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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하나님의 예지

하나님아들 2020. 8. 10. 17:28

제6장 하나님의 예지

 

하나님의 예정에 대한 알미니안 주의의 반대는 하나님의 예지에 대해서도 동일합니다. 하나님의 예시하시는 것은 그 성질상 예정되어 있는 것과 같이 확정이 된 것이 아니면 안 됩니다. 만일 예정이 인간의 자유행동과 모순이 된다면 예지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예정과 예지의 차이점은 예정은 사건의 확정으로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이고, 예지는 사건이 확정적인 것을 전제로 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만일 미래의 사건이 하나님께 예지되어 있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지식과 반대로 변할 수 있는 가능성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미래의 사건이 하나님께 예지되어 있다면 마치 기관차가 철길 궤도를 달려감과 같이 역사는 그 결정적인 과정을 밟아 나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예정 교리를 부인하는 알미니안 교리는 예지의 유신(有神)론적 근거도 부인하게 됩니다. 아무 사건이나 그것이 물리적으로든지 아니면 심리적으로든지 혹은 다른 어떤 방법에 의해서든지 미리 결정되어 있지 않으면 예지되기가 어렵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에서 미래의 사건의 확정성을 결정하는 것이 지혜와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의 예지인가? 아니면 맹목적인 자연적 운명인가? 하는 두 가지 질문 중에서 어느 하나를 택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16세기의 이단 중에 '소시니안파(Socinians)와 유니테리언파(Unitarians)'가 있습니다. 16세기의 소시니안파는 삼위(三位)가 공통된 본체(本體)를 가졌다는 교리는 이성에 모순된다고 보았으며, 심지어는 성자의 선재까지도 부정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비록 특별한 성령을 충만이 받으시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많으며, 승천 후에도 만물의 지배권을 받았다고 하지만, 그는 본질적인 성질로 보아 단순한 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들의 하나님에 대한 개념은 오늘날의 유니테리안과 현대주의자들의 선구자가 되었습니다. 유니테리안파는 종교개혁 이후 지금까지 교회 안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단으로, 단일신론과 아리우스파 중 그 선구자입니다. 유니테리안파는 신조(信條)를 부인하고, 다양한 신앙의 범위를 가지고 있으면서, 하나님의 단일성을 강조하고 그리스도와 성령의 신성을 부정합니다. 그들은 자유, 이성, 관용을 인격적이며 사회적인 종교를 본질적인 것으로 보았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예정을 부인한 후 하나님께서 자유행동자의 행동을 예지하신다는 것까지도 부인하였습니다. 그들은 어떤 사람이 어떻게 행동할지는 그 사람이 실제로 어떻게 할 것을 결정하기까지는 알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견해는 성경의 예언을 기껏해야 기민(機敏)한 추측쯤으로 격하시킴으로써 성경의 영감에 대한 역사적 기독교 교리를 파괴하고 있습니다. 이 견해는 한 번도 공인된 기독교회의 지지를 받은 일이 없습니다. 어떤 소시니안파 사람과 유니테리안파 사람들은 그들이 인간의 미래 행동에 관한 하나님의 확실한 예지를 부인하게 된 이유는 만일 하나님의 예지를 인정한다면 칼빈주의적 예정론을 부인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라고 정직하게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많은 알미니안 사람들이 이상과 같은 하나님의 예지에 대한 변론의 위력을 감지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하나님의 예지를 부인함에 있어서 유니테리안 사람들은 추종하지 않으면서도 할 수 있다면 예지를 부인하려는 의사가 있다고 표명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교리는 그렇게 필요하지 않으니 그것을 믿든지 믿지 않든지 별로 큰 문제가 된지 않는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예정을 시인하는 것보다 예지를 부인하는 편이 낫다고 말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하나님은 인간을 자유롭게 하기 위하여 인간의 행동 중 어떤 부분에 대한 지식은 스스로 간과(看過: 방관(傍觀)과 비슷한 뜻으로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것을 뜻함.)하신다고까지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명백히 하나님의 전지성(全知性: 모든 것을 아는 것)을 파괴하는 일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전지(全知)는 마치 하나님의 전능이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시면 어떤 것이든지 다 하실 수 있다는 것과 같이 만일 하나님이 아시고자 하시면 어떤 것이든지 다 아실 수 있다는 단순한 가능성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공정한 비교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무엇이든지 원하시면 다 하실 수 있고 또한 다 아실 수 있는 것과 같은 행동은 일의 성질상 아직 미래에 속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것은 단순한 가능성이 아니고 현실성이며 그들의 행동을 하나님이 모르신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전지를 부인하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 설명은 ‘전지하지 못하는 전지’라는 불합리를 말하는 것뿐입니다.

 

알미니안 사람은 하나님의 예지 교리에 대한 변론에 직면할 경우 미래사의 확정성 혹은 불변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자유행동력 문제를 논하게 될 경우 인간의 행동들은 불확정한 것으로써 궁극적으로 사람의 선택에 의존하는 것이라고 주장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이것은 분명 모순입니다. 인간의 자유행동이 불확정하다고 주장하는 견해는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주권을 희생시키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뿐 아니라 만일 영원 전에 인간의 행동이 그 자체에 있어서 불확정하다고 하면 하나님은 그 계획을 수립함에 있어서 먼저 사건이 그 성과를 얻기까지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한 영혼을 회개시키려고 하실 때에는 마치 나폴레옹이 전쟁을 시작하는 것과 같은 상태 - 여러 개의 계획을 복안으로 가지고서 첫째 계획이 실패하면 둘째 계획으로 둘째 계획이 실패하면 셋째, 넷째 계획으로 연이어 시도하려는 것과 같은 상태 -에서 일하실 것이라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하나님의 우주 통치도 확정성이 없으므로 예측할 수 없는 인간의 행동에 따라 좌우될 것이므로 이는 하나님의 성품을 잘못 판단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예지와 그 불변성의 완전을 부인하는 것은 하나님을 그의 창조물로 말미암아 자주 좌절되고 패배 당하는 불행한 존재로 제시할 뿐입니다. 그러나 누가 이 위대하신 여호와께서 사람 앞에서 ‘사람이 무엇을 하려는가?’라고 자문하면서 앉아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할 것입니까? 알미니안 주의는 하나님의 예지를 부인하지 않는 한 극히 논리적인 칼빈주의 앞에 무방비 상태로 서 있는 셈이 됩니다. 왜냐하면 미래의 사건에 대한 예지는 그 사건들의 정확성을 포함하고 정확성은 예정을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종말을 처음부터 고하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모략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사 46:10)고 하였습니다. 또 시편 139:2에서 “당신이 멀리서부터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라고 하였고, 행 15:8에는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라고 하였으며, 히 4:13에서는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예정에 대한 이해가 어려운 까닭은 인간의 이성이 유한하기 때문에 일시에 몇몇 부분 밖에 깨달아 알지 못하고 또한 그 사이에 있는 관계 중 겨우 일부분 밖에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시간적 피조자이기 때문에 종종 하나님은 우리처럼 제한을 받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잊어버립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현재’ ‘미래’ ‘과거’로 생각되는 것이 하나님의 심경에는 다 현재이므로 영원의 ‘지금’입니다. 하나님은 ‘지존무상하여 영원히 거하며’(사 57:15), ‘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을 뿐임이니이다.’(시 90:4).

그러면 시간 안에서 생기는 사건은 영원 전부터 하나님께서 지정하시고 또한 자기 앞에 제정하여 놓아두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시간은 유한한 피조물의 특성일 뿐이지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시간 위에 계시고 시간을 보시긴 하지만 시간의 제한을 받지 않으십니다. 그는 공간의 제한도 받지 않습니다. 공간은 다만 유한한 피조물의 또 하나의 특성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떤 도로의 일정한 구간을 지날 때에 사람들은 그것은 부분적으로 밖에 볼 수 없지만 하나님은 그 전체를 한 눈에 보실 수 있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은 과거 현재 미래의 역사상 모든 사건들을 일별(一瞥 한눈에)에 다 보시는 것입니다. 역사의 전과정이 영원의 ‘지금’으로서 하나님 앞에 있다는 것 또한 하나님께서 모든 유한적 존재의 창조자시라는 것을 인식한다면 예정론을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미래의 사건에 관한 작정을 세우지 않으셨다면 창조 전에는 그것에 관한 확정성이 전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그 작정을 결정하신 때에만 사건들은 비로소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가능성의 범주에서 확실히 있을 것이라는 실현에의 범주로 옮겨질 것입니다. 이 불변성 혹은 확정성은 하나님의 뜻에만 그 근거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영원에는 하나님 이외의 어떤 존재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댑니(R.L.Dabney) 박사는 말하기를 “어떤 목적이 하나님의 가능성의 환영(幻影)으로부터 실제의 예지로 옮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께서 친히 그것을 수행하기로 뜻하시거나 혹은 하나님이 분명히 존재케 하시려고 작정하신 어떤 능력 있는 요인에 의하여 그것을 수행할 것을 임의적, 목적적으로 정하시는데 있다. 이것은 다음 사실에서 더욱 분명하다. 가능성(Posse)에서 생각되는 어떤 결과는 하나의 동력인 또는 다수활동원인의 힘에 의하여 비로소 현실화 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 본원적 절대적 예지의 견지로부터 장래를 내다 보았을 때는 오직 한 원인 즉 하나님 자신만이 있었던 것이다. 만일 다른 원인이나 능인(能因)이 나타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행동력에 의한 것이 아니면 안 될 것이다. 만일 다른 능인들이 산출하려는 결과들이 하나님의 예지 가운데 포함되어 있다면 그들 모든 능인들을 존재케 하려고 의욕하시는데서 이미 사실상 그 모든 결과들을 존재케 하려고 의욕하시며 기도(企圖)하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침례교 신학자 ‘스트롱(A. H. Strong)’ 박사는 ‘창세기 전에는 우주의 미래적 존재의 원인은 하나님 자신 이외에 아무 것도 없었다. 창세 전에 하나님은 세계의 창조와 그 법칙의 제정이 세계의 실제 역사를 가장 미세한 점에 이르기까지 확정성이 되게 할 것을 예견하셨다. 이리하여 하나님은 이 창조의 법칙의 제정을 결정하셨고 이에 따라 필연적으로 미래의 일체를 결정하셨다.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은 창조를 결정하셨으므로 우주의 전미래적 사건 일체를 확정적으로 예견하셨다. 그런데 이 창조의 결의는 창조의 모든 실제적 결과에 관한 결의까지고 포함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창조의 전결과를 결정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예지와 예정을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예지는 예정을 전제로 하지만 예지 그 자체가 예정은 아닙니다. 자유행동자인 인간의 행동은 그것이 예지되었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예정 되어 확실히 일어날 것이므로 예지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트롱 박사는 ‘논리적으로(시간적으로가 아니라) 결정은 예지 전에 있는 것이다. 내가 “나는 내가 할 바를 안다.”고 말할 겨우 내가 벌써 무엇을 하기로 결의하였다는 것 또는 내 지식이 결의에 선행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결의에 수종하고 거기에 근거한다는 것이 분명히 드러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예지는 완전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처음부터 개개인의 운명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예지란 다만 현세에서 사람이 무엇을 하기로 작정하기 전에 그것을 미리 아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 창조 이전부터 인간의 운명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분명히 구원을 받을 자나 멸망을 당할 자나 다 같이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만일 어떤 자들의 멸망을 하나님께서 계획하지 않으셨다면 그는 멸망당할 자들을 창조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예지에 관한 교리는 하나님의 예정 교리도 증명해 준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건이 예지되어 있는 이상 그것은 불변적이요 확정적인 사건입니다. 영구적 결정의 제1 원인인 하나님의 소욕이 아니면 아무 것도 역사의 사건들을 고정 또는 확정시킬 수 없습니다. 문제는 자유행동자의 행동이 확정되어 있다고 하는 점에 있지만 이 확정성은 예정과 마찬가지로 예지에 있어서도 똑같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알미니안 파의 변론은 만일 정당한 근거가 있다면 예정이나 예지나 다 같이 부인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너무 많은 논증을 하기 때문에 우리는 결국 그들이 아무 것도 논증하지 못한다고 결론짓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예지

과거에 이 주제에 관하여 수많은 논쟁이 있어 왔다. 그러나 성경의 진리치고 신학적 교회적 논란이 야기하지 않았던 진리가 있는가?
그리스도의 신성, 그의 동정녀 탄생, 대속의 죽음, 그의 재림, 신자의 의, 성화, 성도의 안전, 교회, 조직, 직분,계율, 세례, 성만찬 등등 그 외 수많은 귀중한 진리들이 그 사례이다. 그러나 그 논쟁들은 아직도 하나님의 충실한 종들의 입을 막지 못했다.
그러면 논쟁을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다 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예지라는 문제를 회피해야 하는가? 혹자는 그럴지 몰라도 우리의 임무는 우리에게 조명된 빛에 따라 그를 밝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예지(foreknowledge)에 관하여 대다수 사람이 무지한 두 가지 사실이 있다. 이에 대한 무지는 너무도 일반적이어서 설교자와 교사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까지 이 주제를 왜곡하여 전달하기 쉽다. 실수를 막기 위하여 단 한 가지의 안전장치가 있다. 그것은 믿음 안에서 세워져야 한다. 그를 위하여 기도하면서 부지런히 탐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온순하게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럴 때만 우리는 우리를 향한 공격을 막아낼 수 있다.
오늘날 죄인을 구원하는 사역에 있어서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부정하고 불신하기 위하여 이 진리를 왜곡하는 사람들이 있다. 고등비평이 성경의 영감을 부정하듯이 진화론자들은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부정하며, 가짜 성경 교사들은 영생을 주시는 신의 무조건적 선택을 도외시하기 위하여 그의 예지를 왜곡한다.

신의 예정(foreordination)이란 엄연하고 복된 주제를 설명할 때, 자기 아들의 형상을 닮도록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을 택정하신다고 할 때, 마귀는 자기 종들을 보내어 논쟁을 시작한다. 즉 선택은 신의 예지(foreknowledge)에 기초하며, 그리고 이 ‘예지’는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온순하여 성령의 강권에 보다 쉽게 반응하며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믿을 것임을 알기 때문에 그들을 구원하기로 예정하셨다는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은 심히 잘못된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전적 부패라는 진리를 거부한다. 인간에게 무언가 선한 것이 있다는 주장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주성(independency)을 제거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이 피조물에게서 발견될 수 있는 것에 달려 있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앞뒤를 완전히 뒤바꾸어 놓는 셈이다.
어떤 죄인들이 그리스도를 믿을 것인지 하나님께서 미리 아셨기 때문에 그들을 구원하기로 예정하셨다고 주장함은 참으로 진리의 전도(顚倒)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지고하신 자신의 주권으로 어떤 사람을 택하여 그의 특별한 은총을 입도록 택정하셨고(행 13:48) 믿음의 선물을 그들에게 주시기로 작정하셨음을 확증하고 있다.
거짓된 신학은 우리의 믿음을 신의 선택으로 원인을 돌린다. 그러나 실은 하나님의 선택이
원인이요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그 결과이다.

오해가 많은 이 주제를 더 논하기 전에 잠시 멈춰서 용어의 정의를 내려보자. ‘예지’(foreknowledge)란 무슨 뜻인가?
‘미리 안다’는 것이라고 누구나 쉽게 대답 할 것이다. 그러나 너무 성급하게 결론을 내려서는 안되겠다.
그렇다고 <웹스터 사전>을 뒤적이면서 최종 판단을 내려서도 안되겠다. 왜냐하면 이것은 용어에 관한 어원학 차원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필요한 것은 그 단어가 성경에 어떻게
쓰여졌나를 알아내는 일이다. 성령의 언어 구사는 항상 그 단어의 의미와 범위를 설정해 준다. 많은 혼동과 오해를 일으키는 이 단순한 규칙을 적용함은 잘못이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이 성경에 기록된 어떤 단어의 의미를 이미 알고 있다고 상상한 나머지 성구사전을 통하여 자신들의 상상을 시험해 보려고 들지 않는다. 이 점을 좀더 확대해 보자.

‘육신’이란 단어를 살펴보자. 많은 사람들이 그 의미는 너무나도 분명하므로 성경에 기록된 여러 관련 성구들을 찾는 것은 시간낭비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그 단어가 신체와 동의어라고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고 더 이상 조사해 보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실 성경에 자주 나타나는 ‘육신’이란 말은 신체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 그 용어에 내포된 의미는 그 단어가 나타나는 모든 경우를 부지런히 비교 검토하고 각각의 문맥을 연구함으로써 얻어질 수 있다.
‘이상’이란 말을 예로 들자. 성경의 일반적 독자는 이 단어가 인류와 같은 뜻으로 쓰인다고 상상한다. 그 결과로 그 용어가 나타나는 많은 구절이 잘못 해석되고 있다.
‘불멸’(immortality)이란 단어도 그렇다. 전혀 조사할 필요가 없다고들 한다. 분명히 그 단어는 도말되지 않는 영혼을 지칭한다고 생각한다.
독자여, 그러나 말씀에 관한 한 상상은 금물임을 알아야 한다. 만약, 독자가 ‘멸함’(mortal)과 ’불멸‘(immortality)이 나타나는 구절들을 신중하게 검토한다면 이 단어들이 영혼에 적용된 것이 아니요 항상 신체(body)에 적용되었음을 발견할 것이다.

지금까지 ‘육신’ ‘세상’ ‘불멸’에 언급한 내용이 그대로 ‘앎’(know)과 ‘예지’(foreknow)에 적용될 수 있다. 이 단어들이 단순한 인식일 것이라는 상상을 버리고 오히려 그 단어들이 사용된 서로 다른 구절들을 신중히 검토해야 한다.
‘예지’란 단어가 구약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안다’는 자주 언급되고 있다.
그 용어가 신과 관련되어 나타날 때 그것은 종종
은총을 의미하며 단순한 인식이 아니라 대상을 향한 사랑을 표시한다.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 이니라” (출33:17). “내가 너희를 알던 날부터 옴으로 너희가 항상 여호와를 거역 하였느니라”(신 9:24).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렘 1:5). “저희가 방백들을 세웠으나 나의 모르는 바며”(호 8:4). “내가 땅의 모든 족속 중에 너희만 알았나니”(암 3:2). 이 구절들에서 ‘안다’는 것은 사랑을 받거나 택함 받음을 의미한다.

‘안다’는 단어는 또한 신약에서도 자주 쓰이고 있다. 그 의미는 구약과 동일하다.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마7:23).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요 10:14).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 바 되었느니라”(고전 8:3).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딤후 2:19)

신약에 사용된 ‘예지’란 단어는 단순히 ‘안다는 것’보다 덜 모호하다. 그것이 나타나는 모든 구절을 신중하게 검토한다면, 그것이 장치 발생할 사건에 관한 단순한 인지(認知)에 불과한 것인가 하는 것이 논점이 됨을 발견할 것이다. 사실은 그 ‘예지’란 단어는 성경에서 결코 사건이나 행위와 관련하여 사용된 적이 없고 대신에 항상 사람에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것은 사람이지 사람의 행위가 아니었다. 이를 증명키 위해 이 표현이 구사된 몇몇 구절을 인용해 보자.

처음 나타나는 곳은 사도행전 2:23이다. 기록되기를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다”고 하였다. 이 구절을 조심스레 살펴보면 사도 베드로가 하나님이 미리 아신다고 말함은 십자가 처형 그 자체가 아니요 십자가에 못 박힌 그 인격을 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가 내어준 바 되었거늘”.

두 번째 나타나는 곳은 로마서 8:29,30이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여기 사용된 대명사를 유념해 보라. 그가 미리 아신 것은 사물(what)이 아니요 사람(whom)이다.

신이 미리 아신 것은 그들의 의지의 순복도 아니요 그들의 믿음도 아니요 바로 그들 자신들인 것이다.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롬 11:2). 다시 한 번 그 용어가 단순히 인격을 지칭하여 쓰여졌다. 오직 사람들에게 사용된 것이다.

마지막 언급은 베드로전서 1:2에 나와 있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 택하심을 입은 자”. 누가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택하심을” 입었는가? 바로 직전의 구절이 이를 설명해 준다. 즉 흩어진 나그네, 믿는 유대인들이다. 여기서도 또한 그 단어 사용의 대상이 인격들이지 그들의 나타난 행위가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심”은 어떤 사람의 행위, 즉 그들의 ‘회개와 믿음’이며 그러한 행위로 인해 하나님은 그들을 택하여 구원시켰다고 주장함은 지금까지 살펴본 구절들을(더 이상은 없지만)상고해 볼 때 그 영적 근거가 있다고 할 수 있을까? 그 대답은 전혀 ‘아니다’이다.
성경은 회개와 믿음이 하나님에 의해 미리 예견되고 미리 아신 바 되엇다고 하지 않는다. 물론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누가 회개하고 누가 믿을 것인가를 안다. 그러나 이것이 성경에서 언급하는 하나님의 ‘예지’의
대상은 아닌 것이다.
그 단어는 한결같이 하나님이 미리 아신 바 된 인격을 지칭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바른 말을 본받아 지켜야”(딤후 1:13) 하겠다.

우리가 특별히 주의를 기울이고자 하는 또 다른 점은 위에서 인용한 처음 두 구절이 평범하고도 명백하게 하나님ㅂ이 “미리 아심”이 원인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그 대신 무엇인가 그 배경이 되고 있고 선행한다. 그 무엇은 바로 그의 주권의 뜻이다.
그리스도는 “①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② 미리 아신 바대로 내어 준 바 되었다”(행 2:23). 그의 뜻은 그의 미리 아심에 대한 근거이다. 이 같은 사실은 로마서 8:29에 다시 언급된다. 그 구절은 “왜냐하면”(for; 영역본에서는 for가 초두에 나온다)으로 시작된다. 이것은 직전의 구절을 살펴보라는 뜻이다. 바로 직전의 구절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의 “미리아심”은 그의 뜻에
기초하고 있다.(시 2:7)

하나님은 무엇이 일어날 것인가를 미리 아신다. 왜냐하면 그가 장래사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인생을 미리 아셨기 때문에 택하셨다고 함은 성경의 순서를 뒤바꾸는 것이요 말 앞에 마차를 갖다 놓는 격이다.
진실로 그가
택하셨기 때문에 그는 “미리 아신다.” 이것은 선택의 원인이나 근거를 피조물이 아닌 하나님 자신의 주권적 의지에 설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스스로 어떤 사람을 택하셨다.
그것은 그들에게 내재하는, 또는 그들로부터 발산되는 선행이나 예견된 선함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 자신의 기쁘신 뜻에 기인한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사람은 택하고 어떤 자는 버렸는가?
우리는 모른다. 단지 “아버지가 당신의 기쁘신 뜻대로”하셨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로마서 8:29은 평범한 진리이다. 즉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기초가 놓이기 전에 어떤 죄인들을 택하여 구원받게 하셨다는 것이다(살후 2:13).
이것은 그 구절의 마지막에 분명히 언급되어 있다.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하나님께서는 그가 미리 아신 사람들이 본받도록 예정하신 것이 아니다. 도리어 그와 반대로 그가 “미리 아신”(즉 사랑하고 택한)사람을 “본받도록” 예정 하셨다.
그리스도를 본받음은 원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미리 아심의 결과이다.

하나님은 어떤 죄인이 믿을 것이라고 예견했기 때문에 그를 구원한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단순하지만 충분한 이유가 있다. 즉 어떤 죄인도 하나님이 그에게 믿음을 허락하기 전에는 믿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마치 하나님이 그에게 시력을 주시기 전에 볼 수 없는 이치와 같다. 시력은 신의 선물이다. 본다는 것은 그의 선물을 사용한 결과이다. 마찬가지로 믿음은 신의 선물이며(엡 2:8,9), 믿는다는 것은 그의 선물을 사용한 결과이다. 어떤 사람이 때가 되면 믿을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택하셨다는 것은 믿음을 공로로 취급하게 되는 것이다. 이럴 경우 구원받은 죄인은 성경이 힘주어 부정하고 있는 ‘자랑’할 기회를 갖게 되는 것이다.(엡 2:9)

진실로 하나님의 말씀은 믿음이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이 “
은혜로 말미암아 믿은 자들”(행 18:27)이라고 증거하고 있다. 그들이 “은혜로 말미암아” 믿었다면 ‘믿음’에는 어떤 공로든지 전혀 있을 수가 없다.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라면 그 믿음은 하나님이 그들을 택하도록 충동한 원인이나 근거가 될 수 없다. 절대로 그럴 수 없다.
하나님의 선택은 우리 안에 내재하는 것이나 우리로부터 나오는 것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 자신의 주권적 소원으로부터 연유한다.
로마서 11:5에 다신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이제 더욱 명백하다. 선택 그 자체는
은혜요 은혜는 무조건적 은총이요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아무 것도 주장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예지’에 관하여 분명하고도 성경적인 개념을 정립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그에 대한 잘못된 개념은 필연적으로 하나님께 가장 모욕을 끼치는 사고(thoughts)로 발전된다.
신의 예지에 관한 일반적 개념이 모두 합당치 않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마지막을 아셨을 뿐만 아니라 처음부터 모든 것을 계획하시고 예정하셨다.
원인이 결과를 초래하듯이 하나님의 뜻이 그의 예지의 기초이다. 만약 독자가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의 기초가 놓이기 전에 이미 당신을 택하였기 때문이다(엡 1:4).
당신이 믿으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택한 것이 아니요 단지 그것이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기 때문이다.
신은 당신이 천성적으로 불신자임에도 불구하고 택하셨다. 그러므로 모든 영광과 찬송은 오직 신께만 속한다.
당신은 자신에 대하여 어떤 자랑거리를 갖고 있지 않다. 당신은 “
은혜로 말미암아” 믿었다(행 18:27). 당신의 구원은 전적으로 ‘은혜’이다. (롬 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