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dolf Bultmann (1884-1976)
1. 생애 및 사상 배경
1884. 8. 20 Oldenburg 의 Wiefelstede에서 개신교 목사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K. Jaspers와 같은 Gymnasium을 다녔다. Tubingen, Berlin, Marburg에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하였다. 1910 신학박사, 1912 Marburg에서 신약학 교수 논문을 완성하였다. 1916-1920 Breslau 와 Gissen 대학에서 교수. 1921 - 1951 Marburg 大교수, 1951 Yale 대학교의 Shaffer Lectures, 1966 에딘버러 大 Gifford Lectures. M. Heidegger와 친분. 성서의 신화적인 세계관에 대한 견해로 보수교회의 비판을 받음. 공관복음전승사, 요한복음주석, 신약신학. 논문집 ‘신앙과 이해(Glauben and Versthen)’
불트만의 신학적 입장은 자유주의 신학과 신정통주의 신학 사이에 자리한다. 그는 자신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나 자신이 속해 있던 자유주의적 신학과는 달리 ‘변증법적 신학’이라는 이 새로운 신학운동은 다음과 같은 점들을 올바로 깨닫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것은 그리스도교적인 신앙은 종교사적인 한 현상이 아니며, 선천적 종교성(Troeltsch)에 기인하지도 않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은 종교사 혹은 문화사의 한 현상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올바르게 인식한 것 같다. 이 밖에 이 새로운 신학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옳게 보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기독교 신앙은 인간을 만나시는 초월적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응답이요, 신학은 이 말씀과 그리고 이 말씀에 직면한 인간의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판단이 나로 하여금 자유주의적인 신학을 경솔하게 정죄하도록 하지는 않았다. 그 반대로 나는 모든 연구 작업을 통하여 자유주의적인 신학에서 실천되어졌던 역사 -비평적인 연구 전통을 계승하고, 그것을 오늘날 우리들의 신학적 작업 속에 유익하게 활용하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내가 마틴 하이데거와의 대화를 통해서 익히게 된 실존주의 철학은 나에게 결정적인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나는 여기에서 인간의 실존을 서술하는데 적합한 개념, 따라서 신앙인의 실존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게 해주는 개념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러나 신학을 위해서 철학을 효과적으로 적용하려는 노력 속에서 나는 칼 바르트를 더욱 반대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에게서 결정적인 것을 배웠기 때문에 여전히 나는 그에게 감사한다.”
① 역사비평적인 자유주의 신학.
그는 성서에 대한 학문적이고 비평적인 연구과정에서의 지적인 정직성을 높이 평가하였다. 기독교의 과거 유산과의 관계에 있어서 진실성을 강조하였으며, 과거의 신비적이고 초자연적인 세계관과 상반되는 현대적인 세계관을 긍정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앙을 종교사, 혹은 문화형상으로 보는 자유주의 신학은 하나님보다 인간을 다루었다는데 대해서 문제점을 인식하고 비판하였다.
② 변증법적 계시신학
불트만은 Barth와 나중에 대립하고 의견을 달리했지만 처음은 같이 출발하였다. (그러나 Barth는 불트만과 자신을 서로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고래와 코끼리로 비유하였다) 그는 그리스도교 신앙은 인간을 만나시는 초월적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응답임을 받아들였다. 인간으로부터는 하나님에 관해서 말할 수 없으며 오직 케리그마에서만 하나님을 만난다고 주장하였다. “케리그마는 모든 신앙의 전제다”
그러나 Barth와 달리 Bultmann 은 케리그마는 이해되어져야 함을 강조하였다. 불트만은 변증법적 계시 신학자이면서 동시에 현대적인 신학자로 일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역사비평 방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뿐 아니라 실존철학을 적극 수용하였다. 그가 1920 년대에는 변증법적 신학의 토대위에서 자유주의신학과의 간격을 강조 했다면, 1940년 이후에는 새로운 철학과의 대화를 적극적으로 시도하였다.
③ M.Heidegger의 실존철학과의 만남.
동료교수 M. Heidegger의 철학에서 그는 자신의 신학을 표현할 수 있는 틀을 발견하였다. 무신론적 철학자는 인간으로부터 하나님에 관해서 아무것도 말해질 수 없다는 점에서 부정적인 진리를 알고 있다 (그래서 Barth는 철학이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여겨짐) 그러나 Bultmann은 철학이 하나님에 대해서 말할 수 없지만 인간과 세계에 대해서는 본질적인 진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역사 비평 학문이 성서 본문과 주위 세계에 대해서 중요한 지식을 가능케 하듯이 철학은 인간의 근본상황, 복음이 없는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서 말해준다.
2. 신약성서와 신앙
(1) 신약 성서의 성격과 신앙
신약성경의 사화(史話-narrative)는 그 양식에 따라 경구, 기적 이야기 등 여러 단위로 분석 될 수 있다. 이것은 초대교회에서 경건 생활과 변증을 위해 필요했다. 그런데 후에 구슬이 실에 꿰어 모여진 것처럼 공관 복음서를 이루게 됐다. 따라서 공관 복음서는 예수님 자신에 대해서보다는 초대 교회의 신조를 보여준다. 그래서 그는 “우리는 이제 예수님의 생활과 인품에 관하여 거의 아무것도 알 수 없다.”고 하였다. “예수님의 역사적 인격은 초대 교회에서 곧 신화로 바뀌게 되었다. 이제 이러한 신화를 넘어 역사적 사실에 접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면 그리스도교 신앙은 무엇에 근거하는가? 신앙은 역사적 연구를 통해 발견된 내용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는 칭의론(Justification by faith)을 지성적 영역에 적용하려고 하였다.
① 신약성경 는 예수님에 대한 객관적 지식을 주지 않는다.
② 예수님에 대하여 객관적 지식을 추구하는 것은 신앙의 참 뜻에 배치된다. 그것은 세상적인 증거에서 안전성을 구하는 불신앙적인 자세다. 필요한 것을 증명이 아니라 깨우쳐지는 것이다. 신앙이란 과거의 역사적 사실들에 대한 경험적 확인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새롭게 들려지는 kerygma에 응답하는데서 비롯된다. 신앙은 설교되어지는 말씀만 의지할 뿐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Bultmann은 신약성경의 케리그마 선포에서, 즉 사람에게 전달되고 신앙의 응답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을 발견하였다.(이 점은 Barth와 비슷하다) 그래서 불트만은 신약성경의 예수님 이야기의 사실성에 대해서 철저히 회의함에도 불구하고 신약성경의 본질적 메시지는 믿을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2) 비신화화
신약성경의 메시지가 현대세계에 의미 있는 것으로 전달되려면 신약성경의 신화적 표현을 비신화화 해야 한다.
Bultmann의 비신화화 논쟁
1. 신약성경의 메시지는 고대의 신화론 적 체계 가운데서 우리에게 전해져왔다.
땅위, 땅 아래, 사탄의 이 세상에 대한 침입, 그리스도(신적 존재가 성육신되어야 하고 또 그의 피로 사람들의 죄를 속죄해야 한다는 것은 얼마나 원시적인 신화론 인가!!!
2. 그러한 신화론적 세계관에 입각한 내용을 현대인은 믿을 수 없다. 전등불과 무선전신을 사용하면서, 의료와 외과의술을 사용하면서 악마와 영을 믿을 수는 없다. 교회가 신화론적 세계관을 강요하면 현대인에게 거절당할 수밖에 없다.
3. 신약성경 신화의 참 목적은 세계를 객관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기 이해를 표현하려는데 있다.
4. 신화를 무조건 제거해서는 안 된다. 자유주의 신학은 신화와 함께 케류그마까지 제거한데 잘못이 있다.
5. 그러므로 우리는 성서에서 1세기의 신화적 세계관과 하나님의 말씀을 분리시켜야 한다. 중요한 것은 성서의 본래 의미를 잘 해석해 내는 것이다.
6. 신화의 본래 목적은 객관적인 세계상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기 이해를 표현하는 것이므로 신화는 우주론적으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인간학적으로 정확히 말하면 실존론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7. 신약성서의 가르침은 인간이 구체적인 물질세계를 의존할 때 참된 생을 상실한다.
* 신화 - 타계(他界)적인 것을 이 세상의 말로 표현하고, 신적인 것을 인간생활의 제한된 것으로 표현하고 피안을 차안에 의하여 표현하려는 비유적 용법
불트만에 따르면 신화는 세계의 기원과 목적은 인간이 사는 이 세계를 넘어서는 신비한 힘들에서 찾아내야 한다는 신념을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신화에서 비세상적이고 신적인 것이 세상적이고 인간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신화의 독특한 의미는 그것이 어떤 객관적인 세계상을 준다는데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신화를 통해 어떻게 인간이 스스로 자기가 속한 세계 안에서 자기 자신을 이해하였는가를 보여준다는데 있다. 그래서 신화는 우주론적으로보다는 오히려 인간학적으로, 더 정확히 말하면 실존적으로 해석되어지기를 원한다.
그런데 예수의 역사는 초대교회에서 신화와 전설로 표현되었다. 예수님의 역사적 사실은 선재한 존재의 성육신과 그의 피로 인류의 죄를 구속하고 부활, 승천, 재림하실 분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이적과 기사, 악마에게 승리하는 이야기 등 온갖 전설로 꾸며졌다. 이러한 신화적 표현을 현대인은 이해할 수 없다. 지성을 희생하지 않고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수용할 수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 비신화화(demythologizing)해야 한다. 이것은 해석학적 과제다. 그런데 어떤 문서를 해석하려면 그 문서의 주제에 관한 전이해가 있어야 한다. 즉 해석자가 바른 전이해를 갖고 그 분야에 접근해야한다. ex) 창세기에서 우주론을 찾거나 에스겔서에서 현대 정치 사건을 해명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Bultmann에 따르면 성서에 관한 바른 질문은 실존에 관한 질문이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의 메시지는 내 실존에 대해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물어야 바른 해석이 가능하다. 그는 M. Heidegger가 만들어 놓은 범주에서 신약성경을 해석하는데 도움이 되는 내용을 발견하였다.
하이데거의 실존철학에 따르면 인간은 다른 사물과 달리 결단하는 존재다. 그런데 인간은 본래적 실존이거나 비 본래적 실존일 수밖에 없다.
본래적 실존 - 신앙인은 자신을 하나님의 은총으로부터 주어진 자로 이해한다.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자신의 미래를 받아드린다. 그는 자신을 하나님의 피조물로 이해하며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의 선물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하나님에게 자신을 철저하게 맡기며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한다. 그 때 참된 미래가 그에게 열리며, 인간은 자신의 본래성에 도달한다.
비 본래적 실존 - 불신앙인은 자신을 독립적이고 자족적인 자로 생각한다. 그래서 지상적인 것들에 관심보이고 그것들로부터 안전을 보장받으려고 한다. 그는 자신의 삶을 이 세상에 속한 것으로 보장받으려 하며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통하여 안전을 보장받으려고 한다. 그는 지나가 버리는 것, 허무한 것에 자신을 맡긴다. 결국 그는 불안과 절망 속에서 살아간다. 자신의 참된 미래에 자신을 열지 못하고 폐쇄시켜 버린다. 비본래적 실존은 불신앙, 곧 죄의 상태다.
이렇게 Bultmann은 해석학적 열쇠로서 실존의 개념을 취함으로써 성서의 육, 세계, 죄, 신앙과 같은 남은 어휘 속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주려고 한다.
ex : 구체적인 신약성경에 스며든 종말론적 신화 - 비극적 드라마, 최후의 심판
국민 학생도 그런 종말 믿지 않는다. 그러면 어떻게? 종말론적 신화는 개인의 실존의 지금, 여기에 관계해야 한다. 그렇게 볼 때 모든 개인은 임박한 종말, 즉 자신의 죽음에 직면한다.
인간 실존은 죽음을 향한 존재다. 결국 모든 개인은 자기가 책임져야 하는 실존에 관한 일상적 결단에서 자신의 심판을 완성한다. 그래서 그는 지금 여기의 자신의 근원적인 존재를 붙잡게 되든가 잃게 된다. 이처럼 종말론적 개념은 개인의 실존에 관련 될 때 긴박성과 책임감과 결단의 필요성을 회복한다. "모든 순간에 종말론적 순간이 되는 가능성이 잠들어 있다." 4복음서는 종말론을 실존적인 해석하기 시작한 사실을 보여준다.
종말론적인 삶을 결단한다는 것은 세상적인 확신을 포기하고, 타산적인 것에 매달리지 않으며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위탁하는 것이다. 불트만의 표현에 따르면 그것을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를 포기하는 것이고, 죽은 자를 다시 살려내시고(고후 1:9)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롬 4:7) 하나님만을 믿으려는 결단이고, 하나님으로부터는 모든 것을 바라면서, 자신으로 부터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이며, 그러므로 주어지는 모든 세상적인 기준성으로부터의 해방이고, 나아가서는 비세계화의 자세이며, 자유이다. 즉 종말론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고 하나의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영생은 미래적인 것으로 생각되지 않고 크리스천 실존의 지금 여기에 관계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창조신화는 세계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를 보여주기보다 인간 실존의 유한성, 피조적 의존성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부활>
불트만은 부활이 인간 역사의 영역에서 일어난 경험적 사실이라는 것을 부인한다. 부활은 역사적사건이 아니라 신화다. 제자들은 단지 부활신앙에 대해서만 알았다. 부활은 어떤 공통적인 성격의 기적이 아니라 십자가가 지니고 있는 구원의 의미다. 빈 무덤은 전설이요 부활은 신화다. 부활은 십자가의 의의를 표현해주는데 의미가 있다. 십자가와 부활은 세상에 삼판을 가져오고 진정한 삶의 가능성을 인간에게 열어준 단일한 분리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참으로 부활을 믿는 신앙은 실제로 십자가의 구속의 효력을 믿는 신앙과 동일하다”고 하였다. 그러면 부활을 믿지 않으면서 어떻게 그리스도 사건의 구속적 효력을 믿을 수 있는지 묻는다면, 그 대답은 “선포된 말씀을 믿는 신앙”을 믿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십자가는 역사의 사건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이야기는 순수한 신화와 다르다. 그러나 십자가 자체는 우주의 드라마로 각색되었다. “신적 존재가 성육신되어야 했고 또 그의 피로 사람들의 죄를 속해야 한다는 것은 얼마나 원시적인 신화들인가?” 십자가의 영구한 의미는 그것이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하나님의 은총을 통한 새 생명의 제공을 상징한다. 십자가를 믿는 것은 어떤 속죄 이론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며, 자기의 참된 존재와 하나님에게 다 같이 화해하는 것이다. 십자가를 받아들임은 신앙의 철저한 결단이며 헌신이다. 그것은 세상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며 참된 자아를 회복하는 것이며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결단이다. 그러나 이것은 새로운 삶의 시작인 부활로 경험된다. 신자들은 자기의 목숨을 잃음으로 찾게 된다. 그는 자기의 존재가 세상의 관심사로 인해 상실 되었을 때 죄의 죽음으로부터 부활하며 본래적인 실존으로 회복된다. 결국 십자가와 부활은 말씀을 통해 현재화되는데 그것은 설교에서 우리가 세상에의 안심을 구하는 옛사람(비 본래적 실존)을 벗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참된 신뢰를 구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본래적 실존)
결국 그리스도교 신앙의 메시지는 과거의 사건이나 미래의 구원에 대한 희망에 대하여 전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여기에서 하나님의 심판과 은혜의 말씀을 전한다. 본래적 실존을 결단하도록 종말론적 결단을 촉구한다.
<그리스도의 인격>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나를 구원하는가? 나를 돕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인가? Bultmann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론은 구원론에 종속된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 계신다고 우리가 인식하는 것은 십자가를 속죄하는 것으로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라는 것도 형이상학적 진술이 아니고 그리스도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선언하는 것이다. 이러 점에서 Bultmann의 그리스도론은 A. Ritschl의 가치 판단의 영역에 있다.
<문제점>
그리스도교 메시지를 오늘의 세계에 의미 있는 것과 전달하려는 의도, 지적 정직성은 좋으나 다음과 같은 비판이 제기된다.
1. 철학과 신학의 문제
Bultmann의 비신화화 작업을 실존주의 철학과 밀접하게 결속되어 있다. Barth는 Bultmann의 신학은 이집트의 속박으로 돌아간 것과 같다고 비판하였다. 그리스도교 진리를 철학과 결혼시키려했을 때 그것은 진리의 왜곡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물론 신학은 철학적 범주와 개념을 포기할 수 없다. 문제는 실존 철학적 전이해 때문에 기독교의 메시지를 너무 실존의 문제로 좁혀놓았다.
반면에 칼 야스퍼스 (Jaspers)는 Bultmann에게 있어서 철학에 대한 관심을 겉 치례에 불과하다고 비판하였다. 하이데거 철학에 의지하면서도 결국 하나님의 특별계시에 호소한다. 그래서 Bultmann의 제자 Fritz Buri는 비신화화 작업은 비케리그마 하는데 까지 나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부리는 신학의 상징들이 본래적 실존을 추구하는데 도움이 되기는 하지만 그리스도교 신학과 실존철학 사이에는 원칙적으로 구별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2. 신앙과 역사의 문제
그리스도교는 역사의 종교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어떤 세계관이나 법전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강력한 구원행위를 바탕으로 한다. 그러나 Bultmann에게 있어서 사실적이고 직관적인 역사는 거의 무시되었다. 역사적 회의주의에 빠졌다. 물론 그는 예수를 역사적 인물이라고 한다. 그러나 불트만에게 있어서 예수의 역사성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예수님에게 중요한 것은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라고 생각하였다. 결국 역사에 대한 과격한 회의주의가 문제다. 그래서 Barth는 가현실의 독한 악취라고 비판하였다. 이 문제에 대하여 Post - Bultmann 들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였다.
3. 비신화화의 맥락에서 하나님에 관하여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
Malevez 신부 - 주로 하나님에 관하여 말하려고 한 신약성경에 대하여 Bultmann은 인간학적 편견으로 접근하고 있다. 신약성경에서 우리로 하여금 예배하도록 촉구하는 하나님에 관하여, 그의 속성과 본성에 관하여 그의 신학은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 사실 비신화화의 목적이 신화적 언어를 실존적 언어 즉 인간 실존의 가능성에 관한 말로 해석하는데 있다면 어떻게 하나님에 관해서 말할 수 있을까? F. Buri 처럼 솔직하고 철저하게 비케리그마화 하는 것이 더 좋지 않겠는가?
신약성경의 내용은 단순히 인간의 실존적인 물음에 대한 대답을 의도하기보다 개인의 실존적인 결단을 넘어 세계의 종말, 사회와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을 의도한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너무 신약성경 메시지를 순간, 개인의 결단 차원으로 좁혀놓았다. 사회(민중, 해방, 신학) , 역사(몰트만, Pannenberg)
Bultmann에게 있어서 과소평가 된 것은 신적 계시의 우주적 측면이다. 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는 보편사로 묘사되어 있다. 그것은 창조에서 시작하여 시간적 종말의 세계완성으로 끝난다. 그런데 Bultmann에게는 이 거대한 역사가 사라지고 오직 현재속의 순간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위대한 연극은 실존주의적인 '안방의 촌극'이 되었다. 세상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행위를 증거하는 케리그마는 한갓 인간으로 하여금 비본래성에서 본래성으로 인도하는 결단의 호소가 되고 말았다.
Bultmann은 너무 개인의 인격주의에 집착하는 바람에 인간 실존을 추상화하여 세상(사회, 역사, 정의실현 … )과의 관련성을 잃게 만들었다. 자기 이해와 세계이해는 상관되어야 한다.
① 성서와 기독교 메시지는 인간과 사회의 관계, 자연과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은 위축되고 실존적 결단에 관계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②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생태학적 책임에 대해서 말할 수 없게 되었다.
③ 그리스도의 구원은 인간의 새로운 자기이해로 위축되며, 구원의 사회적, 생태학적 의미는 간과되고 구원의 의미는 정신적인 것으로 위축되었다.
④ 종말론은 역사의 목적과 의미에 대하여 의미를 갖지 못한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속에 하나님나라가 현존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그것은 종말의 인간학적 축소로 나타났다.
⑤ 예수님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사건이 간과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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