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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CC는 왜 우리에게 맞지 않는가: 그 기원과 신학

하나님아들 2020. 10. 24. 22:00

WCC는 왜 우리에게 맞지 않는가: 그 기원과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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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진 칼럼] 기독론의 해체

 

 

1. WCC의 기원

 

 

개신교 선교 역사는 그리 오래지 않다. 로마가톨릭이 예수회 중심으로 16세기부터 오지를 공략한 것에 비하면 3세기 정도 격차가 벌어지다, 19세기에 본격화되었다. 1986년 국내에 큰 반향을 일으킨 로버트 드니로 주연의 영화 <미션>도, 2016년 개봉한 영화 <사일런스(엔도 슈카쿠 원작)>도, 다 가톨릭 예수회의 선교를 다룬 영화다.

개신교 선교가 늦은 이유는 가톨릭이 일찍부터 스페인과 포르투갈 정부의 막대한 재정 지원과 교황의 후원으로 선교 사업에 매진할 수 있었던 것에 반해, 바로 그 시기 개신교에서는 루터와 칼빈의 내부 투쟁으로 정신이 없었고 선교를 자극할 만한 중심 기관도 부재했으며, 제후들도 선교에 별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재세례파 등 극단적인 종말론 공동체들만이 외곽으로 동선을 그려나갔다.

 

개신교 선교의 가시적인 성공은 윌리엄 캐리(William Carey)부터로 보는 것이 선교신학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이 시기가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이다. 그로부터 100년 뒤, 이를 기념하기 위한 100주년 선교 대회가 스코틀랜드 에딘버러에서 기획되었다. 1,200명 정도가 모이면서 이 기획이 흥행에 성공한다. 1910년의 일이다.

 

많은 사람이 WCC의 기원을 '1948년 암스테르담에서 결성된 기독교 연합 운동 단체'로 알고 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WCC의 기원은 이 시기부터 살피는 것이 타당하다. 왜냐하면 이 100주년 선교 대회를 기획한 존 모트(John R. Mott, 1865-1955)가 WCC에 개신교를 합류시키는 산파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WCC란 어떤 교단이나 단체가 아니라 일종의 포럼(Forum)임을 의미한다. 이러한 포럼을 의미상 '교회(체)'로 규정하는 것이 선교신학의 중요한 특질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선교 대회의 성격이 실질적으로 무엇인지 유념할 필요가 있다.

 

관광을 겸해 단기 선교나 순회 부흥회들을 다녀오는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하지만, 선교 현장은 생존과 선교의 투쟁 현장이다. 생존과도 싸우고 선교와도 싸운다는 뜻이 아니라, 생존이 선교와 싸운다는 뜻이다. 그래서 자원이 소중하다.

안방에서 편히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은 신앙 교리가 말초 신경처럼 발달해 있지만, 선교 현장에서는 헐거워진다. 왜? 자원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안방에서 하던 대로 무슨 파냐 무슨 파냐 따지다간, 고립되기 십상이다.

선교사들의 이러한 현장 투쟁을 영웅열전 감상하듯 하지만, 그들의 가족, 특히 배우자들이 겪어야 하는 고난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이다. 윌리엄 캐리 역시 아들을 잃었고, 배우자는 정신병에 걸리는 극한을 겪었다.

이 같은 극한 현장 속에서의 연대 의식을 실제 활동으로 끌고 나온 것이 바로 존 모트였고, 그 첫 번째 결실이 1910년 에딘버러에서의 컨퍼런스였던 것이다. 그가 WCC의 형성 단계까지 이를 끌고 나갔다.

 

2. WCC의 형성

에딘버러에서 흥행에 성공한 10년 뒤 람베스에서 한 번 더 모이고, 여기서 세 덩어리의 굵직한 대회로 파생된다. 선교 분과의 '국제선교회(1921년)', 생활과 비지니스 분과의 '스톡홀름(1925년)', 신앙이나 직제를 주로 다룬 '로잔(1927년)'..., 이렇게 3개 덩어리로 나뉠 수 있었던 람베스 회의는 '성공회' 주도 모임이었다. 개신교는 1910년이 처음이지만, 이는 1860년대부터 지속적으로 모여 온 10년례 회의와 교차한다.

이것이 무르익어, 당초 1910년 에딘버러 컨퍼런스를 주도했던 존 모트가 창설한 IMC(International Missional Council)에서는 '반(反)인종차별주의', '반(反)세속주의' 등 보다 거시적인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전방위 선교 그룹의 참여를 자극했다. 그러다 1938년 탐바람(Tarmbaram)에서는 '비기독교 세계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메시지'라는 구호로 전환함으로써 장차 일어날 혼성 WCC를 점점 구체화해 갔다.

 

여기서 '비기독교 세계'라는 표제가 언급되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16세기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선교가 식민지 및 교역 정책과 혼재한 것처럼, 20세기 선교 현장 역시 여러 복잡 미묘한 '선교와 비선교', '기독교와 비기독교'뿐 아니라 '기독교와 기독교'의 혼재를 벗어날 수 없었다. WCC의 구상은 자기 정체성에 갇히는 소극적 선교에서 벗어난 적극적 선교의 한 양상이었던 것이다.

존 모트의 IMC는 결국 1948년 WCC로 합류하기에 이르는데, 이러한 통합이 촉진되기까지는 보다 구체적이고도 결정적 요인 2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1939년에서 1945년까지 약 6년에 걸친 제2차 세계대전이었고, 둘째는 존 모트가 1946년에 노벨상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박차를 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1948년 암스테르담에서 '에큐메니칼'이라는 이름으로 참여한 종파는 성공회, 개신교, 동방정교회, 오리엔트정교회, 아시리아 동방교회이다. 많은 사람이(특히 우리나라) 로마가톨릭을 이 협의체의 설립자인 줄 알지만, 로마가톨릭은 회원 종파가 아니다. 그들은 회원이 될 수 없다. 교의적으로 가톨릭은 이미 단일한 '보편교회'이기 때문이다.

바티칸 공의회 후 얼마나 유연해졌는지 모르지만, 가톨릭의 진정한 신학에 따르면 가톨릭은 다른 교회를 교회로 여기지 않는다. 즉 개신교를 포함한 각 종파들만 가톨릭을 여러 교회 중 하나로서 참여시킨다고 여긴다. (※1948년, 세계 44개국 147교파 대표= 351명이 참여했다.)

 

3. WCC의 발전

WCC의 초기의 주된 테제는 다음과 같다.

1) "성경이 말하는 대로 예수를 하나님이며 구주로 믿고 홀로 한분이신 성부, 성자, 성령께... 공동의 사명을 완수하려는 교회의 친교단체다"
2) 신앙고백 정신과 에큐메니칼 정신 간 올바른 관계
3) 교회의 일치
4) 상호 이해와 관용
5) 그리스도는 몸 된 교회의 머리/ 하나
6) 인간의 무질서 타파와 하나님의 섭리 인식
7) 하나님의 경륜 안에 있는 보편적 교회
8) 교회와 (국제)사회의 무질서 회복

이러던 것이 조금씩 톤이 달라진다.

-2차 1954년 에반스톤(미국)에서는
"하나님 나라는 종말론적이며, 종말론적 승리를 희망하는 원동력은 바로 사회참여이다(이른바,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라고 하던 것이,

-3차 1961년 뉴델리에서는
"'하나님의 선교'를 강조하면서 여타 사회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대처를 요하되, 해결방안은 교회의 일치와 인류의 일치"라며 '일치'가 강화되더니,

-4차 1968년 웁살라에서는
'인간화', '새 인간성', '해방'과 같은 이념 코드 지향을 외치다가, 1971년 구티에레즈의 명실상부 '해방신학'이 탄생하기에 이른다. 해방신학에서의 구원은 사회구원을 의미한다. 이것이 1973년 방콕에서 명문화되면서 교리적 차이를 불문하고 (명목상은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모든 교회 수용한다고 했지만) 사실상 모든 교회 수용의 길로 들어섰다.

-이러다가 우리나라도 화끈한 주역으로 참여한 것이 바로 제7차 회의에서다. 바로 현경(유니온 신학교 교수)의 저 유명한 초혼제(招魂祭, 귀신 부르는 제사)가 그것이다. 그 한 대목을 소개한다.

"우리의 믿음의 조상들인 아브라함과 사라에 의하여 착취를 당하였고 버림을 받은 이집트의 흑인 여성 하갈의 영혼이여!
...
예수 탄생 시 헤롯왕의 군인들에 의하여 살해된 남자 아기들의 영혼이여!
잔 다르크와 중세 시기 동안 마녀심판으로 화형에 처해진 많은 다른 여성들의 영혼이여!
십자군 전쟁 때 죽은 모든 사람들의 영혼이여!
식민주의 시대와 기독교 이방선교 시기 동안에 대량 살상된 토착민들의 영혼들이여!
홀로코스트 동안 가스실에서 죽임을 당한 유대인들의 영혼들이여!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원폭으로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영혼들이여!
...
광주와 천안문 광장과 리투아니아에서 탱크에 깔려 죽은 사람들의 영혼들이여!
매일같이 죽임을 당하는 아마존 우림의 영혼들이여!
인간의 물질과 금전에 대한 탐욕으로 강간을 당하고 고문을 당하여 착취를 당하는 땅과 공기와 물의 영혼들이여!
피비린내 나는 걸프전에서 지금 죽어가고 있는 흙과 공기와 물의 영혼들이여!
십자가에서 고문을 당하셨고 죽임을 당하신 우리의 맏형 해방자 예수님의 영혼이여!"

 

4. WCC 신학

WCC의 핵심 의제와 신학은 에큐메니즘(통합)이다. 그러나 WCC 에큐메니즘은 'World Council of Church'라는 자기 이름에 걸맞지 않게 교회적이지도 성서적이지도 않다.

이를테면, 에베소서 1장은 성서의 대표적인 에큐메니즘을 표지한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εἰς οἰκονομίαν τοῦ πληρώματος τῶν καιρῶν, ἀνακεφαλαιώσασθαι τὰ πάντα ἐν τῷ Χριστῷ...
ㅡ했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아나케팔라이오사스타이(ἀνακεφαλαιώσασθαι), 곧 '머리' 됨이다. 이를 유의해 다시 옮겨보면,

"카이로스(때)의 가득참의 통일(합) 속으로...
천지에 있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그리스도 안으로..."
ㅡ라는 문장이다.

에큐메니즘이라는 말은 바로 이 문장에서 통일로 번역된 어휘군 오이쿠메네(οἰκουμένη)에서 온 말이다. '집(οἰκοϛ)' 또는 '거주하다(οἰκέω)'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창세기 1장 1절의 베레쉬트(태초에)란 말도 '집'에서 유래한 것임을 감안할 때, 천지창조의 시작과 끝이 그리스도로 완결된다는 의미인 셈이다.

결론적으로 저 에베소서 문장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모든 게 복속되고, 그러면 드디어 'οἰκονομίαν(통합/에큐메니즘)'이 된다는 문장이다.

 

이 통합/에큐메니즘 원리를 고(高) 기독론(high Christology)이라 분류하는 것이다. 그래서 몸(σώμα, 소마)이 중요한데, 저 통합체는 그리스도의 몸 곧 교회를 말하는 까닭이다. 우리가 짓밟기도 하고 침뱉기도 하는, 그 교회.

여기까지가 성서 에큐메니즘이다.

그러면 WCC에 참여하는 개신교에게 물어 보시기 바란다. 당신들의 머리가 누구냐고. 그러면 그리스도라 답할 것이다.

그 다음은 WCC 참여 승려께 물어 보시기 바란다. 당신들의 머리는 누구냐고. “…”

이러한 불일치 때문에, 친(親) WCC 신학자는 그에 합당한 신학을 다시금 조제해내는 것이기도 하다. '예수' 또는 '머리(ἀνακεφαλαιώσασθαι)'만 빼면, 완벽한 통합이 된다.

여기에 단골로 등장하는 주제가 '성령론'이다. 심지어는 기독론이 성령론으로 대체되었다는 황당한 발제를 WCC 펀드로 공부하신 분들로부터 들은 적이 있다.

정리하면 머리를 누구로 한 에큐메니즘이냐가 중요한데, 성서는 (그리스도를 빠트린) 자연보호/환경보호 에큐메니즘이나 용공 에큐메니즘을 지지하지 않는다. 참고로 이와 같은 기독론은 에베소서뿐 아니라, 요한복음, 골로새서, 빌립보서, 로마서에도 모두 장착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 같은 기독론은 초대교회 설립자들의 창작인가, 헬라의 문학·철학인가? 그런 것이 아니다. 이는 원천적으로 구약성서 신학에 기반한다.

이를테면 이런 대목.

"야웨께서 내 주에게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여기서 '너'는 누구인가.

이것이 고 기독론(high Christology), 즉 성서 에큐메니즘의 진수이다.

우리 주변의 많은 기독교인이 이러한 전체적인 흐름보다 WCC라는 이름 자체에만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실정인데, 우선 상기한 그들의 신학을 유의하고, 아울러 그들의 신학의 추이를 파악하면 다음 네 그룹이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1) E. P. 샌더스 및 새 관점 파가 주창하는 언약적 신율주의(Covenantal Nomism)
2) 고토신학 및 세대주의 (예슈아/ 나자렌 포함)


3) 친 WCC 선교신학
4) 민중신학

이 신학들의 공통점은 (자신이 기독교 정체성을 갖고 있으면서도) 신약으로 구약을 말하는 데 우선하는 게 아니라, 구약으로 신약을 말하려는 경향성을 갖는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E. P. 샌더스와 그 추종자들은 구약과 신약의 차이가 거의 없는 것처럼 착시를 일으킨다.

이를테면 고토신학은 제3성전(또는 예슈아)이라는 용어를 선호함으로 그리스도의 소마(σώμα)를 약화시킨다(교회를 과정체로 전락시키는 것).

이를테면 여타 친 WCC 선교신학은 예수보다 하나님(엘로힘)이라는 신명을 더 선호하는 특징을 보이는데, 앞서 언급한 대로 기독론보다는 환경보호와 접목된 성령론을 더 선호하는 까닭이다. 왜냐하면 기독론(예수)를 들고 나가면 통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이를테면 민중신학(자)은 구약학을 선호한다. 구약학을 선호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구약학을 선호하면서 신약성서를 제2성서(2차 문헌/2류 문헌)라 부르는 것이 성서 에큐메니즘에 반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신학·신앙 노선들은 진화론, 사회주의, 친동성애 이상 가는 해악인데, 그 핵심이 '기독론(특히 고기독론 high Christology)'을 해체하는 지점에서 서로 만난다는 사실이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이 해체시키는 중이라는 사실을 잘 모르는 것도 공통점이다. 왜냐하면 자신들은 "예수, 예수", "주여, 주여" 하는 열심이 있으니까.

그래서 우리와 잘 맞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