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가 옳은가, '예슈아'라고 불러야 하는가?
예수, 예슈아
'예수'를 '예슈아'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 '예수'가 아니라 '예슈아'라고 불러야 옳다고 한다. 예수 믿는 유대인들 곧 메시아닉쥬만이 아니라 세대주의 종말론에 기초한 백투예루살렘 운동 지지자들, 정치적으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지지하는 기독교인들, 흩어진 유대인들이 이스라엘로 귀환하도록 재정지원을 하는 운동을 펼치는 사람들이 그렇게 주장한다. 메시아닉기독교라는, 유대교 풍습을 따르는 신종 교파가 한국과 중국에도 형성되고 있다. 이들이 "예슈아 이름으로" 기도한다.
'예수'가 옳은가, '예슈아'라고 불러야 하는가?
'예수'는 '여호수아'(יהושוע)에서 유래했다. 여호수아의 본명은 호세아(הושע)였다(민 13:8). '호세아'가 '여호수아'가 된 것은 모세가 그렇게 불렀기 때문이다(16절). '여호수아'(יהושוע)를 음가 대로 읽으면 "예호슈아"이다. 그리스어 성경은 이것을 Ἰησοῦς(이에수스)라고 기록했고, 라틴어로 Iesus(이에수스)가 되었다. 'I'가 영어로 바뀌는 과정에서 'Jesus'가 되었다. 한국에서는 선교 초기 '야소'(耶蘇)라고 했다가 '예수'라는 본래 음가로 개정되었다.
'예슈아'는 어디서 온 말인가? 메시아닉쥬들이 '예수'를 현대 히브리어로 대체(substitute)시켜 얻은 명칭이다. ישֵׁוּעַ (예슈아). 야소(耶蘇)라고 불러도 랑그(langue)에 아무 변화 없듯이 빠롤(parole)에서 예슈아를 쓰는 것은 크게 탓할 게 못 된다. 랑그를 뒤집어 억지로 가공하려는 의도가 문제이다.
랑그와 빠롤은 언어학 용어들이다. 스위스 제네바대학교의 언어학자 소쉬르가 정의를 내린 바 있다. 장기놀이에 비유하면 랑그는 규칙에 해당하고 빠롤은 그 규칙에 따라 장기를 두는 자의 구체적인 행위를 의미한다. 전자는 보편적이고 추상적이며 언어사용의 사회적 규칙과 관행을 뜻한다. 후자는 개별 상황에서 각자가 하는 구체적인 말, 언어이다.
'예수'가 아니라 '예슈아'라고 불러야 한다는 사람들은 '예수'라는 이름이 '저주 받은 자'라는 뜻이며, 진째 발음과 같지 않으며, 거짓 이름이라는 까닭을 댄다. 진짜 이름의 발음이 '예슈아'였다고 한다.
'예수'라는 이름이 '저주 받은 자'를 의미함은 사실이다.
이러한 시각으로 보는 전통은 역사적으로 3단계에 걸쳐 진행되어 왔다.
첫째, 유대인 전통이다. 신명기 법전에 따르면 나무에 달린 자는 메시야가 될 수 없다. 유대인에게 율법은 예언이기도 하므로, 이 주장은 타당하다. 인류의 구원자는 저주 받아 나무에 달려 죽었다(신 21:23).
둘째, 바울은 이 개념을 뒤집어엎었다. "그렇다. 신명기 법전 대로 그리스도는 저주 받아 죽은 자이다. 지당한 말이다." 바울은 이 캐치프레이즈를 내세우면서 그리스도의 저주를 받은 것은 우리의 죄 때문이라고 했다.
셋째, 반유대주의(안티세미티즘)이다. 기독교가 세계를 뻗어나가면서 '예수'를 앞세워 유대인을 핍박했다. 예수교의 피해를 본 유대인들은 '예수'라는 이름에 치를 떨었다. 현재의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위 1단계 전통을 철저히 교육시키고, 자신들의 게토 중심으로 그 전통을 관철시켜 왔다. 현대 히브리어 사전은 '예수=저주 받은 자'라고 기록하고 있다고 한다.
메시아닉쥬는 예수 믿는 유대인이다. 메시아닉기독교라는 종파 교회가 여러 나라에 형성되고 있는 것 같다. 유대인 규례를 따라 안식일을 지키고 쪽발 동물과 비늘없는 물고기를 먹지 않는 등 규례를 지킨다. 바울이 반대한 유대 율법주의적 기독교 종파로 발전하고 있는 듯하다.
메시아닉쥬들에게는 '예수'라는 이름이 신성하지 않을 수 있다. '예수' 이름을 앞세운 유럽 기독교 정치세력의 폭력에 시달려 온 그들이 '예수'라는 이름에 혐오감을 가진다는 것은 이해된다. '예수'가 기독교와 안티세미티즘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어느 미국 메시아닉쥬는 'Jesus'가 제우스(Zeus)를 연상시킨다고 하여 싫다고 한다.
다음 몇 가지를 유념하자.
1) 호세아에서 모세에 의해 여호수아로 바뀐 이름 '여호수아'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모세/율법의 예언에 "나 같은 선지자"(신 18:15, 18)를 세운다고 했다. 그는 다름 아닌 여호수아였으다. 초대교회 설립자들은 이 예언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율법서의 예언이 성취된 것이다.
2) 예수 생존 당시에 '예수'는 너무나 일반적 이름이었고 인기가 없었다. 십자가 사건 이후에는 모두들 이 이름을 회피했다. 저주 받은 자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버려진 이름이었다.
3) 야웨 신앙은 히브리 전통에 속하지만, 헬레니즘은 이것을 세계로 파급시켜 기독교 세계화의 중요한 물결을 일으켰다. 히브리 문화 또는 헤브라이즘은 엄밀한 의미에서 헬레니즘을 포함한다. 히브리어 본문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구약성경 셉투아진트는 작은 규모의 히브리인들이 문명이 세계로 퍼져나갈 수 있는 터미널 역할을 했다. 유대인에게도 셉투아진트는 중요한 문헌이다. 신약성경이 언급하는 '성경(에)'라는 말의 배후에는 셉투아진트 성경이 자리 잡고 있다.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그리스어 번역판 구약성경을 참조했다.
4) '예수'만큼이나 중요한 '크리스토스'는 신약성경 저자들이 지어낸 말이 아니다. 기독교인들의 독창적 용어가 아니다. 셉투아진트는 히브리어 '메시야'(마쉬아흐, 렘 42:2)를 '크리스토스'로 번역했다..
5) '예수'를 '예슈아'로 불러야 한다면, 우리는 '예슈아 크리스토스'라고 불러야 하는가? 아니면 '예슈아 마쉬아흐'라고 해야 하는가? 성경에 나오는 모든 이름들을 현대 히브리어로 바꿔야 하는가?
6) 우리의 가슴이 벅차고 심장이 터질 것 같은 보배로운 이름 '예수'는 성경에 그리스어로 기록되어 있다.
구원자 그 분의 고유한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였다. 신약성경에 기록된 대로 '예수'라고 발음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예슈아'는 예수 시대의 발음이 아니다.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현대 히브리어는 구약성경이 기록될 당시의 언어가 아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고대 히브리 문자는 모음을 표기하지 않는다. 유대인들은 몇 천년 1800년 동안 자기의 언어를 잃어버렸다. 모음을 알 수 없고 자음 글자만 있는 히브리어 문서들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의 네 글자(YHWH)를 어떻게 발음하는지 아무도 모른다.
한국 기독인들은 여호와라고도 하고 야웨라고도 발음한다.
벤 예후다 기념우표, 이스라엘
현대 히브리어는 러시아령 벨로루시 리투아니아 태생 벤 예후다(Ben-Yehuda, Eliezer, 1858-1922)가 일상어로 재생시킨 언어이다. 그는 1886년에 이스라엘로 이주한 유태인이다. 파리대학교(솔본느)에서 공부를 했다. 히브리어 재생에 정열을 쏟다가 폐결핵으로 죽었다. 이 구약학자와 그의 부인은 자기 자녀에게 자신이 만든 현대 히브리어를 모국어로 가르쳤다. 히브리어만 사용하게 했다. 그 언어가 오늘날 이스라엘의 공용어인 현대 히브리어이다.
벤 예후다의 노력이 없었다면 이스라엘이 독립을 했을 때 영어, 독일어, 불어, 이디시(Yiddish)라는 언어가 모두 공용어가 될 뻔 했다. 이스라엘 국가 독립을 추구한 시온주의 지도자들은 팔레스타인에 새로운 이스라엘 국가를 세우면 무슨 언어를 공용어로 사용해야 하는가의 문제를 두고 논쟁을 했다. 벤 예후다는 모세가 다섯 권의 책을 기록할 때에 썼던 히브리어 문자와 말을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하고서 히브리어 복원에 삶을 바쳤다.
이스라엘로 이민 간 뒤, 아들 벤 시온(Ben Zion)이 태어나자, 아버지 벤 예후다는 그의 아내와 함께 아이에게 영어, 독일어, 불어, 러시아어, 프랑스어 등을 가르치지 않았다. 자신이 복원한 히브리어를 가르쳤다. 아이는 4살 때 말을 했다. 이 아이는 주변의 다른 아이들과 대화를 할 수 없었다. 히브리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은 전 세계에 한 명 뿐이었다.
여러 지역에서 팔레스틴으로 귀환한 유태인들은 말이 통하지 않아 불편을 겪었다. 국가적 민족적 난제인 언어 때문에 고통을 당하던 유대인들은 재생된 히브리어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했다. 벤 예후다에게 “저희들에게도 히브리어를 알려 주세요" 하고 요청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확산된 현대 히브리어는 모세 시대나 예수 시대의 히브리어와 똑같지는 않다. 재생, 복원했다고 하는 히브리어의 발음이 모세나 예수 당시의 말과 어느 정도 일치하는가를 검증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예루살렘은 전쟁과 불화와 갈등이 그치지 않은 도시이다. 그런데도 이름은 '평화의 도성'이다. 예루살렘 시내에는 현대 히브리어를 만든 벤 예후다를 기념하는 거리가 있다. 다시 그곳에 가볼 기회가 으면 이스라엘의 영웅 벤 예후다 거리를 산책하고 싶다.
예루살렘의 명소 벤 예후다 거리 풍경
손가락이 아닌 태양을 보라. 심볼보다 그것이 의미하는 에쎈스를 보라. '예수,' 버려지고 저주받은 이름, 나무 위에 달려 우리의 추악한 죄를 담당하고 하나님과 화해에 필요한 제물이 되어 주신 그 분의 이름, 구원의 길을 열어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 '예수'는 참으로 존귀하고 거룩하고 영광스럽다.
"천지에 있는 이름 중 귀하고 높은 이름 주
나시기 전 지으신 구주의 이름 예수,
주 앞에 내가 엎드려 그 이름 찬송함은
내 귀에 들린 말씀 중 귀하신 이름 예수.".
예수는 영원히 어제나 오늘이나 그 이름으로 우리게 복을 내린다(찬송가 80장).
필자의 글에 정확하지 않은 부분이 있으면 알려주기 바란다. 시작 부분은 Young Jin Lee 님의 글 일부를 참고했다.
최덕성/현재 브니엘신학교 총장(2013-), 교의학 석좌교수
김영진 목사의 페이스북 글
예수아, 예수아.., ‘예수’라는 이름대신 아예 공용어처럼 사용하는 분들이 있는데 대단히 거북하다.
이런 분들은 예수아, 예수아 만큼이나 말끝마다 ‘히브리적’, ‘히브리적’...하기도 하는데, 이걸 알아야 한다.
1. 본래 ‘히브리(인)’이라는 명칭은 연대기적으로 ‘모세/시내산 이전의 조상’을 부르는 명칭이다.
2. 그런가 하면 ‘이스라엘’이라는 용어및 개념은 시내산 이후에 등장하는 개념이다.
3. 그런데 말끝마다 ‘히브리적’, ‘히브리적’...하는 분들이 말하는 개념들은 사실 연대기적 ‘히브리’도 아니고, ‘이스라엘’도 아니며, 그것은 대개 ‘유대교’적인 것들 일색이다.
4. 유대교라는 개념은 바벨론 포로기 종료 시점인 BC 6세기경에서 유대-로마 전쟁으로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는 시점인 AD 70년경 사이를 이르는 개념이다.
5. 즉, 뭔가 오리지널, 신토불이... 막연한 향수에 젖어 사용하는 개념들이 실상은 오리지널이라기보다 이미 이방 제국/문화와 하이브리드가 완료된 개념들이라는 사실이다.
6. 보다 심각한 것은 바로 ‘예수’라는 이름을 ‘예수아’로 변경해서 부르는 문제인데, 아다시피 예수는 여호수아(יהושוע)에서 유래하였다. 그러나 여호수아의 본명은 호세아(הושע)였다(민 13:8). 호세아가 여호수아가 된 것은 모세가 그렇게 불렀기 때문이다(16절).
7. 여호수아(יהושוע)를 음가 대로 읽으면 <예호슈아>인데 희랍어 성서는 Ἰησοῦς(이에수스)라고 기록하였고, 이것이 라틴어로 Iesus(이에수스)가 되었고 I가 영어로 오는 과정에서 Jesus가 되었다. 우리말로는 선교 초기 야소(耶蘇)라고 불렀으나 예수라는 본래 음가로 개정되었다.
8. 그렇다면 예슈아는 어디서 온 말인가. 그것은 예수를 현대 히브리어로 다시 치환시켜 얻은 말이다. ישֵׁוּעַ (예슈아)
9. 사실 야소(耶蘇)라고 불러도 랑그에 아무 변화 없듯이 빠롤을 예슈아로 쓰는데는 별 문제가 없다. 본인들이 그렇게 좋다는데...그러나 그 랑그까지 뒤집어 가공하려는 것은 큰 문제이다.
10. 한 마디로 예수는 ‘저주 받은 자’라는 뜻이므로 거짓 이름이라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예슈아‘만’ 진짜 이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 이름이 ‘저주 받은 자’라는 전통은 역사적으로 3단계에 걸쳐 이행되어 왔다.
1) 유대인들이 그렇게 가르쳤다. 신명기 법전에 따르면 나무에 달린 자는 메시야가 될 수 없다는 근거에서이다(이들에게 법은 예언이다). 실제로 그 주장은 타당한 것이었다. 실제 저주 받아 죽었기 때문에. [참조. 신 21:23]
2) 이 가르침을 뒤집은 것이 바로 바울이다. “맞다! 신명기 법전 대로 그는 저주 받아 죽은 자가 맞다!!”라는 케치프레이즈를 통해서이다. 단, 그 저주는 우리 죄 때문에!전도라는 무식한 방법 하나로 이 케치프레이즈를 관철시키고 만 것이다. (김세윤 박사가 이걸로 박사 학위 받았을 것이다.)
3) 마지막 단계에는 그리스도교가 세계를 평정하면서 안티세미티즘(반 유대정책)의 피해를 본 유대인들이 예수라면 치를 떨게되어 위 1단계 전통을 철저히 재생 교육시켜옴으로써 그 전통을 자신들의 게토 중심으로 관철시켰다는 사실이다. 현대 히브리어 사전에 예수=저주 받은 자, 등재되었다나?
11. 그렇다보니 메시아닉 쥬(예수 믿게 된 유대인)들에게는 예수라는 이름이 신성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미국 메시아닉 쥬 중엔 제우스[Zeus]가 연상되어 Jesus를 싫어한다고.) 여기에다가 자기들 나름대로 고토신학을 영위하는 와중에, 한국인들 중심으로 ‘옛 것은 좋은 것이여ㅡ’ 예수 그 이름을 배격하는 웃지 못할 사태까지. 그렇지만 Jesus가 사전에 제기럴!로 등재된 게 Jesus 잘못인가? 오마이갓, 갓땜 처럼 지저스 크라이스트를 내뱉어온 어군들 잘못이지. 다음을 유념하고 또 유념해야 한다.
α. 호세아에서 모세를 통해 여호수아로 변화를 겪은 이름 여호수아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모세/율법의 예언에 ‘나 같은 선지자’(신 18:15, 18)를 세운다고 하였는데 그는 여호수아였으며, 초대교회 설립자들은 이 예언을 적극 수용했다는 사실. (예언으로서 율법은 예언서 라인과는 또다른 차원의 예언 라인이라는 사실 유념)
β. 예수 시대에 예수라는 이름은 너무나 일반적 이름이라서 인기가 없었고(요즘 같이?), 십자가 사건 이후에는 예수를 믿거나 안 믿거나 모든 사람에게 회피된 이름이었다(요즘같이?). 저주 받은 자의 이름이었기 때문에.버려진 이름 예.수.
γ. 야웨 신앙의 기원은 히브리 전통이 맞지만 헬레니즘은 이 전통을 세계로 파급시킨 중요한 물결이었다는 사실을 유념할 것이다. 그래서 히브리 문화를 표명하는 용어 헤브라이즘은 엄밀한 의미에서 헬레니즘을 포함하는 용어이다(서양 문명 사조를 '헤브라이즘', '헬레니즘' 둘로 나눈다면서도). 가령 히브리어에서 헬라어로 번역된 구약성서인 셉투아진트는 조그마한 히브리인들의 문명이 세계로 퍼져나갈 수 있는 터미널 역할을 한 중차대한 문헌인데,신약성서에서 언급되는 ‘성경(에)’라는 말은 바로 이 성경을 두고 하는 말이다. 왜냐하면 신약성서의 저자들이 거의 다 이 희랍어로 된 구약성경을 참조하여 신약성서를 써나갔기 때문이다.
δ. 예수 만큼 중요한 어휘 ‘크리스토스’는 신약성서의 저자들이 지어낸 말이 아니라, 히브리어 ‘메시야’(마쉬아흐, 렘 42:2)를 이 셉투아진트에서 크리스토스로 번역된 것을 가져온 말인 것이다.
ε. 그렇다면 ‘예슈아 크리스토스’ 할건가? 아니면 예슈아 마쉬아흐? 아예 히브리어로 다바꿔?
ζ.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 터지는 소리는 히브리어가 아닌 희랍어 즉 헬라어로 기록되었다는 사실.
현진섭 님의 댓글:
마1:21에 등장하는 예슈아는, 헬라어나 아람어에서 번역될 수 없습니다. 이와같이 다른 몇몇 신약 성경들에서도, 히브리어가 원어로 적혀진 것들이 상당합니다(물론 헬라어가 원어로 적힌 신약이 있습니다). 대부분 혹은 몇몇 신약성경은 히브리어에서 헬라어나 아람어 혹은 라틴어로 번역한 흔적이 나타납니다. 즉, 헬라어를 신약성경의 원어로 보기에는 적용이 되지 않는 문서들이 많이 있습니다.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통용되던 언어도 히브리어였을 것이라는 주장이 이미 몇 십 년 전부터 나오고 있었데, 예슈아 하마쉬악을 사용하는 사람으로, 이 글에 개인적으로 동의할 수 없습니다.
<예슈아 Vs. 예수> 문제 (부연 설명)
1. ‘예슈아(ישוע)’라는 명칭이 더 오리지널이고 ‘예수’는 가짜다ㅡ라는 주장의 근원적 문제에 대한 추가 요약이다.
2. 가장 심각한 문제는 마태복음 1장 21절(“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을 신구약성서를 압도적으로 초월하는 특별계시로 보는데 있다. 그게 뭐가 나쁜가 싶겠지만, 문제는 저 문장이 헬라어가 아닌 아람어(우리가 히브리어라고 부르는)로 된 게 있었을 것이라는 막연한 확신을 가함으로써 기존의 기록된 신구약 정경 권위에 도전한다는 사실이다.
3. 이를 테면 이런 식이다.
א זֶה סֵפֶר תּוֹלְדֹת הַמָּשִׁיחַ יֵשׁוּעַ בֶּן־דָּוִד בֶּן־אַבְרָהָם׃
(째 쎄펠 톨레도트 하마싀아흐 ‘예슈아’ 다뷛의 자손 아브라함 자손ㅡ마태복음 1:1)
4. 이 히브리어 성경 문장 속의 ‘예슈아’가 진짜라는 것이다. 그럼 ‘예수’는 뭐냐.
5. 예수는 그리스어로 된 신약성서가 ‘예슈아’라는 아람어를 음역하는 과정에서 미처 다 발음을 표현하지 못한 Ἰησοῦς(이에수스)에서 비롯된, 그래서 가짜라는 식이다. 이 문자 빠롤들에 이상한 주술을 거는 셈이다.
6. 이와 같은 발상으로 인해 두 가지 어이없는 일이 발생하는 데, 첫째 그 동안 축적된 사본학적 유산을 깡그리 무시하는 바람에 정경이 파괴된다는 사실이다.
7. 둘째는 ‘히브리어’ 라는 언어에 대한 미신적인 집착이다.
8. 히브리어란 게 사실은 언어로서는 완전히 죽은 사어(死語)였던 언어다. 토라가 보전되어 오기는 했지만 모두 자음으로 되어 있어 읽을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읽었다기보다는 자음 중심으로 외웠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9. 이런 死語에다가 모음을 다시 입혀서 읽을 수 있게 만들어 낸 성경을 우리가 맛소라 사본이라 부른다. 순전히 맛소리스트들의 헌신적인 공헌이다. 그러나 그렇게 복원한 독음은 엄밀한 의미에서 인공어인 셈이다. 문자는 분명 수천년 전해내려온 문헌 맞는데, 독음은 불완전하다는 소리다.
10.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의 진정한 발음은 알 수 없듯이 토라 전체의 역사적 진성 독음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11. 그럼에도 헬라어로 기록된 Ἰησοῦς(이에수스)보다는 ‘예슈아(ישוע)’가 우월한 원래의 이름이라는 것이다.
12. 그것은 마치 2017년판 이스라엘 ‘원더우먼’의 실명을 미국식 발음인 ‘갤 가돗’(Gal Gadot)이라 불러선 안 되고, ‘갈 가도트’(גדות גל)라고만 불러야 한다는 것과도 같다.
13. ‘갈’(גל)은 ‘파도’ 또는 ‘굴리다’는 뜻을 가진 ‘גל’의 독음일 뿐이며, ‘가도트’(גדות)는 ‘가다’(גּדה)의 여성복수형의 독음일 뿐이다
14. 히브리어 신약 성경 원전은 6세기설에 논란이 있지만 비교적 권위를 둘 만한 버전은 아무리 넉넉히 잡아줘도 14세기 정도이다.
이 사안의 본질은 이들의 전승이 기존의 정경 사본학을 넘어서려는 시도가 배후에 있는 것이다.
예슈아 Vs. 예수> 이거 하만 더 부연.
1. 사실, "보라 처녀가 아들을 나으리니 '예슈아'라 하라ㅡ" 이 말은 누가복음에도 나오는 말인데,
이들은 왜 유독 마태복음만을 근거 내세울까?
2. 실제로 랍비계열의 (히브리어로 된) 신약성서 내력은 마태복음만이 가장 유서 깊다ㅡ
7세기경 랍비 네스토(Sefer Nestor ha-Komer) 작품으로 알려진 "The Book of Nestor the Priest"에는 라틴어로 된 마태복음의 중요 본문들을 인용하는 수준으로 출발한다.
그리고 14세기로 훌쩍 건너 뛰어
랍비 쉠 버전 마태복음이 등장한다(Shem Tov's Matthew, 1385)
이 작품은 안티 카톨릭주석이 첨가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16세기 세바스찬 뮌스터의 버전(Sebastian Münster's Matthew, 1537 )
이것은 영국왕 헨리 8세에게 헌정된 것이다.
그외 쟝 틸렛의 버전(Jean du Tillet's Matthew, 1555)이탈리아에 거주하는 유대인이라고 한다.
끝으로 랍비 에스겔의 버전(Rahabi Ezekiel's Matthew, 1750) 등이 있다.
3. 다시 한 번 질문,
어째서 이들은 다른 신약 문헌보다는 이와 같이 마태복음에 천착했을까ㅡ
4. 그 이유는 오로지 하나,
마태복음이 유대인(을 위한) 복음서라는 확신에 따른 것이다.
5. 이를 테면, 손 안 씻고 먹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정죄하는 '장로들의 유전'이 나오는 대목의 경우, 마태복음에서는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럽게 하는게 아니라 나오는 것이 더럽다는 정도로 부드럽게 말하는데(유대인이 듣기에), 그것에 비하면
"모든 음식이 깨끗하다!"고 선언해버리는 마가복음의 경우는 유대인이 수용하기에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선언이었을 것이다.
6. 그 외에도 마태복음 5장부터 7장은 예수님(그들의 예슈아)은 마치 산 위에 오른 모세나 진배 없었던 것이다.
7. 그러니까 예수의 이름을 '예슈아'로 가르치는 이들의 전승은 그 뿌리부터가 이미
반 이방적인 노선의 텍스트였던 셈이다.
하지만, 마태복음을 유대인(만)의 복음서로 이해한 것은 대단한 오해이다. 마태복음 만한 이방인의 복음도 없기 때문이다
'예수'를 '예슈아'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 '예수'가 아니라 '예슈아'라고 불러야 옳다고 한다. 예수 믿는 유대인들 곧 메시아닉쥬만이 아니라 세대주의 종말론에 기초한 백투예루살렘 운동 지지자들, 정치적으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지지하는 기독교인들, 흩어진 유대인들이 이스라엘로 귀환하도록 재정지원을 하는 운동을 펼치는 사람들이 그렇게 주장한다. 메시아닉기독교라는, 유대교 풍습을 따르는 신종 교파가 한국과 중국에도 형성되고 있다. 이들이 "예슈아 이름으로" 기도한다.
'예수'가 옳은가, '예슈아'라고 불러야 하는가?
'예수'는 '여호수아'(יהושוע)에서 유래했다. 여호수아의 본명은 호세아(הושע)였다(민 13:8). '호세아'가 '여호수아'가 된 것은 모세가 그렇게 불렀기 때문이다(16절). '여호수아'(יהושוע)를 음가 대로 읽으면 "예호슈아"이다. 그리스어 성경은 이것을 Ἰησοῦς(이에수스)라고 기록했고, 라틴어로 Iesus(이에수스)가 되었다. 'I'가 영어로 바뀌는 과정에서 'Jesus'가 되었다. 한국에서는 선교 초기 '야소'(耶蘇)라고 했다가 '예수'라는 본래 음가로 개정되었다.
'예슈아'는 어디서 온 말인가? 메시아닉쥬들이 '예수'를 현대 히브리어로 대체(substitute)시켜 얻은 명칭이다. ישֵׁוּעַ (예슈아). 야소(耶蘇)라고 불러도 랑그(langue)에 아무 변화 없듯이 빠롤(parole)에서 예슈아를 쓰는 것은 크게 탓할 게 못 된다. 랑그를 뒤집어 억지로 가공하려는 의도가 문제이다.
랑그와 빠롤은 언어학 용어들이다. 스위스 제네바대학교의 언어학자 소쉬르가 정의를 내린 바 있다. 장기놀이에 비유하면 랑그는 규칙에 해당하고 빠롤은 그 규칙에 따라 장기를 두는 자의 구체적인 행위를 의미한다. 전자는 보편적이고 추상적이며 언어사용의 사회적 규칙과 관행을 뜻한다. 후자는 개별 상황에서 각자가 하는 구체적인 말, 언어이다.
'예수'가 아니라 '예슈아'라고 불러야 한다는 사람들은 '예수'라는 이름이 '저주 받은 자'라는 뜻이며, 진째 발음과 같지 않으며, 거짓 이름이라는 까닭을 댄다. 진짜 이름의 발음이 '예슈아'였다고 한다.
'예수'라는 이름이 '저주 받은 자'를 의미함은 사실이다.
이러한 시각으로 보는 전통은 역사적으로 3단계에 걸쳐 진행되어 왔다.
첫째, 유대인 전통이다. 신명기 법전에 따르면 나무에 달린 자는 메시야가 될 수 없다. 유대인에게 율법은 예언이기도 하므로, 이 주장은 타당하다. 인류의 구원자는 저주 받아 나무에 달려 죽었다(신 21:23).
둘째, 바울은 이 개념을 뒤집어엎었다. "그렇다. 신명기 법전 대로 그리스도는 저주 받아 죽은 자이다. 지당한 말이다." 바울은 이 캐치프레이즈를 내세우면서 그리스도의 저주를 받은 것은 우리의 죄 때문이라고 했다.
셋째, 반유대주의(안티세미티즘)이다. 기독교가 세계를 뻗어나가면서 '예수'를 앞세워 유대인을 핍박했다. 예수교의 피해를 본 유대인들은 '예수'라는 이름에 치를 떨었다. 현재의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위 1단계 전통을 철저히 교육시키고, 자신들의 게토 중심으로 그 전통을 관철시켜 왔다. 현대 히브리어 사전은 '예수=저주 받은 자'라고 기록하고 있다고 한다.
메시아닉쥬는 예수 믿는 유대인이다. 메시아닉기독교라는 종파 교회가 여러 나라에 형성되고 있는 것 같다. 유대인 규례를 따라 안식일을 지키고 쪽발 동물과 비늘없는 물고기를 먹지 않는 등 규례를 지킨다. 바울이 반대한 유대 율법주의적 기독교 종파로 발전하고 있는 듯하다.
메시아닉쥬들에게는 '예수'라는 이름이 신성하지 않을 수 있다. '예수' 이름을 앞세운 유럽 기독교 정치세력의 폭력에 시달려 온 그들이 '예수'라는 이름에 혐오감을 가진다는 것은 이해된다. '예수'가 기독교와 안티세미티즘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어느 미국 메시아닉쥬는 'Jesus'가 제우스(Zeus)를 연상시킨다고 하여 싫다고 한다.
다음 몇 가지를 유념하자.
1) 호세아에서 모세에 의해 여호수아로 바뀐 이름 '여호수아'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모세/율법의 예언에 "나 같은 선지자"(신 18:15, 18)를 세운다고 했다. 그는 다름 아닌 여호수아였으다. 초대교회 설립자들은 이 예언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율법서의 예언이 성취된 것이다.
2) 예수 생존 당시에 '예수'는 너무나 일반적 이름이었고 인기가 없었다. 십자가 사건 이후에는 모두들 이 이름을 회피했다. 저주 받은 자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버려진 이름이었다.
3) 야웨 신앙은 히브리 전통에 속하지만, 헬레니즘은 이것을 세계로 파급시켜 기독교 세계화의 중요한 물결을 일으켰다. 히브리 문화 또는 헤브라이즘은 엄밀한 의미에서 헬레니즘을 포함한다. 히브리어 본문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구약성경 셉투아진트는 작은 규모의 히브리인들이 문명이 세계로 퍼져나갈 수 있는 터미널 역할을 했다. 유대인에게도 셉투아진트는 중요한 문헌이다. 신약성경이 언급하는 '성경(에)'라는 말의 배후에는 셉투아진트 성경이 자리 잡고 있다.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그리스어 번역판 구약성경을 참조했다.
4) '예수'만큼이나 중요한 '크리스토스'는 신약성경 저자들이 지어낸 말이 아니다. 기독교인들의 독창적 용어가 아니다. 셉투아진트는 히브리어 '메시야'(마쉬아흐, 렘 42:2)를 '크리스토스'로 번역했다..
5) '예수'를 '예슈아'로 불러야 한다면, 우리는 '예슈아 크리스토스'라고 불러야 하는가? 아니면 '예슈아 마쉬아흐'라고 해야 하는가? 성경에 나오는 모든 이름들을 현대 히브리어로 바꿔야 하는가?
6) 우리의 가슴이 벅차고 심장이 터질 것 같은 보배로운 이름 '예수'는 성경에 그리스어로 기록되어 있다.
구원자 그 분의 고유한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였다. 신약성경에 기록된 대로 '예수'라고 발음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예슈아'는 예수 시대의 발음이 아니다.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현대 히브리어는 구약성경이 기록될 당시의 언어가 아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고대 히브리 문자는 모음을 표기하지 않는다. 유대인들은 몇 천년 1800년 동안 자기의 언어를 잃어버렸다. 모음을 알 수 없고 자음 글자만 있는 히브리어 문서들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의 네 글자(YHWH)를 어떻게 발음하는지 아무도 모른다.
한국 기독인들은 여호와라고도 하고 야웨라고도 발음한다.
벤 예후다 기념우표, 이스라엘
현대 히브리어는 러시아령 벨로루시 리투아니아 태생 벤 예후다(Ben-Yehuda, Eliezer, 1858-1922)가 일상어로 재생시킨 언어이다. 그는 1886년에 이스라엘로 이주한 유태인이다. 파리대학교(솔본느)에서 공부를 했다. 히브리어 재생에 정열을 쏟다가 폐결핵으로 죽었다. 이 구약학자와 그의 부인은 자기 자녀에게 자신이 만든 현대 히브리어를 모국어로 가르쳤다. 히브리어만 사용하게 했다. 그 언어가 오늘날 이스라엘의 공용어인 현대 히브리어이다.
벤 예후다의 노력이 없었다면 이스라엘이 독립을 했을 때 영어, 독일어, 불어, 이디시(Yiddish)라는 언어가 모두 공용어가 될 뻔 했다. 이스라엘 국가 독립을 추구한 시온주의 지도자들은 팔레스타인에 새로운 이스라엘 국가를 세우면 무슨 언어를 공용어로 사용해야 하는가의 문제를 두고 논쟁을 했다. 벤 예후다는 모세가 다섯 권의 책을 기록할 때에 썼던 히브리어 문자와 말을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하고서 히브리어 복원에 삶을 바쳤다.
이스라엘로 이민 간 뒤, 아들 벤 시온(Ben Zion)이 태어나자, 아버지 벤 예후다는 그의 아내와 함께 아이에게 영어, 독일어, 불어, 러시아어, 프랑스어 등을 가르치지 않았다. 자신이 복원한 히브리어를 가르쳤다. 아이는 4살 때 말을 했다. 이 아이는 주변의 다른 아이들과 대화를 할 수 없었다. 히브리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은 전 세계에 한 명 뿐이었다.
여러 지역에서 팔레스틴으로 귀환한 유태인들은 말이 통하지 않아 불편을 겪었다. 국가적 민족적 난제인 언어 때문에 고통을 당하던 유대인들은 재생된 히브리어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했다. 벤 예후다에게 “저희들에게도 히브리어를 알려 주세요" 하고 요청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확산된 현대 히브리어는 모세 시대나 예수 시대의 히브리어와 똑같지는 않다. 재생, 복원했다고 하는 히브리어의 발음이 모세나 예수 당시의 말과 어느 정도 일치하는가를 검증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예루살렘은 전쟁과 불화와 갈등이 그치지 않은 도시이다. 그런데도 이름은 '평화의 도성'이다. 예루살렘 시내에는 현대 히브리어를 만든 벤 예후다를 기념하는 거리가 있다. 다시 그곳에 가볼 기회가 으면 이스라엘의 영웅 벤 예후다 거리를 산책하고 싶다.
예루살렘의 명소 벤 예후다 거리 풍경
손가락이 아닌 태양을 보라. 심볼보다 그것이 의미하는 에쎈스를 보라. '예수,' 버려지고 저주받은 이름, 나무 위에 달려 우리의 추악한 죄를 담당하고 하나님과 화해에 필요한 제물이 되어 주신 그 분의 이름, 구원의 길을 열어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 '예수'는 참으로 존귀하고 거룩하고 영광스럽다.
"천지에 있는 이름 중 귀하고 높은 이름 주
나시기 전 지으신 구주의 이름 예수,
주 앞에 내가 엎드려 그 이름 찬송함은
내 귀에 들린 말씀 중 귀하신 이름 예수.".
예수는 영원히 어제나 오늘이나 그 이름으로 우리게 복을 내린다(찬송가 80장).
필자의 글에 정확하지 않은 부분이 있으면 알려주기 바란다. 시작 부분은 Young Jin Lee 님의 글 일부를 참고했다.
최덕성/현재 브니엘신학교 총장(2013-), 교의학 석좌교수
김영진 목사의 페이스북 글
예수아, 예수아.., ‘예수’라는 이름대신 아예 공용어처럼 사용하는 분들이 있는데 대단히 거북하다.
이런 분들은 예수아, 예수아 만큼이나 말끝마다 ‘히브리적’, ‘히브리적’...하기도 하는데, 이걸 알아야 한다.
1. 본래 ‘히브리(인)’이라는 명칭은 연대기적으로 ‘모세/시내산 이전의 조상’을 부르는 명칭이다.
2. 그런가 하면 ‘이스라엘’이라는 용어및 개념은 시내산 이후에 등장하는 개념이다.
3. 그런데 말끝마다 ‘히브리적’, ‘히브리적’...하는 분들이 말하는 개념들은 사실 연대기적 ‘히브리’도 아니고, ‘이스라엘’도 아니며, 그것은 대개 ‘유대교’적인 것들 일색이다.
4. 유대교라는 개념은 바벨론 포로기 종료 시점인 BC 6세기경에서 유대-로마 전쟁으로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는 시점인 AD 70년경 사이를 이르는 개념이다.
5. 즉, 뭔가 오리지널, 신토불이... 막연한 향수에 젖어 사용하는 개념들이 실상은 오리지널이라기보다 이미 이방 제국/문화와 하이브리드가 완료된 개념들이라는 사실이다.
6. 보다 심각한 것은 바로 ‘예수’라는 이름을 ‘예수아’로 변경해서 부르는 문제인데, 아다시피 예수는 여호수아(יהושוע)에서 유래하였다. 그러나 여호수아의 본명은 호세아(הושע)였다(민 13:8). 호세아가 여호수아가 된 것은 모세가 그렇게 불렀기 때문이다(16절).
7. 여호수아(יהושוע)를 음가 대로 읽으면 <예호슈아>인데 희랍어 성서는 Ἰησοῦς(이에수스)라고 기록하였고, 이것이 라틴어로 Iesus(이에수스)가 되었고 I가 영어로 오는 과정에서 Jesus가 되었다. 우리말로는 선교 초기 야소(耶蘇)라고 불렀으나 예수라는 본래 음가로 개정되었다.
8. 그렇다면 예슈아는 어디서 온 말인가. 그것은 예수를 현대 히브리어로 다시 치환시켜 얻은 말이다. ישֵׁוּעַ (예슈아)
9. 사실 야소(耶蘇)라고 불러도 랑그에 아무 변화 없듯이 빠롤을 예슈아로 쓰는데는 별 문제가 없다. 본인들이 그렇게 좋다는데...그러나 그 랑그까지 뒤집어 가공하려는 것은 큰 문제이다.
10. 한 마디로 예수는 ‘저주 받은 자’라는 뜻이므로 거짓 이름이라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예슈아‘만’ 진짜 이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 이름이 ‘저주 받은 자’라는 전통은 역사적으로 3단계에 걸쳐 이행되어 왔다.
1) 유대인들이 그렇게 가르쳤다. 신명기 법전에 따르면 나무에 달린 자는 메시야가 될 수 없다는 근거에서이다(이들에게 법은 예언이다). 실제로 그 주장은 타당한 것이었다. 실제 저주 받아 죽었기 때문에. [참조. 신 21:23]
2) 이 가르침을 뒤집은 것이 바로 바울이다. “맞다! 신명기 법전 대로 그는 저주 받아 죽은 자가 맞다!!”라는 케치프레이즈를 통해서이다. 단, 그 저주는 우리 죄 때문에!전도라는 무식한 방법 하나로 이 케치프레이즈를 관철시키고 만 것이다. (김세윤 박사가 이걸로 박사 학위 받았을 것이다.)
3) 마지막 단계에는 그리스도교가 세계를 평정하면서 안티세미티즘(반 유대정책)의 피해를 본 유대인들이 예수라면 치를 떨게되어 위 1단계 전통을 철저히 재생 교육시켜옴으로써 그 전통을 자신들의 게토 중심으로 관철시켰다는 사실이다. 현대 히브리어 사전에 예수=저주 받은 자, 등재되었다나?
11. 그렇다보니 메시아닉 쥬(예수 믿게 된 유대인)들에게는 예수라는 이름이 신성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미국 메시아닉 쥬 중엔 제우스[Zeus]가 연상되어 Jesus를 싫어한다고.) 여기에다가 자기들 나름대로 고토신학을 영위하는 와중에, 한국인들 중심으로 ‘옛 것은 좋은 것이여ㅡ’ 예수 그 이름을 배격하는 웃지 못할 사태까지. 그렇지만 Jesus가 사전에 제기럴!로 등재된 게 Jesus 잘못인가? 오마이갓, 갓땜 처럼 지저스 크라이스트를 내뱉어온 어군들 잘못이지. 다음을 유념하고 또 유념해야 한다.
α. 호세아에서 모세를 통해 여호수아로 변화를 겪은 이름 여호수아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모세/율법의 예언에 ‘나 같은 선지자’(신 18:15, 18)를 세운다고 하였는데 그는 여호수아였으며, 초대교회 설립자들은 이 예언을 적극 수용했다는 사실. (예언으로서 율법은 예언서 라인과는 또다른 차원의 예언 라인이라는 사실 유념)
β. 예수 시대에 예수라는 이름은 너무나 일반적 이름이라서 인기가 없었고(요즘 같이?), 십자가 사건 이후에는 예수를 믿거나 안 믿거나 모든 사람에게 회피된 이름이었다(요즘같이?). 저주 받은 자의 이름이었기 때문에.버려진 이름 예.수.
γ. 야웨 신앙의 기원은 히브리 전통이 맞지만 헬레니즘은 이 전통을 세계로 파급시킨 중요한 물결이었다는 사실을 유념할 것이다. 그래서 히브리 문화를 표명하는 용어 헤브라이즘은 엄밀한 의미에서 헬레니즘을 포함하는 용어이다(서양 문명 사조를 '헤브라이즘', '헬레니즘' 둘로 나눈다면서도). 가령 히브리어에서 헬라어로 번역된 구약성서인 셉투아진트는 조그마한 히브리인들의 문명이 세계로 퍼져나갈 수 있는 터미널 역할을 한 중차대한 문헌인데,신약성서에서 언급되는 ‘성경(에)’라는 말은 바로 이 성경을 두고 하는 말이다. 왜냐하면 신약성서의 저자들이 거의 다 이 희랍어로 된 구약성경을 참조하여 신약성서를 써나갔기 때문이다.
δ. 예수 만큼 중요한 어휘 ‘크리스토스’는 신약성서의 저자들이 지어낸 말이 아니라, 히브리어 ‘메시야’(마쉬아흐, 렘 42:2)를 이 셉투아진트에서 크리스토스로 번역된 것을 가져온 말인 것이다.
ε. 그렇다면 ‘예슈아 크리스토스’ 할건가? 아니면 예슈아 마쉬아흐? 아예 히브리어로 다바꿔?
ζ.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 터지는 소리는 히브리어가 아닌 희랍어 즉 헬라어로 기록되었다는 사실.
현진섭 님의 댓글:
마1:21에 등장하는 예슈아는, 헬라어나 아람어에서 번역될 수 없습니다. 이와같이 다른 몇몇 신약 성경들에서도, 히브리어가 원어로 적혀진 것들이 상당합니다(물론 헬라어가 원어로 적힌 신약이 있습니다). 대부분 혹은 몇몇 신약성경은 히브리어에서 헬라어나 아람어 혹은 라틴어로 번역한 흔적이 나타납니다. 즉, 헬라어를 신약성경의 원어로 보기에는 적용이 되지 않는 문서들이 많이 있습니다.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통용되던 언어도 히브리어였을 것이라는 주장이 이미 몇 십 년 전부터 나오고 있었데, 예슈아 하마쉬악을 사용하는 사람으로, 이 글에 개인적으로 동의할 수 없습니다.
<예슈아 Vs. 예수> 문제 (부연 설명)
1. ‘예슈아(ישוע)’라는 명칭이 더 오리지널이고 ‘예수’는 가짜다ㅡ라는 주장의 근원적 문제에 대한 추가 요약이다.
2. 가장 심각한 문제는 마태복음 1장 21절(“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을 신구약성서를 압도적으로 초월하는 특별계시로 보는데 있다. 그게 뭐가 나쁜가 싶겠지만, 문제는 저 문장이 헬라어가 아닌 아람어(우리가 히브리어라고 부르는)로 된 게 있었을 것이라는 막연한 확신을 가함으로써 기존의 기록된 신구약 정경 권위에 도전한다는 사실이다.
3. 이를 테면 이런 식이다.
א זֶה סֵפֶר תּוֹלְדֹת הַמָּשִׁיחַ יֵשׁוּעַ בֶּן־דָּוִד בֶּן־אַבְרָהָם׃
(째 쎄펠 톨레도트 하마싀아흐 ‘예슈아’ 다뷛의 자손 아브라함 자손ㅡ마태복음 1:1)
4. 이 히브리어 성경 문장 속의 ‘예슈아’가 진짜라는 것이다. 그럼 ‘예수’는 뭐냐.
5. 예수는 그리스어로 된 신약성서가 ‘예슈아’라는 아람어를 음역하는 과정에서 미처 다 발음을 표현하지 못한 Ἰησοῦς(이에수스)에서 비롯된, 그래서 가짜라는 식이다. 이 문자 빠롤들에 이상한 주술을 거는 셈이다.
6. 이와 같은 발상으로 인해 두 가지 어이없는 일이 발생하는 데, 첫째 그 동안 축적된 사본학적 유산을 깡그리 무시하는 바람에 정경이 파괴된다는 사실이다.
7. 둘째는 ‘히브리어’ 라는 언어에 대한 미신적인 집착이다.
8. 히브리어란 게 사실은 언어로서는 완전히 죽은 사어(死語)였던 언어다. 토라가 보전되어 오기는 했지만 모두 자음으로 되어 있어 읽을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읽었다기보다는 자음 중심으로 외웠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9. 이런 死語에다가 모음을 다시 입혀서 읽을 수 있게 만들어 낸 성경을 우리가 맛소라 사본이라 부른다. 순전히 맛소리스트들의 헌신적인 공헌이다. 그러나 그렇게 복원한 독음은 엄밀한 의미에서 인공어인 셈이다. 문자는 분명 수천년 전해내려온 문헌 맞는데, 독음은 불완전하다는 소리다.
10.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의 진정한 발음은 알 수 없듯이 토라 전체의 역사적 진성 독음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11. 그럼에도 헬라어로 기록된 Ἰησοῦς(이에수스)보다는 ‘예슈아(ישוע)’가 우월한 원래의 이름이라는 것이다.
12. 그것은 마치 2017년판 이스라엘 ‘원더우먼’의 실명을 미국식 발음인 ‘갤 가돗’(Gal Gadot)이라 불러선 안 되고, ‘갈 가도트’(גדות גל)라고만 불러야 한다는 것과도 같다.
13. ‘갈’(גל)은 ‘파도’ 또는 ‘굴리다’는 뜻을 가진 ‘גל’의 독음일 뿐이며, ‘가도트’(גדות)는 ‘가다’(גּדה)의 여성복수형의 독음일 뿐이다
14. 히브리어 신약 성경 원전은 6세기설에 논란이 있지만 비교적 권위를 둘 만한 버전은 아무리 넉넉히 잡아줘도 14세기 정도이다.
이 사안의 본질은 이들의 전승이 기존의 정경 사본학을 넘어서려는 시도가 배후에 있는 것이다.
예슈아 Vs. 예수> 이거 하만 더 부연.
1. 사실, "보라 처녀가 아들을 나으리니 '예슈아'라 하라ㅡ" 이 말은 누가복음에도 나오는 말인데,
이들은 왜 유독 마태복음만을 근거 내세울까?
2. 실제로 랍비계열의 (히브리어로 된) 신약성서 내력은 마태복음만이 가장 유서 깊다ㅡ
7세기경 랍비 네스토(Sefer Nestor ha-Komer) 작품으로 알려진 "The Book of Nestor the Priest"에는 라틴어로 된 마태복음의 중요 본문들을 인용하는 수준으로 출발한다.
그리고 14세기로 훌쩍 건너 뛰어
랍비 쉠 버전 마태복음이 등장한다(Shem Tov's Matthew, 1385)
이 작품은 안티 카톨릭주석이 첨가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16세기 세바스찬 뮌스터의 버전(Sebastian Münster's Matthew, 1537 )
이것은 영국왕 헨리 8세에게 헌정된 것이다.
그외 쟝 틸렛의 버전(Jean du Tillet's Matthew, 1555)이탈리아에 거주하는 유대인이라고 한다.
끝으로 랍비 에스겔의 버전(Rahabi Ezekiel's Matthew, 1750) 등이 있다.
3. 다시 한 번 질문,
어째서 이들은 다른 신약 문헌보다는 이와 같이 마태복음에 천착했을까ㅡ
4. 그 이유는 오로지 하나,
마태복음이 유대인(을 위한) 복음서라는 확신에 따른 것이다.
5. 이를 테면, 손 안 씻고 먹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정죄하는 '장로들의 유전'이 나오는 대목의 경우, 마태복음에서는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럽게 하는게 아니라 나오는 것이 더럽다는 정도로 부드럽게 말하는데(유대인이 듣기에), 그것에 비하면
"모든 음식이 깨끗하다!"고 선언해버리는 마가복음의 경우는 유대인이 수용하기에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선언이었을 것이다.
6. 그 외에도 마태복음 5장부터 7장은 예수님(그들의 예슈아)은 마치 산 위에 오른 모세나 진배 없었던 것이다.
7. 그러니까 예수의 이름을 '예슈아'로 가르치는 이들의 전승은 그 뿌리부터가 이미
반 이방적인 노선의 텍스트였던 셈이다.
하지만, 마태복음을 유대인(만)의 복음서로 이해한 것은 대단한 오해이다. 마태복음 만한 이방인의 복음도 없기 때문이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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