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 종교 다원주의!! wcc!!

선교-종교_다원주의

하나님아들 2021. 8. 17. 23:13
선교-종교_다원주의
 


 
 




 


 


서론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여러 특징을 열거할 때면 다원화된 사회라는 말을 쉽게 떠올린다. 16세기부터 시작된 산업화가 후기 산업주의로 접어들면서 인류 문명은 획일화 표준화 규격화를 벗어나 다원화 다양화 지역화를 특징으로 하게 되었다. 교통과 통신 수단의 발달로 인하여 지구촌 시대에 접어들었고, 신문, 잡지, 라디오, 텔레비전, 비디오 등의 매스 미디어의 발달은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인류의 생활을 동시화, 다원화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제3세계 국가들이 식민지에서 독립한 후 50, 60년대의 정치적 독립기와 그 이후의 경제적 부흥기, 정치적 발전의 시기를 거치면서 그들 자신의 역사와 문화와 종교를 부흥시키왔다. 그러면서 그 이전의 서구 기독교 국가의 문화적인 영향을 벗어나고 있다. 각 민족들은 정치적, 경제적 이유로 인하여 이주와 이민을 거듭하였고 이제는 어느 곳에서나 쉽게 독자적인 종교문화권에서 이질적인 요소를 갖고 있는 타종교의 사람들과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 시대가 안고 있는 인류생존과 문화보존에 대한 위협이 많은 종교인들과 지식인들로 하여금 인류의 평화적 공존과 연합의 필요성과 타당성을 느끼게 하고 그의 시급성을 주장하게 하고 있다.


사회의 다원화와 함께 종교 상황도 다원화되었고, 종교다원주의 신학의 등장으로 인하여 기독교는 안팎에서 다원주의의 도전에 응답하여야만 하게 된 것이다. 한국교회는 한민족 특유의 다원주의적 삶의 태도와 다원주의적인 종교문화로 인하여 종교다원주의 상황 내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한국의 종교상황은 철저한 다종교, 다교파, 다종파 상황의 전형적인 양상을 띠고 있다. 불교, 유교, 개신교, 가톨릭, 원불교, 천도교 그리고 최근에 들어온 이슬람교 등의 종교가 공존하고 있다. 게다가 많은 수의 교파(종파)들이 이들 종교 가운데서 나누어져 공존하고 있다. 개신교만 하더라도 94개 교파로 나누어져 있으며 수많은 신흥종교까지 합하면 조사된 것만으로도 393개에 이르고 있다. 여기에 민중들의 생활 속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는 민간신앙까지도 고려한다면 한국 사회는 가히 종교의 전시장이며, 종교다원주의가 가장 현저하게 보여지는 사회라 하겠다. 그 예로 다미선교회의 시한부 종말론을 비롯하여 모 교단 교수들의 예수 그리스도 밖의 구원론에 대한 언급, 조희성의 승리제단, 김기동과 이초석 목사의 비성경적인 주장들 등의 수없이 많은 이단 사설 내지는 다원주의적인 기독교 신앙 형태를 경험해 왔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에서 끝임없이 이단 사설과 다원주의 사상에 도전을 받고있는 기독교는 과연 어떠한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인가? 또한 어떠한 신앙을 유지하여야 할 것인가는 두말할 것도 없는 아주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제는 정통신앙과 다르다고 해서 무작정 배격하는 시대는 접어야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특별히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연구는 우리 기독교 신앙이 어떠한 관점을 가지고 대처해야 할 것인가를 알게해 준다. 종교다원주의의 역사와 기본 사상들을 연구함으로써 우리의 신앙 자세를 다시 한 번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


 


 


 


 


1. 종교다원주의의 등장 배경 및 원인


 


가. 현대사회의 다원주의화 경향


 


현대사회를 흔히 다원주의 사회라고 부르고 있다. 이것은 오늘날 사회의 가치와 규범뿐만 아니라 사회 조직과 구조에 있어서도 다원화(Pluralization)가 두드러진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학적으로 볼 때 다원화란 개인이나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제도적, 의식적 근원이 다양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현상은 종교 상황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종교다원주의란 “다른 종교 집단들이 경쟁적 상황에서 공존하고 있는 것”, 혹은 “어느 특정 종교가 절대적 진리나 가치를 주장할 수 없다는, 종교에서의 가치중립적 태도”를 의미한다. 이러한 종교의 다원주의 상황은 현대사회의 한 특징적인 양상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종교다원주의의 탄생의 역사적, 신학적 배경에 대하여 전호진 박사는 다음과 같은 여섯 가지의 원인을 들고 있다.


첫째, 기독교 문명에 기초한 서구는 이제 과거에 향유하였던 지배력을 상실하고 기술과 경제면에서 아시아에 주도권을 빼앗기고 있다. 여기서 기독교에 대한 절대성도 포기하는 입장에 있다. 많은 서구인들은 오히려 동양의 신비 종교에 영적 가치를 더 부여하면서 관심을 가진다. 둘째, 일부 서구인들과 신학자들은 서구 식민주의와 두번의 대전에 대하여 강한 죄책감을 가지고 서구 문명과 기독교를 죄악시하고 비서구 문화를 찬양한다. 셋째, 종교다원주의는 비서구인들, 특히 많은 아시아인들이 서구로 이주하거나 거주함으로 서구 사회를 종교 다원 사회로 만들었다. 넷째, 비서구 국가들은 자신들의 문화적 정체감(Identity)을 전통 종교에서 추구하는데서 종교 다원화를 더욱 심화시킨다. 다섯째, 종교다원주의 신학은 서구 신학이 노골적으로 기독교 밖의 구원을 강조하고 기독교의 절대성을 포기하는 데 일차적 원인이 있다. 끝으로 W. C. C의 종교 대화는 전도의 목적으로 시작되었으나 오히려 인류의 평화와 복지라는 세속적 목적과 종교다원주의로 발전되었다.


서정운 교수는 복음과 타 종교의 관계에 대한 논의는 기독교 초기부터 계속되어 온 것으로 보면서 최근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는 이유로 생활 환경의 급변, 매스 미디어의 발달, 인문주의 사상의 발달, 다른 종교들의 부흥과 선교, 인류의 공존과 일치의 필요성과 타당성을 위한 주장과 염원, 서구 기독교 선교의 과오에 대한 도전(역습), 기독교 선교열의 약화 등의 일곱 가지를 들고 있다.


다시 말해서 종교다원주의는 19세기의 선교운동의 시기를 지낸 후 20세기에 들어와서 기독교 내부에서 전개된 신학 논쟁이지만 현대 사회의 다원주의화 경향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이다. 최근에는 제3세계권의 경제적 성장과 정치적 민주화의 진행과 함께 사회주의권 붕괴 이후 자본주의 세계질서의 확대 재편 과정에서 나타나는 다원화 현상, 즉 동서 냉전체제를 통하여 미소 양축으로 통합되어 있던 세계 체제가 소련의 와해로 인해 미, 일, 독을 중심으로 보다 다양한 축이 형성되고 고도로 발달한 자본주의 산업문명의 전파로 인한 획일화와 독점을 거부하고 다양성을 인정하는 사회적 추세를 반영하고 있다.


 


나. 피터 L. 버거의 종교다원주의 상황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


 


다원주의 상황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은 일찌기 사회학의 선구자 웨버에게서 나타나고 있다. 그는 진리 혹은 과학, 미 혹은 미학, 선, 혹은 도덕성의 영역들이 분화되면서 윤리적 세계의 일원성의 가정이 현대성 가운데서의 가치 다원주의로 대체되고 있다고 보았다. 즉 기능적 합리성(functional rationality)으로 특징지어지는 근대 사회에서의 합리화 과정은 제도적인 그리고 인지적인 분화를 초래했고 이것은 가치 다원주의를 낳게 했다는 것이다. 웨버는 분화, 문화적 다원주의, 개인주의화 과정들이 역사적으로 독특한 개인적 의미와 자유의 상황을 낳았다고 주장했다. 가치들이 다원화되는 이러한 상황의 변화를 흔히 세속화라는 용어로 사회학에서는 설명하고 있지만, 어쨌든 웨버의 가치 다원주의 상황에 대한 분석은 후대 사회학자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웨버의 영향을 받아 현대의 종교다원주의 상황에 대하여 가장 폭넓게 그리고 의미있게 사회학적으로 분석한 이는 피터 L. 버거이다. 그는 현대 생활과 사고의 상황은 현대의 외부적 조건과 세력에 의해서만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내부 세계를 형성하는 현대 의식의 세력에 의해서도 역시 형성된다는 것이다.


피터 L. 버거는 현대의 종교다원주의 상황을 “시장상황”(market situation)과 “종교의 사사화 (Privatization)”으로 설명하고 있다. 종교다원주의 상황으로 인하여 종교적 전통의 탈독점화가 초래되어 종교들간의 정당화 경쟁이 불가피하게 되었으며, 세속화가 진전되어 고도로 조직화되어 있거나 제도적으로 훨씬 더 확산되어 있는 여러가지 비종교적인 적대자들과 경쟁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그 결과 이전에는 권위있게 부과될 수 있었던 종교적 전통을 이제는 시장에 내놓고 더 이상 “구매”하도록 강요받지 않는 고객들에게 “판매”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장상황은 고객들의 종교적 욕구가 유사하므로 종교제도도 또한 표준화되는 경향을 갖게 되며, 이 증가된 유사성과 경쟁의 결과로 경제제도에서는 카르텔이 형성되는 것과 같이 종교제도에서는 에큐메니즘이라는 조직의 구성을 촉진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종교의 사사화는 종교, 가족, 여가, 예술 등의 어떤 분화된 제도적 영역들이 경제, 정치, 법과 같은 공적 영역의 지배적인 제도들로부터 분리되고 사적인 영역으로 퇴거하는 과정을 말한다. 종교가 개개인의 사적인 일이 되어버린 것이다. 종교는 결국 현대의 다원주의 상황 아래서 그 기능과 위치에 있어서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되었는데, 기능에 있어서는 사적인 일로 크게 축소되었고, 위치에 있어서는 사회적 정당화를 독점하던 위치에서 많은 경쟁자들과 경쟁할 수 밖에 없는 상대적 위치로 전락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다원주의 상황에서 나타나는 종교적 본질이 약화되거나, 종교적 본질을 끝까지 고수하기 위하여 사회와 스스로 단절되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전자의 경우는 자유주의자들의 전형적인 입장이요, 후자의 경우는 보수주의자들의 전형적인 입장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버거의 종교다원주의 상황에 대한 분석에 대하여 이원규 박사는 한국적 상황에 적용하기 어려운 몇 가지 문제점들을 지적하였다. 그 첫째는 버거의 이론이 철저하게 미국적 모델이라는 것이다. 둘째는 종교적 다원주의 상황을 주로 전통적인 종교에 적용시킴으로써 오늘날 중요한 유사종교, 대체종교(alternative religion)들을 그 다원주의 상황에 중요하게 포함시키지 않고 있는 점이다. 셋째로 버거는 다원화되는 상황 가운데서 종교집단들이 세속성, 현대성에 대하여 가질 수 있는 태도의 유형을 주로 동화 혹은 굴복, 거부 혹은 퇴거의 두가지로 설명하고 있으나 제3의 입장인 갱신과 자기 변형 그리고 이것을 통한 사회 변동의 가능성을 무시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넷째로 서로 다른 반응을 보이고 있는 종교집단들 사이의 역학 관계에 대한 설명이 미흡한 점이다. 끝으로 종교적 다원주의 상황이 야기한 긍정적, 부정적 기능에 대한 분석이 개인 심리적, 사회적, 종교 자체의 수준에서 폭넓게 다루지 못하고 있다는 점 등이다.


 


다. 알랑 레이스의 세 가지 유형론을 통해 본 종교다원주의


 


기독교에 있어서 다원주의적 태도는 오랜 전통을 갖고 있다. 알랑 레이스(Alan Race)는 기독교와 타종교의 관계를 예수의 종국성 이해를 기준으로 하여 배타주의(exclusivism), 포괄주의(inclucivism), 다원주의(pluralism)의 세가지로 분류하였다.


배타주의는 문자 그대로 그리스도교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입장이다. 그리스도교는 전통적으로 그리스도만이 참 종교요, 절대종교라고 믿는 그리스도교 절대주의(christian absolutism)를 견지해 왔다. 이러한 배타주의에는 전통적인 가톨릭의 입장과 개신교의 바르트(Karl Barth)와 크래머(Hendric Kraemer), 그리고 절대 다수의 기독교인들이 속할 것이다.


포괄주의는 배타주의와 다원주의의 중간 입장으로 타종교에 대해 변증법적 태도를 견지하며 ‘예’와 ‘아니오’를 동시에 말한다. 자기 종교를 최우위에 놓는 자기 중심적 요소가 있어 한편으로는 배타주의와 통하고, 우열을 가리면서도 남의 종교의 가치를 어느 정도 인정한다는 점에서 다원주의와도 통한다. 즉 포괄주의는 ‘발전 - 완성’이라는 도식의 성취설을 취한다. 타종교인을 ‘익명의 그리스도인’으로 규정한 칼 라너(Karl Rahner)와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 - 1965) 이후의 가톨릭의 입장이 모두 이 견해를 대표한다.


다원주의는 참 종교를 하나만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여럿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포괄주의와 다르다. 궁극적으로 형언 불가능한 하나의 신적 실제를 믿되, 그 신앙의 다양한 표현으로서의 다원종교 현상을 인정하며 그것들 사이의 상호 보완적 관계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려는 태도이다. 이는 교회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타종교들을 배타하거나 포괄하려는 종래의 입장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대안이다. 80년대의 다원주의적 종교신학은 소위, ‘신 중심적 모델’을 제시하며 그리스도 중심적 신학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궁극적 실재로서의 신의 초월성을 강조하고 있다. 다원주의 신학자들로는 스미스(Wilfred Cantwell Smith), 사마르타(S.T.Samartha), 파니카(R.Pnikkar), 토마스(M.M.Thomas), 존 힉(John Hick), 폴 니터(Paul Knitter) 등을 꼽을 수 있다.


 


 


2. 종교다원주의의 신학적 전개 과정


 


종교다원주의는 하나님은 유일신이기 때문에 모든 선한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고, 다른 종교의 장점 역시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일 가능성을 인정해야 하며, 하나님은 인류 전체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진지하게 신에 대해 질문하고 성실하게 신앙을 지키는 모든 사람들에게 응답하신다고 주장하는 종교신학적 이론이다. 그러므로 적어도 고등종교라면 타종교의 가치를 인정하고, 그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인정하며, 그런 전제 위에서 종교간의 대화와 협력을 하고 서로를 발전시키는 것이 옳다고 본다


 


가. 슐라이에르마허(F. Schliermacher)의 종교다원주의


 


종교다원주의가 신학에서 나타난것은 근대 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슐라이에르마허(1768 - 1834)로 부터이다. “내 안에 이성과는 분명히 다른 신적인 어떤 영이 내주하고 있음”을 느낀다고 하는 그는 자기 본성의 가장 깊은 곳으로부터 이 영을 추구하고 있었다.


인간의 경험과 직관으로부터 종교의 출발점을 삼은 그는 하나님을 3위 1체로 보기를 거부하고 신이라는 개념조차 피하였으며, 그에게 있어 하나님은 인간의 내면으로부터 솟아난 “절대의존감정(das schlechthinnge Abhangig-keitsgefuhl)”이다. 이러한 신론은 ‘인간안에 있는 하나님의 존재’를 의미하는 범신론과 병행된다. 기독론에 대해서도 범신론적인 사상을 기초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의 ‘신이 내주하는 인간’이며, ‘신의식이 지속적으로 강한 사람이고, 무죄와 완전한 사람으로 보는 것이다.


 


나. 종교다원주의의 선구자들


 


(1) 트퇼취(E. Troeltsch)의 상대주의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의 대표적인 종교사학자요 ‘역사적 상대주의자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트뢸취(E. Troeltsch, 1865-1923)는 기독교 절대주의를 거부하고 종교 상대주의를 주창했다. 하나님은 유한한 것들과 동일시될 수 없지만 신성도 역사 속에 주어졌을 때는 상대적인 것이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에게는 인간에 대한 절대적이고 유일한 하나님의 자기 계시란 있을 수 없다. 기독교의 복음마저도 다양한 종교적 구원 체험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이것은 그의 철저한 역사적 의식과 그 역사적 의식이 요청하는 바 역사적 상대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틔뢸취의 이러한 역사적 상대주의는 오늘날 길케이(Langdon Gilkey)와 트레이시(David Tracy), 그리고 니터에 의해 철저히 관철되고 있다.


 


(2) 고가르텐(F. Gogarten)의 역사주의


‘역사’는 고가르텐에 있어서 유연한 실제이다. 그는 ‘초자연’과 ‘자연’의 두 가지 영역에서 분리하는 것을 부정하고, ‘초역사는 더 이상의 역사가 아니다’고 잘라 말한다. 고가르텐은 하나님의 계시 사건 역시 신화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이 아닌 ‘단지 역사일 뿐’이라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그는 하나의 실존적인 인간일 뿐, 예수의 신성이나 초자연성을 부인한다. 두 본성론은 예수를 인류로부터 고립시킬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특히 ‘예수 숭배’를 거절하며, 신앙과 기원이 예수를 향할 수 있다면 우리는 예수를 하나님의 자리에 두고 인간의 모든 능력을 뛰어넘는 구원의 능력을 그에게 부여하는 것이된다. 이것은 심각한 우상숭배요, 예수 숭배가 된다.고 주장한다. 사실 고가르텐은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나 또는 필요성에 대한 인간의 자각, 하나님의 관계 등에 대해서 언급하지만, 그의 역사주의는 에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고백을 우상숭배로 여기고,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와 본질이 똑같은 인간으로만 규정함으로써 얼마든지 다른 종교적인 영웅들과 같은 위치에 세울 수 있게 만들었다. 고가르텐에 있어서 예수는 하나님이 아니다. 다만 하나님이 예수 안에 나타나신 것이다. 예수는 오직 하나님과 인격적인 일치가 이루어졌을 뿐이라고 한다. 그에게는 하나님도 역사적 실재일 뿐이다. 이 역사 자체를 넘어선 실재란 없다.


 


(3) 폴 틸리히(Paul Tillich)


20세기의 탁월한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틸리히(Paul Tillich, 1886-1965)는 신의 초월성을 강조하고 신이 어느 특정한 방법으로만 현현한다는 특별계시의 주장을 배제하면서 타종교에도 계시적 접촉이나 신과의 만남이 있다는 기독교 보편주의를 표방했다. 그는 이제 기독교는 유대인이나 이슬람교도나 힌두교도, 불교도들을 개종시키려고 노력하는 대신 자기 성찰과 대화를 촉진시켜야 할 것이라고 했다. 그 목표는 종교들을 혼합하는 것도 아니고 타종교에 대해 승리하자는 것도 아닌 자기 바판적인 대화를 통해 자기 종교의 깊이로 더욱 파고들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그는 모든 종교에 공통되는 하나의 ‘신’, 혹은 ‘신을 초월한 신’ 개념을 제시하면서 신 중심주의적 사상을 강조한다. 오늘날에는 주로 발덴휄스(H.Waldenfels), 힉(J.Hick), 파니카(R.Panikkar), 사마르타(S.J.Samartha), 오트(H.Ott) 등이 틸리히의 종교신학을 따르며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대화의 길을 모색하고 있다.


 


(4) 스미스


하버드 대학의 비교종교사 교수이자 세계적 명성의 이슬람 연구 대가였던 스미스는 종교를 연구하고, 이를 삶으로 구현하려는 사람들로부터 ‘종교’라는 개념을 제거해 버리려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그에 따르면 ‘종교’라는 말은 서구적인 개념으로 다른 종교들, 특히 동양종교들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순전히 서구적 관념에서 잉태된 ‘종교’라는 말은 종교를 하나의 사물로, 하나의 ‘객관적인 조직적 실체’로 만들어 버렸다. 스미스는 종교라고 불리는 추상적인 ‘사물’을 추구하는 대신에 살아있는 현상인 ‘신앙’에 관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러한 보편주의적 신앙에 기초해서만 모든 종교들 사이에 새로운 관계가 정립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스미스의 신 중신적 보편주의는 오늘날 카즌스(Ewert Cousins), 카모디(John Camody)같은 ‘지구신학’자들에 의해 창조적으로 계승되고 있다.


 


(5) WCC와 사마르타


WCC는 제3차 뉴델리 총회(1961) 때부터 1928년 탐바람 선교 협의회 이후 유행해 온 바르트와 크래머의 영향, 즉 타종교에 대한 부정적이고도 배타주의적 입장과 전격 결별하기 시작했다. 뉴델리 총회는 타종교를 ‘다른 신앙’으로 표현하고, ‘다른 신앙’을 통해서도 하나님이 말씀하시며 성령이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1979년 중앙위원회에서 타종교와의 ‘대화를 위한 지침’(Guideline on Dialogue)을 채택하기에 이른다.


이 지침은 무엇보다도 혼합주의(Syncretism)의 위험을 경계하면서도 ‘대화’와 ‘선교’가 결코 모순되지 않다는 것과 타종교 신봉자들도 신학적으로 의미심장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다. WCC의 이런 경향은 1983년 뱅쿠버 총회를 거치면서 더욱 확대되어 마침내 1985년을 대화의 해로 정하고 그로부터 4년간 소위원회를 통해 “내 이웃의 신앙과 나의 신앙-종교간의 대화를 통한 신학적 발견들”이라는 연구 프로그램을 수행하게 한다. 이때부터 이른바 신학적 종교다원주의 문제가 WCC무대에 본격적으로 부상된 셈이다. WCC의 이러한 경향의 핵심은 아리아라자(W. Ariaraja)를 중심으로 한 위의 연구 프로그램 소위원회가 공동 작성한 이른바 ‘바아르 선언’(Baar Statement, 1990)에서 구체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WCC를 중심으로 활동해 온 종교다원주의 신학자 가운데 대표적인 학자로 인도 출신의 사마르타(S. J. Samartha)가 있다. 사마르타는 남인도교회의 장로로서 1968년부터 1980년까지 WCC의 대화 프로그램 담당자로 일해왔다. 그는 일생을 통해 우리 시대의 절박한 요구인 세계 종교간의 대화 문제와 씨름해온 신학자이다. 1981년 발표된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과 종교적 다원사회”(The Lordship of Jesus Christ and Riligious Pluralism)에서 그는 “무엇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종교적 다원성 가운데서 사는 것을 두려워해야만 하는가?”라고 도전하고 있다. 그는 오직 신만을 유일한 절대자로 인식하고 모든 종교들을 상대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종교간의 만남의 모델을 추구한다. 사마르타는 세계의 상황이 인류 역사상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특별한 것으로 환경오염이나 핵폭발로 모든 생명체의 전멸이 가능한 처지임을 역설하고 인류 전체가 위협받는 이 마당에서 한 특정 종교의 가르침이 전 세계적 문제 해결의 유일한 해답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라고 주장하였다.


신의 신비 앞에서 모든 종교 및 모든 종교적 인물의 필연적인 상대성을 인식한 이같은 사마르타의 신 중심적 다원주의는 오늘날 대부분의 종교다원주의 신학자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관점이나, 특히 ‘모든 인간 의식의 불가피한 상대성’과 성육신 안에서의 ‘절대자의 불가피한 상대화’를 잘 인식하고 타종교에 접근하라고 알려주는 버클(Howard Burkle)과 인류와 신의 모든 계약 안에서 어떤 본질적인 상대성 혹은 한계를 발견한 도우(Donald G. Dawe)와 길케이(Langdon Gilkey)에게서 한결 돋보인다.


 


(6) 파니카의 보편적 그리스도와 특수한 예수


라이문도 파니카는 가장 심오하고도 세련된 종교다원주의 주창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스페인의 로마 가톨릭 신자인 어머니와 인도의 힌두교인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 두 종교 전통사이에서 자라났다. 화학, 철학, 신학 분야에서 각각 박사학위를 받은 사제요, 가톨릭 신학자요, 권위있는 힌두교 학자인 그는 그의 문화 교차적, 그리고 타종교에 대한 경험 때문에 지구의 변화를 자신 안에 이미 경험했고, 그 안에서 새로운 형태의 의식이 이미 구체화된 인간으로 평가되어 왔다. 무엇보다도 그는 종교간의 대화에 있어서 신 중심적 모델을 주창하는 대부분의 학자들 이상으로 제종교의 다양성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파니카는 종교적 다원주의의 새로운 시대는 ‘참된 보편적 그리스도론’을 요구한다고 확신한다. 이러한 새로운 그리스도론에 대한 그의 제안은 그리스도에 대한 “참으로 보편적인” 이해와 더불어 시작된다. 그리스도는 실재, 즉 신, 인간, 우주의 전체성에 대한 살아있는 상징이고, 이른바 시원적인 신-인 양성적 사실이며 범우주적인 신-인 양성적 실재이다. 이러한 개념들은 모두가 신-인 사이의 친밀하고 완전한 통일을 표현하려는 용어들이다. 파니카는 이러한 통일을 명시적으로 ‘비이원론적 전망’이라 칭한다.


결국 본격적인 신학적 종교다원주의에로의 문턱을 다져놓은 핵심 인물로서의 파니카 종교신학의 핵심은 보편 그리스도론을 제시하고 종교간의 대화에 임하는 세 가지 태도 유형을 설정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배다주의(exclusivism)와 포괄주의(inclusivism)을 모두 배격하고 타종교를 흡수하거나 적대시하지 않는 병행주의(parallelism)를 제시했다. 비규범적으로 그리스도론을 형성하려는 현대의 다른 여러 신학자들도 파니카가 시도한 보편적 로고스, 혹은 그리스도와 역사적 예수 사이의 구분을 수용한다. 큐핏(Don Cupitt), 맥쿼리(J.Macquarrie), 홀(Thor Hall) 등이 모두 파니카 종교신학의 발전적인 계승자들이다.


 


(7) 존 힉의 신학에 있어서의 코펠니쿠스적 혁명


존 힉은 영국의 종교 철학자요 신학자다. 그는 그리스도교가 타종교들에 접근하는 방법으로 신 중심적 모델을 제안한 사람 가운데서 가장 철저하고, 가장 혁명적이며, 가장 논쟁적인 인물이다. 힉은 라너와 같은 신학자들이 신실한 이슬람교도, 힌두교도, 유대교도들을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것은 아직도 신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중심에 모시는 옛 교조주의적 태도에서 벗어나지 못한 입장이라고 비난한다.


힉은 조만간 이 다리를 통해 건너편으로 가야 할 것을 강조하며 코페르니쿠스의 우주관에 필적할 “종교신학에서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Copernican revolu- tion in our theology of religion)을 주창한다. 힉은 종래의 타종교에 대한 배타주의적, 혹은 포괄주의적 태도는 프톨레미의 천동설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힉은 종교적 우주의 재편을 역설하면서 동시에 모든 종교의 배후에 있는 하나의 영, 하나의 신적 실재 혹은 절대자, 하나의 로고스에 관해 반복해서 말한다. 즉 모든 종교가 하나의 실재를 공유하고 있음에도 유신론적(인격적 종교), 혹은 무신론적(비인격적인 동양종교) 양태를 보이는 것은 오직 역사적, 문화적 혹은 심리학적 차이에서 온 결과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동일한 궁극적인 신적 실재에 대한 제약된 인간적 반응이라는 점에서 모든 종교들은 근본적인 통일성을 갖는다. 힉은 ‘그리스도교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교리는 신학적 프톨레마이오스 논리이라고 강하게 주장한다.


힉의 종교신학을 주도적으로 이끄는 철학적 원리는 선험적 인식론과 경험적 인식론을 결합한 칸트의 인식론적 노력이다. 인간 경험 저편에 있는 물 자체의 세계와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현상 세계를 구별하는 칸트의 인식론의 원리를 힉은 하나님 체험에 변환하여 적용한다. 힉은 예수를 신과의 만남을 위한 중재자로 본다. 그러나 유일한 중재자는 아니며 더구나 하나의 ‘신-인’도 아니다. 또, 힉은 성육신사상이 오늘날 명백한 종교적 사실과 부합되지 못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절대성을 주장할 수 있었던 뿌리로서의 성육신 사상의 전제와 성육신으로서의 예수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을 비판적으로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성육신의 진술은 예수의 말과 행동이 하나님의 사랑의 완전한 성취임을 뜻하고, 그 진술은 그리스도인들이 그의 삶 속에서 경험한 그리스도를 통한 해방의 표현이다.






(8) 니터의 신중심적 그리스도론


가톨릭 신학자인 니터는 라너의 제자로 ‘신 중심적 그리스도론’을 제시하는 대표적인 종교다원주의자이다. 니터는 먼저 신약성서의 자료들을 진지하게 다루며 그의 신 중심적 그리스도론의 모델이 신약성서의 중심적 증언에 충실하다는 사실을 입증하려 한다. 예수의 선교와 인격은 왕국 중심적, 혹은 신 중심적이었다는 것이다. 니터는 예수가 그 자신을 신적 인격으로 생각치 않았다는 힉의 견해에 동의한다. 예수의 본래적 메시지는 오직 신 중심적이고 왕국 집중적이었으나 그의 죽음과 부활 이후 초대교회의 메시지에 와서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니터는 힉처럼 초대교회의 예수 이해에 대해 ‘진화론적 변천의 가설’을 제시한다.


니터에 의하면 신학성서에 나타난 예수에 관한 다양한 증언들은 결코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신약성서의 기독론적 언어는 유대교와 헬레니즘의 환경에서 비롯된 신화적 모델과 상징적 이미지의 산물이므로 문자적으로가 아니라 해석학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신학성서 기독론의 절대적, 배타적 성격은 예수의 존재론적 본질보다는 초대 기독교의 사회적 상황의 반영이며, 따라서 형이상학적 언어라기 보다는 신화화되고 상징화된 언어의 은폐였다. 니터는 예수의 유일회성에 대한 전통적, 고전문화적 이해를 신 중심적인 개혁의 단계로 이끌어 올려 현대 종교다원주의 신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힉과 니터는 "그리스도교 유일의 신화" (The Myth of Christian Uniqueness)라는 책을 다음의 세 가지 방향을 토대로공동으로 편집하였다. 첫째, 역사적 차원에서 모든 인류 종교 형태들의 역사적 상대성을 인정한다는 것. 둘째, 신천적 차원에서 서구 남성 중심적인 신학 - 종교적 국수주의를 극복하고 다양성에 근거한 정의를 목표로 해방신학적 경향과의 접목을 모색하는 일, 셋째는 구조적 차원에서 신이 지닌 무한성과 표현 불가능성의 궁극적 신비는 그리스도교를 비롯한 몇몇 고등 종교만으로는 충분히 드러낼 수 없으므로 결국 우상적 요소까지도 포함시킬 수 밖에 없다는 인식의 심화가 그것이다. 특히 마지막의 구조적 차원의 문제는 최근의 보편종교신학 논의를 불러 일으키고 있다.


 


(9) 존 캅의 그리스도 중심적 다원주의


과정신학자 캅(John B. Cobb, Jr.)은 종교 전통간의 대화에 접근하는 자신의 입장을 그리스도 중심주의라고 밝힌다. 캅의 시도를 포괄주의로 분류하는 다원주의자들의 이해와는 달리 캅 스스로가 자신의 시도를 신중심주의보다 훨씬 더 근복적인 다원주의라고 이해한다. 달리 말하면 그리스도중심적이라고 하여 모든 시도가 포괄주의에 빠지는 것은 아니며, 그 때문에 이른바 ‘그리스도 중심적 다원주의’를 ‘신중심적 다원주의’를 넘어서는 다원주의의 새로운 양태로 이해한다.


캅은 신중심주의의 기본적인 전제, 즉 모든 종교 전통에 공유되는 공통 기반은 대화가 시작되기 전에 대화의 선행조건으로 제시되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근본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 캅은 각 종교전통의 독특한 차이에 대한 근원적 인식으로부터 대화를 시작한다. 기독교의 입장에서 말하면 그는 기독교의 독특성, 즉 그리스도에 대한 철저한 위임으로부터 대화를 시작한다. 그는 그리스도에 대한 위임 속에서 다른 전통에 자신을 개방한다. 그것은 각 종교전통의 독특성을 있는 그대로 되살리는 한편 대화를 더욱 열매있게 하고 생산적이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캅의 그리스도중심적 다원주의의 강점은 첫째 약화되었던 기독교 전통의 독특성을 다시 회복하고, 둘째로 대화의 목적을 ‘상호이해’로부터 ‘상호변혁’에로 철저화하였으며, 셋째로 종교전통의 ‘고립주의’, ‘상대주의’를 극복하고 종교전통을 창조의 ‘과정’으로 이해하는 길을 열었고, 끝으로 ‘실재의 상호연결성’에 기초하여 보편성을 ‘창조의 과정’으로 이해하는 새로운 길을 열었다.


캅은 기독교를 포함하여 어느 종교전통도 보편적이지는 않지만, 동시에 모든 종교전통은 서로로부터 독특한 것을 끊임없이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임으로써 ‘보편화’되어가는 과정 중에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캅은 각 종교전통의 독특성에 철저히 기록하는 새로운 세계공동체의 청사진을 제시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0) 보편종교신학과 포스트모더니즘


최근의 종교다원주의의 문제는 기독교가 절대적이 아니라면 기독교신학을 넘어서 모든 종교들에 두루 받아들여질 보편적인 종교신학은 가능한가라는 보편종교신학의 논쟁으로 접어들었다.


미국의 신학자 스위들러(L. Swidler)는 그가 편집한 "보편종교신학을 향하여" (Toward a Universal Theology of Religion)라는 책을 통하여 문제를 정리하였다. 그는 모든 종교의 전통적 언어를 전인류가 접근할 수 있는 용어로 보충하고 번역하기 위하여 이른바 ‘에큐메니칼 에스페란토’ (ecumenical Esperanto)를 개발하고, 그에 입각한 하나의 보편종교신학을 건설하자고 주장한다. 스미스는 이러한 작업의 가능성을 인정하였다. 가톨릭신학자 큉도 그리스도교와 유대교 및 이슬람교의 역사 속에 나타난 신은 오직 한 분이었음을 지적하면서 평화를 위한 실천적 목표로서의 보편종교신학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파니카는 이러한 보편종교신학에 대하여 가치 기준으로서의 보편성을 상정한다는 자체가 서구적 발상이라고 비판한다. 그는 오히려 종교다원주의가 다원성을 더욱 철저하고도 진지하게 수용할 것을 요구하면서 종교간의 대화를 통한 연대(togetherness)는 절실하지만 그것이 결코 통일(unity)을 뜻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캅도 보편 종교신학은 결국 기독교적 뿐 중립적 토대가 되기 어려운 형이상학적 틀에 얽매이게 하므로 반대한다. 이러한 보편 종교신학에 대한 문제 제기들은 철저한 다원적 사고를 뒷받침하며 최근 신학적 테두리안에 소개되기 시작한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의 종교다원주의 신학의 도전이기도 한 것이다.


명쾌하게 규정하기는 어렵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은 근대성의 기초가 되었던 르네상스 정신의 휴머니즘 신화와 인간 이성의 절대화를 기초로 전개되었던 계몽 계획을 비판한다. 그리고 이와 관련된 목적론적 역사 및 진보주의, 또한 기존의 언어가 지녀왔던 의미 체계를 비판하고, 계몽 계획의 도구로 채택되어 왔던 과학적 방법들에 대해 회의적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큰 이야기보다는 작은 이야기가 타당하다고 보며, 총체성보다는 단편화를 강조하고, 헤겔이나 마르크스 등의 모든 보편철학적 시도들을 비판하며 지역적이고 다원적인 것들을 중시한다. 결국 포스트모던 신학을 다원주의 신학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나 크게 보아서 맥을 같이 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단일한 중심, 획일화 등을 거부하고 다양성을 찬미하며 기존질서의 해체를 주장한다. 이전까지 합리성의 이름으로 자기를 관철시켜 온 모더니즘이 한계에 부딪혔을 뿐 아니라 자신을 관철하면서 오히려 비합리적이고 야만적인 방법을 주저없이 선택하는 것을 보면서, 이성 혹은 합리성으로는 더 이상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인식이 포스트모더니즘의 근저를 이루고 있다.


포스트모던 문화는 대체로 환상적이고 일반적인 비결정성과 비정체성 및 언어의 자기지시성에 호소하면서 어떤 한 가지 주장 자체를 부정하므로 엘리트 중심이기 보다는 대중 중심의 문화이다. 그러므로 포스트모던 신학에서는 보편종교신학이 추구하는 종교간의 총체적 논의를 위한 공통 기반의 가설이 너무 큰 이야기로 거부될 수 밖에 없다.


 


 


3. 종교다원주의의 기독교 개념


 


가. 성경에 대한 다원주의의 개념


 


정통적인 신학에선 성경을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말씀으로, 신앙 행위의 규범으로 믿지만 다원주의는 성경의 가르침을 신화로 해석함으로 인간 행위의 규범이 됨을 거부한다. 다원주의는 성경의 가르침을 신호로 해석함으로 인간 행위의 규범이 됨을 거부한다. 종교 다원주의자들은 성경이 타종교를 어떻게 말하는지는 전혀 무관심하고, 모든 종교는 대등하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심지어 서구의 시가에서 종교를 볼 것이 아니라 인도의 간지스 강과 한국의 한강의 관점에서 볼 것을 역설한다.


 


나. 종교 다원주의의 신 : 궁극적 존재


 


종교 다원주의는 신 중심의 새로운 모델을 강조하지만 그 신은 결코 인격적 신이 아님을 시인하여 기독교 신관을 반영하기 보다는 힌두교의 절대적 존재에 더 많은 영향을 받았다. 힉과 니이터는 신을 절대적 존재, 궁극적 실재, 초월적 존재로 말하는데, 이것은 폴 틸리히가 하나님을 존재로 묘사한 것에 고무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다원론자들은 모든 종교의 신은 초월적 존재로 통일이 가능하거니와 이미 하나의 신이라는 것을 말하지만 힌두교와 불교의 궁극적 존재인 브라마와 닐바나는 존재가 없는 존재이며, 회교의 알라는 달 신이며, 유교의 상제는 역시 무인격적이고 추상적인 존재라고 한다.


 


다. 잘못된 구원 개념


 


종교 다원주의는 신학적으로 기독교 밖의 구원을 말한 폴 틸리히, 존 캅, 천주교의 칼 라너, 한스 큉 등의 신학에 많은 부채를 지고 있다. 틸리히는 교회 안의 신자는 나타난 신자로, 교회 밖의 사람들은 잠재적 신화로 말하고, 선교는 잠재적 신자를 나타난 신자로 바꾸어 주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라너는 소위 익명의 신자(anonymous Chirstian)를 말하면서 불신자는 이름 없는 신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전통적 구원론인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Extra ecclesian nulla salvus)는 신학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즉 종교 다원주의는 신을 초월적 타자로 묘사하여 사람들은 자기가 믿는 종교를 통하여 절대적 타자에 도달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결국 힌두교가 가르치는 인간이 브라마와 합일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종교 다원주의는 이렇게 범신론적 구원론을 채택하므로 신비적 동양 종교로 방향 전환을 모색하는 점에서 전혀 새로운 것이 없다.


 


 


4. 한국 기독교와 종교다원주의 신학


 


가. 한국 신학에 미친 종교다원주의의 영향


 


한국 교회는 타종교와의 관계에 있어서 언제나 하나님께 대한 과잉 충성의 태도로 일관해 왔다. 율법주의적 배타주의, 문화적 강요주의, 제국주의적 승리주의가 타종교에 대한 기본 입장이 된 것이다. 그로 인해 한국 교회는 문화적 패쇄성이 낳은 규범적 태도를 자신의 바람직한 모습으로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전통적인 종교문화는 종교들이 서로 겹쳐있고, 깊이 연관되어 있었다. 이에 대하여 1887년 감리교 선교사로 내한하여 이 땅에서 최초로 기독교 신학을 시작했던 존스(G.H.Jones, 趙元時)는 “이론적으로 한국인들은 유교, 불교, 무교의 세 형식으로 구분하지만 실제적으로 이들의 혼합된 가르침을 마음에 지니고, 결국 이들 셋을 모두 믿고 있다. 한국인은 유교적 교육을 받고, 자손을 빌러 불교에 부인을 보내는가 하면, 병이 나면 무당이나 판수를 찾아서 이 세 종교의 연합된 도움으로 행복에 이른다”고 말하고 있다. 캅도 한국교회의 생명력을 불교, 유교, 샤머니즘에 의하여 결정된 한국문화의 깊이에서 우러나오는 것으로 보아서 “한국의 크리스챤들은 한국적인 신학을 전개시킴에 있어서 이러한 본원적인데서 출발하여 한국적인 전통에 적합한 성령의 힘을 개발시켜야 될 줄로 본다”고 역설하였다. 현재의 한국 기독교인들과는 다른 종교다원주의적인 문화적 태도를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신학에서도 종교다원주의적 태도를 찾아 볼 수 있다. 최초의 한국 신학자라고 할 수 있을 탁사 최병헌은 그리스도교의 타종교에 대한 이해 시도를 그의 신학작업에서 시도하였다. 그는 "성산명경"(聖山明鏡)에서 가상적 종교 인물들을 설정해 놓고 대화 형식으로 유, 불, 도교와 기독교의 관계를 논하면서 마침내는 기독교의 우월함을 깨닫게 하여 개종에 이르도록 하고 있다. 일종의 세계 종교 입문서라고 할 수 있는 "만종일련"도 제종교에 대한 핵심을 소개하면서 기독교를 포함한 역사상의 모든 종교는 다만 상대적일 뿐이나 성서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진리는 절대적이라 한다. 즉 동양의 모든 종교에 대해 관심을 보이며 이해를 시도하지만 결국 최종적인 진리는 그리스도에서 성취된다는 포괄주의적 입장이었다.


최병헌 이후로 전재되어온 한국신학의 타종교에 대한 공감적 이해의 시도 역시 최근까지도 거의 포괄주의의 틀을 유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해방 전 종교 일반에 관심을 가지고 신학적 공헌을 했던 정경옥, 채필근 등은 모두 타종교들이 지닌 진리성을 부분적으로 인정하면서 기독교가 최고의 종교의 위치에 있음을 변증하였다.


해방 후 60년대부터 전개되었던 이른바 ‘토착화 신학’은 이런 포괄주의를 더욱 정교화 한 것이다. 타종교를 그리스도교 진리 이해를 위한 전이해로 보았던 윤성범의 경우도 기독교와 타종교 사이의 역사적 연속성은 강조했지만 유교적인 성(誠) 개념을 성육신의 ‘로고스’로 포괄해 낸 것이다. 유동식도 그리스도 중심적 보편주의의에 서서 역사적 기독교 대신 복음의 진리를 기초로 타종교를 포괄하고 있다. 윤성범과 유동식은 모두 한국 종교를 ‘선교’의 문제로 다루었다.


80년대에 들어오면 타종교가 선교의 대상이 아니라 대화의 주체로 등장하게 된다. 기독교와 타종교의 관계가 신앙과 신앙, 주체와 주체의 만남이라는 종교다원주의적인 관계로 인식되기에 이른 것이다. 60년대 토착화신학의 포괄주의와는 다른 80년대의 본격적인 종교다원주의 시대를 시작한 장본인은 변선환이다. 그는 전통적인 기독론이 지닌 배타적 절대성을 극복해 낼 지혜를 ‘타종교의 신학’에서 배워 나가야 함을 강조하고 우주적 기독론의 입장에서 볼 때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할 수 있으나 그리스도는 예수에만 국한될 수 없다는 파니카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


심일섭은 변선환 박사의 신학을 평가하는 한 좌담회에서 변선환이 “동양종교의 부흥과 토착화 신학”이라는 논문에서 일곱 가지 점을 강조하였다고 지적하고 있다. 첫째는 ‘아시아인의 주체성과 영적 통전성’을 강조하였다. 둘째로 ‘타종교와의 깊은 대화를 통해서 신학하며 타종교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은총은 역사하신다.’ 셋째 ‘타종교와 배타적 대결보다는 진리와 평화와 이해를 증진시키는 방향으로 신학하자.’ 넷째 ‘종교적 다원주의 원칙하에서 신학하자.’ 다섯째 ‘성령의 역사와 우주적 그리스도를 밝힐 새 성서 연구를 도모해 나가자.’ 여섯째 ‘우주적이지만 동시에 인격적인 주님을 어떻게 고백할 수 있을까’에 관심을 기울이자. 마지막으로 ‘기독교 자체의 풍부함과 효과적 선교에’ 관심을 기울이자는 것이다.


한국의 종교다원주의 운동에서는 변선환 외에도 하나님을 에베레스트 산으로 비유하고 세상의 종교들을 그 산정에 오르는 다양한 등정로로 보는 김경재와 그의 신학은 이제 교회 중심주의, 그리스도 중심주의를 넘어 신 중심주의, 또 우주, 생명 중심주의에로 자신의 사유 모형을 급격히 전환시켜 나가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이정배, 한국에 포스트모더니즘 신학을 소개하여 주목을 끌었던 홍정수, 그리고 박종천 등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나.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복음주의의 비판


 


한국 교회에서 종교다원주의는 그 신학적 작업의 결과를 통해서보다는 현대판 종교 재판 논쟁을 통하여 일반인들에게까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991년 호주의 캔버러에서 열린 WCC 제6차 총회에서 행한 정현경의 주제발표로 인하여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한국교회의 관심이 세계교회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한국 사회가 종교다원주의 사회이며, 오랜 역사를 두고 종교 간의 갈등과 불화없이 공존하여 왔고 한 사람이 두 종교를 동시에 가지는 오랜 습성과 한국 신학의 포괄주의 내지는 다원주의적 신학작업에도 불구하고 보수주의 교회는 철저한 배타주의적 태도를 고수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작업이 더욱 두드러져 보이며 파동으로 전개되는 것이다. 복음주의의 입장에서도 지나친 배타적 자세를 경계하고 있고, ‘진리는 강하게 방법은 부드럽게’(fortiter in res, suaviter in modo)라는 유연하고도 겸손한 자세를 아쉬워하고 있다.


전호진 박사는 종교다원주의를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첫째로 종교다원주의는 19세기 성경 비평주의의 무비판적 수용에 기인한다. 하나님의 무오한 말씀으로서의 권위 부재는 급진적인 새 신학을 낳게 된다. 복음주의는 기독교가 성경을 낳은 것이 아니라 성경이 기독교를 탄생하였다고 믿는다. 둘째로 종교다원주의의 기독론은 성경적으로 말하면 예수가 하나님과 구주되심을 부인하는 기독론 부재의 신학이다. 다원주의는 너무 많은 그리스도와 로고스의 존재를 인정하여 신앙의 혼란과 구원의 개념과 내용을 다루지 않는 모순을 범한다. 종교마다 구원에 대한 표현과 개념이 다른 것이다. 마지막으로 종교다원주의는 비기독교 종교의 가치성과 구원의 가능성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이들 종교의 역기능이 기독교의 역기능보다 대단히 심각하다는 현실을 완전히 외면한다. 그는 복음주의의 입장에서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스스로 포기하는 기독교는 영적 다이나믹을 상실하며 나아가 자신의 종교를 스스로 소멸하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말하고 있다.


 


 


결론


 


기독교는 현재 다양하면서도 광범위한 사상과 이론들로부터 도전을 받고 있다. 그리고 그 도전의 배경에는 인간 중심의 합리적인 사고가 깔려있음을 우리는 인식하고 있다. 인류 평화와 복지, 가난한 자들을 위한 부의 분배, 환경 문제, 인권의 유린에 대한 문제 등 이러한 모든 상황 속에서 인간은 끝이없이 구원의 문제에 대해서 신에게 물어왔다. 바로 이러한 가장 인간적이고 원초적인 문제 때문에 종교 다원주의의 도전에 기독교가 이토록 휘청거리는 이유가 있는 것이기도 한다.


무엇보다보 다원화된 종교의 사상 속에서 올바른 신학과 신앙을 지켜나가기 위해선 하나님 말씀의 절대적 권위에 대한 복종과 이 세상의 모든 일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섭리 안에 있음을 철저히 인식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