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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강 합리주의에 대해서

하나님아들 2020. 3. 31. 23:50

제7강 합리주의에 대해서

◆ 합리주의는 어떻게 이어지는가


▲ 꾸르노, 과학은 원리를 검토하고 현상의 원인과 이유를 묻는 것이다

‘수학자이자 경제학자이자 철학자이기도 한 꾸르노(Augustin Cournot, 1801-1877)는 실증주의와는 다른 인식론을 제시함으로써 인식론의 역사에 중요한 이정표를 새겼다. 꾸르노는 철학을 제과학의 종합으로 보는 콩트에 반대하고 철학을 제과학의 근본 원리에 대한 비판적 검토로 보았다.’

19세기 이후에 철학이란 담론의 역할에 대한 논의가 사람마다 달라요. 과거에는 그냥 순수학문이 다 철학이었죠. 플라톤이 수학도 하고, 물리학도 하고, 생물학도 하죠. 근데 19세기 되면 과학이 복잡하게 다 분화하니까 그게 아니죠. 그럼 철학이란 담론의 역할은 도대체 뭐냐.

사람마다 다 달라요. 철학은 비판이다, 종합이다, 실천이다, 인간실존이다 등 갈라지죠. 꾸르노는 철학은 과학을 다 종합하는 게 아니라 과학의 원리(principle)를 검토하고 크리티컬(critical)하게 비판하는 거라고 봤죠.

콩트, 베르나르나 마하 같은 사람이, 사물의 근저 현상 너머의 원인에 대한 탐구를 거부하죠? 그러면서 과학은 나타난 그대로의 현상을 그냥 ‘서술(describe)’하는 거라고 했죠. 근데 이 사람(꾸르노)이 그거를 반대하죠.

‘아니다! 과학은 그냥 우리에게 나타난 현상을 서술하는 게 아니라, 현상 너머의, 현상이 그렇게 나타나게 만든 원인을 밝혀나가는 것’이라고 하죠. 어찌 보면, 오히려 좀 더 전통으로 돌아가는 거지. 무슨 얘기냐 하면, 과학은 그저 나타난 현상을 있는 그대로 서술하는 게 아니라 그것의 원인과 이유를 묻는 것이다.


▲ 꾸르노의 세계를 이해하는 방법 - 우연과 필연의 동시긍정

‘꾸르노는 확률적 세계관의 수립자이기도 했다. 꾸르노는 근대 과학과 인식론이 전제하는 필연성이라는 조건을 비판하고, 과학적 인식은 늘 개연적이라고 보았다.‘ 이거 중요한 생각이죠! 옛날에는 철학이 그랬고, 형이상학이 그랬고, 근대에는 과학이 그랬고.

인간은 이 세계의 필연적 인과관계를 법칙성을 알 수 있다는 것을 대전제로 깔았지. 그게 20세기에 오면 무너져. 알 수 없다는 거예요. 단지 개연적(probable)으로만 알 수 있다는 거야. 그래서 수학에서 ’probability‘이 확률이 발전하죠.

그러면서 이 사람은 ‘ 결정론과 우연을 동시에 긍정했다.’ 철수는 배가 아팠어. 그랬기 때문에 병원에 가야겠어. 병원에 가려면 당연히 지하철을 타야 되었어. 거의 필연이지? 물론 버스 안 타고 지하철 타는 건 우연일 수 있지만 거의 필연입니다.

또 영희는 그날따라 연극이 보고 싶었어. 철수는 수서에 있는 어떤 병원에 가려고 3호선 혜화동 거쳐가는 지하철을 탔어. 영희도 필연, 철수도 필연이야. 철수는 배가 아파서 3호선 타고 병원에 간 거고, 영희는 연극 보려고 4호선 타고 혜화역에 갔죠.

이 두 사람은 필연이지만 필연 두 개가 충무로에서 만나면 우연이 되는 거예요. 충무로에서. 이 사람은 우주를 우주의 하나하나의 가닥은 필연이지만, 그 가닥들이 만날 때 우연이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연과 필연을 동시에 설명하려고 하죠.


▲ 푸앵카레 - 실재를 묘사하는 시스템은 하나가 아니다

그 다음 ‘푸앵카레(Henri)라는 사람이 나와서 이른바 ‘규약주의(conventionalisme)를 제시하는데, 푸앵카레는 당대의 주된 경향이었던 과학 만능주의를 비판하고 과학이 내포하는 규약적 성격을 강조했다’ 이건 인식론의 역사에서 엄청 중요한 하나의 분기점이에요.

과학에는 개념 체계가 있지? 생물학이라면 분자, 유전자, DNA, 뉴클리오티드, 염기 등등 이런 과학 시스템이 있단 말이야. 그러면 이 언어 시스템이 이 리얼리티 (일단 생명이라고 합시다)를 그대로 반영한다고 생각하잖아? 그걸 객관성(objectivity)이라고 하죠.

우리가 사용하는 개념체계, 시스템이 리얼리티(실재)를 그대로 보여주는 거다. 근데 푸앵카레는 이 리얼리티를 이런 시스템으로도 묘사할 수 있고, 저런 시스템으로도 묘사할 수도 있다고 보았죠. 실재는 하나지만(엄밀하게 말하면 단정할 수는 없고, 실제로 하나인지도 모르지), 이 실재를 묘사하는 시스템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는 거야.

이건 어찌 보면 서구 인식론에서 굉장히 중요한 분기점이야. 옛날엔 이렇게 안 봤거든. 설사 그런 언어 체계가 여러 개 있다 하더라도 그 중에 하나는 Truth고, 나머지는 전부다 False라고 보았죠. 푸앙카레는 그게 naive 한 생각이라고 하죠.


▲ 로지칼 심플리티(logical simplicity) - 시스템 내에서 우열은 어떻게 나누어 지는가

A 시스템으로 하든 B로 하든 C로 하든, 그거 자체로는 다 설명이 돼. 원자로 설명하든, 기로 설명하든, 에너지로 설명하든, 그 시스템 내에서는 다 설명이 되는 거야. 전부 다 그 안에서는 되는 거야. 그럼 우열은 어떻게 나누는가? 이 사람은 두 가지를 들었어요.

하나는 로지칼 심플리티(logical simplicity). 그 개념 체계가, 얼마나 우리가 경험하는 리얼리티를 logical하고 simple하게 설명하느냐의 문제에요. 또 하나는 유틸리티(utility)에요. 그 시스템을 가지고 봤더니 이러이러한 성과가 나오더라. 그러니까 그 시스템이 정말 이 객관적인 리얼리티하고 딱 맞는지 어쩐지는 우리가 몰라.

그런데 이 놈 가지고 했더니 비교적 예측이 잘 되고 유용한 결과가 나오더라. 그럼 그게 맞는 거야. 애초부터 맞는 건 없어. 이런 식으로 해서 고전적인 인식론을 완전히 무너뜨리지. 고전적인 인식론은 실재가 있고, 인간은 그걸 알 수 있고, 그걸 서술한 방법은 유일하게 하나가 있다고 하는데, 이런 식의 생각이 더 이상 통용되지 않죠.


▲ 논리 실증주의의 제창 - 19세기 사변철학에의 저항

그래서 20세기 전반에 비엔나에서 과학자들과학 철학자들 집단이 형성되는데, 이들을 비엔나 써클이라고 해요. ‘카르납, 슐릭크, 노이라트, 라이헨바하 등등 쟁쟁한 학자들이 모여 마하, 푸앵카레, 뒤엠 등의 인식론을 이어 ‘논리-실증주의(Logische Positivismus)’를 제창했다.‘

실증주의긴 실증주의인데, 당대 발전한 논리학을 무기로 다시 갖고 들어가는 실증주의죠. 이러한 논리 실증주의는 헤겔로 대변되는 19세기 사변철학에 저항하죠. 이건 약간 사회학적인 얘기가 되겠지만 당시의 과학철학자는 대부분 유태인들이에요. 유태인들은 유럽 사회에서 출세 코스가 막혀있어요.

마치 남한 사회에서 북한 출신들이 출세할 코스가 없는 것과 같죠. 그러니까 정관계에는 들어가지를 못 해요. 옛날엔 전라도 사람들이 그랬지. 많이 올라가봐야 5, 6급으로 가면 끝이에요. 그러니까, 평양 사람이나 전라도 사람, 유태인들이 진출하는 게 딱 두 가지에요. 하나는 장사, 또 하나는 문화계.

그러니까 장사하지 않으면 문화계로 가니까 과학자들이 조사해 보면 전부 유태인이야. 그래서 노벨상 수상자의 몇 프로라더라? 전부 유태인이에요. 왜냐하면 그 수밖에 없으니까. 근데 이 사람들이 말하자면 실증주의를 강하게 주장한 것도 사실은 독일의 귀족들, 전통주의, 헤겔을 겨냥해서 무너뜨리려고 만든 거예요. 굉장히 강조하죠.

그런데 1933년에 나치가 집권하니까 미국, 영국으로 다 흩어지죠. 그러면서 역설적으로 미국이 과학 철학의 본산이 되요. 미국이 참 운이 좋은 나라지. 예술도 그렇죠? 20세기 전반 전부 프랑스 파리에서 대가들이 있었는데, 미술계의 주류가 다 유태인들이거든.

근데 히틀러가 나오니까 전부 미국으로 도망가죠. 그러니까 역설적으로 미국에서 미술이, 뉴욕에서 꽃이 확 피는 거죠. 추상 표현주의가 그래서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서 미술의 중심지가 파리에서 미국 뉴욕으로 건너가지. 과학도 똑같아요. 그러니까 말하자면 히틀러가 미국에게 대단한 공을 한 거지.


▲ 19세기부터 20세기의 과학철학 - 실증주의로부터 합리주의

19세기 과학철학으로부터 20세기 과학철학으로의 전환은 실증주의로부터 합리주의에요. 그러니까 과학철학의 변화가 크게 3단계인데, 19세기는 실증주의, 20세기 전반은 합리주의, 후반이 되면 과학을 순수하게 안 보는 경향이 주류를 이뤄요.

과학도 전부 사회의 영향을 받고, 문화적 컨텍스트(context)의 영향을 받고, 정치 권력과 밀접하게 관련된다는 이야기가 20세기 후반에 주종을 이루죠. 어찌보면 19세기 말, 20세기 초, 20세기 전반이 과학 문화의 전성기에요. 과학의 내용(상대성 이론, 양자 역학 등등)도 전성기고 과학 철학도 나란히 제일 번성했던 시대에요.

실증주의는 기본적으로 과학이란 사물의 원인, 이유, 본질 등을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즉 과학은 설명(explain)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서술(describe)하는 것이다. 그러나 합리주의는 과학은 현상을 넘어서 단순한 현상 관찰로는 얻을 수 없는 심층적인 지식을 얻는 행위라고 본다. 때문에 실증주의에서 형이상학과 과학은 완전히 반대되는 입장에 놓이지만, 합리주의에서는 정도 차이의 문제에 놓인다.‘

사실은 모든 과학이 처음에는 전부 형이상학이지. 그러다가 정교하게 관찰이 늘어나고 수학적으로 증명되고 이러면 과학이 되는 거지.’ 보다 과감하고 총체적인 과학이 형이상학이고 보다 세밀하고 구체적인 형이상학이 과학인 것이다.‘


▲ 현대의 비판적 합리주의(critical rationalism) - 과학의 한계를 넘어서

‘’ 이 대목을 잘 보아 두세요. Critical Rationalism 이죠. 그러니까 현대의 합리주의라 해서, 그게 플라토닉한 합리주의라든가, 데카르트의 합리주의로 돌아가는 건 아니죠. 그럼 이 때, 크리티칼‘의 그러나 현대의 합리주의는 비판적 합리주의(critical rationalism)다.의미는 19세기적인 비합리적주의를 거친, 더 좁혀 말하면 베르그송을 거친 합리주의에요.

베르그송의 ontology가 뭐죠? 우주를 지배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시간이다. 세계는 끝없는 생성이고 우리가 아무리 언어로 포착하려 해도 온전한 포착은 절대 불가하다는 것이 베르그송이즘 이지. 과학도 그건 일단 인정하고 들어가는 거지. 우리 언어로, 수학으로 아무리 이 세계를 포착하려 해도 이 세계는 무궁무진한 질적 풍요로움이다.

그런데, 베르그송처럼 이성의 한계를 지적하고 과학의 한계를 지적하는 데에 포인트가 있는 게 아니라, 과학이 한계를 지님에도 불구하고 과학은 끝없이 새로운 언어 체계(패러다임)를 만들어서(비유한다면 그물의 그물코를 점점 꼼꼼하게 만들어서) 어쨌든 세상을 심층적으로 파고드는 데 포인트를 두는 거죠.

베르그송의 온톨로지를 깔고 들어가지만, 그래서 과학은 한계가 있다는 데에 무게 중심을 두는 게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은 점점 더 새로운 수학적 언어를 개발하고, 새로운 기술적 장치를 개발함으로써, 세계 심층에 다가간다는 게 크리티컬 래셔널리즘이에요. 이게 아마 지금도 과학에 대한 가장 설득력 있는 과학철학이죠.

옛날처럼 과학이 세계를 다 비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지. 그러나 인간은 자기가 사물을 보는 개념체계를 만들어서 실험해보고, 사물을 제작할 적에 도구의 힘을 빌리잖아. 광압기, 분광기 등등으로 기술을 개발해서 세계를 새롭게 보는 거지. 내부를 보고. 또 수학이 발전하잖아. 집합론, 텐서 등등 그걸로 포착해서 점점 더 세상을 정교하게 파악하는 거죠.

지금도 과학철학의 논쟁은 이런 거예요. 과학은 결국 인간이 그냥 자기가 만든 틀(패러다임)을 이 세계에 투사하는 거냐? 아니면, 과학이 리얼리티를 옛날 생각하듯이 포착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어쨌든 과학은 점점 리얼리티에 objective하게 접근한다. 지금도 이 두 입장이 갈등을 일으키고 있죠.

이게 과학만의 문제는 아니지. 인간이란 존재가 정말 이 세계를 objective하게 알 수 있냐 없냐 하는 건 엄청 중요한 문제거든. 만약에 알 수 없다고 한다면, 모든 걸 우리가 어떤 언어체계를 쓰냐의 문제일 뿐이지. 있다면 그게 모든 문화의 근거가 되어야 되는 거지. 엄청 중요한 거죠.

현대의 합리주의는 고전적 합리주의처럼 세계의 본질에 대한 단적인 접근을 뜻하기보다, 과학적 절차를 통해서 실재의 본성에 점점 더 가까지 다가선다는 것을 뜻한다. 비판적 합리주의의 대표 주자들 중 한 사람인 브렁슈비크는 “고전적인 철학자들이 모두 플라톤의 제자라면, 우리 모두는 베르그송의 제자다”라는 말을 했다. 생성과 지속, 창조, 그리고 우주의 절대적인 질적 풍요로움, 양화(量化)와 공간화의 한계 등등에 대한 베르그송의 비판은 오늘날의 철학에 거의 무의식적으로 스며들어 있다. 현대의 합리주의는 이미 니체-베르그송을 거친 합리주의인 것이다.


▲ 꾸르노의 계승자 메이에르송(Emile Meyerson)

메이에르송(Emile Meyerson)은 19세기의 앙투안느 꾸르노를 이어서 새로운 형태의 합리주의를 건설하고자 했다.‘ 그러니까 메이에르송은, 베르그송에 의한 온톨로지를 전제하되, 그 위에서 합리주의를 얘기한 사람이에요. ‘메이에르송은 과학사를 존중했지만 잡다한 과학사적 사실의 수집은 곤란하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그는 ‘역사적 아프리오리’라는 개념을 창안했는데, 이는 과학들에 있어 아프리오리한 면을 찾되 어디까지나 과학사에 대한 경험적인 탐구에 입각해야 한다고 보았다. 후에 푸코에게서 이 말이 다시 등장한죠.

메이에르송은 과학은 결코 사실들의 단순한 서술이 아니라 존재론적 의미를 띤다고 생각했다. 즉, 과학은 법칙성과 더불어 인과성을 추구하는 것이다(푸앵카레와 비교). 과학의 목적인 단지 예측과 유용성에 있는 것은 아니다. 과학은 이 세계를 진정한 의미에서 이해하려 하는 행위이다. 열, 전자, 파동 등과 같은 개념들은 모두 이러한 열정의 소산들이다. 이해한다는 것은 합리화한다는 것(rationalisation)을 뜻한다.‘

동일화(identify). 이 세계가 베르그송처럼 끝없는 차이의 생성이라고 한다면, 과학은 그 차이의 생성의 와중에서 나타난 동일성(identify)을 잡아내는 것(identify)이다. 즉 현상적 잡다성을 넘어 실재의 간명함을 읽어내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염산(HCl)과 수산화나트륨(NaOH)을 합치면 소금(NaCl)과 물(H2O)이 나오는데, 이 등식을 유심히 보면, 좌변과 우변이 사실 똑같지? H가 두 개, Na 하나, Cl 하나, O 하나. 그러니까 염산에 수산화나트륨(양잿물), 소금이 나오거든요.

그니까 현상은 다르지. 염산 하얀 거, 양잿물, 소금은 색깔, 냄새, 맛이 모두 다르죠. 이렇게 현상은 다르지. 하지만 에센스는 똑같다. 이런 것을 포착하는 게 과학이다.

‘그러나 실재는 베르그송의 말처럼 절대적인 풍요로움이요, 창조와 지속의 장이다. 때문에 과학적 이상은 그 끝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러나 과학의 발달은 이전에 합리화하지 못했던 측면들을 조금씩 합리성에 용해해 넣는다. 만일 이런 작업이 끝난다면 우리는 파르메니데스의 일자를 재발견할 것이다. 그러나 과학이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 오히려 과학적 작업의 조건이다. 과학을 비켜가는 무한한 질적 풍요로움이 오히려 과학적 합리화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 합리주의는 어떤 식으로 기능하게 되는가


▲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 - 가장 영롱한 시간은 수직으로 솟아오르는 시간

이처럼, 이 세계의 질적 풍요로움, 시간의 절대성, 차이의 생성, 언어로 포착되지 않는 연속성 등을 인정하면서도, 과학은 그 가운데에서 아이덴티티를 잡아내는 것이라는 게 합리주의에요. ‘이런 흐름을 가장 높은 경지로 끌어올린 사람이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 다.’

바슐라르는 아까 우리가 니체, 베르그송, 후설, 메를로-퐁티, 사르트르, 하이데거 같은 사람들에 버금가는 아주 중요한 사람이죠. ‘베르그송의 연속의 존재론에 맞서 순간의 존재를 제시했다.’ 그러니까 베르그송의 ‘시간’은 물처럼 흘러가는 시간이야. 공지천 이야기했죠? 그런데 (시간을) 끊는 거는 인위적으로, 억지로만 자를 수 있는 거죠? 절대로 시간은 그 자체로는 끊을 수 없는 거죠.

거기에 비해서 바슐라르의 시간은 수직으로 솟아오르는 시간이에요. 시간에서의 순간을 중시하죠. 베르그송의 시간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시간이에요. ‘시간은 특정한 순간들이 마치 촛불처럼 수직으로 솟아오른다. 예컨대 시는 순간의 형이상학이다.

그러니까, 베르그송에 어울리는 문학은 전에 이야기했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지. 근데 바슐라르는 꼭 흘러가는 시간만이 시간의 본성이 아니라, 정말 중요하고 의미 있는 시간은 흘러가는 시간이 아니라 수직으로 솟아오르는 시간이라고 했어요. 옛날에 적당한 시가 하나 있어요. 개벽인가? 모든 사람이 숨을 죽이고 탁 멈추는 시가 있는데, 그게 바슐라르적인 시간이죠.

‘베르그송은 과학을 추상화와 연관시키며’. 과학은 추상화(abstraction)의 작용이고, 추상화는 세계의 질적 풍요를 절대로 완전하게 포착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면, 바슐라르는 (강의록좀 아래에서) 과학은 인식론적 단절을 본질로 한다고 주장한다.‘

이게 뭐냐면, 베르그송의 경우는 물처럼 흐르는 시간, 또 물처럼 섬세하게 흐르는 그 시간에 대한 지각이 주안점이거든요. 그런데 과학은 흐르는 시간을 자르고, 평균화하고, 등질화하고, 동일화하는 거죠. 그러니까 베르그송이 볼 적에 실재는 아주 연속적 흐름이고, 두 번째는 질적 풍요로움, 세 번째는 차이의 생성이죠.


▲ 인식론적 단절 - 이미지를 뛰어넘어 수학의 세계로

근데 과학은 연속적인 거를 딱딱 끊어서 분석하고, 질적 풍요로움을 양으로 다 바꿔 버리지요. 그 다음에 차이를 전부 identity로 환원하지요. 그렇기 때문에 베르그송이 볼 적에는 구불구불한 풍요로움을, 과학이 직선으로 abstract 하는 거지.

그런데 바슐라르가 볼 적에, 베르그송의 생각은 피상적인 생각이고, 과학은 구불구불한 것을 직선으로 abstract 하는 게 아니라 구불구불한 것을 넘어선 데에서, 보다 근본적인 리얼리티를 발견할 수 있다는 거예요.

구불구불한 건 뭐에요? 우리가 지각(perception) 하는 거죠? 그런데 진짜 과학이 설명하는 거는, 지각의 레벨을 넘어가야 돼. 이걸 인식론적 단절 이라고 해요. 그러니까 굉장히 플라토니즘적이지.

물론 실험이라든가 관찰 등을 통해서 감각과 대화하는 현대의 플라토니즘이지. 건너 뛰어버리는 플라토니즘이 아니고요. 이 차이를 알겠어요? 어찌 보면 이게 현대 과학을 바라보는 결정적인 차이점이자 틀이에요. 음미해 보세요.

베르그송이 볼 적에는 우리가 지각하는 이 세계는 연속적인 흐름이고, 질적으로 풍요롭죠. 색깔, 맛처럼 말이에요. 그 다음 끝없는 창조, 차이가 발생하죠? 근데 과학은 이걸 딱딱 끊어서 불연속으로 만들고, 숫자로 표현해서 양화하고, 그 다음 전부 identity로 포착해서 차이는 다 빼 버리고, 그러니까 과학은 풍요로운 현실을 직선으로 만들어 버리는 abstract 라는 게 베르그송의 생각이에요. 베르그송, 후설, 하이데거, 메를로-퐁티, 이 계열은 전부 그렇게 생각해요.

근데 바슐라르는 반대에요. 아니다! 이건(현실은) 그냥 아무 의미도 없는 흐리멍텅한 세계고, 바슐라르로 말하면 이미지의 세계고, 진짜(학문적, 과학적) 인식은, 이미지들을 뛰어넘어서(불연속적으로) concept의 세계, 수학의 세계로 가는 거죠. 이렇게 대조적이 되는 거예요.

좀 알기 쉽게 비유하면 베르그송이 인상파라면, 이런 세계는 몬드리안 같은 세계지. 아니면 성격이 좀 다르긴 하지만 종교적으로 말하면 버넨 위만이나 로드코 같은 사람이죠. 그래서 베르그송과 바슐라르를 비교하는 것, 이게 사실 젊은 날의 화두였어요. 20대에 제일 많이 고민했던 게 이 두 사람을 비교하는 거였어요. 얘기하다 생각났는데. 어떨 땐 이게 맞는 것 같고 어떨 땐 저게 맞는 것 같고 그렇죠.


▲ 뒤의 이론은 앞의 이론을 ‘포섭’한다

또 중요한 게 뭐냐면. 바슐라르는 우리가 정말 세계의 리얼리티(진상)를 발견하려면, 지각의 세계, 이미지의 세계, 실질의 세계를 완전히 건너뛰어야 된다는 거죠. 근데 벗어나는 방법 자체도 한 번만 딱 건너뛰는 게 아니라 새로운 건너뜀이 되는 거지.

예를 들어서, 갈릴레오, 뉴턴은 한 번 탁 뛴 거지. 그러나 한 번 뛰고 마는 게 아니고 아인슈타인 같은 사람은 뉴턴에서 또 한 번 뛴 거지. 그러니까 인식론적 단절은 유일하게 한 번 일어나는 게 아니에요. 과학의 역사에서 한 번씩 일어나는 거지. 그러니까 과학은 죽- 발전하는 게 아니에요. 한참 가다가 한 번 뛸 때마다 완전히 다른 차원, 다른 패러다임으로 가는 거예요.



그러면 ‘과학은 완전히 단절인가?’ 이런 문제가 생기죠. 그러니까 패러다임(틀)이 바뀌어 버리면 옛날 틀은 날아가고, 세상을 새롭게 보고 이런 식이냐? 그러면 과학에는 발전이란 게 없겠지. 그냥 뉴턴 패러다임은 이렇게 보는 거고, 아인슈터인은 저렇게 보는 거죠.

그러나 바슐라르는 두 가지를 함께 이야기해요. ‘맞다. 틀이 바뀌면 단절된다.’ 뉴턴이 생각하는 시공간하고, 아인슈타인이 생각하는 시공간하고 완전히 다른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속되는 면도 있다. 발전되는 면도 있다. 어떤 면이냐? 수학적인 면은 발전한다고 보죠.

그러니까 수학적으로 보면, ‘뒤의 이론이 앞의 이론을 포괄한다’ 또는 ‘포섭한다’는 거지. 예컨대 기하학 같은 경우에는 옛날에는 유클리드 기하학만 있었죠. 그리고 리만 기하학이 발달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봤더니, 리만 기하학 중에서 곡률(공간 자체의 휘어진 정도)이 0인 경우가 유클리드 기하학이더라.

또 열역학이 있다가 통계학이 발달해 보니까, 분자수가 무한히 많아지면 이게(통계학) 나오는 거야. 또, 뉴턴의 속도 구하는 공식이 있고, 아인슈타인 공식이 있어요. 그런데 나중에 계산해 봤더니, 아인슈타인의 공식 중에서 운동체의 속도가 아주 느린 경우를 계산했더니 바로 뉴턴 공식이 나오더란 거예요. 이 얘기는 뭡니까?

옛날 이론이 이야기했던 게 알고 보니, 뒤에 나온 이론의 여러 경우 중 하나이더라. 리만 기하학에 무수한 곡률이 있는데, 그 중 0인 경우를 해 봤더니 그게 유클리드 기하학이더라. 다른 말로 하면, 유 기하학은 리만 기하학의 한 경우(case)더라. 이건 뭐 누가 봐도 맞잖아요? 이런 관계를 바슐라르는 뒤의 이론이 앞의 이론을 포섭‘한다고 했죠.

좀 더 알기 쉬운 예로 하면, 맑스 같은 경우는 이전의 철학에서 전혀 포착되지 않았던 ’프롤레타리아’라는 개념을 제시하죠. 근데 현대철학자 미셀 푸코는 ‘타자’ 개념을 말해요. 타자가 아이, 노인, 여성, 병자, 광인 등등 여럿 있을 수 있죠. 이렇게 해 놓고 보니까 아, 맑스가 말한 프롤레타리아는 푸코가 말한 타자들 중의 하나인 거지. 포섭되는 거지. 물론 푸코가 맑스를 온전히 포섭하지 않지.

푸코에게는 맑스에게 있는 경제 개념이 없기 때문에 온전하게 비교할 수는 없지만, 타자의 개념만 놓고 볼 땐 그렇게 이해할 수 있죠. 이럴 때 ‘과학이 발달했다’는 말을 할 수 있단 거예요. 그럴 때 포섭(envelopper)한다. 그러나 개념 (체계)자체는, 패러다임이 달라지면 체계도 달라진다.


▲ 인식론적 단절을 이루지 못하게 하는 쟁애물 - 인식론적 장애물

근데 이 사람 재밌는 얘기를 해요. 인식론적으로 단절을 이루어야 우리가 참된 인식에 도달할 수 있다는 얘기를 거꾸로 하면,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인식론적 단절을 이루지 못하게 만드는 요인들이 뭐냐는 거예요. 예컨대, 인간의 소통은 어떠해야 하느냐? 인간이 서로 소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어볼 수 있죠?

그러니까 하버마스 같은 사람은 재미가 없지. 정직해야 한다, 어째야 한다고 얘기하죠. 근대 그걸 반대로 물어볼 수 있죠. 왜 안 될까를 밝혀줘야죠. 그걸 바슐라르는 이걸 반대로, 거꾸로 소통이 안 되는 이유가 뭐냐고 거꾸로 물어볼 수 있지. 어찌 보면 뒤의 물음이 해결되어야 앞의 물음에 사실(엄밀히 말해서) 대답을 할 수 있죠. 그러니까 하버마스 같은 사람은 재미가 없지.

왜 재미가 없어? 우리가 소통을 잘 하려면 이런 이상적인 대화 상황이 있어야 하고, 서로 정직해야 하고, 진리를 따라야 하고. 그게 어려운 게 아니죠. 누구나 할 수 있는 거지. 근데 사람과 사람이 왜 소통이 왜 안 될까를 밝혀야죠. 그게 중요한 거예요. 그걸 바슐라르는 인식론적 장애물들이라고 해요.

여기에는 ‘선입견, 감정, 개인적 호오(好惡), 국적에 따른 편견 등등은 기본적인 것들은 물론이고, 예컨대 같은 단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같은 내용을 생각하는 것, 하나의 말이 있으면 으레 그 말에 해당하는 실체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 평소에 가지고 있던 이미지를 과학적 사유에 투영하는 것 등등 많은 인식론적 장애물들이 있다.’


▲ 바슐라르의 ‘상상력’

또 하나 흥미로운 건, 과거의 과학에서 직관, 상상력은 부정적인 거였죠. 과학을 하려면, 합리적인 사유를 하려면, 객관적인 사유를 하려면, 직관이나 상상력은 거부해야 되요. (상상력은) 위험한 거였죠. 근데 바슐라르는 아니다! 현대 과학은, 그냥 우리가 보고 들을 수 있는 현상세계를 얘기하는 게 아니라, 우리 지각은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세계를 연구한다는 거예요. 양자역학 같은 거죠.

때문에 옛날 과학자들은 사물을 잘 보고, 세심하게 얘기해야지, 함부로 상상력을 도입하면 안 되는 거였죠. imagination은 아주 나쁜 거예요. 근데 바슐라르는 현대 과학은 반대다! 상상이 풍부해야 한다는 거예요. 당대에는 확인 안 되는 세계를 상상하는 능력이 중요하다는 거예요.

직관. 탁 간파해 내는 거예요. 옛날엔 과학한다는 사람이 직관이라고 하면 학회에서 제명당하죠. 아니, 과학을 하는 사람이 직관? 깨달았어? 빨리 나가라고 하죠. 그런 말 했다가는 완전히 매장당하죠. 근데 바슐라르는 현대 과학은 아니라는 거예요. 현대 과학이 다루는 세계는 보이는 세계가 아니야. 그러니까 참 묘하죠.

왜냐하면, 직관과 상상력은 옛날에는 과학에서는 금기지만 예술에선 중요한 거 아냐? 바슐라르는 과학에서 직관과 상상력이 중요한 거라고 하니까 참 재밌죠. 그래서 바슐라르의 사유는 상상력(imagination)의 이론이야. 이 imagination 으로 과학과 예술이 함께 묶여요. 이 사람에 의해서.

단, 과학적 상상력은 formal 한 수학적·형식적 상상력이고, 예술적 상상력은 물질적(material) 상상력이에요. 예컨대, 물을 안 보고 그린다. 이때 필요한 것은 수학적 공간적 상상력이 아니죠. 미술에서 촉지적(haptic) 상상력 있죠? 이게 물질적 상상력이야. 물질적 상상력을 잘 보여주는 화가가 터너죠. 불을 잘 그렸어요. 또 한국의 시인 중에 김광균이 바슐라르가 말하는 물질적 상상력이 발달한 사람이죠.


▲ 부정명제만이 과학적 추론을 확증할 수 있다

이외에도 여러 가지 많은데, 또 하나만 더 이야기한다면, 과학은 절대지식에 도달할 수 없다고 보죠. 세계란 ‘궁극적으로 -이다’라고는 최종적으로 얘기할 수 없다는 거예요. 단, ‘-는 아니다’ 라고는 일단 얘기할 수 있다는 거죠.

이 세계에 대한 어떤 가설이, 맞다, 진리라고 얘기할 수 없다. 그렇지만 ‘그건 일단 아냐, 틀렸어’ 라곤 얘기할 수 있단 거지. 그래서 이 사람 책 중 하나가 『La philosophie de non (philosophy of no)』이죠. 논리학적으로 보면 증명되는데요.

보세요. ‘모든 인간은 척추동물이다. 근데 나는 척추동물이다. 그러므로 나는 인간이다.’ 얼핏보면 맞는 것 같지. 벤다이어그램으로 그려보면 알지. 밑에 꺼 가지고 봅시다. ‘모든 인간은 척추동물이다. 뽀삐는 척추동물이다. 그러므로 뽀삐는 인간이다.‘ 벤다이어그램 봅시다.


이건 틀린 논증인데, 이것과 똑같은 형식의 논증이 위의 논증이죠. 그러니까 얼핏 보면 꼭 맞는 것 같지. 하지만 틀린 논증이에요. 논리학이라는 건 형식과학이에요. 형식만 문제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소크라테스는 곰이다. 곰은 죽는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는 논리학적으로 맞는 거예요.

논리학에서는 소크라테스하고 곰하고 같은지는 문제가 아니에요. 관계없는 거예요. 소크라테스가 곰이다? 물론 틀리지. 근데 그건 내가 눈으로 확인하는 문제이고, 논리학은 추론의 형식이 맞냐 틀리냐를 보는 거예요. 소크라테스가 곰이란 건 물론 틀린 명제죠. 근데 그건 논리학에서는 문제가 안돼요.

그 추론의 형식을 문제 삼는 거죠. 그러니까 맨 위의 거 보면 내용상으론 맞지. 의아하죠? 근데 이 내용의 논증형식은 아래의 논증형식이거든. 그러니까 위의 논증형식이 틀렸다는 건, 아래 걸 보면 확실하지. 알겠어요? 첫 번째 삼단논법이 두 번째 삼단논법과 똑같은 형식인데, 이 추론은 논리학적으로는 옳아요. 그 다음에 ’소전제가 부정일 경우에는 이게 올바른 추리‘가 됩니다.

그림으로 보면 모든 인간은 척추동물이죠? 꿀벌은 아예 척추 동물이 아니죠? 그러니까 꿀벌은 인간이 아니죠? 이건 맞는 논리죠. 이 얘길 왜 하냐면, 과학자들이 자기의 이론을 논리적으로 전개하다 보면, 등장하는 로지칼 폼(logical form)이 이거에요.

과학자들이 자기의 이론의 결과를 로지컬하게 추론하면, 등장하는 그 폼 중의 하나가 이런 폼이에요. 그런데 ‘-이다‘라는 추리는 오류 추리가 나와. 근데 ‘-가 아니다‘라는 건 오류 추리가 아니라 맞는 추리에요. 그 때문에 이렇게 부정의 형식으로 된 것만이, 일단 오류 추리가 아닌 것이 되는 거죠.

그러니까 ’-가 일단 그건 아니다‘가 과학적 추론이라는 거예요. 지금 맞다고 생각하는 이론도 (포퍼 식으로 말하면) 아직까지 반증이 안 된 거죠. 그게 맞다고 얘긴 못 해. 그게 맞는 게 아니라 아직 아닌(틀린) 건 아닌 거지.

’그건 -이다‘라고 얘기할 수 없어. 단지 뭐라고 얘기할 수 있냐? 아직 아닌(틀린) 거는 아니다. 아닌 건 아직 아니다. 이렇게 밖에 얘기할 수 없다. 이 세계에 대해서. 칼 포퍼도 똑같은 이야긴데 좀 다르게 하죠. ’검증할 수 없다. 단지 반증할 수 있다‘고 했어요.


▲ 바슐라르의 일화와 그의 저서들

바슐라르는 화학자인데, 박사 학위를 화학으로 받은 사람인데, 결혼해서 2년 만에 아내가 아기를 낳다가 죽어요. 홀로 딸을 키우면서 사는데, 딸이 수잔나 바슐라르지. 그 사람도 나중에 철학자가 되죠. 우리나라에도 한 번 왔어요. 이 사람 사진을 보면 실험실에서 실험을 하면 딸이 와서 아버지하고 같이 살아. 자기도 실험하고.

근데 어는 날 제자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선생님 플라스크에는 미생물이 살고 있지 않는 것 같다’고 얘기했어요. 무슨 얘기냐면 당신의 합리주의 체계는 너무 투명(clear) 해서 어떤 불순물도 미생물도 살 여지가 없다'는 말을 하는데, 듣는 순간 바슐라르가 ‘아차’한 거예요.

바슐라르는 이 세계(현실)를 넘어서 합리주의를 이야기했는데, 너무나 클리어한 플라토닉한 세계만 이야기했구나. 이 세계(현실)도 이야기 해야겠다‘ 싶은 거예요. 재밌는 게, 이 세계는 리얼리티처럼 객관적 진리로서 이야기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미학으로만 이야기할 수 있다고 해요. 이미지의 세계, 지각의 세계죠.

그래서 쓴 책이 예컨대 『물과 꿈』, 『불의 정신』, 『대지와 의지의 몽상』 같은 거죠. 잠 안 올 때 읽으면 정말 재밌어요. 내 이불 베개 위에 바슐라르 책이 쌓여 있는데, 잠이 안 오면 읽어요. 물과 꿈. 대지와 의지의 몽상 같은 거 읽으면 너무너무 재밌고 기가 막혀요. 꼭 읽어 보세요. 또 뭐 있더라.

『공기와 꿈』, 『공간의 시학』, 『꿈꿀 권리』(미술에 대한 책, 모네에 대한 책이죠), 『촛불의 미학』, 『풍경』, 『물과 꿈』 이런 것들. 잠잘려 하는데 왠지 심란하고 귀신이 보이고 이럴 때 바슐라르를 읽으면 기가 막혀요. 잠이 사르르 오는 게 정말 재밌지.

근데 내가 바슐라르에 대한 불만이 뭐냐면 나무에 대한 게 없어요. 나무의 꿈이 없어. 내가 나무의 꿈 쓰려고 해요. 그 다음에 쓸 거 많죠. 나무의 꿈도 있고, 풀잎의 노래, 흙은 있나? 흙은 있네. 여러분도 한 번 써 보세요. 나무에 대해서.


▲ 바슐라르 이후의 과학철학

포퍼와 바슐라르 이후에 과학이란 무엇인가를 비롯한 일반적인 물음들은 어느 정도 일단락된다. 일반적인 물음, 예컨대 과학은 뭐냐? 과학 탐구의 방법은 뭐냐? 같은 건 흥미로운 문제가 아니고 어느 정도 일반적인 생각들로 정리가 되었지. 요즘에는 예컨대 19세기 물리학이 어떻게 탄생했느냐 같은 거가 관심사이죠.

그래서 깡길렘(George Canguilhem), 다고녜(Francois Dagognet), 토마스 쿤(Thomas Kuhn), 미셸 세르(Michel Serres) 등이 나와서 여러 가지 새로운 방식의 과학 철학을 하는데, 아까 얘기했지만 전반적인 흐름이 과학의 모습은 순수한 논리라든가 철학적 근거보다는, 역사적 배경, 사회적인 맥락, 정치적인 권력처럼, 지금은 과학을 바라보는 눈이 그런 식으로 바뀌었어요. 순수 과학 내적인 로직을 연구한다기보다는 외적인 요소들에 대해서 요즘엔 얘기를 많이 하는 경향이 있어요.

 


제7강 합리주의에 대해서
 

◆ 합리주의는 어떻게 이어지는가


▲ 꾸르노, 과학은 원리를 검토하고 현상의 원인과 이유를 묻는 것이다

‘수학자이자 경제학자이자 철학자이기도 한 꾸르노(Augustin Cournot, 1801-1877)는 실증주의와는 다른 인식론을 제시함으로써 인식론의 역사에 중요한 이정표를 새겼다. 꾸르노는 철학을 제과학의 종합으로 보는 콩트에 반대하고 철학을 제과학의 근본 원리에 대한 비판적 검토로 보았다.’

19세기 이후에 철학이란 담론의 역할에 대한 논의가 사람마다 달라요. 과거에는 그냥 순수학문이 다 철학이었죠. 플라톤이 수학도 하고, 물리학도 하고, 생물학도 하죠. 근데 19세기 되면 과학이 복잡하게 다 분화하니까 그게 아니죠. 그럼 철학이란 담론의 역할은 도대체 뭐냐.

사람마다 다 달라요. 철학은 비판이다, 종합이다, 실천이다, 인간실존이다 등 갈라지죠. 꾸르노는 철학은 과학을 다 종합하는 게 아니라 과학의 원리(principle)를 검토하고 크리티컬(critical)하게 비판하는 거라고 봤죠.

콩트, 베르나르나 마하 같은 사람이, 사물의 근저 현상 너머의 원인에 대한 탐구를 거부하죠? 그러면서 과학은 나타난 그대로의 현상을 그냥 ‘서술(describe)’하는 거라고 했죠. 근데 이 사람(꾸르노)이 그거를 반대하죠.

‘아니다! 과학은 그냥 우리에게 나타난 현상을 서술하는 게 아니라, 현상 너머의, 현상이 그렇게 나타나게 만든 원인을 밝혀나가는 것’이라고 하죠. 어찌 보면, 오히려 좀 더 전통으로 돌아가는 거지. 무슨 얘기냐 하면, 과학은 그저 나타난 현상을 있는 그대로 서술하는 게 아니라 그것의 원인과 이유를 묻는 것이다.


▲ 꾸르노의 세계를 이해하는 방법 - 우연과 필연의 동시긍정

‘꾸르노는 확률적 세계관의 수립자이기도 했다. 꾸르노는 근대 과학과 인식론이 전제하는 필연성이라는 조건을 비판하고, 과학적 인식은 늘 개연적이라고 보았다.‘ 이거 중요한 생각이죠! 옛날에는 철학이 그랬고, 형이상학이 그랬고, 근대에는 과학이 그랬고.

인간은 이 세계의 필연적 인과관계를 법칙성을 알 수 있다는 것을 대전제로 깔았지. 그게 20세기에 오면 무너져. 알 수 없다는 거예요. 단지 개연적(probable)으로만 알 수 있다는 거야. 그래서 수학에서 ’probability‘이 확률이 발전하죠.

그러면서 이 사람은 ‘ 결정론과 우연을 동시에 긍정했다.’ 철수는 배가 아팠어. 그랬기 때문에 병원에 가야겠어. 병원에 가려면 당연히 지하철을 타야 되었어. 거의 필연이지? 물론 버스 안 타고 지하철 타는 건 우연일 수 있지만 거의 필연입니다.

또 영희는 그날따라 연극이 보고 싶었어. 철수는 수서에 있는 어떤 병원에 가려고 3호선 혜화동 거쳐가는 지하철을 탔어. 영희도 필연, 철수도 필연이야. 철수는 배가 아파서 3호선 타고 병원에 간 거고, 영희는 연극 보려고 4호선 타고 혜화역에 갔죠.

이 두 사람은 필연이지만 필연 두 개가 충무로에서 만나면 우연이 되는 거예요. 충무로에서. 이 사람은 우주를 우주의 하나하나의 가닥은 필연이지만, 그 가닥들이 만날 때 우연이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연과 필연을 동시에 설명하려고 하죠.


▲ 푸앵카레 - 실재를 묘사하는 시스템은 하나가 아니다

그 다음 ‘푸앵카레(Henri)라는 사람이 나와서 이른바 ‘규약주의(conventionalisme)를 제시하는데, 푸앵카레는 당대의 주된 경향이었던 과학 만능주의를 비판하고 과학이 내포하는 규약적 성격을 강조했다’ 이건 인식론의 역사에서 엄청 중요한 하나의 분기점이에요.

과학에는 개념 체계가 있지? 생물학이라면 분자, 유전자, DNA, 뉴클리오티드, 염기 등등 이런 과학 시스템이 있단 말이야. 그러면 이 언어 시스템이 이 리얼리티 (일단 생명이라고 합시다)를 그대로 반영한다고 생각하잖아? 그걸 객관성(objectivity)이라고 하죠.

우리가 사용하는 개념체계, 시스템이 리얼리티(실재)를 그대로 보여주는 거다. 근데 푸앵카레는 이 리얼리티를 이런 시스템으로도 묘사할 수 있고, 저런 시스템으로도 묘사할 수도 있다고 보았죠. 실재는 하나지만(엄밀하게 말하면 단정할 수는 없고, 실제로 하나인지도 모르지), 이 실재를 묘사하는 시스템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는 거야.

이건 어찌 보면 서구 인식론에서 굉장히 중요한 분기점이야. 옛날엔 이렇게 안 봤거든. 설사 그런 언어 체계가 여러 개 있다 하더라도 그 중에 하나는 Truth고, 나머지는 전부다 False라고 보았죠. 푸앙카레는 그게 naive 한 생각이라고 하죠.


▲ 로지칼 심플리티(logical simplicity) - 시스템 내에서 우열은 어떻게 나누어 지는가

A 시스템으로 하든 B로 하든 C로 하든, 그거 자체로는 다 설명이 돼. 원자로 설명하든, 기로 설명하든, 에너지로 설명하든, 그 시스템 내에서는 다 설명이 되는 거야. 전부 다 그 안에서는 되는 거야. 그럼 우열은 어떻게 나누는가? 이 사람은 두 가지를 들었어요.

하나는 로지칼 심플리티(logical simplicity). 그 개념 체계가, 얼마나 우리가 경험하는 리얼리티를 logical하고 simple하게 설명하느냐의 문제에요. 또 하나는 유틸리티(utility)에요. 그 시스템을 가지고 봤더니 이러이러한 성과가 나오더라. 그러니까 그 시스템이 정말 이 객관적인 리얼리티하고 딱 맞는지 어쩐지는 우리가 몰라.

그런데 이 놈 가지고 했더니 비교적 예측이 잘 되고 유용한 결과가 나오더라. 그럼 그게 맞는 거야. 애초부터 맞는 건 없어. 이런 식으로 해서 고전적인 인식론을 완전히 무너뜨리지. 고전적인 인식론은 실재가 있고, 인간은 그걸 알 수 있고, 그걸 서술한 방법은 유일하게 하나가 있다고 하는데, 이런 식의 생각이 더 이상 통용되지 않죠.


▲ 논리 실증주의의 제창 - 19세기 사변철학에의 저항

그래서 20세기 전반에 비엔나에서 과학자들과학 철학자들 집단이 형성되는데, 이들을 비엔나 써클이라고 해요. ‘카르납, 슐릭크, 노이라트, 라이헨바하 등등 쟁쟁한 학자들이 모여 마하, 푸앵카레, 뒤엠 등의 인식론을 이어 ‘논리-실증주의(Logische Positivismus)’를 제창했다.‘

실증주의긴 실증주의인데, 당대 발전한 논리학을 무기로 다시 갖고 들어가는 실증주의죠. 이러한 논리 실증주의는 헤겔로 대변되는 19세기 사변철학에 저항하죠. 이건 약간 사회학적인 얘기가 되겠지만 당시의 과학철학자는 대부분 유태인들이에요. 유태인들은 유럽 사회에서 출세 코스가 막혀있어요.

마치 남한 사회에서 북한 출신들이 출세할 코스가 없는 것과 같죠. 그러니까 정관계에는 들어가지를 못 해요. 옛날엔 전라도 사람들이 그랬지. 많이 올라가봐야 5, 6급으로 가면 끝이에요. 그러니까, 평양 사람이나 전라도 사람, 유태인들이 진출하는 게 딱 두 가지에요. 하나는 장사, 또 하나는 문화계.

그러니까 장사하지 않으면 문화계로 가니까 과학자들이 조사해 보면 전부 유태인이야. 그래서 노벨상 수상자의 몇 프로라더라? 전부 유태인이에요. 왜냐하면 그 수밖에 없으니까. 근데 이 사람들이 말하자면 실증주의를 강하게 주장한 것도 사실은 독일의 귀족들, 전통주의, 헤겔을 겨냥해서 무너뜨리려고 만든 거예요. 굉장히 강조하죠.

그런데 1933년에 나치가 집권하니까 미국, 영국으로 다 흩어지죠. 그러면서 역설적으로 미국이 과학 철학의 본산이 되요. 미국이 참 운이 좋은 나라지. 예술도 그렇죠? 20세기 전반 전부 프랑스 파리에서 대가들이 있었는데, 미술계의 주류가 다 유태인들이거든.

근데 히틀러가 나오니까 전부 미국으로 도망가죠. 그러니까 역설적으로 미국에서 미술이, 뉴욕에서 꽃이 확 피는 거죠. 추상 표현주의가 그래서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서 미술의 중심지가 파리에서 미국 뉴욕으로 건너가지. 과학도 똑같아요. 그러니까 말하자면 히틀러가 미국에게 대단한 공을 한 거지.


▲ 19세기부터 20세기의 과학철학 - 실증주의로부터 합리주의

19세기 과학철학으로부터 20세기 과학철학으로의 전환은 실증주의로부터 합리주의에요. 그러니까 과학철학의 변화가 크게 3단계인데, 19세기는 실증주의, 20세기 전반은 합리주의, 후반이 되면 과학을 순수하게 안 보는 경향이 주류를 이뤄요.

과학도 전부 사회의 영향을 받고, 문화적 컨텍스트(context)의 영향을 받고, 정치 권력과 밀접하게 관련된다는 이야기가 20세기 후반에 주종을 이루죠. 어찌보면 19세기 말, 20세기 초, 20세기 전반이 과학 문화의 전성기에요. 과학의 내용(상대성 이론, 양자 역학 등등)도 전성기고 과학 철학도 나란히 제일 번성했던 시대에요.

실증주의는 기본적으로 과학이란 사물의 원인, 이유, 본질 등을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즉 과학은 설명(explain)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서술(describe)하는 것이다. 그러나 합리주의는 과학은 현상을 넘어서 단순한 현상 관찰로는 얻을 수 없는 심층적인 지식을 얻는 행위라고 본다. 때문에 실증주의에서 형이상학과 과학은 완전히 반대되는 입장에 놓이지만, 합리주의에서는 정도 차이의 문제에 놓인다.‘

사실은 모든 과학이 처음에는 전부 형이상학이지. 그러다가 정교하게 관찰이 늘어나고 수학적으로 증명되고 이러면 과학이 되는 거지.’ 보다 과감하고 총체적인 과학이 형이상학이고 보다 세밀하고 구체적인 형이상학이 과학인 것이다.‘


▲ 현대의 비판적 합리주의(critical rationalism) - 과학의 한계를 넘어서

‘’ 이 대목을 잘 보아 두세요. Critical Rationalism 이죠. 그러니까 현대의 합리주의라 해서, 그게 플라토닉한 합리주의라든가, 데카르트의 합리주의로 돌아가는 건 아니죠. 그럼 이 때, 크리티칼‘의 그러나 현대의 합리주의는 비판적 합리주의(critical rationalism)다.의미는 19세기적인 비합리적주의를 거친, 더 좁혀 말하면 베르그송을 거친 합리주의에요.

베르그송의 ontology가 뭐죠? 우주를 지배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시간이다. 세계는 끝없는 생성이고 우리가 아무리 언어로 포착하려 해도 온전한 포착은 절대 불가하다는 것이 베르그송이즘 이지. 과학도 그건 일단 인정하고 들어가는 거지. 우리 언어로, 수학으로 아무리 이 세계를 포착하려 해도 이 세계는 무궁무진한 질적 풍요로움이다.

그런데, 베르그송처럼 이성의 한계를 지적하고 과학의 한계를 지적하는 데에 포인트가 있는 게 아니라, 과학이 한계를 지님에도 불구하고 과학은 끝없이 새로운 언어 체계(패러다임)를 만들어서(비유한다면 그물의 그물코를 점점 꼼꼼하게 만들어서) 어쨌든 세상을 심층적으로 파고드는 데 포인트를 두는 거죠.

베르그송의 온톨로지를 깔고 들어가지만, 그래서 과학은 한계가 있다는 데에 무게 중심을 두는 게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은 점점 더 새로운 수학적 언어를 개발하고, 새로운 기술적 장치를 개발함으로써, 세계 심층에 다가간다는 게 크리티컬 래셔널리즘이에요. 이게 아마 지금도 과학에 대한 가장 설득력 있는 과학철학이죠.

옛날처럼 과학이 세계를 다 비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지. 그러나 인간은 자기가 사물을 보는 개념체계를 만들어서 실험해보고, 사물을 제작할 적에 도구의 힘을 빌리잖아. 광압기, 분광기 등등으로 기술을 개발해서 세계를 새롭게 보는 거지. 내부를 보고. 또 수학이 발전하잖아. 집합론, 텐서 등등 그걸로 포착해서 점점 더 세상을 정교하게 파악하는 거죠.

지금도 과학철학의 논쟁은 이런 거예요. 과학은 결국 인간이 그냥 자기가 만든 틀(패러다임)을 이 세계에 투사하는 거냐? 아니면, 과학이 리얼리티를 옛날 생각하듯이 포착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어쨌든 과학은 점점 리얼리티에 objective하게 접근한다. 지금도 이 두 입장이 갈등을 일으키고 있죠.

이게 과학만의 문제는 아니지. 인간이란 존재가 정말 이 세계를 objective하게 알 수 있냐 없냐 하는 건 엄청 중요한 문제거든. 만약에 알 수 없다고 한다면, 모든 걸 우리가 어떤 언어체계를 쓰냐의 문제일 뿐이지. 있다면 그게 모든 문화의 근거가 되어야 되는 거지. 엄청 중요한 거죠.

‘현대의 합리주의는 고전적 합리주의처럼 세계의 본질에 대한 단적인 접근을 뜻하기보다, 과학적 절차를 통해서 실재의 본성에 점점 더 가까지 다가선다는 것을 뜻한다. 비판적 합리주의의 대표 주자들 중 한 사람인 브렁슈비크는 “고전적인 철학자들이 모두 플라톤의 제자라면, 우리 모두는 베르그송의 제자다”라는 말을 했다. 생성과 지속, 창조, 그리고 우주의 절대적인 질적 풍요로움, 양화(量化)와 공간화의 한계 등등에 대한 베르그송의 비판은 오늘날의 철학에 거의 무의식적으로 스며들어 있다. 현대의 합리주의는 이미 니체-베르그송을 거친 합리주의인 것이다.


▲ 꾸르노의 계승자 메이에르송(Emile Meyerson)

메이에르송(Emile Meyerson)은 19세기의 앙투안느 꾸르노를 이어서 새로운 형태의 합리주의를 건설하고자 했다.‘ 그러니까 메이에르송은, 베르그송에 의한 온톨로지를 전제하되, 그 위에서 합리주의를 얘기한 사람이에요. ‘메이에르송은 과학사를 존중했지만 잡다한 과학사적 사실의 수집은 곤란하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그는 ‘역사적 아프리오리’라는 개념을 창안했는데, 이는 과학들에 있어 아프리오리한 면을 찾되 어디까지나 과학사에 대한 경험적인 탐구에 입각해야 한다고 보았다. 후에 푸코에게서 이 말이 다시 등장한죠.

메이에르송은 과학은 결코 사실들의 단순한 서술이 아니라 존재론적 의미를 띤다고 생각했다. 즉, 과학은 법칙성과 더불어 인과성을 추구하는 것이다(푸앵카레와 비교). 과학의 목적인 단지 예측과 유용성에 있는 것은 아니다. 과학은 이 세계를 진정한 의미에서 이해하려 하는 행위이다. 열, 전자, 파동 등과 같은 개념들은 모두 이러한 열정의 소산들이다. 이해한다는 것은 합리화한다는 것(rationalisation)을 뜻한다.‘

동일화(identify). 이 세계가 베르그송처럼 끝없는 차이의 생성이라고 한다면, 과학은 그 차이의 생성의 와중에서 나타난 동일성(identify)을 잡아내는 것(identify)이다. 즉 현상적 잡다성을 넘어 실재의 간명함을 읽어내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염산(HCl)과 수산화나트륨(NaOH)을 합치면 소금(NaCl)과 물(H2O)이 나오는데, 이 등식을 유심히 보면, 좌변과 우변이 사실 똑같지? H가 두 개, Na 하나, Cl 하나, O 하나. 그러니까 염산에 수산화나트륨(양잿물), 소금이 나오거든요.

그니까 현상은 다르지. 염산 하얀 거, 양잿물, 소금은 색깔, 냄새, 맛이 모두 다르죠. 이렇게 현상은 다르지. 하지만 에센스는 똑같다. 이런 것을 포착하는 게 과학이다.

‘그러나 실재는 베르그송의 말처럼 절대적인 풍요로움이요, 창조와 지속의 장이다. 때문에 과학적 이상은 그 끝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러나 과학의 발달은 이전에 합리화하지 못했던 측면들을 조금씩 합리성에 용해해 넣는다. 만일 이런 작업이 끝난다면 우리는 파르메니데스의 일자를 재발견할 것이다. 그러나 과학이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 오히려 과학적 작업의 조건이다. 과학을 비켜가는 무한한 질적 풍요로움이 오히려 과학적 합리화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 합리주의는 어떤 식으로 기능하게 되는가


▲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 - 가장 영롱한 시간은 수직으로 솟아오르는 시간

이처럼, 이 세계의 질적 풍요로움, 시간의 절대성, 차이의 생성, 언어로 포착되지 않는 연속성 등을 인정하면서도, 과학은 그 가운데에서 아이덴티티를 잡아내는 것이라는 게 합리주의에요. ‘이런 흐름을 가장 높은 경지로 끌어올린 사람이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 다.’

바슐라르는 아까 우리가 니체, 베르그송, 후설, 메를로-퐁티, 사르트르, 하이데거 같은 사람들에 버금가는 아주 중요한 사람이죠. ‘베르그송의 연속의 존재론에 맞서 순간의 존재를 제시했다.’ 그러니까 베르그송의 ‘시간’은 물처럼 흘러가는 시간이야. 공지천 이야기했죠? 그런데 (시간을) 끊는 거는 인위적으로, 억지로만 자를 수 있는 거죠? 절대로 시간은 그 자체로는 끊을 수 없는 거죠.

거기에 비해서 바슐라르의 시간은 수직으로 솟아오르는 시간이에요. 시간에서의 순간을 중시하죠. 베르그송의 시간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시간이에요. ‘시간은 특정한 순간들이 마치 촛불처럼 수직으로 솟아오른다. 예컨대 시는 순간의 형이상학이다.’

그러니까, 베르그송에 어울리는 문학은 전에 이야기했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지. 근데 바슐라르는 꼭 흘러가는 시간만이 시간의 본성이 아니라, 정말 중요하고 의미 있는 시간은 흘러가는 시간이 아니라 수직으로 솟아오르는 시간이라고 했어요. 옛날에 적당한 시가 하나 있어요. 개벽인가? 모든 사람이 숨을 죽이고 탁 멈추는 시가 있는데, 그게 바슐라르적인 시간이죠.

‘베르그송은 과학을 추상화와 연관시키며’. 과학은 추상화(abstraction)의 작용이고, 추상화는 세계의 질적 풍요를 절대로 완전하게 포착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면, 바슐라르는 (강의록좀 아래에서) 과학은 인식론적 단절을 본질로 한다고 주장한다.‘

이게 뭐냐면, 베르그송의 경우는 물처럼 흐르는 시간, 또 물처럼 섬세하게 흐르는 그 시간에 대한 지각이 주안점이거든요. 그런데 과학은 흐르는 시간을 자르고, 평균화하고, 등질화하고, 동일화하는 거죠. 그러니까 베르그송이 볼 적에 실재는 아주 연속적 흐름이고, 두 번째는 질적 풍요로움, 세 번째는 차이의 생성이죠.


▲ 인식론적 단절 - 이미지를 뛰어넘어 수학의 세계로

근데 과학은 연속적인 거를 딱딱 끊어서 분석하고, 질적 풍요로움을 양으로 다 바꿔 버리지요. 그 다음에 차이를 전부 identity로 환원하지요. 그렇기 때문에 베르그송이 볼 적에는 구불구불한 풍요로움을, 과학이 직선으로 abstract 하는 거지.

그런데 바슐라르가 볼 적에, 베르그송의 생각은 피상적인 생각이고, 과학은 구불구불한 것을 직선으로 abstract 하는 게 아니라 구불구불한 것을 넘어선 데에서, 보다 근본적인 리얼리티를 발견할 수 있다는 거예요.

구불구불한 건 뭐에요? 우리가 지각(perception) 하는 거죠? 그런데 진짜 과학이 설명하는 거는, 지각의 레벨을 넘어가야 돼. 이걸 인식론적 단절 이라고 해요. 그러니까 굉장히 플라토니즘적이지.

 

물론 실험이라든가 관찰 등을 통해서 감각과 대화하는 현대의 플라토니즘이지. 건너 뛰어버리는 플라토니즘이 아니고요. 이 차이를 알겠어요? 어찌 보면 이게 현대 과학을 바라보는 결정적인 차이점이자 틀이에요. 음미해 보세요.

베르그송이 볼 적에는 우리가 지각하는 이 세계는 연속적인 흐름이고, 질적으로 풍요롭죠. 색깔, 맛처럼 말이에요. 그 다음 끝없는 창조, 차이가 발생하죠? 근데 과학은 이걸 딱딱 끊어서 불연속으로 만들고, 숫자로 표현해서 양화하고, 그 다음 전부 identity로 포착해서 차이는 다 빼 버리고, 그러니까 과학은 풍요로운 현실을 직선으로 만들어 버리는 abstract 라는 게 베르그송의 생각이에요. 베르그송, 후설, 하이데거, 메를로-퐁티, 이 계열은 전부 그렇게 생각해요.

근데 바슐라르는 반대에요. 아니다! 이건(현실은) 그냥 아무 의미도 없는 흐리멍텅한 세계고, 바슐라르로 말하면 이미지의 세계고, 진짜(학문적, 과학적) 인식은, 이미지들을 뛰어넘어서(불연속적으로) concept의 세계, 수학의 세계로 가는 거죠. 이렇게 대조적이 되는 거예요.

좀 알기 쉽게 비유하면 베르그송이 인상파라면, 이런 세계는 몬드리안 같은 세계지. 아니면 성격이 좀 다르긴 하지만 종교적으로 말하면 버넨 위만이나 로드코 같은 사람이죠. 그래서 베르그송과 바슐라르를 비교하는 것, 이게 사실 젊은 날의 화두였어요. 20대에 제일 많이 고민했던 게 이 두 사람을 비교하는 거였어요. 얘기하다 생각났는데. 어떨 땐 이게 맞는 것 같고 어떨 땐 저게 맞는 것 같고 그렇죠.


▲ 뒤의 이론은 앞의 이론을 ‘포섭’한다

또 중요한 게 뭐냐면. 바슐라르는 우리가 정말 세계의 리얼리티(진상)를 발견하려면, 지각의 세계, 이미지의 세계, 실질의 세계를 완전히 건너뛰어야 된다는 거죠. 근데 벗어나는 방법 자체도 한 번만 딱 건너뛰는 게 아니라 새로운 건너뜀이 되는 거지.

예를 들어서, 갈릴레오, 뉴턴은 한 번 탁 뛴 거지. 그러나 한 번 뛰고 마는 게 아니고 아인슈타인 같은 사람은 뉴턴에서 또 한 번 뛴 거지. 그러니까 인식론적 단절은 유일하게 한 번 일어나는 게 아니에요. 과학의 역사에서 한 번씩 일어나는 거지. 그러니까 과학은 죽- 발전하는 게 아니에요. 한참 가다가 한 번 뛸 때마다 완전히 다른 차원, 다른 패러다임으로 가는 거예요.

 

그러면 ‘과학은 완전히 단절인가?’ 이런 문제가 생기죠. 그러니까 패러다임(틀)이 바뀌어 버리면 옛날 틀은 날아가고, 세상을 새롭게 보고 이런 식이냐? 그러면 과학에는 발전이란 게 없겠지. 그냥 뉴턴 패러다임은 이렇게 보는 거고, 아인슈터인은 저렇게 보는 거죠.

그러나 바슐라르는 두 가지를 함께 이야기해요. ‘맞다. 틀이 바뀌면 단절된다.’ 뉴턴이 생각하는 시공간하고, 아인슈타인이 생각하는 시공간하고 완전히 다른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속되는 면도 있다. 발전되는 면도 있다. 어떤 면이냐? 수학적인 면은 발전한다고 보죠.

그러니까 수학적으로 보면, ‘뒤의 이론이 앞의 이론을 포괄한다’ 또는 ‘포섭한다’는 거지. 예컨대 기하학 같은 경우에는 옛날에는 유클리드 기하학만 있었죠. 그리고 리만 기하학이 발달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봤더니, 리만 기하학 중에서 곡률(공간 자체의 휘어진 정도)이 0인 경우가 유클리드 기하학이더라.

또 열역학이 있다가 통계학이 발달해 보니까, 분자수가 무한히 많아지면 이게(통계학) 나오는 거야. 또, 뉴턴의 속도 구하는 공식이 있고, 아인슈타인 공식이 있어요. 그런데 나중에 계산해 봤더니, 아인슈타인의 공식 중에서 운동체의 속도가 아주 느린 경우를 계산했더니 바로 뉴턴 공식이 나오더란 거예요. 이 얘기는 뭡니까?

옛날 이론이 이야기했던 게 알고 보니, 뒤에 나온 이론의 여러 경우 중 하나이더라. 리만 기하학에 무수한 곡률이 있는데, 그 중 0인 경우를 해 봤더니 그게 유클리드 기하학이더라. 다른 말로 하면, 유 기하학은 리만 기하학의 한 경우(case)더라. 이건 뭐 누가 봐도 맞잖아요? 이런 관계를 바슐라르는 뒤의 이론이 앞의 이론을 포섭‘한다고 했죠.

좀 더 알기 쉬운 예로 하면, 맑스 같은 경우는 이전의 철학에서 전혀 포착되지 않았던 ’프롤레타리아’라는 개념을 제시하죠. 근데 현대철학자 미셀 푸코는 ‘타자’ 개념을 말해요. 타자가 아이, 노인, 여성, 병자, 광인 등등 여럿 있을 수 있죠. 이렇게 해 놓고 보니까 아, 맑스가 말한 프롤레타리아는 푸코가 말한 타자들 중의 하나인 거지. 포섭되는 거지. 물론 푸코가 맑스를 온전히 포섭하지 않지.

푸코에게는 맑스에게 있는 경제 개념이 없기 때문에 온전하게 비교할 수는 없지만, 타자의 개념만 놓고 볼 땐 그렇게 이해할 수 있죠. 이럴 때 ‘과학이 발달했다’는 말을 할 수 있단 거예요. 그럴 때 포섭(envelopper)한다. 그러나 개념 (체계)자체는, 패러다임이 달라지면 체계도 달라진다.


▲ 인식론적 단절을 이루지 못하게 하는 쟁애물 - 인식론적 장애물

근데 이 사람 재밌는 얘기를 해요. 인식론적으로 단절을 이루어야 우리가 참된 인식에 도달할 수 있다는 얘기를 거꾸로 하면,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인식론적 단절을 이루지 못하게 만드는 요인들이 뭐냐는 거예요. 예컨대, 인간의 소통은 어떠해야 하느냐? 인간이 서로 소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어볼 수 있죠?

그러니까 하버마스 같은 사람은 재미가 없지. 정직해야 한다, 어째야 한다고 얘기하죠. 근대 그걸 반대로 물어볼 수 있죠. 왜 안 될까를 밝혀줘야죠. 그걸 바슐라르는 이걸 반대로, 거꾸로 소통이 안 되는 이유가 뭐냐고 거꾸로 물어볼 수 있지. 어찌 보면 뒤의 물음이 해결되어야 앞의 물음에 사실(엄밀히 말해서) 대답을 할 수 있죠. 그러니까 하버마스 같은 사람은 재미가 없지.

왜 재미가 없어? 우리가 소통을 잘 하려면 이런 이상적인 대화 상황이 있어야 하고, 서로 정직해야 하고, 진리를 따라야 하고. 그게 어려운 게 아니죠. 누구나 할 수 있는 거지. 근데 사람과 사람이 왜 소통이 왜 안 될까를 밝혀야죠. 그게 중요한 거예요. 그걸 바슐라르는 인식론적 장애물들이라고 해요.

여기에는 ‘선입견, 감정, 개인적 호오(好惡), 국적에 따른 편견 등등은 기본적인 것들은 물론이고, 예컨대 같은 단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같은 내용을 생각하는 것, 하나의 말이 있으면 으레 그 말에 해당하는 실체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 평소에 가지고 있던 이미지를 과학적 사유에 투영하는 것 등등 많은 인식론적 장애물들이 있다.’


▲ 바슐라르의 ‘상상력’

또 하나 흥미로운 건, 과거의 과학에서 직관, 상상력은 부정적인 거였죠. 과학을 하려면, 합리적인 사유를 하려면, 객관적인 사유를 하려면, 직관이나 상상력은 거부해야 되요. (상상력은) 위험한 거였죠. 근데 바슐라르는 아니다! 현대 과학은, 그냥 우리가 보고 들을 수 있는 현상세계를 얘기하는 게 아니라, 우리 지각은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세계를 연구한다는 거예요. 양자역학 같은 거죠.

때문에 옛날 과학자들은 사물을 잘 보고, 세심하게 얘기해야지, 함부로 상상력을 도입하면 안 되는 거였죠. imagination은 아주 나쁜 거예요. 근데 바슐라르는 현대 과학은 반대다! 상상이 풍부해야 한다는 거예요. 당대에는 확인 안 되는 세계를 상상하는 능력이 중요하다는 거예요.

직관. 탁 간파해 내는 거예요. 옛날엔 과학한다는 사람이 직관이라고 하면 학회에서 제명당하죠. 아니, 과학을 하는 사람이 직관? 깨달았어? 빨리 나가라고 하죠. 그런 말 했다가는 완전히 매장당하죠. 근데 바슐라르는 현대 과학은 아니라는 거예요. 현대 과학이 다루는 세계는 보이는 세계가 아니야. 그러니까 참 묘하죠.

왜냐하면, 직관과 상상력은 옛날에는 과학에서는 금기지만 예술에선 중요한 거 아냐? 바슐라르는 과학에서 직관과 상상력이 중요한 거라고 하니까 참 재밌죠. 그래서 바슐라르의 사유는 상상력(imagination)의 이론이야. 이 imagination 으로 과학과 예술이 함께 묶여요. 이 사람에 의해서.

단, 과학적 상상력은 formal 한 수학적·형식적 상상력이고, 예술적 상상력은 물질적(material) 상상력이에요. 예컨대, 물을 안 보고 그린다. 이때 필요한 것은 수학적 공간적 상상력이 아니죠. 미술에서 촉지적(haptic) 상상력 있죠? 이게 물질적 상상력이야. 물질적 상상력을 잘 보여주는 화가가 터너죠. 불을 잘 그렸어요. 또 한국의 시인 중에 김광균이 바슐라르가 말하는 물질적 상상력이 발달한 사람이죠.


▲ 부정명제만이 과학적 추론을 확증할 수 있다

이외에도 여러 가지 많은데, 또 하나만 더 이야기한다면, 과학은 절대지식에 도달할 수 없다고 보죠. 세계란 ‘궁극적으로 -이다’라고는 최종적으로 얘기할 수 없다는 거예요. 단, ‘-는 아니다’ 라고는 일단 얘기할 수 있다는 거죠.

이 세계에 대한 어떤 가설이, 맞다, 진리라고 얘기할 수 없다. 그렇지만 ‘그건 일단 아냐, 틀렸어’ 라곤 얘기할 수 있단 거지. 그래서 이 사람 책 중 하나가 『La philosophie de non (philosophy of no)』이죠. 논리학적으로 보면 증명되는데요.

보세요. ‘모든 인간은 척추동물이다. 근데 나는 척추동물이다. 그러므로 나는 인간이다.’ 얼핏보면 맞는 것 같지. 벤다이어그램으로 그려보면 알지. 밑에 꺼 가지고 봅시다. ‘모든 인간은 척추동물이다. 뽀삐는 척추동물이다. 그러므로 뽀삐는 인간이다.‘ 벤다이어그램 봅시다.


이건 틀린 논증인데, 이것과 똑같은 형식의 논증이 위의 논증이죠. 그러니까 얼핏 보면 꼭 맞는 것 같지. 하지만 틀린 논증이에요. 논리학이라는 건 형식과학이에요. 형식만 문제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소크라테스는 곰이다. 곰은 죽는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는 논리학적으로 맞는 거예요.

논리학에서는 소크라테스하고 곰하고 같은지는 문제가 아니에요. 관계없는 거예요. 소크라테스가 곰이다? 물론 틀리지. 근데 그건 내가 눈으로 확인하는 문제이고, 논리학은 추론의 형식이 맞냐 틀리냐를 보는 거예요. 소크라테스가 곰이란 건 물론 틀린 명제죠. 근데 그건 논리학에서는 문제가 안돼요.

그 추론의 형식을 문제 삼는 거죠. 그러니까 맨 위의 거 보면 내용상으론 맞지. 의아하죠? 근데 이 내용의 논증형식은 아래의 논증형식이거든. 그러니까 위의 논증형식이 틀렸다는 건, 아래 걸 보면 확실하지. 알겠어요? 첫 번째 삼단논법이 두 번째 삼단논법과 똑같은 형식인데, 이 추론은 논리학적으로는 옳아요. 그 다음에 ’소전제가 부정일 경우에는 이게 올바른 추리‘가 됩니다.

그림으로 보면 모든 인간은 척추동물이죠? 꿀벌은 아예 척추 동물이 아니죠? 그러니까 꿀벌은 인간이 아니죠? 이건 맞는 논리죠. 이 얘길 왜 하냐면, 과학자들이 자기의 이론을 논리적으로 전개하다 보면, 등장하는 로지칼 폼(logical form)이 이거에요.

과학자들이 자기의 이론의 결과를 로지컬하게 추론하면, 등장하는 그 폼 중의 하나가 이런 폼이에요. 그런데 ‘-이다‘라는 추리는 오류 추리가 나와. 근데 ‘-가 아니다‘라는 건 오류 추리가 아니라 맞는 추리에요. 그 때문에 이렇게 부정의 형식으로 된 것만이, 일단 오류 추리가 아닌 것이 되는 거죠.

그러니까 ’-가 일단 그건 아니다‘가 과학적 추론이라는 거예요. 지금 맞다고 생각하는 이론도 (포퍼 식으로 말하면) 아직까지 반증이 안 된 거죠. 그게 맞다고 얘긴 못 해. 그게 맞는 게 아니라 아직 아닌(틀린) 건 아닌 거지.

’그건 -이다‘라고 얘기할 수 없어. 단지 뭐라고 얘기할 수 있냐? 아직 아닌(틀린) 거는 아니다. 아닌 건 아직 아니다. 이렇게 밖에 얘기할 수 없다. 이 세계에 대해서. 칼 포퍼도 똑같은 이야긴데 좀 다르게 하죠. ’검증할 수 없다. 단지 반증할 수 있다‘고 했어요.


▲ 바슐라르의 일화와 그의 저서들

바슐라르는 화학자인데, 박사 학위를 화학으로 받은 사람인데, 결혼해서 2년 만에 아내가 아기를 낳다가 죽어요. 홀로 딸을 키우면서 사는데, 딸이 수잔나 바슐라르지. 그 사람도 나중에 철학자가 되죠. 우리나라에도 한 번 왔어요. 이 사람 사진을 보면 실험실에서 실험을 하면 딸이 와서 아버지하고 같이 살아. 자기도 실험하고.

근데 어는 날 제자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선생님 플라스크에는 미생물이 살고 있지 않는 것 같다’고 얘기했어요. 무슨 얘기냐면 당신의 합리주의 체계는 너무 투명(clear) 해서 어떤 불순물도 미생물도 살 여지가 없다'는 말을 하는데, 듣는 순간 바슐라르가 ‘아차’한 거예요.

바슐라르는 이 세계(현실)를 넘어서 합리주의를 이야기했는데, 너무나 클리어한 플라토닉한 세계만 이야기했구나. 이 세계(현실)도 이야기 해야겠다‘ 싶은 거예요. 재밌는 게, 이 세계는 리얼리티처럼 객관적 진리로서 이야기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미학으로만 이야기할 수 있다고 해요. 이미지의 세계, 지각의 세계죠.

그래서 쓴 책이 예컨대 『물과 꿈』, 『불의 정신』, 『대지와 의지의 몽상』 같은 거죠. 잠 안 올 때 읽으면 정말 재밌어요. 내 이불 베개 위에 바슐라르 책이 쌓여 있는데, 잠이 안 오면 읽어요. 물과 꿈. 대지와 의지의 몽상 같은 거 읽으면 너무너무 재밌고 기가 막혀요. 꼭 읽어 보세요. 또 뭐 있더라.

『공기와 꿈』, 『공간의 시학』, 『꿈꿀 권리』(미술에 대한 책, 모네에 대한 책이죠), 『촛불의 미학』, 『풍경』, 『물과 꿈』 이런 것들. 잠잘려 하는데 왠지 심란하고 귀신이 보이고 이럴 때 바슐라르를 읽으면 기가 막혀요. 잠이 사르르 오는 게 정말 재밌지.

근데 내가 바슐라르에 대한 불만이 뭐냐면 나무에 대한 게 없어요. 나무의 꿈이 없어. 내가 나무의 꿈 쓰려고 해요. 그 다음에 쓸 거 많죠. 나무의 꿈도 있고, 풀잎의 노래, 흙은 있나? 흙은 있네. 여러분도 한 번 써 보세요. 나무에 대해서.


▲ 바슐라르 이후의 과학철학

포퍼와 바슐라르 이후에 과학이란 무엇인가를 비롯한 일반적인 물음들은 어느 정도 일단락된다. 일반적인 물음, 예컨대 과학은 뭐냐? 과학 탐구의 방법은 뭐냐? 같은 건 흥미로운 문제가 아니고 어느 정도 일반적인 생각들로 정리가 되었지. 요즘에는 예컨대 19세기 물리학이 어떻게 탄생했느냐 같은 거가 관심사이죠.

그래서 깡길렘(George Canguilhem), 다고녜(Francois Dagognet), 토마스 쿤(Thomas Kuhn), 미셸 세르(Michel Serres) 등이 나와서 여러 가지 새로운 방식의 과학 철학을 하는데, 아까 얘기했지만 전반적인 흐름이 과학의 모습은 순수한 논리라든가 철학적 근거보다는, 역사적 배경, 사회적인 맥락, 정치적인 권력처럼, 지금은 과학을 바라보는 눈이 그런 식으로 바뀌었어요. 순수 과학 내적인 로직을 연구한다기보다는 외적인 요소들에 대해서 요즘엔 얘기를 많이 하는 경향이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