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edrich Schleiermacher (1768 ~ 1834)
현대 신학의 아버지, 자유주의 신학의 선구자. Calvin 과 Barth 사이의 뛰어난 신학자. 그의 신학은 오늘날까지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제 단순히 교회의 교리나 성경 구절의 나열로 신학을 전개할 수 없게 되었다. Schleiermacher는 현대과학과 사상의 도전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가 어떻게 존립할 수 있는 가를 자신의 신학적 과제로 삼고 그리스도교의 전통적인 진리를 현대의 정황에 맞게 재해석함으로 써 현대 신학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였다. (교리, 성서 신조들 권위 대신 그리스도의 종교 경험 감정, 신 의식을 출발점으로 삼았다.)
1. 생애 - 위대한 종합의 신학자.
프러시아 군목의 아들. Moravian School 시절 경건주의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나중에는 그 지적 편협성에 불만을 느꼈지만 회의주의를 극복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1787년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Halle 大 입학하여 Kant 와 Spinoza를 읽고 1796년 Berlin에 가서 German Romantic movement 의 지도자가 되었다. 1804년 Halle 대학의 교수로 저작과 강의에 몰두하였다. 1809년 Berlin의 Holy Trinity Church 설교자로 일했다. 1834년 그의 死後 친구 제자들이 30여권의 전집을 출간하였다. 그의 사상은 종교론(On Religion : speeches to Its Cultured Despisers)과 신앙론(The Christion Faith)에 집약되어 있다.
2. 종교의 자리(본질)
종교론에서 Schleiermacher는 당대의 지성인, 종교를 멸시하는 문화인에게 종교의 본질을 제시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는 계몽운동의 지성인들이 기독교를 멸시하는 것을 수긍하는 한 편 그들을 설득하려고 하였다. 그는 그들이 정통주의의 교리와 의식이라고 하는 껍데기를 볼 것이 아니라 그 본질을 이해한다면 지성인이면서도 기독교 신앙을 받아드릴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즉 지성인들은 종교가 교리 체계나 신조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살아있는 체험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 로마 가톨릭교회나 개신교 정통주의는 교리형태로 된 신학체계가 종교적 체험을 규정하고 시험하는 것으로 보았지만 Schleiermacher는 반대로 종교적 체험(감정), 신앙경험이 신학 체계를 형성한다고 보았다. 이것은 신학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Copernican revolution)과 같다.
그는 Kant 의 철학을 이해하였다. 그는 칸트가 철학적이며 이성적인 신 인식을 거부한 방법론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칸트가 실천이성의 영역, 윤리와 도덕의 영역에 종교의 자리를 마련하려한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하였다. 형이상학이나 윤리학이 종교의 고향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생각하였다. 종교는 하나님과 세계에 대한 정교한 이론도 아니고 삶에 대한 훈계도 아니다. 종교는 최고의 지식도 최고의 윤리도 아니다. 우리의 지식과 윤리는 우리의 유한성과 한계를 반영하며 그것들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종교는 유한한 어떤 것을 넘어선 무한하며 보편적인 전체성, 모든 것을 그 자체 안에 포함하며 포용하고 있고 포괄적 전체성과 관계되는 것이다. 그것을 신이라고 이름 붙이든 우주, 전체, 보편이라고 표현하든 어쨌든 종교는 보편적인 전체성과 관계한다. 그러면 인간은 이 보편과 무한과 어떻게 관계를 맺나? 즉 종교의 자리는 어디인가? 그는 이성으로 접근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것은 Kant 가 이미 이론적으로 불가능함을 증명했다는 것이다. Schleiermacher는 종교 즉 보편적인 전체성과의 관계는 근본적으로 감정의 영역과 관계한다고 주장하였다. Feeling is the peculiar faculty of the religious life.
그러면 그가 말하는 감정은 무엇인가? 그것은 단순히 감각적인 기쁨이나 슬픔, 혹은 감정적인 기분이 아니다. 심리학적인 정서(emotion)가 아니다. Tillich 의 해석에 따르면 그가 말하는 감정에는 주관적인 요소도 있지만 그보다는 impact of the universe upon us를 느끼는 것. 즉 신적인 것, 무한한 것에 대한 직접적인 감지, 의식 혹은 Schleiermacher표현에 따르면 immediate self-consciousness 다. 그 영원하고 무한한 것의 직접적인 감지다. 그가 말하려는 것은 종교적 감정은 이론적인 추론을 통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나의 존재나 삶이 하나님(우주, 보편적 영원자) 안에서, 하나님을 통해서 영위되고 있다는 깊은 자각이다. 그는 하나님과 관계하는 이러한 감정을 다른 감정과 구분하여 “절대의존의 감정“ 이라고 표현한다. 즉 종교는 절대의존의 감정에 자리 잡고 있다.
" Religion does not emerge out of a certain given institutions and doctrines. Rather, doctrines and institutions are the creations of a prior self-consciousness that is natural to human existence. Religion is a unique a priori form of self-consciousness that should not he confused with either moral or scientific knowledge"
3. 기독교와 다른 종교
절대의존의 감정은 그 자체로서 종교를 형성하지 못한다. 종교적인 신 의식, 절대 의존의 감정은 발전해 감에 따라 필연적으로 동료와의 교류를 통하여 공동체를 형성하게 되며 전통을 갖게 된다. 그러므로 추상적이고 비역사적인 종교, 막연히 일반적인 종교란 불가능하다. 종교는 어떤 근거와 중심이 있기 마련이다.
각 종교는 두 가지 점에서 타 종교와 구분된다. ① 외적으로는 그 기원과 역사에 의해서 ② 내적으로는 종교의식의 특별한 양식에 의해서, ⓐ 다신론처럼 헌신의 대상이 다양하게 산재해 있는 종교도 있고 유일신론처럼 단일한 헌신의 대상을 갖고 있는 종교도 있다 그런데 유일신론적 종교가 더 고등 종교다. 왜냐하면 신의식이 더 뚜렷하고 순수하기 때문이다. ⓑ 도덕의식이, 윤리성이 약한 종교도 있고 윤리성과 책임을 강조하는 종교도 있다. 그런데 기독교는 인간의 윤리적 책임과 자유를 강조하는 종교다. 이러한 관점에서 슐라이어마허는 기독교를 다음과 같이 정의 할 수 있었다. Christianity is a monotheistic faith belonging to the teleological [moral] type of religion, and is essentially distinguished from other such faiths by the fact that in it everything is related to the redemption accomplished by jesus of Nazareth.
이처럼 기독교 신앙은 예수님에 의하여 성취된 구속과 관련해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단순히 이성이나 사변적인 추론에 바탕을 둔 그리스도교란 있을 수 없다. 이렇게 해서 슐라이어마허는 기독교를 종교의 일반개념으로 설명하는 동시에 기독교의 특수성과 우월성을 제시할 수 있었다. 즉 그의 분석에 따르면 기독교 신앙 안에서 종교가 가질 수 있는 최고의 표현, 가장 뚜렷하고 완전한 내용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4. 기독교 교리.
(1) 교리의 성격. Dogmatics is the formulation in language of the prior Christian feelings. 즉 Christian 의 신 의식, 절대의존의 감정이 교회 안에서 형성되며 착색되어 가는 것을 그대로 기술한 것이 기독교 교리다. 교리를 단순히 객관적인 사실들을 진술하는 것이나 형이상학적 탐구의 결과를 모아놓은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창조주시며 세상의 주관자시라는 교리는 곧 Christian의 절대적 의존 의식을 표현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런데 교리는 개인적인 신 의식, 종교적 감정을 기록한 것이 될 수 없다. 그 신 의식은 신앙 공동체 안에서 형성되고 양육되어진 것이며, 역사를 통하여 그 표현이 변화되고 발전되어온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교의 신학(Dogmatic Theology)이란 어떤 한 시기에 한 기독교 공동체 내에서 주류를 이루는 교리를 체계화하는 학문이다. 그런데 기독교 공동체는 과거와의 연속선상에 있으며, 그 특이한 신 의식은 예수님 안에 그 기원을 두며 성서의 가르침 특히 신약성서와 관련되어 있기에 그 교리의 내용이 그리스도 중심적이고 신약성서와 연결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2) 신론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어떤 속성을 가졌나? 우선 분명히 해야 될 것은 “인간이 하나님께 돌리는 모든 속성들은 하나님에게 있어서 그 자체의 독특한 어떤 것이 아니라 절대 의존의 감정이 하나님과 관계 되어질 때의 양태에서 나타나는 독특한 그 어떤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 다시 말하면 God as He is in Himself 는 알 수 없다. 하나님은 어떤 독립적인 대상으로 알려질 수 없고 다만 우리의 self-consciousness 와 관련해서만 알려진다. (ex:프리즘) 하나님의 속성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절대의존의 감정을 통해서 진술 될 수 있다.
① 세계와 자연의 전체성에 대한 경험을 통한 신의 특성 → 이것은 그리스도교적 경험과 상관없이 수집이 가능하다.
영원성 - 우리 인간의 시간적 한계와 대저해서 하나님의 절대적이고 영원한 원인성을 가르 킨다. absolutely timeless causality of God, 하나님의 영원한 능력, 그의 뜻의 불변성.
편재성 - absolutely spaceless causality of God. God is equally near and equally for from all finite being and place.
전능 - 우리의 의존성, 유한성에 대한 경험에서 발견되는 신의 속성.
② 죄와 구속 경험을 통해서 알려지는 신의 속성 - 하나님으로부터 이탈되고 소외된 느낌과 구원 경험을 통해 알게되는 속성.
거룩 - 죄에 빠진 인간에게 내리시는 신적 정죄를 반영하는 신의 속성. 하나님은 도덕법의 부여자고 바르게 살 것을 요구
사랑 - 구원 받은 경험을 통해 알게 되고 하나님의 속성. Love is Gold's mature in creation and redemption.
③ 삼위일체 하나님- 슐라이어마허는 직접적인 신 의식을 반영하는 교리와 간접적으로 반영하는 교리를 구분하였다. 삼위일체론은 기독교적 자아의식에 관련된 직접적인 언급이 아니라 그 언급들의 조합이다. 즉 성부, 성자, 성령에 대한 신 의식의 내용을 결합하여 체계화시킨 것이다. 그래서 그는 신의식의 간접적인 반영인 삼위일체론을 “기독교 교리체계의 극치”라고 표현하면서도 신앙을 끝부분에 배열하였다.
(3)죄와 구속
① 죄란 신 의식의 결여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신의식이 우리의 육적이고 감각적인 본성에 의해서 방해 받는 것이 죄다. 아우구스티누스 식으로 말하면 우리의 사랑이 영원자이신 하나님에게 향하기보다 순간적이고 감각적인 것에 몰두하는 것이다. 결국 죄는 참된 축복의 결여(박탈)다. 그런데 인간은 죄에 대하여 자유롭고, 이 자유는 우리에게 책임성 죄책감, 비참함을 갖게 한다. 또한 죄는 개인적인 경험일 뿐 아니라 사회적이고 공동체적이다.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고 종족과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영향을 받고 또 준다. 또 슐라이어마허는 원죄를 부정한다. 인류는 창조 때부터 죄의 경향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해석한다. 즉 인간의 원래 상태는 잠재적인 상태여서 죄와 완전한 신 의식을 어느 쪽으로도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존재였다는 것이다.
② 구속(救贖)이란 감각적이고 육적인 상태에서 충만한 시 의식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곧 예수님이 가진 신 의식을 나누어 받는 것이다. Christian 은 죄의 인식, 죄의 극복 필요성을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예수그리스도는 생의 지배적인 원리로써 그가 지닌 신 의식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감각적인 충동을 극복하고 하나님과 세계에 대해서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된다.
(4) 그리스도
그리스도는 완전한 신 의식을 지닌 분이다. 그래서 고문과 죽음까지도 예수님의 신 의식을 파괴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교회에서 전파될 때 그들은 죄 된 감각, 육신적이고 감각적인 본성에서 그리스도가 지닌 신 의식을 갖게 된다. 그리스도는 이러한 완전한 신의식의 매개자가 된다는 점에서 구속주가 되신다. 다시 말하면 모든 인간에게 부분적으로 있고, 조각난 상태로 존재하는 신의식이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충분하고 완전하게 이루어졌으며, 이제 예수님으로부터 출발하여 그를 믿는 모든 이에게 퍼져나가게 된다. 이것이 곧 구속사역의 확대다. 슐라이어마허는 예수님의 신성을 선재론을 근거로 설명하지 않는다. 그는 예수님은 “자신 가운데 하나님이 참되게 존재하심으로써 그의 신의식의 능력이 계속된다는 점에서” 다른 모든 인간과 구별된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 의 신성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Jesus Christ is best understood as the full historical realization of archetypal humanity, the second or true Adam . He embodies concretely the new race of men and thus becomes for us the exemplar of Good's will for us. Jesus Christ is the redeemer who gives a new impetus and power to man " in the flesh"
5. 평가
(1) 슐라이어마허는 현대 신학의 Kant 라고 불리워질만한 사람이다. ① 신학사에 새로운 기원을 열었다는 점과 ② 그의 신학적 체계가 지금도 여전히 논의에 대상이 된다는 점에서 중요성을 갖는다. 그는 어떻게 현대인이면서 동시에 Christian 일 수 있는지에 대한 나름의 길을 제시했다. 그는 당대의 지성인에게 그리스도 교 신앙이 의미 있는 것을 전하고 싶었다.
(2) 낭만주의 원리에 입각한 그의 신관은 18세기 이신론이 말하는 이 세계와 단절된 신관을 극복하였다. 자연과 초자연의 괴리를 극복하였다. 그는 자연과 역사에 내재적으로 존재하는 그래서 깊은 종교적 각성에서 만나는 신을 들어내었다.
(3) 슐라이어마허를 단순히 성서와 교회의 규범성을 무시한 신학자로 비판할 수는 없다. 그는 교리가 단순히 종교적 감정의 기술이 아니라 한 시대 교회 안에서 느끼는 Christian 의 신 의식이며, 그 신 의식의 진정한 표현은 신약성경에서 볼 수 있다는 주장했듯이 나름대로 노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위의 진정한 자리는 종교적 경험에 있다고 함으로써 그 누구도 그의 종교적 경험의 정당성을 문제 삼을 수 없게 되었다. 즉 종교적 권위는 객관적 기준, 세부적인 기준, 감정을 넘어선 어떤 것에도 둘 수 없게 되었다. Barth의 지적처럼 개인의 신 의식은 진리의 최종 결재자가 되어버렸다.
(4) 슐라이어마허의 신학은 자칫 종교적 주관주의로 떨어지게 된다. 더 이상 객관적인 실재에 대한 형이상학적 주장을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Ludwig Feuerbach의 종교에 대한 비판처럼 종교란 인간의 주관적인 감정, 두려움, 이상을 신학적인 개념이나 구조로 객관화 시킨 것으로 오해될 수 있다.
(5) 종교적 주관주의 문제와 관련해서 슐라이어마허의 신학은 불가지론(agnosticism)으로 이끌려가게 된다. 슐라이어마허는 하나님은 우리의 감정 안에서 인식될 뿐 하나님 자체(Good as He is in himself는 결코 알 수 없다고 한다. 결국 하나님을 알려는 모든 노력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6) 슐라이어마허의 실증주의적 신학은 신학의 타당성, 정당성의 기준, 진리의 규범이 모호하게 된다. 하나님 자체가 아니라 당대 Christian 신 의식을 기술할 뿐이라고 함으로써 합리주의자의 공격은 피할 수 있었으나, 그 신의식의 내용이 지향하는 참 실재에 대해서는 누구도 확증할 수 없게 되었다. 신학자는 당대의 신 의식을 기술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까? 신학은 교회나 Christian 이 지닌 신의식이 정당하다고 하거나 그릇된 사실을 지적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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