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조(신앙고백서) 작성 배경
◎ 사도신경 작성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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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진리를 바르게 이해하고 고백하기 위해서, 이단을 대항하여 기독교의 본질과 원리를 잘 가르치기 위해서 작성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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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케아(Nicaea)신조 - A.D. 325 작성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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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케아 신조가 작성되게 된 배경을 살펴보면 아리우스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이 성부의 신성과 동일하지 않다는 생각에서 말씀 곧 성자는 지으신 일종의 피조물로서 시작이 있었고 따라서 한 때 그는 계시지 않았던 적이 있었다고 말했는데, 이러한 사상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었다는 성육신 신앙에 위배되는 것임을 아다나시우스(Athanassius)가 지적하고 아리우스와 논쟁을 하게 된 까닭이다. 이 논쟁은 자유를 얻기 시작한 기독교의 통일과 평화를 위협하는 것이었으므로 콘스탄틴 황제는 325년에 세계교회 회의를 니케아(Nicaea)에 소집하여 이때까지 이론(異論)이 많았던 기독론의 교리를 확정하여 올바른 신앙고백을 제정할 것을 기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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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케아-콘스탄틴노플(NicaeaConstantinoplis) 신조-A.D. 381 작성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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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신조는 381년 콘스탄티노플에서 모인 에큐메니칼 공회에서 150명의 감독들이 채택한 신조로 알려져 있고, 승인을 받은 것은 451년의 칼케돈 에큐메니칼회의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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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케돈(Chalcedon)신조- A. D.451 작성배경
콘스탄티노플 신조와 아다나시우스 신조는 예수 그리스도가 성부와 동일한 신성을 가지신 분임을 밝혔으나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면서 또한 완전한 사람임을 고백하는 문제를 가지고 신학자들 사이에 이론(異論)이 많았다. 즉 그의 한 존재 안에 신성과 인성이 어떤 모양으로 연합되어 있느냐의 어려운 문제였다. 신인양성을 믿으면서도 그의 신성을 더 우세한 것으로 강조한 사람들은 주로 알렉산드리아 학파(네스토리우스파, 몹수에스티아의 데오도레)에 속했었고, 그의 인성의 약화를 막으려는 막으려는 사람들은 주로 안디옥 학파(유티케스)였다. 이러한 기독론의 역사적인 논쟁들을 일괄하여 종식시키고 정통신조를 확립할 목적으로 로마의 감독 레오(Leo)가 449년 6월 13일에 플라비안(Flavian) 황제에게 보낸 편지 톰(The Tome)에서 논쟁의 해결을 위한 신학적 시론을 발표하였었다. 황제 데오도시우스 2세는 451년에 칼케돈에서 제4차 세계교회의 에큐메니칼 회의를 소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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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다나시우스(Athanasios)신조- A. D.420-450 작성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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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신조는 사도신경처럼 저자가 명확하지 않다. 9세기 이후에는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으로 그리스도의 신성과 정통적인 삼위일체 교리를 가장 두드러지게 옹호했던 아다나시우스(296-373)가 이 신조의 저자로 알려져 왔으나, 17세기 중엽 이후로는 이 견해가 배척을 당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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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The Westminster Confession A.D. 1647)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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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신앙고백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적 입장을 고려해야만 더욱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영국의 종교적 배경은 다른 나라와는 달리 국가교회 내지 민족교회가 형성되었다. 영국은 왕조가 종교의 방향을 좌우하는 독특한 특징을 가진 나라가 되었다. 즉 헨리 8세, 에드워드6세, 메리여왕, 엘리자베스1세, 제임스1세, 찰스1세등 왕조의 변화에 따라서 개신교와 카톨릭의 세력이 좌우되는 형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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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배경 속에 엘리자베스 여왕 때에 대륙에서 돌아온 개혁주의자들을 중심으로 청교도(Puritanism)역사를 창출하게 되었다. 이렇게 형성된 퓨리탄은 영국 국교의 카톨릭적 요소, 국가주의와 민족주의, 교역자의 부도덕과 기성 영국 교회의 도덕적 이완과 잘못된 교리에 저항할 뿐만 아니라 순수한 개혁교회적 교회 정치와 정.교분리원칙 및 보다 순수한 칼빈 신학을 수립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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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시대적인 상황 속에서 본 신앙고백서는 작성되었으며, 앞에서도 설명한 것처럼 그 목적에 있어서 보다 철저한 개혁주의 신학을 형성하려고 신앙고백서 작성이 시도되었던 것이다. 특별히 당대에 주류를 이루고 있던 아르미니우스적 사상을 철저히 배격하고 바른 성경적 입장을 세우고자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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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MC (West Minster Confession)는 왕조와 분리된 의회가 1643년 7월 1일부터 1649년 2월 22일까지 신학자 총회를 소집하여 영국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의식, 권징, 정치를 할 수 있는 보다 완전한 개혁을 단행하여 가까이 있는 스코틀랜드 교회나 대륙의 개혁 교회와 일치케 하도록 하라는 명령을 통해서 작성되었다. 참석자들은 151명으로 30명의 평신도 사정관과 121명의 목사들로 구성되었으며 대부분이 장로교 소속을 갖고 있었다. 이 외에 감독교회파와 독립교회파와 에라스티안파 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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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요리문답서들은 1647년 가을에 심사와 승인을 받기 위해 의회로 보내졌으며, 에딘버러 총회는 1648년 7월 20일에 대요리문답을, 7월 28일에는 소요리문답을 각각 승인하면서, 이 두 요리문답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며, 공인된 교리, 예배, 권징, 교회 정치에 위배된 것이 전혀 없다"라고 선언했다. 이 결정 사항은 1649년 2월 7일, 스코틀랜드 의회에서 비준을 받기도 했다. 이와 같이 개혁주의 교회에서는 WMC와 요리문답를 표명하면서 교리로서의 기독교와 생활로서의 기독교 사이에 선택의 자유를 엄히 거절하고 오직 성경의 바른 가르침을 따라 전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어지도록 노력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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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네바 교리교육서의 역사적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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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1차 교리교육서
칼빈은 그의 회심한 초기의 목회 사역에서부터 교리교육에 온 심혈을 기울인 것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는 시편 주석 서문에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나는 개종한 지 1년이 지나기도 전에 보다 순전한 교리에 대한 열망을 가진 사람들이 나 자신이 초보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내게 배우기 위해 계속 찾아오는 것을 보고 매우 놀랐다".
사실 그의 최대의 역작이라고 할 수 있는 기독교 강요(1536)도 실상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시도로 저술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그의 헌사 부분에서 제시되고 있는 다음과 같은 표현을 통해서도 쉽게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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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목적은 단지 어떤 기초적인 사실들을 전달함으로 그것에 의해 종교에 열심을 가진 사람들이 참된 경건에 도달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특별히 우리 프랑스 사람들을 위하여 이 일에 착수하였는데 그들 중 상당수는 제가 보기에 그리스도에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해 약간의 지식이라도 가지고 있는 자는 극소수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이 책 자체도 그것이 나의 의도였다는 것을 증거 하는데 그 이유는 이 책이 단순하고도 초보적인 가르침의 형태로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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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기독교 강요는 변증의 성격이 강하게 있음과 동시에, 신앙교육서의 성격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사실 "교육"은 칼빈의 교회론에서 매울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도 하다. 즉 칼빈이 교회를 모든 신자의 어머니(piorum omnium mater)로 보며, 교회의 직제 가운데에서 목사직을 중시했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실제로 칼빈은 그의 생애에 중대한 사역을 한 제네바에서 1차 사역의 시기(1537)에도, 2차 사역의 시기(1542)에도 신앙교육서를 만들어서 실천적인 교육을 끊임없이 모색했던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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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1차 교리교육서는 1536년 11월에서 1537년1월 사이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것은 그가 1536년 8월 제네바 종교 개혁자 파렐(Guillaume Farel)의 설득으로 종교개혁 운동에 가담을 결심한지 불과 몇 달이 되지 못해서 작성한 것이다. 이것은 Le Petit Conseil(시의 소의회)로부터 인준을 받은 후인 1537년 2월부터 인쇄되어 유포되었다. 또한 본 교리교육서의 특징은 루터의 대요리문답서(Grosser Katechismus)를 본보기로 하고 있으며, 내용적으로는 '기독교강요'(1536년판)의 요약이라고 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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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중요한 특징이 하나 더 있는데 칼빈은 제1차 교리교육서의 원명에 신앙고백(Confession)이라는 단어를 첨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공적인 권위를 의미하기도 한다. 즉 1차 교리교육서의 내용은 (신앙고백)에 준하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참 교회에 속하려는 사람은 누구나 이를 공적으로 선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카톨릭의 핍박에 대한 변증서의 역할을 하기도 했던 것이다. 이처럼 당시에 있어서 이 교리교육서는 기독교 강요와 더불어 개혁주의의 교회 형성 초기에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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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칼빈은 교리교육서를 통한 교육의 중요성을 성경의 권위와 연결시켜서 제시해 주었던 것이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다. 즉 그는 제네바에서 하나님말씀의 가르침이 가정과 교회에서 무시되는 현실에 있었는데, 그래서 그는 교리교육서의 교육을 더욱 철저히 하려고 했었던 것을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어린이들이 충분히 교육받았다고 판단될 때까지 기독교 신앙의 간단하고 단순한 요약을 모든 어린이에게 가르쳐야 하고, 어린이들은 특정한 시기에 질문을 받고 교역자들에게 와야 하고, 각 어린이들의 능력에 따라 보다 충분한 설명을 들어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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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그 당시 부모들은 어린이들이 세례, 입교문답 준비를 하고 교육과 시험을 위해 적절한 시기에 교역자들에게 나와야 한다는 사실을 매우 강조하기도 했다. 특히 칼빈은 유아세례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는데, 그것은 성령께서 이들의 신앙을 교리교육서 교육을 통하여 점진적이고 꾸준하게 성장시킨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는 미신적인 로마 카톨릭의 견진성사(Congirmation)는 반대하였지만, 신앙 교육을 통한 견진은 인정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는 어떤 어린이도 신앙교육을 받기 전에 성찬을 받는 것을 반대하였는데, 이것을 보더라도 그가 신앙교육서의 교육의 중요성을 얼마나 강조하고 있었는지를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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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2차 교리교육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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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교리교육서는 칼빈이 프랑스의 Strasbourg에 머물면서 Bucer와의 만남을 통해서 영향을 받고, 또한 그가 Strasbourg에서 목회활동을 하면서 실제적인 목회경험이 바탕 되어서 작성된 것이다. 그는 1541년 9월에 제네바시의 행정부의 요청에 따라서 제네바로 돌아왔는데, 바로 그때 칼빈 자신이 목회직의 재수락의 필수조건으로 요리문답교육을 제시했던 것이다. 이것은 그가 이 2차 교리문답서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를 였볼 수 있다. 또한 서문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통해 그가 이것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를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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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는 이런 거룩한 질서를(Catechism) 붕괴시켰다. ........ 우리가 여기서 제시하는 이 요리문답은 옛적부터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준수되어 왔고, 교회가 완전히 부패했을 경우를 제외하고는 결코 포기된 적이 없는 관례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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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교육서는 1차와는 다르게 목사와 아이의 대화체로 구성되었으며, 55과로 나누어서 1년동안 매주일 교육하도록 하기도 했다. 본 연구의 자료는 불어판과 라틴어판으로 한다. 라틴어판에서는 '이것은 그리스도의 교훈을 자녀들에게 가리키기 위한 교리문답이다'(hoc est, formula erudiendi pueros in doctrina Christi)이라는 제목으로 시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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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칼빈의 1-2차 교리교육서의 역사적인 배경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그가 얼마나 이 교리교육을 중요시하고 또한 개혁교회 안에 이 체제가 바르게 정립되기를 얼마나 고대했는지를 알 수 있다. 특히 앞 부분의 신조의 역사적 근거에서도 잠시 설명되었던 것처럼 이런 정신이 영국의 한 성주에게 보낸 편지에 잘 드러나고 있기 때문에 다시 한 번 더 인용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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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교회는 교리교육이 없이 유지될 수 없다. 이것은 선한 씨앗이 죽지 않고 새로운 생명으로 자라는 것처럼 왕성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오랫동안 붕괴되지 아니하고 튼튼히 서 있는 집을 짓기를 원한다면 아이들이 아주 인상깊게 이 신앙교육서를 통하여 믿음에로 이끌어지도록 염려하고 돌보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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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칼빈은 목회를 시작하면서 또한 그의 생애 마지막까지 교회의 성도들이 철저한 교리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심혈을 기울인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제네바 교회가 이 교리교육의 결과에 따라서 교회의 순수성이 지켜질 것을 분명히 확신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칼빈의 목회 사역에 있어서 교리교육의 위치는 매우 중요한 위치였음을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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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2스위스 신앙고백(The Second Helvetic Confession A.D. 1566)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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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스위스 신앙고백서는 Zwingli의 제자였던 블링거(Henry Bullinger)에 의해서 작성되었다. 그는 스스로 이 신앙고백에 따라서 살고, 죽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이 작업을 수행했다고 밝혀지고 있다. 이것은 1562년 라틴어로 초본이 작성되었는데 그 자신이 완성하지 못하고 죽기 얼마 전에 이 고백서에 전적으로 동의했던 순교자 피터(Peter Martyr)에게 고백서의 초안을 보여주고 자신이 죽으면 이것을 잘 다듬어서 추리히 시장에게 보내주기를 부탁하면서 이 고백서는 공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렇게 작성된 본 신앙고백서는 대륙의 개혁 교회 신조들 중에서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을 제외하고는 가장 널리 인정을 받아 큰 권위를 부여받았던 것이기도 하다. 특별히 이것은 역사적인 중요한 특징을 갖고 있는데, 그것은 독일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은 이 고백서가 공적으로 빛을 보게 만들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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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라티네이트의 경건한 선제후 프레드릭 3세(Fredrik Ⅲ)는 개혁 교회를 승인하고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서를 공포함으로써 평화조약을 위배했다는 루터주의 제후들의 위협을 받게 되자, 불링거에게 요청하여(1565) 이단이나 견해를 달리하는 자들에게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고 또 그들을 공격할 수 있는 분명하고도 자세한 개혁파 신앙 해설서를 준비해 주도록 요청했다. 바로 그 때 불링거는 자신의 신앙고백서 필사본을 보내 주었던 것이다.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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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러한 배경 속에서 전달된 본 신앙고백서는 1566년 아우구스부르그 회의때 Fredrik 3세가 왕과 루터주의자들 앞에서 목숨을 걸고 자신의 신앙적 입장을 주장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150) 이처럼 역사적으로 큰 격변기에 개혁교회의 순수성을 지켜 주었던 본 신앙고백서는 철저하게 사도적 신앙과 니케아 신조 그리고 이단 사상들을 배제 시킨 380개의 황제 칙령(공인된 져스틴의 기록)의 내용을 따르고 있기도 한 것을 찾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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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르트신조(The Canons of Dort A.D. 1619) 작성배경 및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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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칼빈주의자들은 전국 교회회의에서 공정한 심문을 받을 수 없으며 단순히 지역적인 개인 문제가 투쟁을 야기시켰다는 항변파의 주장에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그래서 재판절차의 공정성을 보증하고 증명하기 위해 칼빈주의자들은 그 교회회의 정식회원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유럽 전역에 있는 개혁교회들로부터 대표들을 초대하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각국 대표단이 구성되어 105인이 참석한 세계적인 종교회의가 열리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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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견된 대표위원은 다음과 같다. 네덜란드 대표단은 18인의 정치위원과 게더란드, 남 홀란드, 북 홀란드, 절렌드, 위트레히트, 프리슬란드, 오베리셀 그로닝엔, 드렌테, 및 다른 지역 교회회의에서 목사 37인과 장로 19인이 파견되었다. 또한 네덜란드 신학교수 대표단은 요한네스 폴리안더, 프란키스쿠스 고마루스, 안토니우스 티시우스, 아토니우스 왈라에우스 및 시브란두스 루베르투스의 5인으로 구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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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국제대표단은 영국(5인), 팔라티네이트(Pfalz, 3인), 헷센(Hessen, 4인), 낫산(Nassan, 브레멘(Bremen, 3인), 엠덴(Emden, 2인), 독일어 사용권 스위스(취리히 1인, 베른 2인, 바젤 1인, 샤프하우젠 1인), 제네바(2인)에서 파견되었으며, 프랑스와 브란덴부르크(Brandenburg)에도 초청장을 보냈지만 정치적인 문제로 대표단이 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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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 교회는 유감스럽게도 영국과 분리되어 초청 받지 못했다. 제임스 왕은 뒤늦게 스코틀랜드인 한 사람을 대표단에 추가했지만, 그는 월터 발컨컬(Walter Balcanqual)인데, 영국교회 소속이었다. 아무튼 이렇게 구성된 도로트회의는 칼빈주의교회가 이전에 개최해 본 적이 없는 유일하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세계 총회적인 성격을 띤 교회회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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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회의의 진행은 1618년 11월 13일부터 1619년 5월 29일까지 6개월간 지속된 회의였다. 6개월간 154회의 공식회의를 가졌으며, 화란의 대표들은 교회문제와 관련하여 추가로 22회의 회합을 가졌다. 모든 경비는 국가에서 책임졌는데 10만 길더(guider) 이상이나 들었다 . 회의는 공개로 진행되어 방청객이 많았고, 회의의 회장이나 서기는 모두 철저한 칼빈주의자로 선출되었다. 회의 진행은 1618년 11월 12일 모든 대표자들이 도르트에 도착, 13일부터 본격적인 회의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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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회의의 기본임무는 항변파의 견해를 판단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네덜란드에서 달아나지 않은 항편파 지도자들은 교회회의에서 자신들의 관점을 밝히도록 소환되었다. 따라서 항론파들이 1618년 12월 6일에 도착하여 논쟁하기 시작했는데, 그들은 대변인 시몬 에피스코피우스(Simon Episcopius)를 통해 교회회의의 진행을 연기시키고 대표들을 이간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 계략을 이용했다. 나중에는 그들이 한달 이상 그들이 거부하면서 모습을 나타내지 않아, 교회회의의 의장인 요한네스 보겔만(Johannes Bogerman)은 항변파들을 해임하고 그들이 쓴 저서를 근거로 결정내릴 것을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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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양각색의 대표자들 각 자는 알미니우스 교리에 대해 나름대로의 답변을 작성했고 더 저명한 대표자로 구성된 위원회는 채택된 도르트 교회의 법령의 최종 형태를 준비했다. 따라서 항변파에 대한 법령, 즉 4개의 조항이 작성되었는데, 이것은 1619년 5월 6일 공식적으로 선언되었다. 항변파의 3조항은 4조항과의 관계에서만 오류가 있기 때문에 교회 법은 교리의 3,4조항을 하나로 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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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법령이 완성됨에 따라 1619년 5월 9일 폐회하고, 당일 외국 대표자는 출국하였다. 그러나 화란인은 1586년이래 전국 교회회의가 소집되지 않은 까닭에 교회의 생활과 활동에 대한 다른 산적한 문제들을 해결할 필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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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의 결과 이후 향변파의 정치적인 지도자 올덴바로네벨트는 참수형을 당하였고, 당시의 정치가요, 법률가요, 알미니안 신학자였던 그로티우스(Hugo, Grotius, 1583-1645)는 종신형을 살게 되고, 200여명의 알미니안 목사들은 파면 당하였다. 그리고 네덜란드에서 개혁교회는 국교가 아니더라도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종교였기 때문에, 네덜란드 정부 당국은 "참된 종교(칼빈주의 기독교)"를 옹호할 의무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비록 참석하지 못했지만 프랑스 개혁교회는 뒤에 도르트신조를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1620년 알레(Alais)의 23차 총회와 1623년 사렌톤(Charenton)의 24차 총회는 돌트대회의 결정을 모든 목사들에게 주지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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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개혁교회에서 실시되었던 회의를 필립샤프는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도르트 총회는 개혁교회의 역사 중에서 유일하게, 준(準) 세계교회의 총회의 성격을 가진 회의였다. 이런 점에서 보면 도르트 총회는 신학자들의 모임이었던 웨스트민스터 총회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매우 중요한 교리적 표준문서들을 제정하긴 하였으나, 그 참석자들이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신학자들에 국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학식이나 경건함에서 사도시대 이후 어떠한 회의보다 뛰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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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교회의 큰 별이었던 Breiting은 화란 대표들의 지식과 역량의 풍부함에 놀라서 마치 회의에 늘 성령께서 임재해 계신 것 같다고 말하면서, 그 자신도 도르트 회의에 열심히 참석했다. 그리고 팔라티네이트의 대표로 참석했던 Scultetus는 자기가 도르트 총회의 대표가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이 회의를 말할 때마다 모자를 벗고, '지극히 거룩한 총회'라고 말했다고 한다. 심지어 자유로운 사상을 가지 카톨릭 역사가였던 Paolo Sarpi까지도 도르트를 극찬했고, 한 세기가 지난 뒤, 뛰어난 화란의 사학자 캄펜기우스 비트링가(Campegius Vitringa)는 이렇게 말했다 "이처럼 많은 지식이 한 곳에 모인 것은 예전에 없었던 일이다. 트렌트 회의도 이렇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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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벨직 신앙고백(The Belgic Confession A.D. 1561) 역사적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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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신앙고백은 남부 네델란드(화란)의 벨기에 지역에서 Guido de Bres에 의해서 작성된 것이다. 특히 화란은 1618년에 도르트 총회를 개최하는 중요한 개혁교회의 요충지였기 때문에 더욱 관심을 끌고 있다. 이런 세계적인 개혁교회의 총회가 집행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이 지역의 교회들이 사도적인고 어거스틴적이며 또한 칼빈주의적인 개혁신앙을 뿌리 깊게 받아들이고 정립했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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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1561년에 이미 이 화란에서는 개혁교회에서 공적으로 인정받게 된 본 신앙고백서를 작성할 정도로 깊은 신학적 내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또한 16-17세기를 거치면서 유럽의 혼란한 정치, 종교적인 배경 속에서 많은 개혁신학자들이 화란으로 이주해 오면서 화란은 보다 더 철저한 개혁신앙을 정립하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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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정치적인 배경으로는 찰스 5세가 공적으로 이단(개혁교회)을 처형하는 칙령을 발표하고 대대적으로 개혁교회의 성도들을 핍박하기 시작한 역사를 살펴볼 수 있다. 이미 1523년에 어거스틴파의 수도승이었던 헨리 보에스(Henry Voes)와 요한 에쉬(John Esch)는 브리쉘에서 말뚝에 묶여 화형을 당하는 순교의 역사가 화란에 있었다. 이들은 죽어 가면서도 "사도신경"과 "Te Deum"을 부르며 죽어 갔던 역사는 개혁교회에 있어서 신앙고백서를 채택하고 지켜간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정신인지를 깨닫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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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핍박의 역사는 스페인의 필립 2세에 와서는 더욱 심해져서 그 절정을 이루기도 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는 이런 핍박 속에서 화란의 많은 개혁교회들이 독립교회를 세우는 열매들을 낳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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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순교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본 신앙고백서는 아드리안드 사라비아(Adrien de Saravia와 모데투스(Modetus)와 윙켄(G. Wingen)의 도움을 받아서 가이오 드 브레스(Guido de Bres)가 프랑스어로 작성한 것인데, 후에 엔트웝의 왈룬(Walloon)과 보르쥬(Bourges)의 프렌시스 쥬니우스(Francis Junius)에 의해서 좀더 분명한 칼빈주의적 정신이 포함된 형태로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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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작성된 본 신앙고백서는 개혁신앙에 매우 비관적인 필립 2세에게 보내졌다. 이것을 필립 2세에게 보낸 이유로는 당신의 개혁교회의 성도들이 필립 2세의 핍박 정책에 항거하는 중요한 저항의 방식이기도 했던 것을 엿볼 수 있다. 즉 이들은 그가 이것을 읽고 관용 정책을 베풀어줄 것을 기대함과 동시에 거절될 때에는 참되고 바른 신앙정신인 무엇인지를 순교를 각오하고서라도 보여주고자 한 강한 저항 정신의 표출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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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이 이렇게 저항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시 개혁교회의 신자들이 반역 행위를 하고 있다고 비난을 받고 있었으며, 그래서 10만명 이상이 달하는 자들이 죽임을 당하였으며, 또 앞으로도 더욱 극심한 핍박이 예상되고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이런 표현을 통해서 합법적인 것이라면 정부의 모든 명령에 묵묵히 복종하지만 그렇지 않고 참된 신앙의 정신을 파괴시키는 도전이라면 "이 신앙고백에 표현된 바의 진리를 거부당하느니 보다는 차라리 등에 채찍을 받고, 혀를 짤리며, 입에 재갈이 물리며, 온 몸이 불구덩이에 던져지는 편이 더 낫다"고 할 정도로 이 신앙고백을 통한 저항 정신을 매우 분명히 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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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신앙고백의 가치는 개혁주의 교회 안에서도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왜냐하면 본 신앙고백서는 1566년의 엔트웹 회의와 1568년 베셀 회의에서 공식적으로 채택이 되고 보다 더 공적으로 채택이 된 것은 1571년 엠덴 총회와 전국 도르트 총회(1574), 미델부르그 총회(1581)과 1618-1619년에 있었던 도르트회의에서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과 함께 개혁교회 중요한 신앙고백으로 채택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특히 도르트 총회에서는 이 신앙고백서를 개혁교회의 규범 교리의 하나로서 채택하였고, 모든 교회의 책임자는 반드시 이에 서명하도록 규정하였다. 이렇게 됨으로 본 신앙고백서는 개혁교회에서 중요한 신앙고백서로 자리를 잡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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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1584년에는 로마교회의 광신자에 의해 암살을 당한 윌리암 오렌지(William Orange)공은 자신의 둘째 아들과 투쟁을 벌이면서 성경과 함께 벨직 신앙고백서와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을 영적인 안내자와 위로자로 삼고 원수들의 공격을 맞서 나가기도 했다. 이처럼 하나님 이외에는 아무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칼빈주의 사상은 스페인의 정치적, 종교적 독재와 맞서 승리를 얻게 하는 중요한 정신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처럼 본 신앙고백서는 화란의 교회와 정치, 사회의 모든 부분에 걸쳐서 깊은 영향력을 끼쳤던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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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본 신앙고백서도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과 함께 알미니안주의 자들에 의해서 강력한 도전을 받으면서 1618년 도르트 회의 당시에 수정을 강력하게 요구 받았다. 왜냐하면 본문에는 철저한 개혁교회의 신앙 정신이 잘 제시되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는 알미니안주의 입장에서는 여러 가지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도르트 총회에서는 오히려 이 벨직 신앙고백서을 더욱 높이 평가하고 프랑스, 라틴어, 화란어 개정판을 출판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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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The Scotch Confession A.D. 1560) 역사적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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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 개혁교회는 장로교의 역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후대에 영향을 끼친 그 신학적 정신이 매우 엄밀하고 바른 정신을 확립했으며, 장로교 정치의 기틀을 마련해 주기도 했기 때문이다. 특히 스코틀랜드 개혁교회의 후손들은 16-17세기를 넘어오면서 유럽 대륙의 전 지역 중에서 가장 엄밀한 성경의 진리 정신을 오랜 시간 동안 간직해 왔기 때문에 그 가치가 매우 높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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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도 스코틀랜드 신학자들이 깊은 영향을 끼쳤으며, 또한 이 정신은 1729년의 미국장로교의 총회 이후에도 계속해서 엄밀하게 신앙고백서를 채택해 가려고 하는 정신을 가장 많이 제시한 부류로서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 중요성이 매우 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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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 개혁교회는 1567년에 이르서야 비로서 국회의 합법적인 인정을 받았는데, 이 때는 이미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가 나온지 7년이 지난 후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일련의 프로테스탄트 귀족들과 신자들이 1557년 12월 3일 에딘버러에서 모여 "계약서"에 서명을 하고 독자적인 조직을 형성한 후 왕권에 맞서 "전체 그리스도의 회중과 거기에 속한 한 사람 한 사람"을 죽이지 말라고 강력하게 항거했을 때부터 이미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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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정치적인 배경으로는 스코틀랜드 왕국은 전통적으로 프랑스의 지원을 받으면서 영국에 대적하여 왔다. 그러나 16세기의 스코틀랜드는 영국과의 화친을 주장하는 사람이 승리하였다. 그리하여 1502년경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4세(James Ⅳ)는 영국의 헨리 7세(Henry Ⅶ)의 딸인 마가렛(Margaret Tudor)과 결혼하였다. 그후 헨리8세(Henry Ⅷ)는 그의 딸 메리(Mary)를 제임스 4세(James Ⅳ)의 아들인 제임스5세와 결혼시켜 스코틀랜드와 평화로운 관계를 맺으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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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스코틀랜드의 공론은 프랑스와의 전통적인 관계로 돌아감으로 제임스 5세(James V)는 프랑스의 메리(Mary of Guise)와 결혼하였다. 그리하여 두 나라는 전적으로 대립하는 관계에 놓였으며, 스코틀랜드는 보다 카톨릭적인 프랑스의 영향하에 있게 되었으며, 영국은 헨리 8세(Henry Ⅷ) 이후 종교개혁에 돌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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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음에 개신교가 스코틀랜드에 들어왔는데, 이 개신교는 이미 이 나라에 들어와 자리잡은 롤라드파(Lollars)와 후스파(Hussites)와 주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때에 독일에서 공부한 스코틀랜드 사람들이 루터와 다른 개혁자들의 작품들을 수입하기도 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당국은 이를 단호히 저지하여 1528년부터 순교자들이 속출하게 되었으나 오히려 개신교는 급속히 확산되는 결과를 가져 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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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2년 제임스 5세(James V)가 죽고 그의 딸 메리 스튜어트가 왕위에 오르자, 헨리8세(Henry Ⅷ)는 그의 아들 에드워드(Edward)를 메리(Mary)와 결혼시키려 하였으나 스코틀랜드의 프랑스 지지파들이 메리(Mary)를 프랑스로 유학을 보내어 수학케하고 프랑스 왕자와 결혼하도록 하였다. 이처럼 스코틀랜드가 카톨릭을 표방하는 프랑스로 기울어져 있으면서 계속 개신교들을 박해하였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개신교의 음모자들의 무리가 추기경을 살해하고 앤드류 성을 점령하였다. 이들 개신교 혁명 세력은 그 곳을 점령하여 신앙의 요새로 삼았으며 정부군의 힘은 여기까지 미치지 못하여 비교적 안전한 자리를 확보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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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정치적, 종교적 혼란 속에서 스코틀랜드 개혁교회는 기이즈의 메리(Mary of Guise) 여왕이 죽고 프랑스 군대가 철수하게 되자 이런 기회를 틈타서 영국에서 메리 여왕이 도착하기 전에 1560년 8월 1일 에딘버러에서 모여서 의회를 갖게 되었다. 이 모임은 스코틀랜드 개혁교회 역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모임으로 평가 받고 있을 정도로 매우 중요한 모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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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교회 문제와 관련해서 교황제도를 추방하고 예배와 권징의 순수성을 회복하며, 경건한 목사를 후원하기 위한 교회의 수입을 마련하며, 학문의 장려하고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방식을 수립하자고 하는 청원서를 제출하게 되었던 것이다. 바로 이런 청원서에 대한 첫 번째 대안으로서 제시된 것이 개혁교회의 목사들로 하여금 이런 정신을 대변할 수 있는 신앙고백서를 제정할 것을 건의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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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요구에 의해서 죤 녹스(J. Knox)와 그의 동료 다섯 명에 의해서 작성되게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어렵고 힘든 정치적인 배경 속에서 만들어지게 되었던 본 신앙고백서는 1560년 8월 18일에 "무오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교리"라는 인정을 받을 정도로 매우 훌륭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정치적인 어려움으로 인해서 1567년에 가서야 당국에 의해서 공식적으로 인정되기도 하였다. 당국은 "복음을 설교하는 목사들과 본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에 따라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사람들만이 스코틀랜드 안에서 유일하고 참되며 거룩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선포할 정도로 본 신앙고백서가 차지하게 된 비중은 매우 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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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1572년에 가서는 모든 목사들이 이 고백서에 서명하도록 하였으며, 이 때부터 1647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채택되기 전까지 스코틀랜드의 개혁교회의 중요한 교리적 표준 역할을 해왔던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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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의 채택은 미사제도와 교황의 사법권 행사를 강력하게 배격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그리고 개혁교회를 배척하고 로마 카톨릭을 지지하면서 만들어진 모든 기존 법령들을 파기하는 운동을 야기시키기도 했다. 이처럼 본 신앙고백서의 채택으로 인해서 스코틀랜드 개혁교회는 성경의 정신에 입각한 순수한 신앙과 교회를 회복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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