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역사
2차 대전 이후 팔레스타인 지역에 이스라엘 국가가 수립되면서 이 지역에서 유대인과 아랍인간의 갈등이 시작되었으며, 4번에 걸친 중동전쟁으로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지역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자 이 지역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은 난민이 되어 떠돌게 되었다. 이후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를 비롯한 중동지역의 이슬람 저항운동단체의 테러와 유혈분쟁이 계속되었다. 이스라엘과 PLO는 1993년 「영토와 평화의 교환」을 원칙으로 한 '오슬로평화협정'을 비롯하여 여러차례 평화협정이 체결되었으나, 합의안은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고 이 지역의 유혈분쟁은 계속되고 있다.
■ 팔레스타인지역 유대인의 정착과 로마지배 그리고 이산
기원전 15세기 경 팔레스타인지역에 들어온 유대인은 BC 997년 다윗왕에 의해 처음 국가를 성립했다. 그러나 기원전 6세기 외세에 의해 망하고 유대인들은 식민치하에 들어간다. 기원전 100년 무렵엔 로마의 속령이 되어 지배를 받게 된다. 로마제국으로부터 박해를 받던 유대인들은 제1차 유대전쟁을 일으켰으나 AD70년 로마에 패하여 예루살렘이 정복당했으며 신전도 소실되었다. 135년 제2차 유대전쟁에서도 패하여 유대지역은 황폐해졌고 유대인은 세계각지로 흩어지게 되었다. 이것을 디아스포라(이산)라고 한다.
■ 팔레스타인지역 이스람교도의 정착과 유대인의 시오니즘 운동
팔레스타인지역은 637년 이슬람교 아래 단결한 아랍인들이 로마를 격파한 이후 16∼20세기 초에는 오스만제국이 점령하였는데 주로 이슬람교도의 지배가 지속되었으며 이후 팔레스타인은 아랍인이 실질적인 주인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을 거치면서 팔레스타인에는 예로부터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의 성지(聖地)가 함께 있는 복잡한 종교적 지역이 되었다.
터키령이었던 팔레스타인은 제1차 세계대전에 터키가 패하면서 이후 영국의 위임통치령이 되었다. 그런데 19세기 후반들어 국가건설을 위해 투쟁하던 유대인은 국가건설의 예정지를 성서에서 약속한 땅 팔레스타인으로 정했으며, 팔레스타인의 시온산은 그들 국가건설의 상징이었으므로 시온산이 있는 땅으로 돌아가자는 '시오니즘' 운동을 전개하며 팔레스타인지역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시오니즘에 의한 유대인의 이주가 계속 증가하자 아랍인의 유대인 배격운동이 격화되었다.
■ 벨푸어선언과 아랍-유대인의 갈등
1차대전 중인 1917년 영국의 외무장관 아서 밸푸어는 영국이 팔레스타인에서 유대인들을 위한 민족국가를 인정한다는 '벨푸어선언'을 했다. 이것은 미국내 유대인의 환심을 사 미국을 1차대전에 끌어들이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영국은
1차대전에서 독일편에 서있던 오스만제국 내의 아랍인들의 반란을 지원하면서 아랍인에게도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독립국가 독립을 약속하였다.(맥마흔 선언)
■ 이스라엘 건국과 1~4차 중동전쟁
1930년대 나치스의 유대인 학살로 유대인의 팔레스타인으로의 귀환이 증가하여,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에는 유대인 이주자가 팔레스타인 인구의 31%, 유대인이 소유한 땅은 팔레스타인의 5.67%가 되었다. 국제적으로 유대인에 대한 동정적 여론이 급증하게 되었다.
이 결과 1947년 UN에서 팔레스타인을 아랍지구 48%와 유대지구 52%로 분할하는 결의안 가결했으며 이스라엘 성립이 선언되었다. 그러나 시오니즘운동은 팔레스타인에서의 아랍민족의 독립을 반대하고 아랍주민을 쫓아내어 오직 유대교도만으로 나라를 이루려는 유대인들의 건국운동이므로, 팔레스타인내 아랍주민을 배제하고자 하였다.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의 독립이 선포되었고 곧바로 전쟁으로 이어졌다. 이집트, 요르단, 사우디아라비아, 시리아, 레바논 등 아랍국가들이 이스라엘의 독립 선포와 동시에 이를 거부하고 선제공격을 가함으로써 1차 중동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제1차 중동전쟁에서는 이스라엘이 승리하면서 유대인은 본래 UN분할지역보다 50%가 많은 지역을 확보하게 되었다.
이후 1974년까지 4차례의 중동전쟁을 치르면서 이스라엘은 시리아의 골란고원, 요르단강 서안지구, 가자지구와 시나이반도를 점령하여 팔레스타인 지역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이스라엘의 건국과 함께 이곳에 살던 팔레스타인인 90여 만 명이 집단 탈출을 시도함으로써 팔레스타인 난민의 역사가 시작되었으며 이들은 삶의 터전을 잃고 주변 국가에서 떠돌이 신세로 지내게 되었다.
■ 중동평화협상과 갈등의 역사
분쟁이 끝이지 않던 아랍세계와 이스라엘은 1979년 '캠프데이비드 협정' 체결로 숨을 돌리게 된다. 1979년 카터 미대통령의 중재 속에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과 베긴 이스라엘총리 간에 '캠프데이비드협정'을 체결, 이스라엘은 점령지인 시나이반도에서 철수했다. 그러나 다른 아랍국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이스라엘도 시리아로부터 빼앗아 점령하고 있던 골란고원의 반환을 거부해 불화가 더욱 심화됐다.
한편 팔레스타인 독립국가의 건설을 목표로 1964년 결성된 비밀저항조직인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가 세계 곳곳에서 테러 등으로 대이스라엘 투쟁을 전개하고 이스라엘도 1982년 레바논 PLO 본부를 습격하는 등 60년대 이후 양측의 「피의 악순환」이 계속됐다.
1987년 12월 팔레스타인인들의 집단적인 반이스라엘 투쟁인 '인티파다(민중봉기)'가 일어났고 이후 폭력사태가 끊이지 않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평화를 모색하게 되었다. 이스라엘과 PLO는 1993년 9월 「영토와 평화의 교환」을 원칙으로 한 '오슬로평화협정'을 체결, 팔레스타인자치국 건설에 합의했다. 이에 따라 1994년 7월 1일에는 아라파트 PLO 의장이 가자 자치지구에서 생활을 시작하였으며, 마침내 7월 5일 자치정부의 수립을 공식 선언하였다.
그러나 1997년 3월 팔레스타인에 강경입장을 고수하는 네탄야후 이스라엘 총리가 동예루살렘지역에 유대인 정착촌 건설을 강행하자 이에 반발한 팔레스타인측도 과격 이슬람단체들이 협상을 거부하면서 이스라엘을 겨냥한 테러를 잇따라 감행, 협상은 위기국면에 다시 빠졌었다.
그 후 빌 클린턴 미대통령과 후세인 요르단 국왕의 중재로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간에 평화협상이 이루어졌다. 1998년 10월 23일 「영토와 평화의 교환」협정의 마지막 쟁점들을 해소하고 최종 협정문안을 작성했다(와이리버 협정). 그러나 동예루살렘의 주권을 서로 가지겠다고 주장하는 양측의 대립이 결정적 걸림돌이 돼 협상은 난항을 거듭했고 지난 2000년 9월 28일 아리엘 샤론 리쿠드당 당수의 동예루살렘내 이슬람성지 방문 사건이 돌출, 평화협상은 피의 파국을 맞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유혈 충돌이 최고조에 달했던 양측은 이후 휴전협상과 재충돌, 암살과 자살테러 등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에 2003년 4월 미국과 유엔, 러시아, 유럽연합(EU) 등 국제사회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유혈사태를 종식시키기 위해 '중동평화 로드맵'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2005년 9월 12일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에서 완전 철수하였다. 이로써 1967년 제3차 중동전쟁 이후 계속돼온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점령이 38년 만에 종식됐다. 하지만 정착촌 철거를 선언한 이스라엘의 아리엘 샤론 총리가 극우파인 리쿠드당의 반발을 샀고, 이 상황에서 2006년 1월 갑작스런 뇌졸중으로 총리 임무 수행이 중단되었다.
2009년 2월에 극우파인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가 새로 취임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네타냐후 총리는 중동전쟁(1967년) 이전의 영토를 반환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이스라엘의 안전을 이유로 협상할 수 없으며 또한 수도 예루살렘의 분할 역시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결국 팔레스타인은 네타냐후가 2011년 9월 동예루살렘에 대한 종전의 정착촌 건설 중단 조처를 연장하지 않자 협상을 즉각 중단했으며, 이를 둘러싼 양측 간 갈등은 계속되었다.
그러던 2012년 11월 14일,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무장단체인 하마스를 미사일로 공격, 최고 군사령관 아흐마드 알 자바리를 폭살하는 등 가자지구에서 8일간 교전을 벌였다. 이 교전으로 160여 명의 사망자와 1,00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이에 국제사회가 개입하여 양국 간의 중재 결과 휴전 합의를 이끌어냈다. 그러나 두 나라는 여전히 정치적 상황에 따라 어느 때라도 무력 충돌이 재발할 수 있는 갈등 위기에 놓여 있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역사 (시사상식사전, 박문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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