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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강 후설과 현상학

하나님아들 2020. 3. 31. 23:48

제4강 후설과 현상학

◆ 현상학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 현상학은 경험주의이다 - '현상'은 그 자체로서 의미를 지닌다

오늘은 경험과 의미, 현상학 대목을 해 봅시다. 지난 두 시간 동안 니체, 베르그송을 했는데 두 사람은 형이상학(meta-physica), 존재론(ontology)이죠. 이번 시간과 다음 시간에 배울 내용은 현상학(phenomenology)과 해석학(hermeneutics)입니다.

니체와 베르그송의 사상은 우리 경험의 여러 차원들을 포괄적으로 종합해서 세계와 삶에 대한 큰 그림을 그려주는 방식의 사유입니다. 현상학은 제목 그대로 경험주의에요. 그러니까 세계에 대한 포괄적인 그림을 그리는 데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 구체적인 경험, 신체로 하는 경험에 관심이 있죠. 제목 그대로 현상의 세계를 다뤄요. 그런 점에서 앞서 했던 형이상학, 존재론과는 성격이 다른 사유라고 하겠습니다.

첫 번째 이야기할 것은 반성의 철학이 무엇인가? ' 서구 철학의 역사라는 게 우리 감각에 나타나는 외관(appearance)을 넘어서 세계의 본질을 사유하려는 것이고, 감각을 통해서 나타난 외관은 참되지 못한 것(가짜)이란 뉘앙스를 띄죠. 그런데 근대 철학에 오면 외관보다 현상이란 말로 바뀌죠.

그러면서 외관이란 말이, 가짜·환상이란 뉘앙스보다 약화되어서 나름대로 의미를 갖고 있는 ‘현상’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러나 서구 철학의 대상이 외관에서 현상으로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칸트에서 분명하게 볼 수 있듯이 이때까지만 해도 현상이라는 것은 일종의 인식질료에요.

이 탁자가 나무로 되어 있다는, 존재론적인 의미에서의 사물의 질료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인식하기 위해서 필요한 질료들, 그래서 인식 질료라고 해요. 좀 친숙한 말로 하면 데이터죠. 또 우리가 감각을 통해서 얻는 데이터이기 때문에 센스 데이터(sense data)라고도 해요.

그런데 센스 데이터는 자체로 의미를 가지는 게 아니라, 의식의 구성을 받았을 적에 의미로 화(化)하죠. 내가 무엇인가를 보고 듣고 만지고 냄새를 맡고 맛본다 해도, 센서블한 차원들이, 내 의식, 개념, 관념, 사유에 의해서 ‘구성’이 되지 않으면, 그것은 그냥 아무런 의미도 갖지 않는 인식 질료의 더미에 불과하게 되죠. 이것이 칸트의 생각이에요.

콩트는 현상이라는 말에다, 자율적인 존재론적 위상을 부여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현상은 의식의 구성을 받아야만 의미를 갖는 게 아니라 그것 자체로 실재성, 존재성을 띈다는 거죠. 그걸 이 사람은 포씨티비떼(positivite), 능동성, 실존성이라 불렀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나타나는 현상은 인식 주체에 의해 구성될 때에만 의미를 갖는 게 아니라 그 자체로 의미를 갖는다고 봤죠. 이런 생각은 콩트에서 브렌따노로, 후설로 이어지죠. 그런 의미에서 현상학은 경험주의죠.


▲ 영국 경험론과 경험주의의 차이

그런데 경험주의라는 것이 영국 경험론과 어떻게 다른지를 잘 봐야 합니다. 중요합니다. ‘현상을 적극적으로 이해하려는 철학적(존재론적-인식론적) 사유는 곧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인생을 적극적으로 이해한다는 가치론적-윤리학적 사유와 맞물려 있다.’ 지난 번 니체 공부할 적에 이야기했죠?

생성의 무제를 이야기하면서 생성하는 세계가 무가치하다는 생각은, 자연스럽게 이 세계를 떠난 무언가를 찾는다는 뜻으로 해석이 되죠. 그러나 만약에 현상 세계, 생성하는 세계를 그 자체로 인정하면, 삶의 의미나 가치도 현상하는 세계 자체 내에서 찾아야 되겠죠. 이건 사실 니체와 현상학뿐만 아니라 현대 철학 일반의 입장이라고도 볼 수 있죠.

그런데 경험에만 만족하면 철학이 아니에요. 보고 듣고 만지고 한 걸 다 모아놓는다고 거기에서 세계에 대한 통찰이 나올 수 없잖아. 그러니까 경험을 존중하되, 어떻게 단지 경험의 덩어리가 아닌 인식을 할 수 있느냐가 포인트입니다.


▲ 19세기 반성철학

‘따라서 이런 철학은 현실 세계를 넘어서는 형이상학적 사유를 추구하기보다는 현실 세계 자체에 대한 탐구에 경도된다.’ 이렇게 되면서 이 계열의 철학에 오면, 철학이라는 담론의 성격이 확연하게 달라져요. 우리가 이번 학기에 공부하는 네 계열은 니체· 베르그송·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 존재론, 그리고 후설 이후 현상학, 해석학, 그 다음에 배울 게 합리주의(과학철학, 분석철학, 구조주의), 네 번째로 넓은 의미의 맑시즘이죠.

이 네 개는 철학이 내용도 다르지만 철학이라는 게 무엇이냐에 대한 이해가 아예 달라요. '철학이 무엇을 하는 것이냐'라는 규정 자체가 각각 달라요. 재밌는 건 규정이 그만큼 다르다면, 왜 철학이란 말을 쓰냐고 물을 수 있겠지요.

그건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예컨대, 철학사적인 흐름에 대한 참조라든가, 방법은 다르지만 비슷한 문제를 붙들고 씨름한다든가 하는 등의 복잡한 연관성이 있어요. 어쨌든, 네 계열은 철학에 대한 규정 자체가 다릅니다. ‘신체, 의미, 습관, 감정, 불안, 죽음, ... 등등의 주제들이 이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사유되기 시작한다.’

원래 이 문제는 철학의 중요한 문제였고 그리스에서도 중요하게 다루지. 그런데 철학이 스콜라 철학이 되고, 과학에 대한 메타 이론이 되면서 이런 문제들은 문학이 취급할 것이지 철학이 취급할 문제는 아닌 것으로, 배제되지요. 그런데 19세기가 되면 다시 두 번째 계열 철학 에서는 이런 문제를 철학의 주제로 다루게 됩니다.

흥미롭게도 이전의 철학들은 기본적으로 과학과 연관되어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데카르트는 다 과학자이면서 수학자들이죠. 근데 이 계열에 오면 철학은 과학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게 아니라, 문학하고 밀접한 관련을 가지게 되지요.

‘이런 경향은 ‘실증성’에 대한 공통의 믿음을 깔고 있음에도 콩트에서 유래해서 논리-실증주의와 공리주의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는 서구 주류 사회의 철학과는 다른 계열을 형성한다. 즉, 이때의 ‘실증성’은 과학적 탐구의 전제가 되는 ‘감각 자료(sense data)’의 의미가 아니라 인간이 인생을 살아가는 가장 원초적인 모습 즉 ‘생(Leben)’, ‘실존(existence)’의 의미가 된다. 따라서 같이 경험적-실증적 태도에서 출발하지만, 콩트 이후의 실증주의 계열과 멘느 드 비랑 이후의 반성철학 계열은 전혀 다른 - 나아가 대립적인- 길을 걸어간다.‘

그러니까 뽀시티비떼(positivite, 실증성)를 강조한다는 것은 경험을 넘어서는 것, 체험을 넘어서는 것은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경험하는 것, 체험하는 것만 이야기하죠. 그런데 조심할 것은 콩트 같은 사람하고 멘느하고는 달라요. 콩트는 외적 데이터야. 외적 실증성이에요. 과학자들이 외적 실증성을 추구하지.

설사 인간 내면(심리, 정신, 문화)을 다룬다 하더라도 말이야. 과학적 심리학의 경우는, 그 내면을 외적인 데이터 혹은 대상으로 보는 거죠. 그에 비해서 이 사람들(멘느)은 내적 실증성이야. 내가 느끼는 것, 고독, 불안, 죽음, 뿌리 없음 이런 것들은 볼 수도 없고, 계산할 수도, 그래프로 그릴 수도 없잖아.

그러니까 이 외(外)라고 하는 게 꼭 바깥만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인간의 마음을 바깥에서 바라보는 거야. 실험해 보고, 측정해 보고 이런 방식들이지. 빌헬름 분트라든가 프레크너가 그런 식이야. 또 문화도 마찬가지야.

이 사람들은 이런 게 아니라 과학적 실증성이야. 멘느 어떤 실존적인 거야. 그러니까 외적 관찰, 대상화를 통해서가 아니라 내면적인 느낌, 성찰, 반성 을 통해서. 그래서 여기서 반성(reflection)이란 말이 나오지. 이건 우리가 일상어에서 나쁜 일하고 반성한다는 뜻이 아니라 '내 의식이 항상 밖을 향한다'는 거지.

종이, 사람을 보는 것처럼. 이걸(내 의식) 꺾어서 자기 안을 들여다보는 것이 반성이죠. 현대적 의미의 반성철학은 고·중세 ‘반성철학(la philosophie)은 고중세의 형이상학이나 근대의 과학적 철학이 아닌 제 3의 길을 걸어간다. 이 계열은 멘느 드 비랑이 데카르트의 ‘cogito(나는 사유한다)’에 자신의 ‘volo(나는 의지한다. I will)’를 맞세우면서 시작한다.

이후 딜타이, 니체 등의 ‘생철학(Lebensphilosophie). 철학을 이성이나 객관적 인식에 둔 게 아니라 생(Leben), 라베송, 라슐리에, 부트루 등의 ‘정신주의(spiritualisme- 인간의 에스프리를 중시하는)’, 네동셀 등의 ‘인격주의(personalisme- 퍼스날리티. 과학적 대상이 아닌 인간 고유의 인격)’,야스퍼스, 사르트르, 마르셀 등의 ‘실존주의(existentialisme-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인간 고유의 삶. 실존을 강조하는 사상)’ 등으로 발전해 갔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서 후설과 메를로-퐁티, 레비나스 등의 현상학과 하이데거, 가다머, 리쾨르 등의 해석학이 방법론적으로 중요한 기여를 하게 된다. 물론 지금 열거한 사조들, 인물들 사이에도 많은 차이들이 존재하지만, (어쨌든) 전체적으로 보아 이 반성철학 계열이 실증주의 계열(과학적 철학) 및 사회주의 계열(정치적 철학)과 더불어 서구 근현대 사유를 삼분했다고 할 수 있다.


▲ 현상학 - ‘생’의 철학에 방법론적인 핵심 사유를 제시하다

19세기에 개별적이고 산발적으로 진행되던 반성철학은 멘느 드 비랑 이후의 ‘정신주의’와 쇼펜하우어(의 의지철학), 키에르케고르, 니체, 딜타이 등의 ‘생철학’ 등의 핵심을 가지고 전개되는데요. 이렇게 이러한 흐름들의 방법론적인 핵심 사유를 제시하는 게 현상학이에요.

왜냐하면 이런 식의 사유들은 자칫 잘못하면 지리멸렬하고 지나치게 개인적인, 학문이라 보기에는 좀 어려운 담론으로 갈 수도 있죠. 그런데 거기에 어떤 엄밀한 방법적 틀을 제공한 것이 현상학이에요. 현상학의 등장으로 반성철학은 인식론적인 틀을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가지게 된다는 거죠.

후설 그 자신은 생철학, 실존주의류와는 거리가 있는, 과학적이고 인식론적인 사람이지만, 현상학이라는 방법의 창시를 통해서, 현상철학의 새로운 흐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 후설은 현상학을 통해 무엇을 보여 주었는가


▲ 후설(Edmund Husserl, 1859~1938)

현상학의 창시자는 에드문트 후설인데, 후설은 원래 수학자였어요. 수학을 하다가 나중에 철학으로 전향한 사람인데, 뒤에 나오는 하이데거, 사르트르, 메를로-퐁티 같은 사람한테 많은 영향을 끼치죠.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말년에 상당히 고독하게 죽었고요.

‘후설은 철학을 ‘엄밀한 학’으로 만들고자 했으며, 그 실마리 ― 아르키데메스의 점 ― 로서 인간의 의식을 탐구했다.‘ 후설이 진단한 자기 시대는 모든 것이 사물화 되는 시대에요. 대상화, 객관화, 수량화, 분석되고, 양화하고, 함수로 만들고, 그래프를 그리고 하는 등 이 세상의 모든 사물들이 과학적으로 해부되고 마침내 후설이 볼 적에는 인간의 의식까지도 단순한 대상이나 사물로 전락하죠.

보통 다른 관점에서 보면 과학이 발달한 건데, 후설의 입장에서 볼 적에는 사물을 모두 증발시키는 거죠. 예컨대 꽃을 보면 꽃에 대한 체험, 있는 그대로의 꽃에 대한 우리의 체험이 증발되고 꽃에 대한 화학식, 암술, 수술, 꽃받침은 각도가 얼마고 하는 등으로 해부가 되죠.

무지개의 경우 있는 그대로의 체험이 증발되고, 빛이 공중에 떠 있는 물방울이 점반사 되어서 생기는 현상이라고 이야기하죠. 또 색도 마찬가지에요. 빨간, 파란, 노란 색에 대한 경험은 분명히 고유한 경험이지만, 화학적 입장에서 볼 적엔 그냥 파장이 좀 다른 것뿐이죠.

이런 식으로 모든 사물의 의미는 증발하고 모든 것이 숫자와 그래프와 함수 등으로 표시되는 시대가 도래했다는 거죠. 이걸 후설은 상당한 위기로 파악하죠. 그리고 그 경향 중에서도, 가장 결정적인 게 인간의 의식, 주체성, 마음을 대상화하고 양화하고 객관화하는 경향에 대해 안티(anti)를 걸게 되죠.

말하자면 19세기 말부터 발전하기 시작했던 경험적 심리학, 과학적 심리학과의 대결을 통해서 이 사람 사유가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코기토(cogito)의 철학자인 데카르트나 선험적 주체를 이해하기 위한 칸트 같은 사람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죠.

현상학은 phenomenol - logie 죠. 현상의 로고스를 탐구하는 거예요. biology는 생명의 로고스를 탐구하는 거죠. 메테올로지(meteorology 기상학)는 기상현상의 로고스를 탐구하는 거구요. 근데 전통적인 학문관으로 보면 phenomenon - logy란 말 자체가 모순된 말이에요.

왜? 전통적인 입장에서 보면 로고스(logos)를 얻기 위해서는 현상을(phenomenon) 넘어가야 되거든. 내가 세계의 로고스(이법)를 생각하려면, 나에게 나타난 감각 세계를 넘어가야 되는 거야. 그러니까 원래 현상하고 로고스는 반대말이야.

근데 후설은 페노메논(phenomenon) +로기(logy)지. 현상의 로고스를 탐구하는 거야. 그런데 현상이란 것은 우리가 직접 경험하는 거죠. 그러니까 원래는 세계의 근본 이치를 탐구하려면 직접 경험하는 차원을 넘어가야 하는데, 이 사람은 직접 경험하는 그 차원의 로고스를 탐구하는 거야. 그래서 현상학이죠.

그러면 현상의 로고스는 무엇이냐. 그것은 곧 의미에요. 무지개를 점반사로 규정해서, 싸인과 코싸인 함수로 표현하는 게 아니라, 무지개에 대한 우리의 직접 경험, 망원경 보고 해부하는 게 아니라 내 의식으로 경험하는 거지. 직접 경험할 적에 로고스를 찾는다고 했는데 그 로고스는 뭐냐?

그 로고스는 수학법칙, 논리 규칙, 함수도 아니고 의미지. 한 마디로 경험의 ‘의미’를 찾는 거야. 경험을 넘어선 본질, 이데아, 수학 법칙, 신의 의지 등이 아니라 경험의 의미를 찾는 거야. 그것이 현상이지.

‘현상의 의미는 의식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며, 따라서 후설에게서 의미를 탐구한다는 것은 곧 의식의 활동 내용을 탐구한다는 뜻이다.’ 경험의 의미를 찾는다는 말에 대해 생각해 볼 때 경험이라는 것은 의식하는 거지. 주체성이 경험을 하는 거지. 이게 사실은 뒤에 가면 후설이 비판받는 부분이거든. 왜냐하면 경험이라는 게 의식만 하는 게 아니라 내 몸도 하거든요.

또 오늘날 입장(사유)에서 보면 후설의 생각이 나이브(naive)한 건, 무의식 때문이야. 베르그송의 무의식이든 , 프로이드의 무의식이든, 화이트헤드의 무의식이든, 무의식의 레벨을 인정하고 들어가기 때문에 순수한 우리의 주체성의 경우를 고려한다는 게 굉장히 고전적인 생각이죠. 그래서 현대인들에게는 썩 설득력 있게 다가오지 않죠. 어쨌든, 이 사람에게는 경험은 의식이 하는 거야.


▲ 후설의 '순수 경험'

그런데, 경험적 의식(empirical)과 선험적(transcendental) 의식을 나눈다는 부분이 매우 중요하죠. 조심할 건 'transcendental'은 '선험적'으로 번역되기도 하고 '초월론적'으로 번역되기도 해요. 무슨 얘기냐 하면 전통 철학자들은 현상과 본질을 나누는데, 이 사람은 현상 자체 내에서 순수한 경험과 순수하지 않은 경험을 나눠요.

예를 들어 꽃을 보면, 꽃 알레르기 있는 사람이 '꽃이 싫다' 고 하는 것은 우리 경험이지요. 꽃에 대한 순수한 경험이 아니라 인간의 주관적인 경험이에요. 꽃 장수가 이 꽃 돈 좀 되겠다 하는 것도 순수한 경험이 아니죠.

그러니까 꽃이라는 존재, 현상의 의미를 찾으려면, 우리의 비본질적인 경험을 다 솎아내야 되요. 그걸 이 사람은 현상학적 환원이라고 얘기하죠. 대상의 의미, 현상의 의미를 찾기 위해선 우리의 의식을 통해서 직접 경험해야 하는데, 우리의 의식에 불순물이 많아서 자기 여러 개인적 경험을 투영한다.

그러니까 empirical한 걸 다 빼야 된다고 말해요. 그래서 나중에는 순수 경험에 도달한다는 주장이죠. 그런데 순수 경험 이라는 게 실제로 있는지 잘 모르겠어. 없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죠. 남들은 다 없다 그러는데 후설만 있다고 그래요.

내 개인적 생각에는, 순수 경험이 가능한 건 오히려 수학적 영역이거든. 예를 들어 칠판에 파란 원이든, 노란 원이든, 두껍게 그리든 얇게 그리든 원의 본질은 하나밖에 없죠? 어찌보면 이 사람은 탈 전통적 사유를 하는데, 그 안에서 너무나도 전통적 사유를 하는 거야.

사고방식은 너무나 고전적인 방식이지. 마치 플라톤이 이데아 얘기 할 때 쓰던 논법을 현상 세계에서 하려는 거야. 나무에 대한 여러 경험이 있는데, 비 올 때 다르고 맑을 때 다르고 다 다르지. 그걸 다 빼면 순수한 경험이 있다는 거야.

이게 꼭 플라톤의 이데아 같지 않아요? 대상과 차원만 다르지. 재밌는 사람이야. 탈전통적 철학을 하는데 사유 방식은 굉장히 전통적이야. 내 추측이지만 어쩌면 수학을 할 때 사고 습관을 현상 세계에서 확인하려는 거 같아.

어쨌든, 경험적 인식을 현상학적으로 환원시키고 (epoche 판단중지), 그 대상이 내 의식에 순수하게 떠오르는 순간을 순수 경험이라고 했어요.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의식적 세계(우리의 의식을 떠난 세계가 아니에요)의 본질적 구조(순수 경험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거예요.) 들의 구성의 역사”를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죠. 이런 후설의 사유는 기본적으로 ‘세계(world)’를 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원자들의 집합도, 에네르기도, 함수도 아닌, 우리가 직접적으로 경험하는 세계라는 거지요.

‘우리가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나무, 돌멩이, 사람들, 동물들, 푸른 하늘, 땅, 풀, ... 등 ‘사물들’, ‘세계’는 후설의 시대에 와서는 원자들, 텐서 방정식, 그래프, 수식, 세포, 탄성 곡선, ... 등과 같은 개념적-이론적 존재들 속에서 와해되어버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사고는 마침내 인간의 의식까지도 수량화, 법칙화하려는 경향에 이르렀다. 초기 베르그송, 후설, 제임스, 니시다 기타로 등은 모두 이런 문제의식을 공유했던 철학자들이다.‘

그러니까 베르그송도 초기에는 현상학과 비슷해요. '의식은 흐름이다, 지속이다' 이걸(의식을) 자르고 오려 붙이는 것은 시간을 왜곡하는 것이다. 근데 나중에 가면 달라지죠. 베르그송은 초기에는 경험세계를 이야기하지만 나중에 가면 우주 전체를 이야기하는 거대한 차원으로 가요. 그래서 형이상학 내지는 존재론으로 가지요.

후설은 역시 경험주의, 인식론자죠. 미국의 윌리암 제임스(James William)도 마찬가지에요. 유명한 개념이 의식의 흐름(stream of consciousness)이라는 개념이 후대에 영향을 많이 끼치죠. 베그르송의 지속과 흡사한 면이 있어요.

니시다 기타로는 선불교적 의미에서의 인간 내면세계를 현대 언어적 언어로 새롭게 재창조한 사람이예요. 이런 사람은, 모든 게 수량화되고 인간 의식, 주체성마저 대상화되는 시대의 철학자들이라고 불 수 있어요.

‘하이데거가 현상학의 모토로서 “사태들 자체로(zu den Sachen selbst)”를 말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이다. 이 점에서 현상학은 새로운 의미에 있어서의 경험철학이다.‘

그러니까 현상학의 입장에서 영국 경험론을 보면, 인간의 의식과 주체성에 기반한 경험철학이 아니라 인간의 경험조차도 너무나 분석적으로, 원자론적으로 본 것이 영국 경험론이죠.

‘후설의 사유는 많은 변화를 겪었다. 그리고 후설은 체계를 제시한 철학자라기보다는 늘 사고 실험에 몰두한 철학자였다. “나는 내가 본 것을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안내하고 보여주고 서술하려 할 뿐이다.”’

후설의 사유를 몇몇 측면으로 나눠 보면 첫째 ‘순수’ 현상학이죠. ‘논리학에 철학적 기초를 부여하려 한 작업으로, 사념적 존재들(수학적, 논리학적 존재들-예컨대, 삼각형, 원)의 본질적인(eidetique, 그리스어 ‘eidos’에서 유래) 면들, 불변적인 면들을 파악하고자 했다.‘


▲ 선험적 현상학

두 번째가 ‘선험적’ 현상학이에요. 좀 말이 어려운데, 모든 의미작용들 자체가 의식의 지향성을 근거로 한다는 것을 밝히는 작업이에요. ‘주체가 구성하는 인식의 범주들이나 개념들을 발생론적으로 파악하고자 했다.

대상들의 세계를 구성하는 것은 선험적 주체이며, 이 선험적 주체가 탐구의 중심이다.’ 그 다음 ‘생활세계적’ 현상학이에요. 본질주의를 포기하고, (아까 이야기한 의미의 본질, 순수 경험이 있다는 걸 포기하고) 일상 세계의 의미작용들을 밝히려 한 작업이지요.

‘인간의 문화의 역사가 사유의 초점에 오며, 여기에서는 표백된 본질들의 세계가 아니라 생활세계를 살아가는 인간이 문제가 된다.’ 그 중에서 순수 현상학은 나중에 극복되어 큰 의미가 없고, 선험적 현상학이 후설이 집중적으로 전개한 부분이죠.

그리고 생활세계 현상학은, 후설 스스로가 그 가능성을 탐구했지만 그 길로 가지 않고 가능성만 그렸죠. 재밌고 아이러니하게도 후설 이후의 철학자는 대부분 선험 현상이 아니라 생활 세계적 형상학을 연구했죠.

‘칸트가 그랬듯이, 후설 또한 의식을 탐구하면서도 스스로의 작업을 심리학과 구분하려 했다. 후설은 1894년 프레게의 『산수의 기초』를 읽었으며, 이로부터 (밀 등으로 대표되는) 수의 기원에 대한 심리학적-경험주의적 설명의 한계를 깨달았다.’

예컨대, 원은 인간이 보름달, 나무 그루터기, 물의 파문, 눈동자 등을 보면서 ‘아, 동그라미’ 이렇게 생각한 거예요. 이게 수학에 대한 경험주의적 설명이지. 그게 아니라 원의 본질(에센스)이 있다고 보는 게 말하자면 본질주의지.

‘심리주의적-자연주의적 설명만으로는 과학적 진리들의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특성을 정당화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이점에서 19세기 심리주의/자연주의에 대한 후설의 관계는 르네상스 회의주의에 대한 데카르트의 관계, 영국 경험론에 대한 칸트의 관계와 유사하다. 보편성과 필연성을 지키려 했다는 점에서 후설은 고전적인 철학자들의 유형에 속한다.’

그러니까 경험 세계의 로고스를 찾고자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은 보편성과 필연성이라는 전통 철학의 대전제를 유지하는 사람이에요. 그런 점에서 역설적으로 아주 고전적인 생각을 한 사람이죠.

‘후설은 논리학적-수학적 대상들의 탈물질성(Idealitat)’ - 논리학적 수학적 대상들은, 물질적으로 존재하는 대상들에 대한 경험을 통해서 성립하는 게 아니라, 아이디얼리티가 된다는 것이죠. ‘칸트가 그랬듯이 ‘사실의 문제’와 ‘권리의 문제’를 구분했다. 사실의 문제는 경험적이고 발생적인/인과적인 문제이지만, 권리의 문제는 진리의 정당화의 문제이다. 그것은 인간적 본성의 우발성들로부터 벗어난 진리의 문제이다.

후설은 데카르트의 ‘코기토’와 칸트의 ‘선험적 주체’를 이어 선험적 의식(초월론적 의식)을 학문의 토대로 삼았다. 때문에 후설은 의식이라는 존재의 특성을 현상학의 기초로 삼았는데, 그것은 바로 ‘지향성개념이다. 모든 인식은 무엇인가의 의식이다.‘

그런데 이 ’의식‘이라는 것은, 예컨대 이 종이는 그냥 in itself 자기로서 만족해. 사물은 그냥 존재하는 데 비해서, 의식이라는 건 자기가 아닌 것 종이든, 건물이든, 도시든, 타인이든 간에 바깥을 향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지향성이죠. 보통 사물은 탁자는 탁자고, 건물은 건물이고, in itself에요.

의식이라는 놈은 자기(itself)가 아니고 자기 아닌 걸 끝없이 나간한다는 거죠. 그게 말하자면 인간의 의식, 주체성의 본질이죠. 그리고 이 의식이 밖으로 향해 가는데, 항상 의식이 향하는 대상, 사물이 떠오르죠.

떠오르는 조건, 그러니까 뭔가가 떠오르는 건 어떤 지평을 전제하고 떠오르죠. 그걸 (이 사람은) 지평이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의식의 지향성이라는 것과 대상이 떠오르는 지평은 맞물려 있어요. 내가 초원을 달리는 말을 볼 적에 초원이 지평이죠.

'데카르트에게서 코기토와 사물의 본질은 신이 준 ‘자연의 빛’에 의해 일치한다. 칸트에게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의식과 그 의식을 촉발하는 잡다(雜多)이며, 이 '잡다'는 의식에 의해 구성됨으로써 비로소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된다. 후설에게서 의식의 일방적 성격은 의식과 대상의 양방적 성격으로 바뀌며, 또 자연의 빛은 내재적 방식으로 재현되며, 의식과 그 대상은 일치하는 것으로 전제된다.'

그래서 이 사람은 내가 세상을 경험하는데, 경험적 자아가 아니라, 내 순수 자아의 의식 활동을 noesis라 그래요. 그리고 노에시스에 의해 포착되는 것, 경험의 알맹이를 noema하고 해요. 그러니까 현상이라는 건 이 노에마(의미)를 찾는 거지. 그게 의미예요.

꽃을 보는데 꽃에 대한 주관적인 경험이 다 빼 버릴 적에, 그때 내 순수 사유, 즉 노에시스가 생기는 거죠. 그리고 그 노에시스에 의해 포착되는 게 꽃의 의미지. 의미본질. 그 아래에는 (노에마 아래)에는 밑바닥이라고 할 수 있는 hyle라고 부르는, 떠오르지 않는 게 있지.

‘그래서 후설(현상학)은 질료층, 의미층, 의식층 세 층위의 구조로 진행된다. 이 순수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판단 중지(epoche)가 필요하며, 그 후 현상학적 환원을 통해서 현상학적 연역이 가능해진다. 환원이란 결국 의식에 주어진 경험적 소여(所與)들을 정화함으로써 ‘순수 현상들에 대한 과학’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 현상학이 다루고 있는 것들


▲ 후설은 흐름과 동시에 본질들(Wesen)을 강조했다

베르그송도 그렇고, 제임스도 그렇지만 의식이라는 것을 대상화하고 분석하는 것에 대해서 반대로 생각하는 사람은 꼭, 묘하게도 꼭 시간을 끌고 들어와요. 제임스가 말하는 의식의 흐름(stream of consciousness)과 베르그송이 말하는 지속도 그렇구요.

후설 역시 시간을 많이 이야기하는데 칸트는 인간이 시간을 인식할 수 있다고 보지 않았죠. 왜냐하면 시간은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대상이 성립하는 조건이에요. 달리 말하면 시간은 대상을 대상으로서 성립할 수 있게 해 주는 주체의 조건이에요.

시간이 이렇게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시간이란 조건을 가지기 때문에 사물의 시간이 성립하는 거예요. 그래서 ‘ 그것을 순수 직관으로서 모든 인식의 형식적 조건으로서, 그래서 분해 불가능하고 분석 불가능한 것으로서 생각했다. 그리고 시간을 공간과 정확히 대칭적인 방식으로 제시했다는 점에서, 칸트의 시간은 베르그송이 비판했던 ‘공간화된 시간’의 전형이다.‘

그러니까 전 시간에 베르그송을 이야기하면서 사람들이 자꾸 시간을 시간 자체로서가 아니라 공간화해서 이해한다고 했죠. 근데 그 비판에 딱 맞는 사람이 칸트에요. 칸트는 시간에 대한 이야기와 공간에 대한 이야기가 정확히 대칭 되요.

‘이에 비해서 후설은 시간의식의 분석에 상당한 노력을 경주했다.‘ 어떻게 생각해 보면 후설의 본질주의하고 시간분석이 충돌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겠죠? ’그러나 이것은 의식을 흐름으로 볼 것인가, 그 흘러가는 와중에 나타나는 본질적 측면들을 볼 것인가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의식을 흘러가는 측면에서 볼 것이냐, 아니면 흘러가는 측면에서 나타나는 본질을 볼 것이냐는 문제죠. ’전선은 흐름이지만 단면으로 보면 많은 동그라미들의 집합으로 볼 수 있다는 사실에 비유할 수 있을 것 같다.‘

의식은 흐름이지만 거기에 또 본질들이 나타나는 이런 구도로 보면 됩니다. ‘후설은 흐름의 주안점을 둔 ‘발생적 현상학’과 그 와중에서 확인되는 의식의 본질들에 대한 ‘정적 현상학’을 동시에 진행시켰다고 할 수 있다. ‘정적 현상학’은 후설을 베르그송과 구별해 주는 대목이다.‘

다시 말해서 베르그송은 전적으로 흐름만을 강조했지만 후설은 흐름과 동시에 본질들(Wesen)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죠. 그 다음에 니시다 기타로는 의식의 사건을 제시함으로써 베르그송과도 좀 다르고 후설하고도 다른 사상을 제시했죠.


▲ 후설, 살아있는 현재에 대한 분석으로부터 - 생활 세계적 현상학으로

'시간은 기억과 기대, 상상 등과 같은 활동을 담지한다. 후설은 '살아있는 현재'(lebendiges Gegenwart)에 대한 분석에서 출발해,‘ 현재라는 건 그냥 시간으로 해서 딱 공간화한 다음에 하는 게 아니구요. 설명하자면 우리가 시간을 설명할 때 줄을 긋죠? 이것 자체가 이미 공간화 하는 거지.

그래서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어쩌고, 이렇게 하는 게 아니라 계속 흘러가는 생생한 현재, 이 사람은 그것을 강조하죠. 이 점이 베르그송과 비슷하죠. 독일 맥주 집 같은 레벤드 게스라는 게 있고, 우리 나라에도 그런 집이 몇 군데 있지. 아주 맥주가 싱싱하다, 살아있다는 뜻이지.

그래서 ‘의식이 현재를 흘러가면서 과거(Retention)로 지향하고, 미래(Potention)를 지향하고,' 그래서 기억하기도 하고, 기대하기도 합니다. 의식에 이런 활동이 없다면 인간에게는 후회도 기대도 없겠지. 과거를 Retention 못 하니까 후회할 것도 없고, 미래지향 못 하면 우리가 예상하지도 기대하지도 않겠지. 그런 점에서 의식의 이런 걸 분석하는 게 이 사람의 중요한 공헌이죠.

‘후설은 이러한 분석을 통해서 모든 것을 과학이 만들어낸 ‘관념의 옷(Ideenkleid)’ 로 환원시키고자 하는 객관주의에 저항하기도 했다.‘ 관념의 옷이란 아까 얘기했듯이 분석하고, 수량화하는 행위들이죠. 그는 이 객관주의가 유럽학문의 위기는 물론이고 유럽 자체의 위기를 불러왔다고 보았으며, 유럽 학문의 위기를 선험적 현상학으로 구제하려 했다. 후설의 현상학은 생활 세계적 현상학의 형태로 메를로-퐁티에 의해 계승되었다.

생활세계 현상학은 뭐냐면, 내 순수의식으로 사물들의 의미본질(noema)를 파악해 내는 현상학이 아니라, 내 몸을 가지고 살아가는 그대로, 내가 만나게 되는 의미들. 그 사이에 순수하고 불순하다는 경계선은 없죠. 그냥 내가 그때그때 내 몸으로 체험하면서 살아가는 어떤 삶, 의미를 탐구하는 것이 이 생활세계 현상학이죠.

이 생활세계를 메를로-퐁티 같은 사람은 체험된 세계죠. 망원경으로 본다, 현미경으로 본다, 수식으로 파악한다, 그래프를 그린다는 게 아니라, 몸으로 경험하는 체험한 세계, 그 세계를 생활세계로 보는 거죠.


▲ 실존주의 -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

현상학과 실존주의와 관계는, 변증법과 맑시즘의 관계와 비슷해요. 현상학과 변증법은 철학적 사유방식, 사유 문법, 사유의 틀이고 그 사유를 가지고서 보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삶을 사유한 내용들이 실존주의나 막시즘이죠.

변증법은 인식론 또는 철학이고, 그것이 정치로 화(化)한 게 막시즘이듯이, 현상학은 하나의 인식론 내지 철학이고, 그것이 좀 더 대중적이고 현실적인 형태로 일반화해서 나타난 것이 실존주의에요. existence의 반대말은 essence 죠? ‘인간’이 하나의 본질이라면, 철수는 하나의 실존이에요.

또 ‘개’가 하나의 본질이라면, 뽀삐는 existence, 실존(實存)이에요. 문자 그대로 실존하는 거죠. 두 개 단어가 만들어 지는 것은 중세에요. 원래 고대에는 없는 말이에요. 굳이 일치시킨다면 existence는 todeti고 essence는 toti en einai 죠.

원래 에센스라는 거는 God‘s ideas, 그러니까 신의(신이 갖고 있는) 관념들, existence는 이 관념들이 물질에 구현된 거예요. 인간은 본질이지만, 철수는 인간 본질이 어떤 특정한 물질에 구현된 거지. 그런데 existence의 양상(modality)은 우발성(contingence)이에요.

예컨대 영희가 곱슬머리로 태어났다고 합시다. 영희가 인간으로 태어난 건 원래 신의 계획에 있는 것이지만, 곱슬머리로 태어난 건 신의 계획에 없는 거야. 그건 어디에 원인이 있는 거죠? 아까 말한 ’물질‘에 원인이 있는 거지요. 그러니까 영희는 곱슬머리로 태어났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었어. 근데 태어나 보니까 곱슬머리였어. 이런 게 우발성이야.

그런데 existence보다는 essence가 항상 앞서요. 본질이 실존을 앞서는 거예요. 본질이 먼저 있고, 그것이 물질에 적용이 되어서 구현이 되면 개개의 실존들이 있는 거지. 이 실존이 뭐냐면 독일어로 Dasein 이에요. essence는 Sosein이고.

그러니까 인간의 본질, 형상이 먼저고 그 본질에 입각해서 철수, 영희, 톰, 앙드레가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본질이 실존을 앞서는 거죠. 사르트르가 어떤 말을 하냐면, 본질 같은 개념들은 ‘후설이 말한 Ideenkleid다.’

우리가 순수하게 체험하는 것, 경험하는 것, 생활과 ‘체험 세계’에서 만나는 것은 철수나 영희지, 인간이 아니죠. 인간은 하나의 개념이고, 본질이고, 관념이죠. 순수 경험론적으로 볼 적에 말이에요. 전통 철학에서는 인간의 본질이 먼저 있어.

그게 이데아로 존재하든, 신의 관념으로 존재하든, 모나드로 존재하든, 있어요. (모나드는 좀 다르지만) 그 다음에 거기에 입각해서 개체가 있는 거예요. 근데 현상학적 입장에서 볼 적에는 말이죠. 예컨대 인간 본 사람 손 들어봐요. 우리가 보는 거는 철수, 영희를 보는 거지 인간은 본 적이 없죠? ‘인간’은 하나의 컨셉이지.

그러니까 사르트르가 볼 적에 가장 있다,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존재가 아니라 거꾸로 실존이다. 그래서 이 사람은 ’실존이 본질을 앞선다‘고 했어요. 전통철학에서 보면 상당히 도발적인 개념이지. 우리가 보는 거는 뽀삐, 해피, 멍멍이, 바둑이 같은 애들이지. 개의 본질을 본 건 아니죠. 그래서 실존이 본질을 앞선다. 이게 실존주의에요. 고유한 개체성, 주체성을 갖는다는 게 실존주의에요.

‘후설은 현상학을 통해서 과학을 정초하려 했지만, 그리고 과학으로 하여금 심리주의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하려 했지만, 현상학이 ‘의식(Bewußtsein)’을 과학의 토대로 삼았다는 점에서 과학의 실제와는 다소 거리가 멀다 하겠다.‘

그러니까 후설은 자신의 현상학이 과학에 근거, 토대를 제시할 수 있다고 믿었고, 과학이 놓치고 있는 좀 더 근본적인 차원을 찾는다고 제시했고 그래서 자기의 학문이 엄밀한 학(學)으로 얘기했죠. 사실 이것은 번지수를 좀 잘못 찾은 거지.

후설이 이야기하는 순수경험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있다손 쳐도 그것이 과학의 토대, 정초(foundation)가 된다는 이야기는 전혀 설득력이 없죠. 오히려 현상학의 의미는, 우리가 과학적 사유를 하다 보면 놓치게 되는 차원, 과학적으로 객관화, 보편화, 수량화, 함수화하고, 심층적 원리를 찾다 보면 놓치게 되는 게 있죠.

그게 뭐냐면 우리의 직접적 체험의 삶의 공간이죠. 그거를 보여주는 데 현상학의 의미가 있는 거지. 현상학이 과학의 정초가 된다는 것은 번지수를 한참 잘못 찾은 거죠. 메를르-퐁티도 마찬가지고. 왜냐하면 과학의 특성이라는 것을 거꾸로 바슐라르가 말한 것처럼 인식의 단절에 있죠.

내가 직접적으로 체험한 것과 단절되어서 현상 세계 너머에 본질을 포착하는 게 과학의 핵심이지. 현상학적인 방식으로 과학을 정초한다는 건 전혀 이치에 닿지 않죠.

‘때문에 후설의 이후의 현상학은 후설에게서 여전히 남아있는 본질주의 및 주객일치라는 고전적인 전제들을 떼어내고 과학 이전의, 즉 인식론적 단절 이전의 생생한 생활세계를 구성하고자 했다.’ 아까 얘기했듯이, 후설이란 사람은 현상학을 제시해서 새로운 길을 열었지만, 그 사유방식은 너무 고전적이에요.

본질, 순수의식, 객관성, 필연성, 보편성을 중시하는 사유는 너무나 고전적이죠. 그래서 그 이후의 철학자들이 다 버려요. 그리고 과학적 본질, 함수, 법칙 등등으로 이야기하기 이전에 우리가 몸을 가지고 살아가는 생생한 세계, 감각, 지각의 세계 메를르-퐁티가 중시한 지각(perception)의 세계. 내가 이 탁자가 물리학적으로는 입자들의 집합일지 몰라도 내 지각의 세계에서는 아니란 말이야.

내 지각으로는 그냥 딱딱하죠. 무지개도 마찬가지죠. 과학의 관점에서 보면 싸인, 코싸인 함수, 수학적 표현이지만, 내가 체험하는 세계에서 보는 무지개는 전혀 다른 차원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런 체험을 밝혀준 데에 현상학의 의미가 있다고 봐야지 현상학이 과학을 정초한다는 건 번지수를 잘못 찾은 거지.


▲ 바슐라르

재밌는 건, 바슐라르 자신도 한편으로는 인식론적 단절을 통한 과학을 이야기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현상을 이야기해요. 바슐라르는 두 개 모두를 이야기하는 거지. 우리가 현상적인 이미지의 세계, 감각의 세계를 벗어나서 수학적 차원으로 들어가면 그게 과학이라는 거죠.

그러면 현상, 감각, 의미의 세계는 의미가 없느냐? 이 사람은 아니라고 하죠. 그건 그것대로 의미가 있어요. 예컨대 불을 화학적으로 연구하는 맥락이 있는가 하면, 현상적 의미를 생각해 보면 어릴 때 시골 사는 사람은 잘 알 텐데 논두렁에 불을 놓잖아. 그 때 불이 우리에게 주는 미학적 느낌. 오늘날 ‘물, 불, 공기, 흙’ 이라는 건 더 이상 근본 원소(element)가 아니지.

지금은 훨씬 더 심층으로 갔지요. 그럼 '물, 불, 공기, 흙'은 의미가 없느냐? 바슐라르는 의미가 있다는 거예요. 과학적 의미가 아니라 현상학적 의미가 있다. 이렇게 바슐라르는 두 개 다를 이야기하죠. 바슐라르가 현상 세계는 그 자체로서 인정을 해 주는 건 좋았는데 그것을 미학적으로만 이야기했다는 한계가 있어요. 『대지와 의지의 몽상』, 『촛불의 미학』 뭐 이런 거죠.

‘현상학은 타인, 신체, 실존, 사회, 역사, 문화와 같은 문제로 파고들어감으로써 많은 성과를 거두었죠. 특히 하이데거, 사르트르, 메를르-퐁티, 가다모, 뤼케르, 레비나스 이런 사람들이 대표적이 인물들이죠.’ 현상학은 본래 인식론적 성격을 띄고 있죠.

‘그러나 생활세계 현상학은 결국 생활, 인생을 탐구하는 사유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이 사유가 결국 실존주의로 귀착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에는 ‘현상학적 인간존재론(l'ontologie humaine phenomenologique)’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데, 이것은 후설의 현상학이 (하이데거의 전기 철학을 거쳐) 실존주의로 전환되었음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왜? ontologie humain, 그러니까 Human ontology지. 의식을 통해서 어떻게 대상의 본질을 읽어내는 게 문제가 아니라, 내가 의식을 통해서 대상을 어떻게 구성하느냐를 얘기하는 게 아니라, 그런 의식을 가진 인간존재가 무엇이냐는 거예요. 그래서 (인식론이 아니라) 인간 존재론으로 넘어가죠.


▲ 실존주의

실존주의는 2차 세계대전이라는 상황과 맞물리면서, 세계 지성계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게 되고 20세기에 가장 대중적인 철학이기도 하죠. 그 후에는 구조주의가 실존주의를 눌러버렸고, 푸코 등이 나오면서 실존주의가 옛날 일이 되었지만, 옛날에는 실존주의는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했지.

여러분들 부모 세대에 공부 좀 한 분들 서재에 가면, 야스퍼스 이런 사람 한 두 권씩 꼭 있을 거야. ‘사르트르에게 존재란 기본적으로 우발적인 것이다.’ 그런데 중세철학도 우발적이야. 근데 차이는, 중세철학은 본질이 있고 우발적인 거야.

신의 관념으로서의 본질이 있고, 그것의 구현이 우발적인 건데, 사르트르는 신도, 본질도 없이 순수 우발성, 절대 우발성이야. 신이나 본질은 아예 전제되지 않는 제거된 완벽한 우발성이지. 그러니까 우리가 이 세계가 왜 존재하는지, 왜 지구가 존재하고 우리가 왜 존재하는지 아무도 절대 모른다는 완벽한 우발성이지.

사르트르의 구토라는 소설이 그걸 묘사하죠. ‘구토’에서 주인공이 마로니에 뿌리 앞에서 자기 존재, 내가 왜 존재할까라는 문제에 부딪히지. 또 까뮈의 ‘이방인’도 그런 소설이죠. 다른 사람들은 이미 존재의 복잡한 의미의 그물망이 쳐진 삶을 살아간단 말이야.

근데 주인공은 의미의 그물망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지. 그래서 이 사람은 항상 세계를 원초적인 존재로만 보는 거야. ‘구토’하고 ‘이방인’은 말하자면 쌍둥이 같은 소설인데, 또 카프카의 ‘변신’도 마찬가지지요. 이것은 바로 이 세계가 근본적으로 우발적인 것이다. 나아가 불투명하고 불가해한 것이다.

그러니까 과학적 철학하고는 태도가 완전 다르죠. 과학적 철학은 그렇게 안 보죠. 이 세계는 인식할 수 있고 예측할 수 있다고 논리가 진행이 되죠. 근데 이 사람은 이 세계 자체는 아예 불가해하다고 전제하고 나가는 거지.

‘따라서 인간이 알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 즉 의식의 존재인 자기 자신이다.’ 그러니까 자기가 알 수 있는 거는 자기 주체성밖에 없는 거야. ‘더 정확히 말해, 주체성으로서의 자기 자신이다. 의식적 주체는 세계에 나 있는 구멍이다.’ 세계는 다 메워져 있어요. 이런 탁자, 종이 그대로 존재하고, 다 메워져 있는 건데, 의식은 뻥 뚫려 있는 거야.

그것은 무이고 부정이다. ‘이를 사르트르는 즉자와 대비하여 대자로 부른다.’ 그러니까 사물들은 in itself고 인식은 for itself 죠.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이런 구분에 입각해 타인, 시선=눈길, 자유, 책임, 참여를 비롯한 다양한 주제들을 다루었다.‘

의식적 주체가 왜 무이고 부정, 구멍인가? 다른 사물들은 그냥 그것 자체(in itself)이기 때문에 그냥 차 있는 거지만, 의식이라는 것은 자기가 아닌 타자에게 끝없이 향하죠? 예컨대 이 탁자는 무게가 얼마고 규정이 딱딱 되어 있어서 옴짝달싹할 수 없는, 차 있는 것이지만 의식이라는 것은 꽉 규정이 되어 있는 게 아니라, 끝없이 다른 걸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죠.

말하자면 사물들이 이렇게 꽉 차 있는 거라면 의식은 이렇게 뻥 뚫려 있는 거야. 무(無) 또는 ‘아니다(negation)’ 이라고 할 수 있는 존재이고요. 존재의 무. 그냥 그것만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아 오늘 내가 검은 양복 말고 파란 양복 입겠다‘고 생각했는데, 자기가 검은 거 입었어. 그럼 내가 ’이건 입고 싶은 양복이 아니다!‘ 하고 부정(negation)을 하는 존재가 대자야.

그래서 결국 우리가 니체나 베르그송 같은 사람들의 학문 태도하고 후설 식의 현상학 태도가 굉장히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 두 개의 관점, 무지개는 과연 점반사의 결과인가, 우리 꿈을 상징하는 대상인가 이런 문제로 볼 수 있죠.

또는 이 탁자는 과연 물리학자들이 얘기하듯 무수한 입자들로 이루어진 것이냐. 내가 느끼는 대로 딱딱한 것이냐 하는 문제에요. 이런 문제는 어찌 보면 세계를 이해하는 데 아주 근본적인 문제이고, 서로 대립되는 입장이에요. 두 개를 어떤 식으로 과연 화해시킬 수 있는가하는 문제는 대단히 중요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