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화

기독교 신앙관련 예화 모음

하나님아들 2023. 3. 25. 23:40

기독교 신앙관련 예화 모음

 

 

 

 

 

 

눈동자

 

사람의 눈동자는 엄청난 신비를 간직하고 있다. 안과 의사들은 우리의 눈동자가 자동으로 조절된다고 말한다.  가령 사람의 눈에 먼지나 모래와 같은 이물질이 들어가려고 하면 어느새 눈꺼풀이 감겨 눈동자를 보호하는 것이다. 이런 작용이 가능한 것은 눈이 가지고 있는 특수한 구조 때문이다. 현재까지 밝혀진 바로는 사람의 눈에는 자그만치 30만 개의 회로가 있고 1억만 개의 신경세포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아무리 작은 그 무엇이라도 눈에 들어오려고 하면 이것을 눈동자가 감지하고 눈꺼풀에게 지시하여 자동으로 감겨 보호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열악한 환경과 위기 가운데서도 눈동자처럼 항상 우리를 지켜 주신다. 하나님의 눈은 앉아서 천리를 본다는 신비의 눈보다도 더 뛰어나다. 이 눈을 통해서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일들을 보고 계신다. 특별히 사람들의 행동만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 속 깊이 감추어진 동기까지도 다 헤아리고 계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에게는 이처럼 위안이 되는 것도 없을 것이다.

 

 

절반은 빛, 절반은 어둠

 

지구의 특성 가운데 하나는 절반은 항상 어두움 가운데에 있는 반면에 다른 절반은 항상 빛 가운데 있다는 것이다. 세상의 한쪽에서 잠자리에 들 때, 다른 한쪽에서는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한편에서는 열심히 일하는데, 다른 편에서는 곤히 잠들어 있다. 하나님의 종들이 선교를 위해 일을 하고 있는 동안 다른 이들은 곧 밝아 올 새날을 위해 준비하며 쉬고 있는 것이다.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메시지는 전달되고 있다. 그 말씀대로 이루어지고 사람들이 구원받는 역사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복음 사역의 태양은 절대로 지지 않는다. 이 얼마나 거대한 비전인가? 어떤 곳에서는 일하고, 다른 곳에서는 그 일을 위해 준비하는 작업이 반복되고 있는 것은 결국 하나님이 항상 일하고 계시다는 증거이다. 사실 우리는 해가 지구를 비추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지내는 일이 많지는 않다. 그러나 해가 항상 있는 것은 해를 지으신 하나님이 항상 계셔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분임을 입증하는 표적이 된다.

 

 

시온(Zion)

 

‘시온’ 은 이스라엘 백성이 예루살렘 성을 부르던 말이다. ‘시온’ 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사막’ 이라는 뜻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이 그렇게도 사모한 수도 예루살렘에 왜 하필 사막이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사막의 노래’ 라고 불리는 이사야 35장 이 해답을 준다. 선지자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인간 구원의 역사를 ‘사막에서 물이 솟아나게 하는 것’으로 노래하고 있다. 환난과 죽음의 사막에 물이 솟아서 생명의 샘이 되듯, 시온성이 하나님의 거룩한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는 장소가 되기를 기대하는 마음이 담겨 있는 것이다. 사막과 같이 황량한 세상에서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사람들을 생명의 활력이 넘치는 사람들로 바꾸는 비결은 무엇인가? 부패하고 어두워지는 사회를 밝게 바꾸는 비결이 누구에게 있는가?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시온의 백성으로 삼아 주실 때 그들의 삶은 변화될 것이다.

 

 

당연한 말씀

 

고든(C.D. Gordon)의 글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길가에서 과일을 팔고 있는 작은 소녀가 있었다. 그녀는 시간만 있으면 언제나 성경을 읽곤 하였다.

하루는 한 젊은 신사가 과일을 사려고 그녀 앞에 섰지만, 이 소녀는 책에 열중해 있어 손님이 온 것을 알지 못했다.

“얘야, 너는 무얼 그리 열심히 읽고 있니?”

“네, 하나님의 말씀이죠.”

이 젊은 신사는 회의주의자였다. 그는 소녀에게 다시 물었다.

“누가 이 책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이야기해 주었니?”

“하나님께서 제게 그렇게 말씀하신 걸요.”

“뭐, 하나님이 네게 말씀하셨다고? 말도 안돼! 너는 만나 보지도, 함께 이야기하지도 못할텐데!”

소녀는 조금의 동요도 없이 젊은 신사를 쳐다보며 이야기했다.

“누가 아저씨께 하늘에 태양이 있다고 이야기해 주던가요?”

“그건 당연한 말이 아니니? 난 저 햇살이 좋단다.”

“그 래요! 아저씨 말씀이 옳아요. 그렇게 아저씨가 태양을 느끼듯 저는 하나님을 느껴요! 제가 성경을 읽으면 하나님께서는 저를 따뜻하게 해준답니다. 제가 이 성경을 읽어서 얻은 저 햇살과 따스한 마음은 하나님이 아니시고는 제게 줄 분이 없지요!”

 

 

현대 과학으로 증명되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

 

예수의 부활이 현대 의학으로도 입증할 수 있게 되었다. 오늘의 발달된 의술은, 얼마든지 인간 복제가 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의 유전자를 냉동실에 보관해 두었다가, 백년 또는 천년 후에 꺼내서 복원하면, 그와 똑같은 사람을 만들어 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인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이상의 힘을 발휘할 수가 없겠는가? 이제 우리는, 부활 여부에 대한 의문은 깨끗이 버리고, 부활 이후에 있을, 주의 심판에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그냥 죽고 마는 것이 아니라, 신 불신(信 不信)간에 모든 사람은 부활하여, 주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이 더욱 확실해졌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말씀으로 창조하셨다’는 사실이, 또한 과학으로 거의 입증할 수 있게 되었다.

요 즘 ‘디지털’이라는 말을 많이 들어보았을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정보 처리 방식을 말하는데, 글과 그림, 또는 소리를 0과 1이라고 하는 숫자로 표현하여 계산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말한다면, 사람의 음성을 숫자로 표현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것도, 단지 0과 1이라는 숫자만을 가지고, 표현할 수 있다. 거꾸로, 숫자로 된 사람의 말을, 우리가 들을 수 있는 음성으로 재현할 수가 있다.

아무튼, 이런 과학적인 이야기는, 더 이상 말 할 필요가 없겠다. 다만, 사람의 음성을 기계가 알아듣고, 그대로 수행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자 그림을 그려라!’ 하면, 컴퓨터가 사자 그림을 그린다. 뿐만 아니라, 컴퓨터가 부착된 로봇에게 ‘커피를 끓여라!’ 하면 커피를 끓이고, ‘밥을 하라!’ 하면 밥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꿈속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적으로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천지 창조하실 때에, ‘말씀하신 대로 이뤄졌다’고 하는 성경 말씀은 진실이다.

-자료제공 정수환 목사-

 

“인간의 끝은 하나님의 시작이다” (The end of self is begining of God)

"인간의 절망은 하나님의 기회가 된다“ (Man's extremity is God's opportunity)

 

 

보이지 않는 힘(하나님의 섭리)

 

경제학으로 노벨상을 수상한 마틴 후리드만의 「선택의 자유」라는 저서에 보면 이제 앞으로의 새 시대에는 보이지 않는 힘이 모든 것을 좌우한다고 했다. 이 ‘보이지 않는 힘’이란 바로 새 시대의 가장 큰 힘이고 이 힘을 갖지 못하고 발휘하지 못하는 사람이나 사회는 이 지구상에서 살아 남지 못하고 소리도 없이 사라져 버리게 될 것이라고 했다. 도대체 이 보이지 않는 힘의 정체는 무엇일까?

영 국의 세계적인 경제학자인 ‘한스 싱거’ 박사는 이 보이지 않는 힘의 정체를 사람들의 마음의 자세로 규명한다. 마음의 자세란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무엇을 생산하고 만드는 사람의 마음속에, 그리고 그것을 파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기업을 경영하고 운영하며 관리하는 사람의 마음속에 얼마만큼 다른 사람들을 위해 깊고 따뜻한 마음씨를 쓰고 있느냐가 곧 보이지 않는 힘이 된다는 말이다. 결국 새 시대를 이끌어 갈 ‘보이지 않는 힘’이란 기계 과학 문명이 아니라 그 문명을 이끌어 갈 인간의 마음 자세인 것이다.

그런데 경제학자들이 모르는 것이 있다. 이 ‘보이지 않는 힘’이란 역사를 만들고 이끌어 가는 사람들의 마음의 자세라고 했는데, 그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섭리이다. 그 보이지 않는 힘이란 곧 하나님의 섭리를 의미한다.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가능한 인간관계

 

근세의 유명한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나와 너」라는 책에서 현대인의 만남을 세 가지로 진단했다. 하나는 “그것과 그것”의 만남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마치 물건처럼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고 차버린다. 남편과 아내의 만남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생명이 없는 무인격의 만남으로 전락하고 있다.

또 하나의 만남은 “나와 그것”의 만남이다. 상대방이 나를 물건처럼 이용해도 나는 상대방을 끝까지 인격으로 대할 때 “나와 그것”의 만남이 성립된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인간 관계는 “나와 너”의 만남으로 발전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하고 있다. ‘나는 너를 인격으로 그리고 당신도 나를 인격’으로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는 또 이렇게 말한다. “내가 당신을 인격으로 믿어 주고 당신이 나를 인격으로 믿어 주어도 우리들 사이에는 언제나 그 인격적인 만남이 깨질 수 있는 긴장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와 너 사이에는 언제나 인간의 만남을 중매하는 하나의 촉매자가 필요합니다.” 부버는 그 촉매자를 “영원자 너”라고 이야기했다.

그 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영원자 너”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우리가 인간 대 인간으로 부딪칠 때 상대방에게서 얼마나 많은 단점을 발견하게 되는가? 그러나 그리스도를 바로 만나고 그리스도를 통해 다른 사람을 만나게 될 때 바른 인간관계는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나의 모든 것

 위 대한 성가를 많이 작곡했던 조셉 하이든에게 하루는 어떤 사람이 물었다. “당신은 그 놀라운 음악을 작곡하는 영감을 어디서 얻습니까?” 하이든이 대답했다. “나는 기도할 때마다 ‘주님! 주님이 내 삶의 주인입니다. 주님이 내게 지혜를 주셔서 내가 아름다운 음악을 작곡하게 되면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작곡한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주님 앞에 드릴 것입니다’라고 기도 드립니다.”

그가 작곡한 곡 가운데 유명한 [천지창조]가 있다. 이 곡이 비엔나에서 공연되던 날이었다. 그때 하이든은 몸이 몹시 아팠었다. 그래서 이 위대한 곡이 공연될 때 그는 환자로서 뒤에 앉아 있게 되었다. 그날 지휘를 하던 지휘자는 정말 놀랍게 이 음악을 하나님 앞에서 지휘했다. 연주가 끝났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일어나서 지휘자에게 박수를 보냈다. 그때 지휘자는 청중들의 박수를 중단시키면서 뒷좌석 발코니에 앉아 있는 하이든을 가리켰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저 사람입니다. 저분이 놀랍고 아름다운 음악을 작곡했습니다.” 사람들은 다시 고개를 돌려서 일제히 일어나 하이든을 향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그 러자 하이든이 갑자기 청중들의 박수를 중단시키면서 말했다. “아니오!” 그는 하늘을 가리키면서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나의 모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분께 이 영광을 돌리십시오.”

그렇다. 그는 평범한 음악가였지만 믿음의 눈을 열어 자기를 찾아 주시고 불러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써 구원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위대한 작곡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알렉산더와 예수

 B. C. 350년경 알렉산더 대왕은 세계를 정복하고 거대한 제국을 세웠다. 그리스도와 알렉산더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두 사람은 젊은 날에 일을 시작하여 33세라는 이른 나이에 생을 끝마쳤다.

 

알렉산더는 왕국에서 태어났고,

예수는 마굿간에서 태어났다.

알렉산더는 왕자로 태어났고,

예수는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알렉산더는 왕좌에서 고귀한 왕으로 죽었으며,

예수는 십자가에서 조롱받는 왕으로 죽었다.

알렉산더의 일생은 위대한 성공으로 보이고,

예수의 일생은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알렉산더는 자신의 소유를 위해 수십만 명의 피를 흘렸다.

예수는 전 인류를 위해서 자신의 피를 흘렸다.

알렉산더는 영광의 바벨론에서 죽었고,

예수는 수치의 갈보리에서 죽었다.

알렉산더는 모든 왕국을 정복하였고,

예수는 죽음을 정복하였다.

알렉산더는 모든 인간을 노예로 만들었고,

예수는 모든 인간을 자유롭게 하였다.

알렉산더는 역사를 만들었고,

예수는 역사를 변화시켰다.

 

 

예수님의 자리

 

다음은 어느 목사님의 간증이다. 미국에서 한 가정의 초청을 받아 가서 재미난 일을 목격하였다. 식탁에 의자가 죽 있는데 그 중 하나는 꼭 비워놓았다. 한 번은 내가 그 의자에 앉으려고 하니 그 집 꼬마가 앉으면 안 된다고 깜짝 놀랐다.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그 의자는 예수님의 의자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가정의 어린이들은 그 의자를 향해 앉아서 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한다. 참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그들의 부모가 그렇게 훈련을 시키고 있었다.

이 집 어린 형제 둘이서 싸우다가 갑자기 형이 동생을 툭 치면서 “야! 조용히 하자. 예수님이 들으신다.”라고 말한다. 이들의 부모는 그 아이들이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삶의 훈련을 잘 시켰던 것이다.

 

그리스도는 이 집의 주인이시요

식사 때마다 보이지 않는 손님이시요

모든 대화에 말없이 듣는 이시라

 

 

예수님의 얼굴

 

2차대전 말기 눈에 덮힌 중국의 오지를 의심에 잠긴 한 사나이가 말을 타고 가고 있었다.

그는 말 등에 실려, ‘오오 주여, 주의 얼굴을 한 번 보기만 했으면 저는 믿겠습니다.’라고 중얼거렸다. 그때 즉각 그의 마음에 들려오는 음성이 있었다.

“사진을 찍어라, 사진을 찍어라.”

그곳은 눈이 녹기 시작하여 이곳 저곳에 검은 땅이 나타나 보기에 흉한 들판이었다. 그러나 마음에 들려오는 명령을 따라 그는 말에서 내려 그 장면을 그의 카메라에 담았다.

돌아와 그 필름을 현상하였을 때 거기에는 온유와 사랑이 넘치는 예수님의 얼굴이 나타나 있었던 것이다.

이 사진과 이야기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 돌아왔다.

 

 

원자탄을 막을 수 있는 무기

 노 벨이 다이너마이트를 발견한 이후, 그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쓰러졌고, 그로 인해 노벨평화상이 제정되었다. 그러나 지상에 평화는 없었다. 1945년에는 뉴멕시코 사막에서 태양의 천 배가되는 섬광을 발하면서 최초의 원자탄이 폭발되었다. 미국의 의회에서 오펜 하이머 박사가 이 무서운 무기에 대해서 설명했을 때 의원들은 그 것을 막는 무기는 없는가 하고 물었다. 그때 박사는 그 무기는 바로 평화라고 대답했다. 역사가 토인비는 문명이 다시 치료되고 구원받을 수 있는 열쇠는 그리스도의 사랑이라고 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화해가 되고 평안이 되고 평화가 된다.

 

 

세 종류의 인간

 오직 세 종류의 인간이 있을 뿐이다.

신을 이미 발견하고 신에 봉사하고 있는 사람,

아직 신을 발견하지는 못했지만 신을 찾으려고 애쓰는 사람,

신을 발견하지도 못했고,

신을 구하려고 하지도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

 

첫 번째 사람들은 도리에 살고 행복하다. 마지막 사람들은 어리석고 불행하다. 그 중간 사람들은 불행하지만 도리에 맞는다.

(파스칼의 팡세에서)

 

 

하나님 제일주의의 신앙(1)

 

황해도 재령에 정찬욱이라는 장로가 있었다. 자기 집을 지으려고 기도하던 중, 장로가 하나님의 성전을 짓고 난 후에 내 집을 지어야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당시 500석을 추수하는 부농이었던 정 장로는 1년 수확 모두를 바쳐서 성전을 지어놓고 자기 집을 지었다. 그는 자기보다 먼저 하나님을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뿐 아니라 자기 교회 목사님의 생활비와 식미와 목화 100근씩 26년간을 드렸다고 한다.

그 는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았기 때문에 먼저 하나님의 성전을 생각했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자 목사님을 존경하며 뒷바라지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정 장로는 더욱 풍성한 축복을 받아 큰 부자가 되었다. 하나님은 섬기며 충성하는 이에게 복을 주신다.

 

 

하나님 제일주의의 신앙(2)

 

소련이 공산주의의 종주국으로서 냉전 시대의 양극화 체제를 형성하며 한창 위세를 떨치고 있을 때의 이야기이다.

천년을 넘긴 역사적 전통을 가진 러시아 정교회의 뿌리가 쉽사리 뽑힐 리가 없었으나, 그 냉엄한 철의 장막 아래에서도 신실한 기독교인들의 지하 교회가 살아 있었다.

어 느 날 교인들이 은밀하고 깊숙한 창고에 모여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갑자기 창고 문을 요란하게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겁에 질린 교인들은 마침내 모든 것을 포기하는 체념과 함께 단단히 마음을 가다듬고 문을 열어 주었다. 아니나 다를까 소련군인 두 명이 기관단총을 들이대고 뛰어들었다.

“꼼짝 말고 손을 들어라! 너희들이 이 곳에서 모인다는 소식을 벌써부터 듣고 있었다. 너희들은 이제 끝장이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살기를 원한다면 이 곳을 빠져나가라. 나가는 자는 스스로 기독교인임을 거부한 줄로 알고 살려 주겠다. 그러나 남은 자들은 다 죽을 각오를 하라. 모두 사살하겠다.” 군인들의 이 서슬 푸른 기세에 더러는 일어서서 슬금슬금 빠져나갔다. 하지만 많은 교인들이 요동 없이 담담히 앉아 있었다.

생사의 갈림길에 대한 선택이 끝나고 난 다음, 그 군인들은 문을 안으로 걸어 잠그고 이렇게 말했다.

“여 러 성도들이여! 용서하십시오. 여러분들이야말로 참 기독교인입니다. 우리 또한 기독교인입니다. 같이 예배를 드리려고 찾아왔는데, 행여 이 안에 비 기독교인이나 첩자가 있을지 몰라서 그들을 내보내기 위해 한 짓이니 용서해 주십시오. 이제 가짜들은 다 나갔으니 안심하며 예배를 드리십시다.”

그리고 그들은 낮은 자세로 무릎을 꿇었다.

순 교를 각오하고 그 자리에 남았던 참된 신앙의 사람들은, 뜨거운 감사의 기쁨으로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얼싸안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 시험과 환난의 강한 바람 앞에서, 알곡과 쭉정이는 서로 구별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웅변으로 증명한 사건이었다.

 

 

현재의 신앙

 

‘과거에 잘 믿었다’ 는 말이나 ‘미래에 잘 믿을 것’ 이란 말은 모두 가치 없는 말이다. 삼손도 한 때는 하나님의 일을 했고, 사울왕도 한 때는 예언까지 했고, 느부갓네살왕은 간헐적으로 신앙고백도 했고, 가룟 유다는 회계 일을 보면서 전도 사업에 시간과 정력 그리고 관심도 표현했고, 자살한 만한 위신도 알고 철면피를 부끄러워할 줄 알았다. 유대인의 아들로 신학교 1년 중퇴한 스탈린도 성경은 제법 알았고 논리도 정연했다. 과거와 미래가 없는 사람이 현재를 인정할 수도 없고, 미래를 기대할 인물도 못되나 미래에 자기 신앙을 거는 것처럼 자기기만은 없다. 신앙은 현재의 결단이요, 과거의 후회도 미래의 호언장담도 아니다. 신앙이란 오늘이란 순간에 생명을 걸고 금을 구하는 자가 험한 금광으로 돌입하듯 진주를 위해 해저로 다이빙하는 것이다. 그것은 서커스 연기자가 자기의 던진 그네가 반작용으로 다시 자기에게 돌아올 것을 믿고 공중 수십 피트에서 미리 자기 몸을 던지는 것이다.

 

 

독실한 믿음만 있으면

 

시골 교회에 믿음이 독실한 청년이 있었다. 그는 군에서 제대하고 시골에 머무르면서 쇠퇴해 가는 농촌과 시골 교회를 위하여 미력을 바치기로 결심하였다. 일거리를 찾던 중 야산을 헐값에 매입하여 그것을 개간하였다. 그곳을 개간하는 데 삽이 다섯 자루나 낡아버렸다. 청년은 그 개간지에 콩과 깨를 심었다. 그해 우로혜택(雨露惠澤)이 좋아 가을에 가서 큰 수확을 거두었다. 결국 그는 큰 밑천을 마련했고 그 개간지에 과수 묘목을 심어 수년 후에 큰 부농이 되었다. 청년은 빈약한 농촌 교회를 위하여 큰 몫을 담당하는 인물이 되었다. 청교도인들의 정신만 있으면 어디서나 또 누구나 다 성공을 할 수 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시면...

 

다음은 어느 목사님의 간증이다. 이분이, 아주 어렵사리 신학을 마치고, 어떤 교회의 전도사로 있을 때였다. 교회에서 주는 사례비만 갖고서는 생활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따로 인쇄소를 운영하고 있었다. 신학은 했지만, 사명감이 그리 투철하지 못했었노라고, 그 목사님은 말했다.

어느 날 아침, 세수를 하다가 각혈을 하게 되었다. 병원에 가 보니, 폐병 3기였다. 한쪽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나 있었다. 병원에서는, 도저히 고칠 수 없다고 말했다.

이 럴 때에, 인간이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지 알게 된다. 아무리 강한 자라도, 이런 경우에는 큰소리 칠 수 없다. 주님 앞에 두 손을 들 수밖에 없다. ‘당신 뜻대로 하소서!’하고, 주의 심판만을 기다려야 한다. 그러기에, 사는 것도 주의 뜻이고 죽는 것도 주의 뜻이다.

그러나, 그 전도사님은, 아내와 세 아이를 그대로 두고 죽을 수가 없었다. 당신 한 몸 죽는 것은 괜찮지만, 처자들의 앞날을 생각하니, 앞이 캄캄했다.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매달려 보기로 했다.

한 얼산 기도원에 올라갔다. 1주일 동안, 금식을 하며 열심히 기도했다. 그러나, 아무 응답이 없었다. 마침, 추석을 앞둔 때이고 얘들도 보고 싶어서, 집에 돌아오고 말았다. 하지만, 사모님이 그냥 두지 않았다. 당장 다시 기도원에 가서, 기도를 계속하라고 재촉했다.

할 수 없이, 그 다음날, 전도사님은 다시 기도원에 들어갔다. 그리고, 정말 본격적으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아예, 자리 뜰 생각을 하지 않고, 계속 기도만 했다. 거의 탈진 상태가 되었을 때, 비몽사몽간에, 커다란 불 방망이가 자신을 향하여 달려드는 것을 보았다. 그 불 방망이를 맞고 쓰러져 기절한 채, 꼬박 하루를 보냈다. 그런데, 깨어나는 순간에, 시커먼 그 무엇이 자신에게서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 즉시로, 전도사님은 하산했다. 병이 나았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병원에 가서 엑스레이 찍어 보니, 구멍이 사라지고 없었다. 의사도 깜짝 놀랬다. 그 의사가 바로, 그 전도사에게 사망 선언을 한 당사자였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그는 어떤 걱정이나 염려를 하지 않았다. 주께서 함께 하시면, 불가능이 없다는 사실을 직접 체험한 까닭이다. 그리고, 주의 말씀도 담대하게 전할 수 있었다. 인쇄소도 때려치우고, 목회에만 전념했다. 

 

 

신앙은 모험

 

신앙은 목숨을 건 모험이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에도 여러 가지 난관을 만날 때가 있는데 이때는 모험적 신앙이 필요하다. 청교도들은 범선을 타고 대서양을 건넜다. 그들은 신대륙 아메리카의 건설자가 되었다.

혈혈단신으로 아프리카 대륙에 건너가 탐험하며 복음을 전파한 리빙스톤은 만난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뜻을 미개한 대륙에 폈다. 그는 그의 일생을 아프리카 선교에 바쳤다.

중국 내지 선교에 담대히 들어가 선교회를 조직하고 복음을 전파한 허드슨 테일러는 아무 후원자도 없이 오직 하나님만 믿고, 그 믿음으로 중국 내지 선교를 성사시켰다. 이것은 모험적 신앙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홀 로 아프리카 정글 속에 들어가 흑인들의 병을 고쳐 주며 봉사하던 알버트 슈바이처는 백인들의 흑인들에게 저지른 죄의 빚을 갚는 심정으로 선교와 봉사에 생애를 바친 성자이다. 신앙은 이 같은 모험을 감행할 때 그 빛을 발하게 된다. 생의 험한 길을 무릅쓰고 오직 하나님만 믿고 나아가지 않는 신앙은 약속의 땅 가나안을 정복할 수가 없다.

 

 

고문을 극복한 아들

 

루마니아 공산당들이 목사 한 분을 잡아와서 예수를 부인하고 공산당을 지지하라고 심한 고문을 가했다. 그러나 그 목사님은 극심한 고문을 참으면서 예수를 부인하지 않았다.

악 독해진 공산당들은 그 목사님의 아들인 14살 난 알렉산더라는 아이를 데려왔다. 이 아이를 아버지 앞에 세워 놓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주면서 아버지가 항복할 때까지 계속하겠다는 것이다. 아이의 참혹한 광경을 본 목사님은 견딜 수 없어서 “내 아이에게 더 이상 고통을 주지 마시오. 내가 항복하겠소.”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아들은 고개를 쳐들고 사력을 다하며 부르짖기를 “아버지, 아버지가 예수를 부인하여 내가 산다고 하더라도 예수를 부인한 목사 아들이란 말을 듣기는 싫어요. 아버지, 예수를 부인하지 말아 주세요.”라고 했다. 이 부르짖음을 들은 아버지는 아들의 믿음에 용기를 얻어서 다시 공산당을 욕하고 주님을 따르기로 결심했다.

화가 치솟는 공산당들은 어린 알렉산더를 더 심하게 매질하여 숨지게 하고 말았다. 이 귀한 어린 심령의 믿음, 얼마나 장한가?

 

 

하나님과의 관계

 

삶을 성공적으로 살아가려면 나 자신의 노력만 가지고서는 안 된다. 우리의 앞을 가로막는 갖가지 어려운 환경과 여건을 극복해 나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내 힘이 아닌 다른 힘이 필요한 것이다. 유명한 러시아의 작가 톨스토이는 원래 귀족 출신으로 온갖 부귀와 영화를 누리며 살았으나, 죄에 대한 공포와 불안한 마음으로 늘 괴로움을 겪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적한 시골길을 걸어가던 중 한 농부를 만났는데, 그 얼굴에는 유난히도 평화가 깃들어 있었다. 그는 그 농부에게 가서 평화스런 삶의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기 때문에 언제나 내 마음은 기쁠 뿐이다”라고 했다. 그 말은 들은 톨스토이는 그 날부터 진지하게 하나님을 찾기 시작하였다. 그 후 그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고, 과거의 불안과 공포는 사라지게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것이 바로 사는 길이다”라고 까지 고백하게 되었던 것이다.

 

 

믿음의 법칙

 

믿음의 힘은 핵 폭탄과 다를 바가 없다. 성경은 믿음으로 산도 옮길 수 있다고 한다. 믿음으로 불치의 병도 치료되었고, 파도치던 바다도 잠잠해졌고, 죽은 자도 다시 살아났다.

다 이너마이트를 건설에 사용하면 1년이 걸릴 난공사도 열흘이나 한 달에 해치울 수 있지만 그것을 잘못 다루어 폭발하면 수많은 인명과 재산의 피해를 가져오듯이, 믿음의 힘 또한 가공할 만한 파괴력도 엄청난 창조적 능력도 지닐 수 있다. 믿음을 선용하면 개인적으로 엄청난 축복을 누리며, 인류에 기여할 수도 있다.

그러기에 다이너마이트를 조심스레 다루어야 하듯이, 믿음의 힘 또한 신중하게 쓰여지지 않으면 안 된다.

첫째, 열매를 거둘 욕심에 너무 서두르지 말라.

훈 련병에게는 익숙해질 때까지 실탄을 주지 않는다. 처음에는 빈총만 준다. 괴물처럼 느껴지던 총이 손에 익숙해지고 사용법이 능숙해져야 실탄을 주어 사격 연습을 시킨다. 총과 실탄을 처음부터 동시에 주게 되면 여기저기서 오발 사고가 잇따라 인명 피해가 속출할 것이다.

믿음의 힘을 너무 성급하게 발휘하려 들면 문제가 생긴다. 믿음의 힘 자체는 강하지만, 그 힘을 적용하기까지는 많은 준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믿 음의 힘을 자동차 엔진에 비유해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엔진은 동력이다. 힘이 있다. 그러나 엔진만으로는 굴러가지 않는다. 타이어까지 연결되어야 하고, 연료를 넣어야 하고, 누군가가 운전을 해야 한다. 믿음의 힘이 실생활 속에서 금방 나타나기를 기대하는 것은, 엔진의 힘만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겠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둘째, 이기적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이 기적이라는 것은, 이익을 얻은 당사자와 더불어 불이익을 당하는 편도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힘의 사용은 이타적일 때 오히려 유익으로 돌아온다. 하나님께서는 나누는 자, 베푸는 자를 더욱 풍성하게 해주신다고 성경은 명시하고 있다. 아무리 아껴도 부족해지고, 충분하게 베풀어도 넉넉해지는 것이 물질 흐름의 원리이다.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잠 11:24-25)

궁극적인 목적을 이타적인 데에 두면 믿음의 힘은 더욱 커진다. 그러나 이기적일 뿐이면 한계에 부디친다. 하나님의 원리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셋째, 믿음의 힘을 가두어 두지 말라.

권투 선수가 매일 일정량의 연습을 하지 않으면 금방 체중이 불어나고 둔해져서 선수로서의 수명이 다하게 된다.

새 집도 사람이 살아야 수명이 길어지고, 비워 두면 빨리 망가진다.

아무리 비싼 기계라도 멈추어 두면 녹슬어 폐물이 된다. 그러나 계속 사용하면 성능이 더욱 좋아진다.

믿음의 힘, 그것은 아무리 과장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엄청난 능력이다. 그러나 간직하고만 있으면 그 힘은 점진적으로 위력을 상실한다. 그릇에 담긴 물도 시간이 가면 사라지고 만다.

믿음은 활용하면 활용할수록 그 힘이 증폭되고 극대화된다. 군인의 무장이 강화될수록 적을 이길 승산이 높아지듯이, 극대화된 믿음은 인생을 성공으로 이끈다.

무엇을 원하는가?

그 원하는 대로 된다고 믿는가?

믿는다면 그 믿음대로 행동하라. 행동하고 또 행동하라. 믿음은 자란다. 원하는 바가 2배, 4배, 16배, 32배로 기하급수적 증폭을 하는 것을 당신은 확인하게 될 것이다.

 

 

신앙의 뿌리

 

미국 뉴욕시 교육위원회에서 매우 흥미로운 교육자료 하나를 개발한 적이 있다. 그것은 신앙인과 불신앙인이 후손들이 대를 이어가면서 어떤 모습으로 살았는가에 대한 통계 수치였다.

위 원회는 이 조사를 위해 두 사람의 표본모델을 선정했다. 한 사람은 프린스턴 대학 설립자이자 보수 신학자 에드워즈 요나단 목사였고, 다른 한 사람은 뉴욕에서 살롱 술집을 경영하여 거부가 된 무신론자 마크스 슐츠였다. 위원회에서는 이 두 사람의 후손들을 5대에 이르도록 면밀하게 확인하고, 그 개개의 인적 사항을 컴퓨터에 입력하여 통계를 추출했다.

에 드워즈 요나단의 5대에 걸친 후손들은 모두 896명이었다. 그 중 선교사와 목사가 116명, 교사, 교수, 학장, 총장 등 교육자가 86명이었다. 이들 교육자 중에는 총장이 3명, 학장이 66명이나 되었는데, 그 총장 중에는 찬송가 246장 ‘내 주의 나라와’를 쓴, 예일대학의 총장 티모티 드와이트 박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밖에도 부통령이 1명, 상원 의원이 4명, 문학가 및 문필가가 75명, 발명가가 21명, 실업가가 73명 그리고 장로, 집사가 286명이나 되었다.

마 크스 슐츠의 5대 후손들은 모두 1,062명이나 되었다. 그런데 이들은 평균 교도소 생활 5년 정도 한 사람이 96명, 정신병자 및 알코올 중독자가 58명, 창녀가 6명, 정부 보조 극빈자가 286명, 불학 무식한 자가 406명이나 되었고, 이들이 사고를 쳐서 연방 정부의 예산을 낭비한 금액이 무려 1억 5천 만 불이나 되었다.

이 명약관화한 통계는 하나님을 섬기는 가정, 사회, 나라가 자손 대대에 이르도록 복 받는다는 사실을 웅변으로 설명해 주고 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의 개인적인 삶을 위해서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차원에서도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도대체 무엇으로...

 학생은 자신의 실수를 지우개로 지웁니다

의사는 봉합하고 붕대를 감아서 감춥니다

건축가는 벽을 쌓고 칠을 해서 가립니다

농부는 가래로 흙 속을 묻어 버립니다

하지만 신앙의 실패는 도대체 무엇으로 덮을 수 있겠습니까?

 

 

믿음은 구원의 밧줄을 붙잡는 것

 

전에 나이아가라 폭포 상류에서 배가 한 척 뒤집혔다. 그 배에는 두 사람이 타고 있었는데 이 사람들을 구하려고 강가에서 밧줄을 던졌다. 그랬더니 한 사람은 그것을 붙잡고 살아 나왔는데 다른 한 사람은 밧줄을 붙잡지 않고 때마침 떠내려오던 큰 통나무를 붙잡았다. 그랬더니 그 나무는 사람을 실은 채 폭포로 떨어져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왜 그랬을까? 그 나무토막은 강가에 있는 사람과 연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나무가 크기는 했어도, 붙잡기는 좋았어도 구출 받는데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와 같이 인간의 공로나, 희생이나, 수양이나, 지식은 다 좋아 보이기는 하나 구원을 받게 하지는 못한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만이 하나님의 위대한 손과 연결이 되는 것이다. 

 

 

믿고 행하라

 

화재의 현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 소년이 불길을 피해 2층 지붕 위로 올라갔다. 밖으로 급히 피신한 아버지는 “얘야, 내려. 아빠가 받을께”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연기가 위로 치솟았기 때문에 소년은 아버지를 볼 수가 없었다.

“아빠. 보이지가 않아요. 아빠가 보이지 않아요.”

겁을 먹은 소년은 울먹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소년의 아버지는 “얘야, 용기를 내어 뛰어 내리렴. 난 너를 볼 수 있단다. 아빠를 믿으렴”하고 소리쳤다.

결국 소년은 아버지를 믿고 연기 속으로 뛰어 내렸고 살아났다. 믿음은 현실을 보지 않고 전능자에게 의탁하는 것이다.

 

 

결단하는 믿음

 

큰 양조장을 경영하는 분이 어떻게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데, 그 사람이 마음속에 생각하기를 남을 죄짓게 하는 이 사업을 그만둬야겠다 생각하고, 그 수입이 많은 양조장을 그만 두는 것도 보통이 아닌데 그는 은혜 받은 그 길로 집에 돌아와서 도끼로 술이 들어 있는 큰항아리를 다 깨뜨려 버리고 말았다. 그랬더니 그 동네 도랑에 그날은 술이 콸콸 흘러내렸다. 동네 사람들은 아깝다고 했으나 그는 과감히 끊을 것을 끊었던 것이다. 후에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는 올바른 신앙 생활을 하다가 세상을 떠났는데, 그가 운명하는 날 밤 동네 사람들이 보니까 그 집 지붕에서 불이 활활 타고 있더라는 것이다. 실제로 타지는 않았으나 물통을 들고 뛰어갈 정도로 불타는 모습이었다는 것이다. 얼마나 그가 열심 있게 신앙생활을 하였던지 성령의 불이 크게 그 집에 임하였던 것이다.

 

 

믿음은 에너지 원천

 믿음이란 곧 힘이고 에너지이고 능력이다.

내가 잘 아는 분의 아들은, 키가 170센티인 아버지보다 5센티쯤 더 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아들은 그때 고등학교 1학년이었는데 165센티였다. 그런데 불과 1년 사이에 아들의 키는 아버지와 같아졌다.

“두고 보셔요. 앞으로 1년 안에 5센티 저 자랄 테니까요.”

아들의 그 확고한 믿음은 그 아버지의 농담을 통해 나에게 전해졌다. 그때 내가 말했다.

“자네 아들의 믿음이 그렇다면 그렇게 될 테니 두고 보게.”

지금 그 아이의 신장은 175센티이다. 한 치의 오차도 없다. 왜 이런 일이 가능할까? 우연의 일치일까? 결코 아니다. 믿음대로 된 것이다.

믿 음의 적용은 창조적인 것에든 파괴적인 것에든 마찬가지로 유효하다. “나는 하는 일마다 안 돼. 운이 없는가 봐. 이번에도 하나마나 실패할걸.” 이런 사람은 그의 믿음대로 실패의 삶을 산다. 그러나 “난 과거에 실패를 거듭했어. 세상이 다 아는 일이지. 그러나 이번만은 꼭 성공할 거야. 성공을 이렇게 확신하고 있는데...” 하는 사람은, 그의 믿음이 감정적인 차원이 아니라면 반드시 적중한다.

직장인이라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무능해서 영원히 말단 신세를 면치 못하리라고 믿는 사람은 늘 그 모양 그 꼴로 지내게 된다. 나는 동료들 중에서 가장 먼저 과장이 된다고 확신하는 사람은 정말 그렇게 되고야 만다. 왜 그럴까?

믿음이 있으면 그것이 어떠한 믿음이든 언젠가는 행동으로 표출되기 때문이다. 무능을 믿으면 진급할 수 없는 행동을 나타내게 되고, 유능을 믿으면 인정받을 수 있는 행동을 하게 된다.

뾰족한 처방을 하지 않아도 좋을 가벼운 질병의 환자에게 의사는 때로 증류수를 주사하기도 한다고 한다.

“주사를 맞았으니 이젠 아프지 않을 것이오.”

의사의 이 말을 믿는 환자는 신통하게도 배앓이나 두통이 사라지는 경험을 한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그 의사 정말 용해.”

그러나 실상은 의사의 처방이 환자를 낫게 한 것이 아니라 환자의 믿음이 환자를 낫게 한 것이다.

 

 

깨닫는 그 순간

 

오랫동안 중국에서 선교사로 일한 바 있는 허드슨 테일러에게 어느 젊은 중국인 신사가 찾아와서 물었다. “저는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으로서 정식으로 출발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제게는 다음의 두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첫째, 성경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아야 하며, 둘째 신앙의 연조가 몇 년이나 되어야 합니까?” 이런 질문에 대하여 테일러 목사는 이렇게 반문했다.

“램프의 심지가 얼마 동안 타야 빛을 내지요?”

“그야 물론 심지에 불을 붙이는 순간부터 빛을 내지요.”하고 신사가 대답했다. 그때 테일러 목사는 이렇게 말해 주었다.

“그 렇습니다. 기독교인이 되는 것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성경에 대한 지식이 어느 정도이며, 또 몇 해 동안 교회 생활을 하였는가 하는 문제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램프의 심지에 불이 붙는 순간부터 빛이 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앙의 연조가 별로 없다고 해도, 그리고 성경에 대한 지식이 별로 없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나를 불러 주시고 필요한 인간으로 사용하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고 겸손히 받아들이기만 하면 그 순간부터 남녀노소, 빈부 귀천을 막론하고 벌써 빛이 나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벌써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 아니겠습니다?” 테일러 목사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신사는 기쁨이 가득한 채 돌아갔는데 후일 중국의 교회를 위해 크게 공헌하는 인물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용납되는데 무슨 조건이 필요할까? 단지 가난한 마음으로 용납해 주심을 감사하며 나아갈 때 주님의 용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주인을 전도한 머슴의 믿음

 

천원군에 살던 머슴 이씨는 가난한 중에도 열심을 다하는 주님의 성도였다. 교회 예배에 열심히 참예하면서 주의 일을 잘 받들었는데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게 되면서 원하는 대로 교회 일을 하지 못함을 안타까이 여기게 되었다. 머슴살이 첫 해 맥추 감사절이 되었는데 교회 예배에도 참예치 못했으니 얼마나 마음이 아픈지, 그 날 밤은 한잠도 못 자고 머슴방에서 울면서 기도하였다. “주여 나로 하여금 주일도, 절기도 제대로 지킬 수 있게 도와주소서.” 그리고 기회 있을 때마다 주인에게 전도하기 시작했다.

다 음 해가 되었다. 여름 보리 추수 후에 교회에서 지키는 맥추 감사절에 참예하고 싶다고 주인에게 말했다. 처음에는 거절당했는데 몇 번 부탁한 후에 허락을 받았다. 다음은 예물을 드려야 되겠는데 가지고 있는 것이 없어서 다시 주인에게 말했다. 마침내 보리 한 가마를 주어서 그것을 져다가 예물로 바치게 되었다. 그런데 그 주일 그 교회에서는 큰 변화가 있었다. 주인과 머슴이 같이 절기를 지키는 주일이 되었고, 머슴 이씨에게는 적은 것으로 바쳤는데, 큰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계기가 된 주일이었다. 그 후에 이씨 머슴은 주인집을 다 구원했고 경제적으로도 풍족해져 교회를 잘 받들었다.

 

 

믿기만 하면

 

어느 전도 집회에서 전도자가 모든 집회를 끝내고 있을 때, 한 젊은이가 급히 달려와서 이렇게 물었다. “목사님 내가 구원받으려면 무슨 일을 해야 하겠습니까?” 이에 그 전도자는 대답하기를 “젊은 친구, 너무 늦었어. 이미 늦었어, 이미 늦었다니까”라고 했다. 그 젊은이는 또 물었다. “이 전도 집회가 끝난 뒤에 왔기 때문에 늦었다는 말씀인가요?” 그 전도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젊은이, 자네는 구원받고 싶으면 무언가 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이미 수천 년 전에 구원의 역사는 십자가 위에서 완성되었다네. 지금 자네가 구원받기 위해 할 일이라곤 아무 것도 없고 다만 무릎 꿇고, 예수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이미 행하신 일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네.” 그러자 그 젊은이는 무릎 꿇고 기도를 드렸다. 그때 밝은 빛을 보았고 구원을 받게 되었다.

 

 

믿음의 대상은 나 자신

 

갑이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 하늘의 구름이 돈으로 바뀌어서 내 앞에 떨어졌으면 좋겠다. 만 원짜리로 바뀌면 적어도 1천억 원은 될 거야.”

그 앞에 팔베개를 하고 누워 있던 을이 갑의 말을 받았다.

“일 천억? 와! 그걸 다 뭐해? 나에게 반만 주겠니?”

그러자 코웃음치는 갑.

“웃기지 말아. 왜 네게 반을 주니?”

“그럼 10분의 1만 줘.”

“안 돼.”

“야. 그럼 백 분의 1만 주겠니?”

“백 분의 1이라도 10억인데, 10억을 왜 그냥 주니?”

“그래 그럼 1억은 주겠니?”

“야 임마, 1억은커녕 땡전 한푼 못 준다.”

“넌 애가 왜 그리 인색하냐? 1천억이 공짜로 생기는데 1억 원도 못 줘?”

“이 벼엉신아, 너도 저쪽 구름을 차지하면 1천억이 될 수 있는데 왜 내 것만 가지고 그러니?”

우스개 소리 같지만 하나도 우습지 않다. 오히려 바짝 긴장된다.

세상 사람들 중에는 갑처럼 창조적이고 긍정적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을처럼 소극적이고 구걸형인 사람도 있다. 갑은 1천억을 꿈꾸는데 을을 고작 1억 원을 구걸하고 있다.

그들이 바라본 것은 뜬구름에 불과하다. 그러나 같은 뜬구름이라도 두 사람의 입장은 대조적이다.

갑은 구름 속에서 1천억을 잡을 수 있다고 상상할 만큼 꿈이 크다. 그는 구름이 1천억으로 변해서 자기 앞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모습을 바라본다. 상상이 아니라 실감하고 있다. 그러니까 그냥 줄 수 없다는 것이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다. 그러니 출생의 순간부터 내 인생은 나의 것이다.

살기 위해서는 숨쉬는 일부터 내가 해야 한다. 누가 내 대신 숨쉬지 못하고 먹어 주지 못한다. 살고 싶은 한 내가 숨쉬고, 내가 먹어야 한다. 늘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건강을 지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다.

사람은 자기를 믿어야 한다. 삶의 가치를 믿고, 내 앞에 닥칠 모든 일을 척결해 나 갈 수 있는 나 자신의 능력을 믿어야 한다. 자기 자신의 능력이나 존재 의의에 회의가 생긴다면 행복도 성공도 등을 돌린다.

사람에게 우연히 닥쳐오는 일이 있을까. 당신의 현재 상황은 당신의 지식, 감정, 성격, 믿음, 그리고 당신이 과거에 쌓아온 일들에 대한 총집계일 뿐이다. 또한 과거의 결과인 현재에 대해 어떻게 응전하느냐에 따라 미래가 달라진다.

당 신 자신에 대한 믿음 여하에 따라 1천억의 인생도, 구걸하는 인생도 될 수 있다. 성취의 인생으로 올라설 수도 있으며, 멸망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 달콤한 인생이 될 수도 있고, 쓰디쓴 인생이 될 수도 있다. 믿음 여하에 따라 능력있는 사람도 되고 무능한 사람도 되며, 성공인이 되는가 하면 자살로 생을 마감할 수도 있다.

모 든 것은 당신에게 달려 있다. 당신의 친구가 1천억을 가졌어도 당신의 것은 아니다. 설령 1천 분의 1을 나눠준다 할지라도 그건 당신의 능력에 의한 것이 아니다. 친구의 자선 여하에 따라 당신의 삶의 질이 달라질 수는 없지 않은가?.

믿음의 대상은 당신의 부모도 아니고 친구도 아니다. 바로 당신 자신이다.

 

  

 

워너 메이커의 성공담

 

백화점 왕 워너 메이커에게 어느 신문기자가 인터뷰하며 다음과 같이 물었다.

“당신으로 하여금 오늘날 성공에 이르게 한 어떤 비결이 있었습니까?”

그때 워너 메이커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내 가 11살 때 시골에서 올라와 작은 주일학교에 나가게 되었다. 그때 주일학교 선생님이 성경을 사라고 해서 2불 75센트를 주고 붉은 가죽으로 장정된 성경을 샀다. 그것이 오늘날 나를 구원에 이르게 했고 오늘의 복을 받도록 했다.”

 

 

효과적인 성경 읽기를 위한 방법

 

① 기도로 시작하라.

성경을 읽을 때 당신의 마음이 열리도록 기도하라.

② 그 날의 잠언을 선택하라.

매달 그 날짜에 해당하는 잠언을 읽어라. 예를 들어 그 달의 첫    날에는 잠언1장을 읽어라.

③ 성경을 읽을 때는 연필을 이용하라.

그 날의 잠언을 읽을 때 당신의 눈에 띠는 구절에 밑줄을 그어    라.

당신에게 와 닿는다고 생각되는 구절에 동그라미를 표시하라.

④ 깊이 있게 읽어라.

당신이 표시한 구절과 관련된 관주를 찾아 읽어라. 주석이나 해    설서 읽기는 자제하라.

이렇게 성경 말씀을 찾으며 읽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그 분의 말    씀으로 당신에게 이야기하실 것이다.

⑤ 당신이 읽은 구절에 관해 질문을 하고 그 질문을 기도로 하     나님께 아뢰어라.

  ♠ 이 질문이 어떻게 나에게 연관되어 있는가?

  ♠ 하나님께서 내 삶 가운데 바뀌길 원하시는 부분이 있는가?

  ♠ 이 구절에서 내가 무엇을 찾을 수 있는가?

⑥ 성경 말씀 중 한 구절을 암기하라.  

⑦ 당신이 암기한 구절을 놓고 기도하라.

암송한 구절을 가지고 당신과 타인을 위해 기도하라.

⑧ 기록하라.

공책이나 성경에 있는 여백에 당신이 한 기도를 짤막하게 써 넣    어라. 그것 옆에는 날짜를 써라.

나중에 보더라도 당신이 기도한 것이 무엇인지 기억할 수 있도    록 쓰는 것이 좋다.

⑨ 응답을 기록하라.

하나님이 당신의 기도에 응답하실 때 당신의 기도 옆에 메모를 하라.

하나님의 응답은 당신이 매일 기도하는 것을 도와 줄 것이다.

잠언을 주제로 기도하는 것을 마친다면 시편이나 서신서를 같은    방법으로 읽도록 하라.

 

 

뽀나 목사의 ‘성경 예찬 詩’

 

내가 피곤할 때 성경이 나의 침대가 되고,

내가 어둠 속에 있을 때에 성경이 나의 빛이 되고,

내가 굶주릴 때에 성경이 나의 떡이 되고,

내가 무서울 때에 성경이 나의 갑옷이요,

내가 병들었을 때에 성경이 나를 고쳐주는 양약이 되며,

적막할 때에 성경에서 내가 많은 친구를 찾는도다.

 

만일 내가 일하려면 성경의 나의 기구요,

놀 때에는 성경이 나의 즐거운 풍류로다.

만일 내가 무식하면 성경이 나의 학교요,

만일 내가 빠지게 되면 성경이 나의 굳은 땅이로다.

만일 내가 추우면 성경이 나에게 열이 되며,

만일 내가 떠오르면 성경이 나의 날개로다.

성경은 나의 지도자, 의복, 피난처, 꽃동산, 태양, 샘물, 신선한 공기로다.

 

위대한 책이여!

위대한 책이여!

 

 

성경을 생활 이념으로 삼는 미국의 대통령들

 

미국 사우스다코다주에는 러시모어라는 유명한 산이 있다. 이 산의 정상에 있는 화강암 벽에는 미국 대통령들의 얼굴이 조각되어 있다. 미국 역사상 가장 훌륭했던 네 명의 대통령인 조지 워싱톤, 토마스 제퍼슨, 데오도르 루즈벨트 및 에이브라함 링컨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

이 조각상은 이집트의 피라미드보다도 더 큰 것으로 워싱톤 대통령의 머리만 해도 건물의 5층 높이인 18미터이며, 그 전체 높이는 42미터나 되는 것이다. 이는 1927년에 시작하여 14년 이상 걸려 조각된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조각상 중의 하나이다.

여 기에 조각된 인물들의 위대한 점은 하나같이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그들의 생활 이념으로 살았다는 것이다. 조지 워싱톤은 미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는 자리에서 “성경이 아니면 세계를 다스릴 수 없다.”고 하면서 성경에 손을 얹고 선서를 하였다. 토마스 제퍼슨은 미국 독립선언서의 작성자로서 “미합중국은 성경을 반석으로 삼아 서 있다”고 강조하였다. 링컨은 가난하여 제대로 학교 교육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언제나 성경을 그의 곁에 두고 부지런히 읽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힘을 썼다. 대통령이 된 뒤에도 그는 집무하는 책상 위에 늘 성경을 두고 읽었으며 “성경은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좋은 선물”이라고 말하였다. 루즈벨트는 신실한 그리스도인 부모 밑에서 성장하였다. 그는 미국 대통령 가운데 최 연소자로 대통령이 되었던 사람이다. 그는 말하기를 “어떠한 방면에서 활동하는 사람이든지를 막론하고 그가 자기의 생을 참되게 살기를 원한다면 나는 그에게 성경을 연구하라고 권하겠다.”고 했다.

 

 

말씀(생수)의 기갈

 

21세기의 전쟁은 석유도 정치도 아닌 물을 둘러싼 전쟁이 될 것이라고 세계 은행은 벌써부터 으름장이다. 몇몇 통계가 그 심각성을 예고한다. 세계를 통 털어 물의 수요는 21년마다 배로 늘고 있다. 물 부족으로 국민 건강과 경제가 위협받고 있는 나라는 현재 80개국에 이른다. 세계 인구의 40%인 20억 인구가 깨끗한 물을 마시지 못하고 있다. 중동ㆍ북아프리카ㆍ중국 북부ㆍ인도 남부ㆍ멕시코 등지에서 물 부족이 날로 심각해지고 2025년까지 1인당 공급 가능량은 80%까지 떨어질 전망이다.

식량 생산에 경작지 부족보다 농업용수 부족이 더 큰 위협으로 등장하고 있다. 세계 인구의 40%가 2백 50개 강 유역에 맞대 살고 있다. 흐르는 강물에 국경이 분명치 않고 상류가 하류 지역 국가간에 물을 둘러싼 긴장과 적대감은 갈수록 고조된다. 나일ㆍ니제르ㆍ티그리스ㆍ메콩ㆍ브라마푸트라ㆍ갠지즈ㆍ인더스 강의 유역에 국가들은 서로 많은 물을 끌어쓰기 위해 쟁탈전을 벌인다.

물의 부족 상태는 우리에게 앞으로 많은 어려움을 안겨 줄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또 다른 갈함이 있으니 말씀의 부족이다. 성경은 이미 예언하고 있다.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암 8:11)

 

 

 

영혼의 생수

 

냉장고에서 꺼내 마시는 시원한 생수 한잔은 아침 기분을 특히 상쾌하게 해 준다. 아침 약수터에서 갓 받아 온 생수는 먼 수원지로부터 끌어와 수도국에서 처리를 거친 후 수도관을 통해 집까지 오느라고 많은 시간을 소비한 늙은 수돗물에 비해 얼마나 젊고 싱싱한가!

우 리는 일생 동안 대략 물을 3만 리터 정도 마신다. 인체에 있는 동맥과 정맥의 총 길이는 10만km나 되며 그 속을 흐르는 피의 대부분(70∼80%)도 물이 차지하고 있다. 우리는 몸에 갖고 있는 물의 2%만 잃어도 갈증을 크게 느끼게 되며 갑자기 7%정도를 잃으면 혈액순환이 멎고 죽게 된다.

물이 없으면 동물이나 식물의 그 어느 것이라도 살 수 없다. 물은 모든 호흡 있는 것들의 생명이다. 예수님은 영혼의 생수이시다. 일생 동안 마시고 마셔야 할 생수는 예수님이시다. 우리는 일생 동안 예수라는 생수의 물을 길어야 한다.

목 마르고 목마를 수밖에 없는 것이 현대인이다. 그들은 과학과 학문과 이성의 노예가 되어 있다. 우리를 진정으로 채울 수 없는 것들에 목을 매고 가르치고 배운 바 대로 예수 없는 인생을 살고 있다. 만약 이 땅에서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그 끝은 공허한 무덤일 뿐이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나라를 일으키는 길

 

“나라는 망하고 민족은 분산되어 가는 이때 누구든지 이제는 방법이 없다. 이제는 왜나라의 정책에 순응할 수밖에 없다고까지 부르짖는 사람이 있게 되고 본즉 모든 점에서 낙망하게 되었다. 선생은 분연히 우리가 낙망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 우리는 우선 정신상의 수양을 쌓아야 하고, 그 수양을 쌓으려면 예수교를 믿어야 한다 하여 동네에 예수 교회당을 짓고 목사를 모셔다가 설교를 듣고 교도를 모집한 지 얼마 아니 되어 수백 명의 교도가 모이게 되었다.”

위의 글은 남강 이승훈 선생과 함께 오산에 있으면서 신앙생활을 했던 김도태의 증언이다.       

민 족과 인간의 진정한 성숙과 변화는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다. 남강 이승훈은 105인 사건으로 다년간 감옥에서 지내는 동안 거의 모든 시간을 성경 읽기와 기도 생활로 보내었다. 신약 성경만 일 백 번 이상 읽었다. 남강 이승훈의 민족 역사에의 공헌은 이런 개인적 신앙의 성숙과 무관치 않으며, 이는 역시 말씀으로 변화되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하나님의 말씀은 공짜로 들을 수 있다

 

미국에 살고 있는 교포가 모처럼 야구 구경을 갔다. 몸에 감기 기운이 있어 잘 아는 의사에게 이야기를 했더니, “오렌지 쥬스를 많이 마시고 집에서 쉬면서 몸을 따뜻하게 하고 소화가 잘 되는 음식으로 식사를 하라”고 일러주었다. 이 사람은 돌아와 그대로 했는데 며칠 후 그 의사에게서 계산서가 날아왔다. 집에서 혼자 조치를 했는데, 계산서를 보낼 수 있느냐 하며 화가 나서 잘 아는 변호사에게 전화를 했다. 처방은 의사가 했으니 그 값을 지불해야 마땅하다는 말을 듣고 결국 돈을 지불해야 했다.

그런 후 얼마 있다가 또 계산서가 날아왔는데, 그것은 변호사로부터 온 것이었다. 전화로 상담을 했으니 그 값을 지불해야 했던 것이다. 모든 문제와 일은 돈으로만 해결되는 시대임을 알 수 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새삼스러워진다.

 

 

공격당하는 성경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사 40:8).

세 계 역사에서 성경만큼 많은 사람에게 애독되고 있는 책은 달리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만큼 박해를 받아 온 책도 또한 없을 것이다. 그것은 교회의 역사와도 관련되어 있다. 성경은 전세계 사람들의 영혼에 활력과 위로를 주어 왔다.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쓰여진 성경에는 분명히 사람을 돕고 구원할 능력이 숨겨져 있다. 그러나 무신론자들은 이 성경을 부정하고, 추방하거나 소각 처분해 왔다. 성경은 아무리 공격을 받아도 없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약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 련이나 중국, 북한 그리고 기타 사회주의 제국에서는 지금까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성경이 소각되고 공격을 받아 왔다. 그리고 현재도 성경을 인쇄하거나 공개적으로 매매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을 채우는 것은 사람이 만든 이데올로기가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다. 자국 내에서 인쇄할 수 없기 때문에 지금까지 서방측으로부터 많은 성경이 반입되어 전달되었다.

 

 

당신에게 성경은?

 

어떤 이는 “성경은 여행자의 지도요 순례자의 지침서이며 비행사의 나침판이요 병사의 칼이며 그리스도인의 헌장”이라고 했다. 조지 뮬러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우리의 영적 생활의 활력은 우리의 삶과 생각 속에 말씀이 얼마나 차지하고 있는지와 비율이 꼭 같다.”

만 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필요로 할 때 섬기는 일에만 몰두한다면 빈혈증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되고 말 것이다. 반면에 말씀을 보는데는 시간을 많이 보내면서 섬기는 삶을 살지 못하면 소화 불량증에 걸리게 된다. 그래서 이 양자 간에는 항상 균형이 이루어져야 한다. 성경은 우리의 삶을 평가하는 하나님의 관리 책임서이다. 위로, 힘, 훈계, 교훈의 말이 없는 곳이 없다. 무디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관하여,

“만일 인내가 필요하면 조용히 앉아서 욥기를 상고하라. 강경한 사람이면 모세와 베드로에 대해 읽어라. 무릎을 끓고 기도하지 못하면 엘리야를 보라. 당신의 마음에 찬양이 없으면 다윗에게 귀를 기울이라. 정치가라면 다니엘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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