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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강 해석학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아들 2020. 3. 31. 23:49

제5강 해석학이란 무엇인가

◆ 해석학이란 무엇인가


▲ 해석학의 유래

존재와 언어를 해 봅시다. 해석학. ‘해석학(Hermeneutik)은 ‘헤르메스’에서 유래한다.‘ 그리스 신화의 헤르메스 아시죠? 제우스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메신저이죠? 칼립소가 오디세우스를 붙잡아놓으니까 놔 주라고 제우스가 헤르메스를 보내죠? 헤르메스는 명령을 전달하는 메신저, 그 다음에 상업의 신이에요.

그래서 도시와 같은 유통이 활발한 데, 사거리 같은 곳에 가면 헤르메스의 동상이 세워져 있죠. 동양으로 말하면 중국의 상업의 신은 삼국지의 관우죠. 뜻밖이죠? 왜 관우가 상업의 신인가? 중국 홍콩에서 큰 식당가면 관우 상이 있어요. 이유는 찾아보세요.

헤르메스가 유명한 신인데, 우리가 대화를 하다가 갑자기 조용해질 때가 있죠? 그거를 천사가 지나가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좀 와전된 말이고, 실은 헤르메스가 지나가는 거예요. 그리스의 헤르메스를 기독교식으로 해석한 거지. 기독교 천사로 바꿔서 이야기 한 건데, 천사가 아니라 헤르메스가 지나가는 거예요.

‘이것을 일반화할 경우 텍스트란 결국 저자의 의도 및 그 의도가 형성된 맥락, 상황, 의미를 전달하는 메신저이다. 해석학이란 의미를 담고 있는 텍스트를 해석하는 방법이다.’ 그래서 우리식으로 번역하면 ‘해석학’이죠.


▲ 현상학 형성의 흐름

1990년대 이후에 우리한테 새로운 문화 현상이 나타났는데 특징적인 것 중 하나는 텍스트라는 말의 외연이 넓어지는 거예요. 텍스트라는 말이 넓게 해석이 되는 거죠. 옛날에는 텍스트는 언어만 가리켰는데, 지금은 영상도 텍스트고, 옷 입는 것도 하나의 텍스트고, 노래도 텍스트이지요. 그래서 문화를 연구하는 지평이 엄청 넓어졌죠. 그거는 나중 이야기고.

일단 여기서는 ‘옛날 19세기 해석학이라는 건 문헌학을 비롯해서 텍스트 연구 방법론으로서 일찍부터 개발되어 왔다.‘ 여러분들 19세기가 되면 서양에, 서양의 19세기는 참 중요한 시기에요. 19세기에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문명의 이런 것들이 다 형성되었죠.

19세기에 어떤 특징이 나타나는데 뭐냐면 과거 서양의 학문은 영원의 학문이에요. 영원, 보편, 필연, 절대, 무한 같은 것처럼 지금은 빛바랜 말들이지. 이런 것에서 모든 게 ’시간‘에 입각해서 또는 생물학적으로 표현하면 ’진화‘에 입각해서, 또 인문사회과학으로 말하면 무엇이든 ’역사‘에 입각해서 이야기되죠?

이게 서양 학문의 근본적인 변화에요. 18세기는 과도기고, 17세기까지가 고전적인 경향이 나타나죠. 이것은 여러분들이 아주 기본적으로 알아놔야 할 중요한 사실인데, 이런 변화의 형이상학이나 존재론적인 맥락에서 나온 사람이 니체나 베르그송이죠.

그리고 ’시간‘이라는 지평에서 사유할 적에는 반드시 유한성이 등장해요. 아까 빼 먹었는데 무한이 이쪽(빛바랜 말들 부분)에 있죠. 시간적 지평으로 (진화, 역사 개념 등이) 도래하면 세계에 대한 무한적인 파악이, 유한성으로 변화하죠. 그러면서 학문도 '무한, 절대, 영원' 이런 게 아니라 전부 '경험' 위주로 가지요.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게 현상학이죠. 이런 흐름을 이해해야 됩니다.

오늘은 ‘역사’ 부분을 할 거에요. 17세기까지는 학문의 토대가 수학이에요. 물론 그 이후도 자연과학에서는 여전히 수학으로 가지만, 학문 세계의 전체 흐름을 볼 적에는 영원한 본질을 얘기하는 수학이 아니라 ‘역사’에요. 모든 게 역사로써 이야기돼요.

이걸 경제학적인 맥락으로 말하면, 경제학의 기본 개념인 생산(produktion)이 되는 거예요. 그전까지의 경제학에는 이 개념(생산)이 희박해요. 그러나 아담 스미스와 맑스를 거치면서 시간 속에서 만드는 생산이 핵심이 됩니다. 그 다음 생물학에서는 아까 말한 진화(evolution)죠.

그러면 우리의 오늘 주제 언어에서는 뭐냐? 이런 흐름에서 19세기가 되면서 시간의 철학이 도래했고 그게 형이상학에서는 니체, 베르그송이죠? 그러면서 유한성이 등장하고, 경험이 중시 되면서 현상학이 나오고, 또 사회과학에서는 생산 개념이 등장하고, 생물학에서는 진화 개념이 등장하죠.

그럼 언어라는 것에서는 문헌학(philology)이 등장해요. 이건 오늘 우리가 공부할 해석학(Hermeneutik)이죠. 또 중요한 건 언어학의 비교문법이라는 게 있어요. 그래서 언어를 논리학(logic)이나 통사론(syntax)과 같이 구조적, 공간적, 법칙적인 방식으로가 아니라 역사적인 변화, 언어의 변화, 그리고 항구적인 법칙성이 아니라 민족마다 따로따로 존재하는 언어의 다양성이 등장하죠.

빌헬름 폰 홈볼트, 헤르더처럼 언어를 자연과학적인 방식이나 보편적 법칙성, 공간적 구조로 이해하는 게 아니에요. 문헌학으로 실제 역사에 있었던 문헌을 다 뒤지는 거죠. 그 다음 비교 문법으로 각 언어들을 비교하는 거예요. 구조주의에서 중요한 사람이 소쉬르죠. 소쉬르는 바로 19세기적인 언어관에서 다시 구조적, 공간적, 법칙적인 것으로 다시 되돌아온 거죠.

자, 그런 맥락에서 나온 것 중 하나가 해석학(hermeneutik)이고요. 우리에게 남아있는 문헌들, 텍스트들을 어떻게 읽고 이해하고 그 속에 담긴 역사적 맥락, 상황들을 이해할 것이냐 하는 문제가 해석학의 중요한 동기죠.


▲ 해석학 - 기독교의 몰락, 텍스트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필요하다

해석학의 또 하나의 맥락이 뭐냐면, 서구적인 맥락인데 기독교의 몰락이에요. 과학이 발달하니까, 기독교의 성경(bible)에 써 있는 이야기가 영 안 맞게 되는 거지. 예를 들어서, 기독교 바이블 맨 앞의 누가 누구를 낳고 하는 내용이 나오죠?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누구 낳고 하는 것들에 대해 연대를 계산해 보면, 한 사람이 아무리 오래 살아도 지질학이 발견한 연대하고 터무니없이 안 맞는 거지.

뿐만 아니라, 더 이상 과거의 권위를 가졌던 텍스트의 권위를 거의 상실하게 되는 거예요. 기독교뿐만이 아니라 아주 권위있게 군림해 온 텍스트들이 19세기 생물학, 지질학, 별의별 게 발달하다보니 아주 엉망이 되어버리지. 자, 이런 문헌들은 아무런 가치도 없는 문헌들로 버려야 할 것이냐는 문제가 생기죠.

여기에서 해석학자들은, 이미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의) ‘텍스트’의 의미가 실추된 맥락에서 어떻게 거기에 또 다른 의미를, 문자 그대로의 의미가 아닌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겠느냐고 생각한 거예요. 예를 들어서 어느 남자가 어떤 여자와 연애를 하는데, ‘나는 너 때문에 내 가슴에 불이 났어. 타고 있어’라고 고백을 해. 그걸 읽고 여자가 남자 가슴에 물을 끼얹었어.

그러면서 이제 괜찮냐고 하면, 지금 뭐가 문제죠? 이 남자는 지금 문자 그대로의 의미(literal)로 내 가슴이 탄다고 한 게 아닌데, 이 여자는 시적 상상력이 없어서 문자 그대로 알아들은 거지. 그래서 가슴에 물을 끼얹죠?

또 성경에서 예수의 예를 봅시다. 어릴 때 읽어서 잘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예수가 물 위를 걸어서 베드로보고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든가 그런 대목이 있죠? 그러면 예수가 무공을 닦아서 물 위를 걸어갔느냐 이거야. 그거 어떻게 이해해야 되지요? 그럴 적에, 아 예수가 물을 걸어간 게 문자 그대로가 아니다, 이 텍스트를 문자 그대로 읽으면 안 된다, 달리 읽어야 된다 하는 게 그게 서구 사회에서 19세기에 해석학이 나오게 된 중요한 배경이에요.


▲ 현대철학을 가르는 분기점은 '의미'이다

그래서 ‘해석학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슐라이어 마허와 딜타이(Wilhelm Dilthey-일반적, 철학적, 사회적 맥락에서 해석학 시도)부터이다.’ 두 사람이 해석학의 원조 격이죠. 어찌보면 현상학, 해석학, 분석철학 등 현대 사유의 중요한 방법론을 이루고 있는 여러 사조들은 ‘의미’에서 갈라지죠.

meaning 이 뭐냐에서 갈라져요. 저번 시간에 한 현상학에서 meaning은 noema였죠. 내가 이 탁자를 보면 내 순수의식(noesis 우리 의식의 구성자로 되어 있는 거)이 내 경험적인 본질적이지 않은 것들을 다 접어두고 의미를 구성해 내죠. 그게 noema죠.

오늘 해석학, 또 분석철학은 또 다르죠. 그건 '지시'를 강조해요. ‘책상’이라는 말이 이 사물을 지시하죠. 또 구조주의는 의미를 ‘차이’에 두고 있어요. 이렇게 현대 사상의 절반 정도는 의미가 뭐냐, 의미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져요. 그런 관점에서 현대 철학들을 비교하면 그 차이가 금방 눈에 들어옵니다. 이게 왜 다른 사고인지, 사물을 어떻게 다르게 보는지가 말이에요.


▲ 해석학은 숨겨진 상징(symbol)을 찾아야 한다

우리가 분석철학 공부할 때 만나게 될 사람이 프레게(Frege)죠. 근데 해석학은 프레게처럼 명제, proposition으로 본다거나 혹은 좁은 의미의 기호(sign)으로 본다거나, 좁은 의미의 기호로 보기 보다는 상징(symbol)으로 본다.

그러니까 예컨대 꿈에 돼지를 봤다면, ‘아, 오늘 시골 계시는 어머니께서 돼지를 서울로 몰고 오시겠다. 기차에 돼지를 가지고 어떻게 탈까’ 고민할 필요가 없죠? ‘돼지’는 문자 그대로의 돼지를 지시하는 게 아니라 무언가를 상징하는 거니까요. 돼지가 사물 돼지를 지시하는 게 아니라 딴 거를 ‘상징’하는 거예요.

‘해석학에서 언어는 단지 특정한 사물을 지시하거나 진위 판단이 가능한 ’Gedanke'가 아니에요. (Gedanke는 프레게 전문 용어입니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 외에 숨겨진 의미를 담고 있는 상징이다. 해석학은 이 숨겨진 의미를 읽어내는 방법이다. 해석학은 생철학적인 계기하고 또 형이상학적, 존재론적 계기를 동시에 함축한다.'

무슨 이야기냐, 형이상학이 무너진 시대(플라톤의 이데아라든가, 기독교의 신을 비롯한 형이상학적 주장들이 더 이상 적어도 지식의 세계, 학무의 세계에서는 의미를 가지지 못한 시대)에 형이상학을 하는 또 다른 방법, 그러니까 언어들, 명제들에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하려고 하는 점에서, 말하자면 문자 그대로의 형이상학이라기보다는 약간 방향을 튼 형이상학이지.

또 하나, 이것은 생철학적 의미를 지니는데, 왜냐하면 언어를 단지 진위라든가, 논리적 구조 등등으로 보는 게 아니라 그것이 달리 의미하고 있는 사물에 주목하지요. 현대인이 볼 적엔 무의미하더라도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게 우리 문화에 많잖아. ‘호랑이가 담배 폈다’고 그러면 호랑이가 어떻게 담배를 펴? 그렇다고 무의미하다는 게 아니라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는 거예요.

언어를 과학적 객관성, 검증성, 구조 등으로 딱딱하게만 보는 것이 아니라, 언어라는 게 얼핏 보면 무의미한 거 같아도, 그런 언어가 표현되게 된 삶의 맥락이 있단 거예요. 그런 삶의 맥락이 진이냐 위냐 문제가 아니라 그걸 이해하는 거지. 그 맥락, 상황, 언어의 또 다른 의미를 이해하는 거죠. 그런 점에서 해석학은 인문학에 굉장히 중요하고 아주 굵직한 방법론이죠.

‘해석학은 텍스트를 쓴 사람과 읽는 사람의 생(Leben)에 초점을 맞추며 인간이 삶에서 겪는 체험(Erleben)을 다시 체험하고자(Nachleben) 한다.’ 'Er'가 들어가면 좀 강조하는 거지. ‘Nach'라는 건 after, 그러니까 거기에 따라서, 뒤에 다시 체험한다는 뜻이죠.

’이러한 성격은 딜타이에게서 뚜렷이 드러난다.‘ 그러나 해석학에는 인문학적 지평을 해석하는 게 있고, 어떤 삶을 이해하는 단계를 넘어서 존재론적인 맥락으로 확장되는 게 하이데거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해석학은 언어가 담고 있는 존재에 주목하며 이 때 존재론적 함축을 띠게 된다.

‘숨겨진 의미’를 찾는 것은 “언어는 존재의 집”(하이데거)이라는 생각을 전제하며, 이 점에서 전통 형이상학을 대체하는 새로운 형태의 형이상학이라는 함의를 띠게 된다.‘ 예컨대 하이데거는 휠덜린, 릴케, 게오르크 같은 사람의 시를 읽으면서, 단지 그 사람이 살았던 삶이라든가, 시대의 분위기, 맥락을 밝혀주는 게 아니고, 그런 인문학적 형태의 해석학이 아니라 존재론적인 해석학이죠. 그 사람의 시어들이 드러내고 있는 존재를 드러내는 언어를 그려내고 있는 거죠. 훨씬 더 거창한 의미를 부여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 해석학은 어떻게 전개되어 가는가


▲ 슐라미어 마허(Friedrich Ernst Daniel Schleiermacher, 1768~1834)의 개념들

처음에 프리드히 슐라이어 마허는 이전의 해석학 전통과 구별되는 몇몇 새로운 요소를 해석학에 도입하죠. 그 전의 해석학은 일종의 비평의 방법이었어요. 그것도 아주 넓은 의미에 인문학·철학적 방법론의 성격을 띠기보다는 비평의 방법이었는데 슐라이어 마허가 조금 더 일반화되고 심화된 방식으로 하나의 방법론으로 다듬어 낸 거지. 그래서 기법에서 학문으로의 변화를 이루게 됩니다.

슐라이어 마허가 이야기한 중요한 것 중에 하나가 추체험(Nacherleben, 追體驗)이죠. 어떤 텍스트를 읽고서 그 사람의 삶을 추체험하는 거예요. 그 사람과 내 삶의 지평은 다르지만 텍스트를 통해 남은 글을 읽음으로써 그 사람의 삶의 지평을 이해하는 거죠. 그게 추체험입니다.

근데 이게 상당히 주관적이고 어려운 거죠. 해석학의 난점은, 너무나 주관적일 수 있다는 거예요. 해석을 하는 게 귀에 걸면 귀걸이고 코에 걸면 코걸이란 말이야.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이현령비현령이죠. 어쨌든 해석학은 추체험에의 노력을 상당히 중요시합니다. 대중문화 중에 사극을 그린 게 있죠.

연산군이나 폐비윤씨, 이순신 같은 장군을 그리는데 보면, 티비에 나오는 사람들 얼굴이 너무나 현대적이지. 진짜 조선시대 사람 얼굴이 뭔지는 모르지만, 조선시대에 살았던 사람‘다운’ 얼굴이 아니라 대사나 행동이 모두 현대인 보는 것 같아요.

현대인이 가진 생각과 감정을 말을 투영하는 거지. 막 구성하는 거야. 어느 정도는 표현적이에요. 어쩔 수가 없어요. 우리가 가보겠어 어쩌겠어. 그런데 심하다 싶은 게 좀 많지. 추체험하도록 노력해야 하는 데 말이에요.

그 다음에 슐라이허 마허가 남긴 중요한 개념은 ‘해석학적 순환(hermeneutic circle)’이죠. 이 사람들은 모든 언어는 전체 맥락 속에서 의미를 가진다고 이야기하거든요. 그렇죠. 물론 모든 언어들은 전체 맥락 속에서 의미를 가지는데, 그렇다면 우리들은 책을 읽으려고 해도 시작할 수가 없죠.

왜, 우리가 책을 읽으려면 이 책 전체를 알아야 시작할 수 있는 것인데 그러려면 책을 읽어야 하니까. 역설적이죠. 이것을 읽으려면 전체를 알아야 하고, 전체를 알려면 일단은 읽어야 하는데 상당히 모순되고 순환되는 관계지. 가장 전형적인 예가 카프카 같은 사람이에요.

그 사람의 책을 읽으면 ‘이게 무슨 이야기지?’ 이렇게 깜짝 놀라죠. 그 사람 책은 해석이 안 되는 경우가 많아요. 특히 짧을수록 뛰어난 글이 많은데, 「아메리카나」, 「성」 같은 건 약간 진부하고 중편도 재밌지만 단편가면 더 재밌죠.

그런데 무슨 얘긴 줄 몰라. 지렁이가 기어갔다. 무슨 얘기하는 건가. 다 읽을 수 있습니다. 다 읽은 다음에는 돌아와. 그 다음에는 해석이 되죠. 그렇지만 모르는 부분이 있죠. 그래서 카프카의 작품들은 여러 번 읽어야 해요. 근데 여러 번 읽어도 해석이 안되는 게 있어요.

카프카가 쓴 「자칼과 아랍인」이라는 단편이 있는데 그것은 아무리 읽어도 이 사람이 무엇을 이야기하려는지 모르겠어요. 사막에 자칼이 나타나고 어쩌고 하는 거야. 정리하면, 슐라이어 마허라는 사람의 이야기는 모든 언어라는 것은 전체 맥락에서부터 의미를 가진다는 거야.

그런데 내가 전체를 알려면 이것을 읽어야 되죠. 이것이 바로 해석학적인 모순에 취한다고 할 수 있죠. 그렇다면 이 상황이 계속 순환할 수밖에 없죠. 전체를 읽어보고 또 부분을 뜯어보고, 부분을 보고 또 전체를 읽어보고 계속 재독, 삼독해야한다는 거죠.

그 다음에 추체험·해석학적 순환 외에 또 중요한 개념이 중요한 것이 바로 '선이해(先理解)'죠. 우리가 항상 어떤 것에 대해서 충분히 모르고 있는 상태에서 선이해를 가지고 있다는 거예요. 쉬운 말로 하면 선입견이죠. 원칙적으로 말하면, 우리가 어떤 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읽고 소화하고 난 다음에 ‘이건 이런 거야’하고 얘기해야 하는데 대게 안 그렇죠.

어떤 텍스트를 내가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았지만 그것에 대해 미리 가지고 있는 이미지가 있거든요. 그게 선이해에요. 근데 역설적으로 그 선이해가 없으면 그 책을 못 읽어. 선이해라는 게 아예 없으면 이해를 못하니까 시작을 못하죠. 예컨대 내가 아무리 모르는 책도 ‘이게 소설이겠구나’ 혹은 ‘이건 어렵겠는데’ 이런 생각이 막연하게 있을 때 읽기 시작할 수 있다는 거죠.

읽으면서 선이해를 교정 해 나가죠. 그러면서 거기에서 선이해가 또 작동되기도 하고, 오해하기도 하는 거죠. 이런 개념들이 슐라이허 마허가 말한 것들인데, 그가 요즘에는 그다지 자주 언급되지는 않지만 해석학에서 사용되는 몇 가지 중요한 용어들을 개발해 냈다는 것을 봐야합니다.


▲ 해석학을 일반적인 철학으로 수립하고자 한 딜타이(Wilhelm Dilthey, 1833~1911)

그 다음에 해석학을 세계와 인간,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 필수적인 현대의 굵직한 몇 가지 사유계열들의 하나로 확고하게 정립한 사람은 딜타이죠. 딜타이는 해석학을 모든 형태의 정신과학을 위한 일반적인 철학으로 수립하고자 했다.

19세기가 되면 자연과학주의가 득세해요. 자연과학이 아주 발달하면서 모든 학문이 자연과학의 모델이에요. 특히 물리학의 모델을 따라야 한다는 과학주의가 등장했죠. 현대에서도 과학주의가 존재하죠. 예를 들어 리차드 도킨스의 『이기적인 유전자』나, 에드워드 윌슨의 『사회 생물학』(사회과학도 생물학적 모델을 따라해야한다고 주장) 이 이러한 주장을 펼칩니다.

이러한 주장은 심심치 않게 주장되어 왔지만 그것이 가장 격렬했던 시기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예요. 그때가 과학주의가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한 시대죠. 당시 독일 학계에서 등장한 흐름은 과학을 자연과학으로 일원화하는 게 아니라 이원화해야한다는 거였죠.

자연과학과 정신과학, 자연과학과 문화과학 또는 자연과학과 역사과학처럼 이분법적으로 처리하면서 자연과학으로 환원하려는 경향에 안티를 벌였어요. 그 중에 하나가 딜타이가 이야기한 ‘정신과학’이죠.
딜타이의 불만은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을 씀으로서 과학에 대한 메타과학적인 인식론적 작업을 했는데,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은 자연과학에 대한 메타이론이다.

더 넓은 의미의 인식론이 아니라, 자연과학을 모델로 한 인식론이기 때문에 칸트의 인식론의 범주는 자연과학을 이해하기 위한 적절한 범주일지 몰라도 인간의 역사와 사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범주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래서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 대응하는 『역사이성비판』을 쓰죠.

한편으로는 하이데거, 사르트르 이후의 실존적인 철학자이고 한편으로는 맑스즘, 이 두 분야에 빠져서 이쪽은 별로 빛을 못 봤어요. ‘로크와 흄 그리고 칸트에 의해 구성된 인식하는 주체의 혈관 속에는 살아있는 피가 흐르지 않는다. 인간은 역사성을 핵심으로 한 존재이다.’ 인간은 보편적 법칙성에 의해 지배되는 사물이 아니라 역사·의미·문화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이 이 사람의 중요한 생각이죠.

칸트에 비해서 역사성을 중요한 사람은 물론 헤겔이죠. 칸트의 보편주의·객관주의·추상주의를 넘어서 역사성·특수성·구체성을 강조한 사람이 헤겔이죠. ‘딜타이는 헤겔처럼 역사를 사변철학으로 파악하기를 거부한다. 그렇다고 그가 맑스적 유물론으로 간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가이스트, 내적 체험에 있기 때문이다.’

딜타이가 볼 때. 역사를 이야기하되 헤겔은 너무 사변적으로 얘기했고, 맑스는 너무 유물론 적이다. 헤겔과 같은 식의 사변론적으로 하면 안 되겠지만 유물론적인 정신적 체험에 포인트를 맞춰야 한다는 거죠.


▲ 일본인의 내적 체험을 분석한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 1914~1996)

일본의 정치학에서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 1914~1996)라는 아주 중요한 인물이 있어요. 마루야마 마사오가 일본이 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후에 일본 파시즘에 대한 논문을 발표해요. 일본 사회과학사에서 가장 유명한 논문이에요. 그 논문이 왜 중요하냐면 일본의 파시즘이나 패전 같은 것은 경제학적, 유물론적으로는 설명이 안 되거든.

노동운동을 통해서는 설명이 되는데 이건 다른 문제죠. 마루야마 마사오는 일본 사람들의 심리구조를 분석을 해. 내적체험을 분석하는 거죠. 그게 딜타이 이후에 중요한 사람이 또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죠. 이 사람도 하부구조가 아니라 상부구조를 분석한 사람이에요. 그 후에 나오는 사람으로는 또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 라는 사람이 있죠.

이런 사람들은 막심을 여덟 번째 시간인가에 할 막심은 주로 경제현상이나 노동운동 같은 유물론적인 것에 포인트를 맞춘다면 이런 사람들은 상부구조라고 그래서 구차적인 차원의 중요성을 말하면서 분석하는 사람이에요. 일반적으로 얘기할 순 없지만 하여튼 일본 파시즘은 경제학적으로는 분석이 안 되지요.

그래서 이 사람이 일본 사람들의 심리구조를 천황제라는 것의 성격이라든가, 책임을 전가하는 사회구조를 아주 재미있게 분석하죠. 그런 게 말하자면 내적체험에 대한 분석인 것이죠. 해석학이라는 것은 ‘유물론과는 달리 탐구의 초점을 의미에 맞춘다. 나아가 딜타이는 역사주의 또한 거부하는데’ 이 대목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어요.

수학적 보편주의로 가면 학문적인 맛이 있죠. 법칙이 나오고, 연역의 재미가 있고 이 세상의 심층을 발견하는 맛이 있단 말이야. 그런데 그런 것은 나날이 살아가는 세세한 인간사를 포착하지는 못하지. 역으로 역사주의로 가면, 과학이라는 게 성립하지 않아. 죽 사실을 나열할 뿐인 거죠.

그러나 학문이라는 것은 기록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설명해 줘야 하잖아요. 그래서 그 사실들이 이러저러한 연유에서 발생한 것이라는 것을 설명해 줘야하는데 역사주의는 재미가 없죠. 그런 것들은 인간이란 무엇이고 역사란 무엇이고를 탐구하는 과학적인 게 없어요.


▲ 딜타이의 해석학적 개념들

이 사람은 해석학이라는 것을 그냥 역사주의가 아니라 일반화된 학문으로 만들기를 꿈꾸죠. 그런데 이게 어려워요. 왜냐면 상징적인 의미를 객관적 과학으로 다룬다는 게 만만치 않은 문제거든요. 또 그것을 꼭 그렇게 과학적으로 다뤄야 하는지도 의문이죠. 과학적으로 다뤄야 하는 대상도 있는 거고 아닌 맥락도 있는 거죠.

내가 대학 다닐 때 얘긴데, 80년대 초반인데 과학주의가 유행이었죠. 국어 시험도 이제 과학적으로 해야 된다고 그랬어요. 이 텍스트에 비유법이 몇 번 나오느냐 같은 식의 과학적으로 검증되는 것을 시험으로 내는 거예요. 말도 안 되는 거지.

과학적으로 다룬다는 것은 어떤 것을 과학적으로 다룰만한 주제이고 부절적한지, 그렇게 다뤘을 때 얻는 것은 뭐고, 억압되는 것이 무엇인지 아주 세심하게 봐야 되는 거죠. 어쨌든 이 딜타이라는 사람은 상당히 전통철학이 말하는 과학성·객관성에 미련을 많이 갖고 있는 사람이에요. 이런 맥락에서 딜타이 역시 해석학을 위한 여러 개념을 수립하죠.

첫 째, 감정이입(Einfuehlung) 이죠. 자기의 삶의 지평을 넘어서서 타인의 삶의 지평을 이해한다는 것은 감정이입이 필요하다. 그런데 슐라이어 마허의 감정이입이라는 것을 딜타이가 볼 때는 다분히 주관적인 거죠. 딜타이의 감정이입은 특정한 개인이나 상황보다는 텍스트가 등장하게 된 역사적인 지평 전반에 대한 감정입니다.

또 하나는 설명과 이해(Erklaren, Verstehen)입니다. 이 사람이 한 유명한 말이 있죠. ‘우리는 자연을 설명하고, 정신적 삶을 이해한다.’ 자연을 설명을 하는 것이고, 정신적 삶은 이해한다는 것이죠. 예컨대 예수가 물 위를 걸었다면 설명을 해서 될 것이 아니라, 이해해야 한다는 거죠.

그래서 자연과학적으로 설명하는 것과 정신과학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구분합니다. 세 가지가 중요하죠. 체험, 표현, 이해. ‘체험’을 하고 그것을 ‘텍스트로 표현’하고, 그것을 다른 사람이 ‘이해’하는 겁니다. ‘경험과 체험(Erfahrung, Erleben), 지각과 감정으로 인간을 설명하려는 태도에 비판했다’.


▲ 딜타이의 영국경험론 비판

그러니까 영국경험론이 말하는 경험이라는 것은 범위가 너무 좁죠. 지각에 해당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인간의 경험이라는 것이 지각에만 있는 것이 아니잖아요. 시적 경험, 종교적 경험, 역사적 경험, 정치적 경험도 있고 굉장히 많죠.

그러나 그 경험이라는 것을 영국경험론처럼 인식주체가 대상을 지각하는 것으로만 얘기한다면 경험을 너무나 편협하게 이해하는 거죠. 그래서 딜타이는 영국 경험론적 의미에서의 경험을 비판해요. 그래서 체험을 강조하죠.

그래서 생의 의미와 가치를 이해하려 하는 점에서 넓게 보면, 현상학과 해석학은 공동전선을 형성해요. 현상학과 해석학은 분명 다르지만, 과학의 객관주의에 대해서 연맹을 맺죠. 그래서 현상학과 해석학은 항상 같이 다녀. 쉽게 말하면 과학주의에 대항한 인문학주의지. 니체나 베르그송과는 달라요. 그 사람들은 전혀 인문주의가 아니죠. 그 사람들은 자연과학을 넓게 공부해서 개개의 과학이 아니라 통이 큰 우주를 얘기하는 거구요.

일종의 형이상학 존재론자이고, 해석학과 현상학은 과학주의에 대립하는 인문학주의에요. 인문학주의의 가장 대표적인 게 현상학과 해석학이죠. 최근에는 라캉의 정신분석학이 중요한 인문학주의, 반생물학주의를 형성하죠. 프로이드는 좀 달라요.


▲ 체험-표현-외화의 과정

그리고 시간성을 중시하죠. 그러니까 칸트가 말한 사물을 지각하는 의미에서의 물리적·과학적인 ‘시간’이 아니라, 삶의 시간·역사의 시간, 문화가 만들어지고 의미가 짜여지고 텍스트를 표현하고 이해하는 의미와 역사의 ‘시간’을 강조하죠. 그리고 이 점은 나중에 하이데거에게도 상당히 영향을 미치죠.

‘시간이라는 것은 의식의 주관적 범주가 아니라, ‘생’ 속에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 의미는 시간적이다·역사적이다 라는 것은 나중에 하이데거에게 아주 큰 영향을 미칩니다. 하이데거는 후설에게서는 현상학을 배우고, 딜타이에게서는 해석학을 배우죠. 그래서 이 사람이 이런 것들을 종합한 거죠.

그 다음에 표현은 ‘체험을 다루지만 내성으로 가지는 않는다'. 표현이라는 것은 자기의 체험을 표현하는 건데 그 표현이 마음 속, 내성으로 가는 게 아니라 ’객관화‘ 되어야 되요. 그래야 텍스트라는 게 있죠. 그것을 바로 체험의 ’외화‘라고 하죠.

그리고 ‘이해란 것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정신을 파악하는 것이다. 딜타이는 한편으로 생철학자로서의 삶의 충만함과 의미를 이해하려했고, 다른 한편으로 인식론자로서 해석학을 하나의 학문으로 정립하려 했다. 이 점에서 그의 사변에는 니체적인 생철학적인 요소와 신칸트학파적인 인식론적인 요소가 공존했다고 볼 수 있다’

 

◆ 하이데거와 해석학


▲ 하이데거의 존재론적인 해석학

딜타이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해석학을 인식론이 아니라 존재론으로 끌고 간 인물이 하이데거입니다. 철학적인 스타일이 따지면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일단 세 가지가 있어요. 예컨대 세계와 그 안의 인간 자체를 파고드는 것이 존재론이죠.

반면에 이 세계를 사유하는 것은 과학이 하는 것이고 (물리 세계는 물리학, 생물 세계는 생물학, 사회는 사회과학), 철학은 논리적(logical) 틀, 방법을 이야기하는 것이라는 인식론 유형의 철학사가 있고, 세 번째는 철학은 이론이 아니라 실천이라는 스타일이 있어요.

지식(인식)이 아니라 삶의 실천, 정치, 윤리 문제로 보는 거죠. 크게 이렇게 세 가지가 있지요. 존재론에 무게중심 가는 것, 방법론·인식론 등 메타과학적으로 관심을 갖는 게 있고, 또 정치, 윤리 쪽으로 무게를 두는 게 있고. 그 중 하나를 선택하는 건 아니죠.

어떤 사람은 세 개 다 갖고 있고, 어떤 사람은 전기엔 인식론, 후기엔 윤리학 하는 사람도 있고 여러 부류가 있지요. 하이데거 같은 사람은 해석학의 영향을 받았는데 (이전의 해석학은 인식론이었는데) 이 사람은 해석학을 존재론으로, 존재를 이해하는, 이 세계의 근원을 이해하는 방법으로 바꿔요.

‘하이데거는, 후설의 의식중심적, 본질주의적 철학을 비판했다.’ 지난 시간 기억하시죠? 후설은 경험을 중시한 사람이고, 전통적 형이상학이 아닌 ‘경험의 의미‘를 파악한 사람이지만, 그 방식 자체는 굉장히 고전적이고 본질주의적인 사람이라고 했죠. 근데 그 사람은 자기가 발표한 책에서는 본질주의자인데 또 한편으로는 생활세계를 파악한 점에서 양면이 있다고 했죠.

근데 하이데거는 후설의 의식중심적, 본질주의적인 철학을 비판했어요. 참 재밌는 현상을 보이는데 준법칙적으로 철학자들이나 예술가는 나이 차이가 굉장히 중요해요.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죽었어요. 그럼 그 다음에 태어난 사람은, 죽은 사람 사상의 전체를 이야기해요.

나이 차이가 조금 나면 사상 전개가 같이 가는 거고. 근데 애매한 게 10년 내지 20년 차이 나는 사람이 애매해요. 아예 나이 차이가 30, 40 나면 완전 아버지뻘이니까 얘기가 다르고, 또 10년 이하면 같이 가는 거니까 상관없는데, 15년 20년 나이 차이가 나면 어떤 현상이 벌어지느냐?

A란 사람이 사고를 쭉 정리해요. 그래서 어느 정도 틀이 잡히죠? 그럼 (틀이 잡힌) 바로 뒤에서 시작하는 사람(B)은 그 틀을 비판하는데 A는 아직 안 죽었으니까 전기 철학을 극복하는 후기 철학을 제시해요. 근데 B는 A의중기 사상(A의 전형적인 사상)을 공격하는 거예요. 이건 내가 보기에 철학사의 준법칙이에요.

예컨대 칸트가 쭉 가잖아. 그러다가 Fichte가 나와서 칸트를 막 공격해요. 근데 칸트는 스스로 사상이 더 전개되죠. 그래서 말년의 칸트는 fichte 의 비판을 비껴가게 되지요. 또 최근의 예를 들어서, 들뢰즈와 가타리가 라캉을 공격해요. 그게 72년이죠.

근데 라캉은 80년에 죽어. 그래서 들뢰즈, 가타리가 공격하는 건 중기 라캉에요. 사실 안티외디푸스 이후에 라캉 사유는 굉장히 중요한 변화를 겪거든요. 이게 준법칙적인데 후설, 하이데거도 똑같죠. 하이데거는 후설의 철학이 ‘본질주의·의식 중심이다’라고 공격해요. 사실은 후설 자신이 말년에 가면 이거하고 다른 길을 계속 걸어가고 있었던 거지. 이렇게 묘한 과정이 있지요.


▲ 하이데거의 기초 존재론

‘인간은 순수 선험적 자아가 아니다. 인간의 현존재, 즉 거기에 있는 존재다.’ Dasein 이죠. 인간은 순수의식이나 순수 주체성이 아니다. 인간은 자기 순수한 의식이 주는 데 있는 게 아니라 거기(Da, 세계, in the world)에 있는 존재다.

인간의 순수 자아, 주체성이 있고 그걸로 세계를 구성하는 게 아니라고 하죠. 그럴 경우 세계는 항상 인간 주체의 대상이 되지? 이런 방식의 주체 철학으로 볼 적에 세계는 늘 인간 주체의 대상(object)일 뿐이죠. 근데 하이데거는 그렇게 이야기하는 인간 자신이, 이미 그 세계 안에(in the world) 존재하는 거야. ‘즉, 인간은 세계-내-존재(In-der-Welt-sein), 더 쉽게 말해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인간은 순수 자아가 아니라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인 것이다. 그러나 하이데거가 딜타이와 니체의 연장선상에 있으면서도 방법론적으로 현상학의 결정적인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하이데거가 니체나 딜타이 같은 사람들의 생철학에 영향을 받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철학을 추구하는 방법적 측면에서 현상학의 영향을 받아들인 건 사실이죠.

‘다만 하이데거는 ‘Phanomeno-logie’를 현상의 본질을 파악하는 학문이 아니라 존재의 언어를 파악하는 학문으로 정의한다. ‘현상’이란 드러나는 것으로서 그것은 곧 존재자(ta onta, das Seiende)이다.‘ 존재자는 드러나 있는 것이고, 현상은 (하이데거에 의하면) 존재죠. ’로고스란 언어로서 존재를 드러내는 언어이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를 현상의 본질을 인식하려는 담론이 아니라 언어를 통해 존재를 이해하려는 담론으로 즉 해석학적인 담론으로 이해한다.‘ 그러니까 드러나 있는 현상을 지각하는 차원이 아니라 언어를 매개해서 이해하는 거죠.

‘하이데거의 기본 관심은 존재론이지만, 그 전에 존재를 이해하고 존재 물음을 던지는 유일한 존재인 인간에 대한 해명이 필요하다. 하이데거는 이 작업을 ‘기초 존재론’이라 부른다. ‘ 그러니까 존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존재를 이해하려고 하는 존재에 대해 이야기하는, 존재에 대해 사유하는 존재, 즉 인간이란 걸 이해해야 한다.

’인간은 막연하게나마 자신의 실존(Existenz)과 존재 이해를 가지고 있으며, 이 사실(Faktum)에서 출발해 존재에 대한 본격적인 이해를 추구할 수 있다.’ 아까 슐라이허마흐의 선이해를 얘기했는데, 이 사람의 선이해는, 인생에 대한 선이해에요. 어떤 특정한 텍스트에 대한 선이해가 아니지요.

우리는 사실 인생을 명료하게는 모르지. 누구도 인생을 백 프로 만족스럽게 규정하기 힘들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나 인생에 대해서 막연하게나마 어떤 선이해를 갖고 있지. 그것을 실마리로 존재에 대한 이해를 추구할 수 있다고 보는 거죠.

‘하이데거에게 ‘세계’와 ‘사물’은 현상학적 주관성과도 과학적 객관성과도 구분되는 방식으로 이해된다.‘ 세계와 사물을 현상학적 주관성이나 과학적 객관성과는 좀 다른 방식으로 이해한다는 거죠. ’세계와 사물은 이제 인간이 현실 세계에서 보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서술된다.

하이데거는 현실 세계가 결코 데카르트가 이야기하는 것과 같은 과학화된 세계가 아니라 생활세계라는 것을 손에-잡히는-존재(Zuhanden-sein :예컨대 백묵, 탁자 같은 것은 손에 잡히죠?),‘...를-위하여-구조(um ... zu ...:책상은 책을 놓기 위해 있는 것이고, 책은 읽기 위해 있는 것이고, 읽는 것은 뭘 알기 위해 있는 거죠?)를 비롯한 다양한 개념들을 동원해서 서술한다.’

그러니까 세계를 이 사람은 상당히 일상성으로 표현해요. 예컨대, 자연과학적으로 이야기하면 이 탁자가 몇 kg의 물체고, 재료는 무엇이다 같은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죠? 이 사람에게는 이 탁자가 아주 일상적인 거지. 뭐를 위해 있는 거냐? 그러니까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는 세계(world)는 원자들의 집합, 이데아의 표현, 신의 피조물이다 등등이 아니라, 하이데거는 그게 아니라 세계라는 말을 가장 일상적으로 이야기해요.

인간은 그렇게 살아가는 존재다. 인간은 탁자를 원자집합, 수식, 이데아의 표현으로 보는 게 아니고, 뭔가를 하기 위한 어떤 거, 삶 속에서의 무언가를 위해 있는 것으로 본다는 거지. 사물(thing)이라는 거지. 우리가 생활세계 현상학을 자기 말로 표현한 거라는 걸 짐작할 수 있죠.


▲ 자신을 기투하는 인간은 죽음이 자신의 본질임을 깨닫고 받아들일 때 본래적 인간이 된다

‘하이데거는 딜타이의 해석학을 존재론으로 전환시킨다. 이해란 방법론이기 이전에 인간의 존재 방식이다. 현존재는 늘 어디엔가 처(處)해-있는-존재이며(Befindlichkeit)’ 현존재는 처해 있는 존재라는 말을 봅시다. 여러분들 ‘나는 내 인생의 갈림길에 서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I find myself)’같은 말 하죠?

그러니까 이건 과학주의에 대한 반대인데, 예컨대 이 방에 면적이 몇 입방미터라든가, 이 건물의 무게가 몇 kg이라든가, 어떤 사람에게 세포가 몇 개다 등등이 아니라, 내가 어떤 상황 속에 처해 있는 거지. 여러분은 지금 공부, 강의라고 하는 상황에 처해 있는 거죠? 이렇게 항상 누군가 어딘가에 처해 있다. 그걸 사르트르의 용어로 하면 상황(situation)이죠.

'현존재의 이러한 의미 이해는 시간을 그 근본적인 지평으로 가진다. 그래서 이해란 항상 시간과 관련되며 현존재의 미래에의 기투(Entwurf)에 관련된다.' 이 문장 중요해요. 이 현존재의 의미 이해는 시간을 근본 지평으로 가진다. 현존재가 자기 삶을 이해하는데, 그 이해는 시간을 근본 지평으로 한다는 거죠.

재밌는 것은 인간의 자기 이해, 인간이 자기 실존을 이해하려면 항상 미래에 시작하거든요. 무슨 뜻이냐 현존재로서의 인간 실존은, 의식(관심)이 미래를 향해 있다는 거예요. 그 다음에 과거가 오고 마지막에 현재가 오죠. 이런 구조로 되어 있어요. 그래서 인간은 항상 미래에 자기를 던지는 존재에요.

기투(Entwruf)죠? 그런데 인간이란 존재가 미래를 바라본다고 할 적에, 그 미래에서 나타나는 건 죽음이죠. 죽음이 자기 실존의 근본 조건임을 알게 되죠. 그러면서 ‘인간은 ‘죽음으로-향하는-존재(Sein-zum-Tode)’라는 것을 발견하고 자신의 실존이 곧 ‘불안(Sorge)’를 그 본질로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 불안을 통해 인간은 무(Nichts) 앞에 서게 되며(죽음과 불안을 통해서 ‘무’, 없음, 없는 것을, 완전한 무 앞에 서게 되는 거에요) 실존적 결단을 통해 깨어있는 인간, 본래적 인간이 될 수 있다.‘ 그 죽음과 불안, 무로부터 끝없이 도망가면서 어떻게 그걸 피해 볼까 하는 인간이, 비본질적 인간이라고 보죠.

인간의 이 삶을 완벽하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럼으로써 자기 실존을 찾는 사람을 본래적 인간이라고 그래요. 하이데거가 말하는 본래적 인간을 아주 잘 묘사한 것이 까뮈의 『이방인』이지. 죽음 앞에서 (자기가 몇 시간 후에 사형을 당하는데) 무 앞에 선 거지. 오히려 가장 자기 죽음이 다가온 그 순간에 사형수가 역설적으로 가장 본래적이고 깨어있는 자기로 돌아가죠.


▲ 하이데거의 전기철학

하이데거의 전기 철학은 ‘간전기(間戰期, entre guerres - entre가 뭐냐면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사이에 있는 기간이에요. 두 가지의 guerres 사이에 있는 entre)를 반영하는 음울한 분위기를 풍기며' 유럽의 20세기 전반기 문화가 대체적으로 음울해요. 문학도, 철학도, 미술도 다 음울해요.

왜냐하면 1차 세계대전을 통해서 19세기 번영이 무너지죠. 예를 들어서 19세기와 20세기 초를 벨르 에뽀끄(아름다운 시대)라 그래요. 걔들로 보면 평화로운 시대이죠. 그게 부르주아 문화가 아주 절정에 달했을 때에요. 19세기 산업 혁명 발생하고 굉장히 유럽에 혼동이 오죠. 혁명이 발생하고 막 한단 말이에요.

그걸 거쳐서 보불전쟁 이후에 70,80년대쯤 보면 안정이 되요. 1차 세계대전 전까지가 가장 유럽사회가 안정되지. 물론 그 때는 유럽 바깥으로 보면 굉장히 고통스럽지. 제국주의를 당할 때지. 이 놈들은 제국주의 통해서 얻는 부를 통해서 아주 편한 삶을 살게 되거든.

<레이디 앤 트럼프>라든가, <아리스토켓> 같은 영화가 묘사한 것들이 그 시대야. 그게 1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 무너지는 거지. 그리고 앞으로 1차에 겪은 거와는 비교도 안 되는 게 또 온다고 하는 공포감이 엄습하는 거야. 그 때가 간전기에요. 소설 『개선문』이 그 시대 분위기를 잘 그린 소설이죠.

그래서 하이데거 철학은 음울함을 반영하는데, 사르트르는 이 사유를 밝은 실존주의로, 참여, 책임지고, 투쟁하는 식의 정치적 실존주의로 전환시키죠. 그래서 하이데거가 자기를 실존주의로 해석하는 사르트르에게 편지를 보내죠. ‘이른바 휴머니즘이라는 서한에서 자신이 존재론자임을 분명히 한다.’

‘‘드러남’ 즉 탈은폐성(脫隱蔽性)은 곧 존재의 나타남이다. 하이데거가 현상학을 채택한 한에서 그의 존재론은 비가시에 대한 사변을 뜻하기보다 가시에 대한 해석(Auslegung)을 뜻한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사변이라기보다는 보이는 것에 대한 해석입니다.

’그러나 이 해석은 인간이 존재에 언어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언어로 하여금 인간을 통해서 말하게 함으로써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이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그러니까 내가 말하는 것도, 내가 하는 게 아니라, 존재의 언어가 내 입에서 나오는 거야. 시인도 자기가 쓰는 게 아니고, 언어가 시인을 (매개로) 통해서 나타나는 거야.

게오르크 트라클이란 사람이 유명한데, 'Das wort'(말)란 시가 있죠. ‘말이 불가능한 곳에는 사물도 없다는 것을’ 하이데거의 영향을 많이 받은 여류 시인, Ingeborg Bahamann이 있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인데)이 사람 시가 상당히 하이데거적인 것과 많이 통해요. 존재의 빛을 드러냈죠. 하이데거는 싫은데 이 여자는 좋은 거 같애.

‘하이데거는 서구 사유가 사물들을 자신 앞에 불러와(vor-stellen)’ 서구 사유가, 사물들과 더불어 살고, 존재의 목소리를 듣는 철학이 아니라, 사물을 대상화하고 일일이 규정하려 하고 수식화하죠. 독일어로 표상 vor-stellen 인데 해석하면 사물들을 자기 앞에 불러 세우는 거야. 일종의 서구 학문이라는 것은 인간이 세계를 지배하는 주체중심주의라고 이야기할 수 있죠.

‘그 시초로서 플라톤의 사유가 비판되며, 그 후 서구 사유의 존재 망각이 비판된다.’ 그래서 이 사람이 볼 적에, 서구 사유의 주체중심주의 지배의 논리가 극단에 이른 것이 바로 니체의 힘에의 의지로 나타나죠.

‘그 결과 오늘날의 기술 문명이 도래했다고 본다.’ 이렇게 서구적인 자연관, 세계관에 극한에 있는 게 테크놀로지(기술문명)이지요. ‘하이데거는 서구 사유의 해체를 통해서 존재론적 차이, 존재자(세상에 존재하는)와 ‘있다’, 존재의 차이를 역설했다.‘ ‘하이데거는 서구 사유의 해체를 통해서 존재론적 차이(존재자와 존재의 차이)를 역설했다.


▲ 하이데거의 후기철학

하이데거의 후기 철학은 철저하게 언어의 문제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특히 시의 분석이 주종을 이룬다. 이것은 하이데거가 시야말로 존재를 드러내 주는 언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횔덜린, 릴케, 트라클 등의 시에 대한 분석을 통해 “존재의 빛 속에(In-der-Lichtung)” 서 있음을 지향했다.‘

하이데거 후기 철학은 아리송해. 그 자체가 시야. 너무 어렵게 이해하려 들지 말고 그냥 시로 읽고 느낌으로 오면 되요. ’진리란 명제와 사태의 일치가 아니라 드러남, 탈은폐성이다. 시와 철학은 이 탈은폐성에 봉사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한편으로 전통 사유의 주관성, 인간중심주의, 존재 망각에 대한 비판으로 나타나며, 다른 한편으로 그러한 상황에서의 탈출구로서 시와 예술을 통한 존재에의 귀기울임이라는 대안으로 나타난다.‘ 이런 하이데거의 사상이 아주 잘 나타난 글이 『예술작품의 근원』이죠. 우리말로 번역되었는데, 그게 후기 철학을 이해하는데 가장 도움이 될 거에요.

‘하이데거 이후 해석학을 발전시킨 인물들로서 가다머(Hans-Georg Gadamer)와 리쾨르(Paul Ricoeur)가 있다. 가다머는 하이데거의 사유를 좀 더 구체적인 형태로 다듬었으며 특히 미학의 문제와 역사철학의 문제에 커다란 공헌을 했다. 그의 저작으로는 『진리와 방법』이 대표적이다. 리쾨르는 해석학을 주로 다른 담론들(언어분석철학, 구조주의 등)과 대결시키면서 정교화했고, 또 『시간과 이야기』를 통해서 미학을 전개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