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의 역사
마. 북 왕국 이스라엘과 남 왕국 유대(BC 922 - BC 586 경)
1. 2왕국으로 분열된 원인 [고대 이스라엘 지도]
BC922년 솔로몬이 죽은 후 르호보암이 왕위를 이어 받았다.
이스라엘과 여로보암이 선왕보다 노역을 가볍게 하여달라고 청원하였다.
왕에게 늙은 관원들은 허락하라고 청원하고, 젊은 관원들은 더 가혹하게 할 것을 청원하였는데
왕은 젊은 관원의 말대로 하였고, 10지파는 다윗의 자손을 거부하고 여로보암을 왕으로 삼았다.
왕상11:30-31에 선지자 아히야는 그가 입은 새 옷을 찢어 12조각으로 만들어 10조각은 여로보암에게
주었는데 아히야의 예언대로 2왕조가 이루어졌다.
이로써 120년(사울40+다윗40+솔로몬40) 존속된 통일 왕국은 분열되었으며,
남은 2개 지파인 유다와 베냐민은 남 왕조 유대(유다)왕국이 되었다.
북쪽왕국은 1대 여로보암부터 19대 호세아 까지 이며,
남쪽왕국은 4대 르흐보암부터 23대 시드기야까지이다.
2. 북쪽 이스라엘왕국의 간략사
북쪽은 온난하고 수량이 풍부하여 곡식, 포도, 올리브 등이 풍부하였다.
단과 벧엘에 금송아지는 망할 때까지 섬기여 하나님 보시기에 북쪽 모든 왕들은 모두 악하였는데
가장 악독한 왕은 아합이고, 아주 나쁜 왕은 오므리이다.
많은 왕이 쿠테타에 의하여 왕위를 쟁탈했으며, 후회한 왕은 있어도 회개한 왕은 없었다.
수도는 처음에는 디르사에 있었으나 오므리가 사마리아로 옮긴 후 망할 때까지 수도였다.
BC734년 18대 베가 왕 때 앗수르왕 디글랄벨레셀(다른 이름은 '불')이 북이스라엘과 시리아를
정복한 후 모든 주민을 포로로 데려갔으며, 이를 제1 갈리리 포로라고 한다.
사마리아 땅과 이스라엘 왕국만 남았다.
제2 갈리리 포로는 19대 마지막 왕 호세아 BC722년 사마리아는 완전 함락되었고,
왕과 주민은 앗수르로 끌려가 고산 강가에 있는 할라와 하볼과 메대 사람의 여러 고을에 두었다.
이것을 '잃어버린 10부족'이라고 부른다.[앗수르 참조]
남은 자는 이방인들과 결혼하여 혼혈아들이 사마리아 조상이 되어 유대민족 으로부터 배척받고
사람대접을 받지 못한 이유이다.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 대화에서 알 수 있다.(요4:7-29)
선지자는 아히야, 엘리야, 엘리사, 이사야, 아모스, 호세아, 미가 등이다.
3. 남쪽 유대왕국의 간략사
남쪽은 땅이 건조하여 메마르며, 주된 농업은 목축이었다.
2왕국으로 나누어 질 때에 남은 2개 지파 가운데 유다가 대표적이 되여 이 나라의 이름이
유다(유대) 왕국이라 하게 되었으며, 수도는 예루살렘이다.
나쁜 왕은 르흐보암, 아비얌, 여호람, 아하시야, 여호야긴, 시드기야이며,
가장 나쁜 왕은 아달랴(악마적), 아하스(악함), 므낫세, 아몬, 여호야김(악함)
가장 좋은 왕은 히스기야, 요시아이고 나머지 왕들은 대부분 좋았다.
이때부터 이스라엘 민족을 '유대인'이라는 부르는 대명사가 되게 되었다.
유다인(Judah)의 이름에 '쥬다(Judas)'가 많은 것도 '유다'에서 왔다.
남왕은 선한 왕이 많았고, 반란도 적었다.
왕위는 계승에 의하여 거의 이루어지고, 종교 개혁하여 우상도 파괴하였다.
선지자는 이사야, 하박국, 예레미아, 스바냐, 에스겔 등이 활약하였다.
<이스라엘 백성이 끌려간 고산>
<큰 지도>
4. 2왕조 역사의 기록이 있는 성경
2왕조 역사의 기록이 있는 성경은 열왕기상, 하는 남, 북 왕조를 다 기록하였으나
북 왕조 기록은 이곳에 있으며, 역대기하는 유대 왕조의 기록이다.
열왕기 상
1-2장, 다윗의 노년과 솔로몬이 왕이 되는 과정을 기록
3-11장, 성전건축과 솔로몬 왕국과 부인에 대한기록
12-22장, 북 왕국은 여로보암-아합까지이고, 남 왕국은 르흐보암-여호사밧 까지이다.
열왕기 하
1-17장: 북 왕국은 (아하시야-마지막왕 호세아까지이고, 남 왕국은 여호사밧-아하스까지이다.
18-25장: 남 왕국은 히스기야-마지막 왕 시드기야까지이다.
역대기 하
1-9장: 솔로몬의 성전건축과 지혜에 대한기록
10장-36장: 남(유대)왕국 기록은 르흐보암-시드기야까지이다.
참고로 사무엘 상하는 사울과 다윗에 대한 것을 기록하였으며, 역대기 상은 다윗에 대하여 기록하였다.
그리고 왕의 재위기간 때문에 고민을 많이 하였다.
1. 모든 연대는 할레이 저서 '성서 핸드북'을 인용하였다.
2. 재위기간의 연대가 자료마다 다르다.(약 2.500년 전의 역사를 생각하면 이것도 대단한 것이다.)
3. 재위연대가 겹치는 경우는 섭정기간과 성경에 기록된 통치기간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4. 재위연대가 없는 연도는 자세한 것은 모르나 재위가 늦어졌거나 왕이 없었을 경우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대략 그 시기라고 생각하면 된다.
[1] 북 이스라엘(BC 922 - BC 722 경) [고대 중동지도]
1. 여로보암(BC933-BC911) [고대 이스라엘 지도]
느밧의 아들로 밀로를 건축할 때에 감독이었다.
솔로몬의 가혹한 정치 때문에 선지자 아히야는 장차 이스라엘 10지파의 왕이 된다는 예언을 들었다.
솔로몬이 이 사실을 알고 죽이려하여 애굽으로 도망가 바로 시삭에게 있다가 솔로몬이 죽은 후에 돌아왔다.
르호보암의 어리석은 정치를 기회로 삼아 북방의 10지파의 지지를 받아 왕이 되어 22년간 재위하였다.
(왕상 12 :1-20) (대하 10:1-19)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는 것은 장래에 자기를 배반할 것을 염려하여 선지자 아히야의 반대를
물리치고, 금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는 북방의 단에 또 하나는 남방 벧엘에 두어 정치와 더불어 종교도
분립하게 하였다.(왕상 12:25-33)
이것은 자기와 백성을 하나님에게 배반하는 죄를 범하게 한 것으로 벌을 받아 아들 아비야가 죽었고,
아히야의 예언대로 그의 혈통은 아들 대에서 망하였다.(왕상11-15장)
북 왕국의 왕들 모두가 여로보암이 만든 금송아지 우상을 섬기는 악을 행하여 왕상14:15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쳐서 강(유프라테스) 너머로 흩으시리니'라고 예언한 것이 BC722경에 이루어졌다.
2. 나답(BC911-BC910)
여로보암의 아들로 2년간 통치 중에 아버지와 같은 죄를 짓다가 불레셋에게 점령된 깁브돈 성에서 부하
바아사에게 암살되었고 식구모두도 죽임을 당하였다.(왕상15: 25-27)
3. 바아사(BC910-BC887)
천한 신분인 그는 폭력으로 왕이 되어 24년 통치하였으며, 디르사를 수도로 정하였다.
악을 행하여 여로보암과 같이 파멸될 것이 예언되었다.
앗수루와 동맹하여 유대를 공격하여 라마성을 건축하려고 하였으나 남 왕 아사는 아람 왕과 벤하닷과
동맹하여 이스라엘 4개의 성을 점령하여 바아사는 라마성 건축을 포기하고 돌아갔다.
라마성의 건축 재료를 가져다가 게바와 미스바 2성을 건축하였다.
(왕상15:33-34, 16: 1-4, 렘41: 9) (대하16: 1-6)
<선지자 아히야가 옷을 12조각
내어 10개는 여로보암에게
주었다.>
4. 엘라(BC887-BC886)
바아사의 아들로 2년 통치하였으며, 향락을 즐기다가 취중 신하 시므리에게 암살 당하였고,
식구모두도 죽임을 당하였다.(왕상16: 8-9)
5. 시므리(BC886)
병거 대장인 그는 엘라를 살해하고 디르사에서 자칭 왕이라고 하였으나 다른 편이 즉시 오므리를 왕으로
삼아 디르사를 점령하였다.
시므리는 왕궁에 불을 지르고 그 속에서 죽은 것은 왕이라고 자칭한지 겨우 7일째였다.
그는 베냐민 지파로 사울의 왕위를 회복하려고 하였다.(왕상16: 8-20)(대상8:36)
6. 오므리(BC886-BC875)
엘라의 군대장관으로 시므리를 죽였으나, 또 다른 편이 디브니를 왕으로 삼으려고 하여 디브니를 죽였다.
왕이 된 후 4년간은 내란에 시달렸고, 6년 되던 해에 사마리아 성을 건축하여 수도로 삼았다.
유대를 정벌하기 위하여 모압과 화친하고 베니게와 동맹을 맺는 동시에 아들 아합을 두로 왕녀 이세벨과
혼인시켰다.
이세벨이 가지고 온 바알 신을 백성이 섬기기 시작하여 오므리의 왕조가 붕괴되는 원이 되었다.
그는 12년간 재위 중에 6년은 디르사에서 나어진 6년은 사마리아에서 통치하였으며,
이후의 왕들은 사마리아에서 통치하게 되었다.(왕상16: 9-35)
★ 고고학적 자료
오므리의 강대함은 아다드니라리 비문에 이름이 나온다.
살만에셀(샬마네세르-샤르마네세르) 3세의 검은 오벨리스크 비문에 '오무리의 아들(후계자),
예후의 조공인 금, 은, 금주전자, 금잔, 주석, 왕홀(王笏), 창을 나는 받았다'를 기록했다.
BC850년의 모암비석에 '나 모압왕 메사는..., 이스라엘 왕 오므리는 여러 날 동안 모압을 억압했고 ...'라고
기로하였으며, 그가 죽은 후에도 이스라엘을 오므리의 땅으로 알려졌다.
그는 사마리아를 최초로 건설한 건설자이기도 하다.
7. 아합(BC875-BC854)
오므리의 아들로 22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리니며,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삼아
바알을 섬겨 예배하고 사마리아에 건축한 바알의 신전 안에 *바알을 위하여 제단을 쌓으며,
또 아세라 상을 만들어 그의 이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여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다.(왕상16: 29-33)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을 사려고 하였으나 나봇이 거절하여 그를 죽이고 빼앗은 고로 *엘리야가
그 집이 멸망할 것을 예언하였다.(왕상21: 1-29)
정욕에 빠진 여인의 대명사인 그녀는 바알을 숭배하여 850명의 남창을 아스도렛에 두어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게 하였으며, 하나님의 선지자를 죽인 가장 악독한 왕후이다.
바알의 선지자 450명 그리고 아세라의 선지자 400명과 갈멜 산에서 엘리야와 대결에 승리하였고,
그들 모두를 기손 시냇가에서 죽였다.(왕상18장)
아람왕 벤하닷과 3번 싸웠다. (벤하닷은 폭풍의 신 '하닷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첫 번째는 승리하였다.(왕상 20: 1-21)
두 번째는 벤하닷을 사로잡고 전에 잃었던 성읍을 되찾았으며, 다메섹에 아합의 거리(상가)를 수축할
것을 약속 받았고, 벤하닷을 돌려보냈다.(왕상 20: 22-34)
세 번째는 남 왕 여호사밧과 함께 싸웠다.
전쟁에 나가기 전 2왕은 예언자들에게 예언을 받았는데 거짓 선지자 시드기야는 전쟁에서 승리를
예언하였고, 하나님의 선지자 미가야는 나아가지 말 것을 예언하였으나,
거짓 선지자의 말을 따르다가 전쟁에 대패하여 아합은 활에 맞아 죽었고, 여호사밧은 본국으로 돌아갔다.
엘리야의 예언대(왕상 21:19)로 나봇의 피를 핥은 개가 그의 피도 핥았다.(왕상 22: 1-40장)
<살만에셀 3세의 검은
오벨리스크>
★ 고고학적 자료
아합은 살만에셀 3세(BC860-825)의 비문에 '나는 이스라엘 아합 왕의 전차 2.000대와 군인 10.000명을
무찔렸다'라고 기록하였으며, '오무리의 아들(후계자), 예후의 조공인 금, 은, 금주전자, 금잔, 주석,
왕홀(王笏), 창을 나는 받았다'를 기록했다.
아합의 '상아궁'을 1908, 1931년에 발굴하였는데, 그 벽의 표면은 상아로 되어 있으며, 정밀하게 조각된
수천개의 화관, 액자, 옷장, 의자의 조각도 있었으며,
특이한 것은 이세벨의 눈 화장 도구(왕하9: 30)로 화장품을 섞는 접시와 작은 돌합을 발견하였는데
돌합에는 검은색, 초록색, 빨강색 등을 담을 수 있는 여러 개의 작은 구멍이 있고 그 가운데 패인 곳은
이것을 섞는 자리라고 한다.
*바알(Baal)과 그의 아내 아스도렛(다른이름 아세라) [고대 중동지도]
고대 시리아 셈족 고유의 남신 '주(主)'신으로 '소유자'라는 뜻이다.
페니키아 신화에 각 도시의 수호신으로, 불레셋, 가나안, 네게브, 지방에서 섬기였으며,
태양의 신 '*엘' 다음 가는 신이다.
곡식, 과일 가축 등의 결실과 성장을 주관 하는 신으로 숭배한다 .
신전은 전지역에 있었고, 아세라 여신은 자연의 생식력을 의인화한 것으로 제사방식은
사치스러운 술잔치에 여사제는 신전의 창녀이었고, 소돔의 남자 사제는 신전의 남창이었다.
여사제를 성경에 기생이라고 하였는데, 그 중에 라합이 있다.
행위는 창녀 같았으나 오늘날처럼 부끄러운 직업이 아니고 존경받는 자리였다.
생식력을 위한 신전은 음란과 악의 중심지이었고, 성욕을 증대하기 위해 과장된 성기를 붙었다.
가나안 땅 전체가 소돔과 고모라 임으로, 유대인은 유혹의 대상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것들과 단절시키기 위해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잔인한 방법으로
여호수아에게 정복하는 주민을 모두 죽이라고 한 것은 이 길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기초희생'이라는 명분으로 집을 지을 때 자기 아이를 죽여 집에 바르고,
제사에 제물로 장자를 죽이는 제사장들은 공식적인 살인자였다.
여호수아와 엘리야(왕상18:40) 그리고 예후(왕상:9-10)가 바알을 근절시키기 위하여 왜 그렇게
무자비했는지 이해 할 수 있다.
★ 고고학적 자료
므깃도를 발굴하다가 아합왕 시대 층의 아스도렛 신전 부근에서 바알 숭배으로 희생된 아이의 유해가
담긴 항아리가 발견되었다.
*엘(EL)
고대 시리아 셈족이 섬기는 엘과는 성격이 다른 신으로 유대인의 하나님인 엘(EL)에 대한 이야기
하기로 한다. 여호와, 야훼, 엘로힘, 엘로이, 로드, 갓, 데오스 등은 하나님의 이름들이다.
엘(EL): 힘을 나타낼 때의 이름, 이 문자가 들어가면 하나님과 연관된다.
벧엘- 하나님의 집, 브니엘- 하나님의 얼굴, 이스라엘- 하나님과 겨루어 이김 등이다.
-.여호와(Jehpvah): 함부로 부르면 불경죄가 된다. 일년에 한번만 제사장이 제사 때 부름.
-.야훼(Yahweh): '스스로 있는 자'의 뜻, 구약에 6700번 사용,
-.엘로힘(Elohim): 아주 분명하게 유일신을 뜻함. 위엄과 천사의 뜻도 포함
-.엘로이(Elroi): 감찰하시는 분, 급할 때 부름, 창21:16,17
-.로드(Lord): 주님, 종이 주인을 부를 때, 영문 성경은 전부 이렇게 번역되었다.
-.갓(God): '엘'을 이렇게 번역하였다.
-.데오스(Θeos): 복수(複數)(3위 일체)의 뜻, 하나님의 약자 Θ의 표기는 여기서 왔다.
<폐허의 '투불로 마이저스'
바알 신전>
엘란트라 이야기
이스라엘에 가면 엘란트라를 자주 볼 수 있어는데, 전부 'EL' 글자는 없었다.
이유는 '엘(EL)' 자는 함부로 쓸 수 없다는 이스라엘 정부의 요청에 '엘' 자를 빼고 수출한데서 기인한다.
또 우리를 보면 아이들이 '가야'라고 합창하여 소리쳤다.
그 연유를 몰랐는데 '기아 자동차'에서 선전 할 때 '기아'는 설사의 뜻이 있어 '가야'로 바꾸어 선전
하였고, 선전이 아이들에게 인기가 있어 모르는 아이가 없다고 한다.
그런 연유로 한국인만 보면 반갑다는 인사로 '가야'라고 합창을 하는 것이었다.
*엘리야
그는 갈멜산에서 바알 신과 대결하여 승리하여 기손강에서 바알선지자를 죽였으나,
이세벨의 회심에는 실패하여 호렙산에 도망가 40일 금식기도중에 '하나님의
뜻이 초자연의 표적에 있지 않고, 조용히 예언자(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뜻을 실현시킨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왕상19장)
이 대목에서 옛날 같이 바다가 갈라지고 만나가 지금에는 없는지 우리의 궁금증을 덜게 된다.
그리고 이 후로는 선지자 활동시대를 열게 된다.
과부의 아들 살리고, 불과 물을 하늘에서 내리게 하였고, 요단강물도 갈랐다.
모세처럼 죽으려고 느보산에 갔다가 불수레를 타고 승천하였다.
8. 아하시야(BC855-BC854)
아합의 아들로 모압 정벌을 나가다가 왕궁서 낙상하여 병들었으며,
병이 낫을 수 있는지를 바알세불의 점장이에게 물었다.
엘리야는 하나님을 의뢰치 않음을 책망하며 죽을 것을 예언하여 재위 2년째 되는 해에 죽었다.
아하시야는 부하 50명과 그들 부장를 엘리야에게 보내었으나 하나님의 불에 내려와서 부장과
그 오십 인을 불살랐으며, 또 보냈으나 그들도 불살랐다.(왕상22: 49-53, 왕하1장)
9. 여호람(일명 요람, BC854-BC843)
아하시야는 아들이 없어 아합의 아들 요람이 왕위에 올라 12년간을 통치하였다.
아합 왕에게 조공을 바치던 모압 왕이 배반하여 에돔과 함께 진군할 때에 물이 없어 고생하다가 선지자
*엘리사에게 구하여 많은 물을 얻어 모압을 정벌하였다.
그가 타락하는 것을 엘리사가 책망하자 도리어 죽이려고 하였다.(왕하6: 30-33)
하나님께서 저를 아람(수라아) 군대에서 구원하셨다.(왕하7장) 그러나 하나님의 권능과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아람왕 하사엘과 싸우다가 부상당하여 이스르엘에 머물다가 예후의 손에 죽임을 당하여
그의 시체는 나봇 밭에 던져졌다.(왕하 9: 14-26)
왕후 이세벨도 예후의 명령을 받은 내시가 궁에서 내던져 죽었으며,
시체는 개들이 대부분 먹었다.(왕하 9장)
[남 왕 아하시아 참조]
★ 고고학적 자료
모압의 배반은 모압 비석에 기록되었는데 '나 모압왕 메사는 이스라엘에 해방된 것을 기념하여
이 기념비를 그모스(모압 신)에게 바친다.
이스라엘 왕 오므리는 여러 날 동안 모압을 억압했고, 그의 아들(아합)이 뒤를 이었으나 나는 그를
축출하고 여러 성읍을 빼앗으며, 전리품은 그모스에게 여자는 아스달 신에게 바쳤고,
이스라엘 포로로 고르하를 건축했다'라고 기록하였다
<모압왕 메사가 세운 기념비>
*엘리사
선지자 엘리사는 여호람에서 요아사까지 활동하였으며, 그는 엘리야의 겉옷을 입은 제자이다.
그의 기적은 왕하 4-7장에 기록되었는데 요단강을 갈랐고, 과부의 기름이 증가하였고,
수넴 여인의 아들을 살렸고, 독이든 음식을 제거하였으며, 빵이 증가하였고, 나아만의 문둥병을 고쳤고,
전차로 사마리아를 구출하였고, 시리아 군대를 물리 쳤고, 도끼자루를 물위로 떠오르게 하였으며,
보리떡 20개로 100명이 먹고 남는 등의 기적을 많이 행하였다.
아람의 왕 하사엘과 예후에게 기름 부어 왕이 되게 하였으며, 곡물가격이 하락할 것 등의 예언도 하였다.
그는 벧엘, 여리고, 길갈 등에 선지자 학교를 세운 것 같으며, 제자로 요나와 아모스를 가르친 것 같다.
같은 시대의 남 왕국 선지자는 요엘인 것 같다.
[선지자 학교]
사무엘은 제사장과 왕의 도덕적 타락을 억제하기 위하여 선지자학교 시작한 것 같으며,
사무엘상 19: 20절에 의하면 라마에서 시작한 것 같다.
★ 고고학적 자료
왕하 8:13절 하사엘에 관한 사건은 살만에셀 3세(BC860-825)의 비문에 기록되었는데 '나는 벤하닷과
싸워 그를 패배시켰다. 누구의 아들인지 모르는 하사엘이 그의 왕위를 계승했다'라고 기록하였다.
10. 예후(BC843-BC816) [고대 이스라엘 지도]
그는 아합의 경호원이며, 요람의 군대장관이었고, 엘리사는 제자를 보내 북 왕국의 왕으로 기름부고
아합에게 속한 모든 남자는 다 전멸하라고 하였다. (왕하 9: 1-13)
예후는 반란을 일으켜 북 왕 요람과 남 왕 아하시야도 죽이고, 아합의 부인 이세벨도 사살하였으며
(왕하 9: 14-37), 아합의 아들 70명과 바알을 섬기는 선지자를 하나도 빠짐 없이 죽었다.(왕하 10: 1-28)
다윗의 자손인 여호람의 아들이며, 남 왕 아하시야의 형제42명도 죽었다.(왕하 10: 12-14)
그러나 그도 율법을 준행하지 않았고, 벧엘과 단의 금송아지 섬기는 일을 금하지 않았다.(왕하 10: 29-31)
그는 28년간을 통치하였다.
★ 고고학적 자료
아합을 참조할 것
11. 여호아하스(BC820-BC804)
예후의 아들로 17년간 재위 중에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하나님은 아람 왕 하사엘과 그의 아들
벤하닷을 보내어 백성들이 많은 고통을 당할 때에 그가 하나님께 간구하여 벗어났다.
우상(금송아지)을 섬기며, 사마리아에 아세라 목상을 두었다가 하나님의 진노로 백성이 멸절하여
타작 마당의 티끌 같이 되게 하였으며,
군대도 전멸하고 마병 오십 명과 병거 10대와 보병 만 명만 남았으며, 17년간 통치하였다.(왕하 13: 1-9)
12. 요아스(여호아스, BC806-BC790)
여호아하스의 아들 요아스가 왕이 되어 16년간 다스리며 우상(금송아지)을 섬겼다.(왕하 13: 10-13)
그는 엘리사가 임종시 방문하여 아람에게 3번이길 것을 예언 받아 예언대로 3번 승리하여 아버지가
잃었던 성읍을 되찾았다.(왕하 13: 14-21)
에돔의 세일 자손의 신들에게 분향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된 남 왕국 아마샤가 에돔에 승리한 것에
용기를 얻어 요아스를 침공하였다가 도리어 벧세메스 전쟁에서 사로잡히게 되었다.
요아스는 예루살렘을 파괴하고 성전에서 모든 금은과 그릇과 왕궁의 재물을 빼앗고 또 사람들을 볼모로
잡아 사마리아로 돌아왔다.(왕하14: 1-16)(대하 25:17-25) [남 왕 아마샤 참조]
<여호아하스는 '병거 10대만
남았다'는 당시
병거(또는 전차)의 모습>
13. 여로보암2세(BC790-BC749)
요아스의 아들로 사마리아에서 왕이 되어 41년간 다스렸으며, 우상숭배는 계속되었다.
(왕하 14: 23-29)
그의 치세 때 이스라엘은 가장 융성하여 영토를 회복하기를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하였다.
※ 이 시대에 선지자 호세아는 하나님의 긍휼로 다시 구원하신다고 예언하였다.(호 1: 1, 7, 3장)
선지자 아모스는 우상숭배, 사치, 방탕, 도덕적 부패로 멸망을 예언하였다.(암 2: 6, 5: 27, 6: 14)
14. 스가랴(BC748)
여로보암 2세의 아들로 6달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리며,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살룸이 그를
반역하여 백성 앞에서 쳐죽이고 대신하여 왕이 되었다.(왕하 15: 8-12)
15. 살룸(BC748)
무정부 상태로 있을 때에 스가랴를 죽이고 왕이 되어 1달 동안 다스리다가 므나헴에게 살해되었다.
(왕하 15: 13-16)
16. 므나헴(BC748-BC738)
냉정하고 잔인한 그는 살룸을 살해하고 왕이 되어 10년간 다스리며,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앗수르 왕 불이 치려 왔으나 므나헴이 은 천 달란트를 불에게 주어 되돌아갔다. (왕하 15: 17-22)
※ 이 시대에 활동한 선지자는 호세아로 그의 악정을 기록하였다.
★ 고고학적 자료
디글랏 빌레셀의 비문에 '사마리아의 므나헴으로부터 나는 조공을 받았다'라고 기록하였다.
17. 브가히야(BC738-BC736)
므나헴의 아들로 왕이 되어 2년간 다스리며, 그는 앗수르에게 조공을 바치었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장관 베가가 반역하여 사마리아 왕궁 호위소에서 왕을 죽이고 대신하여
왕이 되었다.(왕하 15: 23-26)
18. 베가(BC748-BC730)
그는 세력 있는 군인으로 이스라엘 왕이 되어 20년간 다스리며,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이 와서 갈릴리와 납달리 온 땅 9지방을 점령하고 그 백성을 사로잡아 앗수르로 옮겨갔다.
이것을 제1 갈릴리 포로라 한다.
호세아가 반역하여 베가를 쳐서 죽이고 대신하여 왕이 되었다.(왕하 15: 27-31)
유대왕 요담 때에 아람의 왕 르신과 동맹하여 예루살렘을 점령하려고 하였으나 실패하였다.(왕하 16: 5)
★ 고고학적 자료
디글랏 빌레셀 3세(BC 746-727) 비문에 '오므리 땅(이스라엘) 사람들을 재산과 함께 앗수르에 끌고
왔다. 그들의 왕 베가는 그들이 전복시켰다. 나는 호세아를 세워주었다.
그는 나에게 금 10달란트와 은 1.000달란트를 바쳤다'라고 기록하였다.
19. 호세아(BC730-BC721)
엘라의 아들 호세아가 왕이 되어 9년간 다스리며, 여호와가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나 다.
그가 애굽의 왕 소에게 사자들을 보내고 해마다 하던 대로 앗수르 왕에게 조공을 드리지 아니고
배반하였다.
앗수르 왕 살만에셀 5세가 올라와 그를 옥에 감금하여 두고 사마리아를 3년간 포위하였고,
사르곤이 점령한 후 이스라엘 사람을 사로잡아 앗수르로 끌어다가 고산 강가에 있는 할라와 하볼과
메대 사람의 여러 고을에 두었는데 이것을 제2 갈리리 포로라고 한다. (왕하 17: 1-6, 18: 9-12)
이 때에 사마리아 여인들은 앗수르 군인들 또는 이방인들과 결혼하여 혼혈 아이들이 사마리아인의
조상이 되었다.
★ 고고학적 자료
사르곤 2세의 비문에 '앗수르왕...사마리아에 가서 3년을 에워쌌더니...드디어 사마리아를 취하고 사람을
잡아 앗수르에 이르러...바벨론으로부터 사람을 보내어 사마리아의 모든 성읍에 두니라'라고 기록했으며,
또 다른 기록에는 '나는 첫 해에 사마리아를 정복하고, 포로 27.290명을 잡아왔다.
조공을 바치지 않는 다른 나라 사람을 사마리아에 살게 하였다'라고 하였다.(왕하 17:24)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수르의
디글랏 빌레셀 3세>
[2] 남(유대)왕국(BC933-BC586) [고대 이스라엘 지도]
4. 르흐보암(BC933-BC916)
사울, 다윗, 솔로몬 계보를 이어 받았음으로 통합 4대가 된다.
솔로몬의 왕비 나아마(모압 여인)의 소생으로 세겜에서 왕위에 올라 17년간을 통치하였다.
그는 어리석어 젊은 관원들의 말을 듣다가 유다와 베냐민 2지파 만을 통치하게되었으며,
이것이 남 왕국 유대왕국이다.(대하 10장)
군사를 일으켜 여로보암을 치려고 하였으나 하나님이 형제와 싸우기를 원치 않아 무산되었으나,
침입을 방비 성읍은 많이 건축하였다. (대하 11: 1-12)
여로보암이 우상을 세우고 레위 제사장을 해임하여 직분을 행하지 못하게 하여 그들은 유대로 돌아왔다.
3년 동안은 하나님을 잘 섬기어 강성했으나, 그가 여호와의 율법을 버린 죄로 애굽 왕 시삭이 올라와서
예루살렘을 치고 여호와의 전 보물과 왕궁의 보물을 모두 빼앗고 솔로몬이 만든 금 방패도 빼앗아 갔다.
(대하 12: 1-12)(왕상 14: 25-28)
17년 재위기간 르호보암과 여로보암 사이에 항상 전쟁이 있었다.(왕상 14: 29)
★ 고고학적 자료
시삭의 유대침입의 기록은 카르낙에 있는 아몬 대신전 남쪽 벽에 있는데 '팔레스틴 성읍 156개를
아몬 신에게 바쳤다'고 기록하였다.
므깃도에서 시삭이 세웠던 기념비 조각이 발견되었다.
다니스에서 발견된 시삭의 미이라는 순금을 입힌 은으로 만든 관속에 있었는데 이 금이 예루살렘에서
약탈해온 솔로몬의 금으로 추정된다.
5. 아비얌(야)(BC915-BC913)
아버지처럼 모든 죄를 행하여 하나님 앞에 온전하지 못하였지만 다윗이 하나님 일을 정직하게 행한
덕분에 예루살렘을 견고하게 하셨다.(왕상 15: 1-8)
북 왕과 전쟁 때에 아비얌의 군사는 40만이고, 여로보암 군사는 80만이었으나, 하나님의 율법을 잘
이행하였고, 또 하나님을 의지한 아비얌 군대가 대승하여 적군 50만 명을 죽였다.(대하 13:1-20)
그의 통치기간은 3년이다.
6. 아사(BC912-BC872)
아비얌의 아들 아사가 왕이 되어 41년 동안 재위 중에 다윗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으며,
어머니 마아가가 아세라 상을 만들었을 때에 태후의 위를 폐하기까지 하면서 모든 우상을 없앴다.
그는 북 왕 바아사 사이에 일생 동안 전쟁이 있었는데 바아사가 유대를 치러 올라와서 라마를 건축하였다.
아사는 은, 금 모두를 벤하닷에게 보내어 동맹을 맺어 북 왕국 성읍들을 치게 하였다.
바아사가 이 소식을 듣고 라마를 건축하는 일을 중단하고 디르사로 돌아갔으며, 라마를 건축하던 돌과
재목으로 게바와 미스바를 건축하였다. (왕상 15: 9-24) (대하16: 6) [북 왕 바아사 참조]
<카르낙에 아몬 대신전 남쪽
벽에 있는 시삭의 부조>
7. 여호사밧(BC874-BC850)
아사의 아들 여호사밧이 유대의 왕이 되어 재위 25년 동안 아버지처럼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나 북쪽과 평화를 유지하려고 북 왕 아합과 사돈을 맺은 것은 불행이었다.
(대하 20:31-34)
그는 군중 교육제도를 만들어 제사장나 레위에 정기적으로 순회교육을 하였고,
전국에 재판소를 만들었으며, 많은 군대를 양성하여 더욱 강대하였다.
그는 아합과 동맹하여 길르앗 라못을 치다가 실패하였으며, 아합은 이 전쟁에서 죽었다.
(왕상 22: 29-38) [북 왕 아합 참조]
여호사밧은 모압 자손과 암몬 자손이 몇 마온(세일 산) 사람과 함께 와서 치고자 할 때에 왕은 여호와께
간구 하였드니, 자기들끼리 살육하여 자멸하였다.(대하20: 1-30)
여호사밧이 다시스의 선박을 제조하고 오빌로 금을 구하러 보내려 하였더니 그 배가 에시온게벨에서
파선하였으므로 가지 못하게 되었다.(왕상 22: 48)(대하 20: 35-37)
8. 여호람(요람, BC850-BC843)
여호사밧의 장자를 악독녀 이세벨의 딸 아달랴와 결혼시켜 그녀가 섬기던 바알이 유대왕국에도 들어오게
되었다. 그는 여러 산에 산당을 세워 우상을 섬기고, 예루살렘 주민으로 음행 하게 하며,
그 동생들을 죽인 죄로 하나님은 창자가 빠져 나오는 병에 걸려 죽게 하였다.
백성이 그를 열왕의 묘에 들어가지도 못하였으며, 분향도 하지 않았다.(대하 21: 1-20)
그의 통치기간은 8년이다.
9. 아하시야(일명 여호아하스, BC843)
여호람의 아들이며, 모친은 이세벨의 딸인 아달랴이다.
이로써 다윗의 계보에 오역이 접목되었으며, 그를 여호아하스라고도 하는데 모친을 본받아 악을
행하였다.(왕하 8: 24-29, 대하 21: 17)
외숙인 북 왕 요람과 함께 아람(수리아)왕 하사엘과 싸우다가 패하여 이스르엘에 북 왕 요람이 치료하려
왔다가 반란을 일으킨 예후를 나봇의 토지에서 만나 요람은 예후의 화살에 죽었으며,
아하시야는 므깃도까지 도망가서 죽었다.
아합의 왕후 이세벨은 눈을 그리고 머리를 꾸미고 창에서 바라보다가 예후의 명령을 받은 내시가 궁에서
내던져 죽었으며, 시체는 개들이 대부분 먹었다.(왕하 9: 30-37)
10. 아달랴(BC843-BC837)
여호람의 왕비이며, 아하시야의 어머니가 되는 사람이다.
그는 어머니 피를 받아 잔인하였는데 예후에게 아하시야가 죽자 그의 형제를 모두 죽이고 왕위에 올라
6년을 다스린 유일한 여왕이다.(대하 22:10, 23: 12-15) (왕하 11: 1-16)
11. 요아스(BC843-BC803)
아달랴가 왕의 형제를 죽일 때에 아하시야의 누이이며,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내인 여호사브앗이
아하시야의 아들 요아스를 빼내어 6년 동안 성전에 숨어살게 하였다.(대하 22: 10-12)
여호야다가 반란을 일으켜 아달랴를 죽이고 6살의 요아스를 왕으로 삼았고, 바알 선지자들을 죽었으며,
성전에서 모세의 율법대로 행하였다.(대하 23장)
고모부인 여호야다가 살아 있는 동안은 성전을 보수하며, 정직하게 살았으나 여호야다가 죽은 후에는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겼다.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가 경고를 하였으나, 여호야다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그를 죽인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아람의 적은 군대로 큰 군대를 가진 요아스를 징벌하였으며, 그는 큰 부상을 입었다.
스가랴의 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이 정복되어 모든 방백은 다 죽고 노략한 물건이 다메섹 왕에게 보내어진
것에 대한 분노로 백성은 요아스를 침상에서 죽이고 그를 왕들의 묘실에는 장사하지 아니하였다.
그의 통치기간은 40년이다
<내시가 궁에서 내던져 죽는
이세벨의 모습>
12. 아마샤(BC803-BC775)
아마샤가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15세이며, 29년 동안 다스렸으며, 아버지를 죽인 자들을 처형할 때에
율법(신 24:16)에 따라 아들은 처형하지 않았다.(왕하 14:1-17)
에돔하고 전쟁할 때에 백 달란트로 이스라엘 나라에서 큰 용사 십만 명을 고용하였다.
선지자가 그들은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는다고 돌려보낼 것을 권하여 돌려보냈으나 그들이 분노하여
유대 성읍을 약탈하고 사람 삼천 명을 죽이고 물건을 많이 노략하였다.(대하 25: 5-16)
그는 에돔 사람들을 죽이고 돌아올 때에 세일 자손의 신들을 가져와서 자기의 신으로 세우고 그것들 앞에
경배하며 분향한 것에 하나님은 진노하여 북 왕 요아스와 벧세메스 전쟁에서 그를 사로잡게 하였다.
요아스는 아마샤를 예속으로 삼았으며, 예루살렘을 파괴하여 성전의 모든 금은 그릇과 왕궁의 재물을
빼앗고, 사람들을 볼모로 잡아 사마리아로 돌아왔다.(왕하14: 1-16) (대하 25: 17-24)[북 왕 요아스 참조] 아마샤가 여호와를 버리자 예루살렘에서 무리가 반역하였으므로 그가 라기스로 도망갔으나 거기서
죽임을 당하였고, 그의 시체를 말에 실어다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유다 성읍에 장사하였다.
(왕하 14: 17-22) (대하 25: 25-28)
13. 웃시야(BC787-BC735)
그는 일명 아사랴라고도 하며, 16세에 왕이 되어 52년간을 다스리는 동안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오직 산당은 제거하지 아니하였다. (왕하 15: 1-7)
그가 여호와를 찾을 동안 하나님이 형통하게 하셨기 때문에 암몬 사람들에게 조공을 받았다.
그 이름이 매우 강성하여 애굽 변방까지 퍼지자 마음이 교만하여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가서 향단에
분향하려다가 나병이 걸려 죽는 날까지 나병환자가 되어 별궁에 거하고 왕자 요담이 왕궁과 백성을
치리 하였다.(대하 26장)
※ 이 시대에 활동한 선지자 미가는 예루살렘이 멸망할 것을 예언하였다.
★ 고고학적 자료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의 비문에 4번이나 '유대인 아사랴(웃시야)'라고 기록되었다.
14. 요담(BC749-BC743)
25세에 와이 되어 16년간 다스리는 동안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여호와의 성전에는
들어가지 아니하였고 백성은 여전히 부패하였다.
여호와께서 아람 왕 르신과 북쪽의 베가 왕을 보내어 유다를 치게 하였다. (왕하 15: 32-38)
요담이 여호와의 성전의 윗문을 건축하며, 정직히 행하여 암몬과 싸워 이겨 조공을 받았으며,
여호와 앞에서 바른 길을 걸어 강하여졌다.(대하 27: 1-9)
※ 이 시대에 활동한 선지자는 이사야
★ 고고학적 자료
에시온게벨에서 '요담의 소유'라고 적힌 조각 물(인장)이 발견되었는데 각문을 청동 틀에 끼워 만들었다.
15. 아하스(BC741-BC726)
요담의 아들로 20세에 왕이 되어 16년간을 다스리며, 모든 이방 신들을 섬긴 죄로 아람 왕르신과
북 왕 베가의 침략을 받았다.(대하 28:1-27)
그는 예물로 금, 은을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에게 보내어 원군을 요청하였다.
앗수르 왕은 다메섹으로 진군하여 르신을 죽이기는 하였으나 오히려 유대를 돕지 아니하고 공격하여
앗수르의 속국이 되었으며, 아하스는 유익이 없었다.(왕하 16: 1-9)(대하 28:16-21)
아하스는 회개치 아니하고 성전의 기물을 훼파하고 성전 문을 닫았으며, 다메섹 신들에게 제사하고 다른 신에게 분향하였다가 죽은 후에 왕의 묘실에 장사되지 못하였다.(왕하 16: 10-20)
<요담의 인장>
★ 고고학적 자료
디글랏 빌레셀 비문에 '유대 왕 아하스의 조공으로 금, 은, 연, 주석, 직물을 받았다.
다메섹을 멸망시키고 그 관원을 산 채로 막대기에 꿰었고, 과일 나무를 모조리 베었다'라고 기록되었는데
이것은 왕하 16장과 이사야 7장의 기사와 완전히 일치한다.
16. 히스기야(BC726-BC697) [고대 중동지도]
내환과 외환으로 매우 어려운 시기에 25세로 왕이 되었으나 29년 재위 중에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며 성전을 보수하였으며, 더러운 것을 없애고 성결하게 하였다.(대하 29:1)
그는 성전에서 많은 제물로 번제, 속죄제를 드리었으며, 유월절을 지키었고, 또 종교개혁까지 하여
진심으로 여호와를 의지하 유대 왕 중에 이와 같은 자가 없었다고 하였다.
(왕하18: 1-12) (대하 29, 30, 31장)
산헤립이 40개의 유대 성을 점령하고 20만 명을 포로로 잡고 막대한 배상을 요구하여 성전과 왕궁의
장식품까지 벗겨내어 은 삼백 달란트와 금 삼십 달란트를 주었다.(왕하 18: 13-17)
산헤립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예루살렘을 위협하였으나, 히스기야는 여호와께 간절히 기도하여
이사야로부터 응답을 받았다.
여호와는 사자를 밤에 보내어 18만 5천 군사를 전멸시켜 산헤립은 예루살렘을 떠나 니느웨으로
돌아갔으며, 앗수르 속국에서 벗어났다.(왕하 19장)
또 그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낯을 벽으로 향하고 전심으로 하나님께 기도하여 3일만에 성전에 올라갈
것과 덤으로 15년을 더 살 것을 이사야가 예언하였다.
왕은 예언의 징표를 요구하였고, 이사야는 여호와께 간구하여 아하스의 해시계 그림자를 십도 뒤로
물러가게 하였다.(왕하 20: 1-11)
히스기야가 병든 것을 문안하려고 온 병바벨론의 왕 사자들에게 보물창고에 잇는 것을 모두 보여
주었다가 이사야에게 책망과 함께 이 보물들이 하나도 남김 없이 바벨론으로 옮겨지리라는 예언을
듣게 되었다. 히스기야는 기혼의 윗 샘물을 막아 그 아래로부터 다윗 성 서쪽으로 터널을 뚫어 물을
끌어들였다.(대하 32: 30)
터널은 양쪽에서 뚫어 들어가 만났다고 하는데 당시의 기술로는 대단한 공사이라고 한다.
☆ 이사야서 66장은 성경의 66권과 대조를 보이는데 39장까지는 구약을 40-66장까지는 신약으로 보인다. 특히 53장은 고난받는 예수님을 잘 예언하였다.
이사야는 유대나 이스라엘은 망하여도 '남은 자(회개한 자를 의미)'는 살 것을 믿었다.
★ 고고학적 자료
히스기야 수로에 대한 비문은 1860년에 발견되었으나 지금은 잘라져 이스탄불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비문에는 양쪽에서 곡괭이 질을 하는 동안 3큐빗이나 떨어져 있는데 상대방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곡괭이가 마주치자 물이 기온에서 실로암까지 흘렀다. 길이는 1200큐빗, 높이는 100큐빗이었다.
또 산헤립의 진흙으로 만든 6각 프리즘에는 '나는 굴복하지 않는 히스기야의 46개 성을 수 없이 부수고
200명, 150명 남녀노소와 말, 노새, 나귀, 소, 양 등을 수 없이 전리품으로 가져왔다.
히스기야를 새장의 새처럼 예루살렘에 가두고 성읍을 나오는 사람들을 격퇴시켰다'라고 기록했다.
산헤립이 패배는 기록하지 않았지만 예루살렘을 정복하지 못한 것은 확실하다.
또 히스기야가 보낸 조공으로 금 30달란트, 은 800달란트, 보석, 상아, 궁녀 등의 성물을 받은 것과
산헤립의 궁전 벽 비문에는 그의 부상당한 기록이 있다.
<산헤립의 6각 프리즘
토판의 상부>
17. 므낫세(BC697-BC642)
12세에 왕위에 오르고 55년 동안 다스리며,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그의 아버지 히스기야가 헐어
버린 산당을 다시 세우며 바알들을 위하여 제단을 쌓으며 아세라 목상을 만들어 하늘의 모든 일월성신을
경배하여 섬겼다.(대하 33:1-9)
하나님은 앗수르(아슈르바니팔 왕)를 보내어 쇠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고 가게 하였다.
그는 바벨론에서 하나님께 겸손하게 기도하여 다시 돌아오게 되었으며,
그제야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신 줄을 알았다.
그는 22년 동안 하나님을 배반하였나 그후 23년 동안에는 모든 이방 신을 제거하며,
성전을 증수하고 하나님께만 제사를 하였다.(왕하 21: 1-28)(대하 33:10-20)
※ 이 시대에 활동한 선지자는 이사야, 하박국, 예레미야, 스바냐로 전설에 의하면 이사야 선지자를
톱으로 켜 죽였다고 한다.
★ 고고학적 자료
앗수르 왕 에살핫돈(BC 680-BC 669) 비문에 '나는 서쪽 나라 왕 22명에게 궁전에 사용할 건축자재를
바치게 했다'라고 기록하였으며, '유대 왕 므낫세'의 이름이 있다.
18. 아몬(BC641-BC640)
22세에 왕이 되어 2년 동안 다스리며, 그의 아버지 므낫세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고,
모든 우상에게 제사하였다. 아몬이 그의 아버지 므낫세가 스스로 겸손함 같이 여호와 앞에서 스스로
겸손하지 아니하고 더욱 범죄하여 그의 신하가 반역하여 왕을 궁중에서 죽였고,
백성들은 아몬 왕을 반역한 사람들을 다 죽이고 그의 아들 요시야를 대신하여 왕으로 삼았다.
(대하 33: 21-25)
19. 요시야(BC639-BC608)
아몬의 아들로 8세에 즉위하여 31년간을 다스렸다. 그는 성전을 수리하다가 힐기야가 발견한 율법 책을
서기관 사반에게 낭독하게 하였다.
왕은 율법대로 행하지 않아 하나님의 진노가 크다는 것을 깨닫고 그는 옷을 찢었다. 모든 백성을 모으고
율법 책을 낭독하여 듣게 하였고, 백성에게 율법을 준행하게 하였다.
제사장이 분향하던 산당을 게바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헐어 버리고 우상을 섬기지 못하게 하며,
철저히 개혁하였다.
북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여로보암이 벧엘에 세운 제단과 산당을 왕이 헐고 또 그 산당을 불사르고
빻아서 가루를 만들며 또 아세라 목상을 불살랐다.
마음과 성품을 다하여 율법을 준행한 자가 전무후무하였더라고 기록되었다.(왕하 22, 23장)(대하 34, 35장) 선지자 훌다가 왕의 시대에는 재앙이 내리지 않는다는 예언이 있었지만 왕의 운명은 빨리 찾아 왔다.
BC 609년 애굽왕 느고가 앗수르를 치려고 므깃도에 온 것을 막다가 전사하였으며,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이 슬퍼하였고, 예레미야는 그를 위하여 애가를 지었다. (대하 35: 20-27)
이시기부터 바벨론이 강대국으로 등장한다.[므깃도 참조]
※ 이 시대에 활동한 선지자는 예레미야
20. 여호아하스(BC608)
일명 아하시야 또는 살룸이라고도 하며, 요시야의 아들로 3개월간 재위하였고, 애굽 왕 느고에게 잡혀가
그곳에서 죽었다.(왕하23: 30-34) (대하 22: 1-4)
<므낫세가 조공을 바친 앗수르
왕 에살핫돈>
21. 여호야김(BC608-BC597)
사악하고 고집이 센 그는 여호아하스의 아우로 애굽왕 느고가 왕위에 앉혔으며,
본명은 엘리야 김이었으나 느고가 이름을 고쳐주었다.(왕하 23: 34) (대하 36: 5-8)
그는 3년간은 느고를 섬겼으나, 갈그미스전투에서 느부갓네살이 애굽을 무찌르고 점령하였으며,
유대는 바밸론의 속국이 되었다.(왕하 24: 1-4)
그의 11년 재위 기간에 사회 전체가 죄악에 빠졌으며, 그는 악한 무리의 손에 참혹히 죽었다.(렘22: 13-19)
※ 선지자 예레미야를 여러 번 죽이려고 하였다.
22. 여호야긴(BC597)
18세에 왕위에 올라 3달 10일 동안 다스리다가 느부갓네살 왕이 또 예루살렘의 모든 백성과 모든 지도자와
모든 용사를 바벨론으로 잡아갈 때에 여호와의 전의 귀한 그릇들도 함께 가져갔다.(대하 36: 9-10)
이 때가 제 1회 '바벨론 유수'이다. 에윌므로닥이 즉위한 원년에 그를 석방하여 자유를 주었으며,
바벨론 왕과 함께 식사를 하게 하였고, 37년 동안 속국이 된 다른 왕보다 우대하였다.(왕하 25: 27-30)
※ 선지자 에스겔이 함께 잡혀갔다.
★ 고고학적 자료
바벨론 공중 정원의 폐허에서 기름과 곡식을 정기적으로 분배받은 이름이 나열된 토판을 발견하였는데
그 중에 여호와긴과 5왕자에게 지급된 배급양의 표가 있었다.
배급양의 표에는 '유대의 왕, 여호야긴을 위해 기름 10실라(1.8리터), 왕자는 2.5실라'라고 쓰여있다.
23. 시드기야(BC597-BC586)
느부갓네살이 여호야긴을 잡아갈 때에 22세인 그를 왕으로 세웠고,
11년의 재위기간에 악을 행하였다.(대하 36: 11-21)
시드기야는 립나에 있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로 끌려가 그의 아들들은 죽임을 당하였고,
그는 두 눈을 빼서 바벨론으로 끌고 갔다.(왕하 25: 1-7)
예루살렘의 성벽은 무너지고, 성전과 궁전은 불탔고, 성전의 보물과 왕과 방백들의 보물을 다 바벨론으로
가져가고 나머지는 파괴되었으며, 백성은 죽임을 당하였다.(왕하 25: 8-17)
살아 남은 자는 노예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갔는데 이것을 제 2회 '바벨론 유수'이라고 하며,
이들이 그곳에 있는 동안을 '바벨론 유수기'라고 한다. 유대 지도자로 그달리야를 세웠으나,
그를 죽이고 유대백성들은 예레미야와 함께 애굽으로 도망갔다. (왕하 25: 22-26)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참조]
※ 선지자 예레미야는 옛 계약 대신 새 계약을 주신다고 예언하였고,
에스겔은 '하나님의 백성'을 버리지 않으시고 고국으로 돌아가게 한다고 예언하였다.
★ 고고학적 자료
왕하 25: 4절 시드기야가 '밤중에 두 성벽 사이 왕의 동산 곁문 길로 도망하여'라는 기록이 있다.
이 '두 성벽 사이의 길'이 예루살렘 동남쪽에 지금도 50m남아있다.
라기스, 벧엘, 벳세메스 등지의 불탄 재의 두꺼운 층 아래에서 BC600경의 신전보물, 제단, 향로, 그릇,
제물의 뼈, 식료품(콩, 건포도, 올리브) 등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너무 갑자기 불이 탄 것을 의미하며,
이것은 느부갓네살이 지른 불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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