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신학 자유주의 신학!

신정통주의는 칼 바르트

하나님아들 2021. 5. 15. 10:45

신정통주의는 칼 바르트(K. Barth, 1886~1968)에 의해 창시된 신학이다.

그는 슐라이어마허로 대변되는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의 방법론을 정반대로 뒤집어 놓았다.

그는 인간의 경험이나 종교적 의식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신학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그의 신학은 한 마디로 하나님의 말씀의 신학 또는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자유주의에 대한 맹렬한 공격과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중심에 대한 강조가 바르트 신학의 주요한 특징이다.

 

그러나 바르트와 자유주의 신학의 관계성을 이해하는 것이 그의 신학을 이해하는 지름길이다.

왜냐하면 그이 신학이 자유주의 신학과의 오랜 논쟁을 통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유주의 신학의 교육을 받고 신학자가 되었으나 훗날 자유주의와 결별하고 자유주의 분쇄를 위해 일생을 바쳤다.

 

2. 바르트와 슐라이어마허

 

슐라이어마허가 없었다면 바르트도 없다는 말이 있을 만큼 바르트는 자유주의신학의 창시자인 그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둘의 만남은 베른대학에서 시작되었다. 바르트는 슐라이어마허의 경험 신학에 흥미를 느꼈고 그에 관한 강의나 논문을 쓰기도 했다.

 

바르트의 전환점은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계기가 되었다.

하르낙, 헤르만을 비롯한 바르트의 스승들이 빌헬름 2세의 전쟁 정책을 지지하는 선언서가 발표되었는데, 바르트는 전쟁을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한편으로 그 선언서에 나타난 전체적 사상이 슐라이어마허의 신학에 토대를 둔 것으로 판단하고 이때부터 그를 정통적인 신학적 계보에서 제외시켰다.

 

바르트는 슐라이어마허로부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에게 이르는 길은 없다고 선언했다.

바르트와 슐라이어마허의 결정적인 차이와 논쟁의 핵심은 신학의 개념과 방법론에 관한 것이었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삼위 하나님에 대한 객관적인 지식이라면

슐라이어마허의 신학은 신자의 자기의식 안에 주어진 것을 단순히 개념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슐라이어마허는 하나님에 대한 절대 의존 감정을 신앙의 본질로 정의하고

이러한 감정 혹은 종교의식을 신학의 출발점과 중심 대상으로 삼았지만

바르트는 신앙을 하나님 자신의 말씀에 대한 응답으로 해석하고 하나님 말씀에 근거한 신학을 전개했다.

다시 말해 슐라이어마허가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신학방법을 택했다며

바르트는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신학의 방법론을 택한 것이다.

 

3. 바르트신학의 핵심

 

1) 하나님 말씀의 신학이다.

바르트는 다음의 3가지를 강조한다.

 

① 하나님은 하나님이다.

 

②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실재한다.

 

③ 하나님 말씀 이외에 어떤 다른 토대 위에 신학을 건설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말씀의 3중 형식으로,

 

① 성육신 하신 말씀: 예수 그리스도

 

② 쓰여진 말씀: 성경

 

③ 선포된 말씀: 설교로 보았다.

 

2)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이다.

기독교교의학(1927), 교회교의학(1932) 이후부터 그의 신학은 기독론적 접근법으로 모아졌다.

모든 신학의 초점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두었다.

신학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로 보았다.

그의 교의학의 네 가지 주제는 ‘말씀론, 신론, 창조론, 화해론’이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 외에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진정한 길은 없다고 보았다.

 

또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3중의 양식으로 알려진다고 했다. 이것을 삼위일체의 구조라고 했다.

 

① 하나님은 아버지, 아들, 성령이고,

 

② 아들은 아버지의 말씀과 형상이고,

 

③ 성령은 형상이며, 말씀을 전달하는 힘이라고 했다.

 

 

4. 과오 및 비판

 

바르트의 최대의 과오는 잘못된 성경관에 있을 것이다.

 

1) 그는 먼저 성경은 무오(無誤)하지 않다고 했다.

  그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be)’가 아니라 ‘말씀이 된다(become)' 라고 했다.

 

"선지자들과 사도들 자신은 심지어 그들의 직분에 있어서도,

심지어 증인으로서의 그들의 역할에 있어서도,

심지어 그들의 증거를 기록하는 행위에 있어서도,

우리와 같이 실제, 역사적 인간이었고

그러므로 그들의 행동에 있어서 죄가 있고 그들의 말이나 기록에 있어서 잘못을 범할 수 있었고

또 실제로 범했다"(Church Dogmatics, pp. 528, 529).

 

2) 그는 성경의 역사적 사건들 전반에 대해 매우 회의적이다.

 

"아브라함과 모세와 같은 인물들이

후대의 신화 제작의 산물들이든지 아니든지 무슨 문제가 되는가?"(The Word of God and the Word of Man, p.65).

 

"구약과 신약의 성경 역사는 실상 전혀 역사가 아니고, 위에서 보면 일련의 자유로운 신적 행위들이며 아래서 보면 본질상 불가능한 어떤 것을 이루려는 일련의 결실 없는 시도들이다"(Ibid., p.72).

 

"진정한 역사 속에 '역사적인' 것과 '비역사적인' 것이 동반하고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필요하고 의무적이다"(Church Dogmatics, III. p.81).

 

"우리는 아담 안에 있는 전체 진리가 위치한 앞뒤 문맥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 자체로는 그것이 거짓이며,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에 관계된다는 사실에서만 어떤 타당성을 가진다"(Christ and Adam, p54, 55).

 

그는 성경의 천지 창조 기록을 사가(saga, 무용담)라고 한다.

 

"그것은 자체 안에 시간의 시작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의 역사적 실상은 모든 역사적 관찰과 진술을 피하며,

성경의 창조 이야기들에서 오직 순수한 사가(saga)의 형태로만 표현될 수 있다"(Church Dogmatics, III. i. p. 42).

 

3) 다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들(성육신, 부활 등)을 신화(saga)라고 취급했다.

 

"우리의 세계가 예수님 안에서 다른 세계에 의해 접촉될 때,

그것은 역사, 시간, 혹은 사물로서 직접 관찰될 수 있기를 그친다... 그리스도로서, 즉 메시아로서의 예수님은 역사의 종말이시다.

그리고 그는 오직 역설로서(키에르케고르), 승리자로서(블룸하르트), 원시 역사로서(오베르베크)만 이해될 수 있다.

그리스도로서의 예수님은 우리의 이해를 초월해 있는 지평이시다.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그 지평을, 그는 수직적으로 위로부터 가로지르신다.

역사 안에서, 그리스도로서의 예수님은 오직 문제 혹은 신화로서만 이해될 수 있다"(Church Dogmatics, III, pp. 29, 30)

 

"그의 어머니가 젊은 부인으로 불리우는가 아니면 처녀로 불리우는가 하는 옛 논쟁은 그 진정한 의미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Church Dogmatics, IV. i. p. 5, footnote).

 

"그리스도의 부활이나 그의 재림은, 그것은 동일한 것인데, 역사적 사건이 아니다"(The Word of God and the Word of Man, p. 90).

 

"부활은 역사 안에서 일어난 한 사건(an occurrence)이다... 그러나 부활은 도무지 역사상의 사건(an event in history)이 아니다"(The Epistle to the Romans, p. 30).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이 역사적으로 발생했다는 사실에 대해서 아무런 증거도 없고 어떤 증거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는 것이 명백하다"(Church Dogmatics, IV. i. p. 335).

 

"실제로 성경 역사에 결정적 요소들인 창조 이야기와 및 다른 많은 이야기들과 공통적으로,

예수님의 부활의 역사는,

현대 학자들의 사고 형식들과 용어로, 사가(saga) 혹은 전설로 간주되고 묘사되어야 한다는 것을 대항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확실히 현대적 의미에서 역사로 생각될 수 있지만 부활은 그렇지 않다"(Ibid., pp. 335, 336).

 

4) 그는 또 보편 구원론을 주장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버려두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버림을 당하거나 최종적으로 타락하도록 허용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은혜는 반드시 죄인에게 심판의 형태를 취하지만 그를 포기하지는 않는다.

심지어 심판의 형태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는 은혜이기를 중단치 않는다"(The Word of God and the Word of Man., III. p. 34).

 

"하나님의 '예'(용납하심)는 선언되었고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것은 영원 전부터 그가 아들 안에서 택하시고 사랑하신 인류에 대한 그의 '예'이었고 '예'이다"(Ibid., IV. p. 356).

 

"하나님의 영원한 뜻에 근거하여 우리는 모든 인간 존재가, 심지어 가장 쓸데없는 자들, 가장 악하고 불쌍한 자들까지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형제이시며 하나님께서 그의 아버지이심을 생각해야 하며, 우리는 이러한 생각 위에서 그를 취급해야 한다"(The Humanity of God, p. 53).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대해 그 어떠한 종류의 제한을 가할 아무런 신학적 권리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우리의 신학적 의무는 그것이 우리가 전에 보았던 것보다 훨씬 더 크다는 것을 보고 깨닫는 것이다"

 

5) 그는 성경이 윤리의 객관적 규범임을 부정했다.

 

"선과 악의 문제는 결코 사람이 일련의 규범들로서의 하나님의 권위적 말씀을 인용함으로써 대답되지 않는다.

그것은 결코, 선하고 악한 행위들의 법전, 선하고 악한 것에 대한 일종의 잣대로서 사람에 의해 발견되거나 자신과 타인들에게 부과되지 않는다“(The Gift of Freedom: Foundation of Evangelical Ethics," The Humanity of God, p. 85).

 

그는 자유주의신학의 숨통을 조인 측면에선 매우 큰 공로자이지만

그의 잘못된 성경관은 두고두고 아쉬움을 남겼다.

 

그럼에도 고 김의환 박사(전 총신대 총장)는 생전에 “칼바르트의 신정통주의가 개혁주의와 사촌쯤은 된다”고 후한 평가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