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가 하나님을 잊을 때
When a Nation Forgets GOD1)
이재현목사
서 론
루처Erwin W. Lutzer,1941- 목사는 저서 <국가가 하나님을 잊을 때>에서, “독일이 제1차대전에 패전국이 되고, 히틀러Adolf Hitler,1889-1945가 등장할 때, 독일교회가 전부 무릎 꿇고 타협하는 그 상황이, (2010년 당시) 미국 교회에 닥칠 것 같다”고 집필 동기를 밝혔다. 루처 목사의 예견대로 미국교회는 외적인 몰락만이 아니라, 심각한 영적 타격을 맞게 된다. 2015년 6월 26일 미국 연방대법원은 동성애를 합법화했다. 70-80년대 이미 자유화로 예배당 문이 굳게 닫힌 유럽과 달리 미국은 건전한 가치와 개신교의 영향력이 남아있는 국가였다. 그런 미국의 동성애 합법화 개신교를 포함한 많은 종교지도자들이 가담했다. 마지막이 임박함을 알리는 전조이다. 예수님께서 촛대를 옮기신 유럽교회는 오래전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미국교회에서도 촛대가 옮겨진 증거이다(계2:5). 이제 세계에서 대한민국만 남았다.
루처 목사는 이러한 앞날을 예언이라도 하듯이 미국 교회에 경고를 하기 위해서, 독일교회가 ‘나치’Nazi와 협력한 예를 들어 저술한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처지에 있는가? 코로나19 방역 지침이라는 미명 아래 정부가 예배를 사실상 통제하고 있다. 그 일에 교계의 지도자들라는 이들이 앞장서고 있다. 루처 목사의 통찰은 독일교회와 미국교회를 넘어 한국교회에 주는 경종이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도 이제 곧 그 상황에 맞이하게 되고, 곧 닥칠 것이다. 성소수자를 보호한다는 미명아래 차별금지법은 국회에 계류중이다. 통과는 시간 문제로 보인다. 많고 많은 죄악이 있지만, 동성애는 심판의 바로미터라고 성경은 증언한다(창18:20).
본고에서는 루처 목사가 국가사회주인 나치 시대의 독일교회를 통찰하고 미국교회를 경종한 내용을 먼저 개괄했다. 이어 그 논거를 한국교회와 유추했다. 세 번째로 코로나 펜데믹으로 대對교회의 방역지침을 정부와 예배라는 소제로 논했다. 마지막으로 한국교회 대책을 결론으로 했다.2) 좀 더 실제적인 사례와 방안은 부첨附添에 기재하였다. 읽고 증언하는 가운데 주의 능력이 함께 하실 것을 믿는다. 마지막 시대에 전해야 할 메시지를 외치는데 귀한 도구가 되기를 소망한다.
본 론
히틀러와 독일교회
1933년 집권한 히틀러는 교회 지도자들을 불러 놓고, “국가와 교회가 손을 잡고 평화롭게 잘 지내자”3)며, 마수魔手를 내밀었다. 그의 제안이 속임수인 줄 몰랐던 독일 교회가 무릎을 꿇고, 사실상 교회를 갖다 바쳐 버리는 상황까지 다다랐고, 나치에 자발적으로 부역했다. 다음은 그 한 예이다.
1932년 ‘독일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운동’으로 결집한 ‘게르만기독교’의 수장이 목사이자 나치 당원이었던 요아힘 호센펠더Joachim Hossenfelder이었다. 이 총회의 첫 강령은 ‘하나님은 나를 독일인으로 창조하셨다. 독일인인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하나님은 내가 독일인이기를 위하여 투쟁하는 것을 원하신다.’는 것이었다. ‘독일 기독교인들’은 민족사회주의의 인종주의와 ‘인도자’의 교리에 적극적으로 찬성하며, 독일 교회를 유대인 없는 교회로 정화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교회법으로 정한 ‘아리안조례’Arierpargraphen의 1장 2조에는 아리안이 아니거나 아리안 출신이 아닌 사람과 혼인한 사람은 목사가 되거나 교회 행정을 위한 종사자가 될 수 없으며, 그런 사람들은 현직에서 떠나야 한다고 되어 있다.4) 이렇게 독일 교회 내에는 게르만 기독교와 같이 사실상 나치 분파로 나치 집권으로 자신들의 구상이 실현되기를 기대했던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히틀러에게 적극적인 추종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데 독일 교회의 목사들이 이렇게 히틀러를 도울 수 밖에 없어떤 역사 상황을 알아야 한다. 제1차세계대전에서 패배자이자 전범인 독일은 굴욕적인 베르사유조약Treaty of Versailles,1919.
6.28. 체결해야 했다. 프랑스 등 승전국들은 막대한 재제를 가했다. 독일은 영토 15%와 국민 10%를 잃었다. 대포 5,000문과 비행기 25,000대, 몇몇 장갑차와 모든 함선을 양도해야 했다. 군사력을 무력화시킨 것이다. 그리고 1,320억 마르크를 전생보상금으로 1918-1988년까지 70년 동안 지불하도 명했다.
국가 경제가 거덜 난 상태에서 독일인들은 비참한 생활을 해야 했다. 인플레이션은 치솟고, 먹고 살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국민들이 전부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어느 정도로 경제가 힘들었나 하면, 어떤 사람이 카페에가서 차를 시켰다. 처음에 주문할 때는 차 한 잔에 5,000마르크 였다. 근데 조금 후 약속한 사람이 와서, 차 한 잔을 더 시키게 되었는데, 나중에 청구금약이 14,000마르크이었다. 손님이 항의하자 점원은 “돈을 절약하고 커피 두 잔을 사려면 동시에 주문하라”고 하였다. 불과 수 십분 사이에 인플레로 찻값이 배가 넘게 뛰었다는 얘기이다.5)
또 다른 예로, 식료품을 조금 사려고, 수레에다가 돈을 잔뜩 싣고, 수레를 끌고 가서, 빵 하나를 사는 데도, 돈을 엄청 지불해야 했다. 그런데 가게에 들어가서 잠깐 일 보는 사이에, 어떤 도둑이 돈은 땅바닥에 다 쏟아버려 버리고, 수레만 끌고 갔다는 얘기이다. 화폐가치가 곤두박질 해버리고 살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6) 이것은 과장된 얘기가 아니다. 오늘날도 남미나 아프리카 국가 중에는 화폐로 불을 지피는 일이 있었다.
베르사유조약은 독일인들에게 무자비한 보복으로 받아들여졌다. 이 위기에서 살려내기 위해서 누군가가 필요했다. 그 결과 오히려 군국주의가 태동하고 결국 나치의 대외팽창주의를 부추기는 계기로 작용했다. 바로 히틀러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7) 그는 조약의 모든 내용을 거부했다. 급기야는 제2차세계대전을 발발시켜, 프랑스를 침공 외무부의 문서 보존실에 있던 베르사유 조약 원본을 찾아 없애버렸다.
코로나와 한국교회
그와 같이 지금 전 세계가 고통을 당하고 있는 코로나19는 국가 권력의 비대화를 가져올 수 밖에 없다. 유럽등에서는 항공사 국유화 움직임을 보이도 있다. 각국은 강력한 중앙 정부의 통제와 리더십을 가진 지도자가 요청되고 있다. 그리고 그 권력은 개인의 사생활과 어떤 권리를 심하게 침해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난다. 지금도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시켜도, 신상을 수기하거나, QR코드를 태그해야 한다. 정부에서 가게 문을 닫아라, 학교 문을 닫아라, 교회를 닫아라하면 닫아야 한다. 아무 이의도 제기하지 못한다. 자유주의 체제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우리나라가 전체주의인가? 그런데 문제는 별로 이의를 제기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특히 코로나 펜데믹 진원지로 교회를 타겟으로 삼는데 정부 국회 지자제 언론 등이 가리지 않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다. 루처 목사는 오늘날 미국 정부는 대중 커뮤니케이션 자원, 익명의 전산화 관료, 또 은행과 회사를 국유화하는 능력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에 알려지지 않은 조작 도구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8) 또한 루처 목사는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은 이제 일반 문화에 영향을 미쳤으며 검열과 두려움의 분위기를 조성했다.”는 ‘말콤 머게리이지’Malcolm Muggeridge의 말을 인용했다. “이 모든 것은 놀랍게도 모든 인류의 건강, 부, 행복 그리고 평등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했다.9) 루처 목사는 미국에서는 하룻밤 사이에 전체주의 혁명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지만, “오히려 더 큰 통제와 개별 시민의 조작을 위한 정무, 미디어 그리고 국가 통제의 교육의 현재 추세는 계속될 것이다.”는 존 화이트헤드John Whitehead의 말을 전언傳言했다.10)
화이트헤드는 앞으로 미국에 관해서 “시민들은 행동할 힘이 점점 더 사라지는 것을 느끼고 있다. 실제로, 현대의 정부가 과거의 정부보다 훨씬 더 영향력이 확대되었기 때문에 더 심각한 위협을 가하는 경우가 많다. 현대 복지 국가는 시민의 요구에 부응하여 삶 전체를 점점 더 많이 통제한다.”11)며, 10년 전과 비교하여 오늘날 복지 국가가 얼마나 다른가 생각해 보기 바란다. 국가가 우리의 자유를 침해함에 따라 “영적 영역”은 계속 줄어 들고, 우리의 자유는 서서히 감소할 것이다. 국가를 넘어서는 주권은 없다는 개념인 국가주의에서는 항상 개인의 자유가 축소되는 쪽으로 작용할 것이며, 누구도 도망하거나 숨지 못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국가주의”는 “현대의 황금 송아지다”라고 했다.12)
이러한 진단은 필자가 오랜전부터 피력한 견해와 일치한다. 걷잡을 수 없는 세계의 위기는 강력한 중앙통제 시스템이 필요할 수 밖에 없고, 결국 세계단일정부와 이를 지배할 적그리스도의 등장이 가시화 되고 있는 것이다. 좌파 지도자가 집권해서 국가가 이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이념과 관계없이 지구촌 혼돈이 이러한 체제화를 갖추게 되는 것이다. 독일교회가 히틀러에 부역하였듯이, 한국교회도 지금의 코로나 펜데믹에서 탈출하게 할 자, 종국에는 인류를 위기에서 타결한 적그리스도를 추종하는 배교 교회로 진입한 것으로 본다. 예배를 정부와 논의한다는 자체가 이미 배교에 들어선 것으로 보는 것은 지나치지 않다. 예배가 어떻게 협의의 대상이 되는가? 히틀러가 등장했을 때, 독일교회가 미혹되었듯이, 한국교회는 신앙의 가장 거룩한 행위인 예배를 지키지 못하면, 그와 같은 길을 갈 수밖에 없다.
히틀러는 목사들과 회담에서 “평화! 내가 원하는 것은 교회와 국가 사이의 평화”라고 했다.13) 그러자 정말 히틀러가 독일교회를 보호해 줄 알았다. 피폐한 처지에서도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믿음을 잃으면, 이방 사람(세상)의 가치를 갖고, 그들과 같은 삶을 살 수밖에 없다(마6:31-33). 필자는 현 정권에 대해 부정하지 않는다. 단 방역지침에서 대對교회를 향한 예배 금지는 하나도 받아들일 수 없다. 더 더욱 여기에 사실상 동조하고 있는 목회자들과는 함께 할 수 없다(고후6:17).
히틀러는 겉으로는 교회와 평화를 말했지만, 다른 계략을 갖고 있었다. 히틀러는 목사들에게 “당신은 당신 자신을 교회에 국한하라! 독일 국민은 내가 돌보겠다.”고 했다.14) 이 발언을 지금 시대와 조명하자. 정부는 정부의 일을 하고, 교회는 교회 일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정부의 일이 교회의 영적인 영역을 침해하면 용인할 수 없다. 당시 독일교회는 히틀러의 기만에 속았다. 물론 히틀러에 대행했다가 39살의 젊은 나이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본 회퍼Dietrich Bonhoeffer,1906-1945 그리고 마르틴 니뮐러Martin Niemoller,1892-1984목사와 같은 분도 있지만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히틀러의 말은 들던 니뮐러 목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렇게 이야기 했다. “당신은 독일 사람을 돌볼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우리도 그리스도인으로서 독일 국민에 대한 책임 있다. 그 책임은 하나님에 의해 우리에게 맡겨졌으며, 당신과 세상 누구도 우리에게서 그것을 빼앗아 갈 권한이 없다.”15) 이 발언의 뜻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어떠한 일에 대하여 교회는 침묵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히틀러는 분노했고, 그날 저녁에 니뮐러 목사는 비밀경찰에 의해서 바로 체포되었다.
니뮐러 목사는 1934년에 그가 목회하던 베를린 근교 달렘Dahlem에 있는 그의 교회 강단에서, 다음과 같은 예언적 설교를 했다. “우리 교회 전체와 지역사회는 유혹자의 ‘체’16)에 던져졌으며, 사단은 체를 흔들고 바람이 불고 있으며, 이에 우리는 알곡인가 쭉정인가 분명하게 (자기 정체성을) 나타내야 한다.”17)
정부와 예배
예일대 출신의 문화평론가인 에릭 메탁사스Eric Metaxas는 히틀러 시대 “강건한 기독교 국가가 강력한 정부에 의해 빠르게 세속화되었다. 교회는 분열되었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으며, 그들은 그들이 해야 할 마땅한 일에 반응하지 않았다. 그래서 교회는 국가에 압도당하며 존재 의미와 목적마저 사라졌다”했다.18) 지금 한국교회는 코로나19로 예배 금지라는 교회 역사가운데 초유의 사태를 맞이하고 있다. 그런데 메탁사스의 말처럼 이 위기를 통찰하고 성경적으로 정립해줄 선견자가 없다. 한국교회의 신앙이 ‘체’질을 당하고 있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이는 곧 주 오심이 가까움을 부인할 수 없다(마3:12).
니뮐러 목사는 “나는 우리 교회가 참 좋아, 나는 교회에 오면 마음이 평안해, 나는 저 친구가 있어서 참 교회 생활이 즐거워!”라고 생각하는 자들에게 “그 사람들도 이제는 그러한 어떤 평화의 시간이 지나가고 있어 깨달아야 한다.”고 일침 했다. 이것이 지금 우리에게 주는 경고가 아닌가?(참고/마24:48;벧후3:4-5) 니뮐러 목사는 “하나님은 사탄에게 자유로운 손을 주었다. 그리고 우리의 모습이 어떠한지 흔들어보도록 사탄에게 허락을 하셨다. 사탄은 그의 체를 흔들고 있으며, 기독교는 사방팔방으로 던져진다. 고난받을 준비가 안 된 사람, 자신의 경주와 그의 만족을 위해 좋은 것만을 얻으려고,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은 시간의 바람에 의하여 쭉정이처럼 날아가 버리고 말 것이다.”라고 이어 설교했다.19) 이 또한 지금 우리에게 경각을 주고 있는 말씀이 아닐 수 없다.
한국 교회에는 지금 니뮐러 목사와 같은 선지자적 사명을 감당할 사자使者가 요청된다. 예수님이 죽었다고 책망한 사데교회에도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흰 옷을 입은 몇 명이 주님과 함께 다’닌 것처럼, 종말 시대 예언 사역을 감당할 자들이 있어야 한다(계3:4). 그들을 ‘두 증인’이라고 성경은 말씀한다(계11:3). 그런데 이 ‘두 증인’을 ‘두 선지자’라고 하였다(계11:10). 그것은 이들이 감당할 사역의 직책에 대한 표현이다. 한국교회는 80-90년대 대부흥을 이루면서, 교회 성장에 온통 관심을 갖게 되었다. 21세기가 한참 지금도 다르지 않다. 이로 인해 목사가 제사장으로서 목양적 기능을 우선하게 되었다. 반면 선지자로 예언적 기능은 크게 약화되었다. 예언자적 사명을 논하면 세속화된 자유주의로 보거나, 정반대인 잘못된 세대주의자들인 극단적 종말론자 공격한다. ‘두 증인’인 ‘두 선지자’는 ‘땅에 사는 자들을 괴롭게 한 고로 땅에 사는 자들이 그들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적그리스도에게) 보내리라’고 하였다(계11:10). 예언자적 사명은 이와 같이 세상이 싫어할 뿐만 아니라, 교회에서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루처 목사는 히틀러에 협력한 독일교회의 다름 아닌 ‘경건주의 운동’이라고 지적했다. 이들은 “성경적 경건으로의 복귀, 즉 마음속 하나님에 대한 경배를 주창했다. 그들 대부분은 독일 내 지적 신학적 논쟁에서 떠났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구원에 대한 은혜를 증언했다. 따뜻한 마음을 유지하기 위해 단순히 성경 연구만을 계속했던 그들은 나치 정권을 의무적으로 용인함으로써 절반의 권리만 얻었다.”.20) 이 시대 목회자들이 예언자적 사명을 강화하지 않으면, 종말을 대비할 수 없다. 종말의 최대 징조는 적그리스도이다(살후2:3). 그자는 평강의 왕으로 위장하여 등장한다(단9:27.참고/사9:6). 만약 목회자들이 목양적 역할만을 전부로 안다면, 평화의 왕으로 위장할 적그리스도를 인류 영웅으로 오인하거나,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겠지”라며 무심히 여기게 될 것이다. 전자는 끔찍한 비극이 아닐 수 없고, 후자라면 루처 목사의 진언처럼 히틀러를 추종한 독일교회의 전철을 밟게 될 것이다. 그는 미국교회를 향해 경종했지만, 한국교회도 예외일 수 없다.
너무나도 잘 아는 것처럼 믿음은 시련을 만나봐야 안다(롬5:2-4). 앞으로 우리가 알곡인지, 쭉정이인지 주님은 아시지만, 우리 자신이 모를 수 있다. 그래서 우리가 알곡인지, 가라지인지 알게끔 하기 위하여, 주님께서 사탄에게 (체질을) 일시적으로 허락하는 시간이 오고 있을지도 모른다. 바로 예배를 통해서 말이다.
종말시대인 7년환난은 적그리스도가 지구 위기에서 평화조약 체결로 시작된다(단9:27.참고/살후2:3). 세계인들에게는 영웅으로 유대인들에게 메시아로 추앙받게 된다. 이때 평화의 주요 어젠더Aagenda 가운데 하나가 종교의 자유이다. 역사 가운데 종교는 전쟁의 원인이었다. 그러므로 적그리스도의 중재로 이룬 종교의 자유는 곧 전쟁의 종식이다. 인류에게 평화를 가져온 큰 업적이다. 교회의 예배는 당연히 보장된다. 물론 배교에 빠져 적그리스도를 추앙하는 음녀교회와 적그리스도의 정체를 만방에 전할 촛대교회로 나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전 3년 반이 끝난 지점, 적그리스도는 본색을 드러내고,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이라고 하였다(단9:27). 자신을 경배하는 행위외에 어떠한 예배도 용납하지 않는다(계13:15). 여기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종말시대에는 예배가 적그리스도에 의해 좌우된다는 점이다. 그자에 의해 드릴 수도 있고 중지될 수도 있는 것이다. 바로 지금 예배가 정부에 통제되는 것은 그 예고인 것이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 찾아오는 이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고전10:13;계3:10). 그래야 예수님 오실 때 공중에서 그분을 맞이할 수 있다(살전4:17). 예수님은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라고 하였다(계3:18). 사도 바울은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고 하였다(살전5:23). 우리는 연단의 믿음으로 준비해야 한다. 주 오심을 사모하며 끝까지 예배로 대표되는 신앙을 지켜야 한다. 예배에 관해서는 어떠한 타협도 용납될 수 없다.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24:13).
결 론
히틀러 치하의 독일교회와 오늘날 미국교회 그리고 한국교회가 같은 시대와 체제에 있지 않다. 그러나 모양만 바뀌었을 뿐 본질은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나뮐러 목사는 교회에서 감히 정권을 비난하는 설교를 했다는 죄로 투옥됐다. 현대 민주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지만, 오늘날은 “증오심 표현”으로 처벌 대상이 된다.21) 이 “증오심 표현”은 현재 “증오범죄”로 불린다. 정부가 표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의견을 말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22)
유럽은 “증오 발언”으로 이슬람 비판 자유를 잃어버렸다. 그로인해 유럽인들은 미래에 대한 중요한 주제조차 그들의 의견을 말할 수 없다.23) 미국에서는 플로리다 교장과 체육 선생이 학교에서 점심 식사 기도를 했다는 범죄 혐의로 기소돼 6개월 간 감옥에 수용될 처지에 놓였다. 미국시민연맹과 합의된 소송 해결 조건을 위반한 혐의 때문이다.24) 점심시간에 학생이 식사 기도를 하면 교사가 다가와 “학교에서는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25) 미국의 번영, 자유, 관대가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분명한 증거가 있는데도 부정되고 있는 것이다.
미국 수정 헌법 제1조The First Amendment는 “종교의 설립을 주선하거나, 자유로운 종교 활동을 방해하거나, 언론의 자유를 막거나, 출판의 자유를 침해하거나, 평화로운 집회의 자유를 방해하거나, 정부에 대한 탄원의 권리를 막는 어떠한 법 제정도 금지하는 미국의 헌법 수정안이다.”26) 그러나 종교 및 성소수자에 대한 비난이 “증오 발언”에 해당되어 유죄로 간주되면서, 수정 헌법 제1조의 권리가 축소되고 있다. 이에 대하여 루처 목사는 “미국인으로서 우린 수정 헌법 제1조가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무신론자와 불가지론자들이 거부권을 행사해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 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27)며, 니뮐러 목사의 심정으로 “‘민간 불복중 신학’”을 개발해야 한다고 역설했다.28)
미국의 수정 헌법 제1조는 우리나라 헌법 제21조의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므로 현재 정부가 방역지침 교회 예배를 금지한 행정명령은 헌법 위에 있을 수 없다. 또한 차별금지법 또한 묵과할 수 없다. 한국교회는 주기철 손양원 목사님 등 신앙과 예배를 위해 생명을 바친 선조들의 심정으로 예배 금지를 행정 명령한 정부에 강력항의와 함께 루처 목사의 “민간 불복종 신학”에 더해 “예배 사수 신앙”를 천명해야 할 것이다.
부첨>附添
루처 목사는 “민간 불복종 신학”의 예로 “평범한 영웅들의 끼친 영향”이란 소제로, “값싼 은혜”29) 함정을 경종한 본 회퍼를 예로 들었다.
“그의 말과 삶의 실천으로 국가의 간섭에서 독립한 역동적인 기독교의 강력한 대변인이 되었다. 교회를 본래의 임무로 되돌려 놓은 이 사람은 결국 순교자가 되었다.…잘 알려지지 않은 수천 명의 사람이 그 분의 모범에서 영감을 받아 그들이 섬기는 그리스도의 공로A Credit가 되었다. 수 백명의 목회가 신앙을 위해 기꺼이 고난을 받고 강제 수용소로 갔다. 모든 목회자가 훼퍼나 니뭘러 목사였다면, 나치 아리아 종족의 우월성에 대한 교리와 그 무시무시한 함축적인 의미에 대해 “아니오”라고 간단히 대답했을 것이다.…우리는 기쁨으로 제자도와 순종의 대가를 치를 용기가 있는 사람들이 필요하다.”30) 우리 받은 은혜는 값싼 은혜Cheap Grace 가 아니라 값진 은혜Costly Grace이기 때문이다.
루처 목사는 그 외에도, 콥트교 성직자로, 매주 TV 프로그램과 인터넷을 통해 중동의 5천 만 명의 이슬람교도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자카리아 보트로스’Zakaria Botros. 제2차 세계대전당시 목사로부터로도 절대 하지말라는 권유를 들었지만, 네달란드에 있는 유대인들을 보호하고 도와준 45세의 미혼여 ‘코리 텐 붐’Corrie ten Boom31), 닉슨 대통령의 보좌관으로 권력의 정점에 있다가,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복역한 후, 교도소선교회를 조직 복음을 전한 ‘찰스 W. 콜슨’Charles W. Colson 등을 들었다.32)이 시대 목양과 신앙하는 목회자와 평신도 모두에게 도전을 주고 있다.
루처 목사는 “물론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용기와 비범함으로 주님을 섬기는 수만 명의 영웅이 있다. 미국에는 승리보다 정의에 더 관심이 있는 정직한 변호사가 있다. 미국시민자유연맹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학교에서 증언하는 십 대들, 기만적인 동료와 협력하기를 거부하는 의사들이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자신의 가치를 타협하는 대신 선거에서 패하는 정치인이있다. 그런 헌신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을 통해서 ‘값싼 세속주의’, ‘에로티시즘’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입을 막는 ‘불관용’의 지독한 흐름을 막을 수 있기를 바란다.”고 호소 했다.33)
상기 표현 중 ‘값싼 세속주의’는 코로나19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조치라며, ‘온라인 예배’로 대치할 수 있다. 온라인 예배가 예배의 기능은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자, 어찌 예배의 본질을 추구한다고 할 수 있는가? ‘불관용’은 ‘다원주의’로 대치한다. 어떻게 예수님을 유일한 구원자 믿는데 관용이 없다고 하는가? 세상이 아니라, 교회에서 말이다. 그와 같이 공적 예배는 그 어떤 이름으로도 대치할 수 없다.
脚注>
1) 본고는 어윈 루처(Erwin W. Lutzer,1941-) 목사가 2010년에 출간한 <국가가 하나님을 잊을 때> When a Nation Forgets God를 필자가 저서를 정독하고 보안한 것이다. 루처 목사는 위니펙성경대학(B.A.)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달라스신학교(TH.M.)와 로욜라대학교(M.A.)를 졸업한 후, 웨스턴침례신학교에서 신학박사(TH.D.) 학위를 취득했다. 1980년부터 시카고무디교회 담임목사로 36년간 재직한 후 은퇴했다(어윈 W. 루처, 「국가가 하나님을 잊을 때」, 모영윤역, 기독교문서선교회, 2020.9.10.).
2) 본고는 필자가 주 강사로 섬기는 파루시아 아카데미에서 주최한 세미나에서, 행한 두 번째 강의안이다. 독자는 첫 번째 강의안을 필독 바란다(이재현, 「종말과 예배」(“코로나 펜데믹과 예배의 위기”), 파루시아 글로벌 미니스트리 센터, 2020.9.15.).
3) 어윈 W. 루처, 「국가가 하나님을 잊을 때」모영윤역, 기독교문서선교회, 2020.9.10. p30.
4) “한국교회의 죄책 고백과 독일교회의 사례”. 김영재. 교회와목회(2005년 11월호). http://www.clsk.or.kr
5) 어윈 W. 루처, 「국가가 하나님을 잊을 때」모영윤역, 기독교문서선교회, 2020.9.10. p50.
6) Ibid. p50.
7) Ibid. p51.
8) Ibid. p40.
9) As quoted in Whitehead, Religous Apartheid, on an opening unnunbered page. 어윈 W. 루처, 「국가가 하나님을 을 때」모영윤역, 기독교문서선교회, 2020.9.10. p38. 재인용
10) John W. Whitehead, Religous : the separation of religion from American public Life(Chicago:Moody,1994), 36 어윈 W. 루처, 「국가가 하나님을 잊을 때」모영윤역, 기독교문서선교회, 2020.9.10. p40. 재인용
11) Whitehead, Religous Apartheid, 35, Ibid. p40. 재인용
12) 어윈 W. 루처, 「국가가 하나님을 잊을 때」모영윤역, 기독교문서선교회, 2020.9.10. p40.
13) Ibid. p30.
14) Ibid. p31.
15) Ibid. p31.
16) 여기서 ‘체’ 라는 것은 곡식을 알곡과 쭉정이 가르기 위해서 만든 농구農具를 말한다.
17) 어윈 W. 루처, 「국가가 하나님을 잊을 때」모영윤역, 기독교문서선교회, 2020.9.10. p43.
18) Ibid. p43.
19) Ibid. p43.
20) Ibid. p28.
21) Ibid. p34.
22) Ibid. p39.
23) Ibid. p39.
24) Ibid. p37.
25) Ibid. p37.
26) 권리 장전을 구성하는 10개의 개정안 중 하나로 1791년 12월 15일 채택되었다.
27) Richard Land, The Divided States of America? (Nashville, Thomas Nelson, 2007), 185. Ibid. p42.
28) 어윈 W. 루처, 「국가가 하나님을 잊을 때」모영윤역, 기독교문서선교회, 2020.9.10. p42.
29) “값싼 은혜는 우리 교회의 치명적인 적이다. 우리는 오늘 값비싼 은혜를 위해 싸우고 있다. 값싼 은혜란 저렴한 물건처럼 시장에서 팔리는 은혜다. 성찬, 죄의 용서, 종교의 위안은 싼값에 버려진다. …그런 교회에서는 싼값으로 죄를 덮는 세상을 발견한다. 회개할 필요도 없고, 하물며 죄에서 구원받으려는 진정한 소망도 없다. … 값싼 은혜는 의롭다 인정받지 못한 죄인를 정당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 저렴한 은혜는 제자도(제자로서의 삶)가 없는 은혜, 십자가 없는 은혜,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그리고 성육신이 없는 은혜다.”(Dietrich Bonhoeffer, The Cost Discipleship, trans, C. Kaiser(New York:Macmillan, 1949),43,45. 어윈 W. 루처, 「국가가 하나님을 잊을 때」모영윤역, 기독교문서선교회, 2020.9.10. p137.).
30) 어윈 W. 루처, 「국가가 하나님을 잊을 때」모영윤역, 기독교문서선교회, 2020.9.10. p142.
31) 그녀와 그녀의 가족은 1944년에 체포되었다. 아버지는 며칠 후 사망했고, 코리와 언니 벳시는 수용소에 갇혔 다. 모진 수감생활에 벳시는 수용소에 죽음을 맞았고, 코리는 행정착오로 가까스로 살아났다. 출소 후 코리는 자신을 모욕한 납치범들을 어떻게 용서했는지, 그녀의 저서 「은신처」The Hiding Place에서, “하나님의 사랑보다 더 깊은 구덩이는 없다”고 하였다. 그녀의 이야기는 수백만 명의 마음을 사로잡았다(Ibid.145.).
32) Ibid. pp143-145.
33) Ibid. p148.
[출처] 국가가 하나님을 잊을 때 - 이재현목사|작성자 Parousia Academ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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