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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강 구조주의에 대해서

하나님아들 2020. 3. 31. 23:52

제9강 구조주의에 대해서

◆ 구조주의는 어떻게 형성되는가


▲ 근대성을 비판하면서 동시에 전통철학의 합리주의를 이어받은 구조주의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합리주의 사고, 합리주의라는 건 아주 쉽게 말하면 이 세계가 어떤 합리적인 질서를 가지고 있다는 거예요. 근데 합리적인 질서란 말은 논리적, 수학적으로 이 세계가 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의 인식론적인 짝이 인간은 감각을 넘어서서 자기의 이성을 가지고 세계의 질서를 파악할 수 있다는 거죠. 그게 합리주의죠.

그리고 어찌 보면 학문 자체가 이미 합리주의를 전제하지. 합리주의를 전제하지 않으면 과학을 할 이유가 없죠. 무슨 질서가 있으니까 우리가 할 거 아니에요. 근데 좁은 의미의 합리주의는 더 엄밀한 거죠. 넓게 말하면 인간의 합리적 사고를 하는 게 합리주의지.

그러나 그건 너무 넓은 의미고. 철학적으로 말하면 세계의 수학적 구조와 그것을 파악할 수 있는 인간 이성, 순수 이성, 요게 합리주의의 중요한 개념이구요. 그런 것이 20세기 와서는 인식론, 과학철학에서의 합리주의, 그 다음 분석철학, 논리·언어철학에서의 합리주의, 그리고 오늘은 세 번째로 구조주의를 또 하나의 합리주의로 얘기할 거예요.

그런데 구조주의는 학문적 방법이나 학문적 인식론적 토대는 합리주의지만, 인식론이나 분석철학과는 분위기가 굉장히 달라요. 분위기가 뭔지는 있다가 이야기하겠지만, 뭐랄까 과학철학이나 분석철학은 아주 순수과학, 순수 인식론, 순수 과학철학, 순수 철학이라면 구조주의는 합리주의지만, 훨씬 넓고 폭넓은 문화사적, 정치적, 또 인간 존재론적인 것으로 굉장히 함축하는 바가 넓죠.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많이 연구되고 언급이 되는 철학자들이 대다수가 구조주의의 요람에서 나온 사람들이에요. 구조주의의 요람에서 구조주의를 넘어서면서 나온 사람들이죠. 그런 점에서 구조주의는 상당히 중요한 사조입니다. 아주 넓게 보면 구조주의는 근대성(modernism)에 대한 비판이에요.

서구의 근대성의 폐해에 대한 비판이죠. 그런데 근대성의 폐해라고 할 적에, 가장 기본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인간 중심주의입니다. 인간이 너무나 제멋대로 모든 걸 지배하고 자기중심적으로 행동한 것이 오늘날의 세상을 이렇게 복잡하게 만들었다고 하는, 인간 중심주의에 대한 고발이죠.

그런데 인간중심주의를 철학적으로 이야기하면, 주체에 대한 과도한 의미부여 또는 주체에 대한 과장된 가치 부여, 그리고 그것이 근대 문명 모더니티의 폐단을 낳았다. 그래서 구조주의는 말하자면 근대적 주체 철학에 대한 하나의 안티테제로서 등장합니다.

그래서 구조주의는 양면성이 있어요. 하나는 근대문명이 갖는 주체성 혹은 주체 중심주의를 비판하는데, 그러면서 합리주의는 이어받아요. 근대의 주체 중심주의, 근대의 인간 중심주의를 강하게 비판하면서 탈인간중심적인, 주체가 아니라 구조로 가는 사상을 전개하는데, 재밌는 것은 우리가 모더니티에 대한 극복이란 건 근대 합리주의에 대한 비판을 동반하거든요.

요게 아주 복잡한데, 잘 들어보세요. 근대성(modernity)에 대한 비판 중의 하나가 합리주의에 대한 비판 이죠. 합리적으로 사고해서는 안 될 인간 실존을 강조하는 게 실존주의죠. 그러니까 실존주의도 근대성 비판이에요. 근데 구조주의는 근대철학에서의 주체 중심주의를 비판하고 오히려 합리주의는 이어받아요. 묘하죠?

실존주의는 근대 철학의 합리주의를 공격하고, 주체성의 철학을 더 발전시키거든요. 근데 구조주의는 반대입니다. 주체성의 철학을 공격하고 그 대신 근대 합리주의 인식론은 오히려 더 극단화 하는 거야. 그러니까 근대성을 구성하는 두 가지, 합리주의 요소와 주체주의 요소가 있어요.

실존주의가 합리주의를 비판하고 주체철학을 전개했다면, 구조주의는 거꾸로 주체철학을 비판하고 합리주의를 전개해요. 정확히 대칭되는 거죠. 실증주의와 구조주의는 근대의 합리주의와 주체 중심주의 중에서 각각 하나를 긍정하고 하나를 부정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참 재밌는 게 예를 들어서 헤겔 같은 사람은 근대 합리주의적인 요소하고 근대 주체 철학 둘 다를 갖고 있죠. 근데 실존주의자와 구조주의자가 똑같이 헤겔을 비판해도 비판의 포인트가 반대에요. 실증주의자들은 헤겔이 너무 합리주의자이기 때문에, 이성주의자이기 때문에 비판 하죠.

그리고 헤겔을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은, 헤겔을 아예 실증주의적인 철학자로 바꿔 버리려는 거죠. 근데 거꾸로 구조주의자들이 헤겔을 비판할 적에는 합리주의를 비판하는 게 아니라 헤겔의 인간 중심주의, 주체 중심주의를 비판하는 거예요. 이렇게 두 사조가 묘하게 포인트를 달리 하면서 20세기 중엽을 수놓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재밌는 건 동북아에 사르트르나 메를로-퐁티, 까뮈 같은 사람은 굉장히 일찍 들어왔거든요. 2차 세계대전 직후에, 폐허 위에서 사람들이 실존주의에 매료되었죠. 모더니티의 극한이 이런 거구나, 근대 문명, 근대 합리주의, 근대 과학 문명이 결국은 이런 폐단을 낳았구나 라면서 인간 실존에 대한 고뇌를 받아들이죠.

니체, 사르트르, 하이데거, 키에르 케고르, 카프카, 까뮈 등등 많이 있는데, 여러분들 아버지나 어머니 중에 교육을 좀 받으신 분이 있으면 책장을 잘 보세요. 그러면 이런 사람들 반드시 꽂혀 있다고. 그 세대가 가장 많이 읽은 책이에요. 근데 구조주의는 한국에 한참 늦게 들어와요.

빨리 잡아봐야 70년대, 80년대는 되어야 레비스트로스, 알튀세르, 라캉이 들어오죠. 그래서 우리 느낌은 레비나 알튀세르는 꼭 사르트르 다음 세대 같죠? 근데 그게 똑같은 세대 사람이에요. 레비스트로스, 라캉, 알튀세르 같은 사람들하고, 사르트르, 까뮈, 메를로-퐁티는 똑같은 시대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우리 문화사에서는 한 세대가 다음 세대로 느껴지죠.


▲ 구조주의 - 타자 배제의 역사에 대한 반성

근대성이 과연 우리를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인가? 인간이 주체인가? 과연 인간이 세계를 인식론적으로 구성하는 것이고, 노동(arbeit)을 통해서 세계를 인간화하고, 역사를 만들고, 인간은 절대자의 의식을 가진 대자라는 식의 생각들, 그리고 서구의 모더니티가 자유와 평등과 박애라는 프랑스 대혁명의 이념, 계몽의 이념을 근간으로 하는 삶의 모범 답안인가? 이런 식의 문제들에 대한 회의.

그리고 물론 근대 철학자들이 의식적으로 의도한 바는 아니었겠지만 근대 문명의 끝에서 제국주의, 파시즘, 자연 파괴, 인간 소외가 팽배한 것이 근대 철학이 함축하는 문제점들이 깔려 있는 것은 아닐까와 같은 의심들.
그리고 근대 철학이 이성 중심주의고 서구 중심주의고 남성중심주의 등등이라고 한다면, 그와 같은 철학적 흐름 속에서는 이른바 ‘타자들(the Others)이 배제되어 온 역사가 아닌가’ 라는 거에 대한 전반적인 반성이 서구 지식인 사회에서 팽배하게 되죠.

그러면서 근대 철학에 대한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현대 사회 비판이라든가 구조주의라든가, 이런 식의 사조들이 서양 근대성에 대해서 강한 의구심을 제시하게 됩니다. 서구 바깥에서의 근대성 비판은 대개 민족주의의 형태를 띠죠.

서구 바깥은 서구의 모더니티를 전반적으로 받아들이지만, 그 안티로서 대개가 민족주의 형태, 지역의 트래디션(tradition)의 형태를 띠면서 등장하죠. 그것이 가장 급진적으로 나타난 경우가 예컨대, 이슬람 근본주의 같은 건데요.

구조주의는 어찌 보면 서구인들의 문화 자체 내에서 등장한 근대 비판이라고도 볼 수 있어요. 프랑크푸르트 학파와 구조주의가 이런 흐름의 가장 대표적인 두 사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컨대 칸트 같은 경우는 인간의 주체를 강조한 철학이죠.


▲ 칸트부터 사르트르까지의 인간중심주의를 비판한 구조주의

옛날에는 인식이란, 결국 인간이 자기 몸으로 감각하는 내용들을 자기의식이 가진 틀, 범주, 카테고리로 구성하는 거였으니까요. 그러니까 인간이 세계를 구성하는 거죠. 인간에 의해 구성되지 않은 세계는 칸트에게는 별 의미가 없죠.

그런데 엄밀히 말하면 인간의 주체가 세계를 구성하는 게 아니라, 세계가 인간 주체를 변형시키는 거지. 칸트는 인간이 일정한 틀을 가지고 있어서, 그 틀을 가지고 경험한다는 거거든요. 칸트는 엄밀히 말하면 인간이 경험을 해서 그 경험을 통해 인간의 의식의 틀이 구성한다고 말하는 게 아니에요. 그게 아닙니다. 인간 의식의 틀이 세계를 구성해야만 경험이 성립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렇기 때문에 인간 주체의 틀(칸트가 순수 이성 비판에서 비판하는 인간 의식의 틀)은 경험의 가능 조건이죠. 경험을 해서 그것을 구성하는 게 아니라 그런 구성의 과정이 개입해야 경험이 성립하는 거예요. 그만큼 칸트에게서는 인간의 경험의 틀이 엄청 중요한 것이죠.

근데 사실은 칸트 이후에 전개된 과학사 등을 유심히 보면 인간이 어떤 틀(범주)을 가지고 있어서 (칸트가 말한 12개 범주, 양, 질, 관계, 양상) 자기의 감각 내용들을 구성하는 게 아니라, 거꾸로 새로운 경험이 인간 주체를(범주를) 변형시키는 거지.

인간이 이러이러한 틀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 틀로 구성하는 게 아니라, 세계가 새로운 어떤 걸 우리에게 보여줌으로써,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어떤 새로운 경험을 함으로써 우리의 의식의 틀이 바뀌어 나가는 거죠. 그렇게 봐야 됩니다. 그게 더 정확한 생각이에요.

그러니까 예컨대 양자역학에 등장하는 물질 파괴 개념(메타 웨이브)을 보면, 칸트로 보면, 관계 범주와 실질 범주가 같이 있는 거거든. 그럼 칸트로 볼 때는 융합하기 어렵죠. 그 틀에 안 맞죠. 또 하나 예를 든다면 사르트르가 말하는 즉자와 대자, 우리가 현상학 할 때 했죠? 이런 책상 같은 사물들은 여백이 없는 존재지. 그냥 탁자는 요렇게만 존재할 뿐이야. 꽉 차 있는 거지.

그래서 그걸 이 사람의 용어로 하면 즉자(on -soi, in itself)에요. 근데 우리 인간 의식은, 그냥 요렇게 딱 존재하는 게 아니라 자꾸 딴 걸 생각하지. 자기 밖으로 나가서 미래도 생각하고, 과거도 생각하고, 그러니까 지향성(intentionality)이 있죠.

그러니까 의식은 열린 거야. 열렸다는 건 여백이 있다. 꽉 차 있는 게 아니라 여백이 있는 존재야. 그게 사르트르가 무라고 하는 거죠. 마치 사물들의 세계가 인과율, 법칙성으로 촘촘하게 짜인 그물 같다면 인간의 의식은 바둑판에 구멍. 이렇게 구멍이 뚫린 존재에요. 그게 무죠. 그러니까 이건 곧 자유지.

결국 사르트르의 이런 식의 생각은 데가르트의 레스 코기타스(thinking substance) 사유하는 실체와 레스 엑스텐자(extended substance) 연장된 실체라고 하는 이분법의 새로운 판본이죠. 이런 이원론적 사고에는 동물이나 식물이 들어설 자리가 없어요.

광물이나 식물이나 동물이나 다 이 사람한테는 사물일 뿐이야. 인간 의식을 특권시하니까. 인간의 주체성(subjectivity), 자아, 의식을 특권시하기 때문에 그것이 아닌 다른 존재들은 일괄적으로 쭉 처리되죠. 결과적으로 얘기하면, 사르트르는 굉장히 현대적인 형태를 띠고 있긴 하지만 데카르트에 이후 줄곧 내려온 서구 사유의 이원론적 사고의 현대적인 판본이죠.

이런 식의 생각들, 칸트로부터 사르트르에 이르기까지 전개된, 이런 식의 주체중심주의와 인간중심주의, 인간의 특권, 의식의 특권, 주체성의 특권 같은 것들에 대한 비판이 바로 구조주의죠. 그리고 자연스럽게 어떤 이야기가 나오느냐면, 만약에 그런 것들을 특권시한다면 어떤 결론이 나오죠?


▲ 서구문명을 그대로 ‘모방’하는 세계의 문화

그런 것들을 보다 더 잘 구현하고 있는 것들이 더 뛰어난 존재가 되겠지. 만약에 인간이 주체성이 뛰어나다면 그런 주체성을 더 많이 구현하고 있는 존재가 더 뛰어난 거 아냐? 만약에 합리적·이성적인 사고가 인간의 훨씬 긍정적이고 뛰어난 면이라고 한다면, 그런 사고를 보다 더 많이 발전시킨 문화가 더 뛰어난 문화가 될 거 아냐. 자연스럽게. 그렇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황인종, 흑인종 보다는 백인, 다른 지역 보다는 유럽이, 여성보다는 남성이, 미개인 보다는 문명인이, 아이들보다는 어른이, 더 뛰어난 존재죠. 왜? 이전의 철학들이 뛰어나다고 설정한 것들을 더 많이 구현하고 있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여기는 다양한 이데올로기적 함축이 깃들어 있다, 모더니티가 담고 있는 강한 이데올로기적 함축이 짙게 깔려있다는 거죠.

예를 들어서, 미개인들이 칸트가 말한 12개 범주를 가지고 사람들을 바라보느냐. 인류학적인 연구에 의하면 그렇게 바라보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럼 미개인들은 자연스럽게 굉장히 이상한 존재가 되지. 비이성적인 존재가 되겠죠. 그 다음에 근대 철학자들이 설정한 계몽의 이상을 가장 잘 구현한 것은 유럽 아냐?

그러니까 유럽이 아닌 다른 인도 문명, 이슬람 문명, 중국 문명 등등은 굉장히 미개하고 역사적으로 뒤쳐진 지역으로 되겠고 자연히 어떤 결론이 나오느냐, 유럽이 아닌 지역은 삶의 목표나 역사의 목표를 유럽과 같아지는 것으로 잡아야 되겠죠. 그럴 것 아니에요?

여러분들이 시간나면 4·19탑에 가 보세요. 4·19 탑의 부조를 유심히 보면 이게 한국인 얼굴이 아니야. 코가 다 서양사람 코야. 잘 보세요. 전부 백인 얼굴이에요. 아주 놀라운 사실이지. 바꿨나 모르겠네. 옛날에 바꿔야 한다고 글 썼는데. 가서 한 번 보세요.

여러분들 미술학원 가면 스케치 할 때 보면 그 모델이 서양사람 모델이죠. 로마 사람. 머리도 곱슬한 서양사람, 로마 사람을 스케치하고 있지. 우리나라 사람 스케치해야 되는데 그지? 미술학원에 흑인 조각 갖다놓고 스케치 하는 거 한 번이라도 봤어요?

지구상의 모든 문화는 유럽을 모방하는 문화에요. 애들 보는 만화도 전부 서양 사람이야. 머리도 서양 사람같이 금발이고. 완벽하게 모든 문화는 다 서양을 모방하는 문화로 완벽하게 되어 있죠. 그런 걸 비판하는 수준 높은 사상들도 역시 서양에서 나왔으니까 그걸 비판하는 저도 이렇게 서양 사상을 가지고 비판하는 거지. 아이러니하죠. 참 묘한 것입니다.

그래서 약 1960년대 이후부터는 근대 학문 전반에 대한 어떤 전면적인 비판이 등장해요. 아주 극단적인, 서양 문명 전체에 대한 과도할 정도의 비판들이 등장하고 그 전에는 철학이라는 담론에 들어오지 않았던 존재들이, 철학적 담론 속에서 이야기되는 시대가 전개 됩니다.

재밌는 건 구조주의자들은 이렇게 근대성을 비판하지만 그것들을 사유하는 학문적 방법은 아주 합리주의적인 거예요. 그리고 그런 합리주의까지도 완전히 버리고 일종의 생성의 사고, 감각의 사고까지 아예 가면 후기 구조주의로 접어드는 거죠.

 

◆ 구조주의는 어떤 사유체계를 가지고 있는가


▲ 구조주의 - 구조주의는 철학 담론에 국한하지 않는 너른 의미의 사조다

‘레비스트로스와 라캉으로부터, 오늘날의 데리다와 세르 레비나스로 이루어진 지난 반세기 동안 이루어진 새로운 혁명은, 시대적인 사상적 배경에서 등장했다.’ 그래서 그거는 타자(the others)의 사유다. 말하자면 철학이라는 담론이나 근대성 문화가 배제했던 것은 타자들의 사고죠.

그래서 미셀 푸코라는 철학자의 가장 중대한 관심사가 배제(exclude)였습니다. 그 다음에 바깥의 사고다. 왜 바깥의 사고냐? 근대 철학은 인간이 자기의 안에서부터 세상을 보는 거예요. 인간이 자기를 바깥에서 보는 게 아니라 인간이 자기 안에서부터, 자기 내면, 자기의식, 주체, 자아, 자기의식, 나. 이렇게 인간이 자기 안에서 출발해서 바깥을 보는 거지.

구조주의는 반대에요. 바깥에서 출발해서 안을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안을 가지고 바깥을 설명하는 게 아니라, 거꾸로 바깥을 가지고 안을 설명하는 거죠. 그래서 ‘라 빵세 디드 오허’ 바깥에서 보는 거예요.

그 다음에 여백(margin)의 사유다. 무슨 얘기냐면, 근대 철학은 대부분 중심(centre)의 사고에요. 코기토든, 신이든, 모나드든, 절대의식이든, 선험적 주체든, 뭐든지 간에, 중심을 딱 세워놓고서 세상을 바라보는 거죠. 그러니까 인간 주체성은 하나의 빛이고, 빛을 죽 비추다가 멀리 가면 흐려질 것 아냐.

그럼 어둠이 있죠. 그런데 이런 탈근대사고들은 중심의 사고가 아니라, 거꾸로 그 중심에서 볼 적에는 여백에 해당하는 것의 사고다. 그 다음에 차이의 사유다. 차이라는 건 엄청 복잡한 말이에요. 조심해야 됩니다. 현대 철학에 등장하는 차이의 용법은 정리하면 열 가지 가까이 나옵니다.

그래서 차이라는 말만 듣고서 생각하면 안 되고 이 차이가 도대체 무슨 차이를 말하는 건지 잘 봐야 합니다. 그러나 통상적으로 말해서 어떤 동일성, 아이덴티티 이런 것들은 중심과 통하죠. 아이덴티티보다는 차이, 또는 차이의 운동, 이런 걸 더 중시하죠. 그런 식의 사고들이 있다.

그래서 우리가 현대 사상이란 말 쓸 적에, 현대 사상을 잡는 건 니체부터 잡을 수도 있고 여러 방법이 있죠. 오늘날의 좁은 의미의 현대 사상이라고 하면 이런 식(차이, 운동 등)의 백그라운드를 갖고 있는 사상들이란 거죠. 근데 구조주의는 철학사조가 아니에요. 좁은 의미의 철학사조가 아니에요.

예컨대, 니체 철학이다, 베르그송의 철학이다 이렇게 굉장한 그랜드(grand)한, 큰 철학자들을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고, 그 다음에 현상학 같은 건 후설처럼 창시자가 있잖아요. 근데 구조주의는 철학이라는 담론에 국한되는 사조가 아니에요.

예컨대, 소쉬르 같은 언어학자, 퍼스 같은 기호학자, 라캉 같은 정신분석학자, 레비스트로스 같은 인류학자, 롤랑 바르트 같은 비평가, 뒤메질 같은 신화학자, 부르디외 같은 사회학자, 아동들의 발생 인식론을 연구한 장 피아제, 역사에서는 아날학파의 페르낭 보르데 같은 유명한 사람, 그리고 알튀세르, 푸코 같은 철학자들, 심지어는 생물학의 라콕 등 굉장히 다양한 분야가 하나의 장(field)을 형성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헤겔이다, 니체다 같은 한 사람의 큰 철학자가 아니고고 또 현상학이나 해석학 같은 철학 사조가 아니라, 엄청나게 많고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서로 '공명'하는 거지. 개념을 빌려다 쓰고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거대한 장을 형성하는 거지.

그래서 굉장히 다른 철학사조(현대사상)하고는 성격이 다른 철학사조이죠. 그리고 중요한 건 한 사람이 의식적으로 우리 구조주의 하자고 약속해서 어느 날 갑자기 다 모여서 한 게 전혀 아닙니다. 그냥 어떤 한 시대에 이렇게 퍼져나간 거지.

개념을 빌려다 쓰고, 영향을 주고받고 하면서 형성되는 거예요. 그러기 때문에 구조주의를 공부하려면 엄청 유식해야 돼. 예를 들어서 니체 공부하는 건 니체를 열심히 보면 되잖아. 물론 철학사를 알아야 하지만 말이에요. 철학사는 무조건 알아야 되는 거지.

어쨌든 니체 그러면 니체만 보면 되지. 베르그송 하면 베르그송만 보면 되지. 그런데 구조주의를 하려면 엄청 읽어야 돼. 언어학, 인류학, 정신분석학, 사회학, 인식론, 존재론, 심지어 자연과학까지도 읽어야 됩니다.

구조주의는 서로 알게 모르게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형성되었고, 훗날에 어느 정도 형성이 되어서 사람들 눈에 보였을 때, 구조주의라는 딱지를 부여받게 되는 거죠. 그래서 이걸 여러 담론의 구체적인 내용을 사상하고 철학적인 테마로 정리해서 이해하는 것은 상당히 곤란합니다.

20세기 중반 서구 사상을 지배했던 양대 사조는 실존주의와 맑시즘이었죠. 이 두 사조가 서구 사상계를 강하게 지배했습니다. ‘두 사조는 하나는 역사의 객관적 법칙을 강조하고, 또 하나는 인간 주체성을 강조했지만 결국 둘 다 서구 근대 철학의 전형적인 적자였다. 구조주의는 이런 흐름을 깨고 등장했으며’


▲ 구조주의의 등장배경

이렇게 구조주의가 등장한 배경에는 여러 가지가 있어요. ‘예컨대, 바슐라르의 합리주의, 마 샬 게로의 철학사 독해, 스피노자 르네상스와 라이프니츠의 르네상스, 소쉬르와 퍼스의 언어학·기호학, 그 다음 간접적으로는 하이데거와 메를로-퐁티의 후기 철학, 그 다음 느보로망 같은 문학비평이 아주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구조주의를 형성하게 되었다.’

구조주의는 철학이기 이전에, 우선 인간과학 방법론이에요. 구조주의는 철학으로 출발한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인간 과학(human science)의 방법론으로 출발하고, 나중에 그것으로부터 철학적인 함축이 끌어져 나온 거죠.

그래서 인문과학의 방법론으로서의 구조주의와, 철학사조로서의 구조주의는 구분되어야 한다. 마치 뉴턴과 칸트, 진화론과 베르그송, 수학과 분석철학이 맞물려 있지만 그러나 분리되어져야 하듯이, 구조주의 인간 과학과 철학 역시 구별되어야 한다.

어떤 과학이, 과학 자체로서 그치지 않고, 그 과학의 근본 전제들에 대한 메타적인 검토, 그리고 그 과학의 성과들이 인간 존재에 대해서, 나아가 세계 전체에 대해 함축하는 의미에 대한 성찰로 나아갈 때, 그것은 철학적 성격을 띠게 되죠.

예컨대 분자 생물학은 과학이죠. DNA를 분석하고, 몇 번째 염색체가 이렇게 생겼다, 이게 잘못되면 무슨 병에 걸린다 등등은 과학이죠. 그러나 만약에 누군가가 분자 생물학을 가지고 인간이란 존재에 대한 새로운 해명에 나섰다면, 일종의 철학이 되는 거죠.

또, 양자역학은 과학이죠. 하지만 양자역학이 함축하는 새로운 인과론, 물질개념, 시간 공간 개념, 그 다음 주체와 개체의 관계 등등을 해명하면 일종의 과학철학이 되는 거죠. 그러니까 과학과 철학은 이런 식의 관계를 맺고 있어요.

마찬가지로 구조주의는 일단은 언어학·사회학·정신분석학의 방법을 띄고 있지만, 동시에 세계와 언어의 관계라든가, 인간의 본성이라든가, 문화의 의미 같은 문제와 연결될 때 철학적인 사조로 화(化)하는 거죠.

근데 항상 과학이 먼저 가고, 철학이 나중에 오는 것은 아니고 그 반대일 수도 있죠. 예를 들어서 라캉의 정신분석학 같은 건 현상학과 헤겔-스피노자 같은 철학을 전제하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거죠. 그래서 과학과 철학은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다.

그래서 현상학과 구조주의는 다른데, 현상학은 어찌 보면, 순수 철학 방법론이에요. 순수하게 후설 한 사람이 창안해 낸 거지. 그런 다음에 그게 하이데거, 사르트르, 메를로-퐁티한테 퍼져나간 거지요. 구조주의는 그게 아니라 여러 인간 과학들이 어떤 공통의 장을 형성하고, 그 다음에 그것들이 함축하는 철학적 함축들이 논의가 된 거죠. 그래서 그런 인간과학들을 잘 모르면 구조주의를 이해하기 힘들다.

그러니까 한국 같은 데서는 현상학은 많이 연구도 하고 잘 알려져 있지만, 구조주의는 잘 모르죠. 왜냐하면 한국 철학자들은 철학 밖에 모르니까요. 한국 철학자들은 철학 텍스트밖에는 안 읽어요. 그러니까 현상학 같은 건 아주 쉽게 할 수 있는데, 구조주의는 할 수가 없지.

구조주의를 하려면 인류학도 알아야 되고, 언어학도 알아야 되고, 정신분석학도 알아야 되는데, 그걸 안 하니까 못 하는 거죠. 구조주의가 등장한 지 몇 십 년이 지났지만 한국에서는 지금도 구조주의가 기본이 전혀 안 되어있다고 봐야죠.


▲ ‘실재, 상상, 상징’ 이라는 세 가지 차원

‘구조주의란 무엇인가? 구조주의는 기본적으로 세 가지 차원으로 구분해요. (이게 아주 새로운 건 아니지만, 상당히 구조주의적 방식으로 새롭게 바라보게 되는데) 첫째는 the Real, 실재적인 거죠. 또 하나는 the Imaginary, 상상적인 거죠. 세 번째는 the Symbolic, 상징적인 것입니다.

구조주의 이전 전통철학은 대체적으로, 리얼과 이매지너리 두 차원의 철학이에요. 리얼한 것은 세계죠. 맥락에 따라서 물질도 되고, 대상도 되고, 사물도 되는데 한마디로 말하자면 ‘실제 존재하는 것’이죠. 이매지너리한 건 인간의 정신 차원이죠. 자아, 주체, 자기 의식, 상상, 관념 등이죠.

예컨대, 이 놈(탁자)는 리얼한 거지만, 탁자에 대해서 내 마음이 가지고 있는 생각은 이매지너리한 거지. 금강산은 리얼하게 있지만, 내가 생각하는 금강산은 이매지너리한 거죠. 구조주의는 두 차원 외에, 사물과 주체, 세계와 인간, 이 두 차원 이외에 사실은 이것들을 일정하게 조정하고 있는 심볼릭한 게 존재한다는 거죠.

심볼릭한 것이 있다는 것에서 출발해요. 예컨대 나무는 리얼한 거죠. 실재하는 거죠. 그 나무에 대한 내 생각, 관념, 의식은 이매지너리한 거죠. 그런데 내 생각과 나무가 관계를 맺을 적에, 사실은 그냥 관계를 맺는 게 아니라 어떤 언어적 구조를 깔고 나가죠. 언어적 구조가 매개되어서 나무를 생각하죠.

현상학과 비교해 보면 딱 드러나요. 현상학은 심볼릭한 차원이 없어요. 대상과 주체가 있고, 사물과 의식이 있고, 노에마와 노에시스가 맞물려있는 이원적 사고지. 근데 구조주의는 우리가 사물을 지각하고 사유할 적에, 눈에 안 보여서 그렇지, 이미 여기에는 어떤 심볼릭한 차원이 나와 사물 사이에서 작동하고 있다는 거죠.

아주 쉬운 예를 들어봅시다. 고등학교 수업 시간에, 세 번째 시간이 생물학 시간이었는데 사과를 갖다 놓고 설명한 거예요. 이 사과는 오옥신이 산화되어 있고, 일 년에 몇 번 열리고 등등 막 설명했어요. 그 다음 시간이 경제학 시간이었어요.

고등학교가 가난해서 사과가 하나밖에 없다고 칩시다. 그래서 경제학 시간에 이 사과를 또 놓고서 상주에서 많이 나오고, 부가가치가 얼마고 했어요, 그 다음 미술시간이야. 또 사과를 가지고 미술시간에 놓고 가르쳐요. 그래서 사과를 그렸어요.

그러면 리얼한 것은 그 사과 하나지. 근데 우리가 생물학 시간에 사과에 대한 생각하고, 경제학 시간 사과에 대한 생각하고, 미술 시간 사과에 대해 생각하지만 서로 굉장히 판이하죠? 그런데 그 판이한 것이, 내가 눈 구조가 달라진 것도 아니고, 내 마음이 변화한 것도 아니고, 뭐가 바뀌었을까?

사과라는 대상과 나라는 주체가 관계 맺을 적에, 관계를 주재(regulate)하는 어떤 눈에 보이지 않는 심볼릭한 룰이 있는 거죠. 생물학 시간에 내가 그 사과를 바라보게 되는 보이지 않는 룰이 있는 거고, 경제학 시간에 그 룰이 있는 거고, 미술 시간에 룰이 있죠. 그걸 다른 말로 하면 코드에요.

각 상황마다 코드가 다른 거지. 야구장이나 축구장에 가면 첫째 리얼한 게 있죠. 사람들, 공, 심판, 관중 등은 리얼한 거죠. 그 다음 이매지너리한 게 있죠. 그걸 바라보는 내 생각, 마음, 관념, 느낌 이런 게 있죠. 근데 또 하나가 있지. 공하고 보는 사람하고 사이에 또 하나 안 보이는 게 있죠.

야구장 전체를 지배하는 룰이 있지. 담장을 넘어가면 홈런이라든가, 세 번 스트라이크면 아웃이라든가 하는 룰이 있죠. 구조주의자들은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죠. 더 리얼한 것과, 이매지너리한 것, 즉 사물과 주체, 대상과 자아와 같이 이원적으로 나누는 사고가 전통적인 철학적 사유라고 한다면, 그 두 차원은 그 사이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무의식적인, 의식을 못 하는 어떤 것이 작동하여 관계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대상과 맺는 관계는 사실상 그 룰이 상당부분 지배하고 있다는 거죠. 그게 뭐냐면 구조(structure)죠. 그래서 구조주의는 무의식의 사고입니다. 주체, 자아, 나, 코기토, 이건 다 의식이지. 근데 아까 이런 말 했죠. ‘구조주의는 바깥의 사유다.’

내 안인데 (어찌 보면 안은 안이지) 내 안인데 사실 내 바깥에 있는 게 있어요. 그게 무의식이죠. 구조주의는 무의식의 사고에요. 내 주체성, 의식, 자아의 사유가 아니라 내 안인데 (나의) 바깥에 있는 거예요. 그게 나의 무의식이죠.

물론 구조주의자들이 무의식이라고 할 때는 넓은 의미에요. 프로이트가 얘기하는 무이식만이 아니라 아주 넓은 의미의 무의식이죠. 한국 사람은 한꺼번에 다 차려서 들고 오죠. 심지어는 숭늉까지 들고 와요. 근데 서양 사람들은 하나씩 나옵니다. 근데 우리는 밥 먹으면서 그 생각을 하지 않죠. 그렇게 그냥 사는 거예요. 그러면 무의식이죠. 그게 바로 구조입니다.

 

◆ 구조주의는 어떻게 발전하는가


▲ 인류 문화는 구조(structure)에 따라 만들어진 필연적 산물이다

그 다음 세 번째, 인류 문화는 주체의 창조물이라기보다는 주체가 바로 그 무의식적 법칙에 따라 만들어낸 구조들이다. 문화란 주체의 산물이 아니라 구조의 산물이다. 신화를 봐라. 신화를 실제로 유심히 보면 정말 그렇더라고요. 다 패턴이 있어요.

전혀 다른 문화인데 한국 문화, 일본 문화, 히브리 문화, 그리스 문화, 로마 문화, 인도 문화 다 다른데, 보면 아닌 게 아니라 구조(structure)가 너무 비슷해요. 내용만 달라요. 구조에 들어가는 항만 다른 거지. 여기서는 거울인데 저기서는 칼이고, 여기서는 오작인데 저기서는 바닷물이 갈라지는 식이야.

그래서 구조주의자들은, 인간의 뇌가 사유할 때 방식이 있다는 거야. 내가 막 멋대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나도 모르게 따르는 룰이 있다는 거지. 그 룰의 가장 대표적인 게 언어죠. 아이들이 말 배우는 거 보면 놀랍잖아요.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알지.

왜? 아이들이 언어를 하나하나 배우는 게 아니에요. 그렇게 배우면 몇 십 년 배워야 될 거에요. 그게 아닙니다. 이미 빈 틀이 있는 거야. Chomsky(촘스키) 말마따나. 그래서 하나의 예를 가르쳐 주면, 예컨대 수박이 딸기 보다 더 커를 알려주면, 그 다음부터 대입을 하죠?

‘배가 사과보다 좀 더 크구나. 복숭아보다 참외가 좀 크구나’ 이렇게 대입합니다. 그거 일일이 우리가 다 가르쳐 주는 거 아닙니다. 그걸 우리가 다 가르쳐 주려면, A가 B보다 크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만 해도 몇 년이 걸릴 겁니다. 하나하나 가르쳐 주면 그 폼(form)에 대입하잖아. 그 다음부터는 자기가 알아서 합니다. 그런 structure가 인간에게 갖춰져 있는 거예요.

그래서 구조주의의 출발점이 언어학(소쉬르의 언어학)이에요. 인간의 사고가 이매진한 것은 심볼릭한 것의 지배를 받는다는 거죠. 옛날은 반대지. 인간이 생각을 해서, 그걸 언어로 표현하는 게 말이라고 생각하죠. 구조주의자들은 ‘천만의 말씀!’ 우리 생각 자체가 이미 언어 틀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거예요.


▲ 구조주의적 사고방식에 철학적 함축을 처음으로 부여한 레비스트로스

그런데 그 놈의 구조라는 게 어떻게 생겼나 물어보면 이 사람들은 element(소)들, 예컨대 아까 말한 식사소, 신화소, 건축소, 음식소 등등 소들의 체계(system)라고 얘기한다는 거죠. 언어라는 게 그렇게 되어 있다. 그리고 주체는 이 체계의 창안자가 아니지. 체계의 어디(where)인가에 자리 잡고 있는 거죠. 이런 구조주의적 사고방식에 처음으로 철학적 함축을 부여한 게 레비-스트로스에요.

그러니까 구조주의를 인간 과학의 방법론으로만이 아니라 사상적 의미를 부여한다고 그럴까? 철학적 함축을 끌어낸다고 할까? 그것을 이룩한 사람이 레비-스트로스죠. 이 사람은 이런 걸 근거로 해서 인간의 문명, 역사, 자아, 주체에 대한 비판을 가하면서 인류학자답게 미개인들을 연구하죠.

그래서 여러분들이 구조주의적인 사고의 분위기를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책이, 『슬픈 열대』죠. 그 책을 맨 처음 읽어보세요. 구조주의를 이해하는 데 가장 먼저 읽으면 좋은 책입니다. 재밌어요. 기행문이에요. 자기가 교육받은 거, 어릴 때 이야기라든가, 책이 재밌죠.

그러면서 이 사람은 서구의 제국주의를 공격하죠. 서양인이 잘났다고 날뛰어서 이 모양 이 꼴이다. 전쟁이 벌어지고 (말이죠). 그러면서 서양 사람들이 이야기해 온 문명이니, 역사니, 주체니 하는 게 그렇게 과연 대단한 거냐면서, 미개인을 이야기하면서, 자연으로 돌아갈 것을 외치죠. 물론 지금은 많이 비판받지만, 역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 거죠.


▲ 차이의 체계(system of differences)

원래 인류학이 그렇지. 인류학이 왜 생기냐면, 서양 사람들이 통치를 해야 되거든. 인도를 연구하고, 중국을 연구를 해야지 지배를 할 거 아냐? 그러니까 원래 인류학이란 담론의 출생 자체가 아주 불손해요. 그러니까 재밌는 건 옛날에는 유교나 도교는 우린 그걸 동양 철학이라 그러죠. 그런데 서양 사람들은 인류학과에서 그런 걸 연구했어요.

미개인들 사고의 한 예로써 힌두교나 도교가 연구된 거지. 통치하려고 하니까, 알아야지 통치를 하죠. 제국주의의 본산이라고 할 수 있는 인류학에서 바로 근대성과 제국주의에 대한 반성이 등장했다는 사실이 어찌 보면 시사적이죠.

예를 들어서 구조주의적 사고방식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예 중 하나가 토테미즘이에요. 이게 이제 구조주의가 사물을 바라보는 잘 보여주는 예에요. 토템이란 게 뭐냐는 거에요? 토테미즘을 리얼하게 보면, 리얼한 관점에서 보면, 토템과 부족은 리얼한 관계에 있는 거지.

그러니까 곰을 토템으로 하는 부족은 좀 미련하고, 거북이를 토템으로 하는 부족은 느려 터지고. 이런 식이죠? 심지어 이런 것도 있어요. 아직 사람들이 미개인들을 순수하게 대하는 게 아니라 굉장히 근대 합리주의를 갖고 볼 때에는, 예컨대 늑대를 토템으로 하는 부족은 보름달이 뜨면 늑대로 변한다는 거예요.

서양 사람들은 꼭 보름달이 뜨면 무슨 일이 생겨. 이것도 구조인데. 우리는 반대죠? 우리는 보름달 뜨면 좋은 날이고, 그믐달이 뜨면 구미호가 삭 나오죠. 근데 서양에는 보름달 뜨면 꼭 뱀파이어가 나와요. 그래서 늑대를 토템으로 하는 부족은 보름달이 뜨면 늑대로 변한다는 거예요.

이빨 나오고, 귀가 솟는다는 거죠. 지금 들으면 웃기는 얘기고, 어처구니없는 얘기죠. 근데 근대인들은 미개인들에 대해서 진짜 그렇게 생각했어요. 우리가 들으면 황당하지만. 그만큼 인간의 편견이라는 게 무서운 거죠. 지금은 미개인을 리얼로 보는 건, 정말 웃기는 얘기죠.

근데 그 다음에 이매지너리한 게 있는 거죠. 토테미즘은 리얼한 게 아니라 이매지너리한 거다. 그러니까 토테미즘의 이매지너리한 현대적인 형태가 뭐죠? 문명사회에도 토템이 있죠. 어디에 있습니까? 오비 비어스, 해태 타이거스, 시카고 불스. 그게 바로 토템이에요.

근데 오비 비어스 애들이 미련퉁이냐. 하나 이글스가 날아다니고, 무슨 그런 게 아니죠. 그렇게 리얼한 게 아니라 이매지너리한 거지. 그냥 하나의 상상에 불과하다. 우리에게 재밌게 느껴지는 하나의 관념이지. 그러니까 지금 프로 구단에 붙는 동물의 이름이 토템의 잔재에요. 토템의 현대적 형태이죠.

그런데 구조주의자들은 중요한 건 리얼한 것도 아니고, 이매지너리한 것도 아니라는 거예요. 그럼 뭐냐? 차이의 체계(system of differences)죠. 또는 이 사람들이 즐겨 쓰는 말로 하면 차이들의 놀이 또는 관계들의 체계(system of relations)에요.

예를 들어서, 한화가 베어스고, 삼성이 타이거스고, 기아가 라이언스고 그러면 프로야구가 성립 안 합니까? 안 될 것 없죠. 시카고가 유니콘스고, (농구에 시카고 불스밖에 모르는데, 암튼 뭐가 있다고 칩시다) 아리조나 불스다 이거야. 그럼 농구가 성립 안 합니까? 그건 아니죠.

아리조나 불스든, 시카고 유니콘스든, 시카고 불스 아니에도 상관 없잖아요. 뭐가 중요하죠? 차이의 체계가 중요한 거죠. 관계들의 체계가. 중요한 건 리얼한 것도 아니고 이매지너리한 것도 아니고, 차이들이 체계지.

아까 앞에서 뭐라 그랬죠? 구조주의자들이 말하는 구조는 소(element)들의 관계들의 체계이죠. 요런 것들의 관계들의 차이, 차이, 차이들의 시스템이죠. 요게 스트럭쳐이고 무의식이 에요. 지금 내가 너무 의식적인 예를 들었죠. 왜냐하면 인간이 만든 거니까. 근데 그렇게 의식적인 예가 아니라 무의식적인 예를 생각해야 되요.

예컨대 아까 이야기한 신화소 같은 거죠. 신화가 이렇게 구성되죠. 항만 달라요. 고주몽은 칼인데, 파이톤은 거울이고 , 이건(A) 오작교인데 이건(B) 바다가 갈라지는 식이죠. ‘구조주의는 무의식을 핵심으로 하며, 이 점에서 현상학-실존주의와 날카롭게 대립하’죠. 인간의 주체성, 의식을 강조하고, 책임, 결단, 자유를 강조하는 현상학-실존주의와, 구조와 무의식을 강조하는 구조주의는 날카롭게 대립한다.


▲ 구조주의와 정신분석학 - 자크 라캉의 무의식

무의식을 좀 좁게 해석하면 정신분석학의 용어죠. 그래서 구조주의에서 정신분석학은 굉장히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인류 역사를 보면 참 재밌죠. 맑스가 물러가면 꼭 그 뒤에 프로이트가 오거든요. 무슨 법칙이 있는 것 같아요.

맑스는 이 세계를 변혁시키는 거지. 정치의 철학이고, 의지의 철학이죠, 물론 맑스는 자본주의의 법칙성을 강조하지만, 혁명의 철학이죠. 근데 그런 게 물러가면 그 다음엔 항상 프로이트가 와요. 구조주의가 와요. 우리도 똑같아요. 7·80년대가 맑스 시대였죠.

근데 혁명의 시대가 가고, 보수주의적이고 희끄무fp한 시대가 오면 프로이트가 유행해요. 우리나라도 똑같아요. 그러니까 90년대가 되면 한국에서 프로이트 전집이 나오잖아요. 지금 한국에서 프로이트가 어마어마하게 유행하고 있죠. 아주 묘한 함수 관계에 있어요.

그래서 이 때 중요한 게 자크 라캉(Jacques-Marie-Emile Lacan, 1901~1981)이죠. 그래서 구조주의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레비-스트로스는 전체 사상이 약간 단순구도에요. 물론 인류학적으로 위대한 사람이지만, 철학적으로 볼 적에는 단순 구도의 사상인데 비해서, 구조주의 사고의 깊이를 더하고 문을 열려면 라캉을 이해해야 되요.

근데 이 사람이 아주 만만치 않은 사람이어서 엄청 어려워요. 그래서 우리가 바둑으로 말하면 입단식이지. 태권도로 말하면, 하얀 띠 하다가 나중에 검은 띠로 바꾸잖아. 그래서 현대 사상의 문턱이 라캉이에요. 라캉을 넘어야지 현대 사상을 넘어갑니다. 라킁을 소화해야지 진짜 현대 사상으로 들어서는 거죠. 근데 이 문턱이 너무 높아요.

라캉을 넘어서야 그 다음부터 푸코, 데리다, 들뢰즈 막 나오는데, 이게 엄청난 작업이에요. 그래서 원수 같은 인간이 라캉이에요. 그래서 라캉을 읽지 않고서는 현대 철학으로 진입을 못 해요. 아주 어려운 사상이에요. 레비-스트로스, 인류학은 엄청 복잡하지. 그런데 사상적으로는 슬픈 열대 한 권만 읽고 아, 이 사람이 이런 사람이구나 하면 되는데, 라캉은 20권은 읽어야 되요.

그 다음 나온 사람이 루이 알튀세르죠. 알튀세르((Louis Pierre Althusser, 1918~1990) 란 사람은 막시즘을 구조주의적으로 재편한 사람이에요. 이 사람 역시 라캉과 더불어서 대단히 중요한 사람이죠. 알튀세르, 라캉, 푸코 는 아주 기본적인 사람들이에요. 그리고 라캉 같은 사람은 주로 정신분석학적으로 인간의 무의식을 탐구한 사람이고, 알튀세르나 푸코같은 사람은 역사, 정치를 탐구하죠. 훨씬 더 현실적이고 정치적인 사상을 펼친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