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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강 분석철학에 대해서

하나님아들 2020. 3. 31. 23:51

제8강 분석철학에 대해서

◆ 분석철학이란 무엇인가


▲ 분석철학 - 방법론적 철학

오늘 할 내용은 분석철학이에요. 지난번에 말씀드린 대로 니체와 베르그송으로 대변되는 존재론 계통이 있죠. 존재론은 존재론인데 생성의 존재론이죠. 전통적인 형이상학이 흄, 칸트, 콩트에 의해서 논박당한 이후에 새롭게 정립된 존재론이죠. 또 하나는 현상학과 해석학이었죠. 근데 둘 다 기본적으로 논리나 분석, 본질 탐구, 이성 중시했던 전통 철학과 대립하는 거죠.

그런데 요거에 비해서 비교적 전통철학적인 성격을 오히려 현대에서 유지한 갈래들은, 말하자면 합리주의죠. 서구 전통적인 사고의 기본 성격인 rationalism 이죠. 물론 합리주의란 말이 워낙 층차가 큰 말이에요. 좁은 의미가 있고, 넓은 의미가 있죠.

아주 넓게 쓰자면 그냥 학문 자체가 합리적인 거지. 학문이란 게 다 합리적인 거지. 학문을 감각이나 감성으로 하는 건 아니니까. 그러니까 이 말의 층차가 하나마나 한 일반적인 의미에서부터 아주 좁은 의미까지 특정한 사조에 이르기까지 층차가 굉장히 넓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간에 이 두 계열이 전부 서구의 전통적인 합리주의에 대한 반기를 든 거죠.이성중심주의, 합리주의, 논리와 분석을 중시하는, 객관성을 중시하는 사조에 대해서 둘 다 반대해요. 그러나 이런 성격(합리적)을 여전히 유지하는 계열도 존재하는데 크게 보자면, 과학철학(과학에 대한 일종의 메타과학)이 있고, 그 다음 오늘 공부할 분석철학이 있죠. 그 다음에 구조주의에요.

이렇게 세 계열이 있죠. 말 자체가 ‘과학’, ‘분석’, ‘구조’ - 합리주의적인 냄새를 풍기죠? 그래서 오늘은 두 번째로 분석철학을 해 봅시다. 이 분석철학을 니체나 베르그송과 현상학, 해석학과 비교해 보면 아주 대조적이죠.

이 분석철학은 어떤 사조가 아니에요. 우리 보통 사조란 말을 쓰죠? 현상학, 해석학, 변증법, 구조주의, 예컨대 문학에서는 낭만주의, 사실주의, 모더니즘 이런 게 다 사조죠? 그런데 분석철학은 사조란 말을 쓰면 사조일 수도 있겠지만, 사조라기보다는 철학의 방법을 둘러쓴 용어에요.

철학을 어떻게 할 것이냐? ‘철학‘의 담론을 어떻게 규정하고, 어떤 방식으로 철학을 할 것이냐 라는 것을 둘러싼 개념이죠. 이 개념이 분석적이에요. 말하자면 logicao-linguistic, 그러니까 logical 하고 linguistic 한 논리언어지.

논리적, 언어적 분석을 가지고 철학을 한다는 거죠. 철학은 내용은 다 다르지. 그 철학의 내용은 다르기 때문에 사조라 하기엔 어울리지 않죠. 내용이 같은 게 아니라 (사조가 아니라), 방법, 철학을 하는 방법을 논리적 분석으로 하는 전통이 있어요.

그래서 ontologie 라든가 현상학, 해석학, 다음 주에 할 구조주의, 후기 구조주의 전부 유럽철학이죠. 그에 비해서 분석철학 전통은 보통 우리가 영미에서 많이 발전했기 때문에 흔히 영미 분석철학이라고 부르죠. 근데 사실 창시자들은 유럽 사람들이에요.

러셀과 화이트헤드를 빼면 말이에요. 근데 전에도 얘기했듯이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유럽의 학자들이 미국으로 망명하죠. 그러면서 영미 분석철학이 되는 거예요.

‘이 사유는 개념, 범주, 변증법 등 추상적인 사회를 거부하고 생생한 운동성을 지향한 베르그송과는 달리 오히려 논리학의 형식적 분석을 통해서 철학의 문제들에 접근한 사조이다. 19세기에 부울(George Boole), 밀(John Stuart Mill), 프레게(Gottlob Frege) 등이 현대 논리학의 형성에 크게 공헌했으며, 이 중 프레게는 분석철학의 성립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 논리학에 수학적 함수 개념을 도입한 프레게(Friedrich Ludwig Gottlob Frege, 1848~ 1925)

프레게는 원래 수학자죠. 근데 (지적) 영토를 넓혀서 논리학, 철학을 연구한 사람인데, 이 사람이 사상사에 남긴 중요한 공헌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식논리학(formal logic)을 수학의 함수(function) 개념을 도입해서 명제논리(propositional logic)로 발전시킨 거죠. 이 점에 이 사람의 중요한 공헌이 있습니다.

전통 논리학이 보통 ‘S is P'의 구조로 이루어지죠? 주어(Subject)와 술어(Predicate)죠. 예컨대 ’소크라테스는 하얗다’ 같은 문장이죠. 그런데 명제의 형식을 저런 식(명제 형식)으로만 규정할 경우에 표현할 수 없는 말이 참 많죠. 그래서 프레게는 수학의 함수 개념을 도입해서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으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죠.

예를 들어서, ‘소크라테스는 소크라네스이다’라는 문장과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는 문장은 형식 논리학적으론 똑같은 형식이에요. 전혀 구분되지 않아요. 그러나 예컨대 수학적 함수로 표현하면 앞의 건 x =x 가 되고 뒤에 건 x=y 가 되니까 기본적으로 다른 형식이 되죠.

그러니까 형식 논리학의 형식은 너무 폭이 좁아요. 그렇기 때문에 논리에 담을 수 있는 언어적 표현들이 제한되죠. 그에 비해서 수학적 함수 개념으로 표현할 경우는 굉장히 다채로운 표현을 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런 식으로 해서 논리학이 다루는 것은 어디까지나 명제 proposition 이죠.

예를 들어서 ‘Snow is white’하고 ‘눈은 희다’ 두 가지 문장을 보면, 문장으로는 다른 문장이죠. 그러나 명제로는 똑같은 거예요. 뭐라고 표현하던 똑같은 하나의 명제에요. 문장과 명제의 차이를 알겠죠? 명제는 이런 언어적 표현들이 가지고 있는 물리적 성격들 소리라든가 모양이라든가 이런 것들을 넘어서는 거죠. 그

러니까 'Snow is white'라고 하든 ‘눈은 희다’고 하든, 문장은 여러 가지이지만 전부 기본적으로 하나의 명제이죠. 그 다음에 어떤 어린 애가 ‘나는 바닐라 아이스크림이 좋아’라고 얘기하면, 그건 명제가 아니라 진술(statement)이죠.

또는 ‘야! 저 사람 좀 봐라!’ 하는 감탄문, 또는 ‘나는 -가 좋아’라고 하는 개인의 감성을 표현하는 것들은 명제가 아니에요. 왜? 그런 것들은 진위 판단이 불가능하니까요. 그러니까 원칙적으로, 학술 논문에 들어가는 건 전부 명제들이지.

그래서 명제는 문장하고도 구분되고 진술하고도 구분되죠. 그리고 또 하나 논리학은 형식을 다루지 내용을 다루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가 지난 시간에 바슐라르 이야기하면서 과학의 명제를 확증할 수 있는 것은 부정명제 뿐이라고 했죠?

‘-가 아니다’라는 것은 확증할 수 있지만 ‘-이다‘는 확증할 수 없다는 것을 논리학적으로 이야기했죠? 예컨대 ’소크라테스는 곰이다. 곰은 죽는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는 삼단논법은 맞는 거예요. 내용은 틀리죠. 소는 곰이 아니니까. 근데 logical form 은 맞는 거예요. 맞는 추론이에요.

‘이렇게 수학적 형식화를 통해서 일정한 집합은 변수로’ 변수라는 게 참 재밌죠? 예를 들어서 장미, 백합 이렇게 명시적으로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x라는 꽃’이라는 표현 방법이 변수죠. 물, 불, 수산화 나트륨 등을 y라는 물질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 거죠. 요런 두 카테고리가 맺을 수 있는 관계를 예컨대 f(x), y로 표현하죠.

변수(variable)라는 생각이 현대 문명 건설의 초석 중의 하나에요. 변수 개념은 물론 중세에도 등장하지만 변수 개념을 가장 결정적인 방식으로 제시한 사람은 갈릴레오죠. 갈릴레오가 시간, 속도, 거리 같은 것 사이에 함수 관계를 보여줘요.

그러니까 이 세계를 변수로 본다는 거 있죠. 그게 어찌 보면 현대 문명을 만들어낸 빼놓을 수 없는 장본인 중 하나에요. 그리고 변수들 사이의 관계가 함수죠. 과학이라는 사고방식의 가장 기본 중의 하나가 함수를 구하는 거죠.

물리학자는 물질의 함수, 생물학자는 생물의 함수, 경제학자는 경제의 함수를 구하는 거고. 과학을 하는 작업이 여러 가지 있지만, 가장 기본적인 작업이 함수를 구하는 거죠. 첫째로, 사물들을 변수로 포착하고, 그 다음 변수를 내용으로 채워 넣으려면 측정을 해야 되겠지. 예컨대 수요 x와 공급 y를 변수로 잡았다. 그럼 어떻게 됩니까?

이 변수에 어떤 값이 들어가는지를 측정해야 되겠지. 어제는 증권이 어땠고, 그 다음 어땠고를 측정 해야겠지. 그 다음 측정치 사이의 관계를 살펴서, ‘x가 한 번 증가할 때마다 1 증가, y는 두 배로 증가하더라’ 그러면 y=2x 가 되는 거고, ‘반비례하더라’ 그러면 y=1/x 이죠. 이런 식의 사고 방식, 이렇게 사물을 바라보는 게 모더니티의 핵심이에요.

사물을 변수화, 측정해서, 함수관계를 만드는 것이죠. 함수 관계를 만들면 예측이 가능하죠. 일단 함수를 만들어내면, 함수 중의 시간 t 가 들어가 있다면 t 에다 대입하면 되죠. 그럼 계산이 나오죠. 예측이 되지. 이런 식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방식의 모더니티의 핵심이에요.

‘그래서 ‘한국의 수도’, ‘일본의 수도’, ‘미국의 수도’ 등등은 ‘x의 수도’로 형식화된다(변수가 하나인 경우). “로미오는 줄리엣을 사랑했다”, “이몽룡은 성춘향을 사랑했다”,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를 사랑했다” 등등은 “x가 y를 사랑했다”로 형식화(변수가 두 개인 경우)된다. 흥미롭죠? 이런 식의 형식화를 비판하고 그것이 왜곡하고 있는 무한한 질적 풍요로움을 강조했던 베르그송과 정확히 대비되죠.

‘프레게는 세계의 무한한 경우들(cases)’ 이 ‘경우들’이란 말 자체가 이미 그 경우들이 포함하는 일반성을 전제하는 거지. a, b, c, d 등이 x의 경우들이란 이야기는, a, b, c, d 같은 파티큘러(particular)들이, x라는 일반(general)적인 것들의 경우란 이야기지. 그러니까 경우란 개념 자체가 이미 그것이, 그를 포괄하는 전체의 한 경우라는 식이란 생각을 포함하는 거지.

그래서 그런 경우들이 공통으로 전제하고 있는 논리적 형식(logical structure)를 뽑아내고자 하였다. 예컨대 지구상에서 수많은 나라에서 수많은 시대에 수없이 다양한 사람들이, 너무너무 다른 남녀들이 예컨대 사랑을 했지만, 그건 다 'x 가 y를 사랑했다'라는 logical form 의 경우들일 뿐이지(이런 입장에서 볼 적에).

무한한 시대에 무한한 지역에서 무한한 무기로 무한한 사람들이 'a가 b를 죽였다'라고 하는 경우(form)를 실현하고 있는 거죠. 그래서 이런 식의 생각은 상당히 플라토닉한 생각이다. 니체나 베르그송, 현상학, 해석학 같은 현대 대다수의 사조들이 전부 서양의 전통철학인 플라토니즘에 대한 안티 플라토니즘이죠. 그에 비해서 합리주의 철학은 플라토니즘의 철학을 그대로 잇고자 하는 거죠.

 

◆ 분석철학은 세계를 어떻게 탐구했는가


▲ 프레게는 논리적 법칙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프레게는 논리적 구조가 'Gedanke'로써 자율적으로 존재하며' 무슨 뜻이냐하면, 좀 더 경험주의적으로 본다면 그런 형식들(logical form)은 리얼한 게 아니고, 진짜 리얼한 것은 이 세상에서 실제 존재하는 사람들, 행위들이고, 이런 것들은 인간의 이성이 그것들을 좀 더 합리적으로 파악하기 위한 하나의 개념적 장치들, 수학적 구조인 것이지, ‘그런 구조가 정말 리얼하게 존재해?’ 라고 물을 수 있다는 거죠.

예를 들어서 ‘x가 y를 사랑했다’라는 논리적 폼이 있고, 무수한 경우들이 그거를 채워주는 게 아니라, 실제 존재하는 거는 사람들이고, 그거의 행위들인데, 그것들을 묶어서 이해하려다 보니까 이런 폼을 사용하는 거라고 볼 수 있잖아요? 그건 경험주의적인 사고죠. 근데 프레게는 그런 폼이 있다는 거예요.

비록 어떻게 있는지는 간단하지 않지만, 이 분필처럼 딱 볼 수는 없지만. 이런 식의 사고가 합리주의에요. 똑같아요. 한국 사람들이 밥 먹는 것, 프랑스 사람이 밥 먹는 것, 중국 사람이 밥 먹는 것, 그 폼이 있다는 거야. 그리고 모든 식사는 식사의 폼을 자기도 모르게 구현하고 있다는 거죠.

또 자연과학, 과학철학에 대한 과학이 말한 법칙이 그냥 인간이 생각해 낸 게 아니라 그 법칙이 있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 있다는 것뿐만 아니라 (강하게 이야기하면) 우리가 눈으로 보고 만지는 것들보다 더 실재적(리얼)이란 거지. 과학적 법칙이, 논리적 형식이, 구조가 더 리얼하다는 거야. 과학철학이 말하는 과학 법칙, 분석철학이 말하는 로지컬한 형식, 구조주의가 말하는 구조가 더 리얼하다는 거야.

그렇게 이야기하는 게 완전한 플라토니즘이지. 물론 조심할 것은 합리주의에도 굉장히 폭이 넓고, 층차가 넓기 때문에, 합리주의적인 사고를 하지만 그렇게까지 이야기하지 않는 사람도 물론 많이 있어요. 요걸 중시하지만, 그러나 그건 일종의 도구다, 그게 뭐 진짜 리얼한 건 아니지만 우리가 이 세계를 과학적으로 파악하는 건 그렇게 봐야한다고 좀 약하게 주장하는 사람도 있고, 아주 강하게 주장하면 그건 플라토니즘이죠.

'그래서 프레게는 논리적 구조가 Gedanke로써', 게당케는 영어로 the thought, 그러니까 사유되는 것이란 뜻이죠, 감각으로 확인이 안 돼. 플라톤하고 똑같은 이야기지. 감각으로는 확인 안 되지만 사유로써 알아낼 수 있는 것이죠.

‘그리고 이 세상의 구체적인 이런 실재들은 이 게당케의 구체적인 경우들이다’. 명제논리학은 어디까지나 진위판별이 가능한 명제들만을 다루죠. 감탄문, 명령 같은 거는 명제 논리학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이러이러하다, 맞다, 틀리다 이야기할 수 있는 것만 명제죠.


▲ 일상언어학파의 등장

나중에 John Austin, Gilbert Ryle, John Searle 같은 사람들은, 프레게적인 명제논리학은 아주 학술적인 명제만 다룰 수 있지, 일상어(부탁하고, 명령하고, 감탄하고, 표현하고 등등)는 얘기할 수 없다고 해서 논리적 언어적 분석을 하되 프레게처럼 지나치게 좁은 방식을 지양하고, 일상언어를 이해하기 위한 복잡하고 섬세한 논리를 구사해요.

그래서 이 사람들을 이른바 일상언어학파라고 해요. 옥스퍼드에서 활동해서 경우에 따라서는 옥스퍼드 일상언어학파라고도 하죠. 프레게의 형식화는 그 후 복잡한 발전 과정을 거쳐 판단논리학의 주춧돌이 되죠. 그래서 ‘술어 계산‘, 나중에는 수학 계산하듯이 연산을 하죠.

그 다음에, 논리적 연결사들(logical connectives - 예컨대 ’과‘, ’and‘, ’또는‘, ’-가 아니다‘ 등 말하자면 개념과 개념을 이어주는 connective죠. 요런 거를 따로 개념화해요). 그 다음 양화사들, 예를 들어서 어떤 x가 있는데‘, ’모든 x는‘ , 이렇게 주어를 어떤‘, ’모든‘, ’하나의‘ 같이 양화(quantify)하죠.

예컨대, ’영수 아니면 철수다, 근데 철수는 아니다. 그러므로 영수이다‘ 와 같은 전형적인 논리적 형식(이런 걸 modules tolerence고 하는데)은 ‘p∨q, -q, p’ 이렇게 되겠죠? 이런 과정을 통해서 전통 논리학의 형식들이 전반적으로 재정립되었고, 집합론의 도입으로 벤다이어그램을 도입해서 더 정교화되었고, 러셀과 화이트헤드가 이런 맥락에서 큰 공헌을 하게 되죠.


▲ 버트랜드 러셀과 알프레드 화이트헤드의 논리학 분석

프레게는 독일 사람이었는데, 프레게의 중요성을 일찍부터 알아보고 그 사람을 영어권에 소개하고, 프레게를 비판하면서 자기 자신의 생각을 펼친 사람이 버트랜드 러셀이고, 러셀과 더불어 대작 ‘수학의 원리’를 쓴 사람이 알프레드 화이트헤드죠.

이 두 사람은 ‘수학의 원리’에서 프레게로부터 시작되는 로지칼 폼들을 쭉 정리하죠. 정리하면서 수학은 논리학에서 연역되는 것이라고 하죠. 이 때 20세기 초에, 수학의 본성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가 나와요. 이른바 메타 수학, 수학 기초론이지. 수학이 무엇인가?

특히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나오면서 수학의 본성을 둘러싼 논쟁이 활발하게 벌어집니다. 거기에 대한 몇 가지 이론이 있어요. 직관주의, 논리주의, 형식주의 등이 있는데, 이 사람들 입장은 수학은 그것보다 훨씬 간단한 존재인 논리학으로 환원가능하다, 그러니까 합리주의라는 사고의 근원이라는 거죠.

합리주의란 사고는 심플한 걸 좋아하는 사고에요. 그러니까 예컨대 베르그송은 심플한 건 다 인간이 만들어 낸 허구라고 하죠. 이 세상은 quality들(색, 모양, 움직임들)로 가득 찬 존재라고 보는 데 비해서, 모든 합리주의자들은 기본적으로 심플한 걸 좋아하죠.

그러니까 복잡한 수학도 아주 심플한 논리적 형식들로 환원된다는 겁니다. 그게 『수학의 원리』죠. 이 책을 다 읽은 사람은 저자 두 사람밖에 없어요.

‘러셀은 우리의 일상 언어를 논리적으로 형식화함으로써 기존 철학의 많은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보았다. 순수 논리학자인 수학자인 프레게의 사유는 러셀에 이르러 본격적인 철학적 함의를 갖게 된다.‘ 프레게는 어찌 보면 본격적인 철학자라기보다는 수학자, 논리학자죠.

프레게의 사고방식을 끌어내서 철학체계라고 할 만한 구성한 사람은 버트런드 러셀이죠. 러셀이 어떤 면에서는 분석철학의 원형을 만든 사람이라고 볼 수 있어요. 근데 이 사람은 생각이 계속 바뀌어요. 철학자 중에 점잖은 사람도 있고 화려한 사람도 있는데, 이 사람은 화려한 사람이에요.

결혼도 세 번인가 네 번하죠. 결혼할 때마다 철학적 생각이 바뀌어요. 그래서 아주 복잡한 사람이에요. 러셀의 가장 유명한 논문이 ’on denoting‘이에요 , 분석철학이 뭘 하는 건지, 분석철학으로 철학을 하는 게 도대체 뭘 하는 건지에 대한 원형을 제공해 주었죠.

분석철학이 이렇게 하는 거구나, 이렇게 로지칼한 걸 끌고와서 이런 철학적 문제를 해결하는 거구나, 하는 걸 제시했죠. 예를 들어서 현재 ‘프랑스 왕은 대머리이다’ 같은 문장이 있습니다. 일종의 명제죠. 이거 참 묘한 명제지. 왜? 현재 프랑스 왕은 없잖아? 이런 명제를 어떻게 생각해야 되죠?

이 사람은 ‘어떤 x가 있고 그 x는 현재 프랑스의 왕이며 x는 대머리이다.‘ 이렇게 분석했지요. 이렇게 분석할 적에 뭐가 장점이냐? 지시의 맥락과 서술의 맥락이 명확히 구분된다. reference, 그러니까 그 개념이 지시하는 것이죠.

지시하는 것은 존재의 문제에요. what의 문제죠. 그런데 그 개념이 어떠하다는 건 서술(predication)이죠. ’대머리이다‘. 그래서 이 문장을 이렇게 분석해 놓고 보면 x가 존재하느냐 안 하느냐라는 지시의 문제하고, x가 대머리다 라는 서술형이 구분되죠.

중세 철학, 중세 신학에 보면 중세 철학의 가장 중요한 주제 중 하나가 신 존재 증명이죠. 중세라는 시대는 신의 의해서 떠받들어 지는 시대이고, 신이란 존재를 증명하지 않으면 삶의 존립근거가 없어지는 거지. 그렇기 때문에 굉장히 중요한 명제였고, 모든 철학자들이 들러붙어서 신 존재 증명을 했는데, 안셀무스란 사람이 있죠?

안셀무스의 증명을 존재론적 증명(ontological proof)이라고 해요. 존재론적 증명이 뭐냐면, ‘신은 완전하다’에서 완전(perfect)하다라는 술어로부터 ‘신은 존재할 수 밖에 없다’를 끌어내는 거예요. 왜? 완전한 존재가 어떻게 존재하지 않을 수 있느냐하는 거죠.

어떤 것이 완전한데 존재하지 않다고? 완전한 건 아름답고, 강하고, 가장 능력있고 모든 걸 다 갖춘 거 아냐? 근데 그 존재가 존재한다는 걸 안 갖추고 있다면 말이 안 된다. 그러니까 이건(이런 논리는) ‘완전하다‘는 서술 술어로부터 ‘신‘이라는 주어의 존재를 끌어내는 거죠.

근데 러셀처럼 지시의 맥락과 서술의 맥락을 구분하면, 서술이 되어도 ‘대머리이다’하고 서술되죠? 프랑스에 현재 왕은 없죠. 그러니까 이 존재론적 명제가 러셀에게서 무너지죠. 대머리라는 술어로부터 프랑스 현재 왕이란 주어의 존재가 연역되지 않죠?

마찬가지로 x는 완전하다란 술어로부터 x는 존재하다라는 존재증명은 나오지 않는다. 물론 이것도 그 후에 논쟁이 여러 가지로 이어지는데, 어쨌든 이렇게 러셀은 논리적 분석으로 철학을 한다는 게 뭔지를 보여주는 거지. 논리적 분석을 통해서 철학적 문제를 해결하는 게 뭔지를 보여준 사람이죠.

또 다른 논리적 분석의 중요성의 예로, ‘내포적 의미와 외연적 의미의 분명한 구분을 들고 있다.’ 프레게는 논리적 형식화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의미(meaning)라는 건 두 가지가 있고 구분해야 한다고 했죠. 하나는 Sinn이고 하나는 Bedeutung이죠. Sinn은 보통 'sense'로 번역되고 'bedeutung'은 'reference'로 번역되죠. Sinn und Bedeutung, Sense and Reference 라고 하죠.

예컨대 샛별과 저녁별이 bedeutung는 같죠. 내나(모두) 다 금성이죠. 하지만 새벽에 일어나서 하루 일과를 짜는 사람이 바라보는 샛별과, 하루 일과를 마치고 피곤한 몸으로 돌아올 때 보는 저녁별은 Sinn은 다르다.

플라톤의 가장 뛰어난 제자, 알렉산드로의 스승, bedeutung은 둘 다 아리스토텔레스로 똑같죠. 플라톤의 가장뛰어난 제자라는 Sinn의 아리스토텔레스하고 알렉의 스승으로서의 아리스토텔레스는 분명히 같지 않죠.

이렇게 Sinn과 bedeutung 을 구분하죠. 그리고 명제의 진위를 구분하는 것은 곧 각 변환들의 진위구조를 통해서 계산된다. 변수들 각각의 진과 위를 구분함으로써, 함수 전체의 진위를 계산할 수 있죠. 그걸 우리가 보통 진리표라고 하고 이런 연산은 나중에 비트겐슈타인에 의해서 보완됩니다.

예를 들어서 이런 명제가 있다면 (p∧q ∨ p∧-q) p와 q가 있는데,(아마 수학 시간에 배웠을 것 같은데, 안 배웠나?) p가 진리고 q도 진리라고 하면, t, t, t, f (q가 아닌 거니까 false가 되겠지). 그 다음에 t and t 는 t 고 , t and f 는 f 에요. 그런데 or 이건(∨) or지. t가 되지. 이런 식으로 명제를 계산하죠. 진위를. 이런 ‘진리표’를 작성하게 됩니다.

 

◆ 비트겐슈타인과 분석철학


▲ 비트겐슈타인(Ludwig Josef Johann Wittgenstein)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체계가 특이해서 많이 회자되는데, 지금은 우리가 예컨대 푸코같은 사람의 인생을 많이 이야기하잖아요. 내가 학생 때는 비트겐슈타인의 이야기를 많이 했죠. 비트겐슈타인은 오스트리아의 빈에 있는 유태계 명문 가정에서 태어나죠.

비엔나의 굴지의 가문에서 태어난 사람인데, 베를린에서 공학을 하고, 프로펠러를 설계했다고 하고, 그 과정에서 점차 관심이 수학에로, 철학에로 기울었다. 프레게의 권유로 러셀 밑에서 공부하죠. 그리고 철학자 무어, 경제학자 케인즈 등과 사귀었고, 1차 세계대전에 참가했으며, 전쟁 중에 배낭에 넣고 다니던 수첩에 생각들을 기록했으며, 그것을 토대로 1918년에 논리철학 논고를 출간하죠.

책을 출간한 후에 철학을 버렸다. ‘내가 이제 철학을 완성해서 할 게 없다’고 해서 떠나지. 그리고 오스트리아 시골 초등학교에서 교사직에 봉사하죠. 자기에게 상속된 막대한 재산을 가난한 사람에게 전부 나눠줬어요. 그리고 자기가 사는 집에는 가구라고는 책상 하나 있었다고 그래요.

이 양반은 오로지 자기 삶과 철학에만 몰두한 사람인데, 애들을 좋아해서, 어린애들에게 동화책 읽어주는 것을 가장 행복으로 삼았는데, 여기에서 쫓겨나요. 왜냐하면 이 사람의 수업방식이 너무 독특해서 학부모들이 동성애자로 몰죠.

그래서 학교에서 쫓겨났다고 그런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 다음 수도사의 정원사(gardener)가 되기도 하고, 자기 누이의 집을 건축해서 설계하기도 하고, 그러다가 1929년에 케임브리지로 돌아와서 바로 자기가 세웠던 그 철학을 스스로 공격하죠. 그래서 후기 철학으로 넘어가서 철학적 탐구에 매진합니다.


▲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이 사람의 유명한 말이 있는데 “우리의 삶은 꿈과도 같다. 좀 나을 때 우리는 단지 우리가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 정도로 깨어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간에 우리는 깊이 잠들어 있다.” 이런 말을 남겼죠. 비트겐슈타인은 분석철학의 유명한 사람인데 왜냐하면, 분석철학이라는 게 아주 명료하고 과학적인 맛은 있지만, 삶에 대한 깊은 얘기라든가 윤리적, 정치적인 절박함이 별로 없죠.

뭐라고 할까, 아주 메마른 철학인데 이 사람에 이르러서 분석철학이 하나의 철학적인, 형이상학적인 향기를 띄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상당히 중요한 사람이죠. 어찌 보면 자기 삶에 대해서 (굉장히 냉혹했어요). 사람을 보면 스스로에게 너무너무 너그러운 뺀질이가 있는가 하면, 스스로에게 아주 냉정하고 냉혹한 사람이 있죠.

인류역사에서 이 사람처럼 자기에게 냉혹한 사람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만큼 스스로에게 냉혹한 사람이죠. 그리고 고독한 철학적 삶이었고, 가장 순수하고 엄격한 사상가, 뎅크(Denker)의 모습을 보여준다.

비트겐슈타인는 자기가 논고에서 이야기하려고 했던 핵심을 어떻게 요약하느냐, 말로 할 수 있는 건 명확하게 말해야 하고,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켜야한다고 하죠. 이건 어찌보면 굉장히 칸트적이에요.

칸트식으로 풀어내면, 현상계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이야기해야 되고 물자체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어야 한다는 거죠. 그래서 이 사람은 과학과 형이상학을 대비시킨다. 과학은 말로 할 수 있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가 명확하게 해야 되고, 형이상학은 말로 할 수 없는 거기 때문에 그냥 침묵을 지켜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 언어는 우리의 사고를 표현하는 그림이다

이 책에 전개된 비트의 언어철학은 흔히 ‘그림 이론(picture theory)’이라고 해요. 이게 뭐냐면 언어는 실재의 그림이다. 예컨대, ‘컵이 탁자위에 있다‘는 언어는 이 사태(컵이 탁자 위에 놓여있는)의 그림이라는 거지. 묘하죠.

왜냐하면 예컨대 내가 이걸 (종이에) 그렸으면 이거보고 그림이라고 그러지요. 그림과 이걸(사태를) 구분해서. 근데 이 사람은 언어가 그림이라는 거예요. ’컵’은 실제 컵을 그리고 있고, ‘탁자‘는 실제 탁자를 그리고 있고 ’은‘은 요 놈과 요 놈의 관계를 그리고 있고. ’있다’는 이 사태를 가리키는 거고, 이런 게 그림이란 겁니다. 이런 식의 생각을 전통철학에서 표상(representation)이라고 하지.

어찌 보면 비트겐슈타인의 이론은 아주 정교한 논리학적 언어로 표현되어 있고 당대 과학을 염두에 둬서 그렇지, 철학 이론 자체는 낡은 거예요. 근데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사를 잘 모르는 사람이에요. 영미 계통 철학자들의 특징이 그렇죠.

유럽 철학자들은 항상 철학사를 가지고, 텍스트를 가지고 하는데, 이 사람들은 철학사는 일단 무시해요. 철학사를 딱 잘라버리고 논리학 가지고 하죠. 그래서 가끔가다 읽어보면 놀라죠. 이 얘기는 중세 철학자들이 다 한 이야긴데, 엄청나게 중요한 이야기처럼 하고 있는 경우가 많아요. 이 사람도 만약 철학사에 밝은 사람이었다면 (내가 보기엔) 이 책을 안 썼을 지도 몰라.

철학사를 잘 몰랐기 때문에 이런 책을 썼어요. 이 시대가 되면 표상이론은 니체 등에 의해서 이미 산산조각이 난 낡은 이론인데. 설사 그것(이론)이 아무리 세련되고 독창적이라 해도 철학의 핵심 그 자체는 낡은 거예요.

어쨌든 이 사람은 이렇게 그림 이론을 전개하는데 언어는 세계를 그리는 명제들로 이루어지고, 명제는 사고의 지각 가능한 표현이며 명제들은 사고의 지각 가능한 표현이며, 사고는 사실의 논리적 그림이다. 우리의 사고는 실재의 그림이고 언어는 이 사고를 눈에 보이게 표현하는 거라는 이야기죠.

사실 이건 고전 시대 철학자들이 다 한 이야기지, 따지고 보면 너무 상식적이에요. 실재와 언어의 관계가 간단한 것은 아니죠. ‘철수가 내 옆에 있다’고 말할 때 실제 이 명제에서 ‘철수’라는 글자와 ‘내’는 옆에 있죠. 요 글자 옆에 있죠? 그러나 이런 간단한 경우는 드물죠.

따라서 여기에서 그림이라는 건 즉물적 의미에서의 그림이 아니라 로지컬 폼(logical form)을 얘기하는 거라고 봐야 되죠. 이 세계의 로지칼 폼을 그린 게 언어라는 이야기가 되죠. 예컨대 악보와 가수의 노래와, 노래를 녹음한 씨디 등은 논리적 형식을 공유하죠. 예를 들어서 여기 악보가 있습니다. 베토벤의 크로체 쏘나타 악보가 쭉 있어요. 그래서 지금 연주를 해요.

이게 피아노하고 첼로하고 바이올린이던가? (암튼)지금 연주를 하고 있어요. 이걸 씨디에다 녹음을 했어. 그러면 종이에 그려진 콩나물 대가리가 지금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비올라가 들어가든가? 세 갠가 네 갠가 악기)에서 소리가 나오죠? 요거하고 그 다음 디지털로 되어 있는 기계하고 완전히 다른 거 아냐? 그렇죠? 존재론적으로 전혀 다른 거죠.

그렇다면 악보하고, 소리하고, 디지털 코드는 어떤 관계에 있냐는 거지. 비트겐슈타인이 언어는 실재의 그림이라고 한 게 이런 뜻이에요. 언어와 실재는 다르지. 전혀 다른 차원이지. 하지만 이 악보와 소리와 디지털 코드가 서로를 번역하고 있죠. 번역하고 있듯이, 우리의 언어는 이 세계를 번역하는 거다. 이 사람은 그린 식으로 ‘그림’이라는 거예요.


▲ 언어가 사고를 그리는 그림이라면 지시관계가 먼저 성립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런 관계가 성립하려면 무엇보다도 지시 관계가 성립해야 되죠. 악보가 있으면, 악보에 해당하는 소리를 내야 되죠. 지시에요. 요 소리가 악보 음표를 지시하고 있죠. 도 하면 ‘도’하고 소리를 내야 될 거 아냐. 다르게 되면 음악이 엉망이 되고 딴 음악이 되겠죠. 그래서 이런 유형을 표상 이론이라고 하죠.

유럽 철학자들은 미메시스, 표상이란 말을 하죠. 뭐든지 미메시스 관계란 거야. 영미학자들은 같은 생각을 지시(reference)라는 말로 표현하죠. 그런데 우리가 사용하는 말이 그렇게 지시 관계가 간단한 게 아니죠. 벌써 보편명사, ‘인간’같은 건 뭘 가리키느냐 (하면 알 수 있죠)? 지시이론이 가장 쉽게 설정한 데가 고유명사에요.

철수하면 아! 철수!하고 가장 쉽게 이야기할 수 있죠. 고유 명사(proper name)이니까요. 근데 보편 명사 되면 벌써 골치 아파요. 대체로 보편 명사란 말은 안 쓰지. 바로 그 일반명사를 둘러싼 논쟁이 보편자 논쟁이지. 일반명사가 가리키는 대상이 정말로 실재하느냐, 철수란 말이 가리키는 사람은 실제로 있죠? 근데 ‘인간’이 가리키는 말은 실재하느냐, 이런 문제에요.

인간은 그나마 간단하죠. 인간은 (사람들의) 집합을 가리킨다. 좀 이해가 가죠. 근데 예컨대 민주주의란 말, 민주주의가 뭘 가리켜요? 선거장 또는 어떤 학교가 있죠? 그건 쉽지. 민주 투사 예를 들어서 민주 투사. 그것도 비교적 쉽죠.

그럼 민주주의가 뭘 가리키는 거예요? 정확하게? 골치 아프죠? 이럴 때 우리가 분석을 해야죠. 쪼개야 된다. 그래서 명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끝없이 쪼개야 됩니다. 근데 이것은 실제 물질을 쪼개는 게 아니라 명제를 쪼개는 거기 때문에 ‘논리적 원자론(logical atomism)’이라고 해요.

어찌보면 전형적인 고전적인 사고지. 재현에다, 표상주의에다, 분석주의 등을 말하니까요. 그런데 비트겐슈타인은 세계에 대한 그림을 제공하지 못하는 명제들은 사이비 명제들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토대로 전통 형이상학을 맹공했죠. 그러나 칸트가 그랬듯이, 비트겐슈타인 역시 형이상학이 지향하는 세계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에요.

다만 칸트가 그것을 알 수 없다고 했듯이, 비트는 말할 수 없다고 한 거지. 그래서 이 사람은 ‘가능한 모든 과학적 질문들이 대답된 후에도 삶의 문제는 전혀 언급되지 않은 채 남아있다’는 말을 했다. 예를 들어서 내가 물리학 생물학 경제학, 화학을 다 공부해서 이 세계를 엄청나게 알고 있다고 쳐요.

그렇다고 해도 내가 내일 아침 누구를 만났을 때,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같은 간단한 문제조차 (그런 지식이) 전혀 해결해 주지 않죠. 그래서 논고의 마지막 명제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라고 이야기하죠.


▲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철학 - 언어 사용론

그런데 재밌는 건 이런 말을 해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게 있는데, 그것은 스스로를 드러낸다. 그것은 신비한 것이다.‘ 이런 말을 하죠. 이런 경우가 있죠. 그러니까 말로 토크(talk)할 수 없는 걸 내가 보여주(show)는 경우가 있죠.

말로 설명할 수 없는데 대신에 몸으로 보여주는 경우가 있죠. 그런 것처럼 이 세계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인데, 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은 스스로를 나타낸다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신비한 것이다. 바하만(Ingeborg Bachmann)이라는 여류시인이 있는데, 이 사람은 비트겐슈타인의 동향사람이에요. 자기와 동향인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을 많이 표현했는데,

‘산에서 우리는
호수들을 보고, 호수들에는
산들이 비치고. 구름 의자를 탄 채
한 세계의 鐘들이 산들거리고 있다. 그 누구의
세계인지를 아는 것은 금지되어 있구나.’

하는 유명한 구절이 있죠. 이렇게 이 사람은 정치철학에서는 말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그것의 논리적 구조를 상세하게 파헤쳐 보여주고,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라고 했는데, 그리고 나서 케임브리지로 돌아오죠. 돌아오는 계기가 뭐냐면, 아까 얘기한 거예요.

말할 수 있는 것, 논리적(logical)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을 자기가 다 정리했지만, 그렇게 정리 해 봤자, 내가 매일매일 살아가면서 쓰는 언어는 전혀 해결 불가능한 것으로 남아있다는 거죠. 만약 논리적(logical)인 명제만이 옳은 명제고, 우리가 쓰는 일상어는 아주 애매모호하고 불투명하고 아무 로직도 없다고 한다면, 전기 철학에서 끝나야 겠지.

근데 이 사람은 과학적인 방식, 논리적인 방식으로 이야기하는 것 못지않게, (우리 일상어는 표면적으로는 아주 불투명하고 애매모호하고 논리도 없는 것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다. 논리가 없는 게 아니라 훨씬 더 복잡하고 상당한 논리를 갖추고 있다는 거지. 그 뒤에 이 사람은 새로운 의미론을 시도합니다. 그 새로운 의미론을 흔히 사용론(theory of use)라고 하죠.

예컨대, 남편이나 자식들이 집에 들어가서 아내나 엄마한테 아, 배고파 얘기한단 말야. 그건 표면상으로는 서술어지. 명제지 명제. 나는 지금 배가 고프다는 명제지. 내가 지금 배고프다는 거를 서술하는 거죠. 근데 사실은 그 말이 그 뜻이 아니지. 그 말이 서술인 것처럼 보이지만, 밥 달라고 ‘부탁’하는 거거든. 배고프니까 밥 좀 주세요 하고.

그러니까 언어는 그냥 이렇게 로지칼하지 않다는 게 아니라, 사실 그 로직이 아주 복잡하다는 거지. 사실 이 세상에 로지칼하지 않은 것은 없죠. 다 로지칼한 거지. 그 로지칼한 게 엄청 복잡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걸 로지컬하지 않다고 보는 거지. 선문답이 그렇지. 그건 로직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없는 게 아니라 로직이 세 겹, 네 겹 쌓인 거지. 우리 일상어도 마찬가지라는 거야.

일상어라는 게 엄청 섬세하고 복잡한 논리를 갖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언어는 그림을 그리기 때문에 의미 있는 언어고, 저런 언어는 그림을 그리지 않기 때문에 틀린 언어라고 이야기하기 보다는, 모든 언어가 각각의 맥락에서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잘 살펴야 한다. 그게 이 사람의 언어 사용론이죠.

그래서 의미는 그림을 통해서가 아니라 사용을 통해서 이해되고, ‘자연과학적 언어만이 세계를 그릴 수 있다’는 식의 생각도 철회해야 되죠. 또 전기에는 철학의 고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심리적인 차원들, 인간의 심리 차원은 지향성, 기대, 느낌, 심리 차원은 철학의 문제가 아니다.

철학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 논리적인 것만 해결할 수 있다‘ 라는 식의 생각을 철회하고, 인간의 심리적인 차원들을 치고 들어가죠. 이른바 심리철학(mind-body problem, philosophy of mind)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예컨대 공사장에서 지붕위의 사람이 ‘벽돌!’하고 외치면, 밑에 사람은 벽돌을 던져주죠. 우리는 문법 시간에 어떻게 배우죠? 명사 하나만으로는 문장이 안 된다고 배우잖아. 근데 현실은 안 그래. 현실에서는 말이 안 되는 게 아니라, 말이 되죠.

‘벽돌 줘‘ 안 해도, ’벽돌!‘하면 던져준단 말야. 그 말의 의미라는 건 상황 속에서 결정되지요. 비트겐슈타인의 이런 언어사용을 ‘언어 놀이/게임(Sprachspiel/language game)’이라 불렀다. 이제 의미는 지시대상과의 관계 보다는 사용의 맥락에 중점을 두고서 분석한다.

자연과학도 하나의 언어 놀이 일 뿐이다. 이런 식의 언어 이해를 언어학에서는 화용론(pragmatics)이라 그러죠. 비트겐슈타인은 이제 자연과학적 언어가 아니라 일상 언어를 공격하는데, ‘일상 언어를 교정해서 이상(理想) 언어를 만들려 했던 꿈(카르납 등)이 일상 언어에 대한 섬세한 분석으로 대치된다.’

카르납이나 전기 비트겐슈타인은, 일상언어는 애매모호하기 때문에 그걸 다기호적, 수학적으로 치환해서 명료한 언어를 구성하려고 하죠. 이에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거꾸로 일상 언어 자체의 숨겨진 논리를 파고드는 거죠.


▲ 일상언어의 논리를 분석하면서 찾게 된 ‘비본질주의 철학’

그런데 이 사람이 이렇게 일상언어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아주 중요한 발견을 하게 되요. 그건 뭐냐, 비본질주의 철학이죠. 우리들은 당연히 어떤 말이 가리키는 그 무엇이 있다고 생각하죠? 예컨대 유니콘 같은 아주 상상의 이야기같은 건 별개지만, 그렇지 않고서야 어떤 말의 의미(핵심, 본질) 당연히 있다고 생각하지.

그런데 이 사람은 일상언어를 분석하다 보면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어떤 말의 의미나 본질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거지. 이게 상당히 본질주의 비판의 중요한 교두보가 됩니다. 예컨대 게임이라는 말의 핵심, 본질이 뭐냐, 체스 게임도 게임이고, 교실에서 어린이들 노는 것도 게임이고, 교육용 게임도 있고, 스포츠도 게임인데, 도대체 이 모든 것들의 공통적인, 관료하는, 묶어주는 에센스가 뭐냐는 거예요. 비

트겐슈타인이 볼 적에 이들 사이에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본질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 다만 가족 유사성(family resemblence)만 존재한다. 삼촌, 이모, 조카 등등이 다 다르게 생겼죠. 어떤 삼촌하고 조카는 이런 점이 비슷하고, 할머니하고 손녀는 이런 게 비슷하다고 이야기할 수는 있어도, 그걸 완벽하게 꿰어내는 에센스는 발견하기 쉽지 않거든요. 그런 면에서 가족 유사성만을 가지고 있다고 하죠.

그래서 말하자면, 비트겐슈타인은 니체와 베르그송을 몰랐지만 그러나 니체, 베르그송이 수용했던 본질주의비판을 언어철학적 차원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해 주었다. 비트의 이런 생각은 현대 예술철학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우리가 보통 예술이란 말을 하니까 예술이 있는 것처럼 생각되지.

예술이란 말이 있으니까 예술이란 말이 가리키는 그것, 본질, 에센스가 있다고 생각한단 말이야. 만약에 그런 게 없다면 예술을 한다는 게 이해가 안 가는 거잖아. 그쵸? 그래서 어떤 사람이 예술 정의 불가능론을 제기했어요. ‘예술은 정의가 불가능하다. 예술은 이런 거‘라고 말할 에센스가 없다는 거예요.

이것은 뒤샹 이후에 더 절실한 문제가 되지. 뭐가 예술이냐. 이것을 우리가 예술 작품이라고 부르는 근거가 뭐냐고 물어볼 수 있죠. 어떤 전시장에 가니까 벽에 아무것도 없어. 그래서 왜 (작품이) 없어요? 그랬더니 바닥을 보세요. 해서 보니까 뭐가 있더라고. 이게 작품이래. 마루가 작품이야.

저번에 또 어느 갤러리에 가 보니까 액자만 쫙 걸려 있어. 내용이 없어. 액자만 큰 것, 작은 것, 큰 것, 작은 것 쫙 걸려있어요. (그게 이제 데리다가 말하는 파래르곤이죠. 나중에 이야기하겠지만) 예술이란 게 뭐냐 도대체? 나중에는 심지어 예술 제도론이라 그래.

예술의 본질은 없다. 그럼 예술이 뭐냐? 사람들의 합의에 의해서 이걸 예술이라고 하자고 한 것이 예술이다. 예술의 리얼리틱, 실재론적인 차원을 완전히 파기하고 노미날한 규정만 있다고 보는 거죠.
그리고 이런 식의 언어게임을 가능하게 해 주는 것은 그 맥락(context)이고. 그 이상은 삶의 형태라고 한다.

아까 말한 것처럼, 벽돌!이라고 하면 아무 말 안 해도 벽돌 던져준단 말이에요. 왜냐하면 그게 그 사람들의 삶의 형태(forms of life)니까. 우리가 4강에서 후설의 생활세계 배웠죠? 후설의 레벤스벨트(Lebenswelt)보다 비트겐슈타인의 레벤스포름(Lebensform)이 더 다원적이죠.

후설의 레벤스벨트는 우리가 사는 세계라는 일반적인 의미라고 한다면, 비트의 레벤스포름는 다양한 콘텍스트가 있는 거니까 더 다원적이지.


▲ 20세기 이후, 실용주의의 성립

‘제2차 세계대전은 유럽의 많은 사상가들로 하여금 미국으로 망명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해서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언어철학과 비엔나 학파의 과학철학은 미국으로 이식된다. 미국은 19세기에는 유럽 철학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했으나 20세기 초에 퍼스, 제임스, 듀이 등을 통해서 ‘실용주의(pragmatism)’라는 자신들만의 고유한 사상을 정립하기에 이른다.‘

어떤 문화, 지역에는 매우 다양한 철학들이 존재하기 마련이지만, 그 지역을 그래도 가장 전형적으로 나타내는 철학들이 있어요. 영국하면 역시 경험주의지. 상식을 중시하고, 경험을 중시하는, 일상을 중시하는 철학 혹은 기본 전통이고, 독일 하면 관념론이죠.

상당히 강한 거고, 프랑스 같은 경우는 실증주의, 합리주의 그래서 두 개의 축이 있지. 두 개가 서로 계속 번갈아 가면서 교차하는 식으로, 다 가장 전형적인 철학이 있기 마련인데, 미국이란 문화, 지역을 가장 단적으로 대변하는 철학이 실용주의(pragmatics) 철학이죠.

그런데 20세기에 유럽으로부터 히틀러를 피해서 많은 철학자들이 분석적, 과학적 철학을 미국으로 가져오죠. 그러면서 분석적, 논리적 철학과 실용주의가 결합해요. 그런 가장 전형적인 인물이 콰인(Willard Quine)이지. 분석철학적인 실용주의자입니다.

특히 퍼스의 작업은 미국의 ‘토착적인 분석철학’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분석철학의 역사를 그로부터 시작해 재구성하려는 움직임도 있습니다. 이후 분석철학은 논리-언어철학에서 크립키, 데이빗슨 등을, 심리철학에서 김재권 등을, 과학철학에서 쿤 등을 낳으면서 발전했으며, 최근에는 그 한계를 넘어서려는 많은 시도들 - 로티의 신실용주의 - 이 도래하기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