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정론 1 (서론, 서술)
예 정 론 에베소서 1:1-14
예정론이란 무엇인가? 이는 매우 중요한 교리이며 가장 쉬운 교리이면서도 가장 어렵게 생각하는 교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는 오늘날의 신학은 거의 100%라고 할 정도로 이 예정론을 무효화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타락한 신학은 때문에 종교다원주의를 포용하고 있으며, 만민구원을 옹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보수적인 정통 장로교회의 성도들이나 일부 목회자들까지도 예정론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신학의 시대적 흐름으로 인하여 신학자들이 바로 가르치지 못하였기 때문이며, 또한 세속화 되어 성경 말씀보다는 이단의 주장에 따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예정론에 대해서는 ‘로레인 뵈트너’의 ‘칼빈주의 예정론’이라는 책을 중심으로 하여 가능하면 문구를 바꾸지 않는 범위 내에서 알기 쉽게 설명을 하겠습니다.
제1장 서 론
천주교에서 면죄부를 강제적으로 판매할 때에 많은 신부들이 반대를 했는데, 그 중에서도 ‘마르틴 루터’는 천주교의 잘못된 점을 95개 항으로 정리하여 발표함으로써 정면으로 천주교 지도자들에게 질문을 던지며 개혁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비텐베르크대학교의 주임사제이자 교수였던 루터는 면죄부와 선행의 복잡한 체계에 하나님의 가없는 은총의 선물이 얽매어졌음을 개탄했고, 95개조 반박문에서 교황은 연옥에 관한 권한이 없고, 성인의 공덕에 관한 교리는 복음에 근거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면죄부 체계를 공격했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윤리적·신학적 개혁에 대한 루터의 핵심적 관심사입니다. 즉 성서만이 권위가 있고(sola scriptura), 의인(義認)은 선행에 의해서가 아니라 믿음에 의해서만 가능하다(sola fide)는 것입니다. 그는 가톨릭교회와의 단절을 의도하지 않았지만, 교환권과 곧 충돌하게 되었습니다. 1521년 루터는 보름스 제국의회에서 심문을 받고 결국 파문당하고 말았습니다. 같은 시대의 독일의 츠윙글리도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주장하여 교회와 국가를 연합하여 취리히에서 신정정치를 실시했고, 프랑스에서는 칼빈이 로마 가톨릭의 교리를 부정하며 스위스 바젤로 망명한 후에 ‘기독교강요’(1536)를 발표하였습니다. 이처럼 당시 3대 종교개혁가로 불리는 루터, 츠윙글리, 칼빈은 모두 예정론에 있어서 의견의 일치를 보았고 강력하게 예정론을 가르쳤습니다.
루터의 ‘노예적 의지(The Bondage of the Will)'에 의하면 칼빈과 같이 예정론 교리를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루터파 교회에서는 수정된 형태의 예정 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영국의 청교도와 미국으로 이주한 청교도는 스코틀랜드의 개혁장로교회와 프랑스의 위그노 교파와 같이 철저한 칼빈주의자들이었습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도 한동안 이 교리를 지지하였고, 공공연하게 반대한 적이 없습니다.
오늘날에 와서 비성경적 신학을 가르치는 자들이 많이 있으며, 칼빈주의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기탄없이 말하는 사람을 만나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이는 시대적 흐름 속에 성경에서 경고하는 ‘말세’의 현상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현대의 성도들과 신학자들은 칼빈주의를 낡은 신학이라고 간주하려고 하는 경향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칼빈은 바울, 어거스틴의 계보를 잇는 가장 훌륭한 신학자입니다. 칼빈주의는 칼빈이 만들어 낸 신학신조가 아니며, 예정론을 비롯한 성경적 신학 사상을 매우 논리적으로 설명한 사람이 칼빈이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붙여서 ‘칼빈주의’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즉 칼빈은 신학사상 체계를 창작한 것이 아니라 다만 성경에 제시하는 바를 조직적으로 명료하게 우리들에게 해설해 준 것입니다. 마치 ‘뉴턴의 법칙’과 같이 모든 물체는 땅으로 떨어지는 것을 뉴턴이 탄생하기 이전부터 모든 사람들이 다 알고 있었던 것이지만, 뉴턴이 명료하게 논증하였기 때문에 ‘뉴턴의 법칙’이라고 붙여진 것과 같은 것입니다. 칼빈주의의 체계 역시 칼빈이 탄생하기 전 오래 전부터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이 체계는 사실 창조 시부터 존재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원리를 칼빈이 밝히 깨달아 조직화한 것입니다.
칼빈의 가장 위대한 점은 ‘성경이 인도하는 곳까지만 갔고 성경이 멎는 곳에서 멎었다.’는 점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것 이상은 넘어 가지 않으면서 성경이 가르치는 것은 주저하지 않고 수용하였기 때문에 칼빈의 선언은 결정적이며 적극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그의 비평가들을 화나게 만들었습니다. 그이 설득력 있는 논리적 분석은 그의 적을 두렵게 하는 무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칼빈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구속 계획에 관한 탐구에 있어서 일반인이 일찍이 거의 꿈도 꾸지 못한 신비들을 통찰해 내서 위대한 공을 세웠습니다. 그때까지 가려져 있던 성경의 한 면은 모든 사람들 앞에 밝히 드러내었고, 또한 종교개혁 이전에 교회에 별로 주의하지 않았던 것들의 심오한 진리를 강조하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잊혀진 사도 바울의 교리를 밝히 드러내어 그것을 기독교회의 정착을 시킨 것입니다. 그 사도 바울의 교리가 바로 “예정론”입니다.
예정론은 당시부터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받고 있습니다.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인데, 그 이유는 사람들이 예정론 교리가 참으로 무엇인지를 가르쳐주는 성경의 교훈에 대한 결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성경 교육이 부족한 사실을 생각해 볼 때, 예정론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무지에 대해서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예정론은 성경에 계시된 가장 깊고 심오한 진리를 취급하는 교리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예정론을 먼저 신중하게 연구해 보지도 않고 거부해 보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이 예정론이 지금까지 있었던 가장 현명하고 선량한 많은 사람들의 확신을 받아왔다는 것과 따라서 그것이 진리라는 사실에 대한 강력한 이유가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예정론이 지극히 위대하고 복된 성경의 진리이며 모든 교파의 근본적인 교리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결코 개혁주의 신앙의 총화나 본질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유명한 ‘카이퍼’라는 신학자는 “예정론이나 성경의 권위에서 칼빈주의의 특성을 발견하려는 것은 큰 잘못이다. 이러한 도리들은 칼빈주의의 논리적 귀결이지 출발점은 아니다. 이것은 마치 무성한 잎이 그 나무가 잘 자라고 있음을 증거해 주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그 나무가 잘 자라게 하는 뿌리는 아닌 것과 같다. 만약 이 교리가 다른 진리와의 필연적 관계로부터 분리되어 단독으로 표시된다면 필경 이 교리의 효과는 과장되고 또한 그 체계는 왜곡되어 잘못 전달될 수밖에 없다. 어떤 원리의 서술이 참이 되러면 그것이 그 소속 체계의 다른 요소와 조화를 이루면서 제시되어야 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전체적으로 이 체계의 평행을 이룬 서술이다. 예정론과 더불어 다른 진리들 곧 삼위일체, 그리스도의 신성, 성령의 인격, 성령의 영감, 이적, 예수님의 속죄 및 부활, 재림 등도 동일하게 강조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제2장 서 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는 “하나님은 영원전부터 자신의 가장 현명하고도 거룩한 뜻에 따라 앞으로 일어날 일체의 사건을 자유롭게 불가변적으로 예정하신다. 그러나 그 결과로 하나님이 죄의 창조자가 된다든지 피조자의 의지에 폭력을 가하는 존재가 된다든지 제2원인의 자유와 우연성이 탈취된다든지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확정되는 것이다.” 또 “하나님은 일체의 상정적 조건하에서 발생하는 사건과 발생할 수 있는 사건을 다 아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떤 사건을 미래에 어떤 조건하에 발생할 것이라고 예지하시기 때문에 그것을 예정하신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정교리는 하나님의 목적은 절대 무조건적인 것으로서 유한한 피조물에 관계없이 오직 하나님 자신의 영원하신 뜻에 따라 작정되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자연의 운행을 작정하시고 역사의 과정을 가장 세미한 부분가지 지배하시는 위대한 능력의 왕으로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결정은 영원불변하며 거룩하고 지혜로우며 주권적입니다. 이 결정은 단순히 자연계의 운행에만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로부터 심판에 이르기까지 인류 역사의 전체 사건에 미치며 또한 성도와 천사, 사악한 자와 음부에 있는 악귀의 전 활동가지 포함합니다. 이 결정은 그 원인 조건 지속(持續) 및 관계에 있어서 일찍이 있었고 또한 장래에 있을 일체의 사건을 동시에 포괄하며 시간과 영원 안에서 일어나는 피조물의 전 활동 범위를 포함합니다. 하나님 자신 외에 모든 것은 이 결정 안에 포함되므로, 모든 존재하는 것은 온전히 하나님의 창조력과 지지력을 힘입고 있기 때문에 이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유한한 만물은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으로 존재하며 또한 하나님께 대하여 전적으로 의존하기 때문에 스스로 하나님의 영광의 나타남을 제한하거나 방해하는 어떤 상태도 발생시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영원전부터 지금 그가 하고 게시는 일 그대로를 하시려고 목적하시었습니다. “그는 우주의 주재시오, 하늘의 군사에게든지, 땅의 거민에게든지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누가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은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 할 자가 없도다.”(단 4:35)라고 분명히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우주 만물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왔고, 그 유지도 하나님에게 의존하기 때문에 그 어느 부분에서나 어느 시대에서나 하나님의 관할 안에서만 발달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결정하거나 허락하지 않은 것은 아무 것도 발생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은 주권적 예정으로서 표시되는 것이지, 시간적으로 발생하는 어떤 결과적 사실이나 변화로 조건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은 미래의 모든 사건에 관한 그의 예지의 기초가 될지언정 결코 예지나 장래의 사건들 자체에서 기원된 어떤 것들에 의해서 좌우되지 않습니다.
칼빈은 “하나님의 영원한 제정(이것에 의하여 그가 인간 각 개인에게 어떻게 행하실는지는 그 자신 안에 결정하셨다.)을 우리는 예정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인류는 모두 명을 가지고 창조된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은 영생을 얻기로 어떤 사람은 멸망을 받기로 작정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각 개인은 이 목적 혹은 저 목적으로 각기 다르게 창조되었기 때문에 구원 문제에 있어서도 역시 영생 아니면 멸망으로 예정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루터도 칼빈과 같이 절대적 예정론을 열렬하게 지지했다는 사실이 루터의 로마서 주해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모든 사물은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의도에서 발새하고 또 그것에 의존한다. 이런 관계로 생명의 말씀을 받을 자와 그것을 받지 않을 자 그들의 죄에서 해방될 자와 그 죄 가운데서 강퍅해질 자 또한 칭의 맏을 자와 정죄 받을 자가 다 예정되었다.”고 말하였습니다.“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 13:48) 루터의 친한 친구인 멜랑톤은 “모든 일이(우리가 외면적으로 행하는 일뿐 아니라 내면적으로 사고하는 사상까지도) 하나님의 예정에 의해서 되어진다.”고 하였으며 “기회나 운명 같은 것은 없다. 하나님의 예정을 철저히 깨닫는 길만이 하나님의 경외하고 그를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유일의 첩경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헤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추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고전 2:7)
어떤 주인이 한 종에게 일을 시키기 위한 어느 곳에 보낸 후에, 또 다시 다른 종을 같은 일을 주어 같은 장소에 보내었을 때에, 이 두 종이 그곳에서 만나는 것은 그들 자신에게는 아주 우연적인 일로 보이겠지만, 그것은 이미 그들을 보낸 주인이 작정하고 예지했던 당연한 만남인 것이다. 이처럼 모든 사건의 발생이 우리들에게는 맹목적인 듯하고 의외인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에게는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 사태의 추이를 미리 알고 게시며 또한 의도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들이 보기에 우연한 것이나 사소한 것이 원인이 되어 누누이 중대한 사건이 발생되는 예는 많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예정에 따른 신적 지배가 크고 작은 모든 사건에 미치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자만 사소한 사건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각 사건이 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계획 중에서 그 정확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입니다. 다만 하나가 다른 하나보다 비교적 큰데 불과합니다. 역사의 과정은 무한히 복잡하지만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는 단순한 것입니다. 이 진리는 소요리 문답에 나와 있는데 “하나님의 규정들은 그의 뜻에 따라 정해진 그의 영원한 목적이니 그는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 발생할 것은 무엇이든지 작정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창조 된 모든 것들의 존재를 결정하는 것, 즉 어떤 것은 산나물이 되고, 어떤 것은 미나리가 될 것입니다. 또 어떤 것들은 두견새가 되고 어떤 것은 까마귀가 되고, 어떤 것은 사슴이 되고 어떤 것은 돼지가 될 것을 결정하는 것과 같이 인간에게 있어서도 어떤 사람은 남자 혹은 여자, 부자 혹은 가난한 자, 우둔한 자 혹은 총명한 자, 백인 혹은 유색인, 가인 혹은 아벨과 같이 태어나도록 결정한 것은 가장 위대한 예정입니다. 이렇게 전포괄적인 예정을 사람의 손이나 맹목적인 자연력의 손에 맞기지 않고 다만 천지의 주권적 창조주시오 소유주이신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를 진흙과 토기장이의 비유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이 세계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계획을 수행해 나가는 하나의 조직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나이다.”(롬 8:29,30)
개혁주의 신앙은 참으로 우주의 주권적 지배자이신 위대하신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개혁주의 신앙의 주요 원리는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우주적 계획이다. 칼빈주의는 언제 어디서나 영원부터 영원까지 하나님을 믿는다.”고 ‘베이네’는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현대 세상은 모든 사건들 속에서 사람은 높이고 하나님께는 극히 제한된 부분만을 드리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추세는 예정론을 축소시키거나 왜곡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올바른 신앙을 지키려고 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믿음이 약한 자들은 고리타분하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앞뒤가 꽉 막혀서 이 세상을 어떻게 살려고 하느냐고 말합니다. 이런 말들은 불신앙에 기인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신뢰하는 참 성도들은 세상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든지 오직 말씀에 우리의 모든 생각과 행위를 일치시켜야 합니다. 이런 믿음과 행함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지혜와 세상의 지혜를 이용하여 앞날을 개척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 결국은 오직 하나님의 예정대로 될 것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참 성도의 길은 지혜의 근원인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임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예정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바른 길로 인도하시며 주님 안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지도록 하셨는데, 내 안에 도적같이 스며든 악한 영은 오히려 그 길을 가지 못하도록 막고 있습니다. 이는 연단이 길어지기만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를 비롯한 모든 천지만물까지도 하나님의 예정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말씀에 순종하여 복을 받는 자가 될 것인가 불순종하여 멸망을 받는 자가 될 것인가를 잘 판단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글 요소
제 3장 하나님은 계획을 갖고 계신다.
1. 영원하신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것은 믿는다면, 그 창조는 무한한 지혜와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께서 아무런 계획도 없이 창조하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오히려 천지의 지극히 작은 부분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주도면밀하게 하셨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역사에 있어서도 하나님께서는 계획적으로 운행해 나가시고 계십니다. 이 세계는 명확하게 예정 된 대로 진행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단 하루 만에 지음을 받은 자이며 또한 여러 종류에 오류에 빠지기 쉬운 자인 인간도 행동하기 전에 계획을 세웁니다. 그래서 아무 계획이나 목적도 없이 행동하는 자를 가리켜 어리석다고 말합니다. 어떤 일을 착수하기 전에는 먼저 목표를 세우고 될 수 있는 대로 그 목표에 도달하려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아무리 이론적으로 예정론을 반대한다 해도 일상생활에서 모든 사람들은 실제적 예정론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미드(E. W. Smith)’의 말대로 ‘지혜로운 사람은 그가 성취하고자 하는 목표를 먼저 결정한다. 그 다음에 그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최선의 수단을 정한다. 건축가는 건축을 시작하기 전에 그 건축의 아주 작은 부분에 이르기까지 세밀하게 그려진 설계도를 작성한다. 하나의 기초석도 놓기 전에 건축가의 머릿속에는 이미 그 건축물이 완성 되어 있다. 그와 같이 상업, 농업, 법률 등 판단력과 지성을 갖춘 모든 사람들은 어떤 일을 시작하기 전에 이미 세밀한 계획을 세운다. 그런 다음 그들은 이미 세워진 목표를 따라 활동하며 그들의 유한한 능력이 미치는 한 예상했던 계획을 성취한다.’고 했습니다. 사업이 크면 클수록 계획을 갖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업은 실패로 돌아갈 것입니다. 아무 계획도 없이 배를 만들고 철도를 놓으며 국민을 다스리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틀림없이 정신병자로 간주될 것입니다. 만일 이러한 원리가 인간에게 유익하다면 하나님께서는 더욱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아무런 제한 조치를 만들어 놓지 않은 우주가 불합리하고 무섭기는 마치 급행열차가 불을 켜지 않고 기관사도 없이, 그리고 깊은 어둠 속으로 돌입할지도 모르는 불안을 가진 채 암흑 가운데로 달려가는 것과 같다.’고 ‘고든(A. J. Gordon)은 말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께서 실행하실 모든 일에 대하여 계획도 없이 우주를 창조하셨을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섭리적 통치가 우주 만사에 주도면밀하게 미치는 것과 같이 그의 계획도 또한 포괄적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절대적 계획을 세우시고 또한 우주 만사를 그 계획대로 진행시킨다는 것은 하나님의 완전성의 한 면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주에 실현하실 계획을 갖고 계신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곧 예정론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댑니(Dabney)’는 ‘하나님의 계획이 단일한 것은 그 계획의 수행에서 이해할 수 있다. 즉, 한 사건의 원인은 다른 사건의 결과가 되고 그 결과는 다시 다른 사건의 원인이 된다. 이처럼 한 사건이 다른 사건에 미치는 영향은 상호 교착(交錯: 서로 어지럽게 섞임)하여 무한히 내려간다. 이리하여 전체의 복합적인 결과는 모든 부분들의 집성(集成)으로 이루어진다. 우주에서 한 개의 유성을 제거하게 되면 기타 모든 별의 평형과 궤도가 다소라도 변경될 것이라도 천문학자들이 상상하는 것과 같이 이 계획에 있어서도 한 사건의 실패는 직간접적으로 전체를 혼란케 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적 증거>
사: 46:9-10 “나는 하나님이라 나 같은 이가 없느니라. 내가 종말을 처음부터 고하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예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모략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 살후 2:13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 마 25: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 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벧전 1:20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리신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바 되었으니” 렘 31:3 “나 여호와가 옛적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이르기를 내가 무궁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는고로 인자함으로 너를 인도하였다 하였노라.” 시 33:11 “여호와의 도모는 영영히 서고 그 심사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딤후 1: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2. 하나님의 계획 안에 포함된 우발적 사건
만일 하나님께서 사건의 전과정을 예정하시지 않고 다만 어떤 확정적이지 않은 조건들의 성취나 결국을 기다리시는 것이라면 그가 처음 정하신 것은 영원도 불변도 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오류가 없으시고 또 한 뜻밖의 방해로 말미암아 혼란을 당하시는 일이 없으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왕국은 천계에 있고 하나님은 만물을 통치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획은 역사의 모든 부분에 있어서 매사를 포함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아주 작은 사건이라도 하나님의 계획안에 포함된 것으로서 그 존재 사명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인간에게는 그의 인생행로를 바꾸어 놓은 어떤 ‘우발적 사건’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 우발적 사건의 결과가 또 다른 우발적 사건을 야기시켜 그 영향력을 계속적으로 확대하면서 역사의 전역으로 퍼지게 됩니다. 적군이 로마를 기습할 때에 한 마리의 거위가 큰 울음소리를 내어 잠든 파숫군들을 깨워 적의 침입을 발견하고 본영으로 연락하여 로마는 적을 물리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어떤 군대사령관이 전쟁에 나갔는데, 적군이 발사한 총톤이 불과 1인치 차이로 빗나가서 죽지 않고 전쟁을 지휘하여 승리로 이끌고 나중에 대통령이 되었는데, 그 사람이 바로 조지 워싱턴이라고 합니다. 1871년에 시카고에서 대형 화재가 발생했는데 도시의 절반을 태웠다고 합니다. 그 원인은 암소 한 마리가 등불을 차서 깨뜨리면서 불이 났다고 합니다. 만일 그 때 이 암소의 뒷다리 동작이 잠간만 지체되었더라도 대화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처럼 지극히 큰 사건에 대한 관리는 보다 작은 사건에 대한 관리를 포함해야 합니다. 그것은 큰 사건이 작은 사건들로 인하여 발생한다는 이유에서만이 아니고, 지극히 작고 약한 일이 얼마나 종종 중대한 일을 결정짓는 결정적 원인이 되는지를 역사가 증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적 증거>
잠 16:33 “사람이 제비는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욘 1:7 “그들이 서로 이르되 자 우리가 제비를 뽑아 이 재앙이 누구로 인하여 우리에게 임하였나 알자 하고 곧 제비를 뽑으니 요나에게 당한지라.” 행 1:24-26 “저희가 기도하여 가로되 뭇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주의 택하신바 되어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를 보시옵소서..... 제비 뽑아 맛디아를 얻으니...” 막 14:30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3. 하나님 계획과 불변성
펠라기안은 하나님께 계획이 있다는 것을 부인합니다. 알미니안은 하나님께는 총괄적인 계획은 있어도 특정적 계획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칼빈주의에서는 하나님은 모든 시대의 모든 사건을 포함하는 특정적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고 말합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앞으로 발생할 모든 사건을 예정하신 영원한 계획을 갖고 계신다는 것을 인정할 때 칼빈주의는 단순히 하나님께서 신이시오 모든 인간적 제약으로부터 전혀 자유하신 분이신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행위가 목적을 갖는다는 점에서는 인간과 같지만 그의 계획이 전지(全知)하시고 그의 실행이 전능하시다는 점에서는 인간과 같지 않은 인격적 존재이심을 칼빈주의자들은 인정하는 것입니다. 칼빈주의에서는 우주를 하나님의 창조에 의해서 생긴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완전하심을 드러내 보이시는 극장(劇場)으로 보고 또한 그 모든 형태와 역사에 있어서 가장 미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피조의 목적과 상응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19세기의 칼빈주의 3대 신학자 중 한 사람인 워필드(B. B. Warfield) 박사는 그의 예정에 관한 논문에서 이르기를 ‘성경의 기자들은 하나님의 계획은 전우주의 사물을 포괄할 만큼 광범위할 뿐 아니라 가장 세비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관계할 만큼 치밀하여 장래 발생할 모든 사건에 있어서 불가피적 확실성을 가지고 그 자체를 실현할 것으로 보았다. 천지의 주재이신 그의 무한한 예지(叡智)에 있어서는 각 사건은 명확히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의 전개에 있어서 당연한 위치에 맞아 떨어진다. 아무리 미소(微小)하고 아무리 기이한 것이라도 하나님의 명령 없이 혹은 그의 계획에 있어서의 그 독자적 위치에 합치하는 일이 없이는 발생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이런 것들의 일체의 귀결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나님께 대한 찬양을 누적시키는 것이다. 이는 성경의 우주론이니, 시간적 세계에서의 발전인 발생하는 일체의 사건에 대한 절대적 작정 혹은 절대적 목적 혹은 절대적 계획안에서 구체적 통일을 획득하는 세계관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철저한 유신론(有神論)의 본질은 하나님께서 우주에 대한 계획을 가지셨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만물의 행동을 예지하셨다는 것과 또한 그의 전 포괄적 섭리로 우주 전체를 통치하신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가 어떤 고립된 사건만을 예정하셨다면 자연계 도는 인간계에 혼잡한 사태가 발생됨에 따라 그는 자기의 하시고자 하는 바를 성취하기 위한 부단히 새로운 계획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하나님의 세계 통치는 마침 임기응변적 땜질과 같이 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은 단지 막연하게 통치할 수 있을 뿐이고 미래에 대해서는 무식한 자가 될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러나 바른 신관을 가진 사람이라면 한 사람도 하나님의 본리 계획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우발적인 사건이 발생할 여지를 주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부단히 그 마음을 변경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과 같은 일은 믿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계획의 완전성이 부인된다면 무신론을 저지할 수 있는 장벽은 무너지고 마는 것입니다.
<성경적 증거>
이사야 46:10-11 “내가 종말을 처음부터 고하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모략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 내가 동방에서 독수리를 부르며 먼 나라에서 나의 명령을 이룰 사람을 부를 것이라. 내가 말하였은즉 정녕 이룰 것이요, 경영하였은즉 정녕 행하리라.” 약 1:17 “빛들의 아버지께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민 23:19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말 3:6 “나 여호와는 변역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 사 14:24 “만군의 여호와께서 맹세하여 가라사대 나의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며 나의 경영한 것이 반드시 이루리라.”
4. 하나님의 계획 속에 포함된 인간의 죄행(罪行)
하나님의 계획에는 천지창조 단 한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주를 창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필연성이 때문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주를 창조하신 것은 온전히 하나님의 자유로운 결정이었습니다. 많은 계획들 중에서 현재 우리가 처해 있는 이런 세계를 창조하시기로 결정하신 것입니다. 창조를 결정하셨을 때에는 그 세계 질서 안에 포함 될 온갖 종류의 사건들을 완전히 알고 계셨기 때문에 이 세계 안에서 발생할 모든 사건을 명확히 예정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의 결정을 가리켜 ‘예정 혹은 예지’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들의 범죄도 이 계획안에 포함 되었으나 이 범죄들은 예지된 동시에 허용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 죄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관리되고 처리가 됩니다. 성경을 통하여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과 같이 인류 역사상 최악의 죄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이것도 역시 하나님의 계호기 중에 정확하고도 필연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행 2:23, 4:28). 십자가를 통한 구속 방법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타락으로 일하여 실패하시고 낙심하신 후에 임시로 고안하신 것이 아니고 영원전부 예정하신 목적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것입니다(엡 3:11). 베드로는 대속적 희생으로서의 그리스도는 창세 전에 예지되셨다(벧전 1:20)고 하였고, 또 에베소서 1:4에는 성도들은 창세 전에 피택되었다고 하였으며, 디모데후서 1:9에서 우리는 우리의 행위대로 구원된 것이 아니고 영원 전에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 그의 목적과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되었다고 하였습니다.(딤후 1: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만일 그리스도의 정사와 그의 속죄적 희생 사역이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 속에 포함되었다면 이 희생을 필연적으로 있게 마든 아담의 타락과 기타 죄과(罪過)들이 비록 아름답지 못한 부분이긴 하지만 하나님의 계획 중에 원시로부터 포함되었었던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성경적 증거>
창 50: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사 45:7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란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 암 3:6 “성읍에서 나팔을 불게 되고야 백성이 어찌 두려워하지 아니하겠으며 여호와의 시키심이 아니고야 재앙이 어찌 성읍에 임하겠느냐” 행 3:18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사 자기의 그리스도의 해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 마 21:42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눅 22:22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하시니”
인류 역사는 아주 작은 부분까지도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을 전개하는데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 만드는 모든 제정(制定: decrees)은 우발적 사건이 발생하는 것에 따라 계속적으로 만들어지는 것들이 아니라 본래부터 하나님의 전포괄적 계획을 형성하는 각 부분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전에 생각지 않으셨던 것들을 새로 내놓으신 다거나 또는 어떤 불의의 일을 하신다고 생각해서는 결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어떤 한 목적이 이미 성취된 다른 한 목적의 성과 혹은 인간의 행위의 부산물처럼 보여지는 묘사를 성경에서는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정론에 배치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통속어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것이라도 문구상에는 그런 것같이 묘사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땅 사방’(사 11:12) ‘땅의 기초’(시 104:5)와 같은 것에서, 땅(지구)이 정사각형이라거나 혹은 어떤 기초 위에 세워져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해가 뜬다, 또는 해가 진다’는 말은 태양의 움직임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지구의 자전 현상으로 이해합니다. 또 ‘하나님이 뉘우치셨다.’고 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행하신 어떤 과오를 뉘우치신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고 그의 행위의 과정을 인간의 견지에서 볼 때 마치 하나님께서 뉘우치는 것같이 보여진다는 의미입니다. 또 ‘하나님의 손, 하나님의 팔, 하나님의 눈’ 등의 묘사도 하나님을 인간에 비유하고 말하는 ‘의인법’에 불과합니다. ‘후회’라는 말은 엄밀한 의미에서 하나님께는 해당되지 않음을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민 23:19)라고 하였으며,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되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치 않으심이니이다.’(삼상 15:29)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이 위대한 계획을 숙고해 볼 때 이것은 만드시고 집행하시는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지혜와 무한한 능력을 찬송치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있어서 이보다 더 큰 만족과 기쁨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우주의 전과정이 천국을 건설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함 것임을 아는 것과 우리 자신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풍성히 받도록 만들어졌다는 것을 아는 것보다 더 큰 만족과 기쁨을 없을 것입니다. (롬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제4장 하나님의 주권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떤 주권(主權)이 자신의 생명을 관할하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은 세상에 출생하고 싶은지 아닌지 혹은 언제 어디에서 무엇으로 출생하고 싶은지의 질문을 받는 일은 절대로 없습니다. 21세기에 출생하고 싶은지 아니면 고대 노아의 홍수 전에 출생하고 싶은지, 백인으로 출생하고 싶은지 흑인으로 출생하고 싶은지, 미국에서 출생하고 싶은지 중국에서 출생하고 싶은지의 질문을 받고 태어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역대 성도들은 하나님은 우주의 창조자이시오 통치자로서 피조물 가운데서 발견되는 모든 능력의 궁극적 원천이심을 인정해 왔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를 떠나서는 아무런 일도 발생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진리를 자세히 살펴 볼 때에 우리는 그것이 칼빈주의의 입장을 확정하고 알미니안 주의의 입장을 반박한 이유를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칼빈주의 교리 알미니안 교리
1. 전적 타락 (자유의지 무) 1. 자유의지 여존
2. 무조건 선택 2. 예지 예정
3. 제한 속죄 3. 무한선택 속죄
4. 불가항력적 은혜 4. 가 항력적
5. 성도의 견인 5. 성도 견인 불확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만물의 절대적 소유자 혹은 궁극적 지배자가 되십니다. 단순히 총괄적 영향만 미치는 것이 아니고 그 창조하신 세계를 실제로 통치하고 계십니다. 땅의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위대성에 비해 볼 때 티끌만도 못하며, 하나님의 뜻이나 사업이 저지되기 보다는 오히려 태양의 운행이 중지되는 편이 쉬울 것입니다. 우리가 보기에 실패한 것 같고 모수된 것 같은 인간사에 있어서도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주권을 실현하심에 있어서 그 어떤 방해도 받지 않으십니다. 인간의 사악한 행동 역시 하나님의 허용 아래서만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이것은 타의적 허용이 아니고 자의적 허용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모든 일은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목적하신 것에 반드시 일치할 것입니다. 이런 진리가 부인되면 부인될수록 하나님은 우주 통치에서 제외될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우리의 현 지식 상태로서는 완전히 해결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들이 발생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성경과 이성이 증거해 주는 진리를 거부할 근거는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만일 이 세상의 왕의 권력이 그 나라의 법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 나라의 율법인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성도들은 말세에 각 사람들이 싫든 좋든 간에 그 무릎을 주님 앞에 꿇게 되고 모든 혀가 그리스도는 주(主)가 되신다고 고백하여 아버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큰 날이 반드시 올 것임을 알고 믿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우주 통치의 보좌에 앉으신 전능의 신으로 나타냅니다. 하나님은 태초부터 종말을 아시고 그 종말을 달성하는데 사용될 수단도 알고 계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고 생각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풍성하게 우리를 대우해 주십니다. 불가능이란 ‘만사를 다 하실 수 있는’ 하나님 앞에서는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마 19:26;막 10:27). 그러나 이 말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성품에 위배되는 일을 행하신다거나 또는 모순을 범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망령된 말이나 다른 어떤 도덕적 비행도 하나님께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은 2+2=5를 만드신다거나 또는 차바퀴를 회전시키면서 동시에 정지시키는 일 등은 하지 못하십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은 선하고 아름답다는 것을 보증해 주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세계의 과정이 하나님의 계획에 일치한다는 것을 확실히 보증해 줍니다.
신약에서만이 아니라 구약에서도 똑같이 하나님의 주권 교리는 철저하게 전개되어 있습니다. 워필드 박사는 구약에서 발견되는 주권 교리에 관하여 ‘만유의 전능하신 창조주는 또한 그 창조한 만물의 절대적 통치자로서 표시된다.’고 말했습니다. 계속해서 ‘성경 기자들은 <비가 온다>와 같은 표현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본능적으로 하나님께서 비를 주신다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즉 우연이나 요행의 가능성이 전혀 배제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제비를 뽑는 일까지도 하나님의 결정을 얻어내기 위해 지정된 방법이었습니다(수 7:16, 14:2, 18:6; 삼상 10:19; 욘 1:17). 모든 일은 예외 없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배치되고 하나님의 뜻이 발생되는 모든 일의 궁극적 이유입니다. 천지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사용하시는 방편들에 불과합니다. 자연도 국가도 각 개인의 운명도 그 전체의 변화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바람은 하나님의 사자이고 불길은 하나님의 종입니다. 모든 자연적 발생사는 하나님의 행위입니다. 번영은 하나님의 선물이요 어떤 사람에게 재앙이 내렸다면 그것을 하신 이도 하나님이십니다(암 3:5-6; 애 3:33-38; 사 47:7; 전 7:14; 사 54:16). 사람들이 알든지 모르든지 그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을 흥하게 하거나 망하게 하는 것도 하나님이시입니다. 그 마음을 열거나 강퍅케 하는 것도 하나님이시오 사람의 마음의 생각과 의향을 창조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십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죄인도 회개시키실 수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전능하신 분 즉 우주의 전능하신 통치자께서 그가 지은 피조물의 성격을 변화시키지 못하시겠습니까? 그분은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즙으로 변하게 하셨고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을 회개시키셨습니다. 문둥병자는 ‘주여 당신이 하고자 하시면 나를 깨끗케 하시리이다.’(막 1:40)라고 말하였으며 그의 문둥병은 주님의 말씀 한 마디로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인간의 육체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는 것과 같이 영혼도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만일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면 무수한 목사 선교사 전도자 등 각양의 사역자를 홍수와 같이 일으켜서 삽시간에 전 세계를 회심시키는 일도 가능하다고 믿을 수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실제로 전 인류를 구원하실 목적을 가지셨다면 그들을 교육하고 또한 지상에서 초자연적 역사를 행하기 위해 천사의 무리를 보내실 수도 있고 또는 친히 각 사람의 마음에 역사하여 한 사람도 멸망당하지 않도록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악은 하나님의 허락 아래서만 존재합니다. 따라서 만일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면 악을 단숨에 말소해 버리실 수도 있습니다. 이런 권능을 하나님께서 가지셨다는 것은 성경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룻밤 사이에 애굽의 모든 초태생을 살육하셨고(출 12:29), 또 하룻밤에 앗수르 군대 185,000명을 천사를 통하여 죽이셨고(왕하 19:35), 또 땅이 열려 고라와 그 당시의 반역자들을 삼켜 멸망시킨 일과(민 16:31-33),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베드로의 말 한 마디에 엎드러져 죽은 것(행 5:1-11)과, 또 헤롯왕이 무서운 죽음을 당한 일(행 12:23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는 고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충이 먹어 죽으니라.”) 이와 같은 하나님의 능력은 불변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최선을 다하여 인류와 투쟁하시지만 그의 목적 달성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을 심히 모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보편적이며 절대적이시지만 그저 맹목적인 힘의 주권이 아니며 무한한 예지와 성결 및 사랑이 결합된 주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교리는 바로 알기만 하면 가장 큰 위로와 확신을 우리에게 줄 것입니다. 누가 자기의 인생을 무한한 능력과 지혜를 가지신 거룩하고 자애로우신 하나님의 손에 맡기기보다 운명이나 우연 또는 자연 법칙이나 천박사곡(淺薄邪曲: 지식이 얇고 가벼우며 간사하고 바르지 못함)한 자아(自我)에게 맞기겠습니까?
하나님의 주권을 거부하는 자들은 그들이 달리 택할 것이 무엇인가를 고려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우주의 만물은 어떻게 통치되며 어떻게 인도되는가? “자기의 아름다운 뜻에 따라 모든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에 의하여” 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현대는 인간 의지의 자율성을 허용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주권과 예정에 관한 교리를 파기하는 경향이 심합니다. 한편으로는 인간의 교만과 자만 또 한편으로는 무지와 타락이 인간으로 하여금 될 수 있는 한 하나님의 제외시키고 인간의 자리를 고양(高揚: 높이 올림) 시키려고 합니다. 이 두 가지 경향이 합하여 대다수의 사람들로 하여금 칼빈주의 교리보다 알미니안 주의 교리를 더 따르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중요한 의도가 때에 따라서는 방해를 받아 실패될 수도 있고 또한 유죄(有罪)한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 인간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수도 있다고 주장하는 알미니안 주의는 성경의 사상과 위배됩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인간의 약점이라고는 하나도 갖지 않으신 분으로 무한히 높이고 있습니다. 인간은 약하기 때문에 실현하지 못하는 바가 있지만 하나님은 지혜, 능력 등 모든 것에 있어서 무한하시므로 예견되지 않은 불의의 사건이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는 변경시켜야 할 원인(原因)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갈 수 있다든가 혹은 그의 노력이 헛수고가 되는 일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피조물의 수준으로까지 끌어내리는 처사입니다.
<성경의 증거>
단 4:35 “땅의 모든 거민을 없는 것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사에게든지, 땅의 거민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누가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 할 자가 없도다.”
렘 32:17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큰 능과 드신 팔로 천지를 지으셨사오니 주에게는 능치 못한 일이 없으시니이다.”
엡 1:11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사 14:24-27 “만군의 여호와께서 맹세하여 가라사대 나의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며 나의 경영한 것이 반드시 이루리라. 내가 앗수르 사람을 나의 땅에서 파하며 나의 산에서 발아래 밟으리니 그 때에 그의 멍에가 이스라엘에게서 떠나고 그의 짐이 그들의 어깨에서 벗어질 것이라. 이것이 온 세계를 향하여 정한 경영이며 이것이 열방을 향하여 편 손이라 하셨나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경영하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폐하며 그 손을 펴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돌이키랴.”
사 46:9-11 “너희는 옛적 일을 기억하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같은 이가 없느니라. 내가 종말을 처음부터 고하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모략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 내가 동방에서 독수리를 부르며 먼 나라에서 나의 모략을 이룰 사람을 부를 것이라 내가 말하였은즉 정녕 이룰 것이요 경영하였은즉 정녕 행하리라.”
욥 42:2 “주께서는 무소불능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시 115:3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
시 135:6 “여호와께서 무릇 기뻐하시는 일을 천지와 바다와 모든 깊은 데서 행하셨도다.”
사 55:11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
롬 9:20,21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제5장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섭리의 활동이란 그의 피조물과 그 일체의 행동을 가장 거룩하고 가장 지혜롭고 가장 능력 있게 보존하시고 지배하시는 일이다.”(소요리문답 제11문의 답)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 이외의 모든 존재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고 존속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유지하십니다(히 1: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그분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은 그본으로 말미암아 보존이 됩니다.(골 1: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월성신과 땅과 땅 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오니 모든 천군이 주께 경배하나이다.(행 17:28) 엡 4:6 “곧 마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은 전체를 통하여 자연법칙과 역사의 과정과 또한 개인의 모든 운명을 항상 하나님의 섭리적 관할에 귀속시키고 있습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스랍(천사)들로부터 미생물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절대적 섭리에 의하여 질서가 유지됩니다. 하나님과 만물의 관계는 사려가 깊지 못한 성경 독자들은 범신론적 결론으로 인될 수도 있을 만큼 긴밀합니다. 그러나 각 개인의 인격과 제2 원인(原因)은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한 것으로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바른 위치를 갖고 있는 것으로 인정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 기자들은 또한 이 내재적 교리와 아울러 신(神)의 초월적 교리도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에 관한 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간사와 자연의 운행에 있어서 아주 작은 일에 이르기까지 긴밀하게 관계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이해하여야 할 것입니다. 핫지(Charles Hodges)는 “어떤 일이 하나님의 지배 안에 포괄되기에는 너무 크다든지 혹은 그에게 인지되기에는 너무 작은 일이라든지 혹은 무수히 많은 특수 사건이 하나님의 주의력을 교란시킨다고 상상하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성을 망각한 소치이다. 태양에게 있어서는 어느 한 지점에 그 빛을 비추는 일이나 전 공간에 그 빛을 가득 채우는 일이나 양자(兩者)가 다 한가지로 용이하다. 하나님은 오직 한 장소에 계시는 것과 같이 모든 곳에 계시며 오직 한 일에 유의하시는 것과 같이 모든 일에 유의하신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또 “하나님은 풀잎 하나하나에 계시는 동시에 북두칠성의 행로를 인도하시고 별들을 큰 군대와 같이 통수하시며 또한 그 하나하나를 이름으로 아신다. 또한 각 개인의 영혼에 내재하시어 그에게 오성(悟性: 성질을 깨닫다)을 주시고 재능을 부여하시며 그 안에서 역사하시어 그로 하여금 의욕(意慾)하게 하시고 작위(作爲)하게 하신다. 인간의 심정은 그의 수중에 있어 그는 마치 유수를 변동시키듯 그것을 변동시킨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각 사람들이 언제 어디서 어떠한 환경 아래서 백인으로 혹은 흑인으로 또는 지혜자로 혹은 우매자로 또는 남자나 여자로 출생하고 생활하다가 사망할 것이냐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작정하신다고 함은 거의 보편적으로 용인된 진리입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는 일에 있어서도 역시 주권적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것을 가지시고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십니다. 어떤 사람에근 부요를 어떤 사람에게는 명예를 어떤 사람에게는 건강을 어떤 사람에게는 음악, 웅변, 예술, 재리, 정치의 재능을 각각 부여하십니다. 어떤 사람은 빈곤, 무명, 비천하게 태어나서 질병에 걸려 비참한 생활을 보내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기독교적인 환경에서 출생하여 복음의 모든 특전에 참여하고 어떤 사람은 이교적 암흑 가운데 출생하여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믿음으로 구원에 들어가는 자가 있고 또한 믿지 않는 가운데서 멸망하는 자리에 이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처럼 개인의 선택의 결과가 아닌 외부적 요인이 사람의 생애와 영원한 운명을 상당히 결정합니다. 성경과 우리 인류의 일상적 경험은 하나님께서 어떤 이들에게는 주시지 않는 것을 다른 이들에게는 주신다는 사실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는 왜 그렇게 하실까? 하나님은 왜 전 인류를 구원치 않으시는가? 라고 누가 질문을 한다면 이에 대한 유일한 대답은 예수께서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마 11:26)라고 하신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오직 인류의 타락과 구속에 관한 성경의 교리만이 우리의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여러 가지 사건에 대한 해답을 줄 것입니다.
어떤 선물-영적 선물이든 지상 선물이든-을 받는 자는 순전히 은혜에 의해서 그것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그것을 받지 못하는 자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것을 주시기를 꺼리신 때문이요. 그것을 부여할 의무가 하나님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민족도 개인과 마찬가지로 그것을 부여할 의무가 하나님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민족도 개인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거주 한계를 정하시며 그들의 운명을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수중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막대기나 지팡이를 조종하는 것과 같이 절대적으로 그들을 지배하십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수중에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목적 달성을 위하여 그들(국가나 개인)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선하신 뜻대로 그들을 토기장이의 그릇과 같이 깨뜨리기도 하시며 혹은 위대한 민족으로 만들기도 하십니다. 그분은 평화와 풍년과 행복을 주시고 혹은 전쟁, 흉년, 한발, 질병의 황폐를 보내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목적을 위하여 사용됩니다. 하나님은 자기가 창조하신 우주의 단순한 방관자가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셔서 활동하시며 존재하는 모든 것을 지지해 주는 근원이시오 지배력이십니다.
참새는 그 값이 싸고 이리저리 제 마음대로 날아다니며 아무 것에도 구속되지 않은 듯이 보이지만 천부의 허락이 없이는 땅에 떨어지는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서리는 그것이 어느 나무 가지에 앉으며 무슨 곡식을 쪼아 먹으며 어디에서 자며 어디에 깃들이며 무엇을 먹고 살며 어디에서 죽을런지를 일찍이 작정하셨습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모든 빗방울이나 눈송이, 움직이나 모든 곤충, 자라나는 모든 식물, 공중에 떠다니는 작은 먼지들 이 모든 것이 어떤 원인으로 말미암아 발생되었으며, 확실한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이 하나하나가 사건연결의 한 고리로서 역사상 큰 사건의 대부분은 이런 무의미한 듯한 일들로부터 발생된 것입니다.
모든 사건들은 예정된 목적을 향하여 전진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워피드 박사는 ‘아브라함의 종을 영접하기 위하여 리브가를 우물로 나오게 한 것이나(창 24:15) 혹은 요셉을 애굽으로 보낸 것이나(창 45:8; 50:20) 혹은 바로의 딸을 갈대 사이의 상자로 인도한 것이나(출 2:5), 한 여인이 맷돌 윗짝을 던져 아비멜렉의 머리를 깨뜨린 것이나(삿 9:53), 어떤 사람이 우연히 활을 당기어 이스라엘 왕을 쏜 일(왕상 22:34)등은 모두 우발적 사고가 아닙니다. 모든 역사적 사건은 그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계획을 질서정연하게 수행하기 위한 한 항목인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가는 번개 빛을 명하여 적군을 격퇴하시는 하나님(욥 36:32)의 역사에 있어서의 임재를 부단히 감지(感知: 느껴서 알다)한다고 말하였습니다.
멕카트니(Clarence E. Macartney)박사는 “제군은 큰 정거장에서 게시판에 금속성 연필이 나타나서 벽에 큰 잘자로 기차의 발차 시간을 쓰는 것을 볼 것이다. 그 금속성 연필은 마치 저 혼자서 글을 쓰는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보이지 않는 어떤 사무실에서 사람의 손이 그 연필을 조종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이와 같이 우리들의 생활에 있어서도 우리들은 우리 스스로가 생각하고 선택하고 작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들의 운명은 직물(織物)에는 다른 실-우리들의 베틀에서 짜낸 것이 아닌-이 있어서 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사건일지라도 중대한 사건의 결과에 있어서 그 일익을 담당하게 되는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성경은 이 섭리적 지배가 보편적이고 능력이 있고 지혜롭고 성결하다고 반복해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섭리적 지배가 어떻게 해서 인간의 자유행동과 조화를 이루는지에 대해서는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 인간이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창조물을 통치하신다는 것과 그것들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통치가 창조물의 성질을 무시하지도 않으면서 동시에 하나님 자신의 순결하심과 우월하심에 일치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외부적 유인(誘因) 수단을 주시기 때문에 사람은 자기의 본성에 따라 행동하면서도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고자 하시는 바를 정확히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책임과 관계된 것이므로 앞으로는 자유행동에 관한 글에서 다시 논하게 될 것입니다.
인간의 도덕적 책임감과 의존감 또는 위험에 부딪히면 하나님께 구원을 호소하는 것 등은 하나님께서 세계를 통치하신다는 신념이 얼마나 보편적이고도 구체적인가를 잘 나타내줍니다. 결론적으로 이처럼 우리 인생의 일상생활 전반에 걸쳐 하나님의 섭리적 통치가 있음은 인정하면서 무수한 영혼의 운명은 맹목적 기회 혹은 나약하고 죄 많은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 인간의 불확실한 우연성에 달려있다고 주장한다면 과연 그것이 합리적인 주장이 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섭리적 관할에 대한 성경적 증거>
1. 자연계와 물질계
출 9:26 “이스라엘 자손의 거한 고센 땅에는 우박이 없었더라.”
마 5:45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창 41:32 "하나님이 이 일을 정하셨음이라 속히 행하시리니....“ (애굽의 흉년과 풍년은 자연 법칙으로 된 것처럼 생각할 수도 있으나 요셉은 말하기를 하나님이 이 일을 작정하시고 이루신 것이라고 하였다.)
암 4:7 “도 추수하기 석 달 전에 내가 너희에게 비를 멈추어 어떤 성읍에는 내리고 어떤 성읍에는 내리지 않게 하였더니 땅 한 부분은 비를 얻고 한 부분은 비를 얻지 못하여 말랐으며”
행 14:17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너희 마음에 만족케 하셨느니라.”
2. 동물계
마 10:29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시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마 6: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단 6:22 “나의 하나님이 이미 그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으므로 사자들이 나를 상해치 아니하였사오니”
시 104:21 “젊은 사자가 그 잡을 것을 쫓아 부르짖으며 그 식물을 하나님께 구하다가”
창 31:9 “하나님이 이같이 그대들의 아버지의 짐승을 빼앗아 내게 주셨느니라.”
3. 민족의 생활과 역사
단 4:17 “곧 인생으로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며 또 지극히 천한 자로 그 위에 세우시는 줄을 알게 하려 함이니라 하셨느니라.”
사 40:15 “보라 그에게는 열방이 통의 한 방울 물 같고 저울의 적은 티끌 같으며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으니”
대상 16:31 “열방 중에서는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통치하신다 할지라다.”
시 47:7 “하나님은 온 땅에 왕이심이라 지혜의 시로 찬양할지어다.”
담 2:21 “그는 때와 기한을 변하시며 왕들을 폐하시고 왕들을 세우시며”
시 33:10 “여호와께서 열방의 도모를 폐하시며 민족들의 사상을 무효케 하시도다.”
수 21:44 “그 모든 대적이 그들을 당한 자가 하나도 없었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의 모든 대적을 그들의 손에 붙이셨음이라.”
삿 6:1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칠 년동안 그들을 미디안의 손에 부치시니”
암 3:6 “성읍에서 나팔을 불게 되고야 백성이 어찌 두려워하지 아니하겠으며 여호와의 시키심이 아니고야 재앙이 어찌 성읍에 임하겠느냐”
합 1:6 “보라 내가 사납고 성급한 백성 곧 땅의 넓은 곳으로 다니며 자기의 소유 아닌 거할 곳을 점령하는 갈대아 사람을 일으켰나니”
4) 개인의 전 생활
잠 2:11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보의 물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시느니라”
시 37:23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 길을 기뻐하시나니”
잠 16:9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약 4:15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롬 11:36 “이는 만물이 주께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 돌아감이라.”
고전 4:7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뇨”
시 34:7 “여호와의 사자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치고 저를 건지시는도다.”
단 3:17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시 118:6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게 두려움이 없나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꼬”
사 68:8 “여호와여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
스 8:31 “우리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도우사 대적과 길에 매복한 자의 손에서 건지신지라.”
느 4:15 “하나님이 저희의 꾀를 폐하셨으므로 우리가 다 성에 돌아와서 각각 역사하였는데”
출 11:7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사람에게나 짐승에게나 개도 그 혀를 움직이지 않으리니 여호와가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 사이에 구별하는 줄을 너희가 알리라 하셨느니라.”
행 18:9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5. 인간의 자유 행동
빌 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출 12:36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으로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하사 그들의 구하는대로 주게 하시므로 그들이 애굽 사람의 물품을 취하였더라.”
스 7:6 “이 에스라가 바벨론에서 올라왔으니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사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도우심을 입음으로 왕에게 구하는 것은 다 받는 자더니”
스 6:22 “여호와께서 저희로 즐겁게 하시고 앗수르 왕의 마음을 저희에게로 돌이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 하나님의 전 역사하는 손을 힘 있게 하도록 하셨음이었느니라.”
겔 36:27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6. 인간의 사악한 행동
행 4:27,28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요 19:1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 하셨더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니”
삼하 16:10,11 “저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저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시 76:10 “진실로 사람의 노는 장차 주로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는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출 14:17 “내가 애굽 사람들의 마음을 강퍅케 할 것인즉 그들이 그 뒤를 따라 들어갈 것이라. 내가 바로와 그 모든 군대와 그 병거와 마병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리니”
7. 우발적 사건 또는 요행적 사건
잠 16:33 “사람이 제비는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욘 1:7 “그들이 서로 이르되 자 우리가 제비를 뽑아 이 재앙이 누구로 인하여 우리에게 임하였나 알자 하고 곧 제비를 뽑으니 요나에게 당한지라”
왕상 22:34 “한 사람이 우연히 활을 당기어 이스라엘 왕의 갑옷 솔기를 쏜지라.”
막 14:30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내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나를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제6장 하나님의 예지
하나님의 예정에 대한 알미니안 주의의 반대는 하나님의 예지에 대해서도 동일합니다. 하나님의 예시하시는 것은 그 성질상 예정되어 있는 것과 같이 확정이 된 것이 아니면 안 됩니다. 만일 예정이 인간의 자유행동과 모순이 된다면 예지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예정과 예지의 차이점은 예정은 사건의 확정으로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이고, 예지는 사건이 확정적인 것을 전제로 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만일 미래의 사건이 하나님께 예지되어 있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지식과 반대로 변할 수 있는 가능성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미래의 사건이 하나님께 예지되어 있다면 마치 기관차가 철길 궤도를 달려감과 같이 역사는 그 결정적인 과정을 밟아 나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예정 교리를 부인하는 알미니안 교리는 예지의 유신(有神)론적 근거도 부인하게 됩니다. 아무 사건이나 그것이 물리적으로든지 아니면 심리적으로든지 혹은 다른 어떤 방법에 의해서든지 미리 결정되어 있지 않으면 예지되기가 어렵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에서 미래의 사건의 확정성을 결정하는 것이 지혜와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의 예지인가? 아니면 맹목적인 자연적 운명인가? 하는 두 가지 질문 중에서 어느 하나를 택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16세기의 이단 중에 '소시니안파(Socinians)와 유니테리언파(Unitarians)'가 있습니다. 16세기의 소시니안파는 삼위(三位)가 공통된 본체(本體)를 가졌다는 교리는 이성에 모순된다고 보았으며, 심지어는 성자의 선재까지도 부정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비록 특별한 성령을 충만이 받으시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많으며, 승천 후에도 만물의 지배권을 받았다고 하지만, 그는 본질적인 성질로 보아 단순한 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들의 하나님에 대한 개념은 오늘날의 유니테리안과 현대주의자들의 선구자가 되었습니다. 유니테리안파는 종교개혁 이후 지금까지 교회 안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단으로, 단일신론과 아리우스파 중 그 선구자입니다. 유니테리안파는 신조(信條)를 부인하고, 다양한 신앙의 범위를 가지고 있으면서, 하나님의 단일성을 강조하고 그리스도와 성령의 신성을 부정합니다. 그들은 자유, 이성, 관용을 인격적이며 사회적인 종교를 본질적인 것으로 보았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예정을 부인한 후 하나님께서 자유행동자의 행동을 예지하신다는 것까지도 부인하였습니다. 그들은 어떤 사람이 어떻게 행동할지는 그 사람이 실제로 어떻게 할 것을 결정하기까지는 알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견해는 성경의 예언을 기껏해야 기민(機敏)한 추측쯤으로 격하시킴으로써 성경의 영감에 대한 역사적 기독교 교리를 파괴하고 있습니다. 이 견해는 한 번도 공인된 기독교회의 지지를 받은 일이 없습니다. 어떤 소시니안파 사람과 유니테리안파 사람들은 그들이 인간의 미래 행동에 관한 하나님의 확실한 예지를 부인하게 된 이유는 만일 하나님의 예지를 인정한다면 칼빈주의적 예정론을 부인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라고 정직하게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많은 알미니안 사람들이 이상과 같은 하나님의 예지에 대한 변론의 위력을 감지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하나님의 예지를 부인함에 있어서 유니테리안 사람들은 추종하지 않으면서도 할 수 있다면 예지를 부인하려는 의사가 있다고 표명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교리는 그렇게 필요하지 않으니 그것을 믿든지 믿지 않든지 별로 큰 문제가 된지 않는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예정을 시인하는 것보다 예지를 부인하는 편이 낫다고 말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하나님은 인간을 자유롭게 하기 위하여 인간의 행동 중 어떤 부분에 대한 지식은 스스로 간과(看過: 방관(傍觀)과 비슷한 뜻으로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것을 뜻함.)하신다고까지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명백히 하나님의 전지성(全知性: 모든 것을 아는 것)을 파괴하는 일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전지(全知)는 마치 하나님의 전능이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시면 어떤 것이든지 다 하실 수 있다는 것과 같이 만일 하나님이 아시고자 하시면 어떤 것이든지 다 아실 수 있다는 단순한 가능성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공정한 비교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무엇이든지 원하시면 다 하실 수 있고 또한 다 아실 수 있는 것과 같은 행동은 일의 성질상 아직 미래에 속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것은 단순한 가능성이 아니고 현실성이며 그들의 행동을 하나님이 모르신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전지를 부인하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 설명은 ‘전지하지 못하는 전지’라는 불합리를 말하는 것뿐입니다.
알미니안 사람은 하나님의 예지 교리에 대한 변론에 직면할 경우 미래사의 확정성 혹은 불변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자유행동력 문제를 논하게 될 경우 인간의 행동들은 불확정한 것으로써 궁극적으로 사람의 선택에 의존하는 것이라고 주장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이것은 분명 모순입니다. 인간의 자유행동이 불확정하다고 주장하는 견해는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주권을 희생시키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뿐 아니라 만일 영원 전에 인간의 행동이 그 자체에 있어서 불확정하다고 하면 하나님은 그 계획을 수립함에 있어서 먼저 사건이 그 성과를 얻기까지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한 영혼을 회개시키려고 하실 때에는 마치 나폴레옹이 전쟁을 시작하는 것과 같은 상태 - 여러 개의 계획을 복안으로 가지고서 첫째 계획이 실패하면 둘째 계획으로 둘째 계획이 실패하면 셋째, 넷째 계획으로 연이어 시도하려는 것과 같은 상태 -에서 일하실 것이라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하나님의 우주 통치도 확정성이 없으므로 예측할 수 없는 인간의 행동에 따라 좌우될 것이므로 이는 하나님의 성품을 잘못 판단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예지와 그 불변성의 완전을 부인하는 것은 하나님을 그의 창조물로 말미암아 자주 좌절되고 패배 당하는 불행한 존재로 제시할 뿐입니다. 그러나 누가 이 위대하신 여호와께서 사람 앞에서 ‘사람이 무엇을 하려는가?’라고 자문하면서 앉아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할 것입니까? 알미니안 주의는 하나님의 예지를 부인하지 않는 한 극히 논리적인 칼빈주의 앞에 무방비 상태로 서 있는 셈이 됩니다. 왜냐하면 미래의 사건에 대한 예지는 그 사건들의 정확성을 포함하고 정확성은 예정을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종말을 처음부터 고하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모략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사 46:10)고 하였습니다. 또 시편 139:2에서 “당신이 멀리서부터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라고 하였고, 행 15:8에는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라고 하였으며, 히 4:13에서는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예정에 대한 이해가 어려운 까닭은 인간의 이성이 유한하기 때문에 일시에 몇몇 부분 밖에 깨달아 알지 못하고 또한 그 사이에 있는 관계 중 겨우 일부분 밖에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시간적 피조자이기 때문에 종종 하나님은 우리처럼 제한을 받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잊어버립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현재’ ‘미래’ ‘과거’로 생각되는 것이 하나님의 심경에는 다 현재이므로 영원의 ‘지금’입니다. 하나님은 ‘지존무상하여 영원히 거하며’(사 57:15), ‘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을 뿐임이니이다.’(시 90:4).
그러면 시간 안에서 생기는 사건은 영원 전부터 하나님께서 지정하시고 또한 자기 앞에 제정하여 놓아두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시간은 유한한 피조물의 특성일 뿐이지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시간 위에 계시고 시간을 보시긴 하지만 시간의 제한을 받지 않으십니다. 그는 공간의 제한도 받지 않습니다. 공간은 다만 유한한 피조물의 또 하나의 특성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떤 도로의 일정한 구간을 지날 때에 사람들은 그것은 부분적으로 밖에 볼 수 없지만 하나님은 그 전체를 한 눈에 보실 수 있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은 과거 현재 미래의 역사상 모든 사건들을 일별(一瞥 한눈에)에 다 보시는 것입니다. 역사의 전과정이 영원의 ‘지금’으로서 하나님 앞에 있다는 것 또한 하나님께서 모든 유한적 존재의 창조자시라는 것을 인식한다면 예정론을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미래의 사건에 관한 작정을 세우지 않으셨다면 창조 전에는 그것에 관한 확정성이 전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그 작정을 결정하신 때에만 사건들은 비로소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가능성의 범주에서 확실히 있을 것이라는 실현에의 범주로 옮겨질 것입니다. 이 불변성 혹은 확정성은 하나님의 뜻에만 그 근거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영원에는 하나님 이외의 어떤 존재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댑니(R.L.Dabney) 박사는 말하기를 “어떤 목적이 하나님의 가능성의 환영(幻影)으로부터 실제의 예지로 옮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께서 친히 그것을 수행하기로 뜻하시거나 혹은 하나님이 분명히 존재케 하시려고 작정하신 어떤 능력 있는 요인에 의하여 그것을 수행할 것을 임의적, 목적적으로 정하시는데 있다. 이것은 다음 사실에서 더욱 분명하다. 가능성(Posse)에서 생각되는 어떤 결과는 하나의 동력인 또는 다수활동원인의 힘에 의하여 비로소 현실화 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 본원적 절대적 예지의 견지로부터 장래를 내다 보았을 때는 오직 한 원인 즉 하나님 자신만이 있었던 것이다. 만일 다른 원인이나 능인(能因)이 나타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행동력에 의한 것이 아니면 안 될 것이다. 만일 다른 능인들이 산출하려는 결과들이 하나님의 예지 가운데 포함되어 있다면 그들 모든 능인들을 존재케 하려고 의욕하시는데서 이미 사실상 그 모든 결과들을 존재케 하려고 의욕하시며 기도(企圖)하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침례교 신학자 ‘스트롱(A. H. Strong)’ 박사는 ‘창세기 전에는 우주의 미래적 존재의 원인은 하나님 자신 이외에 아무 것도 없었다. 창세 전에 하나님은 세계의 창조와 그 법칙의 제정이 세계의 실제 역사를 가장 미세한 점에 이르기까지 확정성이 되게 할 것을 예견하셨다. 이리하여 하나님은 이 창조의 법칙의 제정을 결정하셨고 이에 따라 필연적으로 미래의 일체를 결정하셨다.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은 창조를 결정하셨으므로 우주의 전미래적 사건 일체를 확정적으로 예견하셨다. 그런데 이 창조의 결의는 창조의 모든 실제적 결과에 관한 결의까지고 포함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창조의 전결과를 결정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예지와 예정을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예지는 예정을 전제로 하지만 예지 그 자체가 예정은 아닙니다. 자유행동자인 인간의 행동은 그것이 예지되었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예정 되어 확실히 일어날 것이므로 예지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트롱 박사는 ‘논리적으로(시간적으로가 아니라) 결정은 예지 전에 있는 것이다. 내가 “나는 내가 할 바를 안다.”고 말할 겨우 내가 벌써 무엇을 하기로 결의하였다는 것 또는 내 지식이 결의에 선행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결의에 수종하고 거기에 근거한다는 것이 분명히 드러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예지는 완전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처음부터 개개인의 운명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예지란 다만 현세에서 사람이 무엇을 하기로 작정하기 전에 그것을 미리 아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 창조 이전부터 인간의 운명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분명히 구원을 받을 자나 멸망을 당할 자나 다 같이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만일 어떤 자들의 멸망을 하나님께서 계획하지 않으셨다면 그는 멸망당할 자들을 창조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예지에 관한 교리는 하나님의 예정 교리도 증명해 준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건이 예지되어 있는 이상 그것은 불변적이요 확정적인 사건입니다. 영구적 결정의 제1 원인인 하나님의 소욕이 아니면 아무 것도 역사의 사건들을 고정 또는 확정시킬 수 없습니다. 문제는 자유행동자의 행동이 확정되어 있다고 하는 점에 있지만 이 확정성은 예정과 마찬가지로 예지에 있어서도 똑같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알미니안 파의 변론은 만일 정당한 근거가 있다면 예정이나 예지나 다 같이 부인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너무 많은 논증을 하기 때문에 우리는 결국 그들이 아무 것도 논증하지 못한다고 결론짓는 것입니다.
제7장 제 신앙 사상체계의 개요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체계는 다음 세 가지 뿐입니다.
1. 만민구원설
“그리스도는 전인류를 위해 죽으셨다. 그러므로 전인류는 금세(今世)에서나 내세(來世)에서나 모두 구원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이론입니다.” 이 견해는 우리 인간의 감정에 대해 가장 강한 호소력을 지닌다고 할 수 있지만, 이것은 비성경적임과 동시에 일찍이 조직된 어떤 교회도 이것을 지지한 적이 없습니다.
2. 알미니안 주의
“그리스도는 인간 각 개인을 위하여 구원 받을 자를 위함과 같이 멸망 받을 자를 위해서도 공평하고 무차별하게 죽으셨다. 그리고 선택은 하나님의 영원적 무조건적 해위가 아니다. 구원의 은혜는 누구에게나 제공된 것이다. 다만 그 은혜를 받고 안 받는 것은 인간의 의지에 달려 있다. 따라서 인간이 구원의 은혜를 거절하고 싶다면 성령의 중생의 능력도 거절할 수 있다. 구원의 은혜가 반드시 궁극적인 것은 아니다.” 즉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받은 중생한 자라도(하나님께서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끊임없이 원망(願望: 바라며 기다림)하시며 노력하심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은혜를 다 저버리고 영원히 멸망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런 주장을 하는 알미니안 주의를 근본적으로 살펴보면 결국 자력구원(自力救援)의 한 형태인 ‘펠라기안’주의의 부활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칼빈주의를 추적해 들어가면 어거스틴 주의에 이르는 것 같이 알미니안 주의를 추적해 들어가면 펠라기안 주의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대체로 알미니안 주의를 펠라기안 주의라고도 부르는데 그 이유는 알미니안 주의의 제 원리가 알미니우스가 출생하기 무려 1,200년 전에 이미 세상에 나왔기 때문입니다.
펠라기안 주의는 인간의 전적 부패와 효과적 은혜의 필요성을 부인하고 인간의 의지를 하나님의 의지 위에 놓고 있습니다. “그 교리는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타락 교리를 배척하고 인간의 자연적 취미만 만족시켰다. 사람이 자기의 자유 의지에 의하여 무결하고 성결하게 성장 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은혜를 확보할 수 있고 또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는 것처럼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을 미혹해 온 교리이다.”(Warburton, Calvinism, p.11)라고 했습니다.
알미니안 주의는 기껏해야 펠라기안의 체계와 어거스틴의 체계의 중간을 방황하면서 양자의 조화를 꾀해 보려고 하는 애매모호한 시도입니다. 핫지(A.A.Hodge) 박사는 이에 대해 “다기(多技)적이요 융통자재한 타협적 체계”라고 언급하였습니다.
회심과 성화의 역사는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뜻이 협력하여 공동으로 달성하는 것이고 또한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를 수용할 수도 있고 거절할 수도 있는 주권적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알미니안 주의의 주요 사상입니다. 그것은 타락의 결과 인간은 무능력자가 되엇지만 모든 능력을 전부 상실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인간은 그 인격적 노력에 도움을 받기 위해서만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즉 “그는 병들었지만 죽지는 않았다. 스스로 병을 고칠 수는 없으나 의사의 도움은 받을 수 있다. 이때도 자기의 뜻에 따라 의사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고 받지 않을 수도 있다.” 이와 같이 인간은 자기의 구원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 하나님과 협력할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견해는 하나님의 주권을 희생시켜 인간의 자유를 높이고 있습니다. 이 주의는 피상적으로는 성경적 견해를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나 실상은 그렇지 않으며 성경의 다른 부분들과 분명히 모순됩니다.
알미니안 주의의 경향이 복음적 근거로부터 점점 타협하여 일탈(逸脫: 껍질을 벗고 없어지다)한 사실은 역사가 명백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오늘날까지 알미니안 주의 신학의 논리적 계통적 체계가 전혀 발전되지 못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이 주의가 감리교회 안에서 하나의 간단한 비공식적 25개조 신경을 이룬 적이 있었으나 주도면밀하게 작성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는 현저히 반대됨을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습니다.
3. 칼빈주의
모든 인간은 아담의 범죄 이후 전적으로 타락하였고 전적으로 무능력해졌습니다. 이들 중에서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어떤 사람에게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얻도록 선택하시고 어떤 사람은 유기(遺棄: 버리다)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대속의 죽음으로 하나님의 백성(택자들)을 구속하도록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성령은 택자들에게 이 구속을 유효하게 실현하십니다. 이러하여 모든 택자들은 낙오됨이 없이 완전한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이 칼빈주의의 주장이며 오로지 이 견해만이 성경과 일치하며 또 우리 인생의 경험과도 일치합니다.
타락한 인간은 구원을 얻는데 공덕(功德)이 될 만한 일을 함에 있어서는 전적으로 무능하게 되었으므로 그 영적 생활의 발전을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하게 된다고 칼빈주의는 주장합니다. 알미니안 주의의 주된 잘못은 구속사업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역할에 대한 인식 부족입니다. 알미니안 주의는 인간의 존엄과 능력을 칭송합니다. 그러나 칼빈주의는 오로지 하나님의 전능과 은총을 찬양합니다. 칼빈주의는 인간을 은총의 날개에 태워 가지고 초자연적 능력으로 비상(飛翔: 높이 날다)시키기 위하여 먼저 굴욕과 절망의 깊음 속으로 던집니다. 알미니안 주의가 죄인의 생태적(生態的) 자만을 우쭐하게 만드는 것이라면 칼빈주의는 회개하는 죄인들의 복음(福音)입니다.
사실 인간을 깎아 내리는 자보다 추켜올리는 자가 불신자들의 심정에는 더욱 더 환영을 받게 됩니다. 오늘날 알미니안 주의가 보다 더 대중적인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칼빈주의는 그 가르치는 사실들이 아무리 냉혹하고 비타협적인 것 같이 보일지라도 진리에 기초하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언제나 양약은 입에 달지 않고, 입에 꿀처럼 단 것이 배에서는 쓰기 마련입니다. 참으로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고전 1:18).
사람은 자기의 특수한 감정과 의식을 도덕적 공리(公理: 공적인 도리)와 같이 당연시하여 부단히 자신을 기만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거룩한 하나님은 죄가 세상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실 수 없다는 것이 자명한 진리처럼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은 계시지 않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또 어떤 사람에게는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은 피조물인 인생의 일부가 영원토록 죄와 비참 가운데 빠져 있게 되는 것을 허락하실 수 없다는 것이 자명한 진리처럼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영벌(永罰)의 교리를 부인합니다. 어떤 사람은 무죄자가 유죄자로 벌을 받는 것은 부당하다고 단정하여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부인합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성경을 떠나서 각자의 기호대로 기독교 사상을 발전시킬 자유가 없습니다. 강경하고도 열정적인 칼빈주의 옹호자 핫지(Charles Hodge) 박사는 “그들의 여러 가지 신앙 사상 체계 중 어느 것이 참된 것이냐 하는 문제는 어느 것이 우리 인간의 감정에 보다 더 쾌적하고 이성(理性)에 보다 더 진실하게 생각되느냐에 따라 판단해서는 안 된다. 적어도 어느 것이 성경의 교훈 및 경험적 사실과 보다 더 일치하느냐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 모든 신학자는 자기의 이론을 반드시 성경의 권위 아래 복종시켜야 한다. 그래서 자기에게 진리라고 생각되거나 합리적으로 보이는 것을 진리라고 가르칠 것이 아니라 단순히 성경이 가르치는 것만을 가르쳐야 한다. 이것이 모든 신학자들의 의무이다. 만일 각 개인의 강한 개인적 화신이 어떤 교리의 진위를 결정하거나 성경을 재단(裁斷)하도록 허뇽한다면 각 개인의 확신 여하에 따라 동일한 진리라도 서로 의미를 달리할 것이니 쟁론이 끝이 없고 어떤 진리도 확증될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기독교 사상 체계의 공통된 다른 모든 교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칼빈주의의 특징적 교리도 또한 성경 어느 곳에든지 계통적으로 완비된 형식으로 전개되어 있지 않습니다. 성경은 한 권의 조직신학 책이 아니고 다만 거기서 그러한 성전을 지을 석재를 채취할 수 있는 채석장과도 같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완비된 신학 체계의 서술을 주는 대신 우리가 계통을 세우고 유기적 관계로 조직하여 완성시키지 않으면 안 될 일단의 소재들을 줍니다.
예를 들면 삼위일체, 그리스도의 인격 혹은 성경의 영감에 관한 교리의 공식적 서술은 성경 어느 곳에도 없습니다. 성경은 히브리 민족의 기원과 발전 또는 기독교의 발생에 대한 전말(顚末)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그런데 그 교리적 사실이 전혀 비논리적으로 서술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교리적 사실을 분류하고 논리적으로 정리 배열하여 신학적 체계를 수립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에 있는 소재가 신학적 체계로 정리되어 있지 않은 것은 자연계와 기타 영역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조치와 일치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완전히 발달된 생물학이나 천문학이나 정치학 등의 체계를 주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인간이 자연 사이에서 또는 경험으로 유기적 조직이 없는 모든 사실들을 발견할 뿐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것을 우리의 힘이 미치는데 까지 최선을 다하여 하나의 체계로 발전시킬 책임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모든 교리가 조직적이거나 공식적 형태로 제시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릇된 해석이 종종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8장 성경은 최종 권위서이다.
기독교인들 간의 모든 논쟁에 있어서 성경은 최고 법정으로 인정됩니다. 역사적으로 성경은 기독교계가 공통으로 인정해 온 권위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경이 조화 있고 완비된 하나의 교리적 체계를 포함하고 있으며 성경의 전 부분은 상호일치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각 구절을 신중히 연구함으로써 이 조화를 추구해 나가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는 것을 믿는다고 Dr. Samuel G. Craig는 말하고 있습니다.
워버톤은 모든 교리들의 시비에 관하여 ‘성경이 최고 최종의 법정이다. 따라서 모든 교리를 성경 앞으로 가져 와서 성경으로 음미해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들의 신념의 진위는 하나님께서 그의 영감된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 무오(오류가 없음)한 계시에서 설명되는 가르침과 일치하는가 혹은 차이가 나는가에 따라 판단되는 것이다. 칼빈주의에 대한 시비의 결정도 이 규준에 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마찬가지로 알미니안 주의나 펠라기안주의도 이 규준에 의하여 음미되지 않은 안 된다. 우리의 모든 지론은 그것이 종교적인 지론이든 과학적인 지론이든 이 규준에 의해서만 결정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만약 우리의 지론이 성경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그 속에는 공명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무오한 축자영감임을 믿는다. 우리는 성경이 유일한 권위서임을 지지하는 동시에 성경적 근거가 없는 교리는 무엇이나 참되지도 않고 본질적이지도 아님을 중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이 심오한 예정론의 진위는 오직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만 판정될 것입니다. 자기의 관찰과 판단만 쫓는 사람은 아무도 하나님이 수행하고 계시는 계획의 기본 원리가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모든 철학적 사변(思辨: 생각이나 뜻을 분별)이나 추상적 추리들은 우리가 먼저 성경의 증거를 듣기 전까지는 무용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성경적 증거를 들을 때는 겸손히 복종하여야 합니다. 이 일들이 과연 그런가 그렇지 않은가를 알기 위하여 매일 성경을 상고한 베뢰아 사람들과 같은 고귀한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 더 많아지기를 희망합니다.
본서에서 논의되는 교리마다 우리는 성경의 많은 증명-직접적 또는 간접적 증명, 더 이상 대답하거나 설명할 수 없는 증명-그 힘과 범위와 명확함에 있어서 반대편에서 들 수 있는 어떤 증명보다도 훨씬 더 우수한 증명을 제시하였습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칼빈주의적 구원 계획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교리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 자에게 전혀 의문을 품을 만한 여지가 없으리만큼 명료하게 가르쳐지고 있습니다. 이 교리들은 극히 인상적인 방법으로 설명되었고 또 그 표현 방법이 자연스럽고 단순해서 누구나 알아 볼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만일 어느 누가 하늘에 별이 있으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하늘에는 무수한 별이 있다(시 8:3-4)고 대답할 것이며 또 다시 바다에 고기가 있으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바다에는 무수한 고기가 있다(시 104:25-27)고 대답할 것이며 또 다시 산림 중에 수목이 있느냐고 물으면 우리는 산림 중에는 무수한 수목이 있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누가 우리에게 성경에 예정 교리가 있느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은 이 교리로 가득 차 있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삼위일체, 그리스도의 신성, 성령의 인격, 인간의 유죄, 미래 심판의 실재와 같은 교리들이 성경적인 것은 이 교리들을 진리로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까지도 부인하지 않습니다. 합리론자나 고등비평가도 일반적으로 사도들이 복음적 칼빈주의적 교리를 믿고 가르쳤다는 것과 성경 주석상의 규칙을 엄밀히 적용한다면 사도들의 서술이 다른 어떤 해석도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다만 그들은 그들 자신이 사도들의 권위를 수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생각지 않을 뿐입니다.
예를 들자면 그들은 사도들의 신앙을 ‘미개한 시대의 그릇된 관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 교리들이 발견되는 모든 구절들을 비평적으로 해석해 볼 때 이 교리 이외에 다른 어떤 의미도 발견할 수 없다고 말하는 그들의 증언의 가치를 손상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합리주의자는 성경이 이 교리들을 가르치고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 대해서 아무 권리도 가지지 못한다고 말하는데 그래도 그것은 성경의 교훈을 믿는다고 공언하면서 성경의 논증의 능력을 교묘히 회피하는 고등비평가의 역설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칼빈주의 교리를 가지고 알미니안파가 제시하는 성경 구절들을 해석하는 데는 그리 큰 어려움이 없습니다. 반면에 알미니안주의 교리를 가지고 칼빈주의자가 제시하는 성경 구절들을 설명하려면 억지 해석을 하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더구나 칼빈주의 교리는 그것과 모순되어 보이는 여러 장구(章句)들을 제시하는 것쯤으로 전복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장구(章句)들을 제시한다는 것은 결국 성경 자체에 모순이 있다고 하는 오류에 빠지는데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현대의 과학적 주석에 의한다면 개혁주의 신학에 대한 여러 반대가 주석상의 반대라기보다 오히려 감정상 또는 철학상의 반대임이 분명합니다. 만일 기독교인들이 공인된 성경 해석의 원칙에 따라 성경을 해석하는 것에 만족하였다면 저들의 신조 간에는 더 많은 조화가 있었을 것입니다. 컨닝햄은 ‘칼빈주의의 반대자들은 성경의 단편적인 구절들에만 기초하여 어떤 논제의 가능성을 말할 뿐 문제 전체를 지해 주는 성경의 전반적인 증거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의 특성, 원인, 결과를 제시해 주는 성경의 진술을 종합적으로 또는 상호 연락을 취해가면서 관찰하여 공평히 평한다면 우리는 의심할 여지없이 성경이 제시하는 전반적 결론을 적용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성경을 교리에 관한 유일의 권위서로 인정하는 개혁주의적 원리를 주장하는 한 칼빈주의 체계는 하나님 인생 구속을 논하는 유일한 체계로 존속할 것입니다.
제9장 부당한 사변에 대한 경고
여기서 우리는 부당한 사변(思辯)과 호기심을 갖고 이 심원한 예정론을 취급하는 데 대하여 경고를 하지 않으면 안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 점에 있어서 이 문제에 관한 소론 제1절에 있는 칼빈 자신의 말을 인용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입니다. “그 자체가 극히 복잡한 주제인 예정에 관한 토론은 인간의 호기심으로 말미암아 매우 복잡해졌고 따라서 위험성을 띠게 되었다. 인간의 호기심이 하나님의 비밀 중 어느 것이나 탐지하지 못할 것이 없는 것처럼 알고 금단의 미궁 속으로 들어가거나 혹은 그 한계를 넘어 비상하는 것은 어떤 제방으로도 방지할 수 없다. 우리가 예정 문제에 대해 연구하고자 할 때는 첫째로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지혜의 가장 심오한 곳을 침임하려는 자임을 기억하여 부주의하거나 자신만만하게 난입했다가는 거기서 자기의 호기심을 만족시킬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의 한계선을 넘을 경우 오류와 실패와 타락을 피할 수 없는 곤경에 빠지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첫째로 기억해야 할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이상으로 예정에 관한 지식을 알고자 함은 통행 불가능의 도로를 보행하고 함과 어두움 가운데서 물체를 보고자 함과 같은 어리석음인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일종의 학문적 무지(無知)가 있는 어떤 주제에 과한 것들에 대하여 우리가 무지하다는 것을 조금도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우리에게 이 진리들을 해명할 의무가 없습니다. 다만 우리에게는 성경에 계시 된 대로 말하고 또한 우리의 힘이 미치는 데까지 그 말씀을 오해와 반대로부터 옹호할 의무가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이 계시하신 것은 무엇이든지 설사 우리의 이성적 사색으로써 그 깊이를 다 구명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의심할 여지가 없이 참되고 믿을만한 것이라고 확신한다면 우리가 이와 같은 깊은 진리에 대하여 알 수 있는 전부는 성령이 이런 진리들을 계시함이 적당하다고 보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상호 관련된 목적들에 대하여 무지하기 때문에 그의 조언자가 될 자격이 없습니다.
시편 기자는 “주의 판단은 신묘하나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판단을 통찰하고자 함은 마치 대양을 헤엄쳐서 건너려 함과 같은 일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법칙의 비의(秘義)를 알기에는 너무나 적은 지식의 소유자입니다.
본 주제가 중요한 만큼 자연히 우리는 깊은 경건과 주의를 가지고 이에 대한 논의를 진행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의 비의는 신중히 취급하지 않으면 안 되며 거룩한 사건에 관한 부당하고 주제넘은 사변은 피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복음을 복음 그대로 순수하게 전하려면 예정에 관한 성경의 선언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고 조금도 은닉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이 교리가 종종 불경건한 자들에 의해 왜곡되고 남용될 것을 예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경에 아무리 명백하게 가르쳐져 있을지라도 성령의 빛을 받지 못한 자들은 예를 들면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존재나 그의 예지에 관한 지리도 그의 계획이 인간 개개인의 운명을 포함한다는 도리와 같이 불합리라고 황당무개한 것으로 생각될 것입니다.
우리는 예정에 대하여 하나님이 계시하신 것만큼만 알 수 있는 동시에 계시하신 것만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입니다. 만일 그것만큼도 알아야 할 필요가 없었다면 그만큼도 계시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데까지는 주저하지 않고 따라가도 좋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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