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신학

교회사 개요

하나님아들 2020. 2. 11. 15:43

교회사 개요

⊙초대 교회사 개요

1세기 - 가톨릭 교회가 시작된 것은 성령 강림 때이다. 베드로를 중심으로 사도들과 제자들이 성령을 충만히 받고 나가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하느님께서 성자 예수님을 보내주셨으며 그분은 메시아 즉 구세주로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묻히셨으며 부활 승천하셨으니 그분을 믿는 자마다 구원을 받으리라"하는 것이 그들이 전한 복음의 내용이었다. 예수의 제자들이 열성적으로 복음을 전파함으로 나날이 신자들이 늘어나고 사도들을 중심으로 신앙의 공동체, 사랑의 공동체가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제자들이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자 유대인을 중심으로 하는 예루살렘 교회와 이방인을 중심으로 하는 교회가 각각 형성되었다. 이방인을 중심으로 한 교회 중 특히 시리아의 다마스커스 교회, 안티오키아 교회, 로마 교회가 큰 공동체로 성장하였다. 그 후 바울로(바오로)의 열성적 전교에 힘입어 이방인을 중심으로 한 교회들을 융성하나 예루살렘의 유대인 중심 교회는 쇠퇴하게 되었다.

2세기∼3세기 - 이때는 이미 12사도들이 사망하였으므로 사도 후 시대(100∼300년)가 시작되는데 특징은 다음과 같다.

①교회 관습이 유대교적 색채를 띠며, ②교계제도가 확정되어 주교, 신부, 부제 등의 등급이 생겼고, ③그리스도 신학이 정립되었으며, ④로마의 영토 확장으로 그리스도교가 확장되었고, ⑤그 후 그 발전을 견제하기 시작하여 로마 황제들로부터의 박해가 200년간 계속되었다.

4세기 -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313년 밀라노 칙령을 발표, 신앙의 자유가 선포되었다. 그리고 392년 데오도시우스 황제 때 가톨릭 교회는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었다. 이로 인해 ①수도회가 창설되고, ②공의회를 열어 교회의 문제를 협의하고, ③전례가 발전하였으며, ④정통 가톨릭 교리가 정립되어갔다.

5세기 -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으로 로마가 멸망하였다. 게르만 민족 특히 프랑크 왕국의 문화와 고대 그리스 문화가 융합되어 중세 문화가 탄생하게 되었다. 이때 가톨릭 교회가 위기를 맞는 듯했으나 게르만 민족의 회개로 위기에서 벗어나게 된다.



⊙중세 전기(750년∼1057년) 교회사 개요 - 프랑크 왕국이 로마를 지배하는 동안 가톨릭 교회는 계속 발전되었으며 교황령이 생겨났다. 그러나 교회가 국가의 보호와 혜택을 받으면서 황제가 교회를 간섭하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교회가 세속화되고 교권이 약화되기 시작했다. 프랑크 왕국의 멸망과 더불어 가톨릭 교회도 암흑기를 맞이하여 교회가 로마 귀족들에 의해 지배되고(880년∼962년), 후에는 독일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내정간섭으로 자율권이 상실되기에 이르렀다. (962년∼1046년). 아울러 교리 논쟁으로 서방 라틴 교회와 동방 비잔틴 교회가 갈라지게 되어 오늘날까지 서방교회와 동방교회는 전례가 다르다. 1046년 두 교회는 완전히 결별하여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중세 후기(1057년∼1300년) 교회사 개요 -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의 등극으로 교회의 쇄신의 계기를 마련케 되었다. 세속권의 지배를 받던 교회가 자주권을 회복했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서 정치에 관여하게 되었는데 11세기에 시작한 십자군 운동 바로 그것이다. 한편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들의 각성으로 교회는 큰 힘을 갖게 되었는데 특히 많은 수도회가 창설되었으며, 그 가운데 기사 수도회는 십자군 운동의 기수 역할을 담당하였다. 십자군 운동의 목적은 이슬람 교도들이 탈취한 성지의 탈환이었는데 그 실행과정에서 비잔틴 문화와 이슬람 문화의 접촉으로 학문 예술에 큰 발전이 있게 되었다. 또한 당시 보다 열심히 살아보고자 시작되었던 청빈 운동이 극으로 흘러 이단이 생기게 되고, 이를 지키기 위한 종교 재판까지 등장되어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도 생겨났다.

⊙14세기, 15세기 교회사 개요 - 유럽은 지방 분권화가 이루어지면서 단일성을 점차 잃어갔으며 교회는 교황청의 아비뇽 천도와 대이교들의 출현으로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르네상스 시대의 일부 교황들은 문화적인 업적은 쌓았지만 교회 쇄신 차원에서는 부족하였으며, 많은 고위 성직자들도 그들의 영적인 사명을 망각하게 되면서 교회는 붕괴의 위기에 놓이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은 적극적으로 신심활동을 하며 성당의 건립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나 신자들의 신심활동 중에도 많은 부분이 개인의 영달을 위함이었기에 미신적인 요소가 많았고, 물질 추구에 비중을 두어 교회 내에서는 비판과 개혁의 소리가 높아가고 있었다.

⊙16세기 교회사 개요 - 1517년 10월 31일 독일 성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수사 신부였던 마르틴 루터는 대사 남용에 항의하여 95개 조항의 신학 명제가 담긴 편지를 두루 보냈는데 이는 정통 신앙의 기저를 흔들어 놓는 것이었다. 이로써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가 분열되는 불행한 종교개혁 시대(1500년∼1650년)가 열렸으며, 이를 시작으로 스위스에서 츠빙글리와 칼뱅의 종교개혁, 재세례파의 급진적 종교개혁이 일어나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또한 영국에서는 헨리 8세를 중심으로 한 성공회가 탄생되었다. 이렇게 되자 가톨릭 교회 내에서도 개혁 바람, 쇄신 바람이 일어났는데 1545년∼1563년까지 트리엔트에서 전세계 주교들이 모여 퇴락한 교회에 대한 반성과 더불어 신앙교리의 혁신을 모색하게 되었다. 프로테스탄트의 거센 반박을 받아 충격이 심했던 가톨릭 교회는 새 시대를 맞이하였다.



※프로테스탄트의 기원 - 16세기 전까지는 가톨릭 교회만 있었다. 그 당시 유럽 전체는 가톨릭 국가였으므로 개개 국가의 이익보다는 가톨릭 전체의 이익이 우선되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16세기에 들어오면서부터 프랑스, 스페인, 영국 등 서부 유럽 국가들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노력하기 시작하면서 개별 국가의 독립적 사상이 대두되기 시작하였고, 자연 가톨릭 교회는 국가에 종속하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교황 및 일부 성직자들이 잡고 있던 권세와 부를 남용하는 일이 벌어졌다. 한편 인문주의 사상이 팽배하면서 신을 부정하고 인간이 주관심사로 등장하였으며 가톨릭 교회 내부에서는 베드로 대성전 건립에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게 되자 교황 레오 10세는 전대사를 선포하게 되었다. 이것이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가톨릭 신부였던 루터는 95개 조항을 내세우고 비텐베르크에서 가톨릭에 반기를 들고 나섬으로써 독일 북부와 스칸디나비아 전국가가 루터교화하기에 이르렀다. 가톨릭은 16세기 전까지 교회의 전통을 이어오다가 일부 성직자의 타락과 부패로 인해 불운을 맞게 된 것이다. 루터가 세운 교회는 그 후 전세계로 확장되어 나갔다. 한편 프랑스 칼뱅도 또 하나의 종파를 만들어 큰 세력으로 스위스를 비롯해 북유럽으로 퍼져나갔고, 영국에서도 헨리 8세가 자신의 이혼을 합법화하기 위해 교황청과 결별을 선언하고 성공회를 확립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예수님은 하나의 교회를 세우시고 하나되기를 강조하셨으므로 같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프로테스탄트나 성공회를 한 형제로 여기고 따뜻이 사랑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17세기, 18세기 교회사 개요 - 국가 절대주의가 퍼지면서 교황권을 제한을 받게 되었다. 프랑스의 갈리아주의, 독일의 페브로니오 사상, 오스트리아의 요셉주의가 가톨릭 교회를 괴롭혔고, 또한 얀세니즘(극도의 엄격한 신앙생활을 주장하는 이단)이 등장해 더욱 혼란에 빠지기에 이르렀으며 새로운 사상(계몽주의)의 등장으로 종교마저 합리주의적으로 생각도록 종용되니 가톨릭 교회는 사면초가에 놓이게 되었다.

⊙19세기 교회사 개요 - 프랑스 대혁명의 영향으로 독일, 이탈리아 등지에서도 혁명의 바람이 불어 교회는 권위를 상실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후 19세기 후반부터는 점차 권위를 회복하게 되는데, 이 시기에 특기할 만한 점은 교황 레오 13세(1878년∼1903년)가 가톨릭 사회주의 대헌장이라고 칭하는 『노동헌장』을 발표한 것이라고 하겠다.

⊙20세기 교회사 개요 - 교황 요한 23세는 제 2차 바티칸 공의회(1962년∼1965년)를 소집하였다. 이 공의회는 교황 요한 23세의 선종으로 다음 교황인 바울로(바오로) 6세가 끝마무리를 하였는데 3년간 전세계 주교들이 참석하여 사회 전반에 대해 논의한 회의였다. 이 공의회 후 문헌이 나왔는데 신자들은 성서와 함께 이 공의회 문헌(가톨릭 교회의 입장을 한눈에 알 수 있는)을 공부해야 한다. 특히 평신도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권장하고 있다. 공의회 이전에는 라틴어로 전례를 거행하여 평신도들은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공의회는 전례개혁을 천명하고 모국어로 미사를 할 수 있게 함은 물론이요, 사제와 평신도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여러 가지 제안을 하였다. 

'역사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역사신학 총론  (0) 2020.02.11
현대 역사신학의 해석학적 입장  (0) 2020.02.11
사건으로 읽는 이스라엘의 역사  (0) 2020.02.11
기독교와 역사서술의 객관성  (0) 2020.02.11
E. H. Carr : 역사란 무엇인가  (0) 2020.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