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운 부흥의 도구, 피니
교회사-3 (믿음의 선배들)
나는 1792년 8월 29일 코네티컷 주 리치필드 군의 와렌이란 곳에서 태어났습니다. 영국 소설가의 소설을 애독하셨던 아버지는 소설 속의 인물의 이름을 따서 내 이름을 찰스 그랜더슨이라고 지으셨습니다. 우리 집은 가난했고, 믿음은 별로 독실한 편이 못되었습니다.
나는 성장하면서 우리 집에서 기도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성경도 내 나이 29세 때 법률에 나오는 모세오경에 대한 궁금증 때문에 사서 읽게 된 것이 처음이었습니다.
나는 문학 분야에 뛰어났고, 고전어를 연구했습니다. 그럼에도 나는 나를 지도해 주던 선생님의 권고로 대학에 갈 수 있는 기회들을 포기했습니다. 훗날 학교를 같이 설립하자는 그 선생님의 제안도 어머님의 병환으로 인해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저의 길들이 막혀진 것 같았지만, 부모님의 권유로 들어선 그 법률가의 길에서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처음 대하게 된 것입니다.
성경을 읽을수록 나는 내가 죄인임을 점점 더 느끼게 되었습니다. 겉으로는 냉담한 척했지만 내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어느덧 간절히 하나님을 찾기 시작했고, 그러던 어느 날 구원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값없이 주신 "선물"임을 깨닫고서, 이제 죄를 끊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한 결정을 내린 후로는, 별로 선하지 못한 의뢰인들의 법적 탈출구나 만들어 주는 일에는 더 이상 관심이 없어졌습니다. 변호사 일을 계속하는 것이 내키지 않았던 것입니다. 돈을 많이 벌 생각도 없었고, 그것이 어떤 것이든 세상적인 즐거움과 재미에는 흥미를 잃어갔습니다. 반면 이 세상의 어떤 수고도, 죽어가고 있는 이 세상에 그리스도의 구원이 있음을 알리는 그 일보다 더 가치있는 것은 없어 보였습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영혼의 가치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나는 또 한 번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소송 의뢰를 맡은 변호인으로서, 그분의 탄원을 사람들에게 호소하는데 나의 일생을 드리기로 말입니다.
나는 내가 맡은 그리스도의 소송에서 이기고자 하였고, 설교의 내용에 그 길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내 눈에는 그리스도의 소송에는 능력있는 대변인이 참으로 드문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제까지 내가 보아온 목사들이 그리스도의 의를 호소하는 것처럼 어떤 변호사가 자기 소송 의뢰인의 무죄를 변호한다면, 단 한 건도 승소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 묵상할 때면, 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내고자 노력했습니다. 성령님을 의지하고 그들에게 필요한 것으로 생각되는 한 제목을 택하곤 했습니다. 그런 후에 그 설교를 준비하면서 많이 기도했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에게 나아가 설교로써 넘치도록 쏟아놓곤 했습니다. 그러한 나의 설교는, 설교 내용이나 감상하며 설교자에게 칭찬이나 던져 주던 나태한 회중들에게 강력한 찔림이 되었습니다. 나는 설교를 통해 죄인들을 하나님 앞으로 이끌어 오고자 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께로 나아오거나, 격렬한 반대를 보였습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에 죄인들의 완악한 마음들이 부서져서 그리스도 앞에 무릎 꿇었습니다. 술집이 기도회 장소로, 호텔이 부흥의 장소로 돌변하고, 도시 전체가 회개의 물결에 휩싸이며, 지속적인 기도의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반면에 끝까지 반대하던 자들 중에는 졸도로 죽거나, 침대 위에서 죽은 채로 발견된 목사도 있었습니다.
강력한 복음 전파와 풍성한 기도에 힘입어 부흥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앤월프로 갔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술집을 경영하던 사람의 손에 교회 열쇠가 넘어가 있었습니다. 상황이 험악했지만, 나는 매일 이른 아침 숲속에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기도하지 않고는 그 상황을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게다가 기도로 주님의 은혜를 구하지 않고는 힘차고 능력있는 설교를 할 수도 없었고, 나의 언변이나 지혜로는 단 한 사람의 영혼도 구할 수 없음을 절실히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나의 설교를 통해 드디어 그 마을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쏟아져 내리는 우박과 같은 강렬한 사랑을 쏟아부으시는 것만 같았습니다. 모임 장소를 되찾았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왔습니다. 에반즈 밀즈, 앤월프, 가버너, 유티카, 로마... 가는 곳마다 수백 명씩 수천 명씩 주님께 돌아오는 부흥이 있었으며, 그 부흥 뒤에는 끊임없는 기도와 그를 통한 성령의 특별한 도우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계속해서 부흥이 일어나자 무시 무시한 반대도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곳에서는 나와 내쉬 감독(나의 기도의 동역자)의 화상을 만들어 불태우기도 했습니다. 예배 모임중에 소란을 피우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많은 음모와 거짓말과 거짓 보고가 난무했습니다. "그는 인간을 모두 악당이라고 부른다", "능력에 찬 부흥회라고 떠들지만 결과는 별로 없거나 전무하다", "젊은 개종자들을 분별없이 이용한다", "어중이 떠중이에게 연설을 하게 하며 난잡한 모임 속에서 기도들을 한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비난에 대답할 필요조차 느끼지 않았습니다. 또 그럴 의사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반대 세력을 진압해 주시겠다고 하신 약속의 말씀이 있었기에, 오직 신뢰로써 나를 그분께 맡기고 그분의 약속을 붙잡고 한 곳만을 바라보며 전진해 나갈 뿐이었습니다. 나는 부흥을 위해서 그러했던 것처럼 반대에 대해서도 오직 그분께 기도할 뿐이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반대자들의 공격을 뒤엎으셨고, 주요 도시들에 있는 교회 문들이 내 앞에 열리도록 나의 이름을 하나님의 일터로 널리 퍼지게 하셨습니다.
복음 사역을 시작한 지 15년째 되던 해의 일이었습니다. 그때 나에게 교수직의 제의가 들어왔는데, 나는 젊은 학생들을 그리스도께로 이끌 목적으로 그 제의를 수락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학교의 설립자가 파산해버려 학교는 부채를 떠안게 되었고, 나 역시 그해 겨울 동안 나의 가족을 부양할 길이 없었습니다. 최후의 방법으로 나는 여행용 가방을 팔아서 그것으로 한 마리 암소를 사야만 했습니다.
가방을 팔던 그 날, 나는 하나님께 기도로 이 사실을 아뢰고 모든 것을 그분께 맡겼습니다. 예배가 끝나고 집에 도착했을 때, 하나님의 응답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집으로 날아온 한 통의 편지에 200불의 돈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 돈을 보내준 형제는 그 뒤로도 몇해 동안 매년 600불씩 나의 필요를 채워 주었습니다. 학교의 부채도 만 이천 권이나 팔렸던 나의 저서 <피니의 부흥 강의>에 감명받은 영국인들에 의해 해결되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교수직을 수락한 뒤에도 나의 사역을 강의실에만 한정시키길 원치 않았습니다. 대학에서는 매해 겨울에 부흥회를 자질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고, 나는 계속적으로 복음을 전함으로 하나님과의 맹세를 충실히 지켜왔으며, 부흥의 물결은 계속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의 부흥사로서, 목사로서, 저술가로서, 교수로서 나를 쓰셔서 많은 영혼들을 그분께로 이끌게 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나를 도구로 사용하심으로 수많은 죄인들을 주님께로 인도하시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나는 나 자신이나 지도 교수나 다른 목사들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오로지 성경을 나의 교본으로, 성령님을 나의 교사로, 기도를 나의 힘으로 삼았고, 따라서 그분의 사역의 놀라운 도구로 사용되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한 세기의 3/4에 달하는 나의 생애가 다하기까지 그분의 일은 계속되었으며, 주님의 일하심으로 50만 명의 영혼들이 그리스도께로 나아왔습니다.
내가 고백할 수 있는 것은 나를 이끌어 준 것은 나의 지혜가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나의 무지와 무력함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계속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분의 인도하심만을 간절히 구했고, 그분께서는 성령으로 나를 친히 이끌어 주셨습니다. 따라서 나는 이 모든 사역의 열매들을 그분의 것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게 다시 인생의 기회들이 주어진다해도, 나는 40여 년이 넘도록 이 부흥에 하나님의 도구로 쓰인 이 일에 다시 쓰이고자 간절히 소망할 것입니다.
크게 쓰인 작은 그릇, 무디
"이 세상의 죄인들을 하나님께로 이끄는 일은 평범한 재능을 지닌 남녀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나는 확신한다. 왜냐하면 많은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아주 적기 때문이다. 한 달란트를 가진 사람도 있고, 세 달란트를 가진 사람도 있다. 나에게는 반 달란트밖에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각자가 받은 은사대로 일한다면 주님은 우리를 축복하실 것이며, 그의 은사는 2배, 3배로 증가될 것이다."
저는 여러분에게 제 남편 드와이트 라이맨 무디(Dwight Lyman Mooddy)에 대해서 말하기 전에, 그가 남긴 이러한 말로 시작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 말이 그의 생애를 설명해 주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1873년에서 1875년까지 영국에서, 1875년에서 1879년까지 미국에서 여러 도시들을 중심으로 부흥의 커다란 물결을 일으키고, 그후에도 영국을 재방문하고 미국의 중소도시들을 휩쓴 복음사역에 사용된 제 남편 무디의 이름과 명성에 대해서는 여러분께서도 익히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제 남편 무디로 말미암은 부흥보다는 그가 어떤 사람이었고, 어떤 자세로 하나님의 사역에 임하여 주님의 사랑과 은혜 가운데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사용됐는지 말하려고 합니다. 열매보다 바로 그 나무에 대해 말하려는 것입니다.
제 남편 무디는 1837년 메사추세츠 주 노스필드에서 청교도의 신앙을 이어받은 어머니와 석공이었던 아버지 사이에서 일곱 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친은 그가 네 살 때 파산한 채 갑작스럽게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는 어머니의 헌신적이고 따뜻한 사랑 가운데 자랐지만, 아버지를 일찍 여읜 상태에서 어려운 생활을 해야만 했다고 합니다.
다섯 살 때 세례도 받았고 어릴 때부터 종교적인 분위기에서 자랐지만, 1855년 보스톤에 있는 삼촌의 구두 가게에서 일하던 때까지 그는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그당시 요한복음을 창세기에서 찾을 만큼 성경에 무지했던 그에게 그의 주일학교 선생님이었던 에드워드 킴볼(Edward Kimball)이 관심을 가져 주었고, 어느날 구두 가게로 찾아와서 그를 그리스도께 인도했던 것입니다. "보스톤의 가게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던 날, 모든 만물이 내게는 새롭게 보였고, 내 마음은 사랑으로 가득차 있었소. 그날 이후 나는 결코 그분을 잊어 본 적이 없다오."
사업가로서의 꿈을 가지고 있었던 제 남편은 그후 서부를 향해 시카고로 옮겨 오게 되었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하나님을 위한 일들을 조금씩 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맨처음 했던 일들은 교회예배와 주일학교, 집회에 사람들을 모아오는 일이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호텔, 하숙집 때로는 술집이나 도시 북쪽에 위치했던 빈궁한 수백 가구들을 돌아다니기도 했습니다. 그가 그러한 작은 일들을 열심히 찾아서 했던 것은 자신이 스스로 그들을 가르칠 수는 없어도, 사람들을 불러 모을 수는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수년 동안 나는 내 자신이 하나님을 위하여 일할 수 있다는 사실을 결코 믿을 수 없었소. 또 어느 누구도 나에게 어떤 일을 해보라고 제안하지도 않았소. 하지만 나는 그분을 위해 무언가 하고 싶었소." 그래서 그는 자신이 가졌던 한 가지 재능을 하나님을 위하여 사용했던 것입니다.
사람들을 열심히 모으는 일이 하나님께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라 생각했던 제 남편은 1858년 빈 술집에서 주일학교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제 남편은 계속해서 제화업에도 성공을 거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날, 아직도 사업가로서 성공하고자 했던 제 남편의 인생을 바꾼 사건이 있었습니다.
"시카고에 처음 갔을 때 교회에서 네 개의 의자를 빌려 사람들을 데려와 앉게 했을 때도, 나는 그들의 영혼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말해 주지 않았소. 그것은 장로님들이 할 일이라고 생각했소. 그후 주일학교에 관계된 일을 하면서도 나는 숫자를 채우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학생들이 천오백 명쯤 되었을 때는 의기양양하기도 했소. 그러나 난 그들 중 단 한 명도 그리스도께로 직접 인도하지는 못하고 있었소.
내가 운영하던 주일학교에 가장 질이 나쁜 여학생들로 이루어진 한 학급이 있었는데, 그 반의 담임교사가 병이 나서 내가 그들을 맡게 되었소. 그들은 나의 면전에서 나를 비웃었고, 나는 그들을 쫓아내고 싶은 심정이 되었소. 그런데 그 주간에 그 교사가 나의 가게로 찾아왔소. 그는 자신은 폐출혈 증세로 이 도시를 떠나야만 하는데, 자기 반 아이들 중 어느 한 사람도 그리스도께로 인도해 본 적이 없다고 무척 마음 아파했소. 나는 그토록 절실하게 이야기하는 사람을 처음 보았소. 나는 그 선생에게 반 학생들을 만나서 현재의 심정을 이야기해보도록 제안했고 함께 동행하기로 했었소.
그 선생님과 함께 한 소녀의 집을 찾아갔소. 그 소녀의 이름을 불러서 그 소녀를 앞에 놓고 그녀의 영혼에 대해 이야기 해 주었을 때, 그 소녀의 얼굴에는 이전과 같은 비웃음은 찾아볼 수가 없었소. 그 소녀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소. 그 선생님이 생명의 길을 설명해 준 후 같이 기도하자고 제안하면서 나에게 기도를 부탁했소. 나는 이전까지 한 사람을 즉시로 개심시켜 달라는 기도를 하나님께 드려본 일이 전혀 없었지만, 우리는 함께 기도했고, 하나님께서는 즉시로 그 기도에 응답해 주셨소. 이런 일을 그의 힘이 다할 때까지 열흘 동안이나 계속했소. 그리고 열흘 후 그 반의 모든 학생이 그리스도께 인도되었소."
이 일을 계기로 제 남편은 사업가의 길로 전진하느냐, 그리스도께 헌신하느냐 사이에서 갈등했지만 그것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도 영적인 축복을 맛본 제 남편은 사업가로 성공하고자 하는 야망이나 돈버는 일에는 관심이 없어졌던 것입니다. "내가 그때 받은 축복을 잃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소." 사업을 그만두기 전 8개월 동안 오천 달러를 벌던 그는 그리스도께 헌신한 첫해에 300달러도 받지 못했고, 치즈와 크래커로 연명하며, YMCA 강당에 있는 벤치와 의자에서 잠을 자여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았다고 생각되는 그 사역을 충실히 수행해 나갔습니다.
결과적으로 주일학교는 부흥되었고 그 부흥에 의해 1864년 일리노이 스트리트 교회가 설립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뒤로도 그의 노력과 열정은 변하지 않고 지속되었고, 자신의 부족함을 핑계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한 번은 제 남편의 설교를 들은 한 청중이 남편의 문법실력을 지적하면서 공중 앞에서 설교하면 안된다고 비판했습니다. "저도 제 자신이 실수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그러나 저는 제가 받은 재능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충분한 문법 실력을 갖추신 당신은 과연 그 실력으로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이 말은 제 남편에게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는 최선을 다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그를, 목사 안수도 받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사역에 쓰셨던 것입니다.
설교와 사역에 있어서 제 남편에게 깨달음과 큰 도전을 준 것 중 한 경우는 무어하우스라는 젊은 설교자였습니다. 제 남편은 처음 영국에서 그를 만났을 때 어린 무어하우스가 설교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반강제적인 무어하우스의 방문으로 우리는 그에게 교회에서 설교할 수 있는 기회를 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어하우스는 요한복음 3:16을 들고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훑으면서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셨다는 것을 말씀으로만 증명해 내었습니다. 그는 칠일 내내 이제는 다른 본문을 택하리라는 사람들의 기대를 매일 밤 무너뜨리며, 계속 요한복음 3:16을 들고 설교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양날 선 칼을 가지고 죄인의 배후에서 그의 마음을 쪼개려 한다고 설교하곤 했었소. 그런데 그때 바로 내가 그 사실을 체험한 것이오. 뿐만 아니라 그가 똑같은 본문으로부터 칠일 동안 놀라운 설교를 해내는 것은 나에게는 큰 놀라움이었소." 무어하우스의 설교는 제 남편에게는 말씀의 무한성을 깨닫고 더욱 성경을 열심히 연구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부흥의 큰 물결이 시작되던 1873년까지 제 남편 무디는 지속적으로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이제 그는 설교자로서 많은 혼들을 주님께로 인도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영적인 일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과 안목까지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한 예가 바로 생키와의 연합 사역일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한 사람들의 찬반이 분분했지만 그는 생키의 찬양이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능력이 있음을 확신했고, 실제로 제 남편이 설교하기 전에도 생키의 찬양으로 많은 사람들이 회심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연합 사역은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부흥에 커다란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사실 제 남편을 인도했던 킴볼도, 사람들을 함께 모으던 스틸슨이나 또한 그 누구도 제 남편이 하나님을 위해 그토록 놀라운 일을 해내리라고 기대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오히려 제 남편은 부적합한 사람으로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제 남편이 열정을 가지고 주님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작은 일에 자신을 드리기 시작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점차 더 큰 일로 그를 부르셨고 그 일에 쓰일 수 있는 모든 능력을 공급하심으로써 그를 부흥의 도구로 사용해 주셨습니다.
만약 여러분에게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진지한 열정이 있고, 여러분이 할 수 있는 그 일을 신실하게 지속적으로 해나간다면, 어떤 환경이나 어떤 나약함도 아무런 제약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여러분을 생애를 통해 그분이 계획하시고 인도하시는 큰일을 이루시리라고 믿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육신에 채운 복음의 일꾼, 저드슨
존경하는 저드슨 목사님 귀하,
저는 선교를 열망하는 신학생으로서 목사님에 관한 책을 우연히 읽게 되었습니다. 제가 이렇게 편지를 드리게 된 것은 우선은 그 책으로 인해 도전받기보다는 열병을 앓듯 많은 고민과 번민을 하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다시 한 번 제 자신을 주님의 뜻과 계획에 순종할 수 있도록 내어드리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처음 책을 읽어가면서 목사님과 저의 환경이 비슷했기에 많은 부분을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1788년 메사추세츠 맬던에서 회중교회 목사의 자녀로 태어나셨고, 브라운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셨다고 읽었습니다. 하지만 대학에서 무신론자가 되셔서 졸업 후에는 자유로운(?) 삶을 향해 뉴욕까지, 또 거기서 서부로 향하셨지요. 그러나 그 도상의 한 여인숙에서, 한때 목사님을 무신론으로 이끌었던 친구의 비참한 죽음을 접하고는, 인생의 행로를 바꾸어 신학교에 입학하셨고, 1808년 12월 구원받으셨더군요.
저도 소위 '모태신앙'인이며, 제 아버님도 목사님이십니다. 저도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수없이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면서 제 믿음은 송두리째 흔들렸고, 인생의 패배자나 용기 없는 사람들이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절대자에 대한 신앙을 갖는 것이라고까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구원받기 전까지 하나님 없이 그렇게 삶을 낭비했습니다.
목사님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제가 가장 먼저 부딪힌 문제는 침례교 교리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은 우여곡절 끝에 미국 최초의 외국 선교사로서 회중교회의 후원을 받아 떠나셨지만 막상 5개월이나 항해한 뒤 선교지에 도착해서는 회중교회 선교회측에 그들의 교리를 지지하지 않음을 알리셨고, 침례교측에 자신을 후원해 줄 것을 요청하셨었습니다.
목사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저도 침례에 관해서 성경을 펼쳐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선교지에 아무런 도움이 없이 남겨지는 것을 감수하시면서 왜 그런 결정을 하셨는지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성경을 펼쳐보면서 침례에 대해 성경이 말씀하시는 바를 깨달을 수 있었고, 한편으로는 목사님의 사역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즉 진리의 외침 앞에 아무런 보장도 없이 이제 막 선교지에 도착한 선교사가 스스로 보급선을 끊을 수 있을만큼 성경이 말씀하시는 바가 소중했기에, 목사님 평생의 사역 즉 23년이나 걸려 버마어 성경을 번역하실 수 있으셨다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저에게 심각한 고민을 제기했던 것은 다른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은 미국을 떠난 5개월 후 캘커타에 도착했지만 영국 동인도 회사가 본국으로 떠날 것을 명령했기 때문에 여러 섬들을 전전하다가, 결국 마드레스에서 2주안에 떠나라는 명령을 다시 받게 되면서 그 기한 내에 떠나는 유일한 배의 목적지가 목사님의 선교지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렇게 선교를 위해 버마에 도착하기까지 1년 6개월 이상 아무 곳에도 정착하지 못하셨습니다.
그 뒤에도 어려움은 줄곧 끊이지 않았습니다. 복음을 자유롭게 전하기 위하여, 개종한 버마 사람들의 안전을 위하여, 강력한 독재자이며 불교도인 왕의 허락을 얻고자 두 번이나 이라와디 강을 여행했으나 허사였습니다. 그 뒤 의사인 프라이스 선교사로 인해 왕의 호의를 얻어 복음을 전할 수 있는 허락을 받았지만 아내 앤을 데리고 오는 사이 외국인에 대한 반감을 가진 사람들로 내각이 전부 바뀌어지기도 했습니다.
버마가 영국이 시작한 전쟁에서 패하자, 수도에 있던 목사님은 영국 은행으로부터 돈을 얻어쓰는 스파이로 몰리셨습니다. 매일 산뜻한 내의로 갈아입고, 서류 뭉치와 책을 질서 정연하게 정리하시던 목사님께서 엉겨붙은 더러운 오물 위에서 반쯤 벌거벗은 채 땀을 흘리며 악취를 풍기는 다른 죄수들과 함께, 죽음의 감옥으로 상징되는 렛 다 윤(손이 오그라져서 펴지지 않는 곳)에서 21개월을, 다시 아웅 비넬의 감옥에서 6개월 동안 갇혀 있으면서 죽음의 위협들과 싸우셨습니다.
어디 이것 뿐이었습니까?
기독교에 대해 관심을 갖는 사람 한 명 없이 4년이란 세월을 인내하셨고, 버마에 도착한지 만 6년이란 세월만에 단 한 명의 회심자를 얻을 때까지 계속 일하지 않으셨습니까?
하루에 거의 15시간씩, 실타래처럼 뒤엉켜 있는 끝없는 단어들과 매일 숙어가 변하는 버마어를 마른 야자나무 앞에 휘갈겨 쓰며 공부한 지 약 1년 후에는 머리를 단창으로 찌르는 것같은 통증에 시달리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에도 육신의 고통보다도 선교를 시작도 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중지시키시는 것은 아닌가하고 방황하셨더군요. 후에는 폐가 나빠져서 인후염이 왔고 그로 인해 목소리를 자유롭게 쓸 수 없었기에 목사님이 목이 터져라 전하고자 했던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될까봐 안타까와 하시지 않았습니까?
첫 번째 아이는 버마에 도착하기 전 배 안에서 죽었고, 다음 해에 건강한 사내아이가 태어났으나 버마의 습한 기후가 천천히 그 사내아이의 건강을 좀먹어 그 아이도 죽었지요. 목사님께서 낯설고 힘든 곳으로 떠나려는 무일푼의 선교사 지망생임을 알고도 선뜻 따라나서, 목사님과 숱한 어려움을 함께 했을 뿐 아니라 감옥까지 따라다니며, 목사님이 번역하신 버마어 성경 원고를 용감하게 지켜냈던 사랑하는 아내, 열병과 이질 속에서도 잘 견디어 주었던 앤마저도 목사님이 감옥에서 나온 뒤 죽었습니다. 그 6개월 뒤 셋째 딸도 죽었구요.
13년이나 분투해서 랭구운에서 18명으로 세운 교회도 2년 동안의 감옥 생활과 전쟁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남은 것은 겨우 4명의 회심자뿐이라니요! 다시 시작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셨습니다.
사실 목사님은 신학교 졸업 당시 모교인 브라운 대학에서 강사 자리를 약속받았었습니다. 그리핀 박사는 보스턴에서 제일 크고 부유한 교회에서 같이 일하자고 초청했었습니다. 세계 최고의 문화 환경이 갖추어진 곳에서 편안한 생활을 누리면서도 훌륭한 교회를 개척하실 수도 있지 않으셨습니까? 다른 동창들이 뉴잉글랜드에 교회를 세워 시원하고 건강에 좋은 뉴잉글랜드 기후에서 가족들을 부양하고 있을 동안 목사님에게는 그런 고난들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목사님의 생애는 저로 하여금 많은 것들을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잃어가면서, 심지어 모국어로 말하는 것조차 잊어버리면서까지 계속해서 끈질기게 버마어 성경을 번역하고, 죽어가는 버마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고자 하는 그 수고를 어떻게 중단하지 않을 수 있었는지..., 또 목사님을 복음의 일꾼으로 부르신 주님께서는 평안한 삶을 버리고 주님을 위해 헌신한 목사님의 생애에 왜 그런 고난들을 왜 허락하셨는지..., 무엇보다, 복음을 들고 나가고자 하는 나에게 이런 일들이 주어진다면 나는 계속해서 그 길을 갈 것인지...
계속해서 저는 목사님의 두 번째 부인 사라의 죽음에 대한 부분을 읽게 되었습니다. 사라의 건강이 극도로 나빠져 미국행을 결정했지만 미국에 도착하기도 전 목사님께서는 부인의 죽음을 직감하셨습니다. 남편과 함께 버마로 와서 야만스럽고 무지한 정글지대의 원주민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남편을 잃고, 본국의 송환도 거부한 채 어린 아들과 함께 정글을 다니며 복음을 전했던 여인, 그후 목사님과 함께 버마어 성경을 완성하는 일과, 복음을 전하여 교회들을 세우는 일을 함께 해온 동역자, 그러나 이제 건강을 잃어 주님의 부름에 응하려는 그녀에게 물었던 목사님의 맨 처음 질문은 이것이었습니다.
"당신은 아직도 구세주를 사랑하오?"
목사님의 질문은 다음과 같은 말을 포함하고 있는 듯 들렸습니다. '그렇게 많은 고난 후에도, 그리고 이제 그분을 섬기다 이 낯선 땅에서 죽어가면서까지도 말이오?'
이 부분에서 저는 비로소 제 앞에 있을지도 모를 고난에 대한 두려움을 벗을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에 대한 열정을 다시 회복할 수 잇었습니다. 그리고 목사님께서 어떤 안락도 마다한 채 "인생은 짧다. 수많은 버마인들이 죽어가고 있다. 나는 그들에게 구원을 전하기 위해 그들의 언어를 습득한 유일한 사람이다."라고 말하며 복음의 일꾼으로서 버마의 복음화를 위해 그리스도의 고난들을 육신에 채울 수 있었던 이유를 알았습니다.
목사님에 관한 책을 다 읽고 덮으면서, 선교의 열망을 가졌던 저로서는 제 자신에 대해 겸손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동시에 복음의 일꾼으로서 지금 저의 삶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아직도 주님께서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곳으로 저를 인도해 주시기를 바라고 있기에 제가 해 오던 준비들을 계속할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사는 이곳, 언어를 따로 익히지 않아도 되며,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 성경을 번역해야 할 막중한 부담도 없고,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나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목숨이 위태롭지 않은 바로 이곳에서 복음을 위해 신실하게 수고할 수 없다면, 다른 땅, 다른 언어, 다른 민족에게 가서 숱한 고난들을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이 저에게 명백하게 다가왔습니다.
그러기에 저는 먼저 바로 이 땅에서, 복음을 위해 수고하고 애썼던 목사님처럼, 이 땅을 선교지로 삼아 복음의 일꾼으로 살고자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사탄의 왕국을 뒤흔든 그리스도의 용사, 요한 웨슬리
사탄(Satan)은 이 세상의 통치자로서 지금도 그의 세력을 굳건히 하고, 어리석고 무력한 죄인들을 끝없는 멸망으로 이끌고자 쉼없이 일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도 매시대마다 의의 진영에서 그들과 맞서 싸울 신실한 군사들을 필요로 하신다(성경에 등장하는 노아, 모세, 엘리야, 요한, 바울 외에도).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일꾼을 사용하셔서 어둠의 왕국을 그 밑바닥으로부터 뒤흔들어 놓는 일련의 타격을 가하시고, 진노와 저주와 고통의 어두움 가운데 있는 죄인들을 빛으로 이끌어내고자 하신다.
86세의 나 웨슬리(1703-1791)는 먼저 주께서 나의 모든 죄를 씻으시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구원하셨다는 확신을 갖게 된 이후(1738년) 지금까지 53년간 의의 진영에서 선 군사로서 그분과 함께 하게 하신 하나님께 찬양을 드린다.
감리교회의 창시자로 알려진 나는 엡워드의 교구 목사인 사무엘 웨슬리와 어머니 수잔나 사이에 15번째 아들로 태어나 옥스퍼드 대학에서 공부하고, 링컨 대학의 특별 연구원이 되었다. 또 잠시 동안 부친의 교회에 부목사로도 있었다. 대학 시절에는 신성 클럽(Holy Club)을 조직하여 신앙운동을 주도하다가 그후 1735년 당시 식민지인 미국에 선교사로 다녀오기도 했다.
그러나 그 당시의 영국국교회 전체가 그랬던 것처럼 나는 구원의 복음을 밝히 전하지 못했다. 진지하게 학문을 추구하고, 매주 성찬을 받고,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의(義)를 추구하고, 동료들과 더불어 규칙에 따른 신앙생활을 통하여 경건해지고자 했던 종교인, 곧 "규율을 지키는 사람"(Methodist : 후에 나는 성경에서 가르치는 방법[Method]에 따라 생활하는 사람의 의미로 감리교도를 정의했음)에 불과했다.
따라서 구원받지 못한 죄인이었던 내가 인디언들을 회심시키려고 미국에 선교사로 갔던 일에 실패한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목자 자신이 장님이면서 영적 장님들을 인도하려던 목회의 실패와, 나 자신으로 인해 나는 절망의 수렁에서 뒹굴게 되었다. 거룩함을 추구했던 내 자신이 온통 부패하고 역겨운 것들로 가득차 있음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의의 진영에 속한 그분의 신실한 군사 피터 뵐러(Peter Bohler) 형제를 만나게 해 주셨다. 진젠도르프(Zinzendorf) 백작에 의해 선교사로 파견된 그는 내가 미국으로 가는 여정에서 만났던 사람들과 같은 모라비안으로서, 그들은 심한 폭풍우에 삼켜질듯 한 배 안에서도 여자와 어린 아이들에 이르기까지 평안한 모습으로 하나님을 찬송하던 사람들이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떨고 있던 나에게 그것은 놀라운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뵐러 형제는 내가 붙들고 있는 철학을 버릴 것을 나에게 권고하였으며, 행위로 내 믿음을 입증하려던 내가 불신자임을 깨닫게 해 주었다. 그러나 나는 그가 말해준 구원의 복음을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거의 모든 영국교회 회원들처럼 나도 한순간에 죄인이 회심한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권고대로 사형을 선고받은 어느 죄수에게 오직 믿음에 의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전했을 때,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불안해 하던 그 사형수는 기도를 드리고 난 후,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죄를 거두어 가셨기에 자신에게 정죄함이 없다고 외치고는 평안한 모습으로 사형장으로 갔던 것이다.
물론 나 자신 안에 그러한 믿음이 없으면서 그러한 믿음에 대해 전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겠으나, 나는 그것을 계기로 그 형제가 전해 준 새로운 교리에 대해 확신을 갖게 되었고, 올더스게이트 거리의 어느 모임에서 루터의 로마서 주석서 서문을 듣다가 1738년 5월 24일 8시 45분경 구원받았다.
올더스게이트에서의 거듭남 이전까지 나는 전력을 다해 하나님의 편에 서 있다고 생각했고, 많은 노력들 중 몇 번은 승리하였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제로 나는 그분의 편에 설 수도 없는 상태에 있었으며, 영적 장님이었기에 내가 어느 편에 서 있는 줄도 몰랐다고 하겠다. 그러나 성령께서 친히 나의 영으로 더불어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증거하신 후로 비로소 패배를 모르는 그리스도의 편에 서 있음을 알게 되었다.
거듭난 후, 그리스도의 군사들로서 믿음의 충만한 능력을 생활로써 증거하고 나같은 연약한 자들을 주 안에서 세워주는 모라비안 형제들과 함께 지내고 싶었다. 나는 곧바로(1738년 6월) 진젠도르프의 영도하에 있는 그들의 활동 중심지인 독일의 헤른훗(Herrnhut)을 방문하여 3개월 동안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들의 생활은 행위로 거룩함에 이르고자 했던 나의 예전 모습과는 본질이 달랐다. 그들은 형식에 얽매이지 않았으며, 생활 방식 또한 단순한 것이었다. 그들은 어디서나 기회가 닿는 대로 복음을 전했으며, 죄인들을 하나님께로 이끌고 있었다.
그 여행에서 돌아온 직후부터 나는 불같은 열심으로 즉시 "값없이 주시는 구원"을 전하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편에 서서 사탄의 왕국을 흔드는 공격이 시작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사탄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곧바로 나에게 성경적인 반응들이 돌아왔다. 일찍이 영국 국교회의 안수를 받은 나였지만, 구원의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자 일단의 목사들이 반기를 들고 나섰다. 교회들은 나에 대해 즉시로 문을 닫아버렸다. 그것은 나보다 먼저 이 복음을 전하던 나의 동료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한마디로 "이단"으로 몰리게 된 것이다.
모든 교회가 문을 닫기 시작하자 브리스톨에서 좀 떨어진 곳에서 교회를 구경해 본 적도 없는 광부들에게 야외 설교를 하기 시작한 휫필드에 이어 나도 야외에서 설교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야외설교를 탐탁치 않게 생각했으나, 주님께서도 옥외에서 산상설교를 행하셨음을 깨닫고는 그 일에 함께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야외 설교는 기존의 "교회"의 규칙과 방식을 완전히 무시해버리는 일이었다. 그들은 내가 가는 곳마다 그 교구에서 설교할 자격이 없다고 공격하였다. 그러나 복음을 전할수록 어디에서나 구원의 기쁜 소식을 기꺼이 들으려고 모여드는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일은 온당하고 정당하며, 이 일이야야 말로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셔서 내게 맡기신 일이라는 것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비록 교회의 문은 나에게 닫혔으나 전세계를 나의 교구로 삼고자 하였다.
그러나 나만 영국 국교로부터 제외된 것이 아니라 나로 인해 구주를 믿은 사람들까지도 동일한 취급을 받았다. 나와 내 동생 찰스는 교회의 성찬식에 참여하지 못하게 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의 만찬을 행했다. 우리에게는 파문령이 내려졌고, 곧 조사를 받도록 소환되었다. 친형 사무엘까지도 우리를 수용소에 감금된 정신나간 사람들의 행동에 빗대는 극언을 했다. 그럼에도 나는 영국교회의 모든 형식주의를 내버리고, 구속의 말씀을 높은 자나 낮은 자의 구별없이 알리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군중에 의한 박해의 폭동도 계속해서 일었다. 런던에 체류중 6일 간에 걸친 폭동이 일어나기도 했으며, 설교중에 여러번 돌을 맞는 것은 예사였고, 유리창을 깨고 가구를 부수고 집들을 파괴하여 난장판이 되는 일도 잦았다. 신변의 보호를 위해 치안 판사에게 호소했을 때 오히려 "당신이 폭동을 일으킨 자이므로 광폭한 소란을 겪어 마땅하다."는 답변을 듣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그들에게 밝히 보인 것은 새로운 교리가 아닌 성경에 따른 구원의 복음이었으며, 무지한 자를 가르치고, 악한 자를 바로잡고, 믿음이 있는 자를 견고히 하여 죄인들을 생명과 밝은 빛 가운데 서게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속에서 53년간의 사역으로 이제 영국에는 294명의 설교자와 71,668명의 회원이 있으며, 선교부에는 19명의 선교사와 5,300명의 회원이 있다. 그리고 미국에는 198명의 설교자와 43,265명의 회원이 있다. 내가 매년 말을 타고 여행한 거리는 평균 8,000마일(12,800km)이며, 나는 거의 매일 새벽 4시나 5시부터 하루 일과를 시작해서 거의 쉼없이 일해왔다. 약 20,000번의 설교를 했고, 영국뿐만 아니라 아일랜드(1747년부터)와 스코틀랜드(1751년부터)에서도 복음을 전했으며, 미국에도 복음을 전하도록 사람들을 파송했다.
나는 이러한 하나님의 사역을 통해 사탄의 왕국에 치명타가 가해졌음을 믿는다. 이 시대의 영국 땅에 나를 세우셔서 사용하신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의의 진영에 서서 싸울 신실한 군사들을 필요로 하시며, 보이지 않는 이 싸움에서 그분의 편에서 승전보가 계속해서 하늘 높이 울려퍼지기를 원하신다.
지금도 멸망으로 향하는 죄인들을 주님께서는 녹아지는 마음으로 바라보신다. 어두움으로 눈먼 그들에게 누가 하늘의 밝은 빛을 전해 줄 것인가! 죄와 사망의 사슬에 감겨있는 노예들을 용감히 구해낼 자가 누구인가!
사탄의 왕국을 다시 한 번 크게 뒤흔들 자가 누구인가!
아직도 열매 맺는 조지 뮬러의 믿음의 기도
"신실하신 주님,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고 드높혀 드리기 원합니다. 이렇게 주님 앞에 다가설 때마다 죄인된 저의 어리석음과 무지를 깨닫게 해 주시고, 오직 성령으로 충만케 해 주십시오. 또 주님께 간구할 때마다 말씀의 약속들을 붙들 수 있도록 도와 주시고, 특히 주님께서 베풀어 주신 자비들을 늘 잊지 않고 감사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시오.
주님께서는 제가 구원받지 않은 채 할레대학의 신학생으로 있을 때 저에게 손을 내밀어 주셨습니다. 카드 놀이, 거짓말, 속임수, 놀음에 빠져서 온갖 죄악의 구덩이에서 허덕이고 있을 때 저를 영원한 생명으로 건져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십자가의 대속을 알고 이해하고 있으면서도 주님의 존재를 믿지 못했던 불신의 마음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저에게 자비를 베푸셔서 저를 한 기도모임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곳에서 무릎꿇고 살아계신 하나님께 기도하던 한 형제의 진지한 기도를 통해 저도 주님의 존재를 믿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가 주님의 자녀가 되어서 주님과 나누었던 교제의 첫 기쁨이 지금도 제 마음을 가득 채웁니다. 주님께 믿음으로 기도하기 시작하던 때도 기억합니다. 저의 육신의 아버지는 제가 루터교 목사가 되어 좋은 급료에 훈훈하고 깨끗한 집에서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면서 자신의 노후를 보장해 주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선교사가 되려고 하면서부터 아버지에게서 받던 모든 재정적인 도움을 받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아무도 저를 도울 사람이 없었지만, 주님께서는 제 학비와 생활비와 방세를 주님께 구할 수 있는 믿음을 주셨고, 바로 그 날 공부하면서 일할 수 있도록 그 기도에 응답해 주셨습니다. 믿을 수 없을만큼 속히 기도에 응답하시어 기뻐 얼떨떨해 하던 때를 기억합니다.
주님, 처음 목자로 테인마우스에서 한 교회를 돌보게 해 주셨던 때였습니다. 주님께서는, 목사의 생활비를 위해 교회에서 실행되던 좌석요금제로 귀가 어두운 가난한 한 성도가 맨 뒷자리에 앉는 것을 마음 아파하던 제가 그 성경적이지 못한 관례를 버릴 수 있도록 도우셨습니다. 우리의 필요를 하나님께만 말씀드려 구하기로 하고, 이를 실행하기 위해 아내와 함께 헌금함을 만들어서 밤에 교회당에 몰래 두고 오던 날의 기쁨을 기억합니다. 주님께서는 주님을 의지해서 바른 일을 할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생활의 어려움에 대해 주님만을 의지했을 때, 주님께서는 저의 가정의 필요를 공급해 주셨습니다.
그후 브리스톨에 와서 막 일하기 시작했을 때였습니다. 그때 그 지역에는 콜레라가 만연했습니다. 병 중에 있는 사람들을 돌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주위에서 죽어갔지만, 주님께서는 성도들을 잘 보호해 주셨습니다. 저희 몸을 돌보는 것보다 주님의 일을 우선으로 수행했을 때 저뿐만 아니라 제 아내도, 아내의 태에 있던 아이도 함께 지켜 주셨습니다. 환경에 굴하지 않고 믿음으로 주님께서 부르신 일을 계속햇 수행하여 교회를 지켜낸 것이 자랑스러웠습니다.
주님께서는 주님의 일에 부르신 어리석고 무지한 저에게 분별력을 주셔서 올바로 주님을 섬길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제가 빈민촌의 어린이들을 위한 무료 주간학교를 지원하기 시작했을 때, 그 일을 수행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려 주셨습니다. 그들은 세계가 점점 좋아진다고 선전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든 아니든 간에 아무에게나 자신의 필요들을 알려 기부금을 받아냈습니다. 그들에게 이러한 일들에 대해 지적해 주었지만, 그들은 비성경적인 일들을 자행하면서도 '전통'과 '편의주의'를 들먹이면서 자신들의 죄를 옹호했습니다. 그들은 아무 일에나 하나님의 이름을 붙이는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뚜렷한 기도 응답으로 주님의 사역을 받드는 저에게 확신과 격려를 주셨습니다. 빈민촌 아이들을 위한 무료 주간학교를 열어서 그들을 성경학교로 인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알고 싶어서, 20파운드를 보내 주시면 당장 그 일을 시작하겠다고 기도했을 때 주님께서는 바로 그날 20파운드를 저에게 주셨습니다. 또 주님보다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과오를 범하지 않도록 저를 도와 주셨습니다.
주간학교의 아이들이 계속 빈민구제소로 끌려가서 더 이상 학교에서 교육받지 못하게 되자, 저는 고아원에 대한 계획을 갖게 되었습니다. 주간학교의 교감도, 제 아내도, 동역자들까지도 그 일을 반대했습니다. 영국에는 그러한 것이 있어 본 적이 없고, 또 제가 가난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말들에도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주님의 뜻을 물을 수 있도록 저를 붙들어 주셨습니다.
거듭난 후 제가 믿음으로 기도를 시작할 수 있도록 도전을 준 프랑케의 전기를 우연치 않게 다시 접하게 해 주셨습니다. 18세기의 풍습에 과감하게 대항하여, 단 한 푼도 없었지만 하나님께 구한 기도의 응답으로 고아원을 세웠던 그 사람을 통해 도전을 주셨습니다. 백년 전에(1727년) 프랑케의 기도에 응답하셨던 주님께서, 그때(1835년)에도 저의 기도에 응답해 주실 수 있으심을 신뢰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1836년 5월에 믿음으로 시작된 고아원의 사역을 주님께서는 30명에서 100명으로 300명으로 700명으로 1,000명으로 이제 2,000명까지 늘려 셨습니다. 그간에 채워 주신 주님의 공급하심의 손길은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지만, 저는 그것이 주님의 신실하심 가운데 이루어졌다고 담대히 고백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일을 통해 아이들을 주님께 인도하는 일 외에도 성경신학원을 세워 성경을 가르치고, 꾸준히 성경을 배포하고, 선교사들을 지원하는 일들도 매년 더 많이 수행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가난하고 무지한 저를 사용하셔서 이같이 놀라운 축복의 통로가 되게 해 주신 주님, 참으로 감사합니다.
주님, 주님께 더욱 감사한 것은 이러한 일들을 수행하면서 저희들이 받는 시험과 인내의 과정들 때문입니다. 그러한 과정들을 통해 주님께서는 저와 저의 동역자들의 믿음을 성장시키기 원하셨고, 주님께 더 가까이 다가서게 만들기 원하셨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60년이 넘는 동안, 즉각적으로 필요를 채워 주실 때도, 몇 개월씩 시험의 시간들을 지날 때도, 실제적인 매일의 필요를 부족하지 않게 채워 주셨고, 어려움 당하지 않도록 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끈기있게 인내로써 기도의 응답을 받을 때까지 기도해야 한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세들어 있던 고아원에서 첫 번째 고아원을 지을 건축 헌금이 채워지기까지 447일을, 둘째, 셋째 고아원을 위하여 기도하기 시작하여 그것들이 완공될 때까지는 11년이 넘는 세월을 매일 기도하며 응답될 때까지 기다리게 하셨습니다. 때로 약속된 헌금이 지불되도록 수년 이상을 기도하도록 몇 번이나 허락하셨습니다.
따라서 저희 믿음에 인내를 더하셨고, 기도가 응답되었을 때 큰 기쁨을 맞보도록 하셨습니다. 그러한 과정들은 더욱 죄를 멀리하고 주님과 더 깊이 교제하는 기쁨을 누리게 하는 시간들이었습니다.
주님, 오늘도 제가 주님께 구하는 것은 이 사역을 통해 더 많은 고아들이 주님을 알게 되도록 역사해 주시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저를 통해 2,000명의 고아들의 매일의 모든 필요가 채워진 일들로 주님께서 살아계시고, 기도를 들으시며, 신뢰하기에 부족함이 없으신 분이심을 나타내 주십시오.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증거와 도전이 되게 해 주십시오.
그렇게 되기를 간구하는 것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려운 상황에 부딪치면 믿음으로 살기를 포기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재정적인 어려움을 당하면 주님께 나아가기보다는 부유한 친척과 같은 다른 사람의 도움에 의지하고자 하는 유혹이 앞선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업 경영과 같은 현실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믿지 않는 사람들과 똑같은 방법으로 자신의 양심을 더럽히도록 세상 풍조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응답하실 때까지 인내하고, 자신이 늙어 노후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주님께 의지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적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모든 불신의 마음에 주님께서 말씀에 따른 믿음으로 살도록 도전을 주십시오. 자신의 나약함 가운데 '너는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거짓 속삭임에 어떤 그리스도인도 귀기울이지 않게 해 주십시오.
모든 필요에 주님을 의지하여 기도하는 자들마다 붙드시고 응답해 주셔서 그들의 믿음의 간증을 지니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설교의 왕자, 찰스 헤이든 스펄젼
1834년 6월 19일, 사도 바울에 버금가는 위대한 설교자가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 제임스 스펄젼은 54년 간(1804-58) 영국 스탬본에서 목회를 했다. 스펄젼의 부모님은 스펄젼의 할아버지가 일하셨던 콜케스터로 이사해 톨스버리에 위치한 독립 교회에서 사역했다. 스펄젼은 어린 시절(1835-41) 할아버지와 함께 살았다. 1849년 그는 뉴마켓에 있는 침례교 학교를 다녔다.
모든 기독교적인 배경에도 불구하고 어린 스펄젼은 복음의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 그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방법을 찾을 때까지 도시에 있는 모든 교회를 방문할 것을 다짐했다. 6개월 간 그가 할 수 있는 한 모든 교회를 방문하고 난 뒤 스펄젼은 거의 좌절하고 말았다. 설교자인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있었지만 그들은 복음을 전해주지 않았던 것이다.
춥고 눈 오는 1850년 1월 6일 아침이었다. 스펄젼은 내리는 눈처럼 차갑게 얼어붙은 마음을 안고 터벅 터벅 걷고 있었다. 목적지까지 가려면 아직 더 가야하는데 갑작스레 눈보라가 쳐 피할 곳을 찾다가 전에 있었는지조차 몰랐던 한 교회를 만났다. 알티머리 스트릿 초대 감리교회였다. 스펄젼은 감리교도들은 머리가 아플 정도로 크게 찬송한다는 그들의 명성을 들었기에 약간 망설이면서 안으로 들어갔다.
키가 크고 마른 남자가 앞으로 나가서는 오늘 날씨 관계로 목사님께서 늦으시는 것같아 자신이 대신 설교하겠다며 즉시 이사야 45:22을 본문으로 설교하기 시작했다. "땅 끝에 있는 모든 자들아, 나를 쳐다보고 구원을 받으라. 이는 내가 하나님이요, 다른 이가 없음이라." 어린 스펄젼에게 이 말씀은 너무도 놀랍게 다가왔다. 그 사람은 계속 말했다. "쳐다보라! 단지 쳐다보기만 하라!" 스펄젼은 왜 전에는 이런 사실을 알지 못했는지 놀랍기만 했다. "나를 쳐다보라. 나는 피를 흘렸고 나는 십자가에 매달렸느니라." 그는 스펄젼에게 이렇게 말했다. "젊은이! 자네는 지금 참 비참해 보이는군... 젊은이, 예수 그리스도를 쳐다보기만 하라구. 단지 쳐다보기만 하란 말일세."라고 말했다.
스펄젼은 그때 15살이었고 후에 이렇게 간증했다. "나는 구원받는 방법을 단번에 보았다. 어두움은 물러갔고 나는 태양을 본 것이다. 나는 앉은 자리에서 봄이 온 것처럼 포근함을 느꼈고, 이 감리교 형제들과 함께 흥분하여 소리치고 싶었다. "나는 용서 받았다." 그때 그 설교자가 누구였는지 지금까지 알려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최선을 다해 자신의 의무를 다한 그 사람은 분명 하늘나라 어딘가에서 밝게 빛나는 별처럼 반짝이고 있을 것이다.
"오, 그리스도를 위해 어떤 일을 하고자 소망해야 하는가요?" 이렇게 스펄젼은 어머니께 편지를 썼다. 한 주도 안되어 그는 그리스도를 위한 '어떤 일'을 찾았다. 그는 사람들에게 전도지를 나누어 주었다.
그는 1851년 5월 3일 캔트로우 목사에게 침례받았다. 그는 캠브리지에 있는 침례교회에서 목회자가 아닌 성도들이 설교하는 모임에 참석했다. 그는 그 교회의 주일학교에서 가르치기 시작했고 작은 기도모임을 인도했다. 그는 첫 번째 설교를 캠브리지 근처 테버샴이라는 동네의 오두막에서 베드로전서 1:7 말씀을 본문으로 했다. 진지하고 실제적이며 정직한 설교였다. 스펄젼은 자신이 맡은 예배를 인도하기 위해서 종종 16km 이상을 걸어가야 했다.
하나님께서 스펄젼에게 주신 은사는 분명하게 드러났고 "소년 설교자"에 대한 명성은 빠르게 퍼져 나갔다. 방과 후 저녁 때마다 스펄젼은 캠브리지 근처의 교회와 오두막 그리고 야외까지 가능한 한 모든 곳에서 설교했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로 성도들을 말씀으로 양육했고 설교했다. 그의 설교는 너무 뛰어나서 누가 들어도 명백히 하늘로부터 온 것임을 알 수 있었다. 22살에 그는 당대의 가장 유명한 설교자가 되었다. 런던에 메트로폴리탄 예배당을 세웠다. 5,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중앙 강당과 두 개의 갤러리가 있는 엄청나게 큰 건물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청중에 비하면 큰 것이 아니었다.
그가 여행할 때조차도 그의 설교를 들으려고 10,000명의 청중들이 모여들었다. 그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침례인 요한에게 모여들었던 것처럼 모여들었다. 선지자 엘리야에게 있었던 것처럼 그에게도 하나님의 불이 있었던 것이다. 그의 교회에서는 왕족도 종처럼 앉아서 설교를 들어야 했다. 택시 운전사들은 그에게 요금을 받지 않았다. "설교의 왕자"를 차에 태운 것만으로도 영광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빵을 만들고 있는 여인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생명의 빵을 만들려고 시도해 본 적은 없습니까?" 목수들에게는 "모래 위에 성을 쌓으려고 한 적은 없습니까?"라고 묻곤 하였다.
스펄젼은 메트로폴리탄 예배당에서 그가 죽을 때까지(1892년) 주께서 주신 위대한 능력과 설교로 목회를 했다. 한 미국인 방문자에게 스펄젼의 설교를 듣고한 후 그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하게 되었느냐는 질문에 그는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의 설교를 듣고나면 저는 스펄젼이 아닌 그리스도를 생각하게 됩니다."라고 대답했다. 스펄젼은 적합한 묘사와 시기 적절한 말을 도구로 설교할 때 마치 한 편의 그림을 그려서 주듯 듣는 자들에게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어린 양"을 그대로 제시했다.
1864년 스펄젼은 그가 구원받았던 그 교회를 다시 방문해서 이사야 45:22을 본문으로 다시 설교했다. 자신이 앉았던 그 자리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제가 바로 저 자리에 앉아있었습니다. 그 자리가 모든 것을 시작할 수 있게 했던 곳이었습니다." 그는 설교뿐만 아니라 기도에도 탁월한 은사가 있었다. 5,000명의 회원들의 이름을 다 알 만큼 스펄젼에게 있어 그들은 소중하고 의미있는 사람들이었다.
목회뿐만 아니라 설교하는 일과 주간 설교지를 발행하는 일과 900명의 학생들이 있는 목회자 학교를 운영하는 일 등 그는 주 안에서 이 모든 일들을 감당했다. 그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인기를 얻기 위해서 설교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오직 마귀만을 탄핵해야 하며, 오직 그리스도만을 높여야 합니다." 스펄젼은 사람들에게 단지 인기있는 설교자로 남는 것을 원치 않았다. 1867년에는 500명의 고아들을 수용할 수 있는 고아원을 세웠다.
스펄젼이 무디에게 메트로폴리탄에 와서 설교해 줄 것을 부탁했을 때 무디는 "저를 초대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그러나 당신의 설교에도 하나님께로 돌이키지 않는다면 설령 죽은 자가 부활한다고 하여도 사람들은 하나님께로 돌이키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초대를 거절했다.
스펄젼은 1891년 6월 7일 메트로폴리탄 예배당에서 자신의 5,311명의 회원들과 친구들에게 마지막 설교를 했다. "당신이 만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었다면, 당신은 그분 안에서 당신의 혼이 편히 쉴 만큼 그분은 온유하며 겸손하신 분임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분처럼 관대한 지도자는 없습니다. 그분과 같은 통치자를 저는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그분은 영적 전쟁 중 가장 어려운 상황에 항상 함께 계십니다. 찬 바람이 불 때면 그분은 항상 언덕 위의 바람맞이로 서 계십니다. 십자가의 가장 무서운 부분은 항상 그분의 어깨 위에 놓여 있습니다. 그분이 만일 우리에게 짐을 지운다면 그분 역시 그 짐을 함께 지고 계십니다. 사랑 안에 품위 있고 관대하며 친절하고 부드럽고 풍부한 무엇을 보았다면 당신은 언제나 그것을 그분 안에서만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40년 이상 저는 그분을 섬겼습니다. 그분으로부터 온 사랑 이 외에는 전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분의 군대에는 생명과 평화와 기쁨이 있습니다. 지금 당장 당신이 입대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로 입대하는 것을 도우시기 바랍니다!"
스펄젼은 1892년 1월 31일, 주일 저녁 11시 5분에 주님께로 갔다. 장례식은 2월 7일부터 11일까지 대략 100,0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참석한 가운데 메트로폴리탄 예배당에서 치뤄졌다. 스펄젼이 설교할 때 쓰던 성경은 그의 관 위에 이사야 45:22 말씀이 펼쳐진 채 놓여 있었다. 스펄젼은 결코 사람에 의해서 부름받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그를 설교하도록 부르셨다. 그는 설교자들을 위하여 목회자 학교를 세웠고 고아들을 위하여 고아원을 세웠다. 그리고 온 세상의 수많은 죄인들을 위해서 많은 글을 썼다.
그는 당시 국가의 소리였다. 그래서 도덕, 종교, 혹은 가난한 자에게 영향을 미치는 모든 국가의 문제는 그의 판단과 조언을 받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도 영혼에 대한 그의 열정에 비길 수는 없었다. 그의 모든 설교에서 독자들은 그것을 느낄 수 있다. 스펄젼은 수천 편의 시, 소책자, 노래와 설교와 주석서를 발표했다. 복음이 전해지는 한, 죄인들에게 보내는 그의 메시지는 생생하게 살아 울려퍼질 것이다.
주님께서 온전하게 인도하신 스코필드
한 때 법률가였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스코필드, 그는 <스코필드 관주성경>으로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매우 잘 알려져 있다. 그 성경은 수십만 성도들뿐만 아니라, 신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실제적인 도움을 주었다. 이 성경은 그가 구원받은 지 30년 후의 역작으로서 주님께서 전적으로 도와주셨음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스코필드의 어머니는 이 아이기 태어나면 설교자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그녀는 그를 낳다가 돌아가셨다. 스코필드는 어린 시절 내내 미시건 레나이 지역에 있다가 그후 가족들과 함께 테네시 레바논으로 이사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아내를 만나게 되었다. 감독교인이었던 아버지는 그가 어린 시절부터 성경을 읽어주었고, 또한 그가 자발적으로 성경을 읽게끔 도와주셨다.
어린 그는 자연에 대해서는 무엇이든 알려는 열정이 있었고,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 그의 나이 17세, 그는 남북전쟁으로 인해 그가 가려던 버지니아 대학교를 포기하고 전쟁에 참가하게 되었다. 그는 18번 이상의 크고 작은 전쟁에 참가하였고, 그로 인해 상을 받는 적도 있었다.
스코필드는 법률을 공부하여 1869년에는 켄사스에 있는 변호사단을 승인받았고, 1872년에는 캔사스에서 주 의회에 입당하게 되었으며, 이듬 해에는 그당시 인디안 영토(대부분 오클라호마)를 포함한 켄사스의 변호 대변인이 되었다. 이로써 그는 당대 미국에서 가장 나이 어린 변호인이 된 것이다.
그러나 너무나도 많은 정치적 충돌과 마찰로 그는 켄사스에서의 일을 그만두고, 1879년에는 세인트 루이스로 돌아와 그곳에서 다시 개업을 하고, 여가생활로 미주리와 캔사스를 왔다갔다 하며 여행을 했는데, 그때부터 그는 상습적으로 술을 먹기 시작했다. 성경도 읽긴 했지만 연구할 정도는 아니었고, 그저 역사 이야기를 다룬 책이거니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일어났다. 그의 친구 중에는 YMCA에 다니고 있는 맥 휘터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하루는 그가 사무실로 놀러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오래 전부터 자네에게 물어보고 싶었던 말이 있었는데, 여태껏 두려워서 하지 못했네. 그러나 지금은 꼭 물어봐야겠네, 친구." "자네가 두려운 것도 있나? 그래, 그것이 뭔가?" 맥 휘터스는 이어서 물었다. "자네는 왜 아직도 그리스도인이 아닌가?" "하늘나라에는 나 같은 술주정뱅이가 설 자리가 없지 않은가? 자네가 알듯이 나는 술없이는 못사네."
그러나 맥은 질문을 멈추지 않았다. "자네는 아직도 내가 물은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았으니 다시 묻겠네. 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거부하는건가?"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감독교인이야. 하지만 그리스도인이 되는 방법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네." 맥 휘터스는 그의 대답을 듣고 걸상을 가져와 포켓성경을 펴 들어 한 구절 한 구절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떻게 해야 구원받을 수 있는지를 설명했다. "이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자네의 구세주로 영접하겠나?" "한 번 생각해 보겠네." "아니, 자네는 지금껏 살면서도 모르겠나? 지금 결정하게나, 지금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아야 하네."
스코필드는 더 이상 주저할 수 없었다. 그 둘은 즉시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고, 그 순간이 바로 36세의 나이로 새 생명을 얻은 스코필드의 기적같은 삶이 시작되는 때였던 것이다. 그가 찰리 트럼블에게 쓰라고 준 자서전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것은 성경적 회심이었습니다. 맥 휘터스는 그의 낡은 포켓 성경으로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대해 나에게 말해 주었습니다. 요한복음 3:16; 6:48; 10:28, 사도행전 13:38-39 등을 읽어 주었을 때 나는 빌립보의 간수처럼 '내가 구원받으려면 어찌해야 합니까?"라고 물어 보았고, 그는 그저 성경을 다시 한 번 읽어 주었습니다. 나는 그때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영접하였고, 순간 나의 죄사슬은 풀리고, 다시는 나를 얽어매지 않았습니다. 술을 먹고 싶은 욕망도 사라졌습니다. '순간'이라는 말을 빼지 마십시오. 강조하셔도 좋습니다. 그리고 절대로 '그는 술먹는 욕망을 떨쳐내고 승리하게 되었다.'라고는 쓰지 마십시오. 그것은 제가 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온전히 하신 일입니다. 주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맥 휘터스는 스코필드를 즉시 YMCA로 데려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교제하게 도와 주었다. 그후 스코필드는 전천년주의자이자 세대주의자이며 성경을 가르치는 장로교 목사인 제임스 브룩스에게 큰 영향을 받게 되었다. 그는 "구원은 성경적 사실에 근거한 것이며, 절대로 체험이나 감정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라고 가르쳤다. 스코필드가 감명받은 사람 중에 또 한 사람이 바로 C.E. 팍슨이다. 그는 새로 산 성경에 무슨 표시를 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지금의 관주의 시작이었다. 스코필드 역시 그것에 관심이 있었다.
그는 세인트 루이스에서 철도직을 겸하면서 지역 회중교회를 돌아다니며 일하게 되었는데, 한 회중교회에서는 스코필드의 하는 일들을 주목하였고, 마침내 그에게 달라스에 있는 제일 회중교회의 목사직을 맡기게 되었다. 1882년 드디어 스코필드는 법률가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것은 바로 어머니의 39년 전 기도가 응답되는 순간이었다.
처음에는 한 명의 형제와 열한 명의 자매들로 모임을 시작했다. 곧 그는 그들의 남편들을 주님께로 인도했고, 신학교를 가는 대신에 그전 제임스 부룩스에게서 배운 것으로 열심히 공부하여 1883년 10월 17일에는 드디어 회중교회에서 안수받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 그의 결혼생활은 파탄 지경에 이르렀다. 1881년 7월 23일 그의 아내가 이혼서류를 내민 것이다. 그가 주님께로 강력하게 헌신한 이후 그의 아내는 그들의 사이를 끝낼 것을 독촉하여 2년 후 그들은 이혼을 하게 되었다. 스코필드의 회심 후 2년 동안 많은 문제가 야기되었는데, 그의 아내는 그들이 이혼한 사유를 "나는 그 이의 변한 생활방식을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스코필드는 1883년부터 1907년까지 달라스교회에서 두 차례에 걸쳐 사역을 담당했으며, 1908년에는 비로소 독립교회로 나왔고, 1922년에는 스코필드 기념교회라고 교회명칭을 바꾸었다. 2년 만에 12명의 작은 교회에서 200명의 교회로 된 것이다.
그당시 주목할 만한 그의 일은 그의 첫 번째 저서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1888)라는 책과 <달라스의 중앙 아메리카 선교 구조, Formation of the Central American Mission of Dallas>(1890년 11월 14일)라는 책을 쓴 것이다. 그리고 중국 사역의 설립자이자 감독자인 허드슨 테일러와의 많은 만남으로 그는 하찮게 여겼던 미국 선교사업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몇 명의 성도들과 함께 선교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곧 그 해 선교비로 책정된 예산을 초과한 금액으로 선교사업에 동참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그는 성경통신과정을 시작했는데, 한때는 7천 명이 넘는 학생이 등록한 때도 있었다.
1895년 무디의 권유로 메사추세츠 북동쪽에 있는 교회에 목사로 갔을 때 스코필드에게 또 다른 새로운 장이 열리게 되었다. 그는 7년 간 그곳에서 매주 일요일마다 농사를 짓는 그 지역 사람들과 수천 명이 넘는 고등학생들에게 설교했는데, 196명의 회심자들이 교회에 붙여졌고, 112명의 다른 교회성도들이 그 교회로 모이게 되었다. 1899년 무디가 생을 마감할 때도 스코필드의 설교로 장례식을 치렀다.
그가 성경 훈련학교에 학장으로 있었을 당시 다른 이들과 함께 뉴욕 롱아일랜드에 있는 씨 클리프 성경모임을 결성하였는데, 그때가 첫모임으로서 1901년 7월 23-29일에 열렸다. 그때 그는 게벨라인과 함께 성경 주석서를 만드는 것에 심취해 있었는데, 단순히 주석을 다는 것보다는 참고구절, 요약, 도입, 부제목 등을 첨가시키는 것을 원했다.
이 작업은 반대자들의 반대에 부딪쳐 완성되지 못했지만, 1902년 달라스로 돌아왔을 때, 그의 성도들은 그가 계속 주석서를 펼 수 있도록 허락하였고, 그는 1902년부터 1909년 동안 주석서를 펴내는 데 열중했다. 7년 동안 그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자신에게 끊임없이 던지며 주석서를 펴냈다. "내 자신이 처음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려고 했을 때, 말씀을 공부하려는 그 기본적인 원리를 배제한 채 어떤 주석서가 나에게 도움이 되었던가?"
여러 가지 방해에도 불구하고, 1907년 그의 책은 완성되었고, 1909년 1월 15일 드디어 주석성경이 성도들의 손에 쥐어지게 되었다. 그의 저서에는 유명한 <스코필드 관주성경>과 스코필드 통신과정이 있지만 그에 못지 않은 책,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예언의 위치>, <성령론>, <신구약 성경공부> 등의 주옥 같은 책이 많다. 비록 그의 설교 자료를 보수적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주기도 했지만, 단 한 번도 근본주의자가 된 적은 없었다. 1908년에는 자유주의 물결에 의해 그 회중교회에서 물러났고, 뉴욕시로 가서 다시 일을 시작했다. 1914년에 그는 루이스 쉐퍼, 윌리엄 페팅길과 함께 필라델피아 성경신학원을 만들어 1918년까지 학장으로 지냈다.
1921년 5월 22일, 그는 마지막 예배를 드리고, 두 달 뒤 집에서 생을 마감하게 되는데, 그의 말에 의하면 자신의 생애에 잊지 못할 순간이 두 번 있었다고 한다. 첫 번째는 성경에 대해 인간적인 가르침을 그만두고 성경 자체로 들어가 공부를 시작했을 때요, 두 번째는 승리자이신 그리스도와 그가 하신 일을 알았을 때였다는 것이다.
수백만 명의 많은 사람들이 스코필드가 쓴 주석성경으로 인하여 더 쉽게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모든 성경 학자들이 그를 인정하는 것도 아니었으며, 또한 모든 사람들이 그의 주석을 인정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1954년부터 9년 동안 아홉 명의 위원들이 모여 스코필드 주석성경을 다시 편집하게 되었고, 쉴러 잉글리쉬 아래 그 일이 마무리되어 1967년에는 <뉴 스코필드 관주성경>이 나오게 되었다. 하지만 이는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역이 왕성하게 되는 것을 막기 위한 사탄의 방해였다.
왜냐하면 이 새로운 주석성경은 하나님께서 보존해 주신 <킹제임스성경>을 배격하고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스코필드가 그렇게 높여 드렸던 하나님의 말씀은 이 새로운 책에서 무너져 버린 것이다. 이는 스코필드의 의도와는 전혀 관계없는 것이었다.
36세의 나이에 구원받고, 제대로 된 신학공부도 하지 못한 그가 지금도 성도들의 마음 속에 위대한 믿음의 선조로서 무엇을 했는지 보라. 그를 인도하신 하나님은 참으로 위대하지 않으신가?
끊임없이 도전한 생애, 윌리엄 캐리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라. 하나님을 위하여 위대한 일을 시도하라." 아직 "선교"라는 이름조차 낯설던 시절, 선교사로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고향을 떠나 낯선 이국 땅 인도에 와서,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을 위하여 위대한 일을 시도한 나의 아버지, 윌리암 캐리(William Carey)의 말은 지금 또 복음의 다른 미 개척지 버마로 부르심을 받아 떠나는 나 펠릭스의 다짐이기도 하다.
나의 아버지 윌리암 캐리는 1761년 영국의 북 앰프턴셔(Northamptonshire) 지방 폴러스푸리(Paulerspury)라는 작은 마을에서 직조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성경을 읽어 성경의 역사적인 지식은 풍부했지만 14살이 되기 전까지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가난했기에 14살의 나이에 생계를 위해 일해야 했던 아버지는 클라크 니콜이라는 구두 수선공의 견습생이 되었다. 그 즈음 동료 견습생과의 거듭된 논쟁은 나의 아버지에게 영적인 갈등을 불러 일으켰고, 그런 과정을 통해 아버지는 구원받았다.
그후 바톤에서 설교 초청을 받은 것을 시작으로 물튼에서 목사가 되신 아버지는 탐험가인 <쿡 선장의 마지막 항해기>라는 탐험기를 읽고서 선교사로 부르심을 받게 되었다.
그 책은 단순히 흥미진진한 모험 이야기였으나, 나의 아버지 캐리는 그 책에서 하나님이 없는 인간의 절실한 요구를 보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을 위한 부르심에 "제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응했다.
그러나 극단적 칼빈주의가 만연해 있었고, 현대적 형태의 선교가 태동하지도 않은 상태였던 영국은 아직 선교에 무관심한 상태였다. 아버지가 품은 선교의 뜻에 대해 교회 지도자들은 그를 반대했고, 따라서 격려는커녕 그의 말에 귀기울이는 사람조차 없었다. 선교의 꿈이 실현 불가능하게 보이는 상황이었지만, 아직 서른 살도 되지 않은 구두 수선공이었던 나의 아버지는 헬라어나 히브리어를 배우고 익히는 것 외에도, 잠자는 때를 제외하고 오두막집에서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였다.
도서관을 이용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지만, 여러 책들을 통해 온 세계의 대륙, 섬, 인종, 종교, 왕국을 조사하고 그 결과를 논리적으로 일반화시킨 작업의 결과로 <탐구, Enquiry>가 출간되었다.
십 년 동안 홀로 선교의 밭을 갈면서 함께한 이들이라고는 동정이나 표시하며 동참을 꺼리는 서너 명의 친구들뿐이었지만, 서서히 조나단 에드워즈의 책에 감명받은 목사들이 교회부흥과 복음전파를 위해 우선 규칙적으로 기도하는 모임을 만들자고 결의하게 되면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조짐이 일기 시작했다(1784년 노팅검).
이렇듯 한 사람의 마음에 굳게 자리잡은 세계 복음화의 목표를 향한 노력으로 많은 목사들이 '선교'에 도전을 받았지만, 황무지에 길을 닦는 데 어려움을 느끼자마자 그들은 그분께서 행하실 위대한 일을 기대하는 대신 곧 뒷걸음질쳤다. 하나님의 명령도 잊은 채 그들은 푸념을 늘어 놓았다. "시골 목사들이 어떻게 그토록 막중한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수많은 책들을 읽고 새로운 정보들을 모으면서 세계 복음화의 목표를 구체화시켜 가던 아버지에게 하나님께서는 선교에 대해 목사들에게 설교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라. 하나님을 위하여 위대한 일을 시도하라!"
이제 어렵게 선교회가 설립되자, 아직도 정부(동인도회사)의 선교사에 대한 적대감이 남아 있는 인도의 선교사로 자원하여 1793년 11월 영국을 떠난 나의 아버지는 다시는 고향을 보지 못하는 길을 떠나오게 되었다. 아버지는 인도 선교사로 임명된 순간부터, 인도를 위해서 살았다. 나태에 빠지게 하는 열대 나라 인도의 사람들은 복음을 기꺼이 듣기도 했지만, 거의 대부분 복음을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두려워하고, 높은 카스트 계급은 명예를 잃을까 두려워하며, 가난한 자들은 채권자들로부터 받을 복수를 두려워하기 때문이었다. 또 우상숭배로 그들의 눈은 너무나 어두워져 있기도 했다.
처음 7년 동안 한 명의 인도 사람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기쁨을 맛보지 못한 가운데서도 아버지는 더 효과적인 선교의 방법을 모색하고 찾았다. 그는 7,8명의 선교사들이 가족과 함께 한 저택에서 공동체를 이루어 생활하는(모라비아 선교사들의 방식대로) 선교 공동체(missionary colony)를 계획했다. 선교사들의 아내들의 적극적인 도움이 요구되는 이 공동체는 검소하게 생활하고 일을 분할해서 할당하여 사역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함이었다.
그러한 생활 방식은 각자의 수입을 하나님의 사역에 그대로 드려지게 하여 선교 기금의 많은 부분을 자체적으로 충당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교회의 사역이 활성화되어 확장되자 영국에 있던 후원자들은 선교회 지원금에 부담을 느껴 삭감을 촉구하기도 했다. 주저하는 그들에게 아버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일 여러분이 큰 뜻을 품는다면 하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을 통해 도움을 아끼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작은 뜻을 품는다면 즉시 그들의 도움도 그만큼 줄어들 것입니다.
나의 아버지에게는 특별한 동역자들이 있었다. 온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사역에 드려진 워드 형제와 놀랄 정도로 근면하고 성실한 마쉬만 형제였다(워드가 죽기까지 이 두 선교사는 아버지와 함께 23년 동안 동역했다). 이들의 동역으로 특히 1832년까지 40개 언어(벵갈어, 산스크리트어, 오릿아어, 마흐라타어, 힌두어, 구자라트어, 페르시크어, 텔링가어, 카르나티어, 중국어, 브라만어 등등 - 이 성경들 때문에 존속된 언어들도 있다.)로 성경을 번역할 수 있게 되었다.
식물학자나 언어학자로 알려진 나의 아버지는 정식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고, 어떤 지위도, 영향력도 없는 한 사람의 구두 수선공에 불과했다. 또 같이 사역했던 워드는 인쇄공이었고, 마쉬만은 직조공이었다. 천한 집안에서 천하게 자란 기계공들이 이방인들 가운데서 복음을 전파하고, 성경을 번역하여 확산시키는 일에 도구로 쓰였던 것이며, 이들은 세상 어느 곳에서 시도되거나 성취되었던 것보다 더 많은 일을 성취했다.
사람들은 이렇게 질문하곤 했다.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그토록 많은 종류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을 할 수 있습니까?" 이에 대한 아버지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도만 한다면 어떤 일도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며,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나아가려는 시도는커녕 자기가 맡은 일조차 꾸준하게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찌 이들에게는 자신의 한계를 바라보고 정당화시키면서 안주하려는 마귀의 유혹과 공격이 없었겠는가? 그럼에도 이백만이 넘는 이스라엘 군대를 이끌고 불 기둥과 구름 기둥을 따라 이집트에서 나온 모세처럼, 카나안 땅을 정탐하고서도 뒤로 물러서지 않고 싸우러 가자고 담대히 말했던 칼렙처럼, 주의 구원하심을 기대하며 병기 든 자만 데리고 필리스티아 진영으로 올라간 요나단처럼, 자신의 좋은 처지에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의 집을 지으려고 준비했던 다윗처럼, 포로의 신세로 예루살렘 재건을 위해 일했던 느헤미야처럼 이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했고, 하나님을 위한 위대한 일을 시도했다. 이것이 그분의 도구가 된 하나님의 사람들의 표가 아니겠는가?
8살에 인도에 온 나는 그분들의 헌신과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열매를 보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성장했고, (나는 마쉬만과 함께 15살 때부터 거리설교에 함께했으며, 성경번역 작업에도 함께했다.) 이제는 그분의 부르심에 따라 버마의 잃어버린 영혼들을 향해 버마로 가고 있다.
물론 나 또한 나의 한계를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분께서 나 같은 사람을 통하여 이루실 위대한 일을 기대하며 멈추지 않고 그분을 위해 수고할 것이다. 그것만이 나를 부르신 그분의 부르심에 바르게 응답하는 길임을 알기에, 그분을 신뢰하며 개척자 정신으로 다음과 같이 외칠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라. 하나님을 위하여 위대한 일을 시도하라!"
공산 치하에서의 믿음의 영웅들과 리차드 움브란트
1살 때 고아가 된 나는 1차 세계대전 기간에 처절한 빈곤을 겪었기에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에는 기쁨이 무엇인지 모르고 지냈다. 나는 유대인이었으나 기독교 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고, 어린 나이에 이미 무신론자가 되었다. 그러면서도 늘 이 세상 어딘가에 진심으로 나를 사랑해 줄 마음을 지닌 존재가 있기를 바랐고, 만약 하나님이 계시다면 나에게 그분의 존재를 나타내야 할 의무가 그분께 있다고 외쳐대곤 했다.
사실 그러한 외침은 내가 겪고 있는 번민을 표출한 것이었다. 그즈음 루마니아의 한 산간 마을의 늙은 목수는 "죽기 전에 유대인을 주님께 인도하게 해 주소서."라고 기도하고 있었는데, 루마니아의 12,000개의 마을 중 우연치 않게 그 목수가 사는 마을에 가게 된 나는 그가 건네준 성경을 읽다가 예수님께 무릎을 꿇었다.
그후 나찌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나는 안수받은 목사는 아니었지만 교회를 인도하고 있었기에 여러 번 그들에게 체포되어 구타를 당했다. 그 때에 많은 소련군 포로들이 루마니아에 끌려왔는데, 소련군 포로와의 첫 만남을 나는 결코 잊을 수 없다.
하나님을 믿느냐는 내 물음에 그는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나는 그런 명령을 받은 적이 없으며, 만약 그런 명령을 받으면 믿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공산주의자들에게 성경의 사실들을 설명하면 그들은 더욱 의아해 한다. 99마리의 양과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에 대해 이야기해 주면 그들은 "어떻게 그 사람이 일백 마리의 양을 소유할 수 있습니까? 협동조합에서 빼앗아 갈텐데요?"라고 되묻는다.
예수님이 왕으로 오셨다고 말하면 "왕들은 다 인민들을 학대하는 나쁜 놈들이니, 예수도 반드시 폭군이겠군요?"라고 말한다. 포도원 농부에 대한 비유를 들려 주면 "농부들이 포도원 주인을 대항하여 나선 것은 잘한 일이지요. 포도원은 협동조합에 속해야지요"라고 대답한다. 공산주의가 인간에게 행한 것은 실로 나에게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나는 나의 조국 루마니아인들뿐만 아니라 공산주의자인 소련군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기로 다짐했다.
공산당은 정권을 잡은 후 교묘히 교회를 핍박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타협의 길을 걷지 않는 참된 교회들은 모두 지하로 숨어들어 갔다. 나는 1948년 2월 29일 지하교회에서 주님을 섬기다가 납치되어 그후 여러 감옥에 있었다. 그들은 나를 고문했다. 내 척추와 뼈들을 부러뜨렸고, 12군데나 칼자국을 냈고, 18군데의 화상 자국을 남겼다. 나는 감옥에서 나온 후 일주일 만에 다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고, 3년 후에 다시 투옥되었다.
나와 내 아내가 잡혀간 후 내 아들 미하이는 길거리에서 방황하는 유랑아가 되었으며, 미하이를 불쌍히 여겨 몰래 도와 주었던 두 자매님들도 잡혀가 매를 맞아 불구자가 되었다.
우리는 죄인이 아닌 죄인이 되어, 안쪽에 톱날이 선 족쇄로 채워졌다. 거꾸로 매달아 채찍으로 때리는 고문 정도는 예사이다. 나는 지금도 냉장고 문을 열기를 꺼리는데, 속옷만 입고 냉동실에 끌려갔던 고문의 후유증 때문이다. 냉동실에 들어간 우리는 얼어 죽을 것 같으면 다시 따뜻한 방으로 옮겨졌고, 몸이 풀리면 다시 냉동실에 잡아 넣는 고문을 반복적으로 당했다. 더 이상의 것들은 차마 언급할 수조차 없다.
후르레스끄라는 성도는 죽도록 매를 맞았다. 그리고서 붉게 달아오른 쇠갈고리와 칼로 고문을 당한 후, 굶은 쥐들을 감방에 넣어 잠을 자지 못하도록 했다. 2주일 내내 밤낮 없이 선 채로 그가 고문받은 이유는 동역하는 성도들을 배반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가 굴복하지 않자, 그들은 14살 난 그의 아들을 데려다 그 앞에서 사정 없이 채찍질하기 시작했다.
"아들아, 나는 이들에게 말해야 되겠다. 나는 더 이상 차마 볼 수가 없구나." "아버지, 저는 주님을 파는 아버지를 원하지 않습니다. 끝까지 견디십시오. 만약 이들이 나를 죽인다면 나는 예수님과 조국을 위해 죽겠습니다."
악에 찬 간수들은 소년을 그 자리에서 때려 죽였다. 감방벽은 붉은 피로 물들었고, 소년은 주님을 찬양하며 숨을 거두었다. 공산주의자들은 고문과 회유를 통해 밀고자가 되게 하기도 하고, 밀고자들의 "밀고자"가 되도록 제안하기도 하며, 심지어 동료 그리스도인이 다른 그리스도인의 고문자가 되게 하는 극악한 방법까지 동원했다.
그러나 감옥에 갇힌 그리스도인들은 단순히 고문을 견디어 내는 것만이 아니라 그 안에서도 끊임없이 주님을 증거한다. 한 형제가 감방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을 때 갑자기 간수들이 나타나 고문실로 끌려갔다가, 피투성이가 된 채로 돌아왔다. 정신을 차리자, 그 형제는 서서히 몸을 일으켜 옷 매무새를 바로하며 그들에게 "여러분, 내가 아까 어디까지 전했습니까?"라고 물으며 다시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지하교회만이 공산주의자들에게 남아 있는 유력한 저항세력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을 감옥에는 집어 넣을 수 있지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없앨 수 없음을 알기에 더 철저히 성도들을 핍박했다. 우리를 핍박하던 공산주의자들이 후에 감옥에 끌려 들어오기도 한다(자신들끼리마저도 증오하는 공산당의 종교는 "증오"이다). 그러면 일반 죄수들은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났다며 그들을 구타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구타당할 위험과 공산당과 한편이라는 오해를 받으면서도 그들을 저지시킨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일주일에 한 조각의 빵과 자신의 생명을 건질 수 있는 약을 이전의 핍박자들이었던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다.
우리는 우리를 채찍질하는 간수들을 바라보며 그들이 빌립보의 간수들처럼 "내가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진정으로 그들이 묻게 되기를 바랐고, 또 간절히 기도했다. 실제로 우리를 고문하고 핍박하던 많은 공산주의자들이 우리를 통해 예수님을 영접하고 우리와 같은 처지에 기꺼이 처해졌다.
서방 교회의 "일부" 지도자들은 예수님께서 원수들도 사랑해야 한다고 하신 말씀으로 공산주의자들과의 연합과 교류를 정당화한다. 그런 종교 지도자들은 순교자들에게 관심이 없다. 오히려 내가 서방에 간 후(14년 복역후 1965년 12월, 나는 가족들과 함께 지하교회를 서방에 알리기 위해 루마니아를 떠났다.) 방문한 신학교들에서 더욱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다. 어떤 신학교들에서는 창세기에 관한 내용이 거짓이고, 노아의 홍수 그리고 모세의 기적들도 실제 일어난 일이 아니며, 동정녀 탄생도, 예수님의 부활도 전설에 불과하다고 가르치는 것이었다.
그들의 관심은 오히려 교회 종파의 역사나, 예수님의 뼈가 어느 고장의 무덤에 있다든지 하는 것들에 불과했다. 실로 하나님이 죽었다고 가르치는 그들은 예수님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숲속에 모여 때로는 낮에 때로는 밤에 비밀 예배를 드렸고, 그 예배후에는 성도들이 감옥에 갇히는 일도 많았다. 그러나 지하교회는 모두 진지한 믿음을 소유했는데, 그들이 지닌 믿음은 커다란 핍박과 생명의 위협까지도 의미했다. 지하교회는 때로 "공산주의" 서적(몇 페이지만 공산주의 내용을 싣고 그 뒤에는 복음이 적혀 있는)을 행사장들에서 판매하기도 하고, 때론 거리에서와 공산당 간부들에게 공개적으로 복음을 전하기도 한다. 그런 그들의 결의와 소망은 이와 같다.
"복음 전파에 필요한 것들을 우리에게 지원해 주십시오. 복음을 전하는 대가는 우리가 치르겠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오직 젊은 세대들을 무신론의 독뿌리에서 구해낼 성경입니다. 우리에게 도움을 주십시오. 우리에게 성경과 복음 책자 등을 지원해 주십시오. 복음은 우리가 전하겠습니다." "핍박받는 성도들과 그 가족들을 기억해 주십시오... 그들은 굶주림과 헐벗음으로 고통에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바로 여러분의 사랑하는 형제이며, 지체가 아닙니까?"
이런 지하교회의 메시지를 전하던 나는 꿈에 그리던 고국으로 다시 돌아왔고, 믿음의 영웅들과 재회했으며, 자신들의 잘못을 회개하고 돌아선 그리스도인들을 세우고 다시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고 있다.
대중 매체들은 메시지를 공산주의 체제가 이미 완전히 전복되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선전한다. 그러나 중국의 11억, 소련의 2억 8천만 그리고 베트남, 쿠바, 에디오피아, 앙골라, 짐바브웨, 북한 등을 포함해서 아직도 인류의 3분의 1을 지배하는 것이 공산주의이다.
모세, 느헤미야, 다니엘, 에스더, 이사야 같은 사람들이 우리의 앞서간 사람들이 되어 주었다. 나는 공산주의 치하의 핍박과 고문 속에서 주님을 섬겨 온 우리 지하교회 성도들이 상황이나 환경에 타협하지 않은 유일한 사람들이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여러분이 특별히 공산 치하의 성도들을 잊지 않기를 기도하며, 더불어 그들이 여러분이 싸우고 있는 믿음의 선한 싸움에 도전이 되기를 소망한다. 죽기까지 신실하게 주님을 섬기지 못할 상황은 없기 때문이다.
위대하신 주인의 종, 허드슨 테일러
영국에서 지구의 반을 돈 지점에 위치한 중국은 광대한 제국으로서, 영국의 면적의 100배나 되고, 지구 표면 중 사람이 살 수 있는 부분의 10분의 1을 차지하며, 이미 1세기 초기에 화약과 종이를 발명했고, 인쇄술이 일찍부터 발달한 나라였다. 그러나 중국인들의 사상은 유교와 도교와 불교의 지배를 받았고,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 대신 조상을 숭배하고, 영적 존재들(여러 잡신들)을 섬기던 민족이었다.
그러나 우리 중국 민족에게도 복음을 전해 주시고자, 작은 키에 변발을 하고 중국인 의상을 입은 청회색 눈을 가진 중국인 아닌 중국인, 60년도 넘는 세월을 오직 중국의 영혼들을 위해 일했던 허드슨 테일러(J. Hudson Taylor)를 준비하사 보내 주셔서 사용하신 그의 위대하신 주인을 찬양한다.
카톨릭 "선교사"가 아닌 선교사는 아무도 중국에 발을 들여 놓지 못한 채 19세기를 맞이했던 중국 땅을 위해 준비된 허드슨은, 평신도 설교자이자 약사였던 그의 아버지 제임스 테일러의 영향으로 어렸을 때부터 중국에 주목하게 된다. 이후 17세에 복음서적을 읽다가 구원받은 허드슨은 자신을 중국으로 부르셨다는 강한 확신 속에서 선교사로서의 구체적인 준비와 훈련에 들어갔다.
허드슨에게는 중국어 사전도 문법책도 없었고, 단지 만다린어(중국의 표준어)로 된 누가복음서가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사전을 만들어 가면서 중국어를 공부했다. 그는 중국에서의 고된 생활에도 대비하기 위해 푹신한 침대 같은 편안한 것을 스스로 걷어 치웠다. 그는 고생스러운 생활을 견디는 것뿐만 아니라 적은 비용으로 살아 가는 법을 익힐 수 있도록 자신을 훈련했다. 실제로 그는 의사로서 준비하는 동안 오직 하나님께만 자신의 필요를 아뢰고 하나님을 통하여 사람을 움직이는 "영적 근육들"을 더 강건케 하고자 애썼다. 중국으로의 부르심은 그에게 꿈이나 낭만이 아닌 현실적인 헌신과 준비였다.
그 당시 중국에서 기독교의 신앙을 받아들였다는 홍수전이 청(淸) 왕조에 대한 반감을 표출하여 주도한 태평천국의 난을 맞이하자, 중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준비하던 허드슨은 왕립의과대학 회원 자격을 포기하고, 중국인들을 예수님의 발 앞에 인도하기 위해 1854년 22세로 중국 땅에 첫발을 내딛게 된다.
그러나 허드슨을 중국으로 보낸 CES(Chinese Evangelization Society)는 사역의 지원에 있어 서툴고 미비했다. [이것은 후에 허드슨 자신이 세운 CIM(China Inland Mission)의 사역의 관리가 중국에서 이루어지도록 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나중에 CES는 빌려온 돈으로 선교사들을 지원했다가 해체되었다.
허드슨은 젓가락 사용을 익히면서 유럽식 습관들을 버리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머리와 복장까지도 중국인들처럼 입었다. 영국인 상인 공동체나 선교사 공동체에서는 그것을 '우등 민족'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것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그는 양복을 입으면 눈에는 잘 띄지만 그들의 마음에 다가가기 어렵고, 그들의 복장을 하면 눈에는 띄지 않지만 그들에게 훨씬 더 영향력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복음을 들고 간 선교사로서 우리 중국인들을 이해하고 다가오려고 했던 사람이었다. 테일러가 만약 아프리카에 갔어도 최선을 다해 그들처럼 생활했으리라! 이러한 우리 중국인과 같은 차림은 나중에 CIM의 규정이 되었는데, 이 선교회의 별명은 "변발 선교회"였다.
그렇게 중국인들에게 다가서려고 했으나, 죄인들은 그렇게 쉽게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선교사들을 "백귀"라고 부르는 것은 예사였고, 그들을 "예수교 산적 패거리"로 지칭하기도 했다. 병원에서 죽어 가는 사람들의 눈알을 도려 내고, 어린 아이들을 잡아먹으며, 아이밴 여자의 배를 갈라 그것으로 약을 만드는 괴벽이 있다고 선전했고, 이에 흥분한 사람들은 선교 건물을 불태우기도 했다.
비난과 모함은 중국인들에게서만이 아니었다. 영국 하원의 한 공작은 선교 건물의 방화 사건을 계기로, 영국 무역의 이해 관계에 손해를 미칠 수 있다는 이유 때문에 내륙까지 가서 위험을 무릅쓰고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들을 "광신자"로 몰아붙였다.
그러한 대우는 다른 선교회는 연 700달러까지 지원해 주었지만, 그에 비길 수 없는 년 80달러의 후원을 받으면서도 기회가 닿는 대로 어떤 선교사도 하지 않으려고 한 일, 즉 중국 내륙에 복음을 전하는 일을 했기에 받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끊임없이 1858년 천진조약과 1860년 북경협정으로 중국 내륙의 자유와 기독교의 자유를 구체적으로 보장받기 전에도, 위험을 무릅쓰고 내륙으로 가서 설교하고 성경과 책자를 배포하곤 했다.
그는 복음이 들어가지 못한 성(省)들에 24명, 100명, 1,000명의 선교사들을 보낼 목표를 세워 중국땅을 누벼 나갔다. 그러한 전도 여행 내내 배 안에서나 해안에서나 찻집에서나 거리에서나 사찰에서나 사람이 모인 곳이라면 어디서나 구원의 복음이 선포되는 시간이 되었다.
그렇다. 아무도 중국 내륙까지 와서 잃어버린 중국의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위험을 무릅쓰지 않았다. 다른 선교사들은 안전하고 큰 도시인 상해에 주로 머물렀다. 그들은 모두 많이 교육받았고, 또 영국 국교회나 혹은 크고 안정된 선교회들과 연결되어 있었다. 당시 상해에서 호화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었던 유럽인들의 풍습대로, 심지어 선교사들 가운데도 "세상적인"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정부 관리로부터 통역관으로 일해 달라는 요청들을 받고 있었고, 외국인 보호를 위해 주둔한 함대들의 장교들과도 자주 접촉했다. 이런 "선교사들"은 잃어버린 영혼들이 그리스도와 만나게 하는 복음전파의 자리에 의료나 교육을 두려는 우를 범하기도 했다.
중국의 영혼들을 향한 그의 열정이 단순한 낭만적인 감정이었다면, 내륙 사역의 고된 노동과 그치지 않는 곤한 시련들 속에서 곧 시들고 말았을 것이다. 또 질병, 안락하지 못한 환경, 과로, 사랑하는 아내와 가족들과의 사별이 다가올 때 무릎 꿇고 주저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영혼들을 향한 그의 전진은 뒤로 물러남이 없었다.
1900년 반외세 운동이었던 의화단의 난으로 수난을 겪은 주요 인물들은 주로 선교사들과 중국인 그리스도인들이었다. 130명이 넘는 선교사들과 50명이 넘는 선교사들의 자녀들이 목숨을 잃었는데, 그중 CIM은 58명의 선교사와 21명의 선교사 자녀를 잃었다. 그러나 CIM의 선교사들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생명의 면류관을 받기에 합당한 자로 여겨 주신 것을 그분께 받은 과분한 영광으로 여겼다.
또 값을 치른 것이 적을수록 값어치가 적다는 말처럼, 그들은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과의 사별이나 긴 이별 같은 커다란 대가들을 지불했지만, 한 영혼이 온 세상보다 귀하다는 것을 믿었다(그 당시의 중국인들은 그리스도 없이 한 달에 "백만" 명씩 영원한 저주로 향하고 있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이 사는 곳이 온 세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까마득히 잊은 채 편안히 안주한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원하는 만큼만 주님께 드리고 있다면, 과연 우리의 주인은 누가 되는 것인가? 우리가 우리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을 그저 우리게에 빚진 분, 우리의 그 작은 호의에 감사해야 할 분, 우리가 그분의 뜻에 따라 주는 것을 고맙게 여겨야 할 분으로 만드는 것이다.
허드슨 테일러, 그는 중국의 영혼들을 향한 주님의 부르심에 신실하게 응했던 사람이었다.
숙고해 보라. 바로 눈 앞에 있는 사람들조차도 우리가 전하지 않는 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을 수가 없는 상황에서, 주님의 지상 명령에 온전히 순종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주인이신 그분의 뜻을 받아들인다면, 우리 각자는 무엇으로 그분의 위대하심을 나타낼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 한 사람, 마틴 루터
유다의 요시야 왕(B.C.640) 치리 당시에 하나님의 택함받은 백성 이스라엘의 상태는 이러하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거룩하신 분의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 했던 주의 전 외에도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주위에 많은 산당들을 세웠다. 거기서 그들은 바알과 태양과 달과 행성들과 하늘의 모든 군상들에 분향했다. 그 일은 우상을 섬기는 사역에 부름받은 "제사장들"의 몫이었다(그들의 생활은 어쩌면 그 당시 주의 제사장들보다 더 풍성하고 부유했으리라!).
그 어리석은 백성들은 솔로몬이 세운 전통에 따라 시돈인들의 아스토렛과, 모압인들의 크모스와, 암몬 자손의 밀콤을 위하여 세운 산당들에서도 분향했기 때문에, 제사장들의 관심사는 어느 신(god)의 제사장이 되는 가였으며, 그것은 제사장 학교 시험 순위에 따라 결정되었다.
백성들 사이에 동성애가 늘어나면서 주의 전 곁에도 남자 동성애자들의 집이 자리잡았다. 백성들은 자기 딸이나 아들을 불로 통과하게 하여 몰렉에게 바침으로써 앞다투어 자기의 "믿음과 헌신"이 아브라함에게 비김을 증명하고자 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은사"를 받았다고 자랑하는 신접한 자들과 마술하는 자들을 찾아가 그들의 "앞 일"을 예언받고 그들에게 "헌금봉투"를 건네는 일도 다반사였다고(왕하 23장, 대하 34장).
하나님을 섬기고자 수도원에서 들어갔던 나와 내 친구 마틴이 사제가 되었을 당시 독일의 상황도 이러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카톨릭 교회에 속했다. 황제와 제후들 이하 모든 사람들이 그 교회가 베푸는 세례를 받고 지상에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교회"의 회원이 되었다. 매주 미사에 참석해서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한 빵과 술을 먹고 마시며, 금식과 철야와 기도와 갖가지 고행을 통해 구원에 이르도록 노력했다. 그러한 일들로도 마음의 평안이 없을 때는 고해 신부를 찾아가 자신의 양심을 괴롭히는 일들을 털어 놓고 용서받으면 되었다.
단지, 하나님께서 지상에서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을 주신 그리스도의 대리자 교황을 주심을 감사할 뿐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지옥불 가운데서 고통당하고 있는 먼저 죽은 가족의 면죄부를 통해 용서되었으니 말이다.
내 친구 마틴은 광부였던 아버지 한스 루터와 어머니 마가레타 사이에 태어났다. 어느 날(1505년 7월) 부모님을 만나 뵙고 학교로 돌아오던 길에 벼락을 맞아 나뒹굴면서 그는 광부들의 수호신 성 안나에게 수도사가 되겠다고 서원하게 되었다. 그 서원대로 수도사가 된 마틴은 구원받기 위해 있어서 카톨릭 교회가 제시한 일이라면 남김없이 실천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죄인이 마음의 평안을 얻는 것은 쉽지 않았다. 더욱 철저히 금식하고 고행하며 기도할수록 거룩하신 하나님은 더 멀리 계신 것처럼 느껴졌다. 아무리 노력해도 죄인의 죄는 씻어지지 않았다. 카톨릭 교회는 죄인들이 다른 성자들의 공로를 전가받을 수 있다고 가르쳤다. 사실 어떤 교황은 살아 있는 자들과 죽은 자들 모두가 면죄를 받으면 연옥에 가서까지 덕을 보는 것으로 장담했다.
그리고 죽어서 연옥에 가 있는 자들은 이미 그들이 지은 죄의 집계가 끝나 있으므로 당장에라도 빼내올 수 있다고 했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친구들이 연옥에서 여러분에게 외치는 소리를 들어 보십시오. '우릴 좀 살려 줘, 제발 좀 살려다오. 이 지긋지긋한 고문, 너희들의 잔돈 몇 푼이면 여기서 벗어나고도 남을 텐데.' '널 낳아 길러 준 우리가 아니냐? 네게 유산까지 남겨 주었는데 그렇게 박절하고 잔인하게 몇 푼 아끼려고 우리를 이곳에 그냥 둘 셈이냐? 여기 이 불 속에 있게 내버려 두겠느냐? 이 면죄부를 받지 않으시렵니까? 귀중하고 불멸하는 한 사람의 영혼을 고향 낙원으로 보내는데 단돈 금화 4분의 1입니다."
그러나 알고 보니 로마 카톨릭 교회는 자금이 필요할 때 엄청난 이자를 주고 돈을 빌려 쓰고서 후에 이 빚을 갚기 위해 면죄부를 발급했던 것이다. 사실 교황이 면죄부를 발급해서 죄인들을 구출할 수 있다면, 죄인들 모두를 구출하지 않는 그의 처사는 너무 잔인한 것이다.
루터는 어느 계기로 로마로 여행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빌라도의 계단을 하나씩 오를 때마다 주기도문을 외우고 계단에 입맞추면서 할아버지 하이네를 연옥에서 끌어내 주고자 했던 마틴에게 갑자기 이런 질문이 떠올랐던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효과가 있다는 것을 누가 알지?"
하나님을 두려워했던 요시야 왕에게 주의 전에서 발견된 율법책이 그의 손에 주어졌다. 요시야 왕이 그 율법책을 펴서 읽게 하자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명령이 적혀 있었다. "...너희는 다른 신들, 즉 네 주위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따르지 말지니(신 6:14; 8:19)... 가서 다른 신들을 섬기고, 그들을 경배하거나, 내가 명령하지 아니한 태양이나 달이나 하늘의 군상들에게 경배하여, 그 사실이 네게 알려져... 곧 그러한 가증함이 이스라엘에서 행해진 것이 확인되면... 그 남자나 그 여자를 돌로 쳐서 죽일지니라(신 17:3-5)... 너는 네 씨 중의 누구도 몰렉에게 주어 불을 통과하게 하지 말 것이며(레 18:21)...나는 주니라. 너는 여자와 함께 하듯 남자와 동침하지 말라. 그것은 가증함이니라(레 18:22)... 또 돌이켜서 신접한 자들과 마법사들을 따라, 그들과 음행하는 혼은 내가 그 혼을 외면하여 그의 백성 가운데서 그를 끊으리라(레 20:6)."
루터는 성경 교수가 되면서 시편에 이어 바울의 로마서를 강의하고자 성경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이 연구가 루터에게는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이 되었다. 루터가 성경을 펴자 다음과 같은 말씀들이 있었다. ".... 이는 율법의 행위로는 아무 육체도 의롭게 될 수 없음이라(갈 2:16)... 너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2:8,9)...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시라(딤전 2:5-6)... 내가 내 죄를 주께 시인하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나이다. 내가 말하기를 '내가 내 죄과들을 주께 자백하리이다.' 하였더니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용서하셨나이다(시 32;5)...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인하여 이제 우리를 구원하는 모형이니, 곧 침례라. (이것은 육체의 더러움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응답이라.)(벧전 3:21)... 이는 우리 모두가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나아가서, 선이든지 악이든지, 각자가 자기 몸으로 행한 것들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라(고후 5:10)..."
요시야 왕은 그들이 믿고 섬겨왔던 그들의 "주"인 우상들의 형상과 제단을 깨뜨리고, 불사르고, 더럽히며, 허물고, 폐하고, 제거하기 시작하였다.
드디어 루터는 성베드로 성당을 짓기 위해 면죄부를 파는 자들 앞에 95개 조항을 내걸었다. 성경에서 발견한 진리들에 관해 책자들을 써서 널리 알리기 시작했다. 그 소책자들에서 교황도 잘못을 저지를 수 있고 교회 회의도 잘못을 저지를 수 있으며 오직 성경만이 최종적인 권위라는 점을 강조했다.
"교황이 성경보다 위라는 점에 나는 반대하네. 누가 그에게 그런 권위를 주는 것인가? 그의 근거는 성경에 없고, 그의 교서는 단 한 번도 성경에 근거한 적이 없다네. 아첨꾼들이 교황을 성경 위에 올려 놓고 잘못을 저지를 수 없는 사람이라고 우겨대지만, 그렇게 되면 성경은 사라지고 남는 것은 인간의 말뿐일세."
시간이 흐를수록,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하나님 아버지께 그처럼 헌신해 온 교황이 결국은 그리스도의 큰 원수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끔찍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알고 있는 라틴어 성경이 틀리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라움을 금하지 못하게 되었다.
고해 성사를 뒷받침하는 마태복음 4:17이 라틴어 성경에 "고해하라"(do penance)로 되어 있지만, 에라스무스의 헬라어 성경에는 "회개하라"(be penitent)로 되어 있었다. 마틴에게 있어서 이것은 너무나도 선명한 발견이었다. 헬라어 성경에 따르면 카톨릭의 많은 성사 중의 하나의 근거가 없어지는 것이었다.
또 그들이 연옥의 근거로 제시하는 마카비후서(12:45)는 구약의 외경이었다. "마카비서는 정경이 아니며, 외경이네, 따라서 거기에 근거를 줄 수는 없네. 외경에도 권위를 주기 시작한다면 인간의 모든 책에도 동일한 권위를 주어야 하지 않겠나."
마틴을 반대하는 어떤 사람도 성경을 근거로 말하지 못했다. "'나는 반대한다. 나는 부정한다.'는 식으로만 시종 일관한다면 어느 멍청이, 어느 나귀, 어느 통나무라 할지라도 누구든지 정죄할 수 있지 않겠나? 단지 자신의 근거없는 말만으로 성경의 무기고를 습격할 수는 없지."
그는 이 세상에 둘도 없는 가장 큰 이단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단"들의 동조자가 되었다. 그 당시 이단으로 정죄되었던 위클리프와 후스의 영향 아래 있던 보헤미아 형제들의 주장을 복음적인 것으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드디어 마틴은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시장이나 거리에서나 일반 사람들이 사용하는 독일말로 표현된 하나님의 말씀을 갖게 된 것이다(1522년에 신약을 번역했고, 1534년에 완역하여 <루터 성경>을 내놓았다).
마틴은 다른 사람들의 순교와 자신의 생명의 위협 속에서도 카톨릭 교회와 교황의 비성경적인 교리들을 담대히 드러내었다. 그러나 그것이 그의 목적의 전부가 아니었다. 사람들이 마틴을 앞세워 폭력을 사용하려고 했을 때이다. "악한 대상을 없앤다고 그 악습이 사라질 것으로 상상하지 말게나. 성급함과 횡포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결여되어 있다는 증거일 뿐이네. 나는 계속해서 기도하고 설교할 걸세."
물론 모함하는 어떤 사람들은 그를 "기회주의자 박사님"으로 불렀다. 그러나 그는 이 세상을 새롭게 하려는 개혁을 원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성경적인 믿음으로 돌아오고자 하였던 것이다. "세상과 대중은 그들이 비록 세례를 받고 이름으로는 그리스도인이라 불린다 할지라도 여전히 비그리스도인이요, 언제나 그럴 것이네. 따라서 하나의 전체 공동체나 세계를 복음으로 다스리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한 우리 안에 늑대, 사자, 독수리, 양을 집어 넣는 목자나 다름없네."
그는 자신들의 대적자들에게 부지런히 성경으로 논박했지만 여전히 그의 일은 묵묵히 계속해서 설교하고, 성경을 가르치고 진리를 널리 퍼뜨릴 책을 쓰는 일이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에 대해서도 진리에 대해서도 알지만 그것을 온전히 따르지 않는 자들이 더 많다. 그러나 내가 주 안에서 자랑하는 내 친구 마틴은 이와 같은 고백을 남겼다. "여기 제가 확고부동하게 서 있습니다. 나는 달리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여, 이 몸을 도우소서."
"이 땅에 마귀 꽉차서
우리를 삼키려하나 겁내지 말고
싸워라 진리로 이기리로다.
친척과 재물과 명예와 생명을
원수가 취해도 두려워말지라
주 말씀으로 이기리.
하나님 말씀 능력이
이 세상 권세 이기네.
주 성령 우리 안에서
큰 능력 채워 주시네.
이 몸을 온전히 주님께 맡기면
이 몸은 죽어도 큰 영광 보리니
그 나라 무궁하도다."
그가 확고부동하게 서서 물러서지 않으려고 했던 곳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내 친구 마틴 루터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안에서 죄인들을 바른 구원의 길과 바른 섬김의 길로 인도해 주었다. 나는 아직도 사랑어린 내 친구 마틴의 음성을 듯는 듯하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의견과 성경의 진리가 서로 반대된다면 자네는 어떻게 하겠나? 자네는 그 대가가 무엇이라도 기꺼이 그 대가를 치를 준비가 되어 있는가? 진리의 길에서 살아 계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길 마음이 있는가? 그렇다면 먼저 진리를 고백하게. 그리고 진리를 따라 나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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