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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급

하나님아들 2022. 2. 26. 16:17

상급

 

우리의 현주소

“상급,” 혹은 “상”이라는 주제는 현재 한국 교회 내에 묘한 양극화 현상을 초래하고 있다. 한편으로, 대부분의 목회자와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을 위해 수고하고 힘쓸 때 하나님께서 구원에 덧붙여 상(급)을 베푸신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어떤 목회자들은 그리스도인들이 내세에서 누리는 상급의 내용 -- 넓고 좋은 거처(요 14:2), 더 나은 부활의 몸(히 11:35) 등 -- 을 들먹이면서, 교우들의 헌신이나 전도 활동을 유도해 내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또 한편에서는 -- 주로 신학자들이 그런데 -- 그리스도인들에게 따로 상급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전혀 상반되는 주장을 내세우고 있다. 어떤 이들은 구원이 곧 상급이기 때문에 모든 이가 똑같이 상급을 받는 것이라고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더욱 엄격히 “상급”이라는 단어 자체의 사용에 반기를 들기도 한다. 이들은 주로 로마 가톨릭의 “공로적” 구원관을 혐오하기 때문에 그러한 입장을 취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사정으로 인해 상(급)이라는 주제는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는데, 심지어 같은 입장 속에도 더 세분화된 갈래들이 존재한다는 것이 이 점을 설명한다. 상(급)에 대한 우리의 궁금증은 깊고도 폭이 넓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상급이 있는가 없는가? 있다면 (혹은 없다면) 구원과의 관계는 무엇인가? 혹시 상급이 있다고 해도 수혜자들 사이에 차등이 존재하는 것인가? 상급의 본질과 그 본질적 특성은 무엇인가? 상급이 완성될 천국의 삶에 어떤 항구적 영향을 미치는가?

상(급)이라는 주제를 다루기가 쉽지 않은 또 다른 이유는, 개역판 한글 성경만 하더라도 “상,” “상급,” “갚다/갚음,” “면류관” 등 상에 연관된 다양한 단어들이 무차별적으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 글에서 주로 “상”이라는 명사를 핵심으로 하여 주제를 개진하고자 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상급,” “갚음,” “면류관” 등의 단어도 비슷한 유로 여겨 함께 포함시킬 생각이다.

국어 사전에는 “상”이 “잘한 일을 칭찬하기 위하여 주는 표적”으로, “상급”은 “상으로 주는 것. 또는 그 물건”으로 되어 있다. 필자는 상과 상급을 함께 다루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선한 행실에 대해 (주로) 마지막 때에 갚아 주시는 일”이라고 다소 느슨한 정의를 내리고자 한다. “면류관”은 원래 고대의 왕들이 국가의 예식 때나 자신의 즉위 시에 썼던 관이고, 신약 성경에 등장하는 면류관은 올림픽 경기의 우승자들에게 씌워 주던 월계관이었다. 면류관은 명예와 영광의 상징으로서 주로 “상”에 대한 비유적 표현으로 많이 사용되고 있다.

 

상(급)에 관한 기본 사항

성경은 상(급)과 관련하여 가장 기본적인 세 가지 사항을 언급하고 있다. 그 세 가지는 상급의 실재성, 상급과 구원의 별개성, 상급의 차등성이다.

(1) 상급의 실재성

성경은 그리스도인에게 분명 상급이 있을 것임을 두 가지 방면으로 밝히고 있다. 첫째, 하나님 자신이 상급과 연관이 되거나 상 주시는 이심을 밝히고 있다.

창 15:1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사 28:5 그 날에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 남은 백성에게 영화로운 면류관이 되시며 아름다운 화관이 되실 것이라.

사 40:10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으며

사 62:11 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반포하시되, “너희는 딸 시온에게 이르라. 보라! 네 구원이 임하느니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느니라” 하셨느니라.

히 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

둘째, 하나님께서 상을 주신다고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다.

룻 2:12 여호와께서 네 행한 일을 보응하시기 원하며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그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삼하 22:21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상 주시며 내 손의 깨끗함을 좇아 갚으셨으니

잠 25:22 그리하는 것은 핀 숯으로 그의 머리에 놓는 것과 일반이요 여호와께서는 네게 상을 주시리라.

마 6:1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골 3:24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앎이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이상과 같은 성경의 증거가 있는데, 어떻게 상급론을 부인할 수 있을까? 사실 상급론을 부인하는 이들은 상급론의 여러 갈래 가운데 어느 하나를 반대하는 것이지, 성경에 상급에 관한 개념이 등장한다는 사실조차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2) 상급과 구원의 별개성

상급은 구원과 같은 것이 아니다. 상급이 구원에 더하여 주어지는 별도의 것임은, 전자가 우리의 행위와 연관된 것으로 말하는 것 -- 구원은 우리의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엡 2:8)인데 반해 -- 을 보아 알 수 있다. 다음의 구절들을 보라.

삼상 24:19 사람이 그 원수를 만나면 그를 평안히 가게 하겠느냐? 네가 오늘날 내게 행한 일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네게 선으로 갚으시기를 원하노라.

대하 15:7 그런즉 너희는 강하게 하라. 손이 약하지 않게 하라. 너의 행위에는 상급이 있음이니라.

잠 19:17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

눅 14:14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 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 하시더라.

고전 3:8 심은 이와 물 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고전 3:14-15 14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15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벧전 5:4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

계 22: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물론 이 때 우리의 “행위,” “선행”조차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성경의 어떤 곳에서는 상급이 곧 구원/영생인 것처럼 말하기도 한다.

골 3:24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앎이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상기 구절에서 “유업”과 “상”은 동격이다. 그런데 새 하늘과 새 땅을 유업으로 받는 것은 구원의 은택 가운데 일부이다 (행 26:18; 롬 8:17; 골 1:12; 벧전 1:3-5). 그렇다면 결국 상은 구원과 별도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구원을 그 내용으로 하는 셈이 된다.

딤후 4: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바울은 상급의 형태로서 “의의 면류관”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바울에게뿐 아니라 주의 오심을 사모하는 모든 이들, 곧 그리스도인들에게 동일하게 주어질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 상급은 구원과 별개의 것이 아니고 구원 자체임을 나타내는 것이 된다.

약 1: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계 2:10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찌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란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상기한 두 구절은 모두 “생명의 면류관”이라는 상급을 말하고 있는데, 결국 생명이 곧 상급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영생은 사실 구원의 핵심(요 5:24)이고, 또 생명은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 곧 그리스도인들에게 약속된 것(약 1:12)이므로, 상급은 구원과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결론이 성립된다.

그렇다면 구원과 상급은 별개의 것인가, 동일한 것인가? 답변은 양자 택일이 아니고 양자 모두에 일리가 있다는 것이다. 먼저 개념상으로 보자면 분명 구원과 상급은 서로 다른 것이다. 구원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공통적이되 상급은 그리스도인마다 차이가 있다. 구원은 믿음을 통한 선물이되 상급은 행위로 인한 부가적 보상이다. 그러나 구원과 상급이 우리에게 인식되고 향유되는 메커니즘의 각도에서 보자면 구원과 상급은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구원의 완성은 마지막 날 주님과의 대면 및 대화를 통해 확인될 것이다. 상급 역시 주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칭찬과 인정이므로 우리와의 대면 및 대화 가운데 주어질 것이다. 다시 말해서, 상급 또한 구원과 마찬가지로 같은 주님과의 만남 및 의사 소통을 통해서 한꺼번에 또 동시적으로 경험될 것이므로 바로 그 점에서 두 가지가 같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구원과 상급을 별개로만 인식한 이들은 구원이 곧 상급이라는 성구의 내용을 설명할 수 없었고, 구원과 상급이 동일하다고 보는 이들은 그 둘이 개념상으로도 똑같은 것처럼 잘못 해석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그러나 상기한 식의 설명은 구원과 상급 두 가지를 개념상 구별할 수 있게 하면서도 동시에 두 가지가 하나의 현상인 것처럼 인식할 수 있게 해 주는 이론적 기초를 제공한다.

(3) 상급의 차별성

상급은 각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차이가 있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큰 상급을 받고 어떤 그리스도인은 적게 받을 것이며 또 어떤 그리스도인은 아예 상급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 다음의 성구들은 그 점을 설명해 준다.

마 5: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마 10:41-42 41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42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고전 3:8 심은 이 물 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고전 3:14-15 14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15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히 10:35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

계 22: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그러나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인 사이에 차등적 상급이 존재한다는 것을 부인한다. 그들의 부인은 그 근거에 따라 두 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성경의 내용에 기초하여 차등 상급 이론을 부인한다.

마 20:1-10 1천국은 마치 품군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 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2저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군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 3 제 3시에 나가 보니 장터에 놀고 섰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4저희에게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네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하니 저희가 가고 5제 6시 제 9시에 또 나가 그와 같이 하고 6제 11시에도 나가 보니 섰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7가로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섰느뇨?” 가로되, “우리를 품군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가로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8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군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 9제 11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10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저희도 한 데나리온씩 받는지라.

블롬버그(Craig L. Blomberg)는 상기한 “포도원 일군의 비유”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근본적 평등성(fundamental equality)”이라고 못박으면서 차등 상급론에 제동을 건다. 그러나 이 비유가 주어진 목적과 전후 문맥을 살펴 보면, 상급의 동등성이나 차등성에 초점이 있기보다도 오히려 상급에 임하는 자세를 가르치고자 함임을 알 수 있다. 이 비유가 마련된 계기는 베드로의 질문이었다.

마 19:27-30 27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28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29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30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베드로의 질문(v. 27)은 자신의 희생적 포기[선행]와 그에 대한 보상[상급]을 중심으로 형성된 것인데, 여기에는 묘하게도 베드로 자신의 공로 의식과 타산적 태도가 반영되고 있다. 이에 대해 주님께서는 일단 상급의 실재만은 기꺼이 인정하신다 (v. 29). 그러나 베드로의 공로적․타산적 상급관은 교정을 받아야 했다. 바로 이것 때문에 포도원 일군의 비유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 비유를 통해 주님께서는 베드로의 상급관에 깔린 두 가지 문제점 -- 공로적 상급관 및 타산적 상급관 -- 을 지적하신다. (i) 첫째, 포도원에서 일한 일군들은 오전 일찍 고용된 이들일수록 공로 의식에 넘쳐 있었다. 이른 아침에 일을 시작한 이들은 명시적인 고용 계약의 체결이 있었고 (v. 2), 제 3․6․9시에 들어온 이들은 그저 “상당하게 주리라”(v. 4)는 말만 믿고 일을 했는가 하면, 제 11시에 들어온 이는 아무런 고용 계약의 언급 없이 그저 초청에 응한 것(v. 7)으로 나타나 있다. 그리하여 처음 온 이들일수록 자신의 임금을 자기가 누려야 할 권리로 당연시했으나, 둘째 그룹의 사람들은 자기들이 받은 임금을 정당한 대가로보다는 어느 정도 주인의 호의에 기초한 것으로 이해했고, 마지막에 들어온 사람들은 오직 주인의 호의에 입각해서만 처분을 기다리겠다는 비공로적 자세를 견지하고 있었다. 비록 베드로가 모든 것을 포기했고 하나님께서는 물론 그에 대해 상을 베푸시는 법이지만, 그래도 그런 헌신이 그의 심령 속에 공로 의식을 낳아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ii) 둘째, 포도원에서 일한 일군들은 일찍 일한 이들일수록 자기들의 수고한 시간의 양에 비례해 남보다 더 큰 임금이 주어지리라는 타산적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이 후에 “집 주인을 원망하여 가로되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저희를 종일 수고와 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다” (vv. 11-12)고 한 것은, 바로 이러한 타산적 태도의 반영이다. 그러나 일군에 대한 임금은 그가 최소한의 적정선을 지키는 한 -- 이 경우에는 모든 이가 최소한 한 데나리온을 받는 것이었는데 --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하시는” (v. 15) 주님의 주권적 결정에 달려 있었던 것이다. 베드로는 모든 것을 희생했지만 거기에 근거해 자신이 받을 상급의 정도를 타산적으로 기대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이러한 두 가지 문제점을 깨우치시기 위해 포도원 일군의 비유를 말씀하신 주님께서는, 비유의 앞 뒤에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마 19:30),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마 20:16)는 교훈을 배치시키신다. 이처럼 마 20:1-10의 비유는 베드로(및 우리)의 공로적․타산적 상급관을 교정하기 위한 것이므로, 차등 상급론에 대한 반대 근거로 활용될 수 없다.

둘째, 신학적 진술에 의거해 차등 상급 이론을 부인하는 경우도 있다.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상급을 받는다는 것은 인정한다 해도 그들 사이에 상급의 차등이 있다는 것은 부인한다. 훅스마(Hoeksema)는 “각각 자신의 일한 대로 상을 받는다”는 성경의 표현을 그저 일반적 원리로만 해석한다. 그는 아브라함 카이퍼의 차등 상급론을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성도들은 적은 이로부터 큰 이에 이르기까지 어느 정도의 선행을 할 것이고, 이 점에 있어서는 그들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을 것임이 확실하다. 그리고 모든 이들은 그들의 행한 바에 따라 은혜의 (보)상을 받을 것이다 … 각자의 일한 바에 따라 상급이 주어진다는 성경의 명백한 가르침은 분명코 전적으로 일반적인(general) 것이다. 여기에는 모든 이가 포함된다. 카이퍼에 의하면 어떤 일부의 사람들만이 그 이상의 선물 곧 그 이상의 영광을 향유하고, 나머지 수많은 성도들은 영생만 누리고 그 이상 아무것도 향유하지 못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맞지 않는 말이다.

 

그러나 상기한 훅스마의 설명은 매우 궁색하다. 각 사람이 일한 대로 상급을 받는다는 진술은 그저 상식적으로만 생각해 보아도, 각 사람의 차이를 부각하기 위한 것이지 그의 해석처럼 공통점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각 사람의 일은 일의 종류, 열심의 정도, 성취도, 일한 이의 동기, 일한 이의 심리적․환경적 맥락 등에 있어서 분명 차이가 있을 것이다. 가장 공평하고 전지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런 모든 요인들을 고려하여 가장 공평하고 정의롭게 각 사람에 맞는 -- 그리하여 서로 간에 차이가 나는 -- 상급을 베푸실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상급의 차등성은 부인할 수 없이 명확한 성경의 가르침이라고 하겠다.

필자는 지금까지 상급의 주제와 관련하여 세 가지 기본 사항 -- 상급의 실재성, 상급과 구원의 별개성, 상급의 차등성 -- 을 설명했다. 이제 본격적으로 상급의 본질적 특성을 규명하고자 한다.

 

상(급)의 본질적 특성

(1) 상(급)의 세 가지 구성 요소

상(급)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관건이 되는 것은 상(급)이 세 요소로 구성된다는 것을 파악하는 일이다. 다음의 성구는 이러한 규명 작업에 도움을 준다.

단 2:6 너희가 만일 꿈과 그 해석을 보이면 너희가 선물  큰 영광 내게서 얻으리라. 그런즉 꿈과 그 해석을 내게 보이라.

느부갓네살은 꿈을 꾸고 나서 자신의 술사들로 하여금 그 꿈의 내용과 해석을 이르라고 명한다. 그렇게 할 경우 해석자는 느부갓네살로부터 선물, 상, 영광을 얻게 되리라는 것이다. 이에 해당되는 유능한 -- 그러면서도 유일한 -- 해석자가 있었으니, 바로 다니엘이었다. 다니엘이 꿈을 해석하자 느부갓네살은 과분할 정도로 반응을 하는데, 어쨌든 그 가운데에는 약속대로 상의 수여가 들어 있었다.

단 2:46-48 46이에 느부갓네살왕이 엎드려 다니엘에게 절하고 명하여 예물 향품을 그에게 드리게 하니라. 47왕이 대답하여 다니엘에게 이르되, “너희 하나님은 참으로 모든 신의 신이시요 모든 왕의 주재시로다. 네가 능히 이 은밀한 것을 나타내었으니 네 하나님은 또 은밀한 것을 나타내시는 자시로다.” 48왕이 이에 다니엘을 높여 귀한 선물을 많이 주며 세워 바벨론 온 도를 다스리게 하며  바벨론 모든 박사의 어른을 삼았으며

느부갓네살은 다니엘의 공로를 인정하여 그에게 각종 선물을 지급하고 높은 지위를 부여했다.

이상의 내용으로부터 상급의 세 요소를 추출할 수 있는데, 그것은 (i) 상급의 수여자, (ii) 상급 수여의 근거, (iii) 상급의 내용이다. 상급의 수여자는 문자 그대로 상급을 수여하는 주체를 말한다. 상급 수여의 근거는 왜 수상자가 이런 상을 받게 되었는지에 대한 것으로서, 보통 상장에 명기가 되곤 한다. 상급의 내용은 수상자에게 주어지는 구체적인 품목으로서 상금, 지위, 특권 등을 말한다. 이 세 요소를 다니엘의 상급과 연관시켜 보면, (i) 상급의 수여자는 느부갓네살이요, (ii) 상급 수요의 근거는 은밀한 것에 대한 인지 능력이며, (iii) 상급의 내용은 예물, 향품, 높은 지위라고 할 수 있다.

삼요소
계기
(i) 상급의 수여자 (ii) 상급 수여의 근거 (iii) 상급의 내용
① 졸업식 시상 대학의 총장 4개년 간 성적 최우수 상패, 석사 과정 장학금 지급
② 신춘 문예 당선 비평가 협회 최우수 소설 창작 상금, 신인 작가로 등단
③ 월드컵 대회 국제축구연맹(FIFA) 결승전에서의 승리 우승배, 상금, 군복무 면제
④ 다니엘의 경험 느부갓네살 은밀한 것에 대한 인지 능력 선물, 높은 지위

상급의 삼요소를 좀더 확실히 깨닫기 위하여 상이 수여되는 몇 가지 계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또 다니엘의 경우도 함께 포함시켜 비교하고자 한다.

(2) 세 요소 사이의 비중

상급의 삼요소 -- (i) 상급의 수여자, (ii) 상급 수여의 근거, (iii) 상급의 내용 --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일까? 타락한 세상일수록 (i), (ii)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주로 (iii)에만 치우치는 것 같다. 예를 들어, 복권에 당첨된 경우를 보자. 당첨자는 그 상금을 누가 주는지 전혀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다 [(i)에 대해 상관하지 않음]. 또 그 당첨자가 그런 상금을 받게 되는 것이 그 자신이 가진 어떤 장점이나 근면한 노력, 재능의 발전 등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는 그저 우연히 어떤 추첨권을 구입했고 그로 인해 행운이 굴러 들어온 것일 따름이다 [합당한 근거 (ii)의 결여]. 그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단지 상금일 뿐이다 [(iii)에 대한 집착].

그러나 이 세상에서도 사람들이 고귀하게 생각하는 상의 계기는 (iii)보다는 (i)과 (ii)에 대한 것이다. 노벨 물리학상이 대단한 이유는 그에 따르는 상금[(iii)의 요소] 때문이 아니라 노벨상 위원회[(i)의 요소]가 수상자의 실력과 공적[(ii)의 요소]을 인정했다는 데 있다. 유전자 조작 식품에 대한 논문이 Nature지에 게재되었다는 것은 그 전문지의 편집인[(i)의 요소]이 논문 작성자의 학문적 수준[(ii)의 요소]을 인정했다는 데 의의가 있지, 그 논문으로 인해 받게 되는 상금[(iii)의 요소]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의 삶에 있어서도 상급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는 (i) 및 (ii)이지 결코 (iii)이 아님을 알 수 있다.

(3) 천국에서의 상급과 삼요소

그렇다면 천국에서 받는 상급의 경우는 어떠한가? 여기에도 상급의 삼요소를 찾아볼 수 있다. (i) 상급의 수여자는 두 말할 나위 없이 하나님이시다. (ii) 상급 수여의 근거는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서 행한 바 --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겸허한 노력과 수고, 은사의 성실한 계발, 지사(至死) 충성의 자세, 복음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고난 등 -- 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이다. (iii) 상급의 내용은 천국에서 누리게 될 구체적 은택이다.

이 가운데 어떤 요소가 가장 중요할까? 그것은 단연코 (i), 그리고 (ii)의 요소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첫째, 우리에게 상급을 베푸시는 수여자가 가장 위대하고 놀라운 분이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수고와 노력을 알아 주는 이가 매우 신분이 낮은 인물이라고 하자. 그것도 어느 정도 우리에게 기쁨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인식자가 정부 요직에 있는 세도가나 전문 영역의 일인자일 때 우리의 기쁨은 엄청날 것이다. 우리는 속으로 “아니, 이런 대단한 인물이 나의 수고와 노력을 알아 주다니 …” 하며 감격에 젖을 것이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렇게 인정해 주실 때에랴?! 하나님은 그 권세와 영광이 뛰어나시고 그 무엇과도 비할 바 없는 주권자이시며 만유의 통치자이시다. 그런 분이 나를 인정해 주실 때 그것보다 더한 즐거움이 어디 있겠는가?

둘째, 상급을 베푸시는 그 하나님은 동시에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지극히 아끼시는 그런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 분은 나를 위해 목숨을 버리셨고 나를 위해 다시 살아나신 그런 분이시다. 그가 단지 권능자로서 나의 수고와 노력을 알아 주시는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인데, 동시에 나를 그토록 사랑하시고 아끼는 분으로서 나의 수고와 노력을 알아 주신다고 할 때, 우리의 즐거움과 쾌락은 상상의 범위를 초월하는 그런 수준의 것이 된다.

바로 이렇게 어떤 수여자[(i)의 요소]가 우리의 수고와 노력을 인정해 주느냐[(ii)의 요소]하는 것이 천국 상급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천국의 상급은 우리가 하늘과 새 땅에서 누리는 어떤 실제적 유익[(iii)의 요소]에 있지 않다. 이 세상에서도 (iii)의 요소에 집착하는 것은 저급한 수준의 상급임을 이미 밝힌 바 있다. 하물며 천국에서겠는가? 이 세상에서 우리가 귀하게 여기는 상금, 선물, 지위[(iii)의 요소] 등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아무런 가치를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상급의 핵심과 본질적 특징은 “어떤 인물, 곧 상급 수여자의 인정”에 있다고 하겠다.

우리가 이상의 내용을 마음에 깊이 새기고 확실히 받아들일 때, 왜 구원과 상급이 그 메커니즘에 있어서 하나라고 하는지를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 구원이 하나님과의 면대(계 22:4) 및 의사 소통 (계 21:3-4, 5)을 통하여 경험되듯이, 상급 또한 같은 하나님으로부터,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찌어다!”(마 25:21, 23)라는 칭찬과 인정을 경험하는 일이다. 비록 구원과 상급이 개념상으로는 구별이 되지만, 후에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이 두 가지를 하나의 현상 혹은 사건으로 한꺼번에 동시적으로 경험할 것이다. 이런 내용은 상급의 핵심과 본질적 특성이 하나님의 칭찬과 인정에 있음을 뒷받침하는 또 다른 증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4) 두 종류의 차등 상급론

바로 이 시점에서 필자는 차등 상급론에도 두 종류가 있음을 밝히고자 한다. 두 종류의 차등 상급론은, 상급의 삼요소 가운데 어떤 것이 중요한지에 대한 견해의 차이로 인해 생겼다. 필자의 주장과 같이 상급의 본질적 특징을 주로 수여자[(i)의 요소]와 근거[(ii)의 요소]에서 찾으면, 신(神) 인정적(認定的) 차등 상급론이 형성된다. 이 입장은 상급의 핵심이 하나님의 인정과 칭찬에 있다고 본다.

이와 달리 어떤 이들은 비록 상급의 수여자와 수여 근거가 중요하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상급의 내용[(iii)의 요소]에 더 큰 비중을 둔다. 이들의 입장을 가리켜 필자는 유익 집착적 차등 상급론이라 부르고자 한다. 왜냐하면 이 입장의 주창자들은 하나 같이 그리스도인이 천국에서 실제적으로 누리게 될 인간 중심적 유익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유익 집착적 차등 상급론자들은 (i) 상급의 차이를 단지 하나님으로부터 경험하는 인정과 칭찬의 차이에 국한시키지 않고 그리스도인이 수여 받는다고 여기는 실제적 상급 내용 -- 은사, 권세, 거주지, 부활의 몸 등 -- 에 있어서의 차이까지도 포함한다고 생각한다. (ii) 또 이러한 상급 내용에서의 차이 때문에 그리스도인들 사이에는 어떤 조건/상태에 있어서 서로 간에 차별이 생긴다고 본다. (iii) 뿐만 아니라 이러한 차별은 초기적이거나 일시적인 것이 아니고 항구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 과연 유익 집착적 차등 상급론은 성경의 지지를 받을 수 있을 것인가?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확신있게 “그렇다”고 답변하면서, 몇 가지 지지 구절을 내세운다. 이제 필자는 그 구절들이 과연 유익 집착적 차등 상급론을 지지할 수 있는지 하나씩 살펴보고자 한다.

마 25:21, 28-29 21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찌어다 … 28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어라. 29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보통 유익 집착적 차등 상급론자들은 종들이 최종적으로 소유한 달란트의 수효가 차등 상급론을 지지해 주고, 또 이런 차등적 상태는 영구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필자는 이들의 성경 해석 내용 두 가지가 모두 그릇되었다고 생각한다. 우선, 달란트의 수효는 상급의 차등성을 설명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종들은 처음부터 서로 다른 수효의 달란트를 부여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비유의 주목적은 상급의 차등성을 설명하는 데 있지 않고 상급을 받는 근거가 무엇인지 밝히는 데 있다. 그런데 이러한 상급 수여의 근거는 부여 받은 달란트의 수효에 있지 않고, 부여 받은 달란트의 수효와 상관 없이 그가 얼마나 착하고 충성된 노력을 기울였느냐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이나 두 달란트 받은 종이나 동일한 상급을 받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비유에 나타나는 최종적 달란트의 수효는 상급의 근거를 설명하기 위한 임시 방편적 수단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이런 수효의 차이로부터 신자 사이의 차등적 상태가 영구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본문의 의도를 벗어나는 억해(抑解, eisgesis)라고밖에 판정할 수 없다. 물론 신자 사이에 상급의 차등성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진리는 이 비유에서 도출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그 차등성의 핵심인즉 하나님의 칭찬과 인정을 크게 받느냐 적게 받느냐 하는 것이지, 신자들이 천국에서 향유하는 은택과 관련해 어떤 영구적인 상태의 차이가 존재한다는 말은 아니다.

이제 유익 집착적 차등 상급론의 근거로 제시되는 또 다른 구절을 검토해 보자.

눅 19:17, 19 17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 … 19주인이 그에게도 이르되, “너도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 하고

므나의 비유는 달란트의 비유와 유사해 보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전혀 별개의 배경, 내용,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이 비유는 분명 차등 상급론을 가르치고 있다. 열 명의 종들은 모두 동일하게 한 므나 -- 한 달의 품삯으로서 60 므나는 한 달란트에 해당함 -- 를 받았지만, 각자의 노력에 의해 열 므나를 남기기도 하고(눅 19:16), 다섯 므나를 남기기도 했으며(눅 19:18), 한 므나 그대로 둔 종도 있었다(눅 19:20). 왕으로 돌아온 주인은 열 므나를 만든 종에게는 열 고을을 상급으로 주고(v. 17), 다섯 므나를 만든 종에게는 다섯 고을을 상급으로 주었다(v. 19). 이 비유에서는 달란트의 비유와 달리 상급의 차이를 수량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어쨌든 각자의 노력과 수고에 따라 상급에 차이가 있음을 가르치는 것이다.

그런데 므나의 비유에 나타난 교훈으로부터 유익 집착적 차등 상급론까지도 도출할 수 있을까? 언뜻 보기에는 그럴 것 같다. 왜냐하면 열 고을을 다스리는 권세와 다섯 고을을 다스리는 권세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그저 신적 인정과 칭찬의 차이 정도가 아니라 그들이 구체적으로 누리게 될 실제적 유익의 차이까지도 가르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차등 상급의 교훈을 찬찬히 살펴보면, 그 교훈이 기초하고 있는 “열 고을,” “다섯 고을”의 다스림이란 사실적인 것이 아니고 차등적 상급 이론을 부각시키기 위한 비유적 표현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왜 그런가? 첫째, 고을을 다스리는 일은 죄와 심판 및 징벌을 포함하는데 이것은 천국의 삶과 맞지 않는다. 고을을 다스린다는 것은 정치적․행정적․사법적 권세를 동반한다. 쉽게 말해서 “심판”(롬 13:2), “악한 일에 대한 징벌”(롬 13:3), “칼”(롬 13:4) 등이 포함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그 거주민에게서 죄성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죄된 행위가 발생하지 않고, 따라서 “심판,” “무력의 행사,” “위협,” “악행,” “징벌” 등의 조치가 요구되지 않을 것이다. 둘째, 천국에서는 주님의 직접적 통치가 이루어질 것이므로 인간 권세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노릇할 것”(계 11:15)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백성을 직접 다스리이기 때문에 더 이상 인간 권세자가 중간에 끼어들지 않을 것임을 함의하고 있다. 이런 이유들로 인해 천국에서는 고을을 다스리는 일이 있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이 표현들은 상급의 차등성을 나타내기 위한 하나의 비유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므나의 비유에서 등장하는 “어떤 귀인” (눅 19:12)이 후에 왕위를 부여 받는 존재이므로, 그런 존재에 걸맞은 상급 형태를 찾다 보니까 그 당시의 왕에게 일어나기도 했던 바, 곧 고을을 맡기는 일을 채택하게 된 것이었다. 따라서 므나의 비유로부터 상급의 차등 이론까지는 도출할 수 있지만 유익 집착적 차등 상급론까지 이끌어 내는 것은 무리라고 하겠다.

한국 교회 내에서 유익 집착적 차등 상급론의 근거로 가장 많이 유행하는 구절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필자는 주저 없이 다음의 구절을 댈 것이다.

요 14: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그들의 주장인즉, 천국에는 공간의 크기와 장려(壯麗)함이 서로 다른 여러 형태의 거주지가 존재하는데, 큰 상급의 수여자일수록 조건이 좋은 집에 살게 되고 그렇지 못한 이들일수록 평범하거나 보잘 것 없는 집에 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상기 구절은 그러한 차등적 거주지에 대해 전혀 힌트조차 주지 않는다. “거할 곳이 많다는 것”은 천국의 충분한 수용 능력을 말하는 것이지 여러 종류의 차등적 거주지가 마련되어 있다는 뜻은 아니다.

또 최근 어떤 목회자는 다음과 같은 구절로부터 유익 집착적 차등 상급론을 정당화하기도 한다.

히 11:35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상기 구절에 “더 좋은 부활”이라는 어구가 등장하기 때문에 그들은 “좋은 부활”과 “더 좋은 부활”을 구분하고, 이 세상에서 열심히 일한 -- 예를 들어 전도나 교회 봉사에 있어서 -- 이들에게는 “더 좋은 부활”[더 좋은 부활의 몸]이 주어진다는 식의 주장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전혀 빗나간 해석으로부터 연유한 것이다. 첫째, “더 좋은 부활”에서 비교하고자 하는 대상은 현재 겪는 고난의 삶이지 부활체끼리의 비교가 아니다. 가령, 우리가 “더 나은 미래를 향하여 나아가자!”라고 말할 때, 아무도 미래 가운데 “나은 미래”와 “더 나은 미래”의 두 종류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더 나은”이 비교하고자 하는 대상은 현재의 상태이다. 그렇다면 이 표현이 나타내고자 하는 것은 “(현재보다) 더 나은 미래”이다. 이와 똑같은 설명이 히 13:35의 “더 좋은 부활”에도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부활체 사이에 더 좋고 덜 좋고의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고, “(현재 겪는 고난의 실존보다) 더 좋은 부활”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둘째, 신자의 부활체 사이에는 차등이 존재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고전 15:42-44에는 현재의 몸과 부활의 몸 사이에 존재하는 대조점 -- 썩을 것 vs. 썩지 않을 것 (v. 42), 욕된 것 vs. 영광스러운 것 (v. 43), 약한 것 vs. 강한 것 (v. 43), 육의 몸 vs. 신령한 몸 (v. 44) -- 에 대해서만 언급을 하고 있지, 결코 부활의 몸들 사이에 무슨 차등이 존재한다는 식으로는 말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히 11:35에 기초하여 유익 집착적 차등 상급설을 개진할 수는 없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필자는 유익 집착적 차등 상급설이 결코 성경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는 이론임을 주장하는 바이다.

이제 필자는 지금까지 등장한 여러 갈래의 상급론을 정리함으로써 이 장을 마무리 짓고자 한다. 우선 도표부터 작성하도록 하자.

(A) 상급 부재론

(B) 상급 실재론 (B-1) 동등 상급론

(B-2) 차등 상급론 (B-2-1) 공로적 차등 상급론

(B-2-2) 신 인정적 차등 상급론

(B-2-3) 유익 집착적 차등 상급론

(A) 상급 부재론은 성경에 상급 교리를 정당화할 만한 가르침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이 입장은 모종의 오해 -- 모든 상급론은 공로적이라든지, 성경의 용어를 제대로 파악하면 상급론이 성립될 수 없다든지 등 -- 때문에 생긴 것이다.

(B) 상급 실재론은 성경에는 상급 교리를 형성할 수 있는 가르침과 데이터가 충분하다고 보는 입장이다.

그런데 상급 실재론은 다시 두 가지로 나누인다. (B-1) 동등 상급론은 구원과 상급이 동일하다든지 또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똑같은 상급을 받게 된다든지 하는 입장이다. 이에 반해 (B-2) 차등 상급론은 상급이 구원에 부가하여 주어지는 것이고,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상급의 차이가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차등 상급론 내에도 몇 가지 갈래가 존재한다. (B-2-1) 공로적 차등 상급론은 주로 로마 가톨릭의 공로관과 연관된 것이라 할 수 있다. (B-2-2) 신 인정적 차등 상급론은 상급의 핵심을 하나님의 인정과 칭찬에서 찾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 사이에 상급의 차이가 존재한다고 본다. (B-2-3) 유익 집착적 차등 상급론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존재하는 상급의 차이가 그리스도인의 영적 상태나 조건에 있어서 항구적인 차별을 만들어 낸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이 논고에서 밝혔듯 상기한 여러 이론 가운데 (B-2-2) 신(神) 인정적(認定的) 차등 상급론을 지지한다. 이 상급론이야말로 성경의 지지를 전폭적으로 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우리가 이 세상의 고난과 역경 가운데에서도 주님을 바라보며 수고와 노력을 아끼지 않도록 -- 그러면서도 우리의 상급관이 공로적이거나 인간 본위적이 되지 않게 -- 해 주는 건실한 입장이기 때문이다.

[출처] 상급|작성자 senios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