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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책) 새 시대를 위한 새 기독교...존 쉘비 스퐁 감독 옮긴이 최종수 목사

하나님아들 2012. 11. 20. 23:16

새 시대를 위한 새 기독교

 

제1부 내용요약

제1장 출발점

저자는 근본주의의 5가지 원칙을 필두로 기독교의 전통적인 교리들을 모두 부정한다. 즉 근본주의와 더불어 그의 생각에 보수적인 기독교 우파들이 고수하고자 하는 전통적 입장을 모두 거부한다. 하나님을 초자연적 존재로 보지 않으며, 초자연적인 일을 행하는 유신론적 하나님은 죽었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현대인의 표준으로 볼 때 유신론적 하나님이 행하는 일들이 결코 도덕적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 결과 더 이상 현대의 지성인들이 초자연적 유신론을 수용할 수 없고 용납하지 않기 때문에 초자연적 유신론은 폐기될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또한 저자는 불트만의 비신화화의 영향을 받아 예수의 신성을 나타내는 성육신, 기적, 처녀 탄생, 육체적 부활, 승천 등을 부정하며, 종교사학파의 영향을 받아 속죄론과 성만찬을 유대교의 유월절 전승에서 빌려온 것으로 규정한다. 이러한 교리들은 현대인의 마음을 끄는 신앙형식이 될 수 없으므로, 기독교의 외면과 본질을 구분하여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하나님의 체험을 분리해 내어, 현대인들도 수용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이미지, 새로운 기독교를 찾아야 한다고 제안한다.

한편 전통적인 기독교를 지지하는 이들을 무지와 편견에 사로잡힌 이들로 규정하고, 자신과 같은 입장을 취하는 이들은 정직하며 지성적이라고 평가한다. 아울러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이나 무신론자로 대변되는 세속주의자들에게 어떤 긍정적인 반응이나 동조조차도 기대하지 않는다고 스스로 밝힌다. 다만 판단유보를 요청한다. 이는 그의 주장이 그들과 타협이나 양립할 수 없음을 스스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저자는 초자연적 유신론과 전통적 교리를 고수하려는 기독교는 모두 사라질 것이라 말한다. 그리고 저자는 자신을 기독교인으로 주장하며, 여전히 하나님을 실재적인 분으로, 예수를 주님으로 부른다고 주장하고 스스로 새로운 종교를 만들려고 의도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가 신앙하는 하나님과 예수는 자타가 인정하는 바대로 전통적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과 예수는 분명 아니다.

 

제2장 유신론의 종말을 보여주는 징조들

지식과 과학의 진보로 말미암아 더 이상 과거의 유신론적 하나님이 머무를 장소가 없어져만 간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그 결과 유신론적 신관이 사회적 기능으로 담당했던 부분인, 불안과 스트레스를 효율적으로 다루는 기능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현대에 불안과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한 대체장치로서 카페인, 알코올, 니코틴 중독과 우울증 치료제 사용의 증가하고, 불안과 스트레스를 해소하지 못한 부작용으로 자살, 테러와 같은 폭력행동들이 급증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제3장 자의식과 유신론

저자는 3장에서는 인간의 자의식이 유신론을 만들어냈다고 주장한다. 틸리히의 ‘비존재의 충격’, 프로이트의 ‘자의식의 충격’이라고 말하는,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자각으로 말미암은 불안을 해소하고 삶의 의미와 영원성과 안정을 추구하기 위해서 고안된 것이 초자연적 유신론이라고 주장한다. 기본적으로 진화론을 토대로 유신론의 진화를 설명한다. 즉 초기 유신론의 형태는 물활론이었으나 인간의 사회가 농경사회로 발전하면서 지모신적 유신론으로 발전하였고 이는 남성적 유신론의 발생과 더불어 다신론적 유신론으로 발전했다고 본다. 그리고 배타적인 부족적 유신론을 거쳐 보편적 유신론으로 발전했다고 주장한다. 서방세계에서는 기독교가, 중동에서는 이슬람이, 극동지역에서는 힌두교, 불교, 유교가 그러한 보편적 유일신론 형태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보편적 유일신론 역시 현대에 적절한 해답을 주지 못하고 있으며, 인간의 자의식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불안을 해소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으므로, 인간의 자의식을 긍정해주고 그 자의식 자체 안에서 시간에 구애를 받지 않는 영원하고 참된 진실을 찾게 해주는 새로운 길을 찾아내야한다고 역설한다.

 

제4장 하나님을 넘어서지 않고도 유신론 넘어서기

전통적 기독교의 모든 경계선을 뛰어넘어 하나님을 어떤 ‘한 존재’나 ‘최상의 존재’가 아니라 모든 존재의 근원이며 원천이라고 말한다. 이는 존 로빈슨이 『Honest to God』에서 주장한 바이기도 하다. 또한 하나님을 인간의 언어로 규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것이야말로 우상숭배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저자는 하나님의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이 끼친 영향, 즉 하나님이 자나간 발자취를 살펴봄으로써 초자연적 유신론의 한계를 넘어선 새로운 하나님 탐구를 시도한다.

그 전제조건으로 성서를 광신해서는 안 되며, 비문자주의적으로, 또 비미신적으로 그 성서 이야기의 원시성을 넘어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 성경읽기의 결과로 하나님과 생명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생명의 근원, 즉 생명의 깊이와 의미, 그리고 그 체험이 바로 하나님이라고 주장한다. 요컨대, 토라연구를 통해서 저자가 얻은 비유신론적 하나님에 대한 첫 번째 정의는 하나님은 생명의 궁극적 원천이라는 것이다. 두 번째 정의는 하나님은 사랑의 궁극적 원천이라는 것이다. 세 번째 정의는 하나님은 존재 자체 곧 존재하는 모든 것 밑바닥에 있는 실재라는 것이다. 아울러 타자를 위한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실재를 예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에 저자는 살아가고 사랑하고 존재하는 자유 속에서 하나님을 체험한다고 주장한다.

 

제5장 본래의 그리스도

저자는 성서가 말하는 예수는 인간의 모습을 지난 유신론적 하나님에 대한 지상적 초상화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고, 유신론적 하나님이 현대인들이 수용할 수 없는 현재의 상황에서, 예수에 대해 말할 때에도 유신론적 개념을 떠나서 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전통적인 자유주의자들의 견해를 받아들여 유신론적인 색채를 제거한 예수는 ‘위대한 선생’이라고 주장한다. 아울러서 비유신론적 사고를 통해서 성육신을 부정함으로써 유신론적 예수상을 해체한다고 해서, 비판자들의 말대로 예수가 한낱 인간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하나님이 존재의 근원이기에 인간은 누구나 신적 실재의 일부이기 때문에, 인간과 신은 서로 다른 실체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별개인 것처럼 보이는 연속체의 두 양극과도 같다고 주장한다.

한편 저자는 Q문서와 마가복음서, 바울 서신서 등을 논하면서 기독교 초기 저작물인 이 문서들에서 묘사된 예수는 유신론적 신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먼저 최초의 저작물인 바울 서신들에는 예수의 기적적인 탄생이나 육체의 부활은 언급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바울이 하나님을 유신론적으로 보았음은 부정하지 못한다고 고백하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신론적 언어가 본래부터 예수에게 적용되지 않았다고 강변한다. 마가와 관련해서는 유대예배력에 따라 마가복음서를 구성하였고, 그 절기에 맞게 예수에게 유신론적 신성을 덧입혔다고 주장한다. 즉 예수의 기적과 초자연적인 행위들은 단지 하나님 나라의 현존을 보여주는 징조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마가의 신학방법(창작)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본래 마가의 예수는 유신론적 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 불어넣어진 한 인간이라고 주장한다.

 

제6장 기독교를 사로잡은 유신론

5장에 이어서 저자는 복음서 저작연대의 순서에 따라 마태와 누가와 요한복음서를 다루고 있다. 후대로 갈수록 유신론적 예수상이 강화된다는 것이 전체적으로 주장하는 바이다. 특히 마태와 누가의 경우에 유신론적 성육신 개념이 도입된 것이 당시 유대예배력에 따라 성서일과 차원에서 복음서를 기록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즉 오순절의 긴긴 철야예배를 위해서 마가보다 더 확장된 본문이 필요하였고, 그것을 충족하기 위해서 성육신 사건에 대한 마태와 누가의 본문이 고안되었다고 주장한다. 아울러 마태와 누가는 자기 이야기를 발전시키는 동안 예수의 기적적 능력을 고조시키고 있다고 보았다. 요한의 경우에는 예수에 대한 유신론적 해석을 가장 발전시켰다고 보았다. 처녀 탄생 이야기보다 선재기독론을 발전시킨 것이 그 대표적인 경우이며, 다른 어떤 복음서보다도 예수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가 강화되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의식의 충격과 고통을 멎게 해주고, 비존재의 충격을 달래준다고 믿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복음서의 저작 당시의 구체적인 삶의 정황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는 않는다. 요컨대, 저자는 5장과 6장의 결론으로 예수의 인간성은 각 발전 단계마다 서서히 그 자취를 감춘 반면에 그의 신성은 점점 더 고조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교회사적으로 기독론과 삼위일체론의 발전과정 및 카톨릭의 교황과 마리아에 대한 교리발전과정을 논함으로 자신의 주장의 신빙성을 덧붙이고자 했다.

 

제7장 기본적인 기독교 신화 바꾸기

저자는 먼저 예수 위에 유신론적 하나님 해석을 덮어씌우게 만든 의미심장한 체험이 분명히 있었다고 전제한다. 그러나 그 체험을 발견할 수 있으며 그것이 무엇이라고 밝히지는 못한다. 그 대신 그리스도 체험의 핵심 요체를 잃지 않으면서도 나사렛 예수 위에 덮어씌운 해묵은 해석들을 벗겨내는 작업을 시도한다. 5,6장에서 성서적 접근을 시도하였다면, 7장에서는 기독교 전통교리인 성육신교리와 속죄론을 다룬다. 이 두 교리가 현대인들에게는 과학적 지식의 발달로 인해, 특히 다윈의 진화론으로 인해 더 이상 기독교 본질을 설명해 낼 수 없으므로 용도폐기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구체적으로는 생식과 유전자에 대한 지식의 발달로 인해서 동정녀탄생설이 더 이상 설 자리를 잃게 됨으로써, 성육신 개념은 효력을 상실했다고 주장한다. 승천에 대한 개념 역시 우주시대의 도래로 말미암아 터무니없는 헛소리가 되었다고 말한다. 속죄론(성만찬)에 대해서는 좀 더 상세히 논하는데, 크게 세 가지 문제점을 지적한다. 첫째, 속죄교리의 전제인 인간의 타락과 그에 대한 심판은 하나님의 이미지를 괴상망측하게 만들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즉 그런 하나님은 손상된 위엄에 대한 배상이 충족될 때까지 용서하지 못하는 전제군주처럼 행동하는 신으로 비춰질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둘째, 예수의 죽음에 대한 이러한 예전적 해석은 예수의 구원하는 피와 관련된 기독교의 미신으로 귀착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셋째, 다윈의 진화론을 고려할 때, 인간은 한 번도 완전한 남자와 여자로 존재한 적이 없다고 주장한다. 진화중이고 계속 발전 중으로서 늘 미완성이었다는 것이다. 달리 말해 성경이 말하는 타락은 존재한 적이 없다고 주장한다. 인간이 행하기 쉬운 악이란 타락한 본성이 아니며, 진화의 과정에서 요구된 철저한 자기중심적 이기주의의 표출이라고 말한다. 요컨대, 인간의 타락은 없었으며, 타락이 없었으므로 속죄의 치료도 필요없다는 것이다.

 

제8장 성육신 교리를 넘어선 예수 : 비유신론적 신성

8장에서는 저자가 이해한 기독론을 피력하고 있다. 스퐁의 예수상은 폴 틸리히의 『New Being』과 『On the boundary』 두 책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가 이해한 예수는 부족적 경계선을 뛰어 넘어 모든 인종적, 성적, 사회적 편견과 차별을 철폐하고자 했다. 사마리아인에 대한 복음서의 여러 이야기들은 예수가 그러한 인종적 편견을 넘어선 새로운 존재로 나아간 증거라고 보았다. 다시 말해 장벽이 없는 인간성, 부족적 두려움의 방어적 주장이 없는 인간성, 하나님이 그 안에서 현존한다고 인식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완전하고 자유로운 혁신된 인간성으로 들어가도록 초청하는 예수이다.

또한 예수의 십자가와 관련하여, 예수의 죽음은 대속교리를 바탕으로 신이 요구한 희생을 위한 것이 아니고, 예수의 생애 속에 현재하는 위협적인 사랑의 능력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즉 친구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원수를 위해서까지도 사랑을 내어주는 과격한 사랑의 상징으로 십지가를 해석한다. 그리고 예수가 생명을 너무나도 완전하게 총체적으로 소유하고 있음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왜냐하면 생명은 생명을 소유하기 전까지는 내어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생명을 완전히 총체적을 소유한 예수, 곧 생명의 원천인 예수는 생명을 내어주는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하나님의 현존을 나타내었다고 보았다. 이것은 그가 초월절 유신론 개념을 버리고도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근거이다. 달리 말해 예수 안에서 사랑과 하나님은 분리할 수 없고 사랑을 나눈다는 것은 하나님을 나눈다는 것에 못지않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 사랑, 생명은 존재이며 곧 하나님이다. 그리고 정말로 인생에 필요한 것은 신적인 구원이 아니라, 그토록 열려 있으며 자유롭고 총체적인 사랑하는 생명이어서, 우리가 예수 안에서 그러한 하나님을 체험할 때 우리는 사랑의 실재 안으로 부름 받는다고 보았다.

한편 저자는 인간 예수를 존재(사랑, 생명)의 근거와 동일시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한다. 동시에 예수를 통하여 존재(사랑, 생명)의 근거 즉 하나님을 감지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예수와 하나님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없기 때문에 궁극적 의미로는 예수와 하나님이 하나이며 같은 실재라고 주장한다. 요 10장 30절의 “나와 아버지는 하나니라”는 의미를 이와 같이 해석하면서, 자신의 이러한 이해가 옛 신화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기는 하지만, 그 핵심상 강력한 정통이라고 주장한다. 그렇기에 자신은 그러한 예수를 주님으로 부르며 자신을 기독교인으로 부른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과 사랑과 존재를 가져다주는 한 부처, 모세, 모하메드, 공자, 나이팅게일 등도 성육신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이제 종교적인 사람들은 한 길을 갖게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모든 종교의 차이점들을 궁극적인 것이 되게 하거나 경계선으로 보지 않고도, 모든 차이점들을 환영하고 심지어 경축하는 것을 배우게 될 것이라 주장한다.

 

제9장 원죄는 나가고 악의 실체는 들어온다.

스퐁은 자신의 비유신론적 신성의 예수상에 대한 두 가지 비판을 9장에서 소개한다. 첫 번째 비판은 예수를 좋은 선생이나 좋은 모범자의 역할로 축소시키고 있다는 비판이다. 스퐁은 자신의 주장이 19세기 개신교 자유주의자들의 주장을 반복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과 다르다고 주장한다. 즉 자신이 이해한 예수는 모범적 모델보다는 자신으로 하여금 자신의 경계선 너머로 부르시는 신적인 능력 강화의 원천이라고 주장한다. 기존의 자유주의자들은 예수를 좋은 모델로 제시했지만, 그런 모범적 삶을 살 수 있도록 능력을 제공해주지는 못했다는 점에서 자신과 다르다고 주장한다.

두 번째 비판은 인간악의 실체를 완전히 파악하지 못했다는 비판이다. 이에 스퐁은 자유주의자들의 실수를 인정하면서 자신은 그러한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으려 한다고 밝힌다. 우선 인간은 원죄를 지니고 태어난다는 전통적 이해를 거부하면서 인간은 도덕적으로 중립상태로 태어난다고 주장한다. 아울러 인간의 원죄를 주장하는 전통적 이해는 인간정신의 진가를 깨닫지 못한 결과이며, 인간성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기독교는 오히려 인도주의자여야 한다고 말한다.

한편 인간이 죄를 범하는 경우로 경쟁과정을 상정하면서, 경쟁과정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잔인성은 진화과정의 생존투쟁 가운데서 생긴 직접적인 부산물로 이해한다. 그리고 생존투쟁의 과정에서 나타난 것이기에 그러한 인간의 잔인성조차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악은 불완전한 인간성이 생존을 제일 중요한 가치로 삼기 때문에 생겨난 것으로 이해하며, 인간의 미완성성을 악으로 규정하는 전통적 이해를 거부한다. 부족주의, 전쟁, 정복, 노예제도, 인종차별주의, 흑백분리, 여성의 제2등급신분, 동성애혐오에 나타난 악은 진화론적 과거에 의해서 생존을 위한 수단으로 설명될 수 있다고 말한다. 요컨대, 저자가 인식하는 죄란 연약한 미완성 의식에 뿌리를 박은 생존 추구의 결과물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남성호르몬의 과도한 분비의 결과나 이중 Y염색체로 인한 유전적 요인에 의해서 범죄행동이 유발되기도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인간이 타락한 존재가 아니라 불완전한 미완성된 존재임을 지적해주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한편 생존과 무관한 경우의 사례로 알코올 중독에 대해 논하면서, 피상적으로 보면 능동적으로 죄를 범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깊이 고찰한 결과 중독의 본성이 아예 처음부터 선택의 여지를 배제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주장한다. 중독과 정신질환의 경우 도저히 통제할 수 없는 힘에 굴복된 것 같아 보이며, 자신이 제시한 새로운 기독교의 이해들 곧 예수라는 인간 안에 현신된 능력 강화의 사랑을 포용한다는 것과 인간성의 완성을 가능하게 해 준다는 것이 이들을 위해서는 대안이 되지 못하는 것 같았다고 말한다. 이런 경우 불완전한 미완성된 인간성으로 설명될 수 없으며, 귀신들렸다고 하는 편이 더 낫다고 말한다. 즉 스퐁은 악의 실재를 인정한다. 요컨대, 저자는 기본적으로 죄 가운데 타락한 인생이라는 전통적 견해를 부정하고 오히려 생존투쟁의 산물로 이해한다. 그러나 동시에 생존투쟁의 산물이라는 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 중독, 정신착란, 자기신념에 따른 파괴행위 등에서 악의 실체를 발견한다고 고백한다. 그러면서 이 둘의 양립을 위한 최종적인 답변을 알지 못한다고 솔직하게 고백한다.

마지막으로 악에 대한 설명의 새로운 가능성으로 융의 견해를 소개한다. 융은 선뿐만 아니라 악 또한 하나님의 일부라고 보고, 하나님 개념이 남성과 여성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와 사탄을 반영해 줄 때라야 하나님은 완성될 것이라고 말한다. 즉 선과 악은 하나님과 우리 자신들 안에서 모두 의식되어져야만 하며, 이것이 우리 존재의 완전 충만함 속으로 들어가는 문턱이라고 융은 주장한다. 스퐁은 이러한 융의 견해가 대안이 되기를 바라면서 빛과 어둠을 하나로 연합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악을 끌어안아 우리의 전일성(wholeness) 추구의 일부로 변형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요컨대, 하나님의 어두운 면을 반영하는 나의 생의 어두운 면을 내가 나의 존재의 일부로 소유하기 전까지는, 내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것처럼 가장할 수 없다고까지 주장한다.

어떤 사람의 경우에는 어두운 면이 그 사람의 존재를 삼킬 수 있고, 그럴 때 무엇에 홀린 사람이 되고 중독된 사람이 되는데, 스스로 구출할 능력이 없기에 신적인 구출행위를 소리쳐 부르는 인생이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구원은 유신론적 하나님의 몫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의 역할이라고 주장한다. 달리 말해 구원자의 역할을 할 사람은 예수라는 인물이 아니라 교회임을 강조한다. 이것이 추구하는 미래 기독교에서의 교회 공동체가 담당할 역할이다. 즉 인간성의 생존 욕구 충동을 벗어나, 타인의 삶을 향상시키고 그 자리를 내어주는 삶을 통해서 새 존재(New Being)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제10장 전도와 세계 선교를 넘어서 유신론 이후의 보편주의로

10장에서는 전통적 기독교의 선교활동의 이기심과 배타주의를 비판한다. 특히 19세기의 식민주의 정복활동의 일환으로 수행되었던 서구 기독교의 잘못된 선교역사를 지적한다. 신의 이름으로 권세를 주장하여 아프리카의 흑인들을 노예로 삼는 것을 정당화하고, 자신들만 옳다고 믿는 배타적인 선교방식으로 말미암아 서구 기독교의 선교는 실패했다고 결론 내린다. 이에 개종활동을 뒷받침했던 유신론적 사고를 버리고, 자신이 주장하는 새로운 기독교를 받아들여 보편주의로 나아갈 것을 주장한다. 하나님은 여러 존재들 가운데 한 존재가 아니라, 모든 존재의 근원이시며, 생명의 원천이시고 사랑의 원천이기에, 하나님은 어떤 종교체계 안에도 담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즉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유일한 통로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다만 여러 출입구 중에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로 들어가는 입구가 존재함을 인정한다. 요컨대, 이 지구상에 특정 시간과 장소에 살고 있는 특정 그룹의 사람이 체험한 하나님의 현존을 해석하려고 하는 여러 다양한 종교 전통들과 하나님 사이에 맺은 관계는 다르지 않다고 주장한다.

 

제11장 그렇다면 기도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스퐁은 그의 경험을 토대로 비유신론적 하나님 개념과 유신론적 하나님을 신봉하는 이들이 세운 종교 안전체계 사이에서 가장 분명하게 상충되었던 것이 예배와 기도였다고 말한다. 전통적 기독교의 기도 이해는 이 세상 밖에 있는 신이 개인이나 사회가 처한 위기에서 기도자를 돕기 위해서 개입한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이는 처음 자의식을 갖게 된 인간이 무력감과 절망감의 충격에서 벗어나고자 자신을 위협하는 힘보다 더 강력한 보호자의 존재를 가정하고자 한 시도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도움을 호소할 수 있는 유신론적 하나님은 없으며,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신의 계획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유신론 이후의 기독교인으로서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하는 지를 설명한다. 우선 기도가 갖는 전통적 이미지를 탈피하고자 기도라는 용어를 명상이나 묵상이라는 말도 대체하자고 제안한다. 이러한 용어는 하나님을 우리 자신의 뜻을 행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보다 그 이상의 어떤 것을 바꾸려 들고 있다는 것을 시사해 주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은 더 이상 유신론적 신이 자신을 위해 일하는 것을 기대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스퐁은 세상 밖에서 우리에게 침입해 들어와 기적을 행한다는 신에게 기도하기 보다는, 우리 인간의 연약성을 포용할 수 있게 해주고, 충만한 삶을 살며, 아낌없이 사랑하는 체험 속으로 과감하게 들어갈 수 있게 해주는, 그리고 용감하게 존재의 깊이 속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해주는 하나님의 현존을 우리 자신들 안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편 스퐁은 자신의 개인기도 시간과 내용을 제시하면서 유신론적 믿음에 서 있었을 때의 기도생활과 유신론 이후의 하나님을 믿을 때의 기도생활의 차이를 비교 제시한다. 이전에는 하루 2시간씩 사랑하는 이들과 관계된 기독교 공동체들과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 중보기도하는 기도생활이었다면, 이후에는 2시간이 아닌 자신의 삶 전체를 기도로 바꾸었다고 말한다. 만일 기도가 하나님에게 몰두하는 행위라면, 그리고 만일 하나님이 생명의 원천이시라면 자신의 삶에 몰두하는 시간이 곧 기도시간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즉 자신이 취하는 모든 행동들 – 생명과 사랑과 존재의 근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져 날라다 주는 행동들 - 이 다 기도라고 주장한다. 삶이 곧 기도임을 말한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요청은 모든 관계 안에서 하나님의 현존이 되고자 노력하라는 의미로 이해한다.

 

제12장 미래의 에클레시아

교회 예배 가운데 남아 있는 유신론적 전통적 개념들을 지적한다. 대표적인 것으로 세례예식과 성만찬의식을 말한다. 그리고 찬양과 기도 속에서 표현되어지는 전통적 언어를 지적한다. 스퐁은 예배의 개혁을 주장하지만 점진적으로 변화될 것이라 기대하며 갑작스러운 개혁을 시도하지는 않는다. 그는 여전히 전통적 언어로 예배를 집례한다. 다만 예배의 언어를 문자 그대로 이해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한다.

한편 미래의 기독교의 예배를 묘사하면서, 먼저 미래 기독교의 예배의 목적이 될 수 없는 것들을 지적한다. 첫째, 예배의 목적이 유신론적 신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기 위해서는 아닐 것이라고 말한다. 둘째, 우리의 특별한 실수를 깨끗이 청산하고 새출발하기 위해서 예배드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셋째, 우리의 죄나 약점을 고백하기 위해서 모이지도 않을 것이라 주장한다. 넷째, 세례예식과 성만찬을 위해서 모이지도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스퐁은 새로운 교회를 에클레시아(불러낸 사람들)로 부르기를 선호하며, 에클레시아의 정의를 생명 안으로, 사랑 안으로, 존재 안으로, 전일성 안으로, 하나님 안으로 불러들인 사람들의 공동체고 규정한다. 예배는 새로운 교회에서도 여전히 교회의 기능으로 남을 것이라고 전망하면서도, 과거의 성스러운 이야기들을 뛰어 넘어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브라함이 새로운 백성들을 세우기 위하여 갈대아 우르를 떠나 여행하였다는 것을 뛰어넘어서, 인간 자의식의 복합성에 이르는 인간의 진화의 긴긴 여행을 축하해야 한다고 말한다. 즉 예배 가운데 자의식을 선물로 준데 대해 경의를 표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미래 교회의 예배는 개인적인 부족적인 생존이 아니라, 이런 한계를 넘어서 전 인류의 복지를 위하여 협동적 결단을 가장 고상한 인간의 미덕이 되게 하는 곳에 이르기까지 자라가도록 우리를 도와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울러 예배는 세계의 개발된 지역에 만연한 무절제한 생활방식을 철저하게 변화시키거나 도전하는 수단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예배가 빈부격차를 줄이는 행동을 실천하도록 촉구하는 수단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배의 예식도 여전히 미래교회의 중요기능으로 제 역할을 다할 것이지만, 그 의미는 달라질 것으로 기대한다. 일례로 물세례 예식은 생명의 부패와 죄가 아니라 생명의 경이와 희망에 집중하게 될 것이라고 보았다. 즉 물세례 예식은 속죄의 의미가 아니라 새로 태어난 아기가 공동체 생활로 들어오는 것을 환영해 주는 예식으로 변화될 것으로 예상한다. 또한 어떤 궁극적인 의미를 계시해 주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생애를 특징짓는 사건들, 즉 예수 안에서 인생 자체의 의미를 계시하기 위해 하늘이 열린 현현의 순간들이 에클레시아의 예배 가운데 예식으로 재연될 것으로 예상한다. 성서 외에 종교적 위인들의 글도 예배 가운데 읽게 될 것으로 예상한다. 이로써 미래의 에클레시아는 진리 탐구에 대하여 새로운 헌신을 보여줄 것으로 기대한다. 마지막으로 미래의 에클레시아는 돌봄의 센터가 될 것이고, 책임적인 인도자가 존재하지만 과거처럼 지도자 역할이 갖는 계급, 신분, 혹은 권위의 특권은 사라질 것으로 예상한다.

 

제13장 왜 그것이 문제인가? 에클레시아의 공적인 모습

스퐁은 그가 에클레시아로 표현하는 미래의 교회상이 필요한 이유를 공적 차원에서 소개한다. 우선 기독교의 메시지는 개인적인 것이 아니고 공동체적인 것이며, 사사로운 것이 아니고 공중적인 것이라고 정의한다. 따라서 우리의 초점이 교회와 교회의 필요에서 벗어나 하나님 나라에 집중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예수가 하나님 나라에 대해 말할 때에는 언제나 ‘집합적 대응’(a corporate reponse)을 말하고 있음을 그 증거로 제시한다.

스퐁이 이해한 하나님 나라는 그 경계선들이 신학적, 교리적이든, 아니면 정치적이든 하나님의 활동을 제한해 온 모든 교회적 경계선들을 반대하는 운동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미래의 에클레시아가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데 헌신할 경우 그 모습은 다음과 같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우선, 미래의 에클레시아는 종교적 사업계획을 위해서가 아니라, 생명의 사업계획을 위하여 단호한 행동을 취하리라 기대한다. 또한 미래의 에클레시아는 생명의 영역을 확장시키고, 사랑의 능력을 증진 향상시키며, 모든 사람들 안에 있는 존재의 용기를 발전시키는데 이바지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제14장 미래 속으로 진입할 용기

스퐁은 자기가 어디로 가고 싶은지, 교회는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를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속한 교회에서 그녀의 비전과 개혁에 귀기울여줄지를 확신하지 못했던 캐서린의 모습을 소개함으로써, 과거 자신의 모습을 회상한다. 그러나 현재는 확신을 갖고 있음을 역설한다. 앞선 논의에서 발전시킨 그의 신앙체계를 재기술한다.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체험의 의미를 설명하고, 그리스도가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무이한 길이 아님을 재차 천명한다. 그리고 자신이 걸어간 새로운 길을 교회도 함께 하기를 요구한다. 그 당위성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무리 두렵다 하더라도 다른 대안이 없다고 주장한다. 변화로 야기될 지독한 상실감과 외로움과 불안을 극복하고 용기를 낼 것을 촉구한다.

 

제2부 서평

이 책을 읽은 첫 소감은 수많은 논쟁과 비판을 통해서 매우 단련된 주장이라는 것이다. 자신이 어떤 비판을 받을지를 잘 알고 있으며, 그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충분히 글 속에 반영했다고 본다. 새로운 개념들을 소개하고 있지는 않으나, 과거에 유사한 주장을 한 이들의 약점을 나름대로 보완하고자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다. 그러한 노력의 결과로 저자는 무신론과 이신론과 19세기 자유주의자들이 받은 비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아마도 기독교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포기할 수 없었던 그의 삶의 정황이 반영된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의 부작용으로 그는 그 누구로부터도 환영받을 수 없게 되었다. 스스로 인식하듯이, 전통적 기독교에서는 이단 내지는 비기독교인으로 비쳐질 수밖에 없으며, 무신론적 세속주의자들에게는 여전히 기독교의 재건에 집착하는 존재로 비쳐질 뿐이기 때문이다.

예수를 통한 하나님 체험에 대한 이해들, 곧 생명, 사랑, 존재의 근원 개념들은 유신론적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의 신앙체계 속에서도 충분히 표현될 수 있다고 보며, 실제로 그렇게 해석되어 왔다. 기독교의 본질의 정수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가 부정하려고 하는 유신론적 하나님의 개념들 역시 기독교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이점에서 그의 사상적 배경이 되는 성서학적 입장들을 비판치 않을 수 없다. 비판할 것들이 너무 많아서 일일이 논할 수 없을 지경이다. 5-6장에 제시된 그의 성서학적 주장들은 사실 휴머니즘과 진화론이라고 하는 두 토대 속에서 아전인수격으로 해석되고 편집되었다. 다시 말해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초자연적 유신론의 개념들을 모두 복음서 저자의 창작물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 지성적 정직함이 보이지 않는다. 한 가지만 지적하면 저자는 Q자료의 초기 저작설을 믿지 않는다. 마이클 고울더 교수의 견해를 따라 후대로 보면서도 예수의 초자연적 요소들이 빠진 Q자료가 초기 연대의 저작으로서 본래의 예수상에 가장 가깝다는 주장이 정설인 것처럼 소개한다. 본인의 입장대로 Q가 마가보다 후대라고 주장하면, 마가의 초자연적 예수상을 비본래적인 면으로 단칼에 잘라버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을 인식하고 있기에 바울서신에서 근거를 찾는다. 그러나 예수의 부활이 육체적 소생으로 이해한 것이 없다는 그의 주장도 거짓이다. 고전 15장 14절을 근거로 했는데, 15장 35절 이하에서 바울이 성도의 부활을 이야기하면서 “몸”의 부활을 말하고 있고, 최초의 서신서인 살전 4장 14절에서 예수의 부활과 성도의 부활이 같음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지는 나름대로 유신론적 기독교가 형성된 과정을 설명한 주장들의 기초가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이다. 책 전체적으로 그가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는 다원주의, 진화론, 휴머니즘의 관점에서 교리들과 성서를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고 강변했다는 것이다. 아울러 유신론적 기독교의 신봉자들을 과학과 지식의 무지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들로 평가하나, 그의 주장에 대한 과학적, 의학적 반론들과 연구들을 무시했다는 점에서 이 역시 지적 정직함을 결여하고 있다. 일례로 최근 의학과 신앙의 관계에 대한 연구들이 많이 나왔고, 의과대학에서 신앙과 의학의 상호관계에 대한 과목들을 신설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신론적 하나님의 치유와 섭리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을 무지의 소치로 돌리기에는 문제가 있다고 본다.

 

 

 

새로운 문명을 열기 위한 새로운 기독교 신앙을 설파하는 책

미국에서 신학전 논쟁의 초점이 되어왔던 존 쉘비 스퐁 감독의 19권의 저술 가운데 마지막 책으로

2000년에 은퇴한 그가 하버드대학교 월리엄 벨든 노블 강좌에 초정받아 행한 강연을 기초로 하였다.

 

이 책은 근대 이후의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기독교의 전근대적 교리들을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게 된 상황에서

기독교의 핵심적 신상을 철저하게 재구성한다.

역사적으로 사회 종교적 차별과 배타주의, 적개심과 전쟁의 원인이 되어왔던 기독교,

오늘날도 여전히 근본주의자들과 네오콘에 의해 제국주의적인 종교가 된 기독교의 낡은 교리들을 폐기하고

생명과 평화의 새로운 문명을 열기 위한 대안적 신앙을 제시하고 있다.

 

출처 : 마라나타사역연구소ㆍ마라나타사역회
글쓴이 : 임재복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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