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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레니즘시대의 역사와 문화

하나님아들 2020. 4. 8. 14:45

헬레니즘시대의 역사와 문화

 



I. Hellenism
1. 어원과 의미
'말하다', '그리스인처럼 행동하다'라는 뜻의 그리스어 hellenigein에서 유래함. 그리스 고유의 문화와 오리엔트의 문화가 융합하여 이루어진 세계주의적인 예술·사상·정신 등을 특징으로 하는 문화.

헬레니즘은 헤브라이즘(Hebraism)과 구별되는 개념으로 헤브라이즘과 함께 유럽 문화의 근간을 이룬다. 헬레니즘은 1863년 독일의 드로이젠이 그의 저서 『알렉산더 대왕의 후계자의 역사(헬레니즘사)』 에서 쓰기 시작하였고, 그전까지는 단지 '소극적인 것', '타락', '몰락'을 의미했던 것이 '인류역사상 가장 깊은 의의가 있는 문화'로 둔갑했고 이 평가는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다.

세계사 속에서 헬레니즘은 고대 그리스에서 연원된 독자성을 지닌 역사적 개념이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그리스 정신에서 '그리스화'한 문화까지 포함한다. 이 말은 '그리스문화', '그리스정신'을 가리키는 경우도 있다. 이 시대의 특징에 관해서도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그리스문화의 확대 발전으로 보는 견해, 반대로 오리엔트문화를 통한 그리스문화의 퇴폐로 보는 등의 견해도 있으나, 그리스문화와 오리엔트문화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아 질적 변화를 일으키면서 새로 태어난 문화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2. 시대범위
헬레니즘 시대의 범위에 관해서도 여러 설이 있다. 먼저 그 시작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아시아 원정 출발(BC 334)에 두는 설, 페르시아를 멸망시킨 해(BC 330)에 두는 설, 대왕의 죽음(BC 323)에 두는 설 등이 있다. 그 종말도 극단적인 경우는 마호메트의 출현까지로 보는 설이 있다. 그밖에 로마 제정기를 문화적으로는 헬레니즘시대로 보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BC 330년 알렉산드로스의 페르시아정복에서 BC 30년 로마가 이집트를 병합하기까지의 300년간이 그 시대범위로 간주된다.

3. 지역적 범위
마케도니아.그리스로부터 대왕의 정복지 전역( 인더스강 유역. 박트리아. 메소포타미아. 소아시아. 이집트) 까지이며, 서방의 로마도 문화적으로는 헬레니즘 문화권에 든다고 생각하는 학자도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로마는 포함시키지 않는 것이 관례이다. 헬레니즘문화는 한때 에게 해 주변의 전 지중해 세계를 지배하고, 카르타고 등의 다른 나라에까지 확산되었으며 그 영향력이 서쪽은 영국, 동쪽은 인도의 펀자브 지방까지 뻗어갔다.

II. 헬레니즘 세계의 성립 과정
1) 고전 고대의 몰락
BC 4세기 후반의 헬라스는 분열과 혼란에 빠져 몰락의 길을 걷고있었다. 그 이유는 노예제의 발달에 따라 자유민의 몰락과 더불어, 시민들이 폴리스에 대한 열정과 애착심을 잃고 정치에 무관심해졌다. 그러면서 낡은 폴리스적 의식을 버리고 새로운 민족주의에 입각하여 범 헬라스주의를 주장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2) 마케도니아의 발흥과 남하
그리스인으로부터 Barbaroi, 즉 야만인 취급을 받고 있던 마케도니아는 BC 4세기경부터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받아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특히 Philippos 2세(BC 382-336) 때에는 국내 금광을 개발하여 재력을 기르고 Phalanx라는 장창 밀집 부대를 편성하여 군사력을 길러 차츰 사방의 여러 민족을 쳐서 그 영토를 넓혔다. 필립포스 2세는 드디어 대군대를 거느리고 BC 346년 중부 그리스로 쳐들어갔다. BC.346년 카이로니아(Chaeronea)전투에서 그리스연합군을 무찔러 마침내 그리스를 복속시켰다. 데모스테네스(Demosthenes)는 이 때 '드라마는 이제 끝났다'고 외쳤는데, 이 말은 폴리스의 최후를 상징한 절규였다.

3)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원정
필립포스 2세가 암살을 당하자 그의 아들 알랙산더 대왕(Alexander the Great(BC 356-323))가 2O세의 젊은 나이로 즉위하였다. 소년시절 테베에 볼모로 있을 때 에파미논다스(Epanunondas)장군으로부터 테베 밀집전법을 배웠으며, 이를 개량하여 마케도니아 밀집전법을 개발한 그는 부왕이 죽은 뒤에 일어난 그리스의 반란을 평정한 뒤 부왕의 유지를 받들어 페르시아 원정군을 일으켰다.

알렉산더 대왕은 Hellespontos를 건너 소아시아로 쳐들어가 이를 짓밟고 이어서 BC 333년 Issus의 싸움에서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3세의 군대를 격멸하였다. 대왕은 다시 군을 돌려 페르시아 본국으로 쳐들어가 티그리스 강 상류 Arbela의 대회전에서 다리우스 군대를 쳐부숴 페르시아 제국을 멸하였다. 이리하여 서는 마케도니아, 동은 인더스 강, 남은 이집트에 이르는 광대한 대제국이 형성되었다.

4) 알렉산더 대왕의 제국 통치
알렉산더 대왕의 꿈은 서로 분리되어 있던 지중해 세계와 오리엔트 세계를 통합하여 하나의 세계로 통치하는 데 있었다. 알렉산더 대왕이 마케도니아출신의 병사와 아시아 출신의 병사를 동등하게 대우하고 페르시아의 수도인 '수사'에서 그리스인과 페르시아 여성의 대량 합동 결혼식을 거행한 것도 그 표현의 하나이다.

그러나, 그의 기본통치방침은 아리스토텔레스의 '建白書(건백서)'에 따라 그리스인에 대해서는 통솔자(Hegemon)이며, 아시아인에 대해서는 지배자(despotes)에 서는 것이었고 전자는 우인으로 대접하되 후자는 동식물과 같이 하대하는 것이었다.

또 대왕은 정복지의 여기 저기에 '알랙산드리아'라는 이름을 가진 도시를 건설하여 그리스의 학자, 문인, 예술가, 상인 등 각계 각층의 인사를 이주시켰다. 이 결과 언어, 학술, 풍속 등 그리스의 생활 양식과 문화가 동방 세계에 널리 퍼지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세계의 모든 민족을 다 같은 동포로 생각하는 세계동포주의가 생겨 알렉산더 대왕의 제국 통치의 기조가 되었다.

알렉산더의 사후, 제국은 이집트의 프톨레미(Ptolemy)왕조, 아시아의 셀레우쿠스(Seleucus)그리고 마케도니아와 그리스의 안티고누스 고나타스(Antigonus gonatas)의 세 전제국가로 삼분되었다. 그러나 3세기나 계속된 이 후계자시대를 헬레니즘시대(Hellenistic age)라 불러 그 문화사적 의의를 강조하고 있다.

5) 헬레니즘의 여러 국가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와는 달리 '군주정'이 전형적인 정치형태였다. 헬레니즘 왕국 중 3대 강국은 프톨레마이오스가 세운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 왕국, 셀레우코스가 세운 시리아왕국, 바빌로니아의 셀레우코스 왕국, 안티고누스의 자손에 의해 유지된 잔존 마케도니아 왕국이었는데, 이들 3국의 건국자는 모두 알렉산드로스 3세 휘하의 대표적인 장군이었다.

헬레니쯤 시대를 정치적으로는 크게 3기로 나눌 수 있다. 즉 알렉산드로스 3세가 이룩한 제국의 분열과 일련의 새로운 여러 국가의 건설이 이루어진 BC 323'280년, 세력균형, 주변지역에 대한 그리스 문화 및 그리스적 생활양식의 확대, 철학·과학의 우위 등을 특색으로 한 창조적 국면을 이룬 BC 280-160년, 동방 및 로마 문화의 영향으로 인해 정치적 쇠퇴와 자멸을 앞둔 BC 160'30년으로 나뉜다.

● 마케도니아
☞· 헬레니즘 諸왕국 가운데 마케도니아는 국력이 가장 약하였다. 마케도니아에 관해서는 자료가 없어 그 정치 · 경제 등의 상세한 내용이 알려져 있지 않으나, 로마와 싸워 패하여 BC 168년 로마령이 되고, BC 140년에는 그리스와 함께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 이집트
☞· 이집트는 지리적 조건이 좋고 물산도 풍부하여 헬레니즘 왕국 중에서 가장 강력한 전제지배가 확립되었다 전국토의 소유권은 원칙적으로 국왕에게만 소속되었다. 신하에게 주는 賜與地, 병사에게 주는 봉토, 신전령 등이 있었으나 이것도 점유권이 주어져 있을 뿐, 왕은 언제라도 이를 회수할 수가 있었다. 왕의 부를 늘리기 위해서는 개간이 필요했는데, 유력한 신하에게 토지를 주어 개간시키고 개간이 되면 다시 몰수한 실례도 알려져 있다.

농경지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왕료지는 '왕의 농민' 이라고 불리는, 이동의 자유가 없는 농노적 소작인이 경작하였다. 상공업과 그 밖의 모든 산업경제는 왕 한 사람의 부를 위해 강력하게 통제되어 제유식물의 재배, 착유와 맥주양조·제염 ·제지 등 거의 모든 산업은 전매제였다. 광업·은행 등도 모두 왕이 독점하고 수입은 엄격하게 제한하였으며, 수출은 국내 소비를 채우고 남은 것만 私人이 행하였다.

이집트에는 알렉산드리아 ·나우크라티스 ·프톨레마이오스 등 그리스 양식의 폴리스가 셋 있었다. 이 중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의 수도이기도 한 알렉산드리아는 상업항으로서 번영하였고, 또한 무세이온· 대도서관 등이 있는 그리스적 학예의 중심지로, '없는 것은 눈(雪)뿐' 이라고 할만큼 번영을 누렸다.

프톨레마이오스왕조는 수족이나 다름없는 관료군이 이집트를 강력하게 지배하였는데, 古來의 토착종교와 왕가의 극단적인 근친결혼과 같은 풍속·습관 등을 그대로 유지하고, 이집트 토착민과의 마찰을 피하여 현명하게 통치하였다. 신전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감독하였으나, 토착민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神官의 힘은 마침내 강력해져 프톨레마이오스왕조의 말기 왕권을 위협하였다. 그러나 헬레니즘 황국 중에서는 가장 오랜 왕국으로, BC 30년 로마에 합병될 때까지 존속되었다.

●시리아
셀레우코스왕조가 지배한 시리아에서도 오리엔트적인 전제군주국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그 지배영역은 헬레니즘 왕국 중 가장 광대하여 豪族과 어떤 종류의 자치권을 가진 민족(유대인 등), 영내에 많이 만들어져 있는 그리스풍의 폴리스 등 정치적으로 이질적인 요소가 많아 지극히 복잡하였다. 자료가 부족하여 상세한 점은 분명치 않으나, 이곳에서도 전국토가 원칙적으로 왕의 소유였다. 그리고 王有地는 '왕의 백성' 이라고 불리는 농노적 농민이 경작하였다. 국토가 광대하고 정치적으로 복잡하였기 때문에 왕의 지배력이 고루 미치지 못하는 곳이 있어 멀리 파르티아 .박트리아와 서쪽의 페르가몬 등이 독립하였고, BC 64년에는 로마에 합병되어 그 속주가 되었다.

III. 헬레니즘 문화
알렉산더 대왕의 중동지방 정복의 결과 이루어진 문화의 융합과 종족의 혼합 때문에 고전적 그리스 시대의 사상은 대부분 상실되고 말았다. 점차로 새 형태의 문명, 즉 그리스와 동방의 여러 요소들이 혼합된 문명이 형성되었다. 이 문명을 고전적인 그리스 문화(Hellenic Culture)와 구별하여 '헬네니즘 문화'라 부른다. 헬레니즘 문화는 폐쇄적이며 자족적인 폴리스문화에 동방적 요소가 가미되여, 그 결과 개방적이며 보편성있는 문호가 되었다.

바꾸어 말하면 헬레니즘 시대는 고전적 그리스 문화가 각 지역의 특성을 흡수한 시기이다. 이 시대의 사상과 문화에는 변화하는 현실을 반영한 상대주의적인 면이 뚜렷하였다. 그리스문화를 로마에까지 연결시킨 교량적 역할을 한 헬레니즘 문화는 그리스의 폴리스적 전통이 다른 어떤 문화권에도 접속 ·성장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였다.

1. 세계시민주의
☞' 헬레니즘(Hellenism)시대는 알렉산더의 동방정복으로 그 영역을 동방으로 인더스강 유역, 西로는 이탈리아까지 확대시켜 그리스문화의 세계화를 가져왔다. 그러면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체계에 내재된 폴리스 중심의 사고는 좀 더 보편적인 인간성에 기반을 둔 사고에 의해 밀려나게 되었다. 그리스의 시민생활은 직접민주제의 이상보다도 광대한 알렉산더 제국의 전제정치의 현실에 의해 지배받기에 이르렀다. 기원전 4세기경부터 싹튼 개인주의적 경향은 폴리스 시민생활의 전통을 침식하였으며, 그리스인들은 공동체 생활에의 참여를 소홀히 하고 자기 자신의 부와 안락을 더 높이 평가하였다.

문학과 미술에 있어서도 폴리스에 대한 애착심을 표현한 전통은 퇴색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개인주의적 경향은 알렉산더 대왕의 그리스 정복에 의해 더욱더 분명하게 되었다. 문화의 중심지가 그리스에서 동방으로 이동해 갔을 뿐 아니라 문화의 성격도 달라졌다. 고전적인 그리스문화는 폴리스와 민족의 제약을 받아 협소성을 면치 못하였으나, 헬레니즘문화는 폴리스와 국가의 한계를 넘어서서 세계시민주의(cosmopolitanism)를 바탕으로 한 보편주의의 차원을 지향하였다. 이 같은 헬레니즘문화의 특징은 철학과 과학에서 찾아 볼 수 있다.

2. 전체주의와 금욕주의 (핼레니즘의 철학)
1. 쾌락주의(hedonism)의 전통
1) 키레네 (Kyrene)학파
Aristoppos(435-355 B.C.)에 의해 창설된 학파. 小 소크라테스 학파의 하나로서 소크라테스의 사상 가운데 실천적인 면을 강조해서 발전시킴. '덕과 선은 행복이다'라는 명제에서 출발함. '행복은 쾌락의 집합이다'라는 결론을 내림. '쾌락은 욕망 충족에서 얻어진다: 여기서 쾌락은 주는 대상이 무엇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다만 어느 정도의 쾌락을 주느냐하는 강도가 문제가 될 뿐이다. 어떤 것이 좋다거나 옳다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나의 욕망을 충족시켜주고 쾌락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덕적 행위의 기준은 개인의 주관적 감정과 감각에 달려있다. 본능적인 쾌락으로부터 지적인 쾌락까지 포함하며, 순간적이고 덧없는 충동적 쾌락을 추구하는 것은 일시적일 뿐이다.

2) 에피쿠로스(Epikouros)학파
Epikouros(331-27O B.C.)에 의해 창설된 학파. 인생의 목적을 쾌락에 둔다. 그리고 쾌락은 고통의 없음을 의미하며, 관응적인 쾌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의 고통이나 영혼의 불안에서 해방됨을 의미한다. 이 학파에 대한 오해가운데 하나는 이들이 육체적 쾌락을 중요시했다는 평가이다. 이들은 오히려 脫俗과 금욕을 통해 행복을 추구했다.

방법론으로서 'ataraxia'를 주장하고 있다. 마음의 불혹, 부동의 상태를 의미한다. 물질의 세계는 無이며 무에서는 아무 것도 생기는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도달하는 마음의 고요한 상태를 의미한다. 세상과의 절연과 금욕주의적 경향이 있다.

선한 생활 : 외적인 변동이나 내적인 감정에 의해 흔들리지 않는 생활을 말함. 이들 쾌락주의 학설은 Lucretius에 의해 계승됨.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과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를 결합하여 계승한 로마의 시인. 다시 이 쾌락주의와 유물론은 17세기 영국의 Hobbes와 프랑스의 유물론자인 Gassendi에 의해 재발견되고 부활됨. 이 쾌락주의의 전통은 공리주의자들에 의해 현대에까지 계승되고 있다.

2. 금욕주의(stoicism)의 전통
1) 퀴니코스(Kynikos)학파
견유(犬儒)학파라고도 불린다. 小 소크라데스 학파의 하나로서 소크라테스의 사상 가운데 실천적인 면을 강조함. 즉 arete가 무엇인가 하는 소크라테스의 물음에 대해 덕이란 행복이며, 행복은 자족에 있다고 봄. 덕이란 욕망을 억제하는 실천적 능력이라고 봄. 즉 검소하고 자연적인 생활을 지향함. Aristenes, Diogenes가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2) 스토아(stoa)학파
Zenon(336-264 B.C.)에 의해 창설됨. Seneca, Epiktetus, Marcus Aurelius에 의해 계승됨. 선한 사람은 이성적인 사람과 동일시된다 따라서 덕이란 이성에 합치되는 행위라고 본다. 행복은 욕망으로부터 해방되고 외계의 욕망 대상으로 인해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때 얻어지는 것이 행복이다. 이 마음이 고요한 상태를 apatheia라고 한다. 이 마음의 부동상태는 스토아학파의 개인윤리의 이상으로 표현하는 말이다. 이런 상태를 얻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의무를 성실히 수행하고 극기를 잘 훈련하는 것이 요구되었다.

3. 신플라톤주의(Neo-Platonism)
Plotinus(205-270)철학에 붙여진 이름. 플라톤 철학의 부흥과 관련된 철학 운동. 당시의 이원론적 사조에 반대를 보였다.
新피타고라스주의: 영혼과 육체의 구분을 강조하였다. 영혼의 구제는 육체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하였고 여러 가지 금기사항을 재도입 하고 있다.

영지주의(Gnosticism): 이단으로 평가된 초기 기독교 신학의 한 입장이다.

플로티노스는 사물들이 서로 유기적인 관련을 맺고 있는 존재의 계열에 속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 존재 계열에는 여러 단계의 계열로 이루어져 있으며, 세 가지 기본존재들(hypostases)로 구성되어 있다.
① 영혼의 단계: 가시적인 유한한 세계, 현상의 세계들로 구성되었다.
② 예지(nous)의 단계: 엮혼의 단계보다 높은 단계로서 이데아의 세계이며, 다양성이 나타나는 세계이다. 플라톤의 이데아의 세계가 플로티노스에게는 단지 다양성의 세계를 가능하게 만드는 원리들의 세계일 뿐이다.
③ 일자(the One)의 단계: 언어로 표현할 수 없고 단지 존재한다고 확신할 수밖에 없는 단계. 모든 존재의 근원이며, 태양에 비유된다. 완전하며 모든 다양성을 초월해 있으며, 순수하게 정신적인 존재로서 신이라고도 불린다. 모든 사물이 이 일자로부터 (유출)한다고 설명한다.

이 유출설은 일자와 다양한 세계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론이지 기독교의 창조설과는 동일하지 않다. 완전한 존재 일자로부터 모든 존재자들이 단지 생겨나는 것이며, 이 일자와 다른 사물들과의 관계는 창조와 피조의 관계가 아니며, 과학적 설명의 인과적 관계도 아니다. 단지 일자로부터 흘러나옴(emanation, effulegence)이다.

순수 정신적인 존재인 일자로부터 어떻게 물질적인 현상의 세계가 가능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나, 플로티노스는 물질적 존재를 부인한다. 또 어떻게 완전한 선인 일자로부터 악이 현실적인 대상으로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그는 악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대답한다. 그 근거는 물질성이나 악의 속성은 사실 정신적이고 선한 속성이 일자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희박하게 된 결과이지 결코 물질이나 악이라는 다른 원인을 가지지 않는다.

세속적인 욕망의 추구를 비난하고 플라톤의 4가지 덕목과 그의 윤리설을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다. 즉 영혼의 단계에서 필요한 윤리적 덕목들이 있다. 예지의 단계를 위한 덕목들로는 예술, 우의, 논리학 등이 있다. 일자의 단계에서는 일자와의 신비한 합일이 요청된다. 주체와 객체의 일치가 필요하다. 플로티노스는 신비주의자였다.

3. 과학의 발전
헬레니즘 문화의 특색의 하나는 과학의 발전에 있다. 철학은 인간의 내적 세계, 즉 윤리문제를 추구하였으나 과학은 인간보다 그 속에 사는 외적. 현상적 세계를 추구하였다. 헬레니즘 시대의 과학으로는 먼저 수학에 유클리드(Euclid, B.C. 3세기)의 기하학이 있다. 프톨레미 왕조 때의 알렉산드리아는 '동방의 대학'이라 일컬어졌고 여기서 유클리드는 수학을 가르쳤는데 왕이 배우다가 하루는 '너무 어렵다. 쉽게 배우는 방법이 없느냐?'고 물었다. 유클리드는 '수학에는 왕도( royal road, 즉 지름길)가 없습니다. '고 대답하여 유명하다.

이 시대의 수학자로 아르키메데스(Archimedes, B.C. 287-212)가 있다. '만일 몸이 물에 빠지면, 몸의 부피는 배수된 물의 부피와 같다'는 아르키메데스의 법칙으로 유명한 그는 시칠리아사람이었고 역학과 정역학에 주력했다.

천문학에는 지구와 달리 거리를 정확히 측정한 히파르쿠스(Hipparchus,B.C. 2세기), 태양의 그늘로 지구 둘레를 계산(오늘의 계산보다 4%적을 뿐)한 에라스테네스(Erasthenes, B.C. 273-192)가 있고, 고대의 코페르니쿠스라 불리우는 아리스타르쿠스(Aristarchus, B.C. 3세기)가 있다.

헬레니즘 시대의 과학으로 의학을 들지 않을 수 없는데 '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 B.C.460년경 출생)가 있다. 그는 '건강한 생활에 법칙이 있듯이 병에도 법칙이 있다'하여 의학 발전에 기여하였다.

IV. 헬레니즘 시대의 특징
1) 경제적 발전
헬레니즘 시대에는 산업과 교역이 매우 활발하여 경제적 발전이 이루어졌다. 경제적 발전의 이유로는,
1. 알렉산더 대왕의 원정의 결과로 인더스강으로부터 나일강까지의 광대한 지역이 교역활동을 위해 개방되었다.
2. 페르시아의 금은이 유통됨으로써 물가를 상승시키고 투자를 활발하게 하였다. 3. 국가수입 증가의 수단으로 상공업이 촉진·장려되었다. 이러한 요인의 결과로 대규모의 생산·무역·금융 등의 제도가 성장하고, 국가는 주요한 기업가 및 자본가의 역할을 하였다. 경제적 발전의 한 결과로서 대도시의 성장을 들 수 있다.

2) 도시의 발달
대부분의 인구가 농촌지역에 거주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구가 도시로 집중되는 경향이 있었다. 각 도시는 그 크기와 인구 면에서 급속히 팽창되어 갔다. 예를 들면, 시리아의 안티오키아는 1세기 동안에 인구가 4배로 늘어나고 티그리스강 연변의 셀류키아(Seleucia)는 2세기도 안 되는 기간에 수십만의 인구를 갖는 대도시가 되었다.

헬레니즘 시대의 가장 큰 도시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로서, 고대사에 있어서 어느 다른 도시도(로마까지도) 그 규모에 있어서 알렉산드리아를 능가하지 못하였다. 거리는 잘 포장되었으며 잘 구획, 정리되었다. 市에는 훌륭한 공공건물과 공원, 박물관 및 수십만 권의 장서를 갖는 도서관이 있었다. 알렉산드리아는 헬레니즘 문화의 중심이며 특히 과학연구의 중심이었다.

알렉산더에 의해 건설된 헬레니즘 세계는 동서문화를 융합시킨 세계적 문화를 형성하였다. 그리스어는 공용어가 되고 폐쇄적인 폴리스의 문화는 널리 개방된 보편문화가 되었다. 광대한 지역이 각각 지역적 특성을 갖고 있으면서도 세계화된 그리스 문화를 수용하는 획일적인 면을 보였다. 헬레니즘은 고전적 폴리스문화가 넓은 시야를 갖게 된 하나의 창(窓)이며, 이 창은 로마를 향하여 개방되었다.

3)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비교
고대 그리스인들의 생활의 중심이며 지주였던, 폴리스가 무너지고 오리엔트적 전제 군주제가 등장하자 그리스인들은 의지할 곳을 잃어버린 처지가 되었고, 개개인으로 흩어져 폴리스를 초월한 세계시민이 되었다. 폴리스를 잃어버린 사람들의 관심은 애국심이나 공공정신보다 개인의 행복, 개인의 구원에 있었고, 이러한 개인의 행복추구나 개인적 구원의 소망에 있어서, 민족족 구별은 있을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헬레니즘 사상의 2대 기조인 개인주의와 세계시민주의라는 특징이 나타났다.

아울러 인간을 이성의 존재로 파악한 그들의 사고는 자연과학의 발달을 가져왔다. 고대 그리스 시대의 자연 과학이 주로 철학적 사색의 결과였던 데 비하여 이 시대에는 보다 실제적인 과학 지식이 발달하였다. 특히 천문학 분야에서는 지동설. 지구의 둘레 계산 등의 여러 가지 성과도 나타났다.

이애 반해 신의 창조물로서 인간을 이해한 크리스트 문화에서는 신 중심의 사고가 지배적이었고, 신의 은총을 받는 것이 행복의 기준이 되었으며, 신에 대한 숭배와 관련하며 음악, 미술, 건축술의 발달이라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다.

<참고문헌 및 참고 사이트>
지성사로 본 세계사, 이상현, 집문당
사진과 함께 보는 서양고대사, 조인형 역, 강원대학교 출판부
인간의 역사를 바꾼 전쟁이야기, 남경태, 풀빛
www.goodnew.co.kr
www.ynucc.yeungnam.ac.kr/~history/
www.afck.org/eurasia/
www.magazinegv.com/5month/
www.nobelmann.com
www.home.hanmir.com/~ansmm/hel/
dharma.dharmanet.net/art
www.my.dreaamwiz.com/idea21c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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