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낭트 칙령의 폐지와 프로테스탄트들의 죽음
교회사-2 (폭스의 순교사)
1. 순교사의 서곡
2. 초기에 행해진 열 차례의 박해 Ⅰ
3. 로마 교회에 의한 박해
4. 성 바돌로메 대학살
6. 종교 재판
7. 포루투칼과 스페인에서의 박해
8. 이탈리아에서의 박해
9. 존 위클리프의 생애와 박해
10.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화형장의 존 후스"
11. 프래그의 제롬에 대한 박해
12. 마틴 루터의 생애와 박해
13. 윌리엄 틴데일의 생애
14. 메리 여왕 통치 기간 중 화형 당한 순교자들
15. 아일랜드에서의 프로테스탄트의 생성과 발전
16. 프랑스 남부 지방에서 있었던 박해
1. 순교사의 서곡
마태복음(16:16)에서 우리 구주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시몬 베드로로부터 {주는 그리스도, 곧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고백을 들으신다. 다른 누구보다도 베드로는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인식했으며, 그분의 아버지 안에 있는 비밀스러운 구원의 손길을 감지했다. 주님께서는 그를 베드로라 이름지었으며, 반석이신 자신 위에 교회를 세우셨다. 그리고 그 교회는 강력한 것이어서 음부의 문이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세 가지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첫째,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교회를 세우실 것이다.
둘째, 그 교회는 세상으로부터뿐만 아니라 모든 음부의 최고 능력과 권세로부터도 강력한 박해를 받을 것이다.
셋째, 그 교회는 마귀와 그의 원한으로 인한 극악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유유히 계속될 것이다.
우리는 놀랍게도 그리스도의 이 예언이 적중되었음을 알고 있으며, 오늘날까지 교회가 거쳐온 모든 발자취는 이 예언된 말씀을 확증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아님을 보여 주고 있다.
첫째, 두말할 나위 없이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세우셨다.
둘째, 이 세상의 귀족들과 왕들, 군주들, 통치자들, 지도자들은 공개적이든 음성적이든 자신의 모든 권력과 교활함을 동원하여 교회를 박해하는 데 자신을 헌신하다시피 하였다.
셋째,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교회는 그것을 견뎌 내고 있으며, 지탱해 오고 있다.
1. 스테판(Stephen)
스테판은 첫 번째로 순교당한 사람이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배반자들과 살인자들에게 신실하게 복음을 전했으며, 이것이 그의 죽음을 야기시켰다. 죄의 찔림으로 흥분한 유대인들의 광란적 반응은 그를 성읍 밖으로 내몰아 돌로 쳐죽이기에 이르렀다. 스테판이 박해받았던 때는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던 이듬해의 봄인 오순절 시기였다고 추정되며, 이 견해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 사건 이후 즉시,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또는 선지자로 고백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대 박해가 가해졌다. 이 사실은 누가가 사도행전에서 {그 때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가해졌으니, 사도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유대와 사마리아 전 지역으로 흩어지더라.}(행 8:1)고 기록한 것을 보면 즉시 알 수 있다. 일곱 집사 중 한 명이었던 니카놀을 포함한 약 2천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스테판에 의해 일어난 박해" 기간 중에 순교당했다.
2. 야고보(James)
그 다음 우리가 만날 순교자는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이다. 그는 요한의 형제이며, 예수님의 친척이기도 하다. (그의 어머니와 마리아는 종자매이다). 야고보의 순교는 스테판이 죽은 후 약 10년이 채 지나지 않아 일어났다. 이는 헤롯 아그립파가 유대의 총독으로 임명되자마자 유대인들에게 환심을 얻을 목적으로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매서운 박해를 가하기 시작했을 때였다.
3. 빌립(Philip)
그는 갈릴리 벳새다에서 태어났으며 최초로 "제자"로 불린 사람이다. 그는 북아시아(Upper Asia)에서 신실하게 주를 섬겼으며, 프리기아의 헤리오폴리스에서 순교당했다. 그는 채찍에 맞았으며, 감옥에 갇힌 후 A.D. 54년에 십자가에서 처형되었다.
4. 마태(Matthew)
마태는 세리였으며, 나사렛에서 태어났다. 그는 파티아와 에디오피아에서 사역을 하였고, 에디오피아에서 박해받았으며 A.D. 60년 나다바에서 미늘창으로 살해당하였다.
5. 작은 야고보(James)
작은 야고보는 예수님의 형제이다. 그는 예루살렘 교회의 감독이기도 하다. 94세 때 그는 유대인들에게 구타당하고 돌로 맞아, 결국 뇌에 손상을 입고 순교했다.
6. 맛디아(Matthias)
맛디아는 다른 대부분의 제자들보다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유다 이스카리옷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임명되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돌매질을 당하였으며 후에 참수형을 당하여 순교했다.
7. 안드레(Andrew)
안드레는 베드로의 형제이며, 많은 아시아 국가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였다. 에데사에에서 붙들려 십자가에서 처형되었는데, 땅에서 십자가의 두 끝을 수직으로 못박혀 죽었다.
8. 마가(Mark)
마가는 레위 족속의 유대인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마가는 알렉산드리아 사람들에 의하여 그들의 우상인 세라피스를 기리는 웅장한 종교 의식을 할 때 순교당하였다. 그는 무자비한 처형 방법으로 몸이 찢기며 그의 생을 마감하였다.
9. 베드로(Peter)
다른 많은 성도들 가운데서 복받은 제자인 베드로는 죽음을 선고받아 십자가에서 처형당했다. 제롬은 베드로의 죽음에 관하여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베드로는 머리가 땅으로, 다리가 위를 향하는 자세로, 즉 거꾸로 십자가에 못박혔다. 그는 이렇게 주님과 같은 자세로 죽을 만큼 자신이 고귀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10. 바울(Paul)
처음에는 사울이라 불렀던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숭고한 희생과 말할 수 없는 수고를 치룬 후, 역시 네로의 박해 아래서 순교하였다. 압디아스(Abdias)는 진술하기를, 네로가 바울에게 처형을 선고하기 위하여 그의 병사 네레가(Nerega)와 파테미우스(Parthemius)를 보냈다고 한다. 그 두 병사는 바울에게 오면서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바울이 자신들을 위해서 기도해 줄 것을 소원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리스도를 믿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곧 자신들이 그리스도를 믿고 예수님의 무덤 가에서 침례받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 일이 있은 후에 그 병사들은 바울을 마을 밖 사형 집행장으로 끌고갔으며, 그곳에서 바울은 기도를 마치고 칼에 목이 베여 순교당했다.
11. 유다(Jude)
야고보의 형제이며 다대오(Thaddeus)로 불렸다. 그는 A.D.72년 에데사(Edessa)에서 십자가형을 받았다.
12. 바돌로매(Batholomew)
바돌로매는 여러 나라에서 복음을 전파하였다. 그는 오랫동안 잔인하게 폭행당하였으며, 포악한 우상 숭배자들에 의하여 십자가에서 처형당했다.
13. 도마(Thomas)
도마는 디두모(Didymus)라고 불리며, 파티아와 인도에서 복음을 전했고, 이곳에서 이교도 제사장들을 격노케 하였다. 그래서 그는 창으로 몸이 관통되어 죽었다.
14. 누가(Luke)
누가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기록자이며 복음 전파자이다. 그는 바울과 함께 많은 나라에서 선교하였으며, 그리스의 우상 숭배 제사장들에 의하여 올리브 나무에 목이 매달려 순교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15. 시몬(Simon)
시몬의 다른 이름은 젤로(Zelotes)이다. 그는 아프리카 마우리타니아(MAuritania)에서 복음을 전파했으며, 영국에서도 선교하였다. A.D. 74년에 그는 영국에서 십자가 처형을 당했다.
16. 요한(John)
이 "사랑받는 제자"는 큰 야고보(James the Great)의 형제이다. 에베소로부터 로마로 강제 송환 명령을 받았으며, 그곳에서 기름이 끓는 솥에 던져지는 형을 받았었다. 그러나 기적적으로 피해 달아나는데 성공했다. 그 후 도미티안(Domitian)은 그를 팟모 섬으로 추방하였고, 요한은 그 곳에서 "요한계시록"을 기록하였다. 도미티안이 후계자인 네르바가 요한을 재송환하였다. 그는 사도들 중에 유일하게 참혹한 죽음을 피한 사람인 셈이다.
17. 바나바(Barnabas)
바나바는 사이프러스(Cyprus) 출신이며, 유대인 자손이다. 그는 약 A.D. 73년경에 순교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같이 계속되는 모든 박해와 끔찍한 처형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매일 성장하였고, 사도들과 사도직분을 수행했던 형제들의 가르침 안에 깊이 뿌리를 내렸으며, 그 위에 성도들의 피가 풍성한 자양분이 되어 주었다
2. 초기에 행해진 열 차례의 박해
1. 네로(Nero) 통치 하에 가해진 첫 번째 박해(A.D. 67)
교회에 대한 첫 번째 박해는 로마의 여섯 번째 황제인 네로가 통치한 67년경에 일어났다. 이 군주는 그 지역을 통치하여 5년 동안에 걸쳐 교회를 핍박했다. 그는 자신을 꽤 괜찮은 사람으로 생각하였으나 누구에게도 견줄 수 없는 도를 지나친 성미와 가장 잔인한 야만적 기질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악마적인 변덕스러움 가운데서도 가장 극악무도했던 것은 로마를 방화하였던 그 사건을 꼽을 수 있다. 그는 로마 시를 방화하라고 명령하였고, 이 명령은 그의 수하에 있던 부하들과 군인들에 의해서 집행되었다. 로마제국의 수도가 불타고 있는 동안 그는 마케나 탑에 올라가 하프를 연주하며 '불타고 있는 트로이'라는 시를 읊고 있었다. 그는 또 자주 자신이 '죽기 전에 모든 것을 파괴하고 싶다'고 말하곤 했다. 귀족적인 대 건축물인 컬커스 외에도 다른 많은 궁궐들과 가옥들이 전소되었다.
이 무시무시한 화재는 9일 동안 계속되었다. 그런데 네로는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비난의 소리가 확산되고 자신에 대한 좋지 못한 평판이 높아지자 책임을 피하기 위해 화재의 책임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돌려 새로운 잔인성을 보여 주었다. 이런 일은 첫 번째 박해 때 발생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을 괴롭히던 그 야만성은 오히려 로마 시민들의 빈축을 사기도 하였다. 네로의 포악성은 더해갔으며 악마적인 상상력으로 그리스도인들을 처형하는 갖가지의 방법들을 고안했는데, 그것은 가히 상식을 초월하는 것들이었다. 그는 야수들의 가죽을 벗겨 꿰매 맞추어 입고 개들을 괴롭혀 죽게 하는가 하면 왁스를 먹여 굳어진 옷을 입은 사람을 굴대에 고정시켜 놓기도 했고, 궁전의 정원을 밝히기 위하여 정원을 방화하기도 하였다. 이 박해는 로마제국 시대를 통틀어 자행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수는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늘어만 갔다. 이 와중에 바울과 베드로가 순교당하였다. 여기에 고린도 교회의 청지기인 에라스토(Erastus), 마케도니아인 아리스타코(Aristarchus), 바울을 통해 회개한 에베소인 트로피모(Trophimus), 그리고 그와 함께 수고했던 동료로서 보통 바나바(Barnabas)로 불리는 요셉(Joseph), 다마스커스 교회의 감독인 아나니아(Ananias) 등의 이름이 바울과 베드로와 함께 순교자 명단에 더해진다. 이 일들은 각각 70년대에 일어났다.
2. 도미티안(Domitian) 통치 하에 가해진 두 번째 박해(A.D. 81)
도미티안 황제는 타고난 성품이 포악한 사람으로 자신의 형을 살해하였으며, 제2차 박해로 그리스도인들을 처형하는 데 열을 올렸다. 그는 개인적인 분노로 로마 원로들을 죽였고, 악한 생각으로 다른 많은 로마인들도 죽였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재산을 몰수당하기도 하였다. 그는 또한 다윗의 혈통에 속한 사람들을 모두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이 박해 기간 동안 수많은 순교자들이 있었으며, 그 중에서 예루살렘 교회의 목자인 시몬(Simon)은 십자가형을 받았으며, 요한(John)은 끓는 기름 속에 던져질 뻔하다가 팟모로 추방당했다. 로마 원로원의 원로의 딸인 플라비아(Flavia)는 폰토(Pontus)로 추방당하였다. 그 당시에는 다음과 같은 법령이 세워졌다. "법정에 일단 출두한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신앙을 단념하지 않는 한 결코 처형을 피할 수 없다." 그의 통치기간 중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온갖 종류의 날조된 거짓말들이 횡행하였다. 로마지역에 기근이나, 역병, 지진 등이 일어나면 그 발생의 원인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돌리는 것 등의 거짓말들이 많았다.
이러한 박해를 통해서 그리스도인 내부에서는 여러 가지 이익을 얻기 위하여 결백한 삶을 버리고 밀고하는 사태도 증가하였다. 또 다른 고난은 그리스도인이 관료들 앞에 섰을 때 반드시 신앙에 관한 선서를 하는 것이 강요되었던 점이다.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면 당연히 사형에 처해지며 그리스도교를 택하지 않겠다고 해도 죽음이 선고되었다.
다음은 수많은 순교자를 내었던 이 박해 기간 동안에 살았던 가장 주목할 만한 사람들에 대한 내용이다. 아레오파고스(Areopagite)의 재판관이었던 디오니시우스(Dionysius)는 아덴인(Athenian)의 혈통으로 태어났고 그리스의 모든 유명한 수사문학을 공부한 사람이었다. 그는 천문학을 공부하기 위하여 이집트를 여행하면서 경이적이고 초자연적인 일식현상을 관찰하게 되었는데, 이 현상은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시간에 일어났던 현상이었다. 품위 있는 언변과 행동의 순수성 때문에 그는 아덴 교회의 목자로 임명되기도 하였다. 자애로운 그리스도인이었던 니코데모(Nicodemus)는 도미티안의 박해 기간 동안 로마에서 고난을 당하였다. 프로타시우스(Protasius)와 게르바시우스(Gervasius)는 밀란(Milan)에서 순교당하였다.
사도 바울의 제자로 이름 높은 디모데(Timothy)는 에베소 교회의 목자로서 A.D. 97년까지 그 교회를 열정적으로 섬겼다. 이 기간 중에 로마제국이 카타고기온(Catagogion)이라는 명절을 기념하려 하자 디모데는 그들의 악마적인 우상 숭배를 통렬하게 비난하였다. 이로 인해 격분한 사람들이 그를 끌어내어 무자비한 방법으로 구타하였고 그는 구타당한 상처로 인해 이틀 후에 죽음을 맞게 되었다.
3. 트라얀(Trajan) 통치 하에 가해진 세 번째 박해(A.D.108)
이 세 번째 박해 때 트라얀 다음의 권력자였던 플리나(Pliny)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교육을 받았으며 지각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참혹한 죽음을 목격하면서 트라얀에게 편지를 썼다. 이 편지에서 그는 트라얀에게 매일 수천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처형되지만 그 중의 누구도 그런 형을 받을 만큼 로마법을 어긴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주지시켰다. "그들이 범한 죄란 단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즉 그들은 지정된 날짜에 서로 교제를 위하여 대낮에 모여 하나님이라고 하는 그리스도에게 함께 기도를 올리곤 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지켜야할 신념으로 그들 스스로 일체감을 갖는 것 등이 전부입니다. 그들은 추호도 사악한 죄를 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절도, 강도, 간음과 같은 죄를 짓지 않습니다. 그들의 말에는 거짓이 없으며 그 누구도 속이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그들 사이에 퍼져 있는 관습입니다. 그리고 흠 없는 고기를 함께 나누기 위해 다시 모이곤 합니다."
이 박해 기간 중에 사랑하는 순교자, 이그나티우스(Ignatius)가 고난을 당하였다. 그는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매우 존경받는 인물로 유명하였다. 이그나티우스는 베드로의 후임으로 안티옥(Antioch)교회의 목자로 임명되었다.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시인하여 시리아에서 로마로 송환되어 야수들에게 던져져 순교하였다고 전해진다. 또한 로마로 가는 중에 아시아를 통과할 때 그는 호위병들로 둘러싸인 가장 엄격한 감금 상태에서도 그가 지나가던 모든 도시들의 교회들에게 권고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여 교회들을 강하고 견고하게 하였다고 전해진다. 따라서, 스머나에 이르러 그는 로마에 있는 목자들에게 자신을 구출할 생각을 하지 말라고 편지로 썼다고 한다. 그 이유는 그것이 바로 자신이 기다리고 소망하던 바였기 때문이다. "지금 나는 제자가 되고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에도, 그것이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나는 그리스도를 얻으려는 것입니다. 불에 태우고 십자가형에 처하고, 야수들의 먹이가 되게 하고, 뼈를 부러뜨리고, 손발을 찢고, 몸을 가루로 만들게 하십시오. 모든 마귀의 공격이 내 위에 임하게 하십시오. 이렇게 함으로써 나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얻기 원합니다!" 그는 짐승들에게 던져지는 형이 선고되었는데 그 형벌은 그가 받기를 고대하였던 것이었다. 그는 사자의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들었을 때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그리스도의 밀알입니다. 내 몸은 야수들의 이빨과 더불어 흙이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순수한 빵을 낼 것입니다."
트라얀의 왕위를 계승한 아드리안(Adrian)은 전임자에 뒤지지 않는 심한 박해를 가하였다. 이 시기에 로마의 목자였던 알렉산더(Alexander)가 두 명의 집사와 함께 순교당하였다. 구리누스(Guirinus)와 헤르네스(Hernes)도 가족들과 함께 처형되었으며 로마의 귀족이었던 제논(Zenon), 이 외의 약 만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순교하였다. 아라랏(Ararat) 산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고난 때와 같은 방법으로 가시 면류관을 쓰고 창으로 옆구리를 찔리며, 십자가에 매달린 상태로 순교당하였다. 용맹스럽고 유능한 로마인 사령관이었던 유스타키우스(Eustachius)는 황제로부터 그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한 우상숭배자들의 제사에 참석할 것을 명령받았으나 그의 믿음은(그는 마음 속으로 그리스도인이었다) 매우 신실했기 때문에 그 명령을 단호히 거부하였다. 이에 격분한 황제는 이 유능한 사령관의 공적을 잊어버린 채 그와 그의 모든 가족들을 처형하였다. 브레시아(Braescia)시민이었던 파우스틴(Faustines)과 요비타(Jovita) 형제의 순교는 특히 극심한 고통이 동반되었으나 그들의 인내심은 놀라운 것이었다고 전해진다. 이들을 본 이교도 칼로세리우스(Calocerius)는 감탄과 경이함으로 선언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하나님은 위대하도다!" 이로 인해 그도 체포되었으며 그들과 같은 죽음을 당하였다. 이 밖에 많은 가혹한 형벌들이 그리스도인들 위에 가해졌으며 아덴(Athens)교회의 목자였던 퀴아드레투스(Quadratus)가 황제 앞에서 그들에 대한 선처를 바라며 사과했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또한 그 도시의 철학자인 아리스티데스(Aristides)도 서신으로 아드리안의 분노를 누그러뜨렸다. 아드리안이 A.D. 138년에 죽고 그 뒤를 이어 안토니누스 피우스(Antoninus Pius)가 왕위를 계승하였으며, 그는 그 전에 통치하던 사람들 가운데 가장 성격이 온순한 군주였고, 박해의 고삐를 늦춘 사람이었다
4.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우스 통치 하에서의 네 번째 박해(A.D. 162)
A.D. 161년에 왕위를 계승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그 누구보다도 천성적으로 사악하고 잔인한 사람이었다. 그는 철학이나 시민 정치사에서 훌륭한 위인으로 평가되지만, 그리스도인에 대해서는 매우 매섭고 잔인한 태도를 견지하였다. 바로 이 사람에 의해 그리스도인에 대한 네 번째 대박해가 시작된다.
이 기간 중에 행해진 잔악한 행위들은 그 광경을 목격하는 사람들을 공포에 질리게 하였으나, 한편으로는 고통당하는 자들의 용기와 담대함에 오히려 목격자들을 아연케 했던 두 면을 가지고 있었다.
어떤 순교자들에게는 부상당한 발로 바늘, 못 또는 날카로운 가시등 위를 걸어가라는 명령이 내려졌으며, 또 다른 사람들은 근육과 혈관이 남아나지 않을 때까지 채찍질을 당하여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극악한 고통을 겪다가 결국에는 끔찍하게 죽는 순교자들도 있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던 젊은 게르마니쿠스(Germanicus)는 그가 가진 믿음 때문에 사나운 맹수에게 던져졌으나 그의 담대한 행동으로 몇 명의 이교도들이 그리스도교 믿음으로 개종하기도 하였다. 스머나 교회의 존경받는 목자였던 폴리캅(Polycarp)은 사람들이 자신을 찾는다는 소식을 듣고 피했으나 한 어린아이에게 발견되었다. 그를 체포한 호위병들을 의연하게 받아들이며 폴리캅은 기도할 수 있도록 1시간의 여유를 부탁했고 이 청이 승락되자 그는 매우 열정적으로 기도했다. 그의 이런 모습을 본 병사들은 자신들이 그를 체포하는 것에 대하여 회개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폴리캅은 총독 앞에 끌려가 유죄를 선고받고 시장 거리에서 화형당하였다.
총독은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리스도를 비난하라. 그러면 내가 너를 풀어주리라." 이에 폴리캅은 "저는86년 동안 예수 그리스도를 섬겼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나를 한 번도 속이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나를 구원해 주신 나의 왕을 모독할 수 있겠나이까?"라고 대답했다. 그 후에 병사들은 그를 화형주에 묶고 그의 주위에 반원 모양으로 나뭇단을 쌓아 점화하였다. 그의 몸에 닿지 않을 정도로 불을 붙여 나무가 타는 것을 보면서 집행관은 칼로 폴리캅의 몸을 찔러 피가 솟아나게 하였다. 그의 몸에서 나온 피는 화염에 쌓인 나뭇단을 꺼뜨릴 정도로 많은 양이었다. 그의 친구들은 폴리캅의 시신을 그리스도교식으로 장사하기를 간청했으나 복음의 적인 선동자들, 특히 유대인들에 의해 이 청은 거절되었고, 결국 장작 더미 위에서 불태워졌다. 그의 친구들은 남겨진 그의 뼈 조각들을 할 수 있는 한 모두 모아서 정중하게 장사지냈다.
매우 강력하게 복음을 전파하였던 목자 메트로도루스(Metrodorus)와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박해에 반대하여 탁월한 사과문을 썼던 피오니우스(Pionius)도 마찬가지로 화형당하였다. 보석 같은 두 명의 그리스도인 카르푸스(Carpus)와 파필루스(Papilus), 그리고 경건한 여인이었던 아가토니카(Agathonica)는 아시아의 퍼가모에서 고난당하였다. 로마의 유력한 집안의 교양 있는 귀부인이었던 펠리시타티스(Pelicitatis)는 헌신된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녀는 일곱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모두를 최고의 모범이 될 만한 신앙심으로 교육하였다. 큰아들 제누아리우스(Ja- nuarius)는 채찍에 맞은 후 압사당하였으며, 그 밑으로 두 동생 펠릭스(Felix)와 필립(Philip)은 곤봉에 맞아 머리가 부숴져 사망하였다. 네째인 실바누스(Silvanus)는 박해자들에 의해 절벽에서 밀려 떨어져 살해당하였다. 밑으로 세 명의 아들인 알렉산더(Alexander), 비탈리스(Vitalis), 그리고 마르티알(Martial)은 참수형을 당하였고, 그 어머니는 세 아들의 머리를 내리친 그 칼에 또다시 목이 잘려 순교하였다.
불안에 떨고 있던 북쪽 지역의 몇몇 나라들은 로마에 대항하여 군대를 일으켰고 황제는 그들을 진압하기 위하여 진군하였다. 그러나 그는 복병을 만나 전 군의 커다란 손실을 입었으며, 산에 둘러싸이고 적들에게 포위당하였으며, 갈증으로 고통당하여서 이교도 신들에게 헛되이 천우신조를 빌었다. 로마 군대와 교전 중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였다. 그러자 기적적인 구원의 길이 즉시 뒤이어 일어났다. 엄청난 양의 비가 내림으로 제방이 물로 채워진 것이다. 기이하게도 폭풍은 적들의 면전에서 발화하여 그들을 위협하였고, 이로 인하여 군대의 얼마는 탈영하고 나머지는 격파되어 로마의 수하에 들어갔던 지역들이 완전히 회복되었다.
이 일로 잠시 동안 그 박해가 잠잠하였으나 적어도 이들 지역은 황제의 통제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곧이어 박해는 프랑스, 특히 리용(Lyons)에서 다시 맹위를 떨치게 되며, 그곳에서 당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고문은 설명하기에 한계를 느낄 정도이다. 이들 순교자들 중의 첫 번째 그룹은 젊은 베티우스 아가투스(Vetius Agathus)와 허약한 체질의 그리스도인 발란디나(Blandina), 비엔나(Vienna)의 집사였던 생투스(Sanctus) - 그는 그의 신체 가운데 가장 약한 부분에 빨갛게 달군 놋쇠 덩어리를 올려 놓는 고통을 당하였다. - 허약한 여인 비블리아스(Biblias)등이 있다. 퍼가모의 아탈루스(Atalus), 리용의 존경받는 집사였던 90세의 포티누스(Pothinus) 등도 여기에 속한다. 블란디나가 다른 전사들과 원형 경기장으로 끌려간 날, 경기장 안의 나무에 매달려 맹수들의 먹이가 되는 순간에도 그녀는 순수하게 기도드림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격려하였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맹수들 가운데 한 마리도 그녀를 공격하지 않아 그녀는 감옥에 남게 되었다. 그녀가 세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짐승의 먹이로 내던져질 때 그녀는 15살의 소년인 폰티쿠스(Ponticus)와 함께 끌려 나갔다. 지속적인 그들의 믿음은 군중들을 격분하게 만들어 그 둘 중 하나는 여자이고 다른 한 명은 소년이라는 것이 전혀 고려되지 않으며, 모든 종류의 형벌과 고문이 그들에게 가해졌다. 이 기간 중 그들이 순교를 받아들일 때, 그들은 광채를 더했으며 화관을 썼다. 이는 그들이 하늘에서 영원한 영광의 면류관을 받았기 때문이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땅 위의 박해와 땅 아래의 기도"로 이어지는 삶이었다는 말이 있다. 그들의 삶은 콜롯세움과 카타콤으로 표현된다. 로마의 땅 바로 밑에는 카타콤이라고 불리는 지하동굴들이 있다. 이곳은 한때 교회이자 무덤이었다. 로마의 초기 교회는 카타콤의 교회라고 부르는 것이 마땅하다. 로마 근처에는 육십여 개의 카타콤이 있으며 이 안에는 960km의 통로가 발견되고 있다. 이 통로들은 높이가 약 2.4m이며, 약 90cm - 1.7m의 폭으로서 양쪽에 길고 낮은 평면으로 된 오목한 곳이 있는데, 마치 여객선의 침대처럼 한 개의 오목한 공간 위에 또 다른 한 개의 오목한 곳이 있다. 이곳에 죽은 시신들이 안장하고 앞 부분을 막는데, 하나로 된 커다란 대리석을 밀어 넣거나 회반죽으로 만든 타일 여러 장을 놓아 막기도 하였다. 이 대리석이나 타일 등에 비문이나 상징 등을 새겨 넣거나 그렸다. 이교도들과 그리스도인 모두 그들의 시신을 이 카타콤에 장사하였다. 그리스도인 무덤이 발견될 때마다 그들의 뼈대는 그들이 당한 끔찍한 일들을 말해준다. 머리는 그들에 몸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그들의 갈비뼈와 어깨는 부수어져 있으며, 뼈들은 종종 불에 태워져 있다. 그러나 박해라는 공포스러운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기에서 평화와 희락과 승리의 숨결을 담은 비문을 읽을 수 있다.
"여기 마르시아는 평강의 소망 가운데 안식을 취하며 눕다."
"그의 귀여운 아들 라우렌스는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 가다."
"그리스도의 평강 안에서 승리를 거두다."
"부름을 받아 평강 가운데 가다."
이런 비문을 읽을 때면 기억하라. 그 비문과 뼈들은 박해와 고문과 타고 있는 불을 의미하고 있음을. 이런 비문에 새겨진 충만한 능력들은 이교도들의 다음과 같은 비문과 대조해 볼 때 알 수 있다.
"현재를 위해서 살라. 왜냐하면 우리는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아니었다. 지금도 나는 내가 아니다.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며 나 자신에게도 관심이 없다."
"나그네여, 지나가며 나에게 욕하지 말라. 나는 어둠 가운데 있으며 대답할 수 없노라."
카타콤의 벽에 새겨진 그리스도인의 상징들 가운데 많은 수는 어깨에 양을 지고 있는 자상한 목자와 평화롭게 항해하는 배, 하프, 닻, 면류관, 포도송이, 그리고 무엇보다도 물고기가 가장 많다.
5. 세베루스(Severus)로부터 시작되는 다섯 번째 박해(A.D. 192)
한 그리스도인의 도움으로 심한 발작증세에서 회복되어가던 세베루스는 대체적으로 그리스도인들에게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우세한 힘을 가지고 있는 무지한 군중들의 편견과 분노 그리고 진부한 법조문은 여전히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데 힘을 발휘하였다. 기독교의 확산은 이교도들을 놀라게 했으며, 우연히 발생된 재앙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돌리는 케케묵은 중상이 A.D. 192년에 다시 시작되었다. 그러나 박해가 맹위를 떨쳐도 복음은 찬란한 빛을 발하였다. 또 사나운 적들의 계속되는 공격에도 복음은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견고하기만 하였다. 이 시대에 살았던 터툴리안(Tertullian)은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스스로 로마 군주들에게 항복했더라면 로마 황제는 결코 유명해지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로마의 목자였던 빅토(Victor)는 A.D. 201년 즉, 3세기가 시작되는 첫해에 순교당하였다. 세레누스와 헤론(Heron), 그리고 헤라클리데스(Hera clides) 등도 참수당하였다. 라이스(Rhais)는 그녀의 어머니 마르셀라(Marcella)와 마찬가지로 끓는 물을 온 몸에 뒤집어 쓴 후 불에 태워졌다. 라이스의 자매인 포타이니에나(Potainiena)도 라이스와 같은 방법으로 처형되었다. 이 때 군대의 소속 장교였으며, 그녀의 형집행에 참석했던 바실리데스(Pasilides)는 후에 회심하게 되었다.
장교였던 바실리데스는 로마인의 우상에게 선서를 강요당했다. 그때 그는 자신은 그리스도인이므로 우상에게 맹세할 수 없다고 말하며 거절했다. 당혹한 사람들은 처음에 자신들의 귀를 의심하였다. 그러나 그는 다시 이를 분명히 밝혔다. 그는 재판관 앞에 불려갔으며 투옥되었다가 지체함 없이 참수당하였다. 리용의 감독이었던 이레네우스(Irenaeus)는 그리스에서 태어나 예절과 그리스도교로 교육받으며 자랐다. 리용에서의 박해에 관한 많은 부분이 그에 의하여 쓰여졌다고 추정된다. 그는 순교당한 감독 포티누스(Pothinus)의 뒤를 이었으며 훌륭한 예의 범절로서 자신의 교구를 다스렸다. 그는 이단교리에 맞서 강력하게 싸웠다. A.D. 187년 그는 이단 교리에 대적하는 괄목할만한 책을 썼다.
이제 박해는 아프리카에까지 퍼져나갔으며 지구의 사분의 일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순교당했으며, 그들 중에 가장 특별한 사람들을 우리는 언급할 것이다. 22살의 결혼한 여인이었던 페르페투아(Perpetua)와 함께 고난당했던 텔리스타스(Telicitas)는 노예였다. 이 때 고난당했던 다른 죄수들 가운데는 사투르니누스(Saturninus)와 세쿤둘루스(Secundulus) 그리고 사투어(Satur) 등이 있다. 그들의 형이 집행 되던 날 그들은 원형 경기장으로 인도되었다. 사투어와 사투르니누스, 그리고 레보카투스는 사냥꾼들 사이에서 태형을 당하거나 맹수들에게 던져지는 형을 받았다.
사냥꾼들이 두 줄로 열지어 서 있고, 그 사이로 이들을 달려 가게 해서 지나갈 때, 사냥꾼들이 그들을 심하게 채찍으로 때렸다. 펠리시타스와 페르페투아는 옷이 벗겨진 채로 미친 소에게 던져졌다. 그 소는 첫번째로 페르페투아를 공격하여 기절시켰고 다음으로 펠리시타스를 공격하여 두려움 속으로 몰아 넣었다. 아직 목숨이 붙어 있는 그들을 군대 장교인 집행관이 마지막으로 칼로 살해하였다. 레보카투스와 스투어는 맹수에게 의해 순교하였다. 사투르니누스는 참수당하였으며 세쿤둘루스는 감옥에서 죽었다. 이 일은 A.D. 205년 3월 8일에 일어났다.
스페라투스(Speratus)와 다른 12명의 형제들도 참수당하였고, 안도클레스(Andocles)도 프랑스에서 참수당하였다. 안티옥의 목자였던 아스클레피아데스(Asclepiades)는 고문으로 많은 시련을 당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생명을 남겨 두셨다. 로마의 명성 높은 집안의 젊은 숙녀였던 세실리아(Cecilia)는 바레리안(Valerian)이라는 신사와 결혼하였다. 그녀는 남편과 그녀의 형제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으며 그 이후에 그녀의 형제들은 참수형당하였다. 이들을 집행장소로 인도하던 장교도 후에 같은 운명이 되어 고난 받았다. 그들은 세실리아를 옷이 벗겨진 채로 끓는 욕조 속에 오랜 시간 동안 들어가 있게 한 후, 칼로 머리를 베여 죽게 하였다. 이 때가 A.D. 222년이었다. 로마의 감독이었던 칼리스투스(Calistus)는 A.D. 224년에 순교당하였다. 그러나 그가 죽임을 당했던 방법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다. 로마의 감독 울반(Urban)도 A.D. 232년에 같은 운명을 맞는다.
6. 맥시무누스 통치 하에서의 여섯 번째 박해(A.D. 235)
A.D. 235년은 맥시무누스의 통치 중간기이다. 카파도키아(Cappadocia)의 총독이었던 세레미아누스(Seremianus)는 자신의 지역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가 할 수 있는 한 모든 극악한 일을 자행하였다. 이 기간에 순교한 첫 번째 그룹의 사람들은 로마의 감독이었던 폰티아누스(Pontianus)와 그의 후계자 안테로스(Anteros)이다. 안테로스는 온 가족과 다른 많은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순교자인 팜마치우스(Pammachius)와 로마 원로였던 큐리투스(Quiritus) 등의 행적을 수집함으로써 통치자를 화나게 하였다. 로마 원로 심플리시우스(Simplicus), 그리스도교 목자였던 칼레포디우스(Calepodius) 등은 타이버(Tuber)에 던져졌으며 귀족 출신의 아름다운 처녀였던 마르티나(Martina)와 고위 성직자였던 힙폴리투스(Hippolitus)는 야생마에 묶여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끌려다니다가 순교하였다.
이 박해 기간 동안 맥시므누스에 의하여 수없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재판도 없이 살해 당하였으며 알아 볼 수도 없도록 매장되었고, 때로는 50명 또는 60명의 사람들이 최소한의 인간적인 대우도 없이 한 구덩이 속에 매장당하였다.
A.D. 238년에 포악한 군주 맥시무누스가 죽고 고르디안(Gordian)이 그 뒤를 승계했으며, 그의 통치 기간과 그의 후계자 필립(Phillip) 재임 기간 동안 교회는 10년 이상 박해의 피해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 그러나 A.D. 249년 알렉산드리아에서 한 이교도 제사장의 사주로 무자비한 박해가 일어났으며, 이것은 황제도 모르는 가운데 저질러졌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신앙 고백
7. 데시우스(Decius) 통치 하에서의 일곱 번째 박해(A.D. 249)
이 일곱 번째 박해는 데시우스가 자신의 전임자였던 필립(그는 그리스도교인으로 추정된다)에 대해 품었던 증오심에서 기인된 것이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놀랄 만한 증가를 보이고 있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질투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당시 이방 종교 사원은 버림을 받기 시작했으며 그리스도인 교회의 숫자는 날로 증가하고 있었다. 이런 요인들이 데시우스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을 가진 모든 사람들을 멸절시키기 위한 박해를 시작하도록 자극하였다.
일반적으로 이때 이교도들은 제국의 법령을 시행하는 데 열을 올렸으며,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을 죽이는 살인 행위를 자신들의 출세를 위한 첩경으로 여겼다. 이 시기에 희생된 순교자는 그 수를 헤아리기가 불가능할 정도이지만, 여기에서는 몇 가지 사건에만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고자 한다.
이 박해 기간에 혹독한 고통을 당했던 명망 있는 사람들 가운데 첫 번째 사람은 로마의 감독이었던 파비안(Fabian)이다. 고인이 된 황제 필립(Philip)은 매우 고결한 사람으로서 파비안을 돌보아 주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그 후임자 데시우스(Decius)는 그 훌륭한 성직자 위에 자신의 증오심을 퍼부었다. 파비안은 곧이어 체포되었고 A.D. 250년 1월 20일 참수당하였다.
준수한 용모와 고결한 마음을 가졌으며 매우 온순하였던 젊은 그리스도인 피터(Peter)는 비너스 여신에게 경배할 것을 거절하여 참수당하였다. 이 젊은이는 경배를 강요당하자, "나는 당신들이 아무 가치도 없는 한 여인에게 경배해야 한다는 데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녀는 당신의 역사 기록에도 있듯이 방탕한 여인이 아닙니까? 그녀의 일생은 지금 당신들의 법으로 말한다면 당연히 처형당해야 할 행위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라고 말했고 이 이야기를 들은 아시아 총독은 그 즉시 이 청년을 바위 위에 매달아 굴려 모든 뼈를 부러뜨리게 하였다. 그 후 그를 참수형에 처하였다.
총독 앞에 불려나온 니코마쿠스(Nicomachus)에게도 이방 우상들에게 경배해야 하는 명령이 내려졌다. 니코마쿠스는 이에 대해 "나는 사탄에게 존경을 표시할 수 없습니다. 그 경외함은 오직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만 합당한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의 이 고백이 지방 총독을 극도로 자극하였고 그는 바위에 내던져지게 되었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계속된 고통으로 그가 자신의 신앙을 버렸다고 하나 그의 박약함을 증명해 주는 증거는 없고, 오히려 그는 가장 혹독한 고문에 처해졌으며 땅에 내동댕이쳐서 즉사했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이 광경을 본 데니사(Denisa)라는 열여섯 살의 소녀는 "오 불쌍한 사람들이여, 당신들은 어찌하여 무시무시한 영원 세계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단지 현재의 안일함을 사려하고 있는가!"라고 말한 후 자신도 그리스도인임을 공개적으로 시인하고 참수형을 당했다.
루시안(Lucian)과 마르시안(Marcian)은 처음에는 마술을 행하는 사악한 이방 우상 숭배자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후 자신들이 범했던 죄들을 회개하였고 은둔자의 삶을 살며 빵과 물만으로 연명하였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그들은 그런 삶을 마치고 열정적인 복음 전도자가 되어 많은 사람들을 개종시켰다. 그러나 이때에도 박해의 불길은 계속되었고, 결국 그들은 체포되어 비두니아(Bithynia)의 통치자인 사비누스(Sabinus) 앞에 끌려가게 되었다. 무슨 권세로 복음을 전하는 일에 투신하였는지에 대하여 대답을 요구받았을 때 루시안은 "그리스도의 사랑과 자비의 법이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들의 이웃을 회심시키도록 만듭니다. 또 그 법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이웃을 사탄의 올가미로부터 구출시키기 위하여 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하게 하십니다."라고 말했다. 마르시안도 함께 "교회를 광적으로 박해했던 바울을 회심시키고 그를 복음의 전파자가 되게 한 그 동일한 은혜로 다른 모든 사람들도 회심하였습니다."라고 고백했을 때, 이 두 사람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고 판단한 총독은 그들을 산채로 불에 태워 버렸다.
시실리(Sicily) 출신의 젊은 여인 아가타(Agatha)는 경건함으로 이름 높은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녀의 뛰어난 미모 때문에 시실리의 통치자 퀸티안(Quintian)을 그녀에게 매혹되었다. 그는 자신의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이 순결한 아가타를 음탕하고 방탕한 여인인 아프로디카(Aphrodica)의 손에 넘겼고 이 사악한 여자는 그녀가 음행하도록 모든 방법들을 동원했으나 그것은 헛된 노력일 뿐이었다. 그녀의 순결함은 흔들리지 않았으며 이는 아가타가 이미 고결한 도덕성만이 진실한 행복에 이를 수 있게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에 퀸티안은 자신의 욕정을 원한으로 바꾸었고, 아가타가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고백하자 관철시키지 못했던 자신의 추악한 욕망대신 복수심을 일으켜 아가타를 채찍으로 때리고, 벌겋게 달아오른 쇠 덩어리에 태웠으며 날카로운 쇠고리로 온 몸을 찢었다. 그녀는 이런 고통을 꿋꿋하게 견디었으며 결국에는 유리조각이 섞여있는 불붙은 석탄위에 벗긴 채로 뉘여 감옥으로 보내져서 A.D.251년 2월 5일 마침내 순교당하였다.
고르티나(Gortyna)의 감독이었던 시릴(Cyril)은 그 곳의 통치자였던 루시우스(Lucius)의 명령으로 체포되었다. 루시우스는 시릴에게 황제의 칙령을 준수하고, 우상에게 경배하여 다른 형제들의 목숨을 구하라고 설득하였다. 그러나 시릴은 이를 거절하며, 자신은 오랫동안 다른 사람들에게 혼을 구하라고 가르쳐 왔으며 자신이 지금 유일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자신의 구원이라고 대답하였다. 고결한 이 형제는 자신에게 내려진 형벌을 아무 저항 없이 받아들이고 유쾌하게 집행장소로 걸어가 놀라운 꿋꿋함으로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였다.
A.D. 237년 제비누스(Zebinus)의 뒤를 이어 안티옥의 감독이 된 바빌라스(Baby- las)는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열심으로 교회를 섬겼으며, 가장 극심한 박해의 폭풍우가 몰아닥친 그 시기에 매우 사려 깊게 교회를 다스렸다. 그가 집무하던 시기에 안티옥에 발생한 첫 번째 불황은 페르시아 왕 사퍼(Saper)가 그곳을 포위하려 공격했던 일이었다. 사퍼는 시리아 온 지경을 침략하여 도시들을 차지하고 강탈하였으며, 그리스도인 거주민들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심하게 공격하였다. 그러나 곧 고르디안(Gordian)에게 완전히 패배하여 물러나게 되었다.
고르디안이 죽고 데시우스가 집권하였을 때, 그는 안티옥에 있는 그리스도인 모임에 자신이 방문할 것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바빌라스는 이에 강력히 반대했으며, 그가 모임에 들어오는 것을 완전히 거절하였다. 그 때 그 황제는 크게 진노하였고 그 감독을 송환하여 그의 오만함을 비난하고 그 대가로 자신들의 신들에게 경배하라고 명령하였다. 이 명령을 거절한 그는 사슬에 감겨 감옥으로 보내졌고 매우 고통스러운 고문을 당한 뒤 목이 잘려 순교하였다.
예루살렘 교회의 감독이었던 알렉산더(Alexander)도 이 때쯤에 투옥되었다가 심한 고문으로 순교하였다. 연로한 줄리아누스(Julianus)와 크로니온(Cronion)은 낙타 등에 매여 혹독하게 채찍질을 당하였고 불에 태워졌다. 안티옥에서는 40여 명의 처녀들이 투옥되었다가 채찍에 맞은 후 화형당하는 일들이 벌어졌다.
안티옥의 젊고 아름다운 여인, 테오도라(Theodora)는 로마 우상에게 경배하지 않아 사창굴에 던져지는 선고를 받아 그녀의 순결함이 그 곳에서 정욕에 찬 짐승들에게 희생당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리스도인이었던 디디무스(Didymus)는 로마 군인 복장으로 자신을 위장하고 테오도라가 있는 곳에 가서 자신이 입고 있던 로마군인 복장을 입혀 탈출시켰다. 그녀 대신 디디무스는 총독 앞에 끌려가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고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 사실을 들은 테오도라는 재판정에 스스로 출정하여 자신에게 사형 선고를 내려 줄 것을 간청하였다. 그러나 무죄한 사람의 통곡에 귀멀고 정의로운 요구에 무감각한 총독은 두 사람 모두에게 사형을 내려 차례대로 목을 자르고 불태우게 하였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죄목으로 고소된 세쿤디아누스(Secundianus)가 로마 병사들에 의해 송환될 때 베리아누스(Verianus)와 마르셀리누스(Marcellinus)가 그 병사들에게 "이 결백한 사람을 어디로 데려가는 겁니까?"라고 물었다가 함께 결박되어 후에 심한 고문을 받은 뒤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 동안에 데시우스가 죽고, 그 뒤를 이어 갈루스(Gallus)가 왕위를 잇는다. 그는 고트 족(Goths)과의 전쟁에 열을 올렸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모처럼의 '박해가 없는 상태'를 맞게 되었다. 갈루스 황제가 전쟁을 마쳤을 때 로마 제국에 역병이 발생하였다. 이 황제는 로마신에게 제사를 드릴 것을 온 나라에 선포하였고 이 명령으로 인하여 또 다시 박해의 바람이 불어 로마제국의 중심부에서부터 멀리 있는 변방까지 광범위하게 순교의 행렬이 이어지게 되었다. 로마의 감독이었던 코넬리우스(Cornelius)와 그의 후계자 루시우스(Lucius)가 이 기간에 순교하였다. 이 때가 A.D. 253년경이다.
이 때 교회에 가장 치명적인 해악이 몰래 들어와 자라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겐 등에 의해 하나님의 계시에 대항하는 인간의 이성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오리겐이 비록 이 기간 중에 죽임당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에 의한 이단 교리는 교회 안에서 그 순수성을 해치게 하였다. 그러나 이 때까지만 해도 그와 같은 오류는 자격 있는 목자들에 의해 그릇됨이 판명되었으며 육신적인 사람들이 만들어 낸 견해들은 태양 앞의 별처럼 무력하게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불 속에서도 평안을
8. 발레리안(Valerian) 황제 통치 하에서의 여덟 번째 박해(A.D. 257)
A.D. 257년 4월 발레리안 치리 하에서 시작된 박해는 3년 6개월 동안 계속되었다. 이 박해 기간에 순교한 사람들은 이루다 헤아릴 수 없으며, 그들이 당한 고통과 처형당한 방법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에 찬 것들이었다.
루피나(Rufina)와 세쿤다(Secunda)는 아름답고 교양있는 숙녀들로서 로마의 저명한 신사였던 아스테리우스(Asterius)의 딸이었다. 언니인 루피나는 젊은 귀족 아르멘타리우스(Armantarius)와 약혼 중이었으며 세쿤다도 부유한 상류 계급 출신의 베리누스(Verinus)와 약혼하였다. 두 숙녀의 약혼자들은 박해 초기에는 그리스도인이었으나 위험에 놓이게 되자 자신들의 재산을 지키기 위하여 믿음을 부인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두 자매들로 하여금 믿음을 포기시키려고 갖은 노력을 기울였고 이것이 실패하자 몹시 실망하였으며 자신의 약혼녀인 두 자매를 밀고하였던 비열한 사람들이었다. 이 두 자매는 A.D.257년에 로마 관료인 쥬니우스 도나투스(Junius Donatus) 앞에 불려가 피로 그들의 생을 마감하였다. 같은 해 로마의 감독 스테판(Stephan)도 참수당하였으며, 툴루스(Toulouse)의 경건한 감독이었던 사투르니누스(Saturninus)도 그 때 순교하였다. 사투르니누스는 우상에게 경배할 것을 거절하였다가 상상할 수도 없는 방법으로 모욕 당하였다. 그들은 숫소의 꼬리에 그의 다리를 묶어 고정시켜 놓고 그 미친 짐승으로 성전의 계단을 질주하게 함으로써 그의 뇌를 산산조각나게 하여 죽였다.
스테판의 뒤를 이어 로마의 감독이었던 섹스투스(Sextus)는 그리스계 혈통의 사람으로 추정된다. 스테판 밑에서 집사로서 교회를 섬겼던 그는 충성스럽고 지혜가 뛰어났으며 범상치 않은 용기가 있었던 사람으로서, 그가 이단 교리를 놓고 벌이는 논쟁을 벌일 때면 경건과 온유로서 적절한 결론을 이끌어 내곤 하였다. A.D.258년에 로마정부의 관료였던 마르시아누스(Marcianus)는 황제 발레리안(Valerian)으로부터 로마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사형에 처한다는 법령을 받았을 때, 이 감독은 그의 집사 6명과 함께 순교당하였다.
여기서 순교자 로렌스(Lawrence)의 불 곁에 가까이 감으로써 우리의 차가운 마음을 훈훈하게 해보자. 사악한 전제군주 발레리안은 자신을 성사의 목자일 뿐만 아니라 교회 재산의 분배자로 생각하고 자신 스스로 일석이조의 일을 실행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 첫째는 황욕의 갈고리로 가난한 그리스도인들의 재산을 긁어오는 것이고, 그 후 압제의 불타는 갈퀴로 그들을 흔들고 교란시킴으로써 그들을 믿음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 악한 여우는 사나운 얼굴과 난폭한 안색으로 로렌스에게 교회의 재산을 내놓을 것을 요구하였다. 그는 3일간의 여유를 달라고 간청하였고 그 군주는 그 요청을 받아들여 3일 후 교회의 재산을 몰수할 것을 선언하였다.
얼마 후 로렌스는 많은 가난한 그리스도인들을 한 곳에 모아 놓고 그가 약속했던 날이 이르자 약속의 이행을 명령하는 폭군 앞에서 그는 그 가난한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키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들은 우리 교회의 가장 귀한 보물입니다. 이들은 참으로 보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들 안에는 그리스도의 믿음이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는 이들 안에 그의 거처를 가지고 계십니다. 이들 안에 거하신 하나님의 약속보다 더 큰 건물이 어디 있겠습니까? 또 말씀하시기를 '내가 굶주렸을 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으며, 내가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도다. 내가 나그네였을 때 대접하였도다.' 또 '여기 내 형제 가운데 가장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께서 가지고 계신 것 중에서 그 분이 사랑하시는 이 가난한 사람들보다 더 귀한 것이 있겠습니까?"
그 누가 이 광기 어린 군주의 격노한 마음에 이와 같은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 때 그 군주는 발을 구르고 그를 노려보며, 위협하는 자세를 취했다. 그의 눈은 이글거리는 불꽃 같았고, 그의 입은 멧돼지 거품을 문 것과 같았으며, 그의 이빨은 개가 이를 가는 것 같았다. 그는 이성을 가진 인간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으르렁거리는 사자와 같다고 불리는 것이 마땅하였다. "불을 붙여라!" 그가 소리질렀다. "나무를 아끼지 말고 태워라. 이 악한 놈이 황제를 기만하였다. 그를 죽여라. 그를 죽여 버려라. 채찍으로 내리치고 장대로 비틀고 주먹으로 때려 눕혀라. 머리를 때려 부수라. 이 반역자가 황제에게 말장난을 하였다. 벌겋게 단 인두로 그를 지지고 불타는 쇠판을 그의 몸에 동여매라. 가장 튼튼한 쇠줄과 불타는 갈퀴와 쇠침대를 가져와 불을 붙여라. 그의 손과 발을 묶고 쇠침대가 달아올랐을 때 그를 눕혀 튀기고 끓이고 뒤집고 엎으라." 이 명령들은 이렇게 빠르게 내려지지는 않았지만 모두 완전하게 수행되었다. 이런 난폭한 명령이 집행된 후에 이 온유한 양은 달군 쇠 침대에 눕혀졌지만, 나는 그가 부드러운 솜털 침대에 누웠다고 말하고자 한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순교자 로렌스와 함께 계셨으며 기적적으로 그 불길을 조정하셨다. 따라서 그것은 고통을 태우는 자리가 아니라 풍성한 휴식이 있는 잠자리가 된 것이다.
아프리카에서도 심한 폭력을 동반한 박해가 위세를 떨쳤으며, 수천의 그리스도인들이 순교의 면류관을 받았다.
카르타고(Carthage)의 감독이었던 시프리안(Cyprian)은 교회의 광채를 더해 주는 경건한 사람이었다. 그의 언행은 우아하고 겸손하였으며, 그는 참으로 경건하고 예절바른 설교자였다. 젊어서 그는 이교도의 교리로 교육받았으며, 막대한 재산가였고 모든 화려함의 극치 가운데서 생활하였다. A.D. 246년에 카르타고의 목자였던 코에실리우스(Coecilius)에 의해 회심한 그는 침례받기 전에 성경을 매우 주의 깊게 공부하였으며, 성경이 담고 있는 진리에 크게 충격을 받고 기록되어 있는 명령을 실행하기로 결심하였다. 침례에 뒤이어 그는 자신의 모든 재산을 처분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분배하였으며, 자신은 매우 소박한 차림새에 궁핍의 생활을 하였다. 그의 미덕과 선행은 광범위하게 칭송되었고 A.D. 248년 도나투스(Donatus)가 죽자, 그는 거의 만장일치로 카르타고의 감독으로 선출되었다.
시프리안의 영향력은 카르타고에서뿐만 아니라 누미디아(Numidia)와 머리타니아(Mauritania)까지 확장되었다. 그는 만장일치만이 교회를 이끄는데 있어서 유일한 방법임을 알고 있었으므로 모든 사역에 있어서 형제들의 조언을 구했다. "감독은 교회 속에, 교회는 감독 안에"라는 그의 말은 격언이 되었고, 그러한 일치됨은 목자와 양들간의 밀착된 관계 속에서만이 유지될 수 있었다.
A.D. 250년에 시프리안은 데시우스(Decius) 황제에 의해서 그리스도인 감독 코네실리우스 시프리안이란 이름으로 추방당하였다. 그 이교 로마는 "시프리안을 사자들에게, 시프리안을 맹수들에게 던지라"고 부르짖었고 시프리안은 주민들의 분노를 가라앉히며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은퇴한 후 그는 그의 양들에게 30회에 걸쳐 경건하고 향기로운 서신을 보내 그들을 돌보았다. 박해의 위세가 조금씩 가라앉자 그는 카르타고로 돌아와 교회 내의 위험스러운 견해들을 없애는데 그의 모든 힘을 기울였다.
카르타고에 무시무시한 역병이 돌기 시작하자 늘 그렇듯이 그 책임이 교회로 돌아갔으며, 그 역병에 대한 교회의 정당함을 주장하는 시프리안의 편지에 행정관료들은 다시 교회를 차례로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A.D. 257년에 시프리안은 다시 카르타고로 돌아왔으나 정부 관료에 의해 참수형을 선고받았고, A.D. 258년 10월 14일에 목잘려 순교당하였다.
이 박해 기간에 순교한 시프리안의 제자들은 루시우스(Lucius), 플라비안(Flavian), 빅토리쿠스(Victoricus), 레무스(Remus), 몬타누스(Montanus), 쥴리안(Julian), 프리메루스(Primelus)와 도나티안(Donatian) 등이 있다.
곳곳에서 심한 폭력을 동반한 박해가 위세를 떨쳤으며, 수천의 그리스도인들이 순교의 면류관을 받았다. 다음은 그들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사람들의 행적이다.
우티카(Utica)에서는 가장 잔인한 비극이 발생되었는데, 300명의 그리스도인들이 불타고 있는 가마에 둘러 세워져서 주피터를 경배하지 않으면 불타는 가마 속으로 던져지는 무서운 명령이 지방 총독에 의해 내려진 것이 그것이다. 그곳의 모든 형제들은 주피터에게 경배하지 않고 용감하게 그 가마에 뛰어들었다.
스페인 타라곤(Tarragon)의 감독 프루투오수스(Frutuosus)와 그의 두 집사 어거리우스(Augurius)와 율로지우스(Eulogous)도 그리스도인이란 이유로 불태워졌다. 팔레스타인(Palestine)의 알렉산더(Alexander), 말쿠스(Malcus)와 프리스쿠스(Priscus)는 한 여인과 함께 자진하여 자신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밝힘으로써 호랑이에게 던져지는 형을 선고받았으며, 이 선고는 곧이어 집행되었다.
투버가(Tuburga)의 세 처녀인 막시마(Maxima)와 도나틸라(Donatilla), 세쿤다(Secunda )에게는 쓸개와 식초를 마시게 한 후 채찍으로 때리고 교수대에서 고통을 주고 맹수들로 위협하다 결국 참수하였다. 그러나 A.D. 260년 발레리안 황제의 뒤를 이은 갈리에누스(Gallienus)가 통치하는 동안은 몇 명의 순교자들을 제외하고 교회는 수년 동안 평안한 기간을 구가하였다.
초기에 행해진 열 차례의 박해 Ⅵ
나타날 영광을 바라보며
9. 아우렐리안(Aurelian) 통치 하에서의 아홉 번째 박해 A.D. 274년
이 때의 대표적인 순교자로는 로마의 감독이었던 펠릭스(Felix)를 거명할 수 있다. 그는 A.D. 274년에 로마 감독이 되었으나, 같은 해 12월 참수당하였다. 젊은 그리스도인이었던 아가페투스(Agapetus)는 자신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등 매우 신실한 형제였으나 그리스도인이라는 죄명으로 붙잡혀 많은 고문을 받은 후 로마로부터 하룻길 떨어진 곳인 프레네스테(Praeneste)에서 참수당하였다. 이들이 이 기간에 순교당한 형제들 중에 유일하게 기록에 남은 사람들이다.
아우렐리안의 뒤를 이어 타시투스(Tacitus)가 왕위에 올랐고 그 뒤를 이어 프로부스(Probus)가 그리고 그 후에 카루스가 뒤를 이었다. 이 황제가 벼락을 맞아 죽자 그의 두 아들인 카르니우스(Carnious)와 누머리안(Numerian)이 왕위를 물려받았고 이들이 집권한 동안 교회는 평화스런 기간을 갖게 되었다.
디오클레티안(Diocletian)이 A.D. 284년에 황제 자리에 올랐던 초기에 그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대단히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286년 그가 막시미안(Maximian)과 연합하면서 몇몇 그리스도인들이 대대적인 박해가 시작되기 전 죽음에 처해졌다. 이들 중에 펠리시안(Felician)과 마르셀리아누스(Marcellianus) 형제가 있다.
마르쿠스와 마르셀리아누스는 쌍둥이였으며 로마인으로서 귀족의 자식이었다. 그들의 부모들은 이교도인이었으나 그들을 교육한 가정교사는 그들을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이끈 주 안의 형제였다. 그들이 이교 로마인이 되기를 열렬히 기원했던 사람들은 그들의 견고한 신앙에 누그러졌으며 오히려 하나님을 비난하던 부모와 다른 모든 가족들이 회심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이교 로마는 이들을 기둥에 묶고 못들을 밟게 하는 등 많은 고문을 가하였고 이들은 그 고통으로 순교하였다.
감옥 간수의 아내였던 조에(Zoe)도 그들에 의해 회심하였다. 그들은 그녀의 발밑에 짚으로 불을 지피고 나무에 매달았으며, 그녀의 몸에 커다란 돌을 매달아 강에 떨어지게 하였다.
A.D. 286년에는 매우 주목할 만한 일이 발생하였다. 테비아스(Thebias)에서 일어난 군대라고 하여 테반군단이라고 불렀던 군단에는 6660명의 군인이 있었는데, 이중에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들은 막시미안 황제로부터 버간디(Burgundy)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골(Gaul)로 행진할 것을 명령받아 마우리티우스(Mauritius)와 캔디두스(Candidus), 엑수페르니스(Exupernis)의 지휘 아래 진군하고 있었다. 이때 막시미안은 그들에게 이방 신에게 숭배할 것과 골에 있는 기독교를 박멸하는데 참여해야 할 것을 명령하며 이 일에 충성을 선서하도록 하였다. 이 명령에 대해 경각심을 가진 테반 군단의 각 개인들은 이 두 가지 명령을 완전히 거절하였고 이에 격분한 막시미안은 열 명 가운데 한 명씩 죽이는 명령을 내려 그들을 칼로 처형하였다. 이 피의 명령은 곧 집행되었으나 살아 남은 사람들은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두 번째 이 명령이 내려졌을 때 또다시 열 번째에 해당되는 사람들이 모두 죽음에 처해졌다. 그러나 두 번째 명령은 첫 번째 다 그들에게 그다지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 군인들은 불굴의 정신과 자신들의 신조를 지켰으나 그들 상관의 조언에 따라 황제에게 충성스런 진정서를 작성하여 보냈다.
이것이 황제의 마음을 누그러뜨리기는 했으나, 결과적으로는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들의 확고부동함과 일치함에 격분한 왕은 전체 군인들을 모두 처형할 것을 명령하였고 이 명령은 점차적으로 다른 군대에까지 퍼져나가 집행되었다. 그들 모두는 A.D. 286년 10월 22일 온 몸이 칼로 난자당하였다.
영국에서는 헤르트폴트쉬어(Hertfor- dshire)의 성 알반(Alban)에서 그 이름을 딴 알반이 첫 번째 순교자였다. 영국은 최초의 그리스도인 왕이었던 루시우스(Lucius)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였다. 루시우스는 원래 이방인이었으나 암필바루스(Amphibalus)라는 그리스도인으로 인해 회심하게 되었다.
존경할 만한 형제 베데(Bede)는 알반이 순교할 때 그 집행자였다. 그때 그는 돌연 기독교로 개종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자신이 알반을 대신하여 죽거나 또는 함께 순교하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그의 청을 받아들여 그들은 알반과 베데의 목을 잘라 참수시켰다. 이 일은 A.D. 287년 6월 22일 베룰람(Verulam)에서 있었다. 지금 이곳에는 콘스탄틴 왕 당시의 그들을 기억하기 위한 장대한 교회가 세워져 있다. 현재의 이 교회는 섹슨 전쟁(Szxon wars) 때 파괴된 것은 메르시아(Mercia)와 오파(Offa)에 의해 재 건축된 것으로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는 아름다운 고딕 양식의 건축물이다.
프랑스 엑큐타인(Acquitain)의 그리스도인 자매인 페이드(Faith)는 A.D.287년 기름 가마에 던져진 후 참수형당하였다. 큐틴(Quintin)은 로마 사람으로서 루시안(Lucian)과 함께 가을에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아미엔스(Amiens)에서 설교했으며 이후에 루시안은 뷰마리스(Beaumaris)에 갔다가 순교하였다. 큔틴은 피카르디(Picardy)에 남아 매우 열정적으로 사역하다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체포되었다. 그들은 그의 정강이가 끊어질 때까지 잡아당겨지고 채찍으로 때려 살점이 떨어져 나가게 했으며 벗긴 몸에 끓는 기름을 끼얹는 등의 고문을 행하였다. 큔틴은 이런 모든 고통을 당한 후에 A.D. 287년 9월 31일 순교했으며 그의 몸은 소메(Somere) 강에 던져졌다.
초기에 행해진 열 차례의 박해 Ⅶ
영광스러운 면류관을 바라보며
10. 디오클레티안(Diocletian) 통치 하에서의 열 번째 박해(A.D. 303)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던 로마 황제들의 통치 기간에도 그리스도인들의 수와 그들의 부는 얼마간 계속 증가하였다. 이로 인해 디오클레티안의 양자였던 갈레리우스(Galerius)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증오심으로 불타서 디오클레티안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도록 설득하였다.
그 피의 역사가 시작된 운명의 날은 A.D. 303년 2월 23일로서 그 날은 테르미날리아(Terminalia)를 경축하는 날이었고, 짐승 같은 이교도들은 그 날이 기독교를 종결시키는 날이 되기를 기대하였다. 그 날로부터 박해는 소아시아의 한 도시인 니코메디아(Nicomedia)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엄청난 수의 군인들과 행정 관료들이 교회의 문을 강제로 뜯고 들어가 그곳에 있는 책들을 모조리 불사르고, 그 도시를 온통 뒤엎어 놓았다. 이런 일들은 디오클레티안과 갈레리우스의 면전에서 일어났으며, 책을 태워버리는 것에 만족하지 못한 그들은 교회 건물을 흔적도 없이 헐어버리도록 칙령을 내렸다.
이 칙령이 공포됨과 동시에 분노한 한 그리스도인이 순교당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는 그가 이 칙령이 붙어 있는 곳마다 그것을 찢어버렸을 뿐만 아니라 황제의 부당함을 부르짖으며 그를 비난하였기 때문이었다. 그의 행동은 황제를 자극하였고, 결국 그는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은 후에 산채로 화형당하였다. 이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체포되고 투옥되었다. 갈레리우스는 그리스도인들을 더욱 박해하기 위한 그럴듯한 명분을 찾기 위하여 황제의 궁을 비밀리에 방화하고 그 죄를 그리스도인들에게 뒤집어씌우기도 하였다.
로마 치하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행하던 일은 희생제물을 드리는 것이었는데, 이 일로 인하여 많은 순교자들이 생겨났다. 여기에는 남녀노소의 구별 없이 박해가 가해졌는데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이교 로마인들에게는 매우 혐오스러운 것이었다. 그들은 수많은 집들을 불태웠고 그리스도인들을 불길 속에 내던졌으며, 심지어는 사람들을 커다란 돌에 묶어 바다에 던지기까지 했다. 그 박해는 로마 전역으로 퍼져갔고, 특히 동쪽 지역에서 더욱 심하였다. 이 일은 10년간 지속되었으며, 그때 순교한 사람들의 숫자나 그들이 순교당한 방법들을 모두 열거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고문대, 채직, 칼, 톱, 처형대, 독약 등이 그리스도인들을 다루는 데 사용되었으며, 더 이상 고문하기 위한 방법들을 고안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였으나, 그들은 그것을 죄악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프리기아(Phrygia)는 도시 전체가 그곳에 살고 있던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불태워졌다. 살육하는 데 싫증난 지방의 몇몇 총독들은 황제식 법정을 열어 꼴사나운 판결을 내리곤 하였다. 많은 사람들의 형집행을 연기하여 가능한 한 그들이 단번에 처형되지 않게 하면서 서서히 그들의 삶을 비극적으로 만들곤 했던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의 귀를 베어버리고, 코를 자르거나, 오른쪽 눈을 뽑고, 손발을 꺾었으며, 벌겋게 달군 인두로 사람들의 몸을 지지곤 하였다.
이 박해 기간에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순교에 내어 던졌던 사람들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사람은 세바스티안(Sebastian)이다. 그는 골 지방의 나르본네(Narbonne)에서 태어났으며, 밀라노에서 기독교 가르침을 받았고, 후에 로마에서 황제 수비대의 장교가 되었다. 그는 우상 숭배가 기승을 부리던 가운데서도 왕궁의 화려함에 유혹되지 않았고, 악에도 오염되지 않았으며, 승진할 욕심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은 참된 그리스도인이었다. 기독교를 버리고 이교도가 되는 것을 거절한 그에게 황제는 캄푸스 마르티우스(Campus Martius)라는 도시 근교의 들로 끌고 가 활을 쏘아 죽일 것을 명령하였다. 이 명령은 곧이어 집행되었다. 그의 시신을 가져다 장사지내기 위하여 그곳에 왔던 그리스도인들은 그의 목숨이 끊어지지 않은 것을 발견하고 그를 안전한 장소로 옮겼으며, 얼마 후 세바스티안은 회복되었다. 그러나 두 번째 순교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걸을 수 있게 되자 그는 스스로 성전으로 가고 있던 황제 앞에 나타나 그의 잔인함과 기독교에 대한 비이성적인 행동의 부당함을 비난하였고, 그가 살아있다는 것을 보고 놀란 디오클레티안은 그를 잡아 때려죽이도록 하였으며, 장사지내지 못하도록 공중 하수구 속에 던져 버리게 하였다. 그러나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던 루시나(Lucina)는 그의 시신을 카타콤으로 옮겨 장례를 치르었다.
빅토르(Victor)는 프랑스 마르세이유 지방의 명망 있는 집안에서 자란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는 밤마다 고통받는 사람들을 찾아가 돌보아 주었으며, 약한 사람들을 일으켜 세워 주었다. 이런 경건한 일들은 신변을 위협하는 일이었으므로 낮에는 지속적으로 할 수 없었다. 그는 자기 재산의 대부분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사용하였다. 막시미안(Maximian) 황제의 칙령에 의하여 체포된 그는 결박된 채 거리에서 끌려 다녔고, 난폭한 성난 군중들에게 온갖 폭행을 당하였다. 고문대에 올라간 그는 하늘을 향해 하나님께 기도하며 인내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간구하였고, 놀라운 인내로 고문을 참아냈다. 고문 집행자들이 지쳐 그를 토굴로 옮겨 놓았을 때, 그는 오히려 그곳의 간수였던 알렉산더(Alexander), 펠리시안(Felician), 롱기누스(Longinus) 등을 구령하였다. 이 일이 황제에게 알려지자, 그는 즉시 빅토르를 사형시키도록 명령하였고, 그 구원받은 간수들도 참수형 당하였다.
빅토르는 또다시 고문대 위에 올려졌고, 몽둥이로 맞고 투옥되었다. 그의 종교와 관련하여 세 번째 심문을 받을 때에도 그는 자신의 신앙을 고수하였고, 그들이 작은 제단을 가져와 그에게 향을 피울 것을 명령한 때에도, 그는 즉시 거절하며 그 제단을 발로 차버렸다. 이 일로 빅토르는 맷돌에 갈려져 산산조각나 순교하였다. 이 때가 A.D. 313년이었다.
디오클레티안 황실의 고위 의전단이었던 드로테우스(Drotheus)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람들을 구령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후에 고르고니우스(Gorgonius)라는 그리스도인과 함께 순교하였다. 황실에서 살았던 내시 피터(Peter)도 매우 겸손하고 온유한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는 석쇠에 눕혀져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서서히 불에 태워지는 형을 받았다. 마술사로 알려졌던 시프리안(Cyprian)은 안티옥 출신으로서 카르타고의 감독이었던 시프리안과는 동명이인이다. 그는 젊은 시절에 자유주의 학문으로 교육받았고, 특히 점성술에 심취하였다. 그는 점성술을 더욱 익히기 위하여 그리스와 이집트와 인도 등을 여행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그가 안티옥의 젊은 여인 저스티나(Justina)와 교류하게 되면서부터 회심하였고, 자신의 점성술과 마술책들을 모조리 불태웠으며, 침례를 받았다. 시프리안의 회심은 한 이교도에게 많은 영향력을 끼쳤고, 짧은 시간에 그는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디오클레티안의 박해로 시프리안과 저스티나는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은 후 참수형 당하였다.
A.D. 303년에 박해가 스페인까지 미쳤을 때 테라고나(Terragona)의 총독이었던 다시안(Dacian)은 감독 발레리우스(Valerius)와 집사인 빈센트(Vincent)를 체포하여 인두로 지지고 투옥하였다. 그러나 두 사람의 신앙은 너무나 견고하였으므로 그들은 발레리우스를 추방하고 빈센트는 고문대에서 고문하고 갈고리로 몸을 찢은 후 석쇠 위에 올려놓고 석쇠 밑에서는 불을 피웠으며, 위에서는 대못으로 그의 몸을 관통하여 찔렀다. 그러나 이러한 고문도 그를 믿음으로부터 돌이키게 하거나 죽게 하지 못하였다. 그는 어두운 토굴 속에 던져졌는데, 그곳에는 날카로운 돌과 깨진 유리들이 바닥에 깔려 있는 곳이었다. 여기에서 그는 A.D. 304년 1월 22일 순교하였으며, 그의 시신은 강물에 던져졌다.
디오클레티안 박해는 A.D. 304년경에 특히 그 위세를 떨쳤고 이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잔인한 고문과 혹독한 죽음에 처해졌다. 이때 순교한 사트리니우스(Satrinius)는 아프리카 알비티나(Albitina)의 한 사제였다. 그는 고문 끝에 투옥되었으며, 거기서 굶어 죽었다. 그의 네 명의 자녀도 갖가지 고문을 받은 후 그들의 아버지와 같은 운명을 맞이하였다. 한편 아그라페(Agrape), 치오니아(Chionia), 이레데(Irene), 이 세 자매는 박해가 그리스에까지 다달았을 때 데살로니가에서 체포되었고, A.D.304년 3월 25일 화염 속에서 순교의 면류관을 받았다.
로마의 감독이었던 마르셀리누스(Marcellinus)는 가이우스(Gaius)의 뒤를 이은 인물로서 디오클레티안 황제에게 존경을 표시할 것을 강력히 반대하다가 순교하였다. 그때는 A.D. 324년이었는데, 그는 숱한 고문 가운데서도 자신이 받을 영광스러운 면류관을 바라보며 숨을 거둘 때까지 소망을 지니고 있었다. 빅토리우스(Victorius), 카르포포루스(Carpophoru -s), 세베루스(Severus), 세베리아누스(Severianus)는 친형제들로서 모두 로마에서 존경받는 위치에 있었다. 이방 신을 경배하는 것을 비난하다가 그들 모두는 체포되었고, 채찍으로 맞았으며, 납으로 만든 종에 묶이는 고문을 받았다. 이 형벌은 잔인함의 극치를 보여 주는 것이었으며, 이 고문으로 신실한 네 명의 형제들은 순교하였다.
마우리타니아(Mauritania)의 집사였던 디모데(Timothy)와 그의 아내 마우라(Maura)는 결혼한 지 3주일도 안되어서 박해로 인하여 헤어지게 되었다. 테바이스(Thevais)의 총독 아리아누스(Arrianus)는 디모데가 성경책을 보관하고 있음을 알고 그것을 불사르기 위하여 가지고 오라고 명령하였다. 이때 그가 대답하기를 "만약 내게 자식이 있다면 나는 그들을 희생시킬지언정 성경책은 불태울 수 없다."고 하였다. 이 대답에 화가 난 총독은 벌겋게 달군 인두로 그의 눈을 빼라고 명령하면서 "이제 그 책은 더 이상 네게 쓸모가 없게 되었다. 너는 그 책을 읽을 수 없게 되었단 말이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고문에도 놀랍게 인내하는 그를 보고, 총독은 그의 발목을 붙들어 거꾸로 매달고 입에 자갈을 물게 하였다. 이때 그의 아내 마우라는 그에게 신앙을 포기할 것을 강하게 주장하며 그의 고집을 비난하였다. 그들이 디모데에게 대답할 기회를 주기 위하여 자갈을 꺼내 주었을 때, 그는 그 아내의 간언에 동의하지 않고 그녀의 잘못된 사랑을 통렬히 비난하였고, 신앙을 위하여 죽겠노라고 하였다. 결국 마우라는 남편의 용기에 감동하였으며, 자신도 그의 영광에 동참하기로 결정하였다. 총독은 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모든 노력을 했으나, 결국에는 그를 혹독한 고문에 처하였고, 디모데와 마우라는 A.D. 304년에 십자가형을 받아 처형되었다.
3. 로마 교회에 의한 박해
지금까지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의 역사가 일차적으로 이방 세계에 의해 자행되어 온 것을 보았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기독교의 허울을 쓰고 이방 로마가 행했던 박해보다 더욱 극악한 박해를 가했던 시대를 보게 될 것이다. 복음의 정신과 가르침을 외면하고 로마 교회는 수세기 동안 무력을 앞세워 하나님의 교회를 괴롭히는 데 모든 힘을 쏟았으며, 역사에서는 이 기간을 가장 합당한 용어로 "암흑 시대"라고 부른다. 세상의 왕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그 "짐승"에게 넘겨주었으며, 로마 교회의 성직자들로 가득 찬 그 악한 망나니들에게 완전히 복종되었다.
1. 프랑스에서의 왈덴파 박해
가증한 로마 카톨릭이 전대 미문의 여러 가지 교리를 교회 안으로 들여오고, 기독교계에 암흑과 미신들을 퍼뜨리자, 이 거짓되고 파멸적인 경향을 미리 간파한 몇몇 사람들은 순순한 복음의 빛을 비추기로 결심하였고, 교활한 사제들이 사람들을 눈멀게 하고 복음의 참 빛을 흐리게 하기 위하여 일으켰던 이 모든 구름들을 일소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들 가운데 대표적 인물이 A.D. 1000년경에 살았던 베렝가리우스(Berengarius)로서, 그는 그들의 초기 순수함을 따라 매우 용감하게 복음의 진리를 전파하였다. 당시에 신앙의 신념에서부터 그의 교리에 찬성했던 많은 사람들은 베렝가리우스 파(Berengarians)라고 불렸다.
베렝가리우스의 뒤를 이어 피터 브루이스(Peter Bruis)가 나왔으며, 그는 헬데폰수스(Hildephonsus) 백작의 보호 아래 톨루스(Toulose)에서 복음을 전파하였다. 또 그는 개혁주의자들의 신념과 로마 카톨릭으로부터 분리한 이유들을 기록하여 "적그리스도"(Antichrist)라는 제목으로 책을 출간하기도 하였다.
1140년경의 개혁주의자들의 수는 매우 괄목할 만한 것이었으며, 그들이 더욱 증가할 공산이 커지자, 당시의 교황들은 크게 불안해져서 이들을 로마 교회로부터 추방하기 위하여 학식 높은 사람들을 고용하였다.
1147년에는 당시 가장 뛰어난 복음 전파자라고 여겨지는 톨루스의 헨리(Henry)로 인하여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헤네비시안즈(Henevicians)로 불렸다. 그들은 신앙과 관련한 어떤 증명에도 동의하지 않았고, 단지 성경 스스로 추론하는 것들을 믿었으므로, 로마 카톨릭 측에서는 그들을 사도 계승자들이라고 불렀다. 결국 리용(Lyons) 출신이며, 신앙심과 배움에 있어서 탁월했던 피터 왈도(Peter Waldo)는 강력한 로마 카톨릭의 반대자가 되었고, 그로 인하여 그 당시의 개혁주의자들은 왈덴파(Waldenses) 또는 왈도이스(Waldoys)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 리용의 주교들로부터 l이런 분리 운동에 대해 정보를 얻은 교황 알렉산더 3세는 왈도와 그의 추종자들을 추방시켰고, 가능하면 지구상에서 그들을 없애 버릴 것을 주교에게 명령하였다. 이로부터 왈덴파들에 대한 로마 카톨릭의 박해가 시작된 것이다. 왈도와 개혁주의자들에 대한 종교 재판이 심문관에 의해 처음으로 시작되었고, 교황 이노센트 3세는 심문관을 임명하여 그들을 심문하고 세상의 법정에 그들을 넘겨주었다. 마치 그 고소 사건이 범죄 행위에 해당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그 재판은 신속히 진행되었고, 그들에게는 공정한 심리가 허락되지 않았다.
이 잔인한 방법이 의도대로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자, 교황은 학식 있는 수도사를 왈덴파 사람들에게 보내서 설교하게 함으로써 개혁주의자들의 견해를 반박하게 하였다. 이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도미니크(Dominic)라는 수도사가 있었는데 그는 로마 카톨릭이 추구하는 목적에 극도의 열심을 내는 사람으로서 그는 수도사들로 구성된 심문관 기관을 창설하였고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강력한 것으로서 그들은 무소 불위의 권력을 향유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기만 하면 그 사람의 나이가 얼마든, 여자이든 남자이든, 계급이 높든 낮든 간에 재판에 회부하였다. 피고인은 힘이 약하였으므로 그 고발은 합법적인 것으로 여겨졌으며, 심지어는 무명으로 투서된 정보도 유효한 증거로 채택되곤 하였다.
부자가 되는 것도 이단 종파와 같은 범죄로 취급되었으므로 돈이 많았던 많은 사람들이 이단자로 고소되거나 이단 교리의 신봉자로 몰렸으며, 그들은 자신들의 견해에 대한 대가를 톡톡히 지불해야 했다. 또 투옥자들을 뒷바라지하는 가까운 친족이나 친구들도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투옥된 사람에게 약간의 밀짚이나 한 잔의 물을 건네 주어도 그들은 이단 교리를 선호하는 사람들로 몰렸고 곧이어 박해를 받았다. 자신의 혈육을 위하여 감히 변호할 수 있는 변호사도 없었으며 로마 교회의 적의는 무덤 너머에까지 확대되어 죽어 매장된 사람의 뼈를 파내어 태우면서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그 말로를 지켜보게 하였다.
죽은 사람도 왈도의 추종자로 고소되면 그의 모든 재산들이 몰수되었고, 재산 상속자를 속여 그들 중 몇 명을 '성지'(Holy Land)로 보내어 그 집과 재산을 도미니칸 수도사들이 취하였다가 주인이 돌아오면 그들을 모르는 체 하곤 하였다. 이러한 박해들이 수세기 동안 여러 교황들과 카톨릭 교회의 고위 성직자들에 의해서 자행되어 왔다.
2. 알비겐파(Albigenses)에 대한 박해
알비겐파 사람들은 알비(Albi)라는 지역에 거주하면서 개혁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을 말한다. 그들은 라테란 공의회(Council of Lateran)에서 교황 알렉산더 3세의 명령에 의해 종교적인 이유로 정죄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비상한 속도로 증가하여 많은 도시들이 그들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만으로 구성되었으며 몇몇 유명한 귀족들도 그들의 교리를 받아들였다. 레이몬드, 톨루소의 백작, 포익스의 백작, 베지에르의 백작 등이 여기에 속한 사람들이다.
피터라는 수도사는 톨루소의 백작이 다스리는 지역에서 계속적인 살인을 자행하였고 교황은 그 귀족과 그가 다스리는 지역 사람들을 박해하는 데 그 살인자를 이용하였다. 이 일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교황은 전 유럽 지역에 사람들 보내어 알비겐 파 사람들을 압제하기 위한 군대를 일으키도록 종용하였고 그들이 거룩한 전쟁(Holy War)이라고 부른 이 전쟁에 참가하는 사람들에게는 안락한 생활을 약속하며 40일 동안 군대를 소집하였다. 이 전쟁에 참가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런 관대함이 십자군 성지 탈환 목적을 수행케 하였다.
톨루소의 백작을 공개적으로 굴복시키는 것이 불가능하자 프랑스 왕과 왕비의 어머니, 그리고 세 명의 대주교는 또 다른 강력한 군대를 일으켜 그 백작을 교묘히 설득하여 회의에 참석하게 한 뒤 그를 체포하여 투옥하였고 그의 적들 앞에 맨발과 머리에 아무것도 쓰지 않은 채 나타나게 하여 강제로 굴욕적인 자신의 신념을 철회하게 하였다. 그 후 알비겐 파들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가 뒤따르게 되었고 이 때 평신도는 성경책을 읽는 것을 허락지 않는 명령이 공표되었다.
1620년의 알비겐 파에 대한 박해는 극히 심한 것이었다. 1648년에는 리투아니아와 폴란드에 거쳐 무시무시한 박해가 맹위를 떨쳤다. 코삭스(Cossacka)의 야만성은 정도를 지나쳐 타르타스(Tartas)에서조차도 그들의 야만성을 부끄러워했다.
박해의 고통을 당했던 많은 사람들 가운데 아드리안 칼린스키 목사(Rev. Adrian Chalinski )가 있다. 그는 산 채로 약한 불에 오랫동안 태워졌으며, 그의 고통과 죽임당한 방법은 당시 그리스도인임을 고백했던 사람들이 우리의 구속자이신 주님의 적들로부터 참아내야 했던 그 두려움을 잘 설명해 주는 것이었다.
로마 카톨릭의 오류를 개혁하기 위한 계획들이 매우 초기에 프랑스에서 세워졌다. 3세기에 학식 높았던 알메리쿠스(Almericus)와 여섯 명의 그의 제자들은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펴기 위하여 박해받을 것을 명령하였다. 즉 하나님은 성찬식 때 떼는 빵에 존재하고 계신다는 것은 거짓이며, 재단을 쌓는 것은 우상 숭배이고, 성도를 신성시하는 것과 그들에게 분향하는 것은 미친 짓이라는 것이었다. 알메리쿠스와 그의 제자들은 순교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의도의 정당성이 인정되어 많은 오류들이 성행하는 것을 막았고, 그들의 개혁 신앙의 순수성으로 인하여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지속적으로 증가하였는데, 이 때 프랑스뿐 아니라 세계 각국에 복음의 불이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1524년 프랑스의 멜든(Melden)에서는 존 클라크(John Clark)라는 사람이 교회의 문에 방을 붙여 교황은 적그리스도라고 하였다. 이 일로 인하여 그는 즉시 체포되어 채찍으로 맞고 이마에 낙인이 찍히게 되었다.
그 후 로레라인(Lorraine)의 멘츠(Mentz)로 간 그는 조각상들을 파괴하였다는 이유로 오른 손과 코가 절단당하고 짐승에게 조각조각 찢기는 수난을 당하였다. 그는 이러한 야만적인 박해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인내력으로 견디었으며, 시편 115편을 노래하였다. 그 후 그는 불 속에 던져져 한 줌의 재가 되었다.
이 당시에 찢기고 맞고 채찍질당하고 태워져 죽은 많은 개혁 신앙의 소유자들이 있었으며, 특히 프랑스의 여러 지역과 특히 파리, 말다(Malda), 그리고 리모신(Limosin) 등지에 많이 있었다.
A.D. 1546년 피터 차포트(Peter Chapot)가 프랑스에 다량의 성경책을 들여와 공개적으로 팔았다. 이로 인해 그는 재판에 회부되었고, 형을 선고받았으며, 며칠 후에 형을 집행받았다. 얼마 후 막스(Meaux)의 한 장애자로서 페라(Pera)의 학교 선생님인 스테판 폴리오트(Stephen Poliot)와 존 잉글리쉬(John English)가 그들의 신앙을 지키다 불에 산화되었다
4. 성 바돌로메 대학살
1572년 8월 21일에 피비린내나는 극악 무도한 잔인한 행위가 시작되었다. 이것은 프로테스탄트를 단 한번에 뿌리뽑기 위해 행해진 것이었다. 그 전에는 프로테스탄트가 부분적으로만 박해를 받았을 뿐이었다. 프랑스의 왕은 프로테스탄트의 지도자인 나바(Navarre) 왕자와 자기의 자매 사이의 결혼을 거짓으로 제안했다. 이런 무분별한 결혼이 8월 18일 그 결혼을 위해 세워진 높은 무대 위에서 보오본 추기경에 의해 공개적으로 거행되었다. 그들은 주교와 함께 호화스런 만찬을 들었고 파리에서 왕과 함께 마셨다. 이로부터 4일 후 의회에서 돌아오다 왕자(콜리그니)가 양쪽 팔에 총을 맞았다. 그는 그때 그의 돌아가신 어머니의 장군이었던 모르(Maure)에게 말했다. "오 나의 형제여, 나는 지금 나의 하나님으로부터 내가 참으로 사랑받고 있음을 인식하고 있네. 지극히 거룩하신 분을 위해 내가 부상을 입었기 때문이라네." 비담(Vidam)이 그에게 도망하라고 충고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파리에 머물러 있었다. 그리고는 곧 베미어스에게 살해되었다. 그는 나중에 그 장군보다 더 용감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특정한 신호에 따라 파리 전역에서 군인들이 갑자기 살육을 시작하도록 약속이 되어 있었다. 장군을 살해하고 그들은 그를 창문을 통해 거리로 던졌으며 그의 머리를 잘라서 교황에게 보냈다. 그에게 여전히 분노하고 있던 로마 카톨릭 교도들은 그의 팔과 각 지체를 잘라서 3일 동안 거리를 끌고 다닌 후에 시 밖에 거꾸로 매달아 놓았다. 그 뒤에 그들은 수많은 존경받는 프로테스탄트들을 살해했다. 그리고는 며칠 동안 계속해서 평민들을 학살했다. 먼저 삼일만에 그들은 만 명에 달하는 모든 계급의 사람들을 살해했다. 시체들은 강으로 던져졌고 강한 급류와 더불어 피가 거리를 흘렀다. 강은 곧 피로 물들었다. 그들의 지옥 같은 분노는 너무도 거대해서 그들의 극악무도한 종교에 충성스럽지 못하다고 의심이 가는 모든 로마 카톨릭 교도들까지 살해했다. 이런 파괴는 파리에서 모든 지역으로 확산됐다.
오렌스(Orleans)에서는 1000명의 사람들과 어린이들이 살해되었고 로렌(Rouren)에서는 6000명, 멜디스에서는 200명이 감금되고, 그 후에 한꺼번에 잔인하게 살해되었다.
리용(Lyons)애서는 800명이 학살되었다. 여기서 부모에게 매달린 어린이들과 아이들을 사랑스럽게 안고 있던 부모들이 칼과 피에 굶주린, 스스로를 카톨릭 교회라고 칭하는 자들의 맛좋은 음식이 되었다. 여기서는 300명이 주교의 집에서 살해되었고, 사악한 수도승들은 그들이 매장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오거스토보나에서는 사람들이 파리에서의 학살 소식을 듣자마자 프로테스탄트들이 도망하지 못하도록 문을 닫고서 개혁 교회의 모든 사람들을 부지런히 찾아나서서 감옥에 넣고는 그런 후에 야만스럽게 그들을 살해했다. 아바리콤, 트로이, 토울로우스, 로엔과 다른 많은 곳에서도, 도시에서 도시로, 시골로, 읍으로, 온 나라 전체에 걸쳐 그와 똑같은 잔인성을 실행했다.
이런 무시무시한 대학살의 확실한 증거로써 한 양식 있고 학식 있는 로마 카톨릭교도가 쓴 다음의 흥미 있는 서술을 특별한 타당성을 가지고 여기에 제시한다.
"젊은 나바르 왕과 프랑스 왕의 자매의 결혼식(그가 말하기를)이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모든 찬사의 말들과 우정을 돈독하게 하는 말들과 사나이들 사이에서 하는 모든 신성한 맹세들이 여왕 캐더린과 왕에 의해 아낌없이 남발되었다. 그 동안 궁정사람들은 축제와 연극과 가면 무도회만을 생각했다. 마침내 성 바돌로매 전야 12시에 신호가 내려졌다. 즉각적으로 모든 프로테스탄트 집의 문들이 강제로 열려졌다. 콜리그니 장군은 시끄러운 소리에 놀라 침대에서 뛰쳐나왔다. 그때 일단의 암살자들이 그의 방으로 돌진해왔다. 베스메(Besme)가 그들을 이끌고 있었다. 그는 구이에스 집에서 종으로 길러졌었다. 베스메 장군의 가슴에 칼을 꽂았으며 또한 그의 얼굴을 칼로 그었다. 베스메는 독일인이었다. 프로테스탄트들이 그를 데려간 후에 로체슬러가 사람들이 그를 매달아 사지를 찢기 위해 데려갔다. 그러나 그는 브레탄 빌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이세의 젊은 공작인 헨리는 브로이스에서 살해되었다. 그는 후에 카톨릭 연맹을 형성시켰으며 이 끔찍한 도살이 끝날 때까지 문에 서서 '베스메! 다 됐나?'라고 크게 소리를 쳤다. 이 말에 즉시 악당들이 시체를 창문으로 던졌으며 콜리그니는 구이세의 발에서 숨을 거두었다."
"델리그니 백작도 또한 희생되었다. 그는 열 달 전에 콜리그니의 딸과 결혼을 했다. 그의 용모는 너무나 매력적이어서 악당들이 그를 살해하기 위해 왔을 때 그들에게 동정심이 일었다. 그러나 더욱 야만스러운 다른 사람들이 나중에 들이닥쳐서 살해했다."
"그 동안 콜리그니의 모든 친구들은 파리 전역에서 암살되었다. 남녀 어린이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학살되었으며 모든 거리는 숨이 끊어지는 시체들로 흩뿌려져 있었다. 어떤 사제들은 한 손에는 십자가를 다른 한 손에는 단검을 들고서 살인자들의 우두머리들에게 가서 친척이나 친구들도 봐주지 말라고 그들을 훈계하였다."
"프랑스의 사령관 카바네스는 무식하고 미신적인 군인이었는데 그는 종교의 분노를 격정의 파티에 접목시켜서 파리의 전 거리를 말을 타고 돌아다니며 그의 부하들에게 소리쳤다. '피를 흘려라! 피를 흘려라! 피흘림은 5월처럼 8월에도 건전한 것이다.' 이러한 열정의 삶의 기록들이 그의 아들에 의해 기록되었는데 그의 아버지는 임종시에 그의 행동들에 대한 일반적인 고백을 했다고 했다. 사제가 놀라서 그에게 말했다. '뭐라고요! 성 바돌로메의 학살은 언급하지 마세요?' 이 말에 타바네스는 대답했다. '나는 그것을 나의 모든 죄들을 씻어 줄 칭찬받을 만한 행동으로 여깁니다.' 그런 무시무시한 생각이 거짓 종교의 영을 북돋을 수 있다!"
"왕의 궁전이 주요한 도살 장면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 나바르의 왕은 루브레에서 숙박을 하고 있었다 그의 모든 가솔들은 프로테스탄트였다. 이들 중 많은 이들이 그들의 아내들과 함게 침실에서 살해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벌거벗은 채로 도망하면서 군인들에 의해 쫓기며 궁전의 몇 개의 방들을 통과하면서 왕의 대기실까지 이르렀다. 나바르의 헨리의 젊은 아내는 무시무시한 소요소리에 잠이 깨어 무서워하며 그의 배우자와 그녀 자신의 생명을 위해 공포에 질려 반은 죽은 채로 침실에서 도망쳐 그녀의 형제인 왕의 발 앞에 엎드리고자 했다. 군인들이 즉시 뒤따라 왔으며, 공주의 눈 앞에서 그들을 뒤쫓아 그녀의 침실로 숨어 들어갔던 사람을 살해했다. 창으로 부상을 입은 다른 두 사람이 여왕의 발에 쓰러졌다. 그리하여 그녀는 피범벅이 되었다."
"드 라 로체포켈트 백작은 젊은 귀족으로 온화한 기품과 공손함과 대화하는 데 있어서의 특이한 기품으로 인해 왕의 호의를 크게 받았다. 그 날 그는 즐거움 속에서 최상의 기쁨과 용솟음치는 상상력과 함께 11시까지 그 날 밤을 보냈다. 군주는 다소간의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일종의 동정심의 발로에서 두서너 번 그에게 집에 가지 말고 루브르에 머물라고 했다. 백작은 자기 아내에게 가 봐야 한다고 말했다. 이 말에 왕은 더 이상 그에게 압력을 가하지 않고 '그를 가게 하라! 하나님께서 그의 죽음을 선언하셨음을 내가 보노라.'고 했다. 그리고 두 시간 후에 그는 살해되었다."
"열광적인 박해자들의 분노에서 도망한 프로테스탄트는 극히 드물었다. 이들 중에 약 열 살 정도의 어린아이인 라 포스가 있었다. (후에 그는 유명한 드 라 포스 사령관이 되었다.) 그가 구조된 것은 참으로 특이한 일이었다. 그의 아버지와 형과 그는 앤쥬 공작의 군인들에 의해 모두 포위되었다. 이 살인자들은 이 세 사람에게 들이닥쳐서 닥치는 대로 그들을 쳤다. 이 때 그들 모두는 쓰러져서 차곡차곡 쌓였다. 비록 죽은 것처럼 보였을지라도 가장 어린아이었던 그는 단 한 방도 맞지 않았으며 다음 날 도망쳤다. 그리하여 그의 생명은 놀랍도록 보존되었으며, 85년 동안 지속되었다."
비참한 희생자들 중에 많은 이들이 물가로 도망쳤다. 어떤 이들은 세느 강을 너머 성 저메이네의 교외로 헤엄쳐 갔다. 왕은 강이 내려다보이는 자신의 창에서 그들을 보았다. 그리고는 그의 종들 중의 하나가 이런 목적을 위해 장치해 둔 카빈총으로 그들을 쏘았다. 반면에 살육의 와중에서도 동요되지 않고 평온을 유지하는 여왕은 발코니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살인자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며 살육된 자들의 죽어 가는 신음 소리에 웃음을 보냈다. 이 야만적인 여왕은 격동하는 야망에 불타고 있었으며 이 야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계속해서 그녀의 담을 바꾸었다.(?)
이런 무시무시한 조처가 있은 지 며칠 후에 프랑스 궁정은 그것을 법의 형태로 변명코저 했다. 그들은 중상으로 대학살을 정당화시키는 체 했으며 사령관을 공모 혐의로 비난했다. 그러나 아무도 그것을 믿지 않았다. 의회는 쿠리그니에 대한 화상을 반대하도록 위탁받았다. 그의 죽은 몸은 몬포콘 교수대에 사슬로 매달려 있었다. 왕은 이 놀랄 만한 모습을 보기 위해 직접 갔다. 그의 아첨꾼들 중의 하나가 그에게 뒤로 물러서라고 충고하면서 시체의 악취에 대해 불평했다. 그는 '죽은 적의 냄새가 참으로 좋구나.'라고 대답했다. 성 바돌로메 날의 대학살은 다음과 같이 새겨진 문구와 함께 바티칸의 왕의 홀에 그려져 있다. '교황은 콜리그니의 죽음을 승인한다.'
이 무시무시한 학살은 단순히 파리 시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유사한 명령이 프랑스의 모든 지역의 영주들에게 궁정으로부터 내려졌다. 그 결과 일주일 만에 약 10만 명의 프로테스탄트가 그 나라의 전역에서 조각조각 찢겨졌다. 단지 두세 명의 영주들만이 왕의 명령에 복종하기를 거부했다. 이 둘 중의 하나인 오버언의 영주인 몬트오린은 다음과 같은 편지를 왕에게 보냈다.
"폐하, 저는 제 지역의 모든 프로테스탄트를 죽이라는 폐하의 인장이 있는 명령서를 받았습니다. 저는 폐하를 너무나도 존경하기 때문에 그 편지가 가짜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만일 이 명령이 사실이라면 (정녕 그럴 수는 없지만,) 저는 폐하를 너무나 존경하기 때문에 그 명령에 복종할 수 없습니다."
로마에서는 그 기쁨이 너무나 엄청나서 그들은 하루를 축제일과 희년으로 정하고 모두가 이것을 지켰고 그들이 고안해낼 수 있는 모든 기쁨의 표현들을 드러내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그 소식을 전한 사람은 로레인의 추기경에게서 그의 불경건한 메시지 덕택에 1000 크라운을 받았다. 왕은 또한 모든 위그노들이 멸절했으리라고 생각하면서 온갖 기쁨을 나타내기 위해 하루를 지키라고 했다.
자신의 몸값으로 상당한 돈을 냈던 사람들도 즉시로 살해되었다. 보호와 안전에 대해 왕의 약속을 받았던 몇몇 도시들은 그 약속을 근거로 왕의 장군들에게 자신들을 내 주자마자 목이 잘려나갔다.
보덱스에서는 설교 중에 카톨릭 교인들에게 살육하라고 충동질을 하곤 했던 악한 수도승의 부추김으로 264명이 잔인하게 살해되었다. 그들 중의 몇 명은 상원의원이었다. 비슷한 신앙심의 또 다른 우애단체가 메인의 아겐디컴에서 유사한 학살을 행했다. 거기서 종교 재판관들의 사탄적인 제안으로 시민들이 프로테스탄트에게 돌격해서 그들을 살해하고 그들의 집을 약탈하고 그들의 교회를 무너뜨렸다.
구이세 공작은 브로이스에 들어서자마자 그의 군인들에게 약탈품에 달려들며 그들이 찾아낼 수 있는 모든 프로테스탄트들을 죽이거나 익사시키도록 했다. 이 말에 그들은 나이나 성별을 가리지 않고 여자들을 더럽힌 후 그들을 살해했다. 거기서 그는 미레에 가서 똑같은 폭동을 며칠 동안 자행했다. 여기서 그들은 카세보니우스라는 관료를 발견하고 그를 강에 던졌다.
안쥬에서 그들은 관료인 알비아커스를 살해했으며, 많은 여인들이 더럽혀지고 거기서 살해되었다. 그들 가운데 두 자매가 있었는데 그들 아버지 앞에서 추행을 당했다. 암살자들은 그들을 볼 수 있도록 벽에 묶어 놓은 후 그들과 그 아버지를 살해했다.
투린의장은 자신의 목숨 값으로 많은 돈을 지불했음에도 곤봉으로 잔인하게 두들겨 맞았으며, 옷이 벗겨지고, 강에서 거꾸로 매달렸다. 그가 죽기 전에 그들은 그의 배를 가르고 내장을 꺼내어 강에 던졌으며, 그의 심장은 창에 꽂아 시로 가져왔다.
바레(Barre)에서도 극악한 잔인성이 행해졌다. 심지어는 어린 아이들의 배를 가르고 창자를 꺼내어 극심한 분노로 그것을 씹기도 했다. 성으로 도망했던 사람들은 항복했을 때 거의 모두가 교수형에 처해졌다. 마티스콘 시에서는 팔과 다리를 자른 후에 그들을 죽이는 것이 스포츠로 여겨지기도 했다. 방문객들을 즐겁게 해 주기 위해서 그들은 때로 "사람들이 저렇게 잘 뛰어내리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까?"라고 말했다.
펜나에서는 그들에게 안전을 약속한 후 삼백 명을 학살했다. 알비아에서는 주일에 45명이 학살되었다. 논네에서는 안전을 조건으로 항복했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무시무시한 광경이 전개되었다. 남녀가 조건 없이 무차별적으로 살해되었고, 거리는 슬픈 외침 소리가 울렸으며, 피가 흐르고 집들은 파렴치한 군인들이 던진 불로 화염에 뒤덮여 있었다. 한 여자가 숨어있던 곳에서 남편과 함께 끌려 나와서 먼저 잔인한 군인들에게 추행을 당한 후에 그들은 그녀에게 칼을 뽑으라고 명령했다. 그리고는 강제로 그녀 남편의 내장을 찌르게 했다.
사마로브리지에서 그들은 프로테스탄트에게 평화를 약속한 후 백 명 이상을 살해했다. 안티시도에서는 백 명이 살해되어 강으로 던져졌다. 오리언즈에서는 감옥에 투옥된 백 명이 분노한 군중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
지옥의 분노에서 기적적으로 도망해서 로첼레로 도망한 프로테스탄트들은 저 거룩한 악마들에게 굴복했던 이들이 얼마나 부당하게 대접받았는지를 보면서 자신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싸웠다. 다른 도시에서도 이에 용기를 얻어 그와 같이 행동을 했다. 로첼레를 쳐부수기 위해 왕은 프랑스의 거의 모든 병력을 동원해서 일곱 달 동안 그곳을 포위했다. 그들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곳의 거주자들을 거의 죽이지 못했다. 그러나 기아로 그들은 18,000명이 죽었다. 산 자들이 매장하기에는 죽은 자들이 너무나 많아서 그들은 벌레와 새들의 먹이가 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관을 교회 뜰로 가져와서 그 안에 누워서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오랫동안 그들의 음식은 그들이 풍족했을 때는 몸서리치던 것들이었다. 심지어는 사람의 살, 내장, 배설물과 가장 혐오스러운 것들이 진리와 자유를 위해 싸우는 투사들의 유일한 음식이 되었다. 그러나 세상은 진리와 자유의 가치가 없었다. 매번 공격 때마다 포위자들은 용맹스러운 환대를 받았고, 132명의 장군들과 그에 어울리는 부하들의 수를 들에 죽은 채로 남겨 두었다. 마침내 이 포위는 왕의 형제인 앤쥬 공작의 제안으로 끝이 났다. 그는 폴란드 왕으로 선포되었고 지쳐버린 왕은 쉽게 승낙했으며 좋은 조건들이 그들에게 허락되었다.
이 모든 무시무시한 대학살에서 기껏해야 두 명의 복음의 일꾼들이 연루되었다는 것은 놀랄 만한 하나님의 복이었다.
프로테스탄트들의 비극적인 고통은 자세히 설명하기에는 너무나 엄청난 것이다. 필립 드 둑스를 어떻게 다루었는가 하는 일이 그 나머지 일들을 조명해 줄 것이다. 악당들이 이 순교자를 그의 침실에서 살해한 후 그들은 그의 아내에게로 갔다. 그녀는 조산원의 도움을 받아 곧 아이를 분만할 예정이었다. 조산원은 그들에게 최소한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만 기다려 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그들은 칼자루를 이 가련한 여인에게 밀어 넣었다. 분만을 하고자 애쓰면서 그녀는 곡물 창고로 도망쳤다. 그러나 그들은 그녀를 쫓아 거기까지 가서 그녀의 배를 찌르고 거리로 던졌다. 떨어지면서 아이가 죽어 가는 어머니에게서 나왔다. 카톨릭 부랑자들 중의 하나가 이 아이를 집어서 찌르고는 강으로 던져 버렸다.
5. 낭트 칙령의 폐지와 프로테스탄트들의 죽음
낭트 칙령의 폐지로 인해 야기된 박해가 루이 14세의 통치 하에서 발생하였다. 이 칙령은 1598년 프랑스 왕 헨리가 제정한 것으로 시민권이든, 종교적이든 다른 여러 영역의 문제들과 더불어 모든 영역에서 프로테스탄트들에게 동등한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었다. 니메스 칙령에 의하여 루이 14세가 프로테스탄트들에게 보장했던 이런 모든 특권들은 그의 통치 기간 중에 충실하게 지켜졌다.
루이 14세의 즉위 시에 왕국은 내란으로 거의 다 파괴되었다. 이 중요한 시점에서 프로테스탄트들은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하리라"는 우리 주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왕의 호의를 입고서 실질적인 역할을 담당하면서 왕에게 그가 왕위에 오른 것은 그의 군대의 힘이라고 억지로 인정토록 했다. 그러나 그를 위해 싸웠던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고 보장하는 대신 왕은 그를 위해 싸웠던 그 세력이 자신을 전복시킬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서 교황의 계략에 귀를 기울이면서 자신의 최종 결정을 나타내는 규제와 법률적인 보호 박탈을 내놓기 시작했다. 로첼은 엄청난 비난과 더불어 곧 감금되었다. 몬토벤과 밀로는 군인들에 의해 약탈당했다. 교황의 사절단들이 프로테스탄트 일을 처리하도록 임명되었으며 왕의 의회를 제외하고는 그들의 명령에 대한 항변도 없었다. 이것은 일반적이고 종교적인 행동들의 뿌리를 강타했으며, 프로테스탄트라는 이유로 카톨릭 교도들을 어떤 이유에서도 고소하지 못하게 했다. 그 이후 또 다른 금지 명령이 뒤따랐으며, 전 교구에서 프로테스탄트들이 지난 20년간 했던 말과 행동들이 모두 조사를 받았다. 이리하여 감옥은 무고한 희생자들로 가득 찼으며 다른 사람들은 노예선으로 끌려가거나 추방되었다.
프로테스탄트들은 그들의 공직과 장사와 특권들과 고용에서 추방당했으며, 그리하여 그들은 자신들의 생계를 유지시킬 수단을 박탈당했다. 그들은 잔인하게도 조산원들에게까지도 자신의 일을 하지 못하게 했으며, 출산의 위기에 있는 여자들을 잔인한 카톨릭 교도들인 그들의 적들에게 내어주도록 강요했다. 그들의 자녀들은 카톨릭 교도들이 교육시키도록 데려갔으며, 7살이면 로마 카톨릭을 받아들이도록 했다. 개혁주의자들은 그들의 병자나 가난한 이들의 고통을 덜어 주는 것이 금지되었으며, 개인적인 경배도 금지되었다. 성스러운 예배는 로마 카톨릭 사제 앞에서만 행해지도록 했다. 불행한 희생자들이 왕국을 떠나지 못하도록 변방의 모든 길들이 엄격하게 경비되어졌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로 약 15만 명이 그들의 야간 경비를 피해 달아났으며, 이 암울한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 다른 나라로 이주했다.
지금까지 언급한 이 모든 것은 기존의 허가서와 같은 낭트 칙령을 단순히 위반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1685년 10월 18일, 마침내 그 칙령의 악마적인 폐지가 통과되었으며 모든 형태의 법에 대해서 22번째로 등록되었다. 즉시로 기병연대의 병사들이 전 지역에서 프로테스탄트를 찾아 다녔으며, 왕은 자신의 왕국에 어떠한 위그노도 허락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그들은 자신의 종교를 바꿔야한다는 소식이 전 프랑스를 가득 메웠다. 이 소식에 전 교구의 감독관들(로마 카톨릭 행정관들과 프로테스탄트를 감시하는 스파이들)은 개혁주의 거주자들을 모아놓고 그들에게 말하기를 자의든지 강요에 의해서든지 지체 없이 카톨릭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프로테스탄트들은 그들의 목숨과 토지를 왕에게 희생할 준비는 되어 있으나 그들의 양심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마음대로 할 수 없노라고 했다.
즉각적으로 군대가 도시의 문과 거리를 포위했으며 손에 칼을 든 경비병들이 모든 길에 배치되었고 "죽음이 아니면 로마 카톨릭 교인"이라고 외쳐댔다. 곧 그들의 종교를 바꾸도록 하는 데 그들이 창안해 낼 수 있는 모든 사악함과 무시무시한 일들을 자행했다.
그들은 남자 여자 모두를 머리와 발을 매달아 놓고서 그들이 거의 죽게될 때까지 건초로 연기를 피웠으며, 만약 그들이 자신의 신앙을 철회하기를 거절하면 그들을 다시 매달아 놓고서 죽이지도 않고 그들이 고문으로 기진맥진해질 때까지 만행을 저질렀으며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을 강제로 굴복시켰다. 다른 사람들은 머리와 수염을 핀셋으로 잡아뜯겼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큰 불에 집어 던졌다가 다시 끄집어 내었다하면서 그들이 자신의 신앙을 철회하겠다고 약속할 때까지 이런 짓을 반복했다.
그들은 어떤 사람들을 발가벗겨서 가장 수치스러운 모욕을 주고, 머리부터 발까지 핀으로 찔렀으며, 주머니칼로 그들을 절개시켰다. 때로는 벌겋게 달군 핀셋으로 그들이 돌아서겠다고 약속할 때까지 코를 찔렀다. 때로는 아버지들과 남편들을 묶어 놓고 그들의 눈 앞에서 그들의 아내와 딸들을 강간했다. 수많은 사람들을 유해한 지하 감옥에 감금해 놓고서 온갖 종류의 고문을 비밀리에 자행했다. 아내와 자녀들은 수도원에 감금시켰다.
도주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숲에서 추적되었으며, 들에서 사냥되었고, 들짐승들처럼 총에 맞았다. 어떠한 상황이나 재능도 이 지옥의 군단의 흉포함에서 그들을 보호해주지 못했다. 심지어는 의회 의원들과 군 장교들까지도 실제 업무 중에 일을 그만두고 자신들의 짐들을 이 폭풍에 견디도록 직접 보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왕에게 불평하는 이들은 바스티유 감옥으로 보내졌으며 거기서 그들도 같은 잔을 마셔야만 했다. 주교들과 감독관들은, 선교사들과 승려들과 다른 성직자들과 더불어 군대 맨 앞에서 행진하며 그들의 "거룩한" 교회가 매우 기뻐하고 그들의 신인 악마와 전제 군주에게 매우 영광스러운 일들을 수행하도록 군인들의 힘을 돋워 주었다.
낭트 칙령을 폐지시키고자하는 법을 제정하는데 있어서 의회는 양분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평신도뿐만 아니라 모든 사역자들을 감금시켜서 강제로 로마 카톨릭으로 개종시키자고 했다. 어떤 사람들은 사역자들의 존재가 프로테스탄트에게 힘을 공급할 것이기 때문에 그들을 추방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만약 그들이 로마 카톨릭으로 어쩔 수 없이 개종한다 해도 쟁점이 되는 문제들에 있어서 그들의 엄청난 지식과 경험으로 인해 교회 안에서 잠재적이고 강력한 적이 될 것이라고 했다. 이 주장이 우세함으로 인해서 그들은 추방형을 선고받았으며 왕국을 떠나기까지 15일의 기한이 허락되었다.
프로테스탄트의 자유를 폐기시키는 칙령이 공포된 바로 그 날 그들은 교회들을 파괴하고 사역자들을 추방시켰다. 또한 파리를 떠나는데 24시간의 여유를 허락했을 뿐이었다. 로마 카톨릭 교도들은 그들의 도피를 지연시키고자 가는 길을 방해함으로써 제한된 시간이 만료되어 프로테스탄트들이 평생을 노예로 사는 저주를 받게 하고자 했다. 항구에는 경비병들이 두 배로 증가되었고 감옥은 희생자들로 가득 찼다. 그들은 인간이 본성적으로 몸서리치는 고문을 감수해야만 했다.
노예선으로 보내진 사역자들과 다른 사람들이 겪은 고난은 극치에 달했다. 노에 묶인 채 그들은 밤낮으로 날씨와 계절에 상관없이 바깥 공기에 노출되었다. 몸이 허약해져서 그들이 노 밑에서 기절할 때면 그들을 소생시키기 위한 강장제나 새 힘을 주는 음식물대신 그들이 받는 것은 회초리와 막대기와 형구로 맞는 것뿐이었다. 충분한 옷과 필요한 청결의 부족으로 인해서 그들은 해충들에게 극심한 괴롭힘을 당했으며 추위에 혹독하게 시달렸다. 이 추위로 낮에 맞고 고문당했던 사람들이 밤에 죽었다. 그들에게는 침상대신에 아플 때나 건강할 때나 딱딱한 8인치의 널판지가 허락되었다. 덮을 것이라고는 그들의 허름한 옷뿐이었다. 그나마 그 옷들은 가장 굵고 거친 돛으로 된 빨간색 세루 조끼인 셔츠로 양쪽이 팔진동까지 다 찢기고 팔꿈치까지도 닿지 않는 올이 성긴 소매였다. 3년에 한 번씩 그들은 올이 굵은 작업복과 그들의 머리를 덮을 모자를 받았다. 그들의 머리는 항상 그들의 허약함의 표시로 간신히 유지되었다.
양식은 그들을 그런 비참함에 처하게 한 사람들의 동정심만큼이나 적게 나왔으며 아플 때에 그들을 어떻게 대하는가는 너무나 놀라워서 말조차 못할 지경이었다. 그들은 어두운 홀의 널판지 위에 누워 죽음을 기다리며 온몸은 해충으로 뒤범벅이 된 채 있어야 했다. 그리스도의 사역자들과 정직한 사람들로서 그들이 참아 내야만한 것은 중죄인과 가장 저주스러운 악당들 옆에 나란히 사슬에 묶인 채 하나님을 저주하는 소리를 끝없이 들어야만 하는 것이었다. 이런 두려움은 가장 작은 것에도 속하지 않는 것이었다. 만약 그들이 미사를 경청하기를 거부하면 그들은 매질형을 선고받았다. 그리고는 무시무시한 벌이 그 뒤를 이었다. 그 벌을 준비하는 것으로 먼저 사슬이 벗겨지고 희생자들은 회교도들의 수중으로 넘겨진다. 그들은 노를 관할하는 자들로 발가벗겨 큰 대포의 축포에 올려놓고 움직이지 못하도록 한다. 그동안 노예선에는 무시무시한 침묵만이 흐른다. 사형집행인으로 지정된 모슬렘 인은 그 희생물이 그의 선지자 마호메트가 기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거친 곤봉이나 매듭이 있는 채찍으로 이 가련한 희생자를 가장 잔인하게 매질해서 살점이 뼈에서 찢겨져 나가고 거의 죽기 직전까지 만든다. 그런 다음 매우 괴롭게 하는 식초와 소금 혼합물을 사용해서 그들의 잔혹함 하에서 수천 명을 죽게 했던 가장 무자비한 병원으로 그들을 넘겨준다
6. 종교 재판
종교 개혁이 유럽 전역에 복음의 빛을 발산할 때 교황 이노센트 3세는 로마 교회에 대한 큰 불안을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수많은 심문관들을 임명했다. 이들은 로마 카톨릭 교도들이 개혁주의자들을 칭하는 소위 이단들을 심문하고 체포하고 벌하는 사람들이었다.
이 심문관들의 우두머리는 도미니크였다. 교황은 그의 권위를 더욱 존경할만한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그를 승인하였다. 도미니크와 다른 심문관들은 많은 로마 카톨릭 국가에 퍼져서 프로테스탄트들을 극도로 심하게 다루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교황은 그가 생각했던 것만큼 이 순회 심문관들이 유용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는 확고하고 정규적인 종교 재판을 담당하는 법정을 수립하기로 결심했다. 이러한 정규 법정에 대한 명령이 떨어지자 토울로스(Toulouse)시에 최초로 종교 재판소가 설치되었다. 도미니크는 그가 최초의 순회 심문관이었던 것처럼 최초의 정규 심문관이 되었다.
그 후 종교 재판소가 몇 나라에 더 세워졌다. 그러나 스페인의 종교 재판소가 가장 강력했고 가장 무시무시했다. 심지어는 스페인의 왕들조차도 다른 모든 일에 있어서는 자의적으로 행할 수 있었지만 종교 재판소의 우두머리의 세력에 대해서는 두려워하도록 가르침을 받았다. 그들이 행사하는 극도의 잔인성으로 인해 로마 카톨릭과 의견을 달리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감정을 조심스럽게 감추었다.
모든 로마 카톨릭 수도사들 중에서 가장 열성적이고 로마 교회에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사람들은 도미니크회의 수도사들과 프란체스코 수도사들이었다. 그래서 교황은 다른 종교 재판소들을 관할할 독점적인 권한을 주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하고 그에 의해 파견되고 교황 자신을 대신하는 재판관들로서 그들에게 거의 무제한적인 권한을 주었다. 그들은 이단에 관한 가장 작은 정보만으로도 그들이 타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추방하고 사형에 처하도록 허락을 받았다. 또한 자신들이 이단이라고 여기는 사람들과 성전(聖戰)을 하고 통치자들과 연합해서 그들의 군사력으로 성전을 치를 수 있도록까지 허가를 받았다.
1244년 그들의 세력은 황제 프레드릭 2세에 의해 한층 더 증강되었다. 프레드릭 2세는 자기 자신을 모든 종교 심문관들의 친구이며 보호자라고 선언하고서 잔인한 칙령을 발표했다. 즉,
1) 계속해서 고집을 부리는 모든 이단들은 화형에 처해져야 한다.
2) 회개한 "이단"들은 종신형으로 감옥에 감금되야 한다.
로마 카톨릭 종교 심문관들에 대한 확신과 황제의 이러한 열성은 유럽 전역에서 선전되고 있는 한 보도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즉 황제가 기독교를 비난하고 이슬람으로 개종할 의도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황제는 이런 보도를 반박하고 잔인성을 통해 교황에 대한 자신의 충성을 보여주고자 했다.
종교 재판소의 요원들은 3명의 심문관, 판사들, 국선 변호사, 2명의 비서, 사법권을 가진 행정 장관, 메신저, 수신인, 간수, 재산 관리인, 몇 명의 재판소 보좌관, 상담자들, 사형 집행인들, 외과 의사들, 내과 의사들, 문지기들, 그리고 비밀을 지키기로 맹세한 친구들과 방문객이었다.
이 재판소에서 맡고 있는 주요 고소 사항은 "이단"이었다. 여기서 이단이란 로마 카톨릭의 전통과 강령에 반대하는 모든 말과 글을 말한다. 마찬가지로 종교 재판도 마술사들과 통용어로 성경을 읽는 것과 유대인의 탈무드와 이슬람의 코란에 대해 취해진 고소들을 정식으로 인정했다.
모든 경우에 심문관들은 극도의 잔악함으로 재판 과정을 진행했으며, 그들을 화나게 하는 사람들을 비할 데 없는 극악무도함으로 벌했다. 프로테스탄트에게는 좀처럼 자비가 베풀어지지 않았으며, 그리스도인이 된 유대인은 안전과는 거리가 더욱 멀어졌다.
종교 재판에서 변호사는 죄수들에게 거의 소용이 없었다. 왜냐하면 의심을 받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저주의 충분한 원인이 되기 때문이었다. 또한 부유하면 부유할수록 위험도 더욱 컸다. 종교 재판관들의 잔인성의 주요 부분은 그들의 탐욕 때문이었다. 그들은 재산을 소유하기 위해 생명을 빼앗았으며 열심을 가장하여 미움받고 있는 사람을 약탈했다.
종교 재판에서 죄수는 자신을 고소한 사람이나 자신에게 불리한 증거를 하는 증인들의 얼굴을 결코 보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다. 위협과 고문을 통해 갖가지 수단이 동원되어서 죄수가 스스로를 고소하도록 했으며 그러한 수단으로 그들의 증거를 확증했다. 고급관리 중에 누군가가 반대 의견을 표하면 반대한 사람은 그 무모함으로 인해 거의 확실하게 수난자의 대열에 끼게 된다. 종교재판의 행동강령이란 테러를 자행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 권력의 대상물이 된 사람들은 두려움에 질려 복종하게 되었다. 출생이 좋다든가, 지위가 높다든가, 직업이 탁월하다든가, 인품이 고상하다든가 하는 것으로는 종교재판의 잔인함을 피할 수 있는 보호책이 될 수 없었다. 종교 재판소의 최하위 관리가 최고의 지위에 있는 인물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 수 있었다.
고발된 사람이 유죄 판결을 받게되면, 그는 심하게 채찍을 맞고 잔인하게 고문을 당한 후 노예선에 보내지거나 사형 선고를 받거나 둘 중 하나였다. 어느 경우든지 재산압수가 동반되었다. 재판 후에는 사형집행 장소까지 행렬이 전개되는데, 그 의식은 오토 다 페(auto da fe), 즉 믿음의 행위라고 불려지게 된다.
다음은 1682년 마드리드에서 행해진 "오토 다 페"에 관한 설명이다.
종교 재판소의 관리들이 트럼펫과 케틀 드럼과 깃발을 앞세우고 기마행렬을 하며 5월 30일에 대광장의 건물까지 행진을 했다. 거기서 그들은 6월 30일에 죄수들에 대한 판결이 집행될 것임을 성명서를 통해 선언했다.
이 죄수들 중에는 한 명의 변절한 모하메트 교도가 있었으며, 그와 함께 20명의 남녀가 화형에 처해지도록 명령을 받았다. 전에는 단 한번도 감옥에 갇히거나 자신들의 범죄를 회개한 적도 없는 56명의 유대인 남녀들이 노란색 모자를 쓰고 오랫동안 감금형에 처해졌다. 이 사건에 스페인의 사법계 전체가 참석했다. 대 종교 재판관의 의자가 재판에서 왕의 의자보다 훨씬 더 위에 위치해 있었다.
고통을 당하게 될 사람들 중에는 대단히 아름다운 젊은 유대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17세에 지나지 않았다. 그녀는 여왕이 위치해 있는 교수대의 같은 면에서 용서를 구하려는 마음으로 여왕에게 다음과 같은 측은한 말을 했다. "위대한 여왕이시여, 왕족인 당신의 참석은 비참한 상황에 처한 저와 같은 이에게 다소나마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제가 젊다는 것을 고려하시고, 아!, 제가 가장 초기 유아시절에 흡수한 종교를 고백한 것 때문에 죽게 된다는 것을 생각해 주소서!" 여왕은 그녀의 고통에 대단한 연민을 느끼는 것처럼 보였지만 이단이라고 선언된 사람을 위하여 단 한마디의 말도 감히 하지 못하고서 눈길을 돌려 버렸다.
그때 수석 심문관이 머리에는 주교관을 쓰고 대법의를 입고서 원형 경기장에서 내려왔다. 제단을 향해 절을 하고서 그는 왕의 발코니를 향해서 올라갔다. 몇 명의 관리들이 그를 수행했으며 그는 십자가와 미사 성찬 때 쓸 복음서의 몇 구절과 책을 들고 있었다. 그 책은 스페인 왕들이 카톨릭의 믿음을 보호하고, 이단들을 근절시키며, 그들의 모든 힘과 군대를 다해서 종교 재판소의 고발과 강령을 지지하겠다고 맹세한 책이었다. 똑같은 맹세가 상담자들과 전체 회중에게도 실시되었다. 미사는 정오 12시쯤에 시작되어서 저녁 9시까지도 끝나지 않았다. 미사는 몇몇 죄수들에 대한 판결 선언으로 연장된 것이었다.
이후에 21명의 남녀의 화형이 진행되었다. 이런 무시무시한 죽음의 고통 가운데서 보여준 그들의 용맹성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다. 왕은 죄수들 가까이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죽어가면서 내는 신음 소리를 매우 잘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끔찍한 장면을 관람하는데 빠질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러한 관람이 종교적인 행위로 존중되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의 즉위 때의 선서가 그로 하여금 거기에 참석함으로써 모든 종교재판의 행위를 지지하도록 강요했다.
우리가 이미 말했던 것은 특별히 스페인의 종교 재판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종교 재판에도 적용될 수가 있다. 포르투칼의 종교 재판도 스페인의 것과 정확히 같은 것이었다. 거의 같은 시기에 세워졌고, 같은 규칙들이 적용되었다. 심문관들은 단지 세 차례만 고문을 사용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 시기 동안에 그 고문은 너무나도 심하게 고통이 가해지기 때문에 죄수는 고문을 당하다가 죽거나 불구가 되어 날씨 변화에 따라 가장 심한 고통을 당해야만 했다. 우리는 여기서 고문에 의해 가해지는 잔인한 고통을 대충 묘사해 보겠다. 다음은 이러한 고문을 각기 3번 당하고서도 다행히 그가 겪은 잔혹함에서 살아남은 사람의 설명이다.
첫 번째 고문 시에 여섯 명의 집행관들이 들어와서 그를 속바지까지 다 벗기고서는 마루에서 몇 피트 높이에 있는 일종의 받침대 위에 그를 눕혔다. 작업은 그의 목에 철로 된 목테를 채우고 각 발에 고리를 채워 받침대에 그를 고정시킴으로써 시작되었다. 그의 사지가 펼쳐졌고 각 허벅지에 두 개의 로프가 감겨졌다. 이 로프는 교수대 아래를 지나서 이러한 목적을 위해 만들어 논 구멍을 통해 나갔으며 4명의 남자들이 주어진 신호에 맞춰 동시에 이 로프를 당겼다.
즉시로 뒤따르는 고통이 참을 수 없는 것임을 쉽게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로프는 죄수의 살을 통과해서 뼈를 절단하게 된다. 그러면 묶여진 여덟 곳에서 동시에 피가 분출하게 된다. 심문관들이 요구하는 고백을 죄수가 하지 않으면 이 로프는 연이어서 이와 같은 식으로 4번씩 당겨진다.
두 번째 고문을 가하는 방식은 다음과 같다. 팔을 등 뒤로 돌려서 손바닥이 바깥쪽을 향하게 한 후 그들 손목을 묶었던 로프를 이용해서 각각의 손을 더 가까이 당겨 손 뒤쪽이 닿게 해서 정확하게 평행으로 손을 세우는 것이다. 이렇게 폭력적으로 뒤틀음으로써 그의 양 어깨가 뒤틀렸으며 상당한 양의 피가 그의 입에서 쏟아졌다. 이런 고문이 세 번 반복되었다. 그 후에 그는 다시 지하 감옥으로 보내졌고 의사가 뒤틀린 뼈들을 다시 맞추었다.
두 번째 고문이 있은 지 두 달 후에 조금 회복된 그 죄수는 다시 고문실로 불려가서 거기서 마지막으로 또 다른 종류의 형벌을 겪어야만 했다. 이 고문은 막간도 없이 두 번 가해졌다. 집행인들은 가슴을 가로질러 손목까지 닿는 두꺼운 쇠사슬을 그의 몸에 묶었다. 그런 후에 두꺼운 판자에 그의 등을 기대게 했다. 각각의 끝에는 활차가 있어서 그것을 통과해서 팔목의 사슬 끝을 잡고 있는 로프가 달려나갔다. 그런 후에 집행인은 로울러를 이용해서 로프 끝을 펼치고는 그 뒤에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는 사슬 끝이 꽉 죄어감에 따라 배에 압박을 가하고 오그라들게 만들었다. 그들은 이런 식으로 고문을 가해서 그의 어깨뿐만 아니라 팔목까지도 완전히 뒤틀리게 만들었다. 그러나 곧 그것들은 의사들에 의해 맞춰졌다. 그러나 이 야만인들은 이러한 잔인성에 만족하지 않고 그와 같은 고문을 두 번째로 즉시 실시한다. 그는 이러한 고문을 동일한 결의와 꾸준함으로 (가능한 일이라면 더 심한 고통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버텨 냈다. 이후에 그는 다시 지하 감옥으로 보내졌고 의사가 그의 상처를 드레싱하고 뒤틀린 부분을 맞춰 주었다. 감옥에서 나오게 될 때까지 그의 "오토 다 페"는 계속되었다. 그가 풀려났을 때, 그는 불구였으며 평생을 병 속에서 살았다
7. 포루투칼과 스페인에서의 박해
윌리엄 가디너는 브리스톨에서 태어나서 26세 때 위탁 판매인으로 리스본에 있었다. 거기서 그는 구원받았다. 그는 로마 카톨릭이나 교황에 최소한의 불쾌감을 주는 일들을 조심스럽게 피했다. 그러던 중 포르투칼 왕자와 스페인 왕녀의 결혼식에 참석하게 되었다. 성당에서 진행된 이 결혼식에는 수많은 고위급 인사들과 왕실 전체가 참석했다. 거기서 그는 그가 본 미신적인 행위들로 인해 너무나도 큰 충격을 받게 되었다. 정도를 넘어선 숭배와 나라 전체가 극심한 우상 숭배에 빠져드는 것을 보고 그는 자신이 순교를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포르투칼에 개혁을 일으키든지, 아니면 경멸 속에서 죽게 되든지, 그의 신중함을 열성으로 바꾸기로 결심했다.
그는 자신의 세상적인 모든 일들을 처리하고 빚을 청산하고, 책들을 정리하고, 그의 모든 상품들을 넘겨주고, 다음 주의 첫날 손에 신약을 들고서 성당으로 갔다. 왕과 왕실 사람들이 등장하고, 추기경이 미사를 시작하고, 미사 중간에 사람들이 성찬용 빵을 숭배했다. 가디너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추기경에게 가서 그것을 빼앗아 발로 짓밟았다
전체 회중이 이 행동에 놀랐으며, 한 사람이 단도를 꺼내어 그의 어깨를 찔렀다. 왕이 그만 두라고 하지 않았다면 그는 아마도 거기서 죽었을 것이다.
가디너가 왕 앞에 끌려왔을 때, 군주가 그에게 어느 나라 사람인가를 물었다. 그는 대답하기를 "저는 영국인이며 프로테스탄트로서 직업은 상인입니다. 제가 한 행동은 결코 폐하의 인격을 경멸하는 것이 아니라 우스꽝스러운 미신들과 엄청난 우상 숭배가 여기서 행해지고 있는 것을 본 정직한 분노에서 기인한 것입니다."라고 했다.
왕은 다른 사람의 부추김으로 그가 이런 행동을 한 것으로 생각하고 선동자가 누구인가를 물었다. 이 질문에 그는 "제 자신의 양심뿐입니다. 제가 한 행동으로 다른 사람의 삶을 위협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 때문입니다."라고 했다.
그는 감옥으로 보내졌고, 리스본에 있는 모든 영국인들을 체포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수많은 무죄한 사람들이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일로 고문을 당하고 자백을 강요당했다.
가디너에게도 심한 고통을 주는 고문들이 가해졌지만 그는 자신의 행동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는 사형 선고를 받았고 교수대 옆에 큰 불이 지펴졌으며 활차로 거기에 운반되었다. 그리고는 불에 닿지 않을 정도의 거리에 그를 두고 느린 속도로 그를 불에 그을렸다. 그는 고통을 참을성 있게 견디었으며 자신의 혼을 주께 기꺼이 내 맡겼다.
가디너를 살랐던 불의 불꽃이 항구 쪽으로 가서 왕의 전함들 중 하나를 태우고 상당한 다른 손해들을 끼쳤다는 사실은 특이할 만하다. 가디너가 죽은 뒤에 이 사건으로 잡힌 영국인들은 풀려났지만, 가디너와 같은 집에 살고 있던 사람은 자유를 얻기까지 2년을 갇혀 지냈다.
스코틀랜드 태생의 윌리엄 리드고우의 삶과 고통
리드고우는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유럽 전역을 다니던 중 스페인의 마라가에 이르러 거기서 알렉산드리아로 가는 프랑스 배에 승선하려 던 중 작은 사건으로 잠시 거기에 머무르게 되었다. 영국 군함이 터키 배로 오인되는 바람에 그 도시의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했으나 결국 오해가 풀린 일이 있었다.
그 영국 군함에는 리드고우가 잘 아는 몇몇 사람들이 있어서 리드고우를 군함에 초대했다. 며칠을 그들과 함께 지낸 후 해변에 내려서 그의 숙소로 가던 중 그는 갑자기 9명의 장교들에게 둘러싸여 사령관의 집으로 납치되었다. 즉 스파이로 오인된 것이다. 이 모든 일들이 시내의 영국 상인들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극비리에 진행되었다. 특히 사령관은 그를 배반자며 스파이라고 말하면서 그가 영국을 이롭게 하고 스페인에게 악영향을 끼칠 계획을 돕고 있으며, 스페인 함대가 인도에서 돌아오는 때를 알기 위해 세빌에 9개월 간을 머무른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가 배의 장교들을 알고 있었으며 지나치게 그들이 예의바른 것에 트집을 잡았다.
그는 비밀리에 사령관의 집으로 옮겨졌다. 그들은 그에게 강철을 지우고 1야드 길이의 철봉으로 그의 다리를 늘렸다. 그것이 너무나 무거워서 그는 설 수도 없었으며 계속해서 등을 대고 누워 있어야만 했다. 그리고 그들은 계속해서 여러 차례의 심문을 통해 자백을 강요했다. 마침내 그는 고문실로 인도되어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심한 고문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는 다시 지하 감옥으로 옮겨졌다.
며칠 후에 사령관과 한 명의 심문관과 교회법에 따른 사제가 두 명의 예수회 회원과 지하 감옥에 와서 질문을 했다. 심문관이 그에게 그가 로마 카톨릭인지 교황의 최고 권위를 인정하는지를 물었다. 그는 둘 다 아니라고 말했으며 영국과 스페인의 평화조약에 의해서 영국 국민은 누구라도 심문을 받아서는 안됨이 분명하게 규정화되었음을 강조했다. 그는 고통 속에서도 그의 환경과는 어울리지 않는 따뜻한 표현을 사용했다. "당신들은 거짓되이 꾸민 반역이라는 이유로, 거의 나를 살해할 지경에 이르게 하고 이제는 나의 믿음을 이유로 나를 순교자로 만들 셈이로군." 또한 1588년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스코틀랜드 해안에 좌초되었을 때 스페인 사람들에게 참으로 고귀한 인간애가 실천되어 그들이 안전을 얻었음을 상기시켰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은 비참하게 죽었을 것이다.
사령관은 리드고우가 한 말이 사실임을 인정했지만, 거만한 태도로 그 때 당시 스코틀랜드만을 다스리고 있었던 왕이 사랑보다는 두려움 때문에 그렇게 행동했으며, 그러므로 감사할 가치가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예수회 회원 중 하나가 그에게 말하기를 "너는 스파이로 붙잡혀서 반역죄로 고소되어, 우리도 인정하지만 무죄하게 고문을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심판을 네게 가져오신 이는 하나님의 섭리였다. 왜냐하면 오만하게도 로레토의 축복된 기적을 웃음거리로 여기고, 지상에서 그리스도의 대사이며 위대한 대리인인 거룩한 교황을 부당하게 표현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그 후 그들은 이 죄수에게 8일간의 생각할 여유를 주고 그의 종교의 개종 여부를 결정하라고 했다. 예수회 회원이 십자 성호를 그으며 말했다. "나의 아들이여 보라, 너는 산채로 불에 태워져야 마땅하지만 네가 신성을 모독한 우리의 로레토의 은혜로 너의 혼과 몸을 살려 두리라."
다음날 다른 3명의 성직자들이 와서 그로 개종하지 못하게 하는 무엇이 그의 양심에 있는지를 물었다. 그가 대답하기를 "나는 내 마음에 어떠한 의심도 없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약속들을 신뢰하고 복음 속에 나타난 그의 계시된 뜻을 확실하게 믿으며 개혁된 카톨릭 교회에서 공언하는 것처럼 은혜로 확실시된 그리스도인의 믿음을 절대적으로 확신한다."고 했다. 이 말에 심문관은 "너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다만 터무니없는 이단일 뿐이다."라고 했다. 리드고우는 무례한 말과 고문대와 고문으로 마음을 바꾸는 것은 종교의 본질과 정수에 위배되며, 성경에서 표출된 논쟁에 의하지 않은 어떤 다른 방법으로도 그는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심문관은 리드고우의 대답에 너무나 분개해서 그의 얼굴을 치고 악한 말들을 하며 그를 칼로 찌르려고 했다. 예수회 회원들이 그를 저지하지 않았다면 그는 분명히 그렇게 했을 것이다.
다음날 두 명의 예수회 회원이 와서 그가 어떻게 결정했는지를 물었다. 리드고우는 자신의 의견을 바꿀만한 실질적인 이유들을 그들이 보여줄 수 없다면 그의 결정은 이미 확정되었다고 말했다. 가장 고참자가 그들의 일곱 가지 성사를 보이고 성도들의 중보와 성면화(성찬의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것)와 그들 교회의 전통과 확고함과 보편성을 자랑했다. 리드고우는 이 모든 것을 거부했다. "왜냐하면 (그가 말하기를 내가 가진 믿음의 표현은 사도들의 시대 이후로 계속되어 왔고) 그리스도께서는 당신들의 가장 큰 어둠의 시대에서도 자신의 교회를 (그러나 보이지 않음)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들의 논쟁이 바라는 만큼의 효과가 없음을 알고, 또한 고문으로도 그의 태도를 바꿀 수 없고, 잔인한 형을 선고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어쩔 수 없음을 알고 그들은 심한 악의를 표한 뒤 그를 떠났다. 그러나 형이 선고되어지던 날 그들은 다시 와서 이번에는 말과 행동에서 완전히 다른 태도를 보이며 눈에는 눈물까지 글썽이며 그가 끔찍한 죽음을 겪어야만 하는 것을 그들 마음 깊이 유감스러워 하는 듯이, 그리고 가장 귀한 혼을 잃게 되는 것을 애통해 하는 듯이 무릎을 꿇고 소리쳤다. "오 사랑하는 형제여 개종하라." 이에 리드고우는 "나는 죽음도 불도 두렵지 않다. 둘 다 준비되었다."고 했다.
그가 받아야 할 형은 네 번의 서로 다른 고문이었다. 만약 그가 이후에도 살아 남게 되면 그는 부활절 이후로 그레나다로 옮겨져 화형에 처해지기로 결정되었다. 그 날 밤 이 선고의 처음 부분이 대단한 야만성과 더불어 행해졌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몸과 마음에 힘을 주사, 진리에 굳게 서게 하시고 그에게 가해진 무시무시한 형벌들 속에서도 살아남게 하셨다.
이와 같은 비참한 상황 속에서 한 터키인 노예가 그에게 비밀리에 건포도와 무화과를 가져다 주었다. 리드고우가 살아 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 노예가 리드고우의 비참한 상황에 마음이 움직여서 40일 이상을 계속해서 음식을 나르고 그를 돌봤기 때문이라는 것은 특기할 만하다.
그러던 중 스페인 신사 한 명이 그레나다에서 마라가로 왔는데, 사령관에게 초대를 받아 리드고우가 당한 모든 것을 듣게 되었다. 즉 스파이로 오인된 리드고우가 무죄하다는 것이 밝혀졌을 때, 그는 자신의 돈과 서류들과 부상에 대한 어느 정도의 대가를 받고 풀려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저서들을 조사하던 중, 그들의 종교에 비춰볼 때 신성 모독적인 저작물들이 발견되었고, 이런 이단적인 의견들을 바꾸기를 거절함으로써 종교 재판에 회부되어 마침내 사형이 결정되었다는 것이다.
사령관이 이 비극적인 이야기를 하는 동안 식탁에서 시중을 들던 플란더즈 젊은이가 알지 못하는 사람의 고통으로 인해 놀라움과 연민에 사로잡혀 그 주인의 숙소로 돌아와서 그 밤을 그 죄수를 생각하며 보내다가 다음날 시로 가서 영국 상인 윌드를 찾아 그 이야기를 다 해 주었다.
곧 윌드는 다른 영국 상인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영국대사를 통해 스페인 왕에게 전체 사건을 알렸다. 그리하여 왕과 스페인 의회에 리드고우의 기록들이 보내졌고 결국 그는 석방되었다. 리처드 호우킨 경이 리드고우의 서류들과 돈과 책들을 돌려 줄 것을 요구했지만 만족할 만한 답변을 얻을 수 없었다. 리드고우는 그의 왼쪽 팔을 잃었고 작은 몇 개의 뼈들이 부서지고 부러져서 그 이후로 불구의 몸이 되어 버렸다. 그는 영국이 유럽의 나라들과 왕들에게 노예의 굴종 상태가 될 위험에 처해 있었던 그 평화 통치 기간 동안 영국 의회에서 참으로 대단히 큰 영향을 끼쳤다.
8. 이탈리아에서의 박해
이제 이탈리아에서의 박해에 관해 살펴보겠다. 이탈리아는 지금까지,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1) 로마 카톨릭의 중심이며, 2) 교황의 자리이며, 3) 다른 나라에 자신들을 퍼뜨려서 수천의 마음을 미혹하고 인간의 명철에 미신과 편협함을 보급시킨 다양한 오류들의 원천이다.
로마 카롤릭의 박해는 1) 교황의 즉각적인 권력과, 2) 종교 재판의 힘과, 3) 특별한 성직자 계급의 부추김과, 4) 이탈리아 영주들의 편협을 통해 행해져 왔다.
가브리아에서의 박해
14세기에 프라그라와 아우피니의 많은 사람들이 가르라로 이주해서 그곳의 귀족들의 허가를 받아 몇몇 황무지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들은 부지런히 경작을 해서 황야와 불모지를 신록이 우거진 비옥하고 아름다운 곳으로 만들었다. 가브리안의 영주들은 이 새 백성들과 소작인들에 대해 대단히 만족했다. 왜냐하면 그들이 정직하고 조용하며 근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곳 사제들은 이들에 대해 몇몇 부정적인 불평을 했고, 그들 자신들과 같이 행동하지 않은 것을 들어 비난하며 다음과 같은 이유로 고소하기에 이르렀다. 즉 그들이,
1. 로마 카톨릭이 아니라는 것,
2. 그들의 아들 중 아무도 사제가 되게 하지 않았다는 것,
3. 그들의 딸들 중 아무도 수녀가 되게 하지 않았다는 것,
4. 미사에 참석하지 않으며,
5. 그들의 사제들에게 헌물로서 밀랍초를 주지 않으며,
6. 순례지를 여행하지 않으며,
7. 우상들에게 절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가브리안 영주들은 이 사람들이 지극히 무해하며 로마 카톨릭을 해치지도 않으며 사제들에게 기꺼이 십일조를 내며, 그들이 이 나라에 옴으로 해서 그들의 수익이 상당히 증가했으며 결론적으로 그들에게 불평해서는 안된다고 말함으로써 사제들을 잠잠케 했다.
이후로 몇년동안 상황이 관용적으로 진행되는 동안 왈도파들은 두 개의 합병된 도시를 세우고 몇몇 마을들을 그들의 사법권 안으로 병합시켰다.
마침내 그들은 두 명의 성직자를 부르려고 제네바로 사람을 보냈다. 한 명씩 각 도시에서 설교를 하게 하고, 그들이 가진 그들의 믿음을 공식적으로 고백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사실이 교황에게 알려지자 피오 4세(Pius the Fourth)는 가라브리아에서 그들을 박멸하기로 결심했다.
이런 목적으로 그는 다른 두명의 수도승과 함께 알렉산드리노 추기경을 가라브리아로 보냈는데, 그는 매우 폭력적인 기질의 자인하고 편협한 사람이었다. 거기서 그들은 종교 심문관으로 활동하기로 되어 있었다. 권한을 위임받은 이 사람들은 왈도파들이 세운 도시 중의 하나인 세인트 식스트로 가서 사람들을 모아 놓고 교황이 임명한 설교자들을 받아들이면 그들에게 아무런 해가 없을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재산과 생명을 모두 잃을 것이라며 미사에 참석하기를 강요했다.
세인트 식스트 사람들은 미사에 참석하는 대신 가족들과 함께 숲으로 도망하였다. 그러자 추기경은 왈도파의 또 다른 도시인 라 가드로 가서 먼저 문들을 잠그고 모든 거리에 경비를 세우고서는 세인트 식스트에서 했던 것과 똑 같은 제안과 거기에 덧붙여져 세인트 식스트 거주민들은 즉각적으로 그 제안을 받아 들였으며 교황이 그들에게 설교자를 임명해 주는 것을 동의했다는 교활한 거짓말을 했다. 이런 거짓 계획은 성공했다. 왜냐하면 라 가드 사람들은 추기경이 그들에게 사실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세인트 식스트의 그들 형제들의 본을 따르기로 했기 때문이다.
한쪽 도시의 사람들을 미혹시킴으로써 자신의 목적을 달성한 추기경은 다른 쪽 도시의 사람들을 살해하기 위해 숲으로 군대를 보내어 들짐승들처럼 세인트 식스트 거민들을 사냥했으며, 성별이나 나이에 상관없이 모두 죽이라는 엄한 명령을 내렸다. 그들의 계획을 알기도 전에 왈도파들은 그들의 포악함에 희생되었다. 그러나 마침내 그들은 가능하면 자신들의 형벌을 더 귀하게 쓰기로 결심하고 몇몇 전투를 개시하여 반무장한 채 놀라만한 용기를 보여주었으며, 그 결과 양편에 많은 사상자를 내게되었다. 그리하여 추기경은 나폴리 영주에게 지원군을 요청했다. 그 영주는 즉각적으로 모든 범법자들과 탈주자들과 다른 규정된 사람들이 세인트 식스트 거민들을 대적하는 캠페인을 하고 이 사람들이 모두 박멸될 때까지 계속 군복무를 한다는 조건으로 그들의 죄를 확실히 용서해 줄 것이라는 포고문을 나폴리 전역에 알렸다. 그리하여 수 많은 사람들이 모아졌으며 그 영주도 정규군의 사령관으로 추기경과 합류해서 숲에 있는 가련한 사람들을 괴롭힐 수 있는 모든 일을 행했다. 어떤 사람들은 잡아서 나무에 매달아 놓고 그 나뭇가지들을 잘라 불에 태웠으며 사람들을 발가벗겨서 들짐승들과 새들의 먹이가 되게 했다. 많은 사람들이 총에 맞아 죽었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오락용 게임으로 사냥되어졌다. 극소수만이 동굴 등에 자신을 숨겼지만, 기아에 희생되었다. 그리하여 이 가련한 사람들은 모두 여러 다양한 방법들로 죽임을 당하여 자비심 없는 박해자들의 편협한 악의를 채우는 데 희생되었다.
세인트 식스트 거민들이 박멸되자마자 추기경과 영주는 관심을 라 가드의 사람들에게로 돌렸다. 만약 그들이 로마 카톨릭의 주장을 포용하면 그들과 가족들은 해를 입지 않고 집과 재산을 다시 회복하며 아무도 그들을 간섭하지 않을 것이나, 반대로 이런한 자비를 거절한다면 가장 극단적인 수단으로 그들이 고분고분하지 않은 대가로 가장 잔인한 죽임을 당하리라는 제안이 제기되었다.
한편의 약속과 다른 면에서의 악의에도 불구하고 이 존경할 만한 사람들은 만장일치로 그들의 믿음을 저버리거나 로마 카톨릭의 오류를 수용하기를 거부했다. 이에 추기경과 영주는 너무나 격노해서 그들 중 30명을 즉각 고문대로 옮겨 나머지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주고자 했다.
고문대로 옮겨진 사람들은 너무나 잔혹하게 다루어져서 몇 명이 고문 중에 죽었다. 특히 찰린이라는 사람은 너무나 잔혹하게 다루어져서 그의 배가 파열되어 내장들이 밖으로 나왔으며 가장 극심한 고통 속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러한 야만성은 그들이 의도한 목적을 충족시키지 못했다. 왜냐하면 고문 이후에도 살아남은 사람들과 고문을 당하지 않은 사람들이 다같이 자신들의 믿음을 지키며 대담하게 육체의 고문이나 마음의 두려움으로는 그들의 하나님을 비난하거나 우상에게 경배하도록 할 수 없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그뒤 추기경의 명령으로 몇 명이 완전히 발가벗겨져서 철 채찍으로 채찍질을 당했으며 어떤 사람들은 큰 칼로 조각조각 잘려졌으며 어떤 이들은 큰 탑 꼭대기에서 던져졌으며 많은 사람들이 역청을 뒤집어 쓴 채 산 채로 화형당하였다.
추기경을 방문한 수도승들 중의 하나는 천성적으로 야만적이고 잔인한 기질의 사람이었는데 추기경에게 요청하여 이 가련한 사람들의 피를 자신의 손으로 직접 흘리게 해달라고 했다. 그의 요구가 허락되자 그는 큰 칼을 꺼내어 80명의 남녀와 어린이들의 목을 잘랐는데 그와 같은 수의 양들을 도살할 때 도축업자가 갖는 것만큼의 양심의 가책도 받지 않았다. 모든 시체들이 네 조각으로 잘려져서 기둥에 매달린 채 30마일 내의 마을에 세워졌다.
라 가드의 4명의 지도자가 목 매달렸으며, 성직자는 교회 탑 꼭대기에서 던져졌다. 그는 심하게 난도질당했으며 단순히 떨어져 죽은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영주가 지나가면서 말하기를 "아직도 그 개가 살아 있나? 그를 데려다가 돼지들에게 주라."고 했다. 잔인하게도 그대로 시행되었다.
60명의 여인들이 너무나 폭력적으로 고문을 받았다. 가는 줄이 그들의 팔과 다리를 죄어 들어가 뼈까지 이르렀으며 감옥으로 옮겨졌을 때 그들의 상처난 부분이 국부적으로 죽어감으로써 가장 비참한 방법으로 죽었다. 다른 사람들도 많은 다양한 방법으로 죽음에 처해졌다. 만약 어떤 로마 카톨릭 교도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동정적이어서 개신교도들 사이에 끼여들면 그는 즉각 체포되어 이단들에게 호의를 베푼 것으로 인해 그와 똑같은 운명에 처해졌다.
영주와 추기경은 각각의 이유들로 인해 다시 나폴리와 로마로 오라는 명령을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가라브리아에는 개혁 종교를 가진 사람 중 살아 남은 사람은 한 명도 없게 되었다.
무해하고 악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소유와 재산을 빼앗기고 자신들의 집에서 쫓겨나서 마침내 다양한 방식으로 살해되었는데 그 이유는 단순히 그들이 자신들의 양심을 다는 이들의 미신에 희생하기를 거부하고 그들이 증오하는 우상 숭배적인 교리들을 허용치 않고 그들이 믿을 수 없는 교사들의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 때문이었다.
전제 군주에는 3가지 종류가 있다. 즉 사람을 노예로 삼는 것과, 재산을 탈취하는 것, 마음까지 규정하고 독재하는 것이다. 처음 두 가지는 시민 군주로 불려지며 전 시대에 걸쳐 임시적인 절대권으로 행해져 왔으며 그들은 사람들을 고문하고 그들의 불쌍한 백성들의 재산을 도둑질하기를 즐겼다. 그러나 마음을 규정하고 독재를 하는 세 번째 종류는 교회 군주로 불리는데 이것은 앞의 두 가지를 포함하는 가장 나쁜 군주이다. 왜냐하면 로마의 사제들은 그들이 박해하는 사람들의 몸을 고문하고 재산을 탈취할 뿐만 아니라 생명을 취하고 마음을 고문하고 가능하면 불쌍한 희생자들의 혼에까지 권세를 누리려 하기 때문이다.
9. 존 위클리프의 생애와 박해
"개혁의 샛별"로 불리는 개혁주의자 위클리프는 에드워드 2세 때인 약 1324년 경에 태어났다. 그는 옥스포드 퀸즈 대학을 다녔다. 그 대학은 그 기간에 퀸 필리피의 고해 신부인 로버트 이글스필드에 의해 세워졌으나, 이 학교에서 그가 기대했던 만큼 공부의 도움을 얻지 못하자 모튼 대학으로 다시 옮겼다.
대중이 처음으로 그에게 주의를 기울인 사건은 그가 구걸하는 탁발 수도사들에 대항해서 대학을 변호한 것이었다. 1230년 옥스퍼드에 정착한 이후로 그 때 당시 수도사들은 대학에 큰 골치 거리였고, 그들과 계속해서 불화가 있었다. 수도사들은 교황에게 호소했고 학자들은 민권에 호소했다. 때로는 이편이, 때로는 저편이 우세했다. 탁발 수도사들은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이 평범한 거지였으며, 구걸은 복음 단체에서 나온 것이라는 개념을 선호했다. 그들은 강단과 그들이 접근할 수 있는 모든 곳에서 이런 교리를 주장했다.
위클리프는 그들의 삶이 게으른 것으로 인해 이 종교적인 탁발 수도사들을 경멸했으며, 이런 사실을 폭로할 좋은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는 이런 구걸을 대항해서 논문을 발표했으며, 이들을 비난하고 그들이 종교뿐만 아니라 인간사회에도 수치거리임을 증명했다. 대학당국은 그를 대학의 첫 번째 투사들 중의 하나로 여겼고 그는 곧 발리올 대학의 학장이 되었다.
이 즈음 이스립 대주교가 켄터베리 홀을 설립했는데 거기에 한 명의 관리인과 열 한 명의 학장을 두게 되었으며, 이 관리직에 위클리프가 뽑혔다. 그러나 주교가 죽자 그 자리는 엘리의 주교 스테펜 랭함으로 대체되었다. 그 일에서 상당한 불이익을 당한 위클리프는 교황에게 호소했다. 그러나 교황은 결국 다음과 같은 이유로 그에게 반대했다. 그때 당시 영국의 왕이었던 에드워드 3세가 존 왕 때부터 교황에게 지불되어 왔던 종교세를 철회했다는 것이다. 교황은 협박을 했고 에드워드는 의회를 소집했다. 의회는 존 왕이 불법을 행했으며 국가의 권리를 포기했다고 결정하고 어떠한 결과가 따르든지 항복하지 말라고 왕에게 충고했다.
성직자 층은 즉시 교황을 변론하는 글을 쓰기 시작했으며, 한 학식 있는 수도사는 그럴싸하고 힘찬 논문을 발표했고 많은 지지자들을 얻게 되었다. 그렇게 나쁜 명분이 그렇게도 잘 변호되는 것을 보고 분노한 위클리프는 그 수도사에게 맞서서 매우 훌륭한 방법으로 그가 더 이상 반박할 수 없게 했다. 로마에 대한 그의 고소로 그는 곧 적대시되었다. 참으로 중요한 시기에 그는 교황에게 반대했으며, 그는 로마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위클리프는 나중에 신학교수의 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는 로마 교회의 오류들과 수도사들의 타락을 완전히 인식하고 그것들을 폭로하기로 결심했다. 공공 강연에서 그는 그들의 악을 비난하고 그들의 어리석음을 반대했다. 그는 미신으로 덮여진 수많은 폐해를 드러냈다. 처음에는 대중의 편견을 풀어나가기 시작했고, 차츰 나아가서는 그 시대의 형이상학적인 논문들과 종교적인 소설을 사용하여 그의 의견을 나타냈다. 로마 법정의 강탈이 그가 즐겨 쓰는 주제였다. 이런 것들에 대해 그는 신랄하고도 장황하게 상술하면서 논리적 사고를 합류시켰다. 이것은 곧 성직자들 사이에 논란을 야기시켰으며, 그들은 위클리프에게서 캔터베리 주교직과 관직을 박탈했다.
이번에는 랭카스터 공작이 그 일을 처리할 권한을 갖게 되었다. 그는 가운트의 존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었는데, 이 공작은 종교에 있어서 매우 자유로운 개념을 가지고 있었고 성직자들에게 적의를 가지고 있었다. 로마 법정의 부당한 요구들이 매우 부담스럽게 여겨졌던 차에 그는 뱅거의 주교와 위클리프를 보내어 이런 폐해들에 대해 항의하기로 결심했다. 또한 교황은 영국 교회에 속한 어떤 교회 수입도 더 이상 처리할 수 없도록 결의되어졌다. 이러한 사명을 띠고 위클리프는 주의 깊게 로마 체제와 정책에 들어갔으며,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로마의 탐욕과 욕망을 폭로하기로 결심하고서 돌아왔다.
그의 전 위치를 회복한 위클리프는 그의 강의에서 교황의 횡령과 그의 무오성과 그의 자존심과 그의 허욕과 그의 전제를 맹렬히 비난했다. 그가 교황을 적그리스도라고 이름붙인 첫 번째 인물이었다. 교황에 이어 그는 주교들의 겉치레와 사치스런 옷차림 등에 대해서도 비평하였다. 그들의 미신과 속임수는 그가 지성과 논리적 명확성을 가지고 말했던 주제들이었다.
랭카스터 공작의 보호 하에 위클리프는 좋은 보수를 받았으나 그가 그의 교구에 정착하자마자 그의 적들과 주교들이 새로운 힘으로 그를 박해하기 시작했다. 에드워드 3세가 죽은 후에 그의 손자 리차드 2세가 열 한 살의 나이에 그 뒤를 이었다. 랭카스터 공작은 그가 기대했던 대로 하나뿐인 대리인 자리를 얻지 못하게 되었으며 그의 세력은 쇠퇴하기 시작했고 위클리프의 적들은 이런 환경을 이용해서 그를 대항하여 고소의 목록들을 새롭게 작성했다. 결국 교황이 왕과 몇몇 주교들에게 교서를 보냈으나 섭정자와 국민은 교황의 오만함에 경멸을 표했다. 그때 당시 교황은 예상되는 프랑스의 공격을 저지하는데 돈이 부족함으로 인해 상당한 돈을 충당해 줄 것을 제안했고, 교황이 쓰기 위해 돈은 징수되어졌다. 이 문제가 위클리프의 결정에 맡겨졌다. 그러나 주교들은 교황의 권위로 지지를 받고 있었으므로 위클리프를 재판에 회부할 것을 주장했고 실제로 그는 람베스에서 심문을 받았다. 그 때 밖에서 민중이 일으킨 소동과 궁정 신사인 레위스 클리포트 경의 명령에 겁을 먹은 그들은 명확하게 형을 집행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교황에게 불쾌한 교리들을 설교하지 말라고 위클리프에게 금지 명령을 내림으로써 전체 사건을 종결지었다. 그러나 우리의 개혁주의자에게 이것은 웃음거리 밖에 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는 맨발로 돌아 다니며 긴 프리즈 가운을 입고 전보다 더 열렬히 설교했기 때문이다.
1378년에 이반 6세와 무시무시한 교황이며 '하나님의 대리자'로 자처했던 클레멘트 7세 사이에 경쟁이 일어났다. 이 때가 위클리프의 재능을 발휘할 호기였다. 그는 곧 교황권에 반대하는 소책자를 만들어 냈는데 그것은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열렬히 읽혀졌다.
그 해 말에 위클리프는 폭력적인 무질서에 사로잡혔다. 구걸하는 탁발 수도사들이 가장 적대심이 강한 옥스포드의 시민들 중 4명을 동반하고 그의 침실로 들어와, 목숨을 부지하려면 그가 주장했던 부당한 것을 철회하라고 그를 다그쳤다. 위클리프는 이 엄숙한 전갈에 놀랐으나 침대에서 일어나 확고한 태도로 응답했다. "나는 죽지 않겠소, 대신 살아서 수도사들의 악행을 알리겠소."
위클리프가 회복됐을 때, 그는 가장 중요한 일을 시작했다. 즉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는 일이었다. 이 일을 하기 전에 그는 이 일의 필요성을 담은 소책자를 만들었다. 성경을 억압하는 주교들이 열심히 그것을 샀으며 복사본을 구입할 수 없었던 사람들은 특별한 복음서나 서신서들을 베낀 것을 입수했다. 나중에 롤라드(위클리프파 그리스도인들)가 증가되었을 때, 이런 성경 조각들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발견된, 저주받은 이단의 목을 조르는 것은 일반적인 관행이 되었다.
이 일이 있은 후 곧 위클리프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화체설(transubstantiation)(성찬의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것)의 교리를 침범했다. 이런 '이상한' 의견은 파스차드 래드버트가 고안한 것으로 놀랄 만큼 대담하게 주장되어졌다. 위클리프는 1381년 옥스포드 대학 강의에서 이 교리를 공격하고 이것을 주제로 논문을 발표했다. 이 때 옥스포드 대학 부총장이었던 바튼 박사는 대학의 수뇌들을 소집해서 위클리프의 교리들을 이단으로 정죄하고 파문하겠다고 협박했다. 위클리프는 랭카스터 공작으로부터 더 이상 지지를 받을 수 없었고, 전에 그의 적이었으며 그때는 캔터베리의 대주교가 된 윌리엄 코트니 앞에 나오라는 소환 명령을 받았다. 그는 자신이 대학의 한 구성원으로서 교황의 사법권에서는 면제되었다고 말했으며, 이 변호는 받아들여졌다. 왜냐하면 대학은 자신의 구성원을 지지하도록 되어있었기 때문이었다.
정해진 시간에 재판이 열렸고 최소한 그의 의견들에 대한 판결을 내리기로 결정이 되어졌다. 어떤 사람들은 잘못이 있다고, 어떤 사람들은 이단이라고 비난했다. 이 문제를 공표하자마자 위클리프가 즉시 답변했다. 대주교에게 부추김을 받은 왕은 '이단 선생' 즉 위클리프의 감금을 허락했으나 하원은 이러한 행동이 불법이므로 왕에게 취소하도록 했다. 그러나 대주교는 옥스포드 대학의 학장으로 하여금 위클리프가 쓴 모든 '이단' 교리들과 책들을 찾도록 지시하는, 왕으로부터 온 편지들을 입수했다. 그런 명령의 결과로 대학은 소란스럽게 되었다. 위클리프는 이 폭풍을 피해 외딴 곳으로 물러나야만 했다. 그러나 씨는 뿌려졌고 위클리프의 의견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어반은 교서를 공표해서, 종교를 높히 여기는 모든 사람들은 이 명분을 위해 싸우며, 거룩한 교황좌를 수호하고 클레멘트와 그의 지지자들을 대항하여 무기를 들라고 촉구했다.
종교라는 이름으로 전쟁이 심하게 악용되었으며, 위클리프의 쇠퇴기에 그를 힘써 싸우도록 자극했다. 그는 다시 펜을 들어 가장 신랄하게 글을 썼다. 그는 매우 자유로운 방식으로 교황을 타이르고 대담하게 그에게 요구하기를 "어떻게 그가 십자가의 그리스도의 상징을 (그것은 평화와 자비와 사랑의 상징인데) 두 명의 가짜 사제들의 사랑을 위해, 그리스도인들을 살해하도록 이끄는 깃발로 사용하며 그리스도와 그의 사제들이 유대인들에게 압박 받았던 것 보다 더 심하게 기독교계를 압박하는데 사용할 수 있는가? 로마의 오만한 사제는 언제쯤 인류가 평화와 사랑 안에서 살도록 관대함을 보일 것인가?"라고 했다.
이런 심한 글은 어반의 분노를 일으켰으며, 그가 전에 겪었던 것보다 더 큰 고난들을 그에게 겪게 했다. 그러나 섭리적으로 그는 그들의 세력에서 구출되었다.
위클리프는 형벌과 비밀리에 갇혀 지냈던 곳에서 풀려나 루터워스의 그의 교구로 돌아갔다. 거기서 그는 그의 삶을 조용하게 끝마쳤으며 1384년 말에 주 안에서 평화로이 잠들었다.
10.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화형장의 존 후스"
교회의 권력을 강탈해 온 로마 성직자들의 횡포가 보헤미아에서는 특히 심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A.D. 977년에 교황에게 시정을 요구하며 2명의 사역자와 4명의 형제들을 로마로 보냈다. 얼마 후 그들의 요구는 받아들여졌고, 불평의 원인이 시정되었다. 특히 그들은 두 가지를 허락받았는데, 그들 자신의 언어로 예배를 드리는 것과 성사 때 평신도에게도 잔을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논란들은 다시 재개되었다. 후임 교황들은 자신의 권력을 보헤미아인들에게 행사하고자 했고, 보헤미아인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자유를 보존하기 위해 노력했다.
A.D. 1375년 복음에 열성적인 이들이 보헤미아의 찰스왕에게 교회 의회를 소집할 것을 요구했는데 그 이유는 교회에 스며든 폐해들을 조사해서 완전한 개혁을 단행하자는 것이었다.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랐던 왕은 교황에게 사람을 보내어 지침을 얻고자 했으나, 교황은 이 사건에 너무나 분개해서 도리어 "이 저돌적이고 악한 이단들을 엄히 처벌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따라서 그 군주는 이 사건에 연관된 모든 사람을 처벌했으며, 교황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 사람들의 종교적 자유를 제한하는 수많은 부가적 조치를 취했다.
박해의 희생자들은 존 후스(John Huss)와 프래그의 제롬(Jerome)이 화형될 때까지는 그렇게 심하지 않았다. 이 두 명의 탁월한 개혁가는 교황과 그의 사절들의 부추김으로 정죄받고 사형에 처해졌다.
존 후스(John Huss)
존 후스는 보헤미아의 후센니츠라는 마을에서 1380년경에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환경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그에게 최상의 교육을 해 주었다. 사립학교에서 고전에 관한 지식을 습득한 후 그는 프래그의 대학에서 지적 능력을 쌓았다.
1398년에 후스는 신학사(B.D.) 과정을 시작했으며, 후에 프래그에 있는 베들레헴 교회의 목사로, 대학 총장으로 지정되었다. 그 일을 그는 성실하게 수행했으며 마침내 설교자로서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그의 설교는 위클리프의 교리와 일치했기 때문에 교황과 그의 추종자들이 그를 주시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후스가 조금도 주저함 없이 그들을 맹렬히 비난했기 때문이다.
영국의 개혁주의자인 위클리프가 개혁에 불을 붙여서 교황권의 가장 어두운 부분과 무지에 빛을 비추기 시작했다. 그의 교리는 보헤미아까지 퍼졌으며 많은 사람들이 수용하였다. 그 중에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존 후스와 그의 열성적인 친구이며 동료 순교자인 프래그의 제롬이다.
개혁주의자들이 날마다 증가하는 것을 보고 프래그의 대주교는 위클리프의 저서들이 확산되지 못하게 하는 칙령을 공포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영향을 미쳤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 교리를 따르는 사람들을 더욱 자극하여 그들이 오히려 이 교리를 널리 퍼뜨렸기 때문이다.
위클리프의 교리를 강력하게 수호했던 후스는 대주교의 칙령을 거부했다. 그러나 대주교는 마침내 교황의 교서를 얻어내었다. 그 교서로 대주교는 그 지역에서 위클리프의 교리들을 출판하지 못하도록 하는 권한을 위임받았다. 대주교는 또한 위클리프의 복사물들을 유포하지도 않았던 네 명의 박사들에게 소송을 일으켰으며, 그들의 특권에도 불구하고 회중에게 설교를 금했다. 후스 박사는 대학의 몇몇 다른 구성원들과 함께 이런 절차에 항거했고 대주교의 판결에 항소하게 되었다.
이 사건이 교황에게 알려졌고, 교황은 콜로나 추기경에게 권한을 위임하여 존 후스를 로마 법정에 직접 출두시켜서 그가 거짓과 이단을 설교했다고 고소하고, 후스로 하여금 그러한 고소에 대해 변호하게 했다. 그러나 후스는 직접 출두하지 않기를 원했으며, 또한 보헤미아에서 그를 크게 사랑했던 윈세스로스 왕과, 여왕, 귀족, 대학 당국은 교황이 그런 출두 명령을 철회해 주기를 바랐다. 그들은 또한 보헤미아가 이단이라는 고소를 받지 않기를 원했으며, 그들의 경배 장소에서 자유로이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허용되기를 원했다.
세 명의 사무 변호인이 후스 박사 대신 콜로나 추기경 앞에 나왔다. 그들은 그가 출두하지 않은 것을 변호하고자 했으며, 후스 박사 대신 답변할 준비가 되었음을 알렸다. 그러나 추기경은 후스가 오만불손하다고 선언하고 그를 파문시켰다. 사무 변호인들은 교황에게 항소했고, 네 명의 추기경이 이 문제를 조사하기 위해 지정되었다. 그러나 이 위원회는 이 전 판결을 더욱 확증했을 뿐이며 후스뿐만 아니라 그의 모든 친구들과 추종자들까지도 파문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부당한 판결에 후스는 위원회에 호소했지만 소용없었다. 이런 심한 판결을 받고, 프래그에 있는 그의 교회에서 추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의 고향인 후센니츠로 가서 그의 새로운 교리를 강단에서, 그리고 글로 계속해서 발표했다.
이 시기에 그가 쓴 글들은 상당히 많다. 프로테스탄트의 책들을 읽는 것은 절대적으로 금지될 수 없다는 논문을 편찬하기도 했다. 그는 삼위일체에 관한 위클리프의 책을 변호하는 글을 썼으며 부패한 교황과 추기경들과 성직자들의 악행을 담대하게 말했다. 그는 또한 강력한 논쟁이 수록된 다른 많은 책들을 썼다. 이것은 그의 교리들이 확산되는 데 크게 기여했다.
1414년 11월 독일 콘스탄스에서 전체 위원회가 소집되었는데, 이 위원회는 외적으로 교황권에 맞선 3사람 사이에서 미결정된 논란을 결정하기 위해서였지만 실제로는 개혁의 진행을 짓밟고자 하는 것이었다.
존 후스는 이 위원회에 출두하도록 소환되었다. 그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기 위해 황제는 그에게 안전 통행권을 보냈다. 후스가 여행 중에 사람들로부터 받은 찬사와 존경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거리와 작은 길들에서조차도 사람들은 그가 지나가는 것을 보기 위해 줄지어 서 있었는데, 이는 호기심이기보다는 존경의 표시였다.
그는 큰 환호성과 함께 각 도시에 안내되었으며, 일종의 승리감 속에서 독일을 통과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추방자였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나의 최악의 친구들이 보헤미아에 있음을 안다."
후스가 콘스탄스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시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유숙했다. 그가 도착한 지 얼마 후 스테판 팔레츠라는 사람이 왔다. 그는 후스에게 고의적인 박해를 가하기 위해 프래그의 성직자가 고용한 사람이었으며, 나중에 그는 로마법정에서 보낸 미카엘 드 카시스와 합류했다. 이들은 자신들을 그의 고소자로 자처하고 후스를 대적하여 일련의 조항들을 만들어 교황과 위원회의 고위 성직자들에게 제출했다.
후스가 그 시에 있다는 것이 알려지자 그는 곧 체포되어 궁정 관리에게 넘겨졌다. 이러한 일반 법과 정의의 위반에 대해 후스의 친구들 중 한 사람이 특히 주의를 기울여 군주의 안전 통행권을 요청했으나 교황은 이를 거부했고 군주의 안전 통행권도 거부되었다.
후스가 감금되어 있는 동안 위원회가 종교 재판관들의 역할을 감당했다. 그들은 위클리프의 교리들을 저주했으며 심지어 그의 유골을 파헤쳐 태워 재로 만들 것을 명령하기까지 했는데, 이러한 명령들은 쾌히 허가되었다. 그동안 보헤미아와 폴란드의 귀족들은 후스를 위하여 강력하게 중재에 나서서 그를 정죄하지 못하게 했으나, 그를 재판하기 위해 임명된 위원들은 그에게 유죄를 선언했다.
그가 위원회 앞에 섰을 때 그에게 고소된 조항들이 낭독되었는데, 40개 이상이나 되는 그 조항들은 주로 그의 저술들에서 발췌한 것이었다.
존 후스의 답변은 다음과 같았다. "나는 교황에게 호소했으나, 그는 죽었고, 결정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이 문제의 명분을 그의 후임자인 존 13세에게 호소하는 바이다. 나의 지지자들이 2년 정도 교황 앞에서 나의 명분을 변명할 기회를 허락해 주지 않았기에 나는 대재판장이신 그리스도께 호소하였다."
존 후스가 이 말을 마치자 그들은 그에게 교황의 결정을 받아들였는지 여부를 물었고, 그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다시 그들은 그가 그리스도께 호소한 것이 합법적인지 물었고, 이에 존 후스는 답변하기를 "진실로 내가 여기 여러분 모두에게 확언하는 것은 그리스도께 하는 호소보다 더 정의롭고 효과적인 호소는 없다. 그리스도보다 더 높은 재판관이 누구인가? 누가 이 문제를 더 정의롭고 더 공평하게 알고 판단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 안에는 속임수도 없으며, 그는 속임을 받지도 않으신다. 누가 그분보다 비참하고 압제받는 자들을 더 잘 도울 수 있는가?"
존 후스가 경건하고 분명한 표정으로 이 말을 했을 때, 전체 위원회는 그를 조롱하고 비웃었다.
이런 훌륭한 말들은 반역의 말로 여겨졌고 그의 대적자들을 격분시켰다. 따라서 위원회에서 지정한 주교들이 그의 성직자복을 벗기고 그를 모욕하며 종이 주교관을 그의 머리에 씌웠다. 거기에는 마귀들이 그려져 있었고 "이단들의 주동자""고 쓰여 있었다. 그는 이것을 보고 말하기를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위하여 가시관을 쓰셨다. 그렇다면 비록 굴욕적이긴 하나 그를 위하여 내가 이 가벼운 관을 쓰는 것이 당연하지 아니한가? 진정으로 나는 기꺼이 이것을 쓰겠다."라고 했다. 그의 머리에 이것이 씌워졌을 때 주교는 말하기를 "이제 우리는 너의 혼을 마귀에게 넘겨주노라."고 했다. 그러자 존 후스는 눈을 들어 하늘을 보면서 "그러나, 오 주 예수 그리스도여! 주께서 대속하신 나의 영을 주의 손에 의탁하나이다."라고 말했다.
화형대의 사슬에 묶였을 때, 그는 웃으면서 말하기를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위하여 이보다 더 심한 사슬에 묶이셨는데, 내가 왜 이 녹슨 사슬을 부끄러워하리요?"라고 했다.
장작이 그의 목까지 쌓였을 때 바바리아 공작은 그에게 자신의 신앙을 포기하라고 했다. 그러나 후스는 대답하기를 "나는 결코 악을 지향하는 교리를 설교한 적은 없다. 내가 내 입으로 가르쳤던 것을 이제는 나의 피로 인치게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사형 집행인에게 말했다. "당신은 거위 한 마리를 불사르려하고 있다. [보헤미아어로 후스(Huss)는 거위를 나타낸다.] 그러나 1세기 후에는 구울 수도 삶을 수도 없는 백조가 나타날 것이다."고 했다. 그가 미래를 예견한 것이라면, 그는 마틴 루터를 의미했음이 틀림없다. 그는 약 100년 후에 빛을 발했으며, 백조를 문장으로 가지고 있었다.
불이 나무에 붙었고 우리의 순교자 후스는 크고 쾌활한 소리로 찬송을 불렀다. 그 소리가 나무들이 타는 소리를 뚫고 들리다가 마침내는 심한 불꽃에 가려 들리지 않게 되었다.
사람들은 그의 재를 모두 모아서 라인 강에 뿌렸고, 지상에 그의 흔적이라고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있는 그에 대한 기억은 물로도, 불로도, 어떤 종류의 고문으로도 없앨 수 없으리라
11. 프래그의 제롬에 대한 박해
존 후스 박사의 동료이며 같은 순교자인 이 개혁가는, 프래그에서 태어나 프래그 대학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큰 학식으로 두각을 드러냈다. 유럽의 다른 신학교들, 특히 파리대학, 하이델버그, 옥스포드 등을 방문하면서 그는 위클리프의 저작들을 알게 되었고 많은 책들을 자신의 모국어로 번역했으며, 많은 노력 끝에 영어에 능통하게 되었다.
프래그에 돌아온 후 그는 자신이 위클리프에게 동조한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드러냈다. 그의 교리들이 후스로 인해 보헤미아에서 상당히 발전했음을 알고 제롬은 이 위대한 개혁에서 후스를 돕기로 했다.
1415년 4월 4일 후스가 죽기 약 석달 전에 제롬은 비밀리에 콘스탄스로 갔다. 그가 도착한 사실이 알려지자 공의회는 그를 붙잡고자 했다. 그는 뒤로 물러서는 것이 현명함을 알고서 다음날 콘스탄스에서 약 1마일 떨어진 황제의 도시 아이버링으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에게 안전통행권을 주면 공의회에 나가겠다는 서신을 황제에게 보냈으나 거부되었다. 공의회에도 같은 요청을 했으나 답변은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는 힐소우에서 한 장교에게 체포되었다. 슐츠박 공작 하에 있던 그 장교는 공의회의 환심을 사기 위해 그럴 권한이 없는데도 그를 체포했다.
제롬을 손아귀에 쥔 슐츠박 공작은 지시사항을 얻기 위해 공의회에 편지를 보냈다. 공의회는 공작에게 감사를 표한 뒤 그를 즉시 콘스탄틴으로 보내줄 것을 요구했다. 제롬은 긴 사슬로 된 차꼬에 묶여 즉시 이송되어 무시무시한 지하감옥으로 옮겨졌다.
제롬은 후스가 당한 것과 거의 같은 대우를 받았다. 마침내 공의회 앞에 서게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의 소인에 대해 변호할 기회를 요구했지만 거부되자 다음과 같이 외쳤다.
"얼마나 야만적인가! 나는 340일 동안 수많은 감옥에 감금되었다. 나는 모든 궁핍과 인색함을 경험했다. 나의 적들에게는 비난의 기회를 실컷 부여하고 내게는 최소한의 변호의 기회도 주지 않다니, 당신들은 내 재판에서 전혀 나를 준비시키지 않은 채 악랄한 중상을 한다. 당신들은 나의 교리를 알지도 못하면서 나를 이단으로, 내가 고백하는 믿음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나를 믿음의 적으로, 사제들에 대한 나의 마음도 이해하지 못한 채 나를 사제들의 박해자로 몰아붙였다. 이곳은 대공의회다. 이곳에 대해서 세상은 위엄과 지혜와 고결함을 이야기하지만, 여전히 당신들은 사람들에 지나지 않으며 사람들은 외모에 치우치게 마련이다. 지혜가 있다고 자부할수록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도록 더 주의해야 한다. 내가 변호하는 명분은 나 자신의 명분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의 명분이다. 이것은 후손들의 권리에 영향을 끼칠 명분이며 나 자신이 그 시험대 위에 있다."
이 연설은 전혀 효력이 없었으며, 제롬은 다음과 같은 죄목으로 고소당했다.
1. 교황의 위엄을 조롱하는 자
2. 교황의 반대자
3. 추기경들의 적
4. 고위 성직자들의 박해자
5. 기독교를 증오하는 자.
제롬에 대한 재판은 그가 고소당한 삼일째에 열렸고, 그 고소에 동의하는 증인들이 증언했다. 죄수는 스스로 변호를 준비했다. 그가 340일 동안 음침한 감옥에 갇혀 빛으로부터 차단되고 생필품의 부족으로 아사 직전임을 감안해 볼 때 그것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의 정신만은 이 모든 불리한 조건들을 뛰어넘었다.
그 집단의 가장 완고한 자는 그의 변호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다수에 의해 그는 자신을 변호할 기회를 부여받았다. 그의 감동적이고 고양된 연설은 시작부터 고집센 마음을 녹이고 미신에 찌든 마음에 찔림을 주었다. 그는 사실에 기초한 증거와, 악의와 중상에 근거한 증거를 분명하게 구별지었다. 그 모임 앞에서 그는 자신의 생애와 행동의 전체행로를 보여 주었다. 그는 진리와 덕을 철회시키고자 하는 그의 적들에게 경멸을 표했다. 그는 후스를 극찬하고 순교자의 영광스러은 발자취를 따를 준비가 되었음을 선포하였으며, 위클리프의 변호할 만한 교리들을 언급하고서, 자신은 추호도 하나님의 교회를 거스르려 하지 않았으며, 자신이 불평한 것은 성직자의 폐해와, 원래는 자선과 자비를 목적으로 했던 교회 재산이 사치스러운 의복과 눈의 만족에 사용된다는 사실이라고 말함으로 결론을 맺었다.
재판이 끝나자 제롬은 순교자들의 발자취를 따라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관례적으로 교황의 겉치레에 따라 시민의 세력으로 넘겨졌다. 그러나 그가 평신도였기 때문에 강등 의식은 하지 않았다. 빨간 마귀들이 그려진 종이 모자가 그의 머리에 씌워졌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위해 가장 비참한 죄인이 죽어야 할 죽음을 겪으셨으며 가시관을 쓰셨다. 그분을 위해 나는 이 모자를 쓰겠다."라고 했다. 신앙을 철회할 2일 간의 기간이 그에게 주어졌다. 그 기간 동안 프로렌스의 추기경이 그를 개종시키기 위해 최상의 노력을 했다. 그러나 제롬은 자신의 피로 자신의 교리를 인치기로 결심하고 죽음을 맞이했다.
사형장으로 가면서 그는 찬송가를 불렀으며, 후스가 화형당했던 바로 그 장소에 이르자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그는 쾌히 화형대에 묶였다. 장작에 불을 지피기 위해 사람들이 그 뒤에 왔을 때 그는 "오냐, 내 눈 앞에서 불을 붙여라. 내가 그것을 두려워했다면 여기 오지 않았을 것이다."고 했다.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고, 그가 부르는 찬송가는 이내 화염 소리에 가려졌다. 그의 마지막 말은 "화염 속의 이 혼을 주 그리스도께 바칩니다."였다.
프로렌스의 학식 있는 신사이며 교황의 비서이며 열성적이면서도 자유주의적인 카톨릭신자 포그는 레오나드 아로틴에게 쓴 편지에서 제롬을 위대한 사람으로 인정했는데, 거기에는 제롬의 특이한 능력들과 덕에 대한 방대한 증거들이 있다.
12. 마틴 루터의 생애와 박해
마틴 루터는 1481년 11월 10일 맨스필드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광부였으며, 루터는 어려서부터 글을 배웠고, 1501년에 어퍼트(Erfurt)대학에 갔다. 거기서 논리학과 철학을 공부했으며 20세 때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과 윤리학 그리고 다른 철학의 일면들을 강의했다. 후에 부모의 권유로 법률을 공부했다.
어느 날 들을 지나다가 번개가 치는 바람에 그가 땅에 쓰러졌고 그의 동료는 죽는 일이 있었다. 이 일로 그는 세상과 단절하고 어거스틴 수도원에 들어가 은둔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 수도원에서 우연히 라틴어 성경을 발견해서 읽다가 성경의 너무 많은 부분이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어퍼트 수도원에서 성직자 서원을 하고 1507년 첫 번째 미사를 인도하게 되었다. 1년 후 비텐베르크 대학으로 옮겨가게 되었고 거기서 같은 성직자였던 노신부에게서 죄들의 사함에 대한 말을 듣게 되었다. 즉 모든 사람들의 죄가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됨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말에 그는 힘을 얻었고 바울이 그렇게도 여러 번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뜻을 알게 되었다. 그곳에서 공부하면서 그는 자신이 과거에 배웠던 해석이 헛된 것임을 알았고 계속적인 기도와 믿음을 통해 그 교리를 더욱 확고히 해 나갔다.
1512년 일곱 개의 수도원 성직자 사이의 다툼으로 인해 루터는 로마로 가게 되었다. 로마에서 그는 성직자 제도의 실상을 직접 보게 되었다. 그 문제가 해결된 후 비텐베르크에 돌아와서 신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자신이 받은 소명에 더욱 전념하게 되었다.
루터는 열심히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님의 아들에게로 돌이켰고, 죄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사랑으로 인하여 값없이 사해졌으며 우리는 이 선물을 받아들여야 함을 명백하게 드러내었다.
그의 삶은 그의 말과 일치했다. 그의 거룩한 삶으로 그의 말을 듣는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이게 되었다.
특히 그는 헬라어와 히브리어에 열중했으며, 그러던 중 로마 카톨릭은 1517년 면죄부를 발행했다. 레오 10세는 로마에 있는 베드로 성당을 건축할 계획으로 유럽 전역에 면죄부를 발행했던 것이다. 이 일은 비텐베르크에서 반발을 야기시켰으며, 특히 루터는 위험을 무릅쓰고 이 일을 반대하기로 결심했다.
1517년 어느 날 밤 면죄부에 대한 논문을 정리해서 교회에 공개적으로 제시했다. 루터의 제안들이 발표되자마자 도미니칸 수도사인 테첼이 직접적으로 그것에 반대하고 나섰다. 그는 수도사들을 선동해서 그를 강단에서 추방시키고 이단으로 규정했으며, 그의 논문을 공개적으로 태웠다.
그의 적들은 점점 더 그에게 반대했으며, 마침내 레오 10세에게 이단으로 고소되었다. 그는 교황에게 편지를 써서 면죄부에 대한 자신의 제안들을 설명했다.
황제 막시밀리안은 루터의 견해들을 저지시키는 데 있어서 교황만큼이나 단호했다. 로마에서 그에게 어떤 조치가 취해졌는가를 안 루터는 로마에 가지 않고 독일에서 공청회를 갖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 루터가 로마에 가는 것을 선제후도 또한 반대했다. 결국 교황의 사절로서 교황에게 위임받은 권세로 추기경 가레탄이 독일에서 공청회를 갖게 되었다.
1518년에 선제후에게 받은 서신을 가지고 루터 자신의 안전을 확인한 후 오그스버그에 갔다. 그러나 논쟁보다는 추기경의 막강한 권력이 더 무서운 상대였다. 거기서 출발하기 전에 그는 교황에게 서신을 작성했으며 비텐베르크에서 같은 교리를 계속해서 가르쳤으며 모든 종교 심문관들에게 자신과 논쟁할 것을 도전했다.
루터의 교리가 계속 퍼져 나가면서, 그는 국내외적으로 지지를 받았고, 수많은 지식인들이 그에게 1519년 레입식에서 존 엑키우스와 논쟁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의견차를 좁히지 못하고 양쪽에 적대감만을 증가시켰을 뿐이었다.
루터는 양 진영에서 행해진 성찬식에 대한 책을 출판했다. 미스니아 주교는 그 책에 저주를 퍼부었다. 루터는 새 황제와 독일의 주교들에게 자신의 입장을 호소했고 엑키우스는 로마로 가서 루터에게 유죄판결을 내리는 일을 확고히 하고자 했다. 루터의 적들과 교황 레오의 집요함으로 마침내 루터는 공식적인 유죄판결을 받았다. 그는 황제와 독일의 모든 적들 앞에서 계속해서 진리를 고수했고 자신을 변호하며 그의 적들에게 답변했다.
많은 평민들과 기사들, 백작들, 남작들, 성직자들이 그를 방문했다. 보름스에서 그는 영주들 앞에 섰고 그는 이런 질문을 받게 된다. "황제의 질문에 답변하라. 네가 인정해 왔던 너의 모든 책들을 여전히 지지하겠는가? 아니면 그것들을 포기하고 굴복하겠는가?" 그는 한결같이 겸손하면서도 담대하게 답변했다. "의심할 바 없이 나의 양심은 너무나 확실하게 성경, 즉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혔기에 어떤 것도 철회하지 않을 것이다. 양심에 거슬려 행하는 것은 타당치가 않기 때문이다. 나는 교황이나 그의 대공의회를 신뢰하지 않는다. 그들은 여러 번 실수를 했으며 성경과도 반대된다." 보름스 의회에서 그는 교회에서 분리된 자로 간주되었으며 고집 세고 악명 높은 이단으로 분류되었다. 교황 레오 10세의 교서가 유럽 전체를 휩쓰는 동안 루터는 비텐베르크 성에 안전하게 있었다. 그러나 은둔 생활에 지친 그는 10개월 간의 공백 이후에 다시 공개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교황과 주교들과 공개적인 전쟁을 치렀으며 가능한 한 사람들이 그들의 권위를 경멸하도록 했다. 교황의 교서에 반대하는 책을 썼으며, 독일어로 신약을 번역해서 출판했다.
독일의 상황은 크게 혼란을 겪었고 로마도 마찬가지였다. 다툼이 일어난 것이다. 영주들은 자기들끼리의 싸움에 열중해 있었고, 루터는 개혁에 관한 책과 카톨릭교도들에 반대하는 책을 썼다.
1527년 루터는 갑자기 심장둘레의 피가 응고되는 병에 걸리게 되었으나, 1534년에 루터가 번역한 성경이 처음 인쇄되었다. 그는 <사제들의 성별(미사에서 빵과 포도주를 예수의 몸과 피가 되게 하는 행위)과 미사에 반대하여>라는 책을 썼다.
그는 1546년 2월 18일 6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다음과 같은 기도를 하고 숨을 거두었다.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 주께서 나에게 주의 사랑하는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나는 그를 사람들에게 가르쳤으며 그를 알았고 내 생명처럼 그를 사랑했습니다. 나의 혼을 주께 드립니다. 내 영을 주께 의탁합니다. 주께서 나를 구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그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3. 윌리엄 틴데일의 생애
하나님의 진정한 종, 순교자, 바른 성경 번역자
순교자 윌리엄 틴데일은 교황과 같은 오만한 성직자들의 뿌리와 기반을 흔드는데 쓰인 하나님의 도구였으며, 주께서 선정하신 특별한 지체였다. 어둠의 통치자는 틴데일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가능한 모든 교활한 방법을 사용했으며, 그를 배반하고 그의 생명의 피를 불의하게 흘렸다.
그리스도의 신실한 사역자인 윌리엄 틴데일은 왈레스 지방 근처에서 태어나서 어릴 때부터 옥스포드 대학에서 교육받았다. 거기서 그는 어학과 다른 교양 과목들을 배웠으며, 특히 성경을 배우게 되었다. 성경에 몰두했던 그는 몇몇 학생들과 막달렌 대학 동료들에게 개인적으로 성경의 진리를 제시해 주었다. 그의 행동은 그의 말과 일치했기 때문에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은 그가 참으로 덕이 있는 사람이며 흠 없는 인생을 살았음을 인정했다.
옥스포드 대학에서 학위를 취득한 그는 캠브리지 대학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의 지식을 더 깊이 쌓아갔다. 자기 아이들의 교장인 월치의 집에서 교제하는 가운데 많은 집사들과, 여러 박사들, 그리고 유명한 성직자들과 함께 성찬식에 참여하고, 루터와 에라스무스에 대해 이야기하였으며, 성경에 대해 많은 논란이 되는 점들과 의문점에 대해서 서로 이야기하게 되었다.
틴데일은 자신의 판단을 그들에게 간단하고도 분명하게 제시했다. 그들의 의견이 자신과 다를 때면 그는 언제나 성경에서 자신의 의견을 보여 주곤 했으며, 성경에 명확하게 나와 있는 사실들을 제시함으로써 그들의 오류를 논박했고 자신의 말을 확증시켰다. 그리하여 틴데일과 여러 차례에 걸친 논쟁을 경험한 그들은 마침내 틴데일을 시기하고 증오하는 마음을 품기에 이르렀다.
사제들은 선술집이나 다른 곳에서 함께 모여 그가 이단이라고 비난하고, 비밀리에 틴데일을 교회법 고문과 다른 주교의 관리들에게 고소하였다.
이 일이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주교의 교회법 고문이 임명되었고 사제들에게 출두 경고가 내려졌으며, 틴데일도 같은 명령을 받았다.
그가 교회법 고문관 앞에 서자 그는 틴데일을 심하게 위협하였고, 고소자도 없는 많은 일로 그를 비난했다. 그리하여 틴데일은 그들의 세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집을 떠나서 그의 스승에게로 다시 돌아갔다.
그곳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어떤 의사가 있었는데 그는 주교의 고문관이었던 사람으로 틴데일과는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으며 그에게 많은 호의를 베풀었다. 틴데일은 그에게 가서 성경의 여러 가지 문제에 관한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았다. 그 의사는 그에게 말하기를, "교황이 바로 적그리스도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가? 성경이 그에 관해 말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말조심하게. 그런 의견을 가진 것이 알려지면 목숨이 위태로울 걸세."라고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틴데일은 우연히 어떤 신학자와 교제를 하게 되었는데, 대화는 논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의 "교황의 법 없이 사느니, 차라리 하나님의 법 없이 사는 게 낫지."라는 신성 모독적인 발언에 틴데일은 하나님의 열심으로 가득 차서 참지 못하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교황과 그의 모든 법을 무시하는 바이며, 차라리 쟁기를 끄는 소년이 그보다 성경에 대해서 더 많이 안다고 생각하오."
틴데일에 대한 불평은 점점 더해갔으며 그들은 끊임없이 틴데일을 보고 이단이라고 말하면서 많은 일로 그를 고소했다. 많은 시달림과 괴롭힘을 당하면서 그는 그 지역을 떠나서 다른 지역으로 가라는 압력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런던으로 떠나게 되었고 거기서 설교하게 되었다.
런던의 험프리 뭄무스의 집에 거하면서 밤낮으로 연구에 몰두했다. 거의 1년 정도를 런던에 머물면서 그는 설교자들의 실상을 보게 되었다. 그들은 교만했으며 자신들의 권위를 세우고, 고위 성직자들은 호화스런 삶을 누리고 있었다. 런던뿐만 아니라 영국 어디서도 신약을 번역할 만한 곳이 없음을 알고 그는 몇몇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독일로 떠났다. 거기서 틴데일은 자신의 조국에 대한 열성과 관심에 불타서 어떤 노력이나 수고도 마다하지 않고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고국의 형제들도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과 진리를 이해하게 하고자 했다. 그러던 중 성경이 일반 언어로 번역되어서 가난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음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성경이 보통 사람들의 눈 앞에 그들의 모국어로 제시되어서 그들이 스스로 본문의 뜻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평민들을 진리 위에 세울 수 있는 길이 없음을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아무리 진리를 그들에게 가르친다 해도 진리를 대적하는 자들이 성경에 근거하지 않은 궤변과 그들 자신의 전통으로 진리를 덮어버리거나 본문을 속여서 다르게 설명하기 때문이었다.
틴데일은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들의 눈에서 가려진 것이 교회내의 모든 불행의 원인임을 깨닫게 되었다. 왜냐하면 너무나 오랫동안 바리새적인 성직자들이 행한 가증스런 행위들과 우상숭배가 식별하기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궤변으로 바른 판단을 흐리게 하고, 본문의 내용과는 다르게 성경을 자기들의 목적에 맞추어서 그들의 행위를 경멸하는 자들을 옭아매었다. 그들은 배우지 못한 평범한 사람들을 미혹해서 그들이 마음 속으로는 모든 것이 거짓임을 느끼면서도 그들의 미묘한 수수께끼를 풀어낼 수는 없게끔 만든 것이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틴데일은 성경을 자신의 모국어로 번역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열정으로 가득찼다. 먼저 신약에 손을 대어서 A.D. 1525년경에 출판되게 되었다. 런던의 주교인 그스버트 톤스톨과 토마스 모오경은 너무나 분개해서 이 "거짓되고 실수투성이의" 번역을 파기시키기 위한 방법을 모색했다. 팩킹톤은 그같은 주교의 말을 듣고, 남아있는 모든 성경을 얻어다 주겠다고 말했다. 주교는 비용이 얼마나 들든지 그것을 다 입수해서 불태울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 일을 부탁했다. 오거스틴 팩킹톤은 이 모든 일을 윌리엄 틴데일과 상의했다. 그리하여 팩킹톤과 틴데일 사이에 이루어진 협약을 모르는 런던 주교는 남은 모든 성경을 입수했고 팩킹톤에게 감사를 표했으며, 결과적으로 틴데일은 돈을 얻게 되었다.
이 일 후에 틴데일은 신약을 다시 수정하고 새롭게 인쇄해서 초판의 세 배나 되는 양의 성경을 영국으로 보냈다. 주교가 이 사실을 알게 되자 그는 팩캥톤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그렇게 많은 신약이 해외로 나가다니. 자네가 성경 모두를 내게 사주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는가?"라고 했다. 이에 팩킹톤은 "분명 나는 구입할 수 있는 모든 성경을 구입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이후에 더 많은 성경을 인쇄했습니다. 그들이 활자와 압인기를 가지고 있는 한 이 일은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압인기까지 다 사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인 것 같습니다."라고 했다. 이 말에 주교는 웃었고 그래서 그 문제는 거기서 일단락 되었다.
얼마 후에 조오지 콘스탄틴이 그때 당시 영국의 교회법 고문이었던 토마스 모어경에게 이단 혐의로 체포되었다. 모오경은 그에게 물었다. "콘스탄틴! 내가 묻는 한 가지에 솔직히 답변해 주기 바라네. 그러면 자네가 고소된 다른 모든 것에는 호의를 베풀 것을 약속하네. 바다 너머에 틴데일 일당이 있는데, 이곳으로부터 누군가가 지원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네. 그들에게 자금을 지원하는 이들이 있는 게 분명한데, 자네는 그들 중 하나이니 돈의 출처를 알고 있을 걸세. 그들을 돕는 자들이 누구인가?" 콘스탄틴은 대답했다. "당신에게 진실을 말하겠소. 우리를 도운 사람은 런던의 주교요. 그가 신약을 불태우기 위해 그 값으로 우리에게 엄청난 돈을 주었소. 과거에도, 또 현재도 그가 우리의 유일한 후원자이며 위로자요." "나도 그러리라고 생각했지. 주교가 그 일을 하기 전에 내가 주교에게 그렇게 말했으니까."라고 모어는 말했다.
그 일 후에 틴데일은 구약 번역에 착수했으며, 모세오경을 끝마치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반복해서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서문을 작성했다. 이 책이 영국으로 보내졌다. 그것이 어둠 속에 갇혀 있었던 영국 전 국민에게 얼마나 큰 빛이 되었는지는 말로 다 할 수가 없다.
틴데일은 루터와 다른 학식 있는 사람들과 독일에서 회합한 후 다시 네덜란드로 떠났다.
틴데일의 신학 서적들, 특히 신약 번역은 사람들의 손을 통해 해외로까지 퍼져 나갔으며 경건한 사람들에게 수많은 유익을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불경건한 사람들은(대중들이 자신들보다 더 현명하게 되는 것을 시기했으며, 진리의 찬란한 빛으로 자신들의 어둠의 일들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면서) 적지 않은 소요를 일으켰다.
틴데일은 신명기를 번역하고서 햄버그에서 인쇄할 것을 계획하고 배를 타고 그곳으로 가게 되었다. 홀란드 해변에서 배가 난파하는 바람에 그는 모든 책들과, 저술들과 복사본들과 돈과 시간을 다 잃고서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만 하는 처지에 이르렀다. 그는 다른 배로 햄버그에 갔다. 거기서 약속대로 커버데일이 그를 기다렸으며 모세오경을 번역하는 일을 도와주었다. 그 일은 부활절에서 12월까지 계속되었으며, A.D. 1529년 마가렛 밴 엠머슨 부인의 집에서 이루어졌다.
한편 성직자들은 그 책이 보급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 성경은 수천에 달하는 이단적 교리들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단순히 어느 정도 수정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파기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어떤 이들은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고, 어떤 이들은 평민들이 그들의 모국어로 된 성경을 갖는 것은 불법이라고 말했으며, 어떤 이들은 성경이 그들 모두를 이단으로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통치자들을 그들의 목적에 끌어들이기 위해 그들은 성경이 사람들로 하여금 왕에게 반역하도록 만들 것이라고도 말했다.
사람들로부터 성경을 빼앗고자 하는 영국 성직자들의 패역한 책략은 너무나 엄청났다. (사람들을 빛으로 인도하는 것이 그들의 임무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기들 스스로 성경을 번역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성경이 번역되는 것도 견디지를 못했다. (틴데일이 말한 바와 같이) 이는 세상을 어둠 속에 가두어 두고, 헛된 미신과 가짜 교리로 자신들의 욕망과 만족할 줄 모르는 탐욕을 만족시키며, 자신들의 명예를 높이고자 하는 추악한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주교들과 고위 성직자들은 왕의 동의를 기어코 얻어냈으며 서둘러 선언문을 작성하고 공표해서 틴데일의 번역 성경을 금지시켰다.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그들은 더 나아가서 그의 생명까지 빼앗으려는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런던의 등기부에서 주교들과 토마스 모어 경은 틴데일에게 속한 모든 것들을 열심히 찾아서 조사했다. 틴데일이 어디서 누구와 모였으며, 그 집이 어디 있으며, 그의 키는 얼마며, 외출할 때는 어떤 옷을 입는지 등을 조사했다. 조사한 자료들을 가지고 그들은 틴데일을 파멸시키기 위한 그물을 한 올 한 올 엮어갔던 것이다.
윌리엄 틴데일은 앤트워프 시에 머물면서 토마스 폰츠의 집에 약 1년을 유숙했다. 그곳으로 헨리 필립이라는 사람이 나타났다. 그가 어떤 숨은 목적을 가지고 그곳에 왔다는 사실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때 틴데일은 여러 차례에 걸쳐 상인들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러 오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런 수단을 통해 헨리 필립은 그와 안면을 트게 되었고 곧 틴데일은 그를 크게 신뢰하게 되었으며 그와 한두 번 저녁 식사를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틴데일은 그와 더 깊은 우정을 갖게 되었고 그를 폰츠의 집에 머물도록 주선하였으며 그에게 자신의 책들과 다른 중요한 연구물들을 보여 주었다. 틴데일은 이 반역자를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폰츠는 이 친구를 그리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에 틴데일에게 필립과 어떻게 알게 되었는가를 물었다. 틴데일은 그가 정직한 사람이며 상당히 학식이 있고 매우 유순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폰츠는 틴데일이 그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음을 알고, 그의 친구들 중의 하나의 소개로 가까워졌으리라 생각하고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폰츠는 앤트워프에서 18마일 떨어진 바로이스 시에 가게 되었다. 거기서 그는 한 달이나 6주 정도 일을 보게 되었다. 그가 없는 동안 헨리 필립은 폰츠의 집으로 가서 그의 부인에게 틴데일이 있는지를 물었다. 그 후 그는 다시 가서 브루셀에서, 그가 데려온 장교들을 집근처와 거리에 배치했다. 정오쯤에 그는 틴데일에게 가서 함께 저녁을 들자고 했다.
저녁 식사 시간이 되자 틴데일은 필립과 함께 나갔다. 폰츠의 집을 나가는 길은 길고 입구가 좁아서 두 사람이 나란히 갈 수가 없었다. 틴데일은 자기 앞에 필립을 가게 했으나 필립은 겸손을 가장해서 틴데일을 자기 앞에 가게 했다. 틴데일은 그렇게 큰 키가 아니었기 때문에 앞에 갔으며 키가 큰 필립이 그 뒤를 따랐다. 그는 문 양편에 장교들을 배치시켜 놓았던 것이다. 뒤에 선 필립은 틴데일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가리켜서 장교들에게 데려가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려 주었다. 장교들은 그를 감옥에 가둔 후에 폰츠에게 틴데일의 단순함에 동정을 표하는 바라고 말했다. 그들은 그를 황제의 변호사에게 데려갔으며 그 다음은 행정고문관이 폰츠의 집에 와서 책들을 포함해서 모든 것들을 가져갔다. 틴데일은 앤트워프에서 18마일 떨어진 빌보데 성에 갇히게 되었다.
감옥에서 틴데일은 변호사를 대주겠다는 제안을 받았지만 자신이 답변하겠다며 거절했다. 그는 자신을 고소한 사람들에게 오히려 설교했으며, 성 안에서 그러한 그의 모습을 본 사람들은 그가 훌륭한 그리스도인이었다고 말했다.
마침내 많은 논의 끝에 아무런 이유도 없이 황제의 칙령으로 오그스버그 모임에서 그는 유죄를 선고받았고 A.D. 1536년 빌보레 시에서 화형당했다. 화형대에서 그는 큰소리로 외쳤다. "주여, 영국 왕의 눈을 뜨게 하소서!"
그의 교리와 삶의 성실성은 그가 감금되어있는 동안(1년 반의 기간) 그가 간수와 간수의 딸과 그의 다른 가족들을 회심시켰다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
그의 적들은 그의 번역이 이단적 교리들로 가득 찼다며 심하게 트집을 잡아댔다. 틴데일은 존 프리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었다.
"우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타나게 될 그 날에 하나님께서 말씀해주시기를 바란다. 나는 결코 내 양심에 비추어 하나님 말씀의 단 한 자도 변개시키지 않았으며, 지상에 있는 모든 것 즉 명예와 쾌락과 부를 내게 다 준다 해도 앞으로도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14. 메리 여왕 통치 기간 중 화형 당한 순교자들
영국 왕의 유언에는 영국의 왕위를 수프폭크 공작의 딸인 레이디 제인에게 양도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통치는 5일밖에 지속되지 못했다. 그녀의 뒤를 이은 메리는 모든 프로테스탄트를 박해하기 시작했다.
존 로저
존 로저는 순교자 윌리엄 틴데일과 마일즈 커버데일을 통해 회심하게 되었다. 그는 "토마스 매튜"라는 이름이 붙은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는 일에 그들과 합류했다. 그는 영국에서 개혁을 증진시키는 일을 도왔으며 바울 성당에서 봉사했는데 거기서 메리 여왕이 왕좌에 오를 때까지 계속 있었다. 그는 그의 설교에서 에드워드 왕 통치 시절에 가르쳤던 참다운 교리를 더욱 확증했으며, 교황 제도와 우상 숭배, 미신의 병폐를 주의하라고 사람들을 훈계했다. 이런 이유로 그는 소환당해서 자신을 변호해야만 했다. 여왕은 참된 설교를 금지시켰고 그의 적들은 이 기회를 이용했다. 오랫동안 가택 연금을 당한 후 그는 화형 선고를 받았다. 자신의 교리를 철회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내가 설교했던 것을 나의 피로 인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단으로 선고받았다. 그의 아내와 10명의 아이들은 그가 스미스필드로 가는 길에 그를 만났다. 그러나 그는 혈육이 당하는 슬픔에도 흔들리지 않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지키면서 놀랄만한 인내로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였다.
로렌즈 사운더즈
로렌즈 사운더즈 목사는 하나님의 참다운 종교가 소개되었던 에드워드 왕의 통치가 시작될 무렵 설교를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 잘못된 카톨릭 교리들을 담대하게 반대했다. 여왕의 무리들은 그의 설교를 듣고 대단히 불쾌해했다. 그래서 그를 감옥에 넣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있었던 왕실 수석 배우들인 그의 형제들과 친구들의 사랑덕분에, 또한 그의 설교에서 법적으로 꼬투리를 잡을 것이 없었기 때문에 그는 풀려났다. 악의에 찬 박해음모를 알아차린 그의 친구들은 그에게 떠날 것을 권유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그후 그는 다시 감옥에 갇히게 되었고 화형선고를 받았다. 그가 화형장으로 가는 길에 그에게 늘 신발을 만들어 주던 가난한 구두공이 소리쳤다. "오 나의 선한 주인이시여,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힘을 주시고 위로하시기를 바랍니다." 사운더즈가 응답했다. "자네가 나를 위해 기도해 주기를 바라네. 나는 내게 주어진 이 높은 지위에는 맞지 않은 사람이지만 은혜로우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내가 이 시련을 이겨내도록 힘을 주실 걸세." 1555년 2월 8일 그는 화형당했다. 화형장에서 자신의 믿음을 철회하면 살려 주겠다는 제의를 받았지만, 그는 거부했다.
윌리엄 헌터
어려서부터 그는 경건한 부모의 영향으로 건전한 교리로 양육을 받았다. 열아홉 살 때 그는 미사 때의 성체 배령을 거부함으로써 주교에게 끌려갈 것이라고 협박을 받았다. 그는 신앙을 포기하면 용서와 안전이 보장되리라는 제안을 거부했다. 그런 이유로 그는 이틀 밤낮을 기둥에 묶여서 빵 부스러기와 물 한 컵만을 공급받았다. 그러나 그는 이것에 손도 대지 않았다. 이틀 후 그의 믿음에 전혀 변동 사항이 없음을 알고 주교는 그를 감옥에 넣었다. 계속해서 그가 믿음을 부인하지 않자 주교는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화형대에 다가가자 그는 찬송가를 불렀다. 그리고는 그는 "나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주여 나의 영을 받으소서"라고 말했다.
존 후퍼
존 후퍼는 에드워드 6세 때 런던에서 설교했다. 그의 설교에서 그는 죄를 바로잡고 세상의 불의와 교회의 부패한 죄악에 대해 맹렬히 비난했다. 매일 수많은 무리들이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모여들었다. 때로 그가 설교할 때 교회가 꽉 차서 문안으로 더 이상 사람들이 들어오지 못할 때도 있었다.
왕 앞에서 설교한 후 그는 곧 그라우체스터의 주교가 되었다. 그는 2년간 그 직무에서 봉사했으며, 너무나 모범적으로 행동했기 때문에 그의 적들조차도 그에게서 어떤 비난거리를 찾아낼 수가 없었다. 그는 매우 주의 깊고 부지런히 자신의 직무를 수행했다. 에드워드 왕의 시대에는 종교가 건전했고 번성했다. 그는 보더와 헬스 박사 앞으로 소환된 후 공의회에 넘겨져서 여왕의 돈을 빚지고 있다는 거짓고소를 당했다. 감금 기간 중 그는 로저 목사를 만났고 거기서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힘을 주실 것이라며 서로를 위로했다. 밤중에 후퍼는 시내를 통과해서 뉴게이트로 옮겨졌다. 이런 일이 비밀리에 행해졌음에도 많은 사람들이 문에 불을 켜고 나와서 그를 격려하며 그의 변치 않는 믿음에 하나님을 찬양했다. 뉴게이트에 있는 얼마동안 보더와 다른 사람들이 자주 와서 그의 믿음을 철회시키고자 했지만 그는 자신이 전에 가르쳤던 진리를 자신의 죽음으로 확증코자 했다.
1555년 2월 9일 8시 정각에 그는 화형장으로 갔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장이 서는 날이라도 되는 것처럼 모여들었다. 그가 돌아서면 여왕께서 용서해주실 것이라는 제안을 다시 했다. 물론 그는 거절했다. 장작더미의 부족과 강한 바람으로 인해서 세 번이나 불이 다시 지펴졌다. "주 예수여, 나의 영을 받으소서." 그의 입에서 나온 마지막 말이었다. 그는 잠자는 아이처럼 조용하게 죽었다. 그는 지금 세상의 기초가 놓여지기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자들을 위해 준비된 하늘 나라의 즐거움 속에서, 복받은 순교자로 있으리라.
해드리의 로우랜드 테일러
로우랜드 테일러는 해드리의 교구 목사로 죄와 악행에 대해서는 단호했으나, 가난하고 병들고 불구인 사람들에게는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 에드워드 6세 시대의 축복된 기억들이 끝난 후 메리 여왕이 왕위를 이어받게 되었다. 그의 교구민 중 두 명이 두 번이나 해드리 교구 교회에서 온갖 미신적인 의식과 함께 미사를 거행하기로 결심했다. 데일러는 교회에 들어와서 단호하게 이 일을 막았다. 그러나 클락이라는 사람이 그를 교회 밖으로 내몰고 미사를 집전케 하고는 즉시 윈체스터의 주교인 대법관에게 그의 행동을 알렸다. 그는 소환당했다.
그의 친구들은 대륙으로 도망하라는 충고를 해주었으나 그는 거절하고 기꺼이 그 소환명령에 응했다. 가디너 주교는 그를 보자 관례에 따라 테일러를 꾸짖었다. 그는 이런 집권남용을 인내하며 들었다. "어떻게 감히 내 얼굴을 쳐다보는 거지? 내가 누군지 모른단 말인가?"라고 주교가 말했을 때, 테일러는 대답했다. "당신은 윈체스터 주교이자 대법관인 스테판 가디너요. 그러나 당신도 언젠가는 죽을 사람에 지나지 않소. 내가 당신의 얼굴을 두려워해야 한다면, 당신은 왜 우리 모두의 주이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거요. 어떤 얼굴로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설 거요?"
오랜 대화 끝에 가디너는 소리쳤다. "너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단이다! 너는 참으로 신성모독자이며 축복된 성사를 모독했으며, 거룩한 미사를 배척했다. 미사는 산 자와 죽은 자를 위해 희생제로 드리는 것인데 … "라고 했다.
그는 감옥에 감금되었다. 그의 아내와 자녀들이 그를 방문했을 때 그는 "나는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이 축복된 자들이라고 믿소. 하나님께서는 참새까지도 돌보시며 내 머리카락까지도 다 아시니 그러므로 우리 구주이신 그리스도의 공로를 의지해서 하나님을 의지하시오. 그를 믿고, 사랑하고 두려워하며 복종하시오. 나를 죽은 자로 여기지 마시오. 왜냐하면 나는 살 것이며 영원히 살 것이기 때문이오."라고 했다.
그가 화형을 당하는 날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는 기도하며 화형대에 다가갔다. 그리고 하늘을 쳐다보며 계속 기도했다. 워윅이란 사람이 잔인하게 장작을 그에게 던졌다. 그것은 그의 머리에 맞아서 그의 얼굴이 찢겨지고 피가 흘렀다. 그가 영어로 찬송가를 부르자 존 쉘턴이 그의 입술을 치며 "라틴어로 말해!"라고 소리쳤다. 장작더미에 불이 붙여졌고, 그는 울지도 움직이지도 않고 손을 모으고 똑바로 서 있었다. 소스라는 사람이 마침내 창으로 그의 머리를 치자 그의 시체는 불 속으로 떨어졌다
15. 아일랜드에서의 프로테스탄트의 생성과 발전
1614년의 학살과 더불어
아일랜드는 처음부터 카톨릭의 세력 하에 있었으며, 복음이 들어오게 된 것은 헨리 8세 때였다. 그때까지 사람들은 무지 속에서 터무니없는 미신에 사로잡혀 있었다. 아일랜드에 프로테스탄트가 소개된 것은 영국인 조지 브라운(George Browne)의 공로가 컸다. 그는 더블린(Dublin)의 주교로 그 이전에는 어거스틴 수도사였다.
헨리 8세는 영국에서 수도원 설립을 금했다. 이것으로 인해 더블린에 있던 두 개의 성당에서도 형상들과 종교적 유물들이 제거되었다. 얼마 후 브라운은 헨리 8세가 영국과 아일랜드에서 교황의 지배를 떨쳐버리기로 했으며, 그를 행정관으로 임명한다는 편지를 크롬웰에게서 받았다. 그러나 아마그(Armagh)의 주교인 조지가 이 일에 격렬히 반대했다. 그는 교황의 통치권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저주를 퍼부었으며, 아일랜드는 로마 주교의 소유이며 왕의 선조들도 교황으로부터 통치권을 받았다고 말했다.
다음 해에 의회가 소집되었으며 결국 헨리 8세가 교회와 국가의 최고 통치자로 결정되었다. 얼마 후 교황은 아일랜드에(아마 그의 대주교와 그의 성직자들에게) 칙령을 보내어 왕의 통치권을 인정하는 모든 사람을 파문시켰다. 에드워드 6세가 영국 왕위에 오른 후 그는 영국 국교회의 전례의식이 아일랜드에서도 행해져야 한다는 명령을 내렸다. 영국 국교회의 공식 기도문이 더블린의 교회에서 처음 사용된 바로 다음날 카톨릭 편에서는 사악한 간계가 계획되고 있었다. 거기에는 손에 갈대를 들고 머리에 가시관을 쓴 대리석으로 된 그리스도의 형상이 있었는데, 영국식 예배가 회중과 성직자들 앞에서 드려지는 동안 가시관의 틈에서 피가 흘러 그 형상의 얼굴 아래로 떨어진 것이다. 이에, 이 사기극을 꾸민 사람들이 소리쳤다. "보라, 우리 구세주의 형상에 흐르는 피를! 교회에 이단이 침투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다." 너무나 기적적이고도 부인할 수 없는 증거(?)를 통해 하나님께서 불쾌하게 여기신다는 것을 보고 일반 대중들은 공포에 질렸으며, 즉시 프로테스탄트의 교리는 지옥에서 발단한 것이며 구원은 오직 그들 자신의 무오한 교회에만 있다는 확신을 하게 되었다. 의식이 깨인 사람들에게는 이 사기극이 터무니없는 것으로 보였지만 무지한 아일랜드인들의 마음에는 이것이 큰 영향을 끼쳤으며 그들은 이 사기극을 꾸민 자들의 목적에 부합하게 되었다.
제임스 왕의 평화로운 통치기간을 이용해 카톨릭은 힘을 키워 갔으며 찰스 1세 때는 그들의 수가 엄청나게 증가했다. 그런 이유로 1629년 공식적인 카톨릭 의식과 제사행위가 금지되었다. 그러나 곧 로마 사제는 더블린 시에 새로운 카톨릭 대학을 세웠으며 여러 곳에 수도원과 수녀원을 세웠다. 그곳에서 자주 모임을 가지면서 1641년 오닐(O'Neal)은 그의 가족과 그의 추종자들과 함께 끔찍한 계획을 꾸미고 있었다. 이 계획이 실행되기 얼마 전 아일랜드 카톨릭은 그들 종교행사의 자유를 요구했지만 영국 상하원은 둘 다 영국 내 카톨릭의 허용을 금했다.
그 계획은 왕국 전체의 대규모적인 반란과 더불어 모든 프로테스탄트를 예외 없이 다 살해한다는 음모였다. 대학살의 날은 1641년 10월 23일로 정해졌다. 그 날은 예수회의 창시자인 이그나티우스 로욜라를 기념하는 날이었다. 이 계획을 완벽하게 성사시키기 위해 카톨릭교도들은 프로테스탄트를 방문하여 지금까지보다 더욱 친절함을 보여주었다. 이 음모는 겨울이 올 때까지 지연되었는데, 그 이유는 겨울에는 영국에서 군대를 보내는데 큰 어려움이 있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프랑스 사역자인 리첼리에(Richelieu) 추기경은 공모자들에게 상당한 물자와 인적 자원을 약속했다. 많은 아일랜드 장교들은 이 반란이 일어나자마자 카톨릭 형제들과 연합하겠다는 강한 확신을 보여주었다. 이 계획이 실행되기 전날, 이 음모는 아일랜드인 오웬 오코넬리(Owen O'Connelly)에 의해 발견됐으며 이 일의 주모자였던 맥과이(M'Guire) 경이 체포되었다. 다행히 왕국의 수도는 보존된 것이다.
그러나 계획된 비극은 왕국 전체에 흩어진 공모자들에 의해 정해진 날 아침에 강행되었다. 길을 가던 모든 프로테스탄트는 즉시 살해되었다. 나이도, 성별도, 신분도 가리지 않았다. 평화 속에서 살아오던 영국인들이 오랫동안 함께 지내온 가장 가까운 이웃들에게 살해된 것이다. 죽음은 차라리 가장 작은 형벌이었다. 온갖 잔인한 고문들, 마음의 고뇌, 절망 등은 죽음보다 더한 것이었다. 완고하고 자비심 없는 카톨릭교도들은 그들의 손으로 피를 쏟자마자 매일 끔찍한 비극을 되풀이해 나갔다. 예수회 회원들, 사제들, 수도사들은 무지한 아일랜드인들을 더욱 부추겨서 이 계획은 왕국의 발전과 카톨릭의 명분을 발전시키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할 것이라고 선동했다. 프로테스탄트는 이단이며, 더 이상 살도록 허용되어서는 안 되며, 영국인을 죽이는 것은 개 한 마리를 죽이는 정도라고 떠들고 돌아다녔다. 또한 영국인들을 도망시키거나 보호하는 것이 가장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라고까지 했다.
카톨릭 교도들이 롱포드 성과 도시를 포위했다. 그 도시는 프로테스탄트들이 사는 곳이었다. 프로테스탄트들은 목숨을 살려준다는 조건으로 항복했다. 도시 사람들이 나타나자마자 포위자들은 그들을 공격했다. 그들의 사제가 영국 프로테스탄트 목자의 배를 가르는 것을 신호로 그 뒤를 이어 사람들을 매달아 죽이기도 하고, 칼로, 총으로, 혹은 도끼로 많은 사람을 살해했다.
스리고(Sligo) 부대도 같은 대우를 받았다. 그들도 목숨을 살려준다는 조건으로 항복을 했다. 처음에 그들은 감옥에 수감되었고 얼마 후 다리 위에서 급류 속으로 밀쳐져 모두 죽었다. 수도사들이 손에 성수를 들고 와서 그 강에 물을 뿌렸다. 이단의 죽은 몸과 피로 오염된 강을 깨끗이 한다는 것이다.
리스굴에서는 150명 이상의 사람들이 불에 태워졌다. 모니아 성에서는 최소한 100명이 칼로 죽임을 당했다. 툴라 성에서도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살해되었다.
마귀만이 생각해 낼 수 있는 끔찍한 방법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말꼬리에 사람을 묶어놓고 말을 전속력으로 달리게 해서 죽이기도 했다. 높은 교수대에 매달린 채, 밑에 불을 피워서 일부는 질식으로, 일부는 교수형으로 죽기도 했다. 여자라고 해서 이들의 무자비하고 광분한 박해를 피할 수는 없었다. 많은 여인들이 너무도 잔인한 방법으로 죽어갔다. 어떤 이들은 튼튼한 기둥에 묶여, 허리까지 옷이 벗겨진 채 무자비하게 창으로 가슴이 도려내어져 피를 흘려 죽을 때까지 내버려졌다. 심지어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태아들이 자궁에서 끄집어내져 그들의 분노의 희생제물이 되었다. 많은 어머니들이 발가벗겨진 채 나무에 매달려 몸이 찢겼고 무죄한 아기들이 개와 돼지에게 던져졌다. 끔찍한 장면을 더 끔직하게 하기 위해 그들은 그 남편들에게 이런 모습을 억지로 보게 만들었다.
이스센스케아스에서는 100명 이상의 스코틀랜드 프로테스탄트들이 교수형에 처해졌다. 일천명 이상의 사람들이 포타다운 다리에서 강제로 물 속으로 던져졌다. 강변에 기어오른 사람들은 머리가 잘려나갔다. 같은 지역에서 적어도 4000명이 익사당했다. 무자비한 카톨릭교도들은 먼저 사람들을 옷을 벗긴 후 그들을 죽이려고 정해놓은 장소로 짐승처럼 그들을 몰고갔다. 피로와 허약함으로 뒤에 처진 사람들은 창과 검으로 찔렸다.
어떤 곳에서는 140명의 영국인들이 극도로 추운 날씨에 완전히 발가벗겨져 수 마일을 끌려가서 같은 장소에서 모두 살해되었다. 어떤 이들은 교수형에 처해졌고 어떤 이들은 불에 태워졌고 어떤 이들은 산채로 매장되었다. 어떤 사람에게는 안전한 통과를 약속한 후 그들이 안심하고 자신의 길을 가면 적당한 장소에서 가장 악랄한 방법으로 그들을 살해했다.
115명의 사람들이 페림 오닐(Phelim O'Neal) 경의 명령으로 포터다운 다리까지 와서 모두 강제로 물에 빠뜨려졌다. 캠프벨(Campbell)이라는 한 여인이 도망갈 가능성이 없는 것을 알고 카톨릭교도 대장 중 하나를 팔로 안아서 함께 물 속에 빠져 익사했다.
킬리맨(Killyman)에서는 48가구가 학살당했다. 그 중 22명은 한 집에서 불에 태워졌다. 킬모어(Killmore)에서는 약 200가구가 있었는데 그들의 돈이 있는 곳을 말할 때까지 화형대에 묶여 있다가 말한 후에 죽음에 처해졌다. 전체 마을이 도살장이 되어서 칼, 불, 물, 기아, 그리고 다른 가장 잔인한 죽음으로 짧은 시간 내에 죽어 갔다.
어떤 이들은 지하 감옥에 감금되어서 굶어죽기도 했다. 카셀(Casel)에서는 프로테스탄트를 더러운 지하 감옥에 함께 수주간을 몰아 넣고는 잠시 풀어준 뒤 잔인하게 난도질했으며 길에서 재미삼아 그들을 죽이기도 했다. 어떤 사람들은 땅에 머리를 박아서 매장되기도 했다. 이들은 비참함을 더하기 위해, 고통당하는 그들을 조소했다. 앤트림(Antrim)에서는 하루아침에 954명이 살해되었으며 그 뒤 1200명이 더 살해되었다.
리즈니게리(Lisnegary)에서는 24명의 프로테스탄트를 한 집에 몰아 넣고 불을 질렀다. 또 다른 잔인한 행동 중의 하나는, 영국 여인의 두 아이를 빼앗아 그 여인 앞에서 그들의 뇌를 부숴뜨린 후 그 여자를 강에 던져 버린 것이다. 킬케니(Kilkenny)에서는 모든 프로테스탄트가 죽음을 당했다. 그들은 어떤 영국 여인을 성한 뼈가 하나도 없을 정도로 구타한 후 시궁창에 던져버렸다. 이에 만족하지 않고 그녀의 6살 난 여자아이를 데려다가 배를 갈라 그 어머니에게 던졌다. 어떤 남자를 강제로 미사에 참여하게 한 후 배를 가른 후 그대로 내버려두기도 했다. 어린 아이의 뇌를 부숴서 돼지에게 먹게 하기도 했다.
일곱 명의 프로테스탄트 지도자를 잡아다가 그들 중 하나를 시장 사거리에 데리고 갔다. 입에 재갈을 물린 다음 그의 뺨을 귀까지 잘라서 그 앞에 성경 한 장을 놓고서 입이 충분히 커졌으니 설교를 하라고 강요했다. 파우어스카우트에 있는 교회에서는 강단과 성경들을 불태웠다. 성경을 더러운 물에 적셔서 프로테스탄트의 얼굴에 던지며 "너희가 좋은 교훈을 좋아한다는 걸 알지. 여기 아주 훌륭한 게 있군. 내일 와보라고. 이것만큼 훌륭한 설교를 들을 수 있을 테니."라고 조소했다.
어떤 곳에서는 프로테스탄트의 눈을 뽑고 손을 잘라서 들로 보내어 거기서 헤매며 비참한 최후를 맞게도 했다. 젊은이들에게 강제로 부모를 강에 밀어 넣게 했으며, 아내들에게 남편을 매다는 일을 돕게 했으며, 아이들의 목을 찢는데 어머니들에게 자기 아이들의 목을 부수는 일을 돕도록 강요했다. 크로우니스에서는 17명이 산채로 매장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루 형언할 수 없는 비참한 방법으로 살해되었다.
16. 프랑스 남부 지방에서 있었던 박해
1814년 ~ 1820년
낭트 칙령이 폐지된 이후,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박해는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기 바로 전까지 쉬지 않고 계속되었다. 이런 박해를 없애기 위해 루이 16세 궁정에 관심을 갖은 첫 번째 사람 중에는 르보 에띠안느(Rebaut Etienne)와 드 라 파옛트(De la Fayette)가 있었다. 물론 카톨릭과 아첨꾼들 편에서는 이에 대한 반대가 있었으며, 1790년 이후에야 프로테스탄트는 자유롭게 되었다. 그러나 그 전에는 카톨릭이 무장을 했었으며, 특히 니스메(Nismes)에서는 무시무시한 광경이 연출되었다. 무장한 사람들이 도시를 다니며 거리에 불을 질렀고, 그들이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칼로 답례했다.
아스툭(Astuc)이란 사람은 상처를 입고 수로에 던져졌으며, 보든(Bauden)은 연거푸 총검에 맞아 쓰러져, 그 몸은 물 속으로 던져졌다. 창문으로 내다보던 열일곱 살의 청년 부셸(Boucher)이 총에 맞았다. 세 명의 선제후가 상처를 입었다. 도망치는 시민들은 길에서 카톨릭교도들에게 잡혔다. 보그(Vogue) 부부는 시골집에 있었는데 카톨릭 열성주의자들이 침입해서 그들을 살해하고 집을 부수었다. 70살의 블라셸(Blacher)은 낫으로 갈기갈기 찢겼고, 젊은 피에르가 그의 형제에게 음식을 가져다 주는 중에 질문을 받았다. "카톨릭인가 프로테스탄트인가?" 그는 "프로테스탄트"라고 대답했고, 총에 맞아 쓰러졌다. 살인자 무리 중에 하나가 말했다. "나는 내 몫으로 네 명의 프로테스탄트를 죽이기로 맹세했어. 이것이 그 중의 하나로 계산될 거야."
은으로 된 어린 아이 형상
니스메 코우어 로얄 법무관 바론(Baron)은 당굴렘(d'Angouleme) 공작이 프랑스에 왕자를 보내면 하나님께 은으로 된 아이 형상을 바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은 대중의 종교적 열심으로 전환되었고, 가는 곳마다 이 일이 화제가 되었다. 이런 미신적인 열광으로 인해 알라이스(Alaiz) 여자들은 자신들의 프로테스탄트 남편들을 독살하라는 부추김을 받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프로테스탄트를 정치범으로 고소하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프로테스탄트들은 대중 앞에 나타날 때마다 모욕을 당하고 부상을 입었다. 폭도들이 프로테스탄트와 맞부딪히게 되면, 그들은 프로테스탄트를 가운데 몰아 넣고 "왕 만세"를 외치면서 야만적인 즐거움을 만끽했다. 그리고는 노래했다. "우리는 프로테스탄트 피에 우리의 손을 씻을 것이다. 칼빈의 자녀들의 피로 검은 푸딩을 만들겠다."
신선한 바람을 쐬러 산책 나간 시민들은 "왕 만세"라는 외침과 함께 쫓겨다녔다. 마치 이 외침이 모든 과격 행동을 정당화시키기라도 하는 듯했다. 거리에서는 "모든 위그노는 죽어야 한다. 이번에는 그들의 자녀들을 모두 죽여야 한다. 저주받은 자들의 종족을 멸종시켜야 한다."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들은 살해당한 것은 아니지만 잔인한 대우를 받은 것은 사실이다. 프로테스탄트 아이들은 카톨릭교도의 놀이에는 더 이상 섞일 수 없었다. 어둠이 내리면 그들 가족들은 집에 문을 잠그고 있어야 했다. 창문으로 돌들이 날아들었고, 아침에는 문이나 벽에 교수대가 설치되는 일이 다반사였다. 프로테스탄트 목사들의 인형과 교수대를 만들어 십자로에 매달아 놓기도 했다. 네 명의 사역자의 초상을 만들어 그것을 불태울 계획도 있었으나 프로테스탄트인 니스메 시장에게 저지당했다.
보케르(Beaucaire)의 카톨릭 군대
보케르에서 수많은 카톨릭 열성분자들이 무장했고, 이들은 "거주민들에게 경고하기"위해 니스메를 향해 갔다. 질리 장군은 그들에게 평화 협정을 제시함으로써 그들의 극단적 행동을 막고자 했다. 100일간의 나폴레옹 통치가 끝나고 루이 18세는 파리로 되돌아 왔으며, 평화 분위기가 니스메에도 정착되는 것 같았다. 질 장군은 그곳을 떠났고 뒤에 남겨진 군대는 다음 명령을 기다렸다. 적대 상태는 끝이 나고 왕의 권위가 완전히 회복되었음이 선포되었다. 그러나 대중의 마음을 가라앉히고 규제시킬 행정관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수백 명의 오합지졸들이 모여서 그 도시로 들어갔고, 그들은 명령이나 훈련도 받지 않은 채 온갖 색깔의 옷과 누더기를 둘러쓰고 꽃 장식을 하고는 머스킷 총과 총검으로 무장했다. 또한 포도주에 취한 채, 오는 길에 살해한 프로테스탄트들의 피로 오염되어 있었다. 이들은 도시 폭도들과 합류했고, 무방비 상태의 희생자들에게 발포했다. 거의 모든 사람을 죽인 카톨릭 군대에 의한 대학살은 파리의 9월 암살과 리옹과 아비뇽 자코뱅의 도살에 필적할 만했다.
박해받는 사람들을 위한 왕의 칙령
왕의 칙령이 니스메에서 수락되었고 정규 기관에서 그 법을 관리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런 선언에도 불구하고 잠깐 동안 중단되었던 파괴를 막을 수가 없었다. 7월 13일 한 가족의 가장인 쟈끄 꼼브(Jacgues Combe)가 루소(Rusau)의 몇몇 국가 경비대에게 살해되었다. 이 범죄는 너무도 공개적으로 이루어졌다. 다음날, 이 무리들은 도시 외곽을 돌아다니며 농부들을 위협했고, 8월 1일 그들을 살해했다.
같은 날 무장한 6명의 사람들이 목수 모놋의 집을 포위했는데, 그 집에는 퇴역한 프로테스탄트 대령이 있었다. 그는 훌륭한 인격을 지녔고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인물이었다. 여자들과 아이들이 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그의 인품을 칭찬하며 만류했지만, 그는 끌려가서 총살당했다. 얼마간 살인이 뜸해졌으나 이번에는 약탈과 기부금을 강요당했다. 살레 돔브로(Salle d'Hombro)는 몇 차례에 걸쳐 칠천 프랑을 약탈당했으며, 비단 제조업자인 펠린(Feline)씨는 금 32,000프랑과 은 3000프랑과 비단을 빼앗겼다.
소상점에 끊임없이 찾아가서 식량과 의류 등 그들이 파는 것은 무엇이나 요구했다. 부자들의 집에 불을 놓은 사람들이 농부의 포도원을 망치고 직조기를 파괴시키고 예술가의 기구들을 훔쳐갔다. 무장한 무리들은 줄어들기는커녕 더욱 늘어갔다. 도망자들이 늘어갔고, 남아있는 프로테스탄트는 공민권과 종교적 권리를 모두 박탈당했다. 가난한 사람들을 책임맡은 프로테스탄트 집사들은 모두 흩어졌고 다섯 명의 목사 중 두 명만이 남았다.
그 외의 마을들에서의 만행
니스메 근처 마을에서 일어난 박해자들의 행동을 살펴보자. 왕정 수립이후 지방 당국들은 자신들의 고용주들을 위한 열심이 두드러졌다. 반역, 무기은닉, 기부금 불납 등을 이유로 국가 경비대와 무장 폭도들에게 약탈, 체포, 살인이 허가되었다. 이들은 죄에 대한 형벌을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승인까지 받았다. 니스메 근처 밀하우드(Milhaud) 마을 거주민들은 약탈을 피하기 위해 많은 돈을 강제로 내야만 했다. 그러나 이것도 마담 튤롱(Teulon)의 집에 있는 값진 가구들은 파괴되고, 건초와 목재는 불탔고, 어린 아이의 시체가 정원에 매장되었다.
프로테스탄트 패체롤은 카톨릭 이웃에게 자신의 재산을 맡겼으나 그 집이 공격당했고, 카톨릭교도의 재산은 그대로 보호되었으나 패체롤 씨 재산만 압수되어 파괴되었다. 같은 마을에 있는 헤르멧(Hermet)이 질문을 받았다. "프로테스탄트인가?" 그는 인정했고 즉시 살해되었다. 보보트(Vauvert) 군 교회는 8천 프랑을 착취당했다. 보봐신(Beauvoisin)과 제네락(Generac) 군에서도 소수의 허가받은 사람들이 카톨릭 시장의 보호 하에 같은 짓을 행했다. 거주민 중 가장 부유한 프로테스탄트들은 무장 해제를 당하고 집을 약탈당했다. 시장에게 탄원했지만 그는 웃으며 나가 버렸다. 시장은 자신의 명령으로 조직된 700명의 국가 근위대를 지휘하고 있었다. 클래비죵(Clavission)에서는 시장이 프로테스탄트들에게 교회에서 일반적으로 부르는 찬송가를 금지시켰는데, 이는 카톨릭교도들이 그 소리에 불쾌해하고 동요된다는 이유에서였다.
니스메에서 약 16km 떨어진 솜미에르(Sommieres)에서는 카톨릭교도들이 시를 관통하는 화려한 행진을 벌였다. 외국군대가 솜미에레에 도착하자 무기 수색을 하는 것처럼 꾸몄고, 머스킷 총을 소유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강제로 그것을 사게해서 그 집을 포위했다. 군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물품들을 얻을 때까지 하루 6프랑으로 그들 집에 투숙했고, 문을 닫았던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은 오스트리아인들을 위한 병영으로 바뀌었다. 니스메에서는 6개월 간 예배가 중단되었다가 다시 재개되었는데, 예배 시간이 되자 수많은 사람들이 리봇 목사 집에 모여서 예배를 그만두라고 위협했다. 그러나 정해진 시간이 되자 그는 교회로 갔으며, 결국 그는 포위되었고 심한 욕을 들었다. 어떤 여자들은 그의 멱살을 잡았지만 그 무엇으로도 그의 확고함과 인내를 무너뜨릴 수는 없었다. 그는 교회에 들어가 강단에 올라갔다. 군중 가운데서 돌들이 날아왔다. 그러나 회중은 조용한 가운데 주의를 기울였다. 예배는 소란과 위협과 분노 속에서 끝을 맺었다. 주둔군 경비병들의 보호가 아니었다면 되돌아가는 길에 많은 사람들이 살해되었을 것이다. 그들은 열성적이고도 훌륭하게 사람들을 보호했다. 주둔군 사령관은 리봇 목사를 격려하는 편지를 그에게 보냈다.
1816년 2월 2일 "저는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카톨릭교도들의 편견에 대해 참으로 슬퍼하는 바입니다. 지금까지 해오신 것처럼 계속해서 그렇게 행동하시기 바랍니다. 시간이 지나면 카톨릭교도들도 당신의 행동에 감동을 받아 태도가 바뀔 것입니다. 토요일 날 일어난 소요와 유사한 소요가 또 다시 일어나면 제게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저의 의무를 다 할 것이며 그들의 행동을 정부에 보고하겠습니다. 솜미에르에서 있었던 악한 행동들에 대해 중용으로 대처했던 것에 대해 저의 존경을 표하는 바입니다." - 슈발 드 라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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