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교회 10대 박해 1. 네로 황제의 박해 (Nero A.D 54-68년) 클라우디우스(Claudius) 의 네 번째 아내의 아들인 그리피나(Agripp-ina)는 황제를 독살하고 그의 아들 네로1)를 로마 황제에 올려 놓았다. 네로는 황제가 된 뒤 처음 5년동안 가정교사였던 세네카(Senca)의 영향을 받아서 가난한자들을 위한 법령을 만들며 성공적인 통치를 하였다. 그러나 그는 얼마 못되어 위대한 꿈과 향락욕에 빠져 그를 사랑하던 시인들과 예술가들의 증오를 받기 시작하게 되었다. 그는 그로 인하여 두려움에 사로잡혀 생모와 아내 옥타비아등 친척들을 살해하고 기독교인들의 급속한 확장을 두려워하여 박멸하고자 할때 때마침 64년 7월18일 로마시에 대 화재가 발생하였다. 대부분이 목조건물이었던 로마시는 6일동안2) 3분의 2 이상이 불에 타고 말았다. 평소 황제에 대한 불만을 가지고있던 시민들은 이 화재가 미친 네로의 짓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일로 인하여 네로 황제는 화재사건에 연루되게 되었고 이 소문은 계속 확대되어 로마시 전체에 걷잡을수없이 퍼저 나갔다. 네로는 이때 로마 시민들의 민심을 안정 시키고자 하는 목적으로 화재가 발생하게된 모든책임을 유대교에서 갈라진 기독교인들에게 돌리고 책임을 전가하기 위하여 네로는 기독교인들을 무차별 학살하였다. 당시 많은 기독교인들이 맹견이나 사자의 밥이 되거나 십자가에 처형되곤 하였다. 그러나 네로는 결국 그일로 인하여 로마 원로원의 처형결정으로 위협을 느끼자 부하 4명과 함께 어느 시골의 지하실로 피하여 도망을 갔다. 69년 네로는 체포하러온 군인들의 발굽소리를 듣고는 이런말을 남겼다고 한다.“세상에 나같은 예술가를 잃는구나” 네로는 그 같은 마지막 말을 남긴뒤 스스로 자신의 칼로 목을찔러 자살하였다. 네로 황제의 통치 기간동안에 바울과 베드로가 로마에서 순교를 당했다고 한다. 네로 황제의 죽음이후 1년간은 내란으로 인하여 많은 어려움들이 있었지만 내란이 종식된후 베스파시아누스(Vespasian 69-79)가 잠시 황제가 되어 통치를 하였는데 베스파시아 누스는 기독교인들에게는 많은 관용을 베플려고 하였으나 유대인들의 곳곳에서 끈임없는 반란을 일으켰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이를 진압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였지만 결국 진압하지 못하고 자신의 장남인 티투스(79-81)에게 예루살렘성을 점령 하라는 명령을 내리었고 티투스는 많은 병력을 이끌고 예루살렘에 내려가 성을 포위하여 장악하였다. 이렇게 되어 유대인들의 생활과 삶의 중심이 되었던 헤롯성전은 로마의 대 화제 사건에 연류되어 결국 AD 70년에 성이 함락된뒤 끝내 무너지고 말았다. 그후 티투스장군은 돌아가서 로마의 황제가 되었으나 2년을 넘기지 못하고 갑작스런 열병으로 죽었고 티투스가죽은뒤 그의 뒤를 이어 도미티안이 황제가 되었다. 2. 도미티안 황제의 박해 (Domitian A.D 81-96년) 티투스의 뒤를 이어 권력을 장악한 그는 처음에는 기독교인들에게는 무관심하였다. 그는 황제가 된 뒤 로마전통의 신들을 재건하려 노력하였으나 기독교인들의 반대로 좌절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신이라 호칭하여 수도(首都) 로마에 금은(金銀) 형상을 만들고 우상숭배를 강요하며 유대인들이 매년 예루살렘에 보내던 헌금들을 황제에게 바치도록 결정하였다. 그러나 유대인들 역시도 이것을 거절하자 도미티안 황제는 별도의 법률을 만들어 대처하였다. 당시 로마 당국자들은 유대인과 그리스도인들을 잘 구별할수 없었다. 당시 기독교인들은 유대교의 풍습들을 대부분 좇았기 때문에 로마 당국에서는 기독교인들을 유대교와 같은 종파로 간주하여 박해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도미티안 황제는 기독교인들 때문에 로마의 모든 신들이 노했다고 주장을 하며 재산을 압수하고 추방을 하거나 불순분자로 몰아 맹수들과 결투하도록 하여 핍박을 가했는가 하면 예수님의 제자중 한사람인 사도요한도 이때 밧모섬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고 이일로 인하여 사도 요한은 밥모섬에서 외로히 핍밖받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눈물로 기도하다 장래 이루어질 요한계시록을 받아 쓰지않았나 생각해 본다. 도미티안 황제는 네로와 같이 독재자가 된 결국은 자신의 궁전에서 비참하게 암살을 당하고 말았다. 도미티안 황제가 암살된 뒤 5현세 시대를 맞이하여 1세기 동안은 평화로운 통치가 이루어 졌었는데를 그들은 다음과 같다. ①. 네르바(96-98) ②.트라야누스(Trajan98-117), ③. 하드리아누스(Hadrian 117-138), ④.안토니누스(138-161), ⑤. 파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등 이다. 예루살렘성이 함락된 뒤 유대인들이 외국에 나가든지 고국에 있던지 그들이 꼭 찾아보는 성지가 두곳이 있는데 그 하나가 통곡의 벽이요 또 한곳이가 맛사다성이다. 맛사다 성은 예루살렘의 멸망시 성을 빠저 도망 나온 960명의 유대인들이 마지막까지 버티었던 예루살렘 남쪽 약100km 의 위치에 있는 천연적인 군사의 요새지이다. 이곳은 해발 600 m의 깍아 지른 절벽으로 헤롯 대왕이 유사시를 대비하여 자신의 궁전까지 지어 놓았던 곳이기도 하다. 유대인들은 이곳에서 3년 동안이나 로마의 군대들과 대치하며 자신들을 지키었던 난공불락의 요새지였다. 그러나 로마의 10군단의 실바 장군에 의하여 무너지데 되었는데 마지막에는 “로마의 노예가 되기보다는 스스로 죽음을 택하자 로마인들의 손에 죽는 수치보다는 스스로 죽자” 이렇게 최후를 택한 유대인들은 자신의 아내와 아들들을 모두 죽이고 나중에는 남자들이 모여 10명씩 조를짜서 제비뽑고 한사람이 9명을 죽이고 마지막 남은 자가 죽은 시체를 가지런히 뉘어 놓은 뒤 자신도 죽음으로서 택함 받았다는 의를 지켰던 믿음의 성지라고하여 해마다 유대인들은 맛사다를 찾는다. 3. 트라야누스(Trajanus 98-117) 트라야누스는 5현세중의 한사람으로 제위 기간동안 제국의 영토를 계속 확장시켰는데 라인강과 도나우스강, 유프라데스강 까지 확장 시켰다. 트라이야누스 황제는 모든 사람들에게 황제 숭배를 강요 하였고, 기독교인들은 정치적음모를 꾀 하는 비밀 결사대로 오인하여 하여 박해를 가했다. 트라이야누스 황제는 기독교를 로마 제국에서 이름도 사용할수 없게하고 112년에는 법조문을 만들어 조직적인 박해를 시작하였다. 기독교는 로마에 대하여 해로운 단체로 지목이되어 인정받지 못함하고 모임 조차도 갖을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트라이야누스 황제때 시므온이 120세에 십자가에 처형이되고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 감독이 체포되어 로마로 이송된후 원형경기장에서 맹수에게 찢겨 순교 당할 때 그의 나이는 70세였다. 안디옥 교회는 스테반의 신앙을 따르던 무리들이 세운 교회로 바나바가 초대 감독이었고 이그나티우스가 2대 감독이었는데 전설에 의하면 이그나트우스는 예수님당이 예수님의 품에 안기어 사랑을 받았던 어린아이가 바로 그였다고 한다. 또한 안디옥 교회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생겨나게 될정도로 믿음이 있는 교회였으며 안디옥은 기독교회의 동방에 수도요 항구라고 할정도로 일설이 있는 교회이다. 안디옥 교회의 감독이었던 이그나티우스는 순교의 현장으로 끌려 가면서 7개의 서신을 남겼는데 7곱통의 서신은 서머나에 있는 폴리감에게, 에베소, 막네시아, 트라이야, 로마에 있는 교회와 빌라델피아 교회에게 보낸것들인데 그 내용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1).이단을 경계하라 2). 교회의 조직에 통일 3). 감독과 장로의 구분으로 감독의 우위 4). 순교는 영광이다. 라고 말하면서 그는 최초로 카톨릭이란 말을 사용한 사람이다. 4. 하드리안 (Hadrian 117-138년) 하드리안은 티투스 장군의 아들로서 정신적 육체적인 열정이 남다르며 다재 다능한 황제이다. 그는 군대와 함께 있을때에는 병사와 함께 훈련을 받으며 똑같은 급식을 먹고 행군할때에도 똑같이 행군을 하는 황제였다. 그리고 그는 뜨거운 종교열로 신비의 종교에 입문하였으며 아테네시에서는 새로운 구역을 추가하였을 뿐만 아니라 창의적이고 대범한 조각가 이기도 하였다.3). 하드리안은 A.D 120-130년까지 10여년동안 셀 수 없는 많은 개혁을 통하여 산발적으로 기독교인들을 박해하였으며 125년에 발표한 칙령에서는 할레나 안식일에 회당에서 읽는 율법을 금지하고 예루살렘성전터에 유피테르 신전을 세우고 우상제사를 강요하며 이를 거부할 경우 박해를 가했다. 그리고 기독교를 믿는 것은 국법을 어기는 죄가 된다고 보았다. 이때 많은 기독교 변증가들이 등장하게 되었고 델레스푸로스가 순교당하고 서머나 교회의 감독인 폴리갑이 순교를 당하였다. 폴리감은 사도 요한의 제자로서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었다. 폴리감은 2세기에 알려진 최고의 성자요 순교자이며 겸손하고 온유한 사람이었다. 폴리감은 죽음앞에서 유명한 한다디를 남겼다. 네가 만일 이지리에서 그리스도를 저주한다면 너를 살려 주겠다고 제안을 한 총독앞에서 이렇게 대답하였다 “ 내가 86년동안 그를 섬겼으나 그분은 나를 한번도 저버리신일이 없다” 5.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박해(Marcus Aurelius 161-180년) A.D 161년 황제가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그 시대 계몽사상의 지성인가운데 한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다른 황제와 같이 허영에 들뜬 사람이 아니라 개인의 수양을 위하여 텐트 생활을하며 국정을 수행하였으며 명상록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역사가 유세비우스는 이런 말을 남겼다. 그는 기독교에 대하여 “매우 우호적으로 생각하였다”라고 평가하였다. 하지만 점차 이성주의인 스토아 이면에 사로잡혀 미신을 믿는 점성가들에게 빠저 기독교를 미신으로 취급하게 되었으며 중요한 행사를 치를때에는 반드시 희생제사를 드렸는데 국가의 재해나 질병의 원인들이 기독교인들 때문이라고 하여 비밀정보원을 동원하여 기독교인들을 잡아 들였고 심한 고문을 가하여 자신들의 신앙을 포기하도록 만들었다.4) 당시 많은 변증가들이 순교를 당하였는데 저스틴(Justin)이 순교를 당하고 리옹에서도 50여명의 순교자를 냈으며 포티너스(Potinus178)감독도 그들과 함께 고문 끝에 순교를 당했다.5) 쌍투스라는 소년은 죽은앞에서도 “나는 기독교인이다”라고 대답하며 죽어갔다. 이것을 지켜보던 많은 신자들도 용기를 얻어 신앙을 고백하며 순교자의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다. 6.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의 박해(Septimius Severus 191-211년) 아프리카 출신의 군인으로서 기독교에 대하여 무관심 하였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는 유대교와 기독교를 함께 금지하였다. 알렉산드리아 교회는 세례교인들이 많은 박해를 받았으며 전도하여 얻은 그리스도인의 입교를 불허하는 금지령을 내려 기독교인이 되지 못하게 하였다. 이때 일어난 박해를 통하여 사도 시대의 정신을 속사도 시대로 게승하여 온 교부중의 제 일인자였던 이레네우스(Ireraeus)가 순교를 당하였고 유명한 신학자 오리겐의 아버지 레오니마스가 죄인으로 몰려 참수형을 당하였다. 따라서 아프리카의 카르타고에서는 페루페투아(Perpep-tua)와 펠리키타스(Felicitas)여인의 순교는 매우 유명하다. 이 두여인은 노예였는데 맹수들이 들끌는 원형경기장에서 손에 손을 잡고 기독교의 위대함을 온 천하에 증거하였다. 7. 막시미누스 황제의 박해(Maximinus 235-288) 막시미누스황제는 군출신 폭군으로 정치개혁을 통하여 성직자를 처형하고 즉위한지 3년이 되는해에 모든 사람들은 어느곳에서나 공개적으로 신전에 나와 희생제사를 드릴 것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이를 거부하는 기독교인들을 색출하여 지도자들을 유형과 투옥을 통하여 제거하였으며 막시미누스 황제의 임기 동안에는 사형을 당하는 순교보다는 감옥에 투옥시키는 방법을 썼다. 당시 로마 감독이었던 힙포리티스와 폰티아너스는 사르디니아 금광에 유배되어 노예로 죽음을 당하였다. 또한 이때 히플리투스와 우르술라가 순교를 당하였다. 8. 데키우스 황제의 박해(Decius 240-251년) 데키우스는 네로황제처럼 옛로마 정신을 열정적으로 일깨우며 모든 총독들에게 칙령을 내려 전국가적으로 기독교를 잔인하게 금지하고 박해를 가하게되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역사가 유세비우스에 따르면 기독교 때문에 로마 나라가 쇠퇴해 졌다고 보아 혹독한 박해를 가하였다. 그는 날자를 정하여 신전에 제사를 지낸 사람들에게는 증명서를 발급해주며 만약 돈을주고 증명서를 사지 못한다면 도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치 않으면 살아 남을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도 2년이 못되어 그의 아들들과 함께 살해되었다. 이들의 박해 때문에 예루살렘과 알렉산드리아와 오리겐 같은 학자가 고문을 당하여 같은 저명인사들이 순교를 당해야 했다. 로마 감독 파비안(Fabian)과 안디옥 감독 바빌라스(Babylas)가 그중에 들었고 키프리아누스(Cyprianus)는 도피하여 은둔생활을 하며 지냈다. 9.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박해(Valenian 253-260) 발레리아누스 황제는 처음3-4년 동안은 기독교인들에게 호의를 베플어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왕궁에 머물기도 하였다. 그러나 나라에 어려움이 오고 국난과 흉년이 계속되자 이를 기독교인들 때문에 신들이 분노를 하였다고 전가를 하여 교회의 제산을 압수하고 집회를 금지하고 특히 A.D 258년 기독교에 대한 처벌을 성문화하는 칙령을 발표하고 성직자들은 유죄 판결을 받을 경우 사형에 처하도록 하였다. 귀족들은 그들의 직위가 박탈되었고 재산은 몰수를 당하고 사무원들은 강제노동과 수용소로 보냈다. 이때 카르타고의 카푸리아누스(Cyprian 200-258)가 순교를 당하였으며 스페인의 타라고나지방 감독 투루투어스와 부 감독들이 이무렵 순교를 당하였다. 하지만 황제는 페르시아의 샤프르 1세와 전쟁을하여 마침내 포로가 되었고 그는 비참하게 죽고 말았다. 발레리아누스 황제가 죽은 뒤 그의 아들 갈리에누스(Gallienus) 가 황제에 즉위한 뒤 기독교는 잠시동안 번영의 시기를 맞기도 하였었다. 10. 디오클레시안 황제의 박해 (Diocletian 284-305년) 디오클레시안 황제는 본래 비천한 노예출신으로 자수성가 하여 권력을 획득한 그는 군의 추대로 로마 황제에 오르게 되었다. 그는 20년동안 뛰어난 행정력과 조직력으로 로마를 통치하였지만 기울어져가는 로마를 살리기 위하여 제국을 4개로 분할하고 군대를 강화 하고 경제를 개혁하고 기독교에 대하여는 관용정책을 베플었다. 당시 그의 부인을 비롯하여 내시들이 대부분 기독교인들이었다. 그러나 그의 사위 갈레리우스의 말에 따라 그는 종교정책을 바꾸어 궁내에 기독교인들을 제거하고 아폴로신전에 제사를 강요하였으며 이에 호의적이지 못한 기독교인들을 제국의 전역에서 말살하는 초치를 내렸다. 성경을 압수하고 교직자를 투옥시키고 교회를 파괴하였다. 그러나 305년 건강이 악화되어 자리에서 물러나고 그의 사위였던 동부의 황제 갈레리우스에게 계승하여 기독교인들을 더욱 혹독하게 박해를 하므로 그의 공포를 이기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을 포기하거나 형벌을 피하기 위하여 그들과 타협을 하였다6). 그러나 311년 그가 사망하기 직전 기독교인들에게 관용을 베프는 칙령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그 이유는 기독교인들의 꿎꿎한 지조에 감명을 받고 마지막엔 오히려 자기를 위하여 기도해 줄 것을 부탁을 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는 오랜동안 로마의 박해로 인하여 순교를 당한 순교자들을 로마교외에 있는 카타쿰의 지하 묘소에 장사를 지내주기도 하였으며 결국 로마는 기독교인들의 신앙심을 꺽을수는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결국 택한자들의 믿음을 인정하시고 A.D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를 통하여 믿음의 자유를 선언하게 하셨던것이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직위하면서 신앙을 기독교로 개종을 하고 기독교를 합법적인 종교로 선포하는 밀라노 칙령을 발표하게 되므로 초대 교회사 250여년 동안의 길고 긴 어두운 세월의 핍박과 순교의 터널을 뚫고 번영의 자유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2. 영적 빈곤의 시대 (박해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313년부터 콘스탄틴 대제의 기독교를 합법적인 종교로 공인하고 392년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선포된후부터 오랬동안 박해를 받아오던 기독교는 번영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처럼 기독교가 자유를 맞이하게된 것은 오랜 박해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믿음을 지켜온 순교의 씨가 열매를 맺게된 것이다. 그러나 박해의 종식후부터 또 다른 문제가 시작이 되었다. 그동안 기독교를 배신했던 배교자들을 받아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문제로 교회는 또다시 내적 분쟁이 시작되었다. 엄격파는 배교자들을 받아 들이지 말아야한다는것과 온건파들은 일정기간이 지나면 받아 들여야한다는 문제로 교회는 심각한 분쟁이 일고 있었다. 그리고 그동안 박해 때문에 생각할수 없었던 교리적인 문제로 325년 니케야 공회의에서 아다나 시우스의 삼위일체설을 정설로 간주하고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한 아리우스를 이단으로 정죄했다. 그리고 북 아프리카의 카르타고에서 발생한 성례전에 관한 논쟁은 성례전의 효력이 집행하는 사람 개인의 신앙과 도덕적 자질에 죄우되는지의 논의가 있었다. 결국 교회는 성례전의 효력을 성직자와 분리시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집행할수 있게하는 교리를 채택했다. 초대교회에는 교부들의 신학으로 정립이 되었지만 중세에는 외부의 지식으로부터 신학이 정립되었다. 이때 기독교안에 헬라 철학이 신학을 정립하는데 큰 비중을 차지했다. 313년 기독교가 공인되어 자유하게되자 교리문제로인하여 이단자들이 나오게 되자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종교회의가 열리게 되었는데 이것을 에큐메니칼 공의회라고 하는데 일곱차례에 걸처서 모임을 가졌는데 모임의 이름은 당시 모인 장소의 이름을 붙여서 부르게 되었다. 325년 니케아 공회의가 열렸고 381년에 1차로. 콘스타티노플에서 회의 있었다. 431년에는 에베소에서 열렸었고 451년에는 칼케톤 에서 열렸엇으며 553년에는 2차로 콘스탄티노플 공의회가 열렸고 681년에는 3차로 콘스탄티노플 공의회가 여렸으며 787년에는 제 2차로 니케아에서 열렸엇다. 이렇게 열린 공의회는 초대교회의 교리논쟁을 정립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냈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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