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 재앙 그리고 자연재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Pandemics, Plagues, and Natural Disasters What is GOD Saying to Us?1)
이재현목사
서 론
어윈 루처Erwin W. Lutzer,1941- 목사는 저서 <팬데믹, 재앙 그리고 자연재해-우리를 향한 하나님 말씀> 서문에, “코로나 펜데믹 이후 역사는 BC(COVID-19 이전)와 AD(COVID-19 이후)로 이야기할 것”이라며, “다시는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하였다.2) 국가 봉쇄부터 한 개인이 지켜보는 가족 하나 없이 숨져야 하는 비극이 지구 전역에서 벌어지고 있다. 코로나19와 함께 자연재해는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하다. 인류는 기후재앙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대형산불, 대홍수, 대지진, 메뚜기 떼까지, 삼재三災, 사재, 오재로 고통 받고 있다.3)
이러한 일상의 영역만이 아니라. 영적 데미지 또한 이루 말할 수 없다.4) 현장예배가 온라인예배 등으로 전환되면서, 헌금은 크게 줄고, 교회 운영은 물론 선교등 여러 사역이 크게 약화되었다. 비대면예배 대면예배라는 행정 용어들을 성경적이지도 않고, 신학적으로 검증도 없이 교회가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방역 지침에 협조한다는 명분 아래 당국으로부터 사실상 예배를 통제 받고 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야 교회의 본질적인 기능을 찾을 수 있을지, 아니면 다시 찾을 수 없을지 심각한 우려를 갖는다. 교회 안에서도 뚜렷한 해결책을 찾고 있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때에 세속주의자들은 신자들이 불신자와 같은 고통을 겪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을 이유가 없다고 공격한다. 성도는 코로나 팬데믹을 하나님의 무관심으로 해석하지 말아야 한다. 믿음의 선조들은 인간으로 알 수 없을 때 하나님을 기다렸다(참고/히1:1-2).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자연재해가 그들의 믿지 않는 또 다른 이유일 뿐이다. 그러나 말씀과 약속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성도들에게는 과거 현재 미래의 맹공격으로부터 그 믿음으로 살아남아야 한다.5) 코로나19에서 하나님은 침묵하지 않으신다. 우리의 반응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고 루처는 역설한다.6)
코로나19에서 루처가 통찰한 진언을 다섯 가지 키워드로 본론에서 축약했다. 회개-코로나19는 참극이지만, 죽음을 상기하게 하고, 하나님을 찾아야 하는 회개의 시간임에 대해. 심판-코로나19는 죄의 결과인 죽음 가운데 하나로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하고, 심판받지 말아야 함에 대해. 종말:코로나19는 장차 맞게 될 대환난의 예고편으로, 종말의 최대 징조인 적그리스도와 세계정부에 대해. 감사:코로나19에서 보호하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아니라, 지난 시간 평온함에 드리지 못한 감사에 대해. 믿음:코로나19는 이해할 수 없을 때에라도 믿음, 마지막 때 주님이 찾으시는 믿음에 대해. 그리고 결론은 본론의 논지에서 우리가 찾아야 할 것들을 정리했다. 회의론자들의 공격에 대한 반론을 별첨에 기재하였다. 루처와 동일한 필자의 견해는 필자의 저서에서 발췌하여 각 주에 옮겼다. 본고는 코로나 팬데믹 시대 영적 혼란에 빠진 한국교회에 길잡이가 될 것으로 믿는다.
본 론
1. 반드시 배워야 할 교훈 - 회개
들의 백합화를 보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처럼 자연을 통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봄과 함께 자연이 우리에게 미치는 공포로부터도 배워야 한다(참고/마6:28;시42:7;사29:6;겔14:21). 하나님이 대유행 전염병과 자연재해와 같은 참화를 보내시는지 이유는 그분만이 아신다. 설사 하나님이 질병과 재난을 보내신 이유를 안다고 할지라도, 상실과 슬픔의 아픔을 완전히 없앨 수 없음을 솔직하게 인정하게 된다. 예수님은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죽은 열여덟 사람에 대하여, 재난이 악인과 의인을 분리하지 않으신다는 점을 지적하셨다(눅13:4-5). 즉 우리들에게 그 사건으로 죽은 자들이 의롭거나 사악한 두 가지로 구분할 권리가 없다는 것이다. 지금 이 세상에는 믿지 않는 자가 신자와 함께 축복을 받는 것처럼, 의인도 불신자와 함께 희생자가 되는 경우가 많다. 비극은 사람들을 두 개의 진영으로 나눈다. 구원받은 자와 저주받은 자들이 아니라, 죽은 자와 산자. 종교적이고 비종교적인 사람이 아니다. 의인과 악인이 함께 죽는다.7)
코로나19와 같이 예상치 못한 재난은 야고보의 말을 확인시켜 준다. “내일 일을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4:14). 자연재해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은 그날 아침에 깨어나지 않았다. “이번이 지구의 마지막 날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종종 그들에게 일어난 일이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자연자해와 전 세계의 전염병은 우리에게도 죽음이 곧 다가올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8)
전쟁이 죽음을 증가시키지 않는다고 지적한 루이스C. S. Lewis1898-1963가 옳았다. 잔인하게 들리겠지만, 암, 사고, 자연재해, 코로나19로 우리에게 주어진 죽음은 예정된 신성한 약속이다. 비극은 우리가 운명을 통제하고 있다는 과신을 없앤다. 자연재해는 사람들에게 지구상의 생명체가 짧고 불확실하다는 결정적인 증거를 제공한다. 코로나19는 큰 비극이다. 그러나 사람이 사물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비극이 필요하다. 그것은 현재와 영원, 이 세상과 다음 세상을 나눈다. 그리고 우리의 가치를 더욱 명확히 하기 위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마16:26). 코로나19는 우리를 현실로 몰아넣었다. 죽음이 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조차도 지역 병원의 응급실만큼 가까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주말까지 죽으리라는 것을 안다면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인가? 가장 중요한 것은 오늘이 구원의 나이다. 내일은 너무 늦을 수 있다.9)
코로나19는 사람을 존중하지 않았다.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죽었고, 높고 힘있는 사람들은 낮은 사람들과 함께 고통을 받았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마16:26). 부자들은 대유행을 견딜 수 있는 더 나은 위치에 있지만, 죽음은 그들도 덮칠 것이다. 돈은 유용한 것이다. 그러나 요점은 돈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위험을 강조하는 것이다. 일상에 너무나도 필요한 돈을 무시하지 않는다. 그 위험을 강조한다. 결국 돈도 생명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을 코로나19가 보여주는 것이다. 죽음에서는 동등하다. 돈은 하나님처럼 약속하므로 기만적이다. “나는 병과 건강에서 당신과 함께 할 것이다. 주식시장이 상승하고 하락할 때도 함께하겠다.”10)
페이스북의 공동 설립자 겸 CEO인 마크 저커버그Mark Zuckerberg,1984-는 돈이 결국 모든 질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와 그의 아내 프리실라 찬Priscilla Chan은 세기말까지 모든 질병을 소탕한다는 목표로 2015년에 주도권을 잡았다. 그와 그의 아내는 앞으로 10년 동안 페이스북 주식의 99%와 30억 달러3조 6천억원를 기부할 계획이다.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효과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저커버그의 돈이 아무리 병을 막는 데 성공해도 성공해도 죽음을 없앨 수는 없다.11)
코로나19 때문에 우리 경제의 많은 부분이 붕괴 되면서, 영세상인들은 감당할 수 없는 채무를 갖게 되었다. “13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14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4:13-14) 내일이 단순히 과거의 연속일 것이라고 확신한 많은 사람은 그들의 미래가 심각한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 경제적인 큰 손실을 상쇄할 수 없다면, 기억할 것이 있다. 하나님은 당신을 버리지 않으셨는 것이다.12)
하나님은 다음 행동에 필요한 지혜를 주실 수 있다. “5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6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약1:5-6). 지혜를 찾아라, 하나님께 물어봐라, 하나님이 당신을 인도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9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10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고 하셨다(딤전6:9-10).13)
자연재해로 모든 것을 잃었어도 추모되는 것은 재산이 아니라, 생명임을 알게 한다. 즉, 구원을 준비해야 한다. 죽음 다음에 기억되는 것은 생명이다. 자연재해는 우리들에게 우선순위가 생명인 것을 알게 한다. 코로나 19는 우리들에게 영원에 투자하라는 경종으로 보아야 한다. 우리는 오늘 여기 있지만, 내일은 떠날 수 있다. 대유행은 우리들의 신앙의 근간을 보게 하고 있다. 대재앙에서 어떤 사람들은 마음을 강퍅하게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절망적으로 하나님께로 향한다. 임박한 죽음의 현실은 우리 마음을 영원에 집중시키는 길을 제시한다. 코로나19 대유행은 돈이 우리를 구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했다. 청구서를 지불하려면 돈이 필요하지만, 약속한 만큼의 안전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예수가 ‘진정한 부’라고 부르는 것만이 앞으로 다가올 삶에서 우리를 맞이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이 핍박을 받을 때 멈추게 해달라는 기도보다 핍박에 충실하게 해달라고 기도한 것과 같이 전염병에서 해방되기보다 전염병 가운데 좋은 증인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야 한다(참고/고후11:24-30).14)
하나님의 손에 떨어져 우리의 육체적 고통을 끝내도록 요청해야 하는 권리는 무엇인가? 질병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우리의 욕망은 무엇을 위해서인가? “26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27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엡5:26-27). 영혼의 질병은 신체의 질병보다 훨씬 더 파괴적이다. 지금 회개와 믿음으로 기도하며. 절하자. 마치 바울이 독사를 볼 속으로 흔들어 던진 것처럼, 우리는 위를 괴롭히는 죄에서 빨리 분리되기를 바란다(참고/행28:5).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할 것이다.”15)
2. 심판 아래 있는 세상-심판
코로나19가 하나님의 심판인가? 그렇다 하나님의 심판이다. 죽음 자체가 하나님의 심판이기 때문이다. 아담 범죄 이후 인간에게는 죽음이 왕노릇 하였다(창2:17;롬5:12). 죽음을 피할 인간은 아무도 없다. 코로나19가 인류에게 공포로 다가오고 있지만, 코로나19역시 죽음으로 가는 한 가지이다. 죽음은 어디에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죽음의 과정을 증가시키는 코로나19와 같은 전염병과 자연재해 대형재난 그리고 암과 같은 질병에서도 죽음을 본다. 코로나19는 우리에게 죽음을 알게 한다. 죽음을 모르고 사는 자들에게 죽음을 보게 한다. 한국에서는 하루에 약 820여 명, 연간 30여 만 명이 사망한다. 전 세계적으로는 하루에 15만 명, 연간 약 5천 5백 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한다. 자연재해는 동시 사망과 막대한 재산피해 등 규모일 때만 우리의 관심을 끈다. 그것들은 항상 극적으로 가속된다. 대형재난은 죽음의 과정을 증가시킨다. 어떤 사람에게는 굶주림, 암, 심장병으로 죽어가고 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코로나19이다. 죽음은 어디에나 있다.16)
예수믿고 구원 받았다. 그러나 육체의 죽음 신자에게도 찾아온다. 그 육체가 부활하기 전까지, 사람의 몸은 죽음을 맞는다. 그러므로 죽음은 신자에게도 매일 일어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코로나19로 죽을 사람의 수를 증가시키는 것은 아니다. 재난 중 어떤 것도 죽을 사람의 수를 증가기키지 않는다. 결국 어린이, 청소년, 성인 모두 죽을 것이다. 죽음에 대한 통계는 냉정하다. 광범위한 재난은 우리가 정상적인 수명을 누리지 못하고 종종 허다한 사람들이 죽는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재난을 들으면 우리는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빨리 죽을 것을 두려워한다. 기독교인들은 또한 다른 심판의 대상이 된다. 베드로는 기독교인들이 박해의 시기에 심판을 받는다고 가르쳤다. 하나님이 그들을 시험과 훈련을 하신다. 이것 또한 심판의 한 형태이다. “17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은 어떠하며 18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에 서리요”(벧전4:17-18).17)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에게 심판을 보내실 때, 그것은 그들을 벌하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경계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는 그리스도의 심판대에 참석할 것이다(고후5:10). 그 경우, 우리는 우리가 살았던 방식에 관해 설명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상을 받거나 거절당할 것이다. 하지만 감사하게도, 우리는 영원한 심판을 면할 것이다. 사실 예수님은 놀라운 주장을 하셨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요8:51)18)
코로나19는 죽음을 앞두고 죽음을 보지 못하는 인간들에게 대한 경종이다. 빨리 죽음을 준비하라는 것이다. 구원을 받으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죽음이 오게 된 죄를 보고, 회개가 절실히 필요함을 깨닫게 하시고, 우리에게 관심을 갖고 계심을 보여 준다. 자연재해는 모든 육체적 죽음과 파괴가 하나님의 심판이 분명하므로 심판이다. 신자의 죽음은 일시적인 심판이다. 아담의 범죄이후 찾아온 사망을 맞는 것이다. 그러나 불신자들에게는 의식적인 영원한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 한 편, 이생에서 우리의 육체적 죽음은 우리 모두에게 잠깐의 시간이 영원과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히9:27;롬8:18). 우리의 시선을 하늘로 향하라고 경고하고 있다(참고/빌3:14;골3:1-2;약1:17).19)
“하나님이 우리에게 대해 화가 나셨습니까?”라는 질문에 바울은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라고 답한다(롬1:18). 이 구절의 원문에서 “하나님이 그들을 포기하셨다”라는 불길한 말이 세 번 나타난다. 죄 특히 동성애 행위에 대한 설명이다(롬1:24,26,28). 전 세계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르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대해 화를 내시지 않으시더라도 죄인들에게 화를 내신다. 반면에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자비에 응답하는 사람들에게 은혜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롬5:9)20)
하나님은 화가 나셨지만 은혜로우신 분이다. 코로나19, 역병, 지진, 쓰나미, 토네이도, 기근은 모두 심판이며 모두 똑같은 말을 하고 있다. 우리는 교회로서, 그리고 국가로서 개인적으로 큰 죄를 지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회개가 절실히 필요함을 깨닫게 해주신다. 그분은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 인간은 좋은 일도 할 수 있지만, 나쁜 일도 할 수 있다. 자연도 마찬가지 방식으로 행동한다. 아름답고 화창한 날은 우리 몸을 따듯하게 하고 우리의 영혼을 기쁘게 하지만, 너무 강렬한 태양은 사막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인간과 자연의 유사점은 무엇인가? 아담이 불순종했을 때, 저주를 받았다. 또한 하나님은 자연을 저주 아래 두셨다(창3:17-18). 타락한 사람들은 타락한 환경에서 살 운명이었다. 그래서 자연은 재정렬 되었고 인간처럼 파괴되었다.21)
인간의 죄악처럼 자연도 끔찍할 수 있다. 그것은 인간의 죄가 얼마나 끔찍한지를 시각적으로 보여준다.22) 자연재해 코로나19는 인간의 죄가 만들어 낸 그림이라고 우리 자신에게 말해야 한다. 자연은 인간이 타락한 후 저주를 받았고, 그것은 우리가 구원받은 후에야 받을 수 있다. 자연은 구원을 갈망하지만, 우리를 기다려야 한다. 우리가 먼저 구원을 받아야 한다. 다음 말씀을 주의 깊게 읽어보자.23)
“18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19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20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21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22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롬8:18-22)
코로나19는 우리에게 이생에서 잘될 것이라는 잘못된 희망을 주지 않는다. 코로나19 위기 동안 실직한 사람들이 직장을 되찾거나 바이러스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성경에서 희망은 항상 시대가 아니라 영원의 관점에서 제시된다.24)
바울의 요지를 놓치지 마라, 인간의 죄를 지었을 때, 인류는 저주를 받았고, 물리적 우주도 그 뒤를 따랐다. 이제 물리적 피조물이 우리가 구원 받기를 “간절히 기대한다”라고 말한다.25) 그래야 피조물 또한 회복되어 원래의 깨끗한 상태로 회복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우리는 부활하고 구원받을 것이며, 새로운 천지의 성립과 함께 자연에 드리워진 죄의 저주는 영원히 풀릴 것이다.26) 그때까지 하나님의 백성도 죽음의 심판에 참여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역사를 마무리하기 전에 이 지구에 더 많은 심판이 내려질 것이다. 우리는 끝을 보지 못했다. 코로나 19가 우리의 관심을 끌었다. 하나님은 하늘로부터 우리에게 경고하신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아 내가 이와 같이 네게 행하리라 내가 이것을 네게 행하리니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만나기를 준비하라”(암4:12)27)
3. 다가오는 최악의 상황 - 종말
팬데믹, 재앙, 자연재해는 앞으로 일어날 격변과 고통의 예고편이다.28) 코로나19는 분수령의 시작이다. 눈보라가 아니라 빙하시대의 시작이다. 예고편을 보고도 깨닫지 못한다면 불행한 것이다. 요한계시록을 읽고, 창조가 시작된 이래 지구에서 이미 얼마나 많은 심판이 일어나고 있는지 보았다.29) 앞으로의 고난에는 전염병, 지진, 기근, 강력한 바람, 그리고 언급하기에는 너무 많은 재앙이 있을 것이다.30 자연의 격변은 하나님의 심판을 입증하고, 지옥의 고통을 예상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심이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롬11:22)31)
“곳곳에 큰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부터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눅21:11). 주님의 예언이다. 코로나19가 이 말씀에 예언된 전염병일까? 아니, 그렇게 믿지 않지만, 그것은 앞으로 다가올 훨씬 나쁜 전염병의 예고편이다.32) 지금의 코로나19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사실상 이것은 환란의 시작에 불과하다.33) 예수님은 세상 마지막 때 ‘징조’를 묻는 제자들에게 “난리와 소요의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하지 말라 이 일이 먼저 있어야 하되 끝은 곧 되지 아니하리라”고 하시면서, ‘곳곳에 큰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이 있’을 것이고, ‘이 모든 일 전에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하며 회당과 옥에 넘겨 주며 임금들과 집권자들 앞에 끌어’갈 것이라고 하였다(눅21:7,9,11,12). 지금 한국교회는 당국의 방역지침으로 사실상 예배가 통제되고 있다. 주님의 말씀 그대로이다. 그러나 이것은 환난의 시작에 불과하다고 말씀하신 것이다(참고/마24:8).
이사야 선지자는 “16여호와여 그들이 환난 중에 주를 앙모하였사오며 주의 징벌이 그들에게 임할 때에 그들이 간절히 주께 기도하였나이다 17여호와여 잉태한 여인이 산기가 임박하여 산고를 겪으며 부르짖음 같이 우리가 주 앞에서 그와 같으니이다”고 기도 하였다(사26:16-17). 지금 우리가 당하는 재난은 산고 고통과 비교할 수 있다. 임박한 종말을 알리고 있는 것이다. 지금 이 말씀처럼 해산의 고통이다. 이제 곧 마지막 심판이 시작되어, 온 땅의 심판자 앞에 서 있는 수많은 사람으로 절정에 이르게 될 것이다. 앞으로 역병, 기근, 살인 들로 가장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죽어가는 많은 사람을 볼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 저주 받은 지구에 마련된 것이다.
여기 예고편을 따라올 실제 영화에 대한 무서운 묘사가 있다. “12내가 보니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검은 털로 짠 상복 같이 검어지고 달은 온통 피 같이 되며 13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설익은 열매가 떨어지는 것 같이 땅에 떨어지며 14하늘은 두루마리가 말리는 것 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겨지매 15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모든 종과 자유인이 굴과 산들의 바위 틈에 숨어 16산들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 17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계6:12-17). 다가올 다른 재앙과 심판에 대한 설명은 여기에 나열하기에 너무 많다.34)
“20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손으로 행한 일을 회개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여러 귀신과 또는 보거나 듣거나 다니거나 하지 못하는 금, 은, 동과 목석의 우상에게 절하고 21또 그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둑질을 회개하지 아니하더라”(계9:20-21). 이 글을 읽는 동안 마음에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 있다면, 여기서 멈추고 민감하고 순종적인 마음을 창조해달라고 하나님께 구하라. 성경의 엄연한 진리는 우리를 쫓아내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받아들이도록 우리를 하나님 가까이 데려가는 것이다.35)
성경은 우리가 적그리스도라고 부르는 세계적인 통치자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는 모든 세상을 먹일 것이며 자원이 더 균등하게 분배될 것이라는 공영을 약속할 것이다. 그는 평화를 강령으로 올 것이다.36) 그러나 때가 되면 그는 전 세계적인 숭배를 고집할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의 승인이 없으면 굶주릴 것이다.37) 요한계시록 13장 16-17절에서 우리는 짐승이라고 불리는 이 사악한 독재자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16그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인이나 종들에게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17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계13:16-17)38)지난 몇 해 동안, 이 마크는 일종의 문신이나, 지을 수 없는 표식으로 해석됐다. 하지만 현재 시나리오는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확실히 보여주는 그림일 수 있다.
우리는 현재 위기의 장기적인 영향을 기다려야 한다. 사람들은 예측 가능한 경제의 미래에 대한 신뢰를 잃었다. 국가의 역할이 커지게 되었다. 미국은 연방제도이사회에서 수조 달러를 만들도록 의결했다. 즉 이 돈은 은행에 유동성을 범람시키기 위해 전자적으로 만들어졌다.39) 그런 구제 금융에 사람들은 정부의 의존과 자격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감각을 만들어 냈다. 사람들은 공돈을 기대할 것이고 정부에 의존하게 된다.40) 코로나19 대유행은 광범위한 기술적 진보와 함께 감시와 통제가 강화된 글로벌 재설정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세계정부의 전초이다.
그렇다고 너무 성급하게 종말이 올것이라고 예측해서는 안된다. 어떻게 끝날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과 하늘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려주겠다고 스스로 임명한 ‘예언자’가 일어났다. 한 사람은 “코로나바이러스가 전 세계적으로 중단될 것”이라고 선언했고, “불법”이라고 선언했다.41) 교회 회원 15,000명과 유튜브 구독자 160만 명 이상을 보유한 또 다른 거짓 예언자는 두 가지 예측을 했다. 먼저 2월 29일에 그는 “비가 전염병 코로나바이러스를 없배 버릴 것”이라고 말했다.42) 그리고 3월 1일 그는 코로나19가 2020년 3월 27일 끝날 것을 예상했다.43) 2월 28일에 또 다른 사람이 비슷한 주장을 했다. “짧은 시간 내에 극심한 위협이 스쳐 지나간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44) 다음날 첫 미국인 바이러스로 사망했다.45)
2005년 뉴욕타임스는 『최후이 심판』The Latest World if the Last이라는 기사를 실었는데, 이 기사에서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빨리 세계의 종말에 대해 결론을 내리는지 몇 가지 예를 제시했다.46) 우리는 이스라엘군이 1967년 예루살렘 구도시를 점령했을 때, 그리고 나중에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가 야세르 아라파트와 평화협정을 체결했을 때 종말이 임박했다고 들었다. 성경적인 종말론이 정립되지 않은데서 오는 것이다. 이런 일이 언제 일어날지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종말이 오리라는 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더 나쁜 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 최악의 상황은 아직 오지 않았다.47)
4. 이미 준비된 피난처- 감사
코로나 팬데믹은 인간의 생명이 짧고,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승리가 확실하다는 것을 생생하게 상기시킨다. 예수님은 자신을 믿는 모든 사람을 위해 최후의 심판을 받으셨다. 우리가 그분을 영접할 때 우리는 의인이 된다. 예수님은 구주셨기 때문에 우리의 영원을 준비하실 자격이 있다(요3:36;히12:28-29). 인간은 자신의 죄를 자복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을 필요성을 깨달아야 할 시간이다. 지금이 은혜 받을 만한 때요 구원의 날이다(고후6:2). 아무도 구원해 줄 수 없는 대유행에서 준비된 피난처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 그때 우리는 지금의 현실에서도 감사할 수 있다.
어떤 재난이든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모든 축복에 대해 상기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를 깊고 지속적인 감사로 이끌 것이다. 왜 그렇게 많은 사람이 자연재해로 죽느냐, 전염병으로 죽느냐고 묻기 전에 우리는 다른 질문을 던져야 한다. “왜 그렇게 많은 사람이, 우리를 포함해서 아직도 살아있는 것일까?”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하나님께 화가 나서 이 지구에 주기적으로 아름다운 날씨와 자연을 주는 수많은 이점에 감사하지 않는가?48)
우리가 매일 햇빛, 음식, 건강을 가지고 사는 것은, 우리가 받을 자격이 없는 선물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의인과 불의한 사람들 모두를 위해 많은 축복을 베푸신다. “44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5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마5:44-45). 그래서 태양은 우리를 따듯하게 해주고, 비는 우리를 축복하기 위해 내리고, 별들은 우리에게 하나님은 천국에 계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받을 자격이 없는 자비를 주시기 위해, 지구상에 계신다는 것을 상기시켜주기 위해 빛난다. 우리는 지구가 견고하고, 토네이도가 사라지고, 홍수가 없는 때를 감사해야 한다. 예레미야의 슬픔을 묘사한 애가서는 이렇게 쓰고 있다. “22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23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애가3:22-23)49)
생명은 선물이며 하나님은 그것을 주시고 되돌려 받을 권리가 있다. 재난이 일어났을 때 하나님이 어디에 계셨는지 묻는 사람들은 수년간의 평화와 평온함을 경험한 것에 대해 감사하지 않고 그분을 경배하고 존경하기를 거부한다. 그들은 좋을 때는 하나님을 무시하면서 나쁠 때가 오면 도움을 받을 베풀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건강할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지만, 그들이 아플 때는 그들을 고쳐 주시는 하나님이 되어야 한다. 그들이 부유할 때 무시했던 하나님은 임박한 가난에서 그들을 구해 주어야 한다. 땅이 견고할 때 예배를 거부당한 하나님은 땅이 흔들리기 시작하면 그들을 구해 주셔야 한다.50)
하나님이 우리에게 빚진 것이 없다는 것을 자유롭게 인정하자. 우리가 하나님께 신경 쓰지 말라고 비난하기 전에, 그분의 보살핌이 분명할 때 감사하자. 우리는 잠시 멈추고 우리가 부당한 축복에 둘러싸여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침묵 속에서도 그분은 우리를 축복하신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우리의 유일한 희망은 그리스도라고 말한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1:21). 우리의 행위와 말씀으로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자.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 세상은 그 어느 때보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증인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분의 은혜로 우리는 의심의 시기에도 불구하고 계속 믿을 것이다.51)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상상의 하나님이 아니다. 성경에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 앞에 겸손하자, 우리의 관심을 이 세상에서 다가올 세상으로 돌린 코로나19에 감사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최후의 심판을 피할 수 있다는 점에 감사드린다.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가 탈출할 방법을 준비했다는 것에 영원히 감사해야 한다.52)
5. 주님, 저희의 믿음을 도우소서 – 믿음
이사야 선지자는 “8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9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라고 하였다(사55:8-9). 우리는 하나님의 길이의 신비와 경외심을 가져야 하나. 그런 목적이 존재한다고 믿기 위해 전능하신 분의 숨겨진 목적을 이해할 필요가 없다는 것에 감사드린다. 우리가 이해할 때만 믿는다면 우리의 믿음은 작아진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때조차도 그런 믿음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53)
언제가는 우리는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13:12). 미래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 보였던 것들에 의미를 부여할 것이다. 영원은 현세에 일어난 일을 해석할 것이다. 그러는 동안 우리는 설명이 아니라 약속Covenant:말씀에 따라 살아야 한다.54)
바울의 고백과 같이 우리를 압도하는 대유행병, 재앙, 자연재해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분리할 수 없다(롬8:38-39). 분명히, 하나님은 우리를 이런 비극에서 구해 주지 않는 대신, 그분은 설명 없는 시련을 겪을 수 있는 은혜를 우리에게 주시기로 하셨다. 우리는 재난으로부터의 보호를 확정받지 못하더라도, 우리가 그런 심판를 거치는 내내 그분의 임재를 약속하셨다. 우리의 구원을 잃는 것이 아니다. 존 파이퍼John Piper,1946-는 코로나19를 ‘쓰라린 섭리’라고 부르지만, 신자는 그 안에서 달콤함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55)
“하나님은 코로나 바이러스를 막을 수 있는 주권을 가지고 계신다. 그렇지만 그 주권을 행사하지 않으시더라도, 그 안에서 영혼을 지탱시키는 바로 그 동일한 주권이 함께하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은 변함이 없으시다.). 그리고 지탱할 뿐만 아니라, 쓰라리고 달콤한 모든 것이 우리의 선을 위해 함께 작용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에게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의 선이다”(롬8:28-30).56)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지상의 선한 아버지처럼 우리를 돌보지 않으시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의 요청에 응답하고 이 타락한 세상의 재앙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실 것일까? 대답은 우리 아버지는 지상의 아버지가 우리를 사랑할 수 있는 것보다 더욱 우리를 사랑하신다. 그러나 그분은 다른 우선순위를 가지고 계신다. 우리는 건강도 소중하고 다른 소중한것도 많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의 믿음을 더욱 소중히 여기신다. 다른 것은 잃으면 다시 얻을 수 있지만, 믿음을 잃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하신 것이다(눅18:8).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음식을 제공하는 것을 기뻐하신다. 그렇다 그분은 우리가 가장 필요로 할 때 그분이 부재하신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분을 신뢰할 때 기뻐하신다.57)
매튜 핸리Matthew Henry,1662-1714는 “신은 종종 어둠 속에 자시을 숨기지만, 결코 멀리 계시지 않는다.” 가뭄, 질병, 기아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아이들이 고통을 받지만, 아직 이 세상 역사의 마지막 장은 아니다. 회의론자들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우리의 구세주를 만난 사람들은 그분이 알고 계시고 돌보고 계신 것을 확신한다. 우린 또한 그분이 쓰시는 책의 마지막장들이 언제가는 이전에 얼룩졌던 단락의 의미를 명확히 드러낼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므로 재림 신앙이 필요하고 종말 계시인 계시록을 통해 무장해야 한다.58)
우리는 좌절, 개인적인 손실, 응답 없는 기도를 견딜 수 있는 희망이 필요하다. 고통이 끝나지 않고 비록 장래가 점점 어두워질 때도 견딜 수 있는 믿음이 필요하다. “하나님을 믿는다”라는 것이 더 나아질 것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기복신앙은 있어야 하나 기복주의는 타파해야 한다. 우리의 믿음의 기초는 무엇일까? 믿음은 성경이 밝힌 것처럼, “모든 것이 잘되기를 바라지만, 나는 확신이 없다”라는 것이 아니다. 성경적 믿음은 “자신감 넘치는 기대”다. 그것은 우리가 의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59)
“18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19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 가나니 20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히6:18-20)
세례 요한은 옥에 있는 동안 예수가 예언된 구원자인가에 대해 의구심을 가졌다. 헤롯의 죄악 된 결혼을 공개적으로 비판한 것으로 영어의 몸이 되고, 참수까지 당할 수 있는 상황에 대해서도, 얼마나 불공평한지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을 것이다. 아주 잠시지만 회의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제자들을 보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라고 물었다(마11:3).이에 예수님은 이사야에 예언된 메시아의 사역을 열거하신 후,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고 하셨다(마11:6.참/사61:1;마11:5)60)
코로나 팬데믹으로 고난을 겪은 후에 다시는 하나님을 믿지 않겠다고 말하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나를 불의와 학대로부터 지켜 주지 않으셨지만, 또는 코로나19 때문에 하나님의 손길을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뜻을 믿어야 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의 신비 목적 앞에서 우리가 경외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복이 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믿음을 지속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삼는 사람은 복이 있다.61)
정리
회개:코로나19는 죽음이 우리에게도 다가 올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비극은 우리가 운명을 통제하고 있다는 과신을 없앤다, 죽음이 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아주 가깝다는 것을 인식하게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오늘이 구원의 날이다. 내일은 너무 늦을 수 있다. 일상에 너무나도 필요한 돈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 위험을 강조한다. 결국 돈도 생명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을 코로나19가 보여주는 것이다. 내일이 단순히 과거의 연속일 것이라고 확신한 많은 사람은 그들의 미래가 심각한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기억할 것이 있다. 하나님은 버리지 않으셨는 것이다.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 자연재해는 우선순위가 생명인 것을 알게 한다. 코로나 팬데믹은 영원에 투자하라는 경종이다. 우리의 신앙의 근간인 죽음의 문제 해결, 믿음, 구원을 보게 한다. 우리의 기도는 전염병에서 해방되기보다 전염병 가운데 좋은 증인이 되기를 구해야 한다. 어떤 증거를 해야 하는가? 지금 죄에서 벗어나라고 전해야 한다. 영혼의 질병은 신체의 질병보다 훨씬 더 파괴적이다. 지금 회개와 믿음으로 간구하며, 전파해야 한다.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할 것이다.
심판:코로나19는 죽음 가운데 하나이다. 죽음은 죄의 결과이다. 죽음은 심판이다. 코로나19는 하나님의 심판임이 분명하다. 그러면 코로나19로 죽은 성도가 심판받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성도는 영원한 나라에 입성하게 된다. 성도에게 벌하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성도에게 경계하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 앞에 설 날이 가까이 옴을 알게 하는 것이다. 육체적 죽음은 우리 모두에게 잠깐의 시간이 영원과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각성하게 한다. 우리의 시선을 하늘로 향하라고 경고하고 있다. 코로나 19는 오히려 하나님이 우리에게 관심을 갖고 계심을 보여 주시는 것이다. 피조물도 고대하고 있다. 인간이 구원받고 자신들도 회복되기를 바라고 있다. 이것은 다시 오실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진다. 코로나19는 재림의 신앙을 역설하고 있다. 하나님의 손에서 떠나 신앙을 잃고 방역을 얻으면 무엇할 수 있겠는가? 코로나19는 십자가에서 최후의 심판을 받으신 예수를 영접하여, 심판받지 말고,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할 것을 전하고 있다.
종말:코로나19는 앞으로 일어날 고통의 예고편이다. 지금의 환난은 산고의 고통이다. 이제 곧 마지막 심판이 시작되어, 각종 전염병과 재난들로 가장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죽어가는 많은 사람을 볼 것이다. 또한 큰 정부를 만들고, 거론되고 있는 마크짐승표는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확실히 보여주는 그림일 수 있다. 코로나 팬데믹은 광범위한 기술적 진보와 함께 감시와 통제가 강화된 글로벌 재설정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세계정부의 등장의 전초이다. 이 일을 주도적으로 행할 자에 대해서, 성경은 적그리스도라고 지칭될 세계적인 통치자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는 모든 세상을 먹일 것이며 자원이 더 균등하게 분배될 것이라는 공영을 약속할 것이다. 그는 평화를 강령으로 올 것이다. 그렇다고 성급하게 종말을 예측해서는 안된다. 잘못된 종말론으로 물의를 빚고 있는 자들이 교회 안에도 있다. 성경적인 종말론이 정립되지 않은데서 오는 것이다. 지금은 종말로가는 과정이지, 종말이 아니다. 종말의 최대 징조는 적그리스도의 등장이다. 완악한 자들은 종말에 멸망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는다. 종말이 언제 일어날지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종말이 오리라는 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더 나쁜 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 최악의 상황은 아직 오지 않았다.
감사:코로나19에서 아무도 보호해 줄 수 없다. 죄를 자복하고 예수님을 통해 구원받을 필요성을 깨달아야 할 시간이다. 이미 준비된 피난처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 그때 우리는 이 현실에서도 감사할 수 있다. 어떤 재난이든 그 이전에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모든 축복에 대해 되돌아보게 한다. 그렇다면 왜 많은 사람이 자연재해로 죽느냐 묻기 전에, 우리를 포함해서 그렇게 많은 사람이 아직도 살아있는 것이냐고 하나님의 뜻을 알고 감사해야 한다. 햇빛, 음식, 건강 등 받을 자격이 없는데도, 의인은 물론 악인까지도, 하나님의 자비를 받고 있다. 재난이 일어났을 때 하나님이 어디에 계셨는지 묻는 사람들은 수년간의 평화와 평온함을 경험한 것에 대해 감사하지 않고 그분을 경배하고 존경하기를 거부한다. 우리는 그분의 은혜로 지금의 상황에서도 감사해야 한다. 우리의 관심을 이 세상에서 다가올 세상으로 돌린 코로나19에 감사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최후의 심판을 피할 수 있다는 것에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
믿음:코로나19에서 하나님의 길이의 신비와 경외심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을 때에라도 믿음, 그 믿음은 하나님께 영광된다. 영원은 현세에 일어난 일을 해석할 것이다. 그러는 동안 우리는 설명이 아니라 약속(말씀)에 따라 살아야 한다. 하나님이 코로나 팬데믹에서 보호해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구원을 잃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건강도 소중하고 다른 소중한 것도 많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더욱 소중히 여기신다. 다른 것은 잃으면 다시 얻을 수 있지만, 믿음을 잃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장 필요로 할 때 부재하신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을 여전히 신뢰할 때 기뻐하신다. 이것이 이 마지막 때의 믿음이다. 우리는 좌절, 개인적인 손실, 응답 없는 기도를 견딜 수 있는 희망이 필요하다. 고통이 끝나지 않고 비록 장래가 점점 어두워질 때도 견딜 수 있는 믿음이 필요하다. 주님은 실족하지 않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였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고난을 겪은 후에 다시는 하나님을 믿지 않겠다고 말하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믿음을 지속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결론
루처는 대 재앙과 자연재해 전염병에 대해 가장 성경적인 답을 하고 있다. 죽음을 앞두고 죽음을 보지 못하는 인간들을 깨우는 경종이다. 우리는 죽음이 곧 다가올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인간은 죽음의 현실에서 미래의 소망을 바라보아야 한다. 예수님은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서 최후 심판을 받으셨다. 인간이 지옥의 형벌을 받지 않도록 하신 것이다. 대유행 앞에서 가장 큰 비극을 당하셨던 예수님을 영접해야 한다. 죽은 자는 회개할 수 없다. 살아있을 때 회개해야 함을 강조한다. 한국교회는 대각성을 찾아야 한다.
코로나19로 닥친 예배의 대체는 신앙을 세속화시키고 있다. 루처는 진언한다. 어떤 재난이나 사건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분리할 수 없다. 재난이 가져오는 가슴 아픈 일에도 하나님이 선하신 뜻과 목적을 갖고 계신다고 확신해야 한다. 고통이 끝나던 그렇지 않든, 기도의 응답에 좌우되지 않는 소망이 필요하다. 어느 순간에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사람이 가장 큰 복이라고 역설한다. 하나님의 손에서 떠난 질병 치료는 의미가 없다. 코로나 팬데믹이 성도의 영혼을 죽일 수 없다. 구원 받은자의 영혼과 하나님께 예배는 하나이다. 세상과 타협이 예배의 위기를 맞고 있다. 우리는 겸허히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한국교회는 거룩한 예배를 찾아야 한다.
코로나 팬데믹은 광범위한 기술적 진보와 감시와 통제가 강화된 글로벌 재설정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세계정부에 대한 설명이다. 당국이 일상을 추적하고, 예배 인원을 통제하고 있다. 무관하게만 볼 수 없는 사안이다. 적그리스도, 마크짐승표도 언급하며 현재 등장 과정에 있다고 부연한다. 종말의 징후들을 보고 임박한 최후 심판 경성을 당부하고 있다. 대유행은 우리 인생이 짧고 그리스도의 재림이 확실하다는 것을 생생하게 경고한다. 다시 오실 주님만을 소망해야 함을 확실하게 한다. 한국교회는 재림의 신앙을 찾아야 한다.
무실론자들의 주장처럼 대유행이 우연한 자연의 힘의 희생자라고 믿을 때보다, 하나님의 손에서 비극이 왔다는 것을 안다면 훨씬 더 잘 받아들일 수 있다고 강조한다. 코로나19가 하나님 손에서 벗어났다면, 우리가 하나님 손에서 벗어난 것이다. 바이러스에 죽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손에 삶과 죽음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그를 믿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재난을 가져오는 가슴 아픈 일에도 선하시고 모든 면에서 목적을 가지고 계신다고 믿어야 한다. 이 고통속에서도 모든 것은 하나님이 책임 진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마지막때 살아 남을 수 있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한국교회는 주님이 요구하시는 믿음을 찾아야 한다.
현대 신학에서 지옥, 영멸, 종말이 사라진 주제가 되었다. 예수님이 분명히 가르치셨고 더 나아가 계시록에 자세히 묘사되었다고 루처는 전한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도래하지는 않았다already but not yet. 종말도 마찬가지이다. 이미 예고편은 상영되었지만, 본방은 개봉되지 않았다. 코로나19를 통해 지상에서 고통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데, 지옥을 믿지 않는다. 최후의 심판에서 변호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불 못은 영멸이다. 모든 인간은 영원한 불멸의 육체로 부활하여 영원히 천국 또는 지옥에서 살게 될 것이다.69) 십자가, 보혈, 천국, 심판, 종말, 지옥. 한국교회는 원초적인 복음을 찾아야 한다.
종말교회의 표상인 일곱교회 가운데 칭찬만 받은 교회가 있다. 서머나와 빌라델비아이다. 이 두 교회는 ‘사탄의 회당’ 교회가 아닌 교회로부터 공격을 받았지만, 고난 가운데도 끝까지 예수 이름을 배반하지 않고, 배교에 빠진 자들을 오히려 건져냈다. 그들에게 승리의 면류관이 주어졌다.64) 코로나 팬데믹에서 신앙을 볼 때, 과연 주님 오실 때까지, 예수 이름을 붙들자가 얼마나 있겠는가? 한국교회는 대각성, 거룩한 예배, 재림 신앙, 주님이 원하시는 믿음, 원초적인 복음을 찾아야 한다.
부첨>附添:회의론자의 변론
회의론자Skeptic들은 하나님이 사랑이 많으신 분이라면, 악과 고통을 없애실 것이다. 그러나 끔찍한 재난이 존대하는 것은 하나님이 약하거나, 무지하거나 가학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런 하나님은 존경할 수 없고, 무신론이 더 매력적인 대안인 것처럼 보인다. 무신론자Atheist들은 냉소적으로 질문한다. “코로나19가 전 세계에 퍼져 사람들이 죽고 가족이 굶주리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어디계셨는가?” 그리고 그들은 누구의 대답도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65)
그러나 무신론자들에게서 나오는 질문은 불법적이며 비합리적이다.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가정하는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이 없다면, 우리는 무작위로 튀어나온 원자들의 복잡한 조합일 뿐이라면, 선과 악, 또는 더 좋거나 최선이라는 생각 자체가 존재할 수 없다. 무신론자들에게 따르면 원자들은 우연한 패턴에 따라 맹목적으로 배열되고 있다. 따라서 무신론자들이 어떤 재난이나 대유행 전염병에 하나님을 끌어들일 이유가 없다.
그래서 무신론자자연주의자Naturalist가 하나님이 재난 중 어디에 계셨느냐고 묻는다면, 하나님이 존재해야 만 존재할 수 있는 도덕적 틀을 가정한다. 무신론적이 전제에서는 영혼이나 마음 같은 영적 존재는 있을 수 없고, 물리적 입자의 패턴만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자연주의자들은 물질이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불리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즉 그들은 원자나 분자들이 어떤 물질의 배열이 좋고 어떤 것이 나쁜지에 대해 질문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선악에 대한 개념은 원시 진흙에 존재하는 원자에서 발생할 수 없다.66)
C. S. 루이스C.S. Lewis,1898-1963는 그런 주장에 대해 말했다. “우리 모두에게 존재하는 도덕률은 오직 하나님만이 설명할 수 있다”. 그는 무신론적 시대에 우주가 너무 잔인하고 불공평해 보였기 때문에 하나님을 반대했다고 한다. 그러나 다음 드는 정의에 대한 자기 생각이 자신을 초월하는 표준을 전제로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계속한다.67)
“물론 나는 정의에 관한 내 생각을 나 자신의 사적인 생각에 불과하다고 말함으로써 포기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그렇게 한다면 하나님에 대한 나의 주장 역시 무너졌다. 그 주장은 단순히 나의 사적인 공상을 기쁘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세상이 정말로 부당하다고 말하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것, 즉 현실 전체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증명하려면 나는 현실의 한 부분을 가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즉 정의에 대한 내 생각은 의식으로 가득 차 있었다”68)
루이스는 계속해서 도덕률이 우주 그 자체보다 하나님을 더 잘 나타낸다고 주장한다. 그는 우리가 선과 악에 대해 가지고 있는 직관적인 지식이 아연보다 하나님에 관해 더 많이 말해준다고 지적한다. “당신은 어떤 사람을 알기 위해 그가 지은 집을 보는 것보다 그 집은 지은 사람과 대화를 통해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듯이, 전반적으로 우주에서보다 도덕률을 통해 하나님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된다.”69)
무신론적인 세상은 결코 고귀한 결말로 이어질 수 없으므로, 악은 결코 더 높은 목적에 이바지할 수 없으며 고통은 결코 구원될 수 없다. 결국, 모든 사람이 죽고 존재하지 않으므로 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머무르는 것은 의미가 없다. 따라서 자살은 매력적일 것이다. 더군다나 이 세상의 불의는 결코 답을 얻지 못할 것이다.70)
무신론자인 한 유대인은 히틀러가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절대로 심판받지 않으리란 것을 알기 때문에 약간의 불안감을 느꼈다고 인정했다. 그는 잘못을 바로잡을 최후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희망도 없다. 그는 영원함이 없이는 현세의 사건들이 반드시 구속되거나 바로 잡을 수 없다는 것을 유감스럽게 인정했다.71)
무신론은 마음도 정신도 만족시키지 않는다. 그러나 무신론자들은 그들이 또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고 생각할 수 있는 혼을 가지고 있으므로 선과 악에 관해 질문한다. 라비 재커라이어스Ravi Zacharias,1946-2020는 상대주의자는 아마 하나님이 죽었다고 말할 수 있지만, “동시에 그의 혼이 던진 질문은 그가 그를 완전히 죽일 수 없다는 것을 드러낸다”라고 말했다.72)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이 존재하고 악을 종식할 능력이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성경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에 떨어지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라고 말하는 것도 당연하다. 우리는 또한 이렇게 말했다.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시다”라고 하셨으므로, 그분의 면전에서 두려움에 떨어야 한다, 쓰나미가 끔찍한 고통을 가져준다고 생각한다면, 훨씬 더 영원한 고통이 다가올 인생에서 당신을 기다린다. 하나님이 그분이시다. 우리는 그분에게 우리의 선호도에 맞춰 달라고 호소할 수 없다.”73)
자유주의 신학이 주장하는 ‘하나님’은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피조물의 행복을 구하시는 하나님,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를 절대로 심판하지 않으시고 죄인을 지옥에 맡기지 않으시는 하나님이다. 그런 하나님은 성경에 존재하지 않으며 세계의 자연재해와 질병은 모순이 된다. 성경의 하나님은 인간의 고통을 기뻐하지 않으시지만, 진리와 공평의 승리와 숨겨진 목적의 완성을 기뻐하신다.74)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가 제공한 보호를 받아라. 그는 우리를 위해 죽도록 보내셨고, 그는 우리를 다가올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해주신다(롬5:9;살전5:9).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 사람들의 죄를 사해 주신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자 하나님의 분노는 경감되었다. 그러나 이 축복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구원자, 즉 실제로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께 선물할 자격이 있는 예수님을 인정하는 사람에게만 주어진다. 우리의 모든 흠을 제거하여, 아버지로부터 환영받을 수 있는 완벽한 존재로 선물하는 것이다. 예수님만이 우리를 위해 이 일을 하실 수 있다(요14:6).75)
사랑에 빠진 하나님의 포옹을 받고 전능하신 분의 아들이나 딸이 될 수 있는데, 왜 진노하시는 하나님과 싸우느냐 하는 것이다.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이 얼마나 빨리 분노에서 조건 없는 사랑으로 변하는지 생각해 보라. 구약성경에서 이미 이렇게 초대했다.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의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시2:12).76)
추천사
<팬데믹, 재앙 그리고 자연재해-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 어원 루처(Erwin W. Lutzer)
청아비전교회 담임목사 이재현
본서가 코로나 팬데믹 시대 영적 혼란에 빠진 한국교회에 길잡이가 될 것으로 믿는다. 어윈 루처는 대 재앙과 자연재해 전염병에 대해 답하고 있다. 죽음을 앞두고 죽음을 보지 못하는 인간들을 깨우는 경종이다. 죽음이 곧 다가올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예수님은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서 최후 심판을 받으셨다. 인간이 지옥의 형벌을 받지 않도록 하신 것이다. 참극 앞에서 가장 큰 비극을 당하셨던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 죽은 자는 회개할 수 없다. 살아있을 때 회개해야 함을 강조한다.
코로나-19로 닥친 예배의 위기는 신앙을 세속화시키고 있다. 저자는 진언한다. 어떤 재난이나 사건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분리할 수 없다. 무슨 일이 있어도 믿음을 지속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고통이 끝나던 그렇지 않든, 기도의 응답에 좌우되지 않는 소망이 필요하다. 어느 순간에도 하나님을 믿어라.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사람이 가장 큰 복이라고 역설한다.
저자는 코로나 팬데믹은 광범위한 기술적 진보와 감시와 통제가 강화된 글로벌 재설정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고 말한다. 세계정부에 대한 설명이다. 당국이 일상을 추적하고, 예배 인원을 통제하고 있다. 무관하게만 볼 수 없는 사안이다. 적그리스도, 마크짐승표도 언급하며 현재 등장 과정에 있다고 부연한다. 종말의 징후들을 보고 임박한 최후 심판 경성을 당부하고 있다. 저자의 통찰을 통해 절대적 성경을 통한 상황적 징조의 분별이 요청된다. 루처의 저서 “국가가 하나님을 잊을 때”*를 함께 정독하면 더욱 도움이 될 것이다. 마지막 시대 목양과 신앙하는 분들에게 필독서로 추천한다.
* <국가가 하나님을 잊을 때>When a Nation Forgets GOD. 어윈 W. 루처著, 모영윤譯, 기독교문서선교회. 2020.9.10.
<팬데믹, 재앙 그리고 자연재해-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 Pandemics, Plagues, and Naatural Disasters What is GOD Saying to Us?. 어윈 W. 루처著, 모영윤譯. 기독교문서선교회. 2021. 3.15
脚注)
1) 본고는 어윈 루처(Erwin W. Lutzer,1941-) 목사가 2020년 6월 출간한 <팬데믹, 재앙 그리고 자연재해(우리를 향한 하나님 말씀)>Pandemics, Plagues, and Natural Disasters What is GOD Saying to Us?. 번역서를 필자가 정독하고 보안한 것이다(국내출판 20210.3.15). 루처 목사는 위니펙성경대학(B.A.)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달라스신학교(TH.M.)와 로욜라대학교(M.A.)를 졸업한 후, 웨스턴침례신학교에서 신학박사(TH.D.) 학위를 취득했다. 1980년부터 시카고무디교회 담임목사로 36년간 재직한 후 은퇴했다(어윈 W. 루처, 「국가가 하나님을 잊을 때」, 모영윤역, 기독교문서선교회, 2020.9.10.)
2) <팬데믹, 재앙 그리고 자연재해-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 어윈 W. 루처著, 모영윤譯, 기독교문서선교회, 2021.3.15. p20.
3) Ibid. p22.
4) Ibid. p20
5) Ibid. p159
6) Ibid. p158
7) Ibid. p74, 78
8) Ibid. p79
9) Ibid. p83
10) Ibid. p84
11) Ibid. p85
12) Ibid. p86
13) Ibid. p87
14) Ibid. p87
15) Ibid. p92
16) Ibid. p96-97
17) Ibid. p98
18) Ibid. p99
19) Ibid. p99
20) Ibid. p102
21) Ibid. p103
22) “우리는 자연 재해를 보면서 언제부터인가 이런 말을 많이 듣는다. ‘기상 관측이래 사상 최대’ 혹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무엇을 뜻하는가? 저자는 종말에 있을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없었던 환난’(마 24:21)의 서막으로 본다. 영화로 말한다면 예고편이다. 그것도 그 시기가 아주 근접해 있다. 이러한 확신은 강도는 갈수록 강하게 빈도는 갈수록 빈번해 지고 있으며, 그 대상이 지구촌 전역에 나타나고 있다는 성경의 증거에서이다(눅 21:11)”<징조는 픽션보다 참혹했다(개혁주의 관점으로 성경과 시대를 조명한 종말계시연구)>, 이재현, 좋은땅 2013.2.8.p13. “저자는 성경을 통해 알려주신 말세의 징조를 통해 깨닫지 못하는 이들에게 또 다른 방법으로 알리는 하나님의 메가폰(Megaphone)이라고 본다.”Ibid.p24.
23) Ibid. p104
24) Ibid. p105
25) 이미지적으로는 창조물이 “발끝을 곧추세우고”기다린다는 것이다.
26) “이 말씀에서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가 무엇인가?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라 한다. 그렇기에 ‘이제까지 탄식하며 고통을 겪고’있다고 하였다. 이것이 어찌 초림의 예수님에 의한 구원 시작에 대한 소망만이겠는가? 재림의 예수님을 통한 구원 완성에 대한 갈망이 아니겠는가? 그가 다시 오셔서 죄악을 심판하시고 에덴의 회복인 천년왕국 건설에 대해 오매불망 열망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피조물을 상징적으로 들어 깨우치고 있다. 그들조차도 6천 년 전 아담 범죄로 저주 받은 후 회복되기를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는 말이다(창3:17). 그런데 인간들은 이 증언을 귀담아 듣지 않고 있다. 이러한 완악한 심령들에게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의 탄식을 메스미디어를 통해 지구의 눈물로 알리고 있는 것이다. 성경증언만이 종말의 징조를 알리고 있는 것이 아니다. 대중매체를 통해서도 증거하고 있다.”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Ⅱ>, 이재현, PBI. 2017.8.1.p217.
27) Ibid. p107
28) “최악의 가뭄으로 식수가 부족하고, 땅은 타들어가고 있습니다. 주먹만 한 우발들이 세계 도처에서 쏟아지고 있습니다. 초강력 태풍, 대홍수. 대지진. 대형 산불 등 헤아릴 수 없는 자연재해들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재난의 시작’일 뿐이고, ‘창세로부터 지금가지 없었던 큰 환난’이 있을 것 이라고 말씀합니다(마24:8,21). 마지막이 가까이 왔다는 것입니다. 지금 기상이변현상은 예고인 것입니다. 바로 7년 환난 중 후3년 반에 쏟아질 ‘첫째대접’부터 ‘넷째대접’의 재앙이 얼마나 무시무시할 것인가를 예고편으로 미리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영원한복음-요한계시록강해>, 이재현, PBI. 2020.8.1.p163.
29) 지구의 멸망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큰 지진’은 전대미문前代未聞의 대지진을 의미합니다(계16:18). ‘땅에 있어 온 이래로’ 없었던 이 큰 지진으로 ‘큰 성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라고 했습니다(계16:19). ‘큰 성’은 지구를 가리키는 것으로 세 갈래로 갈라지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이 날에는 지구 전체의 지질이 지진대地震帶로 폭발합니다. 이 지구를 폭발시키기 위해 ‘불’을 마지막 심판까지 ‘보존’하셨다고 말씀합니다(벧후3:7). 바로 지구 안에 있는 6천도의 ‘내핵’Inner Core,內核을 말씀합니다. ‘내핵’이 폭발하면서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는 말씀과 같이 됩니다(벧후3:10;참고/사24:17-20;21-23;33:10-12;습1:2-3). ‘만국의 성들도 무너진다’고 하였습니다(계16:19). 세계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도성都城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입니다. ‘각 섬도 없어진다’고 하였습니다(계16:20). 각 섬은 육대주六大洲를 말합니다. 대륙들은 지구의 78%을 차지하고 있는 대양大洋에 떠있는 섬과 같습니다. 큰 지진으로 이 지구상의 모든 지면이 바다 속으로 들어가 없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영원한 복음(요한계시록 강해)>, 이재현, PIB. 2020.8.1.p162. 월부드J. F. Walvoord,1910–2002는 “상징들과 그 해석들이 그 정상적인 방식대로 성취된다고 생각되어야 한다.” 고 주장한다. 정상적이란 말은 계시록의 언어를 문자적이고 직접적인 의미로 해석하는 것을 말한다. 언어적 차원의 의미와 지시적 차원의 의미가 일치하도록 문자적인 일대일의 방식대로 해석하는 것이 계시록의 정상적인 해석방식이란 것이다. 물론 계시록에는 환상언어를 상징적 의미로 해석해야 할 때가 있음을 월부드도 인정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계시록의 저자인 요한이 그렇게 할 때뿐이다. 반면에 저자가 상징적 해석을 제시하지 않는 곳에서 모든 본문은 “그 자연적인〔즉, 문자적인〕의미를 따라” 정상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문자주의와 상징주의자 사이에 그릇된 이분법을 세워서는 안 된다.” 소위 자신을 문자주의로 부르는 학자도 오직 선택적으로만 그렇게 할 뿐이다. 계시록은 상징적인 책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상징들조차 문자적인 사건들을 묘사할 때도 있어서, 계시록의 모든 언어를 철저한 영적 차원의 의미로 산화시켜서는 안 된다. 사역회에서는 문자적 해석을 우선한다.<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이재현, PIB. 2019.8.1.p162.
30) 재차 삼차 강조한다. 예전에는 특정지역에서 전 세계로 그리고 100년 50년 20년 간격이 지금은 10년 5년 매년 수개월로 좁혀지고 있다. 신앙인은 이러한 것을 꿰뚫어보는 통찰이 있어야 한다. 즉 지진은 예전부터 있었다. 그래서 ‘아 자진’ 그랬는데 이제는 지진이 정말 지진으로 느껴질 정도로, 그 위력이 점점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갈수록 그 강도가 더 강력해지고 빈도가 더 많아진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종말이 가까웠다는 증거이다. 이것이 시대적 징조를 보는 것이다.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는 은혜를 받기 바랄뿐이다.<징조는 픽션보다 참혹했다(개혁주의 관점으로 성경과 시대를 조명한 종말계시연구)>, 이재현, 좋은땅 2013.2.8.p43.
31) Ibid. p109
32) 이에 대해 성경은 ‘재난의 시작’일 뿐이고 ‘창세로부터 지금가지 없었던 큰 환난’이 있을 것 이라고 말씀한다(마24:8,21). 마지막이 가까이 왔다는 것이다. 지금 기상이변현상은 예고인 것이다. 이렇게 지구촌 기상은 인간이 접해본 적이 없는 가공할 재앙으로 변화되고 있다.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Ⅱ>, 이재현, PBI. 2017.8.1.p231. 예수님께서 재차 삼차 강조한다. 예전에는 특정지역에서 전 세계로 그리고 100년 50년 20년 간격이 지금은 10년 5년 매년 수개월로 좁혀지고 있다. 신앙인은 이러한 것을 꿰뚫어보는 통찰이 있어야 한다. 즉 지진은 예전부터 있었다. 그래서 ‘아 자진’ 그랬는데 이제는 지진이 정말 지진으로 느껴질 정도로, 그 위력이 점점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갈수록 그 강도가 더 강력해지고 빈도가 더 많아진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종말이 가까웠다는 증거이다. 이것이 시대적 징조를 보는 것이다.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는 은혜를 받기 바랄뿐이다.<징조는 픽션보다 참혹했다(개혁주의 관점으로 성경과 시대를 조명한 종말계시연구)>, 이재현, 좋은땅 2013.2.8.p43. 누가복음 21장 11절에 ‘곳곳에 큰 지진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고 하셨다. 이 말씀 가운데 먼저 살펴볼 것이 ‘곳곳에 큰 지진’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는 지진이 곳곳에서 일어난다고 하였다. 마지막 시대로 가면 갈수록 세계 어느 곳도 지진의 안전지대가 없다는 말씀이다. 두 번째로는 지진은 지진인데 그냥 지진이 아니라 큰 지진이라고 하였다. 바로 대지진을 뜻한다. 그런데 세계 전역을 의미하는 곳곳에 대지진이 발생하고 있는 시점이 바로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라는 것이다.Ibid.p234.
33) 이러한 전염병은 ‘곳곳에 잇을 것’이라고 한 말씀과 같이 세계 어느 나라에 발생하지 않은 곳이 없다(눅21:11). 정말 마지막 때가 가까워졌음을 하나님께서 세상을 통해서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7년 환난 시작에 근접했음을 알리는 징조이다. 정말 그 시기가 가깝게 다가오고 있다..Ibid.p239.
34) Ibid. p112
35) Ibid. p113
36) (종말에 다다를수록) 석유전쟁, 식량전쟁, 자원전쟁, 영토분쟁 등이 극으로 치닫게 된다. 이러한 전쟁과 분쟁은 지금도 심각하다. 이 때 이 모든 것을 중재할 자가 적그리스도이다. ‘그가 장차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맺고’라고 하였다(단9:27). 그는 일약 세계의 영웅이 된다. 세계대전 등 난세亂世를 타개打開하고, 체결된 평화조약의 체제로 들어설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는 평화의 사도로 칭송받게 될 것이다. 세계는 평화의 시대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역사는 증명한다.) 인간에 의해 체결된 그 어떤 평화조약도 온전할 수 없다(는 것을). 장차 그 허구성을 여실히 보게 될 것이 평화조약인 것이다. 인류 역사이래 인간들은 끝까지 자기들을 지켜줄 찾다가 최종에 적그리스도를 선택하기에까지 이른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은 홍수에 휩쓸림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고 하였다(단9:26). 그렇다면 그 자를 따른 자들의 결과도 그와 같을 것이다. 그러므로 적그리스도의 주도하의 평화조약에 절대로 넘어가서는 안된다.<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이재현, PIB. 2018.8.1. pp220-222.
37) 성경 첫 권 창세기에는 인류의 첫 번째 영웅 니므롯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성경 마지막 권 계시록에는 인류의 마지막 영웅 적그리스도가 등장합니다(13:1). 지금 같은 코로나 19와 같은 어려움에서, 사람들은 이 모든 문제를 단번에 종식시킬 영웅을 구합니다. 영웅을 구하는 심리는 창세부터 지금 그리고 종말까지 여전한 것입니다. 적그리스도는 ‘짐승’The Beast으로 지칭되어있습니다(13:1). 이자는 등장부터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하게 합니다. 죽었다가 살아나는 기적의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삼일만의 부활을 흉내 내는 것입니다. 적그리스도는 종말인 예수님 재림 7년 전에 등장하여, 인류를 위기에서 타계할 ‘7년언약’을 체결합니다(단9:27.참고/11:2-3.13:5). 바로 ‘7년환난’의 시작입니다(참고/마24:8,15,29). 그리고 그 ‘전3년 반’이 지난 시점에 자신의 본색을 드러내고, 스스로를 하나님으로 칭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지배가 공고화된 ‘후3년 반’, 자신의 우상을 만들어 인류들로 경배하게 합니다(13:14-15). 또한 자신의 표인 ‘짐승의 수’로 ‘육백육십육’을 받게 합니다(13:16-18). 이 ‘짐승표’를 받은 자만이 매매가 가능합니다. 그 의미는 외형적으로는 경제 수단이지만, 내용적으로는 통치 수단인 것입니다. 짐승표 ‘666’을 ‘오른손에나 이마’에 받는 순간 그 사람의 모든 사항은 짐승, 적그리스도의 손에 들어가고, 통제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영원한복음-요한계시록강해>, 이재현, PBI. 2020.8.1.pp154-155..
38) Ibid. p114
39) Scott Pelley, “Coronavirus and the Economy: Best and Worst-Case Scenarios from Minneapolis Fed President”. CBS News. March 22. 2020. <팬데믹, 재앙 그리고 자연재해-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 어윈 W. 루처著, 모영윤譯, 기독교문서선교회, 2021.2. Ibid. p21. 재인용
40) 금번 코로나19로 마스크 대란이 일어났을 때, 정부에서는 마스크 수급 안정화 대책으로 5부제를 실시했습니다. 내가 싫어도 마스크를 사려면, 인적사항이 기록된 신분증을 제시해야 합니다. 그리고 확진자의 모든 동선은 공개되고 있습니다. 공익이라는 목적으로 개인의 사생활을 항변할 수 없게 합니다. 우리나라뿐만 아닙니다. 개인사생활이 가장 중시되는 유럽에서도, 스마트 폰 위치 추적을 활용하겠다는 방침입니다. 끝없는 경제의 추락으로 항공기와 병원등을 국유화한다는 말이 나돌고 있습니다. 코로나19를 해결하기 위해 전 세계 지도자들이 화상으로 대책회의를 했습니다. 어떤 사안 하나가 전 세계의 문제가 되고 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의 대책들이 강구되고 있고, 효율적으로 방안으로 강력한 중앙 통제와 리더십이 요청되고 있습니다. 장차 종말에 인류의 영웅으로 등장할 적그리스도와 그 자가 형성할 세계 단일정부와 주도할 짐승표의 예고들이 지금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영원한복음-요한계시록강해>, 이재현, PBI. 2020.8.1.p213.
41) See. e.g., Jenny Rose Spaudo, “Cindy Jacobs Calls Christians across World to Pray against Coronavirus,” Charisma, March 7, 2020. Ibid. p42. 재인용
42) T. B. Joshua. “Since yesterday, when the Lord brought the revelation about the rain and that this rain will wipe away the epidemic coronavirus, “Facebook, March 2. 2020. Ibid. p42. 재인용
43) T. B. Joshua. “CORONAVIRUS PROPHECY!!!.” Emmanuel TV. March 2. 2020, You Tube video, 20:48. Ibid. p42. 재인용
44) Shawn Bolz. “The Lord Showed me The end of the Coronavirus...the tide is turning now!” “Facebook, March 28. 2020. Ibid. p42. 재인용
45) <팬데믹, 재앙 그리고 자연재해-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 어윈 W. 루처著, 모영윤譯, 기독교문서선교회, 2021.2. p42.
46) Michael Luo, “Doomsday: The Latest World If Not the Last.” New Your Time, October 16, 2005. p114. 재인용
47) 후3년 반 짐승 적그리스도 철권통치에 혹독한 시련을 당할 것이고, ‘첫째대접’부터 ‘넷째대접’ 땅, 바다, 강, 하늘 지해강천地海江天에 쏟아지는 재앙과 ‘다섯째대접’ 짐승왕좌 적그리스도 본부를 임하는 진노와 흑암을 당해야 합니다. 그러나 ‘예비처’에 있는 성도들은 이 모든 환난을 당하지 않고, ‘여섯째대접’에 예수님은 재림하시고, 아마겟돈에서 짐승 적그리스도와 그의 추종자들을 진멸하시고,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를 ‘산 채로 유황불 붙는 못(지옥)에 던’지는 심판이 있고, ‘일곱째대접’ 심판으로 이 세상은 ‘불 심판’을 받아 초토화되기 직전, 한 명의 누락자도 없이 공중 휴거되는 것입니다. 공중 휴거는 이렇게 지상에서 마지막 심판 때, 최종적인 탈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공중 휴거가 없다면, ‘일곱째대접’ ‘불 심판’인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날 서 없습니다. 예수님은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없었고 후에도 없’을 ‘대 환난’에서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감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마24:21-22).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마24:22). .<영원한복음-요한계시록강해>, 이재현, PBI. 2020.8.1.p286.
48) Ibid. p141
49) Ibid. p142
50) Ibid. p143
51) Ibid. p151
52) Ibid. p123
53) Ibid. p158
54) Ibid. p158
55) Ibid. p163
56) John Piper, Coronavirys and Christ. p50. Ibid. p153. 재인용
57) Ibid. p166
58) Ibid. p166
59) Ibid. p169
60) Ibid. p175
61) Ibid. p176
62) 롬2:12,14-15;계20:11-15
63) 계20:14.참고/막9:48;눅23:43;계14:11
64) 계2:9,10,3:8,9,11
65) Ibid. p144
66) Ibid. p145
67) C.S. Lewis. Mere Christianity, in The Complete C.S. Lewis Signature Classics(New York:Harper One, 2002),p41. Ibid. p145. 재인용
68) Ibid.
69) Ibid.
70) Ibid. p147
71) Ibid. p147
72) Ravi Zacharias, “The Silence of Christmas and the Scream og the Tsunami.” RZIM. Ibid. p147. 재인용
73) Ibid. p148
74) Ibid. p122
75) Ibid. p149
76) Ibid. p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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