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다원주의 시대에서의 기독교신앙 - 문화 및 신학주제 학술심포지움 주제강연 - 발표:슬렌츠카 박사/ 독일 에어랑엔대학 교수 번역:김광채 박사/ 개혁신학원 교수 이 글은 숭실대학교 개교 100주년기념으로 한국기독교문화연구소에서 “21세기의 기독교와 타종교"란 주제로 주최한 문화 및 신학주제 학술심포지움에서 슬렌츠카 박사가 발표한 주제 강연문을 전재한 것이다.(편집자주) “21세기의 기독교와 타종교"라는 이번 국제학술심포지엄의 주제와, 나에게 주어진 “21세기 다원주의 시대에서의 기독교신앙“이라는 제목은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문제를 정확히 파악하고, 그 범위를 분명히 설정한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인 것도 사실이다. 이것은 무엇보다 지역적 차이를 고려할 때 그렇다. 나의 출신지역인 유럽은 내가 처음 와 보는 아시아와는 상당히 많이 다르리라 생각된다. 유럽은 약 2000년에 가까운 기독교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와 비교할 때 복음선교를 통해 형성된 아시아 여러 나라들의 교회는 역사가 짧다. 그래서 자주 "신성교회“라는 명칭이 사용된다. 하지만 유럽 여러 나라들의 교회도 복음선교를 통해 형성되었다는 사실이 잊혀지기가 쉽다. 즉 사도 바울이 2차 선교여행 때 아시아의 드로아에서 마게도냐의 네압볼리와 빌립보로 건너가(행 16:9이하) 유럽 대륙 최초의 교회를 세운 때로부터 유럽의 교회사는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모든 교회는 선교를 통해 형성되었고, 또 항상 선교를 위한 사명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올바른 성경적 관점에서 볼 때 선교란 부활하신 주님께서 다음과 같은 명령을 하시면서 제자들을 모든 민족에게 보내심이다 :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이 명령 전후에는 부활하신 주님의 다음과 같은 약속이 기록되어 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18~20). 이러한 약속과 이러한 명령 때문에 공간적 거리와 차이는 극복되고 하늘과 땅을 통치하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권세 아래 포괄되는 것이다. 우리가 올바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역사적 조건에 의해 제약을 받으시면서 시간 아래 계시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시간 위에 계시는데 그것은 그가 공간과 시간의 주인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고 한 히브리서 13장 8절 말씀은 옳다. 똑같은 것을 우리는 요한계시록에 나타나는 주님의 자기소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계1:8, 4:8)나는 이제부터 몇 가지 문제에 대해 기초적인 개념설명을 함으로써 우리의 광범위한 주제를 살펴보고자 한다. 1. 기독교신앙이란 무엇인가 신앙을 바라보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신학적인 방법으로 기독교신앙이 나의 신앙이라는 전제하에서 기독교신앙의 근원과 내용과 열매에 관해 살펴보는 방법이다. 둘째는 현상학적 방법으로 기독교신앙이 인간사회에서 일어나는 종교적 현상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보는 방법이다. 이 두 가지 방법은 서로 분리될 수 없으나 서로 혼합되어 서도 안될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신앙을 이 두 가지 측면에서 차례로 설명해 보고자 한다. a)신앙의 의미에 대한 신학적 고찰 먼저 두 가지 인용문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인용문은 아돌프 슐라이터(1852~1938)의 『신약에서의 신앙』(1882)이라는 책에 수록된 것으로 이 책은 여러 차례 중판(重版)과 재판(再版)이 거듭되었다. 슐라이터는 이렇게 썼다. "그러므로 신앙의 형성과정은 결코 심리학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으며, 심리학적으로는 정상적 과정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사도들의 관심은 오직 신앙의 대상이 되는 자가 누구인지를 모든 사람들에게 선포하는 것, 그를 왜 믿는지를 밝히 말하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사도들은 그리스도가 선포될 때 사람의 영혼 속에 신앙이 어떤 과정을 거쳐 형성되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신앙에 대해 신앙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믿음이 무엇인지를 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신앙행위에 대해 심리학적 분석을 아무리 많이 한다 하더라도 믿음을 가질 수 없다. 동시에 우리의 삶을 변화시켜 주는 과정은 우리의 고찰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느낌도 드는데 그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꿰뚫어 본다는 것, 무엇보다 우리 자신의 형성과정을 살펴본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신앙의 형성이라 하는 것은 우리의 성령 안에 계시는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에게 임재하신다는 사실, 그리고 말씀을 듣는 자들의 마음이 하나님께 열려져 있다는 사실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은 말씀이 어떤 능력을 발휘하는지를 조용히 지켜보기만 하면 되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듣는 자들에게 ‘믿음의 문'(행 14:27)을 열어 주실 때 말씀은 능력을 발휘한다. 둘째 인용문은 스위스 사람 요한 카스파 라바터(1741- 1801)의 책 『자기 자신을 관찰하는 자의 일기』에 수록된 것이다. 라바터의 1772년 12월 23일의 일기에 이런 글이 있다. “귀하신 나의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말할 수 없이 단순한 것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믿음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단 한 가지 이유, 곧 믿음을 믿음 이상의 것으로 오해하는 것 때문이다." 이 두 가지 인용문 속에는 신구약성경에 일치되어 나타나는 사실이 표현되어 있다. 그것은 곧 신앙이란 하나님의 행하심이며 성령의 은사라는 사실이다. 신앙은 증거될 수 있고 신앙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 하지만 신앙이 인간에 의해 만들어질 수는 없다. 여기에 또 하나 첨부해야 할 것은 신앙은 신실한 것이라는 의미에서, 인간의 신실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속성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신앙이 있는 곳에는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 있으며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삶,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삶,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사는 삶 속에서 하나님께 대한 찬송과 기도가 있는 것이다. 클라우스 베스터만은 그의 이사야서 40장부터 55장까지의 주석에서 이 사실을 매우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다. “제2 이사야의 찬양에는 신약에서 믿음이 위치할 곳에, 구약에는 하나님께 대한 찬양이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이 명확히 드러난다.… 하나님의 구원이 아직 전혀 나타나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환성이 터져 나오고 있다(히 11:1). 그러므로 신구약성경에 나타난 신앙의 개념이라는 말을 하는 것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신앙이 개념이라면 현실과는 완전히 거리가 먼 것이 될 것이다. 신앙은 개념이 아니라 우리를 붙잡고 있는 현실이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 1절에 나오는 신앙에 대한 고전적 정의(定義)는 다음과 같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증거"이다. 이것은 보지 못하는 것 내지는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확인시키는 것 또는 확신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지적해야 할 것은 성경이 증거하는 믿음의 반대는 지식이 아니라, 다른(혹은 이상한) 믿음, 곧 두려움이요, 의심이라는 사실이다. 이에 대한 가장 좋은 예는 마태복음 14:22~23에 나오는 물 속으로 가라앉는 베드로에 관한 이야기이다. 베드로는 주님에게 다음과 같이 부탁한 다음 배에서 내렸다. "주여 만일 주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마 14:28). 그가 물 위를 걸을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의 말씀을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조금 있다가 주님에 비해 더 강한 것처럼 보이는 자연의 힘을 바라보았다.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마14:30~31)". 믿음의 반대로써 또 중요한 것은 바라봄인 바 이것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있을 세상의 종말과 하나님 보좌 앞에서 의 영생으로 들어가는 초입에 우리에게 주어질 것으로 약속이 되어진다.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또 팔복말씀 중 여섯 번째 말씀인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 우리가 취급하는 주제와 관련하여 믿음을 올바로 이해함에 있어 중요한 또 하나의 사실은 이것이다. 로마서 14장과 고린도전서 8장에서는 이방인들이 우상의 제물로 바쳤던 짐승의 고기를 기독교인들이 먹어도 되는지에 대한 문제가 취급되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한 생각은 사람마다 다르다. 그렇지만 항상 결정적으로 중요한 문제는 여기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 믿음에 합치하느냐 하는 것이다. 이때 믿음이 어떻게 양심이나 인식과 같은 의미를 가지게 되는지가 드러난다. 여기서의 준거점(準據點)은 하나님의 심판이요, 이 심판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통과할 것이라는 확신이다. 그러므로 로마서 14:23에는 결론적으로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오고 있다.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이상의 짧은 논의를 통해 우리는 믿음이란 하나님의 은사로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근거한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반면 믿음은 참된 믿음과 죽은 믿음으로 구별될 수 있는데 후자는 행함이 없는 믿음이다(약 2:17, 26). 신구약의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면 믿음은 제1계명의 준수 여부에 달려 있다. “나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루터는 『대요리서』에서 이 계명을 믿음의 의미와 관련하여 간단명료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루터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라는 문제-이 문제는 다원주의사회에서 자주 제기되는 문제이다-에 대해 이렇게 대답한다. “하나님이란 사람으로 하여금 모든 좋은 것은 하나님에게서 나오며 환난 중에서도 피난처가 있다는 소망을 가질 수 있도록 해 주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을 진심으로 의지하고 신뢰하는 것인데 내가 여러 번 말한 대로 오직 진심으로 의지하고 신뢰하는 것만이 하나님이 되기도 하고 우상이 되기도 하는 것이 다. 너의 의지와 신뢰가 옳은 것이라면 네가 믿는 하나님도 옳은 하나님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너의 의지와 신뢰가 거짓되고 그릇된 것이라면 네가 믿는 하나님도 옳은 하나님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믿음과 하나님은 함께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거니와)너의 마음이 애착을 느끼며 신뢰하는 곳, 거기에 진정 하나님이 있다. 이렇게 생각해 볼 때 모든 인간은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문제는 그가 무엇을 또는 누구를 믿는가, 그의 마음이 어디에 애착을 느끼는가, 그가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하는 것이다. 그의 하나님이 누구인지, 또 무엇인지는 이렇게 하여 결정된다. b)신앙의 의미에 대한 현상학적 고찰 이러한 전제하에서 생각해 볼 때 신앙이라는 현상은 지극히 광범위한 현상이어서 신앙이 없는 사람, 신앙이 없는 시대, 신앙이 없는 나라는 없다고 말해야 할 정도이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스토아 철학자들, 그리고 키케로와 같은 기독교 이전의 옛 철학자들은 모두 모든 인간과 민족에게는 경외 내지 숭배하는 신들이 있어서 그 신들에게 제사를 드린다는 전제로부터 출발하였다. 아시아에서 여러분은 이러한 현상을 직접 목도할 수 있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사실을 "인종의 합의"(consensus gentium)라는 용어로 표현한다. 그러한 말을 할 수 있는 근거는 다양한 종교의식이 존재한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으며 어떤 언어든지 간에 "하나님" 혹은 "신(神)"이라는 말이 분명히 있다는 사실도 근거가 된다. 우리가 여기서 개괄적으로 종교 내지는 종교성이라는 말을 사용한다면 이것은 이러한 모든 사실과 현상을 포괄하는 것이 된다. 하지만 종교라는 말의 라틴어어원을 키케로가 기술(記述)한 바에 따라 살펴보면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첫번째의미는, ligare(="묶다“)라는 말에서 도출된 것으로 ”다시 연결함"을 의미한다. 두번째의미는, legere(="읽다“)라는 말에서 도출된 것으로 "반복하여 정확하게 읽는 것 내지는 보는 것"을 의미한다. 두 가지 경우 모두 하나님과의 관계만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도 문제가 된다. 그것은 종교 내지는 종교성 때문에 인간은 서로 결합되기도 하며 서로 구별되거나 분리되기도 하기 때문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서로 적대감정을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의식과 양심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대단히 민감한 영역인 바 이것을 말로 표현하기란 어려울 때가 많다. 하지만 인간은 신앙 때문에 마음에 상처를 받기가 쉽고 그래서 또 남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다. 2. 다원주의사회란 무엇인가 다원주의란 현대사회의 현상일 수가 있고 우리의 주제 때문에도 다원주의를 현대사회의 현상이라고 생각하기가 쉽다. 그렇지만 우리가 신구약 성경의 정치적, 사회적 배경을 고려해 보면 당시의 상황도 종교적 다원주의의 영향을 깊이 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다. 이방신-이것은 가나안 땅을 정복했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알게 되었던 바알신과 아세라신과 같은 자연신 또는 바벨론 등에 거주하는 이방인들이 섬기던 별의 신들이었다. 구약성경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이러한 자연신들과 별의 신들에 미혹 당한 사실이 수없이 기록되어 있다. 이방신들에 미혹 당하는 일이 많았던 것은 이방신들이 풍년과 자손의 번성을 보장해 주는 것으로 생각하였고 또 별자리를 통해 인간의 운명을 점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이방종교의 유혹이나 이방종교의 강요는 민간신앙이나 국가종교의 분야에서 심했다. 이방인과의 혼인, 정치적 , 경제적 동맹, 또한 전쟁에서의 패배 역시 이방종교를 받아들이고 이방신을 섬기도록 만들었다. 위의 사실만으로 다원주의사회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설명이 된다. 문제는 신앙공동체와 정치공동체가 상호의존관계에 있고 상호 영향을 미치는 관계에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 문제를 취급함에 있어서 독일이 처한 상황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제일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독일은 1919년이래 국가와 교회가 분리되어 있으며, 독일 헌법 제4조에 보장돼 있는 종교의 자유, 신앙의 자유, 양심의 자유는 기본권 내지 인권에 속하는 문제이다. 그러므로 국가교회나 국가종교는 전혀 입을 수 없다. 하지만 이 지구상에는 국가종교를 인정하고 있는 나라가 많다. 예를 들어 회교국가에서는 회교만이 국가종교의 지위를 가진다는 것이 법으로 정해져 있다. 유럽에서는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국가종교로 인정했던 역사가 있었는데 비잔티움의 동로마제국이든지 로마의 서로마제국이든지 간에 국가와 교회의 결합이 국가적 통합의 기초였었다. 종교개혁으로 교회의 통일성이 결정적으로 무너질 때 신성로마제국으로 상징되던 서구의 정치적 통일성도 무너졌다. 다원주의사회란 일차적으로 다음과 같은 정치적 문제를 안고 있다. 그것은 다양하고 상반되고 서로 투쟁하는 종교집단들이 하나의 정치공동체로 투합되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하는 문제이다. 지금까지의 모든 경험으로 보아 선의(善意)만 가지고는 그러한 일은 가능하지 않다. 그리고 다원주의사회에서는 엄청난 부조화가 존재한다는 것이 우리의 관찰인 바 이러한 부조화는 여러 가지 종교행사가 있다라는 사실에 결코 국한되지 않는다. 나는 단지 몇 가지 실례를 들어 어디에 부조화 또는 이해상의 어려움이 있는지를 지적하도록 하겠다. 예컨대 종교마다 직장과 학교가 쉬는 명절날이 다르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또한 종교에 따라서 생활형태와 관습이 다르다는 사실을 예로 들 수 있는데 이것은 특히 결혼이나 가족, 또는 여자의 지위의 문제와 관련된다. 복장문제도 있다. 옷벗는 것이 자연스러운 유럽사회에서는 여자들이 동양식으로 몸이나 얼굴을 가리는 것, 회교를 믿는 여학생들이 체육시간이나 수영시간에 출석하기를 거부하는 것 등은 지나친 일로 여겨진다. 또 청결이나 음식에 관한 규정도 상당히 다른데, 예컨대 동물의 목을 따서 죽이는 것을 유럽 사람들은 싫어한다. 동물보호협회에서는 이런 일에 반대한다. 마지막으로 기도시간과 기도에 관련된 신호에 관한 일을 들 수 있다. 독일에서는 최근 회교사원을 짓는 일 뿐 아니라 회교사원의 첨탑에서 기도시간 알리는 사람이 보내는 신호가 교회의 종소리를 방해한 일로 인해 심한 분쟁이 발생한 일이 있다. 이와 비슷한 사건은 신약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로마서 14장과 고린도전서 8장에 나오는 우상과 제물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우리는 모세 율법에 나오는 청결 및 음식에 관한 제정을 둘러싼 분쟁에 대해서도 살펴볼 수 있다(갈 2장, 행 15장). 이것은 교회 내부에서 종교문화적 분쟁이 발생한 사건과 동시에 분쟁을 극복한 사례가 되는데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논의해 보기로 하겠다. 기독교회는 다원주의사회라는 상황속에 처해 있는데, 이 상황은 교회가 마음대로 선택할 수도 마음대로 변화시킬 수도 없는 상황이다. 우리는 앞에서 기독교신앙의 본질에 대해 살펴보았던 바 그것은 신앙이란 하나님의 은사이지 인간의 행위나 가능성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신앙이란 그러므로 결단코 인간이 요구할 사항이나 인간이 공로를 세울 사항이 아니다. 그런데 이것은 에클레시아라고 하는 기독교회의 본질과도 상응한다. 에클레시아는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로 인해 불러 모아진 사람들의 공동체이다. 에베소서 1:4 이하에 의하면 이 공동체는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이 행해짐으로써 형성된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하나님의 이 만세 전의 예정과 선택이 하나님 말씀의 선포로 말미암아 시간 속에서 실행된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세계 만민 중에서 불러 모아진다. 그리하여 기독교 복음과 그로 인해 형성된 교회의 본질 속에는 하나님의 백성은 이 세상 백성과 결단코 동일할 수도, 이 세상 백성 속으로 흡수될 수도 없다는 사실이 포함되는 바 이러한 기독교회의 본질 때문에 또 교회를 결정하는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 때문에 교회는 항상 그리고 세계 만민 중에서 다원주의사회와 만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세계 만민 가운데는 교회에 속하여 부르심을 입은 사람과 교회에 속하지 않은 사람, 또 지금은 교회에 속하지 않았으나 앞으로 교회에 속할 사람이 구별된다. 그러므로 교회가 국가교회의 지위를 가지는 것이나 가지려 하는 것은 교회의 본질과 사명에 어긋난다. 그렇지만 국가의 입장에서는 내적인 통일성을 유지하는 것이 국가이익에 합치하는 바 그것이 없이는 정치공동체가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다원주의시대-그것이 21세기라는 다원주의시대이든 아니면 다른 다원주의시대이든 간에 - 기독교신앙의 문제는 정치적 문제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여기서 기독교회가 논의의 대상이 되는데, 기독교회는 어떻게 그 본질과 사명에 상응하는 책임을 감당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3. 실례:세계관 문제연구센터의 활동상황 다원주의사회 속에서 기독교를 믿는 신앙인이 책임을 잘 감당하기 위한 중요한 전제는 그 사회 내의 다양한 종교 및 세계관이 어떻게 집단을 형성하고 또 어떠한 운동을 전개하고 있는지에 대해 정확히 아는 것, 또 정확히 평가하는 것이다. 나는 아는 것과 평가하는 것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단순히 기술(記述)하는 것보다 훨씬 높은 차원의 일이기 때문이다. 여러 다양한 종교 및 세계관이 각기 집단을 형성하고 사회운동을 전개하는 것은 결코 인간의 독립성의 표현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견고한 결합과 긴밀한 상호의존관계의 표현이다. 이것은 인간의 행복에 기여할 때도 있지만, 때로는 착취와 파멸을 초래하기도 한다. 독일에서는 이러한 현상을 지칭하기 위해 destruktive kulte(="파괴적종교")라는 말이 생겼는데 이 말은 심리학과 명상이라는 수단을 동원하여 인간의 의식을 주장하고 변화시키려는 단체나 기술을 가리키는 말이다. 종교집단은, “청소년종교”(jugendreligionen)라는 말도 있지만 연령구조에 전혀 관심이 없는 것처럼 여겨져 왔던 젊은 세대가 이런 종교집단에 가입했다는 놀라운 사실을 잘 표현해 주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집단은 부침(浮沈)이 심하고 지역적 분포가 고르지 못하기 때문에 이들 집단의 이름을 말해 보았자 별 소용은 없다. 그래도 한국에서 기원한 문선명의 통일교, 미국에서 기원한 크리스찬 사이언스 교회는 언급할 만한데, 이들 때문에 현재 독일에서는 심한 논란이 일어나고 있는 바 이들은 상업활동을 하고 또 특정한 사회계층에 침투하는 관계로 반국가적 단체로 분류돼야 한다는 주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힌두교 내지는 불교를 배경으로 하여 명상과 자기발견의 도(道)를 제시하는 집단은 숫자도 많고 부침도 심하다. 그런데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특정한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정치집단들도 인간의 의식을 지배하고 사회의 진행 방향을 결정하려고 한다는 사실이다. 우리 세계관문제연구센터는 독일개신교협회 내의 종교 및 세계관과 관련된 현상을 관찰하기 위한 기관이다. 이 기관은 1960년 슈트트가르트에서 창설되었고 베를린으로 옮긴지는 2년이 되었다. 나 자신은 !974년부터 1995년까지 이 기관의 재단이사였고 그중 12년 동안은 이사장으로 있었다. 나는 조직신학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이 기간 동안 기독교신앙을 변증할 책임이 어떤 것인지에 대하여 또 다원주의사회에서 기독교회의 사명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많은 것을 배웠다. 이 기관의 전신은 1921년 베를린 슈탄다우(Spandau)에 위치한 요한재단의 국내신교위원회가 창설한 '변증센터' 였다. 이 센터는 1937년 나찌의 국가경찰에 의해 폐쇄되었다. 세계관문제연구센타는 비교적 규모가 작은 기관으로서, 일곱명의 저명한 신학자를 연구위원으로 두고 있는데 이들 신학자들은 보통 목회경험을 가지고 있다. 이 기관이 할 일에 대해서는 기관의 정관 제1조에 잘 나타나 있다. (1)세계관문제연구센터는 오늘날의 종교 및 세계관에 관한 문제에 대해 독일개신교협회를 위해 자료와 문서를 보관하고 정보를 제공하고, 의견을 제시하는 기관이다. (2)세계관문제연구센터는 종교 및 세계관 분야에서의 진행상황을 관찰하고, 그 진행상황이 의미하는 바를 독일개신교협회를 위해 설명해 줄 책임이 있다. 이 기관은 독일개신교협회의 관할지역 내에서 벗어난 종교 및 세계관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작업을 조정하는 역할도 감당한다. (3)세계관문제연구센터는 연구결과를 발표하기 위해 학술대회와 세미나 개최를 제안하거나 직접 수행한다. 이 기관은 연구결과를 적절한 방법으로 문서화하고 이를 공표한다. 이 기관은 종교 및 세계적 문제를 취급하는 다른 교회기관, 국가기관, 또는 민간기관과 협력한다. 이 기관의 활동상황에 대해 보고할 것은 대단히 많으나 여기서는 1920년대와 1930년대의 '변증센터' 시절의 활동상황을 실례로 하여 종교 및 세계관에 관한 문제를 설명하고자 한다. 나의 생각으로는 이것이 이 분야에서의 과제가 무엇인지를 밝히는 데 적절하리라 여겨진다. 1921년 '변증센터'가 생겼을 때는 1919년 국가와 교회가 분리되고 그리하여 국가교회가 해체된 직후였다. 그리하여 그 때 독일의 개신교에는 어떻게 국민 교회 안에서 국민과 교회가 계속 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과 관련된 여러 가지 문제가 제기되고 있었다. 1920년 사회정치적 상황의 특징은 정당이 라든지 소규모의 정치적 이익집단의 수가 너무 많았다는 것뿐만 아니라 종교 및 세계관에 관련된 운동과 소동이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독일적 교회“, "전나무동맹"과 같은 민족주의적 종교집단이 형성되었다. 이런 현상을 지칭하기 위해 당시에는 "정치적 종교“, "정치적 교파"와 같은 말이 생겨났다. 이리하여 종교현상이란 어떤 인간사회에서 결코 고립되어 나타날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왜냐하면 종교현상은 어디에서나 나타나 인간의 의식을 규정하고 지배하며 그리하여 인간을 서로 결합시키거나 아니면 서로 적대적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변증센터'의 사명은 교인들, 특히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종교 및 세계관에 관련된 복잡한 현실에 대해 정보를 제공하여, 정확한 판단을 돕는 데 있었다. 이것은 분명히 '국내선교' 와 연결돼 있는 국민선교적 과업이다. 1932년부터 1937년까지 당시 '변증센터' 의 소장이었던 발터 퀸네트가 알프레드 로젠베르크가 쓴 나찌 책인 「20세기의 신화」를 비판했을 때 공공연한 분쟁이 발생하였고 1937년 결국 '변중센터'가 폐쇄되는 사태가 초래되었다. 1933년에 처음 출간된 『20세기의 신화』는 1940년까지 100만 부 이상이 발행되었다. 이 책의 기본명제는 독일 민족은 독일의 역사에, 독일인의 북방족성에, 당시의 시대에 맞는 독자적인 종교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독일 고유의 독특한 민족교회를 창설하는 것이 그 책의 목표였다. 구약성경은 배척되었는데 그 이유는 구약 배경이 독일 민족에게는 맞지 않는 유대인의 저급한 문화와 관련돼 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로젠베르크에 의하면 구약은 '목축업자와 뚜쟁이들의 역사'였다. 퀸네트의 책은 1935년에 처음 출간되었는데 1년 안에 4판이 나왔다. 그 책의 이름은『신화에 대한 답변:북방신화와 성경적 그리스도 사이의 결단』이었다. 이 논쟁은 고전적 교리논쟁으로써 도그마(dogma:교리․신조)와 도그마의 싸움이었던 바 이때 도그마는 교리라는 의미보다는 이해의 기준 내지는 판단근거라는 의미를 지닌다. 로젠베르크는 민족 정신의 소양을 위하여 북방민족, 혈통 및 독일 역사의 가치라고 하는 도그마를 제시했다. 퀸네트는 이에 대항하여 신구약성경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이야기했다. 여기서 우리의 제목과 관련하여서 중요한 논거 두가지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퀸네트는 그의 답변에서 첫째, 로젠베르크가 어떠한 가치개념으로부터 출발하는지를 지적하였다. 즉 로젠베르크의 가치개념은 그 척도를 인종과 역사에 두고 있으며 그 목표는 독일 민족에게 효용을 가져다 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항하여 퀸네트는 진리의 개념을 제시하였는데 그 진리의 근거는 하나님의 계시에 있었다. 그리하여 퀸네트가 보기에 두 사람 사이의 결정적 대립점은 로젠베르크에 있어서는 진리가 가치 또는 효용으로 대치된다는 사실에 있었다. 그리하여 로젠베르크는 ‘진리의 대용물'로 하여금 최고의 권위를 덧입도록 만든다는 것이었다. **우선 문제가 되는 것은 진리의 개념을 가치의 개념과 뒤바꾼다는 것이다. 신화는 '무엇이 참인가?‘를 묻지 않고 북방 사람들의 피를 위해 '무엇이 가치있는가?‘를 묻는다. 그렇게 해서 엄청난 역전 현상이 일어나 진리를 위한 진지한 노력은 포기되고 만다 가치와 진리는 서로 같은 것이 아니다. 어떤 민족에게는 진리에 모순되는 것이 가치 있는 것처럼 보일 수가 있다. 예컨대 루터를 교황의 판단에 굴복시키는 것이 신성로마제국의 통일성을 유지하는 데 좋고 신앙으로 인해 나라가 분열되고 내란이 일어나는 것을 방지 할 것이기 때문에 진리를 희생해서라도 민족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좋았다는 말을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역으로 진리는 민족적 가치가 순수한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도 있다…. 그리하여 '유기적 진리라는 개념과 그것의 인종주의 내지 혈통주의와의 동일시는 진리를 생물학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진리의 종교적, 윤리적 근거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진리는 삶의 가치와 대립되므로 그것과 동일시될 수 없다. 삶, 그리고 생명력이라 하는 것은 무조건 진리의 표현이 되지 못하며, 오히려 진리를 통하여 그 방향이 결정되고, 윤리적인 제약을 받는다. 진리를 순수한 생물학적, 자연적 영역으로 옮겨버리는 것은 진리의 문제를 가벼운 문제로 여기는 것이며 진리의 엄격성과 진지성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퀸네트는 이와 관련하여 신학과 신학도들은 진리에 대한 책임이 있음을 분명히 지적했는데 이유는 이렇다. "신학도로서 복음의 진리에 무관심한 자는 자기의 소명을 잊어버린 자다. 진리는 증거되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못한다면 신학도는 진리에 대하여 도무지 모른다고 해야 옳다. 신학도가 만약 진리를 탐구하는 것으로 만족한다면 인간적으로는 매우 훌륭하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신학도로서는 말씀선포의 직분에 전혀 합당하지 못한 자가 된다.“ 퀸네트는 교회의 본질과 사명에 대해서도 지적하였다. 로젠베르크는 온전히 민족을 위해서만 봉사하는 민족교회를 주창하였지만, 퀸네트는 이에 반대하였다. 퀸네트는 다음과 같이 힘있게 말한다. "기독교적 교회개념에는 그렇지만 로젠베르크가 독일의 국민교회에 요구하는 것을 근본적으로 거부하게 하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기독교회는 결단코 인간의 명예와 영광을 위한 교회가 아니라 십자가의 교회이며 신비스러운 하나님나라의 교회이다. 교회는 본질적으로 민족적, 정치적 연설을 행하는 장소도, 인종주의와 민족주의를 장려하는 장소도, 십자가 대신 전쟁기념비를 세우는 장소도 아니다. 만약 그런 것이 교회의 사명이라면 교회는 세속주의에 완전히 넘어가게 될 것이며, 자기의 사명에 충실하지 못하게 될 것이며, 거짓 교회가 되고 말 것이다. 『21세기의 신화』에 약속된 민족교회와 같이 세속화된 교회는 존재이유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며 당연히 세상의 조롱거리가 될 것이다. 도그마가 대립할 때 이런 판단을 내리는 것은 물론 기독교신앙의 진리와 기독교회의 본질적 사명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계시에 의해 분명하게 정해질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인간적인 가치와 목적이 제아무리 중요한 것이라 해도 그것이 진리를 정해줄 수는 없는 것이다. 무엇이 교회의 특징이며, 무엇이 교회에 진정한 권위를 부여하는가? 교회는 그리스도의 통치권을 인정하며, 이 주님의 권위에 자신의 생명을 맡기는 사람들의 공동체이다. 이 공동체의 신앙은 자기 스스로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언제나 새롭게 신앙을 일깨우고 보전해 주는 계시의 말씀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모든 중심은 단 하나, 그리스도의 말씀이며 하나님의 응답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어떠한 단체도, 어떠한 정당도, 어떠한 클럽도 아니다. 도리어 그리스도가 비록 보이지는 않지만 그들 가까이에 임재해 계시며 신비적 직접성을 통해서가 아니라 성경적 증거를 통해서 그들을 인도하심을 믿고 따르는 자들의 공동체이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
'이단!! 종교 다원주의!! wcc!!'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종교다원주의 실체 / 길은 많아도 ‘생명의 길’ 은 하나 (0) | 2021.08.29 |
---|---|
종교다원주의란 무엇인가? (0) | 2021.08.29 |
선교-종교_다원주의 (0) | 2021.08.17 |
종교다원주의 실체 (0) | 2021.08.16 |
기독교와 타종교 (0) | 2021.06.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