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와 포스트모던 세계관
세계관은 인간의 사고와 행위 전반에 대해 매우 큰 의미를 갖는다. 세계관은 우리에게 세계 전체에 대한 일반적 관점을 제공하면서, 우리가 주위환경과 어떠한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그 속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규정해준다. 사람은 자신이 독자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가 몸담고 있는 세계나 시대, 혹은 집단이 공유하고 있는 세계관에 깊이 영향을 받으며 살아간다. 그리스도인은 기독교적 세계관을 따라 자신과 세상을 인식하지만, 현대 세계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는 가치와 신념의 영향을 받기도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오늘의 세계가 수용하는 세계관과 기독교의 관점이 서로 충돌하는 것을 발견하고 혼란스러워 할 때가 많다. 분명히 현대의 세계관과 기독교 세계관은 차이가 많다. 그러나 복음이 전달되어야 할 우리 시대에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의 배후에 작용하는 관점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현대의 세계관을 아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현대의 세계관을 이해하는 것은 나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이미 현대의 세계관에 어느 정도 물들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현대(modern)의 관점을 따라 세상을 보는 동시에 포스트모던(post-modern) 사고방식을 자연스럽게 수용하는 것을 본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해체와 극복을 겨냥하는 사상이지만 동시에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극단적인 모습을 띠고 있다. 그래서 이 글은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을 현대인의 세계관을 대표하는 사상으로 소개하고, 기독교가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의 세계관에 어떻게 대응하는 것이 좋을지 생각해 볼 것이다.
Ⅰ. 모더니즘과 현대 세계
현대세계의 등장은 기독교 신앙에 힘입은 바 크다. 많은 역사가들은 17세기 이후 서양에서 과학지식의 확장에는 기독교적인 세계관이 크게 작용하였다고 생각한다. 기독교 세계관은 과학의 발달과 현대 세계의 등장에 신학적인 바탕을 제공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세계는 자신의 등장을 가능하게 한 힘 가운데 하나인 기독교 신앙에 입각한 세계관을 거부하면서 그 영향력을 확대하여 왔다. 이제 현대인은 기독교의 도움을 더 이상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기독교의 세계관을 배격하고 무신론적인 세계관을 바탕으로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가고 있다. 그런데 현대인이 받아들이는 세계관은 대체로 계몽주의에 의해서 그 기본 관점이 형성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몽주의의 배경과 특징을 고찰한 다음 계몽주의로 인하여 형성된 현대 세계의 관점을 정리하기로 한다.
1. 계몽주의
계몽주의는 하나님의 뜻과 교회의 권위에 의하여 지탱되던 중세의 질서가 무너짐으로써 생긴 공허감과 무질서를 극복하려는 갈망을 바탕으로 등장하였다. 계몽주의는 르네상스의 인본주의 정신과 17세기의 과학의 혁명적인 발달을 한데 묶어 이른바 현대세계를 출현시키는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었다. 그 후 약 300년이 지난 지금까지 계몽주의의 여파는 유럽뿐만 아니라 세계로 파급되었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어서 현재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현실과 우리의 일상적인 사고나 세계관은 대부분 계몽주의에 간직돼 있던 관점이 확대되고 현실화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계몽주의는 무엇보다도 철학의 변화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그런데 철학의 혁명적인 변화는 흔히 근대 철학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데카르트(1596-1650)와 함께 시작되었다. 데카르트는 중세의 권위에 근거한 진리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상황에서 절대적으로 확실한 진리에 이르는 길, 지식의 든든한 기초(foundation)를 찾으려고 하였다. 그는 외부에서 진리의 객관적인 근거를 발견하기보다 자신의 내부, 사고하는 주체로서의 자아에서 진리의 확실한 근거(foundation)를 찾으려고 하였다. 그는 모든 것을 의심하는 가운데 의심할 수 없는 어떤 결론에 이르게 되었는데, 그것은 의심하는 사고의 주체는 의심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거기서부터 유명한 데카르트의 명제, “Cogito ergo sum,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가 세워지게 되었다. 이러한 철학 방법을 통해서 그는 인간을 사유하는 존재로 정의하게 되었고, 인간을 자율적이고 합리적인 주체로 규정하게 되었다. 이제 인간은 지식의 대상인 세계 밖에서 세계를 객관화시켜놓고 파악하는 대상으로 삼게 되었으며, 이러한 자세는 계몽주의 이후 현대의 진리와 인식에 대한 기본적인 관점이 되었다. 인간이 주체가 되면서 신은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신은 하나의 객체로서 쉽게 부정되었다. 이렇게 해서 현대인은 신 없는 세계관을 수용하게 되었다.
과학의 혁명적인 발전은 중세의 세계관으로부터 철저히 이탈하는 계기를 마련하여 주었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은 우주관의 대변화를 가져왔으며 삼층으로 된 중세의 우주 모형 이해를 근본부터 무너뜨렸다. 뿐만 아니라 과학의 발전은 질적인 관점에서 보아온 세계를 양적인 관점으로 보도록 만들었다. 중세의 과학은 자연을 볼 때, 자연의 배후에 작용하고 있는 “자연의 원리”에 초점을 맞추었다. 물론 자연의 원리 배후에는 신이 존재하였다. 모든 대상은 신이 의도한 내적 목적을 성취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자연스런 경향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새로운 과학에서는 사물을 그 성취로 이끌어 가는 이른바 “목적인(目的因)” 혹은 “내재적인 목적”이라는 것은 형이상학적인 사변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제 자연을 이해하는 수단으로는 수학적인 논리와 측량의 방법만이 권장되게 되었다. 그래서 측량 가능한 우주, 실제적인 것에 관심이 한정되었다. 그래서 인간은 경험 세계 안에 갇혀있는 존재가 되었다. 사람들은 신의 존재를 가정하지 않고도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관점과 새로운 방법은 지식을 탐구하는 모든 분야, 즉 정치학, 윤리학, 철학, 신학 등 인문과학의 모든 분야에까지 파급되었다.
2. 현대 세계의 관점
계몽주의와 함께 시작된 현대 세계에서 무게의 중심은 하나님에게서 인간에게로, 성경에서 과학으로, 계시에서 인간에 대한 신뢰에 바탕을 둔 이성으로 이동하였다. 사람들은 자신의 힘으로 자신과 세상에 대한 객관적인 지식을 획득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계몽주의 이후 현대인은 그 전 시대 사람들과는 다른 관점을 수용하게 되었다.
(1) 계몽주의 이후 현대인은 이성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진리에 대한 인식 가능성을 확신하게 되었다. 이제 이성은 그 때까지 진리를 결정하는 역할을 맡아 했던 교회의 권위와 계시를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 세상을 인식하고 이해하기 위하여 신의 뜻은 더 이상 고려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인간은 우주의 근본 질서를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이성을 활용함으로써 이 세계를 인간의 지배 아래 둘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제 모든 사유와 주장, 견해들이 이성의 잣대에 의해서 검토되고 그 가치를 인정받게 되었다.
(2) 이러한 이성의 기능에 대한 확신은 사회와 역사의 발전에 대한 낙관적인 견해를 갖도록 만들었다. 사람들은 자신의 힘으로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모든 불행과 고통은 무지에 기인하는데 이제 이성의 빛에 의해서 무지와 허위와 미신이 제거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성을 활용하여 이 세계를 파악하고 인간의 유익을 위해서 활용함으로 발전을 기약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진보에 대한 확신은 역사를 보는 관점에도 변화를 주었다. 이제 사람들은 현대적인 것은 현대적인 것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옳고 좋은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인간들이 자연의 법칙을 발견하고 그것을 이용하며 교육을 통해서 자신을 개발하면 보다 훌륭한 세계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연의 가혹한 조건을 극복함으로 자유로운 삶을 보장받을 뿐 아니라, 모든 사회적인 억압으로부터도 자유를 누리게 될 그런 세상을 기대하였다.
(3) 계몽주의 이후 현대인은 인식하는 주체로서 개인의 가치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개인주의는 현대 세계가 지니고 있는 중요한 성격 가운데 하나다. 공동체 보다는 개인이 존재론적으로 더 근본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사회란 개인이 서로의 이익을 절충하고 이루어나가기 위하여 구성된 집단이란 생각이 자리 잡게 되었다. 자신의 종교 공동체나 종족과는 별개의 개체로서 개인은 독립된 존엄성과 권리를 지니고 있다는 관점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이러한 관점은 진리의 인식에 있어서 특히 중요성을 갖는다. 데카르트 이후 모든 인식론적 확실성은 생각하는 사고의 주체로서의 개인이 출발점이 되었다.
현대인에게 있어서 사고하는 주체인 인간은 모든 전통과 공동체로부터 독립되어 있을 뿐 아니라, 세계를 초월한 존재로서 모든 것을 판정하며, 모든 것에 질서를 부여하고 다스리는 신과 같은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인간 이외의 세계에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오직 초월적인 자아 혹은 주체인 인간의 발전에 기여한다는 점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4) 고대 희랍과 중세를 지배하던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목적론적 자연관이 물러나고 계량과 계측의 엄밀한 방법론에 기초한 근세적 자연관이 등장함으로 수학적 과학주의가 나타났다. 사람들은 과학만이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과학적 방법에 의하여 기술되는 물리적 세계만이 영원 자족하며 존재와 가치의 근원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러한 생각은 하나님의 초월적인 영역을 제거하고 현세적 내재주의를 등장시켰다. 이제 종교마저도 비초월화되고 현세만이 의미 있는 영역, 실질적인 가치를 지닌 것이 되었다.
3. 현대 세계와 기독교
계몽주의와 함께 시작된 현대세계의 등장은 기독교가 유지하고 있던 권위와 가르침을 여지없이 흔들어 놓았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기독교는 그 전과는 전혀 다른 환경에 처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 세상이 전부라고 하는 견해가 17세기 현대 과학의 등장과 함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실재는 무시되어왔고 하나님을 믿는 것은 사사로운 개인적인 견해로서만 허용되었다. 지적인 탐구 영역에서는 하나님의 존재 여부가 중요하지도 않았다. 서양 문화에서 교회의 지배적인 역할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이성과 양심을 따라 진리를 받아들이고 행동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였다. 교회나 성경이나 교리가 사람들의 행동이나 신념을 규제할 수 없게 되었다. 이제 이성은 그 동안 진리를 결정하는 역할을 맡아하던 계시를 밀어내고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성은 종교적인 진리를 판단하는데 있어서도 계시나 교회의 권위보다 우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제 이성은 교회의 가르침을 뒷받침하는 시녀가 아니라 교회의 가르침을 판단하는 재판관이 되었다.
이러한 근대세계의 새로운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여 신학적인 설명을 시도한 것이 이른바 이신론(Deism)이다. 이신론자들은 이성의 잣대에 비추어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것은 그 무엇이든지 기독교가 양보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 결과 기독교에는 최소한의 교리만이 남게 되었는데, 대부분의 이신론자들은 우주의 제일 원인자 혹은 창조자인 하나님의 존재, 인간 영혼의 불멸성, 죽은 다음에 이루어질 선과 악에 대한 응보 등을 수용하였다. 이런 형태의 기독교는 이름만 기독교를 유지하고 있을 뿐 기독교의 힘과 내용을 상실하였다. 이신론은 계시와 권위에 안주하던 기독교가 근대세계의 도전에 대하여 응답한 방식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그것은 근대세계의 도전에 대한 부적절한 응답이었다. 이신론자들은 새로운 사조와 관점에 대하여 무분별하게 다가갔고 영합하였다. 이신론은 세계를 변혁시킬 힘도 기독교의 고유한 힘과 생명력을 유지할 힘도 갖고 있지 못했다. 그러면 오늘의 기독교는 현대의 세계관에 대하여 어떻게 대응하여야 할까?
Ⅱ. 포스트모더니즘과 오늘의 세계
포스트모더니즘은 하나의 철학 이론이기 이전에 이미 시작된 우리 시대의 풍조요 시대정신이다. 그것은 어느덧 우리의 사고와 행동에 젖어 들어와 있다. 모더니즘 혹은 현대성이라고 하는 것이 철학적으로 무엇이라고 규정되든 절대적인 힘으로 17세기 이후 서양에서, 그리고 다음으로 모든 세계에서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을 지배했듯이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과 함께, 그리고 다른 한편 모더니즘의 관점을 무너뜨리면서 서서히 영향을 확대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 기독교는 포스트모더니즘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든 부정적으로 평가하든, 싫든 좋든 이 새로운 사조를 무시하고는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 갈 수 없다. 포스트모던 사유 방식은 선택 가능한 하나의 관점이라기보다 이 시대를 관통하고 있는 시대 흐름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이제 그것은 서구 세계를 통하여 세계 전체로 확산되어가고 있으며 하나의 시대정신으로서 세계 대부분의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의 관점과 사고방식에 깊이 작용하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전문적인 사상가들에 의하여 제기된 철학사상이기도 하지만 과학기술의 발달과 함께 자연스럽게 수용되고 있는 우리시대의 정신이자 앞으로 21세기를 지배하게 될 사회의식이다. 여기서 우리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성을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1. 포스트모더니즘의 지적 특성
포스트모더니즘을 지적인 현상으로 파악할 때 그 주된 특성은 사회발전 또는 인간행위의 근저에 놓여 있는 합리성을 밝히고자 하는 사상적 전통, 즉 우리가 계몽주의라고 하는 것에 대한 반대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특성을 함축하고 있다.
(1) 자아와 객관적 세계상에 대한 확신의 붕괴
사고하고 인식하는 주체로서의 자아에 대한 확신은 현대 세계를 출현시킨 근본적인 토대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포스트모더니즘은 현대 세계의 토대를 이루고 있는 자아에 대한 근본 확신을 문제 삼는다. 자아는 세계와 대립된, 세계를 초월한 주체로서 세계에 대한 확실하고 객관적인 인식의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도리어 자아는 세계 안에 존재하고 있는 역사와 문화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세계를 초월한 세계 밖에 있는 존재가 아니라 철저하게 세계 안의 존재라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인간 존재의 객관성과 함께 세계에 대한 인식과 지식의 객관성은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이제 포스트모던 세계는 합리성에 대한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기준의 근거, 가치에 대한 보편적인 기준을 상실하게 되었다. 자아에 대한 확신의 상실은 세계에 대한 객관적인 인식 가능성에 대해서 회의에 빠지게 만들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관점을 따라 말하자면, 이제 우리는 세계에 대하여 객관주의적인(objectivist) 전망을 가질 수는 없고 다만 해석하는 자(constructionist)로서 세계에 대하여 전망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더 이상 이 세계를 단순히 우리 밖에 있는(out there) 어떤 대상으로 만날 수 없게 되었다. 우리는 세계 안에 있고, 세계는 우리가 사용하는 개념에 의하여 해석되고 구축되는 것이지 고정 불변하는 존재로 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더구나 현대의 언어학에 따르면 우리의 언어는 세계를 객관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우리가 세계를 객관적으로 표현했다고 말하지만 사실 언어라는 것이 그 언어가 사용되고 있는 구조와 상황 속에서만 타당성을 갖는다는 현대 언어학의 관점을 상기할 때, 그 표현은 근원적으로 객관성과 보편성을 갖지 못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더구나 오늘날 지구촌 상황에서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은 이제 더 이상 모든 것을 포괄하는 하나의 실재, 모든 인간의 관심사를 하나로 묶어주는 보편적인 단일한 세계란 없다고 주장한다. 다양한 사람들에 의하여 구성된 다양한 집단이 각기 자신들이 경험한 세계에 대하여 다양한 “이야기(stories)를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합적이고 다양한 실재들”로 구성된 세계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현실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처럼 객관적인 세계상을 부인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관점은 지식의 객관성을 추구한 계몽주의 이후 건설된 현대 세계의 근본 바탕을 흔들어 놓았다. 이제 어떤 사상이나 지식의 타당성을 판정할 수 있는 하나의 기초를 발견하려는 시도는 불가능하게 되었다.
(2) 거대 담론의 거절
현대 세계는 이 세계에 대한 객관적인 지식의 가능성과 보편성에 대한 확신을 토대로 건설되었다. 이 세계에 대한 객관적인 지식의 가능성은 인식의 주체인 자아의 자율성에 대한 확신과 함께 이 세계에 깃들어 있는 보편적인 “법칙”이나 “원리”에 대한 확신에 의하여 뒷받침된다. 이러한 확신은 현대인으로 하여금 다른 모든 것을 판정하고 뒷받침해 주는 보편성을 담지한 거대 담론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제 포스트모던 세계는 현대성이라는 거대 담론, 합리적이고 과학적이라는 현대의 신화를 받아들이지 않을 뿐 아니라, 어떤 다른 이야기도 보편적인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어떤 이야기도 다른 이야기와 주장을 판정하는 거대 담론으로서의 권위를 인정받지 못하게 되었다.
거대 담론에 대한 불신은 지금까지 표준으로 여겨져 온 갖가지 주장이나 가치가 사실은 지식과 힘의 행사에 있어서 주도권을 행사해 온 계층이나 집단의 관점이었음을 자각하게 되었다. 거대 담론의 거절은 지금까지 당연한 것으로 여겨온 서양, 백인, 남성, 기독교의 관점에 대한 반발로 나타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여성 운동, 동성연애자들의 투쟁, 종교 다원주의, 뉴 에이지 운동, 환경 운동, 포스트 식민주의 등은 직접, 간접으로 거대 담론을 거부하는 포스트모더니즘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각기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다양한 이야기가 경쟁하는 다원 사회의 현실을 인식하는 동시에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거대 담론 자체를 거부하는 시대에 들어섰다. 현대 세계 속에서 오랫동안 기독교가 현대의 이성 만능주의, 과학에 입각한 세계관이라고 하는 거대 담론에 맞서 하나님 이야기를 해야 했다면, 오늘의 기독교는 어떤 거대 담론도 신뢰하지 않는 세대에게 하나님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되었다.
(3) 진리의 부정
진리의 부정이란 표현은 앞에서 정리한 포스트모더니즘의 관점을 요약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포스트모더니즘이 진리의 객관성에 대하여 회의하는 이유를 다시 설명하는 것은 지루한 반복이 될 뿐이다. 여기서는 진리의 객관성을 부정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관점이 어디까지 발전하고 있는지를 지적하는데 초점을 맞추기로 한다. 잘 알려진 대로 현대는 진리의 객관성과 보편성에 대한 확신을 바탕으로 세계를 건설하였다. 인식의 주체로서의 자아에 대한 확신, 객관적 세계상에 대한 확신, 인간은 그 대상에 상응하는 내용을 객관적으로 들어내고 표현해 낼 수 있다는 인간의 정신과 언어의 능력에 대한 확신, 그리고 과학적이고 수학적인 정밀성을 바탕으로 구축된 합리적인 이론을 바탕으로 인간의 삶의 조건을 향상시킬 수 있다는 확신 등은 모두 진리의 객관성과 보편성을 뒷받침하고 확대해 나가는 근거가 되었다. 그러나 위에서 논의했듯이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은 자아에 대한 확신, 객관적 세계상에 대한 확신, 그리고 진리를 표현해 내는 언어의 능력에 대한 확신 등을 근원적으로 비판함으로써 진리의 객관성과 가능성, 그리고 진리의 객관적 표현 가능성은 근거가 없음을 들어내었다. 그런 의미에서 포스트모던 시대는 진리의 가능성을 포기하고 거부하는 포스트 진리 시대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은 포스트모더니즘은 단순히 진리의 객관적 가능성에 대한 방법론적 회의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진리의 객관적 표현 가능성에 대한 회의는 어느 시대나 있었다.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은 푸꼬가 주장한 것처럼 지식의 근저에는 근본적으로 권력의 충돌과 투쟁이 짙게 배어 있음을 인식하고 있다. 이른바 진리란 자신의 입지를 세워주는 “진리”를 내세우기 위한 “지식에 대한 의지(will to knowledge)”의 산물이며 권력에 대한 의지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이른바 진리에 숨겨져 있는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비판하는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은 진리의 표현 가능성을 부정하는데서 한 발 더 나아가 진리의 효용성과 진리 자체를 부정한다.
2. 포스트모더니즘의 사회적 특성
포스트모더니즘의 사회적 특성은 대체로 포스트모더니즘의 지적인 통찰을 반영한다. 지적인 영역에서와 마찬가지로 사회적 영역에서의 포스트모더니즘의 출발점도 모더니즘의 원리와 실행이라고 불리는 것에 대한 적대감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보인다.
(1) 전문성이나 권위를 주장하는 사람이나 집단에 대한 거부
포스트모더니즘은 위로부터의 판단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예를 들어 실제로 유행할 수 있는 것을 밝혀내고 우리가 입어야 하고 표현해야 하는 기준을 제시해 줄 수 있다고 가정되는 디자이너의 특권적 지위는 포스트모던 문화에 의하여 도전을 받는다. 미학에서의 품위나 위대한 전통에 관한 일반적인 판단을 포스트모더니즘은 존중하지 않는다. 포스트모던 감수성은 “각자가 자신의 기호에 따라” 과시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권위를 주장하는 전문가의 가식을 벗김으로써 포스트모던 문화는 미학적 상대주의를 고취한다. 이것은 일종의 해방적 내용을 담고 있는데, 그 이유는 포스트모던 문화의 중심에는 삶을 살아가는 ‘올바른’ 기준을 정하는 모든 ‘폭군’에 대한 거부가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모든 폭군, 즉 전문가, 고급, 전통, 권위, 표준, 중심 등에 대항하여 포스트모던 문화는 다양함, 야단스러움, 그리고 무한한 차이를 기반으로 번창한다. 이러한 충동의 배후에는 진리와 표준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동기가 순수할 수 없으며, 그들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많은 의견의 불일치가 있기 때문에 유일하고 논쟁의 여지가 없는 ‘진리’란 없다고 보며, 흔히 ‘진리’에 대한 정의가 횡포로 전락할 수 있음이 전제되어 있다. 이처럼 포스트모더니즘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따라야 하는 기준을 정하는 사람들을 서슴없이 거부하는 것에서 나타나듯이 이른바 민주주의적 방종의 색조를 강하게 띠고 있다.
(2) ‘진정성(authenticity)'에 대한 탐구의 거부.
참된 것, 의미, 실재 등은 모더니즘의 욕구의 대상이다. 그러나 모든 가변적이고 피상적이고 사소한 것을 넘어서 참된 것을 찾고 의미를 찾으려는 것은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거부된다. 진실한 것, 의미를 찾으려는 것은 환상이라는 것이다. 도대체 하나의 ‘진실된’ 의미란 없으며, 다만 ‘실제적인’ 것에 대한 견해와 해석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은 조작물이기 때문에 진실 된 것, 진정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실제적인 한국, 실제적인 역사, 실제적인 전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라는 모더니스트들의 반복적이고 절박한 물음은 논점이 빗나간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물음의 배후에는 진실한 의미가 존재하며, 그 의미가 인식될 수 있다는 암묵적인 생각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볼 때 “진정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진정한 것에 대한 진정하지 못한 구성만이 존재할 뿐이다.”
(3) 다양성의 축하와 감각적 경험의 향유
포스트모더니즘은 진정한 것에 대한 탐구가 무의미한 것이라고 보지만 그렇다고 실망하거나 절망하지도 않는다. 이제 진정한 것을 탐구하기를 포기하고 대신에 존재의 경험을 만끽하자는 것이다. 그냥 주어진 것을 즐기고 향유하면 된다는 것이다. 진정한 의미, 표준적인 해석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다만 무한히 많은 다양한 의미와 해석이 존재할 뿐이라는 것을 안다면 어떤 표준적인 의미나 권위 있는 해석을 찾는 것은 쉽게 포기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관광에 나서거나 영화를 보거나 음악을 들을 때 거기서 진정한 의미를 찾거나 바른 해석을 찾으려고 애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다만 있는 그대로 - 흥미, 기분전환, 가사로부터의 일시적인 도피, 파트너에게 사랑을 청할 수 있는 기회 -를 즐기는 것으로 만족하면 그뿐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다양성과 감각적 향유를 찬양하는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옹호되는 것은 보다 넓은 사회와 개인의 존재 안에서 ‘차이’와 더불어 사는 것이고 ‘진정한 것’, ‘표준적인 의미’, ‘권위 있는 해석’에 구애받지 않고 즐거움을 선택함으로써 의미와 표준이 되는 해석에 대한 불안감을 떨쳐버리고 그냥 삶을 향유하는 것이다.
3. 포스트모던 세계의 관점과 기독교의 대응
21세기에 기독교가 처하게 될 환경은 어떤 세계인가. 사람들은 이제 우리는 현대세계를 지나서 포스트모던 세계에 들어섰다고 진단한다. 그러나 19세기, 20세기의 현대화된 세계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어느 정도 전근대적인 사고방식과 생활습관을 유지했듯이 21세기에도 여전히 그러한 상황은 계속될 것이다. 현대세계가 고수해 온 세계관과 사유방식은 갑자기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모더니즘을 완전히 대치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21세기에도 기독교는 포스트모더니즘만을 상대로 활동할 수 없다. 그러나 지금까지 보다는 포스트모더니즘이 훨씬 더 설득력을 갖게 될 것이며, 따라서 기독교는 포스트모던적인 사유방식에 더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가 포스트모더니즘을 무조건 전폭적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는 자신의 사명을 더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포스트모더니즘을 수용하기도 하고, 거기에 맞서기도 하고, 자신의 고유한 관점을 제시하기도 해야 할 것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1) 기독교는 자신의 이야기에 충실해야 한다.
계몽주의 이후 기독교는 이성과 과학의 공세에 맞서 힘겨운 싸움을 벌였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의 등장이 기독교의 입장을 유리하게 만드는 것도 아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든 진리를 상대화하기 때문이다. 이제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보편적이고 참되고 누구에게나 유익한 이론과 지식은 없다고 생각한다. 객관적인 진리나 도덕적인 표준이 없을 뿐 아니라, 객관적인 해석도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보편적인 관점은 항상 조정하고 억압할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모든 것을 지배하는 관점을 거부하고 특정한 관점, 다원주의적인 관점을 선호한다. 포스트모던 세계에서 사람들은 합리성과 의미의 보편적인 틀의 기초로서 현대과학의 방법이나 성경의 계시를 모두 신뢰하지 않는다. 그러면 이러한 지적 환경에서 기독교는 무엇을 할 수 있고, 또 해야 하는가?
기독교는 모든 사람들이 수용할 수 있는 기준을 따라 신앙을 방어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그런 기준이란 적어도 포스트모던 세계 속에서는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포괄하는 보편적인 기준을 내세우기 보다는 기독교의 자기 이해(self-understanding)에 입각한 특수성으로부터 기독교 신앙이 정당화되고 칭송되어야 한다. 기독교는 보편적인 합리성에 근거하여 복음을 변증하기보다 기독교가 서 있는 자신의 이야기에 근거하여 복음을 변증해야 한다. 다행히 포스트모던 풍조는 고전적인 합리성에 근거하기보다는 기독교 신앙의 독특성을 강조하는 방식의 변증을 선호한다. 이 시대의 정신은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논리보다는 이해와 의사소통에 있어서 아주 구체적인 방식을 좋아하며 그런 것이 더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대의 문화는 기독교의 특수성과 기독교가 제시하는 비전에 대하여 개방적이다. 그러니까 이제 더 이상 과학에 근거한 합리성의 요구에 끌려 다니지 않아도 된다. 무엇보다도 기독교는 자신의 독특한 이야기에 충실해야 한다. 이것은 권위에 근거한 전통적인 교리를 고수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기독교가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자신의 존재를 가능하게 한 이야기, 자신의 정체성(identity)에 대한 명료한 감각을 유지하는데 있다. 그것은 기독교가 살아남는 길일 뿐 아니라 포스트모던 세계 속에서 기독교가 공헌할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2) 기독교는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을 들어내 보여 주어야 한다.
기독교가 자신의 이야기에 충실하다고 해서 그것이 곧 사람들에게 설득력을 갖는 것은 아니다. 거대 담론을 거부하는 시대 풍조는 기독교의 이야기가 또 하나의 억압적인 힘으로 군림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포스트모던 세계에서 사람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과학이나 철학을 통해서 실재에 대하여 그럴 듯하게 해석해 주거나 합리적으로 증명해 주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가장 바라는 것은 실재에 대한 인격적인 경험, 삶이 변화되는 경험이다. 그들은 실재가 구속하는 현존(redeeming presence)으로서 알려지기를 바라지 위대한 해석의 틀로서 알려지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기독교는 사람들이 삶의 능력, 영적인 힘을 경험할 수 있도록 그 전보다 더 영성을 강조해야 한다.
성경의 가치도 권위에 근거하여 주장될 수 없다. 그러한 권위는 더 이상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그러나 성경에 대한 객관적이고 학문적인 탐구 방식도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그러한 연구 결과는 신자들의 영적 욕구를 만족시키지 못했으며, 그들에게 성경은 고대의 문화 역사에 관한 전문적인 지식을 제공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주지 못했다. 역사비평은 독립적인 종교의 근거로서는 힘이 다한 것 같다. 물론 역사비평이 필요 없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성서의 언어는 소비자에게 공급하기 위해서 신학적인 정보를 저장하고 있는 통이 아니라는 말이다. 성서가 들어내는 계시는 보다 많고 좋은 지식이 아니라 보다 깊고 풍부한 만남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권위는 삶을 변화시키는 힘에서 확인될 수 있다. 포스트모던 세계에서 사는 사람들이 듣기 원하는 복음의 진리는 추상적이고 비인격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신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 하나님은 인격적으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이야기다. 성경의 지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볼 수 있게 한다. 복음의 지혜는 어떤 다른 관점보다도 삶의 신비에 대해서 더 진실하고 실제적이고 바른 이해를 제공한다. 이제 기독교는 단순히 전통적인 신앙을 무조건 받아들이라고 요구할 수 없다. 기독교는 자신의 이야기를 근거로 자신이 말하는 의미 있는 신앙을 선택하도록 제안하고, 기독교 복음이 우리 자신이나 세계에 대한 이해에 더 적합함을 보여 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테드 피터스(Ted Peters)는 기독교 복음이 이 세상에서의 삶을 풍요롭게 한다는데 내기를 걸도록 사회를 향하여 도전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기독교는 기금까지 현대세계를 지배해 온 유사 거대 담론에 맞서서 복음이 참된 거대 담론임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겸비한 자세를 가지고 그러한 주장을 제시해야 한다. 만약 그러한 주장이 끊임없는 영적 혁명을 동반하지 않는다면 기독교의 담론 역시 강제적이고 억압적인 기능으로 변질될 것이며, 그렇게 될 경우 기독교는 더 이상 설득력을 갖지 못하게 될 것이다.
(3) 기독교는 해방의 실천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료따르(Jean-Francois Lyotard)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근본 성격을 한마디로 웅대한 이야기, 혹은 메타 이야기의 퇴화(obsolescence), 메타 이야기에 대한 불신(incredulity)이란 말로 규정하였다. 포스트모던 세계는 현대성이라는 웅대한 이야기, 합리적이고 과학적이라는 현대의 신화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합리와 과학, 객관성, 개인주의, 보편주의에 대한 의존은 공동체의 죽음과 소외, 관료체제를 초래했으며, 그것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기 보다는 새로운 억압 아래 놓이게 했다. 그래서 포스트모더니즘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러한 현대의 가치에 의존할 때 불가피하게 힘의 집중과 남용, 지역 공동체의 파괴, 개인의 무기력이 초래되고 새로운 억압이 일어난다고 주장한다. 웅대한 이야기에 대한 불신은 지금까지 표준으로 여겨져 온 갖가지 주장이나 가치가 사실은 지식과 힘의 행사에 있어서 주도권을 행사해 온 계층이나 집단의 관점이었음을 자각하게 되었다.
포스트모던 세계 속에서 기독교는 힘의 집중과 남용, 지역 공동체의 파괴, 생태계의 위기 등에 대해서 예민한 감각을 유지해야 한다. 영성의 회복, 삶의 능력은 신앙의 차원, 개인의 경건 차원에 머물러서는 안 되고 정치 사회적인 활동을 통해 구체화 되어야 한다. 포스트모던 세계 속에서 기독교는 민중 지향적이고 비계급적이고, 상호주체적인 모습으로 억압적인 힘의 행사에 맞서고 해방의 역사에 참여하여야 한다. 참여는 간격을 두고 지시하고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과 함께 시작하고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참여는 이해하게 하고 이해는 생각과 의사를 소통하게 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참여 없는 진리 주장을 거부한다. 기독교가 해방양식의 공동체를 형성함으로 신뢰받는 교제(sociality)를 보여 주는 것은 포스트모던 정신의 최상의 모습을 반영하는 것인 동시에 포스트모더니즘의 최악의 모습에 도전하는 것이 된다. 기독교가 중심보다 주변에 관심을 기울이고 해방 지향적이 되는 것은 그 동안 잊었던 기독교 자신의 이야기를 되살려 내는 것이다. 그것은 출애굽 사건, 예언자들의 상상력, 예수의 삶과 가르침에 관한 이야기다.
포스트모던 세계는 기독교에 심각한 위기를 조성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기독교가 이 새로운 풍조와 관점을 회피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그 속에서 기독교가 어떻게 대응하고 어떤 모습을 보여주느냐에 있다. 위기는 항상 기회로 작용할 수 있다. 포스트모던 세계는 기독교가 참된 모습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수도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기독교는 자신의 이야기에 더 충실하고,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을 구체적으로 들어내 보여 주며, 해방의 실천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이것은 포스트모던 세계에서 뿐만 아니라 현대세계 속에서도 요구되는 것이다. 즉 그것은 기독교가 어느 시대, 어디에서나 회복해야 할 모습이다. 그런데 현대세계 속에서 기독교는 모더니즘의 관점과 원칙을 거부하기 힘든 정신적 환경 속에서 우왕좌왕 하며 갈피를 잡지 못했다. 기독교는 과학주의, 이성과 경험을 위주로 객관화하여 대상을 파악하는 현대의 관점에 대하여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 21세기에도 기독교가 현대세계의 관점과 논리에 사로잡혀 있다면 확장되어 가는 포스트모던 세계 속에서 더 큰 위기를 겪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기독교가 앞으로 더욱 자신의 이야기에 충실하고, 복음의 능력을 따라 삶을 변화시키는 영성을 회복하며,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따라 해방의 역사에 참여한다면 포스트모던 의식을 가진 사람 뿐 아니라, 전근대적인 세계관과 현대세계의 관점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에게도 설득력을 갖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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