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폴레옹
- Napoleon 1세. 본명은 Napoleon Bonaparte 이고 별칭은 Le Caporal이다. 프랑스 장군이자 제1통령(1799-1804), 프랑스와 서유럽 여러나라 제도에 오래도록 영향을 끼친 많은 개혁을 이루어냈고 프랑스의 군사적 팽창에 가장 큰 열정을 쏟았다. 그가 몰락했을 때 프랑스 영토는 1789년 혁명때보다 줄어들었지만 그가 살아 있는 동안, 그리고 조카인 나폴레옹 3세가 다스린 제 2제정이 막을 내릴 때까지 그는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웅으로 존경받았다. 나폴레옹은 1769년8월15일 코르시카의 아작시오에서 카를로 부오나파르테와 레티치아 라몰리노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그가 태어나기 바로 전 제노바는 코르시카를 프랑스에 할양했다. 그 뒤 코르시카 사람들은 프랑스의 점령에 저항했고 카를로 역시 파스콸레 파울리가 이끄는 코르시카 독립운동에 참여했으나 파올 리가 망명하자 카를로는 프랑스인과 타협했다. 코르시카 총독의 비호를 받은 그는 1771년 아작시오 지방법원의 판사 보좌관으로 임명되었고 1778년 에는 위로 두 아들인 조제프와 나폴레옹을 콜레주도툉에 입학시켰다. 나폴레옹은 프랑스로 간 뒤 한 동안 스스로를 외국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9세때부터 프랑스에서 교육받았으나 코르시카 기질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으며 교육과 독서를 통해 확실한18세기 사람이 되었다. 나폴레옹은 오툉, 브리엔, 파리에서 학교를 다녔다. 그가 파리에 있던 1785년 2월, 아버지는 어려운 집안 살림을 남겨 놓은채 숨을 거두었고 장남은 아니었지만 나폴레옹은 16세도 안된 나이에 가장역할을 떠맡았다. 그 해 9월 58명 가운데 42등으로 파리의 육군 사관학교를 졸업했고 젊은 포병장교를 위한 훈련기관인 라 페르 (La Fere)연대에 포병소위로 임관했다. 연대가 주둔한 발랑스에서 계속 교육을 받으며 특히 전략과 전술에 관한 책을 많이 읽었다. 1788년 6월에 연대에 복귀하였는데 그 때는 이미 프랑스 혁명의 불안한 움직임이 일고 있었다. 볼테르와 루소를 읽은 나폴레옹은 정치적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나 직업장교로서 급격한 사회개혁에 대한 필요는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혁명 시대 (1)자코뱅 시대 1789년 입헌군주정을 세우기 위해 모인 국민의회가 파올리의 코르시카 귀환을 허용하자 나폴레옹은 코르시카로가 파올리와 합세했다. 그러나 파올리는 대의명분을 버린 자의 아들에게 전혀 호감을 보이지 않았고 실망한 나폴레옹은 프랑스로 돌아왔다. 1791년 4월에 곧바로 자코뱅 클럽(원래입헌군주정을 지지하는 토론모임이었음)에 들어갔고 곧 회장이 되었다. 1791년 9월 3개월의 휴가를 얻어 다시 코르시카로 돌아가 국민 방위군 중령으로 선출되었으나 4월에 프랑스가 오스트리아에 전쟁을 선포하면서 사면되어 파리로 갔다. 나폴레옹은 대위로 진급했으나 연대로 복귀하지 않고 1792년 10월 코르시카로 돌아갔다. 그 곳에서는 파올리가 독재권을 쥐고 코르시카의 독립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나폴레옹은 파올리의 정책에 반대하는 코르시카 자코뱅당에 들어갔다. 1793년 4월 내란을 일으켜 파올리가 부오나파르테 가문을 탄압하자 그의 집안은 모두 프랑스로 달아났다. 나폴레옹은 1793년 6월 에니스에 있던 자기 연대로 복귀했다. 이 때 그는 을 집필하여 자코뱅 당과 지난 가을에 왕정을 타도한 국민 공회를 중심으로 모든 공화주의자가 단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793년 8월말에 왕당파가 불러들인 영국군에게 저지당했다. 국민 공회의 포병사령관이 부상당하자 나폴레옹은 그의 집안과 친분이 있는 코르시카 대표이자 군사위원 앙투안 살리세티 덕택에 그 자리를 차지했고 빠르게 진급했다. 그는 12월 16일에 부상을 입었으나 이튿날에는 영국군을 툴롱에서 몰아냈으며 그 공로로 12월 22일 24세의 나이의 준장으로 진급했다. 군사위원이 오귀스탱드 로베스피에르는 당시 실질적인 정부수반이자 공포정치의 주역이었던 자신의 형 막시밀리앙에게 편지를 보내 나폴레옹의 능력을 칭찬하였고 1794년 2월 나폴레옹은 이탈리아에 파견된 프랑스 포병의 지휘를 맡았다. 그러나 파리에서 로베스피에르가 테르미도르 9일 (1794.727)에 권력을 빼앗기자 로베스피에르의 앞잡이로 몰린 나폴레옹은 음모와 반역혐의로 체포당했다. 그는 9월에 풀려 났으나 군지휘권은 돌려받지 못했다. 이듬해 3월 방데에서 반 혁명군과 싸우고 있던 서부군의 포병을 지휘해달라는 제안을 받았으나 그 직책이 아뚜 장래성이 없다고 여겨 거절했다. 더 나은 자리를 얻으려고 파리로 갔으나 야심이 지나치고 국민공회의 과격적인 "산악당"과 가깝다고 의심받아 만족스러운 직책을 맡지 못했다. 2)총재정부 시대 나폴레옹이 파리에 있던 1795년 5월 해산을 앞둔 국민공회는 공회위원의 2/3를 새 입법부 의원에 재선하도록 규정한 법령이 통과되지 못하도록 파리에서 반란을 선동했다. 국민공회에게서 전권을 위임받은 골 드 바라스는 나폴레옹에게 진압책임을 맡겼고 나폴레옹은 방데미에르(포도의 달) 13일(1795.10.5) 반란군을 무찔러 국민공회의 공화국을 구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군 국내 사령관이 되었고 그 때부터 프랑스의 모든 정치 흐름을 잘 알 게 되었으며 새 총재정부에서 군사문제 고문직을 맡았다. 또 두 아이를 둔 알렉상드르 드 보아르네 장군의 미망인으로 숱한 염문을 뿌리던 조제핀 타셰 드 라파제리를 알게 되었다. 그에게는 새로운 삶이 열리고 있었다. 그는 프랑수아 바뵈프와 이탈리아 사람 필리포 부오나로피가 이끄는 공산주의 성향을 띤 집단을 해산시켜 총재정부의 인정을 받았고 1796년 3월에는 그가 원하던 이탈리아 원정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조세핀과 결혼한 (1796.3.9) 이틀 뒤 군대로 떠나 니스에 있는 지휘본부에 도착한 그는 4만 3,000명으로 기록되어 있는 군대가 실제로는 3만명의 오합지졸에 지나지 않음을 알 게 되었다. 1796년 3월 28일 그는 장병들에게 첫 성명을 발표했다. "병사들이여 여러분은 벌거벗고 굶주려 있다. 병사들이여 용기와 신념을 잃지 말라 " 그는 4월 12일에 공격을 시작해 오스트리아군과 사르데냐군을 잇달아 격파하면서 토리노로 진격했다. 사르데냐 왕 비토리오 아메데오 3세의 요청으로 5월 15일에 파리에서 평화조약을 맺고 1792년부터 프랑스에게 점령당해 있던 니스와 사보이를 프랑스에 병합시켰다. 오스트리아와는 계속 싸워 말라노를 점령했으나 만토바에서 더 나가지 못하고 그의 군대가 만토바를 포위하고 있는 동안 그는 파르마 공, 모...
출처 : Daum 지식
글쓴이 : 앞을바라보고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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