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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강 베르그송의 사유체계

하나님아들 2020. 3. 31. 23:47

제3강 베르그송의 사유체계

◆ 베르그송은 어떤 사유체계를 가졌는가


▲ 베르그송의 '차이'의 사유 - 시간 속에서 차이가 끝없이 생성된다

‘베르그송의 사유는 차이와 복수성의 사유‘
인데, 왜 차이의 사고라고 할까요? 만약에 우리가 동일성, 개념, 수학적 법칙 등등으로 이 세계를 완벽하게 딱 잡아내는 게 불가능하다면, 모든 것이 시간 속에 있고요. 또 시간이 가장 근본적인 존재라고 한다면, 결국은 시간 속에서 끝없는 차이가 생성하게 되죠? 시간 속에서 끝없는 차이가 생성하기 때문에, 동일성으로의 완벽한 포착이 불가능하단 얘기지.

우리가 이 세계를 완벽하게 동일성으로 포착할 수 없다는 것은, 시간 속에서 차이가 끝없이 생성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심지어는 물리법칙 조차도 그래요. 제일 그래도 가장 규칙적인 게 물리 법칙인데, 그것조차도 완전한 법칙은 없죠. 그것도 아주 미세하게 변해요. 오차들을 상쇄하기 때문에 성립하는 겁니다.

우리가 보통 탄소 원자 값이 6이죠? 근데 실험해 보면 완벽하게 6인 경우는 없어요. 항상 5.9, 5.8 이렇게 나오죠. 완벽하게 6인 경우는 진짜 드문 경우고 그런 경우가 오히려 우연이죠. 6이 아닌 게 우연이 아닙니다. 실험해 보면, 6으로 딱 떨어지는 경우가 진짜 우연이야.

그 다음에 베르그송의 사유가 '차이'라고 하는 것이 시간 때문이라면, 들뢰즈의 사유가 복수성의 사유인 것은 왜냐하면 들뢰즈의 사유가 퀄리티(quality, 질)을 양(quantity)으로 완전하게 환원하는 것을 거부하는 사상이기 때문에 그래요.

만약에 질(색, 냄새, 맛, 운동에 대한 감각)들을 양, 개념, 범주 등으로 완전히 해소해 버린다면, 멀티플리시티(multiplicity)라는 게 사라지겠지. 그러나 베르그송은 복수성의 사유, 멀티플리씨티의 사유라는 이야기예요.


▲ 칸트 - 세계를 범주의 포획하려는 폭력

철학이 세계를 거시적, 보편적으로 이해하려다 보니까 자연히 어떤 현상이 벌어지냐면, 이 세계에다 개념의 폭력을 가하는 경우가 많아요. 이 세계는 개념으로 완벽히 잡히지 않는 운동, 흐름, 다양성인데, 거시적으로 이해하려 하다 보면 자꾸 틀을 만들어서 딱 잡으려고 하지.

조금 심하게 말하면, 범주의 폭력을 가하죠. 칸트의 철학이 대표적이야. 칸트하면 12개의 범주가 있죠. 양, 질, 관계, 양상 등이 있죠. 칸트는 그런 범주를 통해서 우리가 세계를 인식한다고 보는 거죠. 그런데 사실은 존재와 세계가 칸트가 말한 그런 범주에 딱 맞아 들어가지 않는 걸 자꾸 보여주거든.

예컨대, 양자역학에 나오는 물질파 개념(matter-wave)이라고 묘한 게 있어요. wave(파)라고 하는 것은 실체가 아니라 관계거든. 내 입에서 파가 나와서 여러분 귀에 들어가지? 이건 내 실체가 전달되는 게 아니라, 내 입에서 뭐가 나와서 전달되는 게 아니라, 내가 공기를 횡파로 밀어서 (여러분 귀에) 들어가는 거지.

그러니까 실체는 그대로 있고, 실체의 관계가 변해 가는 거야. 이런 분필 두 개가 움직이면, 분필은 변하지 않고, 관계만 변하지 그지? 근데 물질파는 묘한 거거든. 물질이자, 파인 거야. 칸트는 이런 것들을 어떻게 이해할까? 이해할 수가 없지.

칸트는 우리가 이 세계를 요렇게 밖에는 인식할 수 없다고 정해 놓은 철학이지. 그러나 지금 볼 적에는 칸트의 철학은 근대 과학을 모델로 한 범주일 뿐이에요. 그것도 물리학만을 모델로 만든 거예요. 지금은 그렇게 안 보죠. 미개인들이 세상을 볼 때하고 문명인이 볼 때하고 다르게 보잖아.

또 동양적인 범주하고 서구적인 범주는 완전히 다르죠. (난초) 그림을 서양 사람들이 보면, 난초 몇 개 그려 놓고 위엔 텅 비어 있잖아. 서양 사람들이 그거 보면 무(無), 아무 것도 없다 그러지. 동양 사람들에게는 그게 무가 아니라 기(氣)가 차 있는 거지. 그래서 보는 눈이 다른 거예요.

그런데 칸트는 지극히 편협한 범주를 만들어 놓고, 그것이 인간의 보편적이고 영원한 범주라고 생각했어요. 그건 아니지. 칸트 같은 철학이 어찌 보면 인간이 이 세계를 어떤 범주로 포획하려고 하는 전형적인 철학이지. 물론 칸트는 아주 위대한 철학자이지만, 오늘날에 볼 때에는 한계가 명백하지.


▲ 베르그송 - 인간 인식의 범주는 끊임없이 수정되면서 새로운 얼굴을 만나야 한다

근데 들뢰즈란 사람은, 존재의 풍요로움과 운동성에다가, 인간 인식의 범주를 가지고 폭력을 가하면 안 된다고 얘기해요. 물론 그렇게만 얘기하면 좀 부족하지. 어떻게 얘기해야 합니까? 그럼 인간이란 게 이 세상을 아무 인식도 안 하면 그것도 이상하지. 그게 아니라 칸트는 세상을 구성하는 거지. 그게 아니라 존재가 세상에 드러나는 모습들을 쭉 보면서 우리 범주도 고쳐나가야 된다는 얘기지.

꼭 과학뿐만이 아니라 지금 회화의 역사라는 것도 꼭 그래. 물론 주관인 경우가 많이 있지만 회화 역사는 화가의 주관이 아니지요. 회화사적으로 위대한, 획을 그은 작품들은, 화가가 자기 멋대로 세상을 구성한 게 아냐. 그 사람이 그걸 본 거지. 존재의 잘 안 보이는 부분을 그 사람이 본 거에요.

그래서 우리가 어떤 회화사에 획을 긋는 작품 앞에 서면 새로운 세계를 만나는 거지. 그래서 새로운 세계를 만났을 적에, ‘어? 야! 나도 이런 생각 한 적 있는데’ 이런 생각하잖아. 그게 그 사람(화가) 순전히 자의적으로 생각이 되지 않죠. ‘아! 나도 막연하게 이렇게 본 적 있는데!’ 이런 생각하죠.

그 화가가 본 거에요. 그러니까 인식론적으로 주관이 범주를 만들어서 객관을 조작하거나 구성하는 게 아니라, 존재의 드러남을 느끼면서 그걸 충실하게 수용하면서 우리가 가진 범주를 고쳐야지. 게 맞는 방법이죠? 그래서 칸트로부터 베르그송의 전환은 굉장히 중요하고, 철학의 근본적인 전환이에요.

이 사람이 말하는 차이는, 차이의 체계를 전제한 차이가 아니라, 그러니까 이미 어떤 틀을 따라 만들어 놓은 다음에 차이를 집어넣은 게 아니라 질적 창조, 기존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동일성, 범주를 깨버리는 그런 질적 창조라는 근본적인 의미에서의 차이다.

예를 들어 백묵과 컵의 차이가 아냐. 왜? 이런 (백묵과 컵의) 차이는, 백묵의 동일성과 컵의 각가의 동일성을 전제하고 나서 그 차이를 이야기하는 거죠? 이런 건 상식적인 차원의 차이지. 우리가 보통 차이를 말할 때는 이걸 말하지.

근데 이 사람이 말하는 차이는 그런 차이가 아니라, 이 세계에서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던 생각이나 범주를 깨는 새로운 개념이지. 약간 메타포로 표현하면, 세계의 새로운 얼굴을 만나는 거지. 이게 스피노자가 자주 쓰는 말인데, 세계의 새로운 얼굴을 만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recontre, 영어로 하면 encounter. 어떤 만남, 존재와 세계의 새로운 만남이죠.


▲ 폐쇄시스템에 문제를 제기하며 새로운 의미의 '창조'를 이야기한 베르그송

‘베르그송은 전통철학이 대개 “전체는 주어졌다”는 가정 위에 사유했다고 본다.‘ 그렇다면 전통 철학은 변화, 차이, 운동, 시간을 사유하는데, 세계 전체 자체는 딱 정해져 있다고 보는 거지. 이 세계 전체 자체는 완벽하게 한정되어 있고, 그 안에서 변화가 발생한다고 보는 거지.

니체 같은 생성의 철학자, 시간의 철학자조차도 이런 전체 위에서 사고했어요. 왜냐하면 열역학 제1법칙 즉 에네르기 보존의 법칙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거든. 열역학은 굉장히 중요한 학문이에요. 예컨대, 상대성 이론, 진화론, 양자역학 같은 건 유명하잖아? 누구나 아는 이야기인데. 열역학은 이상하게 인기가 없는데, 엄청 중요한 거예요.

그러니까 이 세상의 에너지는 계속 변하는데, 불에 타기도 하고, 다른 형태로 변해도 에너지의 총합은, 이 세계 전체의 (에너지의) 양은 일정하다는 거예요. 니체조차도 그 가정 속에서 사유했어요. 니체는 생성을 사유하려 했지만, 당대 과학이 주는 전제들을 벗어나진 못했어요.

근데 베르그송은 저걸, 열역학조차 깨어 버려요. 왜? 열역학 제1법칙이라는 건 클로즈드 시스템(closed system), 닫힌 체계에서는 성립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클로즈드 시스템이란 게 실험실에서는 가능할지 몰라도 그냥 있는 그대로 이 세계에 그런 게 어디 있느냐는 거죠. 실험실에서는 만들 수 있지요?

항상 실험실에서 무엇을 한다는 이야기 하고, 그냥 실제 과정에서 하는 거하고는 굉장히 다른 거예요. 가끔 가다 심리학 책 보면 웃긴 말들 나오는데, 물론 심리학 자체를 폄하하는 건 아니지만 완전히 실험실에서 하는 거거든. 근데 인간이 살아가는 상황에서는 다르게 나타나고, 여러 가지 조건 때문에 심리학이 연구한 대로는 안 되거든.

그래서 이 사람은 열역학 제1법칙은 어디까지나 폐쇄된 시스템에서만 성립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우주 자체가 폐쇄되었는지 아닌지는 모르는 거죠. 일반 상황에서 풍선처럼 폐쇄했다고 보죠. 그것도 하나의 가정이고, 가정 자체가 질적인 가정은 아니라 공간적인 가정이지요.

그래서 그의 차이는 우주에서의 절대적 창조로서의 차이이다. 이 창조라는 개념이 플라톤이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창조, 데미에르고스나 야훼가 하는 창조하고는 전혀 개념이 다른 거죠. 어떤 존재가 영원한 법칙을 구현했다는 뜻이 아니라, 이 세계 자체 내에서 그 전에 우리가 몰랐던 또 몰랐을 뿐 아니라 그 전에는 아예 없었던 무엇이 탄생할 수 있다는 얘기죠. 이 대목이 이 사람의 래디칼(radical)한 면이고, 논의의 여지가 많은 대목이죠.


▲ 베르그송의 내적 복수성(internal multiplicity)

'베르그송의 복수성은 내적 복수성이 아니다. 그것은 잠재적 복수성, 내적 복수성이다.‘ 이거 굉장히 중요한 개념이에요. 여러분이 나중에 화이트헤드, 들뢰즈 같은 베르그송 후계자들의 사상을 이해할 적에, 아주 긴요한 개념이에요. 내적 복수성 (internal multiplicity).

예컨대, 이 방에 열 사람이 있다는 것은 외적 복수성(external multiplicity)이에요. 공간 속에 펼쳐져 있어서 공간적으로 구분되는 복수성이죠. 그런데 예를 들어서 우리 몸이 하나이에요? 여럿이에요? 하나 같기도 하고 여럿 같기도 하죠? 그냥 우리가 의학적으로 나누는 거지. 실제로는 알 수 없죠.

그러니까 열 사람이 있다고 하는 이 공간 속에서 구분되는 여럿은 외적인 거예요. 그러나 우리 몸의 멀티플리씨티는 내적인 거죠? 다르죠? 그 다음에 외적 멀티플리씨티는 현실(actual)적 복수성이에요. 왜? 펼쳐져 있잖아? actual하게 펼쳐져 있죠.

그러나 우리 몸의 복수성은 virtual한 복수성이에요. 잠재적인 복수성이죠. 약간 징그러운 예이긴 하지만, 내 몸을 다 잘라서 펼칠 수 있겠지? 간도 펼쳐 놓고, 허파, 위, 이렇게 늘어놓을 수가 있겠죠? 이렇게 되면 우리한테 actual 하지? 근데 지금 내 몸은 그게 아니라 전부 펼쳐지지 않은 상태로 잠재되어 있죠. 물론 이것은 인식 주체에 따라 상대적이에요.

옛날 어떤 영화 보면, 조그마하게 사람 만들어서 다른 사람 몸에 집어넣죠? 그럼 무슨 잠수정 같은 거 타고 다니는 그 세계는 완전히 다른 세계 아니야 그지? 머리 안이 바깥이고 가슴 안이 바깥이고, 물론 상대적인 개념이지만 어쨌든 지금 사는 입장에서 보면, 안에 잠재되어 있지, 펼쳐져 있지는 않죠.

그 다음은 spatial (공간적)인 복수성이에요. 우리가 살아가면서 여러 존재가 될 수 있잖아. 그것은 시간적 복수성이지. 지금 공간적으로 현재 여러 개다 하는 뜻하고, 시간 속에서 바뀌어 나가는 복수성이라는 것은 다르죠. 그래서 내적/외적, 잠재/현실, 시간/공간 등의 복수성으로 두 가지 경향을 분류할 수 있어요.

멀티플리티씨(multiplicity). 현대 사유의 과제가 어떻게 여럿을 여럿으로 존재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에요. 여럿이라는 걸 무조건 환원시켜서 통합시키는 게 아니라 여럿을 여럿대로 존중할 수 있는가 하는 게 현대 철학의 중요한 문제에요. 그럴 적에 중요한 게 이 구분이에요. 그래서 이렇게 구분이 되어요.

질적 복수성
양적 복수성
내적 복수성
외적 복수성
잠재 복수성
현실적 복수성
시간적 복수성
공간적 복수성

이 구분이 베르그송에 의해서 제시되고, 이후로도 상당히 중요한 영향을 끼칩니다. 특히 여러분이 다음 학기에 할 들뢰즈란 사람은, 베르그송의 질적 복수성을 발전시킨 핵심적인 인물이죠. 그 사람 이해 하려면, 베르그송의 이 개념이 전제가 되요.

 

◆ 베르그송의 사유는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가


▲ 진화와 엔트로피의 운동의 상반된 운동

‘우주에는 근본적으로 두 가지 운동이 있다. 하나는 차이와 복수성을 끊임없이 생겨나게 하는 진화의 운동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것을 열적 평형으로 몰고 가는 엔트로피의 운동이다.’ 이게 이 사람이 세계를 바라보는 거시적인 틀이에요. 어찌 보면, 열역학과 진화론을 종합한 거야.

열역학에 따르면, 엔트로피의 법칙에 의해서,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질적 차이들이 결국은 소멸되지. 소멸되고 써멀 이퀼리브리엄(thermal equilibrium 열적 평형)에 도달하는 거지. 예를 들어서, 뜨거운 막대와 차가운 막대를 붙여 놓으면, 다 이퀼리브리엄으로 되어서 결국은 식죠?

이런 경우는 있어도 멀쩡하던 막대가 한 쪽으로 갑자기 차갑게 분화되는 경우는 없지? 열역학 제 2법칙, 엔트로피 법칙은 이 우주의 모든 운동은 형상이 생기고 질적으로 풍부해 지는 방향이 아니라, 형상이 다 와해되고 질들이 다 등질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쉽게 말하면 이 세계가 다 죽는다는 얘기지. 55억년 후라나? 천문학적 계산에 따르면, 이 세계가 전부 없어져서 망한다는 거지. 그러니까 공간만 남게 되는 거야. 텅 빈 공간만. 아니면 아무것도 없이 물질만 남는 거지. 티브이 끝나면 치지직하고 나오는 거 있잖아. 사람들, 동물들, 풍요로운 질들이 있다가 말이지.

요새는 티비가 계속 하니까 그게 없어졌는데, 옛날에는 5시에서 11시까지밖에 안 했거든. 근데 요즘은 어디든 티비가 있으니까 그런 현상이 없지. 그래서 아마 못 본 사람도 있을 거야. 옛날에 티비가 애국가 끝나면 치직하고 물질만 바글바글 거리는 게 나와. 그걸 화이트 노이즈라고 그러지. 그런 상태가 돼.

그런데 반대로, 진화론에 따르면, 반대 아냐? 아무 것도 없는 물질세계에서 물고기가 생기고, 파충류가 생기고, 새가 생기고, 이렇게 해서 인간이 나온 거 아냐? 어떻게 보면 참 신기하죠? 모든 게 있다 멸망하는 건 좀 자연스럽게 느껴지는데, 아무 것도 생명체가 없던 데에서 생겼다는 건 너무나 신기한 거야.

그러니까 열역학에 따르면, 세계라는 건 점점 망해가는 거고, 진화론에 따르면 세계는 점점 풍요로와 지는 거죠. 그러니까 열역학이 제시하는 것과 진화론이 제시하는 것은 상반된 세계야. 그래서 베르그송은 물리학에서의 엔트로피 법칙하고, 생물학에서의 진화론을 하나의 통합하는, 종합적인 우주론을 이야기해요.

복잡한 얘긴데 결론만 얘기하면, '우주의 하강운동(엔트로피의 하강 운동)과 진화의 상승운동, 두 개의 운동이 투쟁을 하는 것이 이 세계'라는 거지. 참 재밌는 것은, 형상철학에서처럼 형상이 미리 있는 게 아니라는 이야기지.

형상철학은 그렇잖아, 플라톤의 이데아든, 기독교의 신의관념이든, 물질적이지 않은 무언가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그게 물질에 구현되는 거 아냐. 라이프츠의 모나드도 마찬가지고. 근데 베르그송은 그게 아니라 생명과 물질의 투쟁으로부터 형상들이 생겨난다는 거지.


▲ 베르그송의 세계에는 오로지 '운동' 밖에 없다

이게 말하자면, 고·중세적인 세계관과 근본적인 차이인데요. 자, 플라톤의 티마이오스를 봅시다. 여러분이 플라톤의 티마이오스는 꼭 읽어야하는 책이에요. 서양 철학을 이해하는 주춧돌이에요. eidos의 세계, idea의 세계가 있죠. 그 다음에 이(다른) 쪽에 코라(chora)가 있어요.

코라는 지금의 'matter-space'로 번역할 수 있어요. 물질이 아무 것도 없는 공간이 아니라 물질이 차 있는 공간이죠. 그리고 아무 운동성도 없이 물질만 멍하니 차 있는 게 아니라, 물질 자체가 자기의 운동성을 품고 있는 세계에요.

어찌 보면 똑같지는 않은데 화이트 노이즈 같은 세계지. 조금 더 상세하게 비교할 여지가 있는 대목으로 어쨌든 아직까지 형상을 부여하지 못한 물질세계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조물주 개념이 등장하죠. 그런데 이 개념이 플라톤이 설명하기 위해 만든 픽션이다, 중요한 개념이 아니다, 실제로 중요하다, 여러 가지 말이 많은 부분이에요.

어쨌든 데미르고스(조물주)가, eidos를 보고서 코라를 빚은 거지. eidos를 (코라에) 넣은 게 아니라 eidos는 영원한 것으로 이것을 보고 코라를 빚은 거지. 이걸 ‘흔적‘이라 그래. 이런 구도와 기독교와의 차이는 뭐죠? 기독교는 eidos(idea)가 데미르고스의 머릿속으로 들어가지. 이데아는 신의 관념이야.

신 바깥에 이데아가 있어서 신이 그걸 보는 게 아니야. 신이 자기 머릿속에 있는 관념을 그대로 구현하는 거지. 코라에 대해서는 불명확해. 구약에 어떤 판본을 보면, 신이 만들기 전에 희끄무레하게 물질이 있었다고 묘사하는 것도 있고, 이거(코라) 자체도 신이 창조했다는 것도 있고, 완전한 무로부터 창조했다는 것도 있지.

어쨌든, 베르그송 같은 경우는 이런 영원한 것은 없어. 운동밖에 없어. 근데 그것(운동)이 뭡니까? 물질의 하강운동과 생명의 상승운동이 있는 거지. 오로지 운동밖에 없어요. 그리고 이것들이 서로 타협하면서 이데아들이 생겨나는 거지. 그러니까 인간의 이데아가 있어서, 인간의 모델을 본 따서 우리가 만들어진 게 아니라, 이 물질성하고 생명성이 타협한 결과가 우리의 형상이야. 완전히 다른 모델이죠?

조심할 것은, 아이디얼리즘(idealism)이란 말을 조심해야 돼. 자꾸만 관념론이라고 해석하는데, 사실 고대 철학의 idealism 이란 말은 관념론이 아니에요. 그건(관념론) 근대 범주지. 근대에 들어와서 플라톤의 이데아가 존재하지 않고, 객관적 실재가 아니라 인간의 관념이라는 게 전제되어야 관념론이 되는 거지. 고대의 idealism은 관념론이 아니라 형상철학이지. 그러니까 베르그송을 관념론자라고 부르는 것은 이중으로 피상적인 이야기에요.


▲ '기억'이란 동일성과 차이를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생명은 차이를 낳는 힘인 동시에 또한 기억이기도 하다.’ 기억. 만약에 기억이 없으면 시간도 없죠. 우리가 술 많이 마시고 필름이 끊겼다고 하죠? 필름 끊긴 곳부터 깨어날 때까지는 시간이 사라진 거지. 만약에 시간에 기억이 없다면 찰나밖에 없는 거지. 찰나, 찰나, 찰나밖에 없는 거지.

그럼 시간도 없죠. 시간은, 그게 찰나가 아니라 쭉 이어지는 운동성이 있어야 시간이 있는 거지. 베르그송이 말한 기억은 그냥 인간의 기억만이 아니라, 더 넓은 의미의 기억이죠. 아주 넓게 말하면 생명체의 유전자도 일정의 기억장치죠.

자기에 대한 기억을 실어 나르는 장치죠. 기억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다면, 시간에는 찰나밖에 없고 이 세상은 완벽하게 분산되는 물질 외에 어떤 것도 없겠죠? 물질이 조직 되고 거기에 생명이 들어가고 생명이 유전되고 진화되죠. 베르그송한테는 그 모든 게 기억이에요. 아주 넓은 의미의, 우주론적인 기억이지.

그런데 기억이라는 건 어떤 면에서 보면 동일성이거든요. 계속 남아있는 거 아냐. 그러니까 민족주의가 흥기할 적에 반드시 등장한 것 중의 하나가 긴 기억이죠. 일본도, 한국도, 유럽도 다 그랬어요. 왜냐하면 민족주의를 제시하려면 우리 민족이라는 동일성이 있어야 하거든요. 그 동일성이 공간으로 나타나면 ‘우리 땅이야’ 하는 걸로 나타나고 문화로 나타나면 언어(말)이고, 시간으로 하면? 역사로 나타나죠!

역사적 아이덴티티를 확보해야 우리 민족이란 말을 할 수 있잖아? 그러니까 민족주의라는 게 흥기할 적엔 반드시 역사적 조작이 일어나요. 예를 들어서, 중국, 일본, 우리나라도 그렇고 반만년 역사라고 하는데, 그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어떻게 알아요? 순수한 아이덴티티라는 게 어디 있어요? 뭐 몽골이니, 일본이니 다 섞이고 그런 거지. 다 그거 조작한 이야기죠.

현대 철학자들은 메모리를 굉장히 비판하거든요. 니체도, 푸코도 그렇고 메모리라는 걸 상당히 비판적으로 보는데, 실제 메모리라는 게 그런 부정적인 면이 있죠. 기억에 집착하게 만드는. 기억이 자꾸 새로움보다는 옛날 것을 끝없이 이어가려는 동일성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오토모 가치로라는 일본 애니메이션 감독의 ‘메모리즈’라는 영화는 기억을 다룬 영화에요. 기억을 과거, 현재, 미래로 나타냈어요. 굉장히 재밌고 내가 보기에 애니메이션 10대 작품에 들어가는 대단한 작품이에요. 첫 번째는 과거에 관한 건데, 과거의 화려함을 잊지 못하고 끊임없이 집착하는 거지요.

두 번째 현재는 자기 마음속에 내장된 메모리를 환경에 따라 바꿔 가야 되는데 못 바꾸는 사람의 상당히 코믹한 이야기고, 세 번째는 미래의 기억이야. 얼핏 들으면 모순되지. 과거의 기억은 있어도 미래의 기억이 있나 싶잖아요.

뭐냐면 전쟁이 발생한다, 적이 쳐들어온다. 그 기억을 사람들에게 주입해. 일종의 파시즘 체제지. 우리 이야기야. 북한 쳐들어온다고 만날 그랬지. 내가 학교 다닐 때만 해도 걸핏 하면 사이렌이 울렸다니까. 군기 좀 잡아야지 그러면 꼭 싸이렌 울리고 겁을 줘. 사람들이 항상 북한이 쳐들어온다는 기억을, 미래의 기억을 가지고 있지. 여러분들 그 영화 꼭 봐야 돼.

기억이라는 게 참 묘하죠. 기억이라는 게 없으면, 이 세계는 찰나밖에 없지. 시간으로 말하면 찰나, 공간으로 말하면 파편밖에 없죠. 그럼 아무 존재도, 의미도, 문화도 없겠지. 근데 기억이라는 것에 집착하면, 사람을 이상하게 만들죠. 기억이라는 건 동일성과 차이를 같이 가지고 있는 거지.

자기를 생각해 봐. 인간은 참 재밌는 존재죠? 동일성을 가진, 나는 나인데, 나는 또 변해 가죠? 그러니까 내 기억을 통해서 나의 아이덴티티가 존재하는 동시에, 나는 또 동시에 끊임없이 변해 가죠? 이게 묘한 겁니다. 동일성과 차이를 함께 가지고 있는 거죠. 동일성이 완전히 해체되진 않지만 계속 변해 가는 거죠.

그래서 분명히 나는 나인데, 어떨 때 십 몇 년 전 생각하면, 그게 나인가? 그런 생각 들죠? 내가 그럴 때도 있었나? 내가 언제 이렇게 변했지? 그런데 또 자기가 그렇게 생각하는 거 자체가 이미 기억을 하는 거지. 만약에 기억이 완전히 없어졌다면 그런 생각을 안 하겠지. 그래서 기억이란 건 참 묘해. 동일성과 차이가, 시간과 영원이 함께 있는 거죠.

이 기억이라는 게 평생의 작업이었어. 그래서 베르그송의 책 중에 『물질과 기억』이 있죠. 어찌 보면 생명과 물질의 투쟁은 기억과 물질의 투쟁이죠. 모든 거를 파편화하고, 흐트려 버리고, 끌고 가는 물질과, 끝없이 새로운 거를 만들어 나가는 동시에 과거의 것을 이어가려는 생명의 투쟁이죠. 죽음도 그렇죠? 우린 언젠가 죽는다 말야.

그게 말하자면 엔트로피에 굴복하는 거야. 개체성이 엔트로피로 사라지는 거야. 화이트 노이즈로 돌아가는 거지. 그러나 동시에 나는 내 자식에게 나의 아이덴티티를 남겨놓고 가는 거지. 이건 생명의 기억이죠. 그러니까 나중에 자식을 낳아 보면 자기하고 진짜 비슷하거든.

우리 아들을 보면, 티비 보는 폼이 나하고 똑같아. 둘이 누워있다가, 옆을 보면 나하고 똑같아. 그러니까 나는 엔트로피에 따라 사라지지만 내 기억은 아들을 통해 남는 거야. 그래서 플라톤은 인간이 영원(eternity)에 참여하는 게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자기를 닮은 자식을 낳는 것이고, 또 하나는 문화적, 언어적으로 남는 것. 예를 들어 우리가 지금도 호메로스를 읽잖아? 그렇게 남는 거죠.

‘베르그송은 연속성의 사유에 입각해 ‘무(le neant)’ 개념을 사이비 개념으로 비판했다. 무 개념은 ‘가능성(la possibilite)’ 개념을 전제하며, 베르그송은 무와 가능성 개념이 결국 인간의 주관(관심, 욕망, 바람, 아쉬움, ... )에서 유래함을 역설한다(‘무의 인간화’).

베르그송은 충만한 존재의 철학자이며, 무를 부재(不在)일 뿐인 것으로 봄으로써 서구 철학의 전통에 충실했다고 할 수 있다.‘ 이 대목은 워낙 많은 걸 설명해야 되어서 그냥 넘어가려고 해요. 그 다음에 계속 보죠.


▲ 습관에 젖어 기계화되는 것을 경고한 베르그송

습관은 석화(石化)된 생명이다. 생명은 숱한 자발성이요, 생기요, 운동인데 그것이 석화된다는 건 뭐냐면 우리의 습관이지. 그래서 베르그송은 습관과 생명을 대비시키죠. 인간이 습관에 젖어서 기계화되는 것을 경고하죠.

재밌는 건 헤겔 같은 사람은 또 습관이 중요하다 그래요. 왜? 우리가 습관을 가지게 됨으로써 인생을 낭비하지 않고 좀 더 중요한 시간에 자기를 바칠 수 있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내가 버스 탈 때마다 타는 법을 배워야 되면 얼마나 골치 아프겠어?

운전하는 사람은 알 거야. 자기가 만날 다니는 길은 생각을 안 하고 가거든요. 나도 만날 내 연구실에 주로 왔다, 갔다 하는데, 아침에 차를 갖고 가다 보면 연구실에 내가 와 있어 여기에. 내가 어떻게 왔지 생각해 보면 기억이 안 나. 만날 다니는 길이니까 습관대로 가는 거야.

그러니까 헤겔은 습관이 중요한데 왜냐하면 습관이 없으면 우리가 항상 다시 배워야 될 거 아냐. 그럼 얼마나 골치 아프겠어? 그 습관이야말로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게 해 준다는 거지. 어찌 보면 헤겔의 지적도 일리가 있는데요.

하여튼 베르그송은, 우리가 습관에만 젖으면, 생명의 새로운 운동성이나 창조나 생기를 상실한다는 거지. 그런 면에서 기계가 된다고 이야기한 거예요. 특히 도시 생활은 더 그렇죠. 도시 생활은 완벽하게 기계화되어 있기 때문에, 기계에 의해서 코드화 되지.

우리 신체가 기계를 이용하는 게 아냐. 기계들의 회로를 우리 신체가 돌아다니는 거지. 완전히 거꾸로죠? 베르그송의 철학은 19세기 말에 나온 건데, 그 때에는 세계의 모든 게 기계화 된 세계거든. 그런 기계화 시대를 맞이해서 어떤 운동성, 생명, 시간, 차이 같은 걸 역설한 거지.

그래서 어찌 보면 그 시대 사람들이 느끼던 삶의 위기의식, 기계화에 대한 존재론적인 답을 제시했다는 거죠. 그래서 이 사람이 엄청나게 인기가 좋았어. 사람들이 하도 많이 와서 프랑스 귀부인들이 하녀를 시켜서 미리 앉아 있게 했지. 하녀가 먼저 자리를 잡아놓으면 그 다음 자기는 늦게 와서 바꿔 앉는 거지.

베르그송 강의가 그렇게 엄청나게 대중적인 인기를 끌어서 어떤 사람이 오페라 하우스로 강의를 옮기자고 할 정도였어요. 근데 20세기 중엽이 되면 완전히 묻혀버려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왜 그러냐면 구조주의가 등장한 거죠. 다시금 과학적이고 이성적인, 플라톤적인 사고가 다시 득세하죠. 그러면서 베르그송은 한순간에 잊혀지죠. 근데 이 사람이 들뢰즈에 의해서 부활해요. 그래서 오늘날 베르그송은 어찌보면 들뢰즈라는 사람을 이해하는 통로로 읽히죠.


▲ 생명의 약동을 - 자신의 이론을 실천한 베르그송

‘베르그송은 우주의 ‘창조적 진화(l'evolution creatrice)’의 원동력인 ‘생명의 약동(l'elan vital)’이 우리 가슴속에서 숨 쉬고 있다고 보며 그것이 바로 ‘사랑의 약동(l'elan d'amour)’이라고 말한다. 때문에 윤리나 도덕에서 필요한 것은 이론이 아니라 자신의 가슴속에서 맥놀이치는 사랑의 약동을 실제 직관하고, 그 직관을 통해 우주와 인간과 삶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예컨대 내가 윤리학 백 권을 읽어도, 불쌍한 사람한테 손이 안 가면 안 되지. 그건 다른 문제야. 이론을 아는 거하고, 몸이 하는 거는 다른 문제야. 왜냐하면 윤리학 책을 백 번 천 번 읽어도 내 가슴과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윤리적 행동을 할 수 없는 거지.

근데 베르그송은 윤리의 첩경은 이론(theory)에 있는 게 아니라 자기 마음속에 살아있는 생명의 약동을 ‘느껴야 한다‘고 했지. 어찌 보면 참 동양적인 생각이지. 우리 마음에 있는 기를 실제 느끼고 그걸 내 몸으로 표현하지 않으면, 추상적인 이론을 가지고 이 세상의 윤리적인 기준이 되는 건 절대 아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윤리의 토대를, 기독교 성인들, 프란체스코 같은 사람들, 실제 그런 행동을 보여준 사람들에 의해서 윤리가 진행되는 것이지, 윤리학 이론을 통해서 윤리적이 되는 건 절대 아니라고 했죠. 그래서 이 사람은 실제 자기도 그렇게 살았다고 볼 수 있는데, 나치가 1939년에 일어나서 프랑스를 점령하죠.

나치가 유대인들은 등록해서 다비드 별 그려진 노란 완장차라고 했는데, 당신(베르그송)은 괜찮다하고 특권을 부여했죠. 근데 이 사람은 고통 받는 사람들하고 다르게 살고 싶지 않다면서 자기도 가요. 근데 그 날이 엄청 추운 날이었지. 그 바람에 폐결핵에 걸려서 죽게 되지. 그래서 자기의 이론에 모순되지 않게 산 사람이죠.

‘베르그송의 사유는 생성과 운동, 차이와 질적 풍요로움, 복수성, 그리고 창조와 생명, 사랑의 사유였다. 현대 형이상학의 근본적인 통찰이 그에 의해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사유는 이후 하이데거, 화이트헤드, 메를로-퐁티, 들뢰즈 등의 철학, 루이 드 브로이(양자역학), 일리야 프리고진(카오스 이론) 등의 과학, 마르셀 프루스트 등의 문학, 인상파 미술·음악, 그리고 정치(베르그송은 미국 대통령 윌슨을 설득해 제 1차 세계 대전에 참전케 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국제 연맹의 활동에도 깊숙이 관여했다) 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특히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특히나 뛰어나죠? 그것도 필독서죠. 근데 엄청 기니까 마음을 독하게 먹고 읽어요. 이것도 베르그송 철학과 같이 보면 큰 도움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