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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의 실체와 기독교의 대응

하나님아들 2021. 1. 9. 10:14

이슬람의 실체와 기독교의 대응

 

우리는 이슬람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알라, 꾸란(코란), 무함마드(모하메트), 아랍어중동, 팔레스타인, 9.11, 알카에다, 탈레반, 아프간 피랍사태 정도일까?

이슬람의 규모를 조금만 더 살펴보자.

약 13억의 신도(전 세계 65억 인구의 22%를 차지. 이슬람권에서는 16억이라 주장),

세계인구 5면 중의 한 명이 무슬람(이슬람교도), 세계 57개국의 주도적인 종교,

중동은 물론 한국과 일본을 제외한 아시아 전역에서 가장 강성한 종교, 세계 전역에 확산되어 있는 종교....

 

여기에 우리 기독교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현실을 이해한다면

이슬람은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놀라운 실체를 가진 그들임을 감지할 것이다.

통계적으로 기독교에 바로 뒤따라오는 종교(개신교<8억>만 본다면 이슬람은 실로 세계 최대의 종교이다).

기독교보다 더 빠른 성장률을 보이고 있는 유일한 종교(1.3% vs 1.9%),

과거에는 기독교의 영토를 유린하기까지 했던 유일한 종교, 기독교 세계였던 유럽과 서구를 장악해가고 있는 종교....

나아가 다음과 같이 분명히 선언하는 유일한 종교가 바로 이슬람이다.

“우리는 기독교의 오류를 교정하며, 완성하며, 따라서 기독교를 대신한다.”

한 마디만 더 첨언해 보자.

이슬람법이 다스리는 전 세계적 이슬람 공동체인 ‘움마’(Ummah)의 건설을 꿈꾸며 그것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종교가 바로 이슬람이다 !

 

그런데 최근 한국에서 소개되고 있는 이슬람의 실체를 들여다보면

그것이 대중에게 미칠 영향력을 감안해 볼 때, 심각한 우려를 금할 수가 없다.

한국의 미디어들이, 심지어 가장 파급효과가 큰 공중파 방송들마저 이슬람을 미화하여 소개하기에만 분주한 형편이다. 어떤 경우에는 마치 이슬람의 대변인들 같은 인상마저 들 정도이다.

게다가 인터넷 댓글을 통해 자기주장을 피력하는 많은 네티즌들은

‘왜 이슬람을 폄하하는가?“ ’이슬람에 대한 종교편향적인 태도를 중지하라‘는 식의 발언을 서슴지 않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주장하고 있는지 그 숨겨진 실체를 안다면 얼마나 당혹해 할까?

 

오늘날 특히 서구사회에서는 이슬람을 가리켜 ‘테러를 일삼는 종교’ 라거나 ‘한 손엔 꾸란, 한 손엔 칼 ’을 이야기 했다가는 원시인 취급 당하기 일쑤이다.

좋게 말해서 그러하고, 심한 경우에는 언제 테러를 당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미 서구 사회에서는 더 이상 이슬람에 관해서는 물론, 이슬람 관련 테러집단의 테러행위에 대해서마저도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세태에 이르렀다.

기독교에 대해서는 그토록 신성모독적 발언들을 서슴지않는 이들도 이슬람에 관해서는 한마디의 언급도 꺼리는 형편이다.

 

따라서 누구도 이슬람의 실체에 대해 진실을 말하기를 기피하는 사이, 이슬람 변증가들은 그런 틈을 타서 이슬람을 미화하여 알리는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이슬람의 ‘두 얼굴’인 것이다. 이슬람은 과거에서부터 지금까지 본질에 잇어서 변화가 없다. 오히려 현대에 이르러 이슬람은 이슬람 부흥운동을 통해 더욱 근본적이고 폭력적인 지하드 운동에 전념하고 있으며, 매우 탁월한 효과들을 세계 곳곳에서 거두고 있다.

 

이러한 이슬람의 실체를 알게 된다면, 오히려 우리 사회가 얼마나 이슬람에 대해 ‘이슬람으로 편향된’ 생각에 경도되어 있는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이슬람에 대해 낙관적인 생각을 하고 있고, 또 순진하게 이슬람 선교를 생각하고 또 추진하고 있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그 실체에 대해 조금만 더 살펴보면서 우리의 대응 방안을 모색해 보도록 하자.

 

1. 이슬람의 실체를 아는 지혜

 

우리는 이미 과거 9.11사태를 비롯한 세계 곳곳에서 일고 있는 무슬람들에 의해 자행되고 있는 수많은 폭력적 현상들을 통해, 이슬람이라는 종교가 가지고 있는 폭력적 성향을 경험하고 있다. 게다가 지난 2004년 김선일씨 사건이나 2007년 여름 온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아프가니스탄 피랍사태를 통해 그 문제가 단순히 남의 나라에서나 일어나는 문제가 아님을 실감도 해 보았다.

그런데, 이같이 이슬람 사회에서 일고 있는 일들을 소개하는 매체들의 입장을 보면 한사코 “ 이슬람은 ‘본래’ 폭력적 종교가 아니다.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 이다” 는 사실들을 부각시켜 소개하면서, 그러한 폭럭적 행동들은 ‘소수의 글렬분자’들의 소행일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그들의 이러한 주장은 바로 ‘이슬람권에서 일상적으로 일고 있는 폭력적 현실을 애써 축소하고 자신들의 종교를 미화하여 전달하기 위해 펼치는 무슬림들의 주장’이라는 사실이다. 이같은 무슬림들의 거짓 주장을 우리나라 매체들이 대변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나라 뉴스메이커들 역시 이슬람에 관해 무지하다는 현실을 반영해 주며, 또한 그 결과 대중들의 이슬람에 대한 ‘반대편에서의 편견’을 어찌할 수 없게 만들고 있다. 즉,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이슬람에 관한 한 대중매체가 들려주고 보여주는 것으로 이슬람을 이해하고 있다는데 있다.

 

a. 이슬람의 두 얼굴

 

그런데, 그들의 말처럼 정말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이며, 폭력을 일삼는 극렬원리주의자들은 정말 ‘소수의 테러분자’ 들일 뿐인가? 그들의 주장처럼 이슬람이 정말 그 정도이기만 하다면 얼마나 다행일까? 하지만 이슬람은 ‘ 두 얼굴 ’ 을 가지고 둘 중의 어느 한 쪽을 편의에 따라 선택하여 사용하는 변신에 능한 이들임을 사람들은 잘 모르고 있다. 심지어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이슬람은 평화를 사랑하는 종교이며, 테러를 자행하는 극렬 원리주의자들은 소수일 뿐이다. 대부분의 무슬림들은 온건한 이들이며 우리와 같은 선한 이웃일 뿐이다’ 는 주장들을 당연하듯 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바로 이점이야 말로 이슬람 전략가들이 가장 노리는 전략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이슬람은 ‘평화’를 의미하며 따라서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이다”라고 말하길 좋아한다. 하지만 ‘이슬람’이 ‘평화’의 뜻이라 주장하는 것은 명백한 거짓이다. ‘평회’를 의미하는 아랍어 단어는 ‘쌀람’(히브리어의 샬롬)이며, ‘이슬람’은 단순히 ‘복종’(submission)을 의미할 뿐이다. 이슬람은 알라의 뜻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사람들(무슬림)로 구성된 종교요, 그 종교의 경전인 꾸란(Quran)은 최소한 다음과 같이 무슬림들에게 명령한다.

“ 박해가 없어질 때까지, 종교가 알라의 것이 될 때까지 그들과 싸워라”(꾸란 2:193)

먼저 이해해야 할 것은, 이슬람의 세계관은 기본적으로 이 세계를 ‘평화의 집(Dar Es-Esalam. 다르에 쌀람)’ 과 ‘전쟁의 집(Dar Al - Harb. 다르 알 하릅)’ 으로 이분한다는 사실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여타의 종교들을 물리치고 그들이 꿈꾸는 이상적 이슬람 공동체(움마)를 이루어 이슬람의 율법(샤리아)으로 다스림 받는 ‘ 평화’ 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전쟁’은 불가피하다는 세계관인 것이다. 다시 말해, 이 땅에 이슬람이 아닌 다른 종교들이 공존하는 현실을 가장 견디지 못하는 종교가 바로 이슬람인 것이다.

 

흔히 “꾸란이냐 칼이냐?” 라는 문구로 이슬람을 이해하던 과거의 표현을 두고 무슬림들은 ‘이슬람은 그렇지 않다. 평화의 종교인 이슬람에 대한 서구 기독교인들의 극단적인 편견이 담긴 표현이다.’ 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 표현이야 말로 이슬람의 실체에 대해 가장 짧은 표현으로 그 이중성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말이다. 이슬람의 실체는 과거나 지금이나 그 근본에 있어서 변함이 없으며, 그 전략에 있어서도 옛 방식을 그대로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변화가 있다면 ‘ 칼 ’ 대신 ‘총과 폭탄’ 과 같은 현대식 무기로의 무장이라 하겠다. 이슬람은 처음부터 ‘칼’로 세계를 정복해왔고 여전히 ‘칼’을 휘두르며 세계를 위협하고 있다. 이슬람에선 아무리 ‘아니라’ 하지만 이슬람의 종주국인 사우디아라비아 국가만 봐도 알 수 있다. 녹색바탕 위에 선명하게 보이는 아랍어 글씨와 그 아래에 놓인 긴 칼을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은 ‘알라외에는 다른 신이 없고, 무함마드는 알라의 사도(라수르)이다!’ 하는 그들의 ‘신앙고백’이요, 그 신앙고백의 기초에는 엄연히 긴 ‘ 칼’ 이 놓여 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왜 거기에는 그 고백과 함께 다른 상징은 아닌가?

하지만 그것이 굳이 평화를 위한 ‘칼’이라고 우긴다면, 그 ‘평화’는 ‘모든 이교도와의 전쟁을 그치고 난 후의 평화’임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슬람은 ‘알라의 이름으로’ (비스밀라) 이 땅에 이교도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때까지 ‘성전(聖戰. 지하드)해야 하는 종교이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온 세계가 ’이슬람 율법‘이 다스리는 이슬람 세계가 오기 전까지 ’ 전쟁‘은 쉼이 없다는 의미인 것이다. 오늘날 세계 속에서 테러소식이 가장 많은 나라들을 꼽아보라. 모두 이슬람이 국교이거나 절대 다수인 국가들이다. 왜 그럴까?

 

b. 경전을 통한 판단과 분별

 

아무리 무슬림들이 이슬람을 ‘ 평화’ 로 포장하여 소개한다 하더라도 그들의 절대적이고 규범적인 권위의 원천인 꾸란)코란)의 진술을 부정할 수는 없다. 꾸란에는 수많은 구절들이 무슬림들을 독려하면서 알라를 위해 투쟁(지하드)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 여기에 몇 구절만 소개해 본다.

“ 알라를 위하여 당신을 적대시 하는 자와 싸워라” (꾸란 2:190, 이하 김용선 번역본)

“ 박해가 없어질 때까지, 종교가 알라의 것이 될 때까지 그들과 싸워라”(2:193)

“ 알라와 그 사도에 싸움을 걸고 지상에 해악을 뿌리려 하는 자가 받는 벌은 살해되든가

십자가서 박히든가 손발을 반대쪽부터 절단하든가 그렇지 않으면 국외로 추방을 당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현세에서 받는 그들의 굴욕이며 내세에서도 그들에게는 무서운 벌이

기다리고 있다 “ ( 5:33)

“ 그런데 신성월이 지났으면, 다신교도를 발견하는 즉시 죽여라. 잡아라 억류하라, 모든

길에 복병을 두고 기다리라. 그러나 만일 그들이 회개하여 예배를 지키고 희사를 한다면 방면해 주라, 알라께서는 관용하시고 자비로운 분이시다“ (9:5)

 

어떤 이들의 반박과 같이 기독교 역시 역사 속에서 수많은 살상과 전쟁들을 일으켜 온 것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최소한 그것을 경전을 통해 신의 이름으로 명시적으로 명령하는 것과, 원수마저 사랑하라는 명령에도 불구하고 칼을 든 것은 현실적으로 큰 차이가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어쨌든 이 명령들이 실제로 오늘날 무슬림들에 의해 수행된다고 가정해 보라. 세계는 어떻게 되겠는가? 이 구절들에만 의거해 보더라도 오늘날 ‘테러행위’ 를 서슴지 않는 극렬 무슬림들을 가리켜 어찌 ‘ 소수의 극렬 윈리주의자 ’ 라고 비난하겠는가? 오히려 무슬림들은 이러한 꾸란의 명령을 문자 그대로 수행하는 ‘전사’ 들에게 환호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 땅에 사는 모든 무슬림들이 이러한 꾸란의 명령들을 문자적으로 실행하지 않고 있다는 점은 정말 다행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마치 수많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 땅 끝까지 이르러 모든 족속을 제자 삼으라’는 복음서의 지상명령을 끊임없이 읽고 또 듣고 살아가고 있음에도, 그렇게 심각하게 문자적으로 그 명령 따라 살아가지 않는 것과 같은 현상이다. 그 결과 예수님께서 그 명령을 발하신지 2천년이 되도록 그 명령이 아직도 끝나지 않은 과업으로 남아 있는 것처럼, 꾸란을 읽는 수많은 무슬림들 역시 위에 명시한 구절들을 무자적으로 수행하지 않은 결과 그나마 세계는 이만큼이나 유지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날 아무리 주위에는 ‘온건한 무슬림’ 들이 많이 있다고 하지만, 이같은 알라의 절대적 명령들이 무슬림들의 가슴에 끊임없이 각인되는 한, 어느 날 예기치 않는 때에 그들은 오늘날의 테러분자들로 돌변하여 나타날 가능성들을 안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마치 수많은 기독청년들이 자아실현을 꿈꾸며 자기만의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언제나 예수님의 제자 삼으라는 지상명령에 부담을 안고 살아가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슬람에 있어서 심각한 문제는, 그것이 단순한 ‘도를 전하고 생명을 전하는’ 선교가 아니라, 알라의 이름을 위해서는 테러와 피흘림도 불사한다는데 있다. 기독교의 선교 명령이 준행되는 곳이면 어디든지 생명을 살리는 역사가 자연스런 열매인 반면, 이슬람의 지하드가 수행되는 곳이면 어디든지 생명을 멸하고 파괴와 죽음이 열매로 맺어 나오는 현실이라는데 있다.

 

c. 이슬람의 실체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인터넷에 이슬람에 관한 글이 올라오면 어떤 이들은 ‘기독교를 반대’하기 위해 ‘ 이슬람’ 을 무조건적으로 찬동하는 댓글을 다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정말 그러할까? 그들은 자신들이 하는 말이 정작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하고 있다.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이슬람은 여러 종교들 중의 하나가 아니다. 이슬람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 역시 이슬람이 기독교와 교리적으로 상당한 유사성을 갖고 잇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오늘날 이슬람이 유대교나 기독교와 그토록 많은 충돌의 양상을 빚는 것만 보아도 이슬람과 기독교 사이에는 건너지 못할 커다란 강이 놓여 있다.

 

극단적인 예를 들어보자. 만일 아시아 최고의 축구스타 중에 그리스도교인인 한 선수가 이슬람으로 오늘 개종했다고 하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사실을 이슈화 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그를 아는 그리스도인들 역시 잠시 의아해 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이란이나 사우디 아라비아의 한 축구선수가 오늘 기독교로 개종했다고 하자. 내일 아침이면 그의 몸이 시체로 발견될 확률이 99%에 이를 것이다. 이슬람이 꿈꾸는 알라의 법 샤리아는 그를 ‘자유롭게 개종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악마의 시’ 라는 소설을 썼던 인도 출신의 살만 루시디라는 작가는 그 소설에서 꾸란을 모욕했다는 이유로 이란의 호메이니로부터 살해명령(파트와)을 받고 십 수 년간을 영국 경찰의 보호를 받으며 감옥 아닌 감옥 생활을 하며 지내야 했다. 그 책을 일본어로 번엮했던 일본인은 그 일로 인해 살해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오늘날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거나 심지어 사생아 취급을 하는 이들이 한 둘이 아니며, 심지어 그 사실을 책으로 내고 영화로까지 만들어 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반면, 무함마드에 관한 네 컷짜리 만평 하나를 가지고도 폭력사태를 겪어야만 하는 이슬람세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이슬람은 결코 다른 종교와 같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이슬람은 한국인들이 친숙한 불교나 무교와 같지 않다. 불교는 자신의 해탈을 위해 상대와 투쟁할 이유가 없지만, 이슬람은 ‘알라을 위해’ ‘ 이교도들’에게 칼을 휘두르는 자들을 격려하는 종교이다. 그러한 사람이 ‘진정한 이슬람교도’의 전형이요, 낙원은 바로 그러한 이들을 위해 준비되어 있다고 가르치는 종교인 것이다.

 

2. 한국의 이슬람화 실태

 

게다가 이슬람은 지금 체계적인 세계의 이슬람화를 위해 국가와 민족을 초월하여 전 세계적으로 투쟁(지하드)하고 있다. 이미 영국을 포함한 유럽 각국에서 지대한 성공을 거두고 있다. 이대로 가면 유럽의 무슬림 숫자는 2025년에 이르면 지금의 두 배가 될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경고하고 잇다. )이에 관하여는 <윌리엄 와그너, ‘이슬람의 세계 변화전략’>을 참고하라).

문제는 한국도 예외가 아니라는데 있다. 최근 한국교계는 2020년까지 한국을 이슬람화 하겠다는 이슬람권의 행보에 고심하고 있다. 투아이즈 네트워크에 따르면, 1988년 서울 올림픽이 열리던 해에 이미 중동 국가의 한 언론은 무슬림들이 한국을 이슬람화하겠다는 전략을 수립한다는 기사를 보도한 바 있고, 이 전략은 2005년 11월 서울에서 개최된 중동 이슬람 지도자 선교대회에서 한국을 2020년까지 이슬람국으로 만들겠다는 소위 ‘비젼 2020전략’으로 구체화됐다는 것이다.

 

실제로 한국에는 이슬람권에서 온 많은 유학생들과 근로자들이 그들의 선교적 노력을 강화하고 있는 것들이 현실로 드러나고 잇다. 최근 한국에 들어와 활동 중인 외국인 근로자들은 45만 ~ 50만(2006년 노동부 발표 자료)정도로 추산되는데. 그들 중 상당수가 이슬람권에서 입국한 근로자들로 무려 10만 명에 이른다. 그것은 ‘지성의 산실’ 을 표방하는 캠퍼스들에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서울대학교와 KAIST를 중심으로 한 무슬림 유학생들 커뮤니티 결성의 움직임은 단순한 교류와 예배를 위한 모임을 넘어선 이슬람 선교를 위한 행보임을 구체화 하였고. 이는 한국으로 유학을 오게 된 본래적 목적이 무엇임을 드러내어 보여주고 있다. 다행이 중동선교회, 투아이즈 네트워크, 한국이란인교회와 같은 기관을 중심으로 이슬람의 실체와 한국 이슬람화 개획들이 폭로되고 있다. 그들이 밝히는 바에 따르면 이슬람의 한국 침투는 매우 전략적이다.

다음은 지난 2005년도에 한국 이슬람연맹에서 출판한 ‘한국이슬람 50년사’ 에 소개된 이슬람의 한국 선교전략을 간추려 본 내용이다.

 

① 사원 건립 : 현재 있는 서울 중앙성원을 비롯해 9개의 이슬람 성원, 4개의 이슬람 센터와 50여개의 임시 예배처소를 점차적으로 확대하고자 한다.

② 국제 이슬람학교 설립 : 무슬림 자녀들을 양육하기 위한 교육시설이라는 명목으로 영어로 가르치는 초등학교, 유치원을 만들어 어려서부터 이슬람 교육을 받으며 자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다.

③ 이슬람대학 건립 : 1970년대 말부터 구체화 되어 현재 진행 중에 있다. 이 대학을 통해 최고급 무슬림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며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등 모든 분야들에 침투할 것이다.

④ 이슬람 문화센터 건립 : 이를 다와 센터 (Da'wah Center)라고 부르는데, 선교센터라는 말이다. 아랍어와 이슬람 교리강좌, 벨리 댄스 등을 통해서 한국에 이슬람을 뿌리내리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

⑤ 꾸란 번역 위원회 : 꾸란을 더 완벽하게 한글로 번역하기 위해서 꾸란 번역위원들의 정기모임이 매주 열리며 비정기적으로 연구토론모임도 이루어지고 있다.

⑥ 이슬람 서적 출판위원회 : 지금까지 많은 이슬람 서적들이 나와 있으며, 더 많은 책들과 인쇄물들을 만들어 홍보하고자 한다.

⑦ 결혼 및 출산 전략 : 이주 노동자들이 합법적인 체류 자격을 획득하기 위해서 취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 한국 여성과 결혼하는 방법이다. 그들은 한국 여성과 결혼해 가능하면 많은 자녀들을 낳아서 무슬림들의 숫자를 늘리고자 한다.

현재까지 한국의 이슬람교의 물리적 형편은 아직 미미한 수준이다. 중동선교회에 따르면 국내 무슬림 인구는 약 3만 5천명으로 전체 인구 중 0.1%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각 도시들의 이슬람 사원과 기도처 건립은 물론, 위에서 언급한 이슬람의 전방위적 선교활동은 점차 확장 일로에 놓여 잇다. 거기에 온라인을 통한 포교의 노력까지 곁들여 한층 그 힘을 더해가고 잇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한국사회가 크게 관심하지 않는 사이에,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무슬림들은 한국의 이슬람화 전략을 단계적으로 착착 시행해 나갈 것이라는데 있다.

 

한국에 이슬람이 안정적으로 뿌리내리게 되는 날 한국은 테러에서 자유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이미 유럽의 역사가 이를 말해주고 있다. 이슬람은 소수일 때는‘평화’ 를 강조하지만, 그 사회에 5%만 점하여도 당장 테러는 이슬람 다와의 매우 유용한 도구로 변화된다. 이미이슬람은 ‘테러’ 를 통해 그들의 주장이 효과적으로 멱혀들었던 전례들을 수없이 가지고 있다. 게다가 ‘테러’는 알라의 ‘거룩한 명령’ 이다. 만일 한국에서도 ‘이슬람’ 이 자연스레 ‘인식’ 되기 시작하는 날이 온다면, 때는 이미 늦게 될 것이다. 그 테러의 희생자는 바로 나와 내 사랑하는 가족과 친지가 아니라는 보장이 없는 것이다.

 

3. 한국 교회의 대응 전략

 

무엇보다도 한국교회는 우선 이슬람에 대한 이해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사실 ‘이슬람’ 이라는 실체는 너무도 광범위하여 나라마다 분파마다 각기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어서, 쉽게 파악하기란 한계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개괄적인 이슬람의 실체에 대해 너무도 모르는 것이 많으며, 그러는 사이에 이슬람은 점점 우리의 영역 깊숙이까지 침투해 올 것이기에 이슬람을 알고자 하는 노력은 절실하다 하겠다.

 

a. 선교적 대응

첫째, 한국교회는 선교적인 대응노력을 지속해 가야 한다.

오늘날 한국 교회들에게 미전도종족, 특히 이슬람권에 있는 미전도종족들에 대한 관심이 많이 고조되어 있다. 한국세계선교협의회의 “2007년 한국선교사 파송현황‘ 발표에 따르면, 2007년말 현재 18,000여 한국선교사 중 17%에 이르는 약 3,000여명의 선교사들이 이슬람권에서 사역을 펼쳐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슬람권의 비중과 필요로 보자면 17%의 선교사는 여전히 그 균형점을 위해 부족한 수치라 할 수 있겠다.

사실 이슬람권에서는 생각보다 많은 선교적 장애들이 있다. 즉, 보다 더 전략적이고 많은 용기와 지혜가 필요한 영역이 바로 이슬람권 선교 영역이다. 지난 아프간 피랍사태로 말미암아 이슬람권에 대한 선교가 커다란 타격을 입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선교 헌신자들을 더 발굴해 내고 잘 준비된 사람들을 지속적으로 보내어 상황에 적절한 선교활동들을 펼쳐 가야만 한다.

동시에 한국교회는 국내로 들어오는 무슬림들을 위한 ‘이주노동자 선교활동’ 을 보다 조직적으로 전개해 나가야 한다. 무작정 잘해주고 퍼주는 식의 선교가 아니라, 이슬람을 알고 전략적으로 그들을 도울 수 있는 전문성을 가진 ‘비거주 선교사’ 들을 동시에 양성해야 할 것이다. 특히 무슬림 형제들을 위한 선교활동에 기독교 자매들이 사역을 해야 하는 경우에는 특별한 주의와 분별력이 요구됨을 인식해야 한다.

 

b. 변증적 대응

둘째, 한국교회는 이슬람 선교를 위해 보다 준비된 변증적 대응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슬람을 전파하는 사람들은 단순히 ‘선교적 열정’ 만을 가지고 나서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이 꾸란을 통째로 암송할 뿐만 아니라 기독교를 넘어뜨릴 지성적 무기들로 무장하고 잇다. 먼저 무슬림들을 대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종교를 넘어 그들의 삶과 세계관의 총체인 이슬람‘ 을 알아야 한다. 이슬람을 알리는 기본서를 통해 이슬람

개요를 배우고 거기서 지혜를 얻은 다음, 이슬람의 경전인 꾸란을 최소한 읽고 그 내용을 파악해야 한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 하지 않는가? 우리는 그들이 무엇을 믿고, 기독교에 대해서는 무엇을 공격하고자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즉, 교회는 무슬림들을 만나야 할 성도들을 준비시켜야 한다. (이를 위해 '중선칼럼‘을 활용하라.

이슬람에 변증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특히 이슬람의 성경변질론에 대비해야 한다. 무슬림들은 유독 ‘기독교인’ 들에게 접근하기를 좋아한다. 무신론자나 다신론자들 보다는 유사한 유신론을 믿고 있는 기독교인들이 상대적으로 대화가 통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이 기독교 사회에 침투하는 첫 게단은 ‘ 성경 변질론’ 이라는 무기이다. (김대옥, ‘이슬람의 성경변질론’, <서울 : 기독교문서선교회, 근간예정> 참고)

나아가 한국교회는 이슬람 전문가들을 양성해야 한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슬람은 세계 정복전략을 가지고 매우 지능적이고 교묘하게 세계를 공략하고 있다. 한국교회는 신학교에서부터라도 ‘이슬람학’ 은 물론 ‘비교종교’ 와 ‘ 선교학’ 관련 과목들을 통해 이슬람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부터 가르쳐야 한다. 나아가 이슬람권에서 수학하고 그들의 실상을 학문적으로도 기여할 수 있는 전문가들을 지원해야 한다.

 

c. 사회적 대응

셋째, 한국교회는 이슬람에 대한 사회적 대응에도 지대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우선 이슬람의 선교전략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이슬람권에서 한국사회에서 추진하고자 하는 제반 움직임에 대해 세심한 관찰과 대응이 필요하다. 이 분야의 전문가들이 지속적으로 경고하고 있는 이슬람권의 교육계. 금융계, 문화계, 산업계 등의 영역에서 그들이 종교적인 세력을 형성해 가지 못하도록 지혜로운 교회들의 조직적 움직임이 필요하다고 본다.

우선 한국사회의 최근 인구성장률을 보면 OECD 국가들 가운데서도 두 번째로 낮은 1.2%정도의 성장률을 보이고 잇다. 이 수치는 교과서적으로 한 세대가 지나면 인구가 절반으로 줄어든다는 결론인데. 이 말은 곧 한국은 이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계속해서 생산과 서비스 영역을 감당해 줄 많은 외국 인력들을 필요로 한다는 말이 된다. 또한 세계적 경제위기와 더불어 한국사회를 넘보고 잇는 중동의 오일달러는 무슬림들에게는 이자 없는 대출이란 이점을 통해 많은 이들로 개종의 유혹을 수용하는 기회를 줄 것이며, 교육게에 투입되는 오일달러들은 훨씬 더 나은 양질의 교육 여건을 통해 많은 학부모들로 하여금 자녀들을 이슬람 유치원, 초, 중,고, 대학교에 보내게 할 것이다.

거기서 그들은 아랍어와 꾸란과 이슬람을 배우고 많은 이들이 거기서 제공하는 특혜를 위해 이슬람으로 개종하게 될 것이다. ‘그래 보아야 얼마나 그러하겠나’ 할 지 모르지만, 현재 이슬람의 실체에 대체로 무관심한 한국의 비기독인 비율은 80%를 넘어서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만 한다.

 

4 무슬림들이 진리에 이르도록 돕는 노력

 

a. 예수님, 알 파티하 기도의 성취

무슬림들은 하루에 다섯 차례 공식적인 예베(기도)의 시간을 갖도록 되어있다. 그들은 그 예배시간때마다 그들의 모국어에 상관없이 꾸란의 1장 (알 파티하, Al Ffatlha)을 아럽어로 암송하면서 기도해야 한다. 그런데 그 기도의 유일한 간구의 내용은 “우리를 ‘올바른길’(straight path)로 인도해 주소서!” 이다. 이 길이 아니고서는 알라의 ‘노여움’ 과 ‘방황’만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 안에서는 그 해답이 얼마나 분명하고 쉬운가“ ” 내가 곧 길이요 ! “ (요14:6) 그들이 그토록 간구하는 유일한 기도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성취될 수 있음을 그들이 깨닫게 도와야 한다. 평생을 하루도 쉼 없이 구하고 또 구하는 기도의 제목이 예수님 안에 있음을 알려주어야 한다.

 

b. 성경 보급의 기회

그러기 위해 가장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문제는 무슬림들로 성경을 읽을 수 잇는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성경에는 그들을 축복하는 놀라운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에게 그 진리를 전달해 줄 수 잇는 길이 막혀 있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이슬람 사회에는 현실적으로 신분을 드러내 놓고 복음을 전할 수가 없다. 법적으로도 금지되어 있지만 사회 풍토 또한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또한 대부분의 이슬람 국가에서 ‘성경’은 금서로 되어 있고 자체적인 출판과 배포는 물론 수입도 제한되고 있다. 많은 경우에 성경은 비밀리에 수입되어 전달되고 있다. 게다가 배포 또한 여의치 않은 실정에 놓여 있다. 따라서 거의 대부분의 무슬림들은 성경을 소유하기 쉽지 않은 현실에 놓여 있다. 이를 현실적으로 타개할 수 있는 구체적인 대안들이 요구된다.

 

c. 성경변질론에 대한 준비

설상가상으로 무슬림들이 성경을 받아들이는데 더 큰 장벽은 이슬람 학자들이 전파하고 있는 ‘성경변질론’ 이다. ‘성경은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에 의해 왜곡되고 변질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하나님이 말씀이 아니다’ 는 것이다. 나아가 영원한 천상의 책에서 계시된 꾸란이야 말로 이전에 계시된 모든 성경의 계시를 포괄하며 교정하기 때문에 오직 꾸란이야 말로 영원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요 동시에 그 책 한 권이면 충분하다고 주장한다.

이 말은 곧, 이 성경변질론을 넘어서지 못하면 아무리 성실한 ‘복음전도’도 다만 무의미한 헛수고가 되고 말 뿐이라는 점이다. 그리스도인 전도자가 아무리 아름답고 놀라운 성경 말씀을 사용하여 복음을 전한다해도 그들에게는 ‘왜곡된 비진리의 말씀’ 일 뿐이며 , 따라서 우이독경에 지나고 말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무슬림들의 예봉을 꺽을 지성적 준비가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과 꾸란에 정통하여야 한다. 최소한 꾸란이 말하는 바에 대해 기본적인 이해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 일을 위해서는 뱀처럼 지혜로워야 한다. 우선, 성경의 권위를 확증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귀를 기울이고 있는 꾸란을 잘 활용해야 한다.

성경변질론과는 달리 꾸란은 성경에 관한 놀라운 메시지들을 담고 있으며, 심지어 무슬림과그 선지자도 믿고, 판단 기준을 삼고, 심지어 성경을 먼저 읽은 유대인과 그리스도인들에게 물어야 한다고 권하고 있다. (꾸란 3:84, 4;136. 5;44~47. 66, 10:94, 16:43, 21:7 등 참조)

물론 꾸란은 그 내용은 물론 편집과정에 얽힌 수많은 문제점들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꾸란을 직접적으로 비난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하며, 오히려 꾸란을 잘 이용하여 성경의 권위를 세우기만 한다면, 꾸란의 권위는 논리적으로 스스로 무너지게 되어 있다. 즉 , 성경의 권위만 입증하면 꾸란은 저절로 무너지게 된다는 사실이다. 두 책의 주장은 서로 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가면서

 

아랍사람들 사이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바로 나귀의 비유인데. 사막을 여행하다 사막 한 가운데서 차가운 밤을 지내게 된 어는 여행자의 이야기이다. 그는 천막을 치고 자리에 누웠다 잠시 후 밖에 세워둔 나귀가 부탁을 해온다. ‘ 주인님, 밖은 너무도 춥습니다. 제게 코만 천막안에 두고 이 추운 밤을 보내게 해 주십시오,’ 나귀가 측은했던 주인은 그렇게 허락해 주었다. 잠시 후 나귀는 앞 다리까지만 허락해 달랜다. 그 다음은 그렇게까지 조금씩 조금씩 허락해 주었던 주인을 텐트 밖으로 떠밀어내며 그를 향해 내빝는 나귀의 목소리가, 우리에게 오늘의 이슬람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경종을 울린다. “ 멍청한 녀석 같으니라구...”

 

이 이야기야 말로 오늘날 이슬람이 한국사회에 침투해 오고 있는 실상과 그 미래적 예측에 대해 정확한 청사진을 가늠케 해 주는 아랍인들의 이야기이다. 끔찍하지 아니한가? 이슬람은 이미 그들의 역사를 통해 이 이야기에서 들려주고 있는 나귀의 역할을 지독히도 잘 수행해 왔다. 어떤 이들은 이슬람에 대한 이와 같은 관점을 또 하나의 '극단적 시각‘ 이며 서구 기독교의 편파적인 시각이라 비판하면서 평화 지향적인 다수의 온건 무슬림들에게 보다 많은 관심을 요구한다. 물론 이슬람권 내부에서는 온건론을 주창하는 많은 이들이 있고, 수많은 대중들은 테러에 나서지 않는다는 현실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현재 이슬람 사회에서 주도권은 ’소수의 원리주의자‘ 들에게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수많은 대중을 움직이는 힘은 절대 소수의 핵심 리더십이 아니던가? 정말 그들의 기대대로 이슬람이 세속화로 치달으면서 그들의 문자적 해석을 내려놓고 세계의 평화와 다종교 및 다문화의 공존을 위해 마음을 연다면 얼마나 바람직한 일이겠는가?

하지만, 이와 같은 이슬람의 공격적 성향과 세게 정복 전략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궁극적인 승리의 소망을 가지고 있다. 요한 계시록은 이미 승리하신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이신 예수님을 보여준다. ‘이슬람의 세계 변화전략’을 저술했던 윌리엄 와그너는 그의 책에서 “ 나는 이미 어떻게 영화가 끝날지 알고 있다.” 고 격려한다. 우리는 실제로 마지막 때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승리할 것이며 (게 19;16) 결국 모든 무릅이 (무함마드를 포함) 그분 앞에 꿇게 될 것이며, 모든 입술이 (무함마드와 그 추종자들을 포함)그분을 가리켜 ‘주님’ 이라 고백하게 될 것이다. (빌 2)

‘그 책의 사람들’ (꾸란은 성경을 가진 유대인과 기독교인들 가리켜 이렇게 호칭한다)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 책의 말씀에 따라 참된 신앙을 회복하고 그 말씀에 따라 살며 , 지혜롭게 그 진리의 말씀을 전파하여 오늘도 기도 속에서 참 길을 찾는 13억의 무슬림들에게 참 길 되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축복을 나누어야 할 것이다.

 

Workshop(30분 토의 각조 5분 발표)

 

:외국인 근로자 선교사역을 하는 어느 목사님의 사역을 옅볼 수 있는 한 에피소드를 통해 주어진 질문을 토의하고 대표는 발표를 하기바랍니다.

외국인노동자 자히드 눈물 흘리며 사무실로 들어왔다. "목사님, 가슴이 터집니다" 이슬람교도 자히드는 매일 알라(하나님)께 이라크 국민 도와 달라고 매일 눈물 기도한다고 하였다. 지금, 도와주실 분은 알라(하나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충실한 기독교인임을 자처하는 부시의 이라크 침공으로 고통스러워하는 한 이슬람 노동 형제의 눈물 고백에 목사인 나를 더욱 부끄럽게 만들었다. 가슴을 찟는 심정으로 이슬람 노동형제와 기독교 목사가 두 손 모아 함께 알라(하나님)께 기도 드린다.

 

하나님(알라)

이 전쟁 멈추게 해 주세요.

귀가로 다가온 포성소리

저벅저벅 군화발소리

떨며 부등켜안은 이라크 국민들에게

평화를 주소서.

폭격으로 머리 부서진

어린아이 주검에서

사악한 강자의

그림자를 벗겨주소서.

거짓된 십자군전쟁

천년 동안 회개하였습니다.

검은 황금 침략전쟁

만년동안 회개해야 하나요.

주여,

회개기도 그러한 부끄러움

지금 끝나게 하소서.

차마 눈감지 못한

어린아이 눈동자 속으로

고개 드시는

하나님 당신의 모습을 바라봅니다.

약한 자 힘주시고

강한 자 바르게 하소서. 그런데, 그 다음에......

외국인노동자들이 이라크 침공 문제로 구두 모의 재판을 하였다. 인권을 외치는 미국이 세계의 인권을 짓밟았다고 지적하였다. 외국인노동자들은 부시와 토니 블레어, 헨스 블릭스,코피 아난을 국제재판소에 회부하면서 전쟁범죄, 인권침해, 약탈, 직무유기 등으로 기소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판결하였다. "그들은 떠돌이 들개처럼 그렇게 버림받으리라"는 외국인노동자들의 판결이었다.

2003년 3월 25일

 

[질문]

1. 위의 내용 가운데 무슬림과 기독교인이 함께 드린 기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2. 이주노동자 무슬림들이 모의 재판한 결과인 판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3. 기독교 선교적 관점에서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 참고도서 소개

오늘날은 실제로 이슬람에 관해 기록하고 있는 글들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이 감사하다, 하지만, 일반 출판사에서 출간한 무슬림 학자들이나 종교학자들이 소개한 이슬람 관련 서적들의 대부분은 이슬람의 진면모를 감추는 경향들이 있음을 지적하고 싶다. 다음은 몇 몇 분야에 대해 꼭 추천하고 싶은 책 몇 권을 소개한다.

1. 이슬람 개관

- 앤 쿠퍼, ‘우리 형제 이스마엘’, (서울 ; 두란노, 1992년)

- 잭 버드, ‘이슬람이란 무엇인가’, 중동선교회 역, (서울 ; 도서출판 예루살렘, 1992)

2. 이슬람 선교

- 찰스 말쉬, ‘모슬렘 세계에 예수그리스도를 심자’ 이광호 역(서울 ; 기독교문서선교회 (1985년)

- 키스 스와틀리. ‘ 인카운터 이슬람/ , 정옥배 역, (서울 : 예수전도단. 2008)

3. 꾸란

- 공일주, ‘코란의 이해’, (서울 : 한국외국어대학교 출판부, 2008)

- 돈 리처드슨, ‘코란의 비밀’ , 이희민 역. (서울 ; 쿰란 출판. 2008)

4. 기독교적 변증

- 쇼켓 모우캐리, ‘기독교와 이슬람의 대화’ 한국이슬람 연구소. 역(서울 : 예영커뮤니케

이션, 2003)

- 압둘 마시호, ‘무슬람과의 대화’ 이동주역 (서울 : 기독교문서선교회 2001)

5. 이슬람 대응

- 윌리엄 와그너, ‘이슬람의 세계 변화전략’ 노승현 역, (서울 ; Apostolos Press. 2007)

- 김대옥, ‘이슬람의 성경변질론’ , (서울 : 기독교문서선교회, 근간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