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 난제! 중요한 문제들 ???

[스크랩] 연속적 중생관과 순간적 중생관 비교

하나님아들 2012. 11. 21. 17:16
Re:진합태산님과의 대화를 돕기 위한 (연속적 중생관과 순간적 중생관 비교)|신학토론방
바로미 | 조회 134 | 09.09.11 10:23 http://cafe.daum.net/yangmooryvillage/Jw1j/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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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합태산님은 아마도 총공회 측 분인가 봅니다. 반갑습니다.

먼저 진합태산님께서 쓰신 덧글들을 볼때에 기본적으로 정리 되어야 할 것이 2 가지가 보였습니다.

 

첫째, 중생의 용어 정리와 이해

둘째, 언약과 그 적용의 범위에 대해

먼저 중생의 용어 정리를 하겠습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중생>이란 교리는 두 가지 관점이 있습니다.

과거 초대교회서부터 청교도시대까지 이어져 왔던 <넓은 의미의 중생 or 연속적 중생관>이 있습니다.

그리고 미국 웨민신대원 조직신학 교수인 존 머레이로 부터 처음 시작된 <순간적 중생관>이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중생이 <순간>적으로 이루어지냐... <과정>으로 이루어지냐의 문제이지 결론은 "영이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한우리 | 등급변경 | 조회 206 | 07.10.06 08:37 http://cafe.daum.net/yangmooryvillage/1NyO/29 

카이로스님이 주장하신 내용입니다. 칭의=구원

 

애초에 칭의만 구원에 해당되고 나머지는 구원받은 자의 삶과 윤리로 주장하시어

지금까지의 토론이 진행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중간에 구원의 순서 문제가 대두되었지만

그것은 중생과 회심의 용어정리부터 해야 올바른 토론이 된다는 것으로 정리가 되어 가는 것 같습니다.

 

칼빈을 포함해서 17세기 이전에 개혁신학자들은 중생이라는 단어를 광의적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칼빈은 중생을 돌이킴과 성화를 포함해서 우리가 전적으로 새롭게 되는 것으로 설명했고, 1561년의 벨직고백서도 중생을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삶 전체로 묘사했습니다.

 

그러나 최근에 들어와서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좁은 의미의 중생과 넓은 의미의 중생을 구별할 필요를 느꼈고 구원의 서정을 말할 때는 중생을 거의 좁은 의미의 중생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죤머레이, 루이스벌콥, 안토니 후크마 등등....)

 

다시 말하면 성경은 세 가지 의미의 중생을 말하고 있습니다.

 

1. 새로운 영적 생명의 시작으로 성령에 의해 우리 안에 심기워지며 우리로 하여금 회개하고 믿음에 이르도록 하는 의미의 중생(요3:3-5, 요1:12-13, 요일5:1)-좁은 의미의 중생

 

2. 심겨진 새 생명이 처음으로 나타날 때를 의미하는 중생(약1:18, 벧전1:23)-넓은 의미의 중생

 

3. 하나님의 창조세계가 최종적인 완성의 상태에 이르는 것(마19:28,KJV,ASV 참조)

 

저는 우리의 토론에서 중생을 좁은 의미의 중생으로 좁혀서 생각했으면 좋겠고 그런 의미에서 좁은 의미의 중생은 돌이킴과 동일시 될 수 없으며 구별되어야 하며 칭의에 선행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구원의 과정에서 다양하게 드러나는 국면들은 동시적이며 상호관계적인 것이 많기에 카이로스님이 주장하는 칭의만 구원이고 나머지는 구원받은 자의 삶과 윤리 뿐이라는 주장은 구원론을 왜곡되게 이해시킬 우려가 있기 때문에 조심하고 피해야 할 표현으로 보입니다.

 

구원의 서정에서 다루어지는 모든 국면들은 한결같이 구원에 포함되는 것이지 칭의만이 구원이 아닌 것입니다.

 

 

일단 "영이 살아난다"는 중생에 대해서 진합태산님은 기본구원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진합태산님이 적용하신 기존신학용어인 <중생>은 순간적 중생관에 기본구원이라 적용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연속적 중생관의 개념을 아셔야겠지요..

 

밑의 글은 과정 연속적 중생관과 순간적 중생관의 개념을 서로 비교하느라 쓴 글이었습니다.

글과 댓글들을 읽고 진합태산님이 알고 계신 기본구원과 어떻게 틀린지 한번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래의 글은 영혼의 의사에 있는 글로 제가 연속적 중생관과 순간적 중생관의 개념을 잡으면서 쓴 글입니다.

아래의 글로 두 중생관의 차이가 이해가 안되신다면... 일단 기존 신학에서 말하는 구원의 서정(효과적 부르심~영화)의 요소들에 대해

먼저 사전 지식을 습득하셔야 할 것입니다. 구원의 서정들의 요소들을 미리 알고 있어야 밑의 글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로미 | 등급변경 | 조회 62 | 07.10.06 08:37 http://cafe.daum.net/yangmooryvillage/1NyO/18 

신앙과 칭의의 순서에 대해서 전통 신학자들 사이에도 견해상의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칭의를 신앙보다 먼저 놓고

어떤 이들은 반대로 순서를 배열합니다.

 

구속 적용의 순서에서 다루는 칭의는 신앙에 의한 칭의만을 의미하는 것임을

분명히 카이로스님은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어떤 이들은 칭의라는 명사가 일반적으로 신앙에 의한 칭의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택하신 자들을 의롭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 구원의 모든 서정보다 앞선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본다면 그야 당연합니다.

하나님의 작정은 창조 전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칭의 즉 구원의 요소에서 말하는 칭의는 신앙에 의한 칭의에

국한해서 하는 말임을 깨달으셔야 합니다. 성경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신앙이 근거가 되어서 또는 신앙 때문에 의롭게

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칭의의 은혜를 받을 있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유일한 방편이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생은 신앙보다 앞섭니다. (순간적 중생관의 입장에서 볼때)

중생 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활동을 소명이라 할 수 있기 때문에

부르심이 중생보다 앞선다고 보아야 합니다.

 

회개와 신앙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으로 이것 없이는 저것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앙(믿음)과 회개는 하나로 묶어져야 합니다.

회개와 신앙을 하나로 묶어 표현하는 말이 회심입니다.

 

그러므로 총괄적으로 본다면..

선택, 부르심(소명), 중생, 신앙(믿음)과 회개, 칭의, 양자, 성화, 견인, 영화를

일반적 구원의 순서로 보는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구원에 대해서 언급할 때..

 

소명, 중생, 칭의, 양자, 성화, 영황 등으로 언급합니다. 우리는 대부분 중생을 거듭남이라는 말로

말하기 때문에 거듭남 전에는 성화가 올 수 없으며 성화 전에는 영화가 올 수 없음을 이야기합니다.

성경은 특히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라고 하면서 세 가지 과정으로 간단하게

언급하기도 합니다. 즉 -부르심(소명), 칭의, 그리고 영화....

 

 

구원은 시간적으로 구분을 하나 성질적으로 구분도 합니다.

시간적으로 구분하는 경우에는 대부분

 

즉 성경은

-구원을 이미 얻은 것으로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니라 현재에 이루어야 할 것으로

-장차 받게 될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순간적 중생관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미 받은 구원의 단계들: 선택, 중생, 칭의, 양자됨 등이며..

-현재 이루어가고 있는 구원: 성화이고..

-미래에 받게될 구속: 몸의 부활로 성취될 영화라고

구분을 지을 수 있습니다.

 

 

구원에 대한 성질적 구분은

-하나님이 우리 밖에서 이루신 것(선택과 대속 성취)

-우리에게 이루신 것(칭의와 수양)

-우리 안에서 이루신 것과 (중생)

-우리 안에서 이루시는 것으로 구분합니다.(성화)

 

신자의 의지와 행위를 통하지 않고 이루시는 구원: 선택, 대속, 칭의, 중생, 양자, 부활

부분적으로 신자의 지정의와 몸의 활동을 통해 이루시는 구원: 성화

 

 

 

지금 카이로스님은 의의 구원의 순서적 이론으로만 구원을 논하기에

연속적 중생관이 마치 애매해 보이는 것입니다.

구원의 성질적 구분과 순서와 같이 연동해서 보셔야지만

연속적 중생관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토탈 | 등급변경

| 조회 162 | 07.11.04 23:09 http://cafe.daum.net/yangmooryvillage/1NyO/84 

연속적인 중생관의 정의는 제가 글을 올려놓았고 또한 여러글에 설명했습니다.

 

이렇게 되어야만 설득적인 설교를 할 수 있습니다.

왜그렇습니까

교회에 모인 청중들중 회심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가 보통 이런 표현을 쓸 때 좁은 의미의 중생한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다 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좁은 의미의 중생한 사람은 아직 회심한(믿고 회개하여)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회심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청중들중에는 회심한 사람이 있을 것이고. 그리고 회심은 하지 못했는데 좁은의미의 중생을

한 사람이 있습니다.(하나님의 전적인 행위로서)

마지막으로 중생의 씨앗도 없고 아무것도 하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설교자는 복음을 전합니다. 말씀의 설득적인 도구를 사용해서 말입니다.

그러면 좁은의미의중생(초기중생)한 사람이 반응합니다. 그 사람은 이제 영적인 귀를 가졌기 때문에

복음안에서 부르심을 듣게되며, 효과적으로 이를 마음에 받아들이게 됩니다.

저항하고 싶은 열망이 순종하고 싶은 열망으로 변화되고,(정말 불가항력적인 은혜입니다.)

죄인은 성령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의 설득력에 감화됩니다.

 

죄를 각성하게 되고 확신하게 됩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새생명의 원소가 심기워지지 않았기 때문)

그래서 말씀중에 바로 회개와 믿음의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아니면 죄의 각성과 확신상태가

길어지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1주일, 1개월 1년 그 이상으로 (존번연같이)

그러면서 언젠가는 믿음과 회개의 반응을 보일것입니다.  그래서 회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죄의각성과 확신만으로는 이사람은 아직 회심하고 새롭게 거듭난 사람은 아닙니다.

      이사람이 죄의 각성만 하다가 다시 예전의 죄된생활로 돌아 가게 되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그럴경우는 예정된사람이 아닐 것이고, 아니면 각성하고 돌이켜 회심으로 나아가 새롭게 출생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예정된 사람일 것입니다.)

 

이 회심의 과정이 어떤사람은 급진적으로 올수 있고 어떤사람은 점진적으로 올수 있습니다.

여기서 설교자는 초기중생에서부터 회심시까지 설득적이며 권면하는 설교를 할수있습니다.

왜냐햐면 이 사람이 초기중생을 해서 믿고 회개해야만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고

그이후이 영적인 복들을 누릴수 있기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설교자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는 특권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초기중생은 했지만 아직도 회심하지 못했다면 이사람은 아직 하나님의 영적인 축복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사람이 의식적이고 자유롭게 자신의 반응으로 하나님께 나와

회개하고 믿음을 가지지않은 이상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고 원수이기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구분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택하신 백성으로서 그리스도안에서의 연합과  그리스도와의 실재적인 연합과의 차이입니다.

위에서 말했듯이 아직 믿고 회개하지 않은 죄인은  창세전에 택하신 백성이고,

초기중생을 했다고 하더라도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고 원수입니다.

이사람은 아직 하나님의 영적인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상태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사람이 회개하고 믿음을 가질때만 이사람은 하나님께서 의롭다하시고 그이후의

모든 영적인 축복들(칭의,성화,양자됨, 인치심)을 소유할 수 있게 되고 이때부터 그리스도와의

실제적인 연합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믿고 회개하기전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소유할수 없다고 말입니다.

 

이런전과정을 통해서 완전히 새로워지는 것, 이런회심의 전과정을 넓은 의미의 중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혹은 마스터스가 말한 연속적중생관입니다.

 

이런 관점을 가지게 되면 이사람은 설득적이고 권면적이 될수 밖에 없습니다.

초기중생부터 시작해서 완전히 새롭게 출생할 때까지를 회심의 전과정으로 보기 때문에

회심할때 까지 (믿고 회개할 때까지) 권면하고 설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야만 완전한 출생을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이렇게 설득하고 권면할까요

 

회개와 믿음은 우리가 할수 없는 것임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요구도 하시기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회개와 믿음이라는 방편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해서 우리가 죄를 확신하고 하나님께 자유롭게 자발적으로 의식적으로 나아가

믿고 회개한다는 것입니다. 결코 수동적이 아닙니다

그래서 믿음을 정의하기를 지, 정, 의가 다하여 믿는 것이라고 정의 합니다.

 

(결국은 우리에게 공로가 없는것은 우리를 중생시키시는 분은 인간의 협력을 요구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사역으로 인한 우리 본성의 새로와짐인 좁은의미의 중생때문입니다.

이 중생은 우리가 죽는 날까지 영화롭게 될때까지 우리에게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의 순서가 유기적인 관계속에서 상호성임 볼수 있습니다.

믿음은 우리가 영화될때 까지 그 영향을 계속미칠 것입니다.

칭의도 마찬가지임니다. 성화도.....

 이모든 과정중에 중생이 시발점이므로 이것은 온전한 하나님의 사역이므로

우리의 구원을 공로나 자랑으로 생각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냥 감사와 감탄을 할 뿐이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자는 설득합니다. 마치 우리가 할 수 있을 것 같이 로이드 존스가 말한 것 같이……..

그래야 그이후의 축복을 누리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수동적으로, 중생을 거의 완전한 쇄신으로 보고  언젠가는 열매로 회개와 믿음을 가지겠지 하는 사람은

(이게 순간적인 중생관을 말합니다.)

회개와 믿음을 무슨 자연적으로 따라오는 열매와 결과로 보기때문에 결코 능동적으로 설교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이사람이 어떤 사람에게 강제로 끌려가듯이 수동적이 된다는 것은 성경에서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직 믿고 회개 할때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이모든것위에 하나님이 사람을 다루시는 다양성을 인정해야하고 무슨 단계니 꼭그 틀에 맞춰서

모든 것이 진행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하면 큰 착각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양하게 회심을 시키시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주시하고 열린마음으로 살펴보야합니다.

그것이 참된회심인지,- 회심의 단계가 아니라 폴핼름이 말했듯이 필연적인 구성요소가 포함되었는지를 살펴야합니다.

 

한우리

토탈님이 누구신지요? 호기심이 갑니다. 아울러 초기중생(수태, 좁은 의미의 중생)을 거듭남으로 불러서는 안되는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토탈님이 언급하신 후크마나 벌콥도 좁은 의미의 중생을 거듭남이라고 불렀거든요..나머지는 다 동의합니다. 요일5:1절을 함께 검토해보는 것도 좋은 것 같습니다. 주일 지나고 뵙겠습니다. 복된 주일 되시기를....
holyjoy
한우리님께서 사용하시는 '넓다' '좁다'는 말의 정의와 토탈님이 사용하시는 그 말들의 뉘앙스가 조금씩 다른 것 같군요. 그 뉘앙스의 차이를 잘 이해해야 할 듯 싶습니다. 한우리님께서는 '좁다'는 의미를 '더욱 참되다'는 의미로, 토탈님은 '좁다'는 말을 같이 쓰면서도 '더욱 참된 중생 이전의 무엇'으로 규정하면서 쓰신 것 같습니다. 그리고 1요5:1의 '난 것'을 설명할 때에도 그것이 '좁은 중생(거듭남)'인가 아니면 '넓은 중생(거듭남)'인가, 논의할 때, 이 '넓다', '좁다'라는 말의 개념규정이 선행되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저는 '거듭남'은 한글이고, 꼭같은 그 한글을 한자어로 바꾼 것이 '중생'이라고 생각합니다. 두 단어에는 특별한 의미차이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연속적 중생관과 순간적 중생관의 비교

 


 

 

 




위의 그림에서

(1) 검정색은 불신자의 상태입니다.

(2) 연두색은 성령의 사역입니다.

(3) 파란색은 성령께서 사람으로 하여금 애쓰게 함으로 사람이 애쓰는 것을 표시.

(4) 빨간색은 하나님의 단독적 사역입니다.

 

위의 그림에서 첫째는 아시다 시피 순간적 중생관입니다.

두번째 그림은 연속적 중생관입니다. 위의 그림은 순간적 중생관의 일회적 성령의 사역과

연속적 중생관의 이회적 성령의 사역을 구분하기 위해서만 그린 것입니다.

 

즉 제가 이해하는 바로는

 

위에서 보듯 순간적 중생관에서는 성령의 단독적 역사가 단 1회 나타납니다.

그래서 일회적입니다.

그 1회가 순간적으로 일어날때 효과있는 부르심과 중생과 회심(회개와 믿음)과 칭의 이렇게

4가지가 한꺼번에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카이로스님의 말로는 셋트로...

즉 한박스 안에 들어있는 4가지 요소를 성령께서 한요소씩 주시는 것이 아니고

한 박스채 통채로 일회적으로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연속적 중생관은 그것이 아니고

성령의 단독적 역사가 2회 일어나는데 바로 수태와 칭의때입니다.

이 2회 일어나는 기간은 "순간적"일 수 있습니다. 겉으로 볼때는 순간적 중생처럼

순간적으로 일회적으로 보일 수 있으나 엄연히 2회 성령의 단독적 역사가 순간적으로

나타나서 한번 일어난 것 처럼 보이는 것 뿐입니다.

그러나 엄연히 두번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 연속적 중생관입니다.

 

위의 그림은 순간적 중생관과 연속적 중생관의 성령의 독단적 역사의 횟수가

일어나는 것만을 염두해서 그린 것이고..

 

밑의 그림은 연속적 중생관이 어떠하다는 성질적인 면을 그린 것입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위에서 연속적 중생관은 바로 위 그림의 밑에서 보듯이

수태와 칭의는 서로 분리가 된 것이 아니고 그 사이에

계속적으로 연속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치 혜성의 머리 부분이 수태라면.. 혜성의 꼬리 부분이 칭의라고 한

피터마스터스의 글과 같이 한 몸체처럼 보이지만 성령의 단독적인

역사하심은 초기와 칭의때.. 그리고 그 중간에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의한

사람들의 애씀이 있습니다. 즉 성령께서 사람으로 하여금 애쓰게 만드시기에

사람이 성령의 목적을 향해 애쓰게 되는 것입니다.

 

순간적 중생관에는 인간의 애씀이 전혀 없습니다.

연속적 중생관에는 회심을 위한 인간의 애씀이 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애씀은 인간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 아닌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그 마음에서 나오는 애씀이기 때문에

사람으로부터 기원한 노력이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는 성화에서도 역시 마찬가지로

성화에서 신인협력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과 인간이 서로

독립적으로 하나의 일을 한다는 뜻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목적까지 인도하시고 그 인도하심을 받아 인간은

애를 쓰는 것이기에 결국 인간은 구원을 얻기 위한 어떠한 공로가 없음을 알게 됩니다.

 

회심의 과정에서의 인간의 애씀과 성화시의 인간의 애씀에 대한 개념은

아래의 덧글에 명확히 제시하고 있습니다.

 

수태와 새출생 사이에 인간의 노력이 무지무지 요청됩니다. 청교도들의 간증을 보십시오. 눈물겹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고백하기를 자기의 그런 노력 때문에 구원이 주어졌다고 하지 않습니다. 오직 은혜를 강조하였지요.^^ new 23:11
그럼, 바로미님의 지적대로 회심 시의 인간의 애씀과 성화 시의 인간의 애씀의 차이는 무엇이라고 보아야 하나요? new 23:15
회심시, 곧 수태와 새출생 사이의 애씀은 말 그대로 돌아섬의 애씀(endeavor of turning to God)이고, 성화시의 애씀은, 하나님을 향한 애씀(endeavor only toward God)입니다. new 23:17
turning이란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시면 어렵지 않습니다^^ 지옥을 향해 가다가 돌아서는 것을 자가용이 회전하는 식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비유입니다. 그 자리에 바로 뒤로 도는 것은 순간적 중생관이고, 어느 정도 반원형식으로 완만하게 도는 것은 연속적 중생관입니다. 지옥을 향해가던 사람이 천국을 향해서 돌아서게 되는 것이 돌아섬의 애씀이고, 그렇게 돌아선 사람이 천국을 향해서 달려가는 것이 하나님을 향한 애씀입니다. 회심의 소극적인 측면과 적극적인 측면의 것들과는 다른 것입니다. new 23:23
돌아섬의 애씀은 일종의 방향 전환이고, 하나님을 향한 애씀은 그렇게 방향전환한 사람이 달려가는 것에 해당하겠군요. new 23:26

 

ㅎㅎ 리플들을 보면서 또 다른 오해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연속적 중생관에서는 1차중생의 상태를 구원에 이르게 되는 첫단계로 봅니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로 시작된 것이기 때문에, 이미 구원받은 것으로도 이해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차중생때를 구원에 이른 상태로 강조하는 것은, 1차중생을 싯점을 누구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만이 아시는 것이지요. 마치, 영원전의 선택을 하나님께서 A라는 사람을 하셨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이 구원을 받는 싯점은 영원전이 아니고, 바로 예수님을 믿는 순간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수태시에 생명의 씨가 뿌려졌지만, 믿음과 회개로 반응해야만 new 10:11

그 사람이 구원에 이른다고 해야 합니다. 영원전의 선택을 받을 사람이 영원전에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믿는 순간에 구원을 받는 것이라고 해야 하는 것과 똑 같습니다. 만약 영원전에 선택받았기 때문에, 영원전에 이미 구원까지 받았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의 순서를 무시하는 것이 되지 않을까요? 그렇게 하는 이들이 바로 십자가마을의 이근호목사의 추종자들 중에 있는 줄 압니다만...ㅎㅎ 한우리님이 그렇다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연속적 중생관에 대해서 오해가 있는 것 같아서, 리플을 붙여봅니다. ^^ new 10:13

 

  Horace
나그네1님이 뭔가 오해가 있으신 모양이군요. 무엇보다도 연속적 중생관은, '새출생'과 '성령세례'를 일치된 것으로 여깁니다. 그리고 구원받지 못한 자가 '수태'한 것처럼 보여도 '새출생'에 이르지 못하게 될 때 그것을 성령의 '일반적' 사역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하더라도, 구원받은 자가 '수태'하여서 '새출생'에 이르게 되는 것에는 성령의'특별한' 사역이 있는 것으로 봅니다. 단지, 성령의 특별하신 사역으로 인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결코 '성령의 내주'와는 다른 것이라고 앞에서 제가 설명하였습니다. 그리고 위의 성령세례에 대한 관점은 양무리마을의 연속적 중생관과 특별한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고려신학대학원의 교 07.08.20 20:38

  Horace
수님들께서 '연속적 중생관'이란 용어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저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로는 이런 '연속적 중생관'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자신들의 중생관과 별로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볼 줄 압니다. 만일 이런 용어나 개념들에 그 분들이 익숙하지 않다면, 그 분들이 이런 중생관에 익숙해질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그리고 '성령세례'에 대하여 한 말씀 드린다면, 그것은 '성령께서 베푸시는 세례'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세례로서, 지금도 얼마든지 그 분의 택하신 자녀로서 구원받기로 예정된 이들에게 베푸시기를 원하시고 또한 베풀고 계시는 세례입니다. 이 세례를 받으셨습니까? 07.08.20 21:18

성령세례와 성령의 내주의 시기가 모두 새출생과 동일한 시기이니, 성령세례 받으면 곧 성령께서 내주하는 것으로 이해하시는 것이군요? 성령세례 받고 나서 한참 후에 성령이 내주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성령세례와 동시에 성령의 내주가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는군요? 수태한 것처럼 보여도 새출생에 이르지 못하게 될 때, 그것을 성령의 일반적 사역이라고 하고, 수태하여서 새출생에 이르게 되는 것에는 성령의 특별하신 사역이 있는 것으로 보구요. 호 목사님의 글을 읽으니까 명쾌해지네요. 연속적 중생관에 더욱 가까이 다가간 느낌입니다. 감사합니다.^^ 07.08.20 22:34

 

예외의 경우이지만 한 순간에 중생이 일어났다고 할때.. 

순간적 중생관과.. 연속적 중생관은 차이는 아래그림과 같다고 생각됩니다.

순간적 중생관은 한 순간에 1회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이고

순간적 중생관은 한 순간에 2회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주의 할점은 이 2회 역사는 중생이 2회 일어난다는 의미의 2회가 아닙니다.

시작과 완성.. 즉 수태와 칭의(출생)의 개념...

 

 



 

 

위의 글에 대한 덧글 들....

어떻게 보면 덧글들이 더 유용합니다.

 


왕초보

좋은 글 감사합니다. 바로미님은 여전히 연속적 중생관을 지지하시겠지요? 저는 깊이 고민해 보아야 겠습니다. 이제껏 순간적 중생관의 입장에서 연속적 중생관의 견해를 수용하려 하였는데.. 같이 갈 수 없는 견해임을 알게 되어 약간은 혼동스럽습니다. 어떤 견해를 받아들여야 하고, 어떤 견해를 배척해야 할런지..??
바로미
네.. 만약 위의 저의 개념이 맞다면 순간적 중생관은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신학의 대가들이 모두 연속적 중생관을 언급하고 있네요? - -? 간혹 일부만 순간적 중생관의 관점을 언급하는군요. 즉 구원의 체험은 하나인데.. 그 구원의 체험에 대한 해석이론은 두 가지네요.. 순간적 입장에서 해석할 것이냐? 연속적 입장에서 해석할 것이냐... 일단 연속적 중생관은 순간에 체험한 것까지 해석가능하지만 순간적 중생관은 순간에 체험한 것만 해석 가능하네요.. 
바로미
단.. 위의 저의 개념이 연속적 중생관의 개념과 맞아야지만... - -;
왕초보
저도 홀리죠이님 말씀을 바로미님과 동일하게 이해했습니다. 성령의 이회적 사역과 순간의 개념..
 
바로미
일단 연속적 중생관은 성도들의 모든 구원의 체험들을 모두 수용하여 해석가능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자신이 칭의를 받았는지 받지 않았는지에 대한 두려움과 거부감 때문에 쉽게 수용하지 않으리라 봅니다. 즉 인간의 마음이.. 두 해석 모두 옳은 것이라면.. 기왕이면 이미 내가 구원받았다는 해석을 추구하는 것을 무시 못한다는 것이지요
왕초보
위에서 순간적 중생관에서 소명-중생-회심-칭의의 네 요소만 언급하셨던데, 양자(입양)까지가 동시적이라고 생각됩니다. 즉, 소명-중생-회심-칭의-양자, 여기까지가 동시적 사건이라고 보아야..
바로미
아.. 수태와 칭의에 중점을 두다 보니.. 그냥 아시는 분들은 아셔서 들으시겠지요.. 솔직히 양자 삼는다는 것이 뭔지도 모르는 분이 많을 것입니다. 
 
왕초보
그러나 한 편으로 생각해 볼 때, 순간적 중생관이 소명~양자까지가 동시적 사건이고, 또한 구원의 논리적 순서제시라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바로미
결국 구원의 체험은 하나인데.. 해석이 두가지입니다.그런데 성령의 역사가 1회에 단번에 다 일어나냐? 아니면 성령의 역사가 2회 일어나는데. 중간에 그 2회를 위한 방편으로서의 회심과정이 있는가?
 
바로미
솔직히 노골적으로... 순간적 중생관이 편하긴 합니다. - -; 복음을 믿고 주님을 믿기도 마음을 먹고 회개햇다면.. 그 자체가 구원의 확증이라면.. 얼마나 쉽겟습니까? 불신자가 보기에도 너무 쉽지요.. 그런데 이상하게 주님은 좁은 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아무도 오지 않는다고 하는데요.. 순간적 중생관의 입장에서 보자면 누구나 쉬워서 구원받을 수 있는데.. 중간에 탈락하는 자들이 많다는 소리가 되나요? 그럼 결국 중생후에도 얼마든지 중생취소되어서 지옥 갈 수 있다는 견해가 얼마든지 나올 수 있겠는데요?
왕초보
순간적 중생관에서는 성령의 단회적 사건으로 즉 거듭남으로 회심의 방편을 거쳐 칭의가 선포되는 것이지요. 이회적 사건 보다도 단회적 사건이 이해하기도 훨씬 편한 것이 사실입니다. 이해하기 편하다고 진리는 아니지만..
 
바로미
솔직히 순간적 중생관이 누구나 쉽게 이해하기 쉽지요? 혹시 그래서 무늬만 그리스도인인 분들이 교회에 많아지게 되었고... 교회의 타락의 주 원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도 순간적 중생관을 가르쳤었지만.. 지금 연속적 중생관을 가르치는 것이 상당히 힘듭니다. 성도들의 눈빛이 부담스럽더군요.. 실망의 눈빛... 그냥 교회 나와 말씀듣고 그 말씀에 동의하면 구원받는 줄 알았는데... 동시에 저의 마음은 "그렇게 생각하셔서 그렇게 얄밉게 신앙생활 하셨군요.." 즉 순간적 중생관을 이론적으로 받아들여 신앙생활하는 분들은 그렇습니다. 그러나 구원의 체험을 순간적 중생론으로 적용해 받아들인 분의 신앙은 올바르지요..
왕초보
이회적 사건으로 칭의가 선포가 된다고 생각하면..?? 수태는 경험했는데, 칭의는 경험 못하면 어쩌나 하는 어처구니 없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물론, 연속적 중생관에서 수태는 반드시 칭의로 연결되겠지만 얼른 듣기엔, 성령의 수태의 사역도 경험하고, 성령의 출산의 사역도 경험해야 하고, 한 마디로 불안한 것이지요? 한 번도 아니고 두번씩이나.. 
바로미
위의 개념이 맞는다는 가정하에.. 잘 정리 되었지요? - -; 홀리조이님이 좀 들어오셔 좀 언급좀 해주셨음 좋겠는데요..
 
바로미
순간적 중생관을 이론적으로 전해서 신앙생활에 적용시키는 것
  바로미
연속적 중생관을 이론적으로 전해서 신앙생활에 적용시키는 것..
바로미
구원의 체험을 순간적 중생관 이론에 적용해서 해석한 신앙생활...
바로미
구원의 체험을 연속적 중생관 이론에 적용해서 해석하는 신앙생활
왕초보
확실히 생각해 볼만한 문제입니다. 어쩌면, 바로미님 지적대로 한국교회에 거짓신자가 많은 까닭이 순간적 중생관 때문인지.. 카이로스님 지적대로 칭의가 확정적 구원이어야만 평안을 잃지 않고 자발적으로 기꺼이 성화를 추구해 갈 수 있는데.. 연속적 중생관은 무거운 짐을 안겨 주는 건지..
바로미
그렇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저도 저희 성도들에게 연속적 중생관을 설명하면서 느끼는 것은 무거운 짐을 짊어주는 것 같긴 하지만 성도들은 자신의 구원의 상태에 대해서 알기를 원하는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되려 자신의 영적 상태를 모르는 상태가 더 성도에게는 두려운 상태 아닐까요? 그렇지 않고서야 성도들이 부흥사들이나 은사자들의 예언들을 그리 선호할 이유가 없지요..
 
바로미
지금 잠깐 영혼의 의사를 훑어 보았는데요.. 연속적 중생관은 회심을 의식할 수 있는 단계가 있지만, 순간적 중생관에는 회심을 의식하는 단계 조차가 없음을 언급하고 있네요. 즉 카이로스님이 처음 언급햇던 칭의 후 회심이 된다는.. p115 "순간적 중생의 입장에서는 죄인이 이미 중생했기 때문에 회개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순간적 중생이라는 개념은 새로운 출생(카이로스님이 처음에 언급했던 칭의)이 회개와 믿음보다 앞서는 것이라고 봅니다."
왕초보
순간적 중생관: 성령의 단회적 사역인 거듭남의 결과 회심의 반응이 일어난다. 연속적 중생관: 성령의 이회적 사역 즉 수태와 출산 가운데 회심의 과정이 있다. / 이렇게 놓고 보니 "회심"을 "거듭남으로 인한 결과된 반응"으로 볼 것이냐, "지속적인 과정"으로서 이해할 것이냐의 문제네요? 물론, 거듭남으로 인한 결과된 반응이 지속적인 과정이 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없겠지만. 단순하게 말하자면.. 회심을 지속적인 과정으로 보면, 단계가 있다는 말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될 것 같고, 불가항력적 은혜로 인한 중생의 결과된 반응으로서의 회심으로 보면, 중생과 칭의가 동시적 사건이니 카이로스님 말씀도 어느 정도 이해될 것 같습니다.
왕초보
불가항력적 은혜로 말미암아 거듭난 결과 회심의 반응이 뒤 따라오고. 회심을 방편으로 하여 칭의되고, 그러나 회심 조차도 불가항력적 은혜로 거듭난 결과이니 전혀 공로가 될 수 없는 은혜이고.. 하나님의 단독적 사역인 중생(거듭남)에 기초하여 거듭남의 결과인 회심의 반응을 방편으로 하여 칭의된다. 저는 순간적 중생관을 이렇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소명~양자까지 필연적으로 연결되게 되어 있습니다. 칭의의 방편은 회심이고, 회심이라는 반응은 중생의 결과이고, 중생은 불가항력적 은혜 곧 성령의 유효한 부름에 의한 것이고... 따라서, 그 은혜로 말미암았기에 결코 취소될 수 없는 확정적 구원이고. 이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반영!
 
바로미
즉 칭의의 결과로서 회심의 과정이 일어나느냐? 아니면 거듭남의 열매로서 회심의 과정이 일어나냐??? 아니면 연속적 중생관 처럼 칭의의 수단(방편)으로서 회심의 과정이냐? 겠지요?
 
바로미
성경은 회개하여 구원함을 받으라고 했으니.. 회심은 결국 구원함(칭의를 받는)을 받는 방편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회심을 열매나 어느 것의 반응으로 보는 것은 신학적으로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말이 될 수도 있나요?
왕초보
회심은 칭의를 위한 방편인 동시에 중생의 결과가 아닐까요? 칭의를 위한 방편으로서의 회심을 성경이 요구해도 중생하지 않으면 영적으로 죽은 자가 어떻게 믿을 수 있고, 회개할 수 있을까요? 결코, 오류가 아니라고 봅니다.
바로미
칭의를 위한 방편으로서 회심을 하기 위해서는 "중생"이 필요하지요.. 그래서 중생이 시작이라 할 수 있는 것 아닐까 합니다. 회심의 시작... 하지만 중생의 결과로 회심이 일어난다는 것은 좀 적용하기 어렵겠는데요? 중생이 무의식적이라서.. 그럼 대부분 회심즉 온전한 회심을 한 후 그 회심 바로 전에 중생케 된 것으로 오인할 수 있지 않겠나요?
 
바로미
구원해달라고 열심히 기도하면.. 갑자기 성령께서 중생시키셔시고 회개케 하셔서 칭의 하신다? 아이러니... 순간적 중생관으로는 해석 안되죠..(1) 구원시켜달라고 기도 (2) 중생 (3) 회개를 통한 칭의 (1) 은 과연 어떤 기도인지.. 들으시는 기도인가? 그런데 한국교회에는 저런기도 많이 하는데.. 그래서 말이 안되기에 복음을 듣고 동의하고 믿고 영접기도하는 순간 칭의하셨다고 하는 이론이 나올 수도 있지요?
 
holyjoy
ㅎㅎ 열심히 배우시느라고 수고들 하십니다. 어제보다 이 부분에 있어서 좀 더 분명해 진 것이 있는지요? 그러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바로미님께서 그려놓으신 그림을 보면서, 여전히 미진한 감이 있습니다. 아마도 마스터스목사의 모델을 다시 보시면, 수태와 새출생 사이에 성령의 주권적 역사만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인간의 노력, 곧 구도자의 노력이 요청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구도자가 힘쓸 수 있도록 설교자가 또한 힘쓰는 것이 필요함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의한 순간이 두 군데 있습니다(수태와 출산). 수태 이전의 모든 노력은 순전히 자연인의 노력입니다. 그리고 수태 이후에 힘쓰는 것은 하나님의 깨어나게 하심으로 이뤄지는 애씀입니다(생명에 이르는 근심이라고나 할까요?). 그러나 구도자가 아무리 애쓴다고 하더라도, 영적으로 출산하게 되는 일은 하나님께서 그 때와 스타일을 결정하십니다. 전적으로 구원이 하나님께 달렸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출산한 사람이 성화되어가는 중에 하나님께서 그 성도를 견인하시고, 또한 그 성도는 힘써 자신의 구원을 완성해 가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연속적 중생관의 강조점들입니다. 참으로 개혁주의, 청교도들이 강조해 왔었던 것입니다. 수태가 되면 반드시 새출생에 이르게 되지만, 수태가 된 것 같으면서도 가짜 수태가 있어서, 거짓된 확신에 빠지게 하고, 참된 회개가 참된 믿음을 갖지못하고 결국은 새출생조차 하지도 못하게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씨뿌리는 비유가 그런 사람들을 가르킵니다
바로미
그럼 성화에서의 인간의 애씀과 수태후 인간의 애씀의 차이는 성화는 인간의 애씀이 성화를 이루는 한 요소에 속하지만.. 수태후 인간의 애씀은 칭의를 얻기 위한 조건이 전혀 될 수 없다는 것인가여??? 즉 칭의를 위한 인간의 애씀이 아니라는 것인가요?
holyjoy
왕초보님만 아니고, 한국교회의 대부분의 목사, 신학교교수들이 '순간적 중생관'을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토탈님의 정리는 탁월하다고 제가 지적한 것입니다.
holyjoy
성화에서나 수태 이후의 인간의 애씀이 전혀 구원의 조건적 요소가 될 수 없습니다. 구원은 인간에게 달린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에 달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힘쓰게 하시지 않는 모든 힘씀은 거짓된 것입니다. 자기의 의를 추구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바로미
그럼.. 성령께서 인간이 회심하도록 힘쓰게 인도하신다는 것이고... 성화에서도 역시 인간이 거룩하게 되도록 힘쓰게 인도하신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인간의 노력은 순전히 하나님으로 인한 것이고요.
holyjoy
That's right!!!!! It's absolutely fabulous!!!!!
 
바로미
연속적 중생관 그림에서 수태와 칭의 중간에 다른 색의 막대기만 찍- 그면 됩니다.. 그렇지 않아도 책을 보면서.. 회심의 과정 중에 인간이 해야하는 일이 있길래.. 이것을 회색선으로 그을까하다가 그만 두었는데요.. 성화시의 인간의 애씀과 회심의 과정시의 인간의 애씀의 분명한 차이를 알아야 되겠다는 생각때문에...
holyjoy
수태와 새출생 사이에 인간의 노력이 무지무지 요청됩니다. 청교도들의 간증을 보십시오. 눈물겹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고백하기를 자기의 그런 노력 때문에 구원이 주어졌다고 하지 않습니다. 오직 은혜를 강조하였지요.^^
왕초보
그럼, 바로미님의 지적대로 회심 시의 인간의 애씀과 성화 시의 인간의 애씀의 차이는 무엇이라고 보아야 하나요?
holyjoy
회심시, 곧 수태와 새출생 사이의 애씀은 말 그대로 돌아섬의 애씀(endeavor of turning to God)이고, 성화시의 애씀은, 하나님을 향한 애씀(endeavor only toward God)입니다
왕초보
돌아섬의 애씀과 하나님을 향한 애씀이 어떤 차이가 있는 거지요?
holyjoy
turning이란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시면 어렵지 않습니다^^ 지옥을 향해 가다가 돌아서는 것을 자가용이 회전하는 식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비유입니다. 그 자리에 바로 뒤로 도는 것은 순간적 중생관이고, 어느 정도 반원형식으로 완만하게 도는 것은 연속적 중생관입니다. 지옥을 향해가던 사람이 천국을 향해서 돌아서게 되는 것이 돌아섬의 애씀이고, 그렇게 돌아선 사람이 천국을 향해서 달려가는 것이 하나님을 향한 애씀입니다. 회심의 소극적인 측면과 적극적인 측면의 것들과는 다른 것입니다.
 
바로미
그림과 글을 약간 수정했습니다.
holyjoy
바로미님께서 이 부분에 명확해지신 것 같아서 감사와 동시에 축하를 드립니다. 남은 과제는 이 모델을 따라서 회심과 중생을 어떻게 쉽게(어렵지 않게) 가르치는가 하는 것입니다. 저희 교회에서는 호목사님께서 힘을 다하셔서 가르치시는데, 이런 모델에 따라서 회심하는 분들이 늘어가면서 생명력이 넘칩니다^^
왕초보
홀리죠이님 말씀대로면 돌아섬의 애씀(회심 시)과 하나님을 향한 애씀(성화 시)이 차이가 있다는데요. 색깔도 다르게 표시해야 하는 게 아닌지요?
바로미
인간의 애씀의 두가지에 대해 둘다 다른 색으로 하면.. 인간의 애씀이 하나는 인간에게 기원된 애씀으로 오인될 것 같아서요..
 
holyjoy
지금의 것이라고 하더라도 충분히 이해됩니다. 그 차이를 분명하게 알면 너무 세부적인 구분은 현학적으로 보이게 됩니다. 질문이 있을 때만 그 차이를 설명하면 될 것입니다. ^^
왕초보
돌아섬의 애씀은 일종의 방향 전환이고, 하나님을 향한 애씀은 그렇게 방향전환한 사람이 달려가는 것에 해당하겠군요
holyjoy
왕초보님, 정확하게 보셨습니다. 같이 힘쓰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 차원이 다른 셈이지요.^^
holyjoy
원래 '회심'의 구약용어가 '슈브'인데, 돌아서다는 뜻입니다. 방향전환을 나타내지요~
 
바로미
순간적 중생관으로 해석되지 않음을 스스로 깨닫게 해주는 질문입니다. 특히 고넬료와 루디아의 경우는 이미 하나님을 공경하는 자임이 전제 되었는데.. 왜 그것을 보지 못했을련가가 궁금하네요. 만약 마음이 열리는 그때가 순간적 중생의 순간이라면 전부터 하나님을 공경했던 그 공경은.. 거짓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문제는 성경은 그런말 한적 없다는 것... 그렇다고 하나님을 공경했다는 그 문장 자체가 순간적 중생을 한 시점이라고 해석할 수도 없고요.. 또한 고넬료와 루디아가 이미 하나님을 공경하고 있는 중이라고 할때 "공경"은 그들이 애쓰고 있음을 말해주는 듯 합니다.
 
왕초보
어떤 신학교 교수는 벌코프의 기독교교리요약을 가지고 학생들을 가르친다는데 카이로스님처럼 순간적 중생관의 개념으로서 가르치시는 것 같더군요.(그렇다고 제가 벌코프의 견해가 순간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순간적 중생관인지, 연속적 중생관인지는 직접 읽어 보시면 알게 되겠고..) 하긴 그분이 선교학을 가르치는 교수다 보니 전공이 조직신학이나 교의학도 아니고.. 한국 사회 전반적으로 연속적 중생관 보다는 순간적 중생관에 익숙해 있는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벌써 새벽 1시가 다 되어 갑니다. 이제는 자러 가야 되겠습니다.~~
 
 
 
 
 
 
한우리
저의 견해는 조금 다릅니다. 돌아서고 애씀의 방향전환도 중생1의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가능하다는 점에서 중생1의 상황을 구원받지 못했다고 단정짓는 연속적 중생관은 충분히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보여집니다. 그런 점에서 바빙크의 이런 견해는 생각할 것이 많아보입니다. "중생의 새생명 안에 원리적으로 신앙과 회심이 내포되어 있고 그것들은 때가되면 필연적으로 그로부터 발생한다. 그러나 이들은 서로 분리할 수 없을지라도 언제나 구별할 수 있다. 회심은 중생의 열매요 동시에 그것은 신앙을 전제한다. 그것은 언제나 하나님의 선물이요 역사로서 처음뿐 아니라 계속된 과정속에서도 그렇다. 동시에 부어주신 새 생명에 기인한 인간의 행위로서 한 순간에 제한되지 않고 일생동안 계속한다." (하나님의 큰일, 20장 소명 p423, 김영규 역) 중생을 수태와 출생으로 비유했다면 출생만이 아니라 수태의 상황도 구원의 시작이므로 구원받지 못한 상황이라고 말하는 것은 납득하기 힘들군요...수태에 해당되는 좁은 의미의 중생을 받았다 할지라도 의식적으로 인식되는 회심의 상태에 이르지 않으면 구원받은 상태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학자가 피터마스터즈 외에 또 누가 있는지요? 대부분은 참된 회심으로 이끌리지 않는 수태는 가짜 수태라고 설명하지 않습니까?
바로미
한우리님의 지적은 이미 방향을 틀기 시작한 수태부터 이미 구원 받은 상태이고.. 방향이 완전히 틀어진 칭의에서는 구원확정이라서 일단 자동차 자체가 커브를 틀어서 일단 방향을 움직이기 시작한 것 즉 회심의 시작을 이미 구원받은 것으로 보았다고 생각하는 것이 한우리님의 주장 맞나요? 홀리조이님은 완전히 방향이 틀어졌음을 하나님께서 선포해 주셔야지만 그때 구원을 받은 것이라고 하고요? 결국 회심의 견해차이인가요? - -?
홀리조이님과 피터마스터스는 회심을 통한 하나님의 법정적 선언(칭의)이 이땅에 사는 성도에게 내려질 때를 구원 받은 때. 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저도 수태부터라고 생각되는데.. - -; 저는 이러한 생각이 순간적 중생관에서 오는 산물이라고는 생각되어지지는 않거든요? 하지만 저는 회심과 칭의 사이의 상관관계를 좀더 잘 연구를 해보아야지만 이 문제가 해결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회심이란 무엇이고.. 칭의는 무엇인가?... 
한우리
회심의 견해차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중생의 견해차이 같습니다. 연속적 중생관이 참된 회심이 있기 전에 수태를 인정한다면 그 수태까지도 생명의 상태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아브라함의 예를 들면 갈대아우르에서 불러낼 때부터 구원의 시작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죠...
바로미
회심의 첫 단계가 수태(초기 중생) 아닌가요? 순간적 중생관의 입장에서 연속적 중생관을 보면 수태와 회심이 개별적으로 분리된 것처럼 여겨지던데요.. 즉 수태후 회심이 시작된다고 보게 되는데.. 문제는 연속적 중생관을 언급하신 피터마스터스는 회심의 시작이 수태라고.. 말하면서 수태(중생1)가 회심의 첫 단계로 언급하네요. 그래야지만 중생의 과정이 모두 하나로 큰 사건으로 보아지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한우리
수태된 상태를 생명의 상태로 볼 수 없다면(?) 낙태의 문제도 살인으로 볼 수 없다는 극단적인 말까지 나오지 않겠습니까?
grace
저도 한우리님의 말씀에 너무나 공감합니다, 한우리님의 견해처럼 저도 수태부터 생명이둣이 구원이고 칭의의 순간이라는 중생2는 차라리 진정한 성화를 시작하는 단계라고 보는것이 더 타당성이 있다고도 생각합니다,
바로미
순간적 중생관은 중생-칭의가 순간에 순식간에 일어나는 것이라 회심의 과정 자체가 없습니다. 단지 순간적 중생관에서 말하는 그 중생은 연속적 중생관에서 말하는 회심의 첫 과정 즉 수태의 과정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연속적 중생관에서 회심의 어느 순간이 구원받았다고 할 수 있는 상태냐에 따라서 그레이스님의 궁금증이 풀릴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저도 수태부터 구원이 맞다라고 볼 수 있겠는데.. 만약 회심의 과정 자체를 통해서 구원 받았다고 한다면.. 신학적으로 칭의는 그럼 무엇인가? 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 -?
 
바로미
그럼 회심이 일어나는 상태에서는 구원을 받았다라고 할 수 없고(자동차가 방향을 틀어 돌고 있는 상태), 온전한 회심이 이루어져서 이제 의롭다고 칭의하실때 구원을 받았다(자동차가 생명의 새 방향으로 완전히 틀어졌을 때 이제 제대로 되었다! 선포) 는 것이 홀리조이님과 피터마스터스님의 구원을 언제 받는가?라는 시점이고.. 한우리님은 바빙크의 견해를 통해서 회심은 분리되는 것이 아니기에 회심의 시작은 곧 구원을 받은 상태로 보아야 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이지요?
바로미
이제는 연속적 중생관의 차원에서 회심 과정의 시작부터 구원받았다고 해야하는가? 아니면 칭의를 받을 때에야 비로소 구원을 받았다라고 할 수 있는가로 나누어지는군요..
grace
그러니까 제가 첨부터 중생1을 차라리 구원예정자의 부르심에 대한 마음을 여는 시기라고 해야 중생2가 진정한 중생이 되는것이고 그렇다면 중생2를 진짜 중생이라고 보고 순간적중생이 맞는것 이 되는데~~
grace
그런데 중생1을 시작하면 필연적으로 중생2는 반드시 이루어진다라는 전제를 한다면 구원의 시기를 굳이 따질 필요는 없을것 같기는 하지만~~
바로미
그레이스님이 말하는 순간적 중생은 무엇을 두고 말하는 것이지요? 부르심과 동반한 중생을 말하는 것이지요? 순간적 중생관이 아니고.. 그레이스님 오해를 하시면 안되는 것이 사람이 어떤 구원의 체험을 했다면 그 구원의 체험이 순간적 중생의 체험이냐 연속적 중생의 체험이냐로 나누어지는 것이 아님을 아셔야합니다. 구원의 체험은 하나이지만 두 구원론으로 해석하는데 기존 한국교회는 순간적 중생론으로만 해석해 왔었음을 아셔야 합니다.
grace
출산하는 중생2의 순간만을 진정한 중생이라고 보면 순간적이라는 것이죠,
바로미
지금 한우리님은 출산(중생2)이 아닌 수태(중생1)부터 진정한 구원의 상태라고 말하는 중입니다. 그리고 연속적 중생관에서 진정한 중생의 역사는(성령의 단독적 사역) 수태와 칭의 이렇게 두개입니다. 그러나 순간적 중생관에서는 중생과 칭의가 성령의 일회적 사건에 한꺼번에 일어난다고 보고 진정한 중생(성령의 단독적 사역)은 하나라고 봅니다.
 
한우리
바빙크 만이 아니라 후크마도 그런 주장을 합니다. 인간의 반응 측면에서 회심(회개와 믿음)을 위해 애쓰고 노력해야 함이 정상이지만 회심으로 반응되는 것은 결국 수태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저는 그 수태를 좁은 의미의 중생(생명의 씨앗이 뿌려짐)이라고 보고 있으며 그 좁은 의미의 중생을 후쿠마도 벌콥도 바빙크도 거듭남이라는 단어를 채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피터마스터즈는 거듭남을 중생2에만 채용하는 것이 저와 다른 점이라고 봅니다. 성경은 거듭남을 중생1로도 표현하고 중생2로도 함께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 저의 견해입니다.
grace
그렇다면 중생2에서 칭의가 아니고 중생1에서 이미 칭의가 되어야 하는것이 아닌가요?
grace
성령께서 중생1을 시작한 사람은 반드시 중생2로 이끄신다는 전제를 하고 연속적중생론을 펼치는것도 가할것 같습니다만 ~~
한우리
저는 순간적중생관이나 연속적 중생관보다 좁은 의미의 중생과 넓은 의미의 중생으로 구분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개혁주의에서는 좁은 의미의 중생도 거듭남이라고 쓰고 넓은 의미의 중생도 거듭남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하나만 고집하면 안된다는 뜻이죠....
한우리
(그레이스님) 아니죠 중생1은 아직 믿음의 반응이 나타나지 않는 상태이니까 칭의라고 부를 수 없죠. 아브라함이 12장에서 칭의받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을 때 의롭다고 칭함 받았으니까요....
grace
아브라함이 갈대아우르를 떠나는 순간을 구원받았다고 그동안 설교를 들었습니다,칭의를 받은 시기 즉 하나님이 의로 여기셨다는 그 시기가 칭의이며 구원이 비로소 이루어진 시기로 보아야 할까요
바로미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이 머리가 시원할 것입니다. 12장은 효과적 부르심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고요.
 
 한우리
물론 바빙크는 직접적으로 거듭남이라고 하지 않고 소명의 부분에서 이 문제를 다룹니다. 그러나 많은 개혁주의 학자들은 내적소명 자체를 좁은 의미의 중생과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스트롱과 바빙크, 후크마)
왕초보
중생1,2나 중생의 시작과 완료, 수태나 출산.. 이런 용어들은 다 연속적 중생관의 용어들입니다. 순간적 중생관에선 중생, 칭의라는 용어를 사용할 뿐.. 용어사용이 정리되어야 혼란을 막을 수 있습니다. 순간적 중생관에서는 중생이 시작되고 완료되었다고 하지 않습니다. 거듭남을 단회적 사건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거듭남의 사건이 단회적으로 일어나면, 소명~양자가 동시적 사건이기에 칭의가 확정됩니다.
grace
기복신앙에서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는 lordship의 신앙으로의 전환이 중생2가 아닌가도 생각해 봅니다. 결국 둘다 학설로서 수용할수 밖에 없네요,
왕초보
순간적 중생관에선 중생2라는 용어가 없습니다. 칭의이지요. 순간적 중생관에서의 중생(거듭남)은 단독설을 취합니다. 협력설이 아닙니다. 그런데 문제는, 연속적 중생관을 견지하신 분들은 순간적 중생관을 배척한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물론, 순간적 중생관을 지지하는 분들도 연속적 중생관을 비판적으로 보겠지만.
grace
중생2가 순간적중생관에서 없다는 것은 잘 압니다 . 둘의 조화를 자꾸 생각하다가 보니 ~~
 
바로미
혹시.. 번역자가 순간적 중생관의 입장에서 번역해서 이렇게 꼬이는 것은 아니겠지요? - -?
왕초보
그럴지도 모르지요. 저도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로미
순간적 중생관의 시초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도 궁금하네요.. 존 머리부터??? 그럼 역사가 너무 짧은 것 아닌가요? - -? 존 머리가 웨민대학원 조직신학 교회로 핫지의 뒤를 이어서 했다는데.. 우리나라 신학생들 초기에 박형룡이후부터 거의 웨민으로 갔지요? - -? 그리고 교수가 되었고... 저는 신학시절 연속적 중생관을 듣지 못하다가 저희 교단의 송용조 목사의 조직신학 책을 보고 그제서야 넓은 의미의 중생이란 개념을 처음 접해 보았습니다. - -;
 
한우리
왕초보님이 조금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소위(?) 순간적 중생을 주장하는 분들도 중생이 완료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단지 생명의 씨앗이 뿌려지는 것이 순간적이고 무의식적이고 신비적이라는 것이죠. 그 생명은 언제나 자라가야 하지 않습니까? 생명이 자라가는 것은 응애하고 태어나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이미 복중에서부터 자라고 있는 것이죠.
왕초보
순간적 중생관에서 중생이 완료되었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연속적 중생관을 말하는 것인데요. 연속적 중생관에서 중생의 시작 곧 중생1 그리고 중생의 완료 곧 중생2.. 순간적 중생관은 중생의 완료 개념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중생1이라는 용어나 중생2라는 용어도 없습니다. 그냥 중생(=거듭남)이고 그냥 칭의입니다. 중생이 시작되었다. 중생이 완료되었다. 중생1,2 .. 이런 용어들이 연속적 중생관의 용어라는 겁니다.
grace
순간적중생관이 여러가지 면에서 편하기는 합니다,
바로미
ㅎㅎㅎ 그레이스님도 순간적 중생관이 편하게 느껴지시는가봅니다. ㅎㅎㅎ 그런데 문제는 구원의 체험을 한 사람의 그 체험담을 순간적 중생관으로 적용하면 상당히 불편해 짐을 느끼실 것입니다. ㅎㅎㅎ
 
한우리
제가 볼 때 문제와 오해의 소지는 연속적 중생관이 응애하고 태어나는 그 순간만 거듭남이라고 단정짓고 뱃속에서 10달동안 자라는 것은 거듭남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라고 여겨집니다.
 
바로미
그런데 한우리님.. 재미있는 것은 순간적 중생관의 입장에서는 자꾸 수태와 칭의가 회심과 분리되어서 생각되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피터마스터스 목사는 회심의 과정 안에 이미 수태와 칭의가 다 들어가 있습니다. 즉 순간적 중생관으로 길들어진 저희들은 거듭남 이후 회심을 거쳐서 회심 후 칭의라는 것을 따로 생각하는데 연속적 중생관에서는 거듭남이후가 아니고 회심 이후가 아니고.. 회심의 과정 안에 이미 수태와 칭의가 다 포함되어 있는 과정으로 보는 시각에서 아직 구원받지 못한 상태라고 언급하는 것에 주의하셔야 할 듯 합니다.
바로미
아.. 오타.. (재미있는 것은 연속적 중생관의 입장에서는 자꾸 수태와 칭의가 회심과 분리되어서 생각되어진다는 것입니다.) 가 아니고 (재미있는 것은 순간적 중생관의 입장에서는 자꾸 수태와 칭의가 회심과 분리되어서 생각되어진다는 것입니다.)
 
바로미
연속적 중생관 (초기중생--> 죄각성-> 회개와 믿음-> 칭의-> 양자-> 구원의 확신) ==> 회심의 단계, 그런데 이 과정을 순간적 중생관의 입장에서 해석하니.. (초기중생-수태) (죄각성-> 회개와 믿음) (칭의-양자-구원의 확신) 이렇게 따로 분리해서 자꾸 생각하게끔 하네요?
 
한우리
연속적 중생관이 회심의 과정 안에 수태와 칭의가 다 포함되어 있다면 아무리 회심을 강조해도 수태도 구원의 시작이라고 해야 합니다. 제가 볼 때 연속적 중생관은 수태와 회심을 분리하고 있는 것 같은데 제가 잘못 본 것인가요? 오히려 순간적 중생관이 수태와 회심과 칭의를 다 같이 보고 있지 않습니까? 바로미님의 말씀처럼 회심의 과정 안에 이미 수태와 칭의가 다 포함되어 있는데도 구원받지 못한 상태를 언급한다면 논리적 모순이 일어나는 것 같은데요....??
바로미
영혼의 의사 책에 나오는 회심의 요소 그림을 보면 회심의 첫 단계가 수태(초기 중생) 넷째 단계가 (칭의) 다섯째 단계(구원의 확신)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이것이 한 몸뚱아리(하나의 과정)이라서 수태부터 구원의 시작이니 구원 받았다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라고 여태동안 생각해 왔었는데.. 어제 홀리조이님은 회심(여기서 회심은 아마도 구원에 이르는 회개를 말하는 듯 합니다)과 칭의가 있어야지만 구원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맞는 이야기 같기도 합니다. 일단 죄 용서를 받으려면 구원에 이르는 회개가 있어야 하는데.. 그러면 홀리조이님은 구원에 이르는 회개의 전조단계로 수태와 죄의 각성의 단계를 회개를 위한 단계로 기본 기초단계로 보신 것인가????
 
한우리
그렇지 않습니다. 순간적 중생관이 소명-중생-회개-믿음-칭의라는 구원의 논리적 순서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동시적으로만 보지 않습니다. 중생한 사람이 참된 회개와 믿음의 반응을 보이는 데까지 중생한 순간 그럴 수도 있고 오히려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는 것이 순간적 중생관입니다. 순간적중생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생명의 씨앗이 뿌려진 것이 순간적이라는 것이지 그 생명이 회개와 믿음과 칭의로까지 발아되는 것이 다 순간적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래서 제가 순간적 중생이라는 표현이 그렇게 오해될 수 있기 때문에 좁은 의미의 중생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바로미
(한우리님)그래요? 제가 알기론 순간적 중생관이 그렇게 해석되는 것은 칼빈과 같은 신학자들의 넓은 의미의 중생의 글들과 일치가 되지 않아서 순간적 중생이 그렇게 적용되는 것 아닐까요? 제가 알기론 순간중생은 생명의 씨앗이 뿌려진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요
바로미
ㅎㅎ 저는 왕초보님의 글에 대해서 답변한 것입니다. 착각을 일으키게 해서 죄송스럽습니다. 그리고.. 저는 구원론 그렇게 자세히 배우지 못하고 졸업했습니다. ㅎㅎ 솔직히 제가 배운 신학과정의 허술함을 고백하고도 싶어지네요. 졸업후에 배운게 더 많으니까요.
 
holyjoy
ㅎㅎ 리플들을 보면서 또 다른 오해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연속적 중생관에서는 1차중생의 상태를 구원에 이르게 되는 첫단계로 봅니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로 시작된 것이기 때문에, 이미 구원받은 것으로도 이해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차중생때를 구원에 이른 상태로 강조하는 것은, 1차중생의 싯점을 누구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만이 아시는 것이지요. 마치, 영원전의 선택을 하나님께서 A라는 사람을 하셨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이 구원을 받는 싯점은 영원전이 아니고, 바로 예수님을 믿는 순간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수태시에 생명의 씨가 뿌려졌지만, 믿음과 회개로 반응해야만 그 사람이 구원에 이른다고 해야 합니다. 영원전의 선택을 받을 사람이 영원전에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믿는 순간에 구원을 받는 것이라고 해야 하는 것과 똑 같습니다. 만약 영원전에 선택받았기 때문에, 영원전에 이미 구원까지 받았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의 순서를 무시하는 것이 되지 않을까요? 그렇게 하는 이들이 바로 십자가마을의 이근호목사의 추종자들 중에 있는 줄 압니다만...ㅎㅎ 한우리님이 그렇다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연속적 중생관에 대해서 오해가 있는 것 같아서, 리플을 붙여봅니다. ^^

 

한우리

리플 감사합니다. ^^ 저도 홀리죠이님의 견해와 거의 동일합니다. 단지 1차중생, 2차중생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죠...생명의 씨앗이 뿌려진 것과 그 씨앗이 발아한 것으로 사용합니다. 1차중생, 2차중생이 오해의 소지가 있을까봐서요..
 
바로미
그렇다면 홀리조이님께서 말씀하신 구원받는 시점을 말할 수 있는 때는 "드러난 때"를 말씀하신 것이로군요
바로미
위의 홀리조이님의 덧글 2개, 게시물에 추가했습니다.
 
 
 
 
참고..
카이로스 | 등급변경 | 조회 97 | 07.10.06 08:37 http://cafe.daum.net/yangmooryvillage/1NyO/44 

 

 

홀리조이님의 리플 중에 [성경을 그런 식으로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는 것은 님의 영혼을 위해서 경계하셔야 할 것입니다. 바울, 고넬료, 루디아가 순간적으로 중생하였다고 해석하는 개혁주의자들은 거의 없습니다!!!!!!  20:57 ] 라는 글에 대해서 질문입니다.

 

연속적 중생관으로 바울, 고넬료, 루디아의 구원순서를 설명 부탁합니다.

이 부분에서 설명이 되면 완전히 우리의 토의는 끝이 날 것 같습니다. 더이상 장황한 설명은 필요없을 것 같네요

홀리조이님의 리플 중에 [성경을 그런 식으로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는 것은 님의 영혼을 위해서 경계하셔야 할 것입니다. 바울, 고넬료, 루디아가 순간적으로 중생하였다고 해석하는 개혁주의자들은 거의 없습니다!!!!!!  20:57 ] 라는 글에 대해서 질문입니다.

 

연속적 중생관으로 바울, 고넬료, 루디아의 구원순서를 설명 부탁합니다.

이 부분에서 설명이 되면 완전히 우리의 토의는 끝이 날 것 같습니다. 더이상 장황한 설명은 필요없을 것 같네요.

 

holyjoy

그렇다면, 성경을 펴보십시오. 먼저, 바울부터 살펴보기 위해서, 사도행전9장을 펴십시오. 펴셨으면 펴셨다고 리플을 다십시오. 다른 분들에게 응답하고 되돌아 오겠습니다. ^^
holyjoy
읽으셨다면, 사도행전9장에서 사울이 회심한 싯점은 몇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까?
holyjoy
그리고 사도행전10장을 펴셔서 고넬료의 경우를 살펴보시고, 고넬료의 회심의 싯점을 나타낸다고 생각되는 구절을 지적해 보십시오
holyjoy
또한 사도행전16장의 루디아가 그 마음이 열리기 전에 '하나님을 공경하고 있었'는데, 마음도 열리기 전에 그녀가 '하나님을 공경하였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설명해 보십시오.
카이로스
저에게 재질문하실 필요 없이 성경에 나온 부분만 연속적 구원관으로 설명해주시면 되는데요~ 저는 이미 루디아에 대해서는 순간적 중생관으로 두차례 올렸습니다만.
holyjoy
이미 저의 질문들이 연속적 중생관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님께서 저의 질문에 답을 해 보시면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루디아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루디아가 하나님을 공경했던 '싯점'과 '마음이 열렸던' 싯점이 동시적이었다고 보십니까? 그렇게 말하는 개혁주의신학자, 혹은 성경해석학자가 누가 있는지 대어 보십시오
카이로스
유대교인들이 지금도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요? 그 사람들의 성령의 역사는 어떻다고 보십니까
holyjoy
그들이 예수를 주로 인정합니까? 그렇지 않다면, 아직 구원에 이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공경한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그들 중에는 가라지도 있겠지요. 알곡이 있다면, 그들은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에서 루디아처럼 마음이 열려 예수를 주로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자들이 바로 이면적 유대인입니다. 표면적 유대인은 구원과 무관합니다.
 
//
   
짖굳다고 생각되는 것이 너무 많은 내용을 올려놓으셨습니다. // 일단 님이 조언한 대로 앞서 (어젯밤) 중생에 대한 내용들을 열람해 보았고, 위에 인용한게 또 다 그내용이군요. 그리고 밑에 도표들을 잘 보았습니다. 그래서 님의 뜻을 좀더 명확하게 이해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외의 덧글들을 올려놓은 것은 어지러워서 나중에 혹시 참고삼아 훑어보기로하고, 제 생각을 글로 표현해서 올릴도록 하겠습니다. 총공회에서 중생을 표현하는 것과 님이 제시한 것들과 비교하면서 생각해보면 서로 유익이 되겠다는 것과 또 이원론이라는 오해도 같이 풀었으면 좋겠는데, 글 실력이 따라주지 못하는 점이 좀 아쉽겠다는 것을 미리 걱정합니다 09.09.11 11:44
ㅎㅎ 길더라도 덧글까지 꼭 읽어주셨음 합니다. 솔직히 덧글이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09.09.11 13:09
 
이 정도라면 제가 생각할때 표현력들의 차이가 있다는 정도이지 이견을 보일만한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09.09.11 11:47
여하튼, 나름대로 정리해보겠습니다. 09.09.11 11:47
 
수준이 안따라줍니다. ^^; 인터넷이 좋은게 복사신공을 마음껏 펼칠수있다는 점이겠지요....님의 생각대로 덧글도 충분히 읽어보았습니다. 09.09.11 14:23
 
총공회가 뭐죠?? 잘 몰라서... ^^!
 
 
 
 
어중이떠중이 같은 글이라 평하시니 자진 삭제합니다.|신학토론방
진합태산 | 조회 209 | 09.09.11 14:22 http://cafe.daum.net/yangmooryvillage/Jw1j/205 
//

이곳에 허술하고 사변적인 글을 끌어다 올려서 대단히 죄송하고 송구합니다.

 

하나님의 큰 책망으로 생각되어 지우겠습니다.

 

이렇게 불편을 드리고, 무리를 드리게 될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는데, 주제 넘은 글을 쓰려다가 더 큰 실수를 범했나 봅니다.

어느날 굴러들어와 쓸데없이 끼어들어 마음을 불편케 해드렸으니 어떻게 사과해야할찌,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늦게나마 어중이떠중이 같은 글을 올려서 님들에게 불편을 드린 것을 사과하겠습니다.

 
//
 
   
조직신학이란게 원래 그래서 그런지... 너무 단정적인 태도로 교리를 설해서 좀 웃었습니다. 다른 뜻은 없습니다. 09.09.11 15:04
이런 식의 낮은 수준의 사변을 신학이라 부른다면... 신학무용론도 나올 수 있겠구나 여겨지고...그때문에 신학을 모르는 저도 마음이 답답해집니다. 09.09.11 17:06
요새는 별별 어중이떠중이들도 교조주의화해서 백파의 그 성향이 얘깃거리가 안될지 몰라도 백목사 죽고 3년이나 지났는데도 총공회 교회들이 백목사 녹음설교를 주일 낮에 듣기만 하는 걸 보고... 참... 사도들도 누리지 못한 특권을 누리는구나 싶었습니다 09.09.11 17:08
미안합니다. 어중이떠중이같은 걸 조직신학이랍시고 올려드려서 님의 심기를 불편하게 해드려 너무 죄송스럽고 황송합니다. 앞으로 조심하겠습니다. 어쩌다가 제가 이런 사변을 신학이라고 생각해서 님에게 읽으시는 불편을 드렸는지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09.09.11 18:53
제가 어중이떠중이라고 한건 공중예배를 교조의 음성 또는 영상파일로 대신하여 말씀 부분에 채우는 예배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소위 지교회라는 걸 세우고는 관리목사를 두고 주일 예배때 말씀선포를 그렇게 하는 행태를 두고 한 말입니다. 제가 있는 지역에서도 직분을 그런 교회에서는 돈을 받고 팔더군요. 그 정도면 그런 말이 심한 말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09.09.11 20:51
총공회 교회중에 누가 그런 직분을 돈을 주고 팔던가요? 공개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도 확인하고 같이 욕을 하겠습니다. 제발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09.09.11 21:07
글을 읽는 데 다소 문제가 있거나 아니면 다소 흥분을 하셨거나 아니면 제가 오해를 살만큼 글을 잘못 쓰고 있거나 이 중 하나겠군요. 요새 어중이떠중이들이(백목사님 유고 당시가 아닌-순복음 계통의 최모, 조모목사) 하도 설치니 유고 당시에 교조적 예배행위가 오히려 별 문제처럼 여겨지지 않을 수도 있겠다고 말한겁니다. 물론 공중예배에 유고한 목사의 설교를 틀고 예배드리는 행위는 미신이라는게 제 생각이지만... 어중이떠중이들에 대해서는 다른 무리들을 두고 한 말입니다. 09.09.11 21:56
 
총공회(백파)의 조직신학을 알게 되어서 반갑군요. 이런 주장 때문에 박윤선박사가 애당초의 백영희목사와의 교제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으로 단교하였던 것이구나 추측해 봅니다. 죽기 전에 화해했다고 하는 것은, 신학적인 화해가 아니라 그저 죽기 전의 인간적인 화해였을 뿐이라는 생각도 들고 말입니다. 요즘 총공회교리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하여튼 감사를 드립니다. 박윤선박사의 견해는 삼분설에 기초한 영의 중생론을 아주 강하게 비판한 것으로 들었습니다. 09.09.11 16:23
어떻게 생각하시든 님의 자유입니다만, 님의 입장에서 생각할수있는 선에서 박윤선 목사님을 판단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박윤선 목사님이 신학을 같이 하지 못하는 정도(특히 이단정죄의 배경이 된)의 사람들과 인간적인 화해를 할만큼 속화된 사람으로 오해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이단자들과는 자리도 같이 안하는 분들의 신앙입니다. 09.09.11 21:09
holyjoy
'인간적인 화해'가 박윤선목사를 속물인것처럼 표현하는 것으로 오해를 하시는군요. 죽음 앞에서 사상이나 신념이 달라도 같이 만나 지난 일들을 무언가 정리하고 싶어하는 것이 인간의 본원적이고 또한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비록 다른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화해해놓고 죽고 싶은 것이지요. 그런 박윤선목사님의 모습이라면 오히려 더욱 존경할 만하지요. 다른 채로 고집하면서 화해도 하지 않을려고 했다면 옹고집쟁이처럼 보였을 터이고 말입니다. 님의 말을 듣고 보니, 누가 먼저 화해의 제스쳐를 보냈는지가 궁금해 지는군요. 09.09.12 14:59
 
진합태산님.. 백목사님의 글(설교나 서적) 중에 혹시 교회 안 "가리지"에 대해서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또한 "주여 주여 하는자 마다 다 구원 받는 것이 아니다"라는 구절 또한 어떻게 해석하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즉 중생은 되지 않으나 회개와 성결 혹 능력만을 받는 자들에 대해서 말입니다. 09.09.11 16:34
백영희신앙연구홈은 님이 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님이 가셔서 얼마든지 공개되어 있으니 검색을 통해서 취하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사변 밖에는 안되는 설교를 감히 또 올릴 생각을 하겠습니까? 09.09.11 18:55
아.. 그러 싸이트가 있었군요. 09.09.12 07:58
 
이분설이든 삼분설이든 요소설 자체가 너무 정적(static)인 관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떠한 요소로 구성되어 있나 살펴보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여기에 너무 몰입하면 동적(dynamic)인 부분에서 혼선을 불러일으키는 것 같습니다. 가장 중요한 핵심은 옛 본성과 새로운 본성, 그리고 '각축장'이라는 표현에서 드러나는 역동적 싸움인 듯 싶습니다. 여기서 영이든 몸이든 또 혼이든 따로 따로 생각한다면 옛사람과 새사람 간의 싸움에서 영은 싸우지 않고 몸과 마음만 싸운다는 뜻이 되어 버리는 듯 합니다. 성경에서는 계속 우리 안의 두 가지 본성, '두' 사람에 대해 얘기하지만 09.09.11 18:56
우리는 사람을 볼 때 '하나'로 밖에 볼 수 없는 한계에 처해 있어서 잘 이해되지 않은 부분들이 생기는 듯... 09.09.11 18:55
자세히 연구해보지 않고는 그렇게 설명하시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다 못해 성경구절속에서도 그런 것이 아니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굳이 그것까지 이런 책에 기록을 할필요까지야 있겠습니까? 왜 영이 열중쉬어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로마서 8장을 이 책에 기록해야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09.09.11 19:00
죄송합니다만, 저는 뭘 설명한 것은 아니고 그냥 글을 보면서 제게 어떻게 이해되었는지를 썼을 뿐입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자세히 연구해 본 적은 없기 때문에 설명하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읽으니까 저한테는 그런 뜻으로 해석이 되어서..... 09.09.11 19:15
SolarGratia님께 제가 너무 몰아붙이는 투로 말씀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옛사람과 새사람이라고 할때 옛사람은 우리가 안믿을때의 그대로의 사람을 가리켜서 말합니다. 그러나 새사람이라는 것은 피와 성령,진리와 우리 살아난 영, 그리고 우리 심신을 가리켜서 말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 심신이 양쪽에 걸쳐져 있는셈인데, 롬7장에서도 바울의 내면고통을 호소하는 부분을 알수있고, 또 롬6장에는 의의 병기와 불의의 병기라고 해서 심신을 도구로 표현해 놓았습니다. 우리 중생된 영이 심신을 붙들고 의의 도구로 사용하면 새사람이 되는 것이고, 중생된 영의 지도를 벗고 악령,악성(원죄),악습(죄의습관들)으로 심신이 이용되면 09.09.12 23:51
멸망이 되는 이치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심신을 두고, 양쪽(우리의 중생된 영과 악령 등)의 치열한 접전이 이루어지고 있고, 이것을 롬7장에서 바울이 표현한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로마서8장에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한다고 기록한 것은 영이 살아난 후로 우리 심신에게 새사람으로 살것을 계속 지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09.09.12 23:53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신다고 했으니 증거를 하는 곳이 어디겠습니까? 불신자에게 영이 증거하는 것은 아닐 것이고 우리 심신에게 양심을 통해서 채근하는 것이라는 것은 충분히 알수있지 않습니까? 09.09.11 19:02
진합태산님의 말씀이 잘 이해되지 않는데... 불신자에게 무엇을 증거한다는 뜻인가요? 말씀에서 '우리'란 중생한 자,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 알고 있는데요... '우리 심신'에서 우리란 누구입니까? 09.09.11 19:21
글을 읽으실때는 좀 철저하게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다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09.09.11 21:10
진합태산님, 님께서는 제가 올린 댓글을 이유로 원글을 삭제하신다고까지 했는데...제가 올린 댓글이 그 정도 문제가 있었습니까? 진합태산님은 제 댓글을 철저하게 읽으셨는지요. 조직신학은 원래 사변이라는 건 상식적인 일이고 제가 루이스 벌코프나 기타 조직신학자료들에 비해 원글이 가벼운 사변이라 한것이 크게 문제가 되는지요. 아니면 예배에서의 말씀선포에 대한 제 의견이 지나치다는건가요. 저때문에 원글까지 삭제했다 하시고는 거기에 아무 말씀도 안하시니 좀 그렇습니다. 저만 나쁜 사람처럼 만들고 그러시니 말입니다. 09.09.12 08:09
그리고 어중이떠중이라는 말이 과거의 백목사님과 관계된 말이 아니라는 걸 설명했는데도... 그 말을 꼬투리잡으시고...아무 말씀도 안 하시니... 그것도 참 난감합니다. 저는 님이 SolarGratia 님께 말하듯 추궁하기보다는... 다만 친절한 답변이 있었으면 하고 기대해봅니다. 09.09.12 08:27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가 범죄하지 않는다는 말은 옳은 말입니다. 하나님께로 난 자가 범죄한다? 이 말 자체가 오히려 모순되는 것입니다.(하나님은 100% 선한, 범죄함하고는 무관해서 그로부터 난 것도 마찬가지이므로).. 반면, 중생한 자는 이 세상 사는 동안 절대 범죄하지 않는다는 말은 틀린 말입니다. 옛사람과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사람이 계속 싸우고 있기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이기는 싸움이지만 살아가는 동안 옛사람 쪽이 힘이 더 센 모양새가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살아가는 동안 죄를 지을 때 우리 몸이 죄를 짓고 있을 때 과연 그 영은 멀쩡한가... 다윗이 범죄할 때 그 영의 상태는 어떠했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09.09.11 19:12
현재 제가 이해하는 대로는 마음이 영이라고 생각하는 시각이라면 님처럼 혼돈을 가질 수 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자가 범죄하지 않는 것이 옳다고 하셨다면, 그 다음 후반절에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한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만약 하나님께로부터 난자가 범죄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나신자의 무능을 이야기하는 것이 됩니다. 원어로는 하나님께로부터 난자가 사람이라고 해야 맞을찌라도, 성경의 영,혼,마음,육,육체 등의 기록이 원어 그대로 또는 한가지 단어뜻으로 기록된게 아니라 그 사용의 다양성을 이해하신다면, 얼마든지 이해의 폭을 달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09.09.12 23:56
마음이 영이라고 생각하는 시각으로는 아무리 중생이 된 나 자신이라고 할찌라도 또 죄를 지으므로, 이에 대한 보충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안들수없다고 생각합니다. 완전구원을 받은 내가 죄를 짓는 것은 아직 중생이 부족하거나, 또는 다른 무엇이 고장이거나 하는 염려가 있기에 습관적인 죄를 짓다가 죽은 자는 필시 구원이 없었던 자라는 논리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곳 카페에서 중생과 관련한 논의가 전부 이런 시각이라고 생각합니다. 09.09.12 23:58
 
그러면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와 중생한 자는 다르냐...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가 중생한 자 맞습니다. 각각은 맞는데 어찌 보면 모순되기도 하지만..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이 조금씩 이해가 됩니다... 뭐라... 정확히 설명하기는 아직 좀 어려운데.... 각각을 보고 또 전체를 보니.... 흠... 더 알아가야 겠습니다. 09.09.11 19:11
제가 마음에 너무 찹잡하고 죄송스러워 달리 글을 더 달아드리지 못하겠습니다. 마음이 추스려지는 대로 다시 님의 글에 답을 달아드리겟습니다. 09.09.11 20:34
악한 자가 만지지도 못한다는 후반부 구절과 맞춰보시면 모순이 안되는지 더 고민하셔야할 것입니다. 09.09.12 23:59
 
그런데.. 총공회는 지금 백목사 이후 그 후계자가 아직 나오지 않았나요? 저희 교단에도 총공회 출신이 3~4분 계시더군요.. 나이가 70이 넘으셨는데.. 이곳에서 총공회 목회자를 만나니 반갑습니다. / 그리고 강릉예명님이 말하는 어중어 떠중이는 백목사를 예를 든 것이 아니고.. 백목사 흉내내는 그러한 사람들을 두고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 강릉예명님.. 백목사 죽고 난뒤 아직도 백목사의 설교를 듣는 것이 잘못된 일은 아닙니다. 저희도 이미 고인이 되신 조상들의 신학서적을 계속 읽지 않습니까? 단지 그것이 책으로 된 것인지.. 테이프로 된 것인지.. 그것만 틀리지요.. 그런데.. 제가 알기로는 예배 시간에 09.09.12 08:24
배우기 위해 자료를 사용하는 것과 예배에 그것을 그대로 표절하는 것은 다르지 않습니까? 그리고 유명하다는 목사님들의 몇년치 자료들, 프로그램들을 찾아와서 번역사들한테 맡겨 그것들을 그대로 베끼는 데서 신학부재와 혼란상이 발생하는 것 아닐까요? 09.09.12 08:37
그래서 목회자가 물론 자기가 바로 깨달아 앞으로 온전한 데에 나아가 온전한 설교를 통해서 양떼를 먹이는 것이 목표치이나 현재 자기가 거기에 도달하지 못하였으니 회개하는 마음으로라도 원 발표자의 설교를 그대로 듣게 해서 양떼의 양식이 되도록 하는 것이 양을 기르는 목회자의 고육지책이라할 것입니다. 비록 차선책이지만 이를 통해서 양떼가 신앙에 힘을 얻는다면 감사할 일이지 그게 표절시비의 대상이 아닙니다. 요즘 세상이 표절시비한다고 교회까지 그런 것을 가지고 양떼를 기르는데 발목을 잡는다면 양잡는 백정의 자세이지 진정 목자의 자세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09.09.12 22:58
주님이 맡기신 양떼를 길러야하는 입장에서 최고의 양식을 먹이는게 충성입니다. 꼭 자기 설교를 해야 되는게 아니라, 젖이 안나오면 젖동냥이라도 해야하는게 아닙니까? 그건 젖먹이는 어미라면 당연히 가지는 마음입니다. 세상이 너무 타락하니까, 교회까지도 그런 표절이니 저작권이니 하는 것을 끌고 들어왔다면, 그건 교회가 이미 설교장사하는 시장이 벌써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09.09.12 23:00
그리고 오해하시지 말라고 미리 밝혀드리는 것은 저는 목회자라고 기록했으니, 또 삯군의 경우를 들고와서 부당하다고 하시면 곤란합니다. 삯군은 존재 자체가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니 그런 사람들의 경우를 거론해서 중요한 논지를 흐리지는 마시기를 바랍니다. 09.09.12 23:02
 
그 백목사의 녹음 테이프를 틀어주는 것이 아니라 담임목사가 설교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강릉예명님이 알고 계신 그 총공회 목사는 그렇게 하던가요? 제가 선배들에게 듣기론 백목사의 설교 테잎을 많이 들어서인지.. 그것을 그대로 적어서 설교시간에 설교하는 분이 많다는 것을 들은 기억은 납니다. 뭐 일반 교회의 담임목사들 중에도 유명한 목사님의 설교 그대로 하는 것과 같은 이치라 할 수 있지요.. 이러한 모습은 총공회안에서만 볼 수 있는 현상은 아니라 생각됩니다. 09.09.12 08:29
제가 25년전에 전도사로 있던 교회 오신 총공회 본교회 분은 그렇게 말을 했습니다. 본교회서는 계속 백목사 설교를 듣는다고요. 지교회도 그러는데 우리 교회에서는 감히 지교회목사가 직접 설교하는 걸 보고 놀라서 곧 바로 나가는거라고요. 정말 당황해하더군요. 그리고 저는 말씀선포를, 연구하여 자기의 믿음과 고백으로 증거하는 것과 그대로 읽거나 녹음 또는 동영상 파일로 공중예배의 질서로 받는 것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일반 세상에서도 표절은 안된다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선포를 그대로 옮기다니요. 주님께로부터 받지않고 말입니다. 09.09.12 08:41
 
지금까지 바쁜 일정도 있었고, 강릉예명님의 발언을 읽는 순간 제가 너무 잘못한 부분이 있는가 싶어 고민을 했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찹잡해 있었고, 글을 지우는게 불편을 해소시켜드리라 생각했습니다. 또한, 강릉예명님이 알고 있는 부분은 상당부분 잘못된 부분입니다. 오히려 님이 무언가 큰 오해를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교조주의 운운하신 3번째 덧글을 읽으면 제 입장에서는 오해를 할 수 밖에는 없습니다. 그 글에서 교조주의가 나온 것도 생각 밖이지만, 거기서 재독예배에 대한 비난 까지 나오는데 누가 오해하지 않겠습니까? 09.09.12 11:22
 
필요하면 다시 글을 갖다 붙이기는 하겠으나, 좀 생각을 다시 해봐야 겠습니다. 당장에 백파라는 글자까지 나오는 정도이니 이런 방법으로는 무엇을 해도 오해밖에는 안될 것 같고, 고민입니다. 09.09.12 11:24
 
또한 바로미님이 오해하시는 부분은 저는 목회자가 아닙니다. 한번쯤은 목회자에 대한 환상을 가지기는 하기에 그런 욕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근래에 확실하게 그 길은 내길이 아니라고 접었습니다. 저는 현재 잡사(?) 정도나 하면 될 수준일 뿐입니다. 09.09.12 11:26
 
강릉예명님께//제 개인적으로는 [사변]이라는 단어를 아주 안좋은 의미로 받아들였습니다. 거기에 낮은 수준까지 사용하셨고, 더 앞에서는 님이 웃었다는 것이 있기에 이쯤되면 제 개인적으로는 제가 올린 글에 대해서 조롱하는 수준으로까지 받아들여졌습니다. 그 뿐입니다. // 또한, 총공회에서, 과거에 백목사님 계실때 서부교회는 지교회를 여럿 두었었습니다. 이 지교회는 당시의 서부교회 규모는 순전히 백목사님 개인의 영력으로 유지되던 곳이었기에, 앞으로 사후를 대비하는 면이 컸습니다. 그리고 또 운영은 어린이주일학교 운영을 위해 수요일(어린이) 또는 주일오후예배(어린이)를 위해서 부산시내 곳곳에 두었었습니다. 09.09.12 11:30
그리고 지교회마다 주일학교 반사선생님들 중에 실력있는 분으로 맡겨서 설교를 시켰기 떄문에 당연히 지교회를 맡는 사람이 목회자라는 것 자체가 이질감을 느낄수있는 부분입니다. 백목사님 사후에 서부교회에 일반적으로 관찰되는 교권싸움 같을 것을 막기 위해 교인들을 지역별로 분배내지는 개척을 목적으로 세워졌기에 제가 현재 출석하는 교회도 그렇게 개척을 해서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물론 100% 목적대로 되어지지는 않은 것으로 알고 있으나 원취지는 그렇습니다. 09.09.12 11:32
백목사님 사후 재독예배(오디오/비디오)를 한 것은 교인들에게는 백목사님이 거의 어떤 수준이었을 것이라는 것을 짐작하시면 충분히 이해할수있는 면이 있습니다. 갑작스런 빈자리에 일반 목회자들이 그 실력을 감당해주지 못하고 또한, 당장의 혼란을 덜어주기 위해 임시로 서부교회에서 재독으로 예배드리는 것을 했었으나, 총공회의 분란에 이용이 되기도 한 정도입니다. 그리고 일반적인 경우는 재독을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물론 극단적으로 나가는 분들이 약간있어 무조건 재독으로라야 한다는 분들도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목회자의 재량에 따라 할수도 있고, 안할수도 있다는 것이 우리의 입장입니다. 09.09.12 11:35
이에 대해서는 우리는 나름대로 많은 연구를 했었고, 문제없다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기에 필요하면 백목사님의 육성 테이프를 틀어서 예배에 사용합니다. 이를 외부에서 보고 오해하는 분들이 더러 있겠으나, 깊이 연구하지 않은 까닭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반대 논리를 가진 분들도 있었기에 총공회는 현재 몇개로 따로 모여서 총공회를 개최합니다. 반대하시는 분들의 특성은 처음 반대당시의 구호를 그대로 답습하는 정도에서 머물러 있고, 문제없다고 보는 입장에서는 자유로 하고있습니다. 09.09.12 11:37
재독문제는 강릉예명님이 표절을 이용해서 말도안된다고 하시나, 하나님의 말씀은 표절시비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물론 표절을 감시하며 단속할 분들도 있겠으나, 적어도 백목사님은 그런 문제로 얽매이지 않도록 모든 조처를 해놓았고, 그 결과물이 현재 백영희신앙연구홈의 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찬송가를 몇 백년동안 부르면서도 은혜롭다고 하는 것과 재독(백목사님 육성테이프나 타 목회자의 육성테이프를 이용하는 것)도 같은 것입니다. 찬양예배로 200년 이상된 기도문을 가락에 섞어 부른 것이나 재독하는 것이나 다를 것이 없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집에서 테이프를 듣는 것이나 공중이 모여서 듣는 거이나 다를 것은 없습니다. 09.09.12 11:40
칼빈의 설교를 500년이나 반복하는 것이 현재의 장로교입니다. 지나치게 사변적이라고 말씀하실 수도 있겠으나, 지금까지 강단에서 설교한 것이 칼빈의 교리를 모양만 조금씩 바꿔서 했을 뿐 그대로입니다. 그 범주에서 벗어나면 이단이라고 단정하는 것이 현재의 교계입니다. 09.09.12 11:41
이정도로 설명은 충분하리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지나치게 사변적인 제 답변들이 이어질것 같습니다. 제가 다시 글을 올리는 것보다는 질문글을 올릴 것입니다. 지금은 시간이 더 없어 그치고, 내일 저녁 쯤에나 질문을 올려서 님들의 생각을 들어보고 싶습니다. 강릉예명님에게는 솔직하게 마음이 많이 상했었으나 어디까지나 제 개인적인 성격이 좁아서 그런 면이 있었으니 마음은 안쓰셔도 됩니다. 09.09.12 11:44
holyjoy
진합태산님은 백목사의 설교테이프재독과 '칼빈의 설교를 500년이나 반복'하는 문제를 같은 것으로 여기시는 것 같은데, 너무 오버하시는 것 아닌지요? 말이 많아지면 실수가 많아지는 정도로 이해할까요? 09.09.12 15:06
 
백영희신앙연구 홈은 http://pkist.net입니다. 이곳에는 백목사님 관련, 총공회 관련 모든 자료들이 다 있습니다. 이곳은 이영인목사님이 관리하고 있으며, 백영희 관련 모든 내용을 고스란히 보관하고 있으므로 님들이 무엇이든 필요한 자료를 요청하면 개인적인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 한(어떤 특정인의 보호차원) 친절하게 완전공개하는 편이므로 얼마든지 총공회를 뒤집어보고, 잘라보고 할수있습니다. 적어도 이런 정도의 수고를 한 후에 이단시비든, 교리가 사변적이라든 하는 발언이 나왔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저는 에스겔서 36:26-27절은 연속적 중생관을 지지하기 보다는 순간적 중생설을 지지한다고 봅니다.|신학토론방
malkut | 조회 112 | 09.09.14 01:46 http://cafe.daum.net/yangmooryvillage/Jw1j/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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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밤까지 이 문제로 인하여 잠을 이룰 수 없군요.

 

부득불 이어지는 부분이 있어서 먼저 글도 조금은 가져와야 될 것 같습니다.

 

 먼저 글

요3: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게겐네 메논(현재분사 수동태) 에크 테스 살코스 살크스 에스틴,

육으로부터 나아진(현재완료 수동태분사) 것이 육이고,

카이 토 게겐네메논 에크 투 프뉴마토스 프뉴마 에스틴.

영으로부터 나아진 것(현재완료 수동태분사)이 영이다.

헬라어에서 현재완료 --- 과거 동작이 이미 완료되어 그 결과가 현재에 계속 영향을 미치는 것. 이때 동작 자체가 계속될 수도 있고 동작의 결과가 계속될 수 있다. 문맥에서 파악

1) 완료의 개념 강조 2) 결과의 개념강조

저는 거듭나아지는 것은 단회적이지만 거듭남의 결과는 지속된다고 봅니다.

영 앞에 있는 것(분)은 성령으로 뒤에 있는 것은 중생된 된 우리의 을 말하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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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운 글

 

 

거듭나아지는 의미의 핵심요3:6절을 근거로 하여서 본다면 연속적 중생관의 수태개념인 생명의 씨가 뿌려짓는 것으로 보다는 성령에 의하여 아담 안에서 죽었던 우리의 영이 다시 살아나게 되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이것은 중생된 영이고 한번 이 영이 거듭나게 되면 거듭게됨의 결과는 지속되기에 요3:6절에서 현재완료 분사를 썼다고 봅니다. 연속적 중생관은 생명의 수태(조기 출생), 새출생(완전 출생)등의 용어로 생명을 강조하는 것 처럼 보여집니다. 저는 거듭나게 됨(중생)의 용어의 중심점에는 영이 다시 살아나는 점이 강조점 처럼 보입니다. 물론 그게 그것(생명)이다라고 말하면 할말이 없지만은요.

 

 

저는 에스겔서 36:26-27절은 연속적 중생관을 지지하기 보다는 순간적 중생설을 지지한다고 봅니다.

거듭나아질때 하나의 사건만 일어난다고 저는 보지 않습니다.

본문은 히브리서에 새언약으로 나타납니다.

 

겔36: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겔36:27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겔36:26 A new heart also will I give you, and a new spirit will I put within you: and I will take away the stony heart out of your flesh, and I will give you an heart of flesh.

겔36:27 And I will put my spirit within you, and cause you to walk in my statutes, and ye shall keep my judgments, and do them.

 

개역성경에는 기록 순서가 새 영, 새 마음, 나의 신 이런 순서로 되어 있으나

히브리어 성경이나 영어성경은 새 마음, 새영, 나의 신(성령)이런 순서로 기록되었습니다.

본문은 거듭나게 될 때 일어나는 것을 말했다고 봅니다.

 

새 마음을 하나님께서는 줄 것이라고 말합니다. ---> 부패한 마음을 새로게 함.

또한 새 영을중심 (내면 -- 히브리어에서는 명사)안에 둘 것이라고 말합니다. ---> 아담안에서 죽었던 영을 살림

그리고 성령을 중심(내면 -- 히브리어에서는 명사)안에 둘 둘것이라고 말합니다. ---> 성령의 내주

 

 

토론을 위한 것이니 다투고자 함이 아니라는 것을 꼭 기억해주었으면해요.

 
 
   
요한복음3장 자체가 '수태'개념을 갖고 예수님께서 비유적으로 설명하십니다. 땅의 것도 이해가 안된다면 어떻게 하늘의 것을 이해할 수 있겠느냐는 식으로도 말씀하셨습니다. 자궁 속에 씨가 먼저 뿌려지고 잉태의 기간이 어느 정도 있다가 응애하고 태어난다는 개념이 바로 연속적 중생관의 핵심입니다. 이것이 그렇게도 이해하기 힘드신가요? 에스겔서의 36장에 나오는 26~27절은 그 절들 자체로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앞에 25절도 있습니다. 제일 먼저 24절부터 생각해야 합니다. 첫번째는 여러 나라에서 인도하여 내는 것이 필요합니다. 둘째는 고국땅에 들어가는 것, 세째는 맑은 물을 뿌려서 정결하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09.09.14 07:25
 
26~27절이 기록됩니다. 왜 맥락을 보지 않고 어떤 구절에 매이려고 하는지 모르겠군요. 헬라어나 히브리어 해석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바로 맥락입니다. 09.09.14 07:26
 
중생의 기본이 인간의 영이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인데 몸의 생명의 수태 그리고 출생을, 몸에게 적용해야 할 것을 인간의 영까지 적용해야하나요. 그리고 거듭나게 되어야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했기에 거듭나게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 아닐까요. 그리고 요한복음 3장에서는 거듭나게 됨의 부분과 영생을 얻는 것(요3:16)과 구원을 얻는 것(요3:17)을 동시에 말하는 것으로 보이는 군요. 그리고 에스겔서의 문맥은 주석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09.09.14 09:35
holyjoy
요한복음3장에서 중생을 수태과정으로 비유하신 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09.09.14 10:20
 
그리고 저의 견해는 성경을 기초로 하지만 확정적으로 단정을 짓는게 아니라는 것 말씀드립니다. 그리고 님의 견해 연속적 중생관을 몸에게 적용할 것을 인간의 영에 까지도 적용해야하는가의 의구심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그렇게 비유를 하셨을까? 하는 생각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중생1에서 생명의 씨라고 말하던데 이 "생명"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지요. 그리고 저는 순간적 중생관이나 연속적 중생관에 대하여 다 열린 마음으로 바라보고자하는게 저의 기본 마음 자세입니다. 09.09.14 09:44
holyjoy
열린 마음으로 계속 보시기 바랍니다. 닫힌 마음이야말로 어리석은 마음이지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땅의 일"이 무엇일까요? 니고데모가 '두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나는 것'에 대해서 말할 때 예수님께서 받아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육적인 것으로 보아서는 아니되지만, 그 과정을 암시하신 것이 아닐까요? 두번째 모태에 들어가는 것이 아닌, 그러나, 모태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과도 비슷한 어떤 과정....그것이 중생이지 않을까요? 09.09.14 10:24
제가보기에 중생2가 인식론적으로 순간적중생론의 중생에 해당한다고 봅니다. 주님이 거듭남에 대해서 말씀하실때에 바람이 임의로 부는것에 비유하심니다. 바람이 부는 것을 느끼는 것은 결론적인 것이며, 우리가 인식하는 중생2에 해당합니다. 하지만, 바람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신비이며 성령의 선물이며 중생1에 해당하는 수태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알기가 어려우며, 기이히 여기지말라고 주님께서도 말씀하십니다. 순간적중생론의 중생을 연속적중생론의 중생2에 좌표를 맞추어보면 쉽게 풀릴것 같습니다. 09.09.14 12:26
 
요일5:12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요일5:13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 이 구절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에게 영생의 확신, 구원의 확신을 위해서 쓴 것으로 보입니다. 연속적 중생관에 의하면 이미 수태되고 칭의를 받은 자에게, 그런 자 들에게는 구원읠 확신이 있다고 보는데, 본문은 그들에게 구원 확신을 위해서 쓴 것으로 보입니다. 09.09.14 09:57
holyjoy
구원에 이르는 중생과 이미 중생한 자가 자신의 구원에 대하여 확신을 하는 것은 구분되어야 할 것입니다. 서로 분리된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말이지요. 믿음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치열하게 열린 마음으로 궁구해야 하겠지요. '믿음'.....믿음의 씨앗이 뿌려지고, 그리고 그 씨앗이 자라서 싹이 나는 과정....이것이 씨가 뿌려지자 말자 순간적으로 되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이 참으로 이상하군요. 그런 것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은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을까요? 말쿳님에게 복음을 처음 들었던 순간이 언제입니까? 그리고 그 복음을 머리로 이해하기 위해서 고민했던 순간도 없이 듣자 말자 순간적으로 거듭나 09.09.14 10:28
 
셨습니까? 머리에서 깨달은 것이 순식간에 가슴으로 와 닿던가요? 구원이 무엇입니까? 거듭남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번개가 치는 깨달음에서 오는 것입니까? 그렇게 순간적으로 오는 것입니까? 머리와 가슴이 함께 거듭나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게 거듭나도 여전히 성화의 단계가 남아있지요. 분만하는 것 자체를 고려해 보아도 순간적으로 되지 않습니다. 진통이 수시간전부터 시작되다가 자궁에서부터 출산하는 그 순간이 있습니다. 진통 자체도 그러하거니와 그 전의 수태의 오랜 과정을 왜 고려하지 않는지 모르겠군요. 전통적인 개혁주의 신학에서도, 외형적 부르심과 내면적 부르심을 구분하였고, 내면적인 부르심 자체도 부르심에 대 09.09.14 10:32
holyjoy
한 자각으로부터 시작해서, 과연 이것이 진정한 하나님으로부터의 부르심인가 아닌가 하는 확인의 과정에서 말씀을 묵상하고 검토하고 고민하고 기도하고....이런 과정도 없었습니까? 만일 이런 과정도 없었다고 한다면, 글쎄요....저는 그것이 더 믿어지지 않는군요. 09.09.14 10:34
 
동일한 신앙의 체험을 했다고 할수는 없으나 저의 경우는 순간적 중생론입니다. 동시적으로 일어났습니다. 소명-중생-회개와 믿음-칭의-양자 저에게는 단번에 입니다. 순서를 따질수 없이 동시적이었습니다. 이 문제는 이야기해도 끝이 없을 것 같습니다. 제자신이 그렇다고 남까지 그렇다고 생각은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기에 연속적 중생론에 대해서도 열린 마음은 가지고 있겠습니다. 09.09.14 18:10
 
신앙체험은 각양 다르기 때문에 진정으로 남의 체험에 대해서 뭐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연속적 중생관에서도 순간적 중생을 인정하기는 합니다. 단지, 예외적인 현상으로 봅니다. 사도바울 같이 다메섹도상에서..,아니 그것조차도 순간적인 것이 아니고 연속적인 것으로 봅니다(본문을 검토해 보시길....!!)만, 님의 진실성을 사랑의 판단으로 받아들이고자 합니다. 하지만, 순간적 중생을 인정한다는 것과 순간적 중생관을 인정하는 것은 별개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관', 혹은 '론'은 일반화된 것이기 때문에 교회에 큰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심히 경계합니다. 09.09.14 18:34
 
잘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SolarGratia님께 먼저 사과를 드리며 답을 드리겠습니다.|신학토론방
진합태산 | 조회 161 | 09.09.13 00:30 http://cafe.daum.net/yangmooryvillage/Jw1j/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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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rGratia님의 덧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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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설이든 삼분설이든 요소설 자체가 너무 정적(static)인 관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떠한 요소로 구성되어 있나 살펴보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여기에 너무 몰입하면 동적(dynamic)인
부분에서 혼선을 불러일으키는 것 같습니다. 가장 중요한 핵심은 옛 본성과 새로운 본성,
그리고 '각축장'이라는 표현에서 드러나는 역동적 싸움인 듯 싶습니다.
여기서 영이든 몸이든 또 혼이든 따로 따로 생각한다면 옛사람과 새사람 간의 싸움에서
영은 싸우지 않고 몸과 마음만 싸운다는 뜻이 되어 버리는 듯 합니다.
성경에서는 계속 우리 안의 두 가지 본성, '두' 사람에 대해 얘기하지만
우리는 사람을 볼 때 '하나'로 밖에 볼 수 없는 한계에 처해 있어서
잘 이해되지 않은 부분들이 생기는 듯

죄송합니다만, 저는 뭘 설명한 것은 아니고 그냥 글을 보면서 제게 어떻게 이해되었는지를 썼을 뿐입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자세히 연구해 본 적은 없기 때문에 설명하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읽으니까 저한테는 그런 뜻으로 해석이 되어서.....

진합태산님의 말씀이 잘 이해되지 않는데... 불신자에게 무엇을 증거한다는 뜻인가요?
말씀에서 '우리'란 중생한 자,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 알고 있는데요...
'우리 심신'에서 우리란 누구입니까?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가 범죄하지 않는다는 말은 옳은 말입니다.
하나님께로 난 자가 범죄한다? 이 말 자체가 오히려 모순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100% 선한, 범죄함하고는 무관해서 그로부터 난 것도 마찬가지이므로)..
반면, 중생한 자는 이 세상 사는 동안 절대 범죄하지 않는다는 말은 틀린 말입니다.
옛사람과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사람이 계속 싸우고 있기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이기는 싸움이지만
살아가는 동안 옛사람 쪽이 힘이 더 센 모양새가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살아가는 동안 죄를 지을 때 우리 몸이 죄를 짓고 있을 때 과연 그 영은 멀쩡한가...
다윗이 범죄할 때 그 영의 상태는 어떠했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와 중생한 자는 다르냐...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가 중생한 자 맞습니다.
각각은 맞는데 어찌 보면 모순되기도 하지만..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이 조금씩 이해가 됩니다...
뭐라... 정확히 설명하기는 아직 좀 어려운데.... 각각을 보고 또 전체를 보니.... 흠... 더 알아가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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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합태산이 달았던 댓글)

자세히 연구해보지 않고는 그렇게 설명하시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다 못해 성경구절속에서도 그런 것이 아니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굳이 그것까지 이런 책에
 기록을 할필요까지야 있겠습니까? 왜 영이 열중쉬어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로마서 8장을 이 책에 기록해야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신다고 했으니
증거를 하는 곳이 어디겠습니까? 불신자에게 영이 증거하는 것은 아닐 것이고 우리 심신에게 양심을 통해서
채근하는 것이라는 것은 충분히 알수있지 않습니까?

글을 읽으실때는 좀 철저하게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다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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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SolarGratia님께 제가 너무 몰아붙이는 투로 말씀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몇가지 제 단점이 그대로 드러나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님에게 건방진 투로 글을 적은 것에 대해서 사과를 먼저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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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에 적었던 부분으로도 님에게나 이 글을 읽는 분에게 편한 마음을 가지지 못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불편한 마음을 갖게 해드린 점에 대해서 사과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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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아시다시피 구원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입니다 여기계시는 분들은 다 하나님과 남이알수없는 인격적인만남이 계신줄믿습니다 그러면 롬8장에 근거하여 그리스도의영이 우리속에서 끊임없이 말씀의 요구를 순종하기를 부모가 아이를 채근하듯 바라고계심을 체험하실줄 믿습니다 요새 믿음에 대해서 생각하기를 끊임없이 나 자신에근거해서 모든것을생각하는데서 하나님에근거해서 , 십자가에서 나의 모든것을 다시 생각하는것이 믿음인데깨닫습니다 성령을 쫒아 행하라~ 에맞추는것, 어떤사람이 구원을 받는가?에촛점을 맞추기보다 자녀를 분명히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 09.09.13 22:41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엡4:30)는 말씀만 붙잡습니다. 진리를 위한 추구도 소중하지만 지나친 헤아림은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7:2)는 경고에 해당될 것 같습니다. 09.09.14 00:25
인용하신 구절은 상대방을 판단하는 것을 말씀하심이 아니던가요? 진리는 세밀하게 따지고 연구하는 것이 옳습니다. 영계와 우주를 판단할 우리가 두루뭉실하게 살아서야 어떤 만물인들 우리에게 판단을 받겠습니까? 09.09.14 00:57
"그러나 우리는 분량 밖의 자랑을 하지않고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분량으로 나눠 주신 그 분량의 한계를 따라 하노니 곧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고후10:13)는 말씀처럼 모두가 선지자나 신학자가 아니듯이 각자의 믿음의 분량에 맞게 믿음의 생활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그 한계를 뛰어넘는 것은 온전한 믿음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영계와 우주를 판단하실 분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저가 잘못 알고 있는지요? 09.09.14 10:14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심인지, 성구만 달랑 적어놓고 정죄하실게 아니라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심인지를 명확하게 적으심이 좋지 않겠습니까? 성경말씀 적어놓고 선지자 노릇하시는 것은 자유지만, 마치 혼자 방언하시듯 적으시고, 해석은 없으니 듣는 사람이 오랑캐가 되는 듯합니다. 영계와 우주를 판단한다고 기록한 이는 사도로 알고 있사오니 통촉하시기 바랍니다. 09.09.14 11:10
진합태산님께서 SolarGratia님께 건방진 투로 글을 적은 것에 대하여 사과하시는 겸손이 보기 좋아서 지나치게 헤아리지 말고 각자 믿음의 분량대로 살자는 의미로 댓글을 올렸는데 선문답이 되었다니 미안합니다. 그리고 되풀이해서 미안합니다만 <우리가 영계와 우주를 판단한다>고 기록한 이가 사도라는 것이 성경 어디에 있는지 가르쳐주시길 부탁합니다. 눈이 어두워 성경을 찾아봐도 보이지 않아서입니다. 09.09.14 20:06
고전6:2-3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치 못하겠느냐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 엡1: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엡1: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09.09.18 15:20
우선 천사를 판단할 자라 하셨고, 세상도 판단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에베소서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기업이라 하셨고,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는 자의 충만이라고 하심으로 우리의 위치와 할 일이 윤곽적으로 보인다고 생각합니다. 09.09.18 15:22
의견과 관련 성구를 밝혀 주셔서 고맙습니다. 수긍이 갑니다. 그러나 <영계>와 <우주>에 대한 개념의 인식 차이가 있군요. 일반적으로 <영계>를 '영혼의 세계' 또는 '사람이 죽은 후에 영혼이 가서 산다는 세계'로, <우주>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공간·시간'으로 인식합니다. <성도가 영계와 우주를 판단한다>는 말을 이 개념에 대입하면 성도가 영혼의 세계를 판단하고, 창조 질서를 판단한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입니다. 09.09.19 09:54
또 <영계>를 <영의 세계>로 접근하면 <영>을 크게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으로 대별할 때 '진리의 영'에는 '예수님', '성령님'이 포함되니 성도가 예수님과 성령님을 판단한다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천사>도 <타락한 천사>는 심판의 대상이 되나 <선한 천사>는 심판의 대상이 아닌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진합태산님께서 적용하신 <영계>와 <우주>의 개념을 밝혀주실 수 있을런지요? 미진함을 보완코자 함이니 토론이 아니라 의견을 묻는 것으로 받아주셨으면 합니다. 09.09.19 09:55
엡1: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 이 성구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기업)이라고 하셨으니 우리의 한계는 그리스도의 통치하에 있으며, 그의 통치를 만물에게 충만케 하는 일이 우리 일입니다. 천사는 우리의 종이된다고 히브리서에서 증거되어 있고, 천사를 판단한다는 것은 고전6:3에 잘 나와 있습니다. 영계는 우주계가 아닌 천국(낙원)을 말하는 것이고, 현재는 우리가 죽게 되면 갈것이며, 또한 앞으로는 영계와 우주계가 통일된다고 하셨으니 그때가 우리의 주 활동무대입니다. 09.09.21 12:17
 
진합태산님 사울과 유다가 지옥에 가지 않았다면,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억울할 것입니다. 그리고 느부갓네살이나 바로왕이나 헤롯도 억울할 것이고 심지어는 예수를 안다는 자들도 억울할 것입니다. 09.09.14 11:57
 
진합태산님, 사과의 글을 올려 놓으셔서 다소 민망한 느낌도 듭니다. 여기에 감사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할지도 사실 잘 모르겠는데, 우선 제게 미안해 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화가 났다면 사과를 받아들이겠습니다 하면 되는데 진합태산님께 개인적으로 불쾌하거나 감정 상한 게 없으니 이것으로 인해 너무 불편해하지 않으시길 바라구요. 서로 얼굴을 보지 않고 의견을 나누는 중에 생길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양무리 안에서 각자에게 좋은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도 이러한 글을 통해 서로에게 개인적인 감정이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확인하니 좋긴 하네요..^^ 09.09.14 22:38
 
그리고 진합태산님이 205번의 제 덧글에 답변해 놓으신 것을 잘 읽어보았습니다. 그렇지만 전 여전히 잘 이해되지도 않고 받아들여지지도 않아 이 부분에 대한 논의는 내려놓으려고 합니다. 제가 덧글을 달지 않더라도 님께 따로 감정이 있어 그런 것은 아님을 양해를 바라는 뜻에서 미리 말씀드립니다.
 
 
연속적 중생관과 순간적 중생관의 비교의 부분을 읽고서|신학토론방
malkut | 조회 132 | 09.09.12 18:21 http://cafe.daum.net/yangmooryvillage/Jw1j/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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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 거듭남 보다도

요한복음 3장에서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보저는 이게 수동태이기에 거듭나게 됨이라고 표현했으면 합니다.

연속적 중생관은 중생을 수태와 칭의로 구별하던데 저는 이게 의구심이 갑니다.

이 부분에 관하여 후크마의 책을 보면서 거듭나게 됨과 관련된 부분을 원문을 참조한 기억이 있습니다. 전혀 지식없이 논하는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연속적 중생관과 순간적 중생관의 비교의 부분을 프리터로 뽑아서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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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부분에 관한 저의 견해입니다.

 

후크마의 책(구원론)과 연속적 중생관과 순간적 중생관의 비교를 읽고 제나름 대로의 견해를 밝힙니다.

헬라어 표현으로 이야기하니 제 견해가 잘못되었다면 말씀해주시기바랍니다.

일단은 과거에 후크마의 책을 보았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요한복음에 거듭나게 됨에 대하여 예수님과 니모데모의 대화를 보게되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부분도 보았지만 확실히 기억이 나지않습니다.

헬라어에서는 기본적으로 직설법에서만 시간개념이 있고 그 외에 명령법,가정법, 부정사 등에는 시간개념이 아니라 과거 시제일 경우에는 단회적이고 현재시제의 경우에는 계속적, 반복적인 의미가 일차적이고 핵심적 의미입니다. 헬라어는 시간 중심의 언어가 아니라 동작 중심의 언어입니다. 직설법은 시간 개념이 있지만 그  외에는 “단회적이냐 , 계속적이냐”를 강조하는게 영어와 다른 헬라어의 차이점입니다.

 

그런데

요3: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 에안 메 티스 겐네데 아노덴===> 만약 어떤 사람이  거듭나게 되지않는다면

 

에안+가정법 과거를 쓰고 있습니다. 여기서 “겐네데”가 겐나오(낳다)“의 가정법 과거 수동태를 쓴다는 것입니다. 헬라어의 용법으로보면 ”가정법 과거는 단회적인 의미“기에 거듭나게 되는 것은 단회적입니다. 그리고 수동태기에 ”나게 되다“입니다.

 

저는 중생이나 거듭남이라는 단어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수동태이므로 “거듭나게 됨”이라고 표현해야된다고 보고, 수동태이기에 우리에 의지에 의해서 되지않는 다는 뜻도 있다고 봅니다.

 

요3: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에안 메 티스 겐네데(가정법 과거 수동태) 엨스 휘다토스 카이 프뉴마토스 =====> 만약 어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게 되지않는다면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가정법 과거를 사용하기에 거듭나게 됨이 단회적으로 봅니다.

 

요3: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게겐네메논(현재분사 수동태) 에크 테스 살코스 살크스 에스틴,

육으로부터 나아진(현재완료 수동태분사) 것이 육이고,

 

카이 토 게겐네메논 에크 투 프뉴마토스 프뉴마 에스틴.

영으로부터 나아진 것(현재완료 수동태분사)이 영이다.

 

헬라어에서 현재완료 --- 과거 동작이 이미 완료되어 그 결과가 현재에 계속 영향을 미치는 것. 이때 동작 자체가 계속될 수도 있고 동작의 결과가 계속될수 있다. 문맥에서 파악

1) 완료의 개념 강조 2) 결과의 개념강조

 

저는 이 것을 거듭나아지는 것은 단회적이지만 거듭나아짐의 결과는 지속된다고 봅니다.

영 앞에 있는 것(분)은 성령으로 뒤에 있는 것은 중생된 된 우리의 을 말한다고 봅니다.

 

거듭나아지는 의미의 핵심은 성령에 의하여 아담안에서 죽었던 우리의 영이 다시 살아나게 되는 것으로 봅니다. 이것이 중생된 영이고 한번 이 영이 거듭나게 되면 거듭나게됨의 결과는 지속되기에 현재분사를 썼다고 봅니다.

물론 중생된 시점에 여러 가지 변화가 있겠지만요.

 

 

요3: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 데이 휘마스 겐네데나이(부정사 과거 수동태)

==> 네가 반드시(데이) 위로부터(또는 다시) 나아져한다.

부정사 과거 ---> 단회적인 의미

부정사 현재 ---> 계속적의 의미.

 

그러나 본문에서는 부정사 과거이므로 거듭나게 됨이 단회적인 것으로 봅니다.

 

3: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성령으로 난 사람 다 ===> 파스 호 게겐네메노스(현재완료 수동태분사 남성 단수) 에크 투 프뉴마토스 ===> 성령으로 나아진 사람 모두

게겐네메노스 ---> 현재완료 수동태분사 남성 단수 = 나아진

성령에 의하여 나아진 것은 영이지만 그것은 중생된 사람과 분리시킬수 없다.

그리고 중생의 결과는 단회적이지만 그 결과는 지속적이다.

 

 

저의 견해가 틀린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씁니다.

당시 요한복음 3장을 해석할 때 옥스퍼드 원어성경대전을 봐도 너무 피상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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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문, 혹은 질문을 제기하시는 것이 구체적이지 않습니다만, 암시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겠습니다. 좋은 연구 자세를 가지신 것 같아서 보기가 무척 좋습니다. 중생관에서 '연속적'이란 말을 잘 이해하셔야 오해가 없을 것입니다. '순간적'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순간적'이든, '연속적'이든 '단회적'일 수도 있고, '계속적'일 수도 있습니다. 가령, '연속적'인 것이 어떤 시간의 계속되는 싯점에서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것 전체'를 말하면서 '단회적'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순간적'이면서도 그 '순간'이 과연 어느 정도의 시간을 의미하느냐에 따라서 '계속적'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말장난을 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연속적 중 09.09.12 20:22
 
생관'이 헬라어 '거듭나게 됨'의 문법적 의미인 '단회성'을 결코 배제하지 않는다는 것을 염두에 두셨으면 합니다. 연속적 중생관의 연속적이라는 말은 elongated 라는 단어의 번역입니다. 영어권에서도 흔히 사용되지 않는 단어인데, 이 '연속적 중생관'의 연속이란 개념이 평범치는 않다는 것을 암시해 줍니다. 저도 처음에는 애먹었습니다.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하지만, 한 번 제대로 파악하고 나니 새로운 시야가 열리는 것 같더군요. 이 연속적 중생관에서 말하는 중생1(초기중생)과 중생2는 결코 별개의 분리된 개념이 아닙니다. elongated된 개념입니다. 중생1이 된 사람은 반드시 중생2를 거치게 되어있지요. 만일 중생2를 거치지도 09.09.12 20:26
 
않은 사람에 대해서 중생1(혹은 초기중생)을 햇다고 할 수 있느냐 하면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중생1(초기중생)이 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바로 중생2에서 입니다. 그렇게 증명된 사람은 중생2를 거친 사람은 중생2에서 중생된 것이 아니라, 바로 중생1에서 중생되었다고 할 수 있지요. 왜 이렇게 복잡하게 일종의 elongated된 개념이 필요한가? 그것은 성경에서 '중생'이란 개념을 단순하게 사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은 채로 논의하다가 많은 개혁주의학자들 간에 에너지를 소진해 버렸고, 그로 인하여 이 영역에 대한 연구나 토론 자체가 소실, 혹은 상실, 그래서 망각되어 버린 것이 현대교회의 중생 09.09.12 20:28
 
관의 혼란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입니다. 더 깊이 철저하게 연구해 보심으로 이 문제에 있어서 주님의 뜻을 발견하실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 09.09.12 20:29
malkut
아직까지 동의 한다는 말은 아니지만 더 깊히 연구하보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질문이 아니라 이번에는 현재적 입장에서 저의 견해입니다. 09.09.13 00:09
이제 이해를 하고보니. 말쿠트님의 윗글에 대해서 전적으로 공감이 갑니다. 또한 홀리조이님의 의미도 전적으로 공감이 갑니다. 짦은 소견으로 보건데, 연속적 중생관의 중생2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순간적중생관의 중생1에 해당된다고 보여집니다. 왜냐하면, 연속적 중생관의 <씨>에 대해서는 사람이 인식하기 어렵기 때문이지요. 이미 중생에 대한 인식이 있는 것은 바로미님께서 애기하신 '드러난 때'인 것이지요. 다만, 용어의 차이라고 생각됩니다. 09.09.13 00:09
 
연속적 중생관이라는 개념을 도입한 것은 아무리 살펴봐도 성화를 말하는 것 이상이 아닌 것 같습니다. 제가 판단하는대로는 인론에서 마음이 영이라고 보는 견해에서 출발하는 용어 같은데, 중생 또는 거듭남이라는 것은 엡2:1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 그리고 위 본문에 인용된 요3장의 예수님의 말씀에서 처럼(원어로 설명하는 수동태 등의 의미는 개인적으로 알필요는 없이, 우리 구원이 믿음(하나님이 주신 믿음)으로 살아난 것이니 우리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살아난 부분이 있고, 이 중생이라는 의미를 연속적 중생으로 연장하면 영이 계속 살아나야할 요소가 있다는 말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09.09.12 23:14
중생이라는 말은 전통적으로 영이 살아나는 것을 말함이라는 것이 기본개념이 아닙니까? 영은 단일성의 존재라는 것은 조직신학에서도 배우지 않습니까? 믿고나서도 내 스스로가 성화되어야할 부분이 계속 남아 있으니 이를 적극적으로 이해하려는 의도로 연속적 중생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신 것 같은데, 차라리 성화라는 단어를 적시해서 발표하는 것이 더 좋겠다고 생각하고, 중생이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 영이 또 죽는가 하는 생각을 가지거나, 더 살아나야할 영의 요소가 있다는 말로 들려집니다. 09.09.13 00:33
연속적 중생관에 대해서 아직까지도 이해가 안되신 것 같은데요? <커버하려는 의도>라는 것을 보니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연속적중생관을 지지하든 안하든, 일단 상대방의 주장에 대해서 이해를 하는것이 우선일듯합니다만. 09.09.13 00:13
의미를 제가 느끼는 대로는 그러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기록했는데, 무슨 문제점이라도 있으신지요? 적절한 단어 사용이 아니라면 제가 얼른 고치겠습니다. 09.09.13 00:32
 
우리가 받은 구원이 대속의 완전승리로 주신 것이기에 완전 구원이 아닙니까? 또한 구원은 단회적인 구원이지 두번이 없는 구원입니다. 우리의 구원의 효력은 영원입니다. 만약 이러한 명제에 계속적으로 중생이 되어야한다는 것은 완전한 구원을 불완전한 구원이라고 밖에는 달리 해석할 도리가 없습니다. 09.09.12 23:33
 
중생이 연속적 중생이라는 개념이 있다면 어느 성경을 근거로 하시는지 궁금합니다. 09.09.12 23:37
 
전통적인 기독교인들이 삼위일체를 믿지만 어떤 구절 하나때문에 그것을 믿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 구절들을 종합해서 옳다고 믿는 셈이지요. 연속적 중생관에 대해서는 최소한 두 방면의 구절들을 검토해야 합니다. 그것은 첫째, 하나님께서만 중생시키실 수 있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회개하고 믿으라고 외친 말씀, 그래야 구원을 얻는다고 하신 말씀들을 함께 고려해야 합니다. 그 모든 것을 종합해서 정리한 것이 바로 '연속적 중생관'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동시에 인간의 책임적 반응을 동시에 고려하면서도 모든 구원은 하나님께 달렸다는 고백이 이 중생관에 담겨져 있는 셈입니다. 09.09.13 07:25
그렇게 말씀하시니 저는 더 확실하게 성화라는 단어를 사용해야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중생(거듭남)이라는 것은 위의 원어를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나, 사람의 믿음행위가 아닌 전적 하나님의 선물로 주시는 믿음에 근거함이고, 단번, 완전이며, 성령과 진리로 거듭나는 것이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외에 인간의 책임적 반응에 관련되어 있다면 그것은 이미 구원받은 후, 중생이 된 후 믿음의 진행에 따라, 행위에 따라 가는 것입니다. 09.09.13 23:26
또한 연속적인 중생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만, 성경에는 모래위에 지은 집에 비유하며, 하나도 없는 자도 있을 것을 불가운데서 구원얻는다고 말씀하심으로 기록해 주셨으므로, 이 면에 대해서도 원만한 대안을 찾으셔야 한다고 봅니다. 09.09.13 23:27
holyjoy
중생 이후를 '성화'라는 말로 설명하는 것에 대해서 반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만 보고 중생의 과정에 있어서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면서 그 역사하심 속에 인간의 자발적인 회개와 믿음을 넣으셔서 반응케 하시는 것도 있다는 것이 그렇게도 인정하기 어렵습니까? 중생없이 믿음없고 믿음없이 중생없습니다. 이 말을 이해할 때, 앞의 중생과 뒤의 중생은 약간 차이가 납니다. 중생없이 믿음없고의 중생은 믿음의 원인으로서의 중생이고, 믿음없이 중생없다는 말의 중생은 믿음의 결과로서의 중생입니다. 믿음의 원인으로서의 중생과 믿음의 결과로서의 중생, 이 두가지를 구분하는 것이 바로 연속적 중생관입니다. 어떤 구절이 09.09.14 07:32
holyjoy
이런 중생관을 지지하느냐고요? 성경에서는 믿음의 원인으로서의 중생을 지지하는 구절도 있고, 믿음의 결과로서의 중생을 지지하는 구절도 있다는 것이 그 지지구절들의 증명을 보여주는 것 아닐까요? 09.09.14 07:33
혹시 그 구절을 올려주실 수 있습니까? 저도 한번 검토해 보고 싶습니다. 09.09.14 07:56
holyjoy
농담하시는 것은 아니시겠지요?
 
출처 :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글쓴이 : 혼인잔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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