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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강 베르그송과 형이상학

하나님아들 2020. 3. 31. 23:46

제2강 베르그송과 형이상학

◆ 베르그송은 형이상학을 어떻게 정립했는가


▲ 왜곡되어 해석되어 오던 '형이상학meta-physica'의 새로운 정초를 마련한 베르그송

오늘은 베르그송과 메타피지카(metaphysica)의 부활이란 제목으로 얘기해 봅시다. meta-physica 라는 말은 원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붙은 책 제목이죠. 원래는 제목이 없는 책이었는데, 편집을 하다 보니까 만들게 된거죠. 내용상, physica 다음(after)에, 또는 physica를 넘어서(beyond) 읽어야 될 책이다 싶어서 메타피지카라는 제목을 붙였죠.

이 때 피지카라는 거는 자연과학이지. 자연과학을 좀 넓게 해석하면 경험과학이죠. 그런데 이 말을 훗날 일본 사람이 형이상학이라고 번역하죠. 주역 계사전에 보면 형이상자위지도(形而上子爲之道), 형이상의 것을 도라고 하자, 형이하자위지기(形而下子爲之氣), 형이하의 것을 기라고 한다는 대목이 나오거든요. 그걸 따와서 번역을 했어요. 원래 형이상학은 메타-피지카죠. 피지카를 전제하는 메타 피지카인데, 이것이 근대 철학에 와서는 상당히 부정적이고 폄하적인 의미로 사용돼요.

왜냐하면 근대에 들어오면 경험주의나 실증주의가 발달해요. 흄(David Hume) 같은 사람의 경험주의, 또 칸트(Immanuel Kant) 같은 사람의 비판 철학, 콩트 같은 사람의 실증주의가 전부다 고중세의 형이상학을 비판하는 거죠. 그런데 이들이 형이상학을 비판할 적에는 사실 메타-피지카라의 적합한 의미의 형이상학이었다기보다는 중세적 의미의 형이상학이었어요.

원래 이것은 그리스의 철학인데 이것이 중세에 오면 기독교 신학과 합쳐지게 되죠. 그러면서 사실 피지카와 관계없는 게 되어 버려요. 원래는 피지카가 전제되고, 거기에 대한 메타적인 작업을 하는 게 메타피지카거든요.

예컨대, 물리학이 전제되고 거기에 대한 시공간의 문제라든가 물질, 인과 관계 같은 걸 연구한다거나, 생물학을 전제하고 기계론, 목적론을 연구하는 게 메타피지카이죠. 근데 중세에 기독교 신학 (Theology)과 결부되면서 사실상 피지카와 단절되어 버려요.

그러면서 메타-피지카라는 말이 본연의 의미가, 굉장히 사변적이고 독단적이고 실천할 수 없는 의미로 뉘앙스가 바뀌죠. 그러면서 근대 철학에 오면 형이상학이란 건 완전히 폄하돼요. 칸트 같은 경우는 조금 맥락이 다르긴 하지만. 칸트는 어떤 의미에서는 메타피지카를 새롭게 정초했다고 볼 수 있는 면이 있어요.

그러나 어쨌든, 이런 철학(실증주의, 경험주의 등)은 형이상학을 완전히 폄하하게 되었죠. 그래서 지금도 저런 근대 비판을 거친 다음에 베르그송에 의해서 메타피지카를 새롭게 정초가 되어 가지고 다시 정리되거든요. 그리고 다시 니체하고 베르그송에 의해서 형이상학이 다시 새롭게 정초가 되는 거예요. 그리고 화이트헤드 같은 사람도 나오고 말이죠.

근데 지금도 이 말이 많이 이런 뉘앙스(사변적, 독단적)로 사용되어요. 책을 읽다 보면 형이상학이란 말이 굉장히 폄하되어서 사용되죠. 근데 그건 니체 이후에 형이상학이 완전히 새롭게 바뀐 것을 잘 모르고, 이런 뉘앙스(사변적, 독단적)로 사용하는 거예요.

형이상학이란 말을 잘못 이해하는 거지. 니체가 새로운 형이상학의 단초를 마련했다면, 원래 의미의 메타피지카(형이상학)를 현대적인 맥락에서 완전히 새롭게 부활시킨 사람은 베르그송(Henri Bergson)이죠.


▲ 형이상학은 세 가지로 분류된다

근데 (현대) 메타피직이라고 할 때에도 대체적으로 세 부류가 있어요. 하나는, 피지카가 전제되지 않는 사변적이고 중세적인 방식이 아니라 새로운 방식으로 여러 종류의 피지카들을 종합하는 유형이 있습니다. 여러 종류의 피지카의 성과를 넓게 종합함으로써 세계에 대한 포괄적적인 생각을 제시하는 유형의 형이상학이 있죠. 가장 대표적인 사람은 베르그송, 화이트헤드, 들뢰즈 같은 사람이에요.

두 번째 형이상학은, 경험적인 과학들을 내용적으로 종합하는 게 아니라, 그 밑바탕에 존재하는 논리적, 수학적 구조 또는 그것들을 표현하고 있는 언어의 구조에 포인트를 두는 경우가 있어요. 전자가 내용적으로 종합한다면, 후자는 형식적으로 분석하는 거죠. 성격이 판이합니다.

내용적으로 종합하는 것과, 형식적으로 분석하는 건 참 다르죠. 예를 들어서 프레게, 러셀, 비트겐슈타인 같은 흔히 말하는 분석철학의 계통이죠. 흔히 분석철학은 형이상학을 부정한다고만 알려졌지만 사실은 아니죠.

분석철학은 형이상학을 새로운 방식으로, 앞서 말한 형이상학이 현대과학을 내용적으로 종합한다면, 두번째 의미의 형이상학은 논리적 분석을 통해서 접근하는 입장이에요. 요게 다섯 번째 시간에 공부할 내용입니다.

또 하나는 형이상학적인 것, 메타피지칼한 것, (이 사람들은 사실, 메타피지칼이란 말 좋아하지 않지만) 그걸 어디에서 찾느냐 하면, 인간적인 인간 고유의 것에서 찾아요. 인간의 의미, 인간의 실존, 문화 같은 것들에서 찾습니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자연 과학을 종합하고 흡수하는 게 아니라 그 반대죠.

과학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 과학으로 접근하기 힘든 문제, 인간의 삶의 의미라든가 가치라든가, 타인과의 관계라든가, 인간실존, 종교적 신비 체험 같은 것처럼 말하자면 과학적, 실증적으로 탐구할 수 없는 인간의 근본적인 어떤 고유한 특성에 포인트를 맞추죠. 현상학, 해석학, 실존주의 이런 것들이에요. 다음 시간과 고 다음 시간에 이걸 할 거에요.

정리하면 첫 번째 형이상학은 과학을 종합하는 거예요. 물리학, 사학, 생물학, 지질학, 사회과학들을 폭넓게 보고서 세계에 대한 종합적인 넓은 그림을 그리는 거예요. 말하자면 고전적, 그리스적,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의미의 형이상학이에요. 이런 종류의 형이상학 하는 사람은 극소수에요. 들뢰즈, 화이트헤드, 베르그송 정도가 이 범주에 속하죠.

두 번째는 내용이 아니라(내용은 과학이 하고), 포말(formal)한, 형식적, 논리적, 수학적인 구조를 가지고, (담론의 내용이 아니라,) 담론을 떠받치는 수학적인 구조, 형식을 분석하는 거예요.

세 번째는 과학처럼 측정하고 분석하고, 양화하고, 그래프 그리는 방식으로 접근할 수 없는 인간 존재의 다른 측면, 실존의 측면으로 육박해 들어가는 거죠.

이렇게 현대 형이상학은 크게 세 부류로 이야기할 수 있어요. 지난 시간과 이번 시간은 종합적인 형이상학, 다음 시간과 그 다음 시간은 실존주의, 그 다음은 분석철학. 이렇게 진행됩니다.


▲ 베르그송 - 전통 철학의 대전제 비판

베르그송이란 인물은 철학사에 대단히 중요한 인물인데, 왜냐하면 아까 얘기했듯이, 전통 형이상학, 흄의 회의주의, 칸트의 비판철학이라든가 콩트의 실존주의에 의해서 비판받죠. 그래서 고전적인 방식의 형이상학으로는 더 이상 사유하기가 힘든 상황이 도래했죠.

그렇다고 해서 메타피지카의 전통, 그러니까 실증적이고 부분적인 지식의 만족하는 게 아니라 이 세계의 피지카에 대한 메타적인 작업을 하려는 전통이 사라질 수는 없는 거죠. 인간이 지적 욕구를 가지는 이상 말이에요.

그래서 이제 헤겔이나 니체 같은 사람이 19세기에 새로운 방식의 형이상학의 씨를 뿌리죠. 그 다음에 19세기의 과학들, 열역학, 진화론 같은 것들을 전부 수렴하면서 본격적 의미의 메타피지카를 세운 인물이 베르그송이에요. 그런 의미에서 현대 철학의 아버지라 불러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중요한 인물이죠.

베르그송의 사유는 지속의 직관 개념을 기초로 하죠. 지속은 시간의 본성이고, 직관은 시간의 본성을 인식하는 방법이에요. 그러니까 베르그송 사유의 출발점은, ‘철학의 역사와 과학의 역사가 시간이라고 하는 것을 온당하게 취급해 오지 않았다’라는 물음에서 시작합니다.

왜냐? 합리적인 사유, 래셔널(rational)한 사유, 분석(analysis)적 사유, 과학적 사유는 분석을 기초로 하죠? 물리학자면 물질을 분석하고, 생물학자는 생물체를 분석하고, 언어학자는 언어를 분석하고, 사회학자는 사회를 분석하고, 기본적으로 ‘분석’하죠?

분석한다는 건 나누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과학적인 담론에 자주 등장하는 게 자(子), 소(素) 아니에요. 항상 등장하죠. 왜냐면, 다 나눠 본 거거든. 나눈 다음에 거기에 인위적으로 이름을 붙이죠. 이렇게 사물을 나누어서 이름을 붙이는 것, 이것이 분석적 사고의 출발점이죠.

베르그송은 경험과학이 추구하는 ‘분석’이라는 사고 자체에 대해서 의문을 던져요. 그러니까 어찌 보면 베르그송 사유는, 학문이라는 것 자체에 대해서 의구심을 품는 거지. 학문의 특정한 목적이나 분과나 주장을 말하는 게 아냐. 학문이라는 그것 자체가 품고 있는 문제를 이야기하는 거죠.

아주 근원적인 문제를 이야기하는 거야. 왜냐하면 모든 학문은 대상(object)을 정하죠. 그런데 대상을 정하는 것 자체가 이미 분석을 하는 거죠? 물리학, 화학, 언어학, 이 자체가 이미 세계를 자르는 거 아냐? 그리고 그 방법도 분석이구요. 근데 베르그송은 분석이라는 게 대단히 중요하고, 우리가 세상을 바라볼 때 필연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방법이지만, 그러나 어떤 근본적인 한계를 내포한다.

무엇에 대해서? 시간에 대해서. 모든 분석은 어떤 형태로든 시간을 왜곡시키게 되어있다는 거지. 베르그송이 볼 적에 변화, 운동, 시간은 근본적으로는 분할 가능하지 않다고 보는 거죠. 정확히 말하면, 분할할 수 없는 게 아니라, 분할을 할 경우에 반드시 그것의 본성을 해치게 된다는 것이죠. 분할하는 순간, 반드시 그 존재를 어떤 식으로든 조금이라도 훼손시킨다는 거지.

어찌보면 이거 굉장히 파괴적인 주장이에요. 왜냐하면 우리가 사물을 인식하려면 어떻게든 사물을 분석해야 하는데 말이지요. 분석을 하면 사물의 본성을 해치게 된다는 이야기는 학문 자체에 대해서 도전을 하는 거죠.

근데 여러분들이 서구 철학사를 유심히 보면, 상당히 공간 중심적이에요. 물론 예외도 있죠. 예를 들어 헤라클레이토스 또는 중세 히브리적 사고도 상당히 시간적이거든요. 예외는 있어요. 근데 19세기 되면 이미 시간이 상당히 위상을 달리하지만, 17·8세기 까지만 해도 서양 사고는 근본적으로 공간 중심 사고에요.

전 시간에 얘기했죠? 운동이라는 것은 존재와 무의 경계선이 무너져야만 성립한다고 했죠? 그렇다면 이 운동하는 세계는 우리한테 참된 인식을 못 주죠. 왜? 플라톤에게 참된 인식은 동일성의 인식이거든. 흐르는 것, 변화하는 것은 어떤 인식도 못 줘.

그러니까 변화하고 흐르는 걸 넘어선 동일성, 수학적 이데아를 잡아낼 때에만 우리는 이 세계를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어요. 그래서 플라톤은 피지카, 티마이오스를 그럴 듯한 이야기라고 해요. 이 물리학은 온전한 인식이 아니라 뮈토스(Mythos:말) 다 라고 하죠.

왜냐하면 생성의 세계니까. 그거는 플라톤 뿐 아니라 모든 인식의 대전제에요. 언어학자란 이 세계의 흘러가는 언어를 연구하는 게 아니라, 흘러가는 언어 너머에 존재하는 보편성을 연구하는 거죠. 그게 소쉬르가 말하는 ‘랑그’지. 생물학자가 철수, 영희를 연구하는 게 아니지. 모든 생명체의 공통되는 본질(identity)을 연구하는 것은 서구 학문의 대전제에요.


▲ 이 세계의 근간은 시간의 '연속성'이다

이 사람은 지금 그 대전제에 도전하는 거지. 모든 동일성은 어떤 형태로든 시간에 왜곡을 가할 수밖에 없다. 왜? 베르그송이 생각하는 세계는 끝없는 변화, 흐름, 시간이 핵심이죠. 근데 그걸 어디선가 자르면 분명히 흐름, 변화, 시간에 인간의 작위성을 가하게 된다는 거죠.

언어도 마찬가지에요. 예컨대 우리가 나이를 따질 적에, 유년기, 청소년기, 장년기 얘기하지만, 그걸 어디에서 자를 거예요? 어디까지가 청소년기에요? 관습에 불과한 거거든. 역사도 마찬가지에요. 4·19의 시작이 정확히 언제예요.

최루탄 맞은 수학과 학생이 마산에서 떠오른 거기서 부터인가, 아니면 사람이 나가기 시작한 때부터냐? 사람들이 나간 것도 마찬가지지. 누가 어디서 나가기 시작했는지는 알 수가 없지. 그래서 이 사람은 이 세계를 근본적으로 '연속성'으로 봐요. 시간이라고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연속적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세계를 합리적으로 이해하려 한다면, 어쩔 수없이 끊어야죠. 이 사람(베르그송)이 그거 부정하는 거는 아니죠. 그러나 그것이 존재의 전부, 근본 리얼리티라고 생각하면 그건 오해다. 진짜 리얼리티는 아무리 분석해도 완전히 그 분석에 들어오지 않는 이 세계의 흐름, 풍요로움, 탄생, 시간이다. 이게 베르그송의 근본 핵심 테마에요.

 

◆ 베르그송은 형이상학을 어떻게 전개했는가


▲ 이성중심주의 비판 - 이성을 생물학적 진화의 산물로 본 베르그송

베르그송과 밀접한 예술이 인상파죠. 여러분들 드뷔시의 라 메르(La Mer), 바다라는 교향시를 들어보면, 고전적인 음악과 인상파 음악이 어떻게 다른지 확실하게 알 수 있어요. 고전적 음악이 딱딱 마디가 지는 음악이라면 드뷔시 음악을 고전 음악에 익숙한 사람이 들으면, 음악 같지가 않고 소음 같아.

반대로 드뷔시 음악에 익숙해지면 앞에 음악을 듣기 따분해 지죠. 그 다음 미술로 말하면, 인상파 미술이 있지. 전통적인 감각으로 보면, 인상파 미술은 그리다 만 거 같지. 경계선도 없고, 색깔도 희뿌옇지. 파라솔 보면 어디가 여자고 어디가 배경인지 경계가 없지.

그러니까 고전적 감각으로 음악, 미술을 보면 재미가 없지. 그런데 그걸 베르그송의 철학과 같이 보면 의미가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바로 고전적 예술들이 사물들을 분절하면, 분절과정에서 연속성, 흐름이 사라진다는 것이죠. 그리고 이것은 베르그송의 이런 생각은 이성 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이기도 해.

왜? 인간의 이성이라는 건 조금 더 변별해서 얘기하면 인간의 오성이지. 이성은 넓은 의미니까요. 합리적인 사고가 오성이지. 오성은 꼭 사물을 이런 식으로 분석해서 바라볼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러면서 어떤 얘기를 하냐하면, 인간의 지성이나 이성이라는 것을 완전히 다른 것으로 봐요.

옛날에는, 인간의 이성, 지성은 특권적인 것이거든. 데카르트(Rene Descartes)에게서 가장 잘 드러나지. 어떻게 이해합니까? 신이 인간을 만들 적에 인간의 영혼에다가 본유 관념을 넣어 줬지. 그래서 그 본유 관념을 가지고 이 세계를 인식할 적에 우리는 실재를 인식할 수 있죠.

그러니까 고전적인 철학에서는 이성이라는 건 인간의 중심이고 가장 소중한 것이고, 인간을 형이상학적 차원으로 연결시켜 주는 거지. 기독교도 그렇죠. 신과 인간을 연결시키는 매개 고리가 영혼이죠? 그것이 인식론적으로 나타난 게 ‘계시’죠.

근데 베르그송은 인간의 이성이라는 걸 180도 거꾸로 봐요. 인간의 이성이라는 건 생물학적 진화의 산물이라는 거죠. 이 사람 말(이성)에는 지능이 더 어울려요. 인간의 지능은 진화의 산물이야. 그리고 인간의 이성은 인간의 무기에요. 그러니까 새의 무기가 날개고, 두더지의 무기가 발톱이고, 호랑이의 무기가 이빨이듯이, 인간의 무기는 이성이에요.

그러니까 의미가 확 바뀌죠? 이성은 순수하고 형이상학적인 게 아니라 생물학적인 거야. 새가 날면서 살 수밖에 없고 물고기가 헤엄을 쳐서 살 수 있듯이, 인간은 지능으로 살 수밖에 없다. 인간이 가진 것은 지능밖에 없다는 말이죠.

지능이 없다면 벌써 멸망했겠죠? 인간이 호랑이처럼 힘이 센 것도, 새처럼 날 수도 없으니까. 여러분 애 키워보면 알아요. 다른 짐승은 태어나면 금방 걷고 다 알아서 해. 근데 사람은 똥 싸는 거 받아 줘야 돼, 옷 입혀줘야 돼, 몇 살까지 키워놔야 인간이 되지.

어찌보면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열등한 존재에요. 그리고 사실은 문명이 더 열등하게 만들지. 여러분들 산에 가면 조심해야 돼. 산에 가서 어떤 아저씨한테 저기까지 얼마나 걸리느냐고 그러면 뭐 금방 간다그러지. 하지만 그 ‘조금’이 세 시간이야 허허허. 그 사람한테는 조금인데 우리한텐 엄청 긴 거지.

우리가 이미 생물학적으로 마비가 된 거야. 눈도 그래요. 시골 가서 살면 우리 오감이 마비되어서 살아간다는 거 절실하게 느낍니다. 시골 가면 우리 눈, 코, 감각이 살아나요. 그래서 귀가 들리는 범위가(가청범위), 엄청 증폭이 되어요.

시골 가서 느껴 봐요. 냄새도 그렇고. 서울 살면 전부 마비가 되어 가지고 살아가죠. 오히려 인간은 살아남기 위해서 문명을 건설했지만, 거꾸로 문명은 생명체로서의 인간을 점점 위축시키는 거야. 차가 발달하니까 걷기가 싫고 그렇죠?

그런데, 이렇게 이 사람(베르그송)은 전통철학자들이 특권시하던 인간의 지능이라는 게 알고 보면 생물학적 진화의 결과이고, 인간이라는 존재의 생물학적 무기라는 것이지, 결코 순수하고 형이상학적이고 고귀한 것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죠.

자, 그러면 이 두 가지를 이어 봅시다. 아까 리얼리티가 근본적인 흐름인데 인간은 그걸 자른다고 했죠? 두 번째로 인간 이성이라는 건 진화의 산물이라고 했죠? 두 가지 이으면, 인간이 이 세계에서 살아남으려면 지능 밖에 없는데, 그 지능을 가지고 이 세계에서 살아남으려면 분석을 할 수밖에 없다.


▲ 인간의 지능 작동 방식은 고체를 모델로 한다

이렇게 이야기하죠. 근데 분석을 하려면, 그 대상이 고체적이어야 합니다. 액체적이면 안 돼. 물이나 공기를 어떻게 분석해? 흐르는 건 분석할 수 없죠? 고체만 분석할 수 있어. 이 책상 분석할 수 있죠? 반으로 자를 수도 있고, 마름질 할 수도 있죠? 

그런데 물을 어떻게 (분석)해? 안 되잖아. 고체의 도움을 받아서 하죠. 컵을 사용한다든가. 그러니까 이 사람은 참 재밌는 말을 하는데, 우리 지능의 작동 방식은 고체를 모델로 한다. 예컨대, ‘1+1=2’다. 이건 고체에 성립하지? 액체에선 성립하지 않잖아? 액체에서 하나가 어디있어? 고체는 하나, 둘, 셋 있죠? 액체는 셀 수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1이라는 게 액체에선 성립하지 않지. 저 식은 고체에만 성립하지. 액체는 고체의 도움을 받아서만 성립하지? 분명히 한 컵과 한 컵을 합하면 두 컵이 되긴 하는데, 고체의 도움을 받아야 되지? 그러니까 우리의 논리(인식)이라는 게 기본적으로 고체를 모델로 한다. 왜? 인간은 고체를 operate 해야만 이 지구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에 라는 거죠.

집을 지으려면 분석을 해야죠. 잘라야지, 깎아야지, 전쟁하려면 칼을 잘라서 깎아야죠? 그러니까 여러분이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는 소설에 보면, 싯다르타가 뱃사공이 되어서 흘러가는 물을 보면서 ‘연기’깨닫는 대목이 있죠. 여러분이 춘천 공지천에 가서 매운탕에 소주 먹으면 기가 막히죠.

이걸 꼭 저녁에 먹어야 돼. 노을 질 적에. 그 지는 해가 호수에 쫙 비치면, 물에 반영이 되죠. 아 저게 지속이구나 싶죠. 그래서 분석이라는 것 자체가 이미 인간이라는 존재는, 고체를 조작하는 모델을 암암리에 깔고 있는 것이다. 니체, 베르그송, 하이데거 이런 사람이 대체적으로 과학적 사유, 분석적 사유라는 것을 이런 식으로 비판하죠.

근데 과연 과학적 사유가 이런 식으로 온전하게 비판될 수 있는가라는 문제는 현대 철학의 중요한 문제에요. 아니면 예를 들어서, 과학과 기술은 같은 것이냐 다른 거냐 하고도 연관됩니다. 니체, 베르그송, 하이데거의 비판은 과학에 대한 비판으로서는 좀 피상적이라고 볼 수 있어요. 기술에 대한 비판으로는 이게 맞다.

그러나 싸이언스와 테크놀로지는 좀 다르게 볼 수 있는 여지가 있는데요. 물론 현실적으로는 자본, 기술, 다 결합되어 있지만, 과학 본연의 의미로 본다면 현실적으로 지금은 과학이 기술에 종속되어 있죠.

솔직히 지금은 과학이 발달하고 기술이 발달하는 게 아니거든. 과학이 발달하고 기술로 운용되고 선포되는 건 옛날 일이지. 지금 반대지. 자본가가 프로젝트를 만들고, (이거 개발해라고 주문하면) 기술가가 개발하는 거고, 그 기술 개발하기 위해서 과학 연구하는 거지.


▲ 가스통 바슐라르라는 균형의 추 등장

그러나 그렇다 해도 과학의 본연의 의미를 본다면 과연 베르그송, 하이데거 식의 비판이 적절한가? 과학과 기술은 동일시 될 수 있는가 하는 중요한 문제가 깔려 있어요. 그래서 균형을 잡기 위해서는 가스통 바슐라르(Bachelard)라는 사람을 봐요.

그러니까 니체, 베르그송, 하이데거, 메를로 퐁티의 과학관과 대비되는 게 바슐라르에요. 이 사람은 일종의 현대 합리주의자이지. 현대 플라토니즘의 전형이지. 한국에는 바슐라르가 왜곡되어 있어. 이 사람은 철학적으로 보면 완전히 플라토니스트에요.

니체 이후의 흐름에 전면으로 반대하면서 합리주의를 재건한 사람이에요. 그런데 이 사람 얘기는 니체나 베르그송이나 하이데거같은 사람이 하는 얘기가 철학적으로 설득력 있는 게 아니라 예술이나 시로 의미가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사람은 두 개 다 이야기해요.

그래서 이 사람은 굉장히 중요한데 이상하게 함께 엮어서 이야기가 안 되어요. 근데 바슐라르는 엄청 유명한 사람이에요. 바슐라르의 얘기는 니체 이후의 철학자들 이야기는 철학적으로는 별 의미가 없다. 단, 예술적 시적으로 의미가 있는 말이다. 철학 쪽은 오히려 수학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해요.

그래서 이 두 개를 중화시켜서 균형 있게 같이 봐야 되어요. 아직도 열린 문제지. 쉽게 간단하게 얘기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어쨌든, 베르그송이 인간의 이성이라는 걸 전혀 다른 눈으로 보게 해 주고 인간 이성의 한계에 대해서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죠.


▲ ‘지속’이란 흐름이다

‘지속이란 흐름이며 액체적 사유를 유추한다.’ 여러분들 시를 보면, 그것도 다양하지만, 유심히 시를 보면 역시 시는 전반적으로 액체적이죠? 이것을 의식하고 보면 더 잘 보입니다. 시적인 사고라는 게 합리적인 사고와 변별되는 중요한 요소가 액체적이라는 거예요.

‘지속의 첫 번째 속성은 연속성이고, 베르그송은 제논의 패러독스가 연속적 사유를 연속적 운동을 불연속적 공간의 합으로 환원시킨 첫 번째 예라고 생각한다.’ 전 시간에 했던 니체 철학의 출발점도, 엘레아 학파 비판이거든. 엘레아 학파의 전통이 17,8세기까지 이어져 온 거에요. 니체에 이르러서 엘레 아학파가 결정적으로 비판받아요. 베르그송도 니체를 이어서 엘레 학파에서 출발하죠.

제논처럼 얘기하는 것은, 사실 실제로는 분할할 수 없는 운동을 공간에 옮겨다 놓고서 하는 거예요. 제논(이) 설명할 때 선 그리고 나누죠? 이거 자체가 실제 운동을 그렇게 할 수는 없고, 그냥 이어지는 그거를 공간에 옮겨다 놓고서, 잘라 가지고 설명하는 거 아냐 그지? 이거 자체가 왜곡인 거지. 이렇게 설명할 수 없는 거지. ‘그리고 이런 사유는 과학적 합리성 및 형이상학적 사변의 근저에 깊이 스며들어 있다.’


▲ 베르그송의 비합리주의 - 분석적 사고를 넘어서

그 다음 문단 보면, ‘베르그송은 과학적 합리성의 이런 한계를 뛰어넘는 것이 무한소 미분으로 본다.’ 여러분 고등학교 때 배운 미적분 있죠. 이 미적분은 철학하고 굉장히 밀접한 관련이 있어요. 철학뿐만이 아니라 여러 분야하고 관련이 있죠. 미적분의 창시자가 라이프니츠죠.

뉴턴과 라이프니츠가 동시에 창립했지. 라이프니쯔의 철학 자체가 미적분과 얽혀 있어요. 라이프니츠의 철학을 읽어본 사람은, 그 모나드의 연속성을 무리수에 비유하죠. 그게 은유(메타포)가 아니라, 실제 그 사람은 그렇게 생각한 거야.

그 후에도 무한소 미분이라는 것은 우리한테는 인식이 많이 안 되어 있는데 말이죠. 철학이라는 건 시대마다 다른 관계를 맺거든요. 중세 같으면 종교나 신학과 관계있고, 근대에는 과학과 주로 관계를 갖고, 그 다음 19세기 같으면 맑시즘 같은 정치, 또 문화?예술과 관계를 맺죠.

그 관계 맺는 방식이 굉장히 복잡한데 오늘날에는 철학과 과학 관계가 굉장히 멀어졌죠. 또 많이 연관관계가 인식이 안 되는데, 사실은 근대 철학의 역사와 미적분의 관계는 엄청나게 밀접한 관계에 있어요. 특히 베르그송하고도 상당히 중요한 관련이 있습니다.

‘무한소 미분은 유클레이데스(유클리드) 기하학에서 배제된 연속성과 운동성, 그리고 (비본질적으로는) 시간성을 도입함으로써 사유의 역사에 큰 이정표를 새겼다.’ 유클리드 기하학에서의 하나하나 도형은 에센스로부터 주어지는 거예요.

물론 희랍 말에 이런 말은 없고 나중에 생긴 거지. 지금 말로 하면 에센스지. 또는 조금 다른 용어를 사용한다면, in itself, 즉자적으로 또는 그것 자체로서 존재하는 거예요. 그리고 시간이 배제되지요. 그러니까 유클리드 기하학에서는 예컨대 이런 도형(삼각형 + 원)은 잘 안 그려요.
이건 삼각형도 아니고 원도 아니지. 삼각형은 삼각형이고 원은 원이어야지. 플라톤의 이데아가 이런 거죠. 이데아의 세계는 불연속의 세계야. 이데아의 세계는 딱딱 끊어지는 불연속의 세계야. 삼각형이면 삼각형이고 원이면 원이지. 이런 도형은 유클리드 기하학에서는 이상한 거지.

설사 이걸 다룬다 하더라도 삼각형과 원의 합으로만 다루는 거지. 이런 도형은 다루지 않고, 다룬다 해도 삼각형과 원의 합으로만 보지. 모든 도형이 에센스로서만, 본질로서만, in itself로써만 다뤄진다는 뜻이죠. 거기에 시간은 없어요.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유클리드 기하학에는 끊김이 있는 이런 곡선은 전혀 의미가 없어요.

이건 원이 아냐. 이런 원은 유클리드 기하학에 없지. 딱 본질로서 주어져야지. 지금 (저 위의 원은) 우리가 생각한 거 아냐. 그래서 작도한다는 것은 시간을 따라서 이루어지는 거예요. 굉장히 중요한 차이죠. 그 다음 오늘날에는 수학에서 이런 곡선은 얼마든지 다루잖아.

고대 기하학에서는 이런 건 전혀 다룰 수가 없지. 모든 기하 도형은 그 자체로, 딱 본질로, 그 다음에 시간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거야. 거기서 한 발 더 가면 이데아지. 근데 근대로 오면 어떤 본질이 아니라 임의의 도형들이고, 또 시간을 초월해서 주어지는 게 아니라 작도되는 거죠? 만들어져 가는 거지. 저런 차이는 고대적인 플라톤 형이상학과 이 베르그송 철학이 그대로 연관되지요.

‘무한소 미분은 ‘극한으로의 이행(passage a la limite)’라는 중요한 개념을 도입했다‘. 이렇게 이 사람은 무한소 미분이라는 게 연속성을 정복했다고 보는 거죠. 연속적인 운동을 정복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실재(리얼리티)가 수학으로 온전하게 해석되는 것은 아니다라는 거죠.

왜? 결국 수학이라는 것은 퀄리티를 안다는 거니까. 질을 아는 거지. 퀄리티라는 게 없지. 단적으로 말해서 색이라는 게 없지. 수학의 세계는 색도 시간도 없는 세계죠? 그래서 이 사람의 사상은 비합리주의(irrationalism)인데요.

여기서 이레셔널(irrational)이란 말이, 우리가 일상적으로 저 사람은 너무 비합리적이야할 때 쓰는 말이 아니고, 분석적 사고를 넘어서려고 하는 거지. 그런 점에서 래셔널(rational)한 것을 비판한다는 점에서 이래셔널(irrational)하다는 겁니다.

실재라고 하는 것은 이 사람이 즐겨 쓰는 표현으로 하면, 절대적인 질적 풍요로움이다. 실재라고 하는 것은 무수한 질(質)들이 출렁거리는 어떤 운동성이다. 인간의 범주들이, 개념들이, 수식들이, 아무리 잡으려 해도 온전하게 잡히지 않는 그런 운동성이라는 거죠. 그래서 다질성의 실재를 등질성으로 바꿔서 이해하려는 분석적 사고의 한계를 이 사람은 끝없이 비판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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