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전 목사의 설교세계
들어가는 말
한 평생동안 한국교회와 목회자들에게 개혁주의 신앙을 일깨운 김홍전 목사가 향년 89세를 일기로 2003년 7월 6일 오후 1시(한국시간) 캐나다 토론토에서 소천했다.
김홍전 목사는 1914년 충남 한산에서 출생, 어린 시절 전주 서문교회에서 성장했으며, 전주 신흥중학교와 서울 경신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이어 평양과 일본 동경에서 음악을 공부한 후 미국 시카고 센추럴 컨써버토리에서 음악박사와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또한 리치몬드 유니온신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한 후 이스라엘 히브리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김홍전 목사는 1950년대 초 한국 교계의 신학사상 노선의 혼란기에 전국을 순회하며 개혁주의 신앙에 관한 강설을 통해 바른 신학 노선 정립에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1959년 제44회 장로회 총회에서 세계교회협의회(W.C.C.)에 대한 입장 차이로 승동측(합동)과 연동측(통합)으로 분립당시 에큐메니컬 운동에 대한 정체에 대하여 국외로부터 문헌과 정보를 입수해 제공함으로써 자유주의 경향의 W.C.C. 신앙노선에 대한 바른 이해를 돕는데 크게 기여했다.
김 목사는 일본 동경신학교 교수를 역임했고 캐나다 토론토의 국제개혁교회 목사로 목회했으며, 1964년 서울 성약교회를 설립, 한 평생동안 개혁주의 신앙에 근거한 목회에 전념해 왔었다. 김 목사는 토론토 베이커리스트 병원에서 노환으로 입원, 가료 중이었다.
저서로는 예수님의 행적(10권)을 비롯해 50여권의 신앙강설집을 남겼다. 유족으로는 김가일 여사와 2남 2녀가 있다.
1. 김홍전 목사의 사상
1) 기도에 대하여
기도는 청산유수로 말만 많이 붙여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님을 다 알지 만 좌우간 갑자기 기도를 시켜서, 공개 기도를 해야 할 터이니까 그런 식으로 아주 무책임하게 해버리는 것입니다. 교회의 부흥을 위해서 기도했다면 그 다음의 중요한 문제는 “나는 왜 교회의 부흥을 위하여 기도하는가? 교회의 부흥이라면 대체 어떠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인가? 교회의 부흥이라는 것은 사람이 많이 와서 흥성거리고 연보 많이 내고 그래서 항상 어떤 사업을 한다고 떠드는 것만이 교회 부흥인가? 교회라는 것은 그래야 할 것인가” 이런 것을 차례차례 그 사람이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관이 벌써 삐뚤어져 있어서 기업체로서의 교회를 생각하는 사람에게 교회 부흥이라는 말뜻은 기업체처럼 융성하게 해 주셔서 헌금도 많이 나오고 노회나 총회에서 세력 있는 교회가 되게 해 달라는 의미가 됩니다. 부흥됐다는 것은 별 것 아닙니다.
신앙이 깊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깨달아서 그 시대에 내려진 자기네 사명을 알고 모든 흑암의 조류에 대해 역행해 가면서 신령한 증거를 해 나가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프로그램을 현실적으로 생각해 봤느냐 하면 그런 것 생각해 본 일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흔히 교회의 부흥이라는 말을 자꾸 씁니다. 부흥이라는 말뜻이 무엇인가조차 잘 모르고 다만 교회에서 부흥회라 해서 부흥 강사를 데려다가 한바탕 웃기도 울리고 해서 예배당을 짓는다든지 다른 것을 위해 돈을 거두는 방식으로 썼던 집회를 떠올립니다.
그런 때의 그 흥성흥성하는 종교적 기분과 어떤 이상한 종교의 불이 활활 타올라 가지고서 열정적으로 왔다갔다 하는 흥성거림을 생각할 뿐입니다. 이와 같이 그 기도의 내용이 하나님의 생각과는 멀리 떨어져서 자기네가 생각하는 종교적인 방식이 왕성해져야 하겠다는 것만을 구하는 정도라면, 과연 그래도 하나님께서 그런 기도에 대해서 대답해 주시겠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본질에서 벗어나서 이상한 것들을 구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대답해 주시는가?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하나님이 명하시지 아니한 다른 불을 가지고 제단에 가서 제사를 드리려고 할 때 불이 제단에서 나와서 그들을 살라 버리고 말았는데(레10:1-2), 그렇게 이상한 종교의 불을 지펴 가지고 그것이 교회의 부흥이고 교회가 마땅히 도달해야 할 데라고 괴이하게 생각하면서 열렬하게 기도를 하면 그 기도에 대해서 과연 하나님이 대답하시겠습니까?
참고/ 기도에 대하여 중 무책임한 기도의 예 중에서
2) 부활에 대하여
신자의 부활은 기독교 교회에서 절대로 소홀히 다룰 수 없는 도리이다. 성경은 부활을 우리가 믿는 바 모든 내용의 목표로 삼고 가르친다. 고린도전서 15:13부터 보면 부활을 부인함으로써 나타나는 현상을 보여 주고 있다. 부활을 부인하면 무엇보다 먼저 그리스도의 부활이 부인된다. 그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것은 바울 선생이나 초대의 사도들이 열심히 전한 것들이 모두 헛것이 되고 그 전파한 것을 믿은 사람들의 믿음이 모두 헛된 것이 된다. 그뿐더러 바울이나 다른 사도들이나 모두 하나님을 거짓되이 증언한 자가 될 수밖에 없다. 만일 부활이 없다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그렇다면 우리의 믿음도 헛되고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사는 생활을 계속하고 있을 것이며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믿고 살다가 잠든 사람들도 헛된 것을 믿고 죽은 것이니 그로 인하여 멸망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게다가 주를 믿는 사람들의 현재 생활은 더욱 불쌍한 자의 생활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부활은 기독교 교리의 목적지이다. 우리의 소망도 부활에 있다. 그러한 부활의 도리를 도무지 소홀하게 생각할 수가 없다. -부활절 강설(김홍전 / 성약 / 2000년 3월) 서문 중에서
3) 신앙에 대하여
언제든지 지식만을 가지고 신앙을 형성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입니다. 사도 바울 선생의 경우를 볼지라도 그가 그렇게 성경을 많이 알았지만 다메섹에 가는 도중까지는 아직도 이 복음의 사실에 대해서 직접 접촉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다메섹 가까이 가서 노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다음에야 비로서 깨닫고 아라비아에 가서 3년 동안 있으면서 "과거에 읽었던 그 여러 가지 성경의 말씀이 결국은 이분에게 이렇게 집중돼서 이렇게 이룬다"는 것을 안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예로 옷감 장사를 하던 여인 루디아의 경우도 주의를 기울여 볼 만합니다. 바울 선생이 빌립보에 갔을 때 거기에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 유대교도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 "두아디라 성의 지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행 16:14). 여기서도 마음을 열어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항상 주께서 마음문을 열어 주셔서 비로소 듣고 깨닫는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위에서 본 누가복음 24:45에도 역시 "저희 마음을 열어"라고 말씀을 했고 또 32절에서는 "마음이 뜨거웠다"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그 사람들에게 듣고 "깨닫도록" 가르치셨습니다.
우리가 듣고도 깨닫는 바가 없이 덮어놓고 그냥 마음으로 그렇거니 인정이나 하고 지나는 정도라면 그것이 구원의 신앙으로 발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열어서 깨닫게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구원에 이르는 신앙의 지적 요소라는 것은 이만큼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이 내리신 그 증거에 터를 두고 성신님이 역사하셔서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속에서 마음을 열어 주시므로 말씀을 들은 다음에 깨닫게 되면 비로소 그대로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런줄 아시고 이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구원의 신앙의 지식, 무엇보다도 가장 기본적인 것은 복음의 내용인데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그리스도의 부활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친 대로 알아야 합니다.
과거의 많은 유대 사람들이 말씀을 듣고 보면서도 몰랐는데 오늘날에도 역시 말씀 속에서 깊은 것을 깨달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거룩한 말씀을 주의해서 보고 성신님을 의지해서 깨닫게 해 주시기를 바랄 때 우리가 그것을 깨닫고 터득해 나갈 것입니다. - [구원의 신앙] 중에서
4) 율법 이해
우리는 처음부터 예수를 믿을 때 성경이라고 하면 개괄적으로 구약, 신약 이렇게 얼른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아직 충분한 계시가 완결된 내용을 증시되어 있지 않은 까닭에 구약이라는 구시대의, 구제도하의 계시만을 보유하고 있었고 그것을 가리켜서 율법과 선지자라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그 사람들에게는 중요한 표준이었고 또한 거기에 계시된 내용이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성격과 규범을 보여 주는 것이었던 까닭에 그 내용과 지금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복의 내용이나 거룩한 세력의 영향이 상충되는 것인지 서로 조화되는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무슨 관계가 있는지가 그들에게는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그러한 의문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마태복음 5:13-48까지의 말씀입니다.
'그것은 상충되는 것이 아니요 또한 그것은 단순한 조화가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런 것은 하나도 폐할 것이 아니다. 오히려 완전케 하려고 왔다'고 하셨습니다. 완전케 한다는 것은 구시대의 모든 제도와 계시가 그것 자체로 늘 자기의 임무를 했지만 하나님 나라의 충만한 계시로서는 아직 좀 더 충분한 계시를 요구하고 있었고 따라서 완성된 것은 아니었다는 말씀입니다. 이제 그것을 성취하려고 예수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가르치신 율법의 참 뜻(산상보훈강해/ 마 :13-48)중에서
6) 예배
예배 의식의 각 부분을 잘 알아야 함.
우리가 교회의 생활을 해 나가려면, 교회에서 늘 당면한 일들, 곧 찬송하는 일, 기도하는 일, 헌금을 드리는 일, 예배를 드리는 일,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 등이 무엇을 뜻하는 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기서는 예배(禮拜)라는 말을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예배는 하나님께서 명하셨음.
예배라고 했을 때에 그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드리도록 명하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마4:10, 히1:6, 신26:10, 대상 16:29, 시45:11, 사19:21, 겔46:3, 계14:7, 19:10, 22:9) 성경의 여러 군데에서 「예배는 하나님 앞에 드려야 할 것」으로 가르치셨습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드립니다. 어느 때에는 아버지께(요4), 예수님께(히1:6), 하나님께 라는 말을 썼다 했을지라도 그 것은 분명히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배는 찬송이나 기도가 아닌 별개의 것임.
우리는 주일에 예배당에 가서 예배식, 곧 기도하고 찬송하고 성경 낭독과 강해를 듣고 그 다음 헌상하는 것을 순서대로 잘 따라서 하고 나오면 '나는 예배를 드렸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면 결국 예배라는 것이 그런 것을 순서에 따라서 전부 합해 놓은 것이냐 하면 그런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 예배는 찬송도 아니고 기도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찬송과 기도가 서로 다르듯이 예배는 그 것대로 별개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계4:8-11, 5:8, 4:10)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생각할 것은, 찬송이 곧 그대로 기도가 아니고 기도를 곧 찬송이라고 하지 않는 것처럼, 예배도 찬송이나 기도와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는 영혼의 활동이 중요함.
예배는 분명히 '내가 예배를 드리겠다' 하는 마음의 활동이 있어야 합니다. 요컨대 그 영혼의 활동이라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다른 날에도 할 수 있지만 주일에는 그 날만을 구별해서 꼭 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유형의 교회가 함께 예배를 하는 것」은 교회가 일정한 날에 모여야만 할 수 있는 데 이날을 주일로 정한 것입니다. 주일에 교회가 같이 모여서 각 개인으로가 아니고 교회가 함께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고 같이 찬송도 올리고 같이 기도도 올리고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 예배드린다는 것입니다.
예배 - 하나님께 절하는 것
예배라는 말은 한자어로 예도 예(禮), 절 배(拜), 해서 절을 해서 예를 지킨다는 말입니다. 혹은 경배라는 말로 쓰기도 합니다. 공경 경(敬), 절 배(拜) 해서 공경하고 절하는 것을 뜻합니다. 즉, 하나님 앞에 절을 한다는 뜻입니다.
예배하는 마음이 있어야
절을 하던지, 허리를 굽히던지 그 것은 우리의 마음에 있는 무엇에 대한 표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음에 그런 것이 없이 절만 한다면 그것은 별로 큰 의미가 없습니다. 여러 가지 표를 한다고 할지라도 더 중요한 것은 자기의 속에 무엇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절을 할 때에는 내가 절하는 그 대상이 받아야 할만큼 나의 마음을 반드시 드려야 합니다.
이와 같이 주일에 예배당에 갈 때에는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겠다'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마음이 없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예배는 마음 가운데 하나님을 공경하여 그 앞에 절을 하겠다 하는 소원이 있어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을 바로 알아야.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은 예배는 그 예배를 받는 분의 값과 자격을 제대로 알고 마땅히 드려야 할만큼 드려야 예배가 되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예배가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고 절을 해야지 세상에서 가장 높은 어떤 분 정도로 알고 절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으로 알아야합니다.
예배와 신지식과의 관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계시다 하더라도 그 분을 이용해서 복리를 증진하고 내 행복을 보태려 합니다. 예수를 오래 믿은 사람도 그렇게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합니다. 신자라는 사람들도 이렇게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지 못하고 또 바르게 공경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어떠한 하나님으로 알아야 하는가?
성경이 가르친 바를 봅시다.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마4:10) - "하나님은 너의 일생, 네 몸, 네 전체를 다 드려서 섬겨야 할 분이다. 그러니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만 섬겨라." 한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에게도 경례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그분만 홀로 전부를 드려서 섬겨야할 대상으로 알고 절을 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려고 하면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알아야 하는고 하니, 다른 무엇보다도 '내가 내 일생을 다 드려서 열심히 섬겨도 나의 정성은 끝없이 부족하다 그렇게 섬긴다고 해도 그분은 다함이 없는 분이다.' 이렇게 알아야 합니다. 이 것을 아는 사람이 비로소 하나님께 대해서 두려운 마음과 공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또 자기의 모든 것을 바치고 섬겨야 하겠다는 마음의 소원을 가지고 나아가서 절하는 것입니다.
예배하는 자의 영혼의 의식 상태
형상이 없는 하나님께 우리는 어떻게 방향을 정하고 절을 하는가?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4:24) 예배하는 자가 몸뚱이로 그 앞에 가서 고개 숙여서 절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참으로 예배하고자 해서 해야 하고, 영으로 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영혼의 기능에는 무엇을 하고자 하는 것이 있고, 무엇을 아는 기능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예배를 하는 데로 모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를 드리러 갈 때에는 "아 예배를 해야겠다. 예배를 하기를 원한다."하는 의식이 생겨야 하고 예배를 하는 자리에서도 '나는 예배를 드리겠다'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그 높으심에 대해서 감사한 심정을 가지고 또 하나님은 내가 일생을 다 바쳐서 섬기고 섬겨도 끝이 없는 분이다. 하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앞에서 - "주여, 형상이 계셨더면 내가 몇 번이나 여기 부복해서 절하지 아니 했겠습니까?형상이 없으신 하나님께서는 나의 영혼의 경배를 받으시옵소서. " 하는 마음의 소원과 마음의 아뢰임을 가지고 고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영혼이 절하는 것이지 눈에 보이는 사람 같이 하나님이 어디 계셔서 거기에다 무릎을 꿇어야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냥 모여서 예배식만 하면 예배가 됐느니 라고 생각해서는 안되고 영이 하나님 앞에 절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절할 때에는 먼저 예배의 대상으로서의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내가 일생을 섬기고 섬겨도 다함이 없고, 하나님은 나를 창조하신 분이고 하나님은 나를 구원하시사 새로운 생명을 주신 분이며,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이시고 나의 짐을 져 주시고 나의 모든 것을 주장하시는 분이고, 한번 명령하시면 천지가 다 없어지고 순식간에 나보다 백 배나 천 배나 만 배나 잘 순종하는 사람을 만들어 내실 수 있는데도 나를 없애지 아니하시고 땅에 두시고 의를 지키시고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시고 .. 하는 등 이런 모든 큰사랑과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분이심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하나님의 선하심. 자비, 은혜, 오래 참으심, 사랑, 이런 것들에 대해서 생각을 하면서 하나님 앞에 공경하는 심정으로 " 내 심정이 예배하겠습니다. 절하겠습니다. "하는 마음의 소원을 가져야 합니다. 이 것이 영혼으로 절하는 상태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공경하는 심정을 가지고, '내가 하나님을 모시고 살고, 하나님께 내 모든 것, 일생을 드려서 공경해도 다함이 없다'하는 그런 분으로 알고 예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크시고, 모든 것을 다 아시고 게시지 아니한 곳이 없으시고, 큰 능력을 가지시고 , 그리고 거기에 또 무한한 사랑과 은혜와 자비를 베풀고 오래 참으시고 의로우시고, 거룩하시다.. '이런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누구든지 하나님께 예배를 잘 드리려면 항상 정성을 모아야 하는 것이 첫째의 일이며, 둘째로는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께 대해서 날마다 혹은 해가 갈수록 차츰차츰 더 잘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예배를 드리고 난 다음. 사람은 무슨 심정을 가지게 되느냐 하면 자기 자신이 참으로 하나님, 하나님 앞에서, 곧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니고 참으로 보잘 것 없는 죄인이라는 것, 불결하다 하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주일에 모여서 예배 드리려 할 때에는 다같이 예배를 하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예배를 잘 드리게 해 줍소서'하는 간절한 소원을 고할 뿐더러, '하나님의 성신을 곧 의지해서 영광의 보좌 앞에 이르게 해 주소서 예수님의 거룩하신 피의 공로만 의지합니다. '하는 이런 마음을 꼭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야 예배를 드리게 되는 것이지 그냥 막연히 형식적으로 앉았던지 그냥 의식이나 집행하듯이 하면 예배가 안됩니다. -[예배란 무엇인가/성약출판사] 중에서
2. 김홍전 목사의 설교 [발췌]
1) 주의 종으로 쓰임 받으려면
오늘 다시 종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종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누누히 하는 것은 우리가 무슨 일에 종사하든지 주께서 나를 부르셔서 이 일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 진행에 무엇을 어떻게 하시려고 하는가를 발견할 수가 있어서 그렇게 봉사해 나가면 제일 좋은 것인데 그렇게 발견할 수 있으려면 무엇이 있어야 하느냐 하면 나는 주님이 그 나라를 위해서 쓰시기 위해 부른 사람이라는 그 부르심에 대한 확신이 생겨야 하는 것이지 '하나님이 나를 그 나라 일 하는 데 부르시지 않았지만 어디 나도 조금 한 깃 들어서 해 볼까' 해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게 내가 마음대로 가담할 권리가 있는 그런 나라가 아니고 그러한 실체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셔서 거기에 가담케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의 종으로서의 각성이 언제 생기느냐 할 때 하나님께서 현재의 나를 나만큼이라도 어디에 쓰시며 어떻게 훈련하시며 어떻게 키우시는가 하는 하나님의 프로그램 가운데 내가 들어간다면 주의 종인 것을 각성하는 것입니다. 종이라고 해서 다 굉장히 유능하고 다 기술자이고 모든 것을 굉장히 다 잘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세와 같이 불려 나가는 사람도 있고, 아직 젊지만 젊은 그 나이에서부터 무엇이든지 하나님을 위해서 성실하게 봉사할 마음을 주셔서 '내가 있는 그대로 쓰려고 하는 것이니 그런 줄 알아라'하고 그렇게 쓰기 위해서 부르시기도 하고, 또 그런 경우에 '내가 그렇게만 쓰지 않고 너를 또한 길러 가면서 쓰겠다'하고 길러 주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더 식견을 넓히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것도 다 주의 종입니다. - [주께서 쓰시는 사람], 101-102쪽
2) 젖 뗀 아이
"실로 내가 내 심령으로 고요하고 평온케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 어미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중심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2절). 젖 떨어질 때까지는 그렇게 주시오, 주시오, 주시오 하고 자기 입에, 자기 속에 들어가는 것을 중심 삼았지만 일단 젖을 뗀 다음에는 어미의 품에 안식하는 것으로 족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의 품에 안식함으로 마음에 평안함을 얻어야 할 것입니다. '주여, 줍소서, 줍소서'하고 애쓰지 않고 벌써 신앙이 장성해서 '나는 주님으로 만족하고 있습니다'하는 그런 위치에서 늘 산다는 것입니다. 젖 뗀 아이가 어머니 품을 떠나면 그 감정이 불안정한 것같이 주의 품을 떠나면 우리가 방황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까닭에 주님의 품안에서 주님을 늘 의지하고 또한 '주의 품안에 있기만 하면 그것으로 우리는 족합니다. 주님,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우리에게 하옵소서'하고 마음의 전부를 주께 맡기고 의지해 버리는 심정이 젖 뗀 아이와 같은 심정입니다. 지금도 젖을 물고 달라고 하는, 아직도 젖 먹는 어린아이가 아닙니다. 항상 자기 속에 무엇이 들어가야만 비로서 만족하는 그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품에 안식할 때 그 안식으로 만족할 수 있는 심정입니다.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찌어다"(3절). '주의 백성들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고요히 기다리고 있으라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주시는 그것을 가지고 살라는 말입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163-164쪽
3) 저항할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어떻게 우리에게 어떠한 것에 대하여 더 바르게 깨닫게 하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언어의 발생과 언어 형성 과정, 그리고 그것이 내함하고 있는 의의, 중요성에 대해서 주의해야 합니다. 언어는 정의만 가지고 돌아다니는게 아닙니다. 언어는 어떤 개념만을 구체적으로 간단한 부호로 표현하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소위 "개념"이라고 하는 것은 설명을 하는 것인데, 설명하는 그것이 개념의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가 캐취한 전부를 다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 점에 있어서 제 맘대로 언어를 만들었다고 가정할지라도 자기가 표현하는 바 그 내용에 대해서 다 안다고 말을 못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사람"이라는 말을 씁니다. "사람이란 뭐냐"고 하면 "내가 느끼고 보고 경험하고 한 이것이 사람이다"하고 한 일면을 이야기 하지만 그러면 사람이라는 걸 한번 정의해 봐라 하면 사람의 생각으로는 아무리 해도 사람은 이런 것이겠다, 저런 것이겠다 중구난방으로 떠들어댈 뿐이지 정확하게, 깊게 전부를 다 말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이 무엇인지 압니다. 누가 사람은 뭐라고 설명해서 아는게 아니라 경험해서 알고 감지해서 아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람에게는 영혼의 작용이 있고 정신 작용이 있는 까닭에 결국 모른다는 말을 많이 하는 것입니다. "열길 물 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르는 것이다"
모르는 것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라는 걸 다 설명할 길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이란 무엇이라고 가르쳐주십니다. 사람들이 잘 모르는, 열길 물속보다도 더 깊고 알수 없는 한길 사람속에 대해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들을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말씀이 뭐라고 가르치는가를 알아야 비로소 바르고 심오한 개념을 터득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대하여 4], 121-122쪽
4) 교회의 본질과 속성
교회의 본질에 관하여 지금 공부해 가는데, 교회를 단순히 하나의 각도에서만 볼 수가 없는 까닭에 여러 가지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습니다. 교회는 이 세상과의 관계에서 세상의 유혹과 핍박과 또 모든 악한 세력에 대하여 대적할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가 자기의 목적을 향하여 행진하노라면 필연적으로 적은 만나는 까닭에 전투를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전투가 끝나면 하늘에서는 승리의 교회로 아름답게 서있다는 것은 우리가 따로 시간을 내어서 공부한 것은 아니더라도 잘 아는 사실들입니다. 그 전투는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공중에 있는 악한 신들을 대적하는 것이니라"하는 것임을 에베소서 6:12 말씀에서 다 배웠습니다. 보통 이 세상에서 누구와 싸움을 하는 것이 아니고 사실상 마귀와 마귀의 큰 국권 조직, 그들의 도전과 그들의 싸움을 맞이해서 싸워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에는 잘 몰랐을지라도 하나님 말씀을 배운 다음에는 더러 잘 알아서 적을 바로 잘 분별할지라도 하나님 말씀을 배운 다음에는 더러 잘 알아서 적을 바로 잘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싸움 자체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지요, 목표지를 향해서 전진하노라면 필연적으로 적의 공격이 있고 장애가 있고 가로막는 것이 있는 것인데 그것을 돌아서 가는 길도 없고 또 타협을 해서 주저앉을 수도 없는 까닭에 전투를 하여 물리치고 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교회의 목적이라는 문제에 대해서 좀더 명확하게 파악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교회에 대하여 3], 87-88쪽
5) 야곱의 나그넷길
야곱이 그 동안 걸어온 나그네 길을 잠깐 돌아보지요. 그가 일흔 일곱 살에 밧단아람으로 도망가서 외숙 라반의 집에 우거하게 되었는데 라반의 딸 라헬을 보고 연모하여 혼인하기를 바라고 7년 일을 하고서 혼례식을 했지만 라반의 간교한 꾀로 큰딸 레아와 혼인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다시 작은딸 라헬과 혼인을 하고 그 빚으로 7년을 더 거기 유하면서 일을 했습니다. 이렇게 두 아내를 위하여 전후14년의 봉공을 한 다음에 열한 번 째의 아들 요셉을 낳았을 때 야곱은 자기 외숙 라반에게 자기 고향으로 돌아갈 테니 처자를 데리고 가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라반은 야곱이 그 동안 일을 잘한 것을 칭찬하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끊임없이 복 주신 것을 자기가 아니까 야곱이 좀더 있기를 간곡히 청하였고, 야곱의 편에서도 자기 집안 하나라도 제대로 이루어 떠나고 싶어서 계약하에서 6년을 더 봉사를 하였습니다. 이래서 전후 20년을 빗단아람에서 라반의 양떼를 지키면서 살았습니다.
그렇게 20년이 됐는데 라반의 아들들은 야곱이 자기 아버지의 재산을 들어먹는 것으로 오해한 나머지 야곱을 미워하므로 그로서는 더 오래 머물 수 없다 생각하고 하나님께 기도하였고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라반이 양털 깎으러 나가 있는 동안에 야곱은 밧단아람을 떠났는데 그것이 야곱이 아흔일곱 살 때 입니다. 요셉은 아마 여섯 살이나 되었겠고 큰아들인 장자 르우벤은 만 열두 살 막 넘었을 때라고 생각됩니다. 이렇게 해서 어린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이끌고 여러 종들과 함께 팔레스타인을 향하여 왔습니다. 부지런히 걸어서 온 것이 아니고 어린것들과젖먹이 짐승이 딸려 있었던 까닭에 유목민의 행보로 천천히 이동하였던 것입니다. 천천히 전가족과 부대가 이동해 가는 까닭에 얼마나 세월이 걸렸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 대강 얼마 걸린다는 것도 별로 없던 시대였고, 목초 상태가 어떤가에 따라서 많이 먹이기도 하고 또 더 적게 먹이기도 한 까닭에 상당한 시간이 걸렸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마침내 야곱이 팔레스타인으로 들어와서 요단 강 동편의 얍복 강과 요단 강이 서로 만나는 지점 가까이에 이르러 거기서 밤에 천사와 씨름을 하고 그 곳을 기념하여 브니엘 곧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의 이름을 붙였습니다. 얍복 강나루를 건너 남쪽으로 내려가면 요단 강 동쪽 언덕이 나오는데 거기서 에서를 만났지만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큰 위기를 아무 탈없이 넘기게 되었습니다. 앞서 라반이 뒤쫓아와서 길르앗 산속에서 야단 내려 할 때에도 하나님의 보호로 아무 탈없이 잘 넘겼지만 형님 에서를 만나는 일은 그보다 더 두려운 일이었는데 거기서도 탈없이 잘 넘겼습니다.
에서는 자기의 본고장 세일로 돌아가고 야곱은 요단 강 동편 언덕에 있는 숙곳으로 옮겨 거기서 긴 여행 길을 쉬는 것이 좋겠다 생각하고 자기가 살 집과 짐승들의 우릿간을 만들어 장기 체류를 하였습니다. 그가 숙곳에서 얼마나 오래 있었는지 알 수 없으나 그 후 거기서 요단 강을 서쪽으로 건너서 그리심 산에 에발 산사이에 세겜 평야로 갔습니다. 목초가 좋아서 갔겠지만 거기에는 세겜 고을이 서 있었기에 세겜 성읍 남쪽에 유진하고 있으면서 양 떼를 먹였습니다.
- 하나님의 백성(이삭, 야곱, 요셉), 263-264쪽
정리/ 송광택
[출처] 김홍전 목사의 설교세계|작성자 청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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