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 형성적 과제에 관여함: 복음주의신학에 대한 포스트모던적 문화 이해의 통찰들
발제자: 스탠리 그렌츠(Stanley J. Grenz,
Carey Theological College, Vancouver, BC)
번역자: 이 승 구 (Seung-Goo Lee,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Kukje Theological Seminary)
1999년 12월에 나는 (내가 섬기고 있는) 캐리 신학 대학의 목회학 박사 프로그램에 등록하고 있던 아프리카 선교사들과 아프리카 사람들의 초청으로 케냐의 나이로비에서 한 강좌를 인도한 바 있었다. 그 강의는 내가 뱅쿠버에서 가르치는 프로그램과 비슷한 점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좀 양해를 구하면서 서구 사회의 포스트모던적 전환에 대한 제시를 포함시켰었다. 내가 그 강의를 마쳤을 때, 커다란 국제 청소년 조직의 후원 아래서 선교사로 섬기고 있는 한 참석자가 강하게 말하기를 그런 자료를 포함시켜 강의한 것에 대해서 양해를 구할 필요가 전혀 없으니, 그것은 바로 그곳 나이로비에서 그 자신이 사역하고 있는 대상인 그곳 젊은이들을 묘사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서구 사회는 일반적으로 포스트모던적 전환으로 지칭되는 문화적 전환기에 있다. 그러나 이는 서구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고, 점증하는 포스트모던적 문화는 그 범위에 있어서 급격히 세계적인 현상이 되어 가고 있다. 포스트모던주의의 세계화는 이 세상 각 곳의 그리스도인들이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이 제공하고 있는 통찰들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 논문의 목적은 이 폭 넓은 도전의 한 가지 긍정적인 측면을 탐구해 보려는 것이다. 포스트모던적 전환은 문화적 현상일 뿐만이 아니라. 문화 자체를 새로운 방식으로 보는 방식을 열어준 지성적 운동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포스트모던 문화는 그들이 살고 있는 세상과 관여하려는 복음주의자들에게 도전을 줄뿐만 아니라, 문화에 대한 포스트모던적 이해 자체는 복음주의 신학의 과제의 어떤 측면들을 보는 상당히 유망한 관점을 제공해 주기도 한다고 할 수 있다.
토대: 포스트모던적 전환과 문화의 성질
이것이 왜 그런지를 살펴보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포스트모던적 전환이 문화에 대한 이해 자체를 어떻게 바꾸었는지를 탐구해야만 할 것이다. '문화'라는 용어가 폭넓게 사용되고, 그 개념은 오랜 역사적 전통을 자랑하지만 수세기에 걸쳐서 문화라는 개념은 그 의미의 극적인 변화를 겪어 왔다.
문화에 대한 변화하는 이해들
'문화'(culture)라는 단어는 "경작한다"(to till the soil)라는 뜻의 라틴어 '쿨티바레'(cultivare)에서 파생한 것이다. 그 어원은 우리를 문화의 본래적 의미, 즉 곡식이나 동물들을 돌아봄(the care and tending of crops or animals), 특히 그 활동이 그 대상을 더 좋게 만들고 온전하게 하는 것을 목적할 때의 돌아봄이라는 뜻에로 인도해 간다.[1] 특별히 인간적인(human) 문화라는 개념은 인간에 대한 이런 돌보는 과정을 은유적으로 확장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문화는 특히 가르침을 통한 사람의 '발달'(development)이나 '세련화'(refinement)와 연관되게 되었다. 그래서 키케로(Cicero)는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밭은 아무리 그 땅이 좋아도 경작하지 않으면 열매를 내지 않는 것과 같이 영혼도 가르침이 없으면 생산적일 수 없다. 그것들은 그 어느 하나도 없으면 유효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영혼의 경작은 철학이다. 철학은 악을 뿌리 채 뽑아 내고, 영혼을 씨를 받아들이기 좋도록 만들어 주며, 영혼으로 하여금 다 자랐을 때 가장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는 그런 씨를 심도록 하는 것이다."[2] 이런 관점은 '고급 문화'(high culture)로 이해된 문화를 개인을 교육하고 세련되게 하는 과정으로 이해하고, (예술이나 문학과 같은) 예술적이고 지적인 산물들이 '세련된'(refined) 사람 연관되던 계몽주의가 나타날 때 특히 융성하게 되었다.
1920년대에는 '형성'(Bildung)에 초점을 맞추는 것과 연관된 '고급 문화'(high culture) 개념이 특정한 사회 집단의 관습과 제의로 구성된 문화 개념에 자리를 내어 주었다. 문화 이해에서의 이 전환과 연관해서 문화 인류학이라는 갓 태어난 새로운 영역을 연구하는 이들은 문화의 통일시키며 통합하는 성격에 초점을 맞추면서도,[3] 어떤 사회를 다른 모든 사회들과 구별하는 구체적인 행동 방식을 탐구하였다.[4]
1980년대 이후로는 사람의 개인적인 삶과 사회적 삶의 역사적 우연성(contingency)에 대한 점증하는 의식에 의해서 문화에 대한 관점이 더 순화되어졌다. 새로운 포스트모던적 관점의 핵심에는 문화에 대한 이전의 현대주의적 정의에서 발견되는 '통합적'(integrated) 초점에 대한 거부가 있다. 포스트모던적 인류학자들은 문화는 수동적으로 문화를 받아들여 내면화한 문화적 집단의 회원들에게 외적으로 전달된 '사회 질서를 부과하는 선재하는 힘'(a preexisting social-ordering force)이라고 보는 옛날의 가정을 버려 버렸다.[5] 더 나아가서, 문화의 통합하는 역할에 초점을 맞추는 이전 입장이 의심받게 되었다. 이제 문화는, 안토니 코헨의 대조하는 묘사를 인용하여 말하자면, "사람들과 과정들을 통합시키기(integrates)보다는 집적시키는(aggregates) 것"으로 여겨진다.[6] 이에 더하여,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은 문화를 사회적 상호 작용의 결과와 산물로 보고, 사람들을 문화의 수동적 수납자로 보다는 능동적 창조자로 본다.[7]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것은 사회적 관계들의 일반적인 틀, 분명히 이해된 일련의 신념들과 가치들, 또는 주도적인 이데올로기이기보다는 알랑 뚜랑(Alaine Touraine)이 말하는 "사회적 행위자들이 조절하고, 통제하고, 그것을 충용하고, 사회적 조직으로 변혁시키면서 그들이 서로 절충하는 일단의 자원들과 모델들"이다.[8]
그러나 지금의 논의와 관련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문화의 본질을 이루는 공통적 인간 행동들에 초점을 맞추는 것으로부터 문화와 의미 사이의 연관성에 더 관심을 가지는 포스트모던적인 움직임이다. 코헨(Cohen)이 주목한 바와 같이 현대의 '인지적(cognitive) 인류학자들'은 문화를 "그 안에서 사람의 삶의 다른 측면들이 그들 사이의 자의적 범주적 경계들을 부과하는 것 없이 서로 연관될 수 있는 의미들, 개념들, 그리고 관념들의 틀을 의미한다"고 이해한다.[9] 환언하면, 문화는 "공유하는 지식(shared knowledge)으로 구성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그들이 속한 사회의 기능하는 성원들로 행위하기 위해서, 즉 그들이 행하는 방식대로 행하고, 그들이 만드는 것을 만들고, 그리고 그들의 경험을 그와 같이 독특한 방식으로 해석하기 위해서 알아야만 하는 것을 포함한다. 짧게 말해서, (포스트모던적 이해에서는) 문화란 주로 특정한 개인의 관점으로부터 주어졌고,[10] 인간 정신은 그것들을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에 유의미한[11] 일련의 의미 있는 형태와 상징들 안에 내재하는 것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문화의 기능
포스트모던 인류학자들은 문화를 의미 형성의 공유된 차원에 대해 말하는 속기적 방식(a shorthand way)이라고 본다. 이는 문화를 세상과 세상 안에서의 개인적 정체성에 대한 사회 구성적 견해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이해이다. 사회 구성적 사유의 선구자들 중 한 사람으로 (보스톤의 지식 사회학자) 피터 버거(Peter Berger)가 있다. 버거는 사람들이 미리 구성되고 주어진 세계 내에 살기보다는 그들 자신이 만들어 낸 사회 구성적 세계 안에서,[12] 그에 대하여 사회가 필요한 문화적 도구를 제공하는[13] 그런 세계 안에서 산다고 논의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았을 때 사람들은 그들을 일단의 비슷한 의미 창조적 문화적 구조를 발전시키는 데로 이끄는 공유된 사람들이 창조한 산물들과 학습된 습관들에 의해서 중재된 비슷한 경험을 (그 사회의 다른 성원들이 가진 동일한 일반적 양상을 따르는 경험을)[14] 가진 한도 내에서 한 문화를 공유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구조들(schemas)은 계속되는 정체성 형성의 도구들을 제공한다. 과거 사건들의 기억들을 재구성하고, 계속되는 경험에 의미를 부여하고 미래를 위한 기대를 만들어 내는 데 필요한 틀을 구성한다는 의미에서 말이다.[15] 이 모든 것을 합해 볼 때, 문화적 구조들(the cultural schemas)은 사람이 사는 세상을 구성하는 것이다.[*]
비록 이렇게 구성된 세계도 주어진 보편적이고 객관적 실재와 비슷하게 보이지만, 데이비드 모르간(David Morgan)의 표현을 사용하여 말하자면, 이는 실제로는 "그 세대들이 끊임없이 만들고, 파괴하고, 재구성하고, 다시 디자인하기 위해 노력하는 불안한 건축물이다".[16] 의미 형성적 작업의 목적은 사회 집단이라는 맥락 가운데서 개인의 정체성, 즉 사회적으로 구성된 자아를 형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제는, 문화 자체의 구성이라는 과제와 같이, 결코 완성되지 않고, 따라서 계속되는 과정이다.[17]
이 역동적 과정의 핵심에는 사회학자들이 '상징들'(symbols)이라고 부르는 것, 즉 그것을 수단으로 해서 사람들이 자신들을 이해하고 그들의 깊은 열망과 동경을 지적하고, 그들이 사는 세상을 구성하는 공유된 의미들을 전달하는 언어와 물체들, 상들(images) 그리고 제의(祭儀)들(rituals)이 있다. 더구나, 그들이 공유하는 상징들을 통해서 집단의 성원들은, 이 과정 가운데서 그들이 사용하는 상징들의 의미를 규정해 보려고 함께 노력하면서, 삶의 중심적 측면들에 대한 그들의 이해를 표현하고 서로 교통하는 것이다. 상징들과 그 의미들을 혼동하려는 인간의 정향에도 불구하고, 상징과 그것이 상징하는 것 사이의 필연적 연관성은 없다. 상징들에 부과된 의미들은 자의적(恣意的)인 것이다. 동시에, 상징들은 단순히 사적(私的)인 문제인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공적(公的)인 것이다. 상징들의 이런 공적인 측면이 문화적 의미의 조달자들로서의 그들의 중요성에로 인도하고, 사회 집단에 대한 참여를 촉진시킨다.[18]
셰익스피어로부터의 유명한 구절을 하나 인용한다면, 우리는 모든 세상이 무대라고 말할 수 있다. 비록 그 무대가 (이 포스트모던 사회에서는) 우리들 자신이 구성한 무대라고 이해되지만 말이다. 의미 형성에 참여함으로 우리는 그 안에서 우리가 사회적으로 조성한 역할을 수행하고 우리 자신의 정체감을 얻는 맥락의 창조에 기여한다. 이 사회적으로 구성된 무대는 고정되고 안정된 것이기보다는 때로는 우리에게 지각되지 않고, 때로는 모든 이들에게 자명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화하는 끊임없이 유동적인 것이다. 우리의 삶의 과정 가운데서, 우리의 개인적 정체성에 대한 감각(과 우리가 하는 역할은) 우리들의 구성된 세계 안에서의 변화와 함께 변화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문화 이해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문화와 종교 사이의 연관성이다. 문화 인류학자들은 문화와 종교 사이의 사회학적 연관성을 발전시키는 경향이 있다. 한 사람의 영향력 있는 이의 이름을 거명한다면, 버거는 사람들이 사는 사회적으로 구성된 세계 내에서 종교가 하는 결정적 역할을 강조한다.[19] 종교의 역할은 그 성원들에게 궁극적 실재와 연관된 존재감을 부여하고, 그 해석적 틀에 우주적 지위를 줌으로써 그 사회와 그 기관들을 거룩하고 우주적인 준거틀 안에 놓게 하여 특정한 사회에 고유한 세상을 정당화하는 것이다.[20] 문화적 표현들이 한 사회가 궁극적인 것이라고 믿는 것에 대해서 말하는 한, 그 문화적인 표현들은 종교적인 것이라고 버거는 덧붙여 말한다. 그를 따르는 이들은 사회적으로 구성된 세계 내에서 자아의 정체성을 확보하는 데 있어서의 종교의 역할에 대해서 이론화하면서 버거의 중심적 개념을 개인 정체성 형성의 영역에로까지 밀고 나가기까지 하였다.[21] 그것을 수단으로 하여 사람들이 세상을 구성하고 자신들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문화적 상징들은 근본적으로 종교적이거나 종교적 성격을 가지는 것이다.
문화의 성질에 대한 이런 포스트모던적 전망은 우리들의 신학 이해에 대해 두 가지 아주 깊고도 상호 연관된 함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첫째는, 그것이 우리를 신학적 성찰에서의 문화의 위치에 대한 새로운 전망에로 인도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그것이 신학을 의미 형성적 작업으로 이해하는 방법을 열어준다는 것이다.
신학과 문화: 신학에 대한 상호 작용적 모델을 지향하면서
Theology and Culture: Toward an Interactive Model of Theology
인간의 실존이 문화적으로 조건화되어 있다는 의식은 어느 시대에나 그들이 사는 문화적 맥락과 관여하는 신학자들의 관심을 촉발시켜 왔다. 그러나 신학자들은 신학에 있어서 문화가 차지해야 하는 역할에 대해서 단일한 생각을 표현해 온 것이 아니다. 사실 희랍 철학이 희랍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몽학 선생 역할을 한다고 시사한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의[22] 추종자들과 "아테네가 예루살렘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수사적인 질문을 한 터툴리안(Tertullian)의[23] 추종자들 사이의 항구적 토론은 문화적 맥락에 대한 고려가 신학적 구성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해야 하느냐는 보다 큰 문제의 한 측면으로 여겨 질 수 있다.
상호 작용하는 신학과 문화(Theology and Culture in Interaction)
비록 신학자들은 신약 시대로부터 문화와 신학의 관계 문제에 대해서 논의하여 왔으나, 19세기부터 시작하여 자유주의 신학적 프로젝트의 도래에 의해서 이 문제는 새로운 긴급성을 얻게 되었다. 슐라이어마허(Schleiermacher)의 뒤를 따라서 자유주의자들은 현대 지식의 빛에서 기독교적 신념을 재구성하는 과제에 헌신하여 왔다.[24] 그리고 이 목적을 위해서 그들은 자신들의 신학적 사유에서 문화에 자리를 내어 주는 것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작업은 자유주의적 프로젝트가 심히 눈에 띄는 뻔한 문화적 절충에로 인도한다는 것에 관심하는 보수주의 신학자들의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이에 반응하여 어떤 보수주의자들은 신학은 초문화적 진리를 발견하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25] 따라서 신학자들은 문화에 별로 깊은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없다고까지 논의하였다.[26]
그러나 오늘날에는 문화로부터 자유로운 신학의 추구가 근거 없는(both ill-founded and unwarranted) 것이라는 것에 대한 폭넓은 의견의 일치가 있다. 모든 이들이 문화적 타당성을 요청하지만, 이것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신학자들의 이해는 다양하다. 다양한 시사점들 가운데서 처음에는 두 가지 제안이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상호 연관의 방법(the method of correlation). 자유주의자들과 보수적 입장 사이를 중재해 보려고 하는 20세기 신학자들 중의 하나로 폴 틸리히(Paul Tillich)를 들 수 있다. 틸리히는 근본주의자들이든지 신정통주의자든지를 막론하고 보수주의자들의 '초자연주의적' 방법은 메시지를 받게 되는 사람들의 질문과 관심('상황')을 무시한다는 점에서 적절하지 않다고 한다.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수납의 가능성을 창조한다고 가정하므로,[27] 이 접근은 사람들은 그들이 묻지도 않은 질문에 대한 대답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28] 틸리히는 또한 자연인의 상태로부터 신학적 대답들을 이끌어 내려고 하는 자유주의자들의 '자연주의적' 또는 '인간주의적' 방법도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본다. 틸리히가 볼 때, 그러한 시도는 인간 실존의 소외 현상과 (대답을 포함하고 있는) 계시는 그들이 스스로 대답해 낸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말하여 진 것이라는 사실을 간과한다는 것이다.[29]
그 모두에 대한 대안으로 틸리히는 그의 잘 알려진 '상관의 방법'을 제안하였다. 이는, 그가 하는 말로, "기독교 신앙의 내용을 상호 의존적인 실존적 질문들과 신학적 대답들로 설명해 보려는 것이다".[30] 질문들은 인간 실존에 대한 주의 깊은 검토를 통해서 제기되므로, 신학자는 먼저 철학자로서 작업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 단계에서 신학자는 인간 실존에 함의된 질문들에 대답하기 위해서 신적 계시의 상징들에 근거하여 그 의미를 이끌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철학은 질문을 발견할 수는 있으나 그에 대한 대답을 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학자의 과제는 세속적인 사람들이 묻는 질문들에 타당(관여)하려고 하면서도 본래의 기독교적 메시지에 신실하기 위해서 계시의 대답들을 해석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미 그의 생전(生前)에도 틸리히의 상호 연관의 방법은 다양한 평가를 받았다. 비평가들은 그가 계시와는 동떨어진 자율적인 철학에 너무 많은 독자성과 권위를 부여한다고 질책했다. 좀더 구체적으로 그들은 유한한 이성에 내재한 긴장들에 의해서 분열되고 파산하는 철학이 어떻게 바르게 옳은 질문들을 정식화할 수 있다고 신뢰받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 의아스럽게 여겼다. 비평가들은 기독교 신앙에로 온전히 '변개하지'(converted) 않은 철학에 의해서 제시된 질문들의 내용과 형태가 기독교적 '대답'을 왜곡시키지나 않을까 걱정했던 것이다.[31]
근자(近者)에는 문화들의 구체성과 다원성에 대한 오늘날의 문화 인류학의 강조점을 신중하게 취급하지 못한다는 이유에서 상관의 방법 전체가 공격받고 있다. 포스트모던 인류학자들은 어떤 보편적 문화 일반의 특성들을 추구하기보다는 특정한 다양한 문화들에 관심을 가지기 때문이다. 인류학에서의 이런 움직임은 그에 대해 신학적 구성이 적절히 맞아 들어가게 될 맥락으로서의 인간적 보편을 정식화하려는 상관의 방법을 사용하려는 시도를 허용하지 않는 듯하다. 오늘날의 문화 인류학은 그 대신에 신학자들로 하여금 특정한 것들에 초점을 맞추게 하고, 신학을 구체적이고 공동체적으로 형성된 삶의 방식의 한 부분으로 보도록 격려하는 것이다.[32]
상황화(토착화, Contextualization). 문화적으로 타당성 있는 신학을 어떻게 형성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두 번째 널리 주장되는 제안은 신학 자체보다도 선교학, 좀더 구체적으로는 '복음과 문화'에 대한 선교학적 질문에서 기원한 제안이다. 교회의 변화하는 세계적 상황과 선교 운동의 발전에 대한 반응에서 선교학자들은 복음의 토착화(inculturation), 또는 좀더 좋은 표현으로는 '상황화'(contextualization)를[33] 요청하였다.
상황화(토착화) 프로그램에 대한 가장 중요한 진술로 여겨질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천주교 선교학자인 로버트 쉬라이터(Robert Schreiter)의 진술일 것이다.[34] 쉬라이터는 상황화 과정을 문화 가운데서 선하고 참된 것을 긍정하고, 악하거나 죄된 것을 도전하고 고치는 목적을 가지고 복음이 문화와 만나는 과정으로 그리는 모델의 상황화를 현실성이 없는 것으로(unworkable) 여기면서 거부한다. 그가 보기에 그런 접근은 토착화가 어떻게 일어나는지에 대한 오해만을 배태시킨다. 왜냐하면 그것은 "한 문화에서 어떤 사람이 전달하는 메시지가 그 전달자가 의도한 바로 그 방식으로 다른 문화에 속한 다른 이에 의해서 받아들여지고 이해될 수 있으리라고 가정하기 때문이다".[35] 쉬라이터는 그와 대조해서 "복음은 순수한 형태로는 한 문화 속으로 전혀 들어갈 수 없고", "항상 이미 복음을 전하는 자의 문화 안에 토착화되어,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확신한다.[36] 그렇기 때문에 그는 문화의 역동성을 출발점으로 보도록 권면한다. 그는 "그 안에서 복음의 제시가 이전의 문화적 토착화로부터 점점 이탈되어져서 새로운 문화적 정황에 맞는 새로운 형태를 취하도록 허용하는" 변증법적 접근을 요청하는 것이다.[37]
아마도 개신교 복음주의 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것은 챨스 크라프트(Charles Kraft)의 접근일 것이다. 그는 의미는 문화적 형상들(forms)이나 상징들(symbols)을 통해서만 사람들에게 전달될 수 있다는 인류학적 원리를 가지고 시작한다. 그리고 이 형상들이 한 사람에게서 다른 이들에게로의 의미의 전달자로 기능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문화적 체계 안에서 문화적 형태를 발전시키고 영속화시킨다고 한다. 크라프트에 의하면, "사람들이 문화적 양상들을(cultural patterns) 비중립적으로 주관적으로 사용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문화의 형상들은(forms) 본질적으로 중립적이라고 한다.[38] (문화의 양상들과 문화의 본질적 형상에 대한) 이 구별은 그에게 독특한 상황화의 근거를 제공하였는 바, 이는 그로 하여금 기독교적 의미는 인간의 문화적 형태들을 통해 전달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한 것이다. 그러므로 크라프트는 "상대적인 문화적인 형태들이" "절대적 초문화적 의미를" 전달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신적인 메시지는 "이런 (문화적) 형태의 용어들로 적절히 표현될 수 있지만, 그 메시지는 그 형태 자체와 그 형태에 이전에 부과된 의미들을 초월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39]
선교학자들의 상황화 요청은 여러 신학적 성향을 지닌 신학자들의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40] 복음주의자들은 교리 구성의 초역사적 성질에 초점을 맞춤으로서 신학적 작업의 사회적 맥락과 모든 신학적 성찰의 역사성을 신중히 취급하지 못하던 옛 보수 신학의 비역사적 성격을 극복할 수 있는 한 방법으로 이를 환영하면서,[41] 특히 이런 접근에 관심을 나타내었다.[42]
그러나 상황화 프로그램은 그것을 주장한 이들의 동기에 대해서는 동감하는 이들에게조차도 보편적으로 인정받은 것은 아니다. 한 예만을 들자면, 더글라스 죤 홀(Douglas John Hall)은 (틸리히적) 상관(相關)의 프로그램을 그렇게 쉽게 탈선시킨 급진적 문화적 절충과 적응의 성향이 상황화의 노력도 손상시킬 위험이 있다고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는 또한 맥락적 차원을 심각하게 취하는 것이 그 자체의 사회적 맥락에만 좁게 초점을 맞추게 하는 신학을 낳게 하여, 신학이 "그 사회(its host society)의 조류와 계속 변화하는 전향들의 노예가 되고", 그 결과로 "그것의 위대한 전통이 말하고자 하는 폭넓은 질문들에 대한 시야를" 상실하게 될 것을 우려한다.[43] 홀(Hall)은 또한 지역 신학들(local theologies)을 발전시키는 것이 결국 교회를 나누어서 "그들의 개별적 문화의 문제들에 너무 사로 잡혀 있어서 더 이상 서로 간에 의미 깊게 의사 소통을 할 수 없는 신학적 지역들"로 파편화 시킬 것을 두려워한다. 만일 그런 현상이 일어난다면, 교회는 그 교회 일치적 성격과 이 지구의 역사에 있어서 참으로 "세계적인(global) 분석과 치유책"이 요구되는 바로 그런 시점에 "전세계적 증언"(worldwide witness)의 잠재력을 저버리게 될 것이라고 한다.[44]
상관의 방법과 상황화를 넘어서서(Beyond correlation and contextualization). 홀(Hall)의 경고와 같은 경고들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 경고들은 가장 유해한 잠재력 있는 어려움을 정확히 지적하지는 못한다. 사실 상황화와 상관의 방법은 모두 비슷한 '쇠약하게 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그 주장자들이 건설적인 대화에로 이끌어 가고자 하는 한 두 대화 상대자들 사이의 보편성을 가정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인간 문화의 특정성을 인정하지 않고서 상관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신학적 구성을 제시할 문화를 보편화하는 성향이 있다. 상황주의자들은 이와는 대조적으로 기독교 메시지에 대한 모든 이해의 특정성을 너무 쉽게 간과하고서, 그 대신에 그들이 말하는 문화의 언어로 표현하려고 하는 기독교적 보편을 가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문화에 대한 포스트모던적 이해는 신학은 "복음과 문화 모두를"은 물론이거니와 복음이나 문화 각각에 대해서도 우리는 그것들을 후에 대화에 참여하게 되는 기존의 주어진 실재들로 전제하지 않을 수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오히려 신학을 구성하는 상호 작용적 과정 가운데서 복음 (이는 항상 복음에 대한 우리의 이해이다)과 문화(그것은 필연적으로 그 안에서 우리가 살고 사역하는 개인적 정체성과 사회적으로 구성된 세계에 대한 공유된 감각인 의미 구조에 대한 우리의 묘사 일 수 있을 뿐이다!) 모두가 대화 자체에 의해서 서로 정보를 주고받는 역동적 실재들인 것이다.
상호 작용적 신학(an interactive theology)을 위한 신학적 근거: 문화와 영
신학은 문화를 신중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견의 일치에도 불구하고, 신학이 어떤 의미에서든지 문화적 맥락에 빚지고 있다는 시사(示唆)는 문화에 민감한 신학에 대한 요청이 성경에 대한 개신교의 고전적 초점을 손상시킬 것을 우려하는 많은 복음주의자들로 하여금 필연적으로 경고의 깃발을 세우도록 한다. 이 반론에 대하여서 나는 기독교 성령론에 대한 바른 이해에서 나오는 상호 작용적 신학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서구 신학 대부분은 모든 진리의 유일한 저장소요, 성령이 적용하는 유일한 장소로 교회에 초점을 맞추어 왔다. 그러나 성경 저자들은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서의 성령의 역할과 연관된 임재인 성령의 임재에 대한 훨씬 더 폭 넓은 이해를 드러내고 있다.[***] 사실 성경적 신앙 공동체의 성령론은 '영'(spirit)을 '숨'(breath)과 연관시키고, 그래서 결국 '생명'(life)과 연관시키는 데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고대 히브리 저자들은 영(Spirit)을 창조하시고(창 1:2; 2:7), 생명을 유지시키시며(시 104:29-30; 사 32:15; 욥 27:3; 34; 14-15), 따라서 피조물의 생명을 활동적이게 하고 번성시키는 신적인 능력(divine power)으로 말한다.[*] 생명을 주시는 창조주 성령은 생명이 약동하는 곳에는 어디에나 현존하시므로, 성령의 음성은 인간 문화를 비롯한 많은 매체를 통해서 들려질 수 있다는 것은 이해 가능하다.[**] 성령에게서 오는 인간의 생명을 약동시키는 힘은 문화적 표현을 낳게 하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문화적 표현들에서 창조주 성령의 임재의 흔적들을 찾아 볼 수 있으리라고 예기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인간들이 구성하는 산물들(artifacts)과 상징들을 통해 표면에 거품을 내는 모든 생명 가운데 현존하시는 성령의 음성을 주위 깊게 들어야만 한다.
그러나 여기서 나는 문화를 통한 성령의 적법한 말씀하심은 항상 성경 본문과 일치한다는 것을 재빨리 덧붙여 말해야만 한다.[****] 사실,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성령에 반하여 성령의 음성을 문화에 맞추는 것은 오늘의 상상과 경험의 어떤 차원을 성경 가운데 있는 것 가운데서 어떤 것이 받아들여 질 수 있은 것이고 아닌 것인지에 대한 시금석이 되는 인간적 보편의 지위에로 올릴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45] 그렇기 때문에, 성령의 음성이 어디서 발견되든지 그 음성을 인정할 준비를 갖추고 있으면서, 기독교 신학자들은 (성경) 본문의 우위성을 계속 주장해야만 한다. 특정한 사회 문화적 맥락 안에서 듣는 것 외에는 그 누구도 (성경) 본문을 통해서 성령의 말씀하심을 들을 수 없지만, 본문 가운데서 성령의 말씀을 듣는 것은 문화 가운데서 성령의 말씀을 듣는 유일하게 분명한 정경(the only sure canon)을 제공한다. 왜냐 하면 언제 어디서나 있는 성령의 말씀하심은 항상 성경 가운데서의 이 근본적 말씀하심과 일치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문화와 (성경) 본문은 전달의 두 가지 다른 기연을(moments) 구성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들은 그저 하나의 말씀하심인 것이다(they are bur t one speaking).[*] 결과적으로, 오늘날 말씀을 듣는 자들은 두 가지 다른 '들음'(listenings)에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들음에 관여하는 것이다. 그들은 듣는 자들의 특정한 맥락 가운데서 말씀을 통하여(through the word) 말씀을(the Word) 말하시는, 따라서 모든 것들 가운데서 말씀하실 수 있는 성령의 음성을 듣는 것이다.
문화로서의 신학: 의미 형성과 그리스도의 공동체
Theology as Culture: Meaning-Making and the Community of Christ
포스트모던적 전환은 우리를 문화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로 인도하고, 이는 또한 상호 작용적 신학을 요청하는 것이다.[**] 문화에 대한 포스트모던적 개념은 또한 신학이 그 자체로서 문화적 실천(cultural practice)이라는 의식에로 우리를 인도해 준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기독교 신학은 그리스도의 공동체라는 하나의 특정한 사회 집단의 문화적 실천이다.
이 점이 너무 넓게 영향을 미치도록 되어서는 안되지만, 몇 가지 고려 점들은 교회가 그것의 독특한 문화를 지닌 독특한 사회 집단이라는 것을 지시해 준다. 오늘날의 사회학자들에 의하면, 집단이란 '한 단위의 의식'(unit awareness)을 공유하는 (즉, 자신들이 독특한 실체라고 생각하는), 그리고 사회적 정황 가운데서 의미를 전달하는 상징적 대상물들과 관련하여 의의를 갖는 관찰 가능한 행위의 형태로 그들 사이에 상호 작용 또는 의사 소통이 있는 서로 연관되고 서로에 대해 정향을 가지고 있는 둘 이상의 사람으로 구성되는 것이다.[46] 이런 기준을 가지고 잴 때, 교회는 그 보편적 표현에서나 지역적 표현에서 모두 집단(a group)이다. 더 나가서, 공동체나 사회로서의 교회는 그 자체를 제도적으로 지속시키고, 의미 형성과 세계 구성의 특정한 이상을 전달하기를 추구한다.[47]
그러나 더 중요하게는 교회에 참여하는 이들이 공유하는 "한 단위 의식'(unit awareness)은 그 핵심에 있어서 신학적이다. 그리스도의 공동체에 참여하는 이들은 건축 벽돌과 의미의 전달자로서 봉사하는 일련의 상징들을 공유한다. 이 상징들은 (죄나 은혜와 같은 단어들을 포함한) 특정한 언어들, (십자가와 빈 무덤을 포함한) 구체적인 심상들, (성찬 잔과 같은) 구체적인 사물들, 그리고 (세례나 성찬과 같은) 제의들과 같이 모든 문화의 다양한 범위를 다 포괄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상징들을 공유하지만, 이런 상징들이 전달하려고 하는 의미에 대해서 반드시 의견이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의미 형성은 그 참여자들 사이에 활기찬 대화와 깊은 논의와 때로는 격렬한 토론을 포함하는 교회 안에서 계속되는 과정이다.
칼 바르트는 그의 기념비적인 {교회 교의학}(Church Dogmatics)을 "신학은 교회의 한 기능이다"는 선언으로 시작하고 있다.[48] 그러나 교회가 사회 집단인 한에서 바르트의 진술은 다음과 같이 바뀌어 질 수 있을 것이다: "교회의 한 기능으로서의 신학은 기독교 문화적 실제와 연관된다". 앞서 말한 바 있는 문화 인류학의 발전은 이런 맥락에서의 신학에 대한 이해를 교회의 '고급 문화'(high culture)를 구성하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49] 오히려 신학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의미를 형성하는 활동과 연관된다. 그러므로 신학은 우리가 '기독교 문화적 의미'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의 건축 벽돌과 전달자로서의 기능 가운데서 다양한 기독교적 상징들과 활동들과 연관된다.
이 목적을 위해서 신학은 교회적 실천, 또는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단순히 나뉘어진 물리적 행위들에서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양상들로 변화시키는 교회적 실천의 차원과 관여한다. 사실 그 핵심에 있어서 모든 기독교적 활동은 신학적인 것이다. 그런 모든 실천들은 어떤 배후의 신학적 신념이나 핵심 가치의 표현들과 연관되고, 그런 것들에 의해 정보를 받고, 그런 것으로 봉사하는 것이다. 신학은 기독교적 실천이 그 배후의 의미와, 그리고 그들이 연관된 특정한 기독교적 상징들이나 의미의 전달자들과 가지는 연관성을 명백히 외현화 하는 것이다.
공동체의 실천들에 대한 이런 성찰은 자주 신학의 '비판적 과제'(critical task)라고 불리는 것에 속한다. 한스 프라이(Hans Frei)는 신학적 작업의 이런 측면을 "그 자신의 언어와 행위들을 그 공동체에 내재한 규범이나 규범들 아래서 평가하는 기독교 공동체의 이차적 평가"라고 적절하게 묘사한 바 있다.[50] 공동체의 실천에 대한 그러한 비판적 성찰은 정보를 주는 의미 구조를 밝히려는 시도를 포함한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그들이 건전한 기독교적 가르침을 반영하고 있는 정도에 근거해서 개별적 실천들을 평가하는 것도 포함한다.[51] 물론 이 과정 가운데서 신학자들은 동기를 유발시키고 기독교적 실천 일반으로 표현되는 것과 특히 탐구하는 구체적 실천의 의미에 관한 그들의 결론들에 의해 영향을 받을 것이다.
신학이 문화로서 이해되는 기독교 공동체와 연관되는 다른 더 밀접한 방식이 있다. 신학자들은 교제의 실천에 대해서 성찰하기만 하지 않고, 기독교적 상징만이 아니라 기독교의 공통적 신념과 가치를 좀더 직접적인 방식으로 규정하고 표현해 보려고도 한다. 즉, 신학적 작업은 비판적인 과제뿐만 아니라, 건설적인 과제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건설적 차원에서 신학은 직접적으로 교회의 문화적 실천(a cultural practice of the church)이다. 캐떠린 태너(Kathryn Tanner)가 요약적으로 잘 말한 바와 같이, "신학은 ...... 의미 형성적 과제에 전무하는 실질적 사회적 실천(a material social practice)이다".[52] 이런 특정한 사회 집단과 연관해서 그런 신학적 구성은 그리스도의 공동체 중심부에 있는 특정한 '의미의 틀', '의미의 주형'(matrix of meaning), 또는 '신념들의 모자이크'(mosaic of beliefs)에 대한 특정한 이해를 제시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나는 이전 절에서 내가 지적한 바 있는 유의점을 다시 한번 더 반복해야만 하겠다. 포스트모던적 문화 인류학은 문화적 실천으로서의 신학의 건설적 과제에 대한 모든 바른 이해는 신학자들이 그것을 설명하고 그것에 근거하여 신학적 지식의 건축물을 세울 수 있는 주어진 실재(reality)로서의 어떤 완결된 전체로부터 시작하는 전형적인 현대적 접근을 피하여야만 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오히려 신학적 구성은 언제나 공동체에 참여하는 이들이 그리스도인들로서 그들이 공유하고 있는 상징들과 연관된 공유하는 문화적 의미에 대해 함께 대화할 때 항상 관여하고 주고받는 과정에서 나오는 것이다. 오직 이런 방식으로만 신학적 건설은 그것의 참된 목적을 성취할 수 있다. 즉, 그들의 특정한 문화적 맥락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현재적 '사회'(society)에게 성경 본문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성령의 목소리를 듣는 항상 필수적이고 결코 변하지 않는 교회의 계속적인 과제를 섬기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목소리를 들은 이들이 그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의 주님 되심을 증언하라고 부름 받은 문화의 맥락 가운데서 복음을 선언하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다.
주(註)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 이 배경에 대해서는 Michael Warren, Seeing Through the Media: A Religious View of Communications and Cultural Analysis (Philadelphia: Trinity Press International, 1997), 41을 보라.
2 Cicero, Tusculan Disputations, 2. 5. 13 in Cicero in Twenty-eight Volumes, trans. J. E. King, revised edition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1971), 18:159.
3 이는 예를 들자면 Paul G. Hiebert, Cultural Anthropology, second edition (Grand Rapids: Baker, 1983), 30에서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4 예를 들자면, John W. Bennett and Melvin M. Tumin, Social Life (New York: Alfred A. Knopf, 1948), 208-209를 보라.
5 Roy G. D'Andrade, The Development of Cognitive Anthropology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5), 250.
6 Anthony P. Cohen, Self Consciousness: An Alternative Anthropology of Identity (London: Routledge, 1994), 118-19.
7 Cohen, Self Consciousness, 118-19.
8 Alaine Touraine, Return of the Actor, trans. Myrna Godzich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88), 8, 26-27, 54-55: "a set of resources and models that social actors seek to manage, to control, and which they appropriate or whose transformation into social organization they negotiate among themselves."
9 Cohen, Self Consciousness, 96.
10 Clifford Geertz, The Interpretation of Culture (New York: Basic Books, 1973), 45.
11 Ulf Hannerz, Cultural Complexity: Studies in the Social Organization of Meaning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2), 3-4.
12 Peter L. Berger, The Sacred Canopy: Element of a Sociological Theory of Religion, Anchor Books edition (Garden City, NY: Doubleday, 1969), 3-13.
13 또한 Hiebert, Cultural Anthropology, 28-29도 보라.
14 Claudia Strauss and Naomi Quinn, A Cognitive Theory of Cultural Meaning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7), 48.
15 Strauss and Quinn, Cognitive Theory, 49.
* 원문 대조: "Taken together, the cultural schemas constitute the world a person inhabits"(4).
16 David Morgan, Visual Piety: A History and Theory of Popular Images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8), 9.
17 Morgan, Visual Piety, 204-205.
18 Hiebert, Cultural Anthropology, 118-19.
19 Peter L. Berger and Thomas Lukemann, "Sociology of Religion and Sociology of Knowledge," Sociology and Social Research 47 (1963), 422.
20 Berger, Sacred Canopy, 32-36.
21 Morgan, Visual Piety, 205.
22 Clement of Alexandria, The Stromata, I.5.
23 Tertullian, The Prescription Against Heretics, Ch. 7. 터툴리안이 고전 철학과 문화 자체(per se)에 대한 근본적 거부를 표현한 것이라고 하는 것은 과장이 될 것이다. 그가 거부한 것은 자주 이교 철학과 기독교 신학의 혼합에서 기인하게 되는 이단들이었다. Justo L. Gonzalez, The Story of Christianity (San Francisco: Harper, 1984), I: 53-54를 보라.
24 Claude Welch, Protestant Thought in the Nineteenth Century, volume 1, 1799-1870 (New Haven and London: Yale University Press, 1972), 142.
25 그래서 Lewis와 Demarest는 그들의 조직 신학의 독자들에게 "근본적 기독교 교리 하나하나에 대한 연구는 근본적이고 초문화적 의의를 지닌 문제와 더불어 시작된다고" 경고한다. Gordon R. Lewis and Bruce A. Damarest, Integrative Theology, three volumes (Grand Rapids: Zondervan, 1987), I:9. 동시에 루이스와 데마레스트는 어떤 의미의 상황화에 대해서는 애호하기도 한다. 그들은 신학은 계시된 진리에 신실할 뿐만이 아니라, "현 세대의 그리스도인들과 우리가 섬기는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분명하고 의미를 지녀야만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Integrative Theology, I:38.
26 19세기 신학자 챨스 핫지의 뒤를 따르면서 웨인 그루뎀은 그의 조직 신학에서 문화에 대한 부분을 할애하고 있지 않다. Wayne Grudem, Systematic Theology: An Introduction to Biblical Doctrine (Grand Rapids: Zondervan, 1994)를 보라.
27 Paul Tillich, Systematic Theology, three volumes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51), I;64-65.
28 Tillich, Systematic Theology, I:65.
29 Tillich, Systematic Theology, I:65.
30 Tillich, Systematic Theology, I:60.
31 George F. Thomas, "The Method and Structure of Tillich's Theology," in Charles W; Kegley, ed., The Theology of Paul Tillich (New York: The Pilgrim Press, 1982), 137-38.
32 이런 제안과 비판에 대해서 Kathryn Tanner, Theories of Culture: A New Agenda for Theology (Minneapolis: Augsburg Fortress, 1977), 66-67을 보라.
33 이 '상황화'라는 영어에 대한 선호와 그 이유 제시에 대해서는 Stephen B. Bevans, Models of Contextual Theology (Maryknoll, NY: Orbis, 1992), 22를 보라.
34 예를 들자면, Robert Schreiter, "Inculturation of Faith or Identification with Culture," in Christianity and Cultures: A Mutual Enrichment, eds. Norbert Greinacher and Norbert Mette (London: SCM Press, 1994)을 보라.
35 Schreiter, "Inculturation of Faith or Identification with Culture," 16.
36 Schreiter, "Inculturation of Faith or Identification with Culture," 16.
(이것은 사실이나 그것을 어느 정도로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입장이 크게 갈릴 것이다. 토착화되어 복음의 내용까지를 변질시키고 있는가? 그렇다면 순수한 복음의 전달은 전혀 불가능한 것이 된다. 복음에 대한 한 토착화된 이해에서 다른 토착화된 이해로의 변환만이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록 복음이 전달자의 문화적 옷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그렇게 전달된 복음으로 복음의 본질을 전달할 수 있다면, 복음이 토착화된 것에서 문화적 요소를 벗겨 내어 복음의 본질을 잘 제시할 수 있을 것이고, 이는 순수한 복음의 전달이 가능하다는 결과를 유도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는 후에 언급된 크라프트의 상황화 이해와 유사한 것이다. 그러므로 항상 그럴듯한 말로 모든 상황을 오도하려고 해서는 안될 것이다 - 역자 주).
37 Schreiter, "Inculturation of Faith or Identification with Culture," 16.
(이것도 이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견해가 달라진다. 어느 사회 속에서나 당연히 그런 것이 일어나는 것인데, 성경이 본질적으로 제시하는 방향이 있어서 모든 토착화가 그 방향을 지향하도록 해야 한다고 볼 것이냐, 아니면 그것은 각 문화마다 다른 문제이므로 궁극적 지향성 개념은 명목으로만 있을 것으로 보느냐에 따라 입장이 상당히 다르게 될 것이다. 쉬라이터의 접근과 일반적 토착화 신학자들의 접근은 후자의 이해에 근접하는 듯하다. 따라서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전자의 입장에 의한 토착화 개념은 근원적인 것이고 반대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근본적 전제의 차이의 문제가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역자 주).
38 Charles Kraft, Christianity in Culture: A Study in Dynamic Biblical Theologizing in Cross-Cultural Perspective (Maryknoll, NY: Orbis, 1979), 391.
39 Kraft, Christianity in Culture, 99.
40 상황화에 대한 오늘날의 주요한 접근들에 대한 유용한 요약으로 (위에서 언급한 바 있는) Bevans, Models of Contextual Theology를 보라.
41 예를 들자면, Millard J. Erickson, Christian Theology, three volumes (Grand Rapids: Baker, 1983), I:21을 보라.
(이런 진술이 제한된 의미에서 어느 정도는 인정될 수도 있으나 이 진술 자체의 문제점을 강하게 지적하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할 것인가? 과연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이 진술에 강하게 찬동할 것인가? 오히려 여기서 비역사적인 것으로 제시된 옛 조직 신학보다 소위 상황화한 신학이 더 많은 문제, 특히 기독교의 본질을 버려 버리거나 모호하게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 역자 주).
42 예를 들자면, John Jefferson Davis, Foundations of Evangelical Theology (Grand Rapids: Baker, 1984), 60-72를 보라.
43 Douglas John Hall, Thinking the Faith: Christian Theology in a North American Context (Minneapolis: Fortress, 1991), 11-12.
44 Hall, Thinking the Faith, 112.
* 이는 상관의 방법과 상황화 방법 모두에 대한 그렌츠의 포스트모던적 입장에서의 비판인 것이다(보역).
** 이 문장과 다음 문장이 이 논문에서의 그렌츠의 입장에 대하 가장 중요한 주장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렌츠 자신이 복음과 문화 이해에 있어서 얼마나 포스트모던적인지가 잘 드러난다. 그러나 이런 포스트모던적 입장이 복음과 문화 모두에 대한 오해를 가지고 있을 수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특히 (1) 이런 입장이 복음의 왜곡을 낳을 위험성은 없는가? 우리는 과연 복음을 기존의 미리 주어진 실재로 전제하지 않고 복음주의 신학을 할 수 있는 것인가? 아마 이 질문이 이 논문에서의 그렌츠의 주장에 대한 가장 중요한 질문들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아마도 그렌츠는 다음 문장이 시사하듯이 복음은 항상 복음에 대한 우리의 이해일 뿐이므로 우리의 이해는 항상 상대적이고, 가변적인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2) 그렇다면 복음에 대한 다원주의적 이해 밖에 없다는 것일까? 다양한 복음의 대한 이해들을 잴 수 있는 준거틀과 시금석은 전혀 없는 것인가? 그리고 (3) 그렌츠의 이런 포스트모던적 입장은 결국 궁극적 상대주의와 종교 다원주의 문제에 대해서는 어떤 입장을 취할 것인가? 이런 그렌츠의 입장은 과연 일관성을 유지하면서 상대주의에로 나아가지 않을 가능성이 있는가?(역자 주).
*** 이는 고전적 신학이 성경과 같이 성령의 일반 은총적 임재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말인가? "혹시 그렌츠의 의도에는 성령의 특별 은총적 임재와 일반 은총적 임재를 나누기 어려워하는 생각이 있는 것이나 아닌지?"가 질문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을 나눈다면, 성령의 임재를 옛 신학이 별로 인정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 과연 정당화될 수 있는 주장일까?(역자 주).
* 이는 그 정도만 말하고 말 수 있은 것일까 이것이 성경적 성령론을 제한한 것으로 이해되면 어떻게 할 것인가?(역자 주).
** 바로 이런 점에 위의 역자 주에서 지적한 문제점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성령의 임재가 곧 성령님의 음성을 어디서나 들을 수 있다는 주장을 가능하게 할 수 있을까? 이런 점에서 그렌츠에게는 성령님의 일반 은총적 사역과 특별 은총적 사역의 구별이 없거나, 그 구별을 모호하게 하는 동기가 작용하는 것은 아니가? 이런 이해에 미친 그가 존경하는 W. Pannenberg의 영향은 없는 것인가?(역자 주).
*** 이에 대해서도 우리는 위의 역자 주의 내용과 연관하여 과연 그런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된다. 그는 성령의 사역의 구별을 전혀 하지 않는 것인가? 결국 그와 정통적 복음주의 사이의 논쟁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와 터툴리안의 논쟁과 비슷한 논쟁을, 아니 그보다 좀더 심각한 논쟁을 일으키게 되는 것인가?(역자 주).
**** 이것이 매우 중요한 것이고 그렌츠의 시금석이기는 하지만, 그렌츠는 과연 어떤 준거에서 성경의 목소리에 모든 것을 맞추려고 하는지의 문제가 제기될 수 있는 것이다(역자 주).
45 Darrell Jodock, "The Reciprocity Between Scripture and Theology: The Role of Scripture in Contemporary Theological Reflection," Interpretation 44/4 (October 1990), 377.
46 H. F. Taylor, Balance in Small Groups (New York: Van Nostrand Reinhold Co., 1970), 1-2.
* 여기서도 위의 역자 주들에서 계속 문제 삼은 그렌츠의 구별하지 않음의 문제가 나타나는 것은 아닌지? 과연 본문과 문화가 그저 하나의 말씀하심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그런 점에서 그렌츠는 포스트모던 사상에 너무 굴복한 것은 아닐까?(역자 주).
** 이는 또한 문화의 변화에 따라서 신학의 모델이 달라진다는 함의를 따르는 그 자체가 문화 적응적 이해, 문화 적응적 신학관이 아닐까?(역자 주).
47 Berger, Sacred Canopy, 46.
48 Karl Barth, Church Dogmatics, I/1, trans. G. W. Bromiley (Edinburgh: T. & T. Clark, 1975), 3.
49 Tanner, Theories of Culture, 70.
50 Hans W. Frei, Types of Modern Theology, eds. George Hunsinger and William C. Placher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92), 2.
51 Ronald Thiemann, Revelation and Theology: The Gospels as Narrated Promise (Notre Dame, ID: University of Notre Dame Press, 1985), 75.
52 Tanner, Theories of Culture, 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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