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 이란!

웨슬레, 칼빈, 루터의 구원관 비교

하나님아들 2021. 3. 18. 11:57

웨슬레, 칼빈, 루터의 구원관 비교

서론
이 글에서는 루터, 칼빈, 웨슬리의 구원론에 대해서만 중점적으로 비교하도록 한다. 그러나 칼빈과 루터는 필요한 부분만을 살려볼 것이다. 왜냐하면 웨슬리의 구원론을 보다 분명히 이해하려는 것이 본 논문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1. 연구 방법
먼저 웨슬리의 구원론을 구원의 순서에 입각해서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칼빈의 그의 기독교 강요 제 3 권 성령론에 입각해서 그의 구원론을 살펴보고 루터는 그의 저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라는 책을 살펴보도록 할 것이다.
그리고 결론에서 각 자의 구원론의 공통점과 차이점 그리고 각 자의 특징적인 구원론을 살펴볼 것이다.
이런 비교가 보다 웨슬레를 잘 이해하고 또한 기독교 구원론을 보다 확실히 이해하여 올바른 정립을 할 수 있기를 원한다.

본론

1. 웨슬리의 구원론

웨슬레의 구원론은 간단하게 구원의 순서에 따라서 진술하도록 하겠다.

 

가. 선행의 은총

웨슬레는 칭의는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이 하는 은혜의 행위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칭의 받는 믿음은 사람의 노력의 산물이거나 은혜에 대한 사람의 응답이라고 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은혜와 같이 하나님의 일방적인 행위이다.

여기에서 딜레마가 생긴다. 그럼 인간은 칭의 받는 은혜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느냐는 것이다. 믿음이 칭의의 은혜를 주게 한다면 왜 하나님은 모든 인간에게 공평하게 믿음을 주시지 않는가? 이런 질문은 자연스럽게 칼빈의 예정론과 같은 결론을 내리게 한다.

그러나 웨슬리는 위의 질문에 대해 다른 대답을 내린다. 즉 믿음을 받기 위해 인간이 응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은 사람이 믿음의 선물을 거절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 믿음의 선물을 받아들이기 위해 능동적으로 행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 능력을 웨슬리는 선행의 은총 또는 모든 사람안에서 하나님의 값 없이 주시는 은총이라고 표현한다. 이 은총은 모든 능동적 응답의 근원이며 선한 욕망즉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하게 살아가려한는 욕망이 이것으로부터 나온다. 또한 이 선행의 은총은 받기를 기다릴 필요없이 모든 자연인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응답의 능력이다.

그래서 웨슬레는 "우리 자신의 구원을 성취함에 있어서"라는 설교에서 하나님이 먼저 활동하시니 인간도 일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믿음이 없는 이유는 인간편의 책임인 것이다.

이 선행의 은총으로 인간은 믿음을 주시기에 앞서서 하나님이 율법을 통해 주시는 회개의 촉구를 받아들이고 회개의 합당한 행위를 하려고 노력한다. 先行하는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 하나님의 역사와 죄에 대하여 무감각해진 인간의 마음이 감각적이 되고, 둔감해 있던 마음이 민감하게 열리기 때문이다.

그럼 이렇게 하나님의 율법을 통한 활동에 응답하지 않는 사람의 경우에는 하나님은 실패한 것인가? 아니다. 여기서 인간에 대한 이해를 더욱 분명히 할 수 있다. 웨슬리는 자연인은 전적으로 부패해 있지만 모든 사람에게 선행적 은총을 주어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총 아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이 웨슬 리가 이해하는 인간의 실존이다.

그런데 믿음이 생기기에 앞서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율법으로 회개의 촉구를 하신다. 웨슬리에게 있어서는 믿음이 생기기 전에 회개를 해야 한다. 선행의 은총으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올바르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 왜 인간은 믿음을 받아들이기에 앞서서 회개해야 하는가? 웨슬리는 그의 인간관에서 모든 인간은 아담의 타락이래로 모든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되었다고 한다.

웨슬레의 구원론은 모든 인간이 처해 있는 죄인으로서의 상태에 관한 그 자신의 이해와 관련을 맺고 있다. 그가 이해하고 있는 바의 인간의 상태는 세가지로 설명이 되는데, 첫째는 자연적인 인간의 상태이고, 둘째는 율법 아래에 있는 인간의 상태이고, 셋째는 은총 아래에 있는 인간의 상태가 그것이다. 이 중에서 특별히 자연적인 상태의 인간에 대한 진술은 인상적이다. 웨슬레는 자연적인 상태의 인간은 자신의 속에 하나님의 은총이 역사하고 있음을 알지 못하고 있는 상태의 인간이라고 진술하였다. 자연인은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상태는 다른 말로 원죄 즉 죄의 세력에 사로 잡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원죄로 인해서 사람은 교만하여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인간 자신에게 돌리며 인간의 생각이 하나님의 뜻보다 더 우선되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신이 구원을 이루려고 한다. 자기사랑하여 육체의 정욕대로 움직여 세상의 것으로 행복을 추구한다.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 즉 칭찬받고 싶어한다. 또한 우상 숭배(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존중하고 필요로하며 영광을 돌림)의 죄를 저지른다. 이로써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이며 죄의 결과로 인간은 심판의 대상인 것이다. 그래서 더 이상 자연상태의 인간은 하나님을 알 수 없다.

웨슬레에게 의하면 하나님은 바로 이러한 상태에 있는 인간을 그대로 방치해 주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인간의 양심 속에서 선행적인 은총으로 역사하여 자연적인 상태의 인간을 율법의 심판 아래로 이끌어 들임으로서 타락의 조건을 인식하게 한다. 선행의 은총으로 인간은 이 사실을 어느 정도 받아 들이기 시작한다. 사실 그 양심으로 죄책감 없이 사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선행의 은총을 양심이라고도 한다. 이렇게 죄인임을 깨달음으로 구원은 시작되는 것이다.


나. 확신의 은총

선행의 은총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욕망이 있게 되며 어느 정도 죄인임을 깨닫게 될 때에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 즉 율법으로 회개의 촉구를 하게 된다. 왜냐하면 인간은 전적으로 죄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해서 또는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서 민감해지고 자신의 죄에 대해서 자각을 한 인간에게 구원은 "확신적 은총"에 의해서 수행된다. 확신적 은총은 하나님에 대해서 자신의 죄의 문제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인식을 시작한 사람들에게 보다 깊은 자각을 일으키는 역할을 수행한다.

이 확신의 은총으로 인간은 스스로를 전적으로 죄인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위에서 설명했듯이 인간은 아담 이후로 타락하였다. 그래서 인간은 구원을 받을 수가 없다. 즉 아담 이후로 인간에게서 구원의 가능성은 찾아 볼 수 없는 것이다.

또한 확신의 은총으로 이제 인간 스스로의 힘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의 능력으로 구원받기를 포기하게 된다.

그리고 확신의 은총으로 죄인임을 깨달아 인정하며 스스로의 노력으로 구원받기를 포기한다면 결국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다.

이렇게 죄인임을 인정하고 포기하며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회개이다. 이 회개는 이제 선행의 은총으로 아는 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믿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웨슬레에게 있어서 믿음은 회개 이후에 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방식으로 죄인인 인간을 참회로 이끄시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웨슬레는 자신만의 독특한 특징을 갖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참회 또는 죄의 확신을 신앙보다 앞서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점에 있어서 웨슬레의 구원론은 초기의 종교 개혁자들의 이해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것이었다. 초기 종교 개혁자들에게 있어서 참회는 신앙 이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앙 이후에 신앙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신앙의 업적이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참회에 따르는 업적의 기회가 주어진다. 물론 마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십자가에 달린 두 강도처럼 기회가 없는 경우도 있기도하다.

이로 인하여 참회의 신앙은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그에 합당한 열매로서의 업적을 이루게 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와같은 참회의 업적이 구원에 필수적인 요소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 업적은 참회의 신앙의 열매로서 의인을 위하여 간접적으로 필요한 요소일 뿐이다. 즉 하나님이 인간 안에서 계속적인 역사의 조건으로 참회의 신앙에 따르는 자유로운 응답을 요구하시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의 요구에 대한 응답의 수준이 일정하게 정해져 있어서 그 일정한 수준에 도달해야만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조건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설명이다.

이 인간의 측면에서의 참회의 신앙에 따른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으로서의 열매가 갖는 성격은 다만 하나님의 계속적으로 주어지는 선물을 받을만한 준비가 되었다는 표시로서의 하나님께 응답하는 것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신앙의 업적은 참회의 신앙의 열매인 동시에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이 된다. 도덕적 의미에서 사람들로 하여금 의인의 신앙을 용납하도록 허용한다는 인간의 입장에서의 표시에 불과한 것만은 아닌 것이다.

 

다. 칭의의 은총

확신의 은총으로 진정한 회개를 했다면 인간은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 때 하나님은 복음으로 역사하신다. 그 복음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칭의를 얻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칭의에 있어서 유일한 조건이 되는 믿음은 어떤 것인가?

믿음은 그리스도의 복음 전체에 대한 동의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보혈에 전적으로 자신을 의뢰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공로를 신뢰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힘입어 사는 것이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모든 죄인의 죄를 대속하셨고 그럼으로서 생명이 되신다는 사실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의존하는 것이다. 이 믿음은 관념적이거나 사변적인 믿음이 아니다. 이 믿음은 하나님께서 그 마음에 역사하시어서 내적 변화를 일으키고 그럼으로서 하나님께 확고히 의뢰하는 믿음이다. 한마디로 고난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다.

 

라. 의인이 됨

1) 의인의 조건

웨슬레에 의하면 의인, 곧 칭의를 받기 위해서 필요한 조건은 오직 '믿음' 밖에는 없다.

앞에서 이미 언급한 것처럼 웨슬레에 의하면, 하나님의 先行하시는 은총으로 인하여 사람들은 죄를 인식하고 뉘우쳐 참회하게 되는데, 참회의 열매는 '믿음'을 간구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설명하였다. 따라서 이제 참회하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믿음'인 것이고 이를 근거로 하나님께서는 죄인인 그 사람을 의롭다고 여겨 주시는 것이다. 이러한 구조에 따라서 의인의 조건은 오로지 믿음이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믿음"은 칭의받기 위한 유일한 조건이 되는 동시에 반드시 회개,곧 참회의 과정이 수반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웨슬레는 이때의 참회를 인간 자신의 극복할 수 없는 죄성, 무력감을 깨달아 아는 것으로 이해했다.

이 믿음은 관념적이거나 사변적인 믿음이 아니다. 이 믿음은 하나님께서 그 마음에 역사하시어서 내적 변화를 일으키고 그럼으로서 하나님께 확고히 의뢰하는 믿음이다.


2) 의인의 내용

그렇다면 "의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속죄, 곧 죄의 용서이다. 사망선고를 받은 죄인을 생명으로 옮겨놓는 하나님의 선언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의인은 믿음을 통해 하나님이 선포로 이루어진 구원받은 상태이다. 그럼 이 믿음으로 칭의받아 얻는 구원은 무엇인가?

첫째 현재의 구원이다. 둘째 모든 죄(원죄,자범죄)에서의 구원이다. 셋째 죄책으로부터의 구원이다. 현재의 구원이란 현제 이 땅에서 이미 구원을 받은 것이다. 모든 죄에서 구원이란 이제 더 이상 죄를 짓는 삶을 살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습관적인 죄나 고의적인 죄 그리고 죄된 욕망에서부터 나온 죄를 짓지 않는다. 죄책으로의 구원은 율법으로 부터의 구원이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해주고 정죄한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과거의 죄책에 대해서 정죄함을 받지 않는다. 따라서 두려움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의인받은 사람의 실제 생활이 사실에 있어서도 도덕적으로 결함이 없는 상태가 되었다거나 의롭게 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죄가 없어서 하나님이 의롭게 여겨주셨다는 의미가 아니라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롭다고 여겨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죄를 죄로 인정하시지 않는 것이고, 그래서 인간을 유죄로 선고하시지 않는 것을 뜻한다.

 

마. 신생

웨슬레의 구원론에 따르면 의인의 사건에 동반되어 일어나는 사건으로 "거듭남"이라고도 말하는 "신생"의 사건이 설명된다. 이 신생의 사건은 의인과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이다. 굳이 순서를 논한다면 논리적인 순서가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진노가 사라진 후에야 비로소 성령께서 인간의 영혼 속에 역사하신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둘이 동일한 사건이라고는 하지만 서로 상이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의인이 상대적인 변화를 뜻한다면 신생은 진정한 실제적인 변화를 뜻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의롭다고 여기심으로서 인간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하시지만 인간을 새롭게 거듭나게 하심으로서 인간 안에서 일하신다.

따라서 의인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외적인 관계성을 변화시킴으로서 원수의 관계였던 것을 자녀의 관계로 변화시키는 것이라면, 신생은 인간의 내적 영혼을 변화시킴으로서 죄인을 성자가 되게 한다.

그리고 의인이 사람들을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위치로 회복시키는 것이라면 신생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시키는 것이다. 의인은 죄책을 제거하는 것이라면 신생은 죄의 세력을 제거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이 둘은 시간적으로는 동시적으로 발생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 성격에 있어서는 상이한 것이다.


1) 신생의 본질

사람을 영적인 세계로 인도하는 신생은 자연적인 출생과 흡사하여 하나님의 신령한 세계에 대한 지식은 전혀 없고, 그래서 은총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무감각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다.


2) 신생의 증거

신생은 신생하는 그 사람에게 있어서는 큰 변화를 의미한다. 하나님이 영혼을 살리실 때, 혹은 인간의 영혼을 죄로 인한 죽음의 상태에서 義의 생명의 삶으로 일으키실 때에 인간의 속에서 역사하여 외양으로 나타나는 삶의 변화된 모습이 나타난다..

우리는 믿음으로 인한 신생의 증거는 무엇인가?

첫째는 "화평"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평화가 그의 마음을 주장(골3:15)"하는 것이며 "흑암의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으로 이 상태는 하나님 이외의 어떠한 세력에 의해서도 칭의의 상태가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 상태이다.

둘째는 '소망'이다. 이것은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빌1:23)"이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이 상태는 죽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희망은 "빛나는 형상" 즉 마지막 심판주로 오는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며 "자신의 영혼이 의와 참된 거룩함으로 완전히 새로워지는 일" 즉 신령한 것으로 다시 지음 받은 몸이 되는 것이다. 다시말해서 영생을 받는 것이다. 희망은 "영광의 면류관,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분깃"을 기다리는 것이다

셋째는 '기쁨'이다. "그리스도안에서 그의 피로 속죄함을 받아 죄과의 용서를 받아서 기뻐한다." "하나님의 영이 그의 영과 함께 그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해 주시는 것을 기뻐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희망을 가지고(롬5:2) 크게 기뻐한다"

네�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다.

"그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그의 마음에 부은바 되었습니다.(롬5:5)" 이런 하나님의 사랑으로 아들이 되었으며 "하나님은 그가 보고자 하는 대상이었고 마음의 기쁨이었으며 시간과 영원에서의 그의 분깃(영생)"인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유는 성령으로 우리에게 먼저 사랑을 확신시키시었기 때문이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우리의 행위는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현제 믿는 바의 구원을 하나님이 구속하실 것을 소망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형제를 사랑한다.


바. 믿는 자의 회개

신생한 사람에게도 죄가 있는가? 아니면 이들에게는 죄가 전혀 없는 것인가? 이에 대해서 웨슬레는 바울의 주장을 따라서 육체의 정욕에 의한 악한 성질이 신생한 자에게도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긍정한다. 그의 '신자안에 있는 죄에 대하여'라는 설교에서 그는 갈5:17"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둘이 서로 대적하느니라"라는 말씀을 통해 믿는 자도 육체의 소욕과 싸워야 함을 말한다.

그럼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성서의 말은 무엇인가? 신자안에 아직 싸워야 할 죄의 세력이 남아 있다면 신자는 부분적으로 새로워진 것이 아닌가? 바울의 말을 우리는 분명히 해석해야 한다. 이 말은 믿음으로 신자는 과거의 죄책에서 완전히 새로워졌다. 즉 과거의 죄책에서 구원을 받았다는 말이다.

웨슬리는 이렇게 이 악한 정욕과 성령이 서로 대적하는 세력으로 신생한 자의 속에서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신자가 성령을 따를 때에는 항상 우세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럼으로써 웨슬레의 생각은 신자에게는 죄가 없고, 육체에 속한 정욕도 없고, 타락의 경향성도 없다는 생각과는 반대되는 생각이다.

따라서 신생한 자도 그 마음 속에 남아있는 죄성 곧 교만, 육신의 정욕, 이생의 자랑, 안목의 정욕, 우상숭배, 불신 등을 항상 느끼며 산다면 신자가 칭의와 신생함을 받은 후에도 회개가 계속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말한다.

신자안에 남아 있는 죄는 무엇인가?

고집이다. 하나님의 뜻보다 나의 원하는 것을 가지려는 의지를 더 중요시한다. 자만이다. 아직까지도 자신의 구원이 자신이 책임지려고 한다. 또한 세상을 사랑한다. 이것으로 인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 생긴다. 분노와 탐심도 신자안에 있는 죄이다.

그래서 계속하여 깨어 있어서 기도하지 않으면 때때로 자만,고집,분노를 나타내기도 하고 때로는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기도 하고 안락을 더 사랑하고 세상의 명예와 향락을 좇게 되기도 한다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태만도 죄이다. 죄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자신을 지키지 않는 것도 죄이다. 태만은 내적으로 선한 생각을 품으려 하지 않고 외적으로 사랑과 경외의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웨슬레는 회개의 필요성을 강조해서 말하는데, 웨슬레가 이 때 말하는 회개는 신생한 자의 속에 아직도 남아 있는 고집과 우상숭배의 경향성, 곧 불신앙으로 기울어지는 마음의 경향성을 깨닫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리고 과거의 죄책으로 죽게 되었던 것을 생각하며 두려워하고 마지막으로 우리 스스로 무력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불신자와 신생한 자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웨슬리는 신생하지 못한 사람은 죄에 순종하며 사는 사람이라고 단정 짓는다. 이에 비하여 신생한 자는 죄에 순종하여 살지 않는 사람이 아니다. 신생한 사람은 범죄의 가능성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 죄에 대적하여 싸우는 사람이다. 다시 말하면 신생한 자도 죄의 세력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죄의 지배 아래에 있지는 않다. 그래서 죄의 세력과 맞서서 있는데, 그 맞선 상태는 대항해서 싸우는 상태인 것이다.


사. 성령충만과 성화

1) 성화의 기준으로서의 십계명

신생한 자는 "그리스도를 닮지 않는 모든 성품" 즉 "격정과 교만, 육욕과 허영, 야심과 탐욕"에서 구원 받았다고 말하고 "육신의 정욕, 이생의 자랑, 안목의 정욕에서 초연하다(요일2:16)"고 한다. 신새한 자는 삶에서 말로서 죄짓는 일들 즉 "거짓말, 허위, 사기, 궤사, 정의나 자비에 어긋나는 말, 비방"을 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고의로 해를 끼치지" 않는다고 했다.

이런 행위는 십계명에서 지적하는 죄를 저지르지 않는 것이다. 또한 이런 자는 성화된 자이다.

 

2) 성령충만과 은혜의 수단

우리의 칭의와 성화가 하나님의 역사가 없이는 되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하나님의 물주심"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물주심"은 성령충만이다. 이것을 받기 위해서는 "날마다 하나님의 정하신 모든 의식 곧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의 정해진 수로를 계속 지키는 것" 즉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살 때에 성령충만을 받는다.

웨슬레는 구체적으로 '은혜의 수단'이라고 말한다. 종교의미로는 예배와 찬송 ,기도이며 도덕적 의미로는 선행, 구제 등이다. 다시말해서 하나님사랑 이웃사랑을 구체적으로 하는 것이다.

초대기독교의 구원받은 개인들은 "단순히 악을 행하는 일을 구만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초대기독교들의 영혼은 "선을 행하는 일을 갈망"했다.

"단순히 악을 행하는 일을 구만둔 것"은 소극적인 것 겸손, 인내 등이다. "선을 행하는 일을 갈망"은 적극적인 것으로 구제하는 것등이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찬양하는 행위인 예배도 적극적으로 드려야 하는 것이다.

 

3) 점진적이며 순간적인 성화

웨슬레의 이 성화론은 몇가지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로 지적할 수 있는 특징은 점진적인 성장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칭의를 포함하는 초기의 성화의 단계로부터 완전한 성화의 단계로 점차 성장해 가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 거듭난 이후에도 그 사람의 신앙은 계속하여 성장한다는 것이다.

웨슬레가 이처럼 점진적인 발전을 하는 것으로 이해한 성화의 시작은 신생이었다. 신생의 순간적인 경험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내적인 새로움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이로부터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으로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 부은 바 된 사랑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초기의 성화를 경험한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성령의 도우심으로 육의 악한 성질,악한 생각과 싸우면서 성화의 길을 가는 것이다.

이 성화의 발전과정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죄에 대해서 죽으면 죽을수록 하나님을 향하여는 더욱 가까이 나아가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둘째 특징은 성화의 이 점진적인 과정에서 하나님의 직접적인 역사로 인하여 어느 순간에 보다 더 높은 차원으로 끌려 올려지는 단계가 있다고 보았다는 점이다.

웨슬레가 이처럼 성화의 과정에서의 순간적인 발전의 단계가 있다고 보았던 것은 '성화'는 인간적인 노력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그 자신의 이해가 있었던 때문이었다. 그것은 특별히 그 자신의 올더스케이드街에서의 하나님 경험으로부터 얻어낸 결론으로 생각할 수 있다.


4) 웨슬레의 '그리스도인의 완전론'의 특징

첫째, 웨슬레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기독교의 진수였다. 이것은 기독교인들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얻을 수 있는 것으로서의 완전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것은 기독교인들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추구해야 할 최고의 목표이기도 하였다. 웨슬레는 이 목표로서의 기독교인들의 완전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그것은 의도의 순수성이요 삶 전체를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다. 그것은 온갖 더러움과 모든 내적.외적 불결을 탈피하는 마음의 할례이다. 그것은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두번째의 특징은 동기와 사랑 안에서의 완전을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웨슬레가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말할때에 그것은 인간 자신의 무지나 실수 등의 제약성을 탈피하는 자유를 얻게 된다고 본 것은 아니었다. 이와같은 제약성으로부터 벋어나는 자유는 "영화"의 순간으로 미룬다. 그렇다고 이와같은 제약성을 죄로 여긴 것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완전이 마음 속에 죄가 있는 상태와는 구별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죄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동기가 되는 문제로 보고 그리스도인의 완전의 문제도 그 동기의 순수성에서 찾았던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인간의 한계성을 가진 그대로의 완전이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완전한 사랑 안에서 완전하신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의해서 이루어진 관계성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웨슬레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었다.그래서 마음에는 사랑과 반대되는 그릇된 性情이 전혀없고 생각과 행동의 전부가 순수한 사랑에 의하여 지배되는 상태의 것이었다. 그래서 이러한 완전한 사람들의 생활은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생활이 된다.

세번째의 특징은 순간 순간 주를 의지함으로 유지되는 완전이었다. 이것은 웨슬레의 죄에 대한 이해에서 비롯되는 특징이다. 웨슬레는 죄를 이중적인 것으로 이해하였다. 하나는 율법을 의식적으로 범하는 죄이고, 다른 하나는 율법을 무의식적으로 범하는 죄였다.그리고 성결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이 가운데에서 의식적으로 범하는 죄는 피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 자신의 연약성으로 인하여 무의식적으로 범하는 죄는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설명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성결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삶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무의식적 죄 때문에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순간 순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웨슬레가 말하는 완전은 순간 순간 그리스도를 의지함으로 가능한 완전인 것이다.

네번째의 특징은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전도와 봉사의 원동력으로 설명되고 있다는 점이다. 웨슬레에게 있어서 성결은 윤리적 또는 사회적 성격을 지닌다. 웨슬레에 의하면 사랑의 행동이 나타나야 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은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나타나야 한다. 그리고 그 사랑의 행동은 복음 전파와 사랑의 봉사의 행동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대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행해야 되는 일이 아닌가. 하나님의 사랑은 세상을 살리고자 하는 사랑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랑도 이와같은 사랑이어야 한다. 즉 복음 전파와 사랑의 봉사의 생활로 이루어지는 사랑이어야 한다. 그리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고 어두운 세상을 밝게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랑이어야 한다". 이와같이 웨슬레가 말하는 성결론은 복음 전파와 사회 봉사의 동기와 기초를 제공하는 특징을 나타내는 것이다.


2. 칼빈의 칭의론과 성화론

칼빈에게 있어서 그의 칭의론과 성화론에 대한 설명은 칼빈의 기독교 강요 제 3 권 성령론의 부분에서 설명되고 있다. 왜냐하면 칭의와 성화가 모두 성령의 활동으로 이루어진다고 보기 ?문이다. 다시말해서 칼빈에게는 믿음을 통해 칭의 받는다면 그 믿음은 성령의 역사라고 파악되는 것이다.

그럼 지금부터 칼빈의 기독교 강요 3권 성령론에 나타난 칭의론과 성화론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펴보도록 한다.


가. 칭의 받기 위한 자세

12장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율법을 주시고 그 율법을 지키도록 계약을 맺으셨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사람의 능력으로는 그 율법을 지킬 수 없다.

율법을 지킬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에 대해 12장의 4번에서 설명하는데 인간이 율법을 행할 수 없음을 알면 하나님 앞에서 선행을 내세우지 못하며 하나님의 자비를 기다리게 된다고 말한다. 즉 율법에 자기 자신을 비춰보고 그것을 지킬 능력도 없고 실제로 지키지도 못했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면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를 죄인으로 인정하며 겸손하게 되어 그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의 복음의 은혜를 인정하고 은혜 받기 위해 하나님께 나아간다. 이점은 웨슬레와 비슷하다.


나. 칭의

그럼 칼빈에게 있어서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의 복음의 은혜를 받아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

그의 성령론에서 그는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의 의로 삼는 방법"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이 부분은 칭의를 다루는 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는 말씀이 되어 우리에게 오셨다. 이렇게 말씀이 되어 오신 그리스도를 사람의 지혜로서는 알 수 없고 성령의 역사로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는 성령과 말씀이 결합되어 있다. 그는 성령이 결합시키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의미에서 "띠"라고 한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온다. 그래서 성부와 성자를 사랑의 관계 결합시키고 신과 인간 사이를 연결시키는 띠로서 존재한다.

그래서 성령의 역사로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고 믿게 된다. 이 말의 의미는 신앙도 칭의도 사람에게서부터 나오지 않고 인간과 하나님을 연결시키는 성령의 활동에서부터 나온 것이라는 의미이다.

정리한다면 인간이 말씀이 된 예수 그리스도를 성령의 활동으로 알게되어믿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당연히 믿음의 내용도 그리스도인 것이다.


그럼 칼빈은 신앙이 생기는 작용의 형태를 어떻게 설명하는가?

그것은 1)지성적인 형태 - 말씀을 읽고 성령의 활동으로 이해가 된다. 2)정서적 형태 - 성령의 활동으로 말씀이 마음에 감동이 된다. 3)의지적 형태 - 성령의 활동으로 각오와 신념이 생긴다.

그리고 신앙의 내용은 말씀이신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우리에게 구원이 된다. 기독교 신앙의 내용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인 것이다.

그리고 신앙의 내용인 그리스도와 인간을 연결시키는 기능도 성령이 한다. 이와같은 성령의 역사로 말씀의 작용으로 사람에게 그리스도라는 내용이 채워진다.

이제 까지 보았지만 여기서 칼빈은 성령이 신적인 요소가 직접 인간에게 들어 올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을 연결시키는 기능을 성령이 가지고 있다는 식으로 말한다.

이런 식으로 그리스도의 의가 사람의 의가 된다. 다시말해서 성령의 활동으로 말씀을 읽고 이해하며 감동받고 내적으로 말씀에 내용인 그리스도에 대한 신념과 신앙이 발생하게 되어 이 믿음을 통해 칭의를 받는 것이다. 이 칭의를 통해 그리스도의 의가 사람의 의가 된다.

복음을 들려주고 하나님을 제대로 알아 신앙이 생겨야 칭의받고 중생이 가능한 것이다.


다. 칭의의 성격

기독교 강요 3권의 11장(238쪽)에서 칭의의 성격을 설명한다. 칭의는 법적인 성격으로 루터나 웨슬리와 같은데 법적이라는 말은 의롭다 칭함을 받는 사람의 경우에 자신이 거룩한 삶을 살아감으로 인해서 내용적으로 거룩해져 있는 모습을 보시고 하나님이 의롭다 칭하는 것이 아니고 여전히 죄인이지만 하나님이 형식적으로 의롭다고 칭한 것이다.

만약 내용면에서 의롭게 된 것이어서 칭의를 받는다면 여기에는 성서와 일치하지 않는 교리가 발생한다. 다시말해서 모라비안교도처럼 성화의 노력이 필요없게 되는 것이다. 성서는 믿는 자가 성화의 길을 걸어 갈 것을 설명하고 있다.


라. 칭의의 목적

13장에서는 "칭의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계시는 그의 공의를 내리신다"고 말한다. 여기에 칭의의 목적이 나온다. 즉 칭의는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 첫째 목적이다. 그러므로 칭의 받는 것을 배격하는 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자이다.


마. 성화론

14장에서는 칭의를 성화와 연결시킨다.

믿는자도 여전히 회개를 지속적으로 해야 하다. 위에서 말했듯이 칭의받은 자는 완전한 의인이 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는 아직 죄인이다. 따라서 자신이 온전히 하나님께 죄인인 것을 시인한다.

또 하나님앞에 자신의 무능력을 인정하고 겸비하며 하나님을 의지해야만이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 받을 수 있다. 이것이 믿음인데 즉 믿는 자의 회개와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그의 행위를 의롭다고 인정한다.

이 점은 칼빈,루터,웨슬리도 같다.

 

3. 루터의 구원론

루터의 구원론은 루터 자신이 쓴 “그리스도인의 자유”라는 글을 통해서 살펴보도록 한다. 이 글은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하는 대표적인 세 글 중에 하나이다.

이 글을 크게 두부분으로 나누어서 설명하도록 한다. 첫째 내적인 삶 둘째 외적인 삶이다.

 

가. 내적인 삶

이 부분에서는 신앙으로 구원받는 것을 말하고 있다. 즉 칭의론의 부분이다.

먼저 그는 이 책에서 “많은 사람들이 크리스찬의 신앙을 쉬운 것으로 생각했으며, 또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것을 덕행의 하나로 인정하고 있다. 그들은 이 신앙을 체험하지 못했고”34)라고 한다.

“신앙을 ... 덕행의 하나로 인정하고 있다.”라는 말은 신앙을 단순히 인간적인 현상 즉 인간의 능력으로 이룰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는 말이다. 특별히 이것을 종교적인 성화, 윤리적인 성화 즉 단순히 윤리적인 수준의 성화라고 했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신앙을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신앙을 체험하지 못했다는 말은 신앙이 사람 자신이 만든 것이 아니고 사람 이외의 바깥에서부터 들어온 것을 받아들인 것을 전제한 것이다.

계속해서 루터는 이 글을 통해서 믿음을 통한 신앙인의 자유가 무엇인지를 설명한다.

 

먼저 그는 두가지 명제를 세웠다.

1. 크리스찬은 자유로운 만물의 주이며 아무에게도 예속 하지 않는다.

2. 크리스찬은 만물의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예속한다.35)

 

첫째 명제에서 “아무에게도 예속되지 않는다”는 말의 의미는 모든 인간의 삶의 모든 것들 즉 먹는 것, 자는 것 등 살아가는 모든 것에서 벗어나 있고 어느 누구도 그런 자유로운 인생을 방해할 수 없다는 것이며 둘째 명제는 모든 것을 섬기며 모든 사람을 섬긴다는 의미이다.

간단히 다시 설명한다면 첫째 명제는 사람이 자유롭게 된다는 것은 오직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관계에 있어서 자신을 하나님을 진정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것은 믿음이다. 이렇게 할 때 성경에 인간의 인생에게 약속되어 있는 모든 좋은 것 즉 구원, 지혜, 의 등의 모든 것이 인간의 것이 된다.

두 번째 명제의 의미는 자신의 영혼이 하나님께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고 완전히 구원되었기 때문에 인생의 내 구원을 위해서는 더 이상 노력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수도승처럼 자신의 구원을 위해 고행하거나 하는 노력을 더 이상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더 이상 자신의 구원을 위해 공적을 쌓으려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은 온전히 자신의 삶을 남을 위해서 내어 줄 수 있게 되었다. 더 이상 구원받은 사람은 스스로를 위해 살 필요가 없고 이제 온전히 남을 위해 살 수 있다는 말이다.

여기서 모라비안설이 손쉽게 나올 수 있다. 즉 모라비안들 처럼 자신의 영혼의 구원이 100% 완전히 이루어졌다는 말이 될 수 있다. 그런데 모라비안과 루터의 다른 점은 루터는 칭의를 받았다면 자신의 의무적으로 다른 사람의 종이되어 사랑의 행위를 해야 한다고 한다. 내 육신이 아직도 나를 방해함으로 그것을 매일 같이 죽여야 한다. 그것을 통제해야 한다고 한다. 모라비안은 이점을 뺀다.

이 두가지 명제를 설명하기 위해 루터는 영적이며 육적인 인간에 대해서 먼저 설명한다.36) 이렇게 하는 이유느 고후4:16에서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다”라고 말했듯이 성경에서 영적, 육적 인간에 대해 설명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37)

이 “영적,육적”이라는 단어는 인간적인 용어가 아니라 이것은 순전히 하나님과 죄인인 인간과의 관계라고도 말할 수 있다. 즉 하나님이 인간과 관계 맺은 상태를 말한다. 이런 상태는 인간의 어떤 현실과도 상관이 없다.

루터는 영혼이 의와 자유를 얻은 상태를 영적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 영혼의 의와 자유는 “모든 종류의 행위를 배제하고”38)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모든 종류의 행위”는 인간이 삶에서 경험하는 것 전체이다. 선행을 하든지 악행을 한다는 등의 모든 것이다.

영혼의 의와 자유를 위해서 필요한 것은 오로지 한가지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이다. 루터는 이 주장의 근거를 성경에서 대고 있다. 그 성경의 말씀은 요11:25“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 것이다.”의 부분이다. 이것이 인간의 영혼을 의롭고 자유롭게 한다.39)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만 있다면 그 밖의 다른 모든 것이 없어도 자유롭게 된다. 자유롭게 된다는 말은 하나님이 약속한 모든 것을 부여 받을 수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약속한 모든 것은 생명, 진리 , 빛, 평화, 의, 구원 등이다.40)

그러면 이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이고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

말씀은 모든 좋은 것을 압축해서 담아 놓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즉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체이다. 이 복음의 말씀에 우리가 구원을 위해 필요한 영혼의 자유를 위한 모든 것이 들어 있다.

구원을 위해 말씀을 사용하는 방법은 믿음이다. 다시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 놓은 구원 즉 영혼의 자유를 얻으려면 그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고 신뢰하는 방법밖에는 없다는 의미이다.41)

신뢰한다는 말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간을 구원하기로 약속했으니 인간편에서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기를 원한다는 기대한다는 의미도 된다. 인간이 하나님께 구원하도록 모든 인간적인 행위를 배제하고 자리를 내주며 의지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편에서 현실적으로 아무런 행위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며 인간편에서 어떤 큰 노력을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그 행위를 내세울 수 없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일종의 행위이다. 더 이상 인간의 행동을 가치있게 내세우지 않고 겸비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믿음인데 이것을 보시고 의롭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이렇게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면 인간안에서 두가지의 변화가 일어난다.

첫 번째는 말씀을 받아들여 신앙을 가지기 시작한 순간 인간안에 있는 모든 것이 저주받고 무가치한 것임을 알고 죄인임을 자각한다. 이 점은 웨슬리와 틀리고 칼빈과 비슷하다. 신앙이 있고 난 다음에 비로소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내가 저주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자신말고 다른 존재 즉 당신을 위해 고난받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42) 다시말해서 복음을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게 된다. 오로지 이 믿음을 통해서만 의롭게 된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을 만드는 것은 내적인 사람안에 있는 불경건이며 외적인 사람에게서 일어나는 어떤 일을 그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지 않는다.43)

이것은 십계명의 제 1계명을 어기면 즉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한 행위는 모두 죄이며 1계명을 인정하면 의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은 믿음으로 행동했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으로 인정하는 것이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인데 다시말하면 그 하나님께서 복음에 나타난데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사실대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것이 믿음이다.

 

그러면 루터가 볼 때에 성경에서 인간의 행위와 종교적인 의식을 규정하는 명령이 있는데 그것과 이 신앙의 관계는 무엇인가?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성경을 두 부분으로 구분한다.

첫번째는 율법이고 두번째는 약속이다. 율법을 구약에 연결시키고 약속을 신약성경에 연결시킨다.

첫째 율법은 웨슬리에게서도 살펴보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선한 행위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주며 따라서 인간은 그 계명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

둘째 이 율법은 사람의 힘으로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44) 따라서 인간은 실로 겸비하게 된다. 율법을 완수하지 못했을 때 인간은 정죄를 받게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 점은 웨슬리의 구원의 순서에 있어서 율법의 역할 부분과 아주 비슷하다.

이런 상황에서 두 번째 부분인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를 돕게 된다. 그 약속은 “만일 네가 율법이 명령하는 대로 율법을 완수하고 탐내지 않기를 원한다면, 와서 그 안에서 은총, 의, 평화, 자유 및 모든 것이 너에게 약속된 그리스도를 믿으라. 만일 네가 믿으면 모든 것을 가지게 될 것이나 믿지 않는다면 너는 모든 것을 가지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45)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함으로 이룰 수는 없지만 신앙으로는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율법의 요구를 이루지 못해도 마음 속에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 것이다.

이런 이치의 배후에 있는 것은 하나님이 명령하시고 이루신다는 점이다. 이 점을 이해해야 한다.

이렇게 굳건한 신앙으로 이 말씀에 매어 달리는 영혼은 이 말씀과 결합된다. 그래서 말씀의 능력의 동참한다. 이런 결과로 영혼의 의와 자유를 얻게 된다.

웨슬리와 비교한다면 그에게 있어서 칭의의 효과로 구원을 얻는다. 그것은 현제적 구원으로 모든 죄로부터 벋어나서 구원을 얻고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다. 그리고 성화라는 개념도 죄를 짓지 않는 삶이다. 그런데 루터 하나님의 능력이 내 속에 들어와서 연합하여 구원을 이루고 따라서 자신은 이제부터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결합된 신앙은 먼저 구원을 위해 어떤 공적도 필요하지 않게 된다. 이것이 첫째 능력이다.46) 그러므로 율법으로부터 해방되었다. 이것은 모든 인간의 행위로 부터의 해방이다. 내가 의롭게 되어 구원을 받기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한다는 강박관념에서의 해방이다.

둘째 능력은 율법이 요구하는 대로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믿음으로 하나님을 온전히 인정하게 되었다. 이렇게 될 떄 영혼은 하나님의 뜻에 일치된다.

그 이유는 예를 들어서 만약 누군가를 믿는다면 그 사람이 진실되다 참되다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즉 그 사람의 정체성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믿는 것이다. 하나님에게도 똑 같이 적용되어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분이 의로우시고 구원을 이루신다고 인정한다. 이것이 진정한 경외이다. 믿음은 하나님이 구원을 이루신다고 인정하고 의지하는 것이다. 따라서 믿음은 진정한 경외이다.

따라서 약속을 믿지 않는 것이 가장 불경건한 것이다. 즉 믿음 없이 율법을 열심히 지키려는 것이 하나님을 경멸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활동하시게 믿음으로 하나님을 인정해야 한다. 인간적인 노력은 배제 되어야 한다.

셋째 이득은 그리스도와 결합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것이 인간의 것이 되고 인간의 것이 그리스도의 것이 된다. 그리스도의 의와 생명과 구원이 그리스도의 것이고 죄와 사망이 인간의 것이다.47) 또한 그리스도는 왕같은 제사장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결합된 그리스도인은 왕같은 제사장이다. 왕이라는 말이 이 세상의 어떤 것에도 의존되지 않고 자유롭다는 것이고 즉 구원받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영혼의 자유를 얻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설교하며 구원받는 것을 올바로 가르치자고 한다. 첫째 율법을 알게해서 죄를 알게하고 즉 죽음에 대한 공포를 알게 하고 주님에 대한 소망을 가지게 하며 즉 자신이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고 둘째 그리스도의 의가 나의 죄가 그리스도의 것이 되어서 극복되는 것을 알게 한다. 셋째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그리스도의 승리가 우리의 것이 된다. 그래서 신앙도 우리의 것이 된다는 것을 가르친다.

 

나. 외적인 삶

그럼 선행이란 것이 왜 명령되는가?48)

첫째 우리가 육체적인 현실가운데 사는 한 우리는 미래에 있을 완성(부활)을 향해서 나아가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을 인정하며 생활하기 때문이다.

둘째 우리의 육체는 죄의 유혹을 끊임없이 당하게 되며 다스리지 않으면 믿음대로 살 수가 없다. 그런데 신앙의 정신은 이 죄의 유혹 즉 자신이 육가운데서 세상을 섬기려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따라서 선행의 요구는 당연하다.

그런데 우리의 선행이 의로운 행위로 인정되서는 않된다. 왜냐하면 믿음은 이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즉 인간의 능력으로 선행을 행할 때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은 이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선행을 행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믿음안에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 선행을 행한다. 이것이 셋째 이유이다.

자신의 선행을 의롭다고 스스로 인정하지 않으면서 믿음으로 새로운 존재가 되어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뻐하시게 하기 위해 선행한다.

그런데 인간의 믿음과 사랑이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선행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선행을 통해 믿음과 사랑이 증진되기도 한다. 이 점은 웨슬레의 점진적인 성화의 부분과 비슷하다. 웨슬레도 성화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루터는 이어서 선행을 행할 때의 전제와 선행인 이웃사랑에 대해서 말한다.49)

전제는 믿음없이 선행을 행하는 것은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신앙이 선행을 낳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분께 의지함으로 선행을 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런 믿음없이 공적만을 내세운다면 믿음은 파괴되고 하나님은 믿음이 없는 상태의 인간을 의롭다고 할 수 없으므로 믿음 없는 선행은 무의미한 것이다.

그리고 이 선행의 기준은 믿음의 근거인 말씀의 내용 즉 예수 그리스도이며 그리스도께서는 종의 형체를 입어 섬기는 사랑을 했다. 그래서 인간도 믿음을 따라 그리스도와 같이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이 글에서 루터는 이웃의 사랑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믿음으로 그리스도인이 자유를 얻어 더 이상 인간의 삶의 어떤 것에도 예속되지 않음으로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 신경 쓸 필요가 없으며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처럼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다. 구원의 순서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루터에게 있어서의 구원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1)말씀(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음

인간 자신이 율법을 행함으로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을 받으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인간이 스스로의 공적을 하나님께 자랑하는 상황에서 말씀을 듣게 된다.

그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예수님이 인간이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음을 알고 스스로 종의 형체를 입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시어 하늘에 오르신 사건이다. 이것은 말씀의 핵심이다. 정리하면 말씀은 이 복음을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다.

 

2)신앙의 시작

말씀을 듣는 순간에 그 말씀을 받아 들이느냐 않느냐에 따라 신앙이 시작되거나 시작되지 않는다. 이 말씀을 신뢰해야 한다. 그리고 더 이상 스스로의 노력으로 의롭다고 인정받으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복음으로 의롭게 한다고 했기 때문이다.

 

3)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함

말씀을 신뢰하면서 인간은 스스로 율법을 행하여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없음을 인정하게 된다. 즉 인간안에 있는 모든 것이 저주받고 쓸모없음을 알고 자각한다는 말이다.

 

4)복음을 요청함

인간 스스로가 저주의 대상인 죄인임을 알게 되면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복음을 신뢰하고 받아들인다. 신뢰한다는 말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한다고 하는 복음이 역사하도록 기대하며 인간적인 행위를 배제하고 의지하는 것이다.

 

5)신앙이 생김으로 칭의 받음

복음에서 말하는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의지함으로 인해서 믿음이 생기며 그 믿음을 통해서만 의롭다고 칭함을 받는다. 말씀은 인간이 신뢰하고 의지할 때 인간에게 역사해서 신앙이 생기게 한다. 칭의 즉 영혼이 자유롭기 위해서는 말씀 즉 복음을 믿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 되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 말의 의미는 인간이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인정 받을 수 없으며 그러므로 율법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다른 말로 죄에서의 해방이다. 율법을 지킴으로 의롭다고 인정받으려면 결국 죄인으로 인정 받을 수밖에 없었지만(인간의 무능력으로 인해서)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죄에서 구원을 얻는 것이다. 즉 영혼이 의로움과 자유함을 얻게 된 것이다. 이것이 신앙의 첫 번째 능력이다.

또한 신앙함으로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하게 된다. 즉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게 된다. 왜냐하면 믿음은 믿는 대상의 정체성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두 번째 신앙의 능력이다.

마지막으로 신앙으로 그리스도와 결합되어 그리스도의 의가 자신의 의가 되고 자신의 죄가 그리스도의 죄가 되어 이제 어떤 것에도 구원이 방해받지 않는다. 이것이 세 번째 신앙의 능력이다.

 

6)믿는 자의 선한 삶을 살아감(성화)

가)믿는 자의 회개

믿는 자는 믿음으로 자신에게서 아무 것도 공로로 내세울 수 없음을 인정하고 자신의 무능력을 시인하며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한다.

 

나)믿음으로 구원받아 이웃의 구원을 위해 내어 줌

자신의 영혼이 하나님께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고 완전히 구원되었기 때문에 자신의 인생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더 이상 노력할 필요가 없으며 이제 그리스도를 본받아 다른 사람들을 섬기며 사랑하고 이웃의 구원을 위해 자신의 삶을 내어 줄 수 있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사랑하는 삶을 원하시므로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사랑한다.

 

다)완전을 이룰 수 없음

루터는 육정과 방종을 극복하는 선행이 “내생에 이르기까지 자라나야 한다”50)고 말한다. 이 점이 웨슬리와 다른 것이다. 루터는 우리가 육신을 벋기 전에 그리스도의 완성이라는 것을 전제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웨슬리는 아니다. 웨슬리가 완전을 강조한 이유는 죄를 짓지 않기 위해 그리고 진정한 회개와 믿음을 위해서이다. 완전을 강조해야만 끝까지 힘있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 하나님이 완전을 약속했다면 그 약속을 믿고 기대하며 완전을 이루기 위한 신앙의 생활을 할 것이다.

 

라)끝까지 선행의 노력을 함

그리스도인은 선을 행함으로 구원을 얻지도 않으나 끝까지 선을 행하기 위해서 노력한다. 왜냐하면 육정과 방종이 죄의 유혹을 해도 믿음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론

1. 공통점

가. 칭의의 근거

세 명은 칭의의 근거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라는 점에서 분명히 같다. 인간은 스스로의 능력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으며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구원을 받는다.

 

나. 믿은 자의 회개

신자가 그 안에 죄의 성질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그 죄와 싸워야 한다는 것과 지속적으로 회개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한다.

 

다. 죄를 깨닫게 하는 율법

율법을 죄를 깨닫게 하고 자신이 온전히 죄인이라서 스스로의 능력으로 구원 받을 수 없음을 알려 준다고 말한다.

 

라. 복음을 요청함

구원을 받기 위해 복음인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는 것을 복음의 역사로 알게 되어 복음이 내 안에서 역사하기를 요청한다.

 

마. 거듭난 신자는 하나님의 뜻대로 사랑하는 삶을 살아감

세명 모두 신자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한다고 한다. 이것은 성화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다.

 

2. 차이점

가. 인간의 무익함을 주장하는 순서

웨슬리는 선행의 은총으로 시작해서 확신의 은총으로 회개하며 인간이 스스로의 능력과 모든 것이 구원을 이루기에 무익하다는 것을 알지만 칼빈과 루터는 신앙이 생긴 다음에 이런 역사가 나타난다고 말을 한다.

 

나. 성화의 시기

루터는 세상에서는 완전해질 수 없음을 말한다. 그러나 웨슬리는 세상을 사는 동안에 성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말을 한다.

 

3. 각자의 독특한 사상

가. 칼빈

1) 예정론

칼빈은 하나님이 믿음을 통해서 사람을 구원한다고 했을 때 모든 사람이 아니다. 칼빈은 하나님이 믿음을 통해서 사람을 구원한다면 하나님은 믿음이 없는 자에게는 믿음을 주지 못해서 실패한 것이라는 논리를 피하기 위해 하나님이 믿음을 통해 구원할 사람을 선택했다고 말한다.

칼빈주의에 따르면 하나님의 예정은 하나님의 단 일회적인 결정에 의하여 어떤 이들은 구원으로 정해졌고 어떤 이들은 멸망으로 정해졌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대속은 오로지 구원으로 예정된 사람들만 위한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대속”의 은총을 구원으로 예정된 자들에게만 유익한 것으로 제한하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었다

 

나. 루터

루터의 경우에는 자신의 영혼이 하나님께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고 완전히 구원되었기 때문에 자신의 인생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더 이상 노력할 필요가 없으며 이제 그리스도를 본받아 다른 사람들을 섬기며 사랑하고 이웃의 구원을 위해 자신의 삶을 내어 준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사랑하는 삶을 원하시므로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사랑한다.

루터는 믿음을 통한 구원을 웨슬리보다 더욱 확고히 설명하고 있다.

 

다. 웨슬리

1) 先行하시는 은총

웨슬레의 은총론의 특징 중의 하나는 하나님의 ‘先行하시는 은총’을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웨슬레의 이 先行的 은총론은 종교개혁으로부터 비롯되는 기독교 신앙의 진리의 입장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51).

태초에 하나님에 의해서 피조되었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서 창조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능력이 그 안에 있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 충만하였다. 그래서 이 처음의 인간은 죄가 없는 상태에서 살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 최초의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였었다. 이는 善行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자신으로부터 善으로 지향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존재였다. 그럼으로 다른 어떤 피조물들보다도 뛰어난 존재였다.

그런데 이 태초의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게 되었고, 이로써 하나님께 대한 범죄가 성립되어 창조때에 하나님에 의해서 은혜로 주어졌던 본래적인 善한 상태는 붕괴되었다. 이는 곧 최초에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의지에서 惡으로의 가능성을 택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인간은 惡德을 지닌 타락한 존재가 되었고, 죄책과 형벌을 지닌 존재가 되었다. 물론 그가 지니고 있던 자유의지도 상실하게 되었다. 그래서 무능력하고 무기력한 존재가 되었고, 그 스스로는 자신의 구원에 유익한 어떤 선한 행위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는 존재가 되었다.

이 사실을 깨닫게 해주고 선한 것을 알게하여 하나님의 역사에 응답하도록 하게 한 것이 선행의 은총이다. 이것은 웨슬리에게서 볼 수 있는 특징이다.

이 선행적 은총은 참회와 義認의 과정으로 인도되는데에 필요한 인총일 뿐이다52). 하나님의 이 선행하시는 은총으로 말미암아 부분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자유의지가 회복된 것이다. 그래서 이 은총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응답하던지 거부하든지 할 수 있는 첫 기회가 주어지게 된 것이다.그래서 선행적 은총은 하나님의 구속사업의 첫 출발점이고, 이 은총의 역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 현존적인 것이라는 설명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선행하시는 은총으로 말미암아 이제 인간에게는 계속적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 들이느냐 아니면 거절하느냐 하는 것을 결정할 수 있는 자유가 회복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이 결정한 내용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만 되는 책임적인 존재로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바로 이와같은 모든 실존하는 사람들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은총을 웨슬레는 “선행적 은총”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 것이다.

그리고 웨슬레에게 있어서 이 선행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은 타락한 인류 전체에게 공통으로 역사하는 은총이었다.

그렇다고 웨슬레가 죄인인 인간이 선행을 함으로서 의로워질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웨슬레는 인간에게 선한 동기가 생기고 하나님을 향한 어떤 일을 할 수 있다면 이는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즉 웨슬레에게 있어서 첫 출발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뿐인 것이다. 다만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인류는 타락하였지만 하나님은 그 타락한 인류를 위하여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웨슬레는 본 것이다. 이것이 바로 先行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며, 이 先行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타락 이후로 타락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웨슬레의 구원론에서 모든 사람들은 은총 아래에 있는 죄인들이다53).

그렇다면 선행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은 무엇인가? 그것은 무엇보다도 인간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양심”이었다54). 양심은 모든 사람이 공유하고 있는 것으로써 이로부터 선악간의 이해가 생기고, 여기에 이성이 작용함으로써 선악간의 판단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웨슬레에 의하면 바로 이 양심에 하나님께서는 善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해 주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양심에 부여해 주신 하나님의 先行하시는 은총으로 인하여 하나님께로 전환하기에 충분하다는 것이다. 이 선행적인 하나님의 은총으로 인하여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이 구속에 대해서 응답하든지 거부하든지 할 수 있는 첫 기회가 주어지고 이 때문에 선행적 은총은 하나님의 구속 사업의 첫 출발점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웨슬레의 구원론의 특징은 이와같은 ‘先行的 은총론’을 통하여 인간의 구원은 하나님에 의해서 주도되는 것으로 설명하면서도 또한 동시에 인간의 책임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바로 이와같은 특징은 “福音的 神人 協同說”에 더욱 잘 나타나고 있다.

 

2) 복음적 신인 협동설

웨슬레의 은총론의 특징 가운데에 또 하나의 특징은 하나님의 은총과 인간의 善行이라는 상호 대립적일 수 있는 두 측면을 해결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고대의 펠라기우스논쟁에서 나타난 어거스틴의 구원론의 약점과 펠라기우스의 구원론의 약점을 동시에 극복한 것이었다.

어거스틴의 구원론에 의하면 인간적인 善行의 가능성은 전혀 없는 상태에서 설명되었다. 인간은 오직 하나님의 예정하심에 의해서 구원받을 사람은 구원으로 遺棄로 작정된 사람은 유기로 정해져 있다는 입장이었다. 또 펠라기우스의 입장은 인간의 가능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하나님의 주권은 도외시하는 결과를 초래했었다.

그런데 웨슬레는 바로 이와같은 두 사람의 약점들을 보완하는 구원론을 설명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복음적 신인 협동설”이었다. 웨슬레에게 있어서 인간의 구원의 문제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에 의존하고 있지만,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인간에게도 그 책임이 주어진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선행적 은총에 근거하여 하나님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선행적 은총의 역사가 있기 때문에 죄를 회개할 가능성과 능력이 인간에게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원에 있어서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에 호응하며 함께 일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웨슬레가 말하는 “福音的 神人 協同說”이다.

웨슬레는 이 복음적 신인 협동설의 근거를 빌립보서 2장 12절~13절에서 찾는다55).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느니라”. 웨슬레는 이 귀절에서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신다”는 설명에 주목한다. 즉 사람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선한 일을 하겠다는 생각을 하거나 행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구원에 있어서 출발은 하나님의 행하심으로부터 시작한다는 의미이다.

그 다음에 웨슬레가 주목하는 것은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이다. 사람들은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야 하는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을 이루지 못한다면 그 책임은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에게 있다는 설명이다. 웨슬레는 이에서 더 나아가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선을 행하라고 분부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 두가지의 명제는 서로 모순이 되는 것처럼 보이는 명제이다. 그런데 웨슬레에게 있어서 이 두 명제는 서로 모순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 긴밀한 관계로 연결이 되어지는 명제이다. 이 두가지의 명제를 근거로 하여 웨슬레는 “하나님께서 일하시니 그러므로 사람들도 일할 수 있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일하시니 사람들도 일해야 한다”는 주장을 도출한 것이다. 이와같은 복음적 신인 협동설은 웨슬레만의 독특한 특징이었다. 이것은 고대의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의 논쟁에서 나탄났던 상호간의 약점들을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방향 모색이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3) 만인 대속의 은총56)

웨슬레에게 있어서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모든 은혜는 인류를 구원하시기로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온 것이다. 웨슬레는 이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총과 연관 짓는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인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대속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고 또한 모든 믿는 자들을 의롭다고 여겨 주신다.

이 점에서 웨슬레의 구원론은 ‘이중 예정론’에 근거해서 제한된 그리스도의 죽음을 주장하는 칼빈주의를 비판하는 위치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칼빈주의에 따르면 하나님의 예정은 하나님의 단 일회적인 결정에 의하여 어떤 이들은 구원으로 정해졌고 어떤 이들은 멸망으로 정해졌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대속은 오로지 구원으로 예정된 사람들만 위한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대속”의 은총을 구원으로 예정된 자들에게만 유익한 것으로 제한하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었다.

그런데 웨슬레는 이에 반하여 그리스도의 대속은 모든 사람들의 구원을 위한 것으로 이해한 것이고, 그래서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하시기로 정하셨다고 말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웨슬레의 견해는 칼빈주의의 제한된 대속론에 대해서 반대의 입장을 분명히 하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웨슬레는 칼빈주의의 예정론에 반대하는 입장을 통하여 그 자신의 “만인 대속의 은총”에 대한 설명을 더욱 강력하게 제시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의 주장인즉 만약 칼빈주의가 말하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죽음이 구원으로 예정된 사람들만 위한 제한된 것이라면 신앙인의 전도생활은 헛수고가 될 것이고, 또 영혼의 구원을 위한 설교도 필요없게 될 것이며, 성도가 선행을 하기 위하여 열심을 낼 필요도 없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4) 성화의 시기

웨슬레는 성화가 이 땅에 있는 동안에 이루어진다고 말했다. 그리고 성화의 상태에 대해서도 독특하게 말한다. 이것은 위에서 모두 설명했다.

 

4. 정리의 말

세사람의 구원론이 이렇게 차이가 있는 것은 지속적인 연구대상이다. 어쩌면 이런 구원의 교리에 대한 차이가 현제 많은 교파를 만들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아무튼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구원의 교리를 더욱 분명히 하기 위해 세사람을 더욱 연구해야 한다.

그리고 감리교인으로서 성화의 교리를 쉽게 포기해서는 안된다. 성화의 교리가 포기되면 감리교인의 정체성 즉 쉼 없는 성화의 정진으로 활동적이며 움직이는 신앙인이 되기 어렵고 나태해질 수 있는 것이다.

앞으로도 이 세사람의 구원론에 대한 연구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1).William R. Cannon, ?요한웨슬리 신학?, 조종남번역(서울:감리교교육국), p.132.

2).Ibid, p.132.

3).Ibid, p.138

4).조종남, ?요한웨슬레의 신학?, (서울:대한기독교출판사, 1993), p.133.

5).조종남, ?요한웨슬레의 신학?, (서울:대한기독교출판사, 1993), p.129.

6) Ibid, pp.60~61.

7).조종남저, ?요한웨슬리 설교전집?, (서울:문덕인쇄 , 1994), pp.97~100.

8).William R. Cannon, ?요한웨슬리 신학?, 조종남번역(서울:감리교교육국), p.240.

9).조종남저, ?요한웨슬리 설교전집?, (서울:문덕인쇄 , 1994), p.79.

10). 콜린 W .윌리엄즈, ?존 웨슬리의 神學:現代的 意義?, 이계준 譯 (증보판, 서울:전망사,1993), p.41.

11).조항백, “요한웨슬레의 完全思想 이해”(석사학위논문:서울신학대학 신학대학원,1990), p.23,39.

12). 조항백, “요한웨슬레의 完全思想 이해”(석사학위논문:서울신학대학 신학대학원,1990), p.23,39.

13). 이장옥, “J.Wesley의 성화윤리 연구”(석사학위논문:감리교신학대학신학대학원,1990), pp.13~15.

14) Ibid, pp.16~17.

15) 이장옥, “J.Wesley의 성화윤리 연구”(석사학위논문:감리교신학대학신학대학원,1990), pp.13~15.

16) Ibid.

17)이동명, “웨슬레의 구원관이 현대선교에 끼친 영향”(석사학위논문:감리교신학대학대학원,1991), p.30.

18). 조종남저, ?요한웨슬리 설교전집?, (서울:문덕인쇄 , 1994), p.18~19.

19).조종남저, ?요한웨슬리 설교전집?, (서울:문덕인쇄 , 1994), p.21.

20).Ibid, p.20.

21) 조종남, ?요한웨슬레의 신학?(개정증보판, 서울:대한기독교출판사,1993), pp.178~179.

22). 조종남, ?요한웨슬레의 신학?(개정증보판, 서울:대한기독교출판사,1993), pp.178~180.

23).조종남, ?요한웨슬레의 신학?(개정증보판, 서울:대한기독교출판사,1993), pp.50~54.

24).조종남, ?요한웨슬레의 신학?(개정증보판, 서울:대한기독교출판사,1993), p.112.

25).조종남, ?요한웨슬레의 신학?(개정증보판, 서울:대한기독교출판사,1993), p.119.

26).Ibid,119

27).조종남, ?요한웨슬레의 신학?(개정증보판, 서울:대한기독교출판사,1993), pp.135~137.

28).Ibid, 139.

29) 이장옥, “J.Wesley의 성화윤리 연구”(석사학위논문:감리교신학대학신학대학원,1990), pp.21~22.

30) 조종남, ?요한웨슬레의 신학?(개정증보판, 서울:대한기독교출판사,1993), p.189.

31) Ibid, pp.189~191.

32) Ibid, pp.191~194.

33) Ibid, pp.194~196.

34).마틴루터,?종교개혁3대논문?,지원용옮김(서울:컨콜디아사,1993), p.263.

35).마틴루터,?종교개혁3대논문?,지원용옮김(서울:컨콜디아사,1993), p.264.

36).마틴루터,?종교개혁3대논문?,지원용옮김(서울:컨콜디아사,1993), p.264.

37).마틴루터,?종교개혁3대논문?,지원용옮김(서울:컨콜디아사,1993), p.264.

38).마틴루터,?종교개혁3대논문?,지원용옮김(서울:컨콜디아사,1993), p.265.

39).마틴루터,?종교개혁3대논문?,지원용옮김(서울:컨콜디아사,1993), p.266.

40).마틴루터,?종교개혁3대논문?,지원용옮김(서울:컨콜디아사,1993), p.266.

41).마틴루터,?종교개혁3대논문?,지원용옮김(서울:컨콜디아사,1993), p.267.

42).마틴루터,?종교개혁3대논문?,지원용옮김(서울:컨콜디아사,1993), p.267.

43).마틴루터,?종교개혁3대논문?,지원용옮김(서울:컨콜디아사,1993), p.268.

44).마틴루터,?종교개혁3대논문?,지원용옮김(서울:컨콜디아사,1993), p.269.

45).마틴루터,?종교개혁3대논문?,지원용옮김(서울:컨콜디아사,1993), p.270.

46).마틴루터,?종교개혁3대논문?,지원용옮김(서울:컨콜디아사,1993), p.271.

47).마틴루터,?종교개혁3대논문?,지원용옮김(서울:컨콜디아사,1993), p.273.

48).마틴루터,?종교개혁3대논문?,지원용옮김(서울:컨콜디아사,1993), pp.283~285.

49).마틴루터,?종교개혁3대논문?,지원용옮김(서울:컨콜디아사,1993), pp.291~301.

50).마틴루터,?종교개혁3대논문?,지원용옮김(서울:컨콜디아사,1993), pp.284.

51)이동명, “웨슬레의 구원관이 현대선교에 끼친 영향”(석사학위논문:감리교신학대학대학원,1991), pp.26

52) 콜린 W .윌리엄즈, ?존 웨슬리의 神學:現代的 意義?, 이계준 譯 (증보판, 서울:전망사,1993), pp.43~44.

53) 조종남, ?요한웨슬레의 신학?(개정증보판, 서울:대한기독교출판사,1993), pp.131~133,158~162.

54) 콜린 W .윌리엄즈, ?존 웨슬리의 神學:現代的 意義?, 이계준 譯 (증보판, 서울:전망사,1993), pp.42~48.

55) Ibid.

56) 조종남, ?요한웨슬레의 신학?(개정증보판, 서울:대한기독교출판사,1993), pp.137~1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