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어떠한 존재인가?
올바른 신앙생활을 위해서는 하나님을 바로 알아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것은 사람을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이 된다. 사람의 나약함과 죄악함을 바로 알 때라야, 강하고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기 때문이다.
성경은 사람을 세 유형으로 나누어서 말한다. 첫째는 처음 지음받은 상태의 무죄한 사람이다. 둘째는 죄 아래 있는 사람, 즉 죄인이다. 셋째는 죄에서 해방된 사람, 즉 중생인이다. 이 중에서 처음 지음받은 상태의 사람을 살피는 것은 가장 우선되어야 할 과제이다. 그래야 그것을 근거로 하여서 지금 우리의 죄인된 모습을 진단할 수 있고, 바람직한 내일의 중생인의 모습을 그려 볼 수가 있기 때문이다. 처음 지음받은 사람의 모습에서 우리는 다음 몇 가지 점들을 유의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1.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기쁘신 뜻에 따라서 천지를 창조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에 목적이 있었음을 뜻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실 때, 특별한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 그래서 그 특별한 계획에 어울리도록 사람을 독특하게 지으셨다. 그 독특함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음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고 하신 것은 이 때문이다(창 1:26).
이 말씀에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 이외에도 모양이라는 말이 등장한다. 그러나 형상과 모양을 별개의 것으로 생각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형체가 없으시다. 따라서 하나님의 모양을 어떤 외형적인 것과 연관하여 생각할 수가 없다. 형상과 모양은 때때로 구분이 없이, 서로 교대적으로 사용되어진다. 창세기 1:26절에는 형상과 모양이 동시에 등장한다. 그러나 1:27은 형상만을 말하고, 5:1은 모양만을 말한다.
하지만 5:3은 또다시 둘 다를 사용한다. 히브리식 표현에는 강조를 위하여 비슷한 의미를 가지면서도 각기 다른 단어를 반복해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신 6:5에 기록된 "너는 마음을 다하여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말씀의 경우를 보자(예수님께서는 마 22:37에서 이 말씀을 인용하여 이르시기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다). 여기서 마음과 성품과 힘, 또는 마음과 목숨과 뜻은 각각 별개의 것을 가리키는말이 아니다. 반복을 통해서 강조를 하려고 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면 하나님의 형상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우리는 다른 피조물과 달리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것들 중에서 그 내용을 찾아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사도 바울께서는 새 사람을 가리켜서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은 자니라"(골 3:10)고 하셨고, 또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4)고 하셨다. 이 말씀을 보면 참지식, 의, 거룩함이 각각 하나님의 형상으로 표현되고 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좇아 하나님처럼 참지식과 의와 거룩함을 지닌 존재로 지음을 받았다.
그러나 사람은 범죄로 말미암아서 이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참 지시과 의와 거룩이 아닌 단지 거짓된 지식과 왜곡된 의와 거룩함의 모양들만 가지게 되었다. 참지식과 의와 거룩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된 자들에게만 회복이 되어진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한 사람은 더 이상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식으로 전략되어 버렸기 때문이다(엡 2:3).
그러면 범죄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전혀 없는 것인가? 그래서 범죄한 사람은 다른 피조물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것인가? 사람은 범죄한 이후에도 여전히 다른 피조물과 구별되는 특징들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께서 친히 코에 불어 넣어 주셨던 생기는 범죄한 이후에도 여전히 가지고 있다. 그리고 다른 피조물들을 지배하고 다스리게 하자는 하나님의 계획대로, 사람은 여전히 피조물들을 정복하고 지배하고 다스리고 있다. 이 때문에 사람은 범죄한 이후에도 만물의 영장일 수가 있다. 이렇게 볼 때, 사람이 다스려야 할 피조물을 숭배하거나 그 앞에서 두려워하는 것은 우상숭배일 뿐만 아니라 창조질서를 위반하는 죄가 된다.
그러므로 참지식, 의, 거룩은 범죄로 말미암아 상실해버린 하나님의 형상이지만, 사람이 지니고 있는 영성(靈性)과 피조물에 대한 지배권은 범죄와 관계없이 지니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들이 영적 진리를 분별하게하거나 하나님 앞에서의 공로를 이룰 수 있게 하는 것은 아니다.
2. 육체와 영혼
사람은 육체와 영혼을 가진 존재로 지음을 받았다. 육체는 흙으로 빚어졌다. 영혼은 하나님께서 불어 넣으신 생기로 말미암았다. 우리는 육체와 영혼이 결합되어 있는 상태를 가리켜서 살아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죽음은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는 것이다. 사람이 죽으면 육체와 영혼은 각기 그 왔던 곳으로 되돌아간다.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하나님께로 되돌아간다.
육체와 영혼은 각기 그 근원이 다른 것처럼, 그 특성도 다르다. 그래서 서로 갈 등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다. 마음은 원하지만 육체가 연약해서 그 소원을 이루지 못하는 때가 있다. 때로는 육체의 욕망이 영혼의 탄식을 자아내는 때도 있다. 또 하나님의 거룩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이루기 위하여서는 육체의 요구를 억제해야 할 때도 많다. 그래서 사도 바울께서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하고 탄식하였다. 경건한 사람일수록 이러한 육체와 영혼의 갈등은 더욱 심해진다.
사람은 한 그루의 나무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육체는 나뭇잎에 해당하고, 영혼은 열매에 해당한다. 잎사귀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는 나무는 찍혀 불에던지운다. 따라서 사람은 영혼에 더 치중해야 한다. 그러나 나무를 아름답게 단장하고, 알찬 열매를 가능하게 하는 나뭇잎 즉 육체도 적절하게 보살펴야 한다. 육체는 하나님께서 친히 만드신 것이다. 그러기에 육체는 선하고 존귀하다.
육체를 죄악시 하거나 천시하는 것은 옳치 못하다. 더욱이 우리의 육체는 장차 부활하여 영혼과 더불어서 영원히 조화를 이루며 지내게 될 것이다. 육체와 영혼의 갈등은 육체 자체가 악하기 때문이 아니라, 죄로 말미암은 결과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육체를 적절히 관리해야 한다. 육체가 죄의 악한 영향에서 벗어나게 되기를 힘써야 한다. 그리하여 의의 병기를 삼아야 한다. 그리고 육체를 통해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기를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영혼에는 두 가지의 기능이 있다. 하나는 사리를 분별하고 판단하는 이지적인 기능이다. 다른 하나는 선악을 구별하여 행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기능이다. 이것은 하나의 영혼이 가지고 있는 두 가지의 기능이다. 사람에게 이 기능을 담당하는 기관이 각각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지적인 기능을 담당하는 혼이 따로 있고, 종교적인 기능을 담당하는 영이 따로 있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성경에는 영(spirit)과 혼(soul)이 별개인 것처럼 구별되어지게 사용된 경우가 없지 않다. 사도 바울께서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편지하시기를,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존되기를 원하노라"(살전 5:23)고 하셨다. 또 히브리서의 저자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한다"(히 4:12)고 하셨다.
그러나 성경은 더 많은 곳에서는 영과 혼이 특별한 구분없이 서로 교대적으로 사용되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영혼의 상태를 가리켜서 지금 내 마음(soul)이 민망하다고 하셨다(요 12:27). 그러나 다른 곳에서는 심령(spirit)에 민망히 여기셨다고 했다(요 13:21). 민망히 여기는 것이 영이기도 하고 혼이기도 하다. 또 예수님께서는 그의 목숨(soul)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셨다고 했다 (마 20:28). 그러나 다른 곳에서는 크게 소리를 지르시고 그 영혼(spirit)이 떠나 가셨다고 했다(마 27:50). 하나의 생명이 영으로도 표현되고 혼으로도 표현되었다. 이러한 사례는 다른 여러 곳에서도 나타난다. 그러므로 영과 혼이 각기 다른 두 개의 실체가 아니라, 하나의 영혼이 지닌 두 기능이라고 보는 것이 좋다.
3. 복된 환경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복되게 창조하셨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창조한 사람을 보시고 심히 좋아하셨다. 그러므로 사람의 생명은 복된 것이다. 아무리 하찮게 여겨지는 생명이라 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복된 것이다. 이 세상에 우연하게 또는 재수없게 태어났다고 여겨질 만한 생명은 있을 수 없다. 여기에 모든 사람의 생명과 인권을 존중하게 여겨야 할 이유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생명을 귀하게 여기시기 때문에, 독생자까지 희생시켜서 그 생명을 값주고사신다. 혹 표범이 그 얼룩점을 바꾸는 일이 일어날 수 있을런지는 몰라도, 생명을 복되게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변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생명을 소홀히 하거나 헤치는 것은 크나큰 죄악이다.
사람의 생명뿐만 아니라, 삶도 역시 복된 것이다. 아무리 고달픈 삶이라고 하더라도 삶이란 복된 것이다. 삶에 고통이 들어온 것은 죄로 인하여 생겨난 결과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항상 감사함으로 활기찬 삶을 살아야 한다. 어떤 종교에서처럼, 사람과 인생 그 자체를 고통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우리는 삶이 고달플수록 그 원인이 되는 죄를 찾아서 회개하고 바르게 하기를 힘써야 한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연단으로 주시는 삶의 고통은 예외이겠지만, 대부분의 경우 우리의 삶은 더 없이 복된 상태로 변화되어질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시고 에덴 동산에서 살게 하셨다. 거기에는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각종 나무들이 있었다. 저 솔로몬의 옷보다 더 고운 백합화가 있었다. 아름답게 지저귀는 새소리가 있었다. 또 한 강이 발원하여 동산을 적셨다. 그 강은 다시 아름다운 네 개의 강으로 나뉘어 흘렀다. 부패와 오염이 전혀 없는 복된 환경이었다. 그러나 사람의 죄는 복된 환경을 무질서와 혼란으로 바뀌어 놓았다. 땅은 박토로 변했다. 엉겅퀴와 가시가 생겨났다. 수고의 땀을 흘려도 그 댓가를 얻기가 힘들 정도의 악한 환경이 되고 말았다.
환경의 오염은 하나님의 아름다운 창조에 대한 도전으로 이해될 수 있다. 기독교인들은 최근 전세계적으로 일고 있는 환경보호 운동에 적극 앞장설 필요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복되고 아름다운 창조에 대한 보존 또는 회복을 위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부 환경론자들의 경우처럼, 우리는 자연 그 자체를 하나님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자연은 우리가 다스리고 지배하여서, 더 큰 아름다움으로 가꾸고, 하나님을 찬송하는 도구로 삼아야 할 대상일 따름이다.
4. 사회적 존재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 혼자가 아닌 더불어 사는 존재로 만드신 것이다. 한 남자와 한 여자는 가정을 이룬다. 가정은 사회의 최소단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사람을 사회적인 존재로 창조하셨다. 사람이 필요에 따라서 때때로 골방과 산을 찾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예수님과 사도들께서도 그렇게 하셨다. 그러나 고립주의적인 수도원 생활이나 독불장군식의 삶을 계속하는 것은 재고해 보아야 한다. 산 위에서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던 제자들은 거기에다 초막들을 짖고 살 것을 원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많은 문제들을 안고 사는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던 산 아래로 주님과 함께 내려갈 것을 명하셨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은 머리에서부터 보배로운 기름이 흘러내리는 것처럼 선하고 아름다운 모습이다. 여호와께서는 거기에서 복을 명하신다(시 133:1~3). 그리고 주님께서 명령하신 빛과 소금의 역할도 사회 안에서라야 이루어질 수 있다.
최근에는 독신생활이 늘어나고 있다. 독신생활이 사도 바울의 경우처럼 주님을 향한 최대 희생의 표시일 경우는 예외를 인정할 수 있을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편의만을 위한 독신생활은 많은 죄악의 온상이 된다. 또 하나님의 창조에 비추어 볼 때도 문제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독처하는 것을 좋지 않게 여기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혼은 한 남자와 한 여자로 이루어져야 한다.
한 아내가 여러 남편을 갖는 것이나, 한 남편이 여러 아내를 갖는 것은 옳치 못하다. 사실 족장들을 위시한 성경의 많은 인물들은 여러 아내를 두고 있었다. 하지만 이 사실을 근거로 일부다처제를 주장하는 것은 지나친 속단이다. 그것은 사람이 범죄한 이후에 끌어들인 악한 행위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에 주셨던 본래의 제도는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루는"(창 2:24)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남자와 여자를 동일한 재료로 만드셨다. 또 남자의 머리뼈와 발목뼈가 아닌 갈비뼈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셨다. 이것은 남녀의 동등성을 의미한다. 남녀의 인격에는 우열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남녀의 관계를 종속적인 관계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남녀의 인격은 똑같이 존중시 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 역할에는 서로 구분이 있다. 이것은 마치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에 역할의 구분이 있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이 역할의 구분이 무너지면 가정의 조화가 깨어지고 만다.
부부의 관계, 즉 가정은 사회의 최소 단위이다. 그러므로 부부의 관계는 사회의 여러 관계들에도 확대 적용될 수 있다.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은 인격적으로 동등하다. 그러나 그 역할에는 서로 구분이 있다. 다스리는 자가 있고 섬기는 자가 있다. 가르치는 자가 있고 배우는 자가 있다. 다섯을 맡은 자가 있고 하나를 맡은 자가 있다. 그러나 무엇을 맡았는가 또는 얼마나 맡았는가와 관계없이, 각자가 자기의 역할을 잘 감당할 때 사회는 조화로운 상태를 이룬다. 그리고 그 안에 주님이 계시게 되면, 그 곳은 바로 천국이 되어진다.
5. 노동하는 존재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피조물들을 다스리게 하셨다(창 1:26). 또 땅을 경작하게 하셨다(창 2:5). 다스림과 경작은 노동을 의미한다. 노동은 사람이 범죄하기 이전에 주어진 하나님의 명령이자 축복이었다. 노동은 사람에게 기쁨과 보람을 느낄 수 있도록 해 주시려는 하나님의 배려이었다. 그러므로 노동을 천시하거나 죄악시하는 것은 잘못이다. 노동은 신성한 것이다. 범죄의 결과는 노동 그 자체가 아니라, 노동의 수고와 고통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지금까지 일하고 계신다.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편하고 배부르게 먹고 사는 것을 축복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말아야 한다.
우리는 사람이 노동을 통해서 얻어낸 결과를 가리켜서 문화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사람이 노동하는 존재로 지음을 받았음은 문화적 존재로 지음받았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람들에게는 문화를 적극적으로 만들어 내고 발전시켜야 할 문화적 사명이 주어져 있다. 이 문화적인 사명은 하나님의 창조 목적과 잘 조화되어야 한다. 그러나 사람이 범죄한 이후에는 문화가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대적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바벨탑의 경우가 그러했다. 그리고 사람의 말초적인 향락을 추구하는 방향으로만 나아갔다. 소돔과 고모라의 경우가 그러했다. 오늘날의 세속문화는 바벨탑이나 소돔 고모라의 타락상보다 더 심각하다. 그래서 성도들은 문화를 불신자들에게만 내맡기고, 외면을 해 버리는 일까지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이다. 성도라면 적극적으로 문화에 참여하여 타락한 문화의 변혁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문화를 창달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께는 아름다운 찬송이 되게 하고, 사람에게는 큰 기쁨이 되게 해야 한다.
노아의 방주는 노동없이 저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성전의 건축에는 온갖 아름답게 다듬어진 재료와 각종 기술들이 총동원되었었다. 하나님을 찬양함에는 각종 악기와 공교한 연주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함에는 놀라우리만치 정확한 문법과 단어들이 사용되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은 문화를 개발하고 발전시켜야 할 책임이 있다.
노동에는 정신노동, 육체노동, 가사노동 등 여러 유형이 있다. 그러나 어떤 노동이든 하나님께서 위임하신 일을 이루는 것이라면, 귀천이 따로 있을 수 없다. 노동에 귀천이 없음은 직업에 귀천이 있을 수 없음을 뜻한다. 우리는 노동을 할 때, 하나님께서 그 일을 하도록 우리를 부르셨다는 사명감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자기에게는 어떤 노동을 할 만한 은사가 부여되어 있는지, 또 얼마만큼 부여되어 있는지를 고려해야 한다. 그래야 보람을 느끼면서 효과적인 노동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어떠한 존재인가. 어떠한 존재가 되어야 하는가. 우리는 처음 지음받은 사람의 모습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좇아서 영혼과 육체를 가진 존재로 지음을 받은 만물의 영장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모든 죄악을 벗어버리고, 서로 서로 조화를 이루면서 아름답고 복된 피조물을 잘 다스리고 관리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그리고 이것을 위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워져야 한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요구하는 바람직한 인간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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