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로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복음주의에 머물 것인가? / 송다니엘 목사 목차 들어가면서 I. 개혁주의와 TULIP II.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는가? 1. 펠라기우스와 어거스틴 2. 반펠라기우스주의 3. 루터와 에라스무스 부록: 가톨릭의 은혜론 논쟁 내용 1) 에라스무스의 입장 2) 루터의 입장 노예의지 III. 아르미니우스와 알미니안주의 1) 알미니안주의 배경 2) 알미니안주의 IV. 칼빈주의 다섯 요점 1. 전적 부패와 자유의지 2. 조건 없는 선택과 조건적 선택 3. 제한적 속죄와 일반적 속죄 1) 일반적 속죄 2) 제한적 속죄 3) 어려운 구절 해석 4) 정리 4. 불가항력의 은총과 거부할 수 있는 은총 5. 성도의 견인과 은총으로부터의 타락 1)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구절 2) 히브리서 6장과 10장 a) 알미니안주의적 해석의 축이 되는 두 구절 b) 히 6:4-6과 10:26-29에 나오는 신자는 진짜 신자인가 가짜 신자인가? c) 히 6:4-6의 주경학적 검토 d) 구원의 확신 V. 알미니안주의와 복음주의 1. 복음주의란 무엇인가? 1) 근본주의 2) 신정통주의 3) 복음주의 4) 진보적 복음주의 2. 개혁주의 1) 개혁주의와 함께 할 수 없는 것 2) 한국의 개혁주의와 장래 3) 경건주의와 청교도 들어가면서 개혁주의 신학의 특징을 한 마디로 표현하라고 한다면, 필자는 주저 없이 „하나님의 주권1)“이라고 하겠다. 개혁주의 신학은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한 신학이며, 그 위에 세워진 신학이다. 하나님의 주권이란, 하나님께서는 로만 그레코의 신화에서 등장하는 신이나 독재 군주와 같이 인간의 운명을 임의로 좌지우지하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분의 주권을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시고, 타락한 인간을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구원하신다. 이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분의 절대적인 사랑으로 하나님께서 이루신다. 인간은 자신의 구원을 위해 전혀 기여할 수도 없으며, 기여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따라서 개혁신학은 하나님의 주권과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해야 한다2). 하나님의 사랑이 빠진 하나님의 주권은 없다. 하나님께서 주권적인 능력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사랑하신다면, 우리는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여기에서 신전의식(Coram Deo3); 코람 데오, 하나님 앞에서)이 나온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 앞에서 산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잘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며… 더욱이 이 지식은 단지 하나님에 관한 어떤 사실들을 이성적으로 깨닫는 것만이 아니라 전 인격을 포함한 마음의 지식이 되어야 한다4)“ 그러므로 개혁주의 신학은 인간의 책임을 강조하게 된다. 신전의식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살고자 하는 마음을 불러 일으킨다. 하나님의 뜻은, 구약(올바로 이해된 율법)과 신약(신약의 계명)에 계시되어 있다. 신자는 더이상 자기를 위해 살지 않는다. 또한 올바른 삶이 무엇인지는 자신이 임의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계명으로 규정하신다. 구원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와의 언약 관계(피의 언약)로 들어가기 때문에, 마땅히 하나님의 뜻을 지키며 살아야 한다. 계명을 지키지 않는 신자란 말 자체가 모순이다. 계명을 어긴다는 말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스스로 파괴하기 때문이다. 계명을 잘 가르치지 않아서 많은 신자가 계명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것이 한국교회의 현실이다. 또한 계명을 지킨다는 말의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신앙생활이 율법적으로 흐르는 것이 신앙생활의 비극이다. 계명을 지킨다는 말은 노예처럼 계명에 매어서 산다는 말이 아니다. 예정론은 „하나님의 주권“ 사상에서 나왔다. 예정론의 중심은, 도저히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죄인이 „단지 하나님의 은혜로“(sola gratia)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즉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 그러므로 나는 그 구원에 감사하고 감격하여 일생 하나님의 뜻을 좇아서 산다5). 비록 나에게 죄성이 남아서 내가 죄를 짓고, 그로 말미암아 구원의 확신이 흔들릴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나를 끝까지 붙들고 계신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므로 아무도 내 생명을 그분의 손에서 탈취할 수 없다. 나도 그것을 할 수 없다. 나는 구원을 받았다! 그러므로 나는 매일 하나님을 향해서 산다. 예정론은 나에게 일어난 구원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러므로 예정론은 다음의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 ·내가 하나님을 믿고자 의지로 결단하여, 즉 나의 선택에 의해서 하나님을 믿게 된 것인가? 아니면 죄인인 내가 하나님을 선택할 정도로 능력이 없으나,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믿음으로 인도하신 것인가? ·나는 내가 결단한 믿음을 끝까지 지켜야 구원을 받는가? 아니면, 나는 비록 능력은 없으나 하나님의 보호 하심으로 끝까지 믿음을 지킬 수 있는가? 예정론은 믿지 않는 자는 원래부터 하나님께서 그를 멸망으로 예정하셨음을 설명하기 위한 체계가 아니다. 예정론은 이 사실을 분명히 가르치지만, 이것은 논쟁에서 나온 어쩔 수 없는 논리적 귀결이다6). 즉 예정론은 반대자들의 공격을 받고 체계화되었으므로 논리적 귀결이 그렇다는 것이다. 멸망으로의 예정이라는 말이 가르침의 중심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예정론은 인간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끝없이 겸손하게 만든다. 예정론은, 모든 것이, 즉 나의 구원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음을 알고 진정으로 겸손해지는 것이며, 하나님의 사랑을 영접하여 구원의 확신을 갖고 흔들이지 않으며, 죽을 때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감사함으로 좇아 사는 삶을 가르친다. 본고는 루터와 에라스무스와의 논쟁에 초점을 맞추어, 어떻게해서 종교개혁이 예정론 교리를 다시 붙들게 되었는지를 나타내고자 한다. 그리고 예정론의 중요한 요점을 살피고, 복음주의가 점차로 알미니안주의로 이동하므로 위기를 맞을 수밖에 없음을 밝히려고 한다. 그리고 한국의 기독교가 다시 개혁주의로 돌아가고, 개혁주의7)에서 많이 배울 것을 호소하려고 한다. I. 개혁주의와 TULIP 루터는 그의 노예의지론에서 예정론을 세우는 것에 대해 경고를 했다. 우리의 하나님은 계시의 하나님인 동시에 숨겨진 하나님(Deus absconditus)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숨기신 비밀 속으로 파고 들어가는 것은 큰 잘못이다. 예수님을 바라보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감미롭게 부르신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아버지(Abba)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은 힘있게 이중예정을 가르쳤다. 그 이유는 그가 루터의 경고를 무시한 것이 아니라, 수많은 적에 대해서 종교개혁의 유산을 수호해야 했기 때문이다. 예정론에 관한 한 루터와 칼빈 사이에 내용적인 긴장은 없다. 칼빈(개혁)주의의 TULIP은 칼빈주의의 중요한 가르침이다. TULIP은 후세에 알미니안주의와의 싸움(도르트 회의: 1618/1619)에서 만들어진 것이므로, 다소 전투적이고 배타적인 표현이다. 이 표현은 매우 명확하다는 이점이 있는 반면에 성경에 없는 표현을 사용하였으므로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더욱이 이것을 처음 듣는 사람에게는 거부감을 줄 수 있다8).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가르침은 개혁주의에서 포기할 수 없는 중요한 가르침이므로 우리는 잘 연구할 필요가 있다. 특히 오늘날과 같이 가짜 복음이 기승을 부리는 시대에, 우리의 선조들이 이해한 복음을 잘 연구하여, 자신이 먼저 복음을 올바로 이해하고 새로이 받아들여야 하며, 좀 더 분명한 자세로 복음을 전해야 한다. 그러나 연구에 있어서는 인간의 사고의 한계를 인정하고 (반대편과 서로 싸울 것이 아니라) 겸손한 자세로 연구에 임해야 한다. 우선 영어 표현을 소개한 후에 번역한 것을 기술한다: 첫 자를 따서 TULIP(튤립)이라고 한다. 회의가 열린 도르트는 네덜란드에 있고, 네덜란드의 국화가 튤립이므로 암기하기 쉽다. 그러면, 이러한 칼빈주의의 다섯 요점이 어떠한 배경에서 나왔는지를 우리가 알고 있으면, 이것을 이해하기가 수월해진다. 이 문제의 핵심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문제이다. 먼저 이 문제를 둘러싸고 일어난 논쟁의 역사를 간단히 살펴보고자 한다. II.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는가? 인간에게 과연 자유의지가 있는가의 문제는 기독교에서뿐만 아니라, 철학 그리고 과학에서까지, 고대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자유의지라는 개념을 일차적으로 단지 „구원에 관한 문제“에만 국한한다. 즉,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의 사역을 자신의 능력으로 깨닫고, 이것을 받아들여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아나갈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즉, 이것은 „내가 오늘 점심때 무엇을 먹을 것인가“에 대한 결정(inferiora: 낮은 것)이 아니라, 구원을 위한 결정의 문제(superiora: 높은 것)이다. 인간의 자유의지에 관해서는 이미 5세기 초에 펠라기우스와 어거스틴이 매우 격렬하게 논쟁한 문제인데, 교회는 어거스틴의 가르침을 받아들였다. 펠라기우스주의는 418년에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당했다. 1. 펠라기우스와 어거스틴 어거스틴: 자유의지는 완전히 제거되거나 파괴되지 않았지만, 죄로 말미암아 부패되었으므로, 악으로 기울여져 있다. 자유의지가 실재하기 때문에, 어떤 일을 결정할 수 있지만, 그것은 죄에 대해서 항상 타협을 한다. 펠라기우스: 인간이 죄로 오염되었다는 것, 죄성, 도덕적 타락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 심성의 악함을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 펠라기우스 정죄의 의의 펠라기우스주의는, 기독교가 국교가 됨으로써 교인의 도덕심이 해이해져 있을 때, 이에 대한 반항으로 일어난 도덕주의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실제로 로마에 살면서 로마 교인들의 해이한 삶에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문제는 그가 합리주의자와 도덕주의자였으며 죄와 은총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죄인을 믿음으로 의롭게 하시는“ 칭의 교리에 가장 큰 집단적 도전(그의 의견은 많은 지지를 얻었음)이었다. 따라서 어거스틴의 승리는 도덕주의 경향으로 기울어지고 있는 일군의 교회 지도자들에게 경각심을 주고, 교리를 복음의 핵심으로 돌리는 데에 큰 공헌을 했다고 볼 수가 있다. 2. 반펠라기우스 주의 그러나 어거스틴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한 승려들의 반발로 반(Semi)펠라기우스 주의가 등장했다. 이 가르침의 핵심은 신인협력설이다. 즉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과 인간이 협력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타락했지만 완전히 타락한 것은 아니다. 자유의지는 소멸되지 않고 약화되었다. 하나님이 약화된 인간의 의지를 도와주셔서 구원을 이루게 하신다. 은혜는 인간의 믿음에 선행하는 것이 아니라 동행하며 인간의 의지를 계발시켜준다. 비록 529년 오렌지 공의회에서 세미 펠라기우스 주의가 정죄 되었지만, 중세기에 세미 펠라기우스 주의가 부활하였다. 종교개혁자들은 가톨릭을 세미 펠라기우스주의라고 비판하였다. 그들이 어거스틴의 칭의론을 발굴, 연구하여 이신칭의가 종교개혁의 핵심교리가 되었다. 인본주의, 계몽주의는 칭의론에 문제를 제기하여 현대 인본주의 신학에 영향을 주었으며, 오늘날에는 복음주의에서까지도 칭의교리는 올바른 대접을 받지 못한다. 이제는 개혁주의 신학이 소수로 몰려났다. 3. 루터와 에라스무스 에라스무스(1465-1536)는 교황청의 압력에 못이겨 1524년에 루터(1483-1546)에 대항하여 „자유의지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였다. 루터는 1525에 „노예의지에 관하여“로 대답하였다. 결과는 에라스무스의 KO패였다. 그때까지는 에라스무스가 „휴머니즘의 제왕“이라는 명성을 얻고 있었으나, 그 이후부터는 에라스무스의 명성은 루터의 뒷전으로 밀리고, 루터는 종교개혁과 인문주의 사이를 칼로 자르듯 명확하게 구분하였다. 만약 루터의 이 작품이 없었더라면, 종교개혁에 가담했던 수많은 인문주의자들이 계속 종교개혁자로 남아 있으면서 기독교를 더 빨리 인본주의화 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이 작품 이후에 종교개혁의 본질을 깨닫고 이에 실망하여 루터를 떠나서 인문주의자로 자리매김하였다. 물론 많은 기독교 학자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더 분명한 자세를 가지게 되었다. 따라서 루터의 „노예의지에 관하여“는 종교개혁의 기초를 놓는 작품이며, 노예의지는 개혁신학에서 포기할 수 없는 가르침이다. 이 가르침을 분수령으로 두 진영은 분명하게 나뉘므로 루터와 에라스무스와의 싸움은 신교와 가톨릭을, 신교와 인본주의를 가르는 문화싸움이다10). 기독교 입장에서 역사를 바라본다면, 역사는 루터와 에라스무스의 싸움이며, 이 투쟁은 치열하게 계속될 것이다. 교회는 루터 교회와 에라스무스 교회로 나누어질 것이고, 신자라면 누구든지 루터 편에 설 것인가, 아니면 에라스무스의 편에 설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루터는 이미 1518년 하이델베르크 논쟁에서 자유의지에 대하여 확고한 의견을 가졌다. 루터는 자신이 논제를 세우고 해설을 하였다: ·3항: „인간의 행위는 그것이 아무리 훌륭하게 보일지라도 대죄로 간주된다. 인간의 행위는 외형적으로는 빛이 나지만 내적으로는 타락한 것이다11)“ ·13항: „타락 후에 자유의지는 단지 명목상으로만 존재하며, 그(자유의지)가 할 수 있는 것을 할지라도12) 대죄(죽을 죄)를 범하는 것이다. 인간은 죄의 노예이다… 은혜없는 자유 의지는 단지 죄를 짓는 능력뿐이다“ ·27항: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자마자 그분은 우리의 살아있는 믿음을 통하여 우리를 그분의 사역으로 움직이게 하신다. 그분 스스로가 하시는 이러한 사역은 하나님의 계명을 완성하시는 것이고, 이것은 우리에게 믿음을 통해 선사되는 것이다… 그분의 자비하심이 우리 안에 임하시면, 그것은 우리 안에서 믿음으로 인해 생명을 얻게되고, 우리가 계명을 지키도록 우리의 마음을 강력하게 움직인다“ à 여기에 예정론이 인간을 게으르게 만든다고 하는 모든 인본주의적 기독교에 공격에 대한 답변이 있다. 인간은 자신 안에 새생명이 싹트고 있고,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음을 분명히 알 때, 비로소 자신을 버리고 하나님께 헌신할 수 있게 된다. 즉 그는 진정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사랑하고 따르는 것이다. 그의 십자가 신학은 논제 19-22에 있다. 이것을 간단히 정리하면: ·진정한 신학이란 하나님을 십자가에 달리신 분에서 찾는 신학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신학이란 십자가 신학(theologia crucis)라고 불리운다. ·가톨릭 교회는 이성(사변)과 선행을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한다. 루터는 이것을 영광의 신학(theologia gloriae)이라고 명명하고 이것은 잘못된 신학이라고 비판하였다. ·이 가짜 신학은 악을 선이라고 하고, 선을 악이라고 한다 à 가톨릭 신학에 폭탄선언을 함. ·십자가 신학은 고난과 십자가를 통해서 계시를 안다 (예수님의 인성과 고난을 강조) 부록: 가톨릭의 은혜론 그러면, 루터는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가? 그는 당시의 은혜론에 따라 하나님의 은혜(자비하심)를 얻고자 철저한 투쟁을 하였다. 그러나 그는 끝끝내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얻었다는 확신을 가질 수가 없었다. 스콜라의 은혜론을 살펴보면: meritum de congruo: 은혜의 상태에 있지 않은 인간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할“때 하나님께서 그를 불쌍히 여기셔서 인정해 주시는 공적을 „메리툼 데 콘구로오13)“라고 한다. 즉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에 대해서 매우 적어서 공적이라고 할 수 없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공적으로 인정해 주시는 것이다. 이러한 가르침의 바탕에는, 인간이 비록 타락했지만,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히 파괴되지 않아서 하나님께 비록 작지만 그분을 기쁘시게 할 만한 정도의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해 먼저 „자신에게 있는 것을 하라“고 가르친다: facere quod in se est. meritum de condigno: 이 적당한 공로를 인정받은 사람은 이제 하나님께서 부어 주실 은혜를 받을 준비가 된다(이 적당한 공로가 없는 사람이 아무리 성사를 받아도 효과가 없다. 은혜의 주입이 되지 않는다). 그가 성사를 통하여 은혜의 주입(gratia infusa: 주입된 은혜)을 받으면 그는 은혜의 상태에 있게 된다. 즉 그는 칭의를 받아 하나님과 온전한 교제를 할 수 있는 상태에 도달한다. 이렇게 이미 변화가 된 사람이 행한 공적을 „메리툼 데 콘디그노“라고 한다. 그가 이룬 이 공적은 본질적으로 의롭기 때문에 그의 공적은 쌓이는 것이며, 그는 그 공적으로 말미암아 영생을 얻을 수밖에 없다. 루터는 진지하게 참회를 했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의 참회를 받아주셨다는 확신이 없었다. 스콜라 신학의 참회론에 따르면, 참회자는 (고해성사 때) 반드시 올바른 회개를 먼저 해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인간을 참회로 몰아간다. 즉 회개를 위한 전제는 하나님에 대한 순수한 사랑이다. 그러나 사랑에는 순수한 사랑 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종류의 사랑도 있다. 사랑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1.amor concupiscentiae: 열망하는 사랑.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의 죄를 뉘우치되 이것을 단지 자신만을 위해 하는 것. 2.amor amicitiae: 친구사랑. 우리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의 죄를 뉘우치는 것. 그런데 문제는, 지옥에 대한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기적인 사랑이므로, 단지 자신을 생각하지 않고 순수하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만 죄사함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사랑도 그것이 온전히 자신의 의지에 의해서 발생되어야만 유효하다. 참회자가 이러한 상태에 도달해야지만(meritum de congruo) 성사 때에 자신에게 은혜가 쏟아 부어진다. 그러면 „개인의 현재적 죄“가 사함받고 죄인은 „진정으로“ 의롭게 된다. 루터는 이 가르침에 따라서 회개를 통한 죄사함을 얻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내면에 진정한 하나님 사랑을 만들어내려고 노력했다. 처음에는 이것이 이루어지는 듯 하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오랫동안, 그리고 깊이 관찰할수록, 자신이 가장 깊이 회개할 때에도 여전히 자기 사랑(지옥에 가고 싶지 않은 마음)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자기 자신을 더욱더 채찍질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결국 하나님께 대한 완전한 사랑, 깊은 회개는 자기 스스로는 성취할 수가 없음을 깨달았다. 그는 인간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자신을 향하여 굽어있는 존재“인 자기욕망(Ich-Sucht)이 결정적인 동력으로 자리 잡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심판하고 징벌하는 하나님앞에서 공포와 불안은 커져 갔다. 이러한 체험을 통해 루터는 인간이 하나님께 나가는 길은 전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회개는 인간이 죄인이므로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인간은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잡은 자기 사랑을 지울 수가 없다. 아무리 자기 의지로 하나님을 순수하게 사랑하려고 결심하여도 이것을 실행할 수가 없다. 인간은 사단에게 붙잡힌 존재이다. 구원은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이 오로지 하나님으로부터 와야 한다. 회개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먼저 회개하는 마음을 주셔야 한다. 이로써 루터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기초한 회개론, 은혜론을 벗어버리고, 오직 은혜라는 복음을 붙잡을 수 있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내가 왜 교회에 다니는지, 신앙생활을 하는지를 잘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나의 종교행위는, 그 자체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미가 없다. 종교적 감정, 영성(?)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종교적 감정에 의존한다면, 나는 위선자가 되며, 결코 회개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진지하게 회개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불가능하다. 아무리 마음을 찢고 금식할지라도 회개는 되지 않는다. 회개는 100% 성령님의 사역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성령님께서 나의 마음속에서 역사하셔서 회개하는 마음을 주시도록 할 것인가? 방법은 단 한가지이다. 매일 하나님 말씀을 진지하게 듣고(믿음은 들음에서 난다), 들은 말씀을 진지하게 실행하려고 노력하는 것 밖에 없다. 이것은 내가 성령님의 역사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태도가 바로 성령님께서 주신 마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회는 모든 신자가 서로에게 하나님 말씀을 따라 살도록 위로하고 권면하는 장소가 되어야 하며, 함께 하나님을 경배하는 곳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 말씀의 올바른 선포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논쟁 내용 1) 에라스무스의 입장 자유의지는 nonnihil(약간)이며, 하나님의 은혜는 plurimum14)(대부분)이다. 우리가 비록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게 되지만, 그래도 인간의 의지가 작용할 여지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간을 상주시고 벌하시겠는가? 그래야지만 인간은 선행을 위해 힘쓰지 않겠는가? 만약,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다면, 벌을 주시는 하나님은 불공정한 잔인한 하나님이 아니겠는가? 2) 루터의 입장 루터의 대답에서 신교 칭의론의 본질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다. 개혁교회의 4가지 솔라는 이곳에서 나왔으며, 이것은 루터의 칭의론의 근간을 이룬다. solus Christus(오직 그리스도) 에라스무스는 인본주의자로서 인간의 존엄성을 살리려고 했다. 즉 인간은 비록 일그러지고 병이 들었지만, 그럼에도 선한 면이 조금은 있으므로, 이것을 잘 고양하면 선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사람은 그리스도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리스도는 (여러 의사 중에) 가장 좋은 의사이다. 성경도 여러 가지 좋은 약 중에서 가장 좋은 약이다15). 루터: 인간이 병이 든 것이 아니라 죄로 말미암아 죽었다! 세포 하나라도 살릴 수가 없다. 그에게는 부활만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그를 살리는 분은 오직 그리스도이다. sola gratia(오직 은혜로) 에라스무스: 인간의 내부에는 아직 불씨가 꺼지지 않고 있다. 이것이 자유의지다. 인간은 성(城)에 비유하자면, 성의 대부분이 적에 의해 점령을 당했지만, 가장 깊은 곳에는 아직 자유가 있다. 외부에서 강력한 지원군이 온다면, 이는 해방될 수 있다. 이 지원군이 하나님의 은혜이다. 루터: 무슨 소리! 바로 가장 깊은 곳(마음, 양심)이 이미 옛날에 적에게 강점되어 있소. 인간의 중심이 바로 사단의 노예가 되어 있소. 바로 이러한 이유로 인간의 의지는 속박되어 있소. 에라스무스: 인간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facere quod in se est).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가 부족한 것을 채워서 완성시킨다(당시 가톨릭의 가르침). 루터: 이러한 가르침은 „사단의 가르침“이다. 인간이 자신의 가장 깊은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것을 하게 되면, 그는 대죄(죽을 죄)만 지을 뿐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은혜를 내리게 하시기 위해 무엇을 준비한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 만약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만하게 자신을 만든다면,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더이상 은혜가 아니다. 은혜와 공적은 물과 불이라서 결코 섞일 수 없다. 진실로 인간은 암흑, 토후와보후(창1:2: 혼돈하고 공허하며)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은혜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sola fide(오직 믿음으로) 우리는 이 은혜를 무료로, 선물로 받기 때문에 „오직 믿음으로16)“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sola scriptura(오직 성경으로) 에라스무스: 성경에는 어둡고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심지어 서로 모순되는 부분도 있다. 하나님과 인간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없고, 단지 주장이나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성경과 교부들의 해석, 성경과 전통, 성경과 교황의 가르침, 성경과 철학, 성경과 건전한 이성, 이 양자가 모두 필요하다. 루터: 성경은 명료하다17)! 단지 우리의 어두워진 눈이 이것을 보지 못할 뿐이다. 성령님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주시면, 우리는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멸망에 처해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다음에 하나님의 구원을 기쁘게 받아들인다. 그리고 우리는 분명하게 신앙고백을 할 수 있다. 성령님께서는 회의하는 이성과 같은 회의론자가 아니므로 그리스도인도 확신의 사람이다. 이 모든 것은 활짝 열린 성경이 선사한다. 그러므로 오직 성경이다. 루터는 이곳에서 성경은 다른 권위에 의존해서 해석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성경에 의해서 해석되어야 한다는 성경해석학적 원칙을 내세웠다. 좀 어두운(어려운) 부분은 밝은 부분으로부터 해석이 가능하다. 성경해석에 있어서 교황이나 전통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개혁 교회는 루터가 가르친 4가지 솔라 외에 soli deo gloria(오직 하나님께 영광을)를 추가해서 5가지 솔라를 가르친다. 이것은 칼빈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역사적으로 칼빈 만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 사람은 드물다. 루터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함께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잘 드러냈고, 칼빈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잘 드러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각오로 살았다. 그의 다소 엄격한 태도는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그의 유언대로, 묘지도 초라하게 하고 비석도 세우지 않아, 장사된지 몇 달만에 그의 무덤은 아무도 찾지 못했다. 그는 법학도 시절에 교수 대신 학생을 가르칠 정도로 수재였고, 박사학위를 받은 것이 분명하지만, 자신은 이것을 한번도 밝힌 적이 없어서 아무도 정확하게 그가 박사였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는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이라는 구호를 삶으로 실천했다고 볼 수 있다] 노예의지18) 의미 규정: 루터가 말하는 자유의지는, 일반사람들이나 철학자들이 사용하는 의미와는 다르다. 그리고 결정론과도 다르다. 결정론이란, 인간의 의지가 먼저 더 높은 존재나 어떠한 법칙에 의해 이미 결정되었다는 것이다. 즉 인간의 운명이 먼저 결정되어 그 결정에 따라서, 혹은 인과법칙에 따라 인간이 인형처럼 움직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루터는, 인간이 일상적인 삶에서 자신의 삶을 자신의 의지대로 꾸며나갈 수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 그가 말하는 자유의지는 superiora(높은 것)에만 해당한다. 즉 인간의 의지로는 어쩔 수 없는 것, 다시 말해 우리의 구원의 문제에 관한 것이다. 갈림길 앞에 선 헤라클레스 비유: 그리스 철학자들은 (에라스무스도 마찬가지) 갈림길 앞에 선 헤라클레스의 예를 들어 자유의지를 설명하는데, 이것은 전제가 잘못되었다. 갈림길에서 아름다운 두 여인이 나타나 각자 자기의 길로 오라고 그를 유혹했다. 한 여인은 호화스러운 삶과 욕망을 충족시키는 미래를 약속하고, 다른 여인은 큰 고생을 통한 영원한 명성을 얻는 삶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이때의 헤라클레스 상태는, 욕망에 의해 지배당하지 않는 완전한 자유의 상태였다. 그는 아무런 욕망에 의해 이끌리지 않고, 자신이 무슨 일이든지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에 따르면, 헤라클레스와 같은 상태는 불가능하다. 인간은 물론 타락했기 때문에 불가능하기도 하지만, 타락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그가 피조물이기 때문에 불가능하다. 그의 피 한 방울도, 세포 하나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지 아니하신 것은 없다. 그러므로, 그는 본질적으로 단지 피조물로서 그에게 주어진 유한한 자유 만을 소유할 수 있을 뿐이다. 즉, 그는 하나님에게 속하므로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만 자유로울 뿐이다(물고기가 물에서만 자유로운 것처럼). 만약 누가 인간이 완전한 선택의 자유가 있다고 한다면, 그는 자신이 피조물임을 부인하는 것이다. 그래서 분명한 것은, 절대적인 의미에서의 자유라는 말은,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만 해당한다. 그러므로 „자유의지“라는 명예로운 말은, 전능, 전지, 영원성과 같이 하나님만을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전능하시다는 말은, 단지 그분이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분이 자신의 능력으로 세상의 모든 일에 활동하신다는 의미이다19). 하나님께서는 게으르신 분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 가운데서 항상 일하시고 반응을 하시는 분이시다. 악한 자들도(바로나 가야바, 유다나 빌라도, 사단까지도) 하나님의 목적을 섬겨야 한다. 인간도 낮은 영역(inferiora: 우리가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는 것들)에서 계획하고 행하는 것들도 하나님의 지속적인 활동에 의해 조정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모든 것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하나님의 자유는 우리에게 무한한 위로를 준다: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아니면,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손안에 나는 보호되어 있다. 우연이라는 말을 끔찍한 말이며, 나에게는 그러한 말은 없다20). 인간의 의지는 말(馬)과 같다: „그러므로 인간의 의지는 … 말과 같다: 하나님께서 그 위에 앉으시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인간의 의지가 움직인다. … 사단이 그 위에 앉으면, 사단이 원하는 방향으로 인간의 의지는 가고자 한다. 그리고 인간은 자신이 기사를 선택할(자신이 하나님께 가야 할 지, 아니면 사단에게 가야할 지를 결정할) 능력이 없고, 단지 기사들이 말을 소유하려고 싸울 뿐이다“ 즉 인간은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주인이 원하는대로 달린다. 앞에서 인간은 피조물로서 단지 제한된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했는데, 그는 이 자유를 하나님과의 교제 안에서만 올바로 사용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뜻에 일치할 때만 자유를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죄인은 그 특징이 „하나님 같이“(eritis sicut Deus21)) 되고자 하는 것, 즉 완전한 자유의지, 자율22)을 추구하는 데에 있다. 인간이 이러한 광적인 것을 추구한 결과 그는 타락했으며, 즉 하나님의 선한 지배권으로부터 떨어져나와 사단의 통제 속으로 들어갔다23). 그러므로 이제는 인간의 자유의지는 실제로 내용이 없는 껍데기일 뿐이며, 완전한 거짓말이요, 하나님 모독이라고까지 할 수 있다. 인간은 항상 누구의 지배권 안에 있으며 중립지역은 어디에 가도 없다. 루터는 그의 갈라디아서 주석에서도 이와 비슷한 말을 한다24): „오늘날 인간의 자유의지를 신봉하며 ‚선한 의도’를 가르치는 거짓교사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과 같다. 그들은 자신의 능력으로 „하나님 만을 사랑하는“ 그러한 ‚행동’(Akt)을 강요하며, 이것이 이루어지면 그때에 하나님의 은혜를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데, 이것은 극악무도하게 교만한 생각이다“ 이러한 루터의 답변은 에라스무스(인본주의)에게 철퇴를 휘두르는 것이었다. 에라스무스는 이 답신을 받고 매우 상처를 받았다. 또한 그의 명예는 치명상을 받았다. 루터가 인간의 무능과 죄악을 폭로함으로써, 인본주의를 공격하고 인간을 다시 피조물의 자리에 되돌렸다. 그러나 인문주의자들 중에 아무도 감히 이 작품을 비판하지 못했다. 이로써 에라스무스의 시대는 지나고 한동안 종교개혁이 유럽 무대의 주인으로 떠올랐다. 인본주의자들은 후에 주로 칼빈을 공격했다. 네덜란드에서 아르미니우스의 추종자가 된 사람들은 인본주의자들이었다. 마무리하며 1. 케틀링 박사는 루터의 노예 의지론을 루터를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노예의지론에 반대하는 자는, 종교개혁에 반대하는 자이다! 더 나아가서, 그는 복음에 반대하는 자이며, 은혜에 반대하는 자이며, 믿음에, 그리고 성경에,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에 반대하는 자이다. 2. 루터의 글은 이를 악물고 씹어야 하는 딱딱한 빵이다. 이에 이반트25)는 말하기를: 루터의 글을 읽는 독자는 자주 따라갈 수 없는 지점에 도달한다. 내 경험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반복된다: 먼저 깊이 감동하지만, 그 후에 도전을 당하고, 나중에는 혼란에 빠지고 좌절하게 된다. 그러나 끝에는 다시 극복하여 노예의지에 대한 통찰력이 생겨서 결국에는 끝없는 해방감을 맛본다. 3, 마지막으로, 노예의지론의 반대자들이 에라스무스와 함께 항상 들고 나오는 논거에 대해 간단히 언급한다: 만약 사람이 행위와 관계 없이 단지 하나님의 은혜만으로 구원을 얻는다면, 누가 믿음생활을 진지하게 힘쓰겠는가? 이에 대한 간단한 대답은, 진정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은 선행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안에 역사하시므로, 그는 완전히 변화되어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선행을 하며,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나간다. 나를 능력있게 만드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빌4:13). 즉 회심의 열매가 삶의 전 영역에 나타나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는 더이상 노예로서가 아니라, 자유인으로, 아들로서, 상속자로서 하나님의 뜻을 기쁨으로, 그리고 자발적으로 섬기는 자가 된다. III. 아르미니우스와 알미니안 주의 1) 알미니안주의 배경 칼빈은 루터의 노예의지론을 받아들이고 어거스틴의 가르침을 기반으로 예정론을 발전시켰다. 그는 원래 예정론을 자세하게 변증할 생각을 갖지 않았으나, 앞에서 설명한대로 제네바에서 예정론 문제로 말미암아 많은 공격을 당하고 시정부에 호출되어 여러번 자기 변호를 해야만 했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기독교강요의 예정론 부분이 증보되었다. 어거스틴도 펠라기우스와의 싸움에서 그의 예정론을 발전시켰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예정론이란, 우리가 우리에게 일어난 구원을 이성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인본주의적 생각에 대항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며, 따라서 예정론은 다소 변증적인 요소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 자신을 위해서는, 구원이 단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며,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세상을 다스리시며, 그분께서 나의 삶을 선한 길로 인도하시므로, 나는 모든 일에 있어서 안심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을 마음으로 찬양하며, 하루하루의 삶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나가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예정론은 불행하게도 아르미니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 또다시 도전을 받았다. 그는 에라스무스의 추종자요 인본주의자로 분류된다. 그의 영향력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향수가 커다란 세력으로 전환되었다. 그는 1612년 „Examen“을 출판하여 윌리엄 퍼킨스의 예정론을 비판하였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끝까지 발전시키지 못하고 죽었지만,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 그리고 후세의 사람들에 의해 계속 발전되어 기독교에서 확고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알미니안 주의는 1618/19 도르트 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를 받자26), 독립하여 독립교단을 세웠다. 당시 알미니안주의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인본주의자며 천재 학자인 후고 그로티우스(1583-1645)였다27). 그는 정치가요, 신학자요, 법학자였으며, 세속적 자연법에 근거한 국가법(국제법)의 기초를 놓았다. 그는 초기 계몽주의자이다. 알미니안주의는 영국으로 건너가서 챨스 1세(1625-1649)의 힘을 얻어 번창하기 시작하여 칼빈주의와 겨루게 되었다. 죤 오웬은 이미 1620에 „알미니안주의를 드러냄“을 발표하여 알미니안주의가 펠라기우스와 세미펠라기우스가 알미니안의 옷을 입고 다시 등장했다고 비판했다. 2) 알미니안 주의 알미니안주의의 중요한 포인트 몇 개만 소개한다. 완전 타락: 아르미니우스(Arminius, 1560-1609)는 종교개혁의 핵심 가르침인 완전 타락을 인정함28)으로써 자신이 종교개혁자들의 선상에 있음을 분명히 하였다. 만약 그가 이것을 부인했다면, 그는 당장에 이단으로 정죄당했을 것이다. 오늘날의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아르미니우스가 완전타락을 가르쳤다는 점을 강조하여 알미니안주의가 종교개혁의 근본 원리를 떠나지 않았음을 천명한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편법에 불과하다. 왜 그런지 계속해서 살펴보자. 선행 은혜(prevenient grace): 그러나 문제는, 아르미니우스는 계속해서 가르치기를, 하나님께서 은혜로 사람의 의지를 회복하셔서, 모든 사람이 구원으로의 부르심을 듣고 스스로 결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도록 만드셨다고 한다. 이 은혜를 선행 은혜라고 하며, 후에 웨슬리는 이 이론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이론은 완전 타락설을 우회하기 위한 방편에 불과하다. 성경은 이러한 이론을 지원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구원으로 결단할 능력을 이왕 주셨다면, 왜 좀 더 큰 능력을 주셔서 모든 사람이 구원으로 결정하고, 끝까지 구원을 받도록 하지 않으시는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완전타락을 믿지 않고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예지예정: 아르미니우스는 누가 구원으로 결단할 것인가를 미리 아시고 예정하셨다고 한다. 그러나 루터는 „노예의지론“에서 이미 예지예정이라는 말은 없다고 못박았다. IV. 칼빈주의 다섯 요점29) 이제 우리는 칼빈주의의 다섯 요점과 알미니안 주의의 주장을 성경 구절을 중심으로 살펴보아야 한다. 양쪽 모두 성경에 근거하여 주장하므로 양쪽의 주장을 면밀히 검토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확고한 의견을 가질 수 없다. 필자가 중요한 것 두 가지만 다루려고 한다. 1. 전적 부패와 자유의지 2. 조건 없는 선택과 조건적 선택 3. 제한적 속죄와 일반적 속죄 “제한적 속죄”라는 말은 일부의 칼빈주의자들까지도 흥분시키게 하는 도발적인 표현으로 들릴 수 있다.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4가지 요점 칼빈주의자들도 있을 정도이다. 필자도 이 표현을 듣고 처음에는 흥분했다. 아마도 그 이유는 우리가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돌아가셨다”는 표현에 너무 길들었다는 사실에 있을 것이다. 우리는 성경 구절을 찾아가며 생각해보자. 1) 일반적 속죄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모든 사람과 화해하셨다. 즉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위해 돌아가셨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아니라, 인간이 여기에 반응하여 구원을 받아들여야 구원을 받는다. 그러므로 객관적 사실과 주관적 결단은 구별해야 한다. 객관적 사실: 화해는 모든 사람을 위해 골고다에서 일어났다. 주관적인 것: 화해가 되었다는 이 사실을 내가 받아들여야 한다. a) 핵심 구절 요일 2:2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롬 11:15 “그들을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 고후 5:19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골 1: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b) 그 외에, 하나님의 초대와 선택, 구원의 의지뿐만 아니라, 구원의 행위까지도 모든 사람에게 유효하다는 것을 지지하는 구절: 딤전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벧후 3:9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딛 2:11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이러한 해석은 다음과 같은 문제가 있다: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인간의 죄를 지시고 그로 말미암아 피를 흘리시고 돌아가셔서 대속을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이 속죄가 효과가 없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속죄는 이론적 속죄와 실제적 속죄로 나눌 수 없다. 이론적 속죄란, 실제로 속죄가 이루어져서 죄인에게 이것을 받아들이도록 제공되었지만,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은 경우에는 속죄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처럼 된다는 것이다. ·스펄젼: 만약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돌아가셨다면, 지신의 피를 흘려서까지 구원하시고자 한 사람들이 지옥에 가게 된다면, 예수님께서 얼마나 실망하실까? ·하나님과 죄인이 화해했다는 것은, 이미 죄인이 구원을 받았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개인이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해서 구원을 받지 못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논리가 매끄럽지 못하다. 어느 선교사(?)의 고백: 나는 온 세상을 내 마음에 품고 (내가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것처럼), 나의 몸이 산산조각이 날지라고(“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정몽주의 단심가), 일초의 시간이라도 아껴서 하나님의 역사를 섬기며,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하시려는 하나님의 목자심정을 덧입고, 하나님이 부르시는 곳이라면 언제 어느 곳에도, 직장과 가족을 모두 버릴지라도 나는 가겠다 à 이러한 생각이 어디가 잘못되었는지를 생각해 볼 것. 2) 제한적 속죄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위해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단지 교회(그분의 자녀가 될 자들)를 위해서만 돌아가셨다는 구절이, 모든 사람을 위해 돌아가셨다는 구절보다 압도적으로 많다. 몇 구절만 인용하면: 마 1:21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요 10: 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사 53: 6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딛 2: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살전 1:10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선지자나 사도는 지금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들은 모든 사람을 말하고 있지 않고 있다. 3) 어려운 구절 해석 그러면 일반적 속죄를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는 구절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 요일 2:2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온 세상은 모든 나라 사람을 포함한 모든 종류의 사람을 의미한다. 당시에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사도들은 이방인도 구원의 대상이 됨을 강조했다. 유대인에게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이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그러므로 사도들이 유대인만 구원받는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모든 사람, 모든 세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고 추측된다. - 고후 5:19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모든 사람)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과 화목해서 죄를 죄로 돌리지 않는다면, 최후의 심판도 없을 것이므로, 만인구원설로 빠진다. 따라서 여기에서의 세상은, 거듭난 자들만 의미한다. - 골 1: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이 구절은 만인구원론자들이 즐겨 인용한다. 특히 칼 바르트가 이 구절을 좋아한다. 만물은 원래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을 말하지만, 이곳에서는 명백히 사람을 의미한다. 인간 외에는 십자가의 피가 의미가 없다. 여기에서도 고후 5:19와 같은 이유로 하나님의 자녀만을 이야기한다고 볼 수 있다. - 딤전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문맥을 보면, 2절에서 왕들과 집권자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하라는 말이 나온다. 따라서 “모든”이라는 말은 모든 종류의 사람을 말한다. - 고후 5:14-15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먼저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돌아가셨다고 하셨다. 그다음에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자들”, 즉 신자들임을 밝혔다. -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세상이라는 말은 하나님께 대항하는 죄인이라는 의미이다. 신자들도 하나님을 미워하는 죄인이었고, 이들도 세상에 속했는데, 하나님은 바로 이들을 사랑하셨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은 보편적인 사랑이 아니다. 사랑을 받는 자는 하나님의 신부, 혹은 자녀로 표현되며, 이 사랑은 인간이 끊을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깊은 구원자의 절대적인 사랑이다. 이 사랑이 먼저 우리를 변화시키지 않는다면, 죄인은 누구도 자신을 미워해서 하나님께 마음을 열 수 없고, 이 사랑을 체험하지 못하면 회개할 수도 없다. 인간은 구원을 받았다고 할지라고 이기적인 죄인이며, 하나님의 교회도 때가 묻어 있고 죄로 얼룩져 있다. 우리의 의지에 관계없이 하나님의 조건없는 사랑이 유지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끝까지 지킬 수 없다. 4) 정리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의 공통적인 것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단지 자기의지가 구원에 이바지하는가의 문제이다. 알미니안주의는 예지예정을 가르친다.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이미 누가 예수님을 받아들일 것인가를 아시고 그들만을 구원으로 예정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즉 하나님께서 누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다면, 성자께서 구원받을 자들만을 위해서 피를 흘리셨다고 할지라도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예지예정이라는 말은 자체로 의미가 되지 않는다. 예수님이 누구를 위해 돌아가셨는가의 문제는 단지 신학적인 탁상공론이 아니라, 우리가 전도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태도를 결정한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리스도는 당신을 위해 돌아가셨습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표현은 듣기에는 좋을지 몰라도 성경이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만약 이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교회에 들어온 사람은 일생 가짜복음을 믿고 살 수가 있다. 그는 진실된 회개를 통한 중생을 모르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는 이와는 전혀 반대되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이 당신들을 사랑하고 계십니다” 라는 소프트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라, “너희가 하나님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다”고 말함으로써,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자로 고발하고 있다. 따라서, 믿음에는 반드시 죄 고백과 회개가 선행되어야 하며(죄사함을 믿는 것이므로), 회개의 열매가 전 삶의 영역에 나타나야 한다. 구원과 믿음의 중심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인간이 구원받는 것이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는 것이 중심이다. 인본주의 신학은 인간의 결단에 구원의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므로, 자연스럽게 인간이 구원의 중심에 놓이게 된다. 현대에는 예배가 많은 경우에 하나님 중심, 말씀 선포 중심(회개와 위로)이 아니라, 인간의 감정에 호소하고, 예배의 형태와 분위기도 인간에게 맞추어져 있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다. 이러한 가짜 전도자들에 대항하여 이미 오래전에 조나단 에드워즈(1703-1758)와 스펄젼(1834-1892) 같은 사람은 일생 고단하게 싸웠다. 그들이 복음전도를 시작했을 때, 알미니안주의도 성행했다. 스펄젼의 때는 집회가 대중집회가 되어가고, 음악과 같은 것을 통해 감정에 호소하고, 자신의 삶을 예수님께 맡기라고 부추기며 결신자는 앞으로 나오라고(결심중생) 하는 등, 복음집회가 타락하고 있던 시대였다. 스펄젼은 매우 강렬하게 이들을 비판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누구를 구원으로 선택하셨는지를 모르고,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도하라고 명하셨으므로 우리는 복음을 전해야 한다. 제한적 속죄가 복음전파에 방해되지 않는 예는, 스펄젼에서 가장 잘 볼 수 있다. 그 외에도 휘트필드(1714-1770), 조나단 에드워즈와 같이 대부흥을 일으킨 자들이 있었고, 현대의 세계선교는 초기에는 주로 칼빈주의자들에 의해 이루어졌고, 초기의 한국선교사들은 대부분 칼빈주의자였다는 것을 감안할 때, 제한속죄가 선교를 방해한다고 주장할 수 없다. 4. 불가항력의 은총과 거부할 수 있는 은총 5. 성도의 견인과 은총으로부터의 타락 본 논의는, 구원을 받은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되는 자가, 큰 죄를 짓고 구원을 잃을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이다. 칼빈주의는 절대로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한다. 구원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으로 시작되었고, 그분의 전능하심으로 끝까지 이루어짐을 믿기 때문이다. 견인(Perseverance)이라는 말은 끝까지 참고 견딘다는 의미이다. 이 말이 시사하듯이, 구원은 하나님께서 끝까지 책임을 지지만, 성도는 가시밭길을 가야 하며, 이러한 고난의 길을 통하여 성도의 삶이 그리스도를 닮아간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를 어느 정도까지만 도와주시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도와주신다.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며, 아무리 부족할지라도 한번 양자로 삼은 자를 쫓아내지 않으신다. 성경은 이러한 구절로 가득차 있다. 1)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구절 - 성도는 구원을 잃지 않고 목적에 도달한다. 롬 8:28-30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à 예정 – 소명 – 칭의 – 영화(현세에서 이미 영화가 시작한다) 롬 8: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à 우리는 이미 영생과 영광을 상속으로 받았고, 또 완전한 영광을 받게 될 것이 분명하다. 이 영광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와 같은 고난을 받아야 하는데,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절대적인 도움 없이는 이 고난을 이기고 영광을 받을 수 없다. 하나님은 우리를 고난을 통하여 영광으로 이끄신다. 거듭남도 성령님의 역사요, 성도가 끝까지 인내하는 것도 성령님의 역사이다. 요 6:40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à 한 명도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예수님께서 이것을 이루고 계시는데 여기에는 실패가 있을 수 없다. - 하나님은 신자를 보호하시고 지키신다. 요 10: 28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à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을 손에 꼭 쥐시고 보호하시는데, 누가 그리스도를 이기고 우리를 빼앗겠는가? 요 17:24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à 하나님의 아들의 기도가 틀림없이 이루어지지 않겠는가? 요일 5:18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그분께서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를 지키시매 악한 자(사단)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 영생은 영원하고 확실한 것이다. 요 5:24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 6:47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요일 5:12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à 우리가 영생이 있음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 새 언약은 영원한 언약이다. 렘 32:40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는 영원한 언약을 그들에게 세우고 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 나를 떠나지 않게 하고” à 구약의 언약은 조건적 언약이다. 즉 이스라엘이 율법을 지키면 하나님께서 그들 곁에 계시고,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면 하나님도 그들을 떠나신다. 그러나 신약의 언약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 언약을 지키도록 하셔서 우리를 끝까지 구원하시는 영원한 언약이다.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 마음을 인도하신다. 히 13:20 “양들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à 새언약, 즉 피의 언약은 능력이 있으므로 우리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원히 살게 하신다. - 성령께서 일단 신자에게 주어지면 영원히 떠나지 않으신다. 요 14:16-17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à 성령께서 신자 안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신다. 요일 2:27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 성화는 성공적으로 이루어진다. 고전 1:8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 빌 1:6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살전 5:23-24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살후 2:13-14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에 관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 이를 위하여 우리의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à 개혁신학에서 성화가 얼마나 중요한가는 더이상 강조할 필요도 없다. 신자는 성령님으로부터 다시 태어나므로 거룩하며, 이 거룩함이 생각과 전 삶의 영역에 미쳐서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에 온전한 사람으로 나타나는 것이 신앙생활의 목적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타락한 복음주의는 결코 이 목적을 이룰 수가 없다. 이들은 거듭남을 심리적 체험(기쁨과 심경의 변화)으로, 혹은 신비한 체험(출처를 알 수 없는 이상한 세력, 즉 이상한 방언과 심령술, 치료, 쓰러지는 현상 등), 혹은 정복운동(과도한 선교운동, 타종교 핍박 등)으로 대체했기 때문이다. 거듭난 자는 거룩함을 갈망한다. 이것은 거룩함이 그들의 새로운 신분이며, 거룩한 성령께서 그 안에 계시며 그를 거룩하게 만드시기 때문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이 일을 직접 하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맡기신다면, 어느 누구도 성화가 된 삶을 살 수가 없고, 전부 타락해서 구원을 잃을 것이다. 우리는 비록 거듭났을지라도, 정욕은 끊임없이 우리를 부추기기 때문이다. - 신자에게는 더이상 정죄가 없다. 즉 그리스도와 완전히 갈라지지 않는다. 롬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롬 8:33-39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신자가 죄를 짓는다고 할지라도, 그는 정죄를 받아 심판대에 서지 않는다. 따라서 죄를 지은 신자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도 이것으로 말미암아 약해지지 않는다. 이것은 신자가 누릴 수 있는 최대의 특권이다. 따라서 신자가 타락하여 하나님을 떠날 수 있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렵다. [이 말씀은 신자가 죄를 지어도 좋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 6:2).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요일 5:18). 신자는 죄를 짓지 않으려고 진지하게 노력한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죄를 점점 떠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가 죄를 지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죄로 말미암아 심판하지 않으신다는 의미이다. 물론 그 죄는 신자가 회개를 해야한다. 단지 죄가 사해지는 것 뿐이지 죄가 죄로 여겨지지 않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영생이 확실하다는 것을 약속하는 구절이 많은 것으로 보아서, 신자가 영생의 확신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구원의 확신이 없다면, 신자가 어떻게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고 십자가의 길을 갈 수가 있겠는가? 2) 히브리서 6장과 10장 a) 알미니안주의적 해석의 축이 되는 두 구절 - 히브리서의 이 두 장은 구원은 잃어버릴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이 말씀을 근거로 신자가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앞에서 구원의 확실함을 증명하기 위해 예로 든 구절을 모두 재해석해야 한다. 그리고 적어도 다음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어떠한 죄를 지어야 구원을 잃는지를 분명히 규정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를 보호하시겠다고 하셨는데, 왜 보호하실 수 없는지를 설명해야 한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그분께서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를 지키시매 악한 자(사단)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요일 5:18) ·영생이 왜 영원하지 않은지? ·…… - 알미니안주의는 히 6:4-6과 히 10:26-29을 축으로 하여, 다른 말씀을 해석하는데, 예를 들면 요 10:29 말씀(“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에서 „아무도“를 „0(아무도) – 1(자신)“로 해석한다. 즉 „아무도“를 외부의 사람(사단)이라고 보며, 사단은 우리를 결코 하나님의 손에서 빼낼 수 없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자신은 언제든지 하나님을 떠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영원히 멸망하지 않을“ 영생을 영원한 생명이 아니라고 해석한다. 롬 8:27-29에서도 아무것도 나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나, 나는 끊을 수 있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적어도 다음의 두 가지의 오류를 포함한다: 1.주경학적인 오류: 이 말씀은 아버지께서 모든 것보다 크시기 때문에 아무도 그분의 것을 뺏지 못하신다고 한다. 즉 나의 구원이 확실한 것은 나를 지키시는 하나님보다 큰 자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손을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보다 크다는 의미이다. 2.신학적 오류: 인간은 늘 사단의 영향을 받는다. 갈림길 앞에 선 헤라클레스와 같이 모든 유혹에서 제외된 완전한 자유의지를 가진 사람은 없다. 타락한 인간은 100% 자신의 주인이 아니다. 따라서 사단이 나에게 영향을 주어서 내가 하나님의 손에서 빠져나왔으면, 사단이 나를 하나님으로부터 빼낸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사단보다 크지 않으시다는 결론이 나온다. 아무튼 알미니안적 해석은 많은 무리가 따른다. 두 구절을 중심으로해서 많은 다른 구절을 매끄럽게 해석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칼빈주의가 옳다면, 이 두 단락에서 등장하는 타락한 사람이 가짜 신자라는 것을 석의학적으로 증명해야 한다. 바로 이어지는 과에서 이 문제를 다룬다. b) 히 6:4-6과 10:26-29에 나오는 신자는 진짜 신자인가 가짜 신자인가? 칼빈주의자들은 구원을 잃어버린 이들을 가짜 신자라고 하고,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이들을 진짜 신자라고 한다. 우선 본문을 소개하면: 히 6:4-6 4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히 10:26-29 26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27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28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으로 말미암아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29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가 당연히 받을 형벌은 얼마나 더 무겁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가짜신자(명목상의 신자)란 어떤 사람인가? 신약에서 가짜신자, 혹은 일시적 신자에 대해 언급하는 구절이 많이 있다. - 가라지: 밀밭의 가라지 비유(마13:24-30). 교회에는 가라지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참 신자를 고려하셔서(그들이 다치지 않게 하려고) 그들을 바로 뽑아내지 아니하신다. 그러나 심판 때에 그들을 무섭게 벌하신다. - 빨리 성장하는 가짜 신자: 씨뿌리는 자의 비유(마 13:3이하)에서 가짜 신자라고 할지라도 어느 정도는 성장한다. 참 신자보다 처음에는 빨리 성장하고(5: 곧 싹이 나옴) 활력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20: 말씀을 기쁨으로 받음) - 적그리스도인 장로, 목사들: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그들이 우리(교회)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요일 2:18-19). 적그리스도는 교회에서 나온다. 그들은 큰 능력과 술수로 교인들을 미혹하는 사람들이므로, 능력 있는 목사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실제로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속하지 않는다. - 능력 있는 교회 지도자들: 교회에 특별히 강력하고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많다. 실제로 그들의 믿음이 하늘을 찌를 정도로 강한 신뢰를 보이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진짜 신자는, 큰 능력은 없고 비록 부족할지라도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다. ·능력 있는 카리스마티커들(마 7:21-23):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à 능력 있는 목사지만 불법을 행하는 자! ·믿음을 가지고 교회로 오는 자들(요 2:23-2):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예수님을 믿게 된 유대인들(요 8: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그러나 이들은 예수님의 권고를 듣자 예수님을 공격하였으며, 예수님은 그들을 사단의 자식들이라고 하신다. 따라서 믿음을 갖되 끝까지 의심을 이기고 견디어야 한다. ·특히 히브리서에서는 자주 끝까지 견디는 자만 신자라고 한다(히 3:14):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 우리는 신앙생활을 아무리 잘 하는것으로 보일지라도 교인 중에는 가짜 신자도 많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히브리서 4장과 10장에 등장하는 신자들이 어째서 가짜 신자인가? 13:5절은 이러한 생각을 강력하게 변호한다: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은 한국어 번역에도 강조되었지만, 그리스어에서는 두 문장을 부정하는 데에 부정사가 5개나 사용됨으로써 매우 강조되었다: οὐ μή σε ἀνῶ οὐδ᾽ οὐ μή σε ἐγκαταλίπω 따라서 “절대로” 버리지 않고 떠나지 않겠다는 약속의 말씀으로 해석할 수 있다. NIV, KJV에는 부정사 “never”를 사용하였다. 그러므로 히브리서도 다른 성경과 같이 하나님께서 그분의 자녀를 절대로 떠나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히브리서 기자는 환난을 당한 신자들에게 끝까지 견디라고 격려하면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놓지 않으신다는 것을 가르침으로써 신자들을 크게 위로하고 있다. 그리고 11장에서 믿음의 모범을 보인 무수한 선조들을 열거하면서, 그들도 이미 우리와 같은 길을 걸어갔음을 증거하고 있다. 12장에서는 다시 믿음의 싸움을 끝까지 싸우라고 권고한다. 그렇다면, 6, 10장은 가짜신자에게 하는 말씀이 아니라 참 신자에게 주는 경고의 메시지이다. 그들이 결코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을 것은 분명하지만, 이들이 예수님을 부인한 결과는 영원히 돌이킬 수 없음을 알고 있으면, 그들은 더욱 정신을 차리고, 목숨을 걸고 고백을 지킬 각오를 하게 된다. 또한 이 말씀은 교회가 가짜와 진짜를 분별하는 분명한 기준이 된다. 우상에게 절을 한 것이 절대로 사함을 받을 길이 없다는 것을 아는 교회는, 핍박이 지난 후에 변절자를 추려낼 분명한 근거를 가진다. 한국교회는 일본강점기에 공식적으로 신사참배를 결의했고, 교회는 해방 후에도 이것을 참회하지 않았고, 아직까지 이들은 한국교회의 정통 교회로 자처하고 있다. 더구나 이들은 해방 후에 신사참배 거부로 말미암아 감옥생활을 한 출옥 성도들의 회개의 요청을 듣지 않고 이들을 오히려 소외 내지는 출교시켰다. 이들은 별도로 고신 교단을 만들었다. 그러나 순교자와 고백자의 이름으로 세워진 고신 교단은 다시 기득권이 되어 몇 년 전에 이와 비슷한 일을 자행하였다. 고신 신대원의 최덕성 교수가 “한국교회 친일파 전통”을 출판하여 한국교회의 변절을 파헤쳤으나, 그는 오히려 동료들의 질시를 받아, 교수들이 그에게 죄를 씌워서 감옥살이를 하게 하고30), 이로 말미암아 최교수는 교수직 박탈과 함께, 교회에서도 징계를 당했다. 이러한 교단은 진리를 멀리함으로써 스스로 변절되었음을 증명한 셈이므로, 이미 하나님의 교회를 대표하는 교단이 아니다. 한국교회에서는 가라지가 뽑히는 것이 아니라, 참 신자가 가라지에 의해 뽑힌다. 이것은 신사참배를 한 공식적인 교회가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출옥 성도를 쫓아낸 것과 고신교단이 최덕성 교수를 징계한 것에서 잘 나타난다. 참 신자는 갈 곳을 못 찾아 헤매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수많은 매국노와 예수님을 부인하고 신사참배를 한 자들이, 영웅으로서 그리고 믿음의 본보기로서 역사에 기록되어 있었고 동상이 건립되어 있었다. 그들이 지은 찬송가가 우리의 찬송가에도 들어있었다. 따라서 우리는 모두 신사참배자들로부터 복음을 듣고 배운 것이므로 한국 신자의 피 속에는 모두 변절자들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깨닫고 모두 진지하게 회개를 해야 한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참신자가 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우리 주위에는 참신자의 모범이 너무 적은 것도 문제이다. 그러나 순교자의 피는 결코 헛되지 않으므로, 비록 소수이지만 한국교회를 지켜나가는 사람들이 비록 보이지는 않을지라도 도처에 있을 것이다. c) 히 6:4-6의 주경학적 검토 그러면 우리는 본문에 등장하는 타락한 사람들이 왜 명목적 신자를 말하는 것인지를 주경학적으로 밝혀야 한다. 만약 그들이 중생한 신자라면 몇 가지의 구원의 은덕을 체험했어야 한다: 중생 – 회개 – 신앙 – 칭의 – 양자됨 – 성화(성령의 열매). 우리는 그가 체험한 것이 성경에서 가르치는 구원의 은덕과 일치하는지를 밝히면 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러한 체험은 물론 거듭난 자들도 공통적으로 갖는 것이지만, 그러한 체험만으로는 거듭난 자의 특성이 나타났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 체험신학의 문제가 드러난다. - 비췸을 얻다. 이곳에서 사용된 동사 포티조라는 말은 신약에서 11번 사용되는데, 이 말은 “믿게 되다”, 혹은 “회개하다”라는 말로 사용된 적이 없다. 비췸을 받는 것은 일반적으로 “어느 종교에 귀화하는” 동기가 된다. 스님이 되더라도 먼저 불교의 가르침의 비췸을 받아야 할 것이다. 즉, 그 종교의 핵심을 파악한다든가, 아니면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말을 기독교에 적용하면, “복음을 듣고 이해하게 되었다” 정도로 해석할 수 있겠다. 따라서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자신의 죄를 진정으로 회개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단지 교인이 되어서 열심히 종교생활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을 뿐이다. 성경에서 사용된 예: 눅 11:36 “등불의 빛이 너를 비출 때와 같이 온전히 밝으리라” 요 1: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빛을 주지만, 비췸을 받았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신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엡 1:18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사도 바울은 이미 믿음에 들어 있는 에베소 성도들이 마음의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더욱 잘 깨닫기를 소원한다. 따라서 이 말은 믿음이나 회개를 나타내는 전문용어가 아니다. - 하늘의 은사와,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다. 맛을 보았다는 것은 분명한 체험을 의미한다. 그는 복음의 말씀이 주는 여러 가지 초자연적인 은총을 누렸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것은 중생되지 않은 자들도 체험하는 것이다. 이 말씀은, 신비한 체험이나 중생의 감정을 강조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 ·하늘의 은사를 맛보다: 성령의 은사를 말하는 것 같다. 거듭나지 않고도 성령의 초자연적인 은사를 받을진대(병고침, 축귀), 교인이 비록 중생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교회에 내려주시는 성령님의 은사를 맛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선한 말씀을 맛보다: 성경에는 사람이 말씀을 듣고 기뻐하고 감격했으나 진정한 회개가 없고 열매가 없다는 보도가 많이 있다.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말씀을 듣고 기뻐하여 싹이 트고 자라기까지 하지만,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과 같다. ·내세의 능력을 맛보다: 성령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말하는 것 같다. 즉 기적을 체험하고 악령이 쫓기는 것을 체험한 것이다. 이러한 것을 통해서 그들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내세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깨닫게 되었다. - 성령에 참예한 바 되다. 메토코스(형용사, 명사)는 “몫을 가진”이라는 의미에서 “참여한”, 혹은 “동지”라는 의미이다. 히 3: 14에서 끝까지 견디는 신자는 그리스도의 동지라고 한다: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 성령의 동지라는 말은 의미가 되지 않으므로, 성령님과 관계를 맺었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특히,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사람이, 인간이 되신 그리스도의 동지가 아니라 성령과 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이것은 그 사람이 성령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은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능력(특별한 은사)을 받았거나, 아니면 인격적인 감화를 받았다고 할지라도, 성령님과 인격적인 관계가 형성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사람이 위인의 말과 행동을 듣고 감화를 받은 것에 비유할 수 있다. 따라서 교인이 하나님 말씀을 듣고 감화되고 기뻐하고, 성령님의 감동 감화를 받아 열심히 교회를 섬긴다고 해서 이것이 참신자의 표징이 되는 것이 아니다. 교인은 거듭나지 않았을지라도 자연적으로 교회에서 성령의 은사에 첨여하게 된다. - 회개하다. 지금까지 열거된 은사 및 성품들은 불신자들도 가질 수 있는 것임을 확인했다. 이러한 것에는 중생, 회개, 신앙, 양자됨, 성화(성령의 열매) 등이 구체적으로 나타나지 않았다. 구원의 은덕의 그림자 정도가 나타난 것으로서는 구원을 받았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런데 이 명목상의 신자가 6절에서 회개를 했다고 한다. 회개는 분명히 구원의 은덕 중의 하나이다. 그렇다면 그는 중생한 신자가 아닌가? 그러면 중생한 신자도 타락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회개라는 말도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된다. 인간적인 회심도 있으며,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회개도 있다. 이것은 영생으로 통하는 회심과는 다르다. 예를 들면: ·에서의 회개: 에서는 눈물을 흘리고 후회했지만 진정한 회개는 아니다(히 12:7) ·유다의 회개: 마 27:3 ·사울 왕의 회개: 삼상 15:24-25 이러한 회개는 지식적으로, 또한 마음에서 진심으로 일어날 수도 있지만, 자신의 삶을 바꿀 수 있는 정도로 일어나지 않는다. 하나님 앞에서의 회개란 자신의 삶을 온통 부인하고 미워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성령님의 전권적인 역사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렇게 행한 회개는 반드시 성화의 열매로 나타난다. 정리하면, 히 6:4-6에 등장하는 사람은 성령님의 인침을 받고 거듭난 자가 아니라, 교회에 출석하여, 은혜를 많이 받고 열심히 교회에 봉사하여, 겉보기에는 중생한 자와 같은 사람이다. 문제는 이들의 선행과 섬김이 믿음의 열매가 아니라는 점이다. 중생하지 않은 사람도 얼마든지 선행을 할 수 있다. 믿음의 열매는 결정적으로 고난과 박해 때에 나타난다. 이들은 교회 생활을 하면서 은사를 받고 교회를 섬기지만, 고난과 박해의 순간에 인내를 보이지 못하고 변절할 자들이다. 이것이 7,8절의 내용으로서, 이들은 은혜의 비는 받았지만 열매를 맺지 못하고 가시와 엉컹귀를 낸다. 우리는 믿음 생활에서 고난과 박해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실감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열매 맺는 기회를 주시는 것이다. 이때 타협을 하게 된다면, 우리는 엉컹귀를 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히 6:4-6은 어차피 멸망할 가짜 신자에게 주는 메시지가 아니라, 바로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연단을 감사함으로 받아야 한다. d) 구원의 확신 성경은 우리가 구원의 확신을 가지라고 가르친다(요일 5:12 “…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그렇다면 우리는 자신에게서 구원을 받았다는 확실한 증거를 보아야 한다. 무엇이 구원의 증거가 되는지를 살펴본다. i. 구원을 받았다는 증거가 될 수 없는 것 히 6:4-6의 분석에서, 중생한 신자는 아닐지라도 명목상의 신자도 가질 수 있는 여러 가지 표시를 살펴보았다. - 영적인 축복을 받은자(히 6:4-5): 하나님 말씀을 즐거워하고, 성령의 은사를 맛보고, 기적과 같은 것을 체험하여 내세가 있다는 것도 알게되고, 심지어 자신도 기적을 행할 수 있다. - 회개한 자(히 6:6): 회개를 한 표시가 어느 정도는 드러났다. - 예수님의 이름으로 큰 일을 한 자(마 7:21-23): 큰 기적을 행한 자. 오늘날의 대형교회 목사들, 유명한 부흥사도 여기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 주여, 주여 하는자(마 7:21): 이들은 진지하게 주님의 이름을 부르므로, 타인은 물론 자신도 구원을 받았는지를 잘 알 수 없다. ii. 구원을 받았다는 증거가 되는 것 - 진실한 회개 죄인은 성령님의 비췸이 없이는 회개의 의미를 깨닫지도 못하며, 회개할 수도 없다. 회개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깊이 깨닫는 것인데, 이것은 도덕적인 죄가 아니라 모든 인간의 본질적인 죄이다. 자신이 하나님께 반항하고 있다는 것, 하나님을 증오하는 것,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보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는 것(“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 행 2:36)을 진심으로 뉘우치는 것이다. 회개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러한 죄에 대해 고소를 당해서 찔림을 받아야 한다(“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물러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행 2:37”). 이렇게 해서 예수님을 믿게 된 자들은, 일생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고 살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고 그들은 반드시 열매로 그 증거를 나타낸다. - 회개의 열매 ·마 7:16-20: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갈 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러한 열매는 자신이 덕을 갈고 닦아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께서 변화된 나의 인격을 통해 표출되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그리스도를 나의 삶의 중심으로 모시고 살 때 나타난다. - 하나님의 계명과 말씀을 지킨다 ·신자들은 계명을 자신을 속박하는 것으로 여기지 않고, 기쁨으로 지킨다. ·요 14: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요 14:21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 하나님 말씀에 순종한다 ·마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요일 2: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 예수님이 주가 되심을 고백한다 ·롬 10: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입으로 시인한다는 것은 모든 사람 앞에서 고백한다는 것이고, 그리스도가 주가 되심이 자신의 삶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의미한다. - 세상을 미워하는 것 ·요일 2:2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 이웃사랑 ·요일 3:17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à 궁핍한 형제를 도와 줌. 이 외에도 무수히 많이 있다. 중요한 점은, 중생한 자는 하나님 말씀을 사랑하여 자주 말씀을 들으면서 자신이 어떤 점에서 성화가 되지 않았는지를 살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셔서 거룩한 삶으로 이끄신다는 것을 항상 유념하여, 말씀을 올바로 실천하여 구원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 기억력이 아무리 좋은 사람도 계명을 잊고 사는 경우가 많이 있으므로, 우리는 자주 말씀을 읽고 묵상하여 말씀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 구원을 받지 못한 이단에 속한 사람일수록 구원의 확신이 강하므로, 자신의 구원을 때때로 의심해보는 것도 구원의 기초를 더욱 분명히 하기 위해, 그리고 성화를 위해서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구원의 중요성을 생각하며, 구원을 의심하는 자세로 자신을 살펴보는 것이, 잘못된 구원의 확신으로 자신을 살피지 않고 멸망을 당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교회의 중요한 임무중의 하나는, 하나님의 계명을 잘 풀어서 현실에 적용시켜주는 것이다. 사람을 말씀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사람은 문화권에 따라서, 혹은 자라온 환경에 따라 아무리 율법을 잘 설명해주어도 올바로 적용을 못하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사람들은 열매가 없다. 교회는 그들에게 구체적으로 말씀에 대한 복종을 가르쳐주어야 한다. 딤후 4: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교회에서 항상 말씀을 가르치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엘렝쇼: 죄를 확신시키다) 경계하며(에피티마오: 꾸짖다, rebuke) 권하라(파라칼레오)“ V. 알미니안주의와 복음주의 참고서적: 목창균: „현대 복음주의“. 황금부엉이. 2005. 목창균 교수는 서울신학대학의 총장을 역임함. 그는 알미니안주의자로서 복음주의에 대해 가장 많이 연구한 사람으로 보인다. 그는 복음주의의 폐해를 지적하며 건전한 복음주의를 위해 진지하게 노력하고 있다. 필자는 그의 다수의 논문 및 출판물을 인용하고 있다. 그는 성서영감설을 지지하는 건전한 복음주의자로 보인다. 필자는 그의 노력과 학문적 성실함을 높이 사면서도, 개혁주의 입장에서 그가 정확하게 분류하지 않은 몇 가지 점을 수정한다. 따옴표를 하고 인용한 곳을 밝히지 않은 것은 그의 „현대 복음주의“에서 인용한 것이다. 김홍만: „개혁신앙으로 돌아가라“ 옛적길. 2004. „영적 바이러스를 치료하라“ 솔로몬. 2009. 김홍만 교수는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의 역사신학 교수이며, 한국 청교도 연구소 소장이다. 그는 한국 교회가 청교도로부터 많이 배워야 할 것을 역설한다. 필자는 그의 저서와 논문을 참조하였다. 그는 복음주의를 비판하는데, 이는 복음주의가 종교개혁의 원리를 너무 떠났기 때문이다. 1. 복음주의란 무엇인가? 먼저 목창균 교수의 복음주의 정의를 들어본다: „복음주의는 획일성을 지닌 하나의 실체라기보다는 다양성을 지닌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복음주의는 어느 한 교파나 신학 노선에 국한하지 않고, 초교파적인 것이 특징이다. 그것은 루터주의와 칼뱅주의와 알미니안주의, … 근본주의자와 …개혁파 신학자, 그리고 오순절주의자와 신정통주의자들을 포괄하기에 충분한 큰 개념이다“ „복음주의는 성서의 메시지로부터 유래한 신학체계인 동시에, 기독교에서 일어난 독특한 운동, 즉 경건하고 헌신적인 신앙 풍토다. 그것은 항상 신앙운동과 일시적으로 제휴하며 형성되었다. 종교개혁운동, 경건주의운동, 청교도운동, 대각성운동, 부흥운동, 근본주의운동, 성결운동, 은사운동 등이 그것이다. 따라서 학자들은 신학의 역사를 통해 복음주의를 기술하고 있다“ „종교개혁의 중심 주제들은 복음주의운동의 근원과 근간이 되었다. 종교개혁의 표어, 오직 성경, 오직 은총, 오직 믿음의 원리가 복음주의적 정체성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종교개혁은 복음주의의 초점과 표준이다“ 목창균 교수는 복음주의에 대해 비판을 아끼지 않으면서도 복음주의를 상당히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필자는 현재의 복음주의가 종교개혁신학에서 멀어졌다는 사실을 밝히려고 한다. 아래 근본주의, 신정통주의, 복음주의에 대한 설명은 주로 목창균의 책에서 인용했다. 1) 근본주의 „근본주의는 자유주의의 도전으로부터 성서적이고 전통적인 기독교 신앙을 보존하기 위하여 20세기 초 미국에서 일어난 운동이다. 그것은 특정 집단을 가리키는 명칭이라기보다 광범위한 지성적, 종교적 흐름을 나타내는 명칭이다. 또한 현대주의에 대항하여 성서적 기독교를 보존하려 했던 다양한 그룹의 연합체이다31)“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근본주의가 1910년대. 즉 ‚근본적인 것들’이 출판되던 기간(1910-1915)에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 이전에는 복음주의자와 근본주의자…가 구분되지 않았다. 근본주의는 일반적으로 극우파 보수주의를 의미한다… ‚근본적인 것들’은 유럽과 미국의 신학자들이 공동 작업으로 총 12권이 출판되었다“ 소위 근본주의 5대 강령은 여기에서 유래한다. “샌딘에 따르면, 근본주의의 근원은 세대주의와 프린스턴 신학이다. ‚근본주의는 19세기의 서로 연합될 수 없는 두 신학의 조류, 즉 세대주의와 프린스턴신학(개혁주의)이 1918년까지 공동의 적인 현대주의와 싸우려고 공동전선을 펴기 위하여 형성한 일종의 연합운동이다’ 세대주의적 천년왕국자들은 프린스턴신학으로부터 성경무오 교리를 받아들였다“ 근본주의는 „한때 모든 그리스도인이 공유했던 신학을 부분적으로 그리고 평신도의 관점에서 되살려낸 것“32)이다. 근본주의의 5대 강령33)은: 1.성경무오 2.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3.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 4.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 5.그리스도의 육체적 재림 근본주의의 신학적 구조를 제공한 것은 구 프린스턴의 정통개혁주의 신학이었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근본주의 5대 강령은 정통 개혁주의 신학의 톡특성(인간의 전적 타락)이 반영된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이 공유한 가장 기본적인 기독교 진리를 나타낸 것이며, 이것은 성경무오설이 그 바탕을 이루고 있다. 성경무오설은(유기적 영감설과 완전 영감), 찰스 핫지와 벤자민 워필드로 이어지는 그 프린스턴 신학이 성경과 과학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고 있을 때, 발전시킨 교리이다. 목창균 교수도 지적하듯이, 세대주의는 개혁신학의 가르침과 반대되는 것이다. 개혁신학과 세대주의는 함께할 수 없다. 세대주의는 천년왕국설을 지지하지만, 개혁주의는 무천년설을 가르친다. 그러므로 실제로 오늘날까지 개혁주의 신학교에서 공부한 개혁주의 목사들의 많은 숫자가 천년왕국설을 지지한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미국 북장로교회 총회는 1910년 근본주의자들의 영향에 의해 5개조 교리를 기독교의 본질적 신앙으로 선언했으며, 이것은 1916년, 1923년 총회에서 재확인되었다. 그러나 근본주의자와 자유주의자는 포스딕 사건을 통해 첨예하게 대립되었다“ 포스딕(Fosdick)은 침례교 출신의 자유주의 신학자요 저명한 설교자로서 1922년 6월 „근본주의자들이 승리할 것인가“라는 설교로써 자유주의자 측의 반격을 주도하였다. 한편 1923년의 총화 직후인 1924년에 자유주의자들의 주도로 어번선언(The Auburn Affirmation)이라는 문서가 150명의 서명과 함께 출판되었다. 이것은 성경무오의 교리를 „매우 해로운 교리“라고 선언하는 등, 총회가 선언한 5개조 교리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논쟁이 계속되었으며, 장로교가 분열되기 시작하였다. 근본주의 운동은 1920년대 절정을 이룬 후 급격히 약화되었는데, 가장 큰 원인은 현대주의자와의 논쟁에서 패배한 것이다. 1925년 근본주의자와 진화론자의 대립으로 일어난 원숭이 재판은 근본주의의 대중적 기반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다. 테네시 주의 한 고등학교 교사인 스콥스가 주의 법령을 무시하고 진화론을 가르친 사실이 고발당해 재판을 받았다. 비록 스콥스가 유죄판결을 받았으나, 재판과정에서 근본주의를 변호한 변호사의 현대과학에 대한 무지가 폭로되어, 일반대중으로부터 근본주의자들은 무식하다는 불신을 받게 되었다. 또한 개혁주의 요람인 프린스턴 신학교가 자유주의로 변질되면서 메이천 교수가 밀려났다. 그는 그 후에 웨스트민스터신학교를 설립하였다. 1936년에는 자유화하는 북장로교에 대항하여 정통주의 장로교(OPC)를 설립했다. 근본주의가 약화된 또 하나의 큰 이유는 신복음주의가 전투적 성향을 가진 근본주의로부터 분리되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1941년 전국복음주의자협회(NAE)를 만들었다. „밥 존스 대학의 설립자인 밥 존스가 전투적 근본주의자들을 대변한다“ „근본주의는 본래 보수적인 종교운동으로 시작되었으나 점차 문화 사회 정치 분야까지 확대되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근본주의는 극단적인 정치적 보수주의와 손을 잡았다. 근본주의자들은 종교 문제뿐만 아니라 사회 및 정치 문제에도 보수적이었기 때문에, 이들의 연합이 가능했다. 1970-80년대에 급속히 성장한 근본주의는 팔웰(Jerry Falwell)의 주도로 정치적 행동 그룹인 도덕적 다수(The Moral Majority)를 창설하여 정치인을 위한 선거운동에 깊이 관여했다“ „근본주의는 현대주의와 자유주의에 맞서 초자연주의를 옹호하며 기독교 신앙의 본질적인 요소를 성실히 보존하는 데 성공했다. 반면, 지성적인 면에서는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켰다. 근본주의는 학문을 불신하고, 합리적 추론의 가치를 인식하지 못했다. 신앙을 이성에 반대적인 것, 또는 합리적 분석이나 비판적 평가에 의해 도달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했다. 이것은 신앙에 대한 추론을 거부하는 비교화주의가 일어나게 했다“ 2) 신정통주의 „신정통주의는 바르트를 비롯한 일단의 젊은 학자들이 자유주의 신학의 한계를 발견하고, 신학적 전환을 통해 전개한 새로운 신학운동이다. … 신정통주의는 자유주의 신학에 의해 변두리로 밀려났던 하나님의 계시와 그리스도의 복음을 개신교신학의 중심부로 원상 복귀시켰으며, 성서적 기독교, 성경에 토대를 둔 개신교 정통주의의 부흥을 이룩했다. 한편, … 신정통주의는 자유주의 신학과 철저히 단절하기보다 오히려 그것을 수정하고 각색했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신정통주의는 역사비평(성서비평)을 적극적으로 도용하지 않았으나(학자에 따라 정도가 다름), 그 방법을 인정함으로써 비록 문화적 자유주의(문화적 개신교)를 비판했다고 해서 정통주의가 되는 것이 아니다. „계시를 신학의 근본 토대로 삼았으나, 성경을 계시나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시하지 않았다. 따라서 근본주의자들은 신정통주의를 신현대주의, 또는 껍데기는 정통주의인데 알맹이는 자유주의라든가, 위장된 정통주의라고 비판하기도 한다34)“ 신정통주의는 성경과 하나님 말씀을 구분하고, 성경을 하나님 말씀에 대한 증언으로 설명한다. 즉 성경은 계시가 아니라 계시에 대한 증언이다. 내가 성경의 증언을 하나님 말씀으로 받아들일 때, 그것은 나에게 하나님 말씀이 된다고 가르친다. 이들은 말씀에 대한 영감보다 성경 저자에 대한 영감을 강조하였으나, 저자는 비록 하나님 말씀의 증인이지만, 인간은 불완전하므로, 증인으로서도 오류를 범할 수 있다고 한다: 인간이 저술한 어떤 문서가 무오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무오한 것이다. 3) 복음주의 „현대 복음주의는 1940년대에 해롤드 오켄가, 칼 헨리. 빌리 그레이엄 등 근본주의 내에서 성장한 젊은 지도자들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한때 신복음주의로 불리기도 했다. 신복음주의자들은 개신교 정통교리를 유지하면서도, 학문 연구에 가치를 부여하고 사회 문제에 적극적 관심을 가졌던 온건한 근본주의자들이다. 신복음주의의 출현과 더불어 서구에 복음주의의 새로운 부흥이 일어났다. 근본주의와 복음주의의 차이는 신학보다는 양태에 있었다. 양자 모두 프로테스탄트 정통주의 신학관점, 즉 성서의 영감과 절대 권위에 대한 확신, 그리스도의 유일성, 체험적 신앙, 세계 선교 등에 대한 강조를 공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교리적 관심을 추구하는 방법에서 복음주의자는 보다 지적이고 개방적이었다. 근본주의는 이 세상으로부터의 분리를 강조한 반면, 복음주의는 이 세상과의 대화를 강조했다35)“ „흔히 신복음주의의 선언서로 불리는 ‚현대 근본주의의 불편한 양심’에서 칼 헨리는 근본주의의 사회에 대한 무관심을 지적하고, ,불편한 양심,은 근본주의의 성서적 진리가 아니며 그것을 현대의 중요한 문제들에 효과적으로 적용하지 못한 것이라고 했다. 근본주의는 독특한 사회적 비전을 지닌 기독교적 세계관을 제시하지 못하고, 기독교 복음의 한 측면만 강조했다. 따라서 그것은 지나치게 내세 지향적이고 반지성적이어서 교육받은 대중들의 흥미를 끌지 못했다“ 이러한 비판은 „파괴적인 것이 아닌, 건설적인 비판이었다. 그것은 근본주의에서 성장한 학자들이 근본주의 운동이 본래의 진로로부터 벗어났다고 평가하고, 그 방향을 재설정하려는 시도였다. 해롤드 오켄가, 칼 헨리, 에드워드 카넬 등을 중심으로 명문대학에서 학위를 취득한 젊은 학자들이 근본주의의 분리주의를 거부하고 주류 교회 내에 복음주의 신학의 활력을 회복시키는 운동을 전개했다. 그들은 종교개혁 주류의 입장을 회복하면서 세상을 긍정하고 문화를 포용하는 복음주의적 비전을 가지고 있었다“ „근본주의자와 복음주의자가 갈라지게 된 결정적인 사건은 1957년 빌리 그레이엄의 뉴욕 집회였다. 그레이엄은 그 집회를 위해 뉴욕교회 협의회의 후원을 받았다. 그것은 많은 근본주의자들에게 큰 충격이었다. 칼 헨리, 오켄가 등의 지도자들이 그레이엄과 제휴했다. 그들은 극단적 근본주의자들로부터 자신들을 구분하기 위해 신복음적 또는 복음주의적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근본주의자들은 현대 사회의 변화에 적응하기보다 의도적으로 그것으로 고립되었다. 반면, 신복음주의는 복음의 원상태를 보존하면서 세상을 긍정하고 문화를 포용하는 복음주의적 비전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현대 문화를 분석, 비판하는 동시에 문화적 참여를 강조한다“ 4) 진보적 복음주의 출현 „신 복음주의는 복음주의 지성의 르네상스를 이룩하고, 복음주의 서적 출판을 활성화했다. 신 복음주의의 중요한 업적은 현대 후기의 급진 신학에 굴복하지 않고 근본주의적 극단성의 늪으로부터 복음주의 교회와 신학을 구출하는데 크게 공헌한 것이다. 이들이 복음주의 지성을 주도하고 있으나, 신 복음주의 역시 보수적 복음주의와 진보적 복음주의로 분열되었다. 보수적 복음주의자들은 전통신학과 현대 사상의 경계선에서 조심스럽게 활동하고 있다“ „근본주의는 이 세상으로부터의 분리를 강조하는 반면, 복음주의는 이 세상과 신학적 대화를 하려고 한다“ 보수적 복음주의자들은 성경의 무오를 신봉하고, 진보적 복음주의자들은, 성경이 그 중심 주제인 구원에 대해 말할 때는 무오하나, 과학이나 역사상의 문제, 혹은 연대나 지리적인 문제 등과 같은 주변 문제들에 있어서는 오류가 있다고 주장한다. 성경무류를 비판하는 진보적 복음주의자: ·클라크 핀녹: 대담하게 성서비평을 수용함. ·다니엘 풀러: 풀러신학교에서 일어난 성경무오에 관한 논쟁에 도화선이 된 인물. 그가 지적한 오류의 예는 겨자씨 비유(마 13:31-32)에서 예수님이 겨자씨가 세상에서 가장 작은 씨라 한 것이 잘못이라는 것이다36). ·잭 로저스와 도널드 맥킴: 성경의 전적 무오는 역사적 정통주의의 입장이 아니며, 성경은 구원의 메시지에서 그리고 인간의 구원에 필요한 것들에서 무오하다는 것이 종교개혁자들의 입장이며, 전적 무오의 개념은 최근에 제시된 학설이라고 주장했다. „신복음주의의 분열은 신복음주의의 요람이자 신학센터인 풀러신학교에서 처음으로 드러났다…1960년대에 이르러 일부 교수들이 제한적 무오설을 수용하자 교수단에 균열이 생기게 되었다. 이것이 결정적으로 표출된 것은 1962년 12월 1일 소위 암흑의 토요일(Black Saturday)이었다“ 학교 설립자의 아들로 학장에 선출된 다니엘 풀러가 그날 전적 무오설을 포기하고 제한적 무오설을 받아들이는 발언을 한 것이었다. 1977년 ‚성경 무오에 관한 국제협의회’(International Council on Biblical Inerrancy)가 조직되었다. 그것은 성경에 관한 역사적 정통적 입장을 옹호하려는 보수주의 학자들의 모임이었다. 협의회는 시카고 무오 성명(1978)과 시카고 성경해석학 성명(1982)을 발표했다37). 반면, 1981년 풀러신학교와 토론토의 기독교연구소의 후원으로 개최된 ‚성경 권위에 대한 토론토 대회’(the Toronto Conference on Biblical Authority)는 불오주의자들의 제한된 무오개념을 대변했다. 1990년대 이후 진보적 복음주의자들이 복음주의의 중심 세력으로 등장하고 있다. 최근 활발한 저술 활동을 하는 복음주의 학자들은 대부분 이 그룹에 속한다. 따라서 이들이 21세기 복음주의 신학계를 주도할 것이라고 보아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38). 풀러신학교도 이미 오래전에 진보 복음주의자들의 손에 넘어갔다. 위튼대학, 골든-콘웰신학교도 여기에 속한다. 이들은 조심스럽게 성서비평학(고등비평)을 지지한다. 영국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1991년 발행된 하워드 마샬이 주로 영국 복음주의 학자들의 논문을 편집한 „New Testament Interpretation“에서 대부분의 학자들이 성서비평학을 지지하고 있다. 보수적 복음주의자로 분류되는 인물: 오켄가, 칼 헨리, 빌리 그레이엄, 케네스 칸저, 해롤드 린젤, 칼슨(D. A. Carson), 웰스(David Wells), 마크 놀 등. 학교는: 웨스트민스터, 댈러스, 트리니티… 진보적 복음주의자: 에드웨드 카넬, 토머스 오든, 조지 래드, 버나드 램, 도널드 블로쉬, 클라크 핀녹(Clark Pinnock), 스탠리 그렌츠 학교는: 컨콜디아, 노스 파크, 베델, 고든 콘웰, 애즈베리… 2. 개혁주의 개혁주의는 마틴 루터가 회복한 기독교의 근본 가르침을 바탕으로 세운 신학이며, 이것은 쯔빙글리도 근본적으로는 공유하는 것이며, 또한 부쩌, 칼빈 등으로 이어진다. 이 신학은 17세기에 주로 칼빈의 영향을 받아 체계화되었으며, 주로 네덜란드에서 오랫동안 개혁주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었다. 미국에서는 프린스턴 신학교가 개혁주의 전통을 이어오다가 학교가 좌경화되자 메이천과 같은 몇 명의 동료들이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세워서 개혁주의를 유지해갔다. 앞에서 근본주의 운동 태동에 개혁주의자들이 함께했다는 것은 이미 언급했다. 즉 (구)프린스턴 신학교에서 근본주의 5대 강령(성경 영감설 지지)을 제시한 것이다. 그러나 개혁주의는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예정론)한다는 점, 그리고 무천년설을 지지한다는 점에서 근본주의와는 다르다. 워필드. 메이천, 반 틸과 같은 사람은 근본주의로 분류하는 학자도 있으나(메이천과 반 틸은 자신이 근본주의자라고 생각함), 이들은 성경영감설을 지킨다는 의미에서 근본주의자였으며, 정통개혁주의로 돌아간다는 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개혁주의자(칼빈주의자)로 분류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겠다. 이들은 특히 자유주의자들과 맞서서 격렬하게 싸웠으므로, 혹자에게는 근본주의자로 보일 수 있다. 이들은 근본주의자들 이상으로 자유주의자들과 심혈을 기울여 싸웠다. 메이천은 사회 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았으며, 총회가 금주법을 제정할 때, 성경에 분명히 나타나지 않는 것을 교인에게 강요한다면 그것은 개인의 자유를 제한할 뿐 아니라 교회가 성경보다 더 큰 권위를 갖는 과오를 범하는 것이라고 반대하였다. 이러한 것들도 메이천이 근본주의와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개혁주의는 복음주의라는 큰 흐름 속에 들어 있다. 그러나 복음주의는 비복음적인 것을 너무나 많이 포용했으므로, 개혁주의가 복음주의 안에 더이상 머물러 있을 수 없다. 이들과 함께 자유주의와 싸우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문제는 복음주의의 영향을 받아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많은 교회, 교인이 개혁주의의 정체성을 포기한다는 것이다. 즉 복음주의는 계속 알미니안주의로 나아가고 개혁주의 교회도 그쪽을 따라간다. 그러므로 많은 개혁주의 교회가 이미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개혁교회가 아니다. 이러한 시점에서 우리는 개혁교회가 무엇인지를 한번 뒤돌아보고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개혁주의로 돌아가야 한다. 1) 개혁주의가 함께 할 수 없는 것: 알미니안주의 세대주의/ 천년설 오순절주의 보편주의(지옥은 영원하지 않거나 혹은 없다): 빌리 그래함, 존 스토트. 성서비평/ 종교다원주의/ 에큐메니칼운동 율법주의/ 도덕률폐기론자(무율법주의)/ 상황윤리 문화적 종교/ 반문화적인 풍조 내적치유/ 상담 부흥주의/ 교회성장운동(풀러 신학교)/ 신사도운동(풀러신학교) 빈야드운동/ 윌로 크릭/ 이머징 교회/ 구도자를 위한 예배 관상기도(lectio divina) 복지복음/ CCM/ 실용주의 정권과 결탁39)/ 정치에 무관심 위에 열거한 문제에 대해서는, 앞에서 소개한 김홍만 교수의 두 책에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그처럼 복음주의를 신랄하게 비난한 사람은 없을 것 같다. 그에게 동의하던 않든 간에 그의 책을 일독하기를 권하며, 각자 나름대로 의견을 세우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몇 군데 인용하면: „오늘날 소위 복음주의라는 이름 아래, 교회들이 신학과 실천에 있어 배교의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그 단적인 증거로 들 수 있는 것이 교회들이 하나님의 주권 대신 여러 가지 프로그램이나 방법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교회에 은혜의 수단으로 주신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 및 성례를 무시하고, 우선 당장 숫자적인 성장 효과를 가져다주는 방법과 프로그램에 의존하고 있다. 다시 말해 성령의 역사에 의지하고, 인내하며 기다리기보다는 당장 외적 효과와 결과를 가져다주는 방법들을 선호하는 것이다. 또한 새로운 방법의 출현을 기다리고 있으며, 교회성장을 위해서는 어떠한 방법과 수단도 합리화되고 있는 형편이다. 이러한 실정으로 교회의 예언자적 기능을 대중성으로 대체되고, 목회자는 대중적 인기를 얻는 연예인과 같은 모습을 지니게 되었다40)“ 김홍만은 복음주의가 특히 알미니안주의화되고 있음을 역설했다: „20세기 복음주의는 개혁주의 신학으로부터 떠나 찰스 피니가 갔던 길을 따라갔다. 이러한 복음주의 노선 때문에, 알미니안 신학을 근거로 하는 교회와 교단들이 대거 복음주의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미국의 경우, 남침례교의 대부분이 알미니안주의자들로서 복음주의에 속해 있으며, 알미니안 신학에 근거를 두고 있는 오순절 계통의 거의 모든 교회가 복음주의 교회에 속해 있다. 이 두 그룹은 미국 교회에서 크게 숫자적으로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교회이다. 그러다 보니 찰스 피니의 신학으로 출발한 복음주의가 더욱 알미니안 신학으로 기울어지게 되었다. 한국도 마찬가지이다. … 장로교단 중 많은 교단들이 개혁주의 신학을 포기하고 복음주의 신학으로 기울고 있다…. 결국 장로교회는 복음주의 이름 아래에서 장로교회 신학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인본주의 신학인 알미니안주의자들이 되어가는 것이다. … 큰 (개혁주의) 신학교의 교수들이 개혁주의라는 단어보다는 복음주의라는 단어를 선호하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과거 유물로 취급하려는 모습들을 들 수 있다“ 미국 북장로회가 1903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34장과 35장을 첨가하여 사용하고 있다. 그 이후에 다른 여러 장로회와 한국의 고신측에서도 이 수정된 고백서를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표면적으로는 개혁교회를 주장하는 장로교가 완전하게 알미니안주의화 된 것을 보여준다. 문제되는 구절을 살펴보면: ·34장의 3항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The Holy Spirit, whom the Father is ever willing to give to all who ask him…성령받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주신다는 내용이다. ·35장 1항: …이 구원은 복음 안에서 모든 사람에게 자유로이 제공되었다. 35장은 대체로 이러한 내용이다. ·선언문의 마지막에는 유아 시에 죽은 모든 아기는 구원받는다라고 되어 있다. 그들이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에 의해 거듭나고 구원을 받는다고 한다(We believe that all dying in infancy are included in the election of grace, and are regenerated and saved by Christ through the Spirit, who works when and where and how he pleases.). 이것은 신학적으로 전혀 의미가 되지 않는다. 이것은 단지, 모든 사람이 결국에 가서는 구원을 받는다는 신학적인 근거를 제공하기 위해 삽입한 것 같다. 그렇다면 이것은 속임수이다! 이러한 일은 스캔들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특징 중의 하나는 알미니안주의를 배격하는 신앙고백서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고백서의 말미에 알미나안주의로 돌아가는 조항을 넣는다는 것은, 고백서 전체를 부정하는 것과 다름없다. 그들은 웨스트민스터 고백서를 버리고 나름대로 새로운 고백서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명목상으로만 개혁주의를 표방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이것은 위선이다. 또한 김홍만은 일부 복음주의자 지도자들이 모든 사람이 결국 구원을 받으리라는 보편주의 쪽으로 흘러감을 지적한다: 빌리 그래함41), 리로이 가렛(Leroy Garrett)은 „복음을 들을 기회가 없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정죄하지 않으시며, 불신자들도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클락 피녹은 „지옥의 교리는 잔인한 것“이라고 말하며, 존 스토트(John Stott)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자들은 지옥이란 곳에 가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멸절될 것“이라는 멸절설을 주장하였다. 2) 한국의 개혁주의와 장래 한국의 개혁주의는 초기의 선교사들에 의해 세대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목창균 교수도 지적하듯이, 세대주의는 개혁신학의 가르침과 반대되는 것이다. 개혁신학과 세대주의는 함께 할 수 없다. 세대주의는 천년왕국설을 지지하지만, 개혁주의는 무천년설을 가르친다. 성경해석학에 있어서도 큰 차이가 있다. 한국은 불행하게도 전천년주의 영향을 받은 선교사들이 많이 들어왔고(이들이 세대주의자들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신학 교수도 했기 때문에, 대부분 목사들이 전천년주의자가 되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박형룡 박사까지도 이들에 의해 전천년주의자가 되었기 때문에, 그가 프린스턴 대학의 핫지, 워필드, 메이천과 같은 개혁신학의 거장들에 의해 배웠지만, 그는 먼저 유학 이전에 선교사들로부터 배운 전천년설을 고집하였다42). 따라서 개혁신학이 한국에는 약간 변질되어서 소개되어 그 영향이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다고 본다. 정통개혁신학은 박형룡, 김치선, 최태선, 박윤선과 같은 분들에 의해 한국에 조금씩 소개되다가 1980년 말경부터 주로 국외 유학하고 돌아온 교수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했다 (무천년설이 처음으로 소개됨). 필자가 아는 범위 내에서 이들을 소개하면: 김성봉, 이승구, 김영규, 변종길, 조병수, 김재성, 최덕성, 김향주, 류호준, 송제근, 김성수, 이광호, 김광채, 김홍만, 젊은 학자로는 소깜뻔 출신의 김재윤. 이 외에도 필자가 모르는 개혁주의 학자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필자는 한국에 있을 때에는 전천년주의자였다. 독일에 유학 와서 무천년주의라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 깜짝 놀랐다. 그것은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필자는 예정론에 있어서도 분명한 의견이 없었다. 사람은 자기가 자라온 환경의 영향을 받기 마련이므로, 우리는 선배들이 우리에게 전해준 것이 진리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또한 한국 교회는 잘못된 복음주의43)가 기승을 부려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잘못된 복음을 믿고 있는 사람들이 무수하게 많을 것이다. 한국교회는 점차로 극단적 알미니안 주의로 나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루터와 칼빈의 저서를 통해 새롭게 개혁신학을 배워나가야 한다. 그래야만 한국 교회가 진정으로 개혁되어 장래가 있다고 생각한다. 3) 경건주의와 청교도 정통이 활력을 잃자 여기에 활력을 불어넣는 운동이 경건주의이다. 신학적으로는 칭의의 바탕 위에 중생을 강조한 것이다. 즉, 올바른 정통신앙(교리)과 실제적인 경건, 산 믿음을 강조했다. 이는 정통의 약점, 즉 교리만 붙잡다가 실제적 그리스도인의 삶을 잃어버리는 약점을 보완한 것이다. 그러나 차차로 교리와 경건의 균형을 잃고, 교리에 소홀한 자들이 나타났다. 경건주의가 교리를 떠날 때 많은 문제를 일으킨다. 올바른 경건주의는 루터와 칼빈과 같은 종교개혁자들의 근본정신을 되살렸다고 볼 수 있다. 종교개혁자들은 열광주의자와 인문주의자와 싸우면서, „오직 믿음“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가르침이 후에 체계화되면서 철학이 신학에 들어오고, 교파 간에 신학적 체계가 점점 벌어지자 서로 심각한 갈등을 초래했다. 그리고 신앙생활을 생동감을 잃어 갔다. 이러한 현상을 죽은 정통이라고 한다. 이것은 루터의 „오직 믿음“의 의미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 결과이다. 루터와 칼빈은 이론과 경건을 겸비한 인물이다. 그들에게는 교리와 경건이 결코 분리되지 않았다. 따라서, 후세의 경건주의자들이 메말라버린 교회에서 올바른 교리 위에서 믿음의 실천을 위해 애를 쓴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영국의 청교도들도 칼빈을 이어받은 경건주의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믿음의 실천을 위해 매우 애를 쓴 자들이다. 청교도는 정통의 교리를 실천에 옮긴자들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타락한 청교도들도 있다. 가르침과 실천의 균형을 잃은 곳에서는 항상 문제가 따른다. 그렇다면, 웨슬리의 부흥운동, 피니와 무디의 부흥운동, 더 나아가서 20세기의 복음주의 운동을 전부 경건주의 운동으로 볼 것인가44)? 지금까지 우리가 고찰한 바에 의하면, 우리는 여기에 동의할 수 없다. 웨슬리에게는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이 많이 있으므로 제외한다고 할지라도, 나머지 운동은 전통적인 경건주의와는 다르다. 새로운 운동에는 분명히 하나님의 주권 교리, 칭의 신학, 성경적인 중생, 율법과 복음과의 긴장이 결여되어 있다. 복음주의는 오히려 타락한 경건주의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필자의 좁은 소견으로는 경건주의의 최대의 강점과 약점은 중생을 강조한 것인데, 중생이 칭의에 발판을 둘 때는 이것은 경건주의의 최대의 강점이 된다. 그러나 중생에 지나치게 강조점을 둔 나머지 교리적인 발판을 떠나면, 종교적 비췸을 중생으로 착각하는 오류를 범한다. 인간은 성경을 떠나서도 얼마든지 종교적 비췸을 얻어, 겉보기에는 (자신도 속는다) 성령님을 통한 진정한 중생과 구분할 수 없다. 복음주의는 중생을 엄밀하게 신학적으로 규정하지 않으므로, 종교적 감정을 중생으로 착각할 수 있으므로 가짜 신자가 양산될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개혁정통주의와 경건주의가 겸비된 청교도 운동이며, 청교도 운동은 건전한 정통을 떠나서는 안 되며, 정통은 다시 루터와 칼빈으로 돌아가야 한다. 정통은 많은 논쟁을 통해 체계화되었으므로 여기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신이 들어가 있다. 학문의 성격상, 성경이 가르치지 않는 것까지도 언급해야 한다면, 우리는 매우 주의를 기울여야 하며, 그들의 근원인 칼빈, 그리고 루터 쪽으로 재조정해야 하며, 또한 루터와 칼빈은 성경 말씀을 통해 재조정되어야 한다. 어떠한 체계도 위험을 내포하고 있으므로, 개혁주의는 근본(성경)을 향해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주권 신앙이 나의 삶을 지배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가르침은 오히려 해롭다고까지 할 수 있다. 1) 혹은 하나님 중심적(theocetric)이라고도 한다. 2) 정통개혁신학자들은 이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다. 이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하나님의 경륜 속에 포함시킨다. 필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는 것은 루터신학 때문이다. 필자는 개혁신학이 루터의 근본정신을 이어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예정론을 설명함에 있어서도 루터의 노예의지론을 출발점으로 삼았으며, 전체적으로 루터 신학의 관점에서 개혁주의를 살펴보았다. 17세기 개혁신학을 개혁신학의 중심으로 보는 사람들에게는, 본고가 약간 불편할 수도 있다. 3) 루터가 제일 먼저 사용함. 개혁신학의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4) „개혁주의 전통의 정신“ 125쪽. 유진 오스터헤이븐, 최덕성 옮김. 본문과 현장사이. 5) „이것은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그의 삶 전 영역에서의 권리를 인정하여 드리는 것이다“ 개혁신학에의 한 탐구. 96쪽. 이승구. 웨스트민스터출판부. 이글은 워필드의 „The Theology of Calvin“에서 인용된 것임. 6) „예정론에서 개혁신학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개혁신학이 어쩔 수 없이 말해야만 하는 논리적 결국(logical consequences)의 하나인 것이다“ 상계서 95쪽. 7) 필자가 말하는 개혁주의는, 17세기의 정통개혁주의가 아니라, 루터와 칼빈에 둔 종교개혁에서 그 뿌리를 찾는다. 즉 종교개혁자들의 가르침에 의해 수정된 생명력있는 개혁주의를 말하며, 이것은 물론 정통개혁주의의 범위 내에 있다. 8) 필자는 독일 개혁주의 신학교에서 이것을 접했을 때, 처음에는 거부감을 가졌으나, 오랜 연구 끝에 이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각자 성경지식을 총동원하여 잘 연구해보기 바란다. 9) 칼빈주의의 오대 교리라고 주로 번역을 하지만, 이것은 칼빈주의를 지나치게 축소하는 것이므로 필자가 칼빈주의의 다섯 요점으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칼빈주의를 잘 나타내고 있다는 것만은 사실이다. 10) Armin Sierszyn, 2000 Jahre Kirchengeschichte, Band 3 S 106. 11) 그의 심오한 통찰력이 엿보인다. 하나님이 주시는 의를 구하기 위해 초인적인 노력을 하고, 몇 년동안 강의를 위해 시편과 로마서를 집중적으로 연구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이 말은 인류의 문화를 뒤엎는 악한 소리로 들린다. 왜냐하면, 인류는 그간 많은 성인을 배출했는데, 루터는 이들을 모두 가증한 위선라로 보았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 간디, 마더 테레사도 모두 이러한 부류에 속한다. 우리는 루터를 통해 인간을 보는 관점을 새롭게 해야 한다. 12) „할 수 있는 것을 해라“(facere quod in se est)는 당시 스콜라의 가르침으로서, 인간이 먼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하면, 그때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다고 한다. 13) „적당한 공로“라고 번역할 수 있다. 14) 이러한 에라스무스의 주장은 모든 알미니안주의가 공유하는 것이므로 잘 알아둘 것. 예를 들어 자유의지는 1%, 하나님의 은혜는 99%가 협력해서 우리의 구원을 이룬다는 생각. plurimum은 multum(많음)의 최상급이다. 15) 인문주의는 일차적으로 고전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다(ad fontes). 학자들은 고전(성경 포함)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했다. 따라서 그들은 성경이 가장 좋고, 그리스도도 꼭 필요한 것이지만, 다른 책들도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즉, 오직 그리스도, 오직 성경이 아니었다. 이것은 오늘날 복음주의가 그리스도와 성경 외에 심리학, 사회학, 상담학을 받아들이는 것과 유사하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 점차로 복음주의를 떠나서 개혁주의로 돌아와야 한다. 16) „믿음은 선물로 받는 것“이라는 사실은 특히 한국사람이 뼈속 깊이 새겨야 하는 것이다. „믿음을 가져라, 믿음을 키워라, 믿어라, 믿음으로 …을 해라“라는 말은 가증한 것이다. 17) 성경의 명료성은 종교개혁 뿐만 아니라 개혁신학의 중요한 가르침이 되었다. 이것은 또한 성경해석학의 중요한 원칙이다. 18) 루터는 이 논문에서 노예의지, 혹은 자유의지의 문제에 대한 거의 모든 궁금증을 풀어준다. 매우 중요한 작품이므로 독일어로된 해설집이 많다. 필자는 Siegfried Kettling박사의 해설집을 참조하였다. 19) „machtvoll alles in allem wirkt“ 20) 위의 것(중생과 같은 것)은 하나님의 결정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지만, 아래 것(오늘 점심은 스파게티를 먹겠다)은 인간의 자유로운 결정에 의해 일어난다. 그러나 아래 것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의해 지배를 받는다. 이 말은 우리의 행위 모든 것이 하나님이 결정하신 대로 움직인다는 말이 아니다. 21) „너희는 하나님 같이 되리라“ 낙원에서 뱀의 유혹적인 말. 이 말을 괴테가 그의 작품 파우스트에서 사용한다. 즉, 메피스토펠레스가 파우스트를 유혹하기 위해 이 말을 사용한다. 포이어바하의 철학에 와서는 인간이 하나님이 되었다. 22) Autonomie, Selbst-herr-lichkeit. 23) 사단의 통제를 벗어나는 길은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길 밖에는 없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마음에 자리잡은 사단의 지배를 끊고 그를 하나님 지배 영역으로 데리고 오셔야 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중생은 하나님의 역사이며, 인간은 사단의 지배하에 있으므로 중생을 원할 수도 없다. 여기에 예정론의 출발점이 있다. 그러나 루터는 예정론을 체계화시키지 않았다. 이 문제에서 더이상 나가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24) 1519년판 2:16a 주석 25) 유명한 루터 학자. 루터 전집 Weimarer Ausgabe를 만드는데 공헌을 함. 26) 알미니안주의가 역사적으로 이단 판정을 받았다고 해서 오늘날 우리는 그들을 이단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들도 교리상으로는 „오직 예수“를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들이 단지 „인간에게 일어난 구원을 잘못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독일 복음주의 경우는 대부분 알미니안 주의자들이지만, 대체로 온건한 편이다. 그러나 우리는 알미니안주의의 폐해에 대해서는 침묵해서는 안 된다. 이들은 교회가 인본주의화 되는 것에 일조하기 때문이다. 27) 그는 11살에 라이덴 대학에 입학하여 16세에 변호사 자격증을 획득했음. 28) „In this [fallen] state, the free will of man towards the true good is not only wounded, infirm, bent, and weakened; but it is also imprisoned, destroyed, and lost. And its powers are not only debilitated and useless unless they be assisted by grace, but it has no powers whatever except such as are excited by Divine grace." Arminius, James The Writings of James Arminius (three vols.), tr. James Nichols and William R. Bagnall (Grand Rapids: Baker, 1956), I:252 (비키페디아에서 인용함) 29) 이 단락은 Martin Bucer Seminar 교수 Thomas Kinker의 Kursbuch(강의 자료)를 많이 참조했다. 30) 최덕성 교수의 징계는 다른 문제에 연루한 것이었는데, 그는 교단으로부터 동료 교수 이성구의 박사학위 논문에 성서비평학적인 요소가 있는지를 검토하라는 부탁을 받고, 검토한 결과 그것이 성서비평학적이라고 보고한 것이 화근이 되었다. 이성구 교수는 제명되었으나, 그를 동조하는 신대원 교수들이 이성구를 중심으로해서 최덕성에게 누명을 씌워 이는 실형을 선고받아 옥살이를 했다. 고신 교단은 교단의 정통성을 위해 싸운 교수를 정치적인 이유로 버렸다는 비겁함과 변절의 죄를 벋지 못한다. 31) 목창균, 현대 복음주의 268쪽 32) Niegel M. de S. Cameron „The Challenge of Evangelical Theology“. 상계서 268쪽 33) 근본주의 5대 강령은 그리스도의 재림 대신에 „초자연적 이적 행사“, 혹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포함시키기도 한다. 34) 칼 바르트의 신정통주의를 가장 신랄하게 비판한 사람은 반 틸(Van Til)이다. 그는 신정통주의가 역사비평을 수용하면서도 정통과 유사하기 때문에 자유주의보다 더 위험하다고 보았으며, 신정통주의를 이단시하였다. 35) 목창균 274쪽. 36) 이에 대한 대답은, 예수님께서 그의 청중들이 파종하는(혹은 이들이 당시에 알고 있던) 씨앗 중에서 가장 작은 씨라는 의미에서 말씀하는 것이다. 37) 독일어권에서는 스위스 제네바의 STH 학장 사무엘 퀼링이 대표로 참가했다. 독일어권에서는 대부분의 복음주의 신학교가 시카고 무오선언을 받아들인다. 이곳에 참가한, 우리에게 잘 알려진 학자로는, Gleason Archer, James Voice, Norman Geisler, Harold Lindsell(대표). John MacArthur Jr., Josh McDowell, Warwick Montgomery, James Packer, R.C. Sproul, John Walvoord. 이렇게 중요한 대회에 한국인의 이름이 없는 것이 좀 이상하다. 38) 목창균의 논문. 39) 부쉬 대통령과 결탁하여 이락 침공을 지원한 미국의 일부 복음주의는 역사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 이를 계기로, 독일 복음주의는 메스컴을 통해 많은 핍박을 받았다. 그 이전에는 독일에서 많은 교회가 (온건한) 근본주의자로 자칭했다. 그러나 언론에서 미국 복음주의자들을 근본주의자들로 간주하고 이들을 이슬람 근본주의자(테러리스트)와 같이 취급했다. 그 이후로 대다수 독일 근본주의자들이 자신을 복음주의자로 명칭을 바꾸었으며, 이제는 소수의 근본주의자들이 핍박을 받고 있다. 복음주의자로 넘어간 자들은, 계속해서 에큐메니칼 운동으로, 성서비평수용으로 발전한다. 이러한 미국 복음주의자들의 실수는 많은 한국 교회가 이명박 대통령 후보를 공식적으로 지원한 것과 같다. 이로써 한국교회는 스스로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했다. 40) „개혁신앙으로 돌아가라“15쪽 41) 빌리 그래함의 보편주의적 발언은 유튜브에서도 볼 수 있다. 42) 박형룡 박사 저작의 방대한 조직신학은 그(전천년왕국설) 외에는 훌륭한 것으로 평가된다. 어쨋든 그분은 한국에 신학을 도입, 정착한 분으로써 마땅히 존경을 받아야 하며, 또한 많은 선교사들이 비록 개혁주의를 벗어나 전천년설을 가르쳤지만 그들의 공로가 과소평가되어서는 안 된다. 43) 물론 올바른 복음주의도 있다. 44) 김홍만의 „영적 바이러스를 경계하라“를 참조할 것. http://cafe.daum.net/reformedvillage/Gij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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