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신학 자유주의 신학!

Karl Barth ( 1886-1968)

하나님아들 2020. 8. 27. 09:17

Karl Barth ( 1886-1968)

 

 

1.생애

바르트는 20 세기 신학을 연 인물이며, 종교 개혁자 이후 최대의 개신교 신학자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스위스 Basel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Fritz BarthBerne에서 교회사 및 신약학 교수였다. 바르트는 18세에 Berne 대학에서 신학 수업 시작하여, 독일 여러 대학에서 공부하였다. Berlin에서 Harnack, Reinhold Seeberg, Julius Kaftan, Hermann Gunkel의 강의를 듣고 Tübingen에서 Theodor Haring, Marburg에서 Wilhelm Herrmann, Johanones Weiss등의 강의를 들었다. 특히 W. Herrmann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909 Geneva에서 목회를 시작하였는데 1911 Safenwil의 개혁교회 목사로 임명 받았다. 그는 여기서 자유주의 신학과 거리를 두게 되었다. 문제는 설교에서 발단되었다! 그는 자유주의 신학이 회중들의 요구를 도저히 충족시키지 못함을 발견하게 되었다. 1916Barth는 로마서를 주의 깊게 읽기 시작하였다. Luther 의 경우에서와 마찬 가지고 로마서의 재발견은 그를 신학적인 혁명으로 이끌어 가게 하였다. 1919년에 초판이 나왔지만, 1922년에나온 재판이 신학계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Harnack은 그 책을 보고 학문적인 신학을 경멸하는 자로 공격하였지만, Barth의 로마서 강해에 나타난 신학에 동조하는 점은 신학자들도 많이 생겼다. E. Brunner (1889-1966) Bultmann(1884-1976), Friedrich Gogarten(1887-1967) Thurneysen(1888-1974) George Merz (1892 -1959)

1922년 가을 Barth, Thurneysen, Gogarten, MerzZwischen den Zeiten(Between the Times)라는 잡지를 시작하였다. 이것이 소위 위기신학’(Theology of crisis) 혹은 하나님의 말씀의 신학의 기원을 열었다.

바르트는 1921Göttingen 대학 교수로, 1925Münster 대학 교수로, 1930Bonn 대학교수로 가르쳤다. 1932Church Dogmatics 1권을 출판하였다.

그런데 1930년대에 그의 신학 작업에 있어서 실제적인 문제가 발생하였다. Barth는 히틀러의 Nazi 운동에 반대하는데 1933 년에는 독일 복음교회가 나치당의 도구로 변신하였고, 그 해 4월에는 “Evangelical Church of the German Nation” 이 결성되어 다음과 같은 원칙을 천명하였다. “We see in race, folk and nation, orders of existence granted and entrusted to us by God. God's law for us is that we look to the preservation of these orders... 유대인은 우리 국가(민족)에 위험하며, 독일인과 유대인의 결혼은 금지되어야 한다. 우리는 복음주의 교회(개신교회)가 우리 민족(nationhood)에 뿌리박기를 원한다. 우리는 Christian world citizenship을 거절한다.” 이에 대항하여 BarthMartin Niemöller와 함께 독일 고백 교회(German Confessing Church)를 이끌었고 19345월에는 고백 교회의 신앙을 나타내는 Barman Confession 발표하였다. 그 핵심은 “The sovereignty of the word of God in Christ over against all idolatrous political ideologies.”

 

“Jesus Christ, as he is attested for us in Holy Scripture, is the one Word of God which we have to trust and obey in life and in death.

We reject the false doctrine, as though the Church could and would have to acknowledge as a source of its proclamation, apart from and besides this are word of God, still other events and powers, figures and truths, as God's revelation.

We reject the false doctrine, as though there were areas of our life in which we would not belong to Jesus Christ. but to others.“

BarthTheologische Existenz heute라는 신학 잡지를 Thurneysen과 함께 만들어 나치에 대항하였다. 이 잡지와 함께 Barth는 성경 안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 외에 다른 권위를 인정하려 한다고 생각되는 Gogarten , Bultmann, Brunner와 결별하였다. 1934 Nazi에 의해 Bonn 교수직을 정직 당했다. 다음해 봄에 추방된 바르트는 스위스 Basel 교수로 은퇴할 때 까지 교회 교의학 집필과 강의로 생애를 보냈다.

 

 

2. 신학적 특징

 

1)하나님의 전적 타자성(God as Wholly Other)

바르트는 하나님과 인간의 차이를 재발견하였다. Barth는 신지식을 위하여 인간의 경험이나 인간 자체의 능력에 의지하려는 합리주의와 신비주의에 대항하여 하나님의 전적 타자성을 강조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바르트에게 있어서 신학의 첫 번째 과제는 하나님과 인간의 무한한 거리를 강조하는 것이었다. 1922년 판 로마서 강해 서문에서 Barth는 말하기를 나에게 체계가 있다면 Kierkegaard가 말한바 infinite qualitative distinction between time and eternity.... God is in heaven, and thou art on earth.”

하나님은 우리와 전적으로 다른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하나님을 통해서만 알려진다. 유한한 피조물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가 될 수 없다. 도리어 피조세계는 하나님을 숨긴다. 여기에 위기가! 여기서 개혁교회 원리인 Finitum non capax infiniti(유한은 무한을 포함하지 못한다)는 주장이 확인된다. 하나님은 전적 타자이시다.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이나 자연계에 직접적으로 주어져 있지 않다. 인간에게서 신에게 이르는 길은 없다. 그러나 There is the way from God to man - the way of God's gracious self-revelation. God is only known by God by his revelation in Jesus Christ. 인간에게 불가능한 것이 하나님에 의하여 가능하게 되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계시하셨고 스스로 말씀하신다. But here, too. the God revealed, the Deus revelatus, is also the hidden God, Deus absconditus. In the crisis of faith we know that the God revealed in Jesus Christ is, indeed, the hidden God !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 지식과 하나님의 은폐성은 역설적으로 하나이며 같은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두려운 은폐성을 본다. 이 봄은 보통의 봄이 아니다. 이 봄은 은혜의 인물인 믿음의 봄이다. 하나님의 계시는 항상 간접적이고 가리워져 있어서 은혜가 요구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계시는 죄와 육신의 지배 아래 있는 세계 속에서 자신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에 관하여 문제시되는 곳에만 자신을 나타낸다. 종의 모습으로, 십자가와 죽음으로 나타났다. 그의 최대의 성취는 부정적인 성취다. 그는 첫째도 영웅도 지도자도 아니다 십자가에서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고 절규하였다. 예수님 안에서 계시는 역설이다.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자체적으로 명백한 진리가 아니다.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역사적으로, 심리적으로 경험의 사실이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시는 우리의 인지 활동에 의해 접근되지 않는다. He is made known as the unknown. 예수 그리스도(계시)는 유대인에게는 scandal(거리끼는 것)이요 헬라인 에게는 어리석은 것이다 ... To believe in Jesus is the most hazardous of all hazards.

이처럼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들어냄(unveiling)은 가리움이어서,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관계는 봄(sight)의 관계가 아니라 신앙의 관계다. One does not possess revelation as an object, but one is given the gift of faith. 계시에 개한 이러한 이해 때문에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육신을 따라 according to the flesh”추구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그는 역사적 예수님의 탐구는 무익한 역사적 과제요 불신앙의 표라고 하였다. 역사적 예수님에게서 우리는 묵시적 열광주의자나 the divine incognition 를 만나게 된다. 하나님은 지상의 예수님 안에서 직접적으로 보여 지지 않는다.

God is revealed in Jesus as the Christ, only by an event that breaks the bounds of history. The incognitio is lifted by Christ's resurrection from the dead which is scandal, for it constitute an eternal event, an event that cannot be described historically.

Jesus as the Christ, as the Messiah, is the end of History; 그래서 그리스도는 역설로서만 이해된다. As Christ, Jesus is the plane which lies beyond our comprehension. ... Within history, Jesus as the Christ can be understood only as problem or Myth.

 

2) 변증법적 방법(The Dialectical Method)

thesis to antithesis to synthesis로 이르는 Hegel적인 진리에 이르는 방식이 아니라 Kierkegaard적인 방법. Truth is found in the dialectical tension between truth and truth. 이 긴장은 결코 완전히 해결 되지 않는다. Barth는 말하기를 “we can comprehend that we cannot comprehend God otherwise than in duality.” It is not possible to give direct information concerning God and his revelation. The truth of God can never be expressed in a single word, but only in statement and counter-statement. Every positive proposition has to be complemented and corrected at once by an opposing negative one. Affirmation must be clarified by negation, negation by affirmation.

그 이유는 기독교신학이 계시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인데 즉 영원의 세계와 시간의 세계의 일치에서 파악되는 계시의 성격 때문에 어떤 유비(analogy)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한 시간과 영원의 관계는 역설적으로만 (paradoxically)표현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하나님 지식은 결코 직접적인 것이 될 수 없다. 신학은 종종 dogmatism 이나 mysticism의 방식을 따라 직접적으로 진리에 이르려고 하지만 실패하고 만다. There is a third way- the way of dialectic. 그런데 이러나 변증법적 방법은 결코 완전한 해결에 이르지 못한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가파른 벼랑 위를 걸어갈 수밖에 없다. 가만히 서 있으려 하면 오른쪽이나 왼쪽으로 떨어진다.” 우리의 과제는 yes no 를 해석하는 것인데, noyesyesno로 해석해 내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창조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자마자 곧 우리는 창조에서 우리에게 감추어진 하나님의 은혜를 말해야 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을 말하자마자 우리는 타락한 인간을 말하게 된다. ... Christian 은 모든 것의 주()이자 모든 사람을 섬기는 종 “I need not continue. He who hath ears to hear will understand my meaning.

자유주의 관점에서 볼 때 Barth의 변증법적 방법은 혼란스러운 것이다. 왜냐하면 자유주의 신학은 하나님과 인간의 직접적인 연속성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본성을 역사적인 경험이나 심리적인 경험에서부터 알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Barth는 주장하기를 “God is not writ large. 인간은 자연의 유한한 문구로서 영원하신 하나님에 관한 진리를 포착할 수 없다. 인간은 역설적으로만 하나님 자신의 자기 계시를 증언할 수 있을 뿐이다.” 결론적으로 “The dialectical method is the only way of preserving both the truth that God is not man- that he is beyond the finite realm- and, yet, that he has revealed himself within it. It alone can maintain the 'Godness of God' the wholly otherness of the self-revelation in time.”

 

3) 성서의 기이한 세계(The Strange World of the Bible)

사람들은 성서에서 어떤 도움이 도는 것들을 찾을 수 있다.(성서를 깊이 바로 보지 않으면) 그러나 좀 더 면밀히 조사하면 성서는 역사, 도덕, 종교문야에 있어서 정말 가치 있는 것을 별로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서 실망하게 된다. 성서의 인물들은 도덕 표준에 맞지 않는다. 예수님 자신의 가르침도 실제로 적용하는데 어려움 많다. 솔직히 말하자면 “The Bible is of little practical value, and this is because it is a witness to ‘the other, new, greater world,’ because it is not of this world.

 

<Barth의 성서 이해>

성서는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바른 사상이 아니라 인간에 관한 하나님의 바른 생각이다. The Bible tells us not how we should talk with God but what he says to us: not how we find the way to him, but how he has sought and found the way to us... We have found in the Bible a new world, God, God's sovereignty, God's glory, God's incomprehensible love. 성서에는 인간의 역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 인간의 덕이 아니라 인간을 흑암에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거하게 하신 하나님의 덕이 들어있다. 인간의 관점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이 들어 있다. 이처럼 성서 안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해할 수 없는 존재와 역사(acting) 의 세계다. 그런데 그 세계에 접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우리가 위기에 직면할 때에, 우리생각과 기대의 상대성을 깨달을 때다.

 

<성서의 기이성(strangeness) 은 계시의 성격 자체와 관계가 있다>

계시는 이 세계를 매개로 증거 되고 수용되기를 요구되는데, 하나님의 계시는 가리움(veiledness 과 신비를 간직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상대적이고 문제성 있는 성서라는 문헌을 통하여 자신을 계시할 수밖에 없다. 결국 성경의 세상적인 성격과 그 증언의 간접성은 우연한 것이 아니라 계시의 성격 자체에 기인한다. “아무도 성서의 상대성 혹은 문제성을 부인할 수 없다. 그것을 제거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성서가 증언하려는 사실 그 자체를 제거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성서의 인간적인 면, 문제성에 대한 Barth의 견해는 일관되게 주장된다. 성서에는 보편적인 고상한 사상, 덕이 있다고 주장하는 자유주의 신학과는 반대로 Barth는 성서란 고대 민족주의적 종교문헌 보고이며 근동 지방의 희랍 제의의 유산을 반영한다고 생각하였다. 즉 성서 기자들은 우리와 다른 문화, 세계에 살았고, 따라서 성서는 그 시대상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성서의 취약점은 신학적인 내용에도 있다. 예언자나 사도들은 증언하고 기록하는데 있어서 우리처럼 실수가 있는 실제로 역사적인 인물이었음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더구나 성서의 구절이 다른 의문의 여지가 없이 명백하게 바로 전달되었다는 확신도 있을 수 없다. We are therefore on uncertain ground. 결국, The Bible is both word of man and word of God. However, the revealdness of the Bible as Word of God can be perceived, through the human limitations and barriers, only by a miracle of grace..

그런 의미에서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그 안에서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는 의미에서 그렇다. 따라서 The Bible only becomes God's Word.

 

4) 자연신학 (Natural Theology)

Barth는 인간에게 하나님을 아는 어떤 능력(역량)이 있다는 자연신학을 철저히 반대한다. 인간은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서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스스로 알려주시는 길 이외에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어떤 것도 없다는 것이다. 계시는 모든 인간의 자연적 인식을 넘어서는 곳에 있다.

 

<계시의 성격>

God's revelation in its objective is the incarnation of His Word. 그래서 계시는 우리 지식의 대상(object)이 되었고, 우리 경험과 사고의 내용이 되는 길을 찾아내었다. 그러나 계시는 우리의 생각과 인지 능력의 범위를 넘어선다. 계시는 우리를 위해 대상화 될 때에도 Novum으로서 우리에게 온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다른 대상 가운데 하나와 연결 지어 계시를 생각할 수 없으며, 계시를 다른 대상과 비교하거나, 다른 대상으로부터 추론해 낼 수 없다. 그래서 바르트는 게시와 인간의 자연적 경험이나 지식 사이에 어떤 접촉점도 없다고 주장한다.

 

<자연신학>

자연신학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존재 유비 (analogia entis)를 전제한다. 자연신학은 하나님의 존재와 인간 존재의 유사성을 긍정하기에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와 상관없이도 하나님에 관한 어떤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본다. 바르트는 자연신학이 특별히 나쁜 점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활동하는 하나님과 그의 존재를 분리시키는데 있다고 생각한다. Natural Theology conceives of God as a neutral being, in abstracto. 라는 것이다. The living God can be known only in his acting, which is the revelation of his very being. 그런데 자연인(natural man)은 참 하나님을 진정으로 알기를 원치 않는다. 죄 때문에 자연인은 하나님과 적대관계에 있다. 자연인은 자신의 종교성을 증거 할 수 있고, 또 스스로 다룰 수 있는 경배의 대상으로서 우상을 만들 뿐이다. 바르트가 보기에 자연신학은 인간이 하나님을 떠난 죄인임을 보여주는 완벽한 표다.

 

<자연신학과 종교>

자연 신학은 바르트로 하여금 종교에 대한 해석을 다시 하도록 한다. The religious man is the man who imagines he can know God and who can justify and sanctify himself by his own efforts. Religion is the crown of all human achievement, the sign of man's transcendence over the lesser creatures. 종교에서 인간 가능성의 가장 높은 능력이 그 완성과 최종적인 실현에 이르렀다. 종교는 영원, 무한에 이르려는 인간 정신의 최고의 표현이다.

동시에 종교는 인간의 비참(misery)을 나타낸다. 종교에서 인간은 자신의 유한성, 무력성을 깨닫게 된다. Our capacity for religion directs us to that final negation- the recognition that we must die. 종교는 하나님께 대항하는 것으로서 인간의 불가능성의 최고점이다.

 

<종교와 인간의 불신앙>

Religion ultimately exposes man's sinful condition as that of unbelief. 종교적 인간은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것을 하기 원하며, 하나님에게 이르려고 노력한다. 그것은 곧 신앙 없음의 표현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하기를 거부하는 종교적 인간의 영적 반역이다. Religion constitutes the most direct contradiction to faith. Sin is always unbelief. And unbelief is always man's faith in himself. 이런 자기 신앙은 하나님의 신비(오묘하심 mystery)를 받아드리는 대신에 자기 책임의 신비를 자신의 신비로 만들려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런 사상을 바르트는 신약성경에 증거 된 하나님의 계시와 반립 되는 종교라고 부른다. 그런데 하나님의 계시의 빛 안에서만 사람은 자신의 종교가 우상이요 불신앙임을 깨닫게 된다.

 

<기독교는 어떻게 참 종교가 되나>

어떻게 기독교가 참 종교가 되나? 기독교는 은혜로서 참 종교가 될 수 있다. That there is a true religion is an event in the act of the grace of God in Jesus Christ. 기독교는 기독교 계시의 빛 안에서 이해되고 그 삶이 영위될 때 오직 유일한 참 종교라고 불리워질 수 있다. It is the free grace of God as revealed in Jesus Christ and received in faith that constitutes the truth of the Christian religion- and that separates it from all human religion and natural theology.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자신을 온전히 계시하셨다면 다른 데서 하나님을 찾으려는 시도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는 것이다. 성서, 전통, 제도로서의 교회 그 무엇이 되었든지 인간의 제도나 기구에 하나님을 제한하려는 시도는 예수그리스도 보다 다른 어떤 것을 궁극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이 된다.

 

5) 바르트 신학의 후기 경향(The Later Direction of Barth's Theology)

<후기 경향>

1. 하나님은 하나님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계를 위한 하나님이다.

2. 세계는 세계이고 하나님이 아니지만 세계는 하나님이 사랑하는 세계다. 세계는 화해, 계약, 구원의 대상이다.

3. 하나님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세계를 만난다.

4.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안에서 자연계시의 가능성이 인정된다. 참고: 김균진, 20세기 신학사상 p33

5. 그리스도론적 집중 - 하나님과 세계 사이의 무한한 질적 차이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극복된다.

 

바르트 신학의 전체적인 관점은 여전히 일관성을 가지고 있지만 새로운 방향이 강조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 변화는 1935년 이후 교회교의학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Hans urs von Balthasar는 이 변화를 BarthChristological concentration 이라고 불렀다. 이 변화는 사실은 only a dialectical shift of emphasis 라고 보는 것이 옳겠다. 로마서 강해에서 하나님에 대한 강조, 하나님 의 심판, 부정이 강조 되었다면 후기에는 하나님의 전적 타자성, 하나님과 인간의 질적 차이가 여전히 강조되고 있지만 이제는 보다 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긍정을 말하고, 인간에 대한 심판 보다 은혜가 강조 되었다. 나이가 들면서 바르트는 더 친절하고 부드럽고 친절하게 이해심 있고 사랑스러워졌다. (Heinz Zahrnh)

The Christian gospel is the gospel of the humanism of God. Against man's attempt to create his own humanity, Barth opposes the 'humanity of God' as the source and norm of all human standards and human dignity'

하나님은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신개념으로 알 수 없다.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 전능하심도 인간 세계에서 추론할 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 안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부성적인 사랑과 전능하심에서부터 이해되어야 한다.

Barth 1956년 행한 강연에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Godness)을 재발견한 것이 그가 40년 에 이룬 신학의 공헌이었음을 회고하였다. 동시에 그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은 바로 하나님의 역사 (history)에서, 인간과의 대화에서 그 의미와 힘을 발견할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바로 이것이 그전의 시기에 나온 신학과 대조된다고 했다. Barth는 그 전에도 하나님의 계시를 추상적으로 말하지 않고 예수그리스도의 인격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계시를 말했다. 그러나 1935년 이후 그의 신학은 전체적으로 그리스도론에서 초점이 맞추어졌다. 신론 뿐 아니라 창조론, 예정론, 인간론이 모두 그리스도론적으로 규정되었다. This is because, for Barth, God's Godness " includes in itself His humanity." In christ humanity is taken up into the very Godhead itself.

"We must not refer to the second " person" of the Trinity, to the eternal son or the eternal Word of God in abstracto... According to he free and gracious will of God the eternal Son of God is Jesus Christ... He is the decision of God in time, and yet according to what took place in time the decision which was made from all eternity."

 

(참고) 바르트는 Creation is the external basis of the covenant, the covenant is the internal basis of creation이라고 하였다. 즉 창조를 먼저 보고 구속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경지에서 창조를 보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창조의 신비는 구속을 기초로 만이 바로 이해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획에서 구속이 먼저고, 창조가 두 번째다. 하나님은 은혜를 위해 세계를 창조하셨다.

 

창조는 God's eternal covenant in Christ의 빛 안에서 항상 조명되어야 한다. 그래서 바르트는 계약을 창조의 내적 근거라고 한다. 바르트에 따르면 창조의 유일한 근거와 목표인 예수그리스도는 인간론의 단서가 된다. 우리가 인간을 이해하려면 몇 개의 인간학적 model을 구성하거나 타락한 아담의 원래 모습을 찾아보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만이 prototype of humanity.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영원한 계약 덕택에 창조(피조세계)는 하나님에 대하여 근본적으로 긍정적인(positive) 관계에 있다. 그래서 Barth는 죄(sin)와 악(evil)(nothingness), 존재론적 불가능성이라고 말한다. 죄와 악은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의 계약에 의하여 부정(극복)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Barth가 죄의 불가능성을 말한다고 해서 죄와 악의 실재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죄와 악이 상대적으로(relatively) 존재한다는 것이다. Sin is an attempt to evade and escape from grace, but sin cannot finally prevent God from addressing His Yes to man.

로마서에서 finitum non capax infiniti를 강조했다면 교회 교의학에서는 theatrum gloriae Dei (The theatre of the glory of God)을 강조하였다. 이 두면은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인 것이다. 유한이 무한을 파악할 수 없지만 but this world is the stage upon which God represents the drama of his revelation in Jesus Christ, which he has decreed in eternity - for his glory and for the salvation of man.

 

<예정론>

Barth는 예정론을 the sum of the Gospel이라고 부른다. 개혁자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예정은 신비다. 종교개혁자들은 어떤 사람은 영원한 구원으로, 그리고 다른 이는 영원한 저주로 예정되었다고 하였다. 왜 어떤 이는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다른 이는 불신앙을 고집하는가는 하나님의 불가사의한 뜻, Deus abscondituswork 라는 것이다.

바르트는 그러한 기쁨과 공포가 혼합된 이중예정론을 견딜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것은 우리 인간의 관점에서 부당하게 보이기 때문이 아니라 God's eternal covenant of grace in Jesus Christ에 배치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전에, 그리스도 없이, 그리스도를 제쳐놓고는 하나님은 어떤 것도 예정하시지 않고 어떤 것도 결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바르트에 따르면 Jesus Christ is both the electing God and the elected man. In Jesus Christ God in his free grace determines Himself for sinful man and sinful man for Himself. He therefore takes upon Himself the rejection of man with all its consequence, and elects man to participation in His own glory.

이처럼 Barth는 이중예정론을 발전시켰지만 Calvin의 예정론과는 전혀 다르다. 바르트에 따르면 예정은 오직 예수그리스도 안에서만 발생했다. In Jesus Christ, God elected Himself for rejection and death, but also elected sinful man for election and eternal life. Here both God's Yes and God's No are heard, but whereas the No is addressed to Christ alone as the rejected of God, the Yes is spoken to man whom God in his original covenant has elected for fellowship with Himself.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거부한 것이 아니라 아들을 거부함으로써 우리를 선택하시고 받아드렸다. 선택론은 하나님의 사랑의 메시지다. 예수그리스도의 사실은 인간은 절망 할 필요가 없다고 하나님의 복음이다. Jesus is at once the elect for all and the reprobate for all.

그렇다면 Barth는 만인 구원설을 주장했는가? 바르트는 하나님의 은혜의 자유를 보존하기 위해 만인구원설에 대한 찬성을 주저하였다. 그러나 그 반대도 주저하였다. 결국 한 가지 분명한 것은 man cannot place limit on the loving-kindness of God as revealed in Jesus Christ. 그러면 Christian non-Christian의 구별은 어떻게 되는가? 바르트는 신자는 구원 받았고 불신자는 저주 받았다고 보지 않는다. 신자나 불신자는 모두 공통된 결핍 가운데 있다. 양자를 향하여 굽히시는 분은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신자는 그의 선택에 대하여 우쭐 댈 수 없다.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Christian 은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부름 받았고 선택되었음을 알아 거짓된 삶을 버리고 참된 삶을 살아가게 된다. Christian 의 부름 받음은 하나님의 은혜에 응답하여 봉사하도록 부름 받은 것이다. 이 봉사는 선택된 자의 축복으로서 하나님의 self-offering에 대한 감사로 이루어진다. The elect man is chosen in order to respond to the gracious God, to be His creaturely image, His imitator. 그러므로 Christian 의 삶은 무엇보다 joyful thanksgiving으로 특징지어진다. 은혜와 감사는 그래서 함께 한다.

그래서 Barth는 복음의 신학자로 불리어 진다. 바르트를 위기와 심판의 신학자로만 보는 것은 교회 교의학의 중심 주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바르트는 그의 낙관주의로 인해 비판을 받고 있다. 그의 신학은 the triumph of grace라고 일컬어진다. 그는 악과 하나님의 심판을 상대화 했으며 진정한 인간의 자유가 설 자리가 없게 되었다고 비판받고 있다. 그래서 Barth의 신학에서는 인간이 은혜에 의해 늪지에 빠진 격이라고 평가되기도 한다.

 

'신 신학 자유주의 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Friedrich Schleiermacher (1768 ~ 1834)  (0) 2020.08.27
Rudolf Bultmann (1884-1976)  (0) 2020.08.27
세속화 신학  (0) 2020.08.27
칼 바르트의 성경관 비판  (0) 2020.08.09
자유주의 신학(liberal theology)  (0) 2020.05.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