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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의 성경해석의 두가지 전제데이빗 L.퍼켓/미국 남침례 신학교 교회사 교수

하나님아들 2020. 4. 29. 17:45

칼빈의 성경해석의 두가지 전제

데이빗 L.퍼켓/미국 남침례 신학교 교회사 교수

 

 

성경의 기자들은 당대의 사람들이 읽고 이해할 수 있는 각도에서 성경을 기록했다는 것이 칼빈의 기본적인 생각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성경의 인간적인 측면만을 보게 될 때 성경의 진면목을 절반밖에 보지 못하게 된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리고 이 절반 즉 인간적 측면은 다른 절반 곧 신적인 측면에 비해 덜 중요하다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칼빈에 의하면, 성경은 인간이 저술한 고대 기록들의 수집물로 간단히 치부될 수 없는 책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성령이 성경의 진정한 저자이기(Scripturarum author est)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칼빈의 성경 해석 방법론을 이해하기 위해 그의 성경관을 구성하고 있는 몇 가지 요소를 조명해 보고자한다.

칼빈에 의하면. 성경은 비록 여러 세기에 걸쳐 많은 개개인들이 집필한 다수 글들의 수집물이긴 하지만 그 신적 저작성 때문에 다른 글들에는 없는 '통일성'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칼빈은 그의 요한복음 주석에서 성경의 통일성이 함축하고 있는 한 가지 의미를 다음과 같이 도출하고 있다. "성경은, 그리스도를 발견할 목적으로 읽어야 한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성경은 구약성경을 뜻한다.' 그럼에도 한편으로 칼빈은 구약성경을 기독론적으로 해석하는 이들에 대해 대단히 비평적인 태도를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그는 어떤 근거로 그러한 기독론적 해석을 거부했는가? 성경의 통일성은 우리의 성경 해석에서 있어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 우리가 구약성경에서 그리스도를 어떤 식으로 찾아내야하는가? 이런 문제들에 관해 해답을 얻으려면 그에 앞서 성경의 통일성에 관한 칼빈의 견해를 고찰하는 일이 필요하다. 이제 칼빈이 성경해석의 전제로 삼았던 두 가지 내용 즉, '성경의 이중 저작성'과 '성경의 통일성' 을 살펴보겠다.

I.성경의 이중적 저작성
인간 기자를 성경의 저자로 봄과 동시에 성령을 성경의 저자로 간주할 때, 다음과 같이 허다한 문제가 발생한다. 성경의 내용은 누가 정한 것인가? 누가 그 내용을 지금의 순서로 배열했는가? 본문의 단어는 누가 선정했는가? 그리고 가장 중요한 문제로, 성경의 해석자가 성령과 인간 저자의 의도 중 누구의 의도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가? 본 단락에서는 이런 문제 각각에 대한 칼빈의 답변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1.성경의 신적 측면
칼빈은 디모데후서 3장 16절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의 주석에서, 성경의 신적 영감에 관한 그의 견해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바울)는 성경의 권위를 주장하기 위해 그것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고 가르친다. 사실이 그럴 경우 인간은 외경심을 가지고 성경을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이 원리야말로 우리의 종교를 다른 모든 종교와 구별해주는 것으로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에게 자기의 말씀을 전해주셨음을 알고 또 선지자들이 스스로가 말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기관 (spiritus sancti organa)이 되어 하늘로부터 전하도록 위탁받은 것만 말했음을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으로부터 뭔가 유익을 얻기 원하는 자들은 모두, 먼저 이 사실을 일정한 원리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곧 물법과 선지자가 인간의 뜻대로 전해진 가르침이거나 인간의 마음에서 나온 가르침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 '구술된' (spiritu sancto dictatam)가르침이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모세와 선지자들로부터 받은 그 내용은 그들이 분별없이 닥치는 대로 발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극을 받아 말한 것이다. 그들은 여호와의 입이 자신들을 통해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증언했다... 우리는 하나님께 드리는 바와 똑같은 존경심을 성경에 대해 표해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의 유일한 원천은 하나님이며 인간에게서 기원된 것은 성경과 전혀 혼합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에 권위가 있는 것은, 성경이 하나님께 근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칼빈은 이 점을 최대한 부각시키고자 노력한다. 성경은 성령의 도구였던 선지자들에게서 말미암은 것이다. 성경은 "성령에 의해 구술되었다." 성경은 "인간에게서 기원된 것과 전혀 혼합되어 있지 않다"는 등등. (성경의 영감에 대해 칼빈이 직접 글을 쓴 적은 없으나, 주석서와 기타 여러 글들에서 성경의 영감성과 무오성을 유추해낼 수 있다.)


칼빈이 성경 본문의 생성에서 하나님의 역할이 어떠했는지를 강조할 때 가장 빈번하게 사용한 용어는 '구술하다' (dictare)이다. 요한복음 주석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복음서 기자들에게 그들이 기록해야 할것을 구술하심으로써 각자가자기 고유의 역할을 하는 한편, 전체가 하나의 완전한 몸을 형성하도록"했다 (Comm.John. theme).구약성경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런 것들에 역사가 덧붙여졌고, 또한 선지자들의 수고가 덧붙여졌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성령의 구술 아래 저술되었다." (Inst.IV.viii.6). '다니엘은자신의 자유 재량으로 말한 것이 아니다. 그가 발언한 것은 무엇이든 성령에 의해 구술된 것이다' (Comm.Dan. Pref.). 모세가 "자신의 미덕을 자랑스럽게 기리고자 하는 어떤 의도"를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름 아닌 "성령께서 우리에게 유익한 것을 구술하셨던 것이다. 말하자면 그것을 그의 입에 암시해주었다고 할 수 있다" (Comm. Ex. 3:1). "자기 종에게 하나님이 구술하신 말들이 예레미야의 말이라 지칭되었다. 그러나 바로 말하자면 그 말들은 인간의 말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필멸(必減)의 존재인 인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유일하신 참 하나님에게서 나왔기 때문이다" (Comm.Jer.36:18)


칼빈은 또한 다른 표현들을 사용하여 이것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개념을 전달한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들의 입술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의 입이다" (Comm.lPeter 1:25). 칼빈은 사도들을 "확실하고 진정한 성령의 대서자들"이라 부른다 (Inst..viii.9). 이처럼 칼빈은 성령을, 성경 본문의 생성에 아주 밀접하게 개입시키고 있으므로 폴스트먼은 이에 관해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칼빈에게 있어서는 성경을 성령의 저술이라고 말하는 것이, 직접 편을 잡았던 인간들의 산물이라고 생각하는 것만큼 쉬운 일이었다. 아니 어찌면 더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HJackson Forstman, Word.and spirit, P. 50). 칼빈은 다양한 용어를 두루 사용해 가며, 하나님의 성령을 성경의 저자로 간주해야한다고 거듭 주장한다 (Inst. I .ix.2).

2.성경의 인간적 측면
칼빈은 영감의 방식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정확하게 피력한 적이 없다. 그러나 확실한 사실은, 성경의 영감이 인간 기자들의 개성을 말살한 채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가 상상한 영감의 방식은 결코 기계적인 것이 아니었다. 족장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계시를 논하면서 칼빈은 그들이 사고하는 한 인간으로서 계시를 받았음을 분명하게 암시하고 있다. "의심할 여지 없이, 그들의 마음속에는 확고부동하고 확실한 교리가 새겨져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이 배운 바가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고 확신했으며 그렇게 이해했다" (Inst. I.iv.2). 성경의 기자들은 성경을 배열, 서술하면서 정신적인 기능을 원래 상태 그대로 유지했다고 칼빈은 믿었다. 그는 시편 기자들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그들이 '마음속 깊은 곳의 생각과 감정을 모두 열어두었다'고 말한다 (Comm. Pss.pref.). 이런 표현은 인간 마음의 개입을 분명하게 암시해 주는 문구이다.


성경 본문의 문체에 대한 칼빈의 글에는, 인간 저자들의 마음이 성경을 기록할 때에 평소 그대로 활동했다는 그의 신념이 반영되어 있다. 그는 문체의 차이가, 성경의 각기 다른 부분을 상이한 여러 저자가 기록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고 보았다. 또한 칼빈은, 진정한 바울의 것이라고 그가 믿었던 서신들과 히브리서 사이에는 문체의 차이가 있다고 보아, 히브리서가 바울의 저작이라는 설을 거부했다. "가르침의 방식과 문체에서, 바울이 '히브리서의'저자가 아니라는 점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Comm. Heb. theme). 칼빈은 베드로후서에서 "진정한 베드로의 어법"을 찾을 수 없다는 이유로사도 베드로가 과연 그 책을 썼는가에 대해서도 의심 했다 (Comm, 2 Peter, theme).
칼빈은 선지서들 사이에 매우 중요한 문체의 차이가 나타난다는 점을 가끔 지적한다.

나는 일부 선지자들의 표현 방식이 우아하고 명쾌하며 탁월하기까지 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므로 그들의 웅변은 일반 저술가들에 비해 조금도 손색이 없다. 성령께서는 이러한 사례들을 통해 비록 다른 곳에서 거칠고 세련되지 못한 문체를 사용하셨다 하더라도, 자신이 웅변력이 부족하지는 않다는 점을 보여주고자 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그 언어가 감미롭고 유쾌하게 흐르는 다윗의 글이나 이사야서 등을 읽든, 아니면 그 문체가 보다 거칠고 투박한 맛을 풍기는 목자 아모스, 예레미야, 스가랴의 글을 읽든, 내가 지금까지 말한 성령의 그 장엄하심은 도처에 분명하게 나타날 것이다. (Inst. I .viii.2)

칼빈은 또한 선지자 에스겔의 장황한 문체가 다른 선지자들의 문체만큼 호소력이 없다고 보았다. 에스겔에게 세련된 맛이 없는 것은 그의 배경 탓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피 언어는 분명히 어떤 이국적인 색채를 띠고 있다. 이 선지자는 결코 우아하고 세련된 문체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어떤 고국적인 소박한 어법에 익숙해 있었으므로 그 언어를 스스럼없이 그대로 표현했을 뿐이다' (Comm. Ezek. 2:3). 다른 곳에서도 칼빈은 에스겔의 장황한 문체가 그의 외국 생활에 일부 원인이 있다는 자신의 견해를 재확인한다. 포로기에 백성들의 언어는 순수성이 상실되었으며 외국어의 요소들이 거기에 섞여들어 왔다는 것이다. 게다가 에스겔의 거친 문체는 활기없고 무감각한 백성들에게 적합한 것이었다고 그는 말한다 (Comm. Ezek.12:4-6).


이러한 점들에 비추어볼 때 칼빈이. 문체의 상이성을, 주로 저자가 받은 개인적인 교육, 저자가 살았던 시대. 백성들의 요망사항 등등의 자연적인 산물로 이해했다는 것이 분명하다. 성경의 영감이라는 말이 그 무엇을 의미하든지 간에. 그 안에 개개 저자의 독특한 문체를 부정한다는 뜻이 있을 수는 없다.


인간 기자들이 성경에 각인한 흔적은 비단 문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칼빈은 이 기자들의 개성 전체가 개입되었다는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 칼빈은 이를 바울의 빌레몬서주석 서론에서 이렇게 말한다. "바울의 정신이 지닌 숭고한 특질은, 보다 중요한 그의 저술들에서 한층 더 훌륭하게 나타나고 있지만 역시 이 서신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Comm. Phil. theme). 만일 성령의 영감이 저자의 개성에 미치는 영향을 부정하는 것이라면. 칼빈의 이러한 진술은 무의미할 것이다
칼빈에 의하면, 성경 기자들의 모든 글이 동일하게 숭고한 정신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시편 기자의 일부 감정적 폭발현상들을 보면서 칼빈은 그의 훌륭한 해석학적 승씨를 발회해, 그러한 정서가 어떻게 성경 안에 들어갈 수 있는가라는 문제에 관해 납득할만한 이유를 제시하고자 애쓴다.


칼빈은 시편 88편 14절 ("여호와여 어찌하여 나의 영혼을 버리시며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내게 숨기시나이'), 89편 46절 ("여호와여 언제까지니이까 스스로 영원히 숨기시리이까 주의 노가 언제까지 불붙듯하시겠나이까')에서 그러한 부적절한 감정이 표현되고 있다고 보았다. 칼빈은 약간 망설이는듯하면서도, 시편 88편 14절은 암묵적인 기도를 포함하고 있고 시편 89편 46절은 밀음을 수반하고 있다는 이유로, 시편 기자의 이런 감정 분출을 묵과하고 있다. 그러나 시편 39편 14절 ("내가 떠나 없어지기 전에 내가 즐거움을 알 수 있도록 내게서 눈길을 돌리소서 ," RSV)에 나타나는 하나님을 향한 다윗의 극심한 불청을 설명하는 데는 칼빈도 아주 애를 먹는다. '본 시편의 이 끝맺음 구절은 그 '시편 기자'가 육에 따라 경험했었던 불안감 및 죄악적인 감정과 연결되어 있다.' 즉 칼빈은 이 본문을 만족할 만하게 설명하기가 어렵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칼빈은 다윗의 이 불평에 대해 '신앙의 달콤한 맛이 그다지 배어있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나 다윗의 이런 감정 분출이 전적으로 나쁜 것은 아니다. 다윗이 완전히 부정적인 모습을 보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윗의 말 뜻은, "하나님께서 분노를 중단하시기 전에는 자신이 건강을 회복할 가망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신앙적이다"라고 하겠다. 하지만 칼빈은 자신의 이런 설명을 그다지 만족스럽게 생각하지 않은 것 같다. 폴스트먼의 견해에 의하면, 칼빈은 비록 이런 설명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더라도 어떤 복합적인 인과관계의 원리 안에서 사용할 수 있는. 모종의 해답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이 원리는 "주로 그가 악의 문제를 논하면서 도출해낸 것이지만 여기에서도 역시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폴스트먼은, 이 때문에 칼빈이 어쩌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설사다윗의 말이 부적절했다하더라도, 다윗을 통해 말씀하시고 다윗의 과장된 표현을 사용하신 성령은 전적으로 가납할 만한 어떤 의도를 가지고 계셨다' (Forstman, Word and spitit, 52). 바로 이어지는 문맥이 이러한 폴스트먼의 설명을 어느 정도 뒷받침해준다. 거기에서 칼빈은 '하나님이 다윗의 절제하지 못하는 언어를 통해 자기 백성에게 유익한 무언가를 전해주고자 하셨을 수도 있다' 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윗은 불안하고 괴로운 마음 상태의 영향으로 이런 말을 했지만, 그의 언어 속에는 매우 유익한 어떤 교훈이 들어 있다. 그 교훈이란, 우리가 온갖 근심을 딛고 일어서려면, 덧없는 우리의 일생이 손바닥 넓이 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회상하는 것이 제일 좋은 치유책이라는 것이다. (Comm. Ps. 39: 6)

칼빈은 위의 말에서 . 그 구절 속에 별개의 두가지 목적 혹은 두개의 의도.즉 인간의 의도와 하나님의 의도라는 개념을 암시하고 있는 것인가? 만일 그렇다면 여기에서 하나의 중요한 해석학적 문제가 제기된다. 성경의 해석자는 누구의 의도에 관심을 두어야 하는가? 인간 필자의 의도에 두어야 하는가 아니면 성령의 의도에 두어야하는가? 이 문제를 칼빈이 조직적으로 다룬 적은 없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즉 칼빈은 인간 기자들의 문체와 개성이, 성경에 그들의 흔적을 남겨 놓았다고 믿었다는 사실이다.

3.내용의 선정과 배열
칼빈은, 성령이 성경의 저작에 있어서 성경 본문에 무엇을 포함시킬 것인가라는 실제적인 선정의 문제에까지 개입하셨다고 보았다. 이 점은 모세 오경을 다룬 그의 글 가운데서 두루 엿보인다. 창세기 5장 강해에서 칼빈은 자료의 선정이,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해서 어떤 자료를 선택하지 않기로 한 결정이. 신적인 결정에 따른 것이라고 보았다. 특기할 만한 큰 사건들이 기록되지 않고 간과되었다는 사실은, 성령의 의도(consilium spiritus)라고 밖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Comm. Gen. 5:1).칼빈은 창세기 17장에서 모세가 아브람의 생애에 대해 13년 이상의 기록을 생략했다는 점에 주목한다. 칼빈은 말한다. 우리가 이러한 생략 현상을.기억할 만한 일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는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하나님의 성령께서 자신의 뜻에 따라, 알려야 할 필요성이 지대한 것들만을 선택하셨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나타났다고 보아야 한다.(Comm.Gen.17:1)아브람의 생애에 대해 십년 이상의 기록이 빠져 있다는 것은 모세 혼자만의 결정으로 빚어진 결과가 아니다. 성령은 그 기간에 무슨일이 일어났는지 후손에게 알릴필요가 없다고 보았다.


칼빈은 창세기 24장을 다루면서 . 이삭의 구혼과 결혼에 관한 상세한 기록도 (이것은 사소해 보이는 정보이지만)하나넘의 성령께 기인한 것이라고 말한다(Comm. Gen.24:1).칼빈은 「모세의 뒷 저서 네 권의 조화(Harmony of the Last Four Books of Moses)라는 책에서. 자료의 배열이 성령께 원인이 있는가라는 문제를 다룬다. 거기에서 칼빈은 그 자신이 "성령께서 친히 우리에게 정해 주신 순곡를 변경함으로써 성령이 배열해 놓으신 것을 개선하고자 한다는 타인의 비난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해명하고 있다. 그는 자신을 변호하면서. 모세에게 구술된 그 우수한 배열 순서를 자기가 개선하려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는 한편 그러한 행위는 '신성모독에 흡사한 무모한 짓"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Harmony of the Last Four Books of Moses, pref.)이러한 진술로 보건대, 칼빈은 확실히 출애굽기부터 신명기까지의 내용 배열이 성령께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생각했음에 들럼없다.

4 본문의 단어 선택
성경의 저작에 있어서 성령의 개입은 자료의 선정과 배열을 넘어 본문의 단어 선정 자체에까지 미친다. 성령은 "언어의 최고숙달자"이다(Comm.Dan.4:35). 다니엘은 “하나님이 하늘의 군사에게든지, 땅의 거민에게든지 자기 뜻대로 행하신다'는 느부갓네살의 고백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단4:35).칼빈은 이 구절을주해하면서 , 하나님이 "절제나 공평 혹은 공의의 규범을 전혀 갖고 있지 않은 것처럼" 원하는 대로 행동하신다는 것이, 어떤 면에서는 다소 귀에 거슬릴 수도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면서도 또 한편으로 칼빈은 이 구절의 정확한 언어 선정이 인간 결정 이상의 무언가와 관련되어 있다고 역설한다.

이 문장으로부터 우리는 세상에 아무 일도 우연히 발생하지는 않는다는 사실과 세상의 모든 사건이 하나님의 은밀한 의도에 따라 발생한다는 사실을 추측해낼 수 있다. 언어의 최고 숙달자이신 성령은 여기에서 두 가지 것을 표현하고 계신다. 첫째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이며 다음으로는 하나님이 자신의 뜻대로 행하시는 일이다. (Comm. Dan.4:35)

칼빈은, 하나님이 자신의 절대적인 권능으로 부당하게 행동하실 수도 있다는 (심지어는 하나님이 죄의 조성자이실지도 모른다는)비난에 맞서 하나님의 입장을 변호하면서, 이 구절의 표현이 성령께서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시기 위해 택한 것이라는 소신을 피력한다.
칼빈은 시편 105편에 대한 강해에서도 이와 유사한 경향의 추론을 전개한다. 이 시편에서 기자는 하나님이 애굽인들의 마음을 돌려 하나님의 백성을 미워하게 하셨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동사의 능동형은 지나치게 가혹하다고 생각하여 이를 수동적으로 해석하는 견해에 대해, 칼빈은 다음과 같이 반대 입장을 표명한다.

그러한 교리가 귀에 거슬리는 이들이 있다면, 여기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성령이 명쾌하게 확언하고 계시는 한 가지 사실을 잘 살펴보아야 하리라. 그것은 다름 아니라, 인간의 마음이 어떤 은밀한 충동에 의해 이리저리 내몰린다는 사실 (잠 21:1), 그리하여 인간이 오로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무슨 일을 행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보다시피, 성령이 여기에서 확언하고 계시는 것은, 애굽인들이 너무나 악하여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을 돌려 하나님의 백성을 미워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중도파는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이 진술을 회피하거나 희석시키려고 한다. 즉,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변하게 했다는 것이(25절) 마음의 변화를 허용했다는 뜻이라고 해석하거나, 혹은 애굽인들이 너무 악해 이스라엘을 미워하려고 할 때, 다시 말해 그것이 우연히 하나님을 가로막게 되자 하나님께서 그들의 악의를 이용하셨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마치 성령께서 언어 구사력이 부족하여 어떤 말을 하려고 하다가 엉뚱한 의미를 전하게 되었다는 것처럼 말이다. (Comm. Ps. 105:25)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 점을 주목해볼 수 있다. 첫째, 칼빈은 성령이 아주 특정한 사실을 확언하시는 것으로 보았다는 점이다.
즉, "애굽인들이 너무 악했으므로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을 변화시켜 하나님의 백성을 미워하게 하셨고 단언하였다. 둘째로 칼빈은,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마음을 적극적으로 변화시켜 악을 행하게 하신다는 사상'이 혹자들에게는 귀에 거슬릴 수도 있으나, 동사를 수동태처럼 해석함으로써 본문의 의미를 희석시켜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성령은 자신이 원하는 바로 그 내용을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해 자기가 원하는 언어를 사용하실 수 있다. 성령이 여기에서 어떤 수동적인 개념을 전달하기 원했다면 확실히 수동태 동사를사용하실 수 있었을 것이다.


칼빈은 성경 본문의 표현 자체가 성령께서 깊이 개입하심으로 만들어졌다는사실을 어디에서나 확증하고 있다. 그는 시편 129편 3절(“밭 가는자가 내 등에 갈아 그 고랑을 길게 내었도다”)에 대한 주석에서 매우 구체적인 이런 비유법이 성령의 작용에 의해 나온 것이라고 보았다. “성령은 우리를 경작할 수있는 전답에 비유하고 있는데, 이것은 아주 적절한 비유라고 할 수 있다”(Comm Ps.129:3).성경에서 발견되는 많은 기도의 형태들도 역시 성령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이 말씀에서 성령은 기도의 한 형태를 구술하고 계신다'(Comm.Ps. 44:19).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주기도문을 논하면서도, 성경에서 발견되는 기도들이 성령께로부터 나온것임을 강조한다. “성경 곳곳에서 우리는 많은 기도문들을 볼 수 있다. 이런 기도들은 사용 언어에 있어서 주기도문과 아주 다르지만 역시 같은 성령께서 작성한것이다”(Insc.Ⅲ.xx.49).성령은 성경 기도문들의 형태와 작문에 이와 같이 개입하셨다. 마치 성령께서 직접 이 기도문들을 작성한 것처럼 말이다. 창세기 39장6절 강해에서 칼빈은 그 구절의 언어(“말의 형태")가 모세와성령, 이 둘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보았다. 칼빈은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하는 기사중 “그 주인의 처가 요셉에게 눈짓했다”는 문장에 주목하면서, 성령은 이와 같은 언어 형식을 통해 모든 여성들에게 순결한 마음으로 순결하게 행동해야 할것을 충고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또한 그말들이 모세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모세는 불결하고 방탕한 추파를 묘사하고 있다” (Comm.Gen.39:6).


나아가 칼빈은 오바댜서를 강해하면서, 성경의 기록에 있어 인간의 역할과 하나님의 역할이 맺고 있는 밀접한 관계를 강조한다. “앞으로 우리가 살펴보겠지만, 예레미야와 이 선지자는 동일한 생각과 거의 동일한 말을 사용했다.” 이것은 단순히, 두 선지자가 우연히도 유사한 언어를 사용했다는 문제가 아니다. 칼빈은 이 유사 구절들의 어법이 성령께 기인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성령은 분명 서로 다른 말로 동일한 것들을 표현하실 수도 있었겠지만 이 두 증언을 결합함으로써 보다 큰 신뢰를 얻게 하셨던 것이다” (Comm. Obad.,pref.).

5.성령의 의도에 대한 해석학적 관심
칼빈은 본문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기 원했기 때문에, 그리고 성경이 신적인 측면과 인간적인 측면을 공유하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자연히 다음과 같은 의문이 생겨났다. '인간저자의 의도가 진정한 의미인가아니면 성령의 의도가 진정한 의미인가? 맥네일(McNeill)은 칼빈이 관적으로 성경 각권의 인간 저자를 염두에 두고 각 구절에서 인간 저자의 의도와 취지를 염두에 둔다"고 주장했다(McNeill, "Significance of the Word of God for Calvin," 139). 칼빈의 저서를 출간한 크리스핀(Jean Crispin)은 칼빈이 진정한 의미로 여긴 것은 바로 성령의 뜻에 부합하는 것이었다'고 지적한다. 칼빈은 어디에서든 성령의 의도를 펼쳐 보이면서, 성령의 진정한 의미를 제시한다…."(Co-mm.Minor Prophets, Jean Cripen’s pref.).


이같은 크리스핀의 진술은 ‘해석자로서 칼빈이 지녔던 목표' 를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런 사실은. 칼빈의 일부 주해들에서 엿볼 수 있다. 칼빈은 성령이 의도하신 의미를 우리가 발견하기 전까지는 본문을바르게 이해하지 못한다고 보았다. 실제로 칼빈은, 바울이 로마서 3장 13절(“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에서 시편 5편의 구절을 인용한 것에 대해 변호하면서, 바울이 이 구절의 관련 범주를 유대인들을 넘어 모든 인류에게로 확대한 것이 옳았다고 주장한다. 즉 바울의 이런 해석은 성령의 마음 내지는 의도를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정당하다는 것이다(Comm.Ps.5:9). 다니엘 12장 4절 주석에서 칼빈은 모종의 해석을 거부하면서. “내가 생각할 때는 성령이 여기에서 다른 의도를 가지고 계신것 같다”고 진술한다. 또 민수기 14장 11절에 대한 주해에서 칼빈은, 제롬이 선택한 벌게이트 역본의 단어가 본문의 진정한 의미 곧 하나님의 의도에 가깝다는 이유로, 이 벌게이트역의 읽기에 찬성의 뜻을 표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참 뜻에 만족하도록 하자”(Comm.Num. 14:11).


한편,성경 해석의 과업을 수행할때는 성경에 기록된 어떤 정보를 하나님이 무슨 의도로 주셨는지 물어보아야 한다. 레위기 11장 13절에 대한 해석에서, 칼빈은 해석자가 언제나 하나님의 의도를 고려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칼빈의 이 지적은, 자기 백성에게 그런 율법 항목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해석자가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뜻이다(만일 이런 이해가 없을 경우에는, 율법에 대한 참된 이해를 할 수 없다).이 경우 하나님의 의도는 이 말씀의 문자적인 의미를 초월하고 있다고 칼빈은 생각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해석이 단어들 그자체의 한계를 어느 정도나 넘어가야 할 것인지 물어 보아야 한다. 그래야만 그 해석은 입법자의 순수하고 진정한 의미를 충실하게 옮긴 해석이 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 해석은, 인간의 그럴듯한 설명을 하나님의 율법에 추가한 하나의 부록이 되고 말 것이다‥‥ 나는, 계명을 주신 이유에 주의를 기울이는 이것이 최선의 규범이라고 본다. 즉 우리는 각 계명에 대해 왜 그 계명이 우리에게 주어졌는지를 숙고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Inst, Ⅱ .viii.8)

다니엘 7장의 강의 서두에서 칼빈은 그장에 기술된 환상들을 이해하기 원하는 자신의 젊은 학도들에게 모종의 지침을 제시한다. “성령의 의도(spiritus sancti consilium)를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 문단에서 성령의 의도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있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구원의 소망을 제공하는 데 있었다(Comm.Dan.7:1,2).또한 다니엘 11장의 강해에서도 칼빈은 "우리가 언제나 성령의 의도를 확인하려고 애써야 한다"고 역설한다. 다니엘 11장에서는 극심한 환난을 당하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격려를 주는 것이 성령의 의도였다(Comm. Dan 11:6).


예레미야 10장에 대한 주석에서 칼빈은 이렇게 주장한다. “한일 우리가 기록된 내용을 읽고 무언가 유익을 얻고자 한다면 성령께서 의도하신 바를 숙고해야 한다”(Comm.Jer. 10:23).이런 각각의 사례에서 본문을 바르게 적용하느냐 하지 못하느냐의 여부는 ‘성령의 의도에 대한 이해’ 에 달려 있다.

6. 인간 저자의 의도에 대한 해석학적 관심
칼빈이 성령의 의도에 관심을 두고 이를 강조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가 인간 저자의 의도를 무시한 것은 아니다. 구약성경 주석 곳곳에서 칼빈은 해석자의 역할이 선지자의 의도를 설명하는데 있다고 단언한다. 시편 8편 주석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지금까지 충실한 해석자로서의 본분을 이행하면서 선지자의 마음을 열어 보였다"(Comm.Ps.8:2). 칼빈은 그리내우스(Simon Grynaeus)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자기가 해석하고자 하는 성경 본문 저자의 마음을 열어 보이는 것이 해석자의 거의 유일한 과업”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해석자가 “원작자의 의도에서 벗어나 그 한계를 넘어 독자들을 이끌게 되면, 그만큼 자기 목적을 이루지 못하거나 아니면 적어도(넘어서는 안되는)자기 한계를 벗어나게 된다”고 한다(Calvin to Grynaeus). 칼빈은 다른 해석자들이 인간 저자의 의도를 고려하지 못하고 있음을자주 책망한다. 아모스6장 10절에 대한 두가지 해석을 검토하면서 그 두 해석을 다 거부하고 있는데, 이유는 이렇다.“ 내가 보기에 선지자의 의도는 다른 데 있는것 같다. 해석자들은 이것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했다.”


또 칼빈은 나훔 1장9절의, “재난이 다시(두 번째로)일어나지 아니하리라”라는 구절이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두 번 형벌하시지 않으며, 진노를 발하는 데 있어서도 도를 넘지 않으신다” 는 의미로 잘못 이해되어 왔음을 지적한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이 해석은 “선지자의 마음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저자의 의도에 따라 본문을 해석하고자 한 칼빈의 욕구가 가장 뚜렷하게 반영된 곳은 아마도 그의 호세아 강해일 것이다. 칼빈은 거기에서, 예전의 해석자들이 호세아 선지자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은 그들의 해석을 따를 수 없다고 분명하게 지적했다. 호세아 6장 3절(“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은, ‘복음을 통해 우리에게 완벽하게 밝혀진 교리, 즉 하나님이 어떤 살아 있는 형상 속에 자신을 나타내듯 자기 아들 안에 자신을 계시하셨다는 그 교리’의 예언이라고 종종 해석되었다.그러나 칼빈은 이것이 지나치게 신비적인 해석이라고 보았다. “선지자의 의도를 따르는것으로 충분하다.” 두 장뒤인 호세아 8장에서도 해석자들은 “선지자의 의도”를 충분히 고려하지 못함으로써 해석에서 다시 한번 잘못을 범했다고 지적한다. 그 해석들은 “선지자의 마음에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Comm. Hos. 8:4).칼빈은 호세아 10장 1절에 대해서도 한가지 해석을 거부하면서 “이 해석자들이 선지자의 마음을 이해한 것 같지 않다”고 말한다. 호세아 13장에 대한 강해에서도 그는 “선지자의 마음에서 떠난 해석자들을 책망한다”(Comm.Hos.13:1).


인간 저자의 의도에 대한 칼빈의 관심이 물론 호세아서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 관심은 모세 오경의 첫 책으로부터 구약선지서들의 마지막까지 이르고 있다. 창세기 28장에는 야곱이 돌기둥(베게)에 기름을 붓는 행위가 나온다. 칼빈은 이 행위에 대한 우화적 해석, 곧 지나치게 신비적인 기독교적 해석에 의문을 제기한다. 이 해석에 의하면, 야곱의 돌 기둥은 “그리스도의 상징물이다. 온갖 성령의 은혜가 이 기름처럼 그리스도께 쏟아부어진다.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의 충만한 데서 은혜를 받을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러나 칼빈은 과연 그런 의미가 “모세나 야곱의 마음에 들어”있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Comm.Gen.28:18).또한 시편 75편 3절에 대한 한 가지 해석도, 결코 선지자의 마음 속에 그런 의도가 들어있지 않았을 것이라며 거부한다. 또 시편 89편 11절에 대한 한가지 해석은, “선지자의 마음에서 너무나 동떨어진 듯하다"며 거부한다. 아모스 5장에 대한 강해에서 칼빈은 선지자의 의도가, 히브리 단어 “기윤”(암 5:26)의 의미를 찾아내는데 있어서 지배적인 요인이라고 보았다. 일부 해석가들은 이 단어가 어떤 케이크를 의미 한다고 보았다. 혹자들은 이를 고유명사로 간주했다. 반면 어떤 이들은 이 단어를 문자적 의미 그대로 해석했다. 첫 번째 해석에 반대하면서 칼빈은, 이를 수용한 자들이 “선지자의 의도”에 주목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말라기 4장도 여태껏 명쾌하고 충분하게 설명되지 못한 것은, “해석자들이 말라기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했거나 그 시대의 환경을 고려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Comm.Ma1.4:4,칼빈이 말한 바에 따르면, 해석에는 세 가지 순서가 있다. 첫째는 무엇보다도 선지자의 의도를 받드는 것이고, 둘째는 그 시대의 상황을 고려하는 것이며, 셋째는 상징(signs)과 그 상징이 예시된 사물(things signified)사이의 유비(analogy)를 따르는 것이다). 진정한 의미는 원래 선지자가 의도했던 의미라는 것이다.

7.하나님의 의도와 인간의 의도, 이 양자의 관계
칼빈은 성령의 의도와 인간 저자의 의도가 상호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믿었다. 스가랴 주석에서 칼빈은. “선지자의 마음과 의도에 어긋나는 어떤 다른 의미들”을 찾을 하등의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Comm.Zech.7:l4). 레위기 11장 13절에 대한 주해에서는, 해석자가 언제나 하나님의 의도를 고려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칼빈은 그러한 두 가지 주장 사이에 긴장 관계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리고 인간의 의향과 하나님의 의향, 이 양자의 구별을 허용하기 싫어했다. 선지자의 의도와는 전혀다른, 하나님이 뜻하신 보다 완벽한 의미는 존재하지 않는 듯하다는 것이다(G. R.Evanns, “Sensus Plenior,” in The Westmiinster Dictionary of Cristian Theology)


선지자의 의도와 성령의 의도를 연결하고 있는 한가지 좋은 예가 요엘 2장 28절에 대한 칼빈의 주해에서 발견된다. 이 구절("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주리니")은 오순절 날 성령 강림으로 성취된 하나의 예언으로서 베드로의 설교(행 2장)에 인용되고 있다. 모든 사람('한민," "모든육체")이 실제로 그 은사를 나누어 받지는 않았기 때문에, 칼빈은 이를 과장법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보았다. 자신의 해석을 변호하는 과정에서 칼빈은 이 과장법이 첫째로는 선지자로부터, 다음으로는 히나님의 성령으로부터 지었다고 말한다.

우리가 또한 기억하지 않으면 안될 것은 선지자가 과장법에 의해 하나님의 은혜를 극구 칭송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의 마음은 너무나도 어리석고 둔감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과장된 어법으로 표현되지 않으면 우리가 결코 그 은혜를 충분히 파악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사실 우리가 바른 안목으로 본다면 그런 과장법 자체는 지나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그렇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사들을 백분의 일도 이해하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목전에 이런 은사들을 제시하실 때는, 우리의 생각을 고양시키기 위해 어떤 칭송을 덧붙이는 것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무감각 때문에, 정확히 말해 우리의 부주의 때문에 하나님의 성령은 과장하여 말씀하실 수밖에 없었다.(Comm.Joel 2:28)

칼빈이 이사야 34장 주석에서 사용하고 있는 어법을 살펴보면, 어떤 말씀을 성령의 말로 간주하는 것과 선지자의 말로 간주하는 것, 이 양자간에 그다지 차이를 두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ꡒ이 구절들에서 이사야가 에돔 족속에 대해 경고한 내용을, 성령은 다른 곳에서 아합의 집에 대해 선언하신다. 칼빈은 여기에서 한 문단의 경고를 성령으로부터 기원된 것으로 보고, 다른 문단의 거의 동일한 경고를 선지자에게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있다(Comm.Isa.34:11).


야곱이 라헬을 사랑하여 레아를 거부하는 창세기 29장의 사건을 논하면서 칼빈은 성경 저작에서 성령의 사역과 인간 저자의 사역 간에 존재하는 밀접한 관계를 조명한다. 칼빈은 이렇게 말했다. “모세는 레아가미움을 받았다고 단언하고 있다(31절, 한글개역. ‘레아에게 총이 없음’).” 그리고 몇 줄뒤에서 “성령은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하는자들에 대해 ‘그들이 미움을 받는다’라고 표현하신다.” 즉 모세의 선언은 그자신의 단언으로 간주할 수도 있고 성령의 단언으로 간주할 수도 있다는 것이, 칼빈의 이 말에서 암시되고 있는것 같다.
한층 더 분명한 곳은 예레미야 17장 12절에 대한 칼빈의 주석이다. 거기에서 칼빈은 선지자의 의도와 성령의 의도를 동일시하는 듯한 표현을 사용한다. “우리는 선지자의 의도를 이해해야 한다. 성령은 때로 사람들의 마음을 고양시켜 확신을 심어주기 위해, 혹은 그 마음을 일깨워 찬양의 제사를 드리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의 축복을 기린다.”


칼빈은 몇몇 대목에서, 어떤 한가지 진술을 인간 저자의 말로 간주한 다음, 자기 말을 수정하여 그 진술을 다시 성령께로 귀착시키고 있다. 확실히 이런 대목들은, 성경의 인간적 측면과 신적인 측면 간에 밀접한 관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그가 예시해주는, 대단히 흥미로운 사례들이라 하겠다. 시편 87편에 대한 해석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선지자의 의도를 고려하지 않으면 안된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해 선지자의 입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성령의 의중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된다. “칼빈은 여기에서 선지자의 의도와 성령의 의도가, 사실상 양자를 서로 바꾸어 말할 수 있을만큼 아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의미에서 칼빈의 이 구절은 대단히 의의가 깊다고 하겠다(Comm.Ps.87:3).


칼빈이 다른 주석들에서도 이와 유사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윗 인용문의 단어들은 그가 아주 신중하게 선정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창세기 주석에서 그는, 일부 불경건한 사람들이 “모세,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해 하나님의 성령이” 이삭의 구혼과 결혼 문제 같은 사소한 일들을 다루어야 하는가 하는 의아심을 나타낸다고 하면서, 그들을 신랄하게 비판했다(Comm. Gen.24:1). 에스겔 16장 4,5절 강해에서도 칼빈은 한 가지 사상을 선지자에게서 나온 것으로 묘사한 다음 자기 말을 다음과 같이 다시 수정한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선지자의 의도,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해 성령의 의도를 이해해야 한다.” 에스겔 18장 1-4절에 대한 주석에서도 그는 동일한 표현을 사용한다. “이제 우리는 선지자의 의도,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해 성령의 의도를 이해해야한다.” 칼빈은 이사야서의 말이 너무 장황하다며 이사야서를 비평하는 자들을 다음과 같이 책망했다. “선지자가,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해 하나님의 성이, 너무나 많은 말들을 사용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뭔가를 잘 모르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칼빈은 이사야 본문의 표현들 자체가 성령에게서 나온 것으로 보고 있다.
칼빈이 인간 저자의 의도와 성령이 뜻하신 바를 서로 분리시키고 싶어하지 않았다는 것은 명백하다. 성경의 저작에서 선지자의 의도와 생각과 말, 그리고 성령의 그것들이, 양자를 구분하기가 도저히 불가능할 정도로 상호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것, 이것이 칼빈의 생각이었다. 우리는 이와 같은 결론을 피하기가 어려울 것이다(이러한 칼빈의 견해는 그가 예표론을 이해할 때도 중요하게 작용했다).

II.성경의 통일성
“모든 족장들에게 주어졌던 언약은 본질적, 실질적으로, 우리의 언약(새 언약)과 아주 흡사하다. 그러므로 양자는 실제적으로 하나이자 동일한 것이다'(Inst. Ⅱ .x.2). 칼빈이, 족장들의 시대와 신약시대가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가를 묘사하면서 아마도 이보다 더 강력한 단어들을 찾기는 어려웠을 것이다.하나님의 백성은 하나이며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계시도 하나이다. 옛 언약 하의 계시와 새 언약 하의 계시는, 상호간의 공통점에 비해 그 차이점이 미미하다. 이것이 칼빈의 생각이다. 신구약의 통일성에 관한 칼빈의 견해는 이처럼 아주 강력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크레일링(Kraeling)은 칼빈의 이런 견해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칼빈은 구약 성경을 기독교화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그는 역사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접근법을 채택한다. 그는 “실제로 예수의 설교에 나타난 새로운 도덕적 가치관에 대해서는 눈을 감아버리고 예수를 모세의 바른 해석자 수준으로 격하시키고 만다” (Emil G. Kraeling, The 0ld Testament since the Reformation, London: Lutterworth Press, 1955, P.25.).
칼빈이 성경의 통일성에 대해 그처럼 강력한 견해를 표명했지만, 그것은 결코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것이 아니었다. 사실, 일부 재침례교도들이 그랬던 것처럼 신구약의 불연속성을 주장하는 것이 보다 새로운접근법이었다. 본고의 나머지 부분에서는 성경의 통일성이 칼빈의 사상에서 차지하는 두드러진 역할에 대해 고찰할 것이다.

1.신약성경과 구약성경의 관계
성경의 통일성에 관한 칼빈의 이해에 심각한 도전을 해온 것은, 재침례교도들 사이에 흔히 퍼져 있던, 구약성경이 신약성경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견해였다(WillemBalke, Calvin and the Anabaptist Radicals, trans. Willian J. Heynen, Grand Ripids: Wm. B. Eerdmans Publishing Co., pp.309-27). 그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구약시대는 육적이고 한시적이었다. 그 시대의 성도들은 그리스도인들이 공유하고 있는 것과는 다른 소망 및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구약 시대 백성의 소망은 지상적인 번영을 지향했다.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관계도 그들 자신의 선행에 의해 규정되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거의 알지 못했다. 구약성경은 유대인의 책으로서 신약성경에 비해 크게 열등하다. 확실히 기독교 시대를 사는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구약성경이 신약성경보다 가치가 훨씬 낮다."


칼빈은 이러한 결론들에 대해 일일이 반론을 제기 한다. 칼빈은 주장한다. “육적인 번영과 행복은 유대인들 앞에 제시된, 그들이 열망해야 할 목표가 아니었다.” 유대인들은 현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처럼 “불멸에의 소망 가운데로 들어가야 했다.” 구약성경의 약속들이 현재의 지상적인 삶을 지향하고 있는 듯하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로 그 약속들은 영원한 생명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신약성경의 저자들도 자신들이 제시하는 소망이 구약성경에 제시된 소망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점을 아주 분명하게 천명하고 있다. 그와같은 사실 때문에 우리는 구약의 약속들에서도 영생이 제시되고 있음을 익히 알 수 있는 것이다. 예컨대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 2절에서, 하나님이 오래 전에 선지자들을 통해 약속하신 복음과 자신의 사도적 지위를 상호 연계 시키면서, 구약성경의 메시지와 자기가 전하는 복음을 동일시하지 않았는가? 또한 로마서 3장 21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가르치는 바로 그 의, 즉 율법과는 다른 믿음의 의를. 율법과 선지자들이 증언하고 있다고 기록하지 않았는가? 칼빈은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복음의 교리가 영적인 것이고 우리로 하여금 부패하지 않는 생명을 소유하도록 해 주는 것일진대, 그 복음에 대해 약속을 받고 기별을 받았던 이들(구약 시대의 성도들)이 영혼에 대한 돌봄을 게을리 하고 등한히 하면서 어리석은 짐승들처럼 육적인 쾌락만을 추구했다고 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Inst. Ⅱ.X.3).


구약성경 주석에서 칼빈은 자신의 이런 견해를 재확언한다. 그는 구약시대의 사람들은 지상적이고 육적인 지식만을 가진 것이 아니라 확실히 불멸에의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약성경의 약속들이 지상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 약속들이 신약성경에서 한 층 더 선명하게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나넘은 지상적인 약속을 이용해, 자기 백성의 마음을 천상적인 실체로 향하게 하셨다. 지각이 뛰어난 독자라면, 구약 시대의 성도들이 지상적인 약속을 넘어 영적인 실체를 바라보았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일례로, 이삭은 창세기 27장에서 야곱을 축복하면서 지상적인 번영만을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한층 더 먼 곳을 바라보았던 것이다. “주님이 (지금은 하늘을 향해 우리를 직접 부르시고 일깨우시지만) 옛날에는 미래의 유업에 대한 소망을 그 족장들의 눈앞에 분명하게 제시하지 않으셨다. 단지 그들을 빙 돌아가게 인도하셨을 뿐이다." 하나님은 “천상적인 유업을 보여주는 거울로서, 그리고 그 유업에 대한 보증으로서 그들에게" 가나안 땅을 지정해주셨다. “그러므로 이삭이 ‘야곱에 대한 축복에서' 하나님의 현세적인 은총을 두드러지게 강조하고 있다 하더라도, 자기 아들의 소망을 이 세상에 가두어 두고자 하는 마음은 그에게 추호도 없었다.” (Comm. Gen. 27:27). 이삭은 자신이 야곱을 위해 비는 그 축복이 지상적인 유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고 이해하고 있었다. 창세기로부터 말라기에 이르기까지 하나님 백성의 소망은 지상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었다. “경건한 자들의 신음과 탄식이, 율법 하에서, 그리스도를 지향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Cornm. Mal.3:1).


하나님 백성의 마음이 지상적인 번영에 대한 약속에만 집중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구약 시대의 물리적인 제사 의식들이 그들의 신앙의 목표가 되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뜻은 그의 백성의 마음이 오로지 건물의 장엄함이나 외적 의식의 화려함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그들의 그리스도에게까지 고양(高場)되는 것이었다. 이는 그 ‘옛 체제'(율법)의 상징 속에 담겨 있던 진리가 바로 그 분안에서 드러났기 때문이다” (Comm.Ps.9:12). 구원의 근거는 구약성경이나신약성경이 똑같다. 그것은 바로, 공로없이 거저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총이다. 구원의 조건도 역시 동일하다. 그것은 바로, 중보자에 대한 믿음이다. 신구약 시대의 하나님 백성들은 한 백성이다. 양자 모두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 거저 영생을 얻었고 또 얻기 때문이다. 훗 시대들의 성도들이 구약시대를 산 하나넘의 백성을 향해 우월감을 가질 만한 근거는 없다. “그리스도 주님은 오늘날 그의 제자들에게,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함께 그들이 잔치 자리에 참석하게 될 그 '하나님의 나라’ 외에. 다른 어떤 하나님의 나라를 약속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Inst. Ⅱ.x.2).


구약성경의 을법이 신약성경의 완벽한 빛에 비추어 볼 때는 육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율법의 메시지와 신약의 메시지는 다르지 않다. 율법의 제반의식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 안에 상징적으로 담겨 있는 영적 실체를, 유대인들에게 지적해주기 위한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를 대속죄일의 규례에서 엿볼 수 있다. 대속죄일에 부정한 속죄 염소를 만진 사람은 누구든지 의식을 통해 정결해져야만 했다.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은 사람이 속죄 염소를 만짐으로써 의식(儀式)적으로 오염 되었을 경우 진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들은 이러한 사실을 숙고하면서, 필연적으로 다음과 같은 영적 교훈을 배우게 되었을 것이다. “하물며, 우리가 다른 어떤 것에 오염되어 불결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죄에 오염되어 불결해진다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간격이 얼마나 더 커지겠는가?'(Comm. Lev. 16:26) 칼빈은 주장하기를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이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의식에 참여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고 한다. 의식의 가치는, 백성이 외적인 것들에서 마음을 위로 끌어 올려 하나님께 영적인 예배를 드리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었다. 외적인 의식은, “성도들이 그것을 타고 하늘에 올라갈 수 있는 사다리” 구실을 했다(Comm.Ps.9:12). 그들이 이 옛 체제 하에서 받아야 할 메시지는,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은혜로써 구원을 제공하신다는 메시지와 결코 다른 것이 아니었다. 바로 이 모든 의식들 속에는 “ 때가 차매, 그들을 하나님과 화해시켜 줄, 그 속죄 (십자가의 속죄)의 가장 분명한 상징'이 담겨 있었다. 레위기 16장에 기록된 모세의 글은 “장차 오실 중보자의 은총을 높이 찬양하고 있다. 성도들의 마음이 오직 중보자 (그리스도)께로만 향하도록 말이다" (Comm. Lev. 16: 29).
구약 시대의 성도들도 신약 시대의 성도들 만큼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유대인들에게도 복음의 언약이 주어졌다고 성경이 말하는 이상, 그리고 그 언약의 유일한 토대가 그리스도인 이상, 누가 감히 그들을 그리스도로부터 분리해 낼 수 있겠는가? 믿음의 의(義)에 관한 교리가 그들에게도 전파되었다고 성경이 말하고 있는데, 누가 감히 거저 주어지는 구원의 선물을 그들에게서 떼어놓을 수 있겠는가?(Inst.Ⅱ.x.4)

아브라함이 그리스도의 때를 보고 기뻐했다고 주님이 친히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아브라함의 시대 이래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신앙의 핵심이었다. 그리스도는 사실 신약시대에 이르러서야 육체로 출현하셨기 때문에, 이 견해에 대해 이의가 제기될 수 있음을 칼빈도 인정한다. 그러나 ‘아브라함 언약’ 의 내용 속에는 실제로 그리스도에 대한 약속이 있다는 것이 칼빈의 주장이다.

다음과 같은 이의가 제기될 수도 있을 것이다. “왜 오래 전에 체결된 한 언약에 그리스도를 귀속시키는가? 하나님은 2천여 년 전에 아브라함을 택하셨고, 따라서 그러한 구별(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의 기원은 그리스도가 오시기 오래 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나는 이에 대해 답변한다. 하나님이 아브라함 및 그의 후손과 맺은 언약은 그리스도 안에 그 토대를 두고 있었다. 언약의 말씀은 바로 이것이기 때문이다.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라”(창 22:18). 그 언약은 아브라함의 씨 즉 그리스도 안에서 체결되었다. 그 외에 다른 어떤 방법으로 체결된 것이 아니다. 이 언약은 그리스도의 오심 이전에 이미 체결되었지만 그가 오심으로씨 확인되고 실제로 재가되었던 것이다.(Comm.Isa.42:6)

구약 시대의 백성은 하나님과 그들의 관계 근거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을 실제로 이해하고 있었는가? 이에 대해 칼빈은 그들은 그 사실을 이해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선지자들은 종종 그들의 메시지에 그리스도의 나라에 대한 예언을 덧붙였다. 구약 시대의 백성들이 슬픔에 압도당해 절망하려 할 때 선지자들은 그들에게 소망을 주기 위해 그들 앞에 그리스도를 제시했다. 백성들이 고초를 견뎌내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에 대해 아는 것이 필요했다. 다른 방법으로는, 하나님의 사랑도,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그의 부성애적 은총에 대한 증언도, 확증될 길이 없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경건한 자들은 언제나그리스도께로 마음을 향해 왔다(Comm.Jer. 31:31, 32). 구약 시대의 백성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통해 하나님의 은총을 얼마나 깊게 확신했었던가. 칼빈은 선지자들의 어떤 독특한 문투에 대해서도 이런 식으로 설명한다. 선지자들은 다른 문제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가도 돌연 이를 중단하고 그리스도에 관해 이야기하곤 한다. “이는, 그리스도안에서 확인되지 않았더라면 의심스럽고 불확실한 것으로 남아 있을 모든 약속들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Comm. Isa.42:1). 이처럼 구약 백성들에게 있어서 삶의 주된 문제는 신약 시대 백성들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이었다.


칼빈은 확실히 신구약의 여러 차이점들을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차이점들이 성경의 통일성을 결코 훼손하지 않는다고 역설한다(Inst. Ⅱ.xi.I).그 차이점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신약시대에는 구약시대보다 훈련방식이 더 고상하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복음을 “지상적인 혜택 아래” 전시하는 방법으로 자기 백성을 훈련하셨다. 하나님은 그들의 생각이 천상적인 실체를 지향하도록 도우시기 위해 지상적인 약속을 주셨다. 주님은, “현세의 축복을 베풂으로써 성도들에게 자신의 자비하심을 입증해 보이셨고, 그러한 모형과 상징을 통해 영적인 행복을 미리 예시해 주셨다. 반면에 물리적인 형벌을 통해 악인들에 대해 장차 심판이 있을 것도 입증해 보이셨다"(Inst. Ⅱ.xi.3). 옛 언약의 백성들은, 주님이 그들의 연약한 수준에 메시지를 맞추어 지상적인 수단으로 그들을 훈련하셨다는 사실에 대해 의식하지 못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스스로를 낮추사(즉.허리를 굽혀) 그와 같은 수단을 통해 자신들에게 말씀하시는 그 하나님의 선하심에 한층 더 마음이 끌렸다.
신약과 구약 간의 두 번째 차이는 이것이다. 옛 시대에는 하나님이 신적 진리에 관하여 실물 그 자체 대신에 상징이나 영상, 혹은 그림자를 사용하신 반면, 신약 성경은 “진리의 본질적 내용 그 자체를 계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Inst. II.xi.4). 칼빈은 이 사실에 관한 가르침이 히브리서에서 아주 완벽하게 전개되고 있다고 본다. 그는 사도 ‘히브리서 저자’ 는 모세 의식의 철폐가 그 의식과 관련된 종교의 파멸을 의미한다고 생각했던 자들을 논박하고 있다고 말한다. 히브리서 10장 1절에 따르면, 율법에는 “ ‘참 형상’ 이 아닌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 가 있었다. 그러므로 복음에서 밝히 드러난 보다 나은 소망을 소개하는 것이, 을법의 유일한 기능이었다. “그리스도가 오셔서 보다 완벽한 지식 획득의 가능성과 성숙의 가능성을 창출하시기까지는, 외적인 예식을 이용해 구약 시대의 성도들을 어린 아이처럼 훈련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비성숙, 이것이 구약시대 일반 신자들의 특징이었다. 그러나 그들 뿐만 아니라 선지자들도 비록 놀라운 지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마찬가지로 어린 아이 취급을 받아야 했다. 그들 가운데, “그 시대의 어둠에 영향을 받지 않을 만큼 뚜렷한 분별력을 소유한” 이는 하나도 없었다(Inst. II. xi..6). 다니엘서 주석에서 칼빈은 구약의 체제가 확실히 열등하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누구든지 그들의 온갖 행위를 모방하고자 하는 자는 오히려 고대인을 흉내내는 자 이상으로 바보가 되고 말것" 이라고 경고한다(Comm.Dan.9:1-3).


교황권의 지지자들이 교회에서 기악을 사용하며 바로 이런 류의 실수를 저질렀다. 칼빈은 이런 잘못된 로마 카톨릭의 관습이, 신약 시대 훈련 방식의 우월성을 인식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교황 제도의 지지자들은 템 시대의 사람들을 모방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칼빈은 그들의 기악사용이, “복음과함께 종료된 구약 시대의 그 상징적 예배를 어리석게 즐기는 행위"라며 이에 관해 매우 예리한 비평을 가했다. 구약 시대의 의식에서 이루어졌던 하나님에 대한 외형적인 예배는 결코 예배의 본질적인 요소가 아니었다. 지식에 결함을 안고 있던 연약한 구약 시대 사람들은, 이런 외적 수단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참된 영적 예배로 들어가는 일이 필요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가 출현하시고 교회가 성숙에 도달한 이상, 교황 제도의 지지자들 마냥 그림자의 시대로 돌아가는 것은 복음의 빛을 매장하는 짓이다(Comm.Ps.92:3).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악기들을 사용하라는 시편 81편의 명령은 새 시대에 그러한 악기들을 사용해도 좋다는 근거가 되지 못한다고, 칼빈은 주장한다. 그리스도 초림 이전의 예배에는 그림자 같은 성격이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레위인들이 율법 하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 기악을 사용한 것은 정당한 행위었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직은 어린 아이와 같이 여리고 미숙한 상태였으므로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 그러한 초보적인 것들로 자기 백성을 훈련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는 복음의 밝은 빛이 울법의 그림자를 소멸시키고, 복음이 보다 단순한 형태로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고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이상, 선지자가 자기 시대의 사람들에게만 명령한 일을 우리가 모방한다는 것은, 잘못되고 어리석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카톨릭 교도들이 이런 행위를 한다는 것은 확실히, 스스로가 흉내나 내는 원숭이임을 보여준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Comm.Ps.81:3)

교황 제도의 지지자들은 또한 옛 시대의 다른 의식들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들은 새 시대의 우월성과 명료성 앞에서 옛 시대의 외형적인 의식들이 폐지되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카톨릭의 주교들은 모세를 모방하여 사제들에게, 그리고 제단 및 기타 폐물들에, 악취나는 기름을 뿌리고 있는데, 내가 보기에 이것은 너무나도 어리석은 짓이다. 이 기름을 바르는 의식은 옛 율법의 그림자에 속한 행위로서, 그리스도의 오심과 함께 폐지되었다는 것이 아주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Comm. Ex 40:12).칼빈에 의하면, 기름을 바르는 의식은 “성령의 한 상징이라는 점을 제외하고” 는 아무런 효능이 없었다(Comm.Ps.40:9). 성령에 관한 신약성경의 분명한 가르침에 비추어 볼 때 이 외적인 의식은, 준수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구약성경의 가르침이 신약에 비해 상대적으로 불분명하다는 것은, 칼빈의 주석들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주제이다. 칼빈은 을법의 모호한 가르침을 복음의 밝은 빛과 대조시킨다(Comm.Dan.9:25). 신구약 양 체제의 차이점들 가운데 그가 가장 빈번하게 지적하는 것은 명료성의 문제이다. 모세에게 주어진 율법은 각종의식들과 지상적인 요소들로 옷을 입고 있었다. 이런 외형적인 것들은 인근 민족들과 아주 흡사했다. 그럼에도 그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영적 예배를 가르치고, 상징적이며 그림자 같은 방법을 통해 그들이 하나님을 바르게 이해하도록 이끌어준 것이었다. 나중에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보내셨다. 이들은 백성들의 이목을 그리스도의 왕국에로 이끔으로써 옛 그림자들의 실체에 대해 보다 많은 것을그들에게 가르쳤다. 마지막으로 사도들이왔다. 그들은 구약 시대 선지자들과 동일한 메시지를 전했다. 그러나 그 내용은 보다 분명했다. 사도들은 그리스도만이 약속의 성취라고 가르쳤다.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예표적 의식들이 성취되고 폐지되었다고 그들은 가르쳤다.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구약성경의 의식들이 “단순한 익살 광대극”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사도들의 메시지에서 엿볼 수 있다. “동물들의 피도, 기름의 달콤함도, 향기로운 냄새도. 촛불들도, 기타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을 달랠 힘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약성경의 율법적 제사와 의식들에는 하나님의 약숙이 수반된 이상 "이 모든 고대의 상징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영원한 구원에 대한 확실한 증거였음을 우리가 상기하게 되는 것이다”(Comm.Ex.25:8).


구약과 신약 간의 세 번째 차이점은 고린도후서 3장의 메시지와 관련된 것이다. 거기에서 사도는 새 언약과 옛 언약을 서로 대조시키고 있다. 사도의 지적에 의하면. 옛 언약은 “문자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 언약은 성령의 역사 없이 공포되었기 때문이다. 반면 새 언약은 영적인 것이다. 주님이 이를 인간의 마음에 영적으로 새겼기 때문이다.” 옛 언약은 저주와 고소와 정죄를 가져온 반면, 새 언약은 자유와 생명과 칭의와 의 (義)를 가져왔다. 의식법은 “부재하는 실물들의 형상을 담고" 있는 것에 불과했으므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멸하고 사라져야 했다.” 반면 복음은 물 그 자체를 계시해주는 것이므로 영원토록 굳건하게 지속된다."(Inst. I.xi.8) 그러나 우리는 을법의 하사(下賜)가 전적으로 무익한 것이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신약의 뚜렷한 가르침과 대조해볼 때 비로소 옛 언약의 결점들이 아주 선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신구약의 네 번패 차이점은 세 번째 차이점에서 생겨난다. 로마서 5장에서 대조되고 있는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차이점이 그것이다. 옛 언약의 특징은 속박이다. 이 속박은 두려움을 일으킨다. 반면 새 언약은 자유를 생산하며 신뢰와 확신을 심어준다. 옛 언약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지도와 후견을 상징하는 제반 의식들을 강제적으로 준수하지 많으면 안되었다. 하나님께로부터 거듭난 자들은, 사랑을 통해 역사하는 믿음으로써 하나님께 순종한다. 그러므로 이들은 새 언약에 속한 자들이다. 반면에 옛 언약의 성도들은, 영적으로 지극히 성숙한 자라 하더라도 율법이 가져다 주는 속박과 두려움을 완전히 면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이 복음의 은혜를 통해 받았던 특권을 제 아무리 흡족하게 향유했다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그도 일반 백성과 동일하게 의식의 준수라는 속박과 짐을 지고 있었기 때문이다”(Inst. II.xi.9).


다섯 번째 차이점은, 전에 주로 유대인에게 국한되어 있던 구원을. 그리스도의 성육신 이후 하나님께서 모든 민족에게로 확대시켰다는 점이다. 칼빈은 이 문제를 다룬 장(章)의 서론에서 이 차이점이 덧붙여진 것임에 불과함을 시사하고 있다. “내가 지적하고 기억할수 있는 한, 그 주요한 차이점들은 네가지이다. 누군가가 다섯번째 차이점을 추가하고 싶다 하더라도 나는 전혀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것이다”(Inst. II.xi.l).


하나님께서 왜 신구약 사이에서 경영의 변화를 꾀하셨는지 칼빈 자신으로서는 충분히 설명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상이한 시대에 상이 한 방법으로 일하신다고 하여 하나님을 변덕스런 존재로 생각한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그는 말한다. 칼빈이 제시할 수 있었던 최선의 답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구약 백성의 미숙에 자기의 방법을 맞추셨다는 것이다(보통 이를 가리켜 ‘accomodation, 적응’이라고 한다). 그러나 신약 시대는 하나님의 그러한 적응이 더이상 필요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4장에서 그리스도인들을 어린이가 아닌 젊은이에 비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육신이 전환점이었다.


“그리스도가 아직 오시지 않았을때는 일종의 상징으로 그를 타나내보이는 것, 그리고 그가 곧 오신다고 선포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가 계시되었으므로 그를 다른 방법으로 나타내보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이러한 설명이 설득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자들을 위해 칼빈은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에 직접 호소한다. “하나님께서 손수 다스리시고. 당신의 은혜를 자유롭게 처리하고자 하시며 ,당신이 택한 백성을 비춰주시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고 누가 말할 수 있는가. 그런 말은 제발 하지 않기를 빈다”(Inst.I.xi.l4).
혹자들은 「기독교 강요」에 진술된 성경의 통일성에 관한 칼빈의 신학이 그의 주석과 강해에서 표출되는 해석적 관습과 배치된다는 견해를 제시했다. 플러튼(Fullerton)은, 칼빈이 「기독교 강요」에서는 성경의 통일성을 매우 강력하게 역설한 반면 주석에서는 자신의 교리적 방향을 억누르고 본문을 역사적으로 해석 했다고 주장한다(Kemper Fullerton, Prophecy and Authority: A Study in the History of the Doctrine and Interpretation of Scripture, New York: Macmillan, 1919, pp.133-64). 그러나 이것은 칼빈의 접근법을지나치게 단순화 한 것이다. 칼빈이 본문을 역사적으로 해석하려 한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과정에서 성경의 통일성을 희생시키지는 않는다. 성경의 통일성에 관한 칼빈의 강력한 소신은 그의 강해 작품들에서도 「기독교 강요」만큼 분명하게 드러난다. 주석에 나오는 그의 진술들은 「기독교 강요」에서 그가 말하는 것을 확증하고 있다. 구약성경은 모호하고 상징적이며 그림자로 가득차 있지만 그럼에도 구약성경 가르침의 내용은 신약의 그것과 동일하다고, 칼빈은 그의 주석에서 밝히고 있다.

옛날의 모든 의식들을 폐지하고 새로운 형태의 가르침을 도입할 필요가 있었지만, 그 가르침의 본질적 내용은 여전히 동일했다. 전에는 시내산으로부터 율법이 나왔지만(출19:20) 이제는 율법이 시온으로부터 나온다. 그러므로 율법은 새로운 형태를 띠게 되었다. 따라서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첫째, 하나님의 가르침은 예나 지금이나 동일하며 언제나 그 스스로가 일치한다. 지금 아무도 하나님께서 일관성 없이 변덕스럽게 행동하신다고 비난할 수는 없다. 하나님의 율법은 지금이나 과거 여느때나 동일하다. 그러나 이제는 그 율법이 새로운 의복을 걸치고 시온으로부터 나왔다. 둘째, 제반 의식들과 그림자들이 폐지된 후 그리스도가 계시되있다. 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 의식들과 그림자들의 실물을 인식할 수 있다. (Comm. Isa. 2:3)

동일한 이 문맥에서 칼빈은. 신약성경의 우수성에 대해 「기독교 강요」에 기록한 내용을 확증하고 있다. 이 문맥에서 그는 말한다. 신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옛 체제하에서 배제되었던 자들에게도 미치고 있다. “이 선지자 이사야는 하나님 나라의 지경이 확대되어 하나님께서 열방을 통치하실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또한 그는 그림자에 불과한 다윗의 왕국과, 그보다 훨씬 더 탁월하게 빛날이 다른 왕국(신약시대의 하나님 나라)간의 차이점을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Comm.Isa.4:3). 시편 47편 7절(“하나님은 온 땅에 왕이심이라”)에 대한 주석에서 칼빈은 같은 견해를 표명한다. “이 말에서 저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땅끝까지 확대되기 때문에, 그림자 같은 율법 시대 하에서보다 메시야가 오실 때 훨씬 더 장엄하고 영광스러울 것이라는 사실이다.”

2.율법과 선지서의 관계
칼빈은 신구약 성경의 통일성을 강조하듯이 을법과 선지서의 통일성도 강조한다. 이사야서 주석 서문에서 그는 이런 견해를 대단히 알차게 전개하고 있다. 그는 말한다. 선지자들은 “시내가 샘에서 나오듯이” 그들의 가르침을 율법에서 끌어내었다. 선지자들은 율법을 자신들의 규범으로 삼아 자기앞에 두었다. 그러므로 그들을 율법의 해석자로 생각하고 그렇게 선언하는 것은 정당한 일이었다. 그들은 율법과 관련된 것 외에 아무 것도 발언하지 않았다. “율법은 세 개의 주요한 부분으로 나뉠 수 있다. 첫째는 삶에 관한가르침이며 둘째는 경고와 약속이고 세째는 “은혜의 언약”이다. “이 언약은 그리스도께 기초를 두고 있으며 그 자체 속제 온갖 특별 약속들을 담고 있다. “이 세 가지 분야를 각각 정확하게 설명하고 적용함으로써 자기 시대의 백성들로 하여금 율법으로부터 최대한의 혜택을 얻도록 하는 것이, 선지자들의 목표였다.


첫째로, 선지자들은 율법의 두돌판에 간단하게 진술된 것을 보다 충분하게 예증 설명했다. 둘째로, 그들은 모세의 일반적인 경고들을 자기 시대에 맞게 아주 특정한 방식으로 적용했다. 세째로. 그들은 모세가그리스도에 관해 모호하게 진술한 내용을 보다 충분하게 설명한다. 선지자들은 율법에 아무것도 추가하지 않았다. 단지 율법을 해석하기만 했다. 그들은 백성에게 도덕적 의무를 촉구할때 “새로운 것을 전혀 제시하지 않고 단지 율법 가운데서 오해되어 왔던 부분들을 설명하기만 한다.” 장래의 사건들에 대한 선지자들의 환상은 뭔가 새로운 것으로 보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 환상들은 율법의 약속과 경고가 백성들에게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그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모세는 “네가 계명들을 지키면 여호와께서 너에게 복을 주실 것”이라고 말한 다음 이 복의 일반적인 내용을 기술한다. 그러나 선지자들은 그 목록들을 상세하게 지적한다. “바로 이것이 여호와께서 너에게 내려주고자 하시는 복이다"라고 말이다. 또 모세를 통해서는 여호와께서 다음과 같은 식으로 약속을 주신다. “네가 땅 끝으로 흩어지고 쫓겨간다 하더라도 내가 너를 다시 데려을 것이다”(신30:4). 그러나 선지자들을 통해서는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를 바벨론으로 쫓아 보냈지만 70년 후에는 내가 너를 다시 찾아을 것이다.”(Comm.lsa.pref.)

하나님은 족장들과. 그리스도의 중보에 입각한 은혜의 언약을 맺으셨다. 선지자들은 백성들에게 그리스도를 상기시킴으로써 그들이 이 언약에 충실하도록 격려했다. “그리스도는 이 언약의 토대이자 하나님과 백성간에 상호 관계를 맺어주는 끈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약슥의 전 범위가 그리스도와 관련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성경의 이중적인 저작성에 대한 칼빈의 소신, 그리고 성경의 통일성과 다양성에 대한 그의 견해는 그의 성경 해석 방법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성경이 인간의 저작이라는 신념은 그의 역사적인 성경 해석에 토대가 되었다. 성경은 동시대인들을 독자로 하여 기록한, 인간 저자들의 저술로서 해석되어야 한다고 그는 보았다. 뿐만 아니라 성경이 하나님의 저작이라는 칼빈의 인식도 역시 성경의 통일성에 대한 그의 강력한 의식과 더불어, 그의 성경 해석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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