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인물

아브라함의 부르심

하나님아들 2020. 10. 5. 17:51

아브라함의 부르심

 

 



아브라함은 유대교, 기독교, 회교에서 믿음의 조상으로 여겨지며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다. 링컨 대통령을 통해 그 이름은 성경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친근한 이름이다. 아브라함을 아는 것은 성경의 전체 맥락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 아브라함의 가족
데라는 아브라함의 아버지이다. 그에게는 세 명의 아들이 있었다.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이다(창세기 11:27, 참고로 하란이 데라의 맏아들임에 분명하다).

아브람의 출생 연대를 성경 기록에 따라 역산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왕상 6:1 에 근거한 출에급 연대 B.C.1446년에 이스라엘의 애굽 체재430년 (출 12:40),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을 때의 연령 100세 (25:26), 야곱이 애굽에 이주할 당시 나이 130세(창 47:9)를 모두 더하면 B.C.2166년이란 아브라함 출생 연대가 나온다. 그러나 출에굽 연대에 대하여서도 학자들마다 차이를 보이며, 성경 족보도 중간마다 생략된 경우가 많으므로 이는 어디 까지나 개략적인 연대일 뿐이다.

유대 전승에는 데라에 대한 흥미로운 내용이 점해지고 있다. 특히 창세기의 "하란은 그 아비 데라보다 먼저...죽었더라"(창 12:28)과 관련이 있는데, '그 아비 보다 먼저'의 문자적 의미는 '그 아비 면전에서'이다. 그러나 이 말은 '그 아비가 살아 있을 때에'로 봄이 타당하다(Luther, Calvin, Rosenmuller). 그러나 유대 전승에 의하면, 당시 데라는 화신(火神) 숭배자 였는데 아들 하란이 이를 거부하자 그들 당국에 고소, 자신의 면전에서 불에 타죽게 했다 한다. 그러나 이의 사실성은 믿기 어렵다. 아뭏든 하란의 죽음은 성경상 아비보다 먼저 죽은 최초의 경우로 (1)인간 수명이 더욱 단축되었음을 시사하며 (2)죽음은 그 누구에게도 순간적으로 엄습할 수 있음을 경고해 준다.


• 아브람/ 고귀한 아버지
'아브람' 의 뜻은 '고귀한 아버지' 로 선민의 조상인 그에게 걸맞는다. 그리고 '사래'는 '나의 공주'란 뜻이다. 후일 이 이름은 하나님에 의해 각각 '아브라함'(많은 무리의 아버지)과 '사라'(여주인)로 바뀌는데(17:15) 이는 그들이 지엽적 존재에서 믿음의 조상이란 거시적 존재로 변모 되었음을 뜻한다.


• 아브라함의 부인/ 사라
"나홀의 아내 이름은 밀가니 하란의 딸이요"(창 11:29). 나홀의 조카 딸과 결혼하였듯이 아브람 역시 이복 누이와 결혼 하였다(20:21).이러한 근친 결혼은 족장 시대에 있어서는 (1) 지리적, 문화적 여건상 불가피하였거나 (2) 혈통 우월쥐의에 입각한 종족 보존 방법일수도 있었고 (3) 또한 순수한 여호와 신앙을 전수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 방법이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인구 증가 및 확산이 이루어졌고 한 가정의 성적 순결 유지가 더욱 중요하게 된 시점에서 하나님께서 이러한 근친 결혼을 공식적으로 금하셨다.(레18:1-18). 따라서 오늘날과 같은 성적 혼란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법정신을 깨닫고 그 뜻을 철저히 준행하여야 한다.


• 아브라함의 비극/ 무자함
"사래는...자식이 없었더라"(창 11:30). 그 이름의 뜻이 고귀한 아버지인 아브람, 그리고 많은 무리의 아비가 될 자인 아브라함이 이때 까지 자식이 없었다는 큰 수치가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고대 근동 지방에서는 자식을 신의 선물로 생각하였기 때문에, 아이가 없다는 것은 신의 은총에서 제외된 자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그라나 당시 급속히 번식해 나가던 이방 족속들과는 달리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은 그분의 엄밀한 계획하에 있었으니 이는 마치 씨앗이 땅 속에서 발아의 때를 기다리듯 아브람의 씨는 하나님의 뜻에 의해 잠시 대기하고 있는 상태일 뿐이었다.(17:1-8).


• 아브라함의 이주
"데라가...데리고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창 11:31). 데라가 무엇 때문에 그의 본토를 떠났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으나 행 7:2,3에서 스데반이 말한 것처럼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이 주요 동기였을 것이다.

"그가 이렇게 대답하였다. “여러분, 들어 보십시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서 살기 전 메소포타미아에 있을 때 영광의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 ‘너는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거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사도행전 7:2‭-‬3‭)


물론 이 외의 다른 요소들도 있었을 것이지만 그것 역시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던 것이라 하겠다. 한편 여기에는 갈대아 우르를 떠난 무리 중 나홀이 빠져 있는데 24:10에 나홀이 우르에서 메소포타미아로 옮겨간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먼저 데라 일행이 이주 한 후 나홀의 가족도 뒤따라 이주한 것 같다.


• 미지의 땅/ 가나안으로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창 11: 31). 가나안은 당시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거민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땅이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곳으로 아브람을 인도하려 작정하셨으며 아브람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히 11:8)서도 그 같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하여 믿음의 순례 길을 떠난 것이다.

데라의 무리는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하게 된다."(창 11:31). 데라의 노쇠함 때문에 가나안으로의 여행이 이처럼 잠시 지체 되었던 것 같다. 그런데 데라 사후 12:1에서 가나안 이주를 위한 하나님과 아브라함과의 직접적인 언약이 보다 명료하게 제시된다.

 

• 아브라함의 소명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소명을 받았을 때 나이는, 칠십 오 세였다. 아브라함의 향년이 백 칠십 오세(175세)였으니(25:7) 이때는 그의 중년기이다. 대개 중년기의 사람들은 현실에 안주하려 하며 변화를 기피하려는 것이 일반적인데, 갈 바를 알지 못하고서도 지체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본토 집을 나선 아브람에게서 우리는 진정한 용기와 신앙의 결단력을 보게 된다(마 4:18,19,20,21,22).


1) 본토를 떠나라
혹자(Calvin)는 이를 '우르'로 이해하고 아브람이 구체적 소명을 받은 것을 우르에 있을 때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11:31). 그러나 아브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후 떠난 곳이 '하란'인 점에 입각할때(4절) 이는 하란 , 더 나아가 우르와 하란을 포함하는 메소포타미아 전지역을 가리키는 것임에 분명하다.

"떠나...가라"라는 말의 의미는 '누가 네 뒤에 남든지 상관 말고 너를 위하여 떠나라' 는 의미이다. 기독교 역사는 이러한 떠남과 분리의 역사인데 오늘날 우리 성도들 역시 죄악된 이 세상에서 분리되어 의와 거룩을 좇는 순례의 길을 떠나야 한다(롬 12:2).

"내가 네게 지시할 땅"을 직역하면 '내가 네게 보여 줄 그 땅'. 여기서 '보여 줄' 은 미래 미완료형으로 아직 까지는 보여지지 않으나 미래에는 구체적으로 보여질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땅'은 아브람으로서는 불명확하나 하나님으로서는 이미 작정해 놓은 가나안 땅을 의미한다.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겠다
Living Bible은 문두(文頭)에 '네가 그렇게 하면'(If you do)이란 말을 부기하고 있다. 한편 여기서 '큰 민족' 이란 단순한 숫자적으로 인구가많은 것 뿐 아니라 영적으로 위대한 민족을 가리키는 바 곧 '이스라엘' 에 적합한 명칭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이 그의 적은 수의 친척을 떠나기만 하면 (1절) 그 보상으로 오히려 큰 민족을 이루게 해주시리라고 보장하셧다.


3) 네게 복을 주겠다
아직껏 무자(無子)한 아브람(11:30)이 많은 무리의 아비가 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수 있는 근거이다. 실로 하나님께서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분이니 그분께서 원하시고 또한 복을 내려 주시기만 하신다면 인간적인 모든 제약은 사라지고 만다(롬 4:18).


*네 이름을 창대케 될것이다
직역하면 '내가 네 이름을 크게 할 것이다'.이는 곧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유명케 하여 그 이름이 길이 회자(膾炙)되게 하시겟다는 뜻이다. 실제로 역사 속에서 아브람의 이름은 위대하게되었다. 즉 열국의 아비(17:4,5),선지자(20:7), 하나님의 방백(23:6), 여호와의 종(시 105:5,6) 하나님의 벗(약 2:23) 등의 명칭을 부여받았다. 뿐만 아니라 그의 이름은 선민 이스라엘의 시조(始祖)로서, 또한 믿는 모든 성도들에게는 영원한 믿음의 조상으로서 길이 남게 되었다.. 이처럼 사람을 높이시는 이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이시니 겸손한 자는 높이 들림받지만 무릇 스스로 높아지려는 자는 낮아지고 말 것이다.


* 너는 복의 근원이 될것이다
이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헤예 베라카'는 곧 '너는 복이 될지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말이 함죽하고 있는 의미에 대하여는 다양한 견해가 제시된다. (1) 아브라함으로 인한 물리적 풍요(슥 8:12)를 의미한다. (2) 사람들이 상호 축복의 양식(樣式)이 된다는 뜻이다.(Calvin 등) (3) 여기서 복은 영적인 복으로서 곧 아브라함은 그로 말미암는 복의 기준이 되리라는 뜻이다(Delitzsch 등). 이상의 견해를 종합해 볼 때 물론 첫번째와 두번째 견해도 타당한 부분이 있으나 세번째 견해로 보는 것이 맞다. 그런데 여기서 아브라함으로 말미암는 영적 축복이란 단순한 아브라함 개인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궁긍적으로는 그의 가계(家系)에서 약속된 '여자의 후손'(3:15)인 메시야가 나리라는 뜻이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과 영생은 누구든지 그를 믿기만 하면 미칠 수 있는 것이니(살후 2:13,14)그 같은 메시아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가리켜 '복의 근원'이라 칭함은 당연하다.

이 복은 "땅의 모든 족속이 함께 얻게 될 복이다(창 12:3)." 이는 '복의 근원'(2절)에 대한 보충,확대 설명이다(갈 3:8). 축복은 타락 결과 인간에게 주어진 저주(2:17;3:16,17,18,19)와는 정반대 되는 것이니, 이러한 축복은 단순한 물질적 축복 뿐 아니라 죄를 사해 주느 영적 축복을 포함한다(Calvin, Keil, Luther). 즉 본질은 아브라함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구상의 모든 민족이 자신의 죄에 대하여 해결받고 진정한 삶의 축복을 누릴 수 있게 되리라는 복된 언약이다(눅 24:47).



* 너로 인해 갈리고 나뉘리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내가 저주 하리니"(창 12:3)
하나님과 아브람과의 각별한 관계를 나타내는 이 말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아브람과 상호 공수 맹약을 맺으시겠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제 아브람의 이웃은 아브람과의 관계에 따라 그들도 각각 하나님께 축복과 저주를 받게 될 것을 의미한다. 이 원리는 신약 시대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에도 적용된다. 아브라함은 그가 가진 믿음에 의해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 되었으면, 모든 인류의 분수령을 이루는 상징적인 인물이다. 그와 동일한 믿음을 가진 자와 그렇지 않은 자로 세상은 나뉜다. 마치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를 통해 좌 우편 강도가 나뉜 것과 같다.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 여기서의 '저주'(칼랄, קלל)는 '감소시키다' , '낮게 여기다' 는 뜻으로 곧 남을 멸시하거나 하찮게 여기는 행위를 가리킨다.이것은 하나님과 특별 맹약을 맺은 하나님의 종 아브람을 멸시여기는 행위는 곧 하나님을 업수히 여기는 행위가 된다는 뜻이다.

"내가 저주하리니" - 여기서의 '저주'(아라르, ארר)는 하나님의 법에 따른 공적 저주를 의미 하는데 이에는 구체적이고도 직접적인 징계 조처와 형벌이 따르게 된다(삼상2:30,31,32,33).

 

• 아브라함의 위대함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 갔다"(창 12:4) - '말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다바르, דּבר)'는 '명령'을 의미한다(27:19;왕상 12:12). 따라서 이는 아브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행동의 절대 기준으로 삼았으며 말씀의 권위를 존중, 어김이 없었음을 나타내 준다(22:1,2,3,4,5,6,7,8,9,10,11,12).


• 아브라함의 동행자/ 롯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롯이 아브라함과 함께 메소포타미아를 떠난 사실이 거듭 언급되고 있는 까닭(11:31)은 그가 이후 아브라함과의 관계에서 많은 족적을 남겼기 때문이다(13:1-13; 14:13-16; 19:1-28). 롯은 단순히 아브라함의 조카가 아니었다. 롯의 아버지 하란이 일찍 죽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옷을 친 아들로 인용하여 길렀다(이는 당시 사회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롯의 결정적인 차이는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은 그냥 삼촌 아브라함을 따라 갔다는 것이다. 똑같은 여정을 걷고 있으나 그 둘은 다른 것을 따라 갔다. 이것은 훗날 롯은 탐욕을 쫓아 소돔과 고모라의 정착하게 되고, 그곳에서 그의 아내가 소금 기둥이 되고 롯의 자녀들이 모압과 암몬의 되는 비극들 통해 극명하게 다른 결과를 보여준다.

Wenceslas Hollar - Abraham and Lot separating (아브라함과 롯의 분리)



• 가나안에 도착한 아브라함 일행
하란에서 가나안 까지는 약 480Km정도의 거리인데 당시의 여행로로 미루어 보아 아바람 일행은 유프라테스 강변을 따라 시리하에 도착, 그곳 광야를 횡단하여 다메섹에 이른 후 가나안으로 직진하였을 것이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도착한 곳은 '모레 상수리나무'(엘론 모레)이다. '본다'는 뜻을 가지 '라아'로 부터 파생된 '모레(Moreh, מורה)는 종교적인 의미에서 '가르치는 자'를 뜻하는데 '예언자'로 번역될 수도 있다. 그리고 '강하다'란 뜻을 가진 '울'로 부터 파생된 '엘론(אלון)'은 상수리나무 처럼 재질(才質)이 강하며 병충해도 잘견디는 나무를 가리킨다. 따라서 많은 학자들은 '모레 상수리나무'를 고대 이교도들이 신탁(oracle)을 받을 때 사용하던 '예언자의 나무'로 본다. 그러나 '마므레'와 같이(13:18) '모레'가 단순히 상수리나무 숲의 주인이름일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


• 하나님의 격려
모레 상수리나무가 울창한 곳에서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말씀하신다"(창 12:7). 하나님의 임재가 어떠한 방식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나타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아(ראה)'는 '증명하다','보이다'는 뜻이므로 아브람에 대한 하나님의 현현(theophany)이 꿈이나 환상이 아닌 눈으로 볼 수 있는 객관적인 실제로 이루어졌음을 증거해 준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영이시므로(요 4:24) 눈에 보이는 것은 온전한 하나님 자체가 아니라 그분의 임재의 상징이거나 표시일 것이다(17:22;18:1,2;출 3:2). 그러나 이것은 계시를 받는 자가 분명히 인지할 수 있다는 특징을 지닌다. 또 하나님의 현현(顯現)에는 선포되는 말씀이 동반된다. 따라서 계시 수납자는 하나님을 직접 눈으로 보고 그분의 특별 계시를 귀로 들을 수 있다(33:24,25,26,27,28,29,30).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창 12:7).
창 12:1절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이다. 이로써 아브람은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섭리에 의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곳 가나안이 자신의 후손들에게 허락된 '약속의 땅'임을 알게 되었다. 훗날 이 약속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 출애굽의 원동력이 되었으며(50:24;출 3:15,16,17,18,19,20) 또한 민족적 일체성을 유지하는 근본 동인이 되었다.


• 아브라함, 예배자로 살아가다
"여호와를 위하여...단을 쌓고"(창 12:7).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제단을 쌓은 자로는 아브람 이전에 이미 노아가 있지만(8:20) 자신에게 현현하신 하나님을 기념하여 제단을 쌓는 자는 아브람이 처음이다. 이로써 아브람은 장차 그의 후손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될 것에 대하여서도 함께 감사하였을 것인데 참된 신앙은 이처럼 보지 못하고 장래일에 대하여서도 믿고 감사할 줄 아는 것이다(히 11:1,13).

그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라고 있었기에 아브람이 세겜에 정착하지 못하고 계속 벧엘과 남방으로 옮겨 가게 된다(창 12: 8,9절). '가나안 사람'은 함의 후예(10:6)로 우상숭배 행위에 탐닉하며 배타심이 강하던 족속이었으니 아브람이 그들 가운데서 생활하기란 무척 힘들었을 것이다.


거처를 옮긴 아브라함은 벧엘에 이르러 정착하여 그것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창 12:8).

여기서 단을 쌓는 것은 하나님께 희생 제사를 드리는 것을 뜻하며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찬송과 기도가 있는 공(公) 예배를 드리는 것을 뜻한다<4:26>. 즉 아브라함은 가나안 입성 후 처음으로 모든 식솔들을 불러 모아 하나님께 대한 공 예배를 드림으로써 자신의 가정에 예배 규례를 확립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아브람은 정처없이 유리하는 중에서도 하나님과의 교제를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 하나님을 향한 기도와 찬양은 성도가 멈추어서는 안 되는 영적 호흡이다.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란 뜻이다. 우리가 어디든 하나님과 동행하며 구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하는 곳이 하나님의 집이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예다. 예배자로 살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출처: https://mybiblenotes.tistory.com/444?category=884687 [묵상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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