끌라스 스낄더의 그리스도와 문화관 N.H. Gootjes(캐나다 개혁교회 교의학 교수) 박상현(대구개혁교회) 서론 끌라스 스낄더를 기념하여 문화에 관심을 갖는 것은 변명할 필요가 전혀 없다. 스낄더는 문화에 상당한 관심을 가졌지만, 다른 많은 사람들도 문화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스낄더가 문화를 정의했을 때는 ‘문화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마땅히 흥미를 일으켜야 한다’고 정의한 점이 훨씬 더 중요하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은 “만물의 주재자이신 그리스도가 우리 사람의 모든 삶에서 단 한 치라도 ‘내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으시는 영역은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까이퍼의 이 말은 스낄더 자신의 확신을 반영한다. 스낄더는 하나님의 백성이 문화에 적극적이어야 한다는 자신의 신념을 강조했다.1) 많은 개혁 신자들이 스낄더에게 귀를 기울였다. 50년대 이후로 개혁교회의 많은 활동이 문화에 대한 스낄더의 활발한 표현의 배경에 대해 해명될 수 있다. 심지어 문화명령(cultural mandate)이라는 표현조차도, 이 활동의 요약된 설명이 스낄더에 의해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스낄더의 문화관은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동시에 스낄더의 문화관은 스낄더 신학의 가장 논쟁적인 주제(aspects)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다. 누르드만스(Noordmans) 박사는 스낄더가 암스텔담 자유대학교 신학생들에게 행한 강연에서 피력한 자기 견해를 설명했던 논문을 비판했다. 그런데 스낄더는 그를 초대해서 그의 견해를 자신이 편집장으로 있던 격주간지 개혁(De Reformatie)지에 실었다. 누르드만스는 문화에 대한 스낄더 논문을 읽으면서 받은 첫 인상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나는 이 논문이 내가 교육받은 동일한 신앙에 여전히 머물고 있는지, 새 종교가 여기에서 자라고 있는지 여부가 의심스럽다. 이것은 개혁주의 뿌리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고 주장하나, 우리가 지금껏 보아왔던 것과는 상당히 달랐다. 그리하여 이 질문은 그 참호(塹壕)를 파서 다른 복음으로 옮아가고 있는지 여부에 대한 의구심을 누를 수 없다. 스낄더의 문화관이 복음에 토대를 두지 않았다는 누르드만스의 첫 인상은 그의 논문의 종반부에 이르렀을 때에 확고해졌다. 거기에서 그는 스낄더의 문화관을 “일반은총 교리의 이런 절대화(absolutizing), 성경을 모독하는 것”2)이라고 불렀다. 누르드만스는 스낄더가 속했던 개혁교회에 속해 있지 않았다. 그러나 개혁교회들 안에서도 스낄더는 반대에 직면했다. 주 논적은 자유대학교의 스낄더의 동료였던 헤프(V. Hepp) 박사이다. 그의 견해는 스낄더 문화관이 자기 당대 교회를 위협하고 있던 개악에 속했다는 것이었다.3) 스낄더 문화관에 대한 비평은 계속 되었다. 처음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격렬하게 계속되고 있다. 스낄더의 확신에는 가장 광범위하게 논쟁하고 거부해야 했던 뭔가가 있다. 한 가지 실례를 든다면, 1990년 4월에 자유 대학교는 스낄더 작품들의 다양한 측면들에 대해 심포지움을 개최했다. 한 참석자가 받은 인상은 아무도 긍정적인 말을 하지 않았던 스낄더의 유일한 출판물이 바로 실제적으로 그리스도와 문화였다는 것이었다. 기념하는 그 해 동안 출판된 많은 논문들과 책들 속에서, 스낄더의 문화관이 비평을 받았다.4) 그러므로 스낄더의 유산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문화관을 다시 한 번 더 마주하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하리라고 판단된다. 우리는 핵심쟁점인 문화명령(cultural mandate) 그 자체에 몰두할 것이다.5) 한 편으로는 열정적으로 따랐고 또 다른 한 편으로는 강력하게 거부했던 이 견해가 무엇이었는가? 스낄더는 아브라함 까이퍼 박사 없이는 이해될 수 없다. 까이퍼 박사는 개혁교회의 세계관, 인생관을 발전시켜 적절하게 삶을 살도록 한 독보적인 존재이다. 까이퍼 박사의 문화관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고 난 뒤에, 스낄더에게로 돌아갈 것이다. 까이퍼의 “문화”이해 1920년 어간에 개혁주의 진영이 다방면으로 펼쳤던 외부활동들은 까이퍼의 창작이었다. 그러나 까이퍼의 책은 문화가 까이퍼 자신에게 중요하지 않다는 인상을 준다. 까이퍼는 수많은 책에서 문화에 대해서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문화라는 말이 충분히 예상된 곳에서도 언급조차도 하지 않았다. 까이퍼의 저 유명한 칼빈주의 강연에서도 마찬가지다. 까이퍼는 “칼빈주의와 정치학” “칼빈주의와 학문” “칼빈주의와 예술”이라는 주제들 다루었으나, 칼빈주의와 문화라는 강의는 없었다. 6) 까이퍼가 이렇게 한 이유는 그가 문화라는 말을 사용하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이 단어는 경작(cultivation)이라는 개념과 연결되어 있다. 까이퍼에 의하면 이 단어가 하나님으로 시작하지 않고 사람으로 시작한 사람들에 의해 사용됐다. 사람은 모든 것을 재배하는 농부와 같다. 농부는 식물들을 돌보고, 성장을 저해하는 모든 것을 제거하는 사람이다. 문화에서 사람은 더 높은 차원으로 발전하는 사람으로 비쳐진다. 문화라는 단어가 사람 중심적이기에, 까이퍼는 문화라는 단어 대신에 일반은총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자 한다. 까이퍼에 의하면 칼빈과 개혁교회 선조들이 일반은총에 대해 말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과 더불어 시작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비참을 완화시키신다. 하나님은 모든 분야에서 인간의 능력의 계발을 가능하도록 하신다.7) 이 사실은 문화에 대한 대단히 특별한 빛을 비추었다. 까이퍼에 의하면, 문화는 은혜의 문제이며, 죄로 가득 찬 세상에 하나님으로부터 온 감당치 못할 선물의 결과이다. 심지어 이 죄된 세상 안에서 우리는 대단한 발전과 엄청난 문화적인 업적을 본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문화적인 발전은 무엇보다도 먼저 일반은총의 결과다. 왜냐하면 이 은혜가 일반적이기에, 문화가 하나님의 백성의 특산품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문화는 다른 모든 곳에서 발전되었다. 동시에 이 사실은 일반은총에 토대를 둔 문화는 대단히 제한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단지 특별 은총에 부가물로서만 문화를 충만하게 자라게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까이퍼의 문화관을 이해하기 위한 최상의 방법은 까이퍼가 해놓은 역사적인 해설을 따르는 것이다.8) 까이퍼는 위대한 문화가 중국, 일본, 인도, 미국에도 존재했다는 사실에 주목하면서 시작한다. 최고로 발전된 인간 사회들이 이런 나라들 안에서 세워졌다. 까이퍼는 여기에서 기독교와 완전히 독립된 문화 발전을 본다. 그러나 이 문화 발전은 오로지 일반 은총의 결과였다. 그러나 이 문화 발전은 성취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그 힘이 진행되면서 중도에 파산해버렸다. 이 나라들의 역사는 이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최고로 발전된 문명이 멕시코와 페루에 존재했다. 그러나 이런 문명이 지금은 완전히 사라지고, 또 이들 나라에서 인디언들의 문화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인도에서 이 상황은 다르다. 그 최고로 발전된 문화는 부분적으로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이 문화가 새로 개화될 가능성이 여전히 있다. 그러나 그 성장이 저해되었다. 더 이상 발전되지 않고 있다. 고유한 문화가 발전되는 대신에, 이 나라는 서구문화의 결과물들(철도와 전화와 기타 등등)을 수입한다. 성장이 저해된 더 분명한 본보기는 중국과 일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나라들에서 우리는 질서가 잡힌 사회를 본다. 이 나라들은 고도의 예술과 지적인 발전과 번영이 있다. 까이퍼의 말로 표현하자면, “이 나라들 가운데 일반은총의 열매가 대단히 풍성했다.” 그러나 이 발전은 제한적이었다. 첫 번째로 일반은총의 결과가 이 나라 자체를 제한했다. 전 인류가 이들의 문화로부터 유익을 얻지 못했다. 두 번째로 이 문명들은 영구적인 유익들을 보여주지 못한다. 이 문명들이 서구 문명과 만날 때에, 민족 문화들이 시드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일반 은총은 나라들에 제한된 영향만 미쳤다. 공간과 시간 안에 제한되었다는 말이다. 이는 일부 사람(populations)에게 복이 되었다. 비해서 다른 나라들은 이로부터 유익을 얻지 못한다. 심지어 이 사람들 안에서조차도, 문화 발전이 특정한 범위에서만 발전한다. 따라서 이 문화는 퇴보하여 석화(石化)되었다. 특별한 한 나라에 제한되지 않고 모든 나라에 복이 되도록 정해진 일반은총의 발전도 있다. 이 발전은 특정한 기간에 제한되지도 않는다. 이 발전은 모든 시대에 걸쳐 계속된다. 이 발전은 일정한 수준에 이르면 중단되지 않고, 오히려 항상 더 발전할 수 있다. 이것이 바벨론과 이집트에서 시작되어, 그리스와 로마에서 어느 정도 번성하여, 기독교에 의해 흡수된 일반은총의 발전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서 이 발전이 전 세기에 걸쳐 계속되었다. 까이퍼는 여기에서 일반은총이 그리스와 로마에 있었던 것과 같이 기독교를 위해 준비했다고 생각한다. 기독교가 그리스와 로마 문화에 보태졌을 때에, 이 문화는 선례가 없을 정도로 발전하여 꽃을 피웠다. 서구문화의 확장은 그리스도의 통치의 결과이다. 그리스도의 사역은 감람산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것으로 끝내지 않았다. 하나님 아버지 우편 보좌에 등극하여 새로운 시작을 하셨다. 그리스도는 그리스 로마 문화에 기독교를 보태셨다. 일반은총이 서구 문화의 뿌리 속에서 일했듯이 그리스도의 특별한 은혜 때문에 훨씬 더 높이 이르렀다.9) 서구 문화의 특별한 성격이 이제 설명될 수 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구원하시는 사역(특별은총)과 문화의 발전은 분리되지 않고, 하나가 되었다.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은 서구문화와 별개로 새로운 세상을 실현시키지 못한다. 이것이 이 문화를 발전시킨다. “이것은 이전에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같은 옛 세상이며 또 그대로이다. 이것은 특별한 은총이 이생에서 속속들이 회복시키고 또 뿌리 속에 있는 암을 소제(掃除)한다.10)” 모든 다른 문명들은 없어졌거나 아니면 그 기세가 꺾여버렸다. 그러나 신약 교회는 열방을 주도하도록 정해졌기에, 일반은총은 항상 기독교 영향력 하에 새로운 길을 연다. 유럽과 미국의 기독교 세계는 모든 역사 속에서 우리 인류의 최고의 발전이다. 그리고 이것은 훨씬 더 발전하도록 정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11) 까이퍼의 견해를 되돌아 볼 때에 우리는 까이퍼가 세계사에 열어놓았던 매력적인 시각에 의해 깊은 인상을 받지 않을 수 없다.12)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이 이 시각으로는 영혼을 구원하거나 사람을 구원하는 일에 제한되지 않았다. 그리스도는 오셔서 문화도 구원하셨다. 그리스도는 그리스와 로마의 문화를 취하셔서 기독교의 힘을 불어넣으셨다. 결과로서, 고전 문화가 치명적인 질병으로 치유되어 다른 모든 문화를 소생시키는 수액을 공급했다. 이것이 서구문화가 여느 다른 문명보다 높이 상승한 원인이다. 신학자 까이퍼가 여기에서 문화 역사가 까이퍼가 되었다. 물론 그 결과는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것이다. 기독교에 의해 영향을 받은 서구문화만이 존재한다. 우리는 기독교 문화를 세우기 위해서 노력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서구문화가 더 기독교화 되도록 하기 위해서 일해야 한다. 정치나 고등교육에 대한 까이퍼의 활동은 이와 같은 문화관과 떼어놓고 설명할 수 없다. 반혁명당과 자유 대학교는 훨씬 더 많이 기독교 방향으로 서구사회를 발전시키는 방편이었다.13) 까이퍼와 스낄더 사이 시간상으로 스낄더의 문화생활관에 대한 논문과 까이퍼의 일반은총론사이에는 약 35년간 차이가 난다. 이 막간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까이퍼 당대의 사람들이 큰 서구문화 속에서 가지고 있었던 거의 헤아릴 수도 없는 신뢰가 산산조각 나버렸다. 유럽 대륙의 가장 강력한 문화대국이었던 독일이 비참한 전쟁을 시작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은 과학과 예술의 진보가 자동적으로 문명을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심지어 철학을 주도했던 독일조차도 이와 같은 야만적인 잔학한 행위를 일삼았을 때에, 서구문화를 낙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어렵게 되었고 서구문화가 옛 문명에 대한 기독교적인 영향의 직접적인 결과라는 것을 유지하는 것이 어렵게 되었다. 세계 1차 대전 이후에 서구문화는 위기를 맞았다.14) 그러나 화란 개혁교회 안에 이전처럼 삶이 지속될 것같이 보았다. 까이퍼가 세웠던 정당과 대학교는 번성하고 있었다. 정당은 거듭 강력한 지도자인 꼴레인(Colijn)을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 있었다. 꼴레인은 몇 차례에 걸쳐 수상을 지냈다. 자유 대학교는 확장되었다. 학과들이 보태졌고, 학생 수가 증가했다. 그러나 문화적인 질문에 대해 힘듦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운 방향을 강조했던 이가 바로 신학자 스낄더였다. 그리스도의 중요성 까이퍼만이 아니라 스낄더도 문화와 관련하여 그리스도와 시작한다. 스낄더는 첫 논문 제목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문화생활”이라 붙였다. 책으로 확장판을 낼 때에, 제목을 줄여 예수 그리스도만 남겨놓고, 그리스도와 문화라고 했다. 두 작품은 문화를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중요성에 대한 토론으로 시작한다. 스낄더는 여기에서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해설을 따른다. 예수는 그가 구세주가 되시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그의 직분의 본질은 구원하기 위해서 이다. 그러나 그는 단지 예수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이시기도 하다. 이름 가운데 그리스도라는 호칭은 그가 구세주가 되도록 하나님이 공식적으로 지명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15) 예수 그리스도는 문화와 관련하여서도 구세주가 되어야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일부 반역한 사람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드신다. 그들은 완전하지 않다. 그러나 그들은 정결하게 되어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의무는 “하나님을 위해 세상을 정복하는 것이다.” 땅은 적법한 주인에게 돌려드려야 한다. 이 목적을 위해 그리스도는 당신과 함께 기름 부음 받은 사람 즉 그리스도인들을 새롭게 하신다.16) 설사 까이퍼와 스낄더가 문화를 말할 때에 예수 그리스도로 시작한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문화에 대한 그리스도의 의미에 대해 다른 견해를 가졌다. 까이퍼는 예수 그리스도를 그리스-로마 문화 안으로 자기의 특별한 은혜를 부어주시는 구세주로서 본다. 그러나 스낄더는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의 구세주로만 본다.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구원을 일으키신다. 이 사역은 불순종한 사람들을 다시 문화적인 사역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을 포함한다.17) 태초로 되돌아가다 구세주이신 그리스도가 당신의 백성에게 그들의 의무(duty: 책무 혹은 과업)를 되돌려준다. 그렇다면 이 의무는 어떤 것인가? 이 의무는 어디에서 발견되는가? 스낄더에 의하면, 이 의무는 에덴동산에서의 의무이다.18) 이 의무는 창세기 1장 28절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이 의무는 또한 창세기 2장 15절에서 에덴동산에 사람을 두신 뒤에, 사람에 대해서 하셨던 말씀에 분명하게 명시되었다.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라.”하나님께서 완전하게 계발된 세상을 창조하지 않으셨다. 사람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동사자(God's fellow worker)로서 일해야 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이 명령을 주셨다. 그러나 사람이 죄를 지었다. 사람은 자신의 죄 때문에 더 이상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지 않았다. 사람은 자신의 불순종으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건축물을 회피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그는 하나님의 자연법을 따라야만 한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의 도덕법에 불순종할 것이다.19) 또 실제로 그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한다. 그는 자기를 지으신 창조주에게 불순종하면서 이 세상 안에서 일한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개입하신다. 구세주로 그분은 중생을 일으키신다. 스낄더의 확신은 그리스도가 문화적인 삶을 위해서도 당신의 자비의 사역을 행하신다는 것이다.20) 그리스도는 또한 태초에 마련하신 하나님의 계명 즉 명령을 사람에게 다시 마주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사람은 문화적인 사역을 해야 한다.21) 문화 이 사실이 우리를 스낄더의 견해에서 문화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으로 데려간다. 그러나 여기에서 모든 사람들이 무력감을 느낀다. 스낄더는 자신의 문화관에 대해 복잡한 한 문장을 거의 반 페이지를 할당해서 요약했다.22) 우리는 몇 가지 중요한 측면을 밝히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다. 첫째로 문화는 이 세상 안에서 시행되어야 할 일의 총체이다.23) 문화라는 단어는 “재배하다”는 뜻을 가진 라틴어 동사에서 나왔다. 농부가 풍년을 위해 자기 땅에서 하는 모든 일이 문화라고 불린다.24) 스낄더는 이것을 태초에 동산을 가꾸고 지키라(창2:15)는 위임명령과 연결시킨다. 따라서 그는 문화가 땅을 지키고 계발하기 위해서 시행된 모든 것을 포함한다는 방식으로 이 의미를 확대한다. 문화는 스낄더에 의하면 예술 분야나 아니면 미술과 학문에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 물론 이것들도 문화에 포함된다. 스낄더는 예술을 계발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의무에 속해 있다고 개혁 진영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예술이 이 세상의 유일한 문화적인 일이 아니다. 교수도 문화적인 일로서 자기 일을 해야 한다. 음식 쓰레기를 모으는 사람도 주부처럼 문화적인 일을 해야 한다. 실제로 이 땅에서 시행되어야 할 모든 일의 유형이 문화에 속한다.25) 스낄더 문화관의 두 번째 측면은 문화명령이 세상이 계발되어야 한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는 그의 신념이다. 세상은 아름답게 창조되었다. 그러나 완전하게 계발된 상태로 창조된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많은 가능성과 더불어 세상을 창조하셨다. 사람은 이 가능성(possibilities)이 현실이 되도록(realities) 일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스낄더는 창조를 토대로 발전(evolution)에 대해서 말한다.26)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해 동산을 준비하셨다. 그러나 아담의 자녀들과 후손들이 태어날 때에는 이 한 동산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더 많은 땅이 경작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삽이 필요했다. 삽을 계발하기 위해서, 머리와 손이 협력해야 했다. 머리가 삽을 고안해내야 한다. 손이 삽을 사용해야 한다.27) 기계 발명은 사람이 계발해야 할 문화에 들어있다. 세상은 사람의 문화사역의 결과로 변화될 것이다. 문화는 동산에서 도시로의 발전을 내포한다.28) 문화관에 대한 세 번째 특성은 문화가 모든 인류의 의무라는 것이다. 문화명령이 먼저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주어졌다. 그 다음 이 명령은 그의 후손들에게 왔다. 모든 사람들이 문화사역에 가담해야 한다. 어쩌면 모든 사람이 문화사역으로 일상생활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이다.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동안, 그들은 하나님의 땅 위에서 하나님을 섬기면서 일해야 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이와 같은 방식으로 일하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인해 문화발전이, 이 세상의 발전이 결코 완전하게 되지 않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거부한 사람들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원(資源)들을 사용하여 하나님이 주신 능력을 가지고 일하지만, 하나님께 순종하지는 않는다. 이런 불순종의 결과로 그들의 문화사역 가운데 많은 것들이 공허하게 된다. 결국 그들의 문화 업적은 단지 미완성 작품, 불완전한 피라미드가 될 수밖에 없다.29) 물론 중생한 사람들도 있다. 중생한 사람들과 더불어 문화사역에서 순종의 시작이 가시화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역시도 완전한 문화 발전으로 이끌지는 못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문화사역도 미완성된 피라미드로 남을 것이다.30) 여기에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그들이 소수라는 사실에 있다. 모든 사람이 해야 할 일이지만 소수의 인원만으로 그 일을 하도록 남겨져 있다. 이들은 분명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을 감당할만큼 인력이 충분하지 않다.31) 또 다른 이유는 이들 속에도 여전히 죄가 있다는 사실에 있다. 그리스도인이 특정한 유형의 일에 관여하지 않는 것이 의무일 수 있다. 왜냐하면 그의 눈과 손은 그를 죄 가운데로 이끌 수 있기 때문이다.32) 여기에서 언급되어야 할 마지막 특성은 문화가 항상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죄를 지었을 때에, 그는 하나님에게서 떠났다. 그의 문화적인 행위가 그 순간부터 하나님과 분리되었다. 문화 발전은 그 자체 안에서 끝나게 되었다. 하나님과 분리된 문화의 산물들은 대단히 위험하기마저 하다. 망치는 유용한 도구이지만, 해를 끼치고 사람을 죽이는 데까지도 사용되었다.33) 죄는 또한 문화에 대한 엉뚱한 시각을 준다. 예를 들어 이 관점은 스포츠가 기분전환이 되는 대신에 첫 번째 중요한 어떤 것이 된다. 스낄더는 심지어 소위 기독교 신문 네 번째 칼럼은 스포츠로 도배하고 단지 반쪽짜리 칼럼만 교회 소식을 싣는다고 말한다. 시합 우승자를 대서특필하지만, 영적인 전쟁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는다.34) 그러나 어떤 일이 중요한가를 결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어야 한다. 스낄더의 문화관이 결코 애매하지 않다는 것을 충분히 보여주었으리라고 생각한다. 스낄더의 문화관은 범위상 까이퍼보다 광범위하지 않다. 스낄더의 문화관은 단 한 번의 전반적인 개관으로 전 세계역사를 개괄하고자 하지 않는다. 그러나 스낄더의 문화관은 까이퍼의 문화관보다 훨씬 더 깊이 내려간다. 스낄더의 문화관은 심장부로 파고들어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일상생활을 하나님의 위임명령으로 수행하라고 격려한다. 스낄더의 견해는 혹독한 비평을 받았다.35) 이어지는 단락에서 우리는 최근의 몇 가지 비평을 다루고 이에 대해서 평가할 것이다. 성경적인 토대 스낄더가 말했던 문화명령이 성경적인 토대가 없다고 여러 차례 제기되었다. 최근에 어떤 사람은 문화명령을 “비누거품”이라고 불렀다. 문화명령은 외견상 멋져 보이지만, 다루게 되면 성경적인 내용이 전무하다. 문화명령은 터져서 사라져버린다. 물론 이것은 개혁신학자에 대해 퍼붓는 가장 혹독한 비평이다. 그러므로 스낄더 견해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성경 본문을 주목해야 한다.36) 스낄더의 주요 증빙본문은 하나님께서 창세기 1, 2장에서 사람을 창조하시면서 하셨던 말씀이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창조 후에 사람에게 요구되었던 첫 순종으로 되돌려 놓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역사의 벽두에 무엇을 말씀하셨는가? 창세기 1장 26절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창조하시는 사람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사람이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의 모든 동물을 다스리는 통치권을 가지게 되는 방식으로 사람을 만들기를 원하신다. 여기에서 “다스리다 혹은 통치권을 가지도록(to have dominion)” 이라는 단어는 상당히 현저하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 용어를 누군가를 폭력으로 정복하는 의미를 가진 것으로 성경에서 발견한다. 그러나 이것이 창세기 1장의 의미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죄가 들어오기 전에 세상이 시작될 때에 하셨기 때문이다. 이 동사는 “종으로 활용하다”(사14:2)를 뜻할 수도 있다. 만일 우리가 부정적인 어감을 제거한다면, 창세기 1장에 합당한 의미로 생각된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동물은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소가 지음 받았다. 소가 창조된 세상 안에 존재한다. 그러나 소는 자유자재로 주변을 어슬렁거린다. 사람은 소를 길들여 젖을 사용할 권리를 받았다. 말도 지음 받았다. 말은 에덴동산 주변에서 달린다. 사람은 말을 잡아 길들여 재갈을 씌워 타고 다닐 권리와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지음 받은 사람이 염두에 두어야 할 대단히 놀라운 계발이라는 것을 상상해보라. 사람은 자신의 발로 걷는 것보다 훨씬 더 빨리 갈 수 있다. 더 무거운 짐을 싣고 다닐 수 있다. 그러나 또한 심지어 죄 없는 세상에서도 사람이 이렇게 하기 위해 발명해야 될 것이 얼마나 많은 지를 생각해 보라. 사람은 재갈, 고삐, 수레, 마차, 구유, 울타리를 발명해야 한다. 이 모두가 말을 다스리는 통치권을 가지는 것에 들어 있다. 사람은 양들도 사용할 수 있다. 털을 깎아 옷을 만들 수 있다. 동물을 다스리는 통제권은 의심의 여지없이 문화적인 과업에 포함되어 있다.37) 또한 사람의 통치권은 하나님께서도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를 다스리는 통치권을 인류에게 주셨다는 것을 우리가 인식할 때에 훨씬 더 강력하게 된다. 이들(그들 형태에 따라) 역시 사람을 섬겨야 한다. 그러나 물고기와 새들을 다스리는 통치권을 가지기 위해서, 사람은 바다와 공중에 자신 영향력을 확대시켜야 한다. 사람은 물고기와 새에 다다라야 할 방편을 계발해야 한다. 달리 말해서 이 통치권은 문화적인 계발을 요청한다. 많은 동일한 말을 창세기 1장 28절에 대해 주장될 수 있다.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에 대해서 말씀하시지 않으셨고, 오히려 당신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사람의 통치의 범위는 하나님이 26절에서 지적하신 것보다도 훨씬 더 크다는 것이 증명된다. 먼저 동물을 다스리는 통치력만이 언급되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고 말씀하신다. “정복하라(to subdue)”는 동사는 26절의 동사와 다르다. 그러나 이 역시도 나머지 성경에서처럼 부정적인 어감이 있다.38) “통치한다(to have dominion)”는 의미의 이 동사와 마찬가지로, 정복하다(to subdue)는 이 의미는 누군가를 종으로 만든다(대하28:10)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땅을 정복하라”는 이 표현은 분명히 사람이 동물만이 아니라 온 땅을 자기 종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39) 땅은 아직 사람을 적대하는 쪽으로 돌아서지 않았다. 이 일은 하나님의 저주의 결과로 타락 이후에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심지어 타락 전에도 땅은 자동적으로 사람을 섬기지는 않는다. 에덴동산에서 사람은 땅을 자기 종으로 사용하기 시작해야 한다. 땅을 다스리는 통치권은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사람에게 말씀하신 이전 말씀과 연결지어야 한다. 이 말씀은 죄와 죽음이 없는 상황에서 말씀하셨다. 태어날 모든 자녀들이 살 것이고 자신의 자녀들을 낳게 될 것이다. 통치권과 자녀들을 낳는 것, 두 부분은 밀접한 관계에 있다. 더 많은 사람은 땅을 더 많이 정복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사람이 필요하다는 의미이다. 태초에는 동산 하나만 있었다. 그러나 동산 하나로는 결코 앞으로 태어날 사람들을 모두 다 감당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더 많은 땅이 경작되어야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더 많다는 것은 그 땅을 계발할 일군이 더 많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28절로부터 여러 가지 요소들이 여기에 언급되는 것이 합당하다. “땅에 충만하라”와 “땅을 정복하라”는 명령은 사람에게 내려진 것이다. 스낄더는 문화명령에 대해서 말했다. 명령(mandate)이라는 단어는 흔한 용어가 아니지만, 과업(task)이나 의무(duty) 이상의 다른 의미는 없다. 이와 같은 의무를 에덴동산에서 인류에게 정말로 주셨다는 것은 부인할 수가 없다. 사람의 창조는 창세기 2장에서 훨씬 더 자세하게 설명되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뒤에, 그를 에덴동산에 두셨다. 우리는 여기에서 꽃과 수목과 풀로 가꾸어진 조경이 잘된 도시정원을 연상해서는 안 된다. 꽃들이 에덴동산에 자랐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지만, 에덴동산이 가정용 채소밭(kitchen garden)이었다고 생각해야 한다. 거기에는 과일 나무들이 있었으며, 사람이 여기에서 먹을 것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런데도 사람은 “경작해야(to till)” 했다. 과일나무는 경작할 필요가 없다. 경작해야 한다는 말은 곡식이 자라도록 준비하는 행위이다.40) 이 말은 에덴이라 할지라도 느긋하게 다니면서 나무에서 열매나 따먹으며 살수 없게 되어있었다는 뜻이다. 땅(field)은 쟁기질로 씨를 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씨를 뿌려야 했고, 곡식은 추수해야 했다. 그리고 그것을 반죽해서 빵을 구워야 했다. 쟁기질, 추수, 빵을 굽기 위해 도구를 만드는 일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땅을 다스리라고 에덴동산에 두실 때에 하나님의 시계(視界)에 있었다. 씨 뿌리고 추수하는 순환을 통해서 사람에게 양식을 공급하기 위해 각양 나무들이 에덴동산에 심겨졌다. 그러나 이 나무들은 단지 시작만 있다.41) 지금까지 우리는 죄가 세상에 들어오기 이전의 기간 동안에 말씀하신 본문을 다루고 있다. 그렇다면 이 문화명령이 타락한 뒤에는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았는가? 시편 8편은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람은 하나님이 손수 지으신 것들을 다스려야 할 통치권을 받았다(6절). 요셉이 애굽을 다스린 것(창45:8,26)처럼 사람은 하나님의 피조를 다스릴 통치권을 받았다. 시편 8편은 창세기 1장을 우리에게 상기시켜준다. 사람은 죄가 들어오기 이전인 태초와 마찬가지로 피조세계 속에서 여전히 동일한 입장에 서 있다.42) 몇몇 신약 본문이 이 점을 언급하고 있다. 그중 하나가 마태복음 25장의 달란트 비유이다. 한 달란트만해도 막대한 액수이며, 그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꿈도 꿀 수 없을만한 액수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43) 이 달란트들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달란트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각각의 다양한 능력을 가리킬 수 없다. 왜냐하면 종들이 “자기 능력에 따라 제각각”(15절) 달란트를 받았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종들은 능력에서 차이가 나기 때문에, 한 종은 다섯 달란트를, 다른 한 종은 세 달란트를, 또 다른 한 종은 한 달란트를 받는다. 그들은 받은 달란트로 일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 달란트들은 주인이 맡긴 의무를 말한다. 주인은 각 종들에게 능력에 따라 제각각 의무를 준다. 이 의무들을 교회 안에서 하는 일에 제한시켜야 하는가? 어디에서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고 암시하지도 않았다. 달란트들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모든 의무들이다. 이 세상에서 일해야 할 의무는 분명히 배제되지 않았다.44) 스낄더는 또한 “너희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일군들이라”45)는 본문을 사용했다. 그러나 이 본문은 자신의 문화관을 지지할 수 없다. 이 표현은 고린도전서 3장 9절을 가리킨다. 개정역(RSV)에 이렇게 나온다. “우리가 하나님의 동역자라,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건물이니라.”이 본문에서 “우리”는 모든 사람을 가리키지도 않고, 심지어 모든 그리스도인을 가리키지도 않는다. 오히려 교회에서 말씀을 전하는 목사들을 가리킨다. 교회를 하나님의 밭이라, 하나님의 건물이라고 한 것이다.46) 여기에서 디모데전서 4장 4-5절이 더 거론될 수 있다. 이 본문에는 금욕을 설교하는 사람들이 있다. 혼인도 하지 말라, 음식도 먹지 말라고 했다. 물론 후자 명령은 기아를 설교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들은 음식을 허용하나, 이 사실을 분명히 해야 한다. 바울은 동의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식물을 지으셨기에 “진리를 믿고 아는 사람들은 감사히 받아야 한다.” 심지어 맛있게 마련된 음식은 하나님께서 지으셨기에 먹으면 된다. 여기에서 우리가 세상의 선물들을 감사하게 받아들인다면 (이 경우에는 음식), 우리는 이것들을 계발하라는 신적인 인가를 받은 것이다.47) 문화명령이 성경적인 토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충분하게 보여주었다고 판단된다. 이 세상에서 일해야 할 의무가 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 잠재력을 계발시켜야 할 의무가 있다. 복음 대(對) 문화인가? 문화명령 개념에 대해 공격하는 다른 비평은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엉뚱한 시각을 제공한다는 데 있다. 이렇게 비난하는 비평 학자들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사람에게 문화명령을 주셨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이 의무가 더 이상 우리 죄된 세상에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오늘날 중요한 것은 문화발전이 아니라 복음 설교라는 것이다. 문화명령이 성취될 때가 아니라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될 때에, 주님이 재림하실 것이다.48) 그리스도의 재림이 문화명령을 성취하는 여부에 달려 있다는 식으로 말해서는 안 된다. 이 말은 사실이다. 성경은 이 세상 종말이 오기 전에 문화가 특정한 수준까지 발전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그렇다면 스낄더가 그리스도의 재림은 문화가 완전하게 발전되기까지 기다린다고 말했거나 아니면 암시하기라고 했는가? 나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정반대로 스낄더는 강력하게 그리스도인과 하나님을 믿지 않는 모든 사람들의 문화적인 모든 노력은 여전히 완성되지 않은 채로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몇 번이나 그는 “미완성 피라미드(truncated pyramids)”라는 표현으로 세상의 발전이 완성되지 않은 채 남아있게 될 것이라는 자신의 신념을 강조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의 재림 사이에 있는 기간의 특징이 무엇인가이다. 이 기간은 오직 설교해야 하는 의무를 완수해야 하는 기간이고, 일해야 할 의무를 다해야하는 기간은 아닌가? 만일 일관되게 적용한다면, 이 견해는 그리스도인이 살면서 자기 책무를 다하기 위해서 자신과 가족이 살아가기에 충분한 만큼만 일해야 하고 남은 시간은 모두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와 같은 견해는 분명히 신약성경과 충돌된다. 예를 들어 세례 요한은 오실 메시아를 선포했을 때에, 그는 세리(稅吏)에게 “네 직무를 포기하라, 가서 복음 전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누가복음 3장 13절에서 “정한 세(稅)외에는 늑징치 말라”고 말했다. 병사(兵士)가 왔을 때에, 그는 그들에게 군대를 떠나 복음 전도자가 되라고 하지도 않았다. 대신에 그는 “사람에게 강포하지 말고 무소하지 말며 받는 요를 족한 줄로 알라”(눅3:14)고 말했다. 아니면 다른 예를 하나를 들어보면, 알렉산더의 문제(딤후4:14)는 그가 구리장색이어서가 아니라 복음을 반대했다는 점이다. 노예들은 노예로서 신실하게 일해야 마땅하다. 만일 그들이 자유인이 되기 위한 기회가 있다면, 그렇게 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평신도) 설교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 창조와 그리스도 재림 사이의 시간의 의미는 복음전도에 제한되지 않는다. 성령님은 그 기간 동안 그들이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고린도에서 또한 일하셨다. 마찬가지로 성령님은 세상이 더 이상 낙원이 아닐지라도 (병사로든 노예로든 어떤 사람으로서든) 일상적인 일들을 창세기 1장과 2장 말씀에 따라 생각하고 행하라고 요청하신다. 간직하고 있어야할 중요한 사실은 신약교회 기간에 각 신자는 자신의 매일의 과업을 감당하는 가운데서 중생이 분명하게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매일의 과업이 우리의 생존이라는 필연성보다 훨씬 더 크다. 우리의 생활은 하나님의 세상에서 하나님의 종으로 일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문화명령과 환경 스낄더의 문화 명령관에 대한 세 번째 비평은 훨씬 더 실천적이다. 세상을 계발시키는 위험들이 가시화되는 시기에 문화명령이 어떻게 유지될 수 있는가? 문화는 대단한 진보를 일으킨다. 그러나 이 진보는 자연을 희생시키면서 발생했다. 세상은 문화명령 아래에서 죽어가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 사실은 우리가 이 세상 안에서 우리의 책무를 명확히 하기 위해서 사용할 수 없는 훨씬 더 많은 것들이 있음을 보여준다.49) 사람이 땅의 자원으로 만든 물건으로 인해 자연이 고통을 받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창조의 일부를 파괴했다. 그러나 문화명령이 이에 대해서 어떻게 비난받을 수 있는가? 스낄더가 문화명령에 대해 말하기 이전에 인류는 하나님의 피조를 학대하기 시작했다. 피조물의 학대 혹은 남용은 스낄더의 문화명령에 의해 영향을 받았던 (상당히 제한된) 범위를 훨씬 더 넘어 발견된다. 그러나 문화명령이 우리가 원하는 것이면 이 세상을 가지고 뭐든 할 수 있고, 모든 자연적인 재원을 다 소모할 수 있고, 식물과 동물을 파괴할 수 있고, 쓰레기를 쌓아놓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조장하는가? 관련해서 자주 언급되는 스킬더의 그리스도와 문화에 나오는 표현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세상에서 얻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50) 이 표현 하나 가지고 스낄더를 판단하는 것은 공정치 못하다. 바로 앞 선행문구에서 스낄더는 땅을 파괴하는 것이 분명히 문화명령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세 가지 사실로 지적한다. (1) 땅의 자원들을 계발할 때, 각각이 가지고 있는 특성들에 맞게 계발해야 한다. 이 말은 자원의 특성에 맞지 않게 창조물을 이용하는 모든 행위를 반대하는 것이다. (2) 우주만물(cosmos)과의 관계를 고려하면서 이 자원들을 계발해야 한다. 이 말은 우리가 하나를 계발하면서 동시에 다른 하나를 파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함축한다. (3)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된 진리, 즉 성경에 순종하는 가운데서 자원들을 사용해야 한다. (이 모두가 그리스도와 문화 40 페이지에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다.) 이 세 가지 제한은 하나님의 피조의 착취가 불법적이라는 것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물론 스낄더는 우리와 다른 시대에 논문을 썼다. 그의 시대에 기술과 산업화가 급속도록 발전했다. 부정적인 결과들이 서서히 가시화 되었다. 이제 우리는 무법한 성장의 결말과 맞닥뜨리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낄더보다도 훨씬 더 미래를 잘 예견할 수 있고, 피조의 남용 혹은 학대에 대해 경고할 수 있다. 우리가 직접 오염을 방지해야 할 책무가 있고, 또 우리가 곤란하게 만들어놓은 것을 처리하라고 다음 세대에게 떠넘기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잘못된 것은 비정상적인 성장, 불법적인 성장, 더러운 성장이지, 피조 그 자체를 사용하고 계발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을 사용하는 사람의 방법이 파멸로 이끌어가고 있다. 그러나 땅을 파괴하는 것이 문명명령의 일부는 아니다. 이것은 이기적인 통치의 결과이다. 땅을 정복하라는 명령은 여전히 견고하게 서 있다. 결론 만일 스낄더의 문화명령관이 원리상 성경적이고 옳다면, 그 귀결은 무엇인가? 나는 귀결을 세 가지로 강조하고자 한다. 1. 첫째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우리의 문화적인 일이 광활함을 자각해야 한다. 물론 땅의 통치권은 무엇보다도 먼저 농부의 일과 관계가 있다. 농부는 밭에서 일하는 사람이다. “문화”는 여기에서 “재배 혹은 경작”이라는 말과 대단히 친밀하다. 농사는 문화적인 일이다. 왜냐하면 농사는 우리에게 음식을 주기 위해서 세상의 동물과 자연적인 자원들을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많은 것이 있다. 스낄더는 문화명령을 교수나 거리 청소부, 부엌가사와 “월광곡 작곡”에 멋진 문장으로 적용시킨다.51) 문화명령 때문에 능력이 있는 우리 자녀들은 할 수만 있다면 열심히 공부하여 과학자가 되도록, 교수가 되도록 허락받았다. 농부와 교수는 서로 질시하지 말고 협력하여 세상에서 문화명령을 위해 협력해야 한다. 피차 자신의 자리를 인정하고 자신이 받은 능력에 따라서 말이다. 다음으로는, 음식 쓰레기를 치우는 사람을 결코 비하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 일도 “땅을 지키라”는 명령의 일부이며, 우리 사회를 존속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감당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이 명령은 길거리를 깨끗하게 하고 질병이 급증하는 것을 방지하는 일을 포함하고 있다. 스낄더는 식모(kitchen workers)에 대해서도 말했다. 지금은 식모가 많이 남아있지 않다. 주부들이 넘겨받은 지 오래되었다. 가전제품의 도움으로 그들은 직접 모든 일을 하게 된 것이다. 페미니즘(feminism)과 맞서, 주부가 된다는 것은 “땅을 정복하는” 하나의 훌륭한 방법이다. 가정이 계속 유지되도록 보존하기 위한 일이 세상의 자원을 사용하는 일이다. 예술적인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이 역시도 계발되어야 할 하나님의 선물들이 있다. 예술가들이 종종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좋지 않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예술 세계는 어느 정도 이를 비난한다. 그들은 예술가가 의미 있는 예술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완벽하게 자유롭게 놔두어야 한다는 생각을 육성했다. 이것은 자주 예술가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자신이 일종의 신이 된다는 것을 함축한다. 그리스도인이 이를 거절한다면, 정당하다. 또 다른 한편으로 예술은 하나님이 피조에 주신 가능성으로 본다. 예술가들도 피조된 실재의 일부를 지배해야 한다. 문화명령 시각에서 본다면,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많은 직업에서 일해도 된다. 교회 안에서 아무도 그가 행하는 일 때문에 다른 일을 경시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분야에서 하나님의 종이자 동사자이다.52) 2. 두 번째 결과는 우리의 일상의 과업이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순종의 일부로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직업과 우리의 일은 돈을 벌어 우리 생활과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역에 필요한 돈을 넉넉하게 마련하기 위한 수단만은 아니다. 우리 일상 업무는 주님을 섬기는 일이다. 사실상 모든 직업에는 많은 고역이 있다. 그럴지라도 반복적이고 지루한 일은 주님 앞에서 일상 책무의 일부로서 반드시 시행되어야 한다. 특히 죄가 세상 안으로 들어온 이래, 일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게 되었다. 우리가 하는 일이 고될지라도 주님을 섬기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감내해야 한다(다시, 노예들을 생각해보라). 그러나 사역자들은 추수를 시작할 때에 즐거워한다. 일이 잘 마무리 됐을 때에는 만족을 가져다준다. 노동절은 기독교 기념일이 되어야 한다. 문화명령은 주간에 대한 바른 시각도 제공한다. 우리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한 주간 동안 꾸물거리면서 모든 일을 뒤로 밀쳐놓고 즐기는데 전념해서는 안 된다. 오늘날 주말을 강조하고 일하는 날을 필요악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주말의 자유를 만끽하기 위해서 살아서는 안 되고, 오히려 일상생활 그 자체가 중요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일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책무의 일부이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우리의 일이 질(質)적으로 개선될 것이다.53) 3. 세 번째 귀결은 교회 안에서 목사들과 장로들의 책무와 관련이 있다. 스낄더는 바울을 그 당대의 세상 안에서 문화적인 능력이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바울은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복음을 전하였기 때문이다.54) 이 복음은 신자들에게 다시 태초에 제정된 의무, 즉 세상을 다스리라는 명령을 마주하게 한다. 하나님의 은혜로운 복음은 일상 일을 하나님을 섬기는 빛 안에 둔다. 그러므로 목사는 자신의 설교를 신자의 내적인 생활에만 국한시켜서는 안 된다. 일상적인 업무도 설교 범위 안에 들어온다. 설교는 회중의 일상생활을 다루어야 한다. 일터와 학교에서의 윤리도 설교해야할 내용이다. 장로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사실상 스낄더는 장로들에 대해 다루면서 책을 마무리 한다. “올바르게 가정을 심방하는 지혜로운 장로야말로 복이 있다. 비록 자신이 이것을 잘 모른다고 할지라도 자신은 문화적인 세력이다.”55) 장로들이 가정심방을 할 때에,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가정의 일상생활에 대해 물어야 한다. 만일 장로가 자기 과업을 맡겨진 대로 마땅하게 감당하고 있다면, 그는 하나님의 구원과 우리의 믿음에 대해서 말해야 한다. 그러나 이와 관련하여 일터에서나 가정에서나 학교에서 우리의 문화명령에 대해서 말해야 한다. 끌라스 스낄더는 문화명령을 우리에게 다시 가르치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가 되었다. 문화명령을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여러분의 일상적인 일을 하나님께서 태초에 사람에게 주셨던 책무의 한 부분으로 생각하라.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께 구속받은 사람으로서 이 일을 감당하라. 그리하여 성령의 능력 안에서 일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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