다음은 로버트 펑크와 관련한 역사적 예수 연구에 대한 서중석 교수(연세대)의 논문입니다.
로버트 펑크의 역사적 예수 가설 비판
I. 서 언
로버트 펑크(Robert Funk)의 Honest to Jesus가 최근에 『예수에게 솔직히』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이 제목은 펑크가 로빈슨(J. A .T. Robinson)의 Honest to God 신에게 솔직히와 한 쌍이 되도록 의도한 결과로 도출된 것 같다. 펑크의 이 책은 최근의 역사적 예수 연구 가운데 대표적인 것 중 하나이다. 이와 함께 그의 The Five Gospels (공저)도 역사적 예수 연구를 위한 소위 “필수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이 책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적 예수 연구사 속에서 이것들이 속한 위치를 파악하는 일이 중요하다.
"역사적 예수"란 예수의 삶과 그의 시대를 다루는 역사적 접근의 한 대상에 대한 지침이다. 역사적 예수는 단순히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예수라는 한 구체적인 인물에 대한 이름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보다는 그러한 인물을 특정한 준거틀에서 재구성해 내려는 작업에 대한 이름이라 할 수 있다. 본 소론의 목적은 최근 역사적 예수 연구를 주도하고 있는 펑크의 역사적 예수 연구 작업을 그의 두 주요 저서를 중심으로 비판, 검토하려는 것이다.
Ⅱ. 펑크의 배경
역사적 예수 연구사는 간략하게 네 시기들로 대별된다. 제1기는 소위 옛 연구(Old Quest)로 불리어진다. 곧, 라이마루스(H. S. Reimarus)와 슈트라우스(D. F. Strauss)로 대변되는 시기이다. 이들은 역사적 예수와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가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고 역사적 예수의 생애를 각기 재구성하려했다. 제2기는 켈러(M. Kähler)와 불트만(R. Bultmann)등으로 대변되는 연구 포기(No Quest)의 시기이다. 켈러는 성서 자체가 역사적 예수에 관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복음서는 "예수의 생애"를 구성하기에는 그 자료로 충분하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곧 역사적 예수 연구는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불트만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역사적 예수 연구는 방법론적으로 불가능하고 신학적으로 불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방법론적으로 불가능한 이유는 복음서의 자료 자체가 역사적 예수의 생애를 구성하는 데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기 때문이고, 신학적으로 불필요한 이유는 역사적 예수는 신약 신학의 한 부분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의 신학적 관심은 “신앙의 그리스도”에게 집중되었다.
역사적 예수와 케리그마의 그리스도의 차이는 불트만이 사용한 역사비평학적 방법 때문에 더욱 확연히 드러났다. 불트만은 역사적 예수를 포기하고 케리그마의 그리스도를 선택하였다. 그에게 있어 역사적 예수와 “케리그마의 그리스도” 사이에는 연속성이 없다. 그러나 역사적 예수와 “그리스도 케리그마”는 연속성이 있다. 불트만 자신이 그의 제자들의 논박에 답변하기 위해 1960년 하이델베르크대학 역사철학회에서 행한, “초대교회의 그리스도 선교와 역사적 예수의 관계”라는 강연에서 이 점을 밝히고 있다. “신앙의 대상은 역사적 예수의 인격이 아니라, 오히려 케리그마의 그리스도라는 나의 주장은 종종 내가 역사적 예수와 케리그마 사이의 연속성을 파괴한다는 의미로 잘못 오해되고 있다. …… 이에 대해서 나는 다음과 같이 간단히 대답할 수 있다. 내가 설령 역사적 예수와 케리그마의 그리스도 사이의 불연속성을 강조한다고 해도 이는 결코 역사적 예수와 초기 기독교 선포 사이의 연속성을 깨뜨리는 것은 아니다.” 케리그마의 그리스도는 역사적 인물이 아니나, 그리스도 케리그마는 역사적 현상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결국, 불트만은 역사비평적 방법을 철저하게 사용하였으나 거기서 확인된 역사적 예수의 의의를 평가절하하고, 신앙의 그리스도를 부각시켰다. 이는 역사비평적 방법을 충실하게 적용하여 역사적 예수를 복원해내려는 예레미아스(J. Jeremias)의 시도와는 자못 구별된다.
제3기는 역사적 예수에 대한 새로운 연구(New Quest)가 시작되어야 한다고 인식한 시기이다. 이 시기는 소위 후기 불트만 학파의 시기로도 불린다. 역사적 예수와 케리그마의 그리스도 선포 사이의 연속성이 강조되었다. 이들은 불트만의 명제에 맞서 역사적 예수 연구는 방법론적으로 가능할 뿐 아니라, 신학적으로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방법론적으로 가능한 이유는, 복음서의 여러 장면들이 예수의 놀랄 만한 권위를 묘사하는데, 예수는 이 권위로 그 정황을 지배할 뿐만 아니라, 예수의 이러한 권위 있는 말씀과 행동 속에 기독론이 이미 배태되어 있기 때문이고(보른캄), 신학적으로 필요한 이유는, 기독교 신앙이 “그리스도 가현론”에 빠지는 것을 막아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케제만).
제4기는 바로 이 책의 저자 펑크와 크로싼(John Dominic Crossan)이 공동회장으로 있는 캘리포니아의 「Westar Institute」와 관련된 대부분 급진적인 신약 학자 74명의 그룹으로 이루어진 소위 「예수 세미나」(Jesus Seminar)의 활동으로 대변된다. 이들의 작업은, 기독교 신앙은 교회의 케리그마가 아니라 예수의 언어와 행태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확신에서 출발한다. 예수의 언어, 곧 비유, 격언, 지혜말씀 및 그의 전복적 행태 등이 신앙의 기초라는 것이다. 복음서의 형태는 교회의 삶의 세계를 우선적으로 반영하나, 그 속에는 교회의 삶의 세계와 상치되는 예수의 본래적인 언어와 행태가 숨겨져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 제4기가 펑크가 서있는 위치이다.
Ⅲ. 펑크의 주장
저자 펑크는 독자들에게 충격적으로 들릴 수 있는 과격한 표제를 수없이 쏟아낸다. "예수 자신은 신앙의 진정한 대상이 아니다". "우리는 예수를 격하시키는 일부터 해야한다. 예수는 그것을 요구했으며, 그렇게 해야 마땅하다”. "우리는 예수를 새로운 드라마에 캐스팅 하여, 다른 줄거리를 갖고 있는 이야기 속에서 그에게 배역을 맡겨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보혈의 공로에 의한 구원의 교리를 버려야 만 한다".
그가 이렇게 외치고있는 이유는 "예수의 말씀들과 행적들과는 상관없는 신화들로 예수를 대체시킨 종교, 예수를 폐기 처분한 종교"에서 벗어나, 나사렛 예수를 기독교 운동의 "전제"가 아닌, "진정한 창시자"로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다. 펑크는 역사적 예수로 하여금 현대의 수많은 예수의 얼굴들, 곧 신화로 채색되고 신조들 속에 곱게 안치된 얼굴들과 대면하게 한다. 그에 따르면, 현대적 예수상은 추종자들을 매질하여 죄의식과 후회에 떨게 하고, 헌금강요를 정당화해줌으로써 그들을 속박하는 상인데, 그 속박은 "인간 역사상 알려진 그 어떤 노예 형태만큼 인간을 학대하는 것일 수 있다"는 것이다.
펑크에 따르면, 나사렛 예수에게로 돌아가려는 길을 막고 있는 장애물들은 무지와 고집의 결합, 복음서들의 역사적 정확성에 관한 근거없는 확신, 획일적인 문자주의와 상상력의 결핍, 자기도취로서의 영성, 부실한 교육을 받은 목회자들의 빗나간 외침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일반적인 항목 이외에 그 장애물 목록에 보다 충격적인 항목도 포함시킨다. 이중 두가지만 소개하면, 첫째, 예수에 대한 일반적인 이미지들이 문제라는 것이다. 곧, '하나님은 천당에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한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예수는 나의 죄를 위해 죽었다' 등의 소박한 것에서부터 '예수는 처녀(동정녀)에게서 태어났다' '예수는 무덤에서부터 육체로 다시 살아났다' '예수는 심판하기 위해 다시 올 것이다'등의 보다 세련된 형태로 확대된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는 것이다. 둘째, 성서신학자의 성향이 바로 장애물이라는 것이다. 성서학자들은 학자적 정직성에 충실하기보다는 모호한 대답을 개발하고, 판단을 유보하거나 얼버무리는 지적 기술을 터득하여 생존해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장애물을 제거한 채 펑크가 도달한 역사적 예수는 어떠한 모습이었는 가? 이를 위해 그는 두 가지 작업을 한다. 첫째는 유대인 예수를 그의 동시대인들과 대조시키는 작업이고, 둘째는 "복음서들의 예수"와 "예수의 복음"을 대조시키는 작업이다. 물론 그는 후자에 집중하고 있다. 후자의 대표적인 것으로, 복음서는 종말론적 예언자로서의 예수상을 제시하는데, 실제로 역사적 예수는 그러한 예수상과는 거리가 있을 뿐 아니라, 심지어 그러한 종말론적 경고에 대해 비판적이기까지 하다는 것이다.
역사적 예수가 고양 기독론으로부터 시작하여 양자론적 기독론의 단계와 기적적인 출생론을 거쳐 선재론 곧 하나님이라는 마지막 단계에로 진전된 과정을 제거하면서(15장), 펑크는 역사적 예수의 참모습을 종교적 사회적 경계선뿐만 아니라, 혈통적 경계선도 뛰어 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던 체제 전복적인 '현자'의 이미지로 구성한다. 곧 예수는 거처할 곳도 직업도 없이 방랑하는 현자이다.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강조된다. “하나님이 공급하리라”는 것이다. 현자로서의 예수는 주로 그의 지혜를 비유로 말하였다. 비유는 예수가 “이 세상을 내려보는 창문이었다".
예수를 체제 전복적인 세속적 현자로 강조한 펑크는 바로 이러한 이미지가 "제도화된 종교보다는 사회 전체의 영적 차원에 보다 현실적합성을 갖는다"고 말한다. 그의 예수는 종교적이었다기보다는 오히려 "비종교적"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결론짓는다. "예수는 역사의 위대한 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며, ...... 영원을 감지하는 것은 신학들이나, 신학교, 혹은 복음 전도자들에게만 차별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불고 싶은 대로, 모든 길로, 분다".
펑크의 또 다른 주저, The Five Gospels(공저)도 유사한 결론을 산출해냈다. 다만, 여기서는 이러한 결론에 이르는 몇 가지 전제, 규칙, 예수의 언어의 특징 분석 등을 내걸었다. 이것들을 간추리면 이러하다.
1)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를 구분해야 한다.
2) 공관복음서가 요한복음서보다 역사적 예수에 보다 더 가깝다.
3) 마가는 마태와 누가보다 먼저 기록되었고, 그 두 복음서의 기본 자료였다.
4) 복음서 기자들은 말들과 비유들을 예수에게서 유래되지 않은 상황 속에 빈번히 한데 묶었다. 복음서 기자들은 말들과 비유들을 빈번히 확장했고, 그것들을 자신들의 견해에 따라 개작하고 편집했다.
5) 난해한 말들은 전승의 과정 속에서 그 난해성이 빈번히 약화되었다. 난해한 말들의 변경은 그 말들을 자신들의 정황 속에 채택하려 했던 초기 기독교 공동체들의 고투를 반영한다.
6) ‘기독교적’ 언어로 표현된 말들과 비유들은 복음서 기자들 혹은 그들의 이전 사람들의 창작이다.
7) 예수 사후에 일어난 사건들에 대한 지식을 반영하는 말들과 이야기들은 복음서 기자의 창작이다.
8) 두 개의, 혹은 그 이상의 독립된 자료들에 각각 나오는 말들과 비유들은 그것들이 담겨있는 전체 문맥보다 더 오래된 것이다.
9) 짧고, 혁신적이고, 자주 반복되는 말들이 구전 기억의 주요 대상이었다. 그것들은 주로 비유와 격언들이었을 것이다.
10)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의 정확한 낱말들이 아니라 주로 그의 말들과 비유들의 핵심이나 요점을 기억했다.
11) 예수의 화법은 뚜렷이 구분이 된다. 고대 유대교나 초기 기독교에서 나온 말은 예수에게로 소급될 수 없다.
12) 예수의 말들과 비유들은 사회적 종교적 안정에 거슬린다. 예수의 말들과 비유들은 경악과 충격을 준다. 그것들은 역할의 반전, 일상적인 기대의 좌절을 동반한다.
13) 예수는 자신을 메시아로 주장하지 않는다.
이러한 기준들과 규칙들에 따라 The Five Gospels가 출판되었다. 여기서 5권의 복음서들이란, 마가, 마태, 누가, 요한, 그리고 고대 이집트어로 된 도마복음서를 뜻한다. 이 책은 여기서 예수의 입에서 나온 것으로 기록된 말씀들을 이러한 기준들과 규칙들에 따라 그것들을 4가지 종류의 색깔들로 구분해 놓았다.
1) 붉은색 : 예수가 직접 한 말
2) 분홍색 : 예수가 직접 한 말일 가능성이 있는 것
3) 회 색 : 예수가 직접한 말은 아니나 그의 생각을 반영하고 있을 가능
성이 있는 것
4) 검정색 : 예수가 직접하지 않은 말
그 결과를 살펴보면, 붉은색의 경우는 다음과 같다.
마가복음서 : 12.17 한 구절
마태복음서 : 5.39-42a, 44a; 6.9a ; 13.33; 20.1-15; 21.21b
누가복음서 : 6.20-21, 27, 29, 30a; 10.30-35; 11.2a; 13.20; 16.1-8a; 20.25
요한복음서 : 없음
도마복음서 : 20.2-3(왕국은 하나의 겨자씨와 같다)
54(가난한 자에게 축복을)
100.2-3(가이사에게 돌리고, 하나님에게 돌리라).
주기도문의 경우는 이렇게 채색되었다. “우리 아버지”(붉은색), “이름이 거룩하게 하옵시고, 당신의 나라가 임하옵시며,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의 죄를 용서한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옵소서”(분홍색)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소서”(회색)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검정색)“우리를 악에서 구하옵소서”(검정색).
이 책은, 우리의 눈과 귀에 예수의 말들로 익숙해져 있는 구절들 대부분을 검정색으로 채색하고 있다. 가령,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마 7.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등이 그것이다. 곧, 복음서에서 예수에게 소급된 말들의 약 82%가 예수에 의해 이야기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책은 Mark, Q, M, L의 네 가지 자료를 인정하면서 요한복음서의 자료를 비역사적인 것으로 치부했다. 또 마가 우선권과 Q의 존재를 전제했으며, 도마복음서를 역사적 예수 연구를 위한 다섯 번째의 주요한 독립 자료로 간주했다. 이 책은 도마복음서의 연대를 50년경으로 추정하고 있기 때문에, 그 문서는 Q 및 바울과 동시대이고, 마가보다는 이른 연대의 문서로 간주된다. 도마복음서는 예수를 방랑하는 견유학파적 교사와 유사하게 묘사한다. 요한복음서 배후에 있는 표적 자료는 여섯 번째 자료이고, 바울은 일곱 번째의 독립된 자료이다. 곧, 이 책에 따르면, 마가, Q, 마태, 누가, 도마, 표적자료, 바울문서 등 일곱 자료들 중 하나보다 더 많은 자료에 나타나는 말들은 30-50년의 구전시대로부터 왔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런 기준에 따라, 이 책은 고대 유대교나 초기 기독교와 관련된 말들은 예수의 제자들에 의해 예수에게로 잘못 소급된 것으로 간주했다. 가령, 미래적 종말론, 함축적인 기독론적 내용들 또는 교회론적 내용들은 예수에게로 소급될 수 없다고 결정했다.
이러한 색깔에 따라, 예수의 순수한 말을 중심으로 재구성한 예수의 이미지는 방랑하는 유대 견유학파, 소외된 자들을 위한 정치적 안건을 지닌 과격한 인습타파자로 각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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