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요리 문답 신조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신학 (1) 유해무

하나님아들 2019. 11. 8. 23:23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신학 (1) 유해무 (고려신학대학원 교수, 교의학)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순서는 후대인들에게 익숙한 신학과 교리의 순서와는 사뭇 다르다. 한 주제를 한 문답에서 일회적으로 다루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 한 주제를 다른 주제들과 연관시켜 여러 곳에서 다룬다. 이 방식은 어떤 주제를 포괄적으로 제시하고 깨닫게 하는 장점을 지닌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시기적으로 종교 개혁 시대의 후대에 나온 작품이기 때문에 이전에 나온 교리서들을 참고하고, 심지어 루터파 교리서까지도 포용하는 면모를 지닌다. 많은 교리서들의 내용을 파악하고 잘 꿰고 있다는 말이다. 그렇지만 단지 기존의 어떤 교리서를 근간으로 삼아 몇 부분을 첨가한 것이 아니라, 참고하고 승화시켜 하나의 새로운 작품을 만들었다. 이런 포괄성과 포용성이 본 교리서의 장점이다.

1부의 죄와 비참 부분(3-11)에서는 율법이 몽학 선생임을 지적하고, 2부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12-85)에서는 사도신경(23-58)과 성례(65-85)를 다루며, 3부의 성신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감사 부분(86-129)에서는 율법, 곧 감사의 법으로서의 십계명(92-115)과 감사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서의 주기도문(116-129)을 다룬다. 이와 같이 인간의 신분을 ‘비참-구원-감사’의 셋으로 구분하여 설명하면서 사도신경, 성례, 십계명, 주기도문을 용의주도하게 다루었다.

특히 성례 부분(65-85)은 세심한 구조적 배려를 지니고 있다. 65-68문답은 말씀과 성례의 관계를 다루는 서론적 부분이며, 69-74문답은 세례를, 75-82문답은 성찬을 다룬다. 그런데 두 성례는 각각 69와 75문답, 70과 76문답, 71과 77문답, 72와 78문답, 73과 79문답, 74와 81/82문답이 대칭을 이룬다. 80문답이 첨가되어 이 대칭을 깨고 있지만, 초판의 의도는 충분하게 돋보인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내용을 검토하면서 신학의 주요 특징들을 살펴보자.

1. 삼위 하나님을 고백하는 요리문답

1)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인간을 주제로 삼지 않고, 인간을 소재로 삼아 삼위 하나님을 말하는 신학이다.

율법(4)-복음(19)-순종의 구조는 멜란히톤의 『신학 개론』의 순서인데, 이것은 로마서로부터 나왔다. 죄와 비참은 율법으로부터 안다(3). 이 점에서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는 몽학 선생이다. 그러나 동시에 율법의 요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이중 사랑’이다(4). 십자가에서 이중 사랑을 보여 주신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목표이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이중 사랑으로 요약하여 가르쳐 주셨는데, 이것은 ‘복음’으로 우리의 죄를 가르쳐 주시는 것이다. 이렇게 율법은 이중 사랑의 법으로 서두에 언급되고, 십계명은 감사의 법으로 뒤에 온다. 루터파와는 달리, 그리스도와 무관하게 율법 자체를 다루지는 않는다. 율법으로 대변되는 구약은 예수님과 교회를 향하여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신약은 구약에서, 또한 구약은 신약에서 서로 분리될 수 없다. 신약은 구약 안에 있고, 복음은 또한 율법으로 계시되었으며, 율법을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셨다.

이런 과정에서 삼위 하나님을 고백한다. 하나님께서는 애초에 인생이 자기를 알고 찬양과 영광을 돌리도록 자기의 형상으로 지으셨지만, 예수께서 율법을 사랑의 계명으로 요약하시고 우리가 그것을 지킬 수 없는 죄인임을 보여 주신다(4). 이제부터는 성신님께서 부패한 우리의 본성을 거듭나게 하셔야 순종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8). 바로 이런 삶을 가능하게 하신 예수님께 속한 것이 우리의 위로이다(1). 그러면서 삼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따라 인간을 규정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간(32)은 이신칭의(以信稱義)를 받은 인간이요(60), 성신님의 사람이다(70).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행한 세 직분 덕에 이 세 직분을 십계명을 지킴으로 수행하여 예수님을 닮는 형상이 된다(31-32, 114).

인간의 신분이 요리문답을 구분하는 근거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각 신분에 처한 인간을 창조하고, 구속하고, 거룩하게 만드시는 분은 삼위 하나님이시니, 성경과 이를 요약한 요리문답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라 삼위 하나님 그분이심을 잘 보여 준다.

2. 그리스도의 구속과 우리의 믿음

2) 구속 부분은 속상론(贖償論)으로 시작하고, 그리스도의 중보자직은 복음으로부터 안다.

인간이 범한 불순종과 반역(10)은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키며, 의로우신 하나님은 이에 대하여 영원한 형벌을 내리신다. 우리나 어떤 피조물도 이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이를 해결할 중보자는 참인간으로서 다른 사람의 죗값을 치르고, 참하나님으로서 하나님의 진노를 짊어지고 의와 생명을 죄인들에게 돌려 주어야 한다(12-17). 이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복음으로부터 안다(19)고 답하면서, 구약의 율법과 선지자를 모두 복음으로 묶은 것은 확실히 개혁파적이다.

성육신을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로부터 도출하는 이 방식은 안셀무스가 확립한 전통이다. 이런 식의 논리 전개와 설명을 합리주의로 보는 경우가 있다. 혹 그런 의문을 가질 수는 있겠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복음으로부터” 안다는 답변은 이런 의문이 근거가 없음을 보여 준다.

3) 믿음도 삼위일체론적으로 해설하고, ‘교회 안의 나’로서 삼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고백한다.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은덕을 받는 자들만이 구원을 얻는데, 참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 지식이며, ‘성신’께서 일으키시는 굳은 신뢰이다(20-21). 이처럼 믿음의 항목에서도 삼위 하나님을 아주 멋지게 고백한다. 믿음은 동시에 복음의 약속을 믿음이며, 사도신경은 복음을 요약한다(22). 이러한 삼위일체론적 믿음 이해는 사도신경을 해설하고 난 뒤, 믿음으로 의롭게 됨을 최종적으로 고백하면서(60), 그 믿음을 성신님이 주신다는 고백에서도 잘 나타난다(65).

믿음을 질문하는 21문은 이신칭의를 향하고(59), 칭의를 질문하는 60문에 종교개혁의 기치인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참믿음(sola fide)”으로 의롭게 된다고 대답한다. 사도신경 해설의 앞과 뒤에 믿음에 대한 고백이 나오는데, 이러한 구조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종교개혁의 진리를 사도신경 해설이라는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61답의 전반부는 인간의 소망 없는 모습을 고백하고, 후반부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위하여 하신 일인 이 선물을 오직 믿는 마음으로 받을 수 있다고 고백한다. 여기서 고백하는 ‘나’는 종교개혁의 교회이며, 그 교회 속에서 개별 성도가 고백한다. ‘교회 속의 개별 성도’라는 울타리를 벗어나면, 경건주의나 개인주의에 빠지고 만다.

21문답이 묻고 답하는 ‘참된 믿음’은 사실상 동어 반복이다. 구약에서 진리와 믿음은 동의어이다. 그럼에도 믿음은 사도신경에 고백한 삼위 하나님의 진리에 기초한다. 진리로 ‘여김’은 진리를 고백하고 하나님이 계시하신 말씀에 뿌리를 내린다는 뜻이다. ‘확실한 지식’은 개연적 지식이 아니라, 신앙의 확실성을 말한다. ‘굳은 신뢰’ 역시 복음으로 마음에 일으켜진다. 참신앙은 말씀에 뿌리를 박은 확실한 지식이며 성신님께서 일으키시는 굳은 신뢰이다. 지식에 신뢰가, 신뢰에 지식이 담겨져 있다. 지식은 복음을 향하며, 복음을 통하여 성신께서 신뢰케 함이 믿음이다.

4) 구원의 역사를 따라서 삼위 하나님을 경륜적으로 가르치는 요리문답은 인격적이며 실존적이다.

24문은 사도신경을 삼분하면서 성부 하나님과 우리의 창조, 성자 하나님과 우리의 구속, 성신 하나님과 우리의 성화를 말한 사도신경의 형성 과정에서 나타난 삼위 하나님을 향한 고백을 간명하게 잘 드러낸다. 게다가 이 고백 방식은 이른바 내재적 삼위일체론이 아니라, 경륜적 삼위일체론을 보여 준다. 구원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따르고 있다는 말이다. 특히 성자 하나님의 구속 계시는 이 구원 역사적인 측면을 아주 잘 보여 준다. 삼위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참되고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다(25). 2)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하신 아버지께서 만물을 지으시고 보존하시며, 하나님께서 성자 그리스도 때문에 ‘나의 하나님과 나의 아버지’가 되심을 믿는다는 고백(26)은 모든 것을 합하여 선을 이루시는 신실하신 아버지 하나님을 고백하는 데로 나아간다. 이 요리문답은 아주 인격적이며 실존적이다(27-28; 120문답 참조).

5) 중보자로서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직분은 성신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한 신자의 직분이다. 곧 기독론에 정초(定礎)하는 성신론적 인간론이 요리문답의 중요한 특성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 고백한다. 12-18문답은 그분이 참하나님이시고 참인간이심을, 29-52문답은 사도신경의 제2부에 나오는 구속 부분을 다룬다.

첫 부분은 4-5세기의 기독론 관점보다는 안셀무스의 성육신론에 나오는 논거를 따르고 있다. 고대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관계에 관심을 보였다면, 안셀무스는 성육신의 이유에 관심을 기울인다. 12문에 “마땅한데”, 16문과 17문의 “왜”는 그런 배경을 보여 준다. 이 부분은 포괄적인 죄 고백 다음에 나온다(6-11). 죗값을 완전히 치름으로 하나님의 의가 만족되어야 한다(12답). 이 사실은 참하나님이요 참인간이신 중보자를 필요로 하며, 이 진리는 복음으로부터 안다고 고백한다(19). 그리스도의 사역은 양성(兩性)이 서로 섞이지 않고, 그러면서도 분리되지 않은 일체성 가운데 이루어졌음을 강조한다(17). 비록 스콜라 신학의 영향이라는 비난을 많이 받지만, 역사적 사실인 죄와 구속의 필요성을 성경으로부터 도출하여 잘 해명하고 있다. 이 해명이 사도신경의 제2부를 다루는 구속 부분에서 길게 나타난다.

구주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설명하면서 “그분은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임명을 받고 성신님으로 기름 부음을 받으셨기 때문”(31)이라고 대답한다. 아주 멋진 삼위일체론적 답변이다. 그리스도의 세 직분, 곧 선지자와 대제사장과 왕직을 말하는데, 이것은 칼빈에게서 왔다. 그분이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구원 경륜을 계시하시고 대제사장으로 성부 앞에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며 왕으로서 말씀과 성신님으로 다스리고 보호하신다는 답도 멋지다(31).

이 기독론 위에 곧장 정초(定礎)하는 성신론적 인간론은 요리문답의 중요한 특성이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도 세 직분을 지니는데, 선지자로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제사장으로서 우리 자신을 산 제물로 드리며, 왕으로서 죄와 마귀를 대항하여 싸우며 그리스도와 영원토록 다스릴 것이다. 이를 위하여 우리는 먼저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어 그분의 기름부음에 참여해야 한다(32). 이것은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을 말한다. “참된 믿음으로 그리스도에게 연합되어 그의 모든 은덕에 참여한다”(20, 53, 60, 65). 우리는 참된 믿음으로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지며(64), 성신님에 의해 그에게 연합된다(74, 80). 이것은 이후 순종의 기조가 된다.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불가능함을 보여 준다. 이런 접근 방식은 요리문답이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하려는 단순성을 잘 보여 준다.

6) ‘음부 하강’에 대한 해설(44)은 칼빈적이다.

그리스도께서 “특히 십자가에서 말할 수 없는 두려움과 아픔과 공포와 지옥의 고통을 친히 당하심으로써 나의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하고 말하는 44답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장사되심과 모든 사역의 유익에 대해서 말하고 나서 이 문제를 다룬다. 즉 ‘음부 하강’을 예수님께서 당하신 역사적 고난의 순서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해석이다.

3. 기독론에 기초한 성신론과 교회론에서 선택을 다룸

7) 선택과 그 확실성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믿음의 확실성과 신뢰(26, 60)로부터 이끌어내며, 기독론에 기초한 성신론과 교회론에서 다룬다.

성부께서는 보좌에 앉으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만물을 다스리시며, 그리스도께서는 성신님으로 자기 지체인 우리에게 은사를 베푸신다고 말한다(50-51). 이것은 사도신경의 제2부를 다루는 문맥에서 나오는데, 삼위 하나님의 사역을 잘 묘사한다. 나아가 장차 임하실 심판주 예수님은 나를 자기의 택함을 받은 모든 이들과 함께 하늘의 기쁨과 영광으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고백하는 가운데에 선택이 나온다(52). 장래에 대한 신뢰도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와 그의 선택으로부터 온다.

그리고 선택을 개인적으로 접근하지 않고 성신론과 교회론적으로 접근한다. 하나님의 성자께서 ‘영생을 위하여 선택하신 교회’를 참믿음(!)으로 하나가 되도록 자기의 말씀과 성신님으로 불러 모으고 보호하시며, 그 가운데서 개별 성도도 영원한 지체임을 고백한다(54). 교회는 말씀과 성신님으로 거룩하여지고, 성부로부터 위임을 받아 만물을 다스리시는 성자께서 모든 인류 가운데서 택하셨으니 보편적이다(50답). 교중이 택함을 받았고, 그 안에서 개인도 택함을 받아 영생을 소망하고 이생에서 사명을 받아 행한다. 선택이 개별적 선택론이 아니라 교회론적 문맥에서 나온다. 이른바 개혁파의 중심 교리라고 알려진 예정론은 이 요리문답에 나오지 않는다. 이후의 개혁파 예정론의 발전은 이런 공동체적 선택 사상보다는 개별적 선택과 인간 심리 분석의 위험을 노출한다. 이런 고백의 성격상,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셔서 자기와 우리의 원수를 영원히 멸망시키실 것이라는 고백은 나오지만(52답), 유기(버림)에 관한 언급은 나오지 않는다. (다음 호에 계속)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신학 (2) 지난 호의 목차 (「성약출판소식」 52호. 2005.12.)

1. 삼위 하나님을 고백하는 요리문답

1)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인간을 주제로 삼지 않고, 인간을 소재로 삼아 삼위 하나님을 말하는 신학이다.

2. 그리스도의 구속과 우리의 믿음

2) 구속 부분은 속상론(贖償論)으로 시작하고, 그리스도의 중보자직은 복음으로부터 안다.

3) 믿음도 삼위일체론적으로 해설하고, ‘교회 안의 나’로서 삼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고백한다.

4) 구원의 역사를 따라서 삼위 하나님을 경륜적으로 가르치는 요리문답은 인격적이며 실존적이다.

5) 중보자로서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직분은 성신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한 신자의 직분이다. 곧 기독론에 정초(定礎)하는 성신론적 인간론이 요리문답의 중요한 특성이다.

6) ‘음부 하강’에 대한 해설(44)은 칼빈적이다.

3. 기독론에 기초한 성신론과 교회론에서 선택을 다룸

7) 선택과 그 확실성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믿음의 확실성과 신뢰(26, 60)로부터 이끌어내며, 기독론에 기초한 성신론과 교회론에서 다룬다.

4. 기독론과 성신론에 근거한 설교와 성례론

8) 설교와 성례를 그리스도께서 말씀과 성신님으로 교회를 모으고 보호하고 다스리시는 사역(31, 54답)으로부터 설명한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그의 은덕에 연합하며(64답), 설교로 믿음을 일으키시며 성례로 믿음을 강화시키시는 이는 성신님이시다(65). 그리스도께서 성신님 안에서 실제적으로 임재하심으로 교회는 존재하고 존속한다. 성례뿐 아니라 말씀에서도 그리스도께서는 실제로 임재하신다. 그래서 종교 개혁 교회의 예배의 중심은 가톨릭교회와 달리 제단이나 성찬상이 아니고, 강대상과 더불어 세례단과 성찬상이 중심이다.

설교가 믿음을 일으킨다는 고백은 아주 중요한다.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되어야 그분의 모든 은덕을 받아 구원을 얻는다(20). 성신님은 복음으로 참믿음을 우리 마음에 일으키고 그리스도의 모든 은덕에 참여시키며(21, 53), 영생을 확신시키신다(1). 성신께서 우리 마음에 믿음을 일으키는 설교는 이렇게 중요하다. 설교는 우리의 모든 구원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단번의 제사에 있음을 가르친다(67). 그렇기 때문에 설교는 동시에 천국을 열고 닫는 주요한 열쇠이다(83-84). 설교는 구원과 복을 성인(聖人) 숭배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찾게 하는 참된 믿음을 일으키며(30), 권징과 함께 천국의 열쇠이다.

성례의 기초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제사이다(66). 십자가에 사죄와 영생과 모든 구원이 있다는 것을, 복음으로 가르치는 성신님께서 성례로 확증하신다(67). 성례의 주인이신 십자가와 부활의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성례는 복음의 약속을 보여 주는 표와 인인 세례와 성찬 두 가지이다(68). 제정하신 분이 직접 세례와 성찬에 임재하신다. 특히 성찬은 십자가와 부활을 재현하지만, 그 동일한 사건이 재현되는 것은 아니다. 성례뿐 아니라 말씀 선포에서도 십자가와 부활의 그리스도께서 실재로 임재하시고 우리와 교제하신다. 나아가 이 그리스도 안에서 삼위 하나님과 교제가 이루어진다.

9) 요리문답은 세례를 십자가의 제사와 연관시키며, 세례가 언약의 표로서 구약의 할례를 대신한다고 가르친다(74).

세례로써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십자가의 피로 우리의 죄를 씻으시며 성신으로 우리가 죄에 대해서는 죽고 거룩하고 흠이 없게 살아가게 하신다(69-70). 성경은 세례를 중생의 씻음, 또는 죄를 씻음이라고 하며, 오직 그리스도의 피와 성신님만이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씻는다는 것을 계속 강조한다(71-73).

유아세례의 근거로 언약을 제시한다. 유아들에게도 그리스도의 피에 의한 속죄와 믿음을 일으키시는 성신을 약속하셨기 때문이다(74). 그러므로 유아들도 세례로 그리스도의 교회에 연합되며 불신 자녀와 구별되어야 한다.

10) 성찬은 또한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그의 은덕에 참여하는 표와 인이며, 떡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성신님 안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몸을 먹고 그분의 피를 마신다(75-76). 그리하여 우리는 땅에 있다 할지라도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와 연합하며, 우리는 그분의 살 중의 살이요 그분의 뼈 중의 뼈가 된다.

요리문답은 화체설(化體說)을 부인한다. 성찬의 떡을 그리스도의 몸이라 함은 성례의 본질을 나타내는 성례전적 용어일 뿐, 실제적인 몸으로 변하지 않는다(78). 그렇지만 우리는 성찬의 표와 인을 받아 입으로 먹을 때, 성신님의 역사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참여하며 그분의 모든 고난과 순종은 우리 것이 되어 우리가 직접 죗값을 치르는 것과 같아진다(79).

11) 80문답은 그리스도의 제사의 완전성을 이야기하기 위하여 화체설을 배격하고 또한 루터교의 공재설도 배제한다.

후에 첨가된 80문답은 이미 진술한 성찬을 다시 포괄적으로 정리한 뒤, 미사는 “저주받을 우상 숭배”라고 규정하고 거부한다. 로마 교회는 트렌트 회의(1545-1564)에서 십자가의 단회적 제사조차도 사제들이 매일 미사를 드려야 사죄의 효력을 발생한다는 교의를 선포한다. 본 요리문답은 다른 개혁파 신조보다 더 강하게, 사제들이 매일 그리스도를 하나님께 바친다는 주장과 화체설을 단호하게 비판한다. 요리문답의 이 비판은 정당하다. 로마 교회의 교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이루신 제사와 고난을 부인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제사는 완전한 구속, 속죄물이고 속상이다.

기독론에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그리스도는 인성으로는 더 이상 세상에 계시지 않으나, 신성과 은혜와 성신님으로는 잠시도 우리를 떠나지 않는다고 가르친다(47-48). 그리스도의 참된 몸은 지금 하늘에 계신다(80). 이것은 루터파의 공재설(共在說)을 거부하려는 의도를 밝힌 것인데, 신성은 인성 밖에(extra) 있다는 주장인 셈이다(참조. extra-calvinisticum). 골수 루터파는 신성과 인성의 속성들의 공유를 주장하였는데, 이를 반대하는 개혁파의 입장이 여기에 대표적으로 나타난다.

개혁파의 이런 입장이 그리스도의 인격의 연합을 훼손할 위험이 있다는 지적이 있어 왔다. 루터파는 인성의 편재(遍在)를 근거로 삼아 성찬에 그리스도께서 신체적으로 임재한다고 주장한다. 로마교의 화체설과는 달리, 루터파의 공재설은 그리스도의 신성이 인성에 전달되어, 그리스도께서 빵과 포도주 안에, 함께, 그리고 밑에 [in, with, under] ‘육체적으로’ 임재한다고 고수한다. 그렇지만 그리스도께서 성찬에 실제로 임재하신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하여 굳이 루터파를 따를 필요는 없다는 것이 요리문답이 취하는 입장이다. 즉 무리하게 육체적 임재를 주장할 필요 없이, 신성은 인성을 초월하지만, 동시에 인성 안에 거하고 인격적으로 결합되어 있다고 설명한다.

다만 첨가된 이 80문은 아동에게 교리를 가르치는 단순한 요리문답의 성격상 썩 잘 어울리지는 않는다. 요리문답을 작성한 그 당대에는 아주 중요한 논쟁 주제였고, 로마교 앞에서 연합해야 하는 종교 개혁 진영을 갈라놓는 신학적 주제라는 중요성 때문에 첨가되었다. 그렇지만 이 교리서가 성도를 평생 가르치는 요리문답서임을 고려하면 이런 첨가도 타당성을 지닌다.

12) 성찬 시행의 순결을 위하여 교회는 경건치 않은 자를 천국 열쇠로 성찬에서 제외시킬 의무를 지닌다(81-82).

이 천국 열쇠로는 복음의 설교와 교회의 권징이 있는데, 특히 권징에 관해서는 아주 분명하고 독특한 입장을 개진한다(83, 85). 권징은 특히 성찬 시행과 밀접한 관계를 지닌다. 성도들은 서로 권면해야 하고, 듣지 아니하면 교회 곧 치리회에 보고하고, 교회의 권면도 받아들이지 아니하면, 수찬 정지(受餐 停止) 시킨다. 성도의 교제(“성도의 사귐”)에서 추방당하면, 다만 회개하고 다시 교회의 회원으로 다시 받아들여지지 않고는 그리스도의 나라에도 참여할 수 없다(85).

권징과 성찬의 관계는 다시 루터파의 성찬론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공재설에 의하면, 빵과 포도주에 그리스도께서 육체적으로 임재하고 있기 때문에, 심지어 빵과 포도주를 받은 불신자들조차도 그리스도의 몸을 먹고 피를 마실 수 있다고 주장한다(manducatio indignorum). 그러나 개혁파는 권징의 시행으로 이런 주장 자체를 근절하였다.

5. 신앙과 행위의 관계

13) 신앙과 행위의 관계는 종교개혁과 그 이후까지 아주 중요한 논쟁거리이다. 요리문답은 감사의 삶인 선행도 인정하면서(62-63, 91), 이미 앞부분에서 나온 기독론에 기초하여 감사의 삶을 십계명과 주기도문의 해설로 푼다.

개혁은 로마 교회와는 달리 이신칭의를 가르친다(60). 그리스도의 대속과 의와 거룩만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의가 되며, 우리의 믿음이 어떤 가치를 지녀서 하나님께 용납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의 것으로 받아들일 뿐이다(61). 인간의 행위뿐만 아니라 믿음조차도 공로가 될 수 없음을 명백하게 말한다. 우리가 믿음으로 받은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구속이다. 로마교는 이신칭의가 인간을 무력하게 만든다고 주장하지만, 요리문답은 이를 의식이나 한 듯 정면으로 부정한다. 그렇기 때문에 참믿음으로 그리스도께 접붙여진 사람들은 감사의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다(64).

이것은 86답에서 성신님의 새롭게 하심으로 가능하여진다고 계속 가르친다. 선행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속하셨고 자기의 성신님으로 우리를 새롭게 하여 자기의 형상을 닮게 하시기 때문에 가능하다. 한편으로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 드림이며, 다른 편으로는 우리가 그 열매로 우리 믿음에 확신을 얻으며, 경건한 삶으로 남을 그리스도께 인도하기 위함이다(86; cf. 64). 우리의 어떤 행위라도 불완전하고 죄로 오염되어 의가 될 수 없지만(62), 성신님 안에서 우리의 행위는 이런 의미를 지닌다.

감사의 삶을 이루는 진정한 회개를 옛사람의 사망과 새사람의 삶으로 묘사한다(88) 이 두 사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이루어졌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 옛사람과 정욕의 죽음이요(43), 그분의 부활로 우리도 새 생명으로 다시 살아난 제물이 된다(45). 88문답은 성신론의 문맥이다. 산 제물이 참믿음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행하는 것만이 선행이다(91).

6. 감사의 법인 십계명과 감사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기도

14) 이렇게 시작하는 감사의 삶은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성신님으로 우리를 자기의 형상의 닮게 하는 과정이며, 기독교 윤리요 삶으로 드리는 찬양이다. 윤리의 교본은 감사의 법인 십계명이다.

특이한 것은 십계명 일반에 관한 문답이 초두가 아니라 뒷부분에 나온다는 점이다. 가장 경건한 자라도 순종을 겨우 시작할 뿐이며, 우리는 평생 이 계명을 완전하게 지킬 수 없다고 고백한다(114). 그럼에도 우리는 두 가지 이유에서 계명의 설교를 듣고 지켜야 한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을 들을 때마다 우리의 죄성을 더 깨닫게 하신다. 둘째로, 그리스도의 사죄와 의를 더 감사하며, 성신님께 간구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끊임없이 닮으려고 노력해야 하기 때문이다(115). 역시 삼위일체론적인 설명이다. 십계명은 죄성을 깨닫도록 책망의 일을 하며(usus elenchticus), 하나님의 형상으로 화하게 하는 긍정적 역할도 지닌다(usus normativus).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게 살며 그분의 계명을 따라 섬겨야 한다.

그리스도의 구속을 받은 자는 성신님 안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야 하며, 감사와 경건한 삶으로 다른 사람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해야 한다(86). 말하자면 삶을 통한 전도의 임무이다. 반대로 구원받을 수 없는 자의 소행은 십계명을 어기는 삶이다(87). 그런 옛사람을 죽이고 새사람으로 사는 것은 참믿음으로 하나님의 율법, 곧 십계명을 따라 그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선행을 말한다(89-92). 역시 삼위일체론적인 구조이다.

십계명을 해설할 때에, 그 계명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묻는다. 금령마다 먼저 부정적인 명령으로 금하고 피할 일들을 제시하고, 그 금령이 의도하고 있는 긍정적인 명령을 분명하게 제시한다. 가령 제1계명은 온갖 우상 숭배, 마술과 점과 미신, 성인과 피조물에게 행하는 기도 등을 금하지만, 유일하고 참된 하나님을 바로 알며 신뢰하고 복종하며 기대하고 사랑하며 경외하고 섬겨야 한다고 부연한다(94). 제6계명은 이웃의 명예를 훼손하거나 그들을 미워하거나 해치거나 살해하는 것과, 살인의 뿌리인 시기, 증오, 분노, 복수심들을 금하지만, 이웃을 사랑하고 보호하고 화평과 자비를 보이고, 원수에게도 선을 행하라고 부연한다(105-107).

각 계명에 대한 해설을 다 다룰 수는 없지만, 공예배시에 십계명을 교독하고, 요리문답 설교로 교인들이 매년 십계명 강해를 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교회의 예배는 제자리를 찾고, 성도들은 경건하게 살고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할 것이다.

15) 기도는 감사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116). 감사의 삶은 기도의 삶이다. 하나님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로 청하여 성신님의 힘을 먼저 받지 않으면, 우리가 행위로 하나님께 드릴 것이 없기 때문이다(127).

십계명과는 달리 기도의 서론을 먼저 다룬다. 우리는 하나님께 은혜와 성신님을 달라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한다(116-117). 멋진 삼위일체론적 표현이다. 주기도문의 ‘우리 아버지’를 설명하면서 하나님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아버지가 되셨다고 멋지게 대답한다(120). 이런 설명은 사도신경 해설 서두(26문답)와도 일치한다. 요리문답은 기도의 내용을 여섯 간구로 나누어 해설한다. 기도의 해설에서도 철저하게 신학적이다. 기도는 한편으로는 우리의 감사이지만, 동시에 기도는 영혼과 몸에 필요한 모든 은혜와 성신님을 주시는 은혜의 방편이다(118). 십계명의 설교를 듣고 성신님의 은혜를 간구(기도!)함이 감사의 삶이다(115). 이 은혜를 받지 않으면 우리는 행할 수 없다. 기도는 이처럼 계명과 말씀을 깨닫고 지키게 하는 성신님을 간구함이다. 여섯 간구를 다 다룰 수 없다 하더라도, 둘째 간구인 “나라이 임하옵소서”에 대한 해설만 살펴보아도 요리문답이 견지하는 신학적 자세를 잘 알 수 있다. 이 간구는 왕이신 주님께서 말씀과 성신님으로 우리를 통치하시고 우리가 점점 더 주님께 순종하게 인도하실 것을 간구한다(123; 31, 54).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그리스도께서 행하시게 하나님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한다(117). 십계명과 주기도문을 감사의 조항을 다루면서, 우리가 성신님의 인도로 삼위 하나님의 형상으로 화하는 과정을 보여 준다(83).

다른 신조들이 종종 빠뜨리는 마지막 ‘송영’도 고백한다(128). 우리가 왕이신 주께 받아 행하지만, 우리가 아니라 주님의 거룩한 이름이 영원히 영광 받으심이 웨스트민스터 대소요리문답 1답처럼,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다. 마지막 129문답은 아멘을 설명한다.

본 요리문답은 만물과 인간의 창조와 구속과 성화에서 삼위 하나님께서 행하신 바를 찬양하고 목적하시는 바를 인간이 행함으로 그분을 송영 가운데서 즐기게 한다.

7.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과 한국 교회

한국 교회 안에는 루터가 통탄했던 영적 무지와 도덕적 혼란이 점차 심화되고 있다. 성경을 애독하고 공부하며 그대로 살았던 선배들과는 달리, 교회에 말씀이 희소하여지며 성도들의 삶이 빛과 소금으로 나타나지 못하고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선배들이 성경 말씀을 잘 요약하고 정리한 교리서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그중에서도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는 값진 유산이다.

이 요리문답은 포괄성과 공교회성의 특징을 지닌다. 한편으로는 로마교의 교의를 단호하게 비판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루터파의 지나친 주장까지 분명하게 거부하는 개혁파 특유의 고백을 담고 있다. 사도신경, 십계명과 주기도문을 중심으로 성경 말씀을 포괄적으로 제시한다. 믿음 뿐 아니라 믿음에 기초한 삶의 지침을 제공한다.

이런 요리문답의 내용적 특성은 신학이다. 신학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말함인데, 이 요리문답은 삼위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여 주신 일들을 다양한 각도에서 잘 보여 준다. 비록 인간의 비참과 구속과 감사의 삶을 구조적 바탕으로 제시하지만, 그것을 설명하는 방식은 철저하게 삼위 하나님께서 주도하심을 드러낸다. 사도신경은 죄로 비참한 우리가 구원받기 위하여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해야 하며, 믿어야 하는 내용을 제시한다. 십계명과 주기도문 해설에서 죄인인 우리를 삼위 하나님께서 자기의 형상으로 변화시키심을 보여 준다. 말하자면 신학으로서의 삼위일체론과 기독론 위에 정초한 성신론적 인간론은 요리문답의 중요한 특성이다.

사도신경, 십계명과 주기도문 등은 교회사에서 주요한 교리 교육의 자료들로서 성경의 가르침을 잘 요약하고 있다. 목사의 설교는 목사의 경건과 취향에 따라 본문 선택이나 설교 내용 자체가 편향될 소지를 안고 있다. 목사가 성경을 균형 있게 가르치기를 원한다면, 선배들이 성경 말씀을 잘 요약한 요리문답을 매 주일 설교하는 것이 그런 편향성에서 벗어날 수 있는 좋은 해결책이 될 것이다. 그런 설교를 듣는 교인들은 결코 영적 편식 현상에 빠질 염려가 없다.

이런 좋은 특징을 가진 이 요리문답이 수백 년 동안 교회의 고백과 교육과 삶의 현장에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우리 한국 교회도 이 요리문답을 매 주일 설교하고 가르치고, 교인들은 이 교리서의 내용을 일상적인 삶에서 고백하고 실천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