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가톨릭 교회(150-1054)
가톨릭은 '보편적'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외적, 내적 통일성에 주력했고, 그 형식은 교리의 체계화, 조직체 정비로 나타났다.
영지주의와 마르시온파 Marcionite의 도전
영지주의는 영혼과 물질의 이원론에 근거해 물질은 악하고 비열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철학을 기독교화하기보다는 기독교를 그리이스와 동방사상의 종합으로 보았다. 신은 선재한 예수를 포함한 이언 aeons라는 영적 존재들의 호위를 받으며 높은 세계에서 살았고, 아래에는 땅의 창조자이며 이언의 타락한 아들이며 어둠속에 빛을 가져다 준 소피아 Sophia가 일을 하며 살았다고 주장했다. 영적 속물인 그가 바로 악한 물질의 세계를 만든 야웨이다. 야웨 자체가 결점이 있으므로 구약의 길 역시 결함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뱀은 사악한 유혹자가 아니라 야웨의 잘못된 인도에서 인류를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 존재라고 변호했고, 동정심이 많고 신성한 이언이었던 예수가 몸의 가면을 쓰고 땅에 내려왔다고(육체가 아님) 주장했다. 예수는 어떻게 육체를 벗어나 영적 존재의 불멸성을 얻게 되는지를 육체의 고행적 훈련과 지혜의 습득과정을 통해서 보여주었다. 이에 대해 교회는 영지주의는 기독교의 역사적 배경을 무시한 주장이라고 비판했다.
마르시온은 구약의 가치를 부정했다. 그 이유는 구약의 신은 정의로우면서도 잔인하게 율법주의적이고 혹독한 신이며 물질계를 창조했지만 도덕적으로는 열등한 존재라는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을 따랐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와 구약을 연결시키는 모든 구절을 삭제하고, 새로운 경전을 제시했다.
교회의 반응 : 사도신경과 신약의 편찬
영지주의와, 마르시온파 등의 활동을 저지하기 위해 교회는 믿음의 체계와 경전의 편찬을 시도하기 되었다. Irenaeus는 185년 경 [이단에 대한 반박] 저술한다. 그의 주장은 기독교 교리의 정통성은 사도성에 있다는 것, 사도적 복음서와 서간의 교리와 일치하지 않는 교리는 인정할 수 없다는 것, 사적이고 비밀스러운 지식은 없다는 것, 사도의 저술, 사도적 교회, 교회의 주교에 의해 정통 교리가 전수되었다는 것이었다. 그후 150년에서 175년 사이 로마 교회는 사도신경을 만들고, 사도적 전승 확립 위해 2세기 말경 경전을 편찬했다.
기독교의 국교화
기독교의 평화주의와 타계지향적 태도는 제국의 팽창을 저해하므로, 로마 지배자들은 기독교를 박해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60-180), Septimus Seversus, Caracalla, Maximimus 등이 그때그때 필요에 의해 기독교 운동을 저지했다. 3세기 중반 Decius 황제는 250년 로마의 모든 시민은 왕의 동상에 희생제물 바쳤다는 증명서를 소지할 것 요구하며 위반자를 처형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기독교를 버리지 않았으나 배교자들이 생기기도 했다. 박해 후 보수적 기독교인들은 배교자들의 재영입 반대하며 교회가 분열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마지막 박해는 303년 Diocletian 황제 치하에서 발생했다.
그러나 정치적 과두체제속에서 기독교에 우호적인 콘스탄틴이 313년 기독교 승인을 포고하고, 황제가 된 후 가톨릭 교회를 지원하게 된다. 그의 의도는 통합된 기독교를 통해 로마의 통일을 달성하려는 것이었고, 결국 383년 로마의 국교가 된다.
아리우스 논쟁과 니케아 신조
알렉산드리아의 장로 Arius는 로고스와 함께 그리스도가 피조물이라고 주장했고, 알렉산드리아 주교는 아들은 영원하고 창조되지 않았으며 신과 동질의 존재라고 주장했다. 그러자 알렉산드리아의 주교는 아리우스를 해임(321)하고 만다. 이로 인해 생겨난 교리적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콘스탄틴이 325년 니케아에서 공의회를 소집했다. 주로 동방교회에서 온 300여명의 주교들이 니케아에 모여 니케아 신조를 발표했는데, 그 내용은 로고스나 그리스도는 아버지와 동등한 신성 지닌다는 것, 그리스도가 없었던 때가 있었다거나, 하느님과 아들이 다른 실재이며, 아들은 창조되었다는 사람들을 파문하기로 결정하는 것이었다. 이 회의에서 가장 큰 활약을 보인 신학자는 아타나시우스였다.
기독론 논쟁과 칼케돈 신조
교회 안에서 로고스와 인간예수의 관계에 대한 논란이 일어났는데, 그것은 육화 개념에 대한 논쟁이었다. 서방 기독교인들은 1세기 이전 터툴리안의 하나의 개체 안에 신성과 인성이 질서있게 결합되어 있다는 주장에 동의하고 있었으므로 당혹해하지 않았다.
그러나 동방은 이 문제로 갈등이 첨예화되었다. 시리아 주교 아폴리나리스 Apolinaris는 완전한 신성을 갖춘 그리스도는 동시에 완전한 인간일 수 없다고 확신하며 그리스도의 신성을 주장했다. 안디옥 학파는 예수가 완전한 인간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논박했는데, 이들의 대표자는 Nestorius로, 마리아는 신을 임신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알렉산드리아 주교 Cyril은 그리스도의 인성이 육체, 이성적 영혼, 영을 지니고 있으나 성품을 지니지는 않으며, 로고스가 그의 성품이라고 주장했다. 네스토리우스파는 이런 주장은 예수의 인성을 약화시킨다고 주장하며 인성과 신성은 오직 결합되어 있을 뿐 하나가 다른 하나를 흡수한 것은 아니라고 반박했다. 431년 회의가 소집되나 정치적 이해관계에 휩쓸려 네스토리우스가 추방되지만, '강도회의'라는 오명을 가진 이 회의의 성격상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451년 칼케돈에서 다시 회의가 열렸고, 이 회의에서는 서방 기독교인들의 입장인, 신성에 있어서도 완전하고 인성에 있어서도 완전하다는 주장이 관철된다. 이에 대해 동방 기독교인들은 불만을 표시했고, 그후 알렉산드리아 학파를 따르는 이들은 "하나의 본성을 믿는 무리들"로 자처하며 단성론자 monophysites라고 불리웠다. 이들로부터 야콥의 교회 Jacobites가 생겨난다. 한편 추방된 네스토리우스파는 페르시아를 거쳐 인도와 중국에까지 뻗어나갔다.
교황권의 증대
2세기에서 4세기 교리논쟁에서 로마교회가 승자의 입장을 지지함으로써 바티칸 교황의 권위가 획득되었다. 교황 레오 1세(440-461)는 영적 권위는 자신에게 있다며 교회에서의 우위권을 주장했는데, 그 근거는 사도의 계승 교리였다. 원래 사도의 계승 교리는 모든 주교들을 사도들의 계승자로 인정하는 클레멘트의 교리였는데, 레오 1세는 사도들 중 베드로가 첫 번째이니 베드로의 후계자인 자기가 주교들의 우두머리라고 주장한 것이었다. 하지만 로마 멸망 후 이 주장은 보류된다. 그러나 침입자들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이미 비시고트, 오스트로고트, 반달, 부르군디, 롬바르드 족등이 아리우스파 선교사들에 의해 기독교로 개종되어 있었으므로 교회는 전란의 와중에도 무사할 수 있었다.
수도원운동의 발흥
사회와 격리된 수도원 운동은 3세기 말에 생겨났다. 이들의 시조는 이집트의 Korma에서 출생한 Anthony였다. 그는 금욕생활, 사막에서 은둔생활, 금식과 기도, 내핍을 실천하는 한편, 개인적 수도의 위험성에 대한 자각에서 공동생활 수도원을 조직하게 되었다. 가이사리아의 주교 Basil이 이들을 후원하며 수도원의 규칙을 제정했다. 서방 수도원 운동은 게르만족 침입 후 혼란기에 생겨났다. 이들 수도원들 중에는 방탕한 수도원도 있었다. 그러나 6세기 베네딕트 수도회가 출현해, 육체노동, 기도, 독서, 엄격한 생활을 특징으로 하는 수도원주의를 정착시킴으로써, 수도원의 제도화를 진전시켰다. 그후 수도원 출신으로 주교, 교황들이 생겨나기도 했다.
St Augustine(354-430)
어거스틴은 북아프리카 Hippo의 주교였다. 그는 종교적 방황후 신플라톤주의를 통해 안정 후 기독교로 개종한 인물이었다. 개종후 엄격한 금욕생활을 실천했으며, 자신의 다양한 사상적 경험을 통해 그의 신학은 다른 경향들을 종합시키는 특징을 보여주었다. 그는 신에 대한 개인적 신비적 체험을 기반으로 신을 순수, 추상적 존재로 생각하지 않았다. 한편 신플라톤주의적 신관념도 제시했다. 신은 절대적 실재이며 선하며 유일, 영원한 존재이며, 모든 다른 존재들의 원천이라는 것, 물질계는 파생적 실재라는 주장이 그것이다. 또한 그는 신 관념을 삼위일체에 적용시켜, 삼위의 동등성을 제시했다. 그의 인간관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 인간의 도덕적 결함을 강조하는 특징을 보여주었다. 같은 경험적 배경에서, 자비한 신은 선택한 사람들을 은총으로 구원한다는 은총론을 펼쳤다. 그것은 인간이 은총을 받을 가치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자유롭게 주어지는 신의 선물이라는 것이었다. 이 은총을 받지 못한 사람은 저주를 받은 것이었다. 이에 대해 영국의 수도승 펠라기우스가 도전하기도 했다. 그는 원죄는 없으며 모든 사람은 선에의 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고, 인간의 도덕적 결함은 유전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한편 어거스틴은 교회는 은총의 수단인 성례전을 행하기 위해 신이 만든 제도라고 주장했고, 따라서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교리를 형성했다. 하잘 것 없는 사제에 의해 거행된 성례전은 효력 없다는 북아프리카 도나투스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해서도 성례전은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므로 수행하는 사람의 무가치성과 상관없이 효력이 있다고 반박했다. 역작 [신의 도시]에서는 지상의 도시(로마)는 멸망할 수 있으나 신의 도시는 문명의 종말에도 살아남는다는 것을 제시했다.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분열
이슬람이 침입한 후 성상에 대한 우상적 숭배를 비판하자, 콘스탄티노플 주교 레오 3세는 726년 성상숭배를 금지시켰다. 그러자 로마교회는 레오 3세와 그 지지자들을 파문해 버렸다. 그러자 레오 3세는 시실리와 남부 이탈리아를 교황의 정신적 관할구역에서 제외시켜 버렸다. 하지만 Pippin과 Charlemagne의 지원으로 로마 교회는 번창한다.
필리오케 Filioque(그리고 아들로부터) 논쟁
서방교회는 589년 니케아신조의 성령은 아버지로부터 나온다는 말 뒤에 필리오케를 첨가했다. 그러자 동방 신학자들은 신이 모든 것의 원천이라는 신앙을 거부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필리오케의 삽입을 반대했다. 서방교회는 대체적으로 필리오케지지했고, 876년 콘스탄티노플 교회회의는 필리오케 반박을 천명한다. 이는 교황의 교회 지배권을 거부하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결국 1054년 동,서방 교회의 분열이 이루어진다. 교황의 특사가 콘스탄티노플 대주교를 파문하고, 콘스탄티노플 대주교는 교황을 파문함으로써 분열이 구체화된 것이다. 그후 1204년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에서 약탈을 자행함으로 완전히 분열
동방교회
알렉산드리아, 예루살렘, 안티옥은 이슬람에 지배당해 신학적 발전은 8세기 이후 사실상 중단되고 만다. 대신 예배의식과 종교적 실천에서의 실제적 변화에 주력했다. 교회의 주도권은 콘스탄티노플 대주교가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터키에 멸망하자 주도권은 슬라브교회, 특히 러시아교회로 넘어갔다. 하지만 동방교회의 통일성은 지속적으로 유지되었는데, 그 이유는 편의주의 교리에 따른 관용 때문이었다.
교리적 입장도 일치성을 보였는데, 그 중심은 마지막 교부인 John of Damascus의 교리적 입장을 고수한 것이었다. 요한은 그리스도안에 있는 신은 생명을 주는 화신이며, 교회의 7개 성사와 다른 예배의식을 통해 현재에도 전달된다는 신비주의적 주장을 했다. 한편 그는 성상을 지지했고, 성상이 성례전과 유사한 효과를 가진다고 주장했다. "책은 지식층을 위한 것이고 성상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차이점
우선 성상에 대한 차이를 들 수 있다. 동방교회는 성상을 인격적 존재로 여기지 않고 오직 상징, 즉 본질적 의미의 단순화된 표상으로 여겼다. 때문에 로마교회의 성상은 환조, 동방교회는 희미한 양각의 형태로 발전했다. 동방교회는 성상을 신의 본성과 영을 표상한 것으로 여긴 반면, 로마교회는 일반적으로 성상에다 마리아와 성인들의 실체성을 부여했다. 이는 성모 마리아에 대한 의견 차이로 발전했다. 로마교회는 마리아는 자기 아들을 사랑하고 동정적이며, 자기에게 기도하는 이들에게 자비로운 자로 간주했다. 반면 동방교회는 마리아는 신의 성스러운 어머니, 인성과 신성이 합치된 고귀한 존재였다. 그후 성례전, 필리오케 문제, 독신생활, 연옥교리에 있어서 차이점이 가시화되었다. 동방교회는 하위성직자들은 결혼을 허용하고, 연옥교리를 부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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