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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의 문화관

하나님아들 2020. 1. 7. 22:29

칼빈의 문화관
신동식목사


차 례

들어가는 말

칼빈의 문화 이해

1] 하나님 절대주권으로서의 문화

2] 소명으로서의 문화-삶의 관점의 문화

가] 창조목적에 맞는 문화이해

나] 문화에 대한 구체적인 인식과 바른 이해
결 론



들어가는 말

구 프린스턴의 개혁신학자 J.G. Machen은 말하기를 "그리스도의 교회가 당면해온 최대의 문제 가운데 하나는 지식과 신앙과의 관계 즉 문화와 그리스도교와의 관계이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J.G. Machen의 견해는 기독교와 문화와의 상관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말이다. 이미 오래전에 한 신학자의 선지자적인 선포가 오늘날 우리 시대에 있어서 매우 의미심장한 명제로서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과 같이 다변화된 사회속에서, 문화의 영향아래서 살수 밖에 없는 이러한 현실 속에서 교회가 문화에 대한 바른 이해를 제시해 주지 않는다면 신앙의 형태는 이원론적인 삶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문화에 대한 성경적인 바른 답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한 요구에 답하기 위해 종교개혁을 통하여 중세의 무지를 개트린 칼빈의 문화관을 살펴 보려고 한다.

칼빈의 유산을 물려받고 있는 한국의 개혁주의 교회들에게 칼빈의 견해는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오랫동안 문화적 분리주의에서 깨어나지 못하였다. 여기에는 여러원인이 있지만 그중 한가지가 바른 복음의 이해가 결여 되었기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런의미에서 문화에 대한 바른 이해가 주어진다면 더 이상 문화적 분리주의에서 깨어나서 문화변혁자로서의 본 위치로 올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개혁신학의 절정이라 할 수 있는 칼빈의 사상을 이해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리라 생각한다. 역사의 현장에서 개혁자로,신학자로,목회자로 사역하였던 칼빈의 문화의 대한 이해를 습득하여 바른 문화관을 정립하여야 할 것이다.


칼빈의 문화이해


존 칼빈(1509-1564)은 루터와 쯔빙글리에 의하여 놓여진 종교개혁의 기초를 확고히 하였다. 말하자면 칼빈은 개혁을 완성한 2대 종교 개혁자였다. 이것은 결코 그가 단순히 하나의 재생가요 모방자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칼빈은 신학계에서뿐만 아니라 문화영역에서도 독창적인 공헌을 하였다.사실 그는 탁월한 문화적 신학자라고 할 수있을 것이다. 칼빈의 문화관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 사상에서 출발해서 이 세상의 기독자의 소명론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본다.


1] 하나님의 절대 주권으로서의 문화

칼빈은 인간에게는 천성적으로 예술과 문화를 추구하고 발전 시키려 하는 성향이 있음을 인식했다. "아담의 자손들 가운데 기술과 예술을 발전 시키려는 데에 열심을 쏟았던근면하고 재주있는 사람들이 있엇다. " 또한 부연하여 말하기를 "하늘과 땅을 관찰 하며,과거와 미래를 결합시키며,오래전에 들은 것을 게속 기억에 담아두며,즐겨하는 것은 무엇이나 다 생각해 낼 수 있는 영혼의 그 다방면의 민첩함,그리고 많은 훌륭한 에술품들을 만들어 내며,놀라운 발명품들을 만들어 내는 영혼의 그 다방면의 교묘한 솜씨,이러한 것들은 분명히 인간에게서 신성이 있다고 하는 확실한 증거이다."라고 하였다."이러한 재능은 창조주이시며 구속자이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베푸신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칼빈은 인간의 문화를 하나님의 은총과 관련시키면서 동시에 인간의 문화는 모두 모든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에 종속된 전적으로 제한된 범위를 갖는 영역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이같은 사실은 인간은 타락했어도 자신의 자연적인 은사들은 박탈당하지 않았으며 땅의 일을 [정치,경제와 모든 기계공작 기술과 문예를 포함한 문화활동] 다루는 인간의 능력은 단지 부분적으로 손상되었다"고 생각하였다. 칼빈은 이렇게 인류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선한 것을 모두 빼앗기지 않은 것은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를 만나시는 것과 똑같은 하나님의 은총때문 이었다는 사실을 지적함에 결코 주저함이 없었다.

칼빈은 에술과 과학에서의 인간의 능력은 역시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온다고 하였다. 그 예로 성막을 짓는데 지혜와 총명이 필요했던 오홀리압과 브사렐에게 성령이 조명되어졌음을 들었다.또한 이러한 은총은 신자나 불신자 모두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일반은총이라고 하였다.그러므로 칼빈은 말하기를 "만약 여호와께서 우리가 물리학이나 변증법,수학 및 기타 학문을 배우는데 닜너서 불신자들의 업적이나 봉사의 도움을 받기를 원한다면 그들의 도움을 이용하도록 하자"고 한 것이다.

또한 " 칼빈은 교회가 인간의 문화를 사용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도록 도울 수있다고 믿었다. 또한 그는 교회가 이러한 은사들을 특별히 굫쇠 건축이나 예배의식 등에 사용함으로서 은혜로우신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을 돌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그러므로 예술,음악,그리고 조각등은 비록 제한된 방식이긴 하지만 우리의 삶의 방향이 하나님과 미래의 삶을 지향하게 도와 줄 수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결국 칼빈은 이 모든 만물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타락에도 불구하고 불신자나 신자 모두를 통하여 이루어 가신다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확신한 것이다. 세상에 있는 다양한 모습을 통하여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 하면서 정작 문화에 대한 무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너무나 편협적인 신학만을 받아들였기때문이다.칼비주의를 내세우면서도 정작 칼빈의 생각에는 무감각한 모습으로 지내고 있는 것이 교회의 현실이라면 기독교 강요를 통하여서 보여주는 칼빈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할 것이다. 칼빈은 이러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으로서의 창조명령인 문화적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신자들을 이 쎄상을 위한 소명자로서 부르신 것이다. 현세의 생활에서의 소명자로서의 삶의 모습은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며 사는 것임을 볼 수있다.


소명으로서의 문화 - 삶의 관점에서의 문화

B.B 워필드 박사는 칼빈은 문화의 전영역을 교회의 속박에서 자유롭게 했다고 보았다. 칼빈은 아퀴나스가 문화의 전영역을 교회의 지배아래 두었으며 신학의 종이 되게한 것에서부터 자유롭게 하였다. 특별히 칼빈은 율법의 세가지 영역에서 제 3영역인 교훈적,규범적 사용즉 신자들을 위한 생활의 규칙으로서의 사용을 강조함으로 문화의 기초를 삼았다. 헨리반틸 박사도 칼빈은 그의 기독인의 자유론에서 이 모든 광범위한 생활영역을 국가와 교회로부터 해방함을 그의 문화철학의 초석으로 삼고 있다고 보았다. 그는 이어서 말하기를 자유로운 하나님의 백성은 이 세상을 믿음 안에서 사용하며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함으로 그에게 영광을 돌린다. 그러므로 사람의 문화적 업적과 부의 추구는 그 자체가 악이 아니다라는 것을 보여 주는것이다.고 하였다.

이렇듯 대부분의 칼빈의 문화에 대한 입장을 그의 기독인의 자유에 기초하여 생각하였다. 그러기에 기독인의 소명에 대한 관점에서는 소홀하지 안았는가 생각한다. 그런의미에서 그의 기독교강요 제3권 10장 현세의 생활에 대한 그의 소명론에서 칼빈의 문화관을 살펴보고자 한다.

칼빈은 "어떻게 우리는 현재의 삶과 그의 도구들을 사용할 것인가"에서 현세의 좋은 것들은 하나님의 선물로 여겨야 즐겨야 한다고 강조 하였다. 그는 하나님이 주신 것은 어떤것이든 감사함으로 받고 사용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들을 사람들에게 맡겨 놓으신 것이기 때문이다. 이 관점은 문화를 바라보는 데 참으로 중요한 것이다. 문화는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필요로와 즐거움을 위해서 주신 것이다. 거기에는 물질도 물론 포함 되어있다. 이세상의 모든 것들은 실상 사람이 살아가는데 유익한 도구가 되기 위해 준비된 것이다. 왜냐하면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의도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통치를 위임하신 것은 바로 인간을 통하여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 가실려고 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회는 생활과 분리 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까지 문화를 볼때에 즐기는 측면에서 고급문화만을 생각하였기에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진정환 의미에서의 문화 즉 삶의 필요를 위한 도구로서의 문회를 등한시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칼빈은 문화의 모습을 필요와 즐김의 두모습을 바로 보았던 것이다.

칼빈은 이러한 하나님의 선물인 문화를 사용함에 있어서 방종함으로 흘러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중요한 원칙을 삼았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자유라는 이름아래 무절제하고 무분별한 방종의 모습으로 흐르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이러한 모습에 칼빈은 양심에 맡겨서 규제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양심의 구속력에 대해서는 한계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중요한 원칙을 정하고 그 원칙에 따라 제한되어져야 한다고 본 것이다.

가] 창조목적에 맞는 문화이해

칼빈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여러 가지 선물들을 창조하신 목적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이지 우리의 멸망을 위해서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정하신 그 목적에 따라서 하나님의 선물을 사용한다면 그러한 사용은 잘못된 방향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목적을 열심히 바라보는 사람이 가장 바른 길을 걷게 될 것이다." 고 하였다. 음식문화,의복문화 그리고 현대의 대중문화에 이르기까지 모두 동일한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교회문화,정치문화,교육의 관점,경제문화등 모두 포함되는 것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알리기 위해서 이 모든 것을 인간에게 주셨다는 말을 반복적으로 하고 계신 것이다. 또한 만물의 자연적인 자질도 우리가 그것을 어떤 목적으로 어느정도까지 이용할 것인가를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고 본 것이다. 이 말은 오늘날 환경오염이 극대화되고 있고 ,자원의 고갈이 심각해 지고 있는 상황에서 더욱 절실히 느껴 지는 것이다. 정말 칼빈의 선지자적인 모습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정하신 그 목적에 따라 바로 사용되어질 때 바른 문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문화학자들이 이야기 하는 문화변혁을 의미하는 것이라할 수있다. 현재 문화에 혼합되거나 분리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지는 문화의 변혁,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창조하시고 정하신 문화인 것이다.

문화에 대한 구체적인 인식

칼빈은 하나님의 창조목적에 맞는 문화를 누리기 위해서 구체적인 인식과 바른 이해를 가져야 됨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우리에게 주신 소명에 충실하는 것이라보고 있다. 칼빈은 창조물 즉 문화적 산물의 사용에 있어서 필요에만 제한하는 비 인간적인 철학을 버리라고 한다.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합당한 열매를 우리에게서 사악하게 빼앗을 뿐 아니라 그것을 실행하면 반드시 사람에게서 의식을 빼앗아 멍청이로 만든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육의 정욕을 막는데에도 이민 못지 않은 노력을 기울려야 한다.그렇지 않으면 육의 정욕은 무한하게 흘러 넘친다.고 본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들의 문화현장에 대한 입장에서 너무 잘 나타나고 있는것이다. 교회는 교회 문화만을 고집하고 나머지는 세상적이라하여 문화의 이원론적 형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태이다. 그러다 보니 노래방이나.비디오방 또는 당구장,그리고 볼링장에 대한 바른 관점을 주기 보다는 사회적 유행의 흐름과 여론에 따라 관점이 혼란을 겪고 있는 것이다. 결국 교회는 사회의 변화속에 유리되어 중세의 수도원처럼 되어버린 것이다. 또한 한쪽으로는 바른 결정이 없으므로 개인 믿음이 기준이 되어서 육의 정욕으로 흘러가게 하는 길을 터 놓은 것이다. 사실 문화만큼 우리의 삼성을 쉽게 자극하는 것은 없다. 그것이 문화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특별히 영상이 우리의 눈과귀를 잡아두는 멀티미디어 세계에 있어서는 정욕의 세계로 빠져 들어가기는 너무 쉬운 것이 사실이다. 칼빈은 바로 이러한 관점을 염두에 두었듯이 하나님이 주신 선물에 대한 바른 인식과 이해를 강조하였던 것이다.

그럼 하나님이 주신 문화에 대한 소명자로서 바르게 가져야 될 문화의 선용은 무엇인가? 칼빈은 네가지로 이 문제에 대하여 접근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첫째는 선물을 주신 분을 주시하면,편협한 마음과 방종을 막을 수있다는 것이다. 칼빈은 정욕을 다스리는 한 방법은 우리를 위하여 만물을 지으신 뜻은 우리가 창조주를 인식하여 우리를 향하신 그 분의 인자하심에 감사하도록 하는데 있다고 하였다.칼빈의 생각은 하나님이 주신 문화[물질을 포함한 모든 문화]에 대하여 하나님의 창조 목적대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정욕대로 해서는 안되는 것임을 강조한 것이다. 정욕으로 사용되어지는 문화는 하나님의 창조명령을 왜곡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제나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바라볼때에 그 목적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바른 문화를 형성 할 수 있는 것이다. 문화에 관심을 가진 자들이라면 언제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절대표준에서 모든 것을 점검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유롭다는 이유아래 무분별하게 교회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것은 바람직 하지 않다 그러므로 칼빈의 견해를 깊이 생각해 볼만하다.

둘째로 칼빈은 절제의 법칙을 배워야 한다고 하였다. 사실 칼빈은 이 말을 사용할때에 물질에 관계된 문제에 대해 중점을 두고 있는 것임을 볼 수있다. 그러나 많은 부분에 있어서 물질과 문화는 깊은 상관관계에 있음을 표면화된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 부분에 있어서도 문화에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모든 문화는 -고급문화든 저급문화든 또는 대중문화든간에- 진보를 목적에 두고있다. 사회가 다변화되면 될수록 더더욱 성장에 목말라 한다. 그리고 성장의 문화는 물질과 연관을 맺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문화에 대한 소명의식이 있는자들은 이러한 부조리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이다. 궁핍속에서 참고 지낼 수 있는 법을 알때에 바른 문화를 소유할 수있는 것이다. 칼빈은 궁핍속에서 인내하지 못하는 자는 번창할 때 대개 상반된 의식을 갖게 된다고 보았다.그러므로 문화선용을 바르게 하기위해서는 바른 이해가 있어야 한다.

셋째는 문화는 우리에게 위탁된 것으로서 언젠가는 결산을 보고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문화명령의 의미는 대리 통치자로서의 위임된 것을 분명히 하고 있는 창조명령이다.[창1:28, 2:15] 또한 이것은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지는 재림의 날에 원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할 것이다.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리라" [요한계시록 21:24절]고 선언 함으로서 위탁된 우리의 문화를 보고하게 된다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까지 청지기의 의식이 물질과 교회 봉사라는 좁은 의미에서 만 사용되었던 것 같다.그러나 넓은 의미는 바로 문화의 청지기 의식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활동이 하나님앞에 결산 할 날이 온다는 것은 우리의 믿음만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인식해야 할 것이다. 이런 의식이 되어진다면 문화의 선용뿐 아니라 문화의 창조적 활동에도 엄청난 활력소가 될 것이다. 교회가 이러한 바른 이해아래 문화의 인도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 우리의 활동을 소홀이 여겨서는 안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주의 부르심이 우리 생활 방식의 기초라는 것이다. 주께서는 우리 모두가 어떤 행동에서나 주님의 부르심에 주의할 것을 요청하신다는 것이다. 칼빈은 인간의 변화무쌍한 본성의 모습을 잘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자기 생활의 한계를 분명히 하기 위하여 각 사람에게 특유한 생활방식에 따라 의무를 지정하셨다고 보았다. 그리고 자기 생활의 다양함을 인정하면서도 경솔하지 않는 생활 방식을 "소명"이라고 말했다 그리하여 인간이 부주의한 인생을 방황하지 않도록 하셨다. 바로 이러한 소명에 따라 우리는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문화적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제정하신 소명이 없다면 우리는 참다운 사명자의 삶을 살 수 없는 것이다. 문화활동은 하나님의 소명아래서 활동해야 하는 것이다. 아무나 유행에 휩쓸려 하는 것이 아니라 바른 소명을 가진 자가 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소명자를 사명자로 키우는 것이 바로 교회가 해야될 소명이요 사명인것이다.사실 한국교회는 이 면에 있어서 너무 경솔하게 대처한것같다. 이미 교회안에서 문화적 편견 - 직업관에 있어서 - 이 이러한 소명의식을 흐리게 하였던 것이다. 진정한 칼빈주의적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교회라면 문화적 소명의식에 대해서 바른 기준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다.

칼빈의 문화론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 사상에서 출발해서 이 세상의 기독자의 소명론으로 나아가고 있다. (22) 칼빈 자신의 말에 의하면 그는 "너무나 완고히 이 로마교의 미신에 몸과 마음을 바치고 있었기 때문에 그 깊은 수렁에서 빠져 나오기란 사실상 불가능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급격한 개종을 통하여 마음이 완악하기로는 그 누구보다도 더 하였던 나의 전생을 정복하여 복음을 가르치는 마음을 불붙게 하였다."고 하였다. 그는 복음의 사역자로서 그리고 종교개혁자로서 이중적 사명을 자각하게 되었다.(23) 그는 평생의 직업인 기독교강요를 출간하게 되었고 이 책은 후세에 훌륭한 신교의 신학저서 가운데 하나로 있게 되었다. 칼빈은 교황의 권위를 부정하고 종교의 성직정치를 인정하지 않은 사실은 잘 알려진 일이지만 동시에 인간의 이성이 지식에 있어서 궁극적 해결점이라는 이성의 자율을 부정한 사실도 또한 분명하게 했다.

칼빈은 영감된 성경에 복종하므로 만물이 하나님의 의로우신 뜻으로 말미암아 발생된다고 가르친다. 비록 우리는 유한한 마음으로 때로 선택과 유기의 사실때문에 난처해질 때도 있지만 그것은 오히려 피조물의 공의의 최고 심판장인 하나님의 뜻을 무법 하게 파고 들어가려 함에 있는 것이다. (24)

칼빈은 각자의 신앙에 따라 문화활동이 선하게 되고 악하게도 된다고 본다. 신앙에서 나오지 않는 것은 모두가 죄다. 모든 배교자의 문화는 자신의 작품을 후세에 남김으로서 자신을 내세우고, 자신의 영광을 높이려 한다. 그러나 기독인의 자유를 수행물로 하는 칭의의 교리는 인간을 자유롭게 하여 문화적사명에서 하나님을 섬기게 한다.

칼빈은 종교개혁의 선구자인 루터보다 문화론에 있어서 훨씬 진보적이었다. 루터의 문화론이 보수주의적이었고, 군주 체제를 옹호 하면서 농업을 장려하는 방향을 나아간데 반해서 칼빈의 문화론은 진취적이었고, 공화 체제를 옹호한면서 상공업을 장려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25)

칼빈은 농업, 상업을 위시하여 미술품과 취미생활에 이르기까지 넓은 의미의 문화를 옹호하였다. 또 한편으로는 과소비와 사치 생활을 반대하였으나 또 한편으로는 정상적이고 감상적이며 정신적인 쾌락을 부정하지 않았다. 칼빈은 죄란 물질에 있는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속에 있으며, 악이란 빛깔, 소리, 음식, 의복에 있지않고, 하나님의 창조하신 질서를 남용하고 파괴하는데 있는 것으로 보았다.

칼빈의 문화론은 루터의 문화론 보다 훨씬 더 사회의 변혁에 영향을 미쳤다. 문화적 신학자로서의 칼뱅은 모든 문화현상을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해 그 통치하에 두려 한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문화 영역에서 인간은 하나님 안에서 교회와 국가로 부터 자유롭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는 방종이 아니고 세상을 악으로 단념 하려는 것도 아니다. 신앙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의롭게 되며 중생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새롭게 된다. 그러므로 성화하는 말씀의 감화는 세상에있는 모든 실존에까지 넓혀져야 한다. 모든 인간은 문화적 요구를 완수 할 신성한 사명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만물은 모두 우리의 것이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것이기 때문이다. (26)

칼빈주의 문화론은 본질적으로 말세론적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전생에 미래의 생을 바라보는 것이며 그러기에 영원의 빛 아래서 모든것을 보아야 한다. 이세상은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에 세상것에 사로 잡히지 않고 그것을 소유할 줄을 알아야 한다.

칼빈에게 있어서 문화는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보다 저속한 문화 현상과 마찬가지로 모든 학문, 예술, 지식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그를 봉사하도록 해야 한다. 여기서 인간 문화에서 이중성이 있음을 본다. 하나님이 영광을 위하지 않은 인간의 행위는 자기 패배에 지나지 않으며 무의미하고 헛된 것이기 때문이다. Soli Deo Gloria! 하나님께만 영광이 있으리라! 이것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그리스도의 사업에서 뿐만 아니라 인간의 문화적 활동에 있어서도 칼빈의 생의 표어였다.


결 론

이 시대의 특징은 바로 문화에 있다고 함이 적절할 것이다. 모두들 문화시민이 되고 싶어서 너나할것없이 문화의 메카인 도시로 몰려들고 있는 것이 이 사실을 증명할것이다. 문화는 지역을 극복하고 사상을 전달하며 인간의 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데 문화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음이 오늘 우리들의 안따까움이다. 그런면에서 칼빈의 하나님의 창조 계획과 그 목적과 진행에있어서 절대주권으로서의 문화의 모습과 소명으로서의 문화에 대한 생각은 우리들에게 바른 이해를 가져다 주었다. 칼빈의 말처럼 "아무리 보잘 것 없고 천한 일일지라도 그것이 소명임을 알고 순종하면, 하나님 앞에서는 그 일이 빛날것이며 매우 귀중한 것으로 인정받을 것이다"는 사실은 오늘 우리들의 삶의 길을 바르게 제시하여 주고 있다. 동산에서 도시에로의 전이과정에 있는 하나님의 문화명령을 바로 이행함으로서 이제까지 문화적 분리주의자로, 문화적 이원론자로 낙인 찍혔던 부당한 자리에서 문화변혁자로서의 새로운 갱신이 있어야 할 것이다.

J.G. Machen은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첫째는 기독교가 문화에 예속되는경우이며,둘째는 종교의 확고한 영역을 부여하려고 문화를 파괴하는 그래서 적어도 그리스도인은 세상문화에 대하여 무관심하게 여기는 것으로보았다. 그리고 셋째는 성별화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예술과 학문을 파괴하지도 않고 또 무관심하지도 않으면서 오히려 개발하여 하나님을 섬기기위해 성별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제 소명자로서 한국교회와 개개인은 어떤 자리에 있어야 할 것인가? 개혁자들의 바른 외침을 들어야 할 것이다. 이들은 성경을 바로 이해하였고 이해한 대로 살았던 것이다. 오늘 우리는 바른 성경의 이해와 그 이해대로 살아온 믿음의 선배들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소명의식에 따라 문화적 사명을 잘 감당함으로 하나님의 창조 게획을 이루어 나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