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영 성령님! 엔드류 머래이
우리의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는 지성소(至聖所)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또 그 안에 보배 피가 뿌려진 언약 궤가 간직되어 있습니다. 더 나아가 거기에는 성령께서 영원히 살아 계신 필치로 쓰신 생명의 성령의 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께서 임하셔서 내면적 생명으로 거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을 필생의 안내자로써 진실로 믿는사람들 중에도 보혈과 성령에 대한 온전한 가르침을 바로 아는 사람이 참으로 드물다는 게 슬픈 사실입니다. 기초가 된 것은 그리스도에게 온 죽음이었고 충만해 지는 것은 우리 안에 나타날 그분의 생명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아버지로부터 성령을 받으셔서 베푸실 수 잇는 것은 그분의 피 흘림 때문입니다. 또한 성령세례는 사역을 위한 능력으로써 특별히 주어지기도 합니다. 이 경우 성령세례가 지속되려면 주님을 증거하라는 부르심에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과 성령세례는 생명의 순환을 이루어 나갈 것입니다. 신령으로란 말은 영 안에서란 뜻입니다. 영 안에서란 말은 성령 안에서란 뜻입니다. 말씀이 우리 안에서 진리와 능력이 되게 하시는 것은 오직 성령만의 사역인 것입니다. 또 성령 없이 말씀에 정통하면 극히 육신적인 사람이 됩니다. 즉 겸손과 온유에 돌아갈 수 없기 때문에 가라지와 같은 신자가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말씀이 의미하는 것을 정확하고 바르게 이해한다면 자연적으로 말씀이 전해 주고자 하는 축복에 이르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착각은 자유입니다 신학박사가 되는 것과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옛 성현들이 말한 성경말씀은 같은 성령의 가르침을 받은 성도들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습니다. 영원하신 말씀과 영원하신 성령은 분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으로 오신 성령의 임재가 곧 구원입니다. 우리는 단지 십자가와 죄의 용서를 신뢰하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아니 됩니다. 온전한 데 나아가지 않는 신앙은 결국 타락하고야 맙니다. 성령이 주어지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영원한 인격이 된 하나님의 생명과 성품에 참여케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 안에 계시면서 행하시는 것처럼 우리 안에 계시면서 우리를 대신해 행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진리가 마음 중심에 들어갈 때 그것은 영의 생명이 됩니다. 그럴 때 인간의 영은 하늘 생명을 담는 그릇이 됩니다. 그러나 진리는 영혼의 외적 부분들, 즉 지식과 이성에만 머무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진리가 그 외적 부분 안에 자리잡고 거기서 그 영향력과 능력을 행사하려는 의도로 우리를 만족하게 해줄 때 그러한 진리란 인간적 주장과 인간적 지혜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써 영의 참된 생명에는 결코 이를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아무런 생명이나 선이 없다는 고백은 우리에게 아무런 지혜가 없다는 고백을 동반하여야 합니다. 육신의 눈으로는 보좌에 앉으신 분을 볼 수 없었고 세상에 대하여는 그것이 감추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속의 모든 것이 소망이 없고 공허함을 느낄 때 성령께서는 은밀히 하나님이 보증하신 것을 이루시고 영광 받으신 자 곧 그리스도께서 마음속에 그분의 처소를 정하셨음을 경험하게 해 줍니다. 신자는 말없는 경배와 찬미 가운데서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알게되고 마음속의 그분의 보좌가 공의 가운데 세워짐으로써 "성령이 내 영광을 나타내리라"는 약속이 이제 성취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의 위대한 사역 중의 하나는 영광 받으신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계시하시되 생각이나 기억 속에 뿐 아니라, 우리 내면의 마음 중심에, 그리고 우리의 생명과 경험 속에 계시해 주시는 것입니다. 세상의 가장 큰 죄는 불 신앙, 곧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죄를 말하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세상의 영입니다. 본성적으로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것이 바로 세상입니다. 여러분이 드리는 각자의 희생 제물에 죽음이 있어야 하는 데 이는 자아와 그 능력을 죽음에 내어주고 희생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갈보리산 십자가에서 여러분이 그 존귀하신 주님과 함께 죽었다는 사실 안에 있습니다. 거룩한 침묵 가운데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서 기다릴 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다는 것 즉 [올바르게 기도할 지혜도 없으며 올바르게 행할 능력도 없다]고 고백하는 것으로 여러분을 보시는 것입니다. 기다림은 결핍의 표현이고 비어있음의 표현입니다. 기다림은 주와 함께 죽었음의 표현이고 거짓 없는 낮아짐의 표현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을 통하여 가난함과 연약함에 대한 의식과 부러울 것이 없는 부요와 능력의 기쁨은 함께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완성자이시고 율법의 마침이셨던 것처럼 성령은 모든 복음의 완성자이시고 성취자이시며 유효자이시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속에 들어오셔서 그 모든 것을 우리의 것으로 해주시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모든 것도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할 것이다." 성령께서는 자신을 하나님이 택하신 연약한 것들 속에 감추시는데 이는 육체가 그 앞에서 자랑치 못하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가 영화롭게 되신 세계 그것이 신앙인이 가는 목적지입니다 연약한 가운데도 이 한가지 목적에 충실하여 순종과 증거가운데 어떤 희생이라도 무릅쓰고 기꺼히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자 하는 것을 하나님께 보여 드리려는 사람은 위로부터 오는 능력을 받을 것입니다.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우는 것]이나 [성령의 권능을 받는 것]은 우리의 본성적 기대와는 상반되는 방식으로 일어납니다. 연약함에 대한 인식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그 능력이 우리의 소유물로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다만 주님 자신을 소유하고 있을 때만 능력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 안에서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능력을 발휘하십니다. 신자의 영혼구원에서 시작한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은 신자의 몸의 구속을 거쳐 만유를 구원하는데 까지 이릅니다. 하나님께서 다 이루신 것을 다 얻지 못한다는 것은 오늘날 신자들의 비극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시면서 그 분의 순종의 삶속에 거하시던 성령께서는 예수님의 인자의 영을 자신과의 완벽한 교제와 일치로 이끄셨고 이제 영광을 받으신 신인(神人)의 성령이 되신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준 것은 나에게도 준 것이지만 그것을 아는 것이 곧 내가 받은 것이 아닙니다. 에레미야 29장 13절 말씀처럼 [전심으로 찾고 찾을 때 만날 수 있는]하나님과 나 사이에 일대일로 맺는 인연이요 언약인 것입니다. 여러분 육신에 속한 자라는 애물단지 신앙 아시죠? 육신에 머무느냐 영안으로 나아 가느냐? 하는 것은 휴거에 이를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 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신자는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즐을 아노니..."라는 말씀을 초월하는 날이 하루도 없음을 느낍니다. 하나님의 뜻안에서 즐거워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할뿐만 아니라 행할 능력을 얻을 때라해도 그렇게 하는 것은 자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요 "내 속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즐을"을 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두 개의 경험이 아니라 두 개의 상태가 동시적인 것을 알게 되고 그가 그를 자유롭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안의 생명의 성령의 법을 충만히 경험하는 때라 할지라도 여전히 죄와 사망의 몸을 지니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만약 율법을 성취하려는 시도가 육적 속성과 죄에 포로됨의 경험을 통하여 결코 이루어 질수 없는 것임을 깨닫게 되면, 성령께 대한 전적인 복종이 이루어지고 강화되는 것이야말로 바로 육에 속한 자신에 대한 전적인 절망 후에 온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육신과 율법에 전혀 희망을 갖지 않는다면 성령의 자유케 하심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독교 구원의 진수는 인격의 구원에 있습니다. 끝내 인격구원이 동반되지 않는 교리적 구원은 사이비구원이라는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성령은 죄를 범하는 능력으로써의 육신에 의해 방해를 받는데 그치치 않고 하나님을 섬기려 애쓰는 능력으로써의 육신에 의해 훨씬 더 많은 방해를 받습니다. 갈라디아서의 말씀처럼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는 사람도 많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육신의 뜻과 지혜를 경계하고 십자가에 못박고 부인해야 합니다. 말씀 없이 성령 안에 있을 수 없고 성령 없이 말씀 안에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 안에 풍성히 거하면서 우리의 전적인 순종가운데 나타나는 말씀과 성령 안에서 오직 성령이 인도하시는 길만이 안전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깊이 신뢰해야합니다. "너희가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이것은 성경이 성결과 관련하여 가장 심오하게 가르치는 것 중의 하나입니다. 죄의 유혹은 끝까지 남아 있습니다. 이길수록 이기기가 쉬워지는 것이 신앙의 법칙입니다. 이렇게 하려면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령으로 충만해져야 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은 끊임없이 죄의 죽음을 가져오게 합니다. 보웬은 말했습니다. "계속 추구하지 않아도 되는 안전한 인도가 있을 수 없다 한 해의 유익을 한 시간에 잃어버릴 수도 있다. 우리가 작은 일이라 하여 성령과 무관하게 행동한다면 큰 일에서 헛되히 성령을 바라보게 될것이다"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온전히 우리 자신을 성령께 맡겨야 합니다. 그리고 잘난체하는 신앙을 다 버려야 합니다. 성령은 현재 내 안에 오신 영원한 하나님이시고 내 안에 오신 아버지와 아들이신 것입니다. 위에 계신 아버지께 구하시고 받으시는 아들의 끊임없는 중재가 필수불가결한 것처럼 아버지께서 주신 것을 아들로부터 구하고 우리안에 받아들이시는 성령의 끊임없는 중재도 필수불가결한 것입니다. 마음과 육신이 실패하는 곳에서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힘이 되시고 우리 영의 내면 지성소에 계신 하나님의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도하신다는 것을 믿고 기뻐합시다. 우리가 기도할 때 거룩한 침묵 가운데서 경배해야 할 것이며, 복되신 보혜사, 진실로 홀로 간구의 영이신 분께 우리 자신을 온전히 맡겨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한다는 구실로 하나님의 목소리인 양심을 죽이기 때문에 더 이상 그 악행을 막을 존재가 없는 까닭입니다. 바울 처럼 "내양심이 성령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라고 기꺼히 말할 수 있어야합니다. 죄사함을 이미 받는 신자가 생활 속의 죄를 고백하는 것은 죄사함을 다시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깨끗함을 받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양심은 창조주 하나님의 영의 작품입니다. 우리가 빛 가운데 행할 수 있는 것은 하늘을 향한 마음의 창이 깨끗게 되고 그 깨끗함이 계속 유지되는 때입니다. 양심이 죄로 더럽혀지고 마비되어 내면 속의 강자가 완벽한 평화속에 거할 수도 있습니다. 그 신자는 강팍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양심에 어긋나는 일을 한다는 것은 신앙의 비극이죠 우리가 하나님을 기뻐게하는 것을 행하고 잇다는 증거를 구하면 구할수록 우리에게 오는 온갖 실패에도 불구하고 항상 정결하게 하는 피를 즉시 바라보는 자유를 더욱 느끼게되는 것입니다. 세속에 때묻지 않은 신앙에 살 때 우리는 이기는 삶의 가치를 알수 있습니다. 양심에 뿌려진 그리스도의 피는 무궁한 생명의 능력과 구원하시는 변함없는 제사장의 능력안에서 거하며 역사합니다.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게 하실것이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피를 전할 때 피와 관련하여 양심을 전하고 양심에게 전하는 것이 교회에 필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성결의 능력은 피와 양심의 놀라운 조화를 통찰하며 세심하게 지속시키는 것에 있습니다. 바른 신앙을 논할 때 신자는 먼저 날마다 새롭게 말씀을 알고 새로운 삶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계시로 말미암아 가르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진리의 길은 하나님의 말씀과 말씀의 영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즉 하늘의 빛은 성령을 통해서만 온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성령께 복종하지 아니하고는 참된 진리에 나아가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즉 불순종하는 한 영생에 이르지 못하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불순종이 바로 사망의 길이요 아담이 선택한 길인 까닭입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진리는 감취어진 영적 비밀로써 오직 영적 계시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음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지혜가 하나님의 계시를 파악하는데 전적으로 무능하다는 사실을 밝히 증거하는 것입니다. 깨닫지 못할 때 인간은 가장 소중한 것도 헌 신짝처럼 버리고 맙니다. 바울은 사람의 지혜의 말로 복음을 전하는 것은 그 기원을 사람의 지혜에 두고 있는 믿음을 낳는 다고 말합니다. 무서운 이야기이지요 그 믿음이 사람의 수단에 의해 자양분을 공급받는 한 그것은 계속 서있으면서 자랄 수도 있을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홀로 설 수 없고 언젠가 시련의 날이 오면 견디지 못합니다. 시련의 날에 견딜 수 없는 필히 비극으로 끝날 수밖에 없습니다. 반대로 성령과 능력의 전하는 것을 받은 신자는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서게 됩니다. 그는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사람을 지나서 살아 계신 하나님과 직접 만나고 그럴 때 그의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게됩니다. 참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지혜를 두려워하기를 배워야 합니다. 이것을 배우지 못할 때 육신 적인 사람으로 인생이 끝날 수도 있습니다. 자기 지혜로 남을 판단하고 교회를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더러운 냄새나는 일인지 우리는 생각해 봐야 합니다. 이 원리 또한 한 때 성령에 의해 가르침을 받았지만 이해하는 과정에서 이제는 단지 기억에 남아 있을 뿐인 진리에도 적용됩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사람들이 먹었든 만나를 아시죠? 만나는 땅위에 저장되었을 때 급속도로 그 하늘 특성을 잃었습니다. 하늘에서 받은 진리는 날마다 새로운 기름부음을 받지 않는 한 거룩한 신선미를 잃는 법입니다. 영원하다는 말은 날마다 새롭다는 말입니다. **** 신자는 바울의 말에 잇어서 처럼 끊임없이 "미련한 자가 되기 위해 힘써야 함을 느낄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참으로 죽기 전에는 안되는 것이 미련한 자가 되는 길입니다.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에게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하는 말씀이 이뤄지는 것입니다. 진리를 바로 배우는 길은 진리와 진리의 영이 함께 할 때인 것입니다. 바울이 그랬듯이 자아와 그 모든 지혜를 십자가에 못박고, 약하고 두려워하는 가운데 몹시 떠는 가운데 하나님께 나아올 때 우리는 위로부터 오는 성령과 능력의 나타남을 가장 확실하게 접하게 될 것입니다. 가나한 심령이 복이 잇는 것은 주와 함께 죽은 자로써 영 안에서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여기에 온전한 신앙으로 가는 길이 있는 것입니다. 이 인간의 지혜는 매우 영특해서 영적인 진리라도 통달하려하고 그것에 대한 분명한 개념이나 이미지를 형성하려하면서 생명 안에서 진리를 계시하는 성령의 살아있는 능력 대신에 자신의 노력의 산물을 즐기려 합니다. 미련한 자가 되는 길이 참으로 하늘 나라의 비밀을 알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십시다. "내가 지혜 있는 자의 지혜를 멸하리라" 세상의 영과 세상의 지혜가 하나임을 유념하십시오. 기록된 말씀은 하나님의 임재,즉 성령 안에 있을 때만 살아있는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들이 아무리 정확히 말씀을 알라도 말씀을 안다는 자만에 빠지면 결국 그 말씀의 참된 생명을 발견하지 못한 채 그 말씀을 모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럴수록 그 신자의 마음은 강팍하게 됩니다. 즉 겸손하고 온유한 사람이 되는 데서 점점 멀어진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오직 온유하고 낮아져서 하나님을 기다리는 자에게만 하나님의 진리를 능력으로 계시할 수 있습니다. 즉 어린아이가 되어 순종하는 것이 참된 진리에 이르는 길이란 말입니다. 복음을 깨달았다는 것이 어떤 자만을 길러줄 때 그는 육신적인 신자의 위치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즉 초신자들에게는 성경을 모르는 것이 문제가 되고 성경을 좀 안다는 사람들에게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굴복함이 없이 자기의지로 하나님을 섬기려드는 것이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언제나 여전히 우리에게 제시해줄 진리를 갖고 계시고 우리에게 채워줄 축복을 안고 계십니다. 우리는 오직 성령안에서만 우리를 진리가운데로 인도하신다는 것을 유념해야 합니다. 이것이 없을 때 그 신자는 육신적인 신자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구원만 받으면 됐지 신령하게 살아서 뭣하느냐 하는 한심한 사람도 있습니다만 그것은 때가 될 때까지 알곡이 되지 않는 쭉정이는 불에 태운다는 주님의 준엄한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소치인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는 말씀은 노골적으로 말해서 영원한 멸망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과 같습니다. 또 버리운 자라는 말씀도 새 하늘 새 땅, 곧 영생복락의 세계에 가는 데서 제외되었다는 말과 다름이 없습니다. 우리 속에 계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은밀한 처소에 대해 아는 것은 우리 성전 예배에 있어서 중심적 진리가 되어야만 합니다. 저나 여러분처럼 죄 많고 부끄러운 인생들을 하나님께서는 더럽다 아니하시고 그리스도의 귀한 피로 씼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생명강가에서 비천한 우리를 영화롭게 하시며 영생하는 아가페 사랑의 길을 하나하나 가르쳐주실 것입니다. 신자들이 육신대로 살아도 천국에 가는 사실은 변함이 없으나 다만 생활이 죽는 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열매는 나빠도 나무는 좋다는 궤변이지요 그러나 그런 엉터리해석은 사단의 올무를 숨기고 잇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복음의 영광을 밝혀주는 로마서 8장이 이 13절을 중심으로 하여 기록하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라는 말씀은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창세기의 말씀과 똑 같은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말씀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는 말씀입니다. 할례는 그 근본이 육적 몸을 벗는 것입니다. 이 육체적 성향은 하나의 거인이어서 우리가 가나안에 들어가고자 할 때 큰 두려움을 주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형제 자매님, 이제 하나님 말씀이 가르치는 축복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다.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함을 망치는 것은 육신을 신뢰함인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을 자아가 행하는 것이며 그것은 신앙을 혼이 주도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혼이 성령으로서 인도하고 해 주실 것을 믿고 기다리는 대신 성령께서 자기의 노력을 보충해주시리라는 기대 속에서 스스로 일을 주도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를 부인함이 없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였던 것입니다. 신자의 자아는 무릎을 꿇고 영을 통해오는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야 하는데 그 반대라는 것이지요 저와 여러분은 이렇게 시건방진 사람이 아닌지요 어떻게 성령께서 육체의 생명을 완전히 처리하시고 자신이 우리 안에 전혀 새로운 생명이 되시며 그리스도를 우리의 생명으로 게시하시는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기를 간구 하십시다. 그 때 우리는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는 필히 본 갈라디아서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은 칭의는 오직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이 목적에 이르기 위한 수단일 뿐이며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행하는 삶에 들어가기 위한 입구에 지나지 않음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죄를 짊어지심은 단지 성령의 임재를 위한 길을 예비하기 위한 것입니다. 믿음에는 반드시 시련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시련은 지는 자에게는 재난이지만 이기는 자에게는 고마운 은총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고 믿음으로 받아드린 이삭의 생명도 부활의 모형으로써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생명으로 되돌려 받기 위해 죽음에 내어 주어야만 했습니다. 성령의 사역에 대신하여 하나님께서 허락하신다는 경험은 몇 번이고 사라질 것이며 영혼은 무기력하고도 죽어있는 것처럼 보이게도 됩니다. 이것은 이중적인 교훈을 완전히 깨달을 때까지 있는 일인데 첫째 교훈은 살아있는 믿음은 모든 느낌과 경험이 약속에 어긋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기뻐할 수 있다는 것이며 둘째 교훈은 육적 생명이 죽음에 넘기울 때 비로소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은 그분의 죽음이 우리 안에서 역사할 때, 그리고 연약함과 무가치 속에서 우리가 그분을 바라볼 때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인 십자가의 원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의 죽음을 요구하셨을 때 정말 그럴 수 없다고 생각했던 상황에서도 그는 하나님을 신뢰 할줄 알았습니다. 여러분의 내면 속에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성령께서 이미 와 계십니다. 처음으로 성령을 받은 조건으로써의 죄에서 정결함을 입는 것과 그후 성령충만을 받는 조건으로써의 사랑으로 순종하는 것은 죄가 무엇이며 피가 무엇이고, 하나님의 뜻과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믿음의 열매인 것입니다. 성령충만이 참으로 이루어지려면 언제나 비워놓는 일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말했습니다. "나는 성령충만의 축복을 오랫동안 진실하게 구했습니다만 얻지 못했습니다. 매번 나는 그것이 왜 임하지 않는지 의아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결국 내 마음속에 성령충만을 받아드릴 여지가 없었기 때문에 임하지 않았음을 깨달았습니다."라고 말입니다. 먼저 비워야합니다. 비우는 일에는 다양한 요소들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지금껏 우리가 갖고 있던 신앙에 대한 불만족감, 그 안에 육체의 지혜와 육체의 행위가 얼마나 많았던가 하는 것을 깊이 깨닫는 것, 우리 스스로 손에 쥐고 자아가 지배하는 가운데 직접 예수님께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것을 불요 불급하다거나 불가능하게 생각했던 지나간 삶의 모든 것을 발견하고 시인하고 던져버리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또 스스로 무능하고 무기력하여 허락된 것을 요구하거나 붙들지 못한다는 깊은 확신 가난한 마음으로 무릎꿇고 큰 자비와 능력가운데 계신 주님께서 그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해주시기를 기다리는 것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 안에서 그 약속을 이루시고 우리의 마음속을 완전히 소유하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기다리며 쉬지 않고 부르짖는 것, 이렇게 비우는 것이 충만에 이르는 필수적인 일입니다. 참으로 약한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을 기대하시고 성령께서 가르치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받기 위해 여러분 자신을 낮추십시요 스스로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십시오 "저희가 성령의 충만을 받고 말하기를 시작하는니라" 그러므로 그들과 같은 믿음의 성령을 소유할 때 우리도 말해야 합니다. 샘은 솟아나야 하고 강이 되어 흘러야 합니다. 여기서의 침묵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잇는 일이지만 지극히 경건한 고독 속에서 인식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풍성한 기쁨이 교제 속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슬프게도 우리 자신의 능력이나 사랑으로는 우리가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본래 우리 자신에게 속한 모든 것은 이기적인것이며 진정한 하나되게 하심에는 별로 보탬이 되지 않는 다는 것을 솔직히 고백하십시다. 성령의 하나되게 하심이란 그리스도의 몸이 통일된 하나의 거룩하고도 드높은 생명체로 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운데 아간처럼 세상욕심을 숨긴자가 없이 모두가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채 깨끗하고도 경건한 삶을 살며 가난하지만 형제 자매를 사랑하고 섬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각양 각색의 여러 지체가 있지만 성령 안에서 오신 그리스도만이 한 사람으로 나타나시고 살아가시는 교회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입니다. 참된 교회는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가 된 거룩한 영적 통일체라는 것을 세상의 모든 신자들은 항상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
- 엔드류 머레이 : 그리스도의 영 성령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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