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으로 읽는 이스라엘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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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창 모 (건국대 히브리학과)
역사는 모든 학문의 기초이자 중심이다. 건축을 공부해도 건축사, 음악을 공부해도 음악사, 미술을 공부해도 미술사, 문학을 공부해도 문학사, 이렇듯 모든 학문이 역사로 통한다. 왜냐하면 역사는 그 학문의 흔적이며 발자취이기 때문이다. 그 학문의 발전이 어떻게 이루어졌나 하는 것은 역사 발전과 맥을 같이 한다. 우리가 왜 한국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가하는 것은 한국인은 한국의 얼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 사람이 한국의 얼을 갖는다는 것은 두 가지 방법을 통해서 가능하다. 모국어인 한국말과 한국의 역사를 통해서 한국의 얼을 획득할 수 있다. 우리가 이스라엘을 공부하려면 히브리어를 알아야 한다. 히브리어를 통과하지 않고 이스라엘을 이해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성경을 이해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야기 할 수 있다. 한국말로도 성경을 볼 수는 있지만 그 얼, 이스라엘의 정신은 한국말로 번역 된 것으로는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얼이 빠졌다는 것은 정신 가운데 에센스, 즉 본질이 없다는 것이다. 또 이스라엘의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그 사람들, 혹은 민족의 얼이 어떻게 이어져왔는가 어떤 격동의 시대를 거치면서 어떻게 변해왔는가 하는 것을 공부하는 것이기 때문에 역사를 공부하면 그 사람, 혹은 민족을 이해 할 수 있다. 현재의 이 사람들을 이해함으로써 즉, 과거를 공부하면서 현재를 이해하고 나아가 미래를 예측하는데 용이하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고대사는 주로 성경의 기록과 일치한다. 그것은 성경상의 초기 이스라엘의 역사를 정리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성경이 역사책은 아니지만 역사적인 과정을 설명하고 있는 중요한 역사사료이다. 역사를 이해할 때 가장 필수적인 것 가운데, 역사를 구성하고 있는 역사 사료, 즉 역사를 재구성할 수 있는 역사의 자료, 즉, Historical Material이 있다. 역사는 현재사, 미래사도 있겠지만 주로 과거이다. 시대마다 그 시대에 만들어진 여러 사료들이 있다. 그 사료들은 주로 문자로 기록되어진 것들은 텍스트(text)라 한다. 여기에는 성경, 혹은 탈무드, 요세푸스 같은 역사책들이 해당된다. 또 하나는 꼭 문자로는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그 시대를 잘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사료 가운데 하나가 고고학적인 자료들이다.
고고학이라는 학문의 역사는 채 100년도 안되었다. 그것은 땅을 파서 실제로 물건을 보는 것이다. 도자기나 혹은 동전, 무기 종류 등이 있는데 어느 시대에 누가 사용하던 것인가 하는 것을 따져 볼 때 그 시대로 되돌아가기에 아주 좋은 자료들인데 이 자료들을 모아 좋은 것을 박물관이라고 한다. 실물을 보는 것은 사실적 실감을 느끼게 해준다. 그래서 성서 박물관, 역사 박물관 등이 필요하다. 그 외에도 주변의 역사적인 상황, 요즘 같으면 사회적 문화적 요소들을 역사 이해의 또 다른 자료들로 활용할 수 있다.
성서에서 말하는 이스라엘 민족의 뿌리, 혹은 기원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곧 이스라엘 역사의 시조이기도 하다. 우리 나라의 시조는 단군 때로부터라고 보기도 한다. 신화인가 역사인가 하는 문제에서 단군을 역사적 인물로 이해하는 한국의 고고학자들이나 역사가들도 있다. 혹은 그것을 신화라 보고 역사 이전의 시대로 분류해서 생각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신화라는 것을 반드시 허무맹랑한 단지 옛날의 꾸며진 이야기로만 보기보다는 다분히 그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해서 생각한 고대인들의 사고방식, 내지는 사고의 구조로 본다면 그것은 역사와 전혀 동떨어진 이야기인 것만은 아니다. 한국역사를 공부할 때 고조선, 단군에서 시작하듯이 이스라엘의 역사의 시작은 아브라함이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었다. 고대 근동의 지도를 보자면 그는 지금의 이라크,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사람이다.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티그리스 강을 따라서 남쪽으로 약 400km 내려가면 우르라는 곳이 있는데 성경은 아브라함이 이곳 출신이라고 말하고 있다. 갈대아는 고대어로 메소포타미아를 일컫는다. 이 지역은 평야 지대이며 문명의 발상지이다. 인류 4대 문명 발상지 중 가장 오래 된 곳이다. 아브라함은 대략 BC 18세기경의 사람이라 추정된다. 그렇다면 메소포타미아의 아브라함의 본향인 우르의 그 당시는 현대로서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문명을 꽃피우던 장소였다. 아브라함은 시골 촌뜨기가 아니었다. 그는 문명의 한복판, 즉, 그 꽃 봉우리에서 살던 사람이었다. 여기에서 세계의 가장 우수한 문학, 역사, 신화, 종교를 공부한 사람이다. 왜냐하면 우르 사람들이 다 문명인이었기 때문이다. 우르는 BC 30세기부터 상하수도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하나님은 그곳으로부터 아브라함을 굉장히 먼 길을 지나 가나안으로 부르셨다. 최소한도 이스라엘 역사의 시작은 팔레스타인에 있던 사람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외국인 로서 이 땅에 들어온 이민자에 의해서였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주제이다. 이스라엘 역사의 시작은 원주민들의 역사가 아닌 이주민의 역사다.
신앙적으로 말한다면 우리는 이민자이다. 우리는 어디에서부터 왔는가 저 세상으로부터 와서 저 세상으로 가는 존재들이다. 그렇다면 이 세상은 무엇인가 잠시 있다가 떠날 장소인 것이다. 이는 성경의 신앙 고백의 시초이다. 그것은 곧 이스라엘의 역사이기도 하다. 신앙고백이란 어느 날 꿈꾸는 자의 머릿속에서 발동한 상상력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역사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사는 신앙이라는 것이다. 종교적 입장을 떠나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역사라고 하는 것을 신앙적 고백으로, 즉 역사적 의미로 본다. 역사는 하나의 사실이 아니라 사실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의미작용-역사 철학적 용어이지만-이다. 역사를 흔히 객관적 사실이라고 하지만 불행히도 아무도 객관적 사실을 알 수 없다. 또 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객관적 사실인지 아닌지를 판단할만한 기준이 없다. 어제 우리에게 어떤 일이 있었다고 하자. 우리 중 역사가가 있어 어제의 역사를 오늘 쓴다면 이 수많은 세상일들 가운데 어떤 것을 역사로 쓸것인가? 조금 역사 철학적인 이야기이긴 하지만 역사는 모든 사실, 즉 객관적 사실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을 쓰는 것이며 기억 중에서도 사실을 경험한 사람이 그 사실 중에 일부를 기억해서 그 기억의 일부를 역사로 쓰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 바로 여과, 즉 필터링(filtering)이라는 작업이다.
그러한 한정적인 기록을 통해서 우리가 그 시대 전체를 이해한다는 것은 이론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19세기 꽁트의 역사 실증주의는 과거 사실을 밝히는 것을 역사의 목적으로 보았다. 역사학의 목적을 곧 과거 사실의 재구성으로 보았던 것이다. 20세기에 들어서 이러한 학풍은 반박되었고 역사는 역사의 의미를 밝히는 학문으로 보기 시작했다. 곧 History가 아니라 Meaning of History인 것이다. History는 결코 Fact가 아니다. 물론 역사는 객관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다. 역사학의 근본적인 목적을 말하자는 것이다. 역사는 왜 중요하며 왜 우리가 역사학을 공부해야 하는가 하는 것을 전에 말했던 것처럼 얼 이야기로 돌아가 그것은 정신이며 일종의 무형인 것처럼 그런 의미에서 의미 작용이라는 것과도 연관성이 있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장황하게 얘기를 하게 되었다. 어쨌든 다시 돌아가 이스라엘의 시초는 이민자이다. 본토민들의 역사가 아니다. 하나님은 왜 자기 백성의 역사를 다른 나라 사람을 데려다가 시작하셨을까? 그런데 분명한 것은 이민자로부터 시작한 이스라엘의 역사는 끊임없는 이민으로 점철된다. 그것은 모으셨다가 때로는 역사를 파괴해서 흩어지게 만드셨다가 다시 역사를 형성하게 하고 하는 반복의 역사였다. 신앙적 입장에서 말한다면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세계를 구원하셔야 했다. 그런 선교적 측면에서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은 아주 고난이 많았다. 고난은 곧 훈련이다 .하나님의 택함을 입은 자들은 이처럼 고난이 많다. 전사를 만드는데는 훈련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역사는 그런 점에서 다른 사람을 데려다가 자신의 역사를 이루어 나가신 역사였다.
유목민들의 얘기를 들으셨겠지만 족장들의 삶의 형태는 대부분 떠돌이 생활이다. 이스라엘에는 아직도 베두윈이라는 떠돌이 유목민이 있다. 아브라함 역시 그런 물과 목초지를 따라 떠도는 떠돌이였다. 사회구조는 족장 중심의 부족 사회였다. 아브라함 이하 이삭, 야곱은 모두 족장이었다. 족장의 말은 곧 법이었다. 국가나 상비군이나 세금이 따로 없었다. 족장이 모든 가축이나 재산, 사람들을 보호할 권리가 있었다. 지금도 이스라엘에는 족장들이 있는데 그들의 권위는 참으로 대단하다. 그들의 말이 곧 법이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선거철이 되면 정치가들이 그들 족장을 만나 표를 놓고 흥정을 하게 된다. 그 당시에는 여러 부족들이 가나안을 떠돌며 살고 있었고 부족과 부족간의 충돌이 일어나면 사회 구조상 계약이라는 방법으로 그 충돌을 해결하곤 했다. 성경의 역사를 보면 부족과 다른 부족들간의 분쟁에 관한 이야기들이 나온다. 이삭의 시대에 브엘세바의 아비멜렉과의 충돌도 그러한 한 예이다. 이 부족간의 충돌에서 이삭이 슬그머니 양보를 하게 된다. 물론 이것이 실재의 역사에서 어떤 사건을 두고 얘기했는지 우리는 직접적으로 알기는 어렵지만 그 당시의 사회구조상 그것은 흔한 일 중의 하나였다. 만약에 계약이 파기되면 즉, 어느 한쪽이 계약을 위반한다면 계약을 위반한 그 A라는 사람은 C라는 사람과 D라는 사람과 계약을 맺고 있는 B가 그들과 연맹해서 A를 쳐부수게 된다. 고로 부족사회에서는 계약을 위반하면 살수가 없게끔 되어있다.
그래서 구약의 하나님은 약속의 하나님이신 것이다. 계약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약속, 즉, 계약을 하신다. 계약을 위반하면 어떻게 되는가 그것은 곧 죽음뿐이다. 그것이 곧 죄의 개념이다. 그래서 창세기 15장에서처럼 계약 당사자들끼리 계약할 때 참 흥미로운 방식으로 계약을 한다. 양쪽에 재단을 쌓아놓고 소를 한 마리 잡아서 각을 떠서 반쪽은 저쪽에 반쪽은 이쪽에 놓고 두 계약 당사자가 그 가운데 서고 계약 문을- 당시에는 주로 토판이나 가죽 종이에 그것을 기록했다.-읽는다. 그리고 두 당사자는 반 동강난 제물들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이 재물에 불을 피우고 하늘에 그 연기를 올려 보낸다. 이것이 곧 창세기 15장의 계약 방식이었는데 이것이 곧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두 사람 중에 한사람이 계약을 위반하면 반 동강난 동물처럼 그 당사자도 죽게 되리라는 것을 서약하는 의미였던 것이다. 그 증인들이 바로 태양, 별, 달, 이런 것들이 곧 증인이었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계약을 하려면 증인, 곧 변호사를 필요로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계약이라는 것은 아직, 국가가 형성되기 이전의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사회구조에서 아주 핵심적인 부분이었다. 그래서 성경상에 계약이라는 용어가 자주 등장하는 것이다.
이 계약은 나중에 신명기의 모세의 십계명 사건으로도 연결되어진다. 십계명은 바로 하나님과 이스라엘사이의 계약법인 것이다. 그 계약을 위반하면 이스라엘이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족장의 시대가 대략 5세기를 점하게된다. 성경에도 있듯이 세월이 흘러 이스라엘 민족에게 기근의 큰 위기가 닥치게 된다. 당시 이스라엘은 기근이 들면 비옥한 토지를 갖고 있던 이집트로 먹을 것을 구하려 갔다. 이집트는 일년 열두 달 비가 안 오는 나라이며 이스라엘은 6개월(겨울)은 비가 오고 6개월(여름)은 비가 안 온다. 이집트 카이로에는 하수구라는 것이 도시에 없다. 그러면 어떻게 이집트가 문명국이 되었을까 그것은 나일강 때문이다. 지구 상 가장 긴 강 중의 하나인 나일강의 제일 끝에서 비가 오면 나일강은 범람한다. 그래서 당시 나일강은 그 퇴적층으로 인해 매우 기름진 땅이었다. 씨만 뿌리고 놀면 곡식은 자기가 알아서 열매를 맺는다. 예로 신명기 11장에 보면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얘기 중에 ‘너희들이 들어가서 얻을 가나안 땅과 이집트 땅은 다른데 이집트 땅에서는 발로 물대기를 채소밭에 댐과 같이 하였거니와’ 라고 기록한다. 그런데 “너희가 들어갈 땅은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먹고사는 땅인데 하나님이 지키시는 땅이다“라는 내용의 이야기인데 이는 곧 이집트 땅의 그 비옥함을 잘 알 수 있는 구절이기도 하다. 야곱도 그리하여 이집트로 식량을 구하러 가게 된다. 하나님은 이민자를 보내실 때 반드시 먼저 가서 자리를 잡고 다음에 자기 조상들을 보내게 한다.
언제인지는 정확치 않지만 대략 BC 15~17세기에 이집트로 내려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후 400년간을 종살이하게 된다. 그리고 이후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켜 가나안 땅으로 들여보낸다. 이 출애굽의 역사는 대략 BC 15내지는13세기로 보여진다. 성경에 보면 창세기 37장 이후에 요셉이라는 인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성경은 왜 그렇게도 이 요셉이라는 인물에 대해 창세기에서 가장 많은 장을 할애했던 것일까? 요셉의 이야기는 역사라기보다는 한 개인의 삶을 자세하게 적어 내려간 이야기이다. 심지어는 이집트의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해서 요셉이 옷 벗고 도망가는 에로틱한 장면까지 묘사되어 있다. 왜 성경은 요셉에 대해 그렇게 상세하게 쓸 필요가 있었던 것일까?
역사는 앞서도 얘기했듯이 후대 사람들이 정리한다. 즉, 후대에 흩어져서 떠돌아다니던 이스라엘 사람들, 다시 말해 나라가 망해 소위 여기저기 흩어져 살던 이주민들, 혹은 유랑민들이 자기 나라의 역사를 정리하면서 유랑민족의 선대를 죽 거슬러 올라가다가 현재 유랑의 처지에 있는 자신의 모습과 너무나도 흡사했던 요셉의 이야기, 여기서 쫓기고 저기서 쫓기고 모함 받고, 도망 다니는 그러한 모습은 바로 그들 조상들의 이야기인 동시에 바로 지금 역사를 쓰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했던 것이다. 누구나 자기관심사를 역사에 반영하기 마련이다. 즉 역사를 기술하는 사람의 어떤 관심사가 그 시대를 정리하도록 하느냐 하는 관점의 문제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유대인들은 철저하게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이야기, 즉, 먼 곳에서 온 사람 이야기, 떠돌아다니다가 그래도 성공하고 출세한 사람의 이야기 등, 자기 조상들의 이야기를 죽 정리하게 된 것이다.
출애굽의 과정을 넘어 가나안 정착 과정에서 조금 살펴보자면 이 시기는 왕정으로 이어지는 과도기로서의 BC 10세기경이다. 곧, 출애굽으로부터 300~500년 가까이되는 시대로서 사사시대라고 하는 시기인데 이 시대의 특징을 좀 정리해보자. 사사시대는 족장들의 시대가 끝났으면서도 아직 왕이 없었을 시대에 과도기적 구조를 갖추고 있던 아주 독특한 시기들이다. 이스라엘이 아닌 우리 식대로 생각해 본다면 한 큰 민족의 부족의 책임자가 없다고 하자, 부족사회도 아니기에 족장도 없고 여기에는 어떤 명령권 자도 없다. 아직 왕도 없다. 왕이라는 것은 부족 사회의 족장보다 큰 권력을 가진 중앙집권적인 군주제의 출발이다. 500년 동안 적어도 가나안 시대에 족장도 왕도 없었다면 도대체 그 사회가 무정부 상태였겠지라고 생각하겠지만 이스라엘 역사 중에서 적어도 고대사에서 이 시기 만큼 안락하고 평온하고 행복했던 시절이 없었다고 성경은 고백한다. 그러면 그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간단히 말한다면 서로 간섭하지 않고 잘 살았다는 뜻이다.
사사는 왕도 명령권 자도, 족장도 아니었다. 오직 전쟁 시에 용맹한 장군이 되어 나라를 안정되게 하고는 다시 평민으로 돌아가곤 했다. 사사출신의 신분은 사실 별 볼일 없었다. 입다는 창녀의 자식이요, 기드온도 양반출신이 아니었다. 사사시대는 오히려 왕이 되기를 거부했던 시대이다. 왕도, 법도 세금도 군대도 필요 없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우리대로 살겠다는 그러한 시대였다. 사사기 마지막 부분을 보면 “각자의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았던” 시대라는 구절이 있다. 어찌 보면 법도 질서도 없으므로 무정부 상태라고 할 수도 있지만 나름대로 평화로운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훗날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선지자들은 나라가 어려워 질 때 계속해서 이때를 회고하며 이 시기를 굉장히 그리워한다. 이 시기의 가장 중요한 이데올로기는 바로 “평등“이었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인간의 평등이었다. 그런데 그 후 왕이 있었던 단일 국가로서의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침략해 들어온다. 블레셋은 원래 문명이 있던 도시국가인 그리스의 크레테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신병기인 철병거를 가지고 있었다. 왕정 초기였던 이스라엘의 사울과 다윗의 시대에 이스라엘은 청동기 시대였다. 당시 블레셋은 이미 철기로 진입한지 오래였다. 이집트 박물관에 보면 왕이 타던 철병거가 있는데 수레바퀴를 인류 최초로 발명한 나라가 바로 이집트였다.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 이외에는 칼을 가진자가 없었더라고 기록했듯이 전쟁 당시 다윗은 물맷돌이었고 블레셋과의 엄청난 문화적 차이가 있었음을 볼 수 있다. 그리하여 국민들은 사무엘에게 우리도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를 만들자고 요구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BC 10세기였다. 500년간의 평화로왔던 사사시대는 국제 정세의 변화, 곧 이스라엘에게 강력히 도전하는 블레셋이라는 세력으로 인해 변화의 국면을 요구받게 된다. 그리하여 시작된 왕정은 이후 BC 6세기까지 이어지게 된다.
BC 586년 이스라엘의 왕정이 무너지게 되는데 이 사이에 물론 남북분열 등 여러 과정을 거친다. 이것이 곧 1차 성전의 멸망이다. 이는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충격의 이유는 첫째로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였다. 왕정과 신전은 깊이 결부되어 있는 것이었다. 왕은 중앙집권의 전제 군주가 되고 신이 사는 신전은 대부분 수도에 머물게 되는데 특히 이스라엘은 유일신교였기에 신전도 하나였고 그 신은 예루살렘에만 있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다른 곳으로 옮겨 다니는 신이 아니었다. 그 이전까지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었던가? 떠돌아다니는 하나님이었다. 텐트 치고 머무는 그곳에 하나님도 머물러 계셨다. 불과 구름기둥사이로 움직이셨던 하나님이었다. 그러던 것이 예루살렘의 성전은 곧 “하나님, 여기만 계셔요, 다른데 가시면 안돼요.” 라는 뜻이다. 이것은 곧 무엇을 의미하는가, 곧 종교와 정치가 기묘한 방식으로 얽혀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물론 세계사적으로 본다면 정교일치의 시대와 정교 분리의 두 시대가 있다. 역사를 연구할수록 정치와 종교 간에 사이가 좋든 나쁘든 간에 양자가 합할 때 역사에는 반드시 위기가 온다는 것이다. 종교적 본질인 진리라는 것과 변화와 현실을 중시하는 것은 현실논리요, 힘의 논리인,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는 현실중심의 정치라는 것은 그 속성상 맞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종교는 불변하며 현실을 중시하는 정치는 매순간 변하는 현실 논리이기 때문이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예배를 드리던 예루살렘 성전이 그것도 이방 왕에게 파괴당했다. 고대사의 전쟁에 있어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정복 할 때 그 최종결말은 정복된 나라의 신전에 그 왕이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것은 곧 신성 모독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 신이 죽는 것이다. 로마와 같은 경우에 있어 자기나라에 판 신전이 있었기에 정복한 나라의 신상을 거기에 가져다주곤 했기에 신을 없애지는 않았다. 따라서 거기엔 무수한 신상이 있었고 다신교적이었다. 로마는 정복 할 때 따라서 종교를 멸망시키지는 않았다. 하지만 앗수르나 바빌론은 달랐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도 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루살렘의 신을 제거했다. 유대인들이 볼 때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그 우주적 하나님이 사시는 집이 더러운 이방인의 선에 멸망당했다는 것은 엄청난 신학적 충격이었다. 이스라엘의 종교는 여기서 깨지기 시작한다. 이는 곧 민족 종교로부터 우주 종교로를 의미한다.
종종 하나님은 사람을 때려서 깨닫게 하시는 경우가 많다. 성전 멸망 이후 이사야서는 말한다 하나님은 사람이 만든 집에는 살지 않으신다고....이 고백이 있을 때까지 이스라엘은 얼마나 충격적인 사실 속에 살아야 했던가? 그렇다면 예루살렘의 솔로몬의 성전에는 처음부터 하나님이 사시지 않았다는 말이다. 여기에는 혼란이 있다. 역사의 위기에서 그들은 새로운 사조와 새로운 사상을 창출해 내는 것이다. 사마리아 여인을 예수님이 만났을 때 “그 날이 되면 이곳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 할 때가 오리니” 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곧 근본적으로 500년간 믿어왔던 신앙의 내용이 깨어졌음을 의미한다. 나중에 이르겠지만 이것이 소위 귀향이라든지 메시야라든지 곧 완전한 새로움, 곧 새 하늘과 새 땅, 예레미야의 경우에는 새로운 계약을 필요로 하고 또 창출하게 되기를 희망하게끔 되었던 것이다. 새 계약을 위해서 이는 곧 약간이기는 하지만 이전 것과 장차 올 새로 올 것과의 사이에 ‘단절’을 선언하게 되는 것이다.
또 적어도 가나안 땅에 아브라함 이후에 정착한 1500년 가까이의 팔레스타인의 터전이 깨어지면서 이들의 삶의 현장은 이산이라고 하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바벨론으로, 이집트로 요르단 등지로 터어키 지역으로 이들은 흩어진다. 이 들이 나중에 돌아온다.
이사야 선지자의 말대로라면 그루터기는 남아있다. 둥지는 잘렸지만 그루터기는 남아있어 언젠가는 나라를 회복할거라는 소망이 있었다. 그 귀향의 꿈은 머지않아 BC538년에 이루어진다. 페르시아의 고레스가 BC538년 바벨론의 수도인 바벨론을 멸망시키게 된다. 그리하여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페르시아의 식민지의 속국이 됩니다. 고레스왕은 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유를 주게 되는 것이다. 페르시아는 지금의 이란이며 백인들이었다. 그는 포로 민들에게 귀향의 자유를 주고 본래의 성전을 다시 지을 수 있도록 관용정책을 펴게 된다. 그에 비해 그 전의 메소포타미아의 바벨론이나 앗시리아는 그렇지 않았다. BC721년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시리아나 이후의 바벨론이 이스라엘에 대해 더 강력한 억압 정책을 썼던 것에 비하면 대조적이다. 고레스는 이스라엘사람들을 자기민족의 고향 땅으로 돌려보내게 하고 그들이 돌아와서 그 당시에 소위 스룹바벨 총독이 서게 된다.
이 사람과 함께 일했던 것이 여호수아, 제사장이었고 이들이 결합하여 제 2차 성전을 완성한 것이 BC515년이었다. 에스라, 느헤미야서를 보면 이 성전을 짓는 동안에 공사를 방해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 사람들에 대해 모든 것을 다 살펴보기는 어렵지만 간단히 말한다면 이렇다. 원래 스룹바벨과 여호수아는 팔레스타인 땅에 정착했던 사람들로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50년만에 돌아온 사람들이다. 성경에는 스룹바벨이 돌아올 때 함께 돌아왔던 사람들의 명단이 나오는데 그 명단 중에는 성전 멸망 시 잡혀갔다가 50년이 지나서야 늙어서 돌아온 사람들도 있었다. 우리나라로 말한다면 지금 남북이 가라진지 50년이 넘어서 점차적으로 그 2세대들만이 남는 것처럼 당시의 이스라엘도 귀향 시에 2세대들이 많았다. 50년의 세월 속에 이 팔레스타인의 사정도 많이 변했던 것이다. 물론 잡혀간 이들은 당시에 귀족, 왕족, 혹은 기술자들이었고 그 땅에는 주로 농민들 층이 남아 있었을 것이다. 한 사회는 어떤 위기를 맞게 되면 그 위기를 진정국면으로 해소하기 위한 자발적이고도 자율적인 사회질서의 재편을 이루게 된다. 만약에 사회변종이 없었더라면 한국형 재벌들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처럼 BC586년 이스라엘이 망하고 귀족들이 잡혀간 사이에 그 땅에 남아 있던 천민들 사이에서 새로운 계급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곧 이 땅에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권력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들의 새로운 계급이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 바벨론에 잡혀갔던 기존의 지배층들이 돌아와 그 정통성과 기존의 권리를 주장하면서 당시 팔레스타인의 신흥계급층들과의 사이에 갈등을 겪게 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통일이 되었을 때 북한 땅에 대한 과거의 집문서와 땅문서를 가진 이들이 자기주장을 하고 나선다면 과연 그들이 그 땅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인가? 훗날 과연 ‘통일’이라는 사회변동이 다시 북한 땅에 왔을 때 과거의 체제로 다시 복귀하는 가의 여부는 정치적 갈등과 알력을 통해서 결정될 것이다. 이후에 페르시아는 헬라의 마케도니아에 의해 정복된다. 헬레니즘의 시대가 도래했고 이후 이스라엘은 기원전 167-4년에 마카비 전쟁을 통해 독립을 쟁취하고 하스모니안 왕조를 탄생시킨다. 이런 와중에 이스라엘의 내부는 두 세력이 형성된다. 하나는 국수주의자인 정통파 바리새파였고 또 하나는 진보주의적이며 친 헬라적인 사두개인들이었다. 결국 이후의 이스라엘은 보수파인 바리새파를 중심으로 독립을 쟁취한다.
BC141년 경 시몬이라는 사람이 왕이 된다. 그는 혼자서 왕인 동시에 제사장, 군대 사령관이된다. 하시딤이란 그 단어가 뜻하듯이 히브리어로 율법에 충실하다는 뜻으로, 바리새파 사람중에 아주 경건한 유대인을 일컫는 말이었다. 이들은 마카비 가문의 후예에 의해 세워진 하스모니안 왕조가 율법에 위배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율법에 의하면 유다 지파의 다윗 왕조의 후예가 아니고서는 안 되었다. 제사장 출신의 시몬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막강한 지도력을 발휘한 이후에 왕이 된 것은 기원전 586년 유다 멸망 이후 거의 400년만에 모진 고생 끝에 독립운동을 통해 세운 왕조임에도 불구하고 그 정통성을 상실한 결과가 되었던 것이다. 이 왕조가 시작되자마자 하시딤과 왕조와는 대립하게 되었다. 하스모니안 왕조의 몇몇 왕들은 이 하시딤의 세력을 축출하기 시작한다. 그들 중 요한 히르카누스2세라는 왕은 하루아침에 바리새파 사람 800여명을 예루살렘에서 십자가 처형한다. 그리하여 이들이 옮겨 간 곳이 에세네파, 즉, 사해의 쿰란 공동체였다. 열심으로 싸워 나라를 되찾은 이들은 결국 예루살렘에서 모두 쫓겨나게 된다. 이들은 쿰란을 형성하고 기도와 근신의 암흑시기를 보내면서 메시야가 곧 오실 것이라는 임박한 종말론적 사상을 가지게 된다.
하스모니안 왕조는 대를 이어오다가 알렉산드라 살로메가 여왕으로 즉위한다. 그런데 그 왕자들 가운데 요한 히르카누스3세와 아리스토불루스2세가 세력다툼을 한다. 형제간의 정권찬탈의 과정에서 이들은 각각 로마와 사막의 제국 나바티안 왕조를 각각 개입시킨다. 페트라라는 도시가 이 나바티안 왕조(BC 2C~ AD 2C)의 수도였다. 이들은 후에 로마의 하드리안 황제에 의해 멸망한다. 그리하여 이 두 제국이 팔레스타인에서 충돌하면서 하스모니안 왕조는 물러나면서 로마는 BC63년부터 팔레스타인을 통치하게 된다. 이 때 로마는 안티 파테르를 등극시킨다. 이는 곧 헤롯 대왕의 아버지였다. 안티 파테르는 원래 유대인이 아니었다. 요한 히르카누스라는 하스모니안 왕조 때 헤브론이라는 유다 남쪽, 이두메 지방을 정복하면서 그 이두메인들을 할례를 줄 때 유대인에 편입된 자였다. 유대인들은 이 이방인 왕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그는 유대인들을 박해했다. 이것이 예수님 당시의 정황이었다. 그것은 지파 간의 갈등, 외세의 개입, 내분, 사회적 혼란의 시기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은 탄생하게 된다. 하스모니안 왕조는 BC63년경에 몰락한다.
BC63년경 폼페이가 들어오면서 로마의 개입을 받게 된 이스라엘은 점차로 로마의 속국이 된다. 이 같은 행정적 간섭이 심화되면서 이스라엘은 저항하게 된다. 그것이 곧 제1차 유대반란(AD66~70년, 성전 파괴까지)인데 유대 반란이라 함은 역사적으로 전쟁이란 말이 주권국가간의 충돌을 일컫는 말이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은 자치정부이긴 하지만 국제세계에서 아직 국가로서 인정을 못 받고 있다. 팔레스타인 분쟁이란 말이 이미 전쟁상태나 다름없는 팔레스타인의 상황을 표현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일부 외신, 프랑스의 좌파 신문이나 친 아랍 측에서는 ‘팔레스타인 대통령 아라파트‘라고 표현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이러한 저항은 로마로 하여금 보다 강력한 무력수단을 통해 예루살렘을 정복하게 하면서 70년 급기야 예루살렘 성전은 멸망한다. 제1차 성전의 파괴와 2차 성전의 파괴는 성격상 큰 차이가 있는데 전자는 역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새로운 BC 515년 2차 성전 재건과 연결된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는 현재까지 예루살렘의 성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전파괴이후 ,종교적인 측면에서 유대교와 기독교에 대해 언급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양자간의 관계를 교리사나 신학적인 것을 떠나 역사적으로만 간략히 조명해 본다면, AD70년 성전파괴이후 이스라엘은 디아스포라, 소위 이산이 시작되어 전 세계로 흩어진다. 전통적인 신앙구조에 있어 이스라엘이라는 집은 두 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진다. 그 하나는 성전이며 다른 하나는 율법, 즉 토라였다. 성전과 율법이 이스라엘을 혹은 유대교를 국가로서 종교로서 지탱하고 있었던 것이다. 성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따라서 이스라엘 혹은 유대교를 지탱하고 있는 유일한 기둥은 토라만이 남게 되었다. 그래서 AD70년 이후의 유대교는 완전히 토라 중심의 종교가 되어 버린다. 더 이상 성전은 없게 되었다, 오늘날까지도... 따라서 성전이 없기 때문에 대제사장도 제사장도 동물 희생제사도, 다 나아가 교리적으로 동물 희생 제사를 통한 속죄도 없게 되었다. 그렇다면 무엇을 통해 그들은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남은 것은 오직 율법밖에 없었다.
성전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살듯이... 완전한 토라 중심의 종교를 유대교라 부른다. 오늘날 유대교라 부르는 것과 ‘이스라엘의 종교’라 명했던 과거의 종교는 전혀 다른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스라엘 종교라 함은 AD70년 이전의 성전과 율법 중심의 두 기둥을 가진 이스라엘의 종교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유대교란 성전이 없는 율법 중심의 종교를 말하는 것이다. 유대교에 있어서는 오직 토라를 잘 지키는 것이 구원에 이르는 길인 것이다. 따라서 유대교는 토라를 보다 잘 지키기 위해서 공부하는 종교이다. 중심은 이제 성전 대신에 율법을 공부하는 장소인 회당이 되었다. 회당은 율법을 공부하는 학교를 말한다. 이후로 점차적으로 회당은 예배의 기능까지 흡수한다. 여기서의 예배란 동물을 잡아서 피를 드리는 희생제사는 물론 아니다. 유대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어렸을 때부터 회당에서 율법을 공부한다.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공부하는 민족은 이스라엘 민족밖에 없다.
그만큼 그들에게 율법의 공부는 구원과 직결되는 것이다.
5세기부터 1894년까지는 이스라엘은 나라도 주권도 없는 국제 고아 내지는 떠돌이의 삶을 보낸다. 독일에 살면 독일계 유대인이요, 프랑스에 살면 프랑스계 유대인이, 스페인에 살면 스페인계 유대인이었다. 유대인의 이 같은 디아스포라의 역사는 너무도 광범위해서 히브리대학을 예로 들자면 역사학부중 디아스포라 역사학부가 따로 있는데 그 중에서도 모로코 내지는 북 아프리카계, 혹은 터어키계, 동 유럽계, 아메리카계, 스페인계 등 유대인만 따로 연구하는 파트가 있을 정도이다.
그 동안의 역사는 팔레스타인이라는 지역을 중심으로 이야기해 볼수 있는데 AD 5세기에 팔레스타인을 점령한 것은 기독교인들인 비잔틴 사람들이었다. AD 7세기경에는 마호메트의 혁명이 일어나고 사우디아라비아로부터 무슬림 들이 이곳을 점령하고 비잔틴을 축출하게 된다. 그러다가 10세기 후반 정확하게는 1091년 경 십자군들이 유럽으로부터 건너와서 무슬림 들을 제거하고 이곳에 기독교 왕국을 건설한다. 이것이 13세기까지 계속되다가 당시 이집트 무슬림인 마물룩 인들이 이곳을 점령하다가 16세기에 터어키인 들에게 19, 20세기 초에는 다시 영국이 이 팔레스타인을 점령하게 된다. 그리고 50년의 영국 통치 후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하게 되는 것이다. 약 1500년 동안 팔레스타인은 역사의 주인들이 빈번하게 교체되었다. 만약에 팔레스타인 땅에 흘린 이들의 피를 채취해 본다면 아랍, 기독교, 무슬림, 십자군, 터어키계, 심지어는 몽골의 징기스칸까지 문명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너무도 혼혈적일 것이다.
그러다가 유럽에서 한 유대의 지식인이 탄생하는데 그의 이름은 테오도르 헤르쩰이었다. 이 사람은 원래 비엔나 대학의 법과대 출신이었고 어느 날 운명적인 신문기사를 접하게 된다. 프랑스에서 이 시기에 드레퓌스 사건이라는 것이 발생하게 된다. 프랑스군내에서 드레피스라는 대위를 독일의 간첩으로 체포하게 되는데 이 사람이 바로 유대인이었다. 하지만 사실은 이 사람은 첩보활동과 무관한 자였는데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재판을 받아 사형언도를 받는 희생양이 된 것이었다. 그래서 당시 에밀 졸라를 비롯한 프랑스의 지식인들이 드레퓌스 사건을 비판하면서 구명운동을 벌인다. 드레퓌스의 무죄함과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처형당해야하는 부당성을 고발한 것이다. 언론사에서 드레퓌스 사건은 유명한 사건이다. 프랑스의 언론사 내지는 19세기의 프랑스를 이해하는데 유효한 사건인 것이다. 테오도르 헤르쩰은 이 사건을 취재하면서 유대인이 유럽사회에서 얼마나 차별 받고 있는지를 실감하게 된다. 그 자신도 랍비의 아들이었다. 1984년 그는 ‘데어 쥬덴스타트’ 라는 독일어로 된 소책자를, 자세히 말하자면 50페이지도 안 되는 작은 팜플렛을 출판한다. ‘쥬덴스타트’ 란 ‘유대국가’란 뜻이다. 이것이 바로 시온주의를 제창한 최초의 이론서가 되었던 것이다. 그 내용이란 천년 이상의 방랑과 차별에 있는 유대인이 그 존엄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유대국가가 필요하다는 것이었고 시온으로 즉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19세기말 당시의 이 같은 이야기는 현실적으로 전혀 불가능한 하나의 환상으로만 여겨졌다. 테오도르 헤르쩰은 각 나라별로 유럽의 머리가 깨인 지식층들, 소위 계몽주의 운동가들 시온주의 이상아래 조직하고, 시온주의 총회를 여는 등의 활동을 한다. 많은 유대의 지식층들이 이 운동에 가담하면서 전 세계적인 조직을 확보해 나가는데 제 4차 시온주의 총회의 연설을 하고 그 다음해에 41세라는 젊은 나이에 병으로 그는 죽는다. 그것이 1904년이었다. 그는 마지막이 된 그 연설에서 이런 말을 했다. “우리가 꾸는 이 꿈은 5년 내지는 50년 후에는 반드시 이루어 질 것이다.“ 그가 죽은 지 50년이 채 안되어 일부에서는 그를 예언자였다고 까지 할 정도로 그의 말은 현실로 이루어졌다.
이는 중요한 부분이고 현대 이스라엘사를 잘 모르는 관계로 우리는 이 시온주의에 대해 적잖은 오해를 하고 있기 때문에 시온주의의 두 가지 특징만 설명하고 이제 이 강의를 마치고자 한다. 한마디로 시온주의는 메시야 운동이 아니다. 이전에 잠깐 언급한 적이 있지만 메시야 운동이란 제1차 성전이 멸망하고 바벨론에 잡혀간 유대인들이 선지자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등을 통해서 귀향과 회복의 꿈을 품는데 그것은 언젠가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할 메시야를 보내서 화평케 하시고 그들에게 아름다운 세계를 주실 것이라는 소망이다. 이것을 종교적인 의미에서 메시야 사상이라 한다. 이러한 꿈은 테오도르 헤르쩰 당시에도 일부 종교적인 유대인들을 통해서 계속적으로 유지되어 왔던 사상이었다. 하지만 테오도르 헤르쩰이 우리의 고향, 시온으로 돌아가자는 주창을 했을 때의 이 귀향은 종교인들이 꿈꾸는 그런 귀향은 아니었다. 이것은 정치적인 귀향이다. 이것은 정치적인 사건이며 정치적인 운동이다. 현대 이스라엘의 독립을 메시야 운동의 완성으로 보려는 사람들이 많다. 그것은 요한계시록의 이스라엘의 회복을 1948년의 이스라엘의 독립과 일치시켜 보는 시각이다. 하지만 그것은 역사적으로 옳은 말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정치와 종교를 분리해서 생각하는 사람이다. 이것은 나의 관점이기도 하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실제로 그렇다. 테오도르 헤르쩰의 초기 운동에 있어서 많은 정통파 종교인들 -소위 메시야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었던-이 제휴를 요청해 왔지만 그는 한번도 이 제휴에 흔들리거나 그것을 수용했던 적이 없었다. 같은 목적 하에 정치적으로 종교인들과 손잡아 국가 건설을 앞당길 수도 있었지만 그는 그런 상황에서 미래에 무엇이 문제로 다가올지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고 본다. 심지어는 그들과 제휴하기를 꾀했던 자기의 측근중 하나인 막스 노르다오 -그는 막시스트 출신의 유대인이었고 헤르쩰의 사상적 이념에 많이 기여했던- 마저 시온주의 총회에서 자기 손으로 제명시킨다. 따라서 역사적으로 볼 때 메시야 운동과 시온주의 운동은 다른 것으로 보아야 한다. 나의 주장은 이렇다. 이스라엘의 건국은 메시야 운동의 결과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스라엘내의 팔레스타인 문제를 조금 논의해보면 좀 더 분명해 지리라. 이스라엘의 라빈 총리를 암살한 사람은 바르 일란 대학교 법과대 3학년 재학 중이었던 한 유대인 청년이었다. 그는 바로 구쉬 에무님이라는 운동의 중심 세력을 이루는 정통파 종교인 출신이다. 구쉬 에무님이란 곧 믿음으로 이스라엘을 구원시킨다는 뜻으로서 현재의 이스라엘을 세속 정부의 결과로 보아 부정하며 허상으로 규정한다. 참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는 세속 정부를 전복시켜야 한다고 그들은 믿는다. 그들은 땅을 나눠줘서라도 팔레스타인과의 협상을 이루려 했던 라빈의 평화정책의 비 신앙성에 분개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들에게 있어서 국토는 곧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거룩한 개념이었던 것이다. 과연 라빈 총리의 암살은 옳은 것인가? 하지만 한국 기독교인들 중의 상당수는 그들을 정신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생각이 다르다고 폭력을 쓴다면 우리 중 몇 사람이나 살아 남겠는가? 기독교는 유대교의 실체를 알 필요가 있다. 종교라는 것은 때로는 편협한 생각으로 그 폭력성을 드러낼 때가 있다. 라빈 총리의 암살 사건에서 보듯이 적은 항상 내부에 있는 것이다. 예수님을 판 것은 유다였다. 나는 중동에 평화가 하루 빨리 정착되기를 원하며 그것이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이라 믿는다. 누가 이념적으로 옳든지 동족 간에 서로 피 흘리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시온주의는 메시야 운동의 산물이 아닌 동시에 안티 세미티즘, 소위 반유대주의의 산물이다. 유대인들은 떠돌아다니는 수천년 동안 다른 민족으로부터 박해를 , 미움을 받았다. 소위 테오도르 헤르쩰이 ‘우리는 이런 방식으로는 인간의 dignity, 존엄성을 얻을 수 없다’라 외칠 정도였다. 테오도르는 물론 랍비의 아들이었기에 어렸을 적부터 종교적인 자기 민족의 귀향을 배우면서 자랐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시온주의 제창’은 철저하게 유럽의 현실을 -드레퓌스 사건 같은 것을 경험하면서- 예고한 것이었다. 그로부터 불과 50년이 채 못 되어 나치가 등장해서 600만 명의 유대인이 학살된다. 그 이전에 이미 상당수의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에 이민하기도 했었다. 그리하여 2차대전의 종결과 함께 남은 유대인 생존자들은 급거 팔레스타인으로 몰려들었다. 1948년 유엔의 지지를 얻어 이스라엘이 독립 시에 신생 이스라엘의 인구는 불과 60만이었다. 불가능한 일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물론 여러 가지 외교적 노력도 있었지만 나치의 유대인 학살은 이스라엘 건국의 결정적인 촉매 작용을 했다. 그러므로 테오도르 헤르쩰의 시온주의 운동은 철저히 현실성의 결과이다. 그는 곧 유대인의 학살과 박해라는 현실로부터 이 운동을 전개했고 따라서 종교적인 유토피아의 사상의 결과가 아니라 현실적인 정치적 운동으로 보아야 한다. 물론 그 결과로서 탄생한 이스라엘이 종교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다. 초대 수상인 벤구리온 등이 종교인들과 정치적으로 제휴하면서 종교인들에게 세금면제와 그 자녀들의 병역의 의무면제를 약속한 것이 지금은 법으로 명문화되었을 정도이다. 현대 이스라엘의 문제에 있어 내적인 것은 소위 종교인들과 세속인들 간의 갈등이요 외적인 것은 아랍과의 갈등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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