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자유주의 신학과 신정통주의 신학
16세기–종교개혁, 17세기–정통주의, 18세기–계몽주의, 19세기-자유주의
20세기-신정통주의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문제는 바르트에게 주요한 주제이다. 앞으로 21세기 한국교회를 위한 주제이기도 하다.
1) 종교개혁시대는 1517년에 발생, 16세기는 종교개혁시대이다. 루터와 칼빈이 중심, 이 시대의 신학을 종교개혁 신학이다.
2) 정통주의 시대는 17세기는 정통주의 신학의 시대이다. 칼빈의 정신을 이어받은 칼빈주의 정통주의가 지배, 루터교는 루터파 정통주의가 지배함. 종교개혁시대와 정통주의 시대의 신학은 매우 유사한 신학이다. 종교개혁시대의 신학의 신학의 후예가 정통주의 시대의 신학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신학은 완벽하게 일치하지 않고 있다. 인식해야 할 중요한 차이가 존재하고 있다. 정통주의의 신학의 시대에 대단히 중요한 신학의 정신은? ① 성경의 절대무오성 강조, 성경의 기계적 영감(성경기자들이 성령께서 불러주신 대로 기록함)을 강조. 축자적 무오를 강조함. 글자 한자 한자도 오류가 없음을 강조함. 이것은 종교개혁자 정신과는 차이가 있다. 종교개혁자는 성경의 권위를 강조함. 종교개혁운동의 핵심은 권위의 축을 옮기는 운동이다. 절대적 권위가 교회에 있었던 것을 성경으로 옮긴 운동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강조함. 교황의 말은 인간의 말이고 언제나 복종하고 순종해야 할 말씀은 성경임을 강조함. 종교개혁자의 권위의 축을 교황에서 성경으로 옮기는데 관심이 있었다. 종교개혁자의 가르침은 1세기가 지난 후 성경의 축자적 무오의 교리로 발전함. 이것이 17세기에 확립됨(성경의 절대적 무오). ② 인간의 절대적 타락을 강조함. 인간은 전적인 타락, 인간은 죄를 만드는 공장이라고 생각함. 17세기 정통주의자들이 강조한 배경은 구원은 전적인 은총으로 가능해진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절대 선한 것이 없다는 것을 강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간의 양심과 이성은 선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강조함. 모든 인간의 문제 곧 진리와 비진리의 판단의 기준은 절대무오하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다. 성경은 모든 것을 판결하는 최후의 법정이다.
3) 계몽주의 시대
4)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이 발전함. 유럽전역은 자유주의 정신이 지배함. 정통주의가 붕괴된 이유는 계몽주의 시대에 뭔가 변화의 조짐이 있었다. 계몽주의 시대에 인간은 이성을 존중함. 이성을 귀중하게 생각한 이유는 17세기 정통주의 시대의 시각에서는 희망이 없는 것인데 18세기는 인간이 이성을 높이 평가한 시대가 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보편적으로 새로운 경험을 함으로써 새로운 정신을 발전됨. 뭘 새로 경험하게 되었을까? 17세기에는 병이 들면 교회를 찾아갔다. 18세기에 들어서면서 병이 병원에서 치료하게 되고 박테리아가 발견되면서 병은 마귀가 옮긴 것이 아니라 병균이 옮긴 것임을 알고 병이 고쳐지고 치료되는 변화가 널리 퍼지자-그 병을 고치는 약을 사람의 이성이 만들어 내는 것임을 알고 사람의 이성을 신뢰하게 되었고 그래서 과학이 발전하고 과학문명이 발전되게 되었다.
사람들이 비행기를 만들고 하늘을 날게 되자 인간의 이성으로 만들어 내자 사람들은 인간의 이성에 대해 신뢰를 보내게 되었다. 인간의 이성은 죄나 만들어 내는 공장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인간의 이성 안에 하나님의 신성이 들어있지 않는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이 이성과 양심을 잘 활용하면 언젠가는 위대한 일을 할 것임을 널리 퍼지자 새로운 시대가 동텄다. 그래서 자유주의 신학 가까이 왔다. 옛 이론의 인간의 전적 타락이론이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게 되자 인간의 이성과 양심이 위대하고 그 안에 신성이 있는 것이 맞지 않겠느냐로 생각하게 되었다. 즉 정통주의 교리가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정통주의를 뒷받침하는 성경의 무오성의 교리는 어떻게 되느냐? 이 때 성경에 이성을 적용하게 되었다.이것은 초기에는 고전비평부터 했다. 희랍의 영웅이야기들을 인간의 이성을 가지고 분석해 보니 매우 놀라운 일들이 나타남. 유명한 고전의 이야기들이 거짓이거나 과장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마침내 이 사람들은 절대 무오하신 성경은 어떻게 되느냐라는 의문을 갖고 이런 불경한 일을 조금씩 하기 시작함. 불경한 일을 해보니 성경 안에 수상한 일이 생각하게 되어서 해보니 성경 안에 모순과 착오가 많이 들어나게 되었다. 사람들의 생각은 성경은 성령이 불러주신 기계적 하나님의 말씀이 아님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성경이 진리, 비진리의 기준이 될 수 없음을 판단함. 성경 안에도 오류가 있음을 그래서 정통주의 교리가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이런 배경 하에 마침내 유럽에는 자유주의 신학이 동터오기 시작합니다. 청교도들이 1627년에 미국으로 들어감. 바로 17세기 정통주의 신학을 가지고 미국으로 들어감. 그 신학으로 신앙생활을 합니다. 미국에 건너간 17세기 유럽인들은 20세기 초까지 지배함. 17세기 정통주의 신학이 미국으로(19세기까지 지배당함), 한국으로 건너옴(20세기까지 지배).
성경의 문제점:
창세기 1장과 2장 4절 이하의 기록이 차이가 있다. 2장은 먼저 아담을 창조하고 에덴을 창조 동물들을 만드심. 창조의 과정이 일치하지 않는다. 실지로 창조가 어떻게 되었을까? 창 6:19이하 노아가 방주에 들어감, 7장 3절에 암수 7쌍씩 들어감. 일치하지 않음. 막에 예수의 머리에 부음, 요한복음은 예수의 발에 부음. 눅 23장 예수의 십자가 좌우에 강도가 있었는데 우편 강도에게 오늘 나와 함께 낙원이 있을 것이다. 막 15: 32에는 두 강도가 예수님을 욕했다고 보도함. 성경에 엇갈리는 기록이 많이 있다. 역대기와 사사기에도 많이 나타나 있다. 왜 이런 착오가 발생했는가. 정신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기록도 많이 있다. 이상한 말들이 성경에 있다. 성경의 과학이 이상한 부분도 있다. 고대인들의 우주관이 들어가 있다.땅도 기둥 위에 있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이런 것들을 성서비평학이 발전되면서 드러나기 시작함. 어떻게 하나님이 불러주신 말씀에 문제가 있느냐? 성경은 사람이 종교적인 체험과 신적인 체험을 했는데 그 경험을 기록한 책이 성경이라고 주장하면서 이런 인식의 변화가 생겨남. 이런 인식 속에 유럽 땅에 정통주의가 붕괴됨.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자유주의 신학이 나타남. 대표학자는 슐라이어마허, 트?체, 리츨, 헤르만, 하르낙 등이 등장함. 19-20세기 초까지 자유주의가 지배하는 자유주의 전성기로 퍼짐. 자유라는 말은 무얼까?교리와 성경과 지배하는 특징이 17세기인데 인간의 자유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판단하면서 성경과 교리에 사람이 얽매이게 된다. 그런데 자유는 묶이는 것에서부터 자유스러워 하고자는 특징이 있다. 교리에서 자유함. 인간의 사고가 자유롭게 하나님에 대한 이해도 인간스스로 찾도록 하는 자유, 진리와 도덕도 인간 스스로 찾는 것.
자유주의 신학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가?
1) 성경에 대한 새로운 이해
인간에 종교적인 체험의 산물을 성경으로 본다. 계시는 우주에 대한 근원적인 새로운 직관이라고 슐라이어마허는 말한다. 신비한 우주를 바라보면서 직관을 느끼는 것에 신적인 계시가 있다고 본다. 우주에 대한 직관이 신에 대한 이념보다 더 가치가 있다. 우주에 대한 상상력을 통해 우주의 정신이 인격화되고 우리는 신을 소유하게 된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우주를 직관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우주가 신을 내포하고 있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함.
슐라이어마허 사상을 연구하면 불교와 관계가 있다고 본다. 우주의 질서와 합일시키는 것과 비슷하다.슐라이어마허에 의하면 성경은 그런 경험을 하는 사람들이 기록한 가치 있는 책이라고 이해한다. 자유신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는 성경은 종교적 체험의 산물이다, 그러기에 오류가 있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
2) 종교신학
기독교 조상만 종교적 체험만 하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의 성경 안에만 절대적인 진리가 있는 것은 잘못이다. 이런 사고는 종교신학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 20세기 후반에 종교다원주의가 대두되는데 19세기의 자유신학자들과 관계가 밀접하다.
감신대 변선한 교수는 쉴이 가장 위대한 분으로 주장한다. 이름은 위대한데 좀 시원찮은 학자는 칼 바르트라고 주장함. 슐라이어마허의 종교론이 그들의 경전으로 삼을 정도로 큰 영향력이 있다. 모든 종교는 신성의 담지자들이라고 말한다.
3) 이성의 신학
진리와 비진리를 측정하는 객관적인 기준은 인간의 이성이라고 주장함. 지금도 그러하다고 말할 수 있다. 최후의 재판소는 이성으로 자리 잡고 있다. 정통주의 정신을 이어가고 있는 어떤 교회 안에서만 성경의 권위를 인정한다. 이성에 맞지 않는 것은 배제한다. 이성에 맞지 않는 성경은 거부했다. 쉴은 절대적인 초자연적인 사상은 포기해야 마땅하다 그리고 아무데서도 그것을 믿으라고 요청을 받고 있지 않다고 말함.
4) 인간 예수를 강조한 기독론
예수를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 2위로 인정하지 않고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 생각. 슐라이어마허는 예수를 신성이 충만한 사람으로 이해. 예수는 모범적인 최초의 그리스도인으로 얘기. 제 2위 하나님의 아들로 말하는 것은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으로 드러났기에 하나님께서 예수를 아들로 삼았다고 생각해서 하나님의 아들로 말하는 것이다. 리츨은 예수는 역사 안에서 온 사람이라고 말한다. 정통주의자들은 예수를 세상의 저편에서 왔다는 것과 반해서 말하는 것이다. 슐라이어마허 예수는 종교의 잠자는 불꽃을 일으키는 자라고 말함. 우주를 바라보면 충만한 신성을 깨닫게 하는 것이 있는데 이런 기능을 하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하르낙은 예수의 신성을 뒷받침할 만한 증언은 신약성경에 없다고 말함. 예수를 삼위일체의 제2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을 때 교회 안에서 속죄론이 희생당하는 일이 벌어진다.예수를 믿어야 구원받는다는 말은 속죄론을 얘기하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가 가르치는 핵은 속죄론인데 예수께서 성자 하나님이 아니라면 속죄의 죽음이 될 수 없다. 속죄론의 근거의 결정적인 것은 예수가 제2위 성자 하나님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매우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다. 예수의 피가 내 죄를 속량한다는 것을 믿으면 이것은 정통주의다. 그런데 이 명제를 받아들이지 못하면 정통주의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이 사상의 학자는 하르낙, 안병무 등이 말하는 것으로서 바로 바울이 발전시킨 제의적 신화로 보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에 대한 이해, 예수 그리스도, 속죄론에 대한 이해에서 차이가 있다.
5) 사랑의 윤리
두드러지게 나타난 단어가 사랑이다. 예수에게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예수의 인격인데 이 핵심은 신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자유주의 핵심은 사랑이다. 자유주의를 도덕주의라고도 비판한다. 복음은 제외되고 윤리만 나타나는 것이 자유주의다. 도덕, 윤리가 강하지만 중심에는 사랑이 있다. 실지로 성경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라고 나타난다. 자유주의자의 슬로건은 교회는 분리하나 봉사는 연합한다.
슈바이처의 종말론은 예수의 종말론은 환상이다 그래서 폐기처분해야 한다고 생각. 예수를 유대인으로 생각함. 유대인의 묵시사상으로 지배당하였기에 그 가르침은 환상이고 착각이라고 말한다. 이 종말론은 철저한 종말론으로 얘기하고 있다. 예수에게서는 종말론이 아니라 예수의 생명사랑의 정신을 배워야 한다고 말함. 예수의 그 정신이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 실천을 하기 위해 아프리카에 간 것이다. 고아를 돌보고,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도우는 사람은 자유주의자들이 많다. 그런데 정통주의자들은 싸움을 많이 했다. 정통주의자들이 자유주의자들에게 배워야 한다.
6) 역사의 진보에 대한 신앙
자유주의자들은 역사가 진보한다고 보았고 역사 안에 신성이 내재하고 있다고 보았다. 이들은 범신론적인 특징이 있다. 우주에 대한 범신론적 사고를 하는 것이다. 역사적 범신주의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하르낙은 역사 앞에서의 경외를 말함. 이유는 역사를 보면 신의 움직임을 알 수 있기에 그렇다고 말한다.그 모체는 헤겔에게 있다. 헤겔은 역사를 절대정신의 자기발전의 역사라고 한다. 신이 역사를 투영시키고 역사를 발전시킨다고 주장함. 역사의 종국은 신국을 발전시킨다. 역사의 종국과 신국은 자유주의자들에 의해 발전됨.
자유주의자들은 인간의 이성과 도덕을 잘 발전시키면 마침내 하나님의 나라를 이 역사 안에 건설할 수 있다고 보았다. 역사적 과정은 신적인 운동이 되는 것이다. 역사는 세계 속에서의 하나님의 행진이다(트로팽), 역사는 하나님의 가면이다. 역사에 대한 낙관주의, 범신주의, 헤겔은 독일민족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이런 사고가 세계 1차 대전의 배경을 하고 있다. 이 대전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특징이 있는데 자본주의를 악으로 보았다. 사회주의를 하나님께서 실현시키는 것으로 생각함. 역사의 낙관론이 깨진 결정적인 계기는 세계 2차 대전이었다. 이것이 엄청난 충격이다. 과학이 발전되면 유토피아가 온 것으로 생각했는데 오히려 대량죽음이 왔다. 인간의 죄악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종교개혁자, 정통자의 가르침이 새로운 지식으로 드러남.
신정통주의 신학이 등장한 것도 바로 역사적 흐름과 관계가 된다. 사람들은 전쟁의 폐허 속에서 새로운 정신을 가르쳤고 그래서 새로운 정신을 찾아서 가르친 사람이 바로 칼 바르트이다. 여기서 등장하는 바르트의 신학은 신과 인간의 질적 차이로 주장을 펼침. 역사는 죽음의 역사이다. 시간의 역사 속에는 희망이 없다. 희망은 영원 속에 있다. 역사 밖에 존재하는 것에 희망이 있다고 주장함. 인간의 역사는 결국 죽음으로 간다. 역사 건너편에 하나님의역사속에 진정한 구원과 희망이 있다고 본다. 역사는 신의 심판을 받고 있다. 인간의 역사는 죄와 죽음의 역사이다. 그런데 바르트의 역사관은 역사의 낙관주의를 붕괴시킨다는 것에는 장점이 있는데, 영원의 세계로 도피해버린 것이 단점이라 할 수 있다.
로마서 강해의 위대한 점은 19세기 낭만주의 낙관론을 붕괴시키고 성경이 얘기하는 인간의 죄악성을 가르친다는 것에는 훌륭한 저술이다. 그러나 역사 자체의 희망을 주지 않고 영원의 세계로 희망을 넘겼다.시간과 영원의 이론에서 영원으로 이탈하는 경우와 세대주의자들이 주장한 역사의 비관론(마지막에 아마겟돈전쟁이 일어나서 역사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고 주장함). 이것이 발전되면 역사에 대한 책임성이 희석 된다. 역사적 비관주의를 갖게 되면 교회로 불러들여 천국으로 보내는 것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래서 역사를 마귀에게 넘겨줘버리는 신학적인 문제를 갖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주기도문이 매우 위대하다. 하늘에서 이룬 것처럼 하나님나라가 이 땅위에 이뤄지기를 기도하고 이것을 위해 살라는 가르침이 들어있다. 그런데 비관주의역사관을 갖게 되면 주기도문의 실천이 불가능하다,
바람직한 역사관은 낙관론도, 비관론도 아닌 희망의 역사관이라 할 수 있다. 이 역사관이 개혁파 역사관이며, 몰트만의 역사관에 강하게 나타난다. 낙관적 역사관과 차이가 있는데 희망의 역사관은 역사 안에 있는 악을 인식하는 역사관이다. 아우슈비츠, 히로시마, 체르노빌은 역사의 파국적인 것을 나타난다.
바르트의 문제점은 역사를 버리고 영원으로 도피하는 것이 잘못이다. 희망의 역사관은 역사 속에 악이 존재함에 불구하고 예수의 능력이 더욱더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역사관이다. 그리스도부터 오는 새로운 역사관이 마침내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질 것을 믿는 역사관이다. 역사에 대한 깊은 개혁의 의지를 갖게 된다. 오늘 역사의 위기가 올지라도 낙심하지 않고 역사를 개혁하기 위해 역사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은 모든 교회의 개혁의 운동의 정신적인 운동이 되었다.
자유주의 신학의 역사관의 긍정적인 점은 하나님 나라가 이 역사 속에 나타남은 좋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죄악의 역사 인식을 가지고 있지 않고 있다. 이 신학이 20세기 초엽까지 지배하고 있었다(1차 대전이 일어나기까지). 유럽전역은 새로운 정신이 생김. 200년이 지배한 자유주의를 무너뜨리고 정통주의를 새롭게 정리한 학자가 칼 바르트이다. 200년 무너진 정통주의를 20세기 세계관으로 다시 복구함. 그래서 신정통주의라고 부른다. 17세기 정통주의를 구정통주의라고 한다. 신정통주의의 신은 옛, 새를 구분하는 신이다. 이것을 우리나라에서는 신신학이라고 부른다. 이 신신학은 자유주의 신학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왜 한국에서 바르트를 자유주의신학자로 부르는가? 여기서 한국에서는 바르트신학의 오해로 인한 비참한 비극을 갖게 된다.
자유주의신학의 특징들
20세기 들어서면서 칼 바르트가 등장하여 200년 무너진 정통주의를 다시 회복함. 바로 신정통주의인데 그 특징을 보면,
1. 성서의 신언성의 강조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함. 초기바르트의 신학을 하나님의 말씀의 신학이라고 지칭함. 이것은 굉장히 놀라운 일이다. 전까지 이렇게 말한 것은 무지함을 드러내고 학문성이 없는 무지함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 시대적 상황을 보면 이렇게 강조한 것은 성경의 영감을 강조하였는데 자기의 선생인 아돌프 하르낙과 공개논쟁을 함. 하르낙과 바르트는 호랑이와 토끼와의 싸움과 같다. 유럽신학의 대가를 대표하는 신학자가 바로 하르낙이었다. 이런 분이 바르트의 글을 읽고 학문적 신학을 조소하는 형편없는 학자라고 말하면서 논쟁을 함. 이와 더불어 바르트는 하나님의 말씀의 신학자라는 이름을 불렀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을 논리적이고 합리적으로 증명한다는 것은 매우 힘들었다. 그런데 바르트는 성경의 오류들을 어떻게 봐야 되느냐? 이 물음을 답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는 하나님의 계시는 인간적 도구들로 전달된다고 말한다.
성서는 계시의 책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 예수그리스도의 계시의 말씀은 정확무오한 말씀이며 이것이 전달될 때 인간적 도구로 전달된다. 계시가 구전의 과정에서 인간에게 왜곡되었다는 것이다. 실지로 우리에게 전달된 말씀은 인간적 도구를 가지고 전달된 말씀이라고 말하면서 성경은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이 서로 섞여 있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향유부음의 사건에서 머리에 부음과 발에 부음의 불일치가 나타나는데 실지로 이런 성경의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전달되었는데 이 전달이 인간적인 요소가 삽입되어서 우리에게 전달되어 잘못 왜곡되는 경우가 많다.
성경의 본질은 아기 예수라는 것이다. 구유를 보면 아기 예수 아닌 것이 있다는 말이 성경과 상응하다.자유주의는 인간적 요소를 발견하면 이것을 인간의 말로 단정 짓는 것이 신학적 오류라고 말한다. 옛 전통주의자들은 성경을 기계적 영감으로 해서 인간적 요소를 배제하였다고 말함. 이 둘 중에 큰 오류를 범한 것은 자유주의신학자라고 말한다. 성경 안에 인간적인 요소를 인식하지 않는 것이 오류지만 바르트가 택한 것은 정통주의를 자유주의보다 더 지지한다고 말한다. 이유는 성경의 본질을 이해했기에 그렇다.
성경은 위에서 내려온 계시의 말씀이다. 이와 같은 바르트의 성서관이 신정통주의성서관이다. 17세기 정통주의 성서관과 비슷하지만 종교개혁자와는 거의 차이가 없다고 많은 사람들은 얘기한다. 루터는 모세가 모세오경을 기록하지 않았다고 해도 상관이 없다. 또 열왕기는 민수기에 비해서 엄청나게 좋다. 요한복음과 바울서신은 로마서와 베드로편지들은 모든 책들 가운데 알맹이요 골수이다. 사도바울의 편지들은 마태, 마가, 누가 3복음서보다 위에 있다. 이런 내용들은 로터는 성경을 똑같이 보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근본주의사고 속에 놓였기에 성경이 똑같이 절대적이라는 사고에 익숙해졌다. 그런데 루터는 성경 안에 어떤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히브리서는 복음서와 사도 바울의 편지에 반대된다. 성경 안에서도 엇갈리는 사상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야고보서는 복음서와 바울서신에 비하면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말한다. 이유는 복음의 본질을 가지고 있지 않고 있기에 그렇다. 요한계시록은 사도의 책이 아니다. 이 책은 도미시안 황제 시 기록된 것인데 사도요한이 살았을 가능성이 없다. 요한 정신과는 차이가 크다. 문체도 크게 다르다. 여러 관점에서 동일한 저술로 보기는 어렵다. 요한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어떤 사람의 글이라는 사실이 우세하다. 루터는 근본주의자들이 갖고 있는 성서관과 다른 성서관을 가지고 있었다. 루터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이 개신교정신을 출발시킨 루터는 무엇을 강조했는가? 권위 축을 교황에서 성서로 옮긴 것이 위대하다. 루터는 성경의 축자적 무오를 주장한 사람이 아니다. 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것을 강조한 분이 루터이다.
이것이 한 세기가 흘러가면서 문자적 무오의 말씀으로 발전되었는데 이것이 17세기 정통신학이다. 칼빈의 성서관은 17세기 성서관과 일치하지 않는다. 행7:17 눅는 창에 비추어 실수했다. 이 부분은 수정되어야 한다. 성서 안에서도 실수가 있다는 것을 제시한다. 옙 4:8 주석에서 시편말씀을 언급하면서 바울은 자신의 주장을 하기 위해 본래의 의미를 벗어나서 기록하고 있다. 만물이 인간에게서 받으시니 이 시편의 구절은 완전히 정반대 의미로 바뀌어 기록함. 벧후에서 이것은 베드로의 글로 인정할 수 없다. 행 4:6에서 예루살렘 대제사장 연대기를 보면서 눅 견해보다 요세푸스견해를 의존한다. 칼빈도 축자적 영감론을 갖고 있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 칼빈은 성서의 부분적인 문제를 갖고 시비를 거는 사람에 대해 대단히 못 마땅히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무오하신 말씀이다. 부분적인 오류들도 있다는 것을 칼빈도 잘 알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루터나 칼빈은 성서의 말씀이 무오하신 하나님의 말씀임을 강조한 분들이다.
이 한 세기가 지나가면서 이것은 기계적 영감론으로 발전됨. 이에 대해 자유주의의 공격을 받았던 것이다. 종교개혁의 성서관을 20세기 상황에서 설명되어준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을 정통주의정신이라고 말한다.
바르트는 역사비평학을 정당하다고 말했다. 이 학문은 성경연구에 필요하다. 이것은 한계를 가지고 있다. 성경의 인간적인 측면을 파악하는 역사비평학의 한계라고 성경의 신적인 측면은 침범할 수 없다는 것이다.
유럽의 역사비평학을 미국은 고등비평학이라고 말하는데 이와 같은 바르트와 신정통주의자들의 성서이해는 종교개혁사 정신을 이어받은 자유주의에서 붕괴는 성서를 회복시키는 공헌을 하였는데 근본주의자들의 눈에는 성서의 오류를 인정하고, 역사비평학을 받아들이고 있다고 비판한다. Van Til 이라는 사람은 바르트를 자유주의학자라고 비판한다.
종교개혁사 정신을 회복시키고 자유주의학자를 넘어서는 큰 공헌을 하였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전하게 되는 신학적 토양을 마련했다. 침몰직전의 성경을 살려냈다라고 얘기할 수 있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한 신학이다.
바르트는 역사의 예수그리스도 그분이 바로 자기계시다. 역사에 자기 자신을 완벽하게 드러냈는데 예수그리스도이시다. 그러기에 이 분은 참 하나님이다. 삼위일체론을 신학의 골격으로 회복시킴.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이해가 그 중심으로 들어있는데 예수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자기 계시임을 강조함.
3. 계시의 질적 차이
예수그리스도의 계시는 뜻밖의 사건이다. 철학과 이 세상으로 알 수 없는 뜻밖의 은총의 사건이다. 종교는 인간이 만든 것인데 율법적이다. 계시는 위에서 내려온 것인데 종교를 부정하게 한다. 종교가 말하는 신은 참 신이 아니다. 종교는 우상숭배라고 받아들인다. 20세기 타종교에 대해 비판한 사람은 칼 바르트이다.
4. 속죄론의 회복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만민을 속량하기 위한 속죄의 죽음이었다고 말함. 예수의 속죄의 죽음에 자신의 신학에 기초로 세움.
5. 하나님의 주권의 신학
바르트는 역사가 하나님에 의해 지배된다고 생각함. 하나님이 통치하는 곳에 하나님 나라가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역사는 하나님의 은혜에 반역하는 역사라고 보고 인간의 역사위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고 생각. 인간의 역사에 희망이 있다면 하나님으로부터 온다고 생각함.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 주권과 반대되는 인간의 행위는 기도가 강조된다. 바르트의 기독론을 읽으면 감동이 된다.
6. 만남과 사건으로서의 진리
참 진리는 만남 속에 있다고 보았다. 브루너도 만남으로서의 진리라는 책도 있는데 Wahrheit als Begegnung 이것이다. 투르나이젠은 칼바르트를 연구하면서 유명한 실천학자가 되었다. 만남으로서의 진리가 신정통주의의 진리이다. 참 진리는 만남 속에서 알려진다. 김치는 먹어봐야 한다. 이것이 중요하다. 김치의 분석을 위대하게 했지만 김치를 먹어보지 않으면 모른다. 이것이 만남 속에서 알게 되는 것이 진리이다. 특히 종교적 진리 속에 그렇다. 하나님과의 만남 속에서 진리를 알게 된다. 예수의 부활은 하나님과의 만남 속에서 알게된다. 19세기 역사관을 극복하기 위한 시도에서 나오는 것이다. 부활의 역사성, 반복될 수 있는 것만 역사성이 있다고 보았는데 이것이 19세기 역사관의 특징인데 부활은 신화라고 판단한다. 19세기에 부활은 역사 속에서 밀려가버렸다.
신정통주의자들은 만남 속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게 되었다. 비판적으로 말하면 실존 속에서 경험하게 되었다. 진리는 실존 속에서 경험하게 되었다. 하나님 자체를 실존의 테두리 안으로 제한시킨 것이 바르트에 대한 비판이다.
최근의 역사관은 미래개방적인 특징이 있다고 보았고 일회적이고 끊임없이 새로운 것이 되어야 한다고 바뀌어졌다.
신정통주의 신학은 정통주의를 20세기적 해석내지는 복구라고 알게된다. 이 신학이 신신학으로 한국에 알려졌는가를 알아보자. 1620년 경 유럽 사람들의 미국으로 이주함. 유럽의 17세기신학을 가지고 미국 땅으로 들어감. 유럽의 17세기 신학은 19세기까지 지속을 함. 특별히 장로교회와 관련해서 찰스 하지, BB 워필드라는 학자는 옛 정통주의 신학을 옛 프린스톤에서 가르침을 받았다. 이 분에게 교육을 받은 사람이 한국 땅에 건너온 선교사들이었다. 유럽 땅에 17세기 정통주의신학 유형을 가지고 한국 땅으로 건너왔다. 이것이 평양신학교의 기초가 되었다. 이것이 한국에서 20세기를 지배하는 신학이 되었다. 거의 한국민들은 옛 정통주의나 근본주의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 대부분이다. 바르트 신학은 우리의 신학 정체성을 마련하는 중요한 과목이다.
유럽에서 옛 정통주의 신학이 붕괴되고 자유주의신학이 승리함. 18세기 계몽사상과 자유주의신학이 미국 땅에 건너왔다. 18세기 말-19세기말은 유럽이 세계 신학을 지배함. 미국장로교 안에서 자유주의신학의 영향을 준 사건은 브리스 사건인데 유니온신학교에서 브릭학자가 고등비평을 가르침. 1891년 파면을 당함. 미국장로교회도 19말 자유신학적 흐름이 영향을 미치기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지배적인 정신이 되지 못하였다. 이 사건은 장로교 안에 큰 충격이 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유니온신학교가 장로교와 결별하게 되었다. 미국장로교회의 19세기말 상황이었다. 미국에 있던 보수주의에 있던 자들이 인본주의적인 것을 밟아야 함을 생각함. 1895년 나이야가라에서 모여 보수대연합을 일으킴. 이것이 근본주의이다. 이것이 미국에서 생긴 운동이다. 주체자들은 구파 칼빈주의자들과 세대주의자들이었다. 세대주의자들은 영국 다비가 일으켰는데 영향을 받은 국가와 교파는 미국과 침례교파이이다. 20세기는 오순절교파가 영향을 받았다. 세대주의는 7세대로 나눈데 아담시대-노아시대-바벨탑시대-출애굽-예수탄생-오순절시대-천년왕국시대 이렇게 보며 이 주의는 문자주의적으로 본다. 휴거와 공중 재림과 7년 대 환란이 일어나고 천년왕국, 백보좌 심판이 있다고 본다. 시대마다 구원의 경륜이 차이가 있다고 말한다. 율법 전에는 양심을 통해서, 율법의 심판, 은혜의 심판이 시대마다 다르다는 사고를 가지고 있다.
근본주의 5대 신앙강령을 채택
1) 성경의 무오 2) 예수의 동정녀탄생 3) 예수의 대속적 죽음 4) 예수의 육체적 부활 5) 육체적 예수 재림
근본주의중심에는 성경의 무오를 강조하려는 흐름이다. 일점일획도 무오하다고 강조함. 이 운동은 효과적이었다. 미국의 자유주의신학에 제동을 거는 힘으로 작용함. 1910년 미국 북장로 교회의 교리 선언을 보면, 5대 선언 중 5번째를 예수의 이적 체험으로 바꾸어 받아들임.
1921년에 구파칼빈주의 대표학자는 B.B.Warfield가 숨을 거둠. 이 자가 주장한 것은 최초의 원본은 절대무오하다는 것이다. 이 자의 죽음은 근본주의 몰락과 관계된다. 이 죽음을 보고 슬퍼한 인물이 메이첸(Machen)은 근본주의를 마지막까지 고수한 인물이다.
1922년에 Fosdick이라는 사람은 설교를 잘 하신 분인데 이 목사님은 근본주의가 이길 것인가라는 설교를 하였다. 근본주의 편협성과 배타성을 비판함. 지금 세계가 실업과 기아와 전쟁으로 죽어가는 이 때 근본주의 교리를 가지고 고수하는 그들은 분명 패배할 것이다. 이것이 사람들이 이 글을 읽고 공감을 함으로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 설교를 읽고 분노한 목사님이 Macartney인데 불신앙이 이길 것인가라는 설교를 했는데 이것도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분노해서 총회에다 제소하였다. 그래서 결국 전자목사님이 패배했다. 치리할 것을 지시했는데 이것이 간단치 않았다. 뉴욕에 코핀은 불복종하여 파스딕 목사를 지지했다. 필라델피아의 소속의 매카니 목사와 뉴욕의 파스딕과 싸움이 벌어졌다. 지역노회 간에 큰 문제가 생겼다. 미국장로교회 안에 상황이 복잡해졌다. 파스딕목사가 스스로 교회를 떠나서 일단락되었다. 근본주의의 인기가 급락하는 상황에 놓여졌다. 근본주의는 자기와 의견이 다른 사람들을 용납하는 정신을 전혀 갖고 있지 않고 있다는 것이 널리 펴졌다.
원수의 재판으로 알려지는데, 스콥스 라는 사람은 법으로 금지된 진화론을 학교에서 가르쳤다. 브라이언목사님이 흥분해서 세상법정에다 재소하였다. 그러나 브라이언목사님은 우겼다. 결국 그 재판은 스콥스가 졌다. 일반국민들에게는 근본주의라는 이미지가 너무 나빠졌다. 진화가 하나님의 행위에 창조방법이라고 상당수 사람들이 생각을 갖고 있었다.
1925년을 기점으로 해서 미국동북부에서부터 근본주의가 급락하게 됨. 동년에 총회가 열었는데 미국의 방향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C.R. Eerdman이 총회장으로 당선됨. 이 분은 메이첸과 다르게 근본주의도 학설로 봐야 된다. 서로 관용하고 섬겨서 세계선교와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 그였다. 메이첸에게 큰 타격이 왔다.
1926년 장로교총회는 메이첸을 정교수로 승인하지 않게 됨. 1926년부터 승인이 보류됨. 연기됨에 따라 메이첸은 프린스톤을 떠나서 새로운 신학교를 만들 것을 생각. 1929년에 학교를 떠나서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만들었다. 따라간 대표학자는 반 틸(Van Til)이라는 이름이다.
1936년에 미국정통장로교회교단을 만듦. 군소교단이 되었다. 1965년에 교세가 만 2천 8백여 명이었다.미국장로교회에서 지지한 사람이 별로 없었다.
1930년대 프린스톤은 신정통주의 특징을 갖게 되었다. 존 맥케이라는 학장이 되었다. 미 프린스톤의 신학적 변천은 1910년 근본주의 지배, 1920년 혼란기 - 1930년 신정통주의를 따름.
메이첸과 근본주의는 변호하게 됨. 신정통주의는 성서비평학을 받아들이고 성경의 무오를 인정하지 않기에 이 신학은 자유주의라고 신신학이라고 주장하게 되었다. 이 관계에 많은 책을 쓴 분이 반 틸 이다.자기 학교에 그런 정신으로 무장시킴.
이 사건이 우리나라 한국에 큰 영향을 주었는가. 1920년대에 한국의 운명을 좌우하는 사람들이 유학을 하게 되었다. 한경직 목사. 박형용 박사, 김재준 목사가 유학을 하게 되었다. 박형용은 메이첸의 사랑을 받았다. 박형용은 메이첸을 따라 받듦. 그래서 근본주의를 받아들임. 메이첸의 근본주의가 박형용을 통해 한국에 영향을 끼쳤다. 박형용 박사에게 가르침을 받은 사람은 신정통주의를 자유주의신학으로 인식하게 됨.
정통장로교회인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는 전쟁이 일어났다. 세대주의에 대해 논쟁이 붙었다. 시대마다 구원의 경륜이 다르다는 것에 반해 세대주의용인유무와 술, 담배 유무가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그래서 분열되어 칼 맥킨타이어(페이드 데오로지 세미너리)가 성경장로교회를 만듬. 이 그룹은 세대주의를 용인한 그룹이다. 웨스트민스터는 세대주의를 반대했다. 교리의 순수성을 지킨다고 논쟁하고 싸움을 하였다. 1930년대 후에 근본주의가 사라져 가는 신학사조가 되었다. 근본주의 원산이 웨스트민스터신학교는 자신의 교리를 개혁주의로 말하고 있다. 20세기 진정한 개혁주의는 칼 바르트에 의한 개혁신학의 중심인데 우리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1929년에 세워진 웨스트신학교 안에서도 갈등이 심화되어 페이드 신학교를 맥킨타이어가 세웠는데 이것을 가리켜 신근본주의라고 부른다. 세대주의를 용인할 수 있는가 없는가에 대한 싸움이 생겼다. 30년대 근본주의는 소멸해갔다.
진정한 개혁학자는 바르트, 브루너, 에벨링 이 주를 이루는데 / 하지-워필드-메이첸-반틸-라인으로 가고 있는 것이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말하는 개혁주의라고 부른다.
신복음주의가 생긴다. 풀러신학교가 1940년 등장하면서 생김. Ockenga박사가 자신의 학교가 지향하는 방향을 신복음주의라고 지칭함. 학자는 헨리, 버나드 램, 헤리슨 등이 있다. 잡지는 크리스차너티 투데이가 있다. 이것이 지금의 복음주의라는 흐름이다.
복음주의가 확장된 계기는 1974년 로잔 세계 복음화 대회가 열려서 빌리그레엄 목사가 신복음주의를 선전하는 대표자이다. 유럽에서는 바이어하우스 학자 중심으로 프랑크푸르트 성명이 발표되었다. 하나님의 선교를 천명하자 여기에 불만을 품은 유럽의 학자들이 선교는 예수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다. 이 운동을 주도한 학자가 바이어하우스이다. 1974년 로잔대회는 73년 방콕대회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운동이었다. 1947년 풀러 신학교가 시작되는데 80년에 거대한 운동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W. C. C를 대적하는 운동이 바로 복음주의 운동이다. 이 운동은 그 흐름으로 보면, 과거의 근본주의 운동에 있었던 사람들이 자신의 신학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서 신정통주의 입장에 일치시키지 않는 자들이 신복음주의로 가담하게 되었다. 오늘날 신학은 복음주의 신학과 에큐메니칼 신학의 흐름으로 보고 있다.
신복음주의의 특징은
1) 근본주의를 비판함. 비신학적이고 비학문적이다. 교파주의적인 특성이 강하고 분리주의적인 특징이 있다. 문서운동이 결여되었고, 역사성이 결여, 문화와 사회의 관계성이 결여됨.
2) 성경의 무오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있다. 성서의 역사비평학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것 때문에 근본주의의 변형된 형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3) 과학과 성경을 조화시키려는 특징이 있다.
성경의 무오를 주장하려면 합리적인 해석을 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래서 독특한 조화를 이룬다. 성경과 과학을 조화시킴. 창1장에서 하나님은 세상을 6일 만에 창조함. 자연과학자들은 45억년이라고 주장한다. 태양계와 우주의 기원은 200억으로 보고 있는데 자연과학과 성경은 매우 차이가 맞지 않는다. 6일의 창조를 6시대의 구분에 의해 이루어지는 상징적인 표현이라고 말한다. 이 논리에 의하면 해와 달이 창조되기 전에 첫째 날은 오늘의 시간에 24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이 시간으로 하루라고 말한다. 그래서 이날은 1억년이 될 수 있고 10억년이 될 수 있다고 해석한다. 이런 논리에 의해 성경과 과학은 맞아들어 간다고 주장한다. 과학적인 사고를 하는 현대인들에게 많이 설득시키는데 기여했다. 옛 근본주의자들은 이들에 맞서 과학을 위해 성경을 팔아먹는 사기꾼이라고 비판하는 자들이 근본주의자들이다. 과학을 정죄하고 성경을 받아들이는 것이 좋은가. 합동 측 분열에 신복음주의에 대한 논쟁이 있다.
노아의 홍수도 의문이 있다고 버나드 램이 주장한다. 도저히 그 방주 안에 생물이 들어갈 수 없다고 생각한다. 과학적으로 맞지 않다고 하면서 지구 전체를 온 세상으로 보지 않고 지역홍수로 바꾸었다. 그래서 과학적으로 어울린다고 주장한다. 근본주의자들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복음주의는 과학적 사고를 하는 사람들을 설득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성서비평학적으로는 이것을 어떻게 보는가? 답은 구약학의 일반적인 흐름을 창1장의 P문서로 보는데 이것은 이스라엘사람들이 바벨론 포로시에 기록되어져 있다고 본다. 바벨론의 창조신화를 보면, 말뚝이라는 바벨론의 신이 있는데 태초에 말뚝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6일 만에 창조하니라라고 기록되었는데 이것이 성경의 창조와 거의 비슷하다. 말뚝이 사람을 창조하는 것까지 동일하다. 어떻게 이렇게 닮을 수가 있을까라는 신학적인 문제가 대두되었다. 노아홍수도 마찬가지다. 수메르인의 홍수설화가 있는데 이것도 비슷한 이야기가 기록되었다. 이것도 성경의 이야기와 닮았다. 이것을 주장하면서 자유주의자들은 정통주의자들의 어리석음을 맹렬히 비판한다. 학문적으로 자유주의자들을 이기는 것은 매우 힘들다. 종교 간의 서로 주고받는 설화인데 너희들만이 어떻게 독특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느냐라고 자유주의자들은 비판한다.
성경은 계시라는 차원으로 유지시키는 것은 없을까라는 신학적인 과제를 골몰하기 시작하였다. 근본주의자들이나 복음주의자들의 신학변호는 문제가 있음을 인식하면서 어떻게 봐야 하는가라는 고민 속에서 신정통주의자들이나 구원사적인 자들은 어떤 영향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데
창1장과 말뚝의 창조설화는 유사한데 그 가능성은 3가지가 있다. ①우연히 유사하다 ②말뚝의 설화는 성경의 영향을 받아 기록됨 ③성경이 말뚝의 창조설화에 영향을 받음. ①의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생각함. 핵심적인 문제는 어느 것이 오래 되었는가이다. 이 두 가지를 비교해보면 말뚝의 창조이야기가 훨씬 오래되었다. 그래서 창조이야기가 큰 도전을 받았다. 유럽의 보수적인 학자들은 모두들 고통스런 고민 속에서 결론은 성경과 말뚝창조이야기의 사이에는 유사성이 있는데 성경이 말뚝의 영향을 받았지만 큰 차이점이 있다. 하나님의 메시지가 들어있다는 것이다. 창세기의 저자는 그 당시 말뚝의 창조설화를 가지고 와서 바로 천지를 창조하신 것은 하나님임을 강조함을 말하고 있다. 사람의 창조시를 보면, 말뚝 창조설화는 신의 종으로 사람을 창조함. 이것은 정치적인 의도가 들어있다. 바벨론의 신을 섬기는 것은 그의 아들인 왕을 섬기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창1장의 선지자는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임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을 닮았다임과 동시에 하나님을 대신하는 의미가 있다. 사람이 땅의 것을 다스리는 자로 창조되었다. 이것은 인간의 해방의 복음이 들어있다. 이것은 정말 놀라운 복음이 들어있다. 많은 보수적인 학자들은 바로 이 속에 창1장의 기록의 메시지는 천지를 창조하신 분은 하나님이며 마지막으로 사람을 창조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신 오묘한 진리를 나타내준다. 하나님을 제외한 다른 것은 다 피조물이며 인간의 책임과 다스림 본질이 정확하게 들어있다.
폰라드 이후에 구약에서 메시지를 찾는 것이 강조된다. 본문 속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찾는 것이 강조된다. 성경은 자연과학적인 책이 아니라 우리에게 신앙을 가르쳐주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창조주이시며 이 창조주가 인간과 피조물과의 관계를 설명하는데 기본적인 초점이 있다. 그래서 이것은 시대적으로 보면 독특한 의미가 있다. 이스라엘의 종교의 회복을 위한 의미가 있다. 바벨론포로생활이 길어지면서 이스라엘의 신앙의 위기가 오게 된다. 이 한복판에서 이 가르침이 설파된다. 바벨론의 신이 아니라 하나님이 역사를 다스리신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다. 우주만물을 만드시고 다스리신 분은 오직 하나님임을 강조하면서 메시지를 주는 것이다.
성경 안에는 신화와 전설이 다 들어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로서의 하나님의 말씀이며 우리에게 말씀하신 메시지가 우리에게 들어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런 사고가 신정통주의사고라 할 수 있다. 유럽에서 보주적인 학자들의 견해이다. 신정통주의학자들이나 구원사학학자들의 주장이 위의 내용이다.
신복음주의는 성서비평학을 사용하지 않는다.
4) 정치적 중립입장을 취하는 특징이 있다. 답은 공동의 선을 추구한다. 해방신학자들이 약한 자와 연대해야 함을 강조한다. 그런 상황에서 당파성이 맞지만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이세상은 대개 경우를 보면 어느 한쪽이 옳고 그른가 보다는 상대적으로 하는 경우가 있다. 70% 잘못된 것은 30%를 고치는 것을 말한다. 중립은 공동의 선을 추구하는 것은 역사 현실 속에 참여하는 것을 말하며 약하거나 곤경에 처하면 당파성도 배제할 수 없다.
5) 전도의 우선권=복음주의자들은 전도를 중요하게 여긴다. 협력적 전도를 강조한다. 성경의 무오의 신앙과 전도의 강조의 특징이 있다. 전도시 협력하려는 특징이 있는데 이것이 옛 근본주의자들과의 차이가 있는 장점이다. 이것이 오늘날 W. C. C에 대항하는 거대한 운동의 계기가 되었다. 신학사조가 달라도 합친다. 복음주의는 근본주의와 신정통주의와의 사이에 있는 중간 쯤 있는 보수성을 가리킨다.
한국에서는 ACT신학교가 복음주의성향이 강하다. 자유주의는 감리교쪽이다. 변선한교수가 대표자이다. 장신대는 복음주의와 신정통주의사고가 혼재하고 있다고 본다. 우리학교는 개혁신학의 보류이다.칼 바르트-브루너-에벨링-몰트만 등이다. 기장의 보수측 전경연교수도 이 흐름에 계승되고 있다.
Ⅱ K.바르트의 생애와 중요사건들
바르트 아버지는 베른 대학의 신약학 교수였다. 바르트는 베른에서 공부하고 베를린으로 학교로 옮겨 거기서 쿵켈과 하르낙에게서 배웠다. 아버지는 베를린에서 공부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튀빙겐에서 공부하길 원했다. 거기에는 쉴라터 라는 학자가 있었다. 바르트는 아돌프쉴라터 밑에서 공부를 배웠다. 도저히 쉴라터 밑에서 공부 못하고 한 학기 만에 튀빙겐 맑북으로 옮겼다. 거기에는 헤르만 밑에서 공부함. 새 시대가 동터 오르는 감격했다고 얘기할 정도로 부지런히 배웠다. 젊은 시절의 바르트는 완벽한 자유주의신학자라고 말할 수 있다.
1909년 제네바에 가서 전도사 생활을 한다. 독일어로 전도사를 Vikar라고 부른다. 2년간 생활하다가1911년 Safenwil에서 목회를 11년간 함. 1915년에 스위스 사회민주당에 가입함. 사회주의실천을 강조한 자펜필의 붉음이라는 자칭도 얻었다. 여기서 목회하는 동안에 1차 대전을 경험하면서 거기서 충격을 받으면서 1919년에 로마서 강해 1판이 출판됨. 그러면서 바르트의 이름이 독일에 알려짐.
1921-30년 젊은 교수로 알려짐 1921년에 괴팅켄 대학, 뮌스터, 본 대학으로 옮김. 이 시기 변증법적인 신학을 발전시킴. 1925년 뮌스터 대학으로 1930에서 1935년에 본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함. 이 시기가 히틀러와 투쟁함. 히틀러와의 투쟁에 진입 1934년 바르멘 신학선언 이것은 바르트가 기초한 유명한 신학선언이다. 이것을 발표하고 본대학교수직에서 해직당함. 1935년-1965년 바젤대학에 교수로 재직함.저술은 바젤에서 기록됨. 신학적 성숙이라고 볼 수 있다. 1935년에 추방되어 바젤로 갔기에 목숨을 건졌다. 바르트는 스위스사람이다. 자기 고향 바젤에서 신학적 성숙을 가졌다. 본회퍼는 바르트에게 욕을 굉장히 먹었다. 본회퍼는 독일에서 고백교회의 신학적 지도자로 있다가 순교했다. 욕을 많이 먹은 본회퍼는 순교당함. 1962-68년에는 은퇴시간이다. 바티칸 공의회에 참석함
중요한 사건은
1) 1915년에 스위스 사민당에 가입함. 바르트는 사회주의자인가? 초기에는 사회주의에 연류 되었다.
2) 1923년 하르낙과 논쟁을 베를린에서 한 사건. 공개논쟁 속에 그래서 답변을 함. 신학의 과제는 설교이다. 역사비평학의 한계를 강조함. 여기에 대해 하르낙은 신학교리를 설교집으로 바꿨다. 하르낙은 예수를 설교하기 전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 논쟁은 대단히 심각한 논쟁이었다.
3) 나찌 히틀러와의 투쟁 사건. 바르트가 세계적 명성을 얻게 된 계기는 로마서 강해와 나찌 투쟁의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이 없었으면 독일교회의 신학의 아버지가 될 수 없다고 본다. 독일은 루터파 신학이 지배한 나라이다. 소수파는 개혁파이다. 독일은 칼빈보다 루터를 좋아한다. 복음의 뜨거움으로 가슴이 가득 찬 학자라고 보고 있다. 칼빈은 냉냉하고 죽음을 좋아하는 자라고 비판한다. 바르트는 개혁파 신학자이다. 이 개혁파 신학자가 독일교회의 신학의 아버지라고 지칭한 결정적인 계기는 히틀러와의 투쟁과 고백교회 그리고 바르맨신학 선언에 기초했기 때문이다. 이 선언은 독일교회의 신조가 되었다.
바르트의 조교가 헬무트 골빈처였다. 이 분도 유명한 신학자이다. 베를린에서 대모가 일어나면 영감한 사람이 앞장선다. 바로 골빈처라는 영감이었다. 본 대학에서 교수였던 당시에 조교가 그였다.
바르트신학은 정치적인 특징을 담고 있다. 인용하면, “나의 신학은 구체적으로 표현했던 안했던 강한 정치적 문제를 담고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현실을 깊이 생각했던 사람이었다. 현재 일어나는 그 상황을 신학적으로 생각하고 해결하려고 했던 사람이다. 오늘의 현실의 문제에 답을 주려했던 학자였다.현실의 문제에 대한 답을 주려고 하는 것이 핵심이다. (조직신학은 설교의 주제라 할 수 있다. 흔히들 성경을 가지고 설교한다는 것은 잘못이다. 설교는 성경의 내용을 통해서 오늘의 현실을 점검하고 하나님께서 이 현실에서 무어라고 말하는가? 이것이 설교이다. 이 시대의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발견하여 기록한 것이 교회교의학이다. 조직신학공부를 많이 하면 설교를 무게 있게 하게 된다). 바르트의 신학이 그 특징이 있다. 현실에 일어나는 그것을 신학적으로 답을 하는 것이다. 초기 나찌에 대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답했다.
4) 여비서가 있었는데 그 이름이 킬시 바움이다. 바르트는 교회교의학을 쓰는데 여비서의 도움이 컸다. 1924년에 여비서를 알게 되었다. 본격적으로 돕기 시작한 것은 1930년부터 도와주었다. 이 여비서의 도움이 없었으면 하루도 자신의 일을 진전시킬 수 없었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킬시 바움이 먼저 죽었는데...바르트의 전기를 보면, 여자의 이야기가 한 장씩 나온다. <합동측 박윤선박사도 여비서가 있었다.저술 활동에 도움을 주었다.>
바르트가 일생을 사랑했던 2가지 있다.
①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였다. 여기서부터 은총의 신학이 발전했다. 20세기 바르트만큼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을 발견해 낸 사람은 없을 정도였다.
②모차르트를 좋아했다. 그 음악에서 자유와 희열을 느꼈다. 잠도 모차르트음악을 듣고 일어났다.
바르트는 바하는 유대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모차르트음악이 세속적임에도 불구하고 더 좋아했다. 이 음악이 복음을 잘 표현하고 있다고 말했다. 비극적 운명위에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 과연 무엇이 잘 표현했는가.
6) 상당한 변천을 가졌는데, 신론을 연구하면 6번의 변천이 있다. 그는 신학이 왜 많이 변했을까. 바르트는 신학의 변천이 컸다. 신학적인 경향과 관련이 있다. 인간이 하는 것은 무효이다라고 생각하고 다시 시작할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함. 그리고 그의 생애가 굴곡이 많이 있었다. 1차, 2차 대전과 유럽의 평화 이런 사건의 변화 속에서 살고 있었다. 이런 시대를 겪으면서 신학이 변천했다고 얘기할 수 있다. 시대의 변화에 신학의 답을 제시하려니까 신학의 변천이 많이 있었다고 본다.
일생의 적 3가지 있다.
① 19세기 문화기독교 자유주의신학이다. 그 이유는 인간의 것으로 신적인 영광을 입히려고 하는 신학이 바로 자유주의신학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② 경건주의이다. 그 이유는 경건주의는 일종의 율법주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경건주의자들의 지옥”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이 신학에 반대해서 은총의 신학을 전개한 사람이다. “나의 신학에 문제가 있다면 심술 사나운 율법주의자다”라고 말한다.
③ 로마 가톨릭이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영을 교황이 대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큰 잘못이다.그래서 초기에는 가톨릭을 적그리스도라고 말한다. 1913년에 설교에서 “예수의 영과 교황의 영은 한 지붕아래 동거할 수 없다”라고 말한다. 또한 가톨릭의 자연신학을 싫어했다. 자연적으로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은 우상을 숭배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철학적으로 하나님을 알려고 하는 것은 복음과는 거리가 멀다고 말한다.
Ⅲ. 로마서 강해 제1판(1919)의 신학
1918년에 탈고가 되었고 1919년에 출판되었다. 바르트는 헤르만의 신학적 경향을 받았다. 자유주의 신학적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첫 목회시 자펜빌에서 설교나 글을 보면 완벽한 자유주의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의 땅위에 있는 제2의 신이다. 인간의 활동은 언젠가는 완전한 것이 될 것이다.”
이 시기에 그는 종교사회주의 정신을 가지고 있었다. 헤르만, 쿠터의 신학적 영향을 받으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운동은 사회주의운동으로 생각함. “예수 그리스도와 사회주의운동”의 글에서 여기에서 예수께서는 단결의 하나님, 사회주의 하나님밖에 계시지 않았다. 오직 단결의 종교, 사회주의 종교만이 있을 뿐이다“라고 말함. 1913년 ”돔“글에서 사회 민주주의적 의지는 정치적 영역에서 절대자 하나님께서 깊이 고려된 것으로 가장 탁월한 것이라고 말함. 참된 그리스도인은 사회주의자들이 되어야 한다. 사회주의자는 그리스도인임에 틀림없다고 말함. 이 시기에 바르트를 자펜빌의 붉은 목사라 지칭한다.
이런 바르트가 어떻게 정통주의자로 알려졌는가? 그 계기는 1914년에 일어난 세계 제1차 대전이었다. 93명의 지식인 가운데 전쟁의 찬성을 하였다. 이 가운데 헤르만, 베를린의 하르낙의 이름도 그 속에 있었다. 여기에 대한 충격을 후에 이렇게 기록됨. 그해 8월 초순은 나에게 암흑의 날이었다. 전쟁의 선포에 지지성명을 발표한 날이었다. 지지성명자중에 나의스승들이 있었기에 나는 이런 것들을 배우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바르트는 이 전쟁이 죄악의 전쟁임을 알았다. 그래서 자신의 스승들이 전쟁지지성명을 발표한다는 말에 그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1915년 초까지 자유주의사고에서 못 벗어났다. 이 당시 큰 충격을 받았을 뿐이다.
바르트가 새로운 바르트로 출발한 것은 1915년 4월에 일어난다. Bad Boll로 가서 불름하르트와 깊은 대화를 하게 되었다. 여기서 뭔가 깨달았다. Ch.Blumhardt를 만난 것은 새로운 계기이다. 자기 아버지의 요한 불름하르트와 함께 독일의 위대한 신학자이며 목회자이었다. 이 자들은 바로 경건주의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요한 불름하르트는 귀신 추방의 능력도 가지고 있었다. 크리스토퍼 불름하르트의 가계에 내려온 중요한 전통은 예수는 승리자이다(Jesus ist Sieger!): 예수의 능력이 마귀를 몰아내고 죽음의 세력을 몰아낸다는 중요한 정신은 칼 바르트의 정신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예수의 능력이 사탄의 세력을 몰아낸다는 정신은 아들에게는 사회적 구조속에 있는 마귀의 능력을 추방시키는 것으로 발전한다. 이것이 바로 예수의 능력이다. 중요한 핵심적인 정신이 바로 이 세상의 변혁의 정신은 인간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예수에게서 온다는 정신을 깊이 가졌다. 바로 위로부터 온 능력이 그의 부활에서 온 능력이 세상을 바꾼다는 정신을 갖게 하였다. 세상의 주체자를 바로 알아야 함을 깊이 깨달았다. 세상의 변혁은 하나님과 관련되어있다. 역사의 주체자는 바로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임을 인식했다. 자유주의자들의 사고를 깨뜨리고 철저한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이 세상을 변혁시킴을 깨달았다.
블름하르트를 만나고 나서 바르트는 성경을 읽을 때 옛 성경 읽음과의 느낌은 전혀 달랐다. 성경의 내용이 다르게 보였다. 비로소 성경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지금까지 자기가 성경을 멀리하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1916년 강연을 하는데 Das eine notwendige(단 하나 필요한 것) : 우리는 꼭 필요한 것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고 말하고 그것이 꼭 필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을 찾는 것이라고 말한다. 평화에 대해서 평화가 없는 것은 전쟁 때문이 아니고 우리가운데 하나님이 계시지 않고 있기에 그렇다라고 강연을 하였다.평화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한다면 전쟁은 없어진다고 역설한다.
1917년의 투르나이젠과 함께 펴낸 설교집에서 “하나님을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우리는 하나님을 잊어버렸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결과가 세계대전으로 귀결된다고 주장함. 우리가 살려면 하나님을 찾아야 된다. 강력하게 영향을 미친 핵심이 여기에 있다. 신앙의 주체인 하나님을 찾는 것이 큰 공헌이다. 이 설교의 주제가 유렵 200년 동안 사라져 갔는데 이 설교의 주제를 강조한 자가 바로 칼 바르트이다.
1915년부터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인간은 인간이다라고 말한다. 세상은 세상이다. 그해 11월에 “전쟁시대와 하나님나라”에서 언급한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식하는 것이 우리의 새로운 시작인 것이다.
로마서제1판의 핵심적인 내용은?
1) 세상을 새롭게 변혁시키는 하나님
: 세상을 새롭게 하신 분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새롭게 하시는 일을 인간적인 진보와 혼돈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세상적인 것이 신성화되어서도 안되고 인간적인 것이 신성화되는 것이 안된다. 이것이 민주주의든 사회주의민주주의든 마찬가지다. 평화주의 나 사회민주주의는 하나님나라를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인간의 나라를 대신하는 것이다. 그런 것들은 참 도움이신 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하나님만이 세상을 변혁하고 새롭게 한다. 이 하나님의 변혁은 세상을 계승하는 것이 아니고 새롭게 창조하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그것은 극단적인 변화이다. 이 하나님의 혁명은 인간적인 개선의 차원에 속한 것이 아니라 그러므로 그것은 세상의 혁명이라고 칭하는 것에 혁명을 의미한다. 따라서 하나님나라는 레닌주의 이상이다.? (이 표현은 큰 논쟁이 되었다. 마르크 바르트와 박순경 박사와 그 제자들-사회주의 이데올로기에서 긍정적인 면이 있다. 칼 바르트는 사회주의자다라고 부각한 것은 마르크바르트가 주장하였다. 박순경 박사가 이것을 이어받았다. 여기서 마르크 바르트는 이 본문에서 레닌주의이상까지 말한 것은 분명 더 철저한 사회주의 운동을 밀고 나가는 것에 하나님나라가 있다고 주장한다. 철저한 레니칼한 사회주의가 하나님나라라고 해석하였는데 이것은 완전 틀리다.) 이 표현의 의도는 인간이 만드는 그 어떤 것도 하나님나라가 아니다를 강조하려고 한 것이다. 극단적인 혁명을 강조한 레닌주의까지도 넘어서는 그곳에 하나님나라가 있다는 것을 강조하려고 한 것이다. 바로 하나님께서 건설할 때에 거기에 하나님나라가 존재하는 것이다.
2) 하나님나라의 건설의 전제인 하나님의 능력
: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형성된다.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이 마귀와 세상을 추방시키면서 하나님나라를 만들어낸다. 이런 차원에서 경건주의를 비판함. 세계사는 죽음의 힘과 영의 힘 사이의 전투이다. 죽음의 힘은 더 큰 힘인 하나님의 힘에 의해 분쇄된다. “세계사의 주제는 개별자로서 인간의 마음씨를 묻는 것이 아니고 거대한 객관적인 세력 즉 죄의 의에 세력과의 투쟁이다. 이 세력들 중 어느 쪽의 지배하의 존재함에 따라 개별자로서의 인간의 존재가 죽음으로 가느냐 삶으로 가느냐에 달려있다. 결정적인 문제는 어느편에 가담하느냐가 중요한 문제이다. 단순한 마음이나 도덕의 문제가 아니다.” 여기서 경건주의를 비판함. 도덕주의적, 율법주의적인 것을 비판함. 경건주의 문제는 선을 이루고자 하지만 선을 이루지 못하는 것에 문제가 있다. 경건주의 끝은 지옥이다라고 말한다. 개인적인 도덕적 경건에 대한 신뢰는 세상의 지배하는 것을 모르는 자유주의신학의 오류라고 말함. 인간이 죄에 의해 지배를 당했는데 이것을 모르고 도덕으로 변화시키려는 경건은 도저히 불가능하며 결국 자결의 종교로 전락하고 만다고 말한다.
율법밖에 새로운 의가 나타난다. 바로 인간의 노력으로 인간의 곤경에서 빠져 나온다는 것을 부수고 오직 생명의 능력으로 온다고 역설한다. 우리의 새로운 존재는 새로운 힘에 의해 이끌림을 받을 때 가능하다. 이 힘이 구원하시는 능력이다. 이 힘이 오고 있는 하나님나라를 성장시키는 에너지이다. 승리는 시온을 통해서 오는 것이다.
3) 세상을 부정하고 긍정하는 하나님의 변증법적 활동
현대신학과 오늘의 도전(10-12장)을 참고하시오.(로마서1판, 2판을 실음)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어떤 인간적인 혁명까지도 혁명해버리는 것. 그러면 인간적인 모든 활동은 하나님나라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가의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 현재 인간의 활동과 하나님의 활동 사이에 그 연결점이 그 문제가 된다. 그 연결점은 변증법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은 ?정? 속에 계시지 않고, ?반? 속에 계시지 않고 ?합? 속에 계신다고 말한다.
우리가 사회주의와 하나님나라의 관계를 예를 들면, 사회주의는 하나님나라이다. 사회주의는 하나님나라가 아니다. 정과 반이 흘러나오는 근원이 되는 합의 지점에 하나님나라가 존재한다. 사회주의 관련해서 언급하면 하나님이 이 시대에 사회주의를 통하여 일하신다면 사회주의는 하나님나라를 반영하는 거울일 수가 있다. 하나님께서 현재 존재하는 사회주의 속에서 하나님나라를 확장시키기로 원하신다면 이 범위 안에서 사회주의는 하나님나라의 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바르트는 직접적인 일치를 거부하고 유일한 가능성은 하나님에게 있으며 다시 말하면 정반합의 합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사회주의가 하나님나라를 반영하는 하나님의 도구가 될 수 있다.
평화주의도 마찬가지다. 그 자체가 될 수 없다. 하나님나라는 스스로 건설하는 그 곳에 존재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적인 도구를 사용하신다. 하나님에 의해 쓰임 받을 때 하나님나라를 반영하는 거울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이것이 로마서1판의 변증법적 신학의 구조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알 수 있고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어떻게 아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이 시점에서 하나님은 어떻게 무엇을 사용하는지를 명확히 설교해야 하는 것이 설교자의 과제이다. 한손에는 성경을 들고, 한손에는 신문을 들고 있어야 그 과제를 알 수 있다. 이 양자를 옆에 두고 깊이 연구하면 하나님께서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활동하시기를 원하시는지를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이것이 설교자의 과제이다.
여기서 바르트는 Warten / Eilen 두 가지 용어를 말한다. 전자는 기다린다는 의미로서 하나님이 어디서 활동하시는지를 알기 위해 우리는 기다려야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과 현실을 깊이 연구하면서 이 시점에서 하나님은 어디에서 활동하시기를 원하시는 가를 기다려야 한다고 말한다. 일단 찾아내면 지체없이 서둘러야 한다. 바로 후자의 용어의 의미이다. 그 운동에 동참해야 한다. 이것을 발견하고 동참할 때에 하나님나라의 군병이 되고 일꾼이 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 가르침은 불름하르트에게서 배웠다.
4) 역사 속에 성장하는 하나님나라
종교사회주의 운동에서는 손규택 번역의 ?예언자적 사회주의?를 참고하시오.
하나님나라는 역사 속에서 성장한다고 말한다. 어떻게 보면 19세기 자유주의신학의 연장선상에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예수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된 하나님나라의 운동은 성장하고 하고 있다. 육의 세계 한 복판에 영의 세계 영토가 계속적으로 펴져 나가고 있다고 말함. 이것은 변증법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 정신은 로마서강해 2판에서는 완전히 사라진다.
Ⅳ. 로마서 강해 제2판(1922)의 신학
로마서 강해 1판의 잘못된 부분을 고쳐야 한다고 생각하여 3년 만에 다시 썼다. 이 두 개의 책은 완전히 다른 책이다. 아예 처음부터 다시 쓴 것이다. 3년 사이에 신학이 달라졌다.
왜 이렇게 달라졌을까? 외적인 현실을 보면, 1판은 전쟁 전에 썼고, 2판은 전쟁이 끝난 뒤에 기록함. 2판 쓸 당시에 전쟁의 황폐화를 경험하게 되었다. 암흑기시기에 쓰여진 것으로 알 수 있다. 희망과 소망이 없을 때 이 2판을 쓴 것이다. 이 사이에 새로운 정신을 접함. 프랑스의 오버백의 말을 듣기 시작함. 과격한 종말론을 들음. 자기 형에 의해 플라톤과 칸트의 사상을 많이 연구함. 이 시기에 접한 사람은 덴마크의 실존주의자 키에르케고르를 접하게 된다. 위기, 종말, 역설 등은 키에르케고르에 의해 왔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시기에 러시아 소설가 톨스토엡스키의 작품을 읽었다. 인간의 부정적이고 어두운 면을 읽음. 이런 것들이 융합되어서 2판을 기록하는데 영향을 받았다. 핵심은 1판의 희망을 걷어내는 것이 2판이었다.
내용을 보면.
1) 하나님과 인간의 철저한 단절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다?는 말은 하나님과 너 사이에 단절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역과 인간의 영역이 다르다는 말이다. 하나님과 세상과의 사이에는 죽음의 선을 존재하고 있다. 이 둘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빙하와 황폐의 계곡이 있다.
1판에서는 사회주의가 하나님을 대신 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지만, 2판에서는 어떤 것도 인간에게는 하나님을 대신 할 아무것도 없다고 말한다. ?우리가 부정보다도 긍정에 몸담고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세상을 무한히 부정할 뿐이다. 하나님은 순수한 부정이고 우리의 비존재의 비존재이다? 낙관주의 비관주의를 부정한 것을 부정하는 것이며 부정하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과 관련이 없는 것이고 하나님은 순수한 부정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인간이고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다. 시간과 영원 사이에는 질적으로 차이가 있다는 사상이 담겨져 있다. 2판에서는 완전히 부정하는 구조의 흐름으로 간다. 어떤 것도 안된다는 것이다.
2) 세상 속에 존재하지 않는 하나님나라
하나님나라는 세상 속에 없다. 죄된 나라가 있을 뿐이다. ?시간적인 것은 하나님나라의 도구가 되지 못한다. 하나님은 시간의 세계 속에 그의 나라를 대신할 만한 어떤 것도 세우시지 아니하신다. 더 나아가서 구원사라는 것도 있을 수 없다. 구원사를 가정하고 구원사속에서 신성을 찾고자 하는 노력은 시간과 영원의 근본적인 차이를 간과하는데서 나오는 잘못된 것이다. 어떤 계약신학도 있을 수 없다? 교회는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는가? 이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교회가 하나님이 계시라고 말할 수 없다. 인간은 인간이라는 것이다.
3) 세상과 역사를 심판에 몰아넣고 심판하시는 하나님
이 세계의 종국은 심판이라는 것이다. ?전 세계는 하나님의 진노의 흔적이다. 시간과 영원이 마주치는 곳에는 세계는 위기 속에 휩싸인다. 하나님이 계시는 곳에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고 조각조각 부수신다.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모든 날들의 끝 날까지 십자가가 서있고 또 서있을 것이다.? 결국 인간은 인간이고 인간의 역사는 죄의 역사이며 이 세계의 역사는 심판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마치 이사야가 하나님을 만나 죽음을 경험하듯이 말이다. 그래서 인간은 그분 앞에 서면 자신의 죄악이 드러나고 심판과 죽음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 거룩하신 분(Das Heilige). 인간과 하나님사이에는 죽음 외에는 없다는 것이다. 틸리히가 2판을 두고 “바르트의 로마서 주석은 종교와 문화적인 예언자적 비판이다. 하나님과 인간의 창의력을 종합하려는 신프로테스탄트적 종합을 파괴하려는 것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강조하고 인간과 문화를 연결하려는 것을 박멸하는 의도를 가지고 기록한 것이다. 유럽인들의 정신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2판은 감동을 받는다. 다른 학자들은 인간의 노력이 망하는 것을 보니까 바르트의 말이 예언자적 목소리임을 인식하면서 깊은 감동을 받은 것이다. 자유주의자들이 놀던 놀이터에 떨어지는 폭탄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 하나님의 거룩성, 인간의 죄악성, 인간의 무능함을 잘 표현하였는데 전체적으로 보면 시원한데 뭔가 신학적으로 간단치 않는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4) 하나님의 존재와 행위에 불가해서
하나님을 우리가 어떻게 표현 할 수 있는가. 우리가 하나님을 얘기할 수 있는가?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바울의 말씀과 예언자들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냐? 여기서 “인간의 말은 하나님을 올바로 나타내지 않는다. 바울과 예언자와 하나님나라의 사도들에게도 타당하다. 모든 인간의 말은 예외 없이 하나님의 자신의 말이 될 수 없다. 인간적인 증언으로부터 자유롭다. 하나님의 대한 인간적 증언은 표현하였지만 실상은 성공하지 못한 좌절된 인간적 언어적 도구에 불구하다. 말이나 생각 속에 담거나 계시되지 않는다. 인간은 영원에 대해 표현할 수 없다.
이와 비슷한 강연이 1920년에 있었는데 ?신학의 과제로서의 하나님의 말씀? 여기에서 “우리는 신학자로서 하나님께 대해 언급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이고 인간으로서는 하나님에 대해 언급할 수 없다. 우리는 두 가지 곧 우리는 ?해야 한다와 할 수 없다?를 알고 이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고 말함. 이 말은 해결하는 방법을 모른다.
이러다가 바르트는 신학적인 방법을 갖게 된다. 이 다음의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의 신학이다. 이것이 본격적인 의미에서 바르트신학의 틀이다. 2판은 뭔가 세우는 것을 못했다.
5) 세상 속에 존재하는 계시의 역설적인 가능성
2판에서 나오는 해결책이다. 이 곤궁에서만 해결책이다. 인간이 말할 가능성이 있느냐에 있다. 그것은 불가능한 가능성이라고 한다. 예언자들과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언급했는데 이것은 불가능한 가능성이다. 시간과 영원이 만나는 것은 신과 인간이 만나는 것이다. 그 접점은 원 속에 있기도 하고 없기도하다. 이것이 불가능한 가능성이다. 바울이 하늘의 영원을 봤는데 이것을 말로 표현하니까 인간의 말이 된 것이다. 인간의 말을 보는 순간 번쩍하는 순간이 있는데 그때 하나님의 말씀을 안다는 것이다. 이런 파라독스 곧 역설이 일어날 때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표현하려는데 인간의 말만 할 뿐이다. 그 과정에서 번쩍하는 순간에 일어나는데 시간과 영원이 만나는 순간인데 이때 하나님의 계시를 알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시의 역설적 가능성인 것이다. 이것은 언어 유희적인 특성이 있다.
2판의 가치를 평가하면,
하나님 없는 세계와 인간의 절망과 불가능성에 강조하고 있다. 인간의 죄악성과 인간의 노력을 부수는 장점은 있다. 하나님과 세상의 차이를 극단적으로 강조하였다. 하나님과 세상의 관계가 단절됨을 강조.정상적인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킴. 오히려 하나님은 세상을 새롭게 하시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성경적이지 않을까. 가장 강력한 인상을 주는 특징이 있고 짧은 시기에 존재했다. 우리의 말씀의 신학과 하나님의 인간성을 강조하는 후기 바르트의 사상을 볼 수 있다.
Ⅴ. 바르멘 신학선언(1934)
이 선언은 독일교회가 신조로 가지고 있고 세계교회역사에서도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신학선언을 기초한 작성한 분이 칼 바르트교수이다. 칼바르트 신학입장이 들어있다. 선언이 나올 때까지 배경은 1차 대전에서 독일이 졌다. 전쟁후의 독일의 상황은 혼란 그 자체였다. 실업자 수는 늘어만 가고 독일의 경제는 희망이 없었다. 이런 과정에서 히틀러가 집권을 한다. 이 기간에 무려 600만 명에 달았다. 독일국민의 기아와 굶주림 속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일부 공장주들은 돈을 버는 절호의 기회였음을 알고 싼 임금으로 배를 채우는 악덕공장주들이 많이 있었다. 이런 시기에 히틀러가 등장하여 집권하였다. 집권 2년 만에 600만 실업자 문제를 해결함. 국민들이 히틀러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일?이라는 말은 구원자이신 히틀러라는 말이다. 이 말은 종교적인 단어이다. 예수가 구원하였듯이 히틀러는 도탄에 빠진 독일 국민들을 사회주의 이념으로 구원하셨음을 의미한다. 악덕 공장주들의 재산을 몰수하여서 노동자를 잘 살게 해주겠다고 하니 얼마나 국민들이 좋아한 것은 당연하다. 승전국들이 독일에게 전쟁 배상국을 갚을 것을 요구했는데 이 억눌려 있는 독일국민들에게 히틀러가 갚지 않겠다고 선언하니 얼마나 좋아했는가. 세계최초로 고속도로를 히틀러가 만들었다. 국책사업을 벌여서 실업자를 해결했다. 전쟁을 머리에 염두 해 두고 작업을 진행했다. 그래서 전쟁을 생각하였다. 그래서 군수사업을 발전시켰다. 이 시점에 독일의 일부의 신학자들과 목사들이 히틀러의 악을 알고 고백교회의 지도자들이 반박했다.
L. MÜller는 히틀러를 지원하여서 독일의 국가 주교로 당선함. 뮐러를 추종하는 그룹이 있는데Deutsche Christen들이 역사에 길이 남는 성명서를 1933년에 발표함. 그리스도는 히틀러를 통해 우리에게 오셨다라고 발표. 모든 민족들에게 그러했던 것과 같이 마찬가지로 영원한 종류의 특별의 법을 주셨다. 그것은 바로 국가 사회주의이다. 1934년 4월 독일민족을 위한 성취는 히틀러를 통해서 성취되었다. 히틀러를 통해 그의 능력을 나타내셨기 때문이다. 국가 사회주의가 독일민족의 뜻이자 하나님의 뜻이다. 히틀러를 따르는 것이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며 그의 국가가 하나님의 국가의 실현이라고 발표하였다.
이런 악을 독일 고백교회지도자와 신학자들은 알고 반박하였다. 긴급 목사연맹을 조직하였다. 고백교회 탄생의 전신이다. 1933년 1월에 가입한 목사 숫자가 7천명에 다다랐다. 이듬해 4월에 독일의 2명의 주교가 가담함(Meiser Wurm). 부름은 고문을 당하는 모습으로 옛 주교관으로 돌아옴. 그러나 얼마안 되어 죽게 됨. 고백교회의 지도자들이 비극적인 삶을 살게 된다. 어쨌든 굉장히 많았다. 공식적인 자신의 입장을 신학적으로 천명의 필요성을 느낀다. 독일 바르멘에서 총회를 연다. 이 총회가 고백교회 출발을 알리는 총회였다. 여기서 신학성명을 발표해야 하는데 그래서 4사람에게 기초워원으로 칼 바르트(개혁교회대표), 한스 아스무스(연합교회대표), 토마스 부라이트(루터파교회대표). 헤르만 작스 이렇게 4명이 선정되었다. 독일 대부분은 루터파이고 소수파는 개혁파인데 칼빈의 정신을 이어받음. 연합교회는 개혁파와 루터파를 섞어 놓은 파이다. 헤르만 작스는 독일 교수이다. 1934년 5월에 총회가 여는데 15일 전인5월 15일에 프랑크부르트에서 모여서 신학성명을 작성하려고 했는데 작센을 제외하고 3명이 잠자는 사이에 바르트는 성명서를 다 썼다. 그래서 이것이 그대로 총회에 상정하기로 보고했다. 일부인 5조만 수정하고 올렸다.
신학선언은 6조로 되어있는데 특징은 머리말에 성경이 기록되어있다. 1조. 요 14:6. 요 10:1,9 성경에서 증언하고 있는 예수그리스도는 우리가 들어야 할 단 하나의 하나님의 말씀이다. 우리는 예수그리스도를 살 때나 죽을 때나 신뢰하고 순종해야 한다. 이 한분 말씀 외에 다른 사건이나 능력이나 형상이나 진리를 설교의 자료로 사용하며 하나님의 계시가 있는 것처럼 그릇된 이론을 우리는 배격한다.
1934년에 바르트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천되었다. 이 신학의 특징은 하나님의 말씀의 3중 양태를 가지고 있다. 예수그리스도, 성경, 교회의 설교라는 것이다. 로마서 제1판에서는 이 세상 어떤 것도 영원을 담을 수 없다고 말했지만 이것을 수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담지하고 있는 가능성은 3가지가 있는데 첫째가 예수 그리스도인데 이 분이 하나님의 자기계시다. 다음으로는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다. 마지막으로는 교회의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고 말한다. 하나의 말씀의 3중 양태라고 말한다.
여기서 강조하고 있는 내용도 이것과 연결된다. 성서가 강조하고 있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라고 하는 것이다.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 이념이 하나님의 나라의 이념이라는 상황에서 이 선언이 발표되고 있다. 우리가 들을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성서에서 증언된 예수그리스도밖에 없다고 말한다. 이 선언에 참여했던 지도자들은 바로 보수주의자들이었다. 독일 고백교회 운동의 역사는 히틀러와 싸운 사람은 부수주의자들이었다. 자유주의 영향을 받은 사람은 권력과 연합하기도 한다. 독일지지자들과 히틀러 지지자들은 대개 자유주의적 경향을 가진 사람들이다.
이 선언을 주창한 자들은 예수그리스도만을 알게 되었기에 히틀러에 대항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을 예수그리스도에게 성경에게서 들어야 한다.
3조. 엡 4;15-16(그는 머리 곧 예수그리스도) 그리스도의 교회는 형제들의 모임인데(주교제도의 거부를 말함, 교회 안에 높낮이가 없어야 함) 이 모임 안에는 예수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해 말씀과 성례전을 방편으로 현재 주님으로 역사하신다.(자신이 주님 되심을 나타내신다.) 이 그리스도의 교회는 은총을 입은 죄인들의 교회로서 죄 많은 세상 한복판에서 자신의 신앙과 순종과 복음과 질서를 통해 예수그리스도의 소유는 이 교회뿐이며(교회밖에 있는 것을 그리스도의 영광을 옷입히는 것을 반대한다). 이 교회만이 예수그리스도의 나타남을 기다리며 그의 위로와 지도를 받으며 살고 있다는 것을 증거해야 한다. 교회만이 가지고 있는 질서의 모습들을 교회가 자기 마음대로 작정한 어떤 것이나 현재 유행하는 세상 이념이나 정치적 신념으로 바꿀 수 있다는 그릇된 이론을 배격한다.
-->교회를 강조하고, 단 한 분 예수 그리스도는 결정적 계시, 그분의 몸은 교회 안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 교회의 모습은 교회가 제 마음대로 생각하여 다른 것에 위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히틀러의 통치 속에 그리스도의 나타남을 당시의 주장을 공격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 바로 이 시기에 에밀 브루너가 Natur und Gnade(자연과 은총)의 글을 씀. 자연과 은총의 글에서 자연신학의 가능성을 약간 열었다. 이 글을 읽고 바르트는 반박한다. Nein 이라는 글을 공격하는 글을 썼다. 그 핵심이유는 자연과 은총은 히틀러를 신격화시키는 것과 직접 연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르트는 자연신학을 공격한다. 이 배경은 독일의 정치상황과 관련된다.
이 논쟁은 정치적인 문맥에서 이해해야 한다. 신학적으로는 에밀 브루너가 옳을 수 있고 독일 정치상황에서는 바르트의 글이 옳을 수 있다. 이 시기는 자연신학을 얘기하는 시기가 아니다. 히틀러를 우상화하는 상황에서 자연신학을 배격하는 바르트의 입장을 들 수 있다. 히틀러 통치 하에 절막한 상황에서 바르트를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의 계시의 발견의 가능성은 하나님의 말씀의 3중성 외에 다양하게 열려져 있다고 말할 수 있다.후기 바르트에는 이 3가지 만이라는 만 자가 없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3가지는 매우 중요하다.역사와 문화와 자연을 통해서 부분적으로 알 수 있지만 정말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을 얻는 방법은 이3가지 외에는 알 수 있을까. 바로 3가지로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Ⅵ. 칼 바르트의 교회교의학
1. 성서관
1.하나님의 말씀의 삼중양태
1)역사적 예수그리스도=계시된 말씀
2)성서=쓰여진 말씀
3)설교=선포된 말씀
이 세 가지는 권위가 동일하지 않다. 역사적 예수그리스도는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쓰여진 하나님의 말씀 성경은 역사적 예수 그리스도에 의존하는 2차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다. 성경은 예수그리스도에 의해 의존하는 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예수그리스도가 성경을 비판한다. 선포된 말씀인 성경은 1)과 2)에 의존하는 하나님이 말씀이다. 가장 낮은 권위를 가지고 있다. 성경이 설교를 비판한다.
2. 하나님의 말씀이면서 인간적 증언인 성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인간적인 증언이다. 이 2가지 특징을 성경은 다 가지고 있다. 17세기 영감주의는 성경이 인간적인 증언이라는 오류가 있다. 19세기 자유주의자들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망각했다. 성경은 이 2가지를 다 가지고 있다. 성경은 인간적 증언이기에 오류가 있다고 생각하고 과학적인 불일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성경을 통해서 직접적으로 말씀하시기에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3. 계시하시고 은폐하시는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은 계시인 동시에 은폐해 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의 자기 계시인데 사람들은 그분이 하나님의 자기계시임을 알지 못했다. 이유는 인성에 의해 그분이 은폐되었기 때문이다. 성경도 마찬가지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임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불경과 동일하게 생각한다. 그 이유는 인간적인 증언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은폐되었기 때문이다.
교회의 설교도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은 말씀하시는데 연설자로 강사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 데 그 이유는 인간의 어떤 사람에 의해 하나님의 말씀이 은폐되었기 때문에 그러하다. 하나님의 말씀은 계시인 동시에 은폐이다. 이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가? 이것을 설명하는 것이 4번째이다.
4. 하나님의 말씀의 사건성
사건이 일어나야 계시로 인식할 수 있다. 하나님과 우리가 만나는 만남의 사건이 일어나야 한다. 즉 하나님 자신이 은폐의 막을 여시고 자신을 스스로 나타내 보이실 때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식하게 된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이 사건이 일어날 때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Werden). 전통적인 종교개혁자들의 얘기를 들어 말하면, 바로 성령의 조명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는 의미이다.
설교자는 설교단에 올라갈 때 반드시 성령과 함께 단에 올라가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말씀이 전달되는 것이다. 설교자는 필히 기도가 필요하다. 그래서 성령께서 자신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도록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에 오류가 있을 수 있고 설교에 오류가 있을 수 있는데 이 경우에는 어떻게 되는가? 바르트는 인간적인 오류와 약점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고 생각한다. 분명 오류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부족한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이에 대해 바르트는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에 감격한 사람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오류를 극복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5. 인간적 증언인 성서의 가치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했는데 인간적 증언의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성경 외에 다른 것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은 없을까라는 질문에 바르트는 없다고 말한다. 성서적 증언은 유일회적 증언이다. 이 성서의 증인들은 독보적인 자들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독보적인 증언이라고 한다. 이들은 특별한 인간들이라고 교회교의학 5권에서 말한다. 이들의 현존은 우리를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적 증언에 묶여있다. 하나님은 오직 인간적 증언을 통해서만 말씀하신다는 의미이다.
6. 정경의 표준
초대교회가 무엇이 정경인가를 결정할 때 시금석의 표준은 사도의 저작인가가 핵심적인 문제였다. 사도저작이 입증되면 정경으로 인정함. 그런데 지금의 문제는 그 당시 사도의 글이라고 인정된 많은 문서가 현재는 사도의 글이 아니라고 입증된다. 이렇게 될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초대교회의 문헌을 볼 때 많은 글들이 있다.
당시에 쓰여진 문헌들은 독보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가운데서 정경을 택하고 제외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뭘 정경으로 채택하고 제외하느냐? 옛날에는 사도성에 기초를 두었는데 지금에 와서는 의문시 된다. 바르트는 여기에서 이렇게 답을 한다. 이 문헌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 참으로 들을 수 있느냐 이것이 결정적인 표준이라는 것이다. 역으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그 문헌을 통해 우리에게 참으로 말씀하고 있느냐 이것이 결정적인 시금석이라고 한다. 여기서 종교개혁자들의 유명한 말을 인용한다. 성경의 권위는 성경 스스로 그 권위를 입증하였다고 말한다. 교회는 그 권위에 압도되어서 후에 정경으로 정한 것이다. 권위의 핵심적인 권위는 성경 자체이다. 성경을 읽는 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 문헌을 통해 하나님은 직접 말씀하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정경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실제 어떤 것이 정경인가? 대체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말씀이 정경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어떤 책을 통해 실지로 말씀하시는가? 어떤 것을 정경으로 교회가 채택할 수 있는가의 문제는 전체 교회가 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전체 교회가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정경으로 채택하는 것이다. 개인이 아니라 교회에 두었다고 생각한다. 과거의 정경과정은 정당하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정경을 수정할 수 있느냐?라고 물을 때 그 가능성은 열려있다고 말한다. 압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그 책은 정경으로 채택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여기서 개인적인 소견은 자기로서는 12사도의 교훈과 디오티게스에게는 보내는 편지는 정경으로 포함시키는 것이 좋겠다고 말한다.반면에 야고보서와 요한 2서, 3서, 계시록은 정경에서 제거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깊이 생각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것을 결정하는 것은 전체 교회가 할 일이라고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정경은 잠정적으로 고정되어있다고 생각한다. 이 가르침은 초대교회의 연구가 필요하다는 도전을 준다. 실제 다른 문헌들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질 가능성을 실지로 열려져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만든다. 이것이 정경에 대한 사고의 방식이다.
B. 신론
신학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분야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아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윤리적인 삶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1. 하나님의 사랑과 자유에 대해서
전통적으로 개혁교회신학을 살펴보면, 하나님의 자유성을 강조,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조. 특히 칼빈주의 예정론을 보면, 영원 전부터 하나님께서 영원한 축복과 영원한 저주로 예정했다. 저주로 예정된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세상의 불평공하다고 하나님께 말할 수밖에 없다. 토기장이인 하나님께서 천히 쓸 것과 귀히 쓸 것을 만들 권한 없겠느냐. 이것이 17세기 칼빈주의 예정론에서 나온 말이다. 지옥에 가는 이빨 가는 자도 하나님의 정의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의이다. 이것을 그렇게 예정했다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지는 것이 의이다. 이것이 의이다. 그래서 지옥에 이빨 가는 자도 하나님의 거룩한 찬양의 소리라고 말했다.
이 가르침속의 핵심은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자유가 강조되고 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데로 자유롭게 행하신다. 바르트는 예정론 속에 나타나는 하나님을 천상의 폭군이라고 비판했다. 천상의 독재자라고 반박한다. 이것이 정말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과 일치하는가?
전통적으로 하나님의 주권과 자유가 강조되었는데 바르트는 하나님의 본질은 사랑이라고 말한다. 요한일서4장에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하나님의 본질이 사랑이시기에 하나님의 모든 행위는 사랑의 행위이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유롭게 행동하시면 사랑 외에는 없다고 바르트는 얘기한다. 하나님은 거짓말도 못하시고 하나님은 진리이시기에 하나님의 본질에 거짓말이 없기에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 하나님은 절대 악한 일을 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본성 속에 악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행위는 사랑밖에 못하신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존재로 규정했다(Gott als des Liebende). 자유신학적 사고에서 하나님을 추론하기에 이렇게 애기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자연신학적으로 이해하며, 예수그리스도와 관계없는 괴상망측한 우상이 발생한다. 이것을 우상을 섬기는 일이 발생한다고 바르트는 말한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유는 하나다. 하나님이 원하시는데로 그대로 두는 것 그러며 사랑을 하신다. 하나님의 자유로운 행동은 사랑으로 나타난다.
칼빈과 바르트의 신학이 다른 것은 이 둘은 개혁신학의 산봉우리인데 바르트는 칼빈의 신학전통을 이어받는데 차이는 하나님의 주권과 자유를 강조하는 칼빈과 달리 바르트는 나님의 사랑을 강조하는 특징이 있다. 칼빈주의 엄격한 것은 칼빈의 하나님의 개념과 관계되어있다. 하나님의 절대자유와 복종이 강조된다. 이것은 신론의 문제이다. 그러나 바르트는 그와 같은 신개념은 잘못됨을 말한다. 철저히 사랑이다. 십자가에 계시된 하나님은 완벽한 사랑이다. 사랑이 아닌 자유와 주권은 존재하고 있지 않다.
바르트의 신학은 사랑과 은총의 신학이고 철저히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출발하는 것이 특징이다. 칼빈은 자연신학적인 사변의 모습이 농후하다. 바르트는 계시신학(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신학)으로 수정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2. 하나님의 자비와 의
전통적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두 얼굴로 인식한다. 하나님은 의로우시다(심판과 형벌의 하나님) 동시에 하나님은 빌면 용서해주시는 자비의 신이다.
하나님을 생각하면, 전통주의신학이 신론에서 의로우심과 자비하심을 동시에 강조하고 있기에 우리의 의식 속에서 교차적으로 갖게 된다. 우리의 행동도 혼란할 때가 있다. 이것이 긴장의 문제이다.
신학적 윤리는 독특하다고 김교수는 말한다. 심리학, 사회학적으로 답을 내는 그런 부분이 아니다.
하나님의 의와 자비와의 관계에 대해서 이것은 서로 대립되는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자비다. 하나님의 자비와 의는 하나다. 결단코 두 얼굴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자비롭지 않는 하나님의 의는 없다고 본다. 하나님은 근본적으로 자비하시기에 그의 의의 활동은 실지로 자비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모습을 새롭게 정돈해서 계시신학을 다시 이해해야한다.
구약의 율법도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는 것인데 예) 이삭의 떨어진 것은 가난한 사람의 것이다. 등등 하나님의 구약의 율법은 그의 모체는 하나님의 자비임을 알 수 있다. 가난한자와 빈민자를 생각하시는 자비에서 출발하고 있다. 바르트는 실지로 의와 자비는 하나님에게서는 하나이다. 하나님의 자비의 흐름 속에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
이사야41:14에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는 구원자이시다. 거룩은 곧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로 나타난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미한다. 가난한 자, 곤궁에 처한 자를 도우심이 하나님의 거룩이요 하나님의 의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이 도와주시는 힘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자신이 곤경에 빠질 때 아버지의 의가 어떻게 나타나는가? 아버지는 자식을 구원해주시는 행위에서 나타난다. 자식을 구원하지 않는 아버지는 의롭지 않다는 것이다. 주의 의로서 나를 구원하소서의 표현이 이 의미이다.
하나님의 의는 구원과 직결된다. 이것이 결정적으로 계시된 장소가 십자가에서이다. 십자가 속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 이것은 결국 죄로 말미암아 죽게 되는 우리를 건져내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가 바로 하나님의 의라고 말한다. 결국 하나님의 참된 의는 우리를 죽이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살리고 건져내고 사랑하시고 자비를 베푸는 것에 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은 자신이 모든 고통을 담당하시고 인간을 살려내는 놀라운 의로운 행위를 행하셨다. 하나님의가 계시된 십자가를 보면, 하나님의 의와 자비는 둘이 아니라 하나임을 알 수 있다. 자비가 아닌 하나님의 의의 행위는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성서에서 말하고 있는 거룩한 하나님은 오토(Otto)가 얘기한 대로 거룩한 자(Das Heilige)라는 의미가 아니라 교회교의학을 발전시키면서 자기의 근본적인 생각을 발전시켰다. 하나님의 모습은 실지로 자비의 신이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에 의해 생각한 것은 하나님의 자비에서 시작되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바르트는 의의 승리란 하나님의 자비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3. 하나님의 불변
하나님은 변치 않는다. 이 말의 뜻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불변과 인간의 기도 사이에 심각한 차이가 있다. 하나님의 작정하심이 변치 않는다면 우리가 기도할 필요가 있는가? 칼빈의 예정론 생각에서는 이런 것에 심각한 의문을 갖게 된다. 혹시 하나님이 뜻이 다른 데 있는 것은 아닌가?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생각하면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 결국 언젠가는 부서지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된다. 높고 깊은 기도는 내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맡기는 기도라는 이 가르침이 장로교 안에 퍼지고 있다. 하나님의 거대한 뜻은 바위 같아서 결국 어느 때가 되면 나의 소망은 다 부서지지는 않는가? -->기도는 무엇일까? 기도의 힘이 약해질 가능성이 내재해있다. 이것이 전부다 하나님의 불변하심의 범주(카테고리)안에서 논고되어야 하는 신학적인 논고이다. 구체적인 신앙생활의 문제 주제가 조식신학 속에 있기에 조직신학은 매우 중요하다.
하나님의 불변과 기도의 관계는 어떤가? 여기에 대해서 바르트는 하나님의 불변은 석고상 같은 무감각함이나 움직일 수 없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죽어있지 않고 살아계신다. 칼빈주의 예정론을 많이 하다보면, 영원 전부터 계획된 대로 이루어지기에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약해진다. 그러나 바르트는 지금 살아계셔서 우리의 얘기를 듣고 계시고 우리를 만나신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말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가 만남이요 역사임을 뜻한다. 지금 우리가 하나님과 만나서 하나님과 새 역사를 이루어간다는 것이다. 이것이 신자들이 하나님과 다스린다는 말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다스리는 존재라는 것이다. 다스림은 나의 의지가 포함될 수밖에 없다. 그는 우리의 기도는 수동적이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바르트는 기도의 포기는 안된다. 포기는 비신앙의 위로받을 길이 없는 것이다. 신자의 기도를 통한 하나님의 결정하심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뭔가 결정하신다는 것이다. 또 그는 인간의 기도가 하나님의 계획과 의지 속에 포함된다. 이어서 하나님의 계획은 인간의 기도보다 앞서기도 하고 인간의 기도에 뒤 따르기도 한다.
하나님은 우리와 만나시고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의 기도에 근거해서 새 계획을 세우신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만남이고 역사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기도의 낙심하지 말 것을 가르치셨다. 이런 점에서 장로교보다 순복음의 기도가 더 낮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바르트는 양쪽 면이 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의 뜻을 듣고 얘기하는 것이 다 중요하다.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새역사를 이루어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새로운 계획을 만드시고 이루시기도 하며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기도 한다.
하나님의 불변하심은 뭐냐? 히스기야가 15년 연장의 이야기가 나온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의 계획을 부분적으로 수정하는 것이다. 오히려 이것은 하나님의 은총의 역사만 더 넓어질 뿐이다. 우리의 기도도 올라가고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양면이 다 중요하다.
그러면, 하나님의 불변하심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불변은 그분의 인격성의 불변을 의미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과 약속의 불변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인격성은 흔들리지 않는 반석처럼 불변이다.민23:19 ?하나님은 인생은 아니시니 식언치 아니시고? 하나님의 불변은 하나님의 약속이 변치 않는다.한번 약속한 것은 절대로 잊거나 잃어버리지 않는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이 변치 않는다. 즉 하나님은 불변은 그분의 인격성의 불변을 의미한다.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반석처럼 그런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런 하나님의 인격성의 불변을 하나님의 자신의 석고상 같은 삶, 존재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다. 변치 않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말을 들으시고 우리의 눈물을 들으시고 우리를 통한 새 역사를 만드시고 그분의 계획을 수정하시는 분이다. 과거 칼빈주의 역사가 하나님의 불변의 잘못된 역사가 교회 속에 있기에 교회는 역동성을 잃어버리게 된다. 이것을 파하여 없애야한다. 예) 걱정은 죄에 대한 한 부분이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약해지기 때문이다.
4. 하나님의 전능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이 어디에서 나타나는가? 답은 우리의 십자가의 사랑 속에 들어있다는 것을 알았다.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독재자적인 전능은 자연신학적 사고방식이고 진정한 전능은 십자가 속에 계시되었다. 십자가 속에 하나님의 전능이 들어있고 하나님이 어떻게 승리하는가가 십자가속에 들어있다. 힘으로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저항할 수 없는 사랑과 은총으로 승리한다. 하나님의 멸시받음과 순종 속에 나타난다. 만군의 주님께서 승리하신 것이 십자가에서 계시되었다.
하나님의 참 신성은 적을 박멸하는데 있지 아니하고 고난 속에서 승리하는데 있다 이것이 핵심이다. 인간의 교만을 극복한 것은 하나님의 겸손이었다. 인간의 죄를 극복한 것은 죄를 죽이는 것으로 극복한 것이 아니고 죄의 고난을 스스로 짊어지시는 그 사랑을 통해 죄를 극복하셨다. 그는 십자가속에서 인간의 반역 때문에 고난 받고 무능함을 발견했다. 이것은 본회퍼는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무능함을 발견했음을 알았다. 마찬가지로 바르트도 하나님은 십자가 속에 있다고 말한다. 이것을 체계화시켰다. 이것을 인간에 대한 사랑 때문에 인간을 헤치지 못하는 신이 십자가에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인간의 고난과 형벌을 스스로 감내 하셨다. 이런 놀라운 신이 십자가속에 들어있다. 그 신은 깊은 사랑으로 마침내 승리하셨다고 말한다. 부활의 놀라운 영광은 십자가속에 들어있었다. 인간을 살리는 전능함이 십자가속에서 나타난다. 이 정신은 20세기후반의 십자가신학의 기본적인 정신이 되었다.
몰트만이 1980년의 설교집이 있는데 Ohne Machr mächtig 무능함 속에 있는 그 능력과 전능에서 십자가신학을 정치신학으로 발전시켰다. 참된 승리는 힘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사랑 속에 있다. 고난 속에서 감수하는 그 것이 참된 승리이다. 몰트만은 동서냉전시대에 원수 사랑의 정신을 정치적으로 실천해야함을 주장하였다. 진정한 승리는 원수를 사랑하는 것에 있다.
요드가 쓴 「예수의 정치학 」에서 빌립보 2:6이하에 그리스도의 찬가를 정치신학의 증거로 제시함. 세상의 사람들이 높이고 섬기는 것은 바로 십자가의 낮춤에 있다. 바로 진정한 승리는 십자가속에 있다는 것이다.
==>교회 목회시 목회자의 권위는 사랑과 섬김에 있다. 목회자가 교인들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에 있다.긴 세월동안 성도들을 사랑하고 섬기면 그분이 굉장히 권위가 있게 된다.
하나님이 승리하신 방법이 십자가 속에 있다. 교만한자를 자기의 겸손으로 낮추셨다. 하나님의 전능함이 나타나는 길이 십자가와 부활 속에 정확하게 제시되어있다. 이것을 떠나서 승리하려는 것은 자연신학적인 승리방법이다.
-->구약의 정신을 예수그리스도의 정신에 재해석해서 설명해야한다. 계시의 핵심은 예수그리스도이고 성경은 예수그리스도다음의 2의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바르트는 말한다. 그래서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이해하는 성서관을 가지고 있다. 구약의 아말렉 이야기는 예수로 재해석되어야한다고 말한다.
C. 예정론
기독교교리 중 난해한 교리는 삼위일체와 예정론이다. 20세기의 위대한 신학자는 예정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였는가? 잘하면 2천 년 간 해결되지 않는 것이 오늘 해결되는 은혜가 있게 될 지도 모른다.
전통적인 예정론의 구조를 보면, 칼빈 예정론은 이중예정론이다. 예정의 두 기둥이 있는데 선택과 유기다. 영원 전부터 일부를 선택과 유기되었다라고 예정하였다는 말이다. 칼빈은 “우리는 칼빈의 예정을 영원한 섭리라고 본다. 장차 모든 사람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또 다른 사람은 저주로 정해졌다. 전자나 후자의 목적으로 창조되었을 때 생명으로, 저주로 예정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을 반대하는 사람은 성령과 바울을 반대하는 것이라고 한다. 바로 바울도 이중예정론을 주장한 것으로 말하고 있다. 롬9장에서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토기장이가 진흙을 만들 권한이 없겠느냐.
이 예정론에 대해 반론을 제기됨.
1) 예정론은 운명론이라는 반응이다. 일종의 기계론이라고 비판함.
2) 예정론은 인간의 자유의지와 모순된다. 하나님이 자유의지를 주었는데 인간의 자유의지가 희생을 당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자유의지가 해결될 것인가? 잘 들어봐라. 인간의 자유의지와 모순된다.
3) 하나님이 죄의 창시자가 된다. 결국 하나님에게로 귀착되는 것은 아닌가라고 말한다.
4) 예정론은 인간의 노력을 하지않게 만든다.
5) 인간을 불공평하게 다룬다.
6) 선한도덕의 비호의적이다. 선한도덕을 위해 노력을 할 필요가 없게 된다.
7) 진지하게 복음을 전하는 의미가 없게 만든다. 17세기 예정론이 강할 때 선교열정이 식어진 경우를 보게 된다.
8) 보편구원을 가르치는 성경에 위배된다. 한정론 속죄론이 칼빈주의 5대강령에 들어가 있다. 속죄가 제한되어있을까. 누구든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데 이 성경의 가르침과 모순되지 않느냐라는 의문을 품게 된다.
이 반론은 정당한 비판들이라고 본다.
예정론은 매우 중요한 교리이다. 이 예정론은 우리에게 굉장히 감격을 주는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 예정론이 복음의 총화라고 말한다. 예정론을 요약하면 예정론이다. 복음을 정의하면 예정론이다. 이 예정론이 중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비판은 다 정당하다. 왜 이런 예정론이 비판에 직면했는가? 뭔가 전통적인 예정론이 성경의 핵을 정확하게 전달하지 못해서 이런 일들이 발생된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이 예정론을 강력하게 비판한다. 비판의 핵은 예정론에 보는 하나님의 모습은 성경의 하나님과 일치하지 않는다에 있다. 하나님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그 십자가 사건 속에서 인식해야 하는데 그 신은 바로 사랑의 신이다. 그분은 죄인을 위하여 스스로 죽으시는 극단적인 사랑의 신이라는 것이다. 그분은 마지막 한 명이라도 구원하려는 노력을 하신 분이다. 그 한사람 때문에 가슴 아픈 모습이 십자가에 계시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하나님이 영원 전에 일군의 무리를 지옥에 들어갈 명단을 작성하는 것이 상상이나 할 수 있는가. 지옥에 이빨 가는 자들의 소리를 들으면서 정의를 이룬다는 것은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과 어떻게 비교할 수 있는가? 이것은 분명 우상이다. 그런 신은 없다.
핵심적인 바르트의 특징은?
1. 하나님을 예수 그리스도 밖에서 찾으면 안된다. 교회 교의학 2권에서 교의학에서 등장. 1936년 하나님의 은총의 선택을 강의한데 1942년에 발전된 것을 정리하여 소개한다.
예수 그리스도 밖에서 찾는 것은 참 하나님이 아니고 우상이다. 영원 전에 지옥으로 예정하신 하나님은 없다는 것이다. 그런 교리를 하나님의 주권으로 변호하고 미화하면 안된다고 말한다. 영원 전에 하나님의 예정이 일어났는데 그 예정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하는 예정이 일어났다.
2.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는 하나님은 선택하신 하나님이시다. 인간을 버리지 않는 하나님의 모습이 십자가에서 계시되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은 죄의 형벌을 대신지시고 심판을 받아 죽으셨다. 십자가속에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분명하게 계시되었다. 인간을 버리기로 작정하는 어둠의 하나님은 십자가에 계시된 하나님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하나님의 결의는 인간을 버리기 위한 결의가 아니고 영원 전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예비하시고 예수 안에서 인간을 선택하기 위한 결의였다. 엡 1:4에 나오는데 창세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예비하셨다. 예수 안에서 우리를 예정하셨다.
3. 하나님의 주권과 자유도 예수 안에서 파악되어야한다.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본질이 계시되었기 때문이다. 예수 안에서 계시된 본질은 사랑이다.
4. 하나님이 이중예정은 하나님이 십자가의 사건을 뜻한다.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인간을 선택하시고 자신을 버리셨다. 예수는 단 한분 버림받은 분이다(Der einzife Verwerfene). 하나님은 예수를 버리고 인간을 선택하셨다. 이것이 십자가에서 계시되었다. 이것이 만인구원론의 문제까지 연결된 신학적인 논쟁의 진원지이다.
예정론을 발전시키면서 모든 인류의 죄악을 짊어지시고 버림받아 모든 인간을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셨다. 하나님은 인간을 절대로 버리지 않는다. 이 모습이 십자가에서 계시되었다.
루터 자신은 예정된 자인지 고민했다. 슈타우피츠에게 찾아갔다. 그는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보시오. 그러면 당신은 예정된 자인지를 알게 될 것이오 라고 말했다. 루터가 십자가의 신학이다. 슈타우피츠의 유명한 말이 구현된 신학이 바로 바르트신학이다. 십자가를 보면 내가 예정된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 너를 포함해서 모든 사람을 예정하신 사건이 십자가사건이다. 예수님이 하나님께 단 한번 버림받은 분이다. 하나님에게 버림받은 분은 오직 예수밖에 없다. 바르트는 내 신학에 문제가 있다는 사람은 율법주의자라고 말한다. 예수께서 단 한번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분이다.
5.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을 찾으시는 하나님께 응답하는 자는 현실적으로 선택된 자들이 된다. 선택은 믿음을 통해 구현화 된다. 엡 1:13을 보면, 듣고 믿는 행위를 통해 언급된다. 하나님은 예수 안에서 모든 사람을 예정하셨는데 이 예정은 복음을 통해 듣고 믿는 행위를 통해 구현된다. 영원 전에 예수 안에서 작정한 하나님의 선택은 시간 속에서 만남을 통해 구현화 되고 있다.
6. 믿는 자들은 선택된 자들이다. 예정론이 신학의 고백적인 특징이 있다. 믿어보면 자기가 예정됨을 확신하게 된다. 예정론의 확실한 사건은 십자가사건이며 이 사건을 믿는 자는 예정된 자임을 알게 된다.현 역사 속에서는 버림받은 존재가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들의 존재는 버렸기에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위는 은총이요 선택이다. 이 행위는 2가지 결과를 초래한다. 예수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은 믿음의 사건을 필요로 한다. 이 믿음의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곳 즉 자비의 부르심이 거부당하는 곳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폐기된 그늘인 버림이 존재한다. 이 그늘이 하나님의 심판이다.
부르심이 거부당하는 그 곳은 현실적으로 버림받은 사람이 있다. 하나님이 버려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십자가에서 모든 문제가 해결 되었는데 그 그림자가 존재하고 있다. 현실적으로 버림받은 그늘에 있고 동시에 실지로 하나님은 용서하고 선택하셨다는 긴장 속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믿음이 인간이 하는 것이냐, 하나님이 하는 것이냐? 이것은 다음시간에 합시다.
예정론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1. 유기교리는 정당한가? 바르트는 유기에 대해 비판한다. 하나님은 영원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만민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셨다. 지옥에 가는 명단을 작정하시지 않았다. 이렇게 강력하게 전통적인 예정론에 대해 유기교리를 반대한다. 무시무시한 이중예정이 영원 전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문제는 칼빈은 유기교리를 반대하는 자는 성경과 바울을 반대하는 자라고 가르쳤는데 바울의 토기장이 비유,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함과 같으니라 고 성경이 말하는데 우리의 이성과 생각에서 납득이 안된다고 해서 이중예정을 반대하는 것은 다 잘못된 사고방식이라고 반대한다.
정말 성경과 맞지 않을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롬 9장인데 이것이 이중예정을 뒷받침하는 본문인가. 결론은 이중예정을 위한 본문이 아니다. 롬 9장은 이중예정을 바울이 전하기 위해 롬 9장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바울이 롬 9장을 쓰고 있음을 알아야한다.
롬 9장을 쓴 바울의 의도가 무언가?
==> 바울의 머릿속에는 이중예정이라는 것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에 나타난 복음을 전하기 위해 롬 9, 10장을 쓰고 있다. 이 복음을 쓸 때 큰 장애물이 있는데 그것은 이방인이 하나님의 백성인가의 문제였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이방인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유업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도저히 납득되지 않았다.
행 10장에 이 문제가 중요하게 등장한다. 욥바 성에서 베드로가 환상을 본다. 이방인 고넬료가 보내는 사람이 찾아온다. 고넬료 집에서 복음을 전하는데 성령이 이 집에 임하는 것을 베드로는 목격한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속된 존재로 인식되었던 이방인이 이제는 함께 성령을 받게 되는 하나님의 백성을 얘기하려는 본문이다. 이방인도 유대인과 같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을 알려준다. 행전에서 방언은 이방인에게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표증이다. 이방인에게 성령이 임하는 것 곧 방언을 받는 것이 성령 받음의 표시이다. 누가는 이방인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알려주는 것이 누가의 핵심이다.
욥바 성의 환상과 사도행전의 걸쳐서 이방인의 문제가 중요한 것은 초대교회에서 이방인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이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바로 롬9장도 이런 배경에서 기록되고 있음을 유념해야한다.여기서 무엇을 얘기하는가? 이방인도 주님을 믿으면 하나님의백성이 됨을 알려주고자 쓰고 있다.
중간에 토기장이 비유가 들어갔다. 이것은 복음을 전하기 위한 보조 자료로 들어가고 있다. 바로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강조한다. 전통적 이중 예정론자들이 이 본문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얘기하는 본문은 틀림없는데 이 절대주권으로 하나님이 어떻게 하였는가.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절대주권으로 지금까지 진노의 자식이었던 이방인들을 예수그리스도의 믿는 믿음을 의로 여기고 구원하기로 작정하셨다. 하나님의 은혜가 이렇게 크다고 해서 하나님을 힐문할 수 있는가라고 말하고자 롬9장의 핵심이다.
하나님은 절대주권의 신이신데 그분이 그 주권으로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만만을 용서하고 구원하기로 작정하셨다. 바로 하나님의 후사로 작정하셨다. 이것이 롬 9-10장에서 말하는 의도이다.
롬 9:6 이하를 보면, 오직 이삭에서 나은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이며 약속의 자녀가 하나님의 후사로 됨.참 하나님의 자녀는 약속의 자녀임을 말하고 있다. 과거는 육신적인 아브라함의 씨였는데 이제는 약속의 자녀가 아브라함의 자녀가 되었다. 이것을 하나님이 하셨다. 이것에 하나님의 큰 자비가 흘러넘치게 되었다. 롬 9:24-25에 이 그릇은 우리니 유대인과 이방인 다 그렇다. 약속의 자녀가 우리라는 것임을 바울은 얘기하고 있다. 롬 9:30을 보면, 그런즉 무슨 말하리요 의를 좇지 않는 이방인이 의를 얻었으니 믿음으로 난 의라고 말하고 있다. 이 은총이 나타났다고 해서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롬 9:39에 누구든지 예수 믿으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 롬 10장6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는 놀라운 은총을 받는 것은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롬 10:9 입으로 예수로 주로 시인하고 입으로 고백하면 구원을 얻는다. 롬 9-10은 예수그리스도의 은총의 복음을 전하는 본문이다. 이중예정은 바울의 머릿속에는 없다.롬9장은 다르게 주석한다. 20세기의 바르트의 예정론이 더 성서적이다.
2. 예정론은 복음의 총화이다. 복음을 요약한 것이 예정론이다.
엡 4:4-5에 창세전에 그리스도를 택하사 거룩하고 흠 없게 하시려고 예수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심. 복음의 내용이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 속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예정론은 복음 중에 복음을 전하려는 교리이다. 예수로 속죄함을 주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고 하나님의 비밀의 경륜을 설명하는 교리이다.
3. 선행하는 하나님의 은총을 전하는 교리이다.
예정과 자유의지와 관계가 있다. 이 정신은 몰트만에게 강하게 나타난다. 몰트만은 희망의 신학 이후에 사회정치적인 책임과 관련해서 알려진 학자이다. 몰트만을 더 이해하면, 그분은 철저히 개혁신학자이다. 칼빈정신을 이어받은 신학자이다. 희망의 신학을 쓰기 전에 쓴 논문과 책은 주 연구 분야는 칼빈주의 신학을 연구하였다. 탁월하고 깊은 칼빈 신학의 이해가 있었다.
17세기 칼빈 신학의 발전을 연구하면서 결론은 선행하는 하나님의 은총을 설명하는 교리라고 내렸다.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자유의지를 얘기하는 것은 불가능 하는 것은 아닐까? 구원이 하나님의 예정에 의해 주어진다면 인간의 지유의지는 필요 없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여기에 답은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끝없이 사랑하신 예수님과 하나님께서 결정하신 그 작정이 나를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예정론은 자유의지를 말살되기 위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선행하는 하나님의 은총을 얻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선행하는 사랑과 은총이 오늘의 ?나?가 된 것이다. 이것이 예정론의 핵이다. 이 일이 기계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이 있기에 어떻게 내 자유의지로 불신할 수 없다. 우리의 자유의지에 의해 그 모든 일이 일어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되고 구원받는 근원은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음을 단호히 말할 수 있다.
저항할 수 없는 은혜는 몰트만에 의하면, 어떻게 왕자의 사랑을 저항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반대하거나 저항할 수 없다는 것이다. 기계적인 것이 아니라 저항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 크기에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자유의지에 있어서 안할 수도 있다. 기계적으로 얘기하는 것은 아니다.
감리교도들은 예정론을 무시하는데 인간의 책임에 둔다. 복음의 핵심을 상실하고 있지 않는가라고 의문을 품을 수 있다. 복음의 핵을 얘기하려면 이 예정론 속에 있다.
4. 신앙의 우연성과 무사성을 반대하는 교리이다.
우연성은 내 신앙이 우연히 생기는 것이 아니다. 내 신앙은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계획이 있었고 그에 따라 그 경륜 속에 오늘의 신앙을 갖고 있다는 것이 예정론이다.
무상성은 성도의 견인은 하나님의 사랑의 신실성이다. 이것은 변함없음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신실성에 대한 고백이다. 이 하나님의 사랑의 신실성 때문에 우리의 신앙은 무상하게 사라지지 않는다. 신앙의 우연성을 반대한다. 예정론의 핵이 하나님의 사랑의 신실성에 있다는 것이다.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 합당하게 살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깊고 깊어서 마침내 주님께 돌아오고 구원에 이르게 된다. 이 세상에서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신실한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이것이 롬8:38-39에 나타나있다. 예정론의 핵은 신앙의 우연성과 무상성을 반대하고 하나님의 신실성을 강조하는 교리이다.
5. 예정론은 하나님의 섭리론의 핵심이다.
이 세계는 하나님의 깊으신 선하신 섭리와 계획이 있다. 우리를 구원하고 영화롭게 하는 선하신 섭리가 있다. 이것은 개혁교회의 금자탑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이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에 대한 신학적 찬양이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이것을 선으로 바꾸사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려고 하였다고 창세기 50장에서 요셉의 고백을 들 수 있다. 그래서 예정론은 요셉의 삶속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하나님의 깊고 깊은 선한 섭리를 표현하려는 교리이다.
마 10:29절에 삼라만상 속에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가 있다는 것이다. 이 예정론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말살하려는 교리가 아니라 지옥으로 보내려는 의도가 아니라 이 핵심은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 놀라우신 섭리, 놀라운 복음, 처음부터 사랑하시고 인도하시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교리이다. 이것을 통해 놀라운 기쁨과 감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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