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의 비교 연구
서론
칼빈주의(Calvinism)와 알미니안주의(Arminianism)는 신학적 성경적 관점에서 각기 다른 견해를 취하고 있다. 이미 17세기의 돌트회의(The Synod of Dort)를 기점으로 신학 논쟁을 빚어 온 두 신학간의 불협화음은 오늘날까지도 해결책을 찾지 못한 채 계속해서 두개의 커다란 신학적 기둥으로 여러 교단과 신학교의 신학 체계를 다져 가고 있다.
1. 돌트회의(The Synod of Dort)
1618년 11월 3일 화란의 돌트(Dordrecht)에서는 화란개혁주의교회를 주축으로 국가적 종교모임인 돌트회의(Synod of Dort)가 개최되었다. 이 대회의 주요 관건은 다음의 3가지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첫째는 Erastianism건으로 정부가 교회를 통제하는 문제에 관한 내용이고, 둘째는 Erasmus와 Coornheert를 축으로 성경적 고백 보다 헬라주의적 경향으로 치우치는 반고백적 인본주의(Anti-confessional Humanism)에 대한 문제수습이며, 세 번째는 알미니안들이 채택한 “1610년 항의서”(The Remonstrance of 1610)에 대한 문제였다. 본 논고는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의 신학적 차이를 살펴보는데 그 의의가 있으므로 세 번째 문제에 초점을 두고 논의를 하고자 한다.
2. Jacobus Arminius와 The Remonstrance
돌트회의는 그 발생 원인이 회의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Jacobus Arminius(1560-1609)라는 사람에게 있다. 알미니우스는 데오도올 베자(Theodore Beza)의 제자로서 화란개혁주의 목사였으며 꽤 규모가 큰 화란 성직자 양성장이라 할 수 있는 라이덴 대학(University of Leyden)의 신학 교수였다. 암스테르담의 젊은 학자요 목사였던 그는 어느 날 Dirk Koornhert라는 평신도 신학자의 견해를 논박하는 글을 쓰게 되었다. 그 이유는 1567년경 Koornhert가 칼빈주의자들이 철저하게 믿어 왔던 예정론 교리를 반박하고 Belgic Confession(웨스트민스터고백과 흡사한 화란의 개혁주의 신앙고백)에 대해 회의를 표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칼빈주의 예정론을 방어하고자 Koornhert의 신학을 연구하던 알미니우스는 오히려 그의 신학에 매료되어 많은 부분에서 Koornhert와 공감하고 그의 신학을 지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알미니우스가 칼빈주의의 예정론에 대해 본격적으로 신학적 반감을 갖게 된 시기는 일찌기 Beza가 발전시켰던 예정론 사상(supralapsum, 아담이 타락하기 전 하나님이 이미 “선택”과 “버림”을 선포하셨다는 교리)을 라이덴 대학의 동료 교수 호마르(Franciscus Gomarus)가 옹호하고 나면서 부터였다.1) 그는 자신의 저서 Declaration of Sentiments(1608)에서 supralapsarianism과 infralapsarianism의 두 가지 예정론에 관한 이론을 반대하는 20가지 이유를 적었다. 기본적으로 그는 위의 두 가지 이론이 복음에 대해 전혀 무익한 견해로 보았다. 그는 이것들이 하나님의 지혜와 선과 공의 그리고 인간의 자유의지등과 모순되는 이론이라고 비난했다. 더 나아가 그는 이런 형태의 예정론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불명예스러운 일”이며, “인간의 구원에 상처를 입히는 행위”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순서를 뒤 바꾸어 놓는 일”(예를들면, 신앙인들의 의는 믿음을 소유함으로 이루어지는 일이지 결코 믿음이 있기도 전에 생겨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라고 지적했다.2)
무엇보다도 그는 “무조건적굼?예정론이야 말로 하나님을 “죄의 창시자”로 만드는 일이라고 거부했다. 이런 주장을 통해 알미니우스는 교회의 모든 교리가(예정론을 포함하여) 기독론 중심이 되어야 하며 신자들에게 덕을 끼치는 요소가 되어야 한다고 피력했다. 그는 supra-와 infralapsarianism의 예정론를 반대하는 또 다른 이유 두 가지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첫째는, supra-와 infralapsarian 예정론이 결코 구원 받을 자들의 머리가 되시고 그들의 구원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의 선포(Gods decree)를 정확히 전달하지 못한다는 것이며,
둘째는 산 돌(living stone)로 비유된 우리가 믿음을 통해 친히 머릿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라고 비난한다.3)
이와 같은 알미니우스의 신학적 견해에 대해 Gomarus와 그의 제자들은 전통 칼빈주의의 신학적 견해를 가지고 맞대응 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화란의 국교회는 두 개의 큰 분파가 생기고 양쪽 진영 간의 대립은 신학적이면서도 정치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그러던 중, 1608년 알미니우스는 화란 정부에 정식으로 종교회의를 청원하여 자신의 신학적 입지를 공포 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그 이듬해인 1609년에 그는 국회에서 자신의 신학적 견해를 피력할 기회를 얻었다. 하지만 미처 회의가 끝나기도 전에 알미니우스는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알미니우스가 죽고 나자 알미니안의 리더십은 Simon Episcopius와 Jan Uytenbogaert에 의해 자연스럽게 계승되었다. 이때 칼빈주의 진영의 Gomarus와 그의 일부 추종자들은 라이덴 대학으로 부터 알미니안의 신학을 뿌리 뽑으려 했으나 알미니안들이 이에 맞서 1610년에 The Remonstrance라고 하는 자신들의 신학적 입장을 표명하는 문서를 발행하게 되어 결국 칼빈주의자들의 노력은 무산 되고 말았다. 이 문서(The Remonstrance)의 핵심적 내용은 전통적 칼빈주의의 신앙원칙에 대항하는 5대 교리로서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다.4)
첫째는, 예지 선택이다.
하나님은 예지(forknowledge)의 능력으로 장차 누가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지 안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결코 지옥에 보낼 자를 미리 선택해 두지 않으신다는 주장이다.
둘째로, 무제한적 속죄(unlimited atonement)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만인을 위한 죽음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은 선택된 일부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인류 모두에게 적용된다는 논리이다.
셋째로, 타락한 인간은 자력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성령의 도우심을 떠나 스스로 어떠한 선이나 의를 추구할 수 없지만, 아담의 죄로 인해 결코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했거나 영원한 정죄를 선고 받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넷째로, 인간 안에 있는 모든 선과 행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에 기인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저항)할 수 있는 자유 의지가 있다는 것이다.
다섯째로,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는 믿음 안에서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 나갈 수 있으며 어떠한 유혹과 시험도 감당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의 실수나 복음을 떠난 행위로 인해 그 구원을 잃을 수도 있으므로 성경공부에 더욱 주력해야 한다.
상기와 같은 알미니안들의 신앙고백서(The Remonstrance)가 발간되자 여기 저기에서는 정치적 사회적 신학적 문제를 둘러 싼 공방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화란의 중산층들과 해변 일대의 사람들은 알미니안들을 지지했고, 남부 지역 변두리에 위치한 시민들은 Gomarus와 그의 칼빈주의 동료들을 후원했다. 이와 같은 신학적 분립은 순식간에 전국으로 확산 되어 화란 국교회(National Church)에 심한 분란을 가져 왔으며 여러 지방에 지역감정을 유발 시켰다.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결국 1617년에는 국내전쟁의 위협을 불러 올 만큼 “알미니안 대 칼빈주의의 논쟁”(The Arminian-Calvinist Controversy)은 사회의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1617년 11월, 국회는 문제 해결을 위해 회의를 소집하였다. 이로써 1618년 돌트회의가 소집 되었고 화란, 영국, 스코트랜드, 독일, 스위스에서 파견된 대표들이 참석하였으며, 알미니안들은 이 계기를 통해 최소한 자신들의 견해가 칼빈주의 신학과 동등한 대우를 받거나 각별한 관심을 받을 수 있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돌트회의는 알미니안들의 이러한 기대와 달리 칼빈주의를 옹호하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이로인해 불가피하게 선출된 13명의 알미니안 신학자들은 자신들의 견해를 변호해야 하는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돌트회의는 알미니안파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벨직 신앙고백서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 지지를 보냈다. 신조가 작성되어 개혁교회 교리들의 주요 내용들이 93개 조항으로 천명되었다. 곧이어 300명이 넘는 알미니안파 목사들이 공직 박탈당했고 15명이 구속 수감되었으며 그 외 많은 사람들이 국외 추방을 당했다.
3. The Canons of Synod of Dort/서유럽의 개혁주의 동향
돌트회의의 규범(The Canons of Synod of Dort)은 알미니안의 5개 항목에 대한 직접적인 대응책으로 어거스틴과 칼빈의 사상에 근거한 죄와 은혜에 대한 5가지 성경적 교리이다. 이 5대 교리(또는 5대 강령)의 배경을 이해하기 위한 차원에서 잠시 종교개혁 이후 유럽의 개혁주의 동향을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스위스의 제네바는 종교개혁의 중심도시였다. 쯔빙글리 당시의 스위스 교회들은 제네바를 중심으로 서로 간에 아주 친밀한 교제를 가지고 있었다. 독일의 교회 역시 상당수가 개혁주의 교회였으며 특히 남쪽지방(예를 들면 Heidelberg Catechism을 편찬한 도시들- Hesse, Bremen, Palatinate)같은 경우는 대다수의 교회가 개혁주의 신앙의 노선을 걷고 있었다. 스코틀랜드 교회는 철저히 칼빈의 신학과 신앙을 채택하여 여러 면에서 제네바에 있는 교회들의 모범이 되었다. 영국의 청교도들은 모두가 칼빈주의자들이었으며 Charles II세가 즉위하기 전까지 영국교회 목사들은 청교도 배경이 아니더라도 모두 칼빈주의자들로 일컬음을 받았다.
프랑스에서는 「기독교강론」이 불란서어로 번역되면서 칼빈을 개신교의 지적인 지도자로 높였고, 1558년경에는 소위 “Huguenots"라고 하는 불란서 칼빈주의자들의 숫자가 급격하게 늘어나기 시작하여 그 추종자가 400,000명에 달했다. 화란의 북쪽 지역 사람들 역시 칼빈주의 신앙의 체계 아래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이렇게 하여 칼빈의 선교적 활력은 서유럽의 대부분을 칼빈주의의 고장으로 만들었고 17세기에 이르러 칼빈주의는 루터란주의를 능가하게 되었다. 이처럼 칼빈주의가 16세기와 17세기를 거쳐 서유럽 일대의 개신교회를 주도했다는 사실은 잠시 후 우리가 살펴보게 될 칼빈주의의 5대 강령이 어떻게 해서 기독교 신앙의 기초가 되고 신학의 원리가 되는지를 잘 설명해 주게 된다.
4. 칼빈주의 5대 강령
알미니안들의 5개 신학 조항에 대응하는 돌트의 규범(Canon of Dort)은 다음과 같은 칼빈주의의 5대 강령이다.5)
첫째는 전적 타락(Total Depravity)이다.
타락한 인간은 절대로 자력으로 구원 받지 못한다. 여기에서 칼빈주의자들이 말하는 전적 타락은 인간이 최고 악(evil)의 상태에 놓여 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인간이 절대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없는 상태라는 말도 아니다. 다만 첫 사람이던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타락했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들의 인격이 손상을 입었고 그들의 죄가 인간의 지, 정, 의에까지 손상되었음을 의미한다.
둘째는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이다.
이 교리는 전적 타락 설에 자연스럽게 부합하는 교리이다. 인간이 죽고, 포로가 되며, 눈이 멀었다면 그것을 치료할 방법은 자신의 한계를 뛰어 넘는 위대한 하나님 외에는 없다. 시편 8:3절의 말씀대로 구원이 하나님으로 부터 온다면 하나님은 인간을 어떤 조건을 보고 선택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긍휼이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롬 9:15), 토기장이는 진흙보다 더 큰 권위를 가지고 있으며(롬9:21),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우리를 예정하사 당신의 아들들로 삼으셨다(엡1:4-5).
우리는 여기에서 무조건적 선택을 설명하면서 알미니안들이 주장한 예지론을 집고 넘어 가지 않을 수가 없다. 하나님의 예지는 인간 자체와 관련이 있는 것이지 인간의 행위와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누구를 미리 알고 계신다는 말은 선택하심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아모스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내가 땅의 모든 족속 중에 너희만 알았나니...”(아모스3:2).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행위와 선 또는 악을 내다보신 것이 아니라 오직 당신이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자녀로 선택했다는 입장에서 그들을 아신바(선택) 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행위를 보시고 우리를 선택했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가 선택 받은 것은 우리가 거룩한 행동을 했거나 우리 스스로가 그리스도를 영접했기 때문이 아니다. 다만 우리가 선택 되었기에 그리스도를 영접 할 수 있는 것이다(엡2;10). 하나님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영접 할 것을 미리 아시고 우리를 선택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선택 되었기에 믿음을 갖게 될 것을 아시는 것이다(행13:48; 빌1:29; 엡2:8-9).
셋째는 제한된 속죄(Limited Atonement)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일반적으로 세 가지 입장을 취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첫째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어느 누구 구분 없이 온 인류를 위해 죽은 죽음이라는 것이고, 둘째로 그리스도는 어느 일부만을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니라는 것과, 셋째로 그리스도는 일정한 숫자만을 구원하시기 위해 죽으셨다. 만인 구원론자들은 첫 번째 견해를 취한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만인을 위해 죽으셨기 때문에 온 인류가 다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두 번째 견해는 알미니안들의 견해이다. 그리스도는 구원의 잠재성을 가진 자들을 위해서 죽으셨다는 것이다. 주님이 죽으셨으나 그것을 인간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모두를 위한 죽음이지만 오직 그것을 믿는 사람들에 한에서만 유효하다는 것이다. 세 번째 견해는 칼빈주의의 입장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선하신 뜻에 따라 미리 선택하신 얼마간의 죄인들만을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만족시키고 그의 의를 선택된 죄인들에게 부어주어 그들이 죄 사함을 받게 하기 위해 죽으심을 당하신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모든 인류를 위한 죽음이었으나 그 죽음의 효력은 오직 선택 받은 자들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넷째는, 불가항력적 은혜이다.
선택받은 인간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거부할 수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선포된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그 부름에 합당한 자세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이것은 곧 복음을 들은 모든 사람이 자신의 죄를 뉘우치거나 예수님에 대한 필요를 꼭 느끼게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복음의 부름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내적 부름과 외적 부름이다. 외적 부름은 여러 가지 형태의 방법을 통해 여러 사람들의 마음에 도전을 가져다 줄 수 있다. 하지만 외적 부름의 약점은 그것 자체만으로 구원의 역사를 가져 올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구원의 역사가 나타나는 곳엔 외적 부름과 동시에 성령님의 사역을 통한 하나님의 내적 부름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인간이 거부할 수 없고 인간에 의해 결코 실패 되어 질 수 없는 인간을 향한 거룩한 성령 하나님의 은혜의 부름이기 때문이다.
다섯째로 성도의 견인이다.
선택받고 중생하여 의로워 진자는 그 믿음에서 실패하지 않고 하나님으로 부터 끝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선택을 받고 성령으로 성화 된 자는 결단코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타락하는 일이 없다. 그들은 마지막 구원을 이루는 때까지 견디며 영원한 구원을 얻을 것이다.
위의 교리들은 소위 칼빈주의의 5대 강령(The Five Points of Calvinism)으로 많이 불려 왔다. 하지만, 사실 이 다섯 가지 강령은 칼빈 신학의 전부를 대표하지 못하고 다만 부분적인 것만을 설명하고 있다. 그 때문에 “돌트의 규범”(Canon of Dort)을 정의 짓자면 그것은 17세기 알미니안 신학의 도전에 대한 칼빈주의의 신학적 대응으로 역사적 상황 가운데서 불가피하게 만들어 진 개혁주의 신학의 요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5대 강령은 Heidelberg Catechism과 Belgic Confession과 더불어 화란교회 뿐 아니라 세계 개혁주의 교회들에게 중요한 교리적 근거가 되고 있음을 부인 할 수 없다.
5.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사이에 논쟁이 되는 성경 구절
1) 요한복음 6: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쫒지 아니하리라”.
칼빈주의자들은 요6:37절이 “불가항력적 은혜”의 교리를 가르치고 있다고 믿는다.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택을 거부할 능력이 없으므로 그리스도에게 나아오는 자는 모두가 거기에 순종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알미니안들은 37절에 나타난 “내게 주시는 자”는 40절에 나오는 “아들을 보고 믿는 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그래서 하나님은 누군가가 그리스도를 믿을 것을 미리 아시고 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보내신다는 것이다. 45절에도 “아버지께 듣고 배운” 자들이 바로 “그리스도께로 오는”자들이라는 것이다.
2) 요한복음 6:44, 65-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에 다시 살리리라. 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칼빈주의자들은 이 두 구절 속에 “전적타락”, “무조건적 선택”, “제한된 속죄” 그리고 “이중 예정론”의 교리가 담겨 있다고 본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는 곧 인간의 전적 타락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을 의미하는 것이다. 무조건적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선택의 원인이 인간이 아닌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제한된 속죄와 이중 예정론은 인간이 하나님의 선택이 없이는 그리스도에게 나올 수 없다는 말씀에서 추론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끌지 아니한 자들은 곧 그리스도의 죽음이 그들을 위한 죽음이 되지 못하며 그들은 결국 심판을 받도록 예정되어 있는 것이다.
알미니안들도 위의 성구들이 인간의 전적 타락을 가르치고 있다고 본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선택한 사람들 뿐 아니라 “모든 인간”(all men)을 그리스도께로 보낸다고 주장한다(요 12:32; 16:8). 더 나아가 그들은 선택의 원인을 아버지로 부터만 찾는 것은 요6:29, 35, 40, 47절 등에 나오는 아들을 전혀 무시하는 것이라고 본다. 또한 구원의 책임과 원인을 찾는데 있어서 부름에 응답하는 인간을 무시한 채 아버지에게서만 찾는다는 것은 40절에 나오는 아버지의 뜻(“아들을 보고 믿는 것”)과 모순된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제한된 속죄나 이중 예정론의 교리도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3) 요한복음 15: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함이라”.
칼빈주의들은 이 구절이 인간의 자유 의지를 무효케 하는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을 의미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알미니안들은 문맥상 이 구절이 가리키는 것이 12제자들의 사도성이지 구원에 관한 것이 아니라고 반박한다. 이것을 뒷받침해 주는 말이 바로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라는 것이다. 이것은 요6:70-71절에 나타난 제자들의 선택하심과도 같은 예라는 것이다. 왜냐면 가룟 유다의 경우는 제자로서의 선택이지 구원에 관한 선택이 아니라는 것이다.
4) 사도행전 13:49-“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칼빈주의자들은 이 구절 역시도 무조건적 선택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지 않았다면 거꾸로 “믿는 사람들마다 다 영생을 얻으니라”고 나왔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미니안들은 “작정된 자”(tetagmenoi)로 번역된 분사가 중간-수동태로 표현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은 같은 형태의 분사가 헬라어로는 중간태와 수동태 두가지를 표현하는 것으로 쓰여졌다는 것이다. NASB번역과 한국어 번역은 수동태로 번역 되어 있지만 이 문장을 중간태로 읽는다면 “영생을 얻기로 작정한 자들은 다 믿더라”가 된다는 것이다.
5) 로마서 9:16, 22, 23-“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 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
칼빈주의자들이 롬9장을 무조건적 선택과 이중 예정론의 근거로 삼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16절의 내용대로 하나님의 선택은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이 아니고 하나님편에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며, 둘째로, 18절(“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의 내용이 이중 예정론을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며, 셋째로, 22, 23절에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과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이 하나님의 조건 없는 선택을 말하는 것이고, 넷째로, 이러한 선택은 민족적 선택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24절에 긍휼의 그릇이 이스라엘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모든 믿는 자들, 즉 “유대인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중에서도 부르신 자”들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 알미니안들은 로마서 9장의 처음 부분에서는 민족들을 선택하시는 하나님과 그의 계획안에서의 민족들의 역할을 다루고 있다고 말한다. 첫째로, 9장 1-5절의 상황은 분명히 민족적 선택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6, 7절에서 뒷받침해 주고 있는데 모든 이스라엘(야곱) 족속들이 구원 받지 못했다는 것과 모든 이스마엘 족속들이 저주 받지 않았다는 점을 이유로 든다. 또한 이것은 13절과 말라기 1:2-4절에서도 나타나듯이 에돔 민족보다 이스라엘 민족을 더 사랑하신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이지 개인의 구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16절은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인도해 내는 방법에 있어서 모세의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방법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지(출33:19) 결코 개인의 구원에 관한 가르침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18절의 상황은 16절과 17절과 관계하여 볼 때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애굽을 잠시 징계하기 위한 하나님의 마음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모세의 노력이나 바로의 방해와 상관없이 자신이 선택 했다는 이유로 이스라엘을 세우셨다는 것이다. 모세나 바로의 개인적 구원을 말하고 있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22, 23절의 주제는 역사 가운데 영광과 멸망을 가져오는 역할을 맡은 민족을 가리키고 있다고 본다. 하나님이 악한 민족을 멸하지 않으시는 이유는 오히려 그들을 통해 선택된 이스라엘 백성을 축복하시기 위함이다. 오늘날 믿는 자들은 모두가 이스라엘의 언약의 축복에 참여 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믿는 자들이 역사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로운 뜻과 목적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결론
지금까지 우리는 칼빈주의와 알미니안 주의가 주장하는 신학적 견해를 잠시 살펴보았다. 알미니안 신학을 주창한 알미니우스도 처음에는 칼빈 주의자였지만 Koornhert의 신학을 연구하면서 부터 전통적 칼빈주의가 믿어 오던 몇 가지 신조를 반박하고 다른 견해를 펼치게 되었다. 필자는 “칼빈 주의”와 “칼빈의 신학”의 차이를 인정하는 사람으로 왜 알미니안의 5대 강령(The five points of Arminianism)이 성경적 가르침에서 벗어난 것인가를 분석해 보려고 한다. 이러한 분석은 칼빈주의 예정론이 보다 성경에 가까운 이론이라는 전제하에 이루어진다.
거듭 말하지만 칼빈주의 5대 강령은 그것 자체로 개혁주의 신학(Reformed Theology)의 전체를 대변하지 못한다. 개혁주의 신학은 성경적 가르침에 근거한 정통 신학으로 그 깊이와 폭이 비교적 광범위한 관계로 몇 가지 교리로 간추려 설명 할 수 있는 신학이 아니다. 하지만 알미니안들에 의해 손상된 전통 칼빈주의 사상은 좀 더 세밀하고 정교한 설명이 가미되어진 칼빈주의 5대 강령을 통해 개혁주의 신앙의 본질을 어느 정도 대변 할 수 있으리라 본다.
알미니안 주의는 엄격히 말해서 개혁주의 신학과는 전혀 다른 또 하나의 신학적 체계이다. 어떻게 보면 광범위한 그들의 신학적 체계를 5대 강령 안에서 찾으려고 하는 노력은 큰 무리일 수 있다. 그러나 알미니안 신학의 오류는 5대 강령으로 요약된 그들의 주장 속에서도 충분히 읽을 수가 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알미니안들이 가장 많이 관심을 갖고 비난하는 “무조건적인 예정론”에 관해서 좀더 사려 깊은 방어를 해야 할 것 같다.
초기 종교개혁자들은 예정론에 관해서만큼은 모두가 일치된 의견을 수용했다. 하지만 오늘날은 오직 개혁주의 노선을 걷는 교회들만 철저한 예정론을 신앙으로 고백하고 있다. 이러한 교회들은 모두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믿고 따르는 교회들이다. 특히 다음과 같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3장(Of God's Eternal Decree)에 나오는 예정론 교리는 개혁주의 교회들이 자신들의 신앙 이념으로 고백하는 하나의 신조이다.6)
1) God from all eternality did, by the most wise and holy counsel of His own will, freely and unchangeably ordain whatsoever comes to pass: yet so, as thereby neither is God the author of sin, nor is violence offered to the will of the creatures, nor is the liberty or contingency of second causes taken away, but rather established.
2) Although God knows whatsoever may or can come to pass upon all supposed conditions, yet hath he not decreed anything because he foresaw it as future, or as that which would come to pass upon such conditions.
3) By the decree of God, for the manifestation of His glory, some men and angels are predestined unto everlasting life, and others foreordained to everlasting death.
4) These angels and men, thus predestinated and foreordained, are particularly and unchangeably designed; and their numbers is so certain and definite, that it cannot be either increased or diminished.
5) Those of mankind that are predestinated unto life, God, before the foundation of the word was laid, according to his eternal and immutable purpose, and the secret counsel and good pleasure of His will, hath chosen in Christ unto everlasting glory, out of his mere free grace and love, without any foresight of faith or good works, or perseverance in either of them, or anything in the creature, as conditions, or causes moving him thereunto; and all to the praise of his glorious grace.
위의 고백서는 1645년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의해 고안되었지만 이것은 이미 초기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고백되어진 신조이며, 개혁주의 교회들이 수용해 왔고, 알미니안들이 의문을 제기한 교리이다. 알미니안들의 반박을 잠재우고 예정론의 입지를 더욱 강화 시키는 내용은 특히 위의 3장 첫 번째 항목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것을 요약하면, “온 우주만물의 역사는 그 시작부터 끝까지가 얼마나 광대하고 세밀한 것이든지 간에 하나님의 선포와 계획안에 들어 있다. 그러므로 역사 가운데 그 어떤 작은일이나 큰일도 영원전 부터 불변하시는 하나님의 예정을 쫓아 지나갈 것이라”.
사실 하나님의 영원전 계획과 선포에 대한 이유 자체가 알미니안들과의 충돌의 원인은 아니었다. 다만, 하나님의 선포가 실존생물, 즉 인간들의 미래 운명과 연결되어져 한 부류는 영원한 삶을 살고 다른 한 부류는 영원한 죽음으로 택정 되었다는 사실이 충돌의 원인이 된 것이다. 하지만, 엄연히 일반적 선포에 대한 교리는 일반적인 사건뿐 아니라 인간의 운명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만약 하나님이 자기 스스로 불변의 원칙을 가지시고 다가 올 어떤일에 대해 미리 규정 지으셨다면, 그래서 어떤 사람은 구원을 받고 어떤 사람은 멸망을 받는다면, 마땅히 하나님은 이런 사건들을 당신의 의지와 불변의 원칙으로 규정 지으신 것이며 또 그 밖의 다른 사건들도 그렇게 하신 것이다. 그 때문에 알미니안들이 다른 모든일은 하나님의 선포와 계획속에 있는 일이지만 인간의 운명에 관해서 만큼 그렇지 않다고 부인한다면 결국 그들은 자신들의 신앙에 모순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을 삶과 죽음으로 영원전 부터 계획하신 하나님의 주권은 특정한 숫자의 죄인들만 구원코자 하시는 일에 있어서 결단코 선택된 죄인들의 미래의 선행이나 믿음을 예지하시고서가 아닌 오직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따라 결정 되어진 것임을 가리킨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이며, 불변적인 선포를 통해 당신의 사랑과 은혜로 일정한 사람들을 선택하여 구원하신다. 선택받지 못한 자들도 하나님의 주권적 뜻에 따라 그들의 죄의 원인으로 멸망의 길을 가도록 규정지어진 것이다.
바로 이런 교리를 알미니안들이 부인하는 것이다. 알미니우스는 절대로 하나님이 구원할 자를 예정해 놓지 않으셨다고 한다. 다만 하나님은 당신의 선포를 통해 그들을 믿는자들로 이해했을 뿐이라고 한다. 이것은 알미니안의 기본적인 신앙으로서 개혁주의 신앙의 규범을 저해한다. 매우 중요하고도 진지한 예정론의 교리가 너무도 쉽게 알미니안들의 손에 의해 손상되고 있다. 알미니안들은 매우 기본적인 하나님의 주권적이고도 무조건적인 선택의 교리를 무시한다. 이와 같은 부인은 진리의 바탕위에 서있는 개혁주의 교리의 본질을 망각하는 것이다.
알미니안들의 입장은 단순히 예정론 교리를 무시하는 차원이 아니다. 그들의 5대 조항의 첫 번째 교리는 다음과 같다.
“That God, by an eternal unchangeable purpose in Jesus Christ His Son, before the foundation of the world, hath determined out of the fallen, sinful race of men, to save in Christ, for Christ's sake, those who, through the grace of Holy Ghost, shall believe on this his Son Jesus, and shall persevere in this faith and obedience of faith, through his grace, even to the end."7)
얼핏보면 이 교리는 칼빈 주의 규범과 별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이 교리는 영원하며 불변하는 하나님의 목적이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구원하고 끝까지 그들을 인도하시기로 결정하셨음을 보여준다. 누가 보아도 손색없는 기독교적 신앙 고백이다. 물론 하나님은 영원한 불변의 선포를 따라 그리스도를 믿고 끝까지 거룩함으로 견디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로 결심하셨다. 하지만 이 문장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거기에는 칼빈 주의자들의 주장과 엇갈리는 부분이 있다. 칼빈 주의자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원한 불변의 선포를 좇아 이미 선택되어 구원받은 부류와 구원받지 못한 부류를 구별 지으셨다는 것이다. 이러한 구원에 대한 선포를 확신시키기 위해 하나님은 구원받을 자들에게 최후의 날을 선포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믿음과 인내를 갖도록 도우신다는 것이다.
하지만 알미니안들은 개인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예정을 부인하고 오히려 그리스도를 믿고 끝까지 인내하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기로 선포하셨다는 것이다. 전자같은 경우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을 입은 대상들에게 구원의 약속이 보장 되지만, 후자와 같은 경우는 인간의 믿음과 인내의 결과가 구원을 가져다준다는 논리이다. 다시 말하면, 전자는 인간에 대한 선택이지만 후자는 인간의 노력과 자질에 대한 선택이다.
이렇게 되면 또다른 문제가 발생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택이 자신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인간들의 의지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선택이 믿음의 근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지로 아신 인간의 믿음이 선택을 좌우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예정은 결과적으로 인간안에 잠재해 있는 선과 능력에 의존된 것이지 하나님 자신의 선하신 뜻에 의한 것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마치 칼빈주의 교리와 별 차이 없어 보이는 이런 형태의 알미니안 교리는 오히려 칼빈주의와 많은 차이점을 드러내고 만다.
칼빈주의에서 가르치는 선택설은 구원을 받고 영생을 가져다 주는 선택으로 은혜와 믿음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포를 이루시기 위한 도구로 사용된다. 그러므로 믿음은 예정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원한 선택으로 인간을 구원하셨기에 또한 인간의 믿음을 통해서 역사 하신다.
무조건적 선택의 교리를 부인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교리에 치명타를 입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절대 주권적인 것이며, 이 절대 주권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는 것은 교만한 마음이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당신이 택하신 영혼들을 그리스도께로 나아오게 하기 위해 여러 가지 도구와 역사를 아끼지 않으신다. 인간이 스스로 구원할 수 없을 때 우리를 창세전부터 택하시고 영원 끝까지 견인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하자. 이것이 바로 성경에 기록된 복음의 진리이며 칼빈주의가 믿는 신앙고백이다.
그래서 칼빈주의는 가만히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오늘도 하나님의 택하심의 은총을 입은 백성들의 마음과 귀가 열리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엡1:4-7).
Bibliography
Carruthers, S. W.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Shorter Catechism
and Larger Catechism, Orthodox Presbyterian Church, 1646.
Elwell, Walter A., ed., Evangelical Dictionary of Theology, Baker Book House,
[출처] Calvinism vs. Arminianism(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비교연구) (세인트 룩 대학/St. Luke University (WA)) |작성자 calvin2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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